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역
3(2).
*
“너희들은 어찌 물러가지 않고 있느냐?”
“……태후 마마, 신첩은 무섭습니다.”
창빈은 약한 소리를 하며 괜히 고개를 숙였다. 태후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한 시진째 머물며 보채는 것이 영 골이 아팠다. 황실의 가장 웃어른인 태후라 할지라도 그 아드님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니, 정무에 간섭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산 역시 일반적으로는 매일 여쭈어야 하는 문후도 격일로만 하고는 하였고, 오더라도 의례적인 안부만 나누고는 돌아갔던 고로 태후가 갑작스레 의견을 내는 것도 조금 모양이 우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후가 권위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태후가 내명부의 대소사를 논할 적에 산이 꽤 그 말을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산은 채윤직의 일로 조정의 시끄러웠던 시절, 태후가 그를 비호하고 나섰던 것에 대한 빚을 갚는 셈이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산이 창천성의 영주가 되는 것을 두고 채윤직과 갈등이 있었던 태후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넓은 창 제국 땅덩어리에서 최동단의 변방 창천성이라는 출신지의 공통점이 있기는 하였다. 그리고 태후는 채윤직의 신중함을 알았으니 더욱 그의 편이 되었고 말이다.
“알았다. 내가 말을 전하마. 여봐라.”
태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태감을 불렀다.
“황상을 오시라고 해라. 희비도 같이.”
아무리 경헌궁에 틀어박혀 눈 귀를 막고 사는 태후라 하여도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알아지는 바가 있었다. 태중태부는 유 승상의 사람이니, 아무래도 주청을 올리라 종용하였던 것도 유 승상일 터였다. 지금 산이 역정을 내고 있으니 응당 희비가 불려 갔을 것이며, 그 이야기를 두 사람이 나누기는 하였을 것이다. 허나 이리도 후궁들이 불안해하니 한 번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기는 하여야 했다.
─폐하.
한편, 한참을 그리 노닥거리다가 이번에는 제가 귀를 파 주겠다며 막 무릎 위에 강을 뉜 산은 바깥에서 소문성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바깥에서 먼저 부르는 일이 없는 고로,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산은 이내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가만히 강을 내려다보며 도로 그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강이 아까 그랬던 것처럼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눈앞에 보였다.
“그대도 이렇게 해.”
“폐하,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 태감이 저리 고하는데, 어찌…….”
“그대를 내 무릎 위에 뉘느라 실랑이만 한 식경을 하였는데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느냐.”
그리 말하며, 잠자코 있으라 덧붙인 산이 강의 귓불을 쥐었다. 소름이 돋아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내고 만 강이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간지러워?”
“예.”
“아까 나도 간지럽다고 하였는데, 그대가 원래 그런 거라고 했잖아.”
“아니, 뭐……. 간지럽다는 말씀도 못 드립니까?”
“어휴. 더러워. 그대는 제대로 씻지도 않는구나?”
산이 귀이개를 귓구멍 안으로 넣으며 혀를 쯧쯧 차자, 강이 다시 어깨를 움츠리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신보다 폐하의 귀가 더 더러웠습니다.”
“그대가 그걸 어찌 알아?”
“그냥 압니다.”
“오만방자한 낭관 같으니. 감히 짐의 귀를 더럽다 했겠다.”
“신을 오만방자하게 만든 것이 어디의 뉘신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듣던 귀가 있으면 기가 막혀 웃었을 것입니다.”
사각사각 긁는 소리가 나니 온몸이 나른해진다. 강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왜인지 몇 년 전, 아직 삼척동자였던 때가 떠올랐다. 채윤직이 어리고 작은 강을 제 무릎에 누이고 귀를 파 주면 그렇게 점점 나른해지다가 이내 잠에 빠지고는 하였던 그때 말이다. 그 뒤로는 강이 워낙 빨리 자란 터라 늙은 채윤직이 다 큰 아들을 누이고 귀를 파 주기에는 여러모로 모양도 우스웠고, 강 역시 조금 계면쩍어 그런 일은 없었다.
“그대 아버지보다 내가 더 잘하지?”
“아뇨, 신의 아비가 더 잘합니다.”
옛날에는 영주의 적자, 지금은 지존이 된 그의 귀한 손이 언제 남의 귀를 파 주었을까. 서툰 손이 귓바퀴를 매만지며 귀이개를 휘적거리는 것이 우스웠다. 귀 벽에 귀이개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대로 잠을 자고 싶어졌다.
기실, 관사에서는 의평 출신이라는 어느 언관의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커서 제대로 잠을 이루기가 힘들 때가 많았다. 겨우 잠들었을까 싶으면 곧 아침을 알리는 징소리가 들리는 고로, 아쉬워하며 몸을 일으키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궁내청에서 조는 모습을 보였다가 책을 잡힐 수도 있으니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있다 보면 퇴청할 시간이 오고, 퇴청하고 나면 희건궁으로 가야 했으므로 강은 늘 피곤한 상태였다. 유유자적했던 창천성에서의 생활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이 낭관.”
“……예에.”
“잠이 오는 게로군. 내가 잘하지 못한다 하더니 다 거짓부렁이야.”
“……예에.”
“예밖에 할 말이 없느냐?”
“예……에에…….”
점점 늘어지는 목소리에 산은 슬쩍 강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반쯤 감겨 느릿느릿 깜빡이는 것이 퍽 귀엽다. 산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자라고 두어야겠다 싶었는지 그의 귀를 놓아주었다.
“……안 잡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 어찌 알아챘는지 강이 급히 눈을 부릅뜨고 민망한 듯 말하였다.
“그럼 돌아누워 봐. 이쪽은 다 했어.”
“예에…….”
굼뜨게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눕다가, 강이 그만 산의 다리 밑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곧 엉금엉금 몸을 일으켜 다시 그의 다리 위로 머리를 올려놓을 줄로 알았더니, 어쩐지 미동이 없다. 산은 허리를 앞으로 기울여 강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깊게 잠들었다.
“안 잔다더니.”
그리 말끝마다 신이 어찌 감히, 신이 어찌 감히, 해 대는 낭관이니 보통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면 감히 침전에서 잠을 잘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오죽 피곤하면 제가 잠드는 줄도 모르고 저리 잘까. 이렇게 잠시 두었다가 나중 깨거든 놀려 주어야겠다 생각하며, 산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응?”
산의 옷자락이 강의 머리 밑에 깔려 있다. 산은 답지 않게 옷자락을 조심스레 쥐고 조금 당겨 보았다. 그러니 강이 크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옷자락을 빼거든 강이 깨어버릴 것 같으니 알아서 일어날 때까지 이 자리에 묶여 있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는 모습이나 구경하면 되지, 뭐. 싶은 마음이 드니 그리 묶여 있는 것이 속박 같지는 않았다.
산은 귀이개를 탁상 위에 내려놓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강과 쉼 없이 웃고 떠들고 노닥거리고 하는 통에 생각할 겨를도 별로 없었고 나쁜 생각을 하려거든 강이 귀염을 떠는 탓에 마음이 상하지 않았는데, 이리 조용하니 문득 다시금 생각에 어둠이 드리웠다.
─폐하!
그때 소문성이 다시 문 바깥에서 아뢰었다. 산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강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아직 깨지 않은 줄을 알고 안심하며 대꾸했다.
“조용히 들라.”
“폐하, 경…….”
그리고 소문성은 감히 황상의 침상에서 깊은 잠에 빠진 요망한 낭관을 보고 말았다. 어찌해야 할지 잠시 당황하였으나, 일전 그의 무례함을 아뢰었다가 크게 화를 샀던 것을 떠올리고 황망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경헌궁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산은 경헌궁이라는 말에 일순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되물었다.
“무슨 연통?”
“경헌궁으로 오시라는 태후 마마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별일이군.”
산은 코웃음을 쳤지만, 이리 직접 오라고 말한 일은 거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자니 문득 제 소매 밑단을 벤 채 강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잠시 멈칫하게 되는 것이다. 산은 잠시 어쩔 줄을 모르고 가만히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용포를 입으시는 것을 도우려던 소문성은 거동을 멈춘 산을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가위를 가져와라.”
“예? 가위는,”
“조용히 말해라. 이 낭관이 깬다.”
“……송구하옵니다. 가위는 어찌,”
“입 닥치고 가져오라면 가져와라.”
“예, 폐하.”
이유를 알지 못한 소문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갔다가, 가위를 들고 돌아왔다. 자를 것이 있다면 자신이 하겠다는 말에도, 산이 말없이 그저 손만 내미니 소문성은 어쩔 수 없이 그 손에 가위를 바쳤다. 한데 기상천외하게도, 산이 그것을 쥔 채로 강이 베고 누운 저고리 밑단을 가위로 미련 없이 서걱서걱 잘라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소문성이 그만 대경실색하여,
“폐하!”
하고 소리치자 산이 신경질적으로 그를 돌아보며 일갈했다.
“입 닥쳐라. 이 낭관이 깨면 네 혀를 뽑겠다.”
“……예.”
아무리 산의 총애가 깊다고 한들, 낭관이 감히 지밀에서 잠을 자는 것도 거품을 물 지경인데 이제는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며 스스로 내의를 잘라내는 모습에 눈앞이 검게 물드는 지경이다. 어쩌면 조만간 금궐 안에 궁이라도 내주실 것 같아, 소문성은 황망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채윤직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세간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얼마나 난리가 날 것인가. 소문성은 눈을 감았다. 절연장을 쓴 것은 진실로 최고의 묘수였다.
“짐이 돌아올 때까지 이 낭관을 깨우지 마라.”
희건궁을 나서며 산이 명하니, 지밀을 지키고 있던 상궁은 심히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이고 명을 받들었다.
“희비는 어찌 홀로 왔느냐.”
한편, 명을 받고 경헌궁으로 걸음 한 희비는 그 앞에 앉아 있는 창빈과 성귀인을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저들이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기에 그러했으나 이내는 평정을 찾고 태후에게 절을 올렸다.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절은 하지 말렴. 몸도 무거울 텐데. 어서 앉아라. 한데 어찌 혼자 왔느냐. 황상은?”
“……예?”
“황상과 함께 있던 것이 아니었느냐.”
희비는 조금 낭패다 싶어 얼굴을 굳혔다. 황상이 걷잡을 수 없이 진노하였으니, 응당 희비가 불려갔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간 것은 아니었으나, 그곳에 이강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다시 명화궁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곧 죽어도 수치스러워 못 하겠는지라. 희비가 답이 없으니 창빈이,
‘오호라 이번엔 아니 불려간 게로군.’
하고 내심 웃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희비가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대는 동안 바깥에서 태감의 소리가 들려왔다. 비빈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희비도 이윽고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채로, 그 고귀한 어수로 5년 만에 사람을 직접 죽이셨다던 황상은 생각보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희게 질린 채 눈가며 뺨이며 하는 곳들이 붉게 상기되어 있을 줄로만 알았더니,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폭풍전야라 생각해야 하는가. 알 길이 없어 그저 눈알만 바지런히 굴릴 뿐이었다.
“태후를 뵙습니다.”
“어서 앉으시오.”
산이 인사를 올리니, 비빈들이 몸을 비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문안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빈들이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산의 시선은 오로지 희비에게 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희비는 그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 있는 줄을 몰랐으나, 태후는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황상도 알고 있는 것일 터다. 태중태부가 어떤 이유로 정전에서 채윤직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그 시작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하지만 산은 책망하는 기색 없이 손을 저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이윽고 비빈들이 다시 좌정하니, 상궁이 차를 가져와 산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사실 산은 그저 돌아가고만 싶었다. 태후가 어떤 이유로 자신을 불렀는지 와 보니 뻔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 첫째요, 그다음은 강이 희건궁 침전에 홀로 남아 있기 때문이 둘째다.
“황상은 어찌 늦으셨습니까.”
희건궁에 사람을 보낸 지 두 식경이 지난 후에야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 태후가 물었다. 하지만 산은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이강의 귀를 파 주느라 그랬다는 말을 제 입으로 하면 둘러앉은 비빈들이 어찌 반응할지는 눈에 선했다. 굳이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녀들은 어차피 태중태부의 일로 눈치를 보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을 터였다.
“이 사람이 황상을 오시라 한 것은 다름 아닌 금일 정전에서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태후가 입을 떼자, 산이 또다시 미소 지었다. 좀처럼 간섭할 줄을 모르는 태후가 부를 정도라면 그 파급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겠다. 산은 정을 주지 않았던 차가운 모후에게 마찬가지로 차갑게 대답했다.
“예.”
“태중태부는 2등관의 높은 관직인데, 어찌 죄상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바로 목을 친단 말입니까. 그로 인하여 내명부가 크게 동요하니 이는 명명백백히 황상의 잘못입니다.”
산은 그 말에 다시 한번 웃었다. 태중태부와 연이 닿아 있는 이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하기야, 생각해 보니 주요 관직에 있던 만큼 그와 친분이 없던 이를 찾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기는 하였다. 그리하여 이 여인들이 그 화가 자신의 집안에까지 미칠까 두려워 태후에게 찾아와 읍소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 생사여탈을 쥔 지아비가 지척에 있거늘 어찌 어리석게도 태후를 찾아가 자신의 신경만 거스르는 것일까. 참으로 생각이 짧은 여인들이었다. 산은 고개를 느릿하게 찻잔을 향해 기울였다.
“모후, 어찌 정사에 간섭을 하려 드십니까.”
그리고 그 대답이 경헌궁 내부를 쥐 죽은 듯 조용하게 만들었다. 주로 산은 이쯤 되면 자신의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라며 한 수 물러 주고는 하였으므로, 태후 역시 아니 당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산은 그리 물러 줄 생각이 없는 모양으로,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굳은 얼굴의 비빈들을 둘러보았다.
“……황상.”
“모후. 짐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자가 아닙니다. 태중태부의 죄는 태중태부의 죄일 뿐으로, 다른 이에게 영향이 미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태후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나이가 드니 느는 것은 한숨뿐인지라. 오늘처럼 날 복잡한 때가 오면 이렇게 대답 대신 한숨만 절로 쉬어졌다. 기실, 산의 반응이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운 것은 아니긴 하였다.
산은 늘 채윤직에 일에 대하여 그 어떤 것보다 예민하게 반응하였으므로 웬만해서는 5년 전, 개국공신의 위를 박탈하고 창천성으로 전송한 것으로 끝을 보기는 해야 했다. 이를 무시한 것이 승상과 태중태부였으니 과하기는 하여도 산의 진노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상. 지금은 전시가 아닙니다. 비로소 태평성대가 왔는데 정전에서 피를 보시다니요.”
“짐도 모르는 태평성대가 어디서 왔습니까, 모후.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미 끝난 일에 정도를 모르고 설치는 자들이 조정에 가득한데, 어찌 태평성대라 하겠습니까.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지는 것만이 태평성대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 말하며, 산이 찻잔을 입가에 대었다. 모자의 온화한 언쟁을 지켜보던 창빈은 이 자리를 괜히 만들었는가 싶어 계속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태후의 간섭으로 황상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진다면, 이를 어찌 감당할까. 창빈은 이미 이강 때문에 황상의 미움을 받질 않았는가.
‘괜히 성귀인의 말을 들어 가지고는!’
하지만 내 낭군 믿지 못하고 집안에 해가 갈까 걱정한 것은 정작 창빈 본인이니, 달리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가 누구보다 불편한 이는 역시 희비였다. 희비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계속 승상과 함께 있었다. 조정에서 벌어진 일을, 그리고 그 전에 승상이 태중태부에게 무어라 말하였는지 소상히 말씀해 보시라 했다. 그랬더니 승상이, 회임한 몸으로 그런 이야기는 듣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하지만 희비는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 생각하여 괜찮으니 부디 말씀하시라 채근하였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어리석게도 아니 듣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태중태부의 망언도, 그리고 산의 반응도 모두 무섭고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 희건궁에서 물건을 부수고 진노를 다스리지 못하였다는 그 황상을 뵙고 나니 더욱 오금이 저리는 것만 같았다. 호갑투의 끝이 가늘게 떨리며 움켜쥔 손바닥을 계속하여 두드렸다.
“모후, 짐을 다그치기 위하여 부르셨습니까.”
“이 사람은 불충한 태중태부의 목을 친 것 그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로 인하여 내명부에 불안이 드리워졌는데, 그게 어찌 정사라고만 하겠습니까. 내명부의 일은 지금 황후가 없으니 이 사람이 다스리는 수밖에요.”
“그런 것이라면 심려를 내려놓으십시오. 짐은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언쟁은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지는 듯했다.
태후는 이만 돌아가 쉬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잠시 숨을 고르다가, 문득 용포 사이로 드러난 내의가 찢어진 것을 발견하였다. 지존이 어찌 용포를 상한 내의에 받쳐 입고 밖을 다닌단 말인가. 금일 제 아드님이 맘에 안 드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태후는 언짢은 기색으로 목청을 틔우고는 산의 곁에 시립한 소문성을 바라보았다.
“소문성은 황상의 의관 하나 제대로 정제해 드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갑자기 불똥이 튄 고로, 소문성은 크게 당황하여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의관을 정제해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인가. 경헌궁에 납시기 전 용포를 입혀드린 것이 저였고, 그 일을 얼마나 오래 해 왔는데 틀렸을 리가 없다.
“태후 마마, 소신이 부족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죽여 주십시오. 허나 그 전에……. 죄가 무엇인지 알고,”
“어허! 황상의 옷자락이 뜯어졌는데 어찌 그것도 모른단 말이냐!”
그 말에 소문성은 숨이 멎는 듯했다. 경헌궁으로 오기 전 산이 낭관이 베고 있던 옷자락을 가위로 자르는 것을 두 눈으로 보기는 하였으나, 새 내의를 들이게 하고 갈아입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오랜 고로, 산이 바로 가자고 한 것을 말리지 않았더니 이리 낭패를 보았다. 소문성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태후 마마, 죽여…….”
“너는 어찌 그리 말끝마다 죽여 달라 하느냐. 일없다. 일어나라.”
하지만 웬일로 소문성의 구명을 한 것은 산이었다. 산이 용포를 조금 열어 찢어진 내의를 잠시 바라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허공에 휙 저었다.
“이것은 짐이 직접 자른 것입니다.”
“……황상이 어찌 내의를 자릅니까.”
“짐의 총자寵者가 옷자락을 베고 자고 있던지라, 깨우지 않으려고 잘랐습니다. 이미 그때는 모후의 전갈을 받은 지 좀 되어 늦었기에 따로 갈아입지 않고 바로 오느라 추태를 보였습니다.”
비빈들은 그 말에 단숨에 젊은 낭관을 떠올렸다. 비빈들에게 제대로 된 애정을 보여 주지 않는 산이 그렇게까지 했다는 것은 이강이 지금으로써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만큼 총애를 얻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창빈과 성귀인은, 이제는 이강이 황상의 진노를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생각하며 철 지난 희비의 시대에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새로운 적이 나타나 골이 아프지만, 희비의 위세가 한풀 꺾인 것은 조금 즐거운 일이었다.
“단수지벽斷袖之癖이 따로 없군요.”
태후가 짧게 대꾸했다. 옛 한의 애제라는 황제가 자신의 남첩이 소매를 붙잡고 자는 것을 보고 조회에 나가기 위하여 소매를 찢은 고사를 두고 단수지벽이라 부르니, 산이 한 일이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들리는 풍문에 산이 창천성에서 어떤 사내를 데려왔는데 그 사내에게 직접 성을 내리고 심히 귀애한다고 하였다. 총자라는 것은 그 사내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가. 채윤직의 일로 마음이 상한 황상에게 창천성 출신의 총자가 있다면 꽤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 애를 곁에 두시면 아무래도 향수 같은 것이 어느 정도 옅어져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황상의 총자는 무엇 하는 이입니까.”
