4.
“해인이가 돌아오니 정신이 없어.”
“공주께서 오랫동안 중경을 비우셨던 모양입니다.”
“거의 3년은 넘은 것 같은데, 못 본 사이에 훌쩍 커서 놀랐단 말이야. 도대체가 애들은 너무 빨리 자라서 적응할 시간을 안 주는 것 같아.”
산이 피로한 듯 강에게 면복을 넘겨주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해인은 생기가 넘치는 젊은 소저이니,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거운 한편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강은 용포를 개어 침전 동편에 두고 탁상 앞에 의자를 빼어 앉았다. 사실 산의 말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아, 의미만을 건져 듣고는 대충 대꾸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할 산이 아니었다. 삐뚜름하게 누운 채로 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
하지만 강은 궁내청에서 들은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고로 도무지 알아차리지를 못하였다. 빈 시선을 허공에 두고 가만히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니, 산이 이내 그 눈앞에 손가락을 딱 하고 울렸다.
“……아, 송구합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기에 정신이 그리 빠져 있어?”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내 낭관이 생각이 많은 모양이야. 궁내청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까 해인이와 했던 이야기를 신경 쓰는 것이냐?”
강은 잠시 망설이다, 희비의 상궁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주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은 대답을 듣고도 시원해진 기색 없이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굳이 캘 생각은 없었는지 장죽을 까딱이며 설핏 웃었다.
“왜, 내가 그대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오라,”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야. 그대라고 해서 특별히 알려 준 것은 아니니 부담스러워하지 마라.”
“황공하옵니다.”
“형님의 일은 별것 아니야. 나는 그대 생각처럼 인명을 앗는 데에 재미가 들린 살인귀가 아니니, 내가 형님을 죽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분명히 그 일에 대하여 사죄를 하였는데도, 산은 그 말을 할 때마다 난감한 기색을 보이는 강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강은 더 반응을 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산을 바라보았다.
“재미없게.”
“형님을 죽이신 데에 어떤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그것을 어찌 공으로 알려 줄까.”
“알려 주지도 않으실 거면서 어찌 말씀하시어 궁금하게 하십니까.”
강이 투정을 부리니 산이 다시 한번 웃었다.
“난 그대가 투정을 부릴 때가 제일 귀여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낭관이 낯빛을 붉히며 작게 대답하자, 황상이 가까이 오라는 듯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저리 얄미우니 아니 가겠다 한들 그마저도 귀엽다 하실 위인이다. 거부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강은 하릴없이 가리킨 곳으로 가 앉았다. 그러자 산이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게 입 맞추면 알려 주마.”
“…….”
그냥 모르고 말겠다고 대꾸할까 싶었으나, 그러면 황상이 낯 뜨거운 말로 당황케 할 것이 뻔하여 그러지도 못하였다. 강은 한참을 그 짓궂은 용안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맞대었다. 산이 이를 놓치지 않고 그의 목 뒤를 붙잡으며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흣.”
강은 순식간에 그에게 붙잡혀 입을 벌렸다. 감히 밀치지는 못하였으나, 설혹 밀친다 해도 얼마나 힘이 센지 미동도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끈질기게 혀뿌리를 빨고 핥았고, 강은 산의 품 안에서 할딱이며 힘겹게 받아 내었다. 반쯤 넋을 놓은 강은, 결국 황상의 끈질긴 입맞춤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하아.”
그의 품에서 풀려나고 나니, 이제야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얄미워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차오른 숨이 가라앉지 않았다.
“방금 내가 얄밉다 생각했지?”
“후우……. 그런 일 없사옵니다.”
“없기는.”
오늘 두 남매가 어찌 이리 속을 읽어 대는가. 가까스로 시선을 외면하자, 산이 낄낄 웃으며 강의 어깨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강은 그 품에 말없이 안기면서도 산이 형을 어찌 죽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자신이 과연 알아야 하는가 싶어 소리 없이 한숨지었다.
자신이 보지는 못하였으되 그저 풍문으로 들었던, 예컨대 오늘 궁내청에서 들었던 산이 상궁을 죽인 일과 같이 잔인한 일면들을 그 입으로 직접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산에게 그런 면모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애써 부정하고 있음을 강은 알고 있었다. 산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모습들만이 그의 진면목이라 여기고 싶은 것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였지. 내가 그쯤 왼쪽 귀를 뚫었으니 열여덟 정도 되었을 때였던 것 같군.”
강은 그 말에 일순 놀라 무례한 줄도 모르고 그의 귓바퀴를 쥐어 귓불을 확인하였다. 산은 갑작스레 강이 제 귀에 손을 댄 것을 알았으나 딱히 저지하지 않고 외려 보라는 듯 어깨를 내려 대어 주었다. 진실로 왼쪽 귀가 뚫려 있었다. 강은 고개를 뒤로 빼어 산을 보았다.
“어찌 귀를 뚫었느냐 묻고 싶으냐?”
“……귀를, 왼쪽 귀를 뚫는다는 것은 신불에 귀의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잘 아는군.”
그는 제가 그 뜻을 잘못 알았는가 생각하여 다시 물은 것이었으나, 산은 의외로 쉽사리 인정했다. 웬만한 백성들은 아무리 신불을 믿는다 하여도 귀를 뚫지 아니하였다. 특별히 신실하거나, 신궁에 몸을 의탁하는 이들이 주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은 이 낭관, 내가 아주 옛날에는 하늘을 등지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신적이 되는 것을 자처했다 여겼느냐?”
“…….”
다른 내밀한 이야기는 듣기를 원치 않았으나, 이 이야기는 듣지 않고는 못 배길 듯하여 그는 사양하지 않았다. 산은 강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변치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때는 그랬단 말이야.”
“……예.”
“그리고 난 그쯤 영주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고.”
“어찌 다짐하셨습니까?”
산은 강의 반문에 일순 말하던 것을 멈추고 가만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강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제가 천인인 것도 눈치를 채 버릴지도 모른다는,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식의 불안함에 강은 그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것은 형님의 일과는 상관이 없는데.”
“……폐하. 신을 시험하려 하십니까?”
그리고 강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대꾸하며 다시 힘겹게 산과 눈을 마주쳤다.
“어찌 그리 생각하지?”
산이 되물으니, 강은 더는 안겨 있을 수가 없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분명 황상의 심기를 거스르는, 주제넘은 발언이었다. 강은 침상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저 춘추 어리실 적의 일이라 말씀하시면 되는 일을 굳이 귀를 뚫었을 때라 하신 것이 신의 귀에는 그리 들렸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어떤 것에 대해 그대를 시험한다 생각하느냐.”
강은 무릎에 얹어 놓은 손을 꽉 쥐었다. 지금은 황상을 처음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경솔하였다. 서늘한 방 안에서 강은 식은땀 한 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산은 자꾸 강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하고, 그 이야기는 강의 출신 성분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향이 있었다. 강은 어쩌면 산이 저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에 폐하의 과거에 대하여 무례한 발언을 하였고, 그로 인하여 폐하께서 신의 사상을 검증하시려 하시는지도 모른다고…… 감히, 감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명화궁에 속한 상궁이 어전에서 삿된 물건을 내보여 폐하의 진노를 샀다는 말을 오늘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폐하께서 저를 곁에 두시면서도 그 상궁처럼 다른 속내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생겼습니다. 신이 미거하여 그런 것이니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강은 그리 말하며 엎드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임기응변이 나쁘지 않았으나, 산이 심히 기민한지라 통할지는 영 의문이었다. 바닥을 짚은 손끝이 덜덜 떨리는 듯하였으므로, 강이 힘을 주어 오므렸다. 만일 여기서 내쳐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차라리 계속 곁에서 의심받는 것보다는 나았다. 강이 신불을 의지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도 아닌데, 어찌 산이 죽이려 들기까지 하겠는가. 그것만이 강이 믿을 만한 구석이었다.
“고개를 들라, 이 낭관.”
“…….”
“그대는 배짱이 남다르면서도, 이따금 이상하리만큼 주저하고는 하지. 내가 무서우냐?”
“…….”
“내가 그대를 이렇게 아끼는데도, 어찌 내가 그대를 망령되게 시험하려 든다 생각하느냐.”
“망극하옵니다. 죽여 주십시오.”
“죽이지 말아 달라 말한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지?”
강은 그 말에 일순 할 말을 잃고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대답은 하지 않고 질문으로 말을 되받는 그의 화법은 늘 강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그 의중을 짐작기 어렵게 하였다.
“명화궁에서 그 상궁을 죽인 일이 그대의 그 끝을 모르던 배짱을 멎게 한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 늙은 것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신불을 섬겼을 뿐 아니라 그대의 뺨까지 쳤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년이었지. 그런 천한 것 하나 죽었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폐하…….”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올라와. 나는 그대가 내 앞에서 그리 저어하고 삼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존안을 뵙기가 송구스럽습니다.”
“어서 이리 온. 내가 그대를 심히 아끼는 것을 몰라 저어하느냐. 그대는 영오하여 내가 얼마나 그대를 원하는지 모르지 않을 것인데 말이야.”
황상이 낭관을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 강은 그것을 보고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에라도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마음을 편하게 하고 싶었으나 제 어깨에 달린 이들을 지켜야 했고, 무엇보다 지금의 이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다. 산이 남들에게 그러하듯 저에게까지 잔혹하게 구는 것을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갈 데까지는 가야 했다. 강은 그 손을 맞잡았다.
“이 낭관, 어찌 나를 이렇게 홀렸느냐. 나는 그대를 한시도 멀리 두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산은 그리 중얼거리며 제 손을 쥔 흰 손목을 잡아당겼다. 강이 침상에 비스듬히 앉아 그에게 손을 내맡기니, 이내 산이 손목 안쪽에 진득하게 입을 맞추며 시선을 올려 강을 바라보았다.
“폐하, 어찌 그리 보십니까.”
마주친 산의 눈에 충동적인 욕심이 비쳤다. 그것은 마치 이성을 검게 살라먹고 방탕한 욕구만이 남은 매서운 칼과 같아서 강은 내어 준 손목을 가늘게 떨었다. 어찌 되려 이러는가. 이 몸 하나 바치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점점 크게 얽혀가는 이 관계가 그저 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허나 그럼에도 거부하고 싶지 않은 양가감정이 가슴속에서 치밀었다.
“신의 몸이 더러우니 끝까지는 모시지 못하옵니다.”
강은 심히 거대한 각오를 다시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산을 따라오지 않았을 텐데, 강의 예상 안에서만 일어났던 홍진의 모든 일이 이곳 중경에서는 완전히 어긋나고 있었다.
강은 체념한 것처럼 스스로 허리끈을 잡아당겼다.
“아……!”
관복이 팔꿈치까지 떨어졌을 무렵, 산은 그만 참지 못하고 강을 제 품 안으로 깊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숨을 한 번 삼키는 사이에 강의 위에 올라타 코끝을 맞대고 느릿하게 눈을 마주쳐 왔다. 강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두 팔로 산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노도처럼 밀려들어 오는 혀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산의 성정이 그러하듯, 느릿하고 여유롭게 움직이면서도 숨을 차마 쉬지 못하게 옥죄는 입맞춤이었다. 강은 눈썹을 일그러트렸으나, 쏟아지는 애무를 쳐 내지는 못하고 그저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으응.”
벗겨지지 않은 가슴팍 위로 손길이 느껴졌다. 입이 막힌 고로 제대로 된 소리는 내지 못하고 그저 비강 내에 그 신음이 가득 찰 뿐이었다. 산의 손가락이 여린 유두 끝을 쉬지 않고 유린하였고, 강은 그 감각이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연방 신음을 터트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이 낭관.”
“하아……읏, 폐하, 아……!”
“그대의 흰 낯에 홍조가 어렸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산이 강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 턱선을 따라 천천히 입을 맞추었고, 이내는 턱 끝에 입술을 문지르다 다시 맞부딪쳐 왔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사로잡혀 단단해진 유두가 옷 아래로 드러났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유두가 그의 손에 비틀렸다. 강이 눈을 질끈 감으며 헛숨을 삼켰다.
“이 몸은 도통 익숙해지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
“신이 방중을 몰라, 읏……! 모시는 법을, 잘…….”
“몰라도 된다. 그대는 모르는 것이 더 귀엽다.”
그래서 소문성이 방중을 익히게 하겠느냐는 말에도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던가. 진실로 그랬다. 산이 강을 기꺼워하는 면은 이런 데에 있었다. 하는 소리들은 하나같이 인생 다 산 노인네 같지만, 이런 데에 있어서는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면이 산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산은 마지막 남은 내의마저 모두 헤쳐 내고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맨살에 다른 이의 체온이 느껴지니 강이 더욱 동요하며 침윤한 눈으로 산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 후, 산은 다시 전처럼 짧게 입을 맞추어 주고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축축한 혀끝이 작게 솟아오른 유두 끝에 닿았다.
“앗……!”
“그대의 유취乳嘴는 음험하기 짝이 없어서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이렇게 만지고 핥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형태를 드러내는군. 마치 그대처럼 말이야.”
“읏, 아…… 폐하, 아!”
입술로 유취를 조이고 혀끝으로 비벼 대는 통에 강은 그만 정신이 혼미하여 제 입에서 신음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니 절로 가슴팍이 들떴다. 산은 입에 담지 않은 다른 편 유두를 손가락으로 쥐며 더욱 문질렀다. 양 유두가 쉴 새 없이 자극당하였고, 강은 자신이 유두에 이리도 취약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강은 보료를 세게 그러쥐고 있던 손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오늘 산은 저번처럼 눈물을 보였다고 해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강은 손을 더듬으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한 번도 다른 이가 여길 만진 적이 없느냐.”
“예, 아무도…… 읏!”
“그럼 여기도 없겠네.”
그리고 조금도 예상치 못한 찰나에 산의 손이 거침없이 성기를 쥐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아연하여 강은 제 전음前陰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그리 힘이 들어갔는가 싶을 정도로 부풀어 꼿꼿이 일어나 있었다. 강은 그만 수치심으로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으나, 그저 한쪽 다리를 미세하게 세우며 고개를 틀었다. 그가 조금 만졌다고 벌써부터 성기를 세워 버린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이 낭관.”
“예…….”
“날 봐라.”
“……싫습니다.”
그리 말해 보았자 산의 눈에는 그저 앙살을 떠는 것으로 보이리라는 것은 평소의 강이라면 알고도 남았겠으나, 지금에서는 그런 것을 판단할 이성일랑은 모두 흔적을 감춘 다음이었다. 산은 그런 강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집착하듯 빨던 유두를 놓아주고, 몸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엄지로 귀두에 원을 그리며 문지르기 시작하였다.
“으응, 읏. 폐하, 그렇게……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건……. 흐읏, 윽!”
“어찌 이렇게 하지 말라 하지?”
“몸 둘 바를, 읏,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제발……!”
“좋아서 그러는 거야.”
“……흑, 으읏!”
“좋고 싫은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진실로 처음이 맞구나.”
그리고 천천히 성기를 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하였다. 이미 발기가 된 지 오래였다. 산이 성기를 흔들면 흔들수록, 찌릿거리는 감각이 점점 더 강하게 사지를 들쑤셨다. 이 이상 흐트러지지 않을 거라 여겼던 호흡은 전에 없이 흐트러졌다.
계속해서 학, 학, 숨을 내뱉으며 강은 발가락을 오므렸다. 이러한 음양 간의 합일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하는 줄도 알았고, 이렇게 산이 계속 성기를 쥐고 흔들면 그 속에서 무엇이 나올 줄도 알았다. 그래서 더욱 부끄럽고 참담하였다. 뿌리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대로 계속 있고 싶기도 하였다. 머리로 백 번 알아도 직접 이리 상황에 처하니 몸이 달아 강은 연방 헛숨만 삼켰다.
“그만, 그만……. 흣! 응, 폐하…….”
“그만이 아니지 않아. 그만이라고 말하는 자가 이렇게 물색없이 질질 흘려서야.”
어느새 산이 손을 흔들 때마다 찌걱찌걱 물기 어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목덜미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오만 군데가 두근거렸다. 강은 달달 떨리는 한쪽 무릎을 세우며 팔로 눈을 가렸다. 차라리 시야에 아무것도 차지 않으면 그래도 부끄럼이 덜 할 것 같았다.
산은 흔드는 손에 속도를 더하기 시작하였고, 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황상의 손에 제 것을 다 흘려 놓으면 아니 될 것 같았고, 아니…… 지금 저를 이리 괴롭게 하는 자가 황상이 아니더라도 차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육신은 강의 편이 아니었고, 심지어 그에게는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아흐, 읏. 윽!”
그리고 이내 참지를 못하고 어수에 모조리 토정하고 말았다. 어찌나 숨이 차던지 가슴이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며 진정할 줄을 몰랐다. 시야를 가린 팔이 답답하여 내리고 싶어도 그리하면 산의 짓궂은 얼굴을 마주하여야 할 것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혼절하였으면, 그리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이 낭관, 팔을 들어라.”
“…….”
“그대가 내 손에 잔뜩 사정하지 않았느냐. 이 불경을 어찌할까…….”
강은 불경이라는 말 한마디에 동요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천천히 팔을 떼어 내고 제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산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그러게 누가, 누가 그리하시라고 했답니까…….”
괜히 제가 민망하니 도리어 역정을 낸다. 산이 볼멘소리를 내는 강을 두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잘못하였지. 그러니 그만 내 손을 좀 닦아 줘.”
“잠시만 계시면,”
“잠시만 계실 필요가 없는데. 그대는 입이 없느냐?”
“예?”
“어찌 황상의 침상 위에서 다른 것으로 손을 닦을 생각을 하지?”
강은 그 말에 산의 의중을 알아채고 크게 얼굴을 붉혔다. 산은 이에 그가 제 말을 알아들은 줄 알고 벽에 등을 느릿하게 기대며 강에게 손짓하였다.
“어서 오렴.”
“……폐하께서 특히 수치스럽게 만드시는 겁니까, 아니면 원래 이런 것입니까?”
“글쎄, 모르긴 하여도 내 시침을 드는 자들은 모두 부끄러운 기색 없이 알아서 하던걸. 그대는 일일이 알려 주어야 하니, 그게 번거롭다는 것만은 알겠다.”
강은 이내 체념한 얼굴을 하고 무릎걸음을 걸어 산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눈을 마주쳤다. 산이 무엇 하느냐는 듯 손을 내미는 고로, 강이 오랫동안 마음을 추스르는가 싶더니 입 밖으로 혀를 조금 내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을 핥기 시작하였다.
“읏……!”
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손가락을 그 입안에 밀어 넣었다. 생각지도 못한지라, 강은 일순 당황하였으나 깨물 수가 없어 그저 입을 벌리고 제 혀를 얽어 오는 손가락을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겨우 가라앉았나 싶었던 숨이 점점 차올랐다. 마치 입을 맞출 때 같았다.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했고, 입안이 뜨거웠고, 자신의 혀는 그에게 이끌려 혹사당하고 있다. 혀가 있을 곳에 그저 손가락이 있다는 것만이 달랐다. 산은 점점 날숨이 짙어지는 강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 낭관.”
“……예.”
“맛이 어떻더냐.”
“무어라 말씀 올려야 원하시는 대답이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봐.”
“……맛없습니다.”
“허어, 어쩌지. 그대는 내 것도 먹어야 하는데 말이야.”
강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새삼 놀랄 것은 없었다. 황상의 시침을 드는데 어찌 혼자만 사정하는 무례를 저지르겠는가. 하지만 먹는다는 것이, 그러니까…….
“그, 어디로…… 먹습니까?”
“뭐?”
“그러니까, 그……. 세인들은 은유적으로 이르기를, 입으로 하여도 또…… 비문으로 받아도 먹는다고 하니 폐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알 수 없어 망령되게 여쭈었습니다.”
“그대는 몸은 순진한데 머릿속은 음탕하기 짝이 없구나.”
“…….”
“나는 그대를 아끼는 만큼 어리석게 급히 굴 생각이 없으니, 윗입으로 먹어도 된다.”
그 말에, 강은 덤덤한 체를 하며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심기일전하였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산의 다리 사이에 조금 더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산이 제 무릎 위에 기대어 두었던 팔을 내려 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강은 그의 손길에 일순 안정을 찾았으나, 이는 곧바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가 한참 동안 머뭇대자, 산은 그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어찌 굴지도 궁금하였고, 그가 스스로 하기를 바랐기 때문도 있었다.
이와 반대로 강은 오히려 자신의 머리를 그가 제 앞섶에 가져다 대기를 바랐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강제로 당한 것’이라고 세뇌라도 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러나 산을 흘끗 올려다보아도 그럴 기색이 없으니 강은 눈을 질끈 감으며 야장의를 헤치고 손으로 남근을 쥐었다.
“…….”
그리고 혀를 내어 그 끝을 조금 핥아 보았다. 어찌해야 하는 걸까. 받아 보기를 했던가, 누군가 하는 것을 보기를 했던가. 어찌해야 하는 줄을 모르니 눈앞이 컴컴하다. 하지만 산은 조금도 손을 대지 않으려는지 그저 강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쥐고 손가락 사이에 걸어 보기만 할 뿐 조금도 알려 주지 않았다.
“……윽,”
강은 이젠 저도 모르겠다 싶어 그저 입을 벌리고 성기를 입안에 담았다. 산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침상 옆에 놓인 화로에서 장죽을 집어 들었다.
“하아.”