“궁내청 낭관입니다.”
“허어, 그런 자가 있다면 봉작을 내려 곁에 두실 일이지, 어찌 낭관으로 두십니까.”
태후의 말에 비빈들이 일괄 동요하였다. 그중 희비는 이제 등 뒤로 식은땀이 뻘뻘 나는 지경이었다. 언젠가는 봉작을 내릴 것이라는 예상을 못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그 이야기를 귀로 들으니 눈앞이 어지러워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폐하께서 무어라 대답을 하실까.’
아마 태후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리며 일부러 이강의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도 모른다. 침전에서 총자를 배려하여 옷을 자르고 나왔다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다른 핑계를 대면 얼마든지 소문성을 두둔할 수 있었을 것인데…….
산은 그 말에 팔걸이에 느슨히 몸을 기대며 비로소 대답했다.
“허면 모후께서 짐의 총자를 위하여 날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
한편, 침전에 홀로 남아 있던 낭관은 기이하게 조용한 느낌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시선을 굴려 주변을 살피니 산은 온데간데없고 저 홀로 침상에 누워 있질 않은가. 잠든 줄도 몰랐던 고로 그것만으로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침전 안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지 않으니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강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가, 제 머리가 있던 자리에 놓인 흰 천을 발견하고는 이를 잡아채었다. 자세히 보니 그 끝에 금사로 자수가 놓여 있는지라, 다시 들여다보니 이는 분명 용 발톱 모양이었다. 황상의 내의다. 한데 이것이 어찌 뜯어진 채로 머리 밑…….
“설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찬찬히 떠올려 보니 소문성이 아까 전 계속 바깥에서 황상을 부르던 것이 생각난다. 산이 그 때문에 잠든 저를 이곳에 남겨 두고 어딘가로 간 것이라면, 가면서 깨우지도 않은 거라면. 이 불경을 어찌해야 하는가 싶어 앞이 다 막막해진다. 문을 빼꼼 열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고 싶은데, 망령되게 나섰다가 다른 이의 눈에 띄면 더욱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은지라 어찌하지도 못하고 강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망했다. 이건 정말 큰일이야.’
아무리 황상의 총애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여도, 이것은 진실로 큰일이다. 산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할 것이 자명했다. 허나 이 일이 알려지면 안 그래도 일파만파 퍼진 강의 소문이, 날개를 달고 훨훨 날 것은 지극히 정해진 일이 아니겠는가. 강은 야장의 자락을 쥐고 어지러이 침전을 왔다 갔다 하며 쉼 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산이 망령되게 이 일을 입 밖에 꺼내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지밀에 있는 궁인들이 입을 열리는 없겠고…….’
하지만 산은 이미 그때, 망령되게 입을 연 다음이었다.
─이 낭관이 잠을 자니 조용히 열어라.
그때, 침전 문밖에서 산의 음성이 들렸다. 강은 심장이 발끝까지 쿵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산이 먼저 자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귀만 파 주겠다고 하였는데 멋대로 잠을 잔 것은 자신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빌어야 할 일이다.
“응? 이 낭관은 왜 여기서 그런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어?”
바닥에 부복한 강을 산이 흘끗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강은 그것이 농인지 진심인지 판단하기에는 몹시 혼비백산한지라,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이…….”
“일어난 것이야? 일어났으면 앉아 있을 것이지 왜 바닥에 그러고 있느냐.”
산이 별꼴 다 보겠다는 듯 웃었다. 용포도 벗어두고 침상에 도로 앉으니, 강이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다시 한번 아뢰었다.
“죽여 주십시오. 신이 망령되게 침전에서 잠을 잤으니 죽어 마땅한 일입니다.”
“죽어 마땅한 일은. 일어나라.”
하지만 산은 심드렁히 대답하며 장죽을 쥘 뿐이었다. 경헌궁에서 결국 날을 잡아 주겠다는 태후의 말을 들은 뒤 퍼렇게 질린 비빈들의 얼굴을 구경하고 온 산은 퍽 기분이 괜찮았다. 비빈이라는 여인들이 황상의 속 헤아릴 줄을 모르고 제 집안 생각하느라 황상과 사이 나쁜 태후를 찾아가 읍소하였을 것을 생각하면 괘씸하여, 어찌 눈물이라도 쏙 빼 주고 싶었는데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태후가 이를 도왔다.
“아, 아니옵니다. 신이 불경하니 벌을 주십시오.”
“벌이라니 가당찮다.”
“폐하…….”
“이리 온, 이 낭관.”
하지만 일어나라는 데도 일어나지 않고,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로 있는 강이 돌아가는 모양을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것이 우습다. 산이 손을 까딱이자, 강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가 다시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런 경우, 비빈들의 미움을 사 귀찮은 일에 처하지 않으려면 산이 강에게 어떤 벌을 내리고 불경죄를 다스렸다는 소문을 내는 것이 가장 좋았다. 강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어차피 미움은 샀으니 얼마든지 미워해도 상관은 없지만, 평화로운 생활이 파괴되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더 가까이 와.”
몇 걸음 더 가까이 온 것으로는 내키지 않는지, 산이 남령초 연기를 뱉으며 다시 한번 손짓했다. 강이 마른침을 삼키며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니, 손이 산의 발치에 치였다.
“이 낭관, 내가 괜찮다 하는데 어찌 불경죄라 하느냐.”
산이 강의 턱 밑을 쓰다듬으며 어르니, 강은 더욱 난처해지고 말았다. 어찌 황상은 이리도 격식을 몰라 자신을 곤경에 빠트리는가. 제 재주와 능력을 높이 사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늘 이렇게 자신에 있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이 모습을 드러내 놓고 반겨도 되는지 걱정되었다.
“폐하.”
“난 모후를 만나고 왔다. 그곳에 희비와 창빈…… 그리고 성귀인이 있었지.”
“…….”
“희비야 모후가 불러 간 모양이지만, 창빈과 성귀인은. 그래, 창빈은 그럴 만도 하지만 영특한 성귀인이 참으로 의외였지. 성귀인은 집안이 모두 망하여 태중태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거든. 희비는 내 아이를 가졌는데, 어찌 그리 어리석게 구는지 모를 일이다. 아비가 희비에게 압력을 넣었는가 싶기도 하지. 그대 생각은 어떠냐.”
“……신이 무엇을 안다고 내명부의 일에 입을 열겠습니까.”
“그래, 나는 이 낭관이 신중하여 좋아하지.”
산이 한 손으로 강의 뺨을 쥐었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이 감싸이니, 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불경이 어떤 여파를 미칠지 알 수가 없는 고로 안면에 드리운 근심을 걷어 내기가 힘들었다.
“이 낭관은 얼굴을 가다듬어라. 내가 괜찮다 하면 괜찮은 것인데 그대는 쓸데없는 곳에서 고집이 세다.”
“송구하옵니다.”
“송구하면 그만하고 이리 올라와라.”
황상이 몇 번을 괜찮다 하니, 이에 대하여 계속 죄를 청하는 것도 도가 지나치다 싶어 강이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산이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모로 누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산은 어쩔 줄 모르는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은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고 침상으로 올라갔다.
“그대가 걱정하는 것은 무엇이냐. 금궐에 퍼질 낭관 이강에 대한 소문?”
“신에게 그런 소문은 하등 상관없는 것이옵니다. 그런 것을 걱정했더라면 폐하를 따라서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허면 무엇이 걱정이라 안면에 수심을 드리우는 게냐.”
“신이 걱정하는 것은 신에게 벌어질 귀찮은 일들입니다.”
“귀찮은 일?”
“신을 미워하는 이들이 생각만으로 그치면 좋겠지만, 응당 신을 해치려 들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로 인하여 관직을 잃거나 쫓겨나게 되는 것도 사실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이 만일 그들과 싸워야 할 때가 온다면, 그것이 그저 싫을 뿐입니다.”
“그대는 노인과 같은 말을 하는군. 노인은 자기가 죽으면 창천성을 중앙에 복속하여 영주를 파견해 달라고 하였지. 채영에게는 그런 싸움판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말이야.”
“송구하옵니다.”
산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 마음은 산도 알고 있다. 이렇게 매일이 전쟁이고, 밥그릇 싸움인 것이 어찌나 지겨운지는 그 첨단에서 살고 있는 산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산은 이에 대하여 해 줄 말은 없었다. 이미 강이 각오한 것과 같이 그는 이미 금궐에서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양명하였고, 태후가 직접 날을 잡아 봉작을 내릴 것이니 총궁이 될 것이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 함구를 명하였으나, 이미 강이 침전에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와 산이 매일같이 불러 본다는 이야기는 일파만파 금궐의 모든 담을 넘은 다음이었다. 이미 시침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듣자 하니, 그대가 내 시침을 든 줄로 알고 있는 자들이 많더군.”
“……예?”
“어떤 점이 그들을 오해하게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찌 그것을 산이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리 의뭉을 떨며 강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하지만…….”
“하지만?”
“사실 그도 신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신을 자주 찾으시니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억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폐하께서 신에게 성총을 주신다는 뜻이니 광영입니다. 그로 인하여 겪게 될 일들이 아예 사라지기를 감히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지금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한순간 견디면 되는 것이고, 그리 모욕적이지도 않으니까요. 사실 더 일이 커지더라도 신이 크게 동요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각오하지 않은 것이 아닌지라. 각오하지 않았더라면 절연장도 받지 않았을 것인데요.”
“이 낭관. 그대는 노인을 대신할 내 약점이 아니냐. 그대가 그리 자처하였지 않아.”
“예……?”
“나는 약점을 놓는 방법을 모르는 자다.”
그리 말하며, 산이 강의 허리춤에 팔을 꿰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창졸지간에 몸이 맞닿게 되었으므로, 강이 헛숨을 집어삼키고 산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미리 말을 해 주지 않았던가. 나는 약점을 놓을 줄 모른다고 말이야. 그래서…… 내 약점을 자처한 그 시간부터 그대는 각오해야 했지.”
“…….”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어. 나는 같은 실수를 두 번 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는 채윤직을 끝내 지켜 내지 못하고 창천성으로 전송해야 했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컴컴한 눈빛으로 읊조리듯 말하는 산을 보며, 강은 어쩌면 산이 자신에게서 채윤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산은 그를 중경으로 데려가려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채윤직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질 않았던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잘못 길을 들어섰다가는 스스로를 다치게 할 것이 자명하므로, 강은 그러한 산의 미래가 퍽 걱정이 되었다.
‘어차피 어찌 되든 나는 시간만 채우고 돌아가면 되지만…….’
돌아가면 된다. 강이 그토록 의연할 수 있는 이유였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자신에 대하여 어떤 소문이 돌더라도, 자신이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곳에 있는 동안 채윤직이 그토록 그리던 주군을 아들인 제가 대신하여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는 산이 자신에게 주는 총애에 대하여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폐하. 신은 괜찮습니다.”
“무엇이?”
“어떤 모욕을 겪든 간에요. 목숨만 붙어 있으면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제가 가진 것으로 폐하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강이 덤덤하게 말을 늘어놓자, 산은 조금 고개를 뒤로 빼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기는 하는가 싶었다. 뜻만 두고 들으면 마치 충신처럼도, 그리고 애정이 깊은 연인처럼도 들리는 고로 산은 꽤 기분이 미묘해졌다. 이 낭관은 그런 자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세상만사에 귀찮음을 느끼지만, 늘 의연하게 대처하곤 하는 단단한 자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며, 굽힐 때는 굽힐 줄 안다.
그렇다고 해서 처세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제게 올 손해들을 알아서 축소할 줄 알기도 하였으니 여러 가지로 산에게는 꽤 마음에 드는 이였다.
그래서 강이 황상의 총자였다.
“귀여운 소리를 하는군. 그대는 이만 궁내청으로 돌아가라.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지.”
“……예.”
“퇴청하거든 다시 희건궁으로 오라. 그대는 편액도 써야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그림도 그려 주고 글씨도 써 주기로 하지 않았어.”
“이제 심기가 불편하시지 않은 것 같은데, 그림도 글씨도 써야겠습니까?”
“어허,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참이냐.”
산이 먼저 침상을 벗어나 기지개를 켜고는 멀뚱히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은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서 가 보라는 듯한 시선에, 강이 의관을 정제한 뒤 절을 올리고는 침전을 빠져나갔다.
‘오늘은 참 이상했지.’
평소에도 산이 그리 이상한 소리만 잔뜩 늘어놓기는 했지만,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뭐랄까, 조금…….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강은 고개를 잠시 기울였지만, 이내 상념을 떨쳐 버리고 희건궁을 빠져나왔다. 태중태부의 일이 있자마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려 갔으니 관원들이 많이 불안할 터였다. 우선 안심시키는 말도 해 주고, 왜 불려갔느냐 물으면 무어라 해야 할지 변명거리도 생각해 두기로 했다. 강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폐하, 어찌 태후께 날을 받기로 하신 일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태후가 지적했던 대로 새 야장의를 대령한 소문성이 옷 시중을 들며 넌지시 물었다. 산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이 낭관이 놀라지 않겠느냐.”
“……폐하께서는 지존이시니,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폐하의 것인데 어찌 그런 걱정을 하시는지요.”
“내명부는 작은 난세이니, 짐이 첩지를 준다는 것은 그 난세로 들어오라고 하는 뜻임을 영오한 이 낭관이 어찌 모를까.”
산은 그리 말하며 의자에 주저앉아 몸을 깊게 기댔다. 소문성은 어찌 대꾸할 바를 모르고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만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라.”
*
“이 낭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래. 응?”
궁내청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관원들이 강을 둘러쌌다. 각오한 일이기는 했어도 이 더운 날씨에 치대니 불편하여, 강이 적당히 팔을 휘둘러 붙어오는 사람들을 떼어 내고는 청내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 앞으로 모였다. 강은 그만 머쓱해져서 미간을 긁었다.
“그……. 태중태부가 폐하께 망언을 해서, 이 때문에 폐하께서 몹시 진노하신 모양입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네. 대관절 태중태부가 무어라 한 것인가?”
그 내용을 제 입으로 말해도 되는 걸까. 강은 잠시 망설였다. 조정이라는 곳은 참으로 애매하여, 수많은 신료들의 앞에서 공언을 하는 자리이기도 하면서 그 자리에 서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 내용이 오리무중이기도 하였다. 소문이야 금세 퍼질 것 같기는 하지만, 태중태부가 무어라 지껄였는지까지는 상세히 돌지는 않겠다 싶었다. 강은 눈썹을 역팔자로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 그래서 폐하께서는 어찌 하고 계신데……? 자네는 왜 불려 갔는가. 응?”
“폐하께서는 이제 진노를 가라앉히셨습니다. 어, 그리고 전…….”
강이 한 박자 쉬는 사이에 수십 개의 눈알이 그를 향해 굴렀다.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관자놀이에 땀이 쪼륵 흐르는 것을 닦으며 강이 대충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이 일과는 상관없이 사사로이 부르신 것이라서요.”
이 일과 상관이 없기는. 태감이 황상 눈 돌아가는 것을 보자마자 애타게 강을 찾았으니, 그 다급한 꼴을 보았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훤히 드러나는 거짓이었다. 하지만 강으로서는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딜 감히 황상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느니, 채윤직과 제가 관련이 있어서 그랬다느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겠는가. 하지만 관원들은 그의 대답이 영 부족하였는지 손을 휘휘 저으며 더욱 긴밀히 물었다.
“말해 보게. 우리 입 무거워.”
퍽이나. 강은 코웃음을 칠 뻔하였다가 가까스로 참아 내었다. 무엇을 어찌 말할까. 그 어떤 변명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어허, 자리로 돌아가 일들 안 하고!”
그때 강을 도운 것은 복야였다.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강이 난처해지자 목청을 틔우고 나서주니 천군만마가 따로 없다. 복야가 얼굴을 찡그리고 각자 퍼지라는 듯 팔을 젓자, 관원들이 입맛을 다시며 흩어졌다. 겨우 살아난 기분이라 강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복야는 냉수 한 사발을 강에게 권하며 어깨를 몇 번 툭툭 두드려 주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꼴이 영 안되었던 모양이었다.
“소 공공.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한숨 돌리는가 하였더니 갑자기 문 앞에서 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은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겨우 희건궁에서 풀려나 궁내청으로 복귀하였더니, 왜 또 태감이 저를 찾으러 온 것인가. 강은 당황하여 조용히 소문성에게 다가갔다.
“태감 어른. 또 어쩐 일이십니까?”
“응? 자네 말고. 폐하께서 복야를 찾으신다네.”
강은 그만 민망해지고 말았다. 여태 궁내청에 태감이 올 때면 늘 강을 찾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으레 그렇다는 듯 반응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궁내청에 하달할 일이 있었다면 강이 이곳으로 복귀하기 전에 전할 일이지 무얼 일을 두 번 하는가. 괜히 심술이 나는 것도 같았다.
복야는 강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소문성을 쫓아 궁내청을 나섰다. 황상을 대면한 일은 복야에게는 한 번도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태감을 보내 명을 내리실 뿐, 직접 불러 보신 일은 없었다. 궁내청이 희건궁과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마주칠 기회가 없던지라 먼발치서 가마가 지나가는 모습만 보곤 하였다. 복야는 긴장이 되어 손에 찬 식은땀을 옷자락에 닦았다. 앞서서 희건궁으로 향하던 소문성이 그 모습을 잠시 돌아보더니, 작게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나쁜 일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아, 그렇습니까?”
“예.”
“낮에 조정에서 큰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 그런가, 조금 떨립니다. 한 번도 폐하를 뵌 적이 없어서요.”
“임관을 받으실 때에도 폐하를 뵙지 못하셨습니까?”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너그러운 분이라 그 일로 복야께 해가 가지는 않을 겁니다.”
너그러운 분은 무슨. 소문성은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거짓말을 하였으니 그래도 침이라도 바르자는 심보였다. 하지만 복야가 안 좋은 일로 불려가는 게 아니었으니, 아무리 성격 사나우신 황상이라지만 복야에게 겁을 주지는 않겠다 싶었다.
“폐하, 궁내청 복야 입시이옵니다.”
─들라.
집무실은 아까의 그 난장판이 언제 있었던고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부서진 것들은 똑같은 물건으로 그대로 대체해 두었기 때문에 산이 아꼈다던 벼루를 제하고는 달라진 바가 없었다. 물론 복야야 집무실에 들어와 보는 것도 처음이니 어찌 알겠느냐마는, 그 역시도 산이 집무실에서 물건을 때려 부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은 고로 흔적도 남지 않은 청결한 집무실을 저도 모르게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자.’
복야는 머리를 조아린 채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까마득히 멀리 있는 황상을 향해 절을 올렸다.
“궁내청 복야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일어나라.”
젊은 음성이 복야의 귓전에 울렸다. 복야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지척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 같군.”
“존안을 뵙게 되어 광영이옵니다.”
“광영이랄 것까지야. 가까이 오라. 그대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송구하옵니다.”
복야가 손을 앞에 모은 채로 몇 걸음 더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턱을 괸 채로 벼루에 붓을 개어 놓은 산이 고개를 들어 비로소 복야를 바라보았다. 행동거지가 답답스러워 참을 수가 없겠는 고로, 산이 혀를 쯧 차며 말하였다.