산의 낮은 숨소리와 섞인 남령초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강은 천천히 고개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혀로 계속 핥아야 했던 것일까.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나마 다행히, 황상의 남근이 점점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
산은 제 다리 사이에서 바지런히 움직이는 작은 뒤통수를 보며 연기를 내뱉었다. 이렇게 애무에 서투른 이도 처음이었으나, 그 점이 귀엽기도 하였거니와 전혀 동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때 묻지 않은 면모가 강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히려 잘하면 배신감이 들 것도 같았다. 산은 장죽을 쥐지 않은 한 손을 내려 엎드린 강의 엉덩이를 쥐었다.
“우응, 윽.”
“좀 더 깊이 빨아 봐.”
“윽, 응…….”
그리 말하면 또 시키는 대로 곧잘 한다. 그리 제 것을 내맡기고 그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으니, 어쩐지 비문을 벌리고 안에 성기를 밀어 넣고 싶어졌다. 산은 잠시 고개를 젖히고 가만 연기를 내뱉으며 머릿속에 그러한 상상을 해 보았다.
자신의 밑에 깔린 채 눈물을 흘리며 요망한 신음을 흘릴 것이다. 혹은, 발칙하게도 산의 위로 올라타 스스로 허리를 흔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를 엎드리게 해서 짐승처럼 마구 삽입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 어떤 상황이어도, 강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이런 쾌락은 처음이라는 듯, 이런 상황은 너무 낯설다는 듯, 그럼에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벌벌 떨리는 몸으로 가쁜 호흡을 뱉으며 예쁘게 울 것이다.
“이 낭관, 이 요망한 것. 감히 날 기다리게 만들다니.”
“…….”
강은 다른 한 손으로 산의 허벅지 안쪽을 쥐고 벅찬 숨을 겨우 들이쉬었다. 산은 그 모습에 일견 인상을 찌푸리고는, 강의 뒷머리채를 붙잡고 세게 짓누르기 시작하였다. 입술이 찢어질 것 같았다. 턱 막힌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입은 그의 성기를 다 품을 만큼 넓지 않았다. 강은 그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으나, 크게 저항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서툴기 때문에 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산은 그런 강의 모습에서 읽히는 순종적인 모습에 문득 이성을 잃을 뻔하였다. 이대로 그를 완력으로 엎어 놓고, 단숨에 그의 여리고 은밀한 곳을 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성을 놓을 뻔했던 순간에 낭관의 입안에 길게 사정했다.
“하아…….”
다시 그의 손, 아니,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나 팔도 좋을 것 같다. 그의 몸을 조일 수 있는 그 어떤 곳에라도 남근을 끼워 넣고 잔뜩 즐긴 뒤, 그를 엎드리게 하고 마음껏 쑤셔 박고 싶다. 아프다며 우는 그의 눈물을 핥아 먹으며 그만해 달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원하는 만큼 안고 싶다.
그리 생각하였으나, 산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장죽을 입에 물었다. 그래도 준비가 되지 않은 강을 억지로 품고 싶지는 않았다.
“……태감에게 일러 탕전에 물을 받으라 할까요.”
강이 겨우 입안에 든 것을 삼키고 고개를 조금 들며 물었다. 아직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그를 내려다보던 산이 한 손으로 그 턱 밑을 받쳐 들고 눈을 마주쳤다.
“아니, 됐다. 이번에는 맛이 어떻더냐?”
“제아무리 폐하의 것이라 한들 어찌 맛이 좋겠습니까.”
“다음엔 입안에 말고 얼굴에 사정해 주마. 그럼 맛볼 필요가 없을 테니.”
“……황은이 망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강이 다시 한번 빈정거리니 산이 웃는 소리를 냈다. 바라는 대로 완전히 안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진일보는 하였다. 산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
“기침하셨습니까.”
근래 아침을 여는 것은 기침을 묻는 낭관의 목소리였다. 산이 뒤척이며 눈꺼풀을 움직이기 시작하니 강이 이마를 짚어 주었다. 산은 그 손을 붙잡으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는 언제 일어났는지 흐트러진 의관을 모두 정제하고 소세를 마친 깨끗한 얼굴로 산의 옆에 앉아 있었다.
“오냐.”
“더 주무셔도 됩니다.”
“됐다. 소세할 물을 들이라고 해.”
“예.”
강이 그 말을 듣고 침상에서 내려갔다. 침전 문을 아주 조금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태감에게 알린 뒤, 다시 문을 닫고 돌아왔다. 산은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여 힘겹게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이 늘 일이었다.
그 옛날 창천성에도 한번 잠에 취하면 도통 일어날 줄을 모르니 채윤직이 늘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산의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얼굴에 찬물을 툭툭 뿌려 겨우 정신을 차리게 하곤 했다. 산은 문득 그때 일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어찌 웃으십니까?”
“그냥 노인이 떠올라서.”
“아버지가요?”
“응. 노인이 내 얼굴에 찬물을 뿌려서 깨워 줬거든.”
“그 정도로 못 일어나셨습니까? 지금은 잘만 기침하시는데요.”
“그대가 깨워 줘서 그래.”
산이 툭 말을 뱉자, 강이 그를 흘끗 노려보았다. 또 저를 놀리려 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산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진실로 강이 곁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기침하시라 말하면 정신이 깨나는 기분이 들고는 했던 것이다.
침전에 강을 들인지 이제 벌써 며칠이 지났고, 경사방 기록에도 남겨 두었다. 내명부에 속한 이들이야 첫날부터 알았으나, 금궐 내에서는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궁내청에서도 별말이 없다고 하였으니 복야가 산의 뜻대로 경솔히 입을 놀리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그 복야가 생각보다 믿을 만한 이인 듯했다. 산은 내심 그자가 앞으로 두고 쓸 일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옆에 강을 두고 앉아 있으니 문득 북양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금궐에서 멀리 떨어진 창천성에서 시간을 더 요긴히 쓸 것을 그랬다 싶은 것이다. 이미 떠나온 곳이니 방법은 없으나 어쩐지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프다고 해 볼까.”
“옥체 미령하십니까?”
“그럴 리가.”
“한데 왜요?”
“다시 행행을 가고 싶으니까 그렇지. 오늘도 정전에 나가면 늙은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댈 것인데, 생각만 하여도 칠정울결 도지는 것만 같도다…….”
산은 그리 말하며 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기에, 강이 다리를 평평히 하고 산의 머리가 좀 더 편히 닿게 하였다. 산이 그것을 느꼈는지 강의 뺨을 쥐며 마주 보았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간밤에 시침을 들고 나서 강은 반쯤 빈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마냥 생경하기만 한 일을 하지 않았던가. 바로 눈이 끔벅끔벅 감기기 시작했다. 산은 곁으로 와 팔베개를 해 주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 품에서 강은 그만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말았다. 한 번도 누군가와 잔 일이 없어 불편할 줄 알았더니 정반대였다. 그 품 안에서 안정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하였고, 황상의 체온이 몸을 데우니 노곤해지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래서 후궁들이 그리 황상을 찾아 대는 것인가. 홀로 자는 것보다 사내의 품에 있으면 안정감을 느끼기에 그런 것인가. 그 여인들은 한 번 궐에 들어오면 주검이 되지 않고서야 평생 궐을 떠날 수 없으니 산이 찾지 않으면 그리 외롭게 살아야만 한다. 강은 문득 무상감이 느껴졌다. 영화롭게 사는 대가라고 하지만, 이렇게나 정신적 고독이 사무치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낭관.”
“예, 폐하.”
“표정이 이상하구나.”
“신의 표정이 어찌 이상합니까.”
“무슨 생각을 하였기에 표정이 그래?”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이 아닌 게 아닌데.”
“저…….”
오지랖을 펄럭이기에는 제 처지가 그리 대단치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은 미간을 긁적이며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순순히 입을 열었다.
“금일은…… 후궁의 패를 뒤집으시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
산은 그 말에 해괴한 소리를 듣겠다는 듯 강을 올려다보았다.
“나와 있는 것이 싫어?”
“그런 것은 묻지 마십시오. 늘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한데 왜 다른 후궁들에게 가라는 소리를 하지?”
“그야…….”
그녀들에게 조금의 연민을 느낀 것도 있지만, 이렇게 매일같이 강이 산의 침전에 있으면 또 그로 인하여 나올 잡음들이 생각만 해도 성가시기도 하였다. 아니,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시기는 애저녁에 지났다. 자객이 금궐 안에서 칼을 휘두르며 강을 죽이려 들기까지 했으니, 이미 그 위기가 왔다고도 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황상이 다른 이들과 함께 고루 찾아 주어야 시선이 분산될 터인데, 이렇게 강만 곁에 두면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적이 느는 것이 싫어 그럽니다.”
“적?”
“보세요. 이미 자객 하나가 들어 신을 죽이려 들었고, 앞으로도 폐하께서 쭉 신만 찾으시면 적이 하나둘 늘어날 것입니다.”
“허튼소리. 그대는 무예 실력이 남다르니 그것으로 그런 자객 따위야 얼마든지 무찌를 수 있지 않아. 어찌 그런 약한 소리를 하느냐?”
“그야 농이었고……. 사실 그런 위협을 받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으나, 늘 말씀드린 말씀을 또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이 싫습니다.”
“이 낭관. 그대가 참으로 철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이미 내 시침을 들었는데 어찌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느냐?”
강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한 일은 없었으나, 이렇게 뻔뻔스럽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말로는 그리 아낀다, 총애한다 하지만 정작 위협을 미연에 방지해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당신이 강을 보고 싶으니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책임감이 없으시다고 비난해도 되겠습니까?”
산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강은 이미 빈정이 상한 고로 고개를 조금 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산은 낯빛을 바꾸지 않고 그저 덤덤히 대답했다.
“내가 지켜 주면 되지.”
“……예?”
“못 들었음 관둬라. 허어, 소문성 이놈은 어찌 이리 늦어.”
그는 말을 반복할 생각이 없는지 장죽을 휘둘러 화로를 댕댕 두드렸다. 문밖에 시립해 있던 소문성이 잰걸음으로 들어와 고개를 조아리자 산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쓸모없는 놈. 짐이 소셋물을 들이라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소식이 없는고.”
하며 괜히 나무랐다. 소문성이 잠시 당혹스러운 눈초리로 강을 흘깃 바라보다가,
“폐하께서 이 낭관과 담소를 나누시기에……. 시간도 조금 있고 하여 잠시 물렸사옵니다.”
하고 변명하였다. 산은 그 소리에 혀를 쯧 차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재게 갖고 와라.”
소문성은 또 어찌 낭관이 황상의 심기를 불편케 하였는가 싶어 입맛을 다시며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다시 침전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산이 괜히 심통을 부리는 것을 보고 있던 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태감에게 화풀이를 하십니까.”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방금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어허, 무엄하다.”
“알겠습니다. 허면 폐하께서 신을 지켜 주십시오.”
“됐다. 스스로 지킬 줄 아는데 내가 무엇 한다고 널 지키고 자빠졌느냐.”
아무래도 기껏 지켜 준다 하였더니 의외라는 듯 반응했던 것이 그 심기를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또 그리 어린아이처럼 속 좁게 굴지.’
강은 산의 성품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단정을 지으려 드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를 찾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였다. 가끔은 날 때부터 패왕의 기질을 타고난 듯 보이다가도, 이럴 때는 이마를 한 대 쥐어박아도 될 것 같은 소년 같으시니. 강은 산의 거친 입을 제 손으로 막으며 대꾸했다.
“그럼 지켜 주지 마십시오.”
“…….”
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 입을 막은 강의 손바닥을 툭툭 쳤다. 열어 주지 않으려다 슬쩍 떼어 내니, 그가 불퉁하게 말을 뱉어 냈다.
“지켜 준다니까 말이 많아.”
황상이 말을 마쳤을 무렵 침전 문이 열리며 열은 되는 궁인들이 차례로 들어와 침상 앞에 금동 대야를 내려놓았고, 침방 궁인들은 금일 입으실 면복을 밀고 들어와 서편에 두었다. 산은 여전히 불만이 많은 얼굴로 강을 흘끗 보다가, 궁인이 들어 올린 대야에 손을 넣었다.
“자네 오늘은 기분이 좀 좋아 보이는데.”
궁내청에 들어서자마자 강에게 복야가 건넨 말이었다. 강이 시침을 들게 되면서 이제 궁내청의 아침을 여는 것은 다시 복야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다른 관원들보다는 등청이 빨랐고, 황상의 기침을 돕는 것도 시침을 드는 자의 일이었기 때문에 복야는 딱히 불만은 없었다. 황상의 극심한 총애를 받으면서도 기고만장하는 법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재물에 큰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닌 듯 보이는 청렴한 모습이 그의 마음에 제법 차기도 하였다. 복야는 마지막 촛대에 불을 붙이며 인상이 다른 날보다 한결 부드러운 강을 흘긋 보았다.
강이 뺨을 긁적이며,
“그렇습니까?”
하고 물으니 복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아뇨……. 그냥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일?”
“예.”
먼저 부러 미주알고주알 떠들지 않으니 복야는 이내 캐묻기를 그만두었다. 황상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데 어찌 세상 즐거운 일이 없을 것인가. 귀한 몸이 모든 영화를 누리게 될 처지이니 궁내청에서 웃전들 비위 맞추며 고생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아무리 강의 성격이 좋기로서니 남의 비위 맞추며 눈치 보는 것이 좋을 리도 없고 말이다.
“저, 복야 어른.”
다른 관원들이 등청하기 전 주변을 정리하고 있던 강이 문득 떠올렸다는 듯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왜 그러나?”
“혹시 궁내청에 홍열이 있습니까?”
“홍열?”
홍열이라는 것은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를 말하는데, 그 나무가 가을이 되면 엄지 한 마디만 한 작은 열매를 맺는다. 아무 맛도 없고, 딱히 몸에 좋은 구석도 없어서 굳이 심지 않는지라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귀하지도 않았다. 별스러운 것을 찾는다 싶어 복야가 고개를 기울였다.
“있을 것이네. 궁내청엔 없는 게 없으니……. 하지만 찾는 이가 없어 들어와도 오래 방치되었을 터인데.”
“아, 있습니까? 어디 있습니까?”
“뒤 창고로 한번 가 보게. 거기 없으면 아마 따로 들여와야 할 거야. 한데 홍열은 왜?”
“아, 제가 홍열을 좋아합니다.”
“홍열을? 그 맛도 없는 것을 왜?”
“……그냥, 그 아무 맛도 나지 않아서 좋습니다. 과실이 터지는 맛도 있고, 재밌잖습니까.”
강은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뒤 창고로 향했다. 복야가 사람 참 이상하다는 듯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찌 이해를 하려 들까 싶어 관두었다.
“이런…….”
강은 거멓게 죽은 채로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홍열을 한 줌 쥐었다가 다시 옹이 안으로 쏟아 내었다.
“이런 걸 어찌 먹어.”
하지만 홍열은 반드시 필요했다. 천인인 몸이니, 정을 받으면 수태할지도 몰랐다. 홍열은 천인에 한해 이를 막아 주는 효험이 있었다. 그러니 홍열이 없으면 황상을 모실 수 없었다.
*
“홍열이요?”
해인은 강의 말에 잠시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복야가 그랬던 것과 같이 홍열을 찾는 이를 처음 봤다는 듯 강을 바라보았으나, 별스러운 시선도 아니었다. 강은 미간을 긁었다. 홍열이 그리 특이한 물건이었던가. 흔히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으나 찾는다고 하여 놀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홍열은 궐에선 찾는 사람이 없어서 밖에서 들여와야 할 거예요.”
“밖에서 들여와야 한다니……. 저 때문에 그것을 들여올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오라버니께 말씀드리면 그리 해 주실 것 같은데요?”
귀한 물건도 아니니 자신이 얼마나 홍열을 좋아하는지 피력하면 궐 안에 나무라도 심어 주실 분이다. 하지만 강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궐 안에 홍열이 소용될 곳이 저 하나에만 있다면 대량으로 들여올 것도 없고 그저 강이 나가서 필요한 만큼 사 오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예?”
“한 번도 궐 밖을 나간 적이 없습니다.”
“어머…….”
강의 말에 해인이 입을 가렸다. 방랑벽이 제 오라버니를 닮은 해인에게 한 번도 궐 밖을 나간 적이 없다는 말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강은 환관도 아니었거니와 일개 관원이니, 나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다.
본래 관리들은 궐 밖에 살아야 하며, 사정이 여의치 않은 이들을 위하여서만 관사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보다는 나가야 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리 운신이 자유로운 입장임에도 이 답답한 구중심처에만 있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해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이 낭관은 참 재미없게 사는군요.”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강의 입장에서는 창천성 때보다 더욱 삶이 역동적이니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라보는 지점이 다른 두 사람은 그저 기이하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웃어 버리고 말았다.
“홍열이야 시장에 가면 흔한 물건이니, 한번 나갔다 오셔요.”
“아……. 나가도 되는 걸까요?”
“안 될 것이 무에 있답니까? 앗,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께서 잠행을 자주 나가시니, 잠행에 데려가 달라고 해 보세요.”
“잠행을요?”
행행을 다니러 가기 전에 산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밤마다 잠행을 나갔다. 못해도 사흘에 한 번은 사복으로 고쳐 입고 궐문을 나섰으니, 요 근래 북양에서 귀환한 이래로 나가지 않으시는 것이 더 이상한 지경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북양에 있는 동안 밀린 일이 많았고, 또 강을 새로 데려온 만큼 그와 밤을 보내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잠행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다시 그가 부재했던 자리가 메워지고 안정이 되었으니 다시 야행夜行을 납신다고 할 때가 되기는 하였다.
“어머니는 오라버니께서 잠행 나가시는 것을 싫어하시니, 비밀에 부치셔야 할 거예요. 그래야 어머니께 미움을 안 사지요.”
해인이 덧붙이자, 강은 문득 죽은 얼굴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일전에 뵈었던 태후의 안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해인이 나타나 그나마 안색이 밝아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밝은 안색이라면 평소에는 어떻다는 말인가. 창천성에서는 백수白壽가 넘은 노인을 대하더라도 거리낌이 없었는데 이곳에 온 이래로는 특히 산과 사이가 나쁜 모후라고 하니 어쩐지 불편하여 자주 보고 싶지가 않았다.
싫다고 하자니 싫어할 만한 처지가 못 되었고, 그저 거부감이 느껴지고 불편하다고 해야 할까. 강이 대답하지 않고 찻잔을 매만지고만 있자, 해인이 웃으며 물었다.
“어머니가 불편하세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어찌 태후 마마를…….”
정곡을 찔렸으나 시인할 수 없어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해인은 이미 강의 속내를 모두 알아차린 듯 호호 웃으며,
“아니에요. 그럴 수 있어요.”
하고 강을 위로했다.
“어머니께선 오라버니께서 첫째 오라버니를 제치고 영주가 된 것부터 시작해서, 신궁을 불태우고 천군을 멸절한 것을 못마땅해하셨죠. 아니 못마땅한 정도였던가요.”
“……아.”
다시 은밀한 사정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강은 어쩐지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산이 직접 알려 주지 않는 것을 그가 없는 곳에서 들어도 되는 것일까 의문이었다. 동시에, 오래전부터 스스로 모르고자 했던 그의 다른 면모에 대하여 듣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몰래 뒷말을 하는 기분이기도 하였다.
“그때 저는 다섯 살이었지만, 나중에 가로가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오라버니께서는 하늘의 뜻으로 그리하신 것이다, 결코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다. 라고요.”
이미 대륙 전체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산이 난세를 진압하고 태평성대를 열라는 하늘의 뜻을 받았으며, 그리하여 다른 땅을 정벌할 때마다 산이 열세에 몰리면 천군이 돕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산이 태도를 바꾸었으나, 그때는 이미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생을 안정시킬 줄 아는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에 뭇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신궁과 사찰의 가렴주구가 도를 넘어선 상태였기에 더욱 그는 민심을 얻게 되었다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어머니께서도 어느 정도 오라버니가 영주가 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치 아니하고 수긍을 하신 것도 있어요. 어머니는 꽤 신실하셨거든요.”
“예…….”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북양성에 가만히 계시던 오라버니에게 먼저 칼을 들이댄 것은 첫째 오라버니였어요.”
“…….”
“이 낭관이 아실지는 모르겠으나, 오라버니가 창천성에 계셨던 때에는 한 영지를 다스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셨으니까요. 한량이 따로 없었고, 망나니라는 소리도 듣고는 했대요. 오죽하면 백성들이 모두 오라버니를 알고 있었지만 영주이신 줄을 몰랐을 정도였을까요. 그냥 동네 한량인 줄 알았다고 해요.”
그리 말하며 해인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강은 문득 산과 처음 창천성에서 마주쳤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장을 다녔더라면 오히려 귀한 집 자제라 생각하는 것이 더 웃기지 않은가. 그때 산이 강에게 관직이든 재화든 여인이든 모두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말에 코웃음을 터트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괜히 머쓱해지는 기분에 강은 해인을 따라 웃었다.
“오라버니가 계신 북양성으로 첫째 오라버니가 군사를 이끌고 먼저 선제공격을 가했죠. 아시다시피 오라버니의 평판이 그러했으니, 모두 꼼짝없이 당하겠거니 했답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일찍이 청천성 영주는 첫째 아들에게 청천성 남쪽에 있는 남현성을, 북쪽에 있는 북양성을 둘째 아들에게 넘겨주고 다스리게 하였다. 장남은 과연 적자답게 글월을 가까이하고 무예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없을 인재라는 평을 들었으나, 차남은 완전히 달랐다.