“같은 궁내청 관원 아니랄까 봐 이 낭관과 하는 행동이 똑같군. 더 가까이 오라.”
“……소, 송구하옵니다.”
황상의 입에서 이 낭관의 이야기가 나오니 복야는 괜히 더 걱정이 되었다. 아까 강이 황상에게 불려가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모르겠지만, 못마땅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꽤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혹시 이강 때문에 황상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면, 그 영향이 복야에게까지 미칠 수도 있는 일이고……. 물론 이강이 그리 물색없는 자는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황상 앞에 선지라 별생각이 다 들었다. 복야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는 발을 멈추었다.
“자미연 동쪽에 여선궁 말이야.”
“예, 폐하.”
주인 없는 궁이 황상의 입에 올랐다. 여선궁은 금궐이 지어졌을 당시부터 희건궁과 가장 가까이 있는 궁이었는데, 한 번도 주인을 맞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무슨 조화인지, 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쓸고 닦게 하였고 꽃이 죽으면 새 꽃을 심고, 문풍지에 구멍이 뚫리면 새로 바르는 등 관리를 하는 고로 복야는 늘 그곳이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궁금했던 참이었다.
소문에는 산이 신불을 부정하는 고로, 하늘의 노염을 사 희건궁과 가장 가까운 여선궁이 음기가 탱천하다고도 하였다. 터도 나쁘고 기운도 좋지 못한 고로, 귀신이 나온다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나기를 꺼리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갈 정도라고 하였다. 허나 실제로 보았다는 사람은 없고 보았다는 사람을 아는 사람만 가득하였다.
“여선궁이 오랫동안 주인이 없는지라. 썰렁하고 보기 나쁘니 안에 들인 것들을 모두 새것으로 바꿔라.”
“새것으로 말씀이십니까?”
“가장 좋은 것으로.”
“황명 받,”
“아니. 짐이 직접 고르겠다.”
황상이 직접 궁에 들일 것들을 엄선하겠다니. 이는 가장 총애하시는 희비가 처음 명화궁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도 없던 일이었다. 대관절 그 궁에 누가 들어가기에 황상이 이리 신경을 쓰는가. 저주받은 궁과 황상의 손길이 닿은 집기는 대관절 무슨 조화인가.
궁내청은 내명부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귀가 밝았다. 궁의 하인들이 물건을 받으러 올 때에 중얼거리며 하는 소리에도 관원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곤 하였기 때문이다. 최상품은 황상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후궁에게만 허락되었다. 만일 총애를 받지 못하는 후궁이 총궁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졌다더는 소문이 돌았다가는 태감들이 와서 어찌나 경을 치는지, 눈을 부라리고 집중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지를 못하는 것이다.
만일 새로운 상전이 들어온다면, 또 그 권력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하므로 복야는 저도 모르게 어전에서 한숨을 쉴 뻔하였다.
“폐하, 대례복도 지어야 합니다.”
곁에 서 있던 소문성이 조용히 가 아뢰니, 황상이 잊은 것을 떠올렸는지 쥐고 있던 장죽으로 화로를 댕댕 쳤다. 그 소리에 반쯤 정신이 혼미해져 있던 복야가 부르르 정신을 차리며 눈을 부릅떴다.
“대례복은……. 음, 날짜가 잡힌 뒤에 만들어도 늦지 않다.”
“폐하, 대례복은 궁내청에 여분이 있사옵니다.”
“그것들은 안 된다. 맞지 않아.”
“예……. 하오시면, 먼저 여선궁의 일부터 처리하겠습니다.”
“여선궁 정원은 이 그림처럼 꾸며라.”
산은 탁상 위에 그림을 올려놓았다. 복야가 두 손을 뻗어 그림을 집어 올리고 이를 눈에 담았다. 그림이 보통 수려한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시선이 빼앗기고 말았다. 먹으로만 그린 것인데 어찌 이리도 생기가 넘치는가. 복야가 저도 모르게 나뭇가지 위에 손을 뻗었다가 자신이 채신머리없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밑으로 내렸다.
“왜,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훼손하지 말고 고이 갖고 있다가, 쓰임이 다하면 짐에게 도로 가져와라. 귀한 것이니 말이야.”
그리고 황상은 이만 복야를 물러가라 하였다. 다시 한번 절을 올린 뒤 희건궁을 나선 복야는 손에 들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새 후궁이 책봉될 모양이다.’
보통 새 후궁이 책봉될 때에는 태후가 궁을 정하고, 복야를 불러 새 사람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심히 다르다. 황상이 친히 신경을 써 주는 그이는 누구일까. 소문을 들은 바가 없어 복야는 고개를 기울였다.
*
“마마. 이대로 두실 겁니까?”
한편, 경헌궁에서 산이 떠난 후에 나란히 축객을 당한 비빈들이 명화궁에 모였다. 그녀들은 이제 태중태부의 일을 모두 잊고 이강에 대한 근심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태후를 동원하여 겨우 집안을 살려놓았더니, 그 태후가 다른 후궁을 황상에게 들이밀어 준 꼴이 된지라 골치가 다 아팠다. 이강이 그리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천한 것이 첩지를 받도록 두실 것입니까, 마마.”
창빈이 아까부터 지금까지 말이 없는 희비를 채근하였다. 그녀는 산달을 석 달 남겨 두고 점점 커져 가는 배 위에 손을 얹어 놓은 채로 그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탈했을 것이다. 북양에서 올라오기가 무섭게 비보들을 쉬지 않고 전해 들었을 터이니.
“마마!”
“본궁이 생각이 많으니 그만 물러가라.”
“……마마, 이런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굳건히 하셔야지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실 이곳에 모인 세 사람 중 꽁무니에 가장 불이 붙은 것은 창빈이었다. 희비의 상궁이 강의 뺨을 친 일은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 고려할 바가 못 된다손 치더라도 창빈은 아니질 않은가. 괜히 책을 잡아 자미연에 드나드는 낭관을 벌하려다 황상에게 밉보인 것은 이미 금궐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단속을 시킨 고로, 망령되게 입에 올리는 자가 없으니 이는 공공연한 비밀로 부쳐졌다는 점인데, 그럼 무엇하나. 어차피 황상은 다 알고 있는데.
성귀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창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귀인은 이강에게 밉보인 일은 없었다. 오히려 유밀과를 전해 황상과 더 시간을 가질 것을 종용한 고로, 황상도 이를 기꺼이 여기심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강이 성귀인의 마음에 찬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만일을 위하여 인상을 좋게 남겨 둔 것에 불과하였고, 가능하다면 싹을 잘라 처리해 버리고 싶은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태후께서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내명부가 이리도 복작거리는데 어찌 새로운 후궁을 들이라는 말씀을……. 폐하께서 춘추가 이립이 넘으셨는데 아직 후사 하나 없으십니다. 지금 희비 마마 복중 아기씨가 유일한데 응당 후계 생산에 집중을 하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수태를 못 하는 남총이 웬 말이랍니까!”
이 땅 위에 세워졌다 스러진 수많은 나라의 황제들이 처첩을 50명도 넘게 거느렸던 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지만, 이 점에서는 산은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내명부에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지금 희비와 경쟁하는 것도 힘든데, 더 깊은 총애를 받는 이가 내명부에 들어온다는 것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입을 조심해라, 창빈. 아랫것들이 다 듣는다.”
“들으라지요! 소첩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자가 금궐 내에 없을 것입니다. 집안을 움직여 조정의 반대라도,”
창빈은 그렇게까지 말하고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집안을 동원하였다가 낭패를 보고 겨우 수습한 지 한 식경도 아니 지났다. 성귀인은 그 모습에 한숨을 지었다. 저리 성급하고 생각이 없어서야 어찌 후일을 도모할까. 순진하긴 하여도 그런 점에서는 희비가 더 나았다. 마음에 음험한 구석이 적어 창빈처럼 제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가 어려워 그렇지, 지금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이강의 등장으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이강을 죽이자고 하여도 고개를 끄덕일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희비 마마. 폐하의 비호가 있어 지금 이강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발언권이 세어지기 전에 후궁들을 모아 단합을 하기는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새로 짓고 있는 곳을 제하자면 금궐에 빈 궁이 없으니, 분명 다른 궁에 함께 거하게 될 것인데……. 어디인지 예상하기 어려우나 같이 궁을 쓰게 될 후궁이 이강을 견제해야 합니다.”
“빈 궁이 왜 없느냐. 여선궁이 있는데.”
성귀인의 말에 창빈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하지만 희비의 생각은 달랐다. 설마 여선궁일까.
“여선궁은 아닐 것이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여선궁은 그 무시무시한 소문과는 달리 자연 풍광이 아름다웠다. 후원은 넓었지만, 궁문을 나서면 바로 앞이 자미연이고 그 뒤편에는 소화원이 있었다. 봄에는 봄꽃 냄새, 여름에는 새가 싱그러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가을에는 풍요로우며 겨울에는 매화가 아름답게 핀다.
그래서 희비가 처음 황상에게 시집을 오던 날, 여선궁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채로 여선궁을 주십사 청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황상이 여선궁은 쓰지 않으니 아니 된다 못을 박은 고로, 두 번째로 희건궁에서 가까운 명화궁에서 살게 된 것이다.
나중 들으니 여선궁에 귀신이 들렸다고도 하였고, 터가 좋지 않아 궁을 짓고 그 기를 막게 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희비는 여선궁에 제 발로 들어가겠다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태후와 비빈들 앞에서 총자라 못을 박은 이강에게 그 불길한 궁을 내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희비는 고개를 저었다.
“주인이 없는 궁에 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주인을 다른 궁으로 보내고 그 궁을 이강에게 내리실지도 모르는 일이지.”
“…….”
그 말에 성귀인과 창빈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굴욕은 절대로 맛보고 싶지 않았다. 후궁은 셋이 더 있었고, 그들의 품계가 소의 둘에 상재가 하나이니 이곳에 모인 비빈들에 비해 존귀하지 못하다. 아마 궁을 비우게 된다면 그녀들 중 하나가 희생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여겼다.
“본래 폐하께서 진노하시면 희비 마마가 늘 달래 주고는 하셨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이강이…….”
“본궁이 회임을 하여 폐하께서 배려하신 것이겠지.”
‘글쎄…….’
창빈이 맞받아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삼키며 슬며시 웃었다.
“본궁은 오늘 북양에서 올라와 몹시 피곤하다.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라. 쉬어야겠어.”
“……예, 마마. 하오시면 이강에 대한 것은,”
“이강! 그놈의 이강! 이강 이야기 좀 그만할 수 없느냐. 천한 낭관 따위를 본궁이 계속 생각하고 고민해야겠느냐!”
그림을 잘 그려 황상의 총애를 얻은 희비는 이강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희비는 그것으로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민하였고, 슬퍼하였으며 고통받았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있음을 그간 느끼기는 하였으나, 오늘처럼 직접 확인받은 것은 너무도 애달픈 일이었다.
오늘 명화궁에 황상이 납신다고 하였으니, 밤에 다시 긴히 대화를 나누면 모든 오해가 풀릴 것이다. 지금은 내명부의 주인이 없는 고로, 황상은 늘 가장 존귀한 희비와 대소사를 논하곤 하였지 않은가. 적어도 이강에게 어떤 품계를 줄 것인지 정도는 희비의 의견에 따라줄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그만 가라. 물러가란 말이, 윽……!”
희비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갑자기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앞으로 고꾸라트렸다. 희비는 단단한 호갑투를 모두 빼어 바닥에 던져 버리고 한 팔로 용종이 머무는 배를 감싸 안았다. 곁을 지키고 섰던 상궁이 대경실색하여 희비의 팔을 붙잡았고, 창빈과 성귀인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마마, 희비 마마! 어찌 그러시옵니까!”
“배가 아파……. 배가, 흐윽…….”
“태의를 불러와라! 린아! 당장 태의를 불러와!”
“폐하! 폐하!”
희비가 갑자기 배를 붙잡고 쓰러졌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금궐 안을 뒤흔들었다. 소문성은 상궁에게 귀엣말로 그 상황을 전해 듣고 집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산은 그때 제 손으로 잘라내었던 야장의를 가만 바라보며 장죽을 물고 있었는데, 물색없이 뛰어 들어온 소문성 때문에 고요가 다 깨진 고로 불편한 기색을 하고 홱 쏘아보았다.
“무슨 소란이냐.”
“크, 큰일이옵니다.”
“무슨 큰일.”
“명화궁이 배를 잡고 쓰러졌다고 하옵니다.”
“아이는 어떻다던.”
“……다행히 가까이에 태의가 있어 바로 진맥을 하였는데, 아기씨에게는 영향이 없고 그저 명화궁이 오랜 시간 움직인 데다 칠정울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사옵니다.”
“별일 아니구나.”
산은 잠시 바깥을 내다보며 시간을 가늠하였다. 곧 궁내청에서 퇴청할 시각이 다 되긴 하였는데, 명화궁에 내명부의 모든 일원들이 모여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아니 가 보기에도 난감하였다.
“궁내청으로 가서 이 낭관에게 금일은…….”
“오지 말라고 할까요?”
“아니, 됐다. 명화궁으로 가자.”
“그럼 이 낭관이 곧 희건궁으로 올 텐데요.”
“낭관이 짐을 기다리는 것이 네 보기에는 이상한 일이냐.”
“……예?”
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뒷짐을 지었다.
“희비는 짐의 총궁인데 몸이 아프면 아니 되지. 배 속에 아이까지 있는 몸이니 짐이 가서 보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 폐하.”
지극히 맞는 말이었으나, 소문성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대관절 갑자기 왜 말을 바꾸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태감 된 도리로 따져 묻는 것은 아니 될 일인지라 그저 잠자코 황상이 가마에 오르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황제 폐하 납시오!”
명화궁에 다다르자, 그 앞은 온갖 궁에서 나온 하인들로 꽉 차 있었다. 소문성이 외치는 소리에 모든 궁인들이 길을 트며 고개를 조아렸다. 산은 본 체도 않고 그곳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섰다. 상궁이 더운물이 담긴 대야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다가와 황상의 앞에 내보이니, 산이 소문성에게 장죽을 넘기며 대야에 손을 씻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모든 비빈들이 예를 갖추었으나, 산은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고 침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희비가 겨우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됐다. 그만 누워라.”
“……신첩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폐하. 폐하께는 아뢰지 말라 그리 일렀는데 아랫것들이…….”
“태의는 어디 있느냐.”
“황제 폐하를,”
“시끄럽다. 무능한 것이 예만 갖춘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찌 희비가 이러는지 소상히 말하라.”
소문성은 태의를 다그치는 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다. 그리 별일이 아니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총애가 다 떠난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이제는 어찌 이러실까. 자꾸 이 낭관이 눈에 밟혔다. 지금쯤 주인 없는 희건궁 앞에 서 있겠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황상의 굄을 받는 것이 진실로 홍복일까. 어쩌면 필부와 만나 평생 서로 의지하며 해로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폐하께서는 지금 명화궁으로 납시었습니다.”
차설, 퇴청한 뒤 약속대로 희건궁으로 향한 강은 상궁의 말을 듣고 잠시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산이 퇴청하고 나서 바로 희건궁으로 오라고 한지라 그리하였더니 자리에 아니 계신단다. 어찌해야 할 바를 알 수 없어 강은 잠시 망설였다. 계속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돌아갔다가 부르심이 있으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가.
“폐하께서 불러오셨다면 기다리시지요.”
상궁이 말을 덧붙이자, 강은 역시 그것이 도리인가 싶어 미간을 긁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너희들은 상전을 어찌 모셨기에 혼절까지 하는 것이냐.”
“폐하, 죽여주시옵소서.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산이 다그치자, 상궁과 장채윤이 어전에 엎드리며 읍소하였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침궁은 비빈들의 땀 닦는 소리를 제하면 아무런 소음도 나지 않았다.
“신첩은 괜찮사옵니다, 폐하. 진노를 거두소서.”
희비가 산의 팔을 가녀린 손으로 붙잡으며 말하니, 산이 허공에 팔을 휘저으며 물러갈 것을 명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궁인들이 뒷걸음질 쳐 물러났고, 산은 신경질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희비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북양에서 마지막 봤을 때보다 수척해지기는 하였다. 이 여름날 마차를 타고 왔다고 한들 그 먼 거리를 움직이는 것이 회임을 한 몸으로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게 고집을 부려 행행에 따라나서질 말았어야지. 그러니 중경에 오자마자 여러 변고를 겪는 것이다. 어리석다. 산은 혀를 한 번 차며 희비의 마른 뺨을 쓰다듬었다.
“짐이 보기엔 하나도 괜찮지 않다.”
“……신첩은 어찌 되든 상관이 없사오나, 복중의 아기가 가장 걱정이옵니다. 무탈하다고 하니 천만다행이지만, 신첩이 조심했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질 못하여 존안을 뵐 면목이 없사옵니다.”
희비가 어수 위에 제 손을 겹치며 말하자, 창빈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요망한 계집. 까짓 회임 하였다고 갖은 유세 다 떠는구나. 한 번 아픈 것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다 덮게 생겼다.’
창빈의 아비야 태중태부와 사이가 좋았던 것뿐이지만, 희비는 태중태부가 그 망언을 하도록 종용하지 않았던가. 모두가 아는 일을 산이 모를 리도 없거니와, 희비가 그리 제 친정 챙기는 꼴이 얄밉기도 할 것이다. 내심 이강에게 성총이 쏠린 김에 이대로 외면받기를 바랐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황상이 다정하게 희비를 다루어 주니, 이를 바라보고 있기가 영 불편하고 좀이 쑤셨다. 부럽다는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질투가 나고 또 화가 나기도 했다.
‘나도 5년 동안 황상을 모셨는데 어찌 수태 한 번 하지 못했는가…….’
희비의 배 속 아이가 건강하게 나오게 된다면 더욱 큰일일 것이다. 사내가 제 아이가 생겼다는데 어찌 기껍지 않을까. 번번이 희비를 지키는 무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 배가 많이 커져서 신첩도 더욱 만사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것 보셔요.”
희비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내리자 옷 아래로 볼록 솟은 배가 드러났다. 희비는 산의 손을 붙잡고 그 위에 올려 두며,
“……건강한 사내아이였으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하였다. 일종의 굳히기였다. 황후가 없는 지금 가장 권세 높은 승상의 딸인 희비가 황자를 낳으면 응당 황후로 책봉하라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아니, 없을 것이어도 승상이 그리 만들 것이다. 산은 그 배를 몇 번 쓰다듬더니, 낮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래. 황자를 낳으면 짐이 너를 귀비로 봉해 주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창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 불편한 기색으로 황상의 말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조용히 상궁이 창빈의 곁으로 와 귓가에 손을 대었다. 은밀히 할 말이 있는 줄로 알고 창빈이 고개를 끄덕이니 상궁이,
“이 낭관이 희건궁 앞에서 반 시진째 폐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희건궁 앞이라. 일개 낭관이 희건궁에 드러내 놓고 드나드는 것도 꼴 보기 싫은 참인데, 이리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뻗대는 것처럼 보였다. 희비는 대충 해 두고 빨리 제게로 와 달라며 성총을 믿고 시위하는 것도 같아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아무리 산이 이강을 총애한다고 할지라도 희비만은 못한 모양이었다.
“폐하, 금일 폐하께서 몹시 공사가 다망하셨는지라 신첩이 탕전에 준비를 해 두라 일렀사옵니다.”