이강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어 태어났다던 차남은 가로 채윤직의 노력이 무색하게 한량이 따로 없었으니. 글월을 멀리하고 무예 훈련은 번번이 빠지기 일쑤였다. 허름한 옷으로 환복하고 매일같이 성 밖으로 도망 나와 성민들과 어울리며, 번번이 고주망태가 되어 코가 벌게진 채로 돌아오고는 했으므로 누구 하나 산을 영주의 싹으로 보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영주가 조금씩 기력이 쇠하여 죽을 날을 받아 놓게 되자 장남이 용단을 내리고 차남을 치기로 하였다. 차남이 그리 위협적인 후계는 아니었으되, 나중 있을 후환을 잘라 내고 안전히 뒤를 잇기 위함이던가. 갑작스러운 시국에 남현성에서 군사를 이끌고 북양성을 정벌코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청천성 사람들은 모두 기함을 하고 마는데, 산이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미리 군사의 반을 남현성 주변에 주둔을 시켜 놓았다가 빈집을 털 듯 남현성을 취하면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하지만 산은 장남을 죽이지 않았고, 남현성의 성주로 계속 머물도록 하였으니 이는 제가 그저 멍청하기 짝이 없는 한량 따위가 아니라 와룡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 사람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영주가 죽으며 산에게 청천성을 물려주겠노라 유언을 남기어 그가 뒤를 잇게 되었다. 하지만 장남이 이에 승복하지 못하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모반을 꾀하였는데, 이 역시 맥없이 진압되었고 가신들이 장남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읍소하였다. 산이 그리하여 깊이 고심하여 자진케 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신궁으로 들어가 여승이 되었던 태후가 스스로 내려와 청천성으로 차남을 만나러 나왔다.
태후가 어미 된 몸으로 제 자식 앞에 꿇어앉아, 장남을 살려 달라 빌었으나 모반을 꾀한 이를 가벼이 처벌하는 것은 아니 될 일이기에 산은 결국 자진을 명하였다. 그때 끝까지 죽지 않겠다 버티는 장남의 목을 직접 벤 것이 가로 채윤직의 장남 채영이었다.
이런 전차로 태후는 가장 사랑했던 아들인 장남을 잃었으며, 또한 산의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거리를 두기 시작하여 신궁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니 두 모자 사이의 감정의 골은 족히 15년을 넘도록 묵었다고 하겠다.
이후 다시 한번 태후가 산에게 등을 지게 된 계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 산이 신궁을 모두 불태우고 태후를 겁박하여 금궐로 모신 일이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오네요.”
해인은 이내 말을 마치고 부끄러운 듯 웃었다. 강은 그 전말을 들으니 어쩐지 스스로 형을 죽였다던 산의 안면이 떠올라 기분이 미묘해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어찌 형을 죽인 일이라고 하겠는가.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제 위치를 불안케 하는 불온분자를 처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게다가 영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더욱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제 권위의 지엄함을 보였어야 할 때였기도 했다.
“아무튼! 오라버니께 잠행에 나가시거든 데려가 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홍열도 살 수 있을 것이고, 금궐에서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즐거운 시간도 보내실 수 있지 않겠어요?”
“즐거운 시간이라니요?”
“음, 금궐에 있어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시지 않는 오라버니이시니 상관이 없을까요?”
해인은 말을 덧붙이며 쿡쿡 웃었다. 강은 해인이 저를 놀리려 드는 것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제가 그리 만만해졌던가 싶은 것이다.
‘잠행에 데려가 달라고 하랬지……. 잠행.’
퇴청하기가 무섭게 희건궁으로 불려가 편액을 쓰는 일에 여념이 없었던 강은 아까 전 해인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머릿속에 계속하여 되뇌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없으면 없는 대로 그저 지내고 싶었으나, 홍열만큼은 아무리 욕심 없는 강일지라도 탐내지 않을 수 없다. 방법이 그것 하나라면 응당 데려가 달라고 청해야 했다. 산이 거절한다면 어차피 궐 출입을 못 하는 궁인의 몸도 아니니 출입증을 따로 발부받아 나가야 하지만, 그보다는 산과 함께 잠행을 나서는 것이 더 나으리라 싶은 것이다.
“이 낭관. 거기는 삼수변이다.”
“예?”
“이수변으로 쓰지 않았느냐. 거기 법法 자 말이야.”
한참 다른 생각을 하였더니, 산이 문득 끼어들며 훈수를 두었다. 강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실로 삼수변을 잘못 쓴지라. 그는 종이를 아무렇게나 구겨 옆으로 버리며 다시 붓을 들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무슨 일이 있었는고.”
“없었습니다.”
“없는데 어찌 그걸 틀려?”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쭐 것이 있습니다.”
산이 그 말에 두루마리를 접어 한쪽에 몰아넣으며 눈을 마주쳤다.
“뭔데?”
“그, 잠행은 언제쯤 나가십니까?”
“잠행?”
잠행에 나가기 전까지는 황상을 모실 수가 없으니,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품으시는 것을 막아야 했다. 어제처럼 그저 애무하는 정도까지는 괜찮겠으나 어디 산이 두 번까지는 참아도 세 번을 참을 위인이던가. 만일 근시일 내로 잠행에 나가지 못하면 칭병해야 한다. 그것도 그것대로 난감하였다.
“잠행은 왜?”
“그냥……. 늘 가시던 것이라 들어서, 근래 아니 가시니 조금 궁금해서 그럽니다.”
“왜, 데려가 주랴?”
산이 웃으며 물으니 강이 정곡을 찔린지라 일순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산이 이에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비치는가 싶더니,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아니, 시간이 안 난다기보다는 그대를 곁에 품고 있는 시간을 빼고 잠행을 나가자니 그게 아까워서 나갈 생각이 안 든다.”
하고 대꾸하질 않겠는가. 품으시려거든 나가셔야 합니다! 하고 말하려던 강이 가까스로 참아 내고,
“그래도 민생이 중요한 것인데, 폐하께서 민생을 아니 살피시면 어찌 그것을 백성을 생각하는 위정자라 하겠는지요.”
하며 위선을 떨었다. 산이 그 말에 하! 하고 크게 웃으며 강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너, 그리 나가고 싶어서 요망을 떠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아니, 뭐. 그게 아니오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폐하께서 아니 나가시면 저 혼자라도 나갈 겁니다.”
“왜?”
“예?”
“갑자기 왜 그리 나가고 싶어 하느냐고 물었다.”
강은 그 말에 잠시 망설이다가 순순히 진실을 토해 냈다.
“갖고 싶은 게 있어서 그걸 좀 사려고 그럽니다.”
“그대 앞에 있는 내가 지존인데 어찌 갖고 싶은 것을 바깥에서 구해? 그게 뭔데. 말해 봐라.”
“폐하 앞에 있는 제가 궁내청 낭관인데 어찌 궐내에 있고 없고를 모르겠습니까. 금궐에 없어 그럽니다.”
“금궐에 없는 것이라니. 그것이 그리 진귀하냐?”
“진귀하지는 않고……. 남들이 찾지 않는 것이라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음…….”
산이 그 말에 장죽을 건져 물고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화로를 댕댕 두드려 소문성을 호출하였다. 바깥에 서 있던 소문성이 잰걸음으로 들어와 명을 받들 준비를 하였더니, 산이 대뜸 물었다.
“짐이 잠행을 가려는데 언제 시간이 나겠느냐?”
“아이고, 폐하. 태후께서 아시면…….”
“입 닥치고 재게 시간이나 보아 둬라. 잠행을 가면 피곤하니 정전 회의가 없는 날로 잡아야겠는데, 그게 언제냐?”
“……사흘 후인 줄로 아옵니다.”
“그럼 그때 잠행을 나갈 채비를 해라. 부산스럽게 여러 사람 준비하지 말고, 짐에게는 무예 실력이 남다르고 엄청나게 강한 이 낭관이 있으니 이자가 짐을 지켜 주지 않겠느냐.”
산이 그리 우스갯소리를 하며 강을 내려다보니, 강이 쿡쿡대며 웃었다. 역시,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것을 두고 평생을 놀릴 위인이다.
“이 낭관을 대동하고 잠행을 나가십니까?”
“그래.”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소문성이 그리 아뢰고 가만 서 있자, 산이 그 뒤로 제가 한 농담을 떠올렸는지 남은 웃음을 마저 짓다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안 나가.”
“예?”
“짐이 이 낭관과 둘이 있겠다는데, 왜 안 나가느냐 물었다. 눈치 없는 놈 같으니.”
“아, 예…… 예! 송구하옵니다.”
“빨리 문 닫고 꺼져라.”
산이 그리 걸게 툭 뱉으니 소문성이 심히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 바깥으로 나간 뒤 문을 닫았다. 산이 탁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장죽에서 입을 떼어 내고는 물었다.
“되었느냐?”
“예. 황은이 하해와도 같으십니다.”
“입에 발린 소리 하기는. 오늘은 몇 개나 썼느냐?”
“이게 아홉 개째입니다.”
“허면 하나만 더 쓰고 자러 가자.”
“예?”
함께 잠행을 나가기로 한 뒤 잘 마무리가 되는가 하였더니 왜 또 자러 가자 하시는가. 잠행을 나갈 때까지는 황상을 모실 수가 없으니 강은 심히 당황하였다.
“왜 그래, 또.”
“저, 신이 그……. 풍한이 들었습니다.”
“뭐, 풍한?”
“예, 아…… 몸이 으슬으슬하고 막 그런 것이…….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아무래도…….”
“풍한이 들었는데 어찌 기침을 안 해?”
산이 그리 물으니 강이 어쩐지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괜히 입가에 주먹을 말아 쥐고 콜록콜록 연방 기침을 토했다. 괜히 제 손등으로 이마도 짚어보고 하는 통에 얼굴도 함께 벌게졌다. 하지만 산은 그리 동요하는 기색 없이 가만 연기를 내뱉으며,
“요망한 것이 또 짐을 속이려 들지.”
하고 코웃음을 치는 것이 아닌가.
“신이 언제 속이려 들었습니까. 신을 그리 모르십니까. 신은 그리 불충한 자가 아닙니다.”
“웃기는 놈이야. 허면 태의를 들라 할까. 총자가 아픈 것을 내 어찌 보겠느냐. 가슴이 다 미어지는 듯하니 그리는 못 두겠다.”
“……어찌 폐하의 태의를 일개 낭관을 위하여 움직이게 하시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인 줄 아뢰옵니다.”
산이 그 말에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픈 것은 아무래도 거짓인 듯싶고, 아무래도 며칠 내내 곁에 두었더니 피곤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는데 계속 억지로 머물게 하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지라, 산이 턱 밑을 긁으며 대답했다.
“오냐. 오늘은 가서 쉬어라.”
“참말이십니까?”
“소문성!”
산은 대답 대신 소문성을 다시 찾았다.
“예, 폐하.”
“경사방에 일러 패를 들이게 해라. 작야 낭관이 짐에게 다른 궁을 찾으라 하였으니 그 말을 들어야겠다.”
소문성이 다소 의외인 듯 강을 흘깃 보았으나 황상의 명을 받은 고로 덧붙이는 말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이내 물러갔다.
강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신을 더러 투기를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어허, 투기라니.”