하지만 희비도 물러날 때를 알았다. 너무 황상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또 언제 질려 떠나려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는 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배가 불러 해산을 할 때까지는 시침을 들지 못하는 고로, 그동안에는 후궁들 중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도록 고루 시중을 들게 하여야 나중이 편했다. 그래서 하필 이때 이강이 나타난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기도 했다. 당분간은 어리광을 부리기보다는 황상을 기껍게 만드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기로 마음먹으며, 희비가 소문성에게 눈짓했다.
“폐하, 탕전으로 뫼실까요.”
“오냐, 가자. 짐이 오늘 조금 피로하여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희비가 미령한 중에도 짐을 신경 쓰는구나.”
“신첩의 본분이옵니다, 폐하.”
“그만 비빈들을 물리고 쉬어라, 희비. 또 오마.”
“폐하를 배웅합니다.”
궁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마에 다다라, 산이 지쳤다는 듯 소문성에게 장죽을 건네받으며 앉았다. 탕전으로 행차하신다는 말과 함께 가마가 들렸다. 산은 팔걸이에 깊게 몸을 기대며 곁에 선 소문성에게 손짓했다.
“하명하소서, 폐하.”
“이 낭관은?”
“희건궁 앞에서 반 시진이 넘도록 기다리고 있다 하옵니다.”
“탕전으로 오라고 일러라.”
“예, 폐하.”
그 성격에 기다리게 하였다고 심통을 부리며 돌아갈 줄 알았더니, 앉을 데도 없는 곳에서 멍하니 기다리고 섰을 것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적보다 많이 성정이 유해졌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산의 언동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잘 받아 주게 되었으니 이는 강이 포기를 했든 길들여졌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탕전은 희비가 말했던 대로 황상을 모실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더운물이 뜨거운 김을 뿜으며 너른 탕 안에 고여 있었다. 산은 용포를 벗고 야장의를 걸친 채로 그 안에 발을 디뎠다. 수면 위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간혹 들리는 매우 조용한 탕전 안에서 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희비가 저리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으니 태후가 어찌 나올지는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기는 하였다. 어차피 강을 후궁에 들어앉히고 싶은 마음이 탱천한 것은 이 금궐 내에서 오로지 산뿐이었으니 돕는 자가 없을 터였지만…….
“폐하, 이 낭관 입시이옵니다.”
“재게 들라 하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강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산은 저도 모르게 그 심통 가득한 표정을 따라 하였다. 두 손을 곱게 모으고 허리를 굽힌 채로 들어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하고 절을 하는 것이 내내 귀엽다. 가만 보니 강은 심술이 나면 더 예를 갖추고 몽니를 부리는 모양이었다. 산은 일어나라는 소리도 않고 그저 계속 엎드려 있는 강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저 심술 언제까지 속으로 부릴지 한번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강은 일어나지 못한 채로 한참 동안 있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절이 다 무어냐, 하지 말고 재게 가까이 오라 했을 산이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을 두고 조금 불안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조금 들고 산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용안에 웃음이 고인 것을 보고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일어나라는 명을 아니 내리십니까.”
“그대가 언제 내 명에 따랐다고 그래.”
“…….”
“절을 하지 말라고 하여도 그리하는 것을 보면 내 앞에서 시위를 하려는 속셈이렷다.”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오래 기다렸느냐?”
“그것도 아니옵니다. ……아니, 예. 좀 많이 기다렸습니다.”
“가까이 와라, 이 낭관. 볼멘소리는 직접 듣고 달래 주마.”
“볼멘소리가 아니옵니다. 명화궁에, 내명부에 납시는 것은 폐하의 어심에 따른 것인데 어찌 신 따위가 그에 불만을 갖겠습니까.”
“그러니까 가까이 와라. 그리 멀리 있지 말고.”
주절주절 하는 소리가 다 옳으나, 이를 말하는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산이 그저 손짓하니, 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고 지척으로 다가왔다. 몇 걸음 조금 오고 멈출 줄 알았더니 그래도 말귀를 알아듣기는 하는 듯 보였다. 산이 곁에 놓인 휘건으로 손을 닦고 강의 뺨에 손을 얹었다.
“명화궁이 갑자기 혼절을 하였다고 해서 그랬다. 그대는 궁내청에 있으면서도 그런 소문 하나 못 들었느냐.”
“……지, 지금은 괜찮은 것입니까?”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예, 사실……. 신은 폐하께서 또 신을 골탕 먹이려고 하시는 줄 알고,”
“허어, 허면 또 그대가 식언을 하였단 소리군. 볼멘소리도 아니다, 내가 명화궁에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해 놓고서는.”
“……그, 그림을 그려 드리기로 했지요. 어떤 그림을 그릴까요?”
강이 급히 말을 돌리며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으면서 지필묵을 찾는 시늉을 했다. 산이 그 모습을 보고는 크게 웃으며,
“밖에 누가 있느냐. 이 낭관에게 지필묵을 가져다주어라.”
하였다. 강은 그 말에 겨우 또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며 안심하고는 지필묵을 받아 산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물기가 없는 바닥을 골라 종이를 내려놓고 문진으로 고정하였다. 연적을 기울여 벼루에 물을 쪼르륵 따르고는 먹을 갈기 시작하였더니, 산이 몸을 기울여 강이 있는 쪽으로 돌아앉았다.
“금일은 어떤 것을 그릴까요?”
“그대가 좋아하는 꽃.”
“꽃이요?”
“그래, 꽃. 좋아하는 꽃이 없느냐?”
“……딱히 있다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보기 좋은 것은 있습니다.”
“그럼 그것을 그려.”
“예.”
강이 붓을 먹에 적셔 화선지로 가져갔다. 그 뒤로는 한 번도 집중을 흩트리지 않고 늘 그랬던 대로 휙휙 종이 위로 붓을 미끄러트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이하리만큼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제가 씩씩 숨소리를 내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리 숨을 쉬는 것도 꽤 귀엽다. 산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게 뭐냐. 모란?”
“다 그렸으니 보시고 직접 맞혀 보십시오.”
강이 화화점정畵花點睛하며 문진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그림의 양 끝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저 멀리서만 그림을 본 고로, 빨리 제 손에 쥐고 보고 싶은 마음에 산이 손짓했다. 강은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급해져 저도 모르게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그리고,
“어, 어어!”
물기가 가득한 바닥을 한 번 밟았는데, 조금도 예상치 못하였으므로 걸음이 한 번 쑥 미끄러지며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산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는 이미 강이 탕전 안에 그림과 함께 풍덩 빠진 다음이었다.
“하하! 그리 조심성이 없어서야!”
산은 그리 소리치며 놀려 대었지만, 강은 물 위로 올라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산은 강이 빠졌던 곳으로 직접 움직였다.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것을 보면 어떤 이유로든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인 것 같아 건져 주기 위함이었다. 산이 물 아래로 손을 뻗어 강의 팔뚝이지 싶은 곳을 쥐고 끌어 올리니, 강이 하릴없이 그 악력에 끌려 물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찌 안 나오고 그리 있어?”
“……창피해서 그럽니다.”
완전히 젖어 버린 낭관이 목덜미를 새빨갛게 붉히며 조용히 대답했다. 산은 그 모습에 일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강의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떼어 주며 잠시 그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훈훈한 증기에 쏘여 붉게 상기된 뺨에 시선이 먼저 갔고, 눈꺼풀을 비비는 흰 손이 그다음으로 눈에 찼다. 산은 그 손을 붙잡아 내렸다.
“……읏!”
그리고 이번에는 진실로 벌어진 입술이 맞부딪혔고, 이윽고는 혀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강은 너무도 창졸지간의 일이었던지라 속수무책으로 입술을 벌려 주는 신세가 되었으며, 또 제 입안을 희롱하는 그 혀를 받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산은 강의 허리에 팔을 걸치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강은 그 힘에 이끌려가면서도, 이내 호흡이 벅차 달뜬 숨을 뱉었다.
맞닿은 살점이 뜨겁다. 강은 이내 견디지 못하고 산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혀는 거침이 없어서 조금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른 방법으로 들러붙으며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강의 허리를 휘감은 팔이 더욱 단단하게 몸을 끌어당겼다.
“하아…… 읏.”
겨우 떨어졌는가 하여 고개를 뒤로 빼면 다시 산의 얼굴이 다가와 맞부딪혔다. 더는 안면을 물릴 곳이 없어 강은 힘겹게 입을 벌린 채로 산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이 낭관.”
“예……?”
“내가 그림을 자세히 못 보았는데. 그 꽃이 무엇이었느냐?”
강은 정신이 혼미하여 어찌 대답할 줄을 모르고 그저 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디에 홀린 것만 같았다. 저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봉밀에 절여 놓은 듯 너무 달아 죄 썩어 버릴 것같이 들렸다.
“……해당화이옵니다.”
간신히 대답하였더니 황상이 젊은 낭관의 턱 끝, 그리고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강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한 시선에 강이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산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쥐었다. 간지럽다. 아까 귀를 파 주었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소름이 돋아났다.
“폐하, 잠깐…….”
황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이 가리지 않은 곳들을 끈질기게 애무했다. 평생 그런 감각은 처음인지라, 강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밤 같이 있겠다고 했던 것이 이런 의미였던가. 강은 야장의 자락을 세게 움켜쥐고 산과 눈을 마주쳤다.
“이 낭관.”
“……예.”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대답은 잘한다. 산은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그대가 나에게 그려 준 그림이 다 젖어 못 쓰게 되었는데 어쩌지.”
마치 현혹되기라도 한 듯 멍한 눈으로 산을 쳐다보고만 있던 강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것도 나를 놀리는 것일까.’
이제는 예사 놀림으로는 자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기겁을 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것일까. 강은 좀처럼 저 속을 알 수 없어 그저 작게 대답했다.
“……다시 그리겠습니다.”
점점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산이 그 고개를 들게 하고 제 눈을 똑바로 마주치도록 종용하였다.
“오늘은 말고. 명일.”
“……예, 명일. 명일……읏!”
산은 마지막이라는 듯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는,
“내일 퇴청하거든 희건궁으로 와라. 이번에는 기다리게 하지 않으마.”
하고 말하며 강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탕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 그가 소문성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몇 마디 나누는가 싶더니 궁녀들이 들어와 휘건으로 몸을 닦고 옷 시중을 드는 것이 보였다. 강은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가 귓바퀴에서 겉도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 다음에는 다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탕 위로 해당화 그림이 물에 번진 채 그의 앞으로 떠내려왔다.
*
“이 낭관!”
“…….”
“이 낭관!”
“……예, 예?”
강은 복야의 목소리에 질겁하여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장부 좀 달라니까, 어찌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 장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무슨 일이 있다. 아주 큰 일이 있었다. 어제 그렇게 되고 나서, 강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대관절 어떤 이유로 산이 그리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 생각해 보아도, 저리 생각해 보아도 모르겠다. 그저 산의 입술이 닿았던 곳들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도, 억지로 눈을 질끈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더니 어느새 관사 담당관이 징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로 붓을 놀리는 강을 바라보던 복야는 뺨을 긁적였다.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저리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니 캐물을 수도 없는 고로 사무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선궁에 부족한 물자가 무엇인지 보아야 하는데, 담당 태감이 없어서 직접 가서 봐야 할 것 같네.”
“여선궁이요? 처음 듣는 곳입니다.”
“궁내청과 가까이 있는데 한 번도 못 보았나? 하긴……. 불길한 곳이라 발걸음이 많이 끊겼지. 일어나게. 같이 가세.”
강은 예, 하고 작게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궁내청을 나와 복야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강은 계속해서 어제 일을 생각했다. 그저 산이 평소와 같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며 떨쳐 버릴 작정이었지만 강의 사상으로는 도저히 그것은 장난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지라. 아무리 산이 늘 짓궂은 장난을 친다 하더라도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고로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늘도 다시 희건궁으로 오라 하였는데 그때는 어떤 낯으로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라네. 왠지 불길해서 들어가고 싶진 않군…….”
“불길한 곳인데 왜 물자를 파악합니까?”
“폐하께서 그리 명하셨으니까. 원래 여선궁은 주인이 없어도 계속 쓸고 닦고 했어. 귀신이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낮이니 괜찮겠지.”
“그렇군요…….”
과연 여선궁은 주기적으로 관리를 한다는 말처럼 정원에는 한 포기 잡초도 없이 깨끗했다. 안으로 들어가 집기를 쓸어 보아도 먼지 한 점 묻어나지 않았으니, 강은 이곳에 주인이 없다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라고 생각하였다.
내부를 한참 동안 돌아다니며 장부에 표시를 하고 소제되지 않은 곳이 있으면 그 역시 적어 두었다. 한참을 그리 돌아다니고 살펴보아도 복야가 말한 그 풍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귀신이 나온다, 불길하다 하기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한 시진 가까이 그곳을 헤매던 강은 복야가 부르는 소리에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후원 한가운데에 서서 어떤 종이를 크게 펴 들고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복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강의 눈에는 지척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손에 들린 그림이 선연했으므로 그것이 제가 그린 그림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 그림은 무엇입니까?”
“어, 어. 조심히 보게. 귀한 것이라네.”
“예?”
“폐하께서 주신 그림인데, 이 후원을 이렇게 꾸미라고 하시지 않겠나. 뉘가 그린 그림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아름답지?”
“……아, 예.”
강은 일전에 산의 명으로 창천성을 그렸던 일을 떠올렸다. 북양행성에 있던 탕전에서 부름을 받아 그린 그림이었다. 그때 산이 창천성을 오래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이 아쉽다고 하여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곳도 탕전이었던가. 새삼 일을 하느라 잊고 있던 어제 일이 다시 떠올라 강이 헛기침을 한 번 하였다. 자꾸 모든 것에 그 일을 엮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으므로, 강은 괜히 민망해져서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구조는 딱 맞는 것 같은데. 자네 보기엔 어떤가?”
“예, 여선궁의 구조가 창천성과 같습니다.”
“창천성?”
“아, 그……. 제가 창천성 출신이 아닙니까. 이 그림을 보니 창천성을 그린 것 같아서요. 창천성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래?”
창천성이라. 여선궁에 새 후궁이 들어올 참인데 창천성처럼 꾸미라 하였다니. 복야는 머릿속에 창천성 출신의 여인이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아랫것들이 백날 생각해서 무엇 하나.’
어차피 예복을 새로 짓는다고 하셨으니, 곧 침방에서 그이의 치수를 잴 것이다. 그때 슬쩍 은자 몇 냥을 찔러 주고 물으면 알 수 있으므로 굳이 지금부터 궁금할 일은 아니었다.
“아, 그래. 자네 창천성 출신이라고 하였으니 잘 알겠구만. 혹시 여기에 심어진 이 나무가 무엇인지 아는가?”
“벚나무입니다. 그림을 보니 여름 같은데, 여름이라 꽃이 다 진 것 같습니다.”
“그렇군.”
묻는 말에는 살뜰히도 대답을 하였지만, 아직도 강은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오래 보지는 않았으나 이리 집중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꼴을 처음 보는지라 복야는 다소 신경이 쓰였다. 저런 상태라면 어찌 일을 더 하더라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 뻔하니, 이쯤 해 두고 여선궁을 나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복야는 궁문을 향해 몸을 돌리며 강에게 손짓했다.
“돌아가세.”
*
“폐하, 궁내청 복야가 들었나이다.”
“들라 해라.”
궁내청으로 복귀하자마자 황상의 부르심이 있어 복야는 강을 홀로 두고 희건궁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황상은 어제와 다름없이 삐딱한 자세로 앉아 상소문을 읽고 있었는데, 복야가 들어와 앞에 설 때까지 마지막 한 줄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복야가 절을 올리며,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였더니 산이 손을 휘저어 몸을 일으킬 것을 명하며 물었다.
“여선궁에는 가 보았느냐?”
“예, 폐하. 마침 여선궁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그……. 이 낭관과 함께 갔습니다.”
황상이 이 낭관을 특별히 신경 쓴다는 것을 알고 복야가 함께 아뢰니, 산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장죽을 꺼떡거렸다. 대답이 없는 채로 잠시 골몰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산이 짧게 대꾸했다.
“이 낭관은 여선궁에 데려가지 마라.”
“아, 예……. 폐하.”
“가능한 그대 혼자 하도록 하고. 정 다른 사람을 쓰게 되거든 믿을 만한 자를 데려가라. 입이 무거운 사람 말야.”
“새겨듣겠나이다.”
이 낭관은 데려가지 말라니. 창천성처럼 꾸미라고 하였으면서 창천성 출신의 이 낭관보다 더 그 정경을 잘 아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한참 그리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복야는 문득 깨달은 듯 눈을 부릅떴다.
‘이 낭관이다!’
이강의 출신지가 창천성이니 그가 창천성을 그리워하지 않도록 후원을 꾸미는 것이고, 그가 사내이니 책봉되기 전까지는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친히 복야를 불러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였더니 손에 식은땀이 차는 것 같았다.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지 마라.”
마치 속내라도 읽었다는 듯 산이 짧게 말을 덧붙이니, 복야가 깜짝 놀라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폐하.”
“왼쪽에 있는 화단에는 그 그림에 있던 이상한 풀 말고 해당화를 심어라.”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그리고……. 날도 더운데 이 낭관은 많이 데리고 다니지 마라. 짐 같은 것도 나르게 하지 말고. 궁에서 사람을 보내라 하거든 다른 자를 보내.”
“예, 폐하.”
“물러가라. 짐이 조만간 다시 부르겠다.”
“물러가옵니다.”
복야는 다시 궁내청으로 돌아가면서 아까 내내 보았던 강을 떠올렸다. 강은 알고 있는 것일까. 아침부터 내내 삿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은 보았지만, 여선궁에 갈 때도 일말의 내색을 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도 같았는데 말이다.
하기야, 황상도 이 낭관을 데려가지 말라고 하였으니 역시 모르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복야는 한숨을 쉬었다. 내명부는 어찌 조용할 날이 없을까. 이 낭관에 대한 총애가 지극한 것은 온 금궐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이것이 눈으로 보이는 것과 풍문에 그치는 것은 다르다. 남총이라. 내명부 상전들이 어찌 반응할지 눈에 선했다.
차설, 강은 늘 그렇듯 마지막까지 궁내청에 남아 있었다. 관원들이 모두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나면 바로 저도 몸을 일으켜 문단속을 하곤 하였는데, 오늘은 어쩐지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강은 탁상 위에 팔을 개고 엎드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산이 짓궂다.’
금일 내내 생각하건대 그랬다. 이전부터 산이 농을 좋아하는 것을 모르지 않아 늘 받아 주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여태까지는 악작惡作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던 데다, 지존의 몸으로 그리 희롱을 하시는데 무어라 나무랄 처지도 못 되어 그저 볼멘소리를 내는 것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작야는 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채윤직의 아들이라 중경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으며, 지금은 파문당하여 가문도 없는 처지이기에 이곳에서 강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면 그것은 단연 산뿐이었다. 그 사실을 산이 알아 일부러 저를 제멋대로 휘두르려 한다면 강은 그를 좋게 보았던 얕은 과거를 청산해야 할 것이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그리 재미있나.’
어제 그리 입맞춤을 받고 나서 제가 멍청한 얼굴을 했던 것 같기는 하였으나, 이는 그 누구라도 그리 했을 것이다. 그 일은 매우 기이한 찰나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벌어졌으며 산은 과연 능수능란한 몸짓으로 강을 희롱하였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퍽 밀치면 밀칠 수도 있었겠으나, 그런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을 만큼 너무도 급작스러웠다. 이제는 그저 말 몇 마디로 강을 자극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 부러 그리했을 테지.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지나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제가 언제부터 이런 것을 다 신경 썼는지도 이제는 가늠하기가 어려워졌다. 매사에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걱정도 없었다. 이 붉은 먼지 휘날리는 풍진 세상은 그저 잠시 다니러온 곳에 불과했고, 그러므로 그 어떤 난리도 환란도 강을 놀라게 할 수 없었다. 창천성의 일에도 그랬을진대 하물며 지금에 있어서랴.
그런데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산을 만나고부터 자신이 이상하게 변해 버린 것 같았다. 걱정이 많아졌고, 그로 인하여 나날이 번잡스럽고 고되었다.
‘산이 원망스럽다.’
“이 낭관!”
어느새 발걸음이 희건궁 앞에 멈추었는지, 바로 앞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 마치 발작하듯 고개를 쳐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태감 어른.”
“폐하를 뵈러 왔는가?”
“예.”
“아뢰어 주겠네.”
강이 집무실로 들어갔을 즈음, 산은 마지막 상소문을 덮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상궁이 다기에 차를 따른 뒤 강이 들어온 것을 보고 이만 물러갔다. 그리하여, 집무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강은 화로에 개어 둔 장죽을 잡는 산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앞에 모은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내 심기일전하고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리 와라. 이 낭관.”
“예.”
몇 발자국 조금 걷고는 이내 멈춘다.
산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강은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다소 그 생각을 읽기가 어려웠다. 얼굴은 늘 그렇듯 조금 상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리 혼란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 조금 붉은 기가 도는 흰 낯도 날이 더워 그런 것이라 치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작야 탕전에서 보인 만큼 그리 귀여운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든지라.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역시 이래야 이강이지 싶기도 하였다.
“이 낭관은 고개를 들라.”
황상의 음성이 들리자, 강은 고개를 조금 들고 짧게 대꾸했다.
“들었습니다.”
“그대 얼굴이 아니 보이는데.”
“……조금 더 들었습니다.”
나비 눈알만큼 들어 놓고는 다 들었답시고 그리 서 있는 것을 보면 작일 있었던 일을 크게 신경 쓰는 것이 뻔한지라. 산이 장죽을 붙잡고 꺼떡거리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더.”
“…….”
“그리고 더 가까이 와.”
“……신이 풍한이 들어 폐하께 가까이 가면 옮으실까 저어됩니다. 이만큼만 떨어져 있겠습니다.”
산이 그 모습을 가만 보더니 아무런 말없이 장죽으로 화로를 댕댕 두드렸다. 소문성을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기에 강이 다소 당황하여 고개를 더 들었더니 산이 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낭관이 풍한에 들었다. 태의를 데려와라.”
“예, 폐하.”
“몸이 아프면 못 쓰지. 풍한은 오래 두면 지병이 된다.”
“신은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내가 안 괜찮다. 어서 태의를 들라 해라.”
“……송구하오나 태의는 부르지 마소서.”
강의 뒤에 서 있던 소문성이 입 모양으로, “부르지 말까요?” 하고 물으니 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고로, 소문성 역시 잠시 눈치를 보다가 이내 재게 그 자리를 빠져나와 버렸다.
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늘 좋게 넘어갔던 것이 화가 되었던가.
‘산은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부아가 치미는 듯하였다.
“폐하. 신이 거짓을 고하였습니다.”
“무엇이 거짓인데?”
“풍한도, 기침도 아닙니다.”
“어찌 거짓을 고했지?”
“……신이 그릇이 작아서 그렇습니다.”
“이 낭관의 그릇이 어찌 작으냐.”
강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내 고개를 들며 말하였다.
“폐하. 신은 백치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제 아비를 보아 신을 기꺼이 여기시고, 또 미천한 재주를 높이 사 주시는 것에 대하여서는 늘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 신의 무례한 언동들에 대해서도 어여삐 보아 넘겨주시는 점에 대해서도 늘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상체를 조금 뒤로 빼었다. 그리고 마저 이야기를 하라는 듯 턱짓하였다.
“폐하께서 악작을 즐기시는 것에 감히 망언을 하는 것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벌을 주신다면 받겠습니다. 하지만 작야 있었던 일은 아무리 장난이라고 하신들 정도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신이 폐하께 황은을 입은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신은 폐하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강이 말을 마치자, 산은 크게 반응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장죽을 입에 물었다. 노하셨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새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태까지 강이 산에게 할 말, 못 할 말 가려 하지는 않았어도 농을 하는 것이 싫다고 고한 일이 없었기에 걱정이 아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저를 내친다고 하더라도 그런 혼란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이 낭관.”
산이 짙은 남령초 연기를 내뱉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내가 농을 한 다음 농이라 말하지 않은 일이 있더냐.”
강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그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내가 언제 작야 있었던 일을 두고 농이라 하였지?”
맞부딪힌 눈빛이 날카롭다. 부릅뜬 눈도 아니거니와 그저 늘 그렇듯 내다보는 것 같은 시선일 뿐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사나워 강은 저도 모르게 팔을 쓸었다.
‘농이 아니면?’
농이 아니라는 대답이 차마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강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만일 산이 진실로 저를 탐하여 그리하였다면 이리 안면을 굳히고 그 무례함을 논한 일은 결국 성심을 짓밟은 일이 되므로, 강은 더욱 생각이 복잡해졌다. 대저 그가 늘 웃는 낯으로 “농이야” 하고 말했던 것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무릇 짐의 승은을 입은 자들은 그 일을 두고 불쾌히 여기지 않는데, 그대는 시종 특이하구나.”
“폐하, 신은…….”
산을 다시 대면하기까지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강은 작야의 일이 그저 산의 악작일 뿐이라는 식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는 여러모로 헤아려 생각해 보건대 가장 그럴싸하기도 하였거니와, 이렇게 결정을 하고 나면 강은 더는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지존이 아니라고 답을 주었으니 아닌 것이다. 그러니 결국 강은 성심을 괄시한 꼴이 되었으므로, 죄를 청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리 온, 이 낭관. 그런 얼굴은 하지 말고.”
강은 말없이 몸을 움직였다. 탁상을 지나 산의 앞으로 다가가니, 강이 있는 쪽으로 황상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여전히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젊은 낭관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걱정이라 그런 얼굴을 하지?”
“……신은,”
천인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귀천할 것이다. 채윤직의 수양아들이기도 하였다. 다른 것은 다 제쳐 놓더라도 천인이라는 사실은 덮어 놓고 황상의 총애를 받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성질이었다. 만일 산이 이를 알게 되면 어찌 될 것인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둘째 치고, 결국 채윤직이 이를 숨긴 것이 들통나 지금 받는 신뢰를 다 잃을지도 몰랐다. 산의 신불에 대한 혐오는 채윤직에 대한 경애를 뛰어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신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진실로 악작을 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리 말하며 강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산은 상체를 조금 뒤로 빼며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강이 저리 매사 진지하니 장난을 치기 좋았던 것이라, 그것을 스스로 자각이나 하였는가 싶었다. 다소 기대했던 반응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강답다 여겼으므로 산은 이에 그리 언짢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리 이상한 발상은 아니야. 내가 늘 그대에게 장난을 친 것은 사실이니 그럴 수 있지. 또 무엇이 그대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냐.”
처음 산을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었을 때 했던 각오들이 앞으로 3년을 살아감에 있어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갖은 오명을 뒤집어쓰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하는 일들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였고 과연 그리되었으며 이것이 채윤직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절연장을 받았다.
또한 고작 3년 동안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을 대저 상정하였고, 물론 그 안에는 죽음이 있기는 하였지만 결코 죽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남은 시간 도망자로 여생을 보내게 되더라도 말이다.
도망칠까. 황상의 총애가 두렵다고 말할까. 이곳에서 내가 과연 인두겁을 쓰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사뢸까. 천인의 귀천에의 열망은 마치 본능과도 같아서, 이곳에 남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지극하였다. 황상의 총애를 받으면 그의 비호는 받을 수 있겠으나, 홍진이든 하늘세상에든 만일이라는 가능성은 늘 확신을 갖는 것에 대한 큰 방해물이었다. 이곳에서 3년 동안 살아남지 못하면 돌아갈 수 없다.
“그대는 내가 싫은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일언지하에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산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화롭게 살던 저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시끌벅적한 곳에 내던져 버렸지만, 그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중경으로 온 다음부터는 한 번도 지루함을 느낀 일이 없었고, 그 변화가 버겁기는 하였으나 산과 함께 있으면 저도 즐거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홍진에 난 뒤로 채윤직과 채영, 그리고 최 행수를 제하면 처음으로 긴밀히 가진 인간관계였으며 그들을 모두 포함하더라도 이렇게 누군가와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기도 처음이었다. 그는 어떤 것으로도 자극받을 줄 몰랐던 강을 쉼 없이 건드렸고, 강은 전에 없이 당황하기도 놀라기도 그리고 화를 내기도 하며 탄력적으로 반응했다. 일전처럼 누가 찌르면 찔린 대로, 누가 밀치면 밀쳐진 대로 있지 않게 되었단 말이다.
‘내가 천인이 아니었다면 고민 없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
구체적인 감정을 두고 논할 단계는 아니나, 확실한 것은 강 역시 산의 사람을 잡아끌고 친밀감을 들게 하는 매력을 느꼈다는 점이었다. 강은 조금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신은 폐하를 모시기에는 출신이 미천한지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내놓을 수 있는 변명이 이것뿐이었다. 산과의 관계는 지금 정도가 가장 적당했다. 더 나아갔다가는 이후 어떠한 일의 화근이 될지도 몰랐다. 그 일이 무엇이라고는 명확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산은 그 말에 강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출신이 어찌 미천할까. 그대는 내가 성을 직접 붙여 주었는데.”
하지만 산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강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황상의 신민臣民이 아니었다. 창의 천하에 발을 디디고 살기는 하지만 이는 그저 육신일 뿐으로, 결국 비롯된 곳은 하늘이니 산의 권력이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채윤직의 아들은 달랐다. 이 인두겁은 결국 채윤직의 자식 된 몸이므로, 지존의 마음이 결국에는 그 귀추를 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창의 풀뿌리 한 포기까지도 모두 황상의 것이니 산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종내에는 그의 뜻대로 될 것임을 강은 모르지 않았다.
“……폐하, 어찌 감히 신이 거부하겠습니까.”
차라리 마음대로 취해 버리면 될 것을, 산은 강의 입에서 저를 안아도 된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참인 모양이었다. 강은 체념 어린 얼굴로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탕전에서처럼, 다시 산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 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산을 따라나선 것을, 또 어쩌면 스스로가 천인임을 원망했다.
이 상황을 만든 것을 후회하거나, 내지는 이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 일을 후회하는 셈이었는데 지금의 강으로서는 둘 중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다만 어떤 것이든 강이 이 홍진세상에서 후회라는 감정을 지니게 된 것이 처음이라는 점이 매우 괄목할 만하였다.
“흣.”
벌어진 입으로 들어온 혀가 능란하게 안을 헤매고 지났다. 고개가 점점 뒤로 젖혀졌고, 산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다잡으려 노력하는데도 잘 안 되었다. 강이 제 바지춤을 세게 붙잡았을 때, 비로소 산이 입술을 옅게 떼어 내고 대답하였다.
“이 낭관. 그 어떤 것이 두려워 저어하느냐. 내가 그대에게 주려는 것은 영화의 길이며, 원한다 하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또, 노력한다 하여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낭관은 그러한 영화의 길을 원하지 않는다.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산과 더욱 긴밀한 관계가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다. 강이 욕심이 없다는 것을 산이 모르지 않을 것인데도,
“……폐하께서 신을 귀여워해 주시니 조금만 더 방자하게 굴겠습니다. 신이 아뢰는 것에 진노치 마시고 여전히 귀엽게 여겨 주십시오.”
강이 체념이 섞인 말투로 말하였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하였다. 산은 그 말에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대는 가끔 나를 헷갈리게 하지. 본래 타고난 성품이 담대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욕심이 없기에 담대할 수 있는 것인지. 감히 나와 거래를 하려 들다니.”
하지만 강의 입장에서는 조건이라도 내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늘과 관련한 것에는 모조리 학을 떼는 그가 강이 천인이라는 사실을 혹여나 알게 되었을 때 벌어질 일들을 잠깐 머릿속에 그려 보았더니 소름이 돋았다. 배신감에 치를 떨 수도 있고, 강이 자신을 기만하였다 여길 수도 있다. 자신이 이리도 강을 아꼈던 것들도 다 잊고 천인이라는 사실 자체에 분개하여 마치 태중태부에게 그랬던 것처럼 할 수도 있다.
“그래, 말해 보렴.”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을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
“차라리 불구로 만들지언정 신이 무슨 잘못을 하여도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대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그대를 어찌 죽인단 말이냐.”
“……세상일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그 어떤 모함으로도 그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죽이지 말아 주세요.”
“일어나라, 이 낭관. 그런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내가 어찌 그대를 죽이려 들겠느냐.”
산이 여전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강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그것을 맞잡고 일어섰다. 하지만 사실을 고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그저 미간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그냥 약속이라도 받아 두려고 그럽니다. 폐하께서 절 죽이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시면, 다른 사람들이 절 죽이려 드는 것에 대해서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어찌할 것인데?”
“폐하께 고자질을 하든지……. 뭐, 아무튼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대는 참으로 이상한 자야. 그대의 신분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그대가 나와 운우지락을 나눈 줄 알고 있으니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그대가 그러한 풍문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였던 것이 조금 풀리기는 하겠군.”
이제 거짓된 풍문이 아닌 사실이 될 터이니 말이다. 강은 짓궂게 말하는 산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저 낯이 참으로 이상하지. 표정이 없는 자도 아니고, 잘 웃고 잘 일그러지는 얼굴인데도 통 속을 알 수 없어 대처하기 어렵다. 그래서 늘 말려들고 말았다.
결국 내딛고 마는구나. 산이 어찌 천하를 얻었는지 알겠다. 사람을 저리 잘 홀리니 아무리 무심한 강이라 하여도 결국에는 알면서도 휘말리고 말았다. 먼 나중 돌이켜 보았을 때 이날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강 역시 그것을 알았으나 그 손길을 쳐 내지 못하고 품 안에 이끌려 들어갔다.
“약조하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죽이지 않겠어.”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은이 망극하기는. 괜한 걱정을 하는 그대가 이상하다. 아, 오늘 편액을 쓰는 것은 그만두자. 도저히 그걸 보고 있을 마음이 안 난다.”
“예, 자꾸 편액 쓰는 일이 뒤로 밀려 걱정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요. 허면 신은 이만 물러,”
“어딜 간다 그래. 그대는 무릎베개를 해 주어야지. 원래 매일 해 주었던 것이잖아. 그대와 내가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 단지,”
산이 잠시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이 그를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황상이 그의 허리끈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짐이 그대의 다른 재주를 보게 되었다는 것만이 달라졌을 뿐이야.”
그 말에 강이 잠시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안색을 바꿨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던 산이 이내 장죽으로 화로를 두드리자, 소문성이 조용히 집무실 안으로 들었다. 강은 내심, 바깥에서 대화하는 소리를 다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괜히 소문성을 보기가 창피하여 고개를 외로 틀었다. 산이 흘끗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금일은 패를 들이지 말라고 할까요?”
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하였다. 소문성이 황상의 곁을 지키는 도태감인 고로 차차 익숙해져야 할 일이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산은 몹시 익숙한 일인 듯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산은 강이 소문성을 지극히 의식하는 걸 알아차리고, 부러 그에게 어질러진 탁상을 정리할 것을 명하고는 강의 손목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에 어울리는 센 악력이었지만, 부끄럼 많은 낭관은 일순 당황하여 조심스레 산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안 했다.”
“……예?”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찌 그리 긴장을 하고 있단 말이야.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
자각하지 못하였으나 제가 꽤 부끄러움이 많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산의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자주 보인 것 같아 강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낯짝 두껍고 뻔뻔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언제부터 이리 내외를 했던가.
그저 산의 발뒤꿈치만 보고 붙잡힌 채 걸었더니, 어느새 침전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처음 들어가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제는 못 들어갈 것도 없게 되었는데 발걸음이 절로 잦아들었다. 그를 붙잡고 앞서 걸어가던 산은 어느샌가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강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침전에 발을 내딛지 못하고 회랑에 가만히 선 낭관을 돌아보았다.
“……읏!”
팔이 쑥 당겨진다 싶더니, 어느새 몸이 산의 코앞까지 닿아 있었다. 강이 고개를 잠시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다시 떨구려 하였다. 하지만 산은 이를 그저 보아 넘길 생각이 없었던지 두 손으로 그의 양 뺨을 쥐고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아, 정신이 혼미하다. 이제 벌써 세 번째였고,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강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혀가 구강을 희롱할 새, 몸이 흐물흐물 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강은 겨우 정신을 다잡으려 산의 팔을 붙잡았다. 다시금 숨이 가빠졌다. 하지만 산은 인정을 보아 주지 않았으므로, 강은 점점 뒤로 밀려 제가 뒷걸음질 치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점점 뒤로 젖히고 있었다.
툭, 하고 허벅지 뒤에 무언가 닿았다. 그리고 그것이 침상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무렵에는 그대로 뒤로 밀려 주저앉는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산은 놓아주지를 않았다. 오히려 완전히 이성을 빼어 놓겠다는 듯 더욱 긴밀히 나붙으며 강을 더 몰아 대었다.
“……신을 죽이려고 하시는 것이지요.”
산이 곧 입술을 조금 떼어 내며 눈을 마주치자 강은 겨우 숨을 골랐다. 산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 귓바퀴를 엄지로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죽이지 않기로 방금 전 약조를 하였지 않아.”
“숨이 막혀서, 앗…….”
물기 어린 살덩이가 귓바퀴를 쓸고 지나갔다. 척추를 타고 생경한 소름이 솟아오르는 듯하였으므로, 강이 몸을 크게 움츠렸다. 귓가에서 머무는 혀가 움직일 때마다 더욱 소리가 증폭되는 것 같아 허벅지 위에 늘어트린 손을 꽉 쥐었다. 발가락이 절로 안으로 곱았다.
“폐하, 신이…… 신이,”
“그대가?”
“신이…… 소리에 약한 모양입니다. 귀는 그만, 읏……!”
어수가 불쑥 옷자락을 헤쳤다. 강은 그제야 아까 산이 제 허리끈을 풀었으며, 이를 알지 못한 채로 집무실에서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소문성이 이를 두고 채신없다 흉을 볼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수치스러워 강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 머릿속에 갖은 생각이 지나는 동안 관복이 팔꿈치까지 내려와 어느새 내의가 드러나 있었다.
“저, 여쭐 것이 있는데…….”
“무엇인데?”
산이 문득 손을 멈추며 대꾸하니, 강이 미간을 긁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신만 벗습니까?”
“뭐?”
진실로 궁금하여 그리 물었더니, 산이 기이하게 안면 근육을 움직이며 강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크게 파안대소했다. 강은 제가 못 물을 것을 여쭈었는가 하여 돌이켜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따져 보아도 딱히 못 할 말 같지도 않았는지라 그저 의아한 얼굴로 산을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황상은 발갛게 물들인 총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실로 요망한 자다. 감히 짐의 옷을 벗기려 들다니.”
“……송구,”
“송구할 건 없다. 허면 그대가 옷 벗는 것을 도와다오.”
산이 침상 옆에 놓인 야장의를 향하여 턱짓하며 대답했다. 제 눈앞에 황상이 손을 내밀자, 낭관이 맞잡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용포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 끈을 잡아당겼다. 부드럽게 매듭이 풀려나며 앞섶이 벌어졌다. 강이 그것을 뒤로 젖혀 양 소매를 빼내고 뒤로 가 완전히 벗겨 내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둬라.”