“송구하오나, 신이 어느 분과는 달리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지라 다른 궁에 납시라는 어제의 진언은 거짓이 아닌 줄 아룁니다. 투기는 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궁으로 납시어 널리 폐하의 성덕을 알리심이 옳은 줄로 사료되옵니다.”
강이 똑 부러지게 말을 마치고 마지막 글씨를 써 내린 뒤 붓을 벼루에 개었다. 산은 제 예상과 다르게 빗겨 나가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다 쓴 것을 차곡차곡 모아 두 손으로 들어 올리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지를 않는가.
“아무리 칠거지악 중 으뜸이 투기라고는 하나, 나는 그리 생각 안 해.”
“그러십니까?”
“투기가 어찌 악한 도리이겠느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인데.”
“신은 그리 생각 안 합니다. 감히! 지존이신 폐하께서 여러 사람 거느리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지요.”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폐하께서 신에게 어떤 반응을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서 어찌 아뢰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 쓴 글씨는 여기 둘 터이니, 보시고 문제가 있거든 알려 주십시오. 허면 신은 이만…….”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하려던 강은 산에게 팔뚝을 붙들리고 말았다. 사흘 동안은 밤에 얼씬도 말아야 하므로 마침 잘 되었다 했더니, 어찌 또 이리 붙잡으시는가. 강이 눈을 질끈 감기가 무섭게 산이 가까이 끌어당겼다.
“밤이 아쉬운 것이 나뿐이란 말이지.”
산이 괘씸하다는 듯 중얼거리니, 강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에 황상이 놓치지를 않고 입을 맞추지 않는가. 어찌 억지로 떼어 놓을 수는 없어서 강이 그저 입을 맞대고 있었더니 이내 산이 그를 놓아주며 한숨지었다.
“가라. 붙잡기 전에.”
“참이십니까?”
“그래. 맘 바뀐다. 얼른 꺼져.”
“……말씀 참. 허면 정말 갑니다.”
“오냐.”
“침수 평안히 드십시오.”
“그대도 풍한이 깊어지지 않게 이불 잘 덮고 자라.”
끝까지 빈정대는 것을 보면 퍽 아쉽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아니 되는 일이니, 강이 예를 갖춘 뒤 가까스로 발을 떼며 문을 나섰다. 밖으로 향하는 회랑에서 강은 패가 놓인 시탁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가려는 경사방 태감과 문득 눈을 마주쳤다.
직접 권한 것이니 황상이 오늘은 다른 궁으로 납실 터였다. 강은 경사방 태감에게 눈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와 섬돌에 놓인 신을 신었다. 어쩐지 기분이 요상하여, 강은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패를 뒤집으소서, 폐하.”
며칠 내내 낭관만 들이시는가 싶더니, 다시 패를 들이시라는 명을 받잡고 황상의 앞에 시탁을 들어 바친 태감은 도통 황상이 반응이 없는지라 눈을 흘깃 뜨고 용안을 훔쳐보았다.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삐딱하게 앉아 패들을 째려보고 있는 눈길과 문득 마주칠 뻔한 고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산은 장죽을 지그시 물고 연신 연기를 뱉으며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이내,
“됐다. 물려라.”
하고는 손을 허공에 휘이 젓는 것이 아닌가.
“패를 뒤집지 않으셨사옵니다, 폐하.”
경사방 태감이 처음 바쳤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시탁을 바라보다 그리 아뢰니 산이 꽤 거친 말투로 대꾸했다.
“짐도 눈이 있다.”
“마, 망극하옵니다.”
“그냥 내가라.”
“예, 예…… 폐하.”
참으로 우습게도, 황상은 금야 독수공방이었다.
*
“기침하실 시각이옵니다, 폐하.”
낭관이 시침을 들 때면 늘 일어나야 하는 때보다 일찍 기척을 내시더니, 금일은 홀로 침수에 드셔서는 여태 소식이 없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소문성이 조금만 더 지체되면 정전 회의에도 늦으실 것이라 생각하여, 조심스레 침전 문을 열고 들어가 침상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
“또 늦장을 부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기침하실 시각이 벌써 지났습니다.”
그래도 두어 번 정도 그리 아뢰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이거나 소문성의 입을 틀어막기 위하여 손을 아무렇게나 뻗어 던져 대고는 하셨는데, 오늘은 왜인지 아무런 거동이 없으시다. 소문성이 조금 당황하여 곁에 선 상궁을 바라보다가,
“폐하, 하하. 또 소인을 골탕 먹이시려고…….”
하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오늘은 낌새가 조금 달랐다. 소문성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상궁을 돌아보았다. 상궁 역시 얼굴이 희게 질려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내 문 앞으로 달려 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태의를 불러라!”
황상이 기침하지 못하시고 의식을 잃으신 듯 좀처럼 기척이 없다는 소식은 가장 먼저 경헌궁으로 들어갔으며, 그 뒤를 연달아 각 후궁들의 귀에 닿았다. 태의 다섯이 침전으로 들어 시시각각으로 황상의 용태를 살폈으나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간헐적으로 몸을 움직이기는 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에 의한 반응은 아니었던지라, 정오가 될 때까지도 황상은 눈을 뜨지 못하였다.
“태의, 황상께서 북양에 행행을 다녀오시고 나서는 옥체 미령한 것이 나으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는 소리를 내는 후궁들을 매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혀를 차던 태후가 이내 입을 열었다. 태의가 엎드려 이마를 찧으며,
“그러하옵니다, 태후 마마.”
하고 아뢰었더니 곁에 앉아 있던 희비가 몸을 겨우 가누며 말했다.
“한데 어찌 폐하께서 칠정울결 때문에 또 이리 자리를 보전하시느냔 말이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께서 지니고 계신 칠정울결은 행행 한 번 다녀오신다고 하여 사라질 것이 아니옵니다. 다만, 다녀오시기 전에 특히 미령하셨던 것이 다녀오신 이후 조금 나아진,”
“시끄럽다. 태의라는 자가 어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희비가 그 말에 인상을 팍 찌푸리며 태의를 바라보았다. 태의가 그 시선이 두려워 그저 몸을 벌벌 떨고만 있으니, 태후가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하였다.
“그만해라, 희비. 곧 황상께서 깨어나실 것이라 하지 않느냐.”
태의를 족친다고 못 깨어나시는 분이 깨시는 것도 아닌데. 태후가 그리 말을 덧붙이고는 침상에 가만 누운 산을 바라보았다. 이 난리가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나란히 감은 눈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생각해 보면 북양에 칠정울결을 덜러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채윤직을 만난 일로 조정이 시끄러웠으니 이는 곧 산이 가장 아픈 손가락을 깨물린 격이었다. 다 물러가려던 병환도 다시 찾아올 만도 하였다. 그래도 그 낭관을 곁에 두고 기꺼워하는 듯 보여 그로 되었구나 생각하였더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희비는 그만 명화궁으로 돌아가거라. 곧 산달이 머지않았는데 이곳에 있어 좋을 것이 없다.”
“아니옵니다, 마마. 이곳에, 폐하의 곁에…….”
희비가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산을 바라보고만 있자, 태후가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어조로 다시금 강조하였다.
“돌아가라. 그리고 너희들도 모두 돌아가도록 해라. 우는 소리를 그리 내니 누가 들으면 황상이 붕어하신 줄 알겠다.”
불경한 말씀을 하시니, 비빈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얼굴을 붉혔다. 일전 황상이 행행을 나가시기 전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 그날은 창빈이 황상의 시침을 든지라, 기침하실 시각임을 알리기 전에 미리 채비를 마치고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황상을 뵙게 되었던 것이다. 창빈이 아연실색을 하여 태의를 부르니 그것이 황상의 옥체가 미령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바깥에 알린 일이었다.
그 뒤로는 혜소의가 황상을 모시다 같은 일이 있었다.
결국 태의가 이대로는 아니 될 것이라, 행행을 납시기를 권하였고 그런 전차로 산이 결국 행행길을 나서게 되었다. 지금이야 돌아와 이제 괜찮으실 것으로 여겼으나,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전장을 누볐으니 몸이든 마음이든 멀쩡한 것이 더 이상하겠으나, 그래도 그들은 산에 대한 기이한 믿음 따위가 있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신뢰라고 하기에는 다소 속물적이어서, ‘산이 그럴 리가 없다’는 우상화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았다.
아무튼, 그 뒤로는 마냥 평안을 찾으신 줄을 알았던 황상이 다시 자리를 보전하고 누우니 내명부의 혼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계속 이리 나으시는 기색 없이 병색이 짙어지면 아직 젊으신 황상이 후계가 없는 고로 사직이 흔들리고 정사가 그 기반을 잃게 되니 마냥 낙관하기가 힘들었다.
“어머니. 어머니도 이만 경헌궁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있겠습니다.”
“해인아.”
“제가 있을게요.”
태후의 축객으로 모든 비빈들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던 해인이 태후를 의자에서 일으키며 침전 바깥까지 모시고 나갔다. 태후는 해인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신을 신고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경헌궁으로 길을 잡았다. 해인은 걱정을 받을 것은 제가 아니라 산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쳐 오르는 것을 겨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물어 돌아오는 대답 없다. 해인은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산의 손을 잡았다.
“또 꿈을 꾸세요?”
“…….”
“꿈에서는 10년을 살아도 현실 세상에서는 고작 일다경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해요.”
“…….”
“어찌 일다경밖에 되지 않는 꿈에 그리 시달리고 계신가요.”
“이 낭관! 이 낭관!”
태후를 보낸 후에 해인은 소문성에게 궁내청에 있는 강을 희건궁으로 데려오라는 명을 내렸다. 제 오라버니 성정을 잘 아니, 다른 내명부 여인들이 그 곁을 지킨다 하여 마음에 평안을 찾을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한 결과였다.
소문성은 명을 받들고 희건궁을 나서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매양 괴롭히고 난처하게 만드시는 주인이어도 저리 누워 계실 때마다 어찌 그리 걱정이 되고 마음이 쓰이는지, 손에 제대로 일이 잡히질 않는다. 오죽하면 평소 그저 게으름을 피우느라 못 일어나실 때에도 혹시 미령하여 의식을 놓으셨는가 싶어 가슴이 철렁철렁할까.
“태감 어른?”
“자네, 빨리 이리 오게.”
“안색이 어찌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제는 퍽 자주 보는 얼굴이라고 안색을 두고 심경을 읽는 지경에 이르렀다. 태감의 입장에서야, 황상께 변고가 있는 것을 알려서는 아니 되기에 표정을 다스리는 데에 꽤 능한 편이었으나 이리 들키고 나니 방도가 없다. 재빨리 강을 끌고 나와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상황을 일러 주는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아직도 못 일어나고 계시네.”
“어찌 게으름이 그리 탱천하셨답니까.”
강은 결국 깨워 달라 부른 것이로구나 싶어 웃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문성의 석연찮은 낌새에 표정을 굳혔다. 정오가 다 지난 시각에 못 일어나시는 게 말이 되는가 싶은 것이다.