“어찌 용포를 막 다룹니까.”
“상관없느니.”
결국 어디에 둘지도 알지 못하여 이르신 대로 바닥에 내려 두고는 다시 앞으로 와 내의에 손을 대었다. 산이 그렇게 옷시중을 들고 있는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고개는 들지 못하고 침방 궁인이나 되는 것처럼 매듭에만 완전히 시선을 고정하였다. 그리고 방금 그리했던 것과 같이 산의 등 뒤로 가 내의를 벗겨내었다.
“…….”
그리고 잠시 하던 것을 멈추었다. 강은 일전에 북양행성에서 처음 이 등을 본 일이 있었다. 그때에는 딱하다 생각을 하였을 뿐 관심이 없었던 고로 어찌 존귀하신 황상의 몸에 이런 흉이 다 졌는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강은 저도 모르게 허공에 늘어트린 팔을 들어 그곳에 손을 대었다.
“어찌 그러느냐, 이 낭관.”
“신이 무례하게도 폐하의 옥체에 진 흉을 보아 그렇습니다.”
“등? 아, 갑옷을 입어도 소용없어 그런다. 잘 벼린 칼로 베면 베이지. 왜, 흉하여 이런 몸을 한 사내에게는 안기고 싶지 않은 게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대의 말대로 내가 사사로운 욕망으로 수많은 목숨을 없애며 이렇게 왔는데, 흉터를 보면 그것이 자꾸 떠오르지 않겠느냐.”
강은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일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산을 보면 그런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연상되지 않는지라 거부감이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쩌면 이유가 있어 그리했을 것이라 스스로에게 산을 변호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쯤 되었으면 황상이 시침을 들라 하는 명에 거절치 못하였던 것도 당연하였다 싶었다. 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잊어 주십시오. 신은 모두 잊었습니다.”
“어찌 그것을 잊었는데.”
“폐하와 함께 있으면 다 아득히 멀게 느껴져서 그럽니다.”
강이 덤덤히 대답하였더니, 황상이 몸을 돌려 낭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히 기꺼운 용안으로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대는 그렇게 가끔 툭툭 뱉는 말이 나를 계속해서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
잠시 멈추었던 황상의 손길이 다시 강에게 내뻗어졌다. 창졸간에 내의가 벗겨졌고, 또 잠시 눈을 깜빡한 사이에 침상에 뉘어져 산의 밑에 가만 누운 상태가 되었다. 돗가비가 나타나 그리했다고 하여도 믿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찰나였다. 아, 그저 제정신이라도 있고 없고 다 놓고 편해지고만 싶었다.
산이 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나직이 음성을 내었다.
“이 낭관.”
“……예.”
“이 낭관.”
“아, 읏! 예…… 폐하, 흣!”
목덜미가 덥고 간지럽다고 느꼈을 무렵 유두 끝에 낯선 손길이 닿았다. 강이 목구멍을 뚫고 나오는 신음을 차마 참지를 못하고 더운 숨과 함께 뱉어 내었다. 검지 끝이 유두 끝을 누르며 사방으로 굴려 대니, 강이 그만 허리를 들썩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난생처음이었다. 한 번도 타인의 손길이 그곳에 닿은 일이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처음으로 맞이한 손길이 심히 요사스러운 고로, 강이 그만 참지를 못하고 마치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내며 황상의 어깨를 쥐었다.
산은 목덜미에서 다시 턱 끝에 입을 맞추고, 총자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감은 눈꺼풀이 조금 경련하고 있었고, 눈꼬리에는 눈물이지 싶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산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면 더 괴롭히고 싶어진다. 늘 시큰둥했던 낭관이 이렇게 두 뺨을 곱게 붉히며 음란한 신음을 내는 모습은 영원히 기억해두고 싶을 정도로 애처롭고 가여웠다.
“어찌 눈물을 보이느냐.”
산이 손끝으로 유두를 부드럽게 쓸며 물었다. 산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강은 시시때때로 가슴팍을 튕기며 발끝을 오므렸다. 스스로 숨이 가빠진 것을 느끼지도 못한 듯, 어떻게든 답을 이어 나가려 입술을 우물댔다.
“으응, 흣. 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는 것은 아니었다. 울 이유도 없었다. 그저 지극히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쾌감 때문일 것이다. 해연관 기녀가 준 황색 소설에서 본 적 있다. 그러나 이내는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강 역시 몹시 당황하여 급히 손을 들어 닦아내니 산이 그 손에 깍지를 껴 잡고 다시 물었다.
“허면.”
“신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아무래도 내가 아직 순진하기만 한 육신을 멋대로 다루었던 모양이야.”
쾌락에 의한 눈물이라는 것은 알지만, 저렇게 벌겋게 달아오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강제로 안는 기분이기까지 했다. 산은 그의 귓가에 입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
“나는 그대를 아끼니 그대가 싫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
강은 살며시 눈을 뜨고 산을 올려다보았다. 싫었던 것일까. 그리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으되 어느 정도의 두려움과 생경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강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작금은 격동의 시기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황상의 품에 몸을 내주기로 하였지만 아직은 채비가 덜 되었던 모양이었다.
산은 땀이 맺힌 강의 이마를 손으로 한 번 쓸어 넘겨 주고는 손등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졌다.
“폐하…….”
“무리하지 말라, 이 낭관. 날은 많단다. 날더러 그것 하나 참지 못하는 사내라고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산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얇은 살갗에 닿는 그의 숨결이 간지럽다. 강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산은 한쪽 팔을 침상에 개며 강에게 짧게 몇 번 입 맞추었다. 쪽,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외설스럽다. 산이 온전히 무게를 실어 올라탄 것도 아닌데도, 그 탄탄한 몸의 형태가 전신에 느껴지는 듯했다.
“……송구하옵니다.”
기어들어 가는 낭관의 목소리에 산이 설핏 웃었다. 이번은 봐주겠다는 듯, 그는 강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팔을 내뻗어 그 어깨를 끌어안으며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자자.”
강이 일순 당황하여 제가 황상의 어심을 상하게 한 줄로 알고,
“폐하,”
하고 부르니 산이 다시금 대꾸하였다.
“그만 자자고 했을 텐데.”
“……예.”
강은 복잡한 눈으로 잠시 산을 올려다보았으나, 그가 눈꺼풀을 닫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몸에 힘을 풀었다. 황상이 노여운 것일까, 그리 잠시 생각하였으나 그렇다 하여도 어쩔 수는 없었다. 강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태후를 뵙습니다.”
“어서 앉으시오, 황상.”
“밤새 강녕하셨습니까.”
“이 사람은 늘 같지요. 황상은 밤새 강녕하셨습니까.”
“짐도 늘 같습니다.”
산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여 찻잔을 들어 올리자, 태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날이 밝았을 즈음 경사방의 기록을 보았더니 황상이 패를 뒤집지 않고 총자를 침전으로 들이셨다고 하였다. 이강을 품으신 일을 숨길 요량이었다면 기록지 말라 하였을 것인데, 황상이 기록을 윤허한 것을 보면 대외적으로 알릴 작정인 모양이라 생각한 것이 바로 일각 전이었다. 태후는 산이 빨리 이강에게 첩지를 내릴 날을 내놓으라 말없이 압박을 넣으려는 줄도 모른다 여겼다.
“황상.”
“말씀하십시오, 모후.”
“황상이 한시라도 빨리 이강에게 첩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이 사람이 보기에는 때가 이르지 않은가 싶습니다.”
산은 그 대답을 예상한 듯이 한 치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지금 희비가 칠정울결로 칭병을 하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은 여러모로 후사를 생각하였을 때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지금 황실이 자손이 귀한 고로 더욱 태후가 희비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것임은 자명하였고, 산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후, 짐은 급하지 않습니다.”
“이강에게는 여선궁을 내릴 참입니까. 벌써부터 궁내청 관리가 드나든다고 하던데.”
“빠르십니다.”
“내명부는 이 사람 소관이니 응당 알아야지요. 이 사람은 상재 정도가 가장 알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 더 신경을 쓰실 요량이라면 봉호를 황상이 친히 붙여 주시면 좋겠지요.”
“늦는 것도 백번 양보하였는데 겨우 상재라니……. 모후, 짐은 수지에 맞지 않는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황상. 성도 없는 천한 자가 아닙니까. 집안도 없는 자를 바로 상재로 봉하는 것도 과분합니다.”
산은 그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웃으며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짐이 성을 주었는데 어찌 천하다 하십니까. 봉호는 의宜로 하고, 소의의 첩지를 쓰십시오.”
“황상.”
“짐은 이만 물러갑니다. 쉬십시오.”
산이 짧게 인사를 내려놓고는 예를 갖추고 경헌궁을 빠져나가 버렸다. 태후는 다시금 이마를 짚으며 입안말로 경전 구절을 외며 마음을 다스렸다. 황상이 한 번도 내명부의 품계를 두고 관심을 둔 일이 없었으므로 이리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성심이 투철하다는 뜻인지라. 억지로 꺾으려 들면 귀인, 빈의 위까지 들먹거릴 것이 뻔하여 좀처럼 다른 수가 없었다.
“마마, 태의를 불러올까요.”
“됐다.”
“폐하께서 그자를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니 마마께서 선처를 베푸소서.”
“그자가 창천성 출신이라 하였지. 채윤직을 만나러 창천성에 갔다가 데려왔다고.”
“예, 마마.”
“황상이 북양에서 창천성으로 향하였을 때 조정에서 잡음이 날 것을 생각 못 하셨을 리가 없는데, 그리 드러내 놓고 사람까지 데려왔으니 그 속을 모르겠구나. 큰일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럴 것이옵니다, 마마. 심려를 거두소서.”
“이 낭관은?”
정전에서 조회가 끝나고 희건궁 집무실에 마악 들어섰을 즈음이었다. 산은 상소문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문성이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궁내청으로 등청하였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산은 잠시 미명이 밝아오던 좀 전의 새벽을 떠올렸다. 산이 깨어났을 때, 강은 이미 일어난 지 조금 되었는지 말갛게 눈을 뜨고 어지러이 시선을 굴리고 있었다. 산이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키자 강이 재빨리 일어나며,
─기침하셨습니까, 폐하.
하고 아침 인사를 건넸다. 산이 그 모습을 보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더니, 강이 어색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에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었더니 낭관이 괜히 시선을 피하였다. 곧이어 궁인들이 소세할 물을 들이고 이내 새 용포를 침전으로 들여왔다. 강이 멀뚱히 서 보고 있으니 산이 괜히 장난이 치고 싶어,
─짐의 시중은 이 낭관이 들 것이니 모두 물러가라.
하며 궁인들을 모두 물렸더니 낭관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의대를 정제해 드리는 법을 제대로 배운 일이 없어 절차가 번다한 용포를 뒤적이며 한참을 헤매질 않았던가. 그 모습을 잠자코 구경하였더니 이 낭관이 이내,
─그리 짓궂게 보고 계시지만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 또 보기에 기꺼워 입을 맞추었다. 그리 한참을 또 품에 안고 물고 빨고 하였더니 삼추三秋가 여일각如一刻이라. 정전 회의에는 조금 늦었지만, 근래 있어 가장 즐거웠던 아침이 아니었던가. 산이 그것을 떠올리며 웃자, 괜히 소문성도 덩달아 입가에 미소를 달고는 은근히 다가가 여쭈었다.
“경사방에 일러 이 낭관에게 방중을 배우게 할까요.”
본래 황상의 시침을 들기 전에는 심신을 정제하며, 한 번도 관계를 가진 일이 없는 이인지 확인을 하고 방중을 배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강은 어느 하나 하지 않았으니 법도에 어긋났다. 소문성이야 산이 그런 절차를 그리 중시하지 않음을 알았으나, 그래도 지키는 것이 기본이니 황상의 의중을 알기는 하여야 했다.
“일없다. 이 낭관은 그런 삿된 것을 하나 모르는 것이 더 어여쁘다.”
산이 그리 일축하며 붓을 들었다. 그런 것이야 나중에 가르쳐도 상관없지. 앞으로 날은 많았다.
*
“계주차가 없다니!”
한편, 강은 등청한 이래로 오랜만에 일다운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관원이 뜬금없이 말에서 떨어져 염좌가 생긴 고로, 황상의 총애를 받는 이 낭관이 급히 그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쓰임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강은 드디어 밥값을 하겠거니 하며 붓을 잡은 참이다. 한데, 어찌 혜소의의 태감이 이리 억지를 쓰는지 모를 일이다.
“장부를 보니 어제 희비 마마의 처소에서 남은 것을 모두 가져가셨습니다.”
“허어, 혜소의 마마의 조부께서 곧 칠순이시라 계주차를 드리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네. 그리 인색하게 굴지 말고 내어 주게.”
계주차는 산이 즐겨 마시면서 그 가치가 올라간 차인데, 계주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이 땅에 몇 되지 않는 고로 매우 귀했다. 일부에서는 계주차 한 줌이 마치 화폐처럼 쓰인다고 할 정도였다. 황실에서나 소용되는 계주차를 칠순 선물로 받으면 그 영화로움을 내세우기 좋을 것이라. 그리하여 혜소의가 조부에게 계주차를 선물하게 되었다며 궁내청에 일찍부터 말해 두었던 참이 아니던가.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정말 없습니다.”
강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없는 것은 진실로 없는 것이다. 어찌 내명부 사람들은 저리 속이 비틀려 있어, 없는 것을 진실로 없다고 하여도 숨겨 두고 아니 내어 주는 것이라 생각을 하는 걸까. 이런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야 까짓 차 한 묶음 내어 주는 것이 낭관의 입장에서 더 편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나. 강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태감이 결국,
“알겠네! 내 마마께 확실히 전하지.”
하며 사라져 버렸다. 태감이 궁내청 밖으로 나가자, 곁에 서 있던 낭관 하나가 한참을 고민하는 듯 입술을 잡아 뜯다가 이내는 다가왔다. 그리고 강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혜소의가 성격이 얼마나 나쁜데 그걸 안 내줬나?”
“예?”
“혜소의 말이야. 성격이 얼마나 나쁜데. 계주차는 저기 뒤에 창고로 가면 여분이 좀 있다네.”
“……예? 있습니까? 하지만 장부에는,”
“장부에는 없다고 기록해야 괜히 달라고 하는 이들에게 정말로 없다 내보일 수 있지 않은가. 여기 없다고 적혀 있는 것들도 뒤 창고로 가면 웬만한 게 다 있지.”
“그렇습니까?”
궁내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세세한 사정에 밝을 리가 없었다. 강은 일순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긁으며 괜히 장부를 넘겨다보았다. 뭐, 궁내청의 내밀한 사정들이니 혜소의가 이 사실을 알고 강이 일부러 안 내주었다 오해하게 되는 일은 없겠다 싶은 고로 신경 쓰지 않기로 하였다.
“없다고 하더니, 이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일이 발생하기까지는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분명히 인진궁으로 길을 잡는 것을 보기까지 하였던 태감이 계주차 한 묶음을 쥐고 궁내청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강의 앞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장부를 옮겨 적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강은 탁상이 흔들리자 그만 붓이 크게 어긋나고 말았던지라 짜증스럽게 태감을 올려다보았다.
“뭡니까, 지금?”
“뭡니까? 이렇게 계주차를 숨겨 놓고 장부에는 없다고 기록을 했겠다. 감히 일개 낭관 따위가 소의 마마를 능멸하려 든 것이 아니라면 어찌 있는데도 내어 주질 않았던 것인가!”
소의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 그의 말마따나 일개 낭관인 강이 능멸하려 들겠는가. 태감이 난리를 피우자, 모든 궁내청 관원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강은 낭패다 싶어 잠시 할 말을 고르다가,
“장부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고, 강 역시 이렇게 넘어갈 수 있을까 내심 생각했으므로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그 얼굴에도 놀라지 않았다.
“마마께서 자네를 보자고 하시니 따라나서게.”
그저 보자고 했겠는가. 그 오만방자한 낭관 놈을 당장 내 앞에 끌고 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겠지. 곁에 서 있던 낭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강의 입장으로는 상전이 오라 하면 아니 갈 수 없는 노릇이라 결국 일어서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 낭관을 향한 폐하의 총애가 지극한데, 혜소의가 이 낭관을 어찌하려고 하나.’
이를 지켜보고 있던 복야는 내심 생각했다. 황상이 일찍이 복야를 불러 강에게는 짐도 나르게 하지 말고, 날이 더우니 다른 궁에 보내지도 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보다 더한 고초를 겪게 생기지 않았는가. 아무래도 혜소의의 태감이 풍문 듣는 귀가 어두워 자신이 팔뚝 억세게 붙잡고 끌고 가는 저 낭관이 황상의 총자임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이를 희건궁에 가서 고해야 하는 것일까. 복야는 한참을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하였다. 이 낭관은 총명하니 알아서 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알아서 따라가겠으니 놓으십시오.”
한편, 어느새 제 팔뚝을 꽉 틀어쥐고 인진궁으로 향하는 태감을 강이 홱 뿌리쳤다. 날도 더운데 치대니 짜증 나고 귀찮았다. 태감이 그 강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며,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마마께 매라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하며 혀를 쯧쯧 차니 강이 한숨을 쉬었다. 일전에 자미연에서 창빈에게 차를 내어 주지 않은 것을 상궁이 일러바쳐 매를 맞을 뻔한 일이 있었다. 그때 산이 나타나 창빈의 패악을 막고 강의 편을 들어 주었기에 손끝 하나 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낮이고, 한낮부터 산이 인진궁에 나타날 리가 없으니 이번에는 그냥 맞거나, 아니면 비굴하게 비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고민해서 무얼 하나. 어떻게든 되겠지.’
아무리 후궁이라 하여도 소의인데, 죽이기야 하겠는가. 강은 그리 생각하며 궁문을 넘었다.
“네 이놈!”
궁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찻잔이 날아와 강의 발치에서 팍 깨졌다. 환영이 너무 거창하여 강이 파편에서 한 걸음 옆으로 떨어져 예를 갖추었다.
“소의 마마를 뵙습니다.”
“네가 감히 본궁을 능멸해?”
“……마마, 신이 어찌 그러겠습니까. 오해를 푸십시오.”
“오해? 하! 가뜩이나 요즘 별 흉흉한 소문 때문에 잠을 설치는 지경인데 천한 낭관 때문에 기분을 다 상하는구나. 어찌 계주차를 숨겼지? 희비가 시킨 게야?!”
희비와의 첫 만남이 그리 잘 풀리지는 않았어도, 강은 그녀에게 그리 나쁜 감정은 없었기에 혜소의의 말에 웃음만 날 뿐이었다. 희비는 적어도 이렇게 체통 없이 굴지는 않았다. 까짓 차 한 묶음이 무어라고 고귀하신 마마께서 일개 낭관을 불러 일일이 호통을 치신단 말인가.
“아닙니다, 마마. 장부에 실수가 있어 진실로 계주차가 없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지고! 내 너희가 일부러 숨겨두고 품계 높은 후궁들에게만 내어 주는 것을 모를 줄 알고?”
“……마마.”
“끝까지 잘못했다는 소리가 없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여봐라! 저자에게 법도가 무엇인지 알려 주어라!”
또다. 그래도 매를 치라 명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녀가 말하는 법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 싶어 강이 입을 열었다.
“마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허어, 드디어 스스로 죄를 자백하는구나. 죄를 지은 자를 어찌 그냥 보내겠는가. 인진궁의 위엄이 상하였으니 내 너를 벌하여 다시는 궁내청에서 본궁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제기랄…….’
법도 운운하기에 납작 엎드려 사죄를 하였더니, 이제는 죄를 인정하였다고 벌하겠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버텨 볼 걸 그랬다 후회하였을 때, 태감이 강의 무릎 뒤를 걷어차 억지로 무릎을 꿇게 하였다.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미움받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순수히 궁내청의 일로 그리될 줄은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마편으로 저자를 쳐라.”
혜소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하자, 태감이 허리춤에서 마편을 뽑으며 공중에 휘둘렀다.
“그만두지 못할까!”
강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뒤에서 엄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소의가 그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관절 누가 저를 도왔는지 확인하려 강이 뒤를 돌았고, 이내 인진궁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성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귀인 마마를 뵙습니다.”
“혜소의. 어찌 죄 없는 낭관에게 패악을 부리느냐.”
“마마, 그것이 아니라……!”
“아까 전 내 궁인이 궁내청에 갔다가 네 태감이 낭관에게 심하게 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전말을 알아보니 참으로 가관이구나. 그 낭관이 새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뒤 창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인데 어찌 그거 하나를 참지 못하고……. 본궁에게 와 말하였으면 혜인궁에 있는 계주차 까짓 하나 내주었을 것인데 참으로 경솔하구나!”
“마마, 소첩은 그것이 아니오라……!”
“게다가 이 낭관은 폐하를 모시는 귀한 몸인데, 감히 태감 따위가 마편을 휘둘러 상하게 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네 태감을 살아서 볼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성귀인의 말에 혜소의가 질린 얼굴을 하고 강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황상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그 낭관이 이자란 말인가. 한 번도 얼굴을 본 일이 없던 데다, 성총을 받았다면 더는 궁내청에 머물지 않을 것 같아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눈앞이 어지러웠다.
강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성귀인이 하는 소리를 가만 듣기만 하였다. 만일 자신이 맞았더라면, 산이 어찌 반응하였을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만일 몸에 상처가 난 것을 보면 어찌 이리되었느냐 물을 것이고, 강은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다른 변명을 할 터였다. 허면 산은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강이 스스로 진실을 뱉어 낼 때까지 쭉 눈을 감아 줄 터였다. 그래도 약 정도는 발라 주지 않을까.
그쯤 생각하였을 때, 성귀인의 태감이 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시게.”
“……감사합니다.”
강이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자, 성귀인이 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애롭게 말하였다.
“자네는 이제 귀한 몸이 되었으니 이런 궂은일은 하지 말게. 본궁이 폐하께 말씀 올려,”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궁내청에 있지 않으면 앞으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성귀인은 그 말에 일순 고개를 기울였다. 저자는 황상이 저에게 첩지를 주려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질 않은가. 어찌 말씀을 안 하신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먼저 말하는 것도 아니 될 일일 터였다. 성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궁내청으로 돌아가게. 본궁이 혜소의와 나눌 말이 있으니.”
“예, 마마. 허면……. 이만 물러갑니다.”
강이 두 상전에게 반절을 하고 이내는 빠른 걸음으로 인진궁을 빠져나왔다. 구사일생이 따로 없었다. 그리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에 뭉친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아 강이 명치께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희비가 악몽을 꾸었다고?”
차설, 이제나저제나 낭관이 퇴청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던 산은 갑작스러운 소문성의 보고에 안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예, 폐하. 어젯밤부터 악몽을 꾸어, 오늘 오수를 들었을 적에도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고 하옵니다. 아무래도 칠정울결이 심하여 그 때문이 아닐는지요.”
“태의는 무어라 하더냐.”
“명화궁이 회임을 하여 감정 기복이 심해진 고로 그리 악몽을 꾸는 것이라고, 마음을 편히 하고 탕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산은 잠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해가 서산에 걸려 붉은빛을 뿜어내니 이는 곧 강이 궁내청에서 퇴청할 시각이다. 금일은 못 쓰게 되어버린 해당화를 다시 그리기로 약조를 하였으니, 웬만해서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낭관을 품에 안으며 희롱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희비가 저리 투정을 부리니 낭군 된 도리로 아니 가 볼 수도 없었던지라. 희비가 악몽을 꿀 때면 하룻밤 안고 얼러 주면 금세 씻은 듯이 낫고는 했으므로, 산은 조금 번다하다 여겼으나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낭관에게는 오지 말고 쉬라고 해라. 짐이 밤이 깊으면 불러 보겠다고 하고.”
“예, 폐하. 하오시면 명화궁으로 납실 채비를 할까요.”
“짐의 말을 귓등으로 처들었느냐.”
황상이 역정을 내시니 소문성이 급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줄행랑을 놓듯이 집무실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산은 거친 손놀림으로 두루마리를 아무렇게나 개어 놓고는 장죽을 잡았다. 후궁들은 매양 성가시기만 하였다. 아양을 부리고 순종적으로 나긋나긋 구는 것이 가끔 곁에 두기 좋았으나, 이제는 그리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먼저 관심을 희구하며 애정을 찾으면 어찌나 귀찮던지.
하지만 건국 이래 5년, 후사가 없으니 조정이 시끄럽다. 그 늙은이들 입이라도 다물게 하려면 희비가 아이를 낳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산이 돌보아 주어야 했다. 물론 안 그래도 그 집안의 권세가 높은 희비의 아들이 후계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 공주가 좋을 것이다.
우선 공주가 한 번 태어나고 나면 황자를 독촉하는 잔소리도 당분간은 줄어들 것이니, 유자명에게 힘이 실리는 것도 어느 정도 막아 낼 수 있다. 어차피 황상은 젊으니 그 뒤로 다른 태에서 황자를 보게 되면 그로 황태자로 책봉할 생각이었다.
산이 명화궁 앞에서 가마를 내리고 궁문을 넘었을 무렵, 희비는 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손을 씻고 있었다. 황상을 모시기 전에 향기로운 물에 손을 담그면 움직일 때마다 향이 나니, 황상께서 좋아하시지 않았던가. 오래전의 일이지만, 황상께서 자신을 품에 안고 향이 좋다 말씀하시던 것이 떠올라 괜히 양 뺨이 발그레해졌다.
희비는 마지막으로 경대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며 외양을 확인하였다. 회임하기 전에 비하여 조금 살이 찐 듯도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미모가 중요하다 하여도 복중 태아에 비할 것인가.
“얼른 대야를 내가라.”
희비는 상궁에게 그리 명하며 경대를 접었다.
그리고 그때, 산은 명화궁 앞에 가마를 내리고 궁문 안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황제 폐,”
“크게 소리 내지 말라. 절을 하러 나오면 번거롭고 귀찮다.”
황상이 납시었음을 알리려던 소문성을 막아서며 산이 명화궁의 회랑을 디뎠다. 그때, 상궁은 금동 대야를 들고 회랑을 따라 잰걸음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대야가 심히 무거운 고로 한 치 발 앞만 살피며 움직이던 상궁은 어느 순간 눈앞에 사내의 발이 보이는지라,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네 이년!”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반동으로 대야 안에 든 향물이 앞으로 철썩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말았다. 상궁이 대경실색을 하여 고개를 들었더니, 황상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다행히 물이 조금 튀었을 따름이라 젖지는 않았으나, 그 여부는 궁인에게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감히 황상의 앞에 물을 끼얹은 것은 이미 큰 불경이었다.
“폐, 폐하!”
상궁이 물이 낭자한 바닥에 옷 젖는 줄을 모르고 엎드렸다. 어찌나 혼비백산했던지 품 안에서 주머니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산은 그리 관심을 두지 않은 고로, 상궁을 가만 내려다보며 일어나라 말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소문성.”
그러나 그때, 황상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예, 폐하.”
“저 주머니를 주워라.”
산이 물에 젖어 가는 잿빛 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문성은 재게 허리를 숙여 그것에 손을 뻗었다. 집어 올리니 물이 주르륵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소문성이 손가락 끝으로 주머니를 고쳐 쥐었다.
“허어……!”
그리고 이내 크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그 반응에 그 주머니를 바라본 모든 이들이 그만 입을 쩍 벌리고 선지라, 상궁이 당황하여 조금 고개를 들었다가 소문성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보고 이마를 바닥에 세게 찧었다.
“이것은 만卍 자가 아니냐.”
산은 주머니에 금실로 새겨진 만 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신궁이며 사찰을 모두 불태우고 천군과 승병을 모두 모아 멸절한 것이 바로 늙은 상궁의 앞에 선 산이다. 산은 시선을 굴려 그 상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곁에 선 모든 사람들이 황상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어전에서 이런 물건을 지녔다 발각된 자가 없었으므로 어찌 될지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희비가 시집올 적부터 데리고 온 상궁이었고, 또 회임을 한 그녀를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것도 그녀였으니 그 연으로 어찌 넘어갈지도 몰랐다.
상궁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 어느새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을 바닥에 뚝뚝 떨어트리며 벌벌 떨고 있었고, 소문성 역시 아무런 말이 없는 황상을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데려가 죽여라.”
산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짧게 대답하고는 상궁을 지나쳤다. 곁에 서 있던 시위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명을 받잡아 상궁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상궁의 양팔을 붙잡고 명화궁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살려 주십시오, 폐하! 희비 마마!”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상궁의 소리에, 황상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희비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방 밖을 나서려다 그보다 빨리 문지방을 넘은 황상과 마주치고 말았다. 희비가 어찌 된 영문인 줄을 몰라 황상을 그저 올려다보고만 있으니, 산은 그녀의 낯을 쥐며 엄지로 뺨을 몇 번 쓰다듬었다.
“어디서 짐승이 우짖는 소리가 나는구나. 그렇지? 그러니 네가 악몽을 꾸는 게지. 저런 것을 곁에 두고 있었다니 짐의 희비가 많이 놀랐겠구나.”
희비는 떨리는 눈으로 고개가 들어 올려진 채 황상을 바라보았다. 들린 소리로 말미암아 이제는 어쩐 영문인지 알겠다. 상궁이 일찍부터 조용히 신불을 찾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금궐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이를 악물고 끊어 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결국 황상 앞에서 모두 들켜 버린 모양이니, 누구보다 신불에 대한 황상의 혐오를 아는 희비는 어쩔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
두렵다. 너무도 두렵다. 처음 황상을 만났던 그때가 다 무색하다. 같은 사람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그때의 기억이 다 허상이었던 것인가.
희비가 처음 황상을 뵈었던 것이 언제인가. 일전에는 풍문으로 변방 창천성의 영주였던 산의 이름을 들어, 아버지가 촌사람이라며 혀를 차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겨우 희비가 8살 남짓일 무렵이었으니, 그리 기억에는 차지 않았으리라. 그러다 다시 희비의 기억에 산이 침투한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다음이다. 갑자기 시절이 하 수상하여 높이 오르면 매양 저 멀리 산등성이 불타는 것이 보이고, 병사들이 몸에 화살 몇 대를 끌어안은 채로 거멓게 실려 오는 것이 자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던가.
늘 나던 것보다 더욱 커다란 불이 산 전체를 뒤덮던 날, 산이 희비가 살던 오문성에 수하들을 이끌고 찾아왔다. 그는 매우 젊은 사내로, 희비의 오라비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많거나 할 듯싶었는데 그 어리던 소저는 멀리서 산을 보고 넋을 놓고 말았다. 그 사내가 어찌나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던지, 성채 안쪽에 있던 그 엄하신 아버지도 한달음에 달려 나가 무릎을 꿇고 맞이하였다. 아버지는 멀리 기둥 뒤에 숨어 빼꼼 구경하고 있는 어린 희비를 불러 그 사내를 소개해 주었다.
─당신 딸이오?
─예, 주군. 귀엽게 생겼지요.
─당신은 낮도깨비처럼 생겼는데 따님은 천하 미색이로군. 이름이 무엇이오?
─설예, 주군께 네 이름을 말해 보렴.
─……설예예요.
─부끄럼이 많은 아가씨라 내가 계속 붙잡고 있기가 좀 그런데. 한려, 이 애한테 그 옥가락지를 줘. 나중에 이 애가 시집을 갈 적에 내가 죽고 없을까 봐 미리 선물을 주는 거요. 당신과 내 화친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산의 곁에 서 있던 사내가 품에서 아름다운 비단 주머니를 꺼내 어린 희비에게 건네주었다. 아버지는 어린 희비에게 예를 갖추게 하였다.
─난 내일 천북산에 있는 신궁에 가야겠어. 산불을 내었으니 하늘에 죄를 청하러 가야 하지.
─예, 주군.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것이 산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그로부터 4년 뒤, 희비는 꽃다운 17세가 되었고 산이 선물로 주었던 그 옥가락지를 쥐고 그에게 시집을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제 손가락에서 한시도 빼놓은 일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느냐.”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폐하. 어서 들어가셔요.”
“상궁을 죽여 짐을 원망하느냐?”
산의 잔인한 물음에 희비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어찌 황상의 아이를 가진 몸으로 한낱 상궁 따위의……. 하지만 그녀는 그저 그런 상궁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곁을 지켜 주던 유모였고, 젖어미였다. 희비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보여서는 안 돼, 하고 내심 다짐했으나 입술 끝이 덜덜 떨렸다.
“희비. 아무리 네 곁에 두었던 상궁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단다. 그것은 설령 짐의 아이를 가진 자라도 절대 살려 둘 수 없지. 그것이 누구든지 말이야.”
아무리 제 아이를 가진 총궁이라고 하여도 예외는 없다. 희비가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 올려다보니, 황상이 그녀를 가까이 당겨 안았다.
“하지만 짐의 희비가 그럴 일은 없으니 그리 질린 얼굴은 말아라. 아이가 놀랄 것이야.”
오늘은 오지 말고 쉬라는 전갈을 받은 강은 오랜만에 궁내청에서 희건궁 아닌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관사로 들어가자니 모처럼의 쉬는 날이 아쉽고, 또 자미연에 가자니 서슬 퍼런 후궁들의 눈이 무서운 고로 강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길을 잡았다.
희영원은 사시사철 꽃이 만개한 정원이었다. 봄꽃, 여름꽃, 그리고 가을에는 붉은 열매가 열리고 겨울에만 피어나는 절개 높은 꽃까지 모두 심겨 있다. 그래서 한시도 죽은 날이 없는 그런 울긋불긋한 정원이었다. 강은 그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리 알아본 바, 이곳은 자미연처럼 황친에게만 허락된 곳이 아니니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밤늦은 시간까지 황상을 모셨고, 아침에도 귀신같이 눈을 번쩍 뜨고 있었던지라 몸이 조금 피로한 것은 사실이었다. 뿐인가. 귀인의 도움으로 십년감수하며 살아나기는 하였어도 소의의 손에 크게 변고를 치를 뻔도 하였다. 그놈의 뒤 창고, 있었으면 미리 알려 줄 일이지 신진의 사정이 이리도 박복하다. 강은 저 멀리 정자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킁킁 냄새를 맡으니 풀 냄새와 꽃 냄새가 비강 내에 가득하였다.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고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오히려 관사 안보다는 잠을 자기 좋을 것이다. 강은 팔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
그리고 한 시진쯤 잠에 빠져 있었을까. 시원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춥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잠을 자면서 관복을 이리저리 움직여 한기가 도는 곳에 덧대기는 했어도,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지금쯤이면 어차피 관사에서도 다들 잘 준비를 하기 시작할 것이라, 이제 돌아가야겠다. 강은 정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좌우를 휘이 둘러보았다. 누구 사람이 있는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저어 멀리 시위 몇이 줄지어 근무교대를 하는 모습이 보였고, 조금 더 멀리 가면 금궐의 높다란 담이 보였고,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보내자면 중경의 성벽이 보였다. 너무 멀리 시선을 보냈던가 싶어 강이 눈을 돌려 희영원을 살펴보았다.
이곳에서 100보쯤 떨어졌을까 싶은 벚나무 뒤에서 흐릿하게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그저 우연히 강처럼 노닐러 왔다고 하기에는 심히 수상하게도, 나무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내는, 그자의 손에 날카롭게 빛나는 물건이 들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검이었다.
강은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허리춤을 확인하였다.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그리하였지만, 애석하게도 금궐에서 칼을 차고 있는 문관이 어디 있을까. 품계가 낮아 장신구도 찰 수 없으니 단단한 것이 없다. 강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허리끈을 풀어 한 손에 쥐었다. 그 바람에 상의 앞섶이 모두 풀려 내의가 다 드러났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히 강을 노리는 자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너무도 뜬금이 없던 데다, 이렇게 대놓고 노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강은 다소 당황하였지만 침착을 유지하며 정자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웬만하면 직접 싸우지 않고 소란을 피워 시위가 달려오도록 하고 싶었지만, 아까 보았던 그 시위들이 이미 저 멀리 가 버려 소란을 피워도 보지 못할 것이다. 설령 오더라도 저자보다는 늦을 터다.
‘살생은 하면 안 된다.’
웬만해서는. 하지만 일이 급하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일 터였다. 강은 허리끈을 세게 감아쥔 채로 우선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나무 사이사이를 돌아 교란을 주고 도망칠까도 생각하였으나, 희영원에 겨우 두 번째 오는 강에게 그것은 무리였다. 오히려 자칫하다가는 제가 길을 잃을 수도 있음이다. 강은 숨어 있는 사내를 크게 의식하며 희영원 문을 향하여 빠르게 걸었다.
“이보시오.”
뒤에서 사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대답하지 않고 이대로 빠르게 달려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옆구리에 검날이 들어온 다음이었다.
“궁내청 낭관 이강이오?”
“아니오.”
어차피 죽이는 마당에 어찌 물을까. 이 금궐에서 갑자기 낭관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면 그처럼 수상한 일이 없으니 신중을 기하기 위함일 터였다. 강은 헛숨을 들이켜며 사내를 돌아보려 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생김새는 알 수 없었다.
‘저 검을 빼앗자.’
뺏어 보았자 저자에게 무기가 저것 하나일 리는 없지만, 자신에게 무기가 없는 지금은 싸우기 힘들다.
“……윽!”
그리고 강이 그 사내의 손목을 주먹으로 쳤다. 그보다 먼저 그 칼날이 허리춤에 파고들었으나, 다행히 겹겹이 입은 옷을 완전히 뚫지는 못하여 살갗만 조금 긁혔다. 강이 손목을 내려친 여파로 사내는 자루를 놓쳐 버렸다. 단검이라 망정이지, 장검을 들이댔더라면 쪽도 못 쓸 뻔하였다. 강이 그것을 주워 들기가 무섭게 사내가 쏜살같이 달려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다시 자신을 향해 도약했다. 강은 부를 만한 시위가 없는가 잠시 확인한 뒤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슥 피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비단 끈을 사려쥐었다. 사내는 커다란 나무 기둥 뒤로 커다란 검을 쑥 밀어 넣었다가, 이내 허공을 가른 줄을 알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강은 일부러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다시 고목 뒤로 숨어 상체를 확 숙였다. 숙이지 않았더라면 강의 머리가 있었을 곳에 장검이 날렵하게 스쳤다.
‘죽을 뻔했다.’
이번에는 사내가 꽤 약이 오른 듯이 나무를 휘돌아 강이 있는 곳으로 오려 하였다. 하지만 강 역시 함께 몸을 움직였으므로 두 사람이 완전히 반대편에 선 채 빙빙 돌며 서로를 견제하고만 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강이 마른침을 삼키며 때를 보았다.
“윽!”