“……폐하께서 옥체 미령하십니까?”
“조용히 하게.”
소문성이 급히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경계하니, 강이 다소 놀란 얼굴을 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리 아무렇지도 않게 계셨던 분이 갑자기 미령하다 하니, 어쩌면 산이 소문성을 시켜 저를 놀라게 하려는 농간이 아닐까 싶다가도 소문성의 행동거지가 심히 조심스러운지라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태의는 무어라 했습니까?”
“원래 폐하께서 칠정울결이 낫지 않으시는 고로 이리 깨나지 못하신 일이 많았는데, 행행을 갔다 오신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네. 한데 이리 갑자기…….”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은 어젯밤 그리 산을 뿌리치고 나온 것이 어쩐지 후회되었다. 강은 침전에 들자마자 불경한 줄도 모르고 침상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곁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머리맡에 앉았다. 색색거리는 산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곧 깨어나실 거라고 했으나 아직 기미가 없으니……. 그래도 폐하께서 자네를 귀히 여기시니 곁에 있으면 도움이 좀 되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야.”
“……예.”
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산을 흘끗 보았다. 크게 아픈 기색이 없고 그저 잠을 자는 것만 같아서 강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늘 아침마다 보던 얼굴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산의 몸이 좋지 못하다는 말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마냥 어색하게만 들리기도 하였다. 강은 그저 하던 대로 산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로부터 두 시진쯤이 지났을까. 강은 그때 탁상에 종이를 개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저 산이 깨어나고 나서 그림을 보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그림을 대여섯 장이나 그렸어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강이 그리 붓을 놀리는 동안 해인이 한 번 다녀갔고, 태의가 두어 번 더 다녀갔다. 모두 산이 눈을 뜨면 기별을 넣어 달라는 말을 하고 돌아갔는데, 이리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기별을 넣을 일이 없으니 영 답답하기만 하였다.
“으…….”
강이 벼루에 갈아놓은 먹을 다 썼다는 것을 알고 연적을 기울여 벼루에 물을 따르고 있었을 때였다. 침상에서 늘어지는 신음이 들려오는 고로, 강이 퍼뜩 고개를 쳐들고 그곳을 돌아보았다. 아까 전과 자세가 달라진 채로 산이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강이 쥐고 있던 것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다시 침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폐하.”
“……으응?”
“기침하셨습니까?”
“어……응.”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것 같긴 하였어도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산이 하품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이내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대는 어제 나를 그리 버리고 갔으면서 어찌 여기 있어?”
“깨워 드리려고요.”
“이리 앉아.”
산이 조금 옆으로 몸을 비키며 강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강은 해인과 태의원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나, 부산스레 굴 일도 못 된다 여겼으므로 그저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산이 팔을 들어 강의 손을 잡고 느릿하게 숨을 뱉었다.
“내가 또 오래 잤느냐?”
“아십니까?”
“……또 그 꿈을 꿨으니 그랬겠지.”
“꿈이요?”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꿈에 나와서 괴롭혀. 그때마다 나는 잠에서 깨나지 못하곤 하지……. 오늘도 그 꿈을 꾸었으니 또 오래 잤을 것이야.”
산이 매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니, 강이 곁에 두었던 다기를 기울여 차를 따르고 목을 축이도록 권하였다. 산이 팔꿈치로 몸을 겨우 지탱하여 일으키고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라앉은 목이 풀리지는 않아, 그가 머리를 짚으며 흐트러진 얼굴을 하고 강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그대 때문이잖아.”
“예?”
“그대가 어제 날 홀로 두고 가 버려서 내가 그 꿈을 꾼 거야.”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니, 강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럴 리가 없기는 하였어도,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지라 찔리는 것 같기도 하였고 말이다.
“경사방 태감이 패를 들여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희건궁에서 침수 드셨습니까.”
“그대 곁 말고 어디서 잠을 자라는 거야. 감히 나를 독수공방하게 하다니…….”
아직도 머리가 꽤 어지러운 모양이나 농담하는 것을 잊지는 않는 것을 보아 살 만한가 보다. 강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산이 붙잡은 제 손을 움직여 그것을 마주 잡았다.
“신이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줄은 알아?”
“예.”
“그럼 됐어.”
“태후 마마와 비빈들이 걱정을 하고 있으니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감을 들게 할까요?”
“내가 이리 오래 자는 것을 그들이 모르지 않으니 새삼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키지 않으니 그만두라.”
“하오시면 한 식경만 있다가 알리겠습니다.”
강이 순순히 대답하자, 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서 올려다본 강의 얼굴이 눈가에 맺히자 산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가 감았다.
한동안 꾸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어찌 또 그 꿈을 꾸었던가.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느냐고, 그래서 이제는 놓으라는 뜻이라면 차라리 계속 이 괴로운 꿈에서 그 싫은 얼굴을 계속 보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산은 다시 눈을 껌뻑였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밑에 그 얼굴이 맺히고 다시 뜨면 강의 안면이 시야에 들어찬다.
“이 낭관.”
“예.”
“입 맞춰 줘.”
“지금 말입니까?”
“나중에 또 맞추고 싶으면 그때 또 맞춰 달라고 하겠어.”
어찌 저리 빙빙 돌려 말씀하시는지. 적응이 되지 않던 저 화법에서도 진의를 찾을 수 있을 만큼 강은 산에게 익숙해졌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 위에 제 것을 내리눌렀다. 산이 그 몸을 놓치지 않고 끌어안으니, 강이 이내 몸에 힘을 풀고 그리 계속 안겨 있었다.
“이제 한 식경이 지났으니 바깥에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대는 성격이 참 이상해.”
“폐하만 하겠습니까.”
산이 헛웃음을 지으며 무엄한 낭관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런 자가 어디 다시 있겠는가. 황상의 총애는 그가 일전에 말했던 것과 같이 영화의 길이며, 원한다 하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한번 맛을 보면 통 헤어나기가 힘들고 나누어 갖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은 황상에게 지닌 마음이 진실이든 가공된 것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강의 경우는 판이했다. 그저 싫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스스로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경하게 주장해 왔고,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하기에는 이제 그런 시기가 지난 것도 같은데. 통 독점욕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산은 강을 가만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저자가 그런 탐심을 보일지 알고 싶었고, 또 그런 탐심을 보이면 어떨지도 궁금하였다. 그래서 좀처럼 답답하고 짜증이 치밀 때도 있었다.
“알려라. 어느 주둥이가 가벼이 침전의 일을 흘릴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야. 귀찮으니 떼로 오지 말라고도 해.”
산이 장죽을 쥐며 말했다. 강이 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에 선 소문성에게 그 뜻을 전했다. 그리고 침상으로 돌아오는 길에 탁상 위에 올려 두었던 그림 몇 장을 들고 다시 그의 곁에 앉았다.
“이게 뭐야?”
그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니 강이 어찌 대답하기가 민망하여 잠시 고민하다가,
“오다가 주웠습니다.”
하고 불퉁하게 대꾸했다. 산은 그 말에 파안대소를 하고는 한 장 한 장 면밀히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그중 이목을 가장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으니, 산은 그것을 꺼내어 다른 것들 위에 포개어 올렸다. 일전 탕전에서 물에 빠트려 못 쓰게 되었던 해당화 그림이었다.
산은 손끝으로 그 꽃잎을 매만져 보았다. 과연 강이 그린 그림이니 그러하겠으나, 당장이라도 바깥에 내어놓으면 나비가 와 앉을 것만 같은 생동감이 있었다. 이리 만지면 이슬 한 자락이라도 손끝에 닿을 줄을 알았더니 그저 만져지는 것은 화선지의 질감뿐이라, 산이 이내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대가 이것을 다시 그려 주기로 했었지.”
강이 그 말에 탕전에서의 일이 떠오르는 것 같아 낯빛을 붉히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보고 산이 복야에게 명하여 여선궁에 해당화를 심으라 했었다. 후원 한 자락에 붉게 피어 있으면 꽃 중의 왕이라던 모란보다 더 강의 눈에 찰 것이니 그도 그대로 좋을 것이다.
“가까이 와 앉아.”
“……곧 소식을 들은 비빈들이 희건궁으로 올 것이니, 신이 보여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가는 것이,”
“좋을 일이 없더라도 나쁠 일도 없지 않겠느냐. 그대가 시침을 든 일을 내명부에 모르는 자가 있더냐.”
산이 그리 흘리듯 하는 말에 강이 손가락을 꿈지럭대었다. 그 풍문이 내명부를 강타한 것은 강이 진실로 시침을 들기 전이었다. 순수히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며 시간을 보냈을 당시에도 그녀들은 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았으니, 결국 그 소문이 진실이 되기는 하였어도 이미 눈 밖에 나 버린 다음이었질 않은가.
“그래도 보이는 것이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비빈들이 침전으로 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전후 사정 알지 못하면 황상이 눈을 뜨자마자 찾은 이가 고작 이 천한 낭관이라 여길 것이다. 이는 일종의 과시인 셈이었다.
과시라는 것은 본디 두 가지 효과를 지니는데, 이에 장단이 있다. 단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공공연한 표적을 만들어 주는 셈이 되는 것이고, 장점이라고 함은 즉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될 만큼 황상의 은총을 받는 이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표적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강에게 전자의 단점은 무용하였다. 어차피 되어버린 표적이라면 장점이 발하도록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기실, 모든 후궁들이 강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어찌 산이 대하는지는 본 일이 없지 않은가.
“그대는 고집이 참 세.”
“폐하만 하겠습니까.”
“나는 지존이라 세도 된다.”
“어리시던 때에 그리 서책을 멀리하셨다더니, 아무리 지존이시라 한들 고집이 세면 군주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글 구절도 못 읽어 보셨습니까?”
강이 한마디를 지지 않고 되받으니 산이 신통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강이 어찌 웃느냐는 듯 그저 멀뚱히 보고만 있자 산이 그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기고 입을 맞추었다.
“이 건방진 주둥이를 막으려면 다른 수가 없다.”
“이……이이! 그냥 하고 싶으시면 하고 싶다 하시지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만드십니까.”
“원래 군주는 명분으로 움직이는 것이야. 그런 글 구절도 못 읽어 보았느냐.”
이번에는 강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고로, 그저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 산을 막지 못하였다. 쇄골 주변에서 자그마한 날숨이 느껴지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며 간지럽다. 강이 그만 참지를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산이 더욱 멈출 줄을 몰랐다.
“간지럽습니다, 그만하세요!”
강이 그리 소리를 친 찰나였을까.
─폐하, 창빈과 성귀인이 들었사옵니다.
하고 소문성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강이 깜짝 몰라 무례한 줄도 모르고 두 팔로 산의 어깨를 퍽 떠밀고 멀찍이 떨어졌다. 이미 침전 문 바깥까지 강이 간지럽다 소리치며 웃는 소리가 다 새어 나간 다음이라 의미가 없겠으나, 그래도 직접 눈으로 보이지는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 산이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내려 두었던 장죽을 쥐었다.