그리고 재빨리 발을 들어 올려 칼을 쥐고 있는 사내의 손목을 발꿈치로 내리찍었다. 아까 맞아 단검을 놓치고 말았던 그 부위인지라, 사내가 움찔하는 사이에 강이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발로 걷어차 저 멀리로 보내 버렸다. 동시에 쥐고 있던 허리끈으로 나무와 함께 사내의 목을 둘러 완전히 고정하였다. 이대로 세게 당기기만 하면 사내는 질식하여 죽을 것이다.
“누가 보냈지?”
“윽……크윽!”
“내가 몸 하나 쓸 줄 모르는 샌님처럼 보였나 봐.”
“이익……이거 놓……윽!”
“창빈이냐? 아니면…….”
강은 오늘 낮에 있었던 소의와의 마찰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우 그 정도로 사람을 시켜 죽이게 할 수 있던가?
─혜소의가 얼마나 성격이 나쁜데.
문득 궁내청 낭관이 귀띔을 해 주었던 것도 함께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겨우 그것으로 어찌 판단할까. 사내가 제 허리끈을 붙잡고 벗어나려 사력을 다하는 것이 느껴지자, 강이 다시 말아 쥔 허리끈을 더욱 조이며 다시 물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누가 날 죽이라고 사주했지?”
도통 대답이 없다. 이미 가진 무기가 있었더라면 겨우 끈일 뿐이니 바로 끊고 도주할 수 있었겠으나 지금껏 계속 졸리고 있는 것을 보면 무기는 그 두 개의 검이 끝이었던 모양이다. 이대로 죽이자니 살생을 하는 것이 영 좋지 않고, 재수 없게 걸렸다가는 삿된 무리들이 강에게 어떠한 멍에를 지울 수도 있다. 웬만해서는 얻을 것은 얻고 살려두고 싶은데 어찌 입을 열지 않으니 충성심이 꽤 대단하였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그리하면 이자가 죽지 않겠느냐, 이 낭관.”
강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입을 열었을 때, 바로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 깜짝 놀라 시야를 다잡으니, 그 앞에 야장의 차림의 산이 검 끝을 사내의 턱 밑에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죽이면 안 되지. 끝까지 살려 놓아 감히 짐의 총자를 죽이려 든 것이 누구인지 알아내야지. 힘 빼지 말고 이리 나와라.”
산이 칼을 겨누고 있으니 강은 더는 목을 조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허리끈을 거두고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사내가 혀를 깨물기라도 하려는 듯 입안을 기이하게 움직이며 눈을 질끈 감기 시작했다. 강이 이에 그 얼굴을 세게 걷어차 입을 벌리게 하고 그 안에 제가 쥐고 있던 끈을 뭉쳐 억지로 밀어 넣었다.
“무예라고는 하나 손도 못 쓰는 줄 알았더니 별 재주가 다 있구나, 이 낭관.”
“별것 아닌 재주입니다.”
강이 덤덤히 대답하며 앞섶이 모두 벌어진 관복을 오므렸다. 산이 그 모습을 흘끗 보더니 이내,
“이자를 금부에 끌고 가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수많은 시위들이 희영원으로 들어와 억센 포승줄로 그 사내를 완전히 묶고, 또 그가 다시는 자결할 수 없도록 입에도 재갈을 물렸다. 강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산이 강을 안으며,
“놀랐잖아. 어찌 밖을 돌아다녀.”
하였다. 강이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조금 떼어내었다. 그리고 산의 팔을 잡아당겼다.
“얼른 바깥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재수가 없으려니…….”
“그래, 나가자.”
그리도 나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강의 발걸음이 유례없이 빨라 산이 그만 놓칠 뻔했을 정도였다. 그리 정 없이, 말없이 그저 산의 손목을 붙잡고 한참을 빠르게 걸어 어느새 희영원을 빠져나왔다. 강의 이마에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귀신이라도 보았어? 어찌 얼굴이 그래.”
“……놀라서 그렇습니다. 폐하께선 어찌 오셨습니까.”
분명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에는 산이 없었는데. 제가 보지 못한 곳에서 왔던가. 상황이 심히 다급하여 산이 오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산은 강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며 대답하였다.
“내가 밤에 그대를 불러 보겠다 했지 않아.”
“그러셨습니까? 오늘 조금 정신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정신이 없었다. 아직도 저 희영원 안에는 그 자객이 강을 죽이고 나면, 죽여서 입을 막기 위하여 보낸 또 다른 자객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자를 문초하여 누가 짐에게 그리 불경하였는지 소상히 알아내라.”
희건궁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산이 금군대장을 호출하여 명했다. 웬만해서는 혹독한 고신에 입을 열겠으나, 그자가 죽어 가는 마당에도 끝까지 배후를 토설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과연 알아질 것인지 강은 다소 의문이었다.
자결하지 못하도록 잘 막으면 되겠으나, 재갈을 물리고 벽에 묶어 놓더라도 머리를 세게 찧어 자진하면 결국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금군대장이 명을 받잡고 희건궁을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희영원에 그 자객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 마지막까지 숨어 있던 그자의 형형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자를 잡아들였어야 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자 역시 자결을 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생김새로 말미암아 찾아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썹 모양을 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썹 끝이 찢어져 있었고, 이를 따라 눈 밑까지 흉터가 있었다.
“이 낭관.”
“…….”
“이 낭관.”
“…….”
산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초점 잃은 눈을 허공에 두고 있는 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금궐에서 갑자기 습격을 받았으니 놀랄 만도 하였다. 만일 무예 실력이 출중하지 않았더라면 단숨에 죽고 말았을 터였다. 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 앞으로 다가갈 때까지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내 산이 그 얼굴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읏…….”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혀에 강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세게 껴안는 팔의 죔을 느끼며 강이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한참을 그리 입술을 맞대고 있던 산이 이내 얼굴을 조금 떨어트리며 물었다.
“이 낭관. 어찌 부르는데 대답이 없어.”
“……부르신 줄 몰랐습니다.”
“많이 놀랐느냐?”
“예, 좀…….”
놀란 것도 놀란 것이고, 그 사내의 인상이 머릿속에 선연한 것도 있었다. 강은 또 다른 자객 이야기를 꺼내려 입을 잠깐 열었다가, 곧 그만두었다. 어차피 지금은 희영원을 빠져나갔을 것이라 뒤늦게 사람을 풀어도 찾지 못할 것이다. 우선 그 자객을 고신하여 알아내지 못하면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 사내와 강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으니 그는 강이 저를 보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대가 벌써부터 습격을 당할 줄은 몰랐어.”
“저도 그렇습니다.”
“짚이는 구석이 있다면 말해 봐.”
“……없습니다.”
창빈, 혜소의, 또 어쩌면 희비. 이에 대해 말한다면 결국 내명부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소리였고, 산 역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섣불리 의심 가는 자를 불렀다가는 반대로 저에게 화가 닥칠 수도 있으니, 우선 그 자객을 고신한 결과를 듣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산은 아무 말이 없는 강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낭관의 몸이니 드러내놓고 호위를 붙여 주기도 애매했고, 태후와는 이미 희비가 해산을 한 다음 첩지를 주기로 이야기가 되었으니 후궁으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이렇게 습격받은 일이 날이 밝아 금궐에 퍼지면 강이 검을 다룰 줄 안다는 사실 역시 소문이 돌 것이라 이리 대놓고 노리는 자들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이것만은 안심할 만한 점이었다. 만일 강이 쪽을 쓰지 못하고 당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지는 생각만 하더라도 끔찍하였다.
“그대는 당분간 궁내청에는 나가지 말고 있어라.”
“아니옵니다. 그리하면 신의 속이 편치 않습니다.”
“또 자객을 만나면 어찌하려고.”
“……괜찮습니다. 신이 꽤 싸웁니다. 좀 셉니다.”
씩씩하게 답하니 산이 웃음을 터트렸다. 좀 세단다. 지켜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헤쳐 나가니 손이 가지 않아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마냥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산이 화가 나는 것은 감히 이 금궐에서 황제의 총자를 죽이려 든 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불경스러운 자가 있다면 당장 육시를 해도 모자라다 여겨지니 문득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강이 연방 괜찮다고만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간이 늦되었습니다. 이만 침수에 드시지요.”
“자고 가라.”
“……예?”
“자고 가라지 않아. 관사에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 말에 강이 잠시 고민하였으나, 이내 “예” 하고 대답했다. 내키지 않는다는데 굳이 고집을 부려 관사로 갈 이유가 없었다. 이제 와서 내외하는 것도 조금 우스웠다.
“오늘은 궁내청에서 별일 없었느냐?”
침상에 누운 채로 산이 물었다. 별일 없기는. 또 후궁에 불려가 크게 고초를 당할 뻔하였다. 하지만 이는 강이 산의 총애를 받기 때문이 아니고 순수히 궁내청의 일로 그리된 것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황상의 총자라는 사실을 제하면 강은 그리 눈에 띄는 관원이 아니지 않은가.
“별일 없었습니다.”
“그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없다고 할 자라 믿기 힘들다.”
“그럼 믿지 마십시오.”
“지금 좀 세다고 뻗대는 거야?”
“예. 폐하께서도 저를 곤란하게 하면 출중한 무예 실력으로 혼내드릴 겁니다.”
산이 그 말에 파안대소하고는, 이내 입을 맞추었다. 어찌 이리 귀여운가. 잠시도 떼 놓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기침하셨습니까, 폐하.”
햇살이 침전에 들이쳤을 무렵이었다. 연신 뒤척이던 산이 희미하게 눈을 뜨고,
“으응? 응…….”
하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강이 모로 누운 채로 여태 잠에 취한 듯한 용안을 가만 내다보다가, 이내 검지로 미간 사이를 찔렀다. 이에 산이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웃었다.
“어허, 무엄하다.”
“늦장을 피우셔서 그럽니다.”
“그대는 잠도 없어?”
“예. 그리고 태감이 신에게 폐하께서 기침하시는 것을 힘들어하시니 꼭 제때에 깨워 드리라 신신당부를 하였는지라.”
“망할 놈. 요절을 낼 것이다.”
그 입이 어찌 그리 거친가.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얼굴은 그리 노엽지 않았다. 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강은 언제 준비를 마쳤는지, 씻고 의관도 새로 정제한 모양이었다. 조금 비몽사몽한 간에 강이 태감에게 황상의 기침을 알리자 궁인들이 소셋물을 들였다.
“아, 더 자고 싶은데.”
휘건으로 젖은 낯을 닦으며 산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스스로도 더 자지 않으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씻기도 하였고, 새벽 내내 그 자객을 추국하여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도 무척 궁금하였으니 말이다. 휘건을 곁에 선 상궁에게 넘기자, 뒤이어 다른 궁인이 다른 대야를 들여 바닥에 내려놓았다.
“간밤에,”
궁인이 족장을 씻겨 드리려 대님을 풀었더니, 산이 문득 말하려던 것을 멈추었다. 강이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젯밤 습격당한 일에 대해 말씀하시려는가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하겠습니다.”
다른 이가 듣는 곳에서 차마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침전에 들어와 있던 궁인들이 그 말에 모두 물러나고 나서야 강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야에 손을 넣었다. 산이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더니, 장죽을 건져 올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간밤에 금부에서 추국한 결과를 아뢰러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을 열지 않은 모양이야.”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끈질긴 놈이야. 네 시진은 족히 고신하였을 것인데. 참으로 충성스럽기 짝이 없어.”
강은 대답하지 않고 그 발등에 물을 끼얹었다. 어찌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이런 일로 그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도 딱히 기분이 좋지는 못했고, 무엇보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지 못하겠어서 답답했다.
“다 되었습니다.”
“그대 일인데 어찌 그리 심드렁해.”
“애를 태운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닌데 어찌 동요하겠습니까.”
강이 새 물에 손을 씻은 뒤 휘건에 닦고 몸을 일으켰다. 어찌 제가 죽을 뻔한 일에 저리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인지, 원. 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함께 일어섰다. 강이 침전 서편에 걸린 용포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산은 장죽을 다시 화로에 던져 넣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굳이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데 계속 화제로 삼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 좋은 일도 아니었거니와, 다른 이야기라도 할 것은 많았으니 말이다.
“이러다가 내가 늙어 죽어야 편액을 바꾸게 생겼다.”
강이 용포의 소매를 산의 팔에 가져다 대며 작게 웃었다. 진실로 그러했다. 편액을 쓰기로 한 것이 벌써 언제인가. 근래 하도 다사다난하여 좀처럼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강 역시 서른 날만 희건궁을 출입하겠다 처음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이리 침전까지 드나들게 되었으니. 문득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강은 산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허리끈을 매었다. 이 매듭을 짓는 것이, 그저 안 풀리도록 고정만 하면 되는 일을 두고 그리 법도 타령을 하며 방식이 다르니 손에 영 익지 않았다.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고리를 만들었다가, 꿰었다 하고 있는데 머리 위에 커다란 손 하나가 얹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산이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내 것을 내가 만진다는데 문제 있느냐?”
“참나.”
“참나? 지금 참나라고 했지?”
“예, 참나라고 했습니다.”
“좀 세다고 지금 참나라고 했겠다.”
침전은 아침부터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바깥에 서서 황상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소문성이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어제 희비의 상궁이 망령된 짓을 하여 황상의 뜻을 거스른 데다, 갑자기 희영원에서 강을 죽이려 들었던 자객도 있었으니 심기가 불편하실 줄로 알았더니. 그래도 저 낭관이 기껍게 해 드리니 지척에서 모시는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문득 곁에 서 있는 상궁이 저를 이상한 듯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소문성은 괜히 목청을 틔웠다.
─폐하, 정전에 납실 시각이 다 되었사옵니다.
“오냐, 가자.”
“저도 궁내청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난 그대가 칭병하고 등청하지 않는 게 좋겠는데.”
“신이 폐하의 녹봉을 받는 자라, 양심이 있어 그러지는 못하옵니다. 얼른 가십시오. 신료들이 기다립니다.”
“누가 그대를 괴롭히면,”
“예에, 폐하께 이르겠습니다.”
“아닌데. 그대는 세니까 그대가 직접 출중한 무예 실력으로 혼내 주라는 것인데.”
“……참나.”
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니, 산이 퍽 아쉽다는 듯 짧게 입을 맞추고는 침전을 나섰다.
“마마, 천천히 가십시오!”
정오의 금궐은 몹시 무더웠다. 머리 바로 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지니, 온몸에서 열이 발산되는 듯하여 곁에 사람이 지나만 가더라도 불쾌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축축 처진 가운데, 홀로 체통 없이 금궐을 내달리는 여인이 있었다. 한 손에는 소중한 것인 양 두루마리를 끌어안은 젊은 여인이 희건궁을 향하니, 모든 이들이 그녀를 한 번씩은 돌아보고는 하였다.
“마마! 마마!”
그녀를 모시던 상궁이 이내 따라잡지를 못하고 헉헉거리며 멈추어 섰다. 아무리 불러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늙은 몸이 지치고 말았다. 이미 저 멀리 점으로 사라진 여인을 보며 상궁은 그저 한숨을 지었다.
“여 상궁!”
한편, 제가 그리 상궁을 따돌리고 달린 줄도 모르고 궁내청 앞에 멈추어 선 여인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어찌나 신났는지 상궁이 저를 못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말괄량이처럼 내달린지라, 거의 길을 잃은 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가마가 너무 느리게 가는 것이 그만 답답하여 다 내버리고 뛰어내렸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모양이다. 금궐은 너무 광활하고 넓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만큼.
“앗!”
그때, 저 앞에서 어떤 사내가 무거운 짐을 나르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리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 어찌 가려나 싶어 한참을 바라보고 있더니 그자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피해야 해! 하고 생각했을 무렵은 이미 늦었다. 여인은 사내와 거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으윽…….”
그리고 그 사내, 그러니까 황상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그 호사를 누릴 줄을 모르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던 낭관 이강은 높이 쌓여 있던 짐을 그만 바닥에 완전히 떨어트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돌바닥에 그만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이고, 하는 소리가 절로 나는지라 여인이 겨우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 그림!”
“괜찮으십니까?”
그때 강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여인을 살폈다.
“괜찮아요!”
여인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바닥에 떨어트린 두루마리를 찾다가, 문득 강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고생 한 번 안 해 본 멀끔한 도령처럼 생긴 것이, 꽤 인상이 좋은지라 자신을 넘어트린 무례를 용서하려 하였다. 한데, 여인은 이내 그의 발밑에 깔려 뭉개진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어떡해! 귀한 것인데…….”
“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앞을 보았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관리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니 이는 받아 주겠으나, 그가 발로 짓뭉갠 두루마리는 흙탕물이 튀어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여인은 강이 발을 치우자마자 두루마리를 들어 올렸다. 강이 그것을 보고 당황하여 난감한 기색을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그…… 귀한 것입니까?”
“그래요! 이게 얼마나 귀한 그림인데, 어쩌지…….”
“그림입니까?”
“그래요! 선물하려고 가져온 것인데…….”
“그럼 제가 조금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리 말하니, 여인이 두루마리를 강의 손에 올려놓았다. 강은 그것을 펼쳐 한참을 바라보고는, 얼룩이 묻은 곳을 손으로 짚어 보았다. 얼룩이 져서 크게 조화가 일그러졌다. 강이 한참을 그러고 섰으니 여인은 그가 어쩌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강은 잠시 골몰히 생각하다가 이내 말하였다.
“잠깐만 여기 계십시오.”
좋다 싫다 대답도 하기 전에 관리는 궁내청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줄행랑을 놓은 것인가 싶어 괘씸하게 여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먹이 든 벼루와 붓을 갖고 나왔다. 그리고 여인이 말리기도 전에 바닥에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 그 위에 붓을 가져갔다.
“무엇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귀한…… 그……림, 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인은 사내의 손놀림에 넋을 놓아 버렸다. 흙탕물이 번진 자리에 붓이 몇 번 휘이 스치니 금세 그것이 늠름한 산등성으로 변하질 않았는가. 그리 섬세한 손길도 아니었는데 화선지에 그려진 것은 당장이고 손을 뻗으면 풀냄새가 날 것만 같고, 그 안에서 산새 한 마리가 포르릉 날아오를 것만 같은 산이 되어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변변찮은 재주이긴 하지만……. 저 때문에 그림이 망쳐진 것이 죄송해서 그래도 이렇게 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림이 많이 귀합니까? 변상을 해 드리고 싶은데 제가 지금은 가진 게 없어서,”
“그대는 도화청 관원인가요?”
“아, 아닙니다. 궁내청 낭관입니다.”
“그대를 알아봐 주실 만한 분이 계세요. 날 따라와요.”
“예? 저, 외람되지만 어느 궁의 마마이십니까?”
강이 여인의 외양을 살피니 귀한 여인인 줄을 알았으며 그런 여인이 금궐에서 이리 활보하는 것은 후궁일 뿐일 것이라, 제가 채 보지 못하였던 소의 윤씨나 상재 연씨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강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꽤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차마 존귀한 여인의 손길을 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강이 어쩔 수 없이 그 힘에 이끌려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향하는 곳이 희건궁이 아닌가. 강이 몹시 황망하여 여인을 바라보니, 그녀는 마냥 즐겁기만 한 얼굴로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저, 여기는 희건궁이…….”
“맞아요. 그대의 능력이 대단하니 궁내청에 있기가 아깝습니다.”
강이 한사코 만류하려 했을 때에는 이미 희건궁 문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바깥에 서 있던 소문성은 나란히 들어오는 두 남녀를 바라보고 기함을 아니 할 수가 없는 지경이라, 잰걸음으로 다가와 그들 앞에 섰다.
“마마! 그리고 자네, 어찌…….”
“얼