“들라.”
비빈들이 오기 전에는 침전을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던 강인지라,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고 그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이에게 보이게 된 셈이었다. 창빈은 잠깐 보았어도 그 성정이 심히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므로, 강이 가장 성가시게 생각하는 상대이기도 하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두 여인이 예를 갖추자 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어나라.”
하였다. 강이 이에 일으킨 몸을 굽히며,
“두 분 마마를 뵙습니다.”
하고 인사를 올리니 창빈이 그 모습을 홱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황상의 앞이니 대놓고 싫은 체를 할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본능에서 우러나는 꺼리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산이 이를 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성귀인이 그것을 알아채고 급히,
“일어나게.”
하며 강이 몸을 세우게 하였다. 창빈은 이에 눈길을 주지 않고 침상 가까이 놓인 의자에 몸을 내리며 갸륵한 안면에 걱정이 천 근 매달린 목소리로 황상에게 아뢰었다.
“폐하, 많이 고단해 보이십니다. 태의는 다녀갔는지요?”
“태의는 필요 없다. 새삼 없던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태의가 어찌 필요할까.”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옥체를 보전하소서, 폐하.”
“짐은 괜찮다. 몇 시진 더 잤다고 이 낭관이 비싼 몸을 놀려 그림 몇 장 더 그려 주니 깨나지 못한 것이 아깝지 않지.”
갑작스레 화제가 저를 향하니, 가만히 쥐죽은 듯 소리 한 점 내지 않고 존재감을 감추던 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 창빈은 좀처럼 표정을 다스릴 줄을 모르는 이이므로, 단번에 안면을 굳히고 말았다.
“태후께서는 다녀가셨사옵니까. 아까 전 뵈었을 때에는 폐하의 옥체가 미령하시니 그로 인해 근심이 가득하시어 뵙기가 송구스러웠사옵니다.”
성귀인이 분위기가 죽기 전에 화제를 돌리자, 산이 장죽을 입에 물며 코웃음을 쳤다. 보지 않았어도 모후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근심이라고 해 보아야 오히려 산이 자리보전하고 누운 모습을 보며 슬퍼하는 해인을 향한 것이 유일하지 않겠는가. 희건궁에서 산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는 소식이 경헌궁에 가장 먼저 들어갔을 것인데도 아무 연통이 없는 것을 보면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희비가 수태한 몸으로 짐의 걱정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인데, 많이 놀랐을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산이 툭 던진 말에 창빈이 다시 한번 동요했다. 곁에 이렇게 낭관을 두시고 가장 먼저 찾으면서도 결국 마음은 희비에게 쓰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던가. 게다가 수태를 하였고, 산달이 다가오는 고로 평소 성심 주시는 것보다 더 세밀히 신경을 쓰실 터였다. 창빈은 옷자락에 가려진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걱정 마소서. 처음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적잖이 놀란 듯싶었사오나, 지금은 평온을 찾은 줄로 아옵니다.”
“너희들이 희비를 많이 신경 써라. 짐의 첫 아이를 낳을 몸이 아니더냐.”
“예, 폐하.”
두 여인이 곱게 대답하자, 산이 이내 볼일이 끝났다는 듯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상에 뉘었다. 성귀인은 이제 알현이 끝난 줄을 알고 의자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고, 좀처럼 떠나고 싶지 않은 듯 일어나지 않는 창빈의 옷자락을 조금 당겨 눈치를 주었다. 창빈의 시선은 강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으나, 이내 어전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결국 침전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몸은 천한 낭관에게, 마음은 희비에게 주어 버린 황상은 이제 한때 총애하시던 창빈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왜 저자는 갑자기 희비의 이야기를 꺼내 가뜩이나 나 때문에 심기를 상한 창빈을 자극하는가. 하고 얼굴에 쓰여 있으니 이 낭관은 표정을 가다듬어라.”
창빈과 성귀인이 침전을 나서기가 무섭게 산이 강을 향해 빈정대었다. 산이 말한 것과 제 속이 한 치 다름이 없는 고로, 강이 일순 마른침을 삼켰으나 이미 성가신 일에 휘말리는 것이 싫다 몇 번이고 아뢴 고로, 못 할 말도 아닌 듯하여 강이 뺨을 긁었다.
“그리 신의 속을 잘 아시는 분이 어찌 그러십니까.”
“너는 투견을 본 적이 있느냐?”
“투견이요?”
“그래.”
작정하고 열린 투견판이라면 한 번 본 일이 있었다. 창천성에 머물던 시절 시장 한구석에서 이따금 투견판이 벌어지고는 하였는데, 강이 길을 지나다 생각 없이 돈을 걸었다가 모두 날려 그 뒤로는 그 주변을 얼씬도 하지 않았더랬다. 그때 일을 떠올리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강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내명부에는 화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지. 어찌 억지로 그리 만들어 두어도, 언젠가는 다시 금이 가고 깨어지기 마련이거든.”
“…….”
“그럴 바에야 싸움 구경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나는 성귀인에게 걸었다. 그대는 어디에 걸겠느냐?”
“……어찌 신이 감히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창빈은 낯이 반반하고 미색이 보아 줄 만하다만, 성격이 급하고 욕심이 많다. 그리고 좀 멍청한 구석이 있어. 희롱하기에는 편하지만 금세 질린다. 도태되기 좋은 축이란 말이야.”
강은 말을 아꼈다. 제가 산에 대하여 떠들어 대는 것이야 처음부터 범했던 무례였고, 당사자인 산이 그것을 귀엽게 보아 넘겨주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내명부는 조금 달랐다. 강이 섣불리 입을 열 만한 화제가 못 되었다.
“불안이 극에 달했을 즈음 가서 귀여워해 주면 불안을 씻은 듯이 가라앉히고는 하지.”
“창빈이 폐하께서 그런 의중을 갖고 계신 줄을 알면 크게 슬퍼할 것입니다.”
“모르니 상관없질 않아.”
강은 산에게서 부쩍 거리를 느꼈다. 산도 사람이니 사람에 대하여 좋고 싫음이 있기 마련일 것이며, 심지어 후궁들은 모두 정치적 이유로 들였으니 정을 주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머리를 올려 주었으니 일말의 연민이라도 갖고 대하여 주었더라면 저 여인이 저리 엇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강은 생각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 투견을 키울 때 먹이를 가끔 던져 주고 사육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니, 강은 어쩐지 팔꿈치에서 소름이 돋아나는 듯하였다.
“그래도 여인으로 태어나 지아비로는 오로지 폐하 한 분을 보고 입궐을 하였을 텐데요. 진심을 받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더러 창빈에게 진심을 주라는 소리냐?”
“……신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강이 스스로가 황상을 가르치려 들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청죄하였다. 하지만 산은 그러한 무례에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그런 강을 향해 손을 내밀기만 하였다. 강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내 진심은 그대에게 주려는데, 왜 그대는 남에게 주라고 하느냐.”
*
“이 낭관!”
“예, 예?”
무슨 정신으로 희건궁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으나, 아무튼 강은 제가 꽤 멍청한 꼴을 보였다는 것은 알았다. 어버버거리며 이만 쉬시라 하였던가, 아무튼 무어라 말씀을 올리고 급히 침전을 나섰는데 제 발이 어디를 디디는 줄도 모르고 헤매다 지척에 있는 궁내청도 아닌 요상한 곳에 도달했다. 물론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궁내청으로 복귀하였으나, 아직도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여선궁 귀신이라도 봤는가?”
“아, 아닙니다.”
복야는 강의 어깨를 쥐고 몇 번 도닥였다.
“폐하, 혜소의와 윤 소의가 문후를 여쭈러 와도 되겠느냐 기별이 왔사온데 무어라 답할까요?”
한편, 그리 강이 도망치듯 희건궁을 빠져나가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산은 소문성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비스듬히 누운 채 장죽 끝으로 화로를 두드리고 있던 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영 귀찮고 내키지 않는 모양이라, 소문성이 그 뜻을 알아채고 이만 물러서려 하였다.
“폐하.”
“왜.”
“이 낭관이 조금 넋을 놓은 것 같습니다. 희건궁에서 빠져나가 이상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하여튼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산은 그리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폐하께서 이 낭관을 그리 아끼신다면, 태후께 다시 말씀을 드려 첩지를 이르게 주셔도 되지 않겠사옵니까. 계속 궁내청에 있는 이 낭관을 번번이 부르는 것도 조금 좋지 못할 듯하옵니다. 요사스러운 소문이 날까 저어되옵니다.”
“뭐 벌써 그럴 것까지야.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데.”
“하오나,”
“이 낭관이 짐에게 신기하고 보기 좋은 물건임은 확실하지만, 이 낭관에게 짐도 딱 그 정도라 안 된다. 게다가 이 낭관은 욕심이 없고 순응이 빠르니 동요하는 법이 잘 없지. 오죽하면 제 목숨을 내놓을 뻔하였는데도 살았으니 되었다는 식으로 여유를 부리고 있겠느냐. 이것이 다 욕망이 없어 그러는 것이다. 내명부에 들어오려면 다른 이들처럼 짐이 주는 것에 대한 욕망이 있어야 하고 짐에게 받고 싶은 것을 가지려 애써야 해. 그래야 다루기가 쉬운 법이니라.”
소문성은 그 말에 대꾸할 바를 잃었다. 매 순간 떼어 놓고 싶지 않으시다 했을 때에는, 그런 말씀을 한 것을 소문성이 지극히 처음 듣는지라 이 낭관에게 단단히 마음을 주셨다 생각했다. 하지만 저 말을 가만 생각하면 그리 은애하고 아끼는 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네 말대로 궁내청 일은 그만두게 하고 꽁꽁 싸매고만 있으면 짐이 이 낭관을 얼마나 찾아 대는지 다른 이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허면 이목도 끌 수 없지. 뭐, 이 낭관도 궁내청에서 일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니 그만두게 할 이유가 없느니라.”
소문성은 문득 산이 한 번도 강을 이름으로 부른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뒷머리를 둔탁한 무언가로 얻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이어서 제가 그간 침전 바깥에서 그 두 사내가 두런두런 주고받는 소리에 흐뭇하게 웃어 대었던 일이 참으로 무색해지는 것이다.
“폐하, 이 낭관을 아끼지 않으십니까?”
“아낀다.”
“한데 어찌…….”
“어찌 괴는 것에 한 가지 방법만 있겠느냐. 이런 사람도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지.”
산은 그리 말하며 남령초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이내 진득하게 연기를 뱉어 내었다.
대관절 저 어심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10년 가까이 산을 주인으로 모셨던 소문성이 그랬고, 28년 동안 지척을 떠나지 않고 보필하였던 채윤직이 그랬다. 하물며 이제 고작 한 달이 조금 넘은 강이 어찌 저 속을 알까. 소문성은 그 순진한 이가 마음을 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안타까웠으나, 제가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알기에 그저 침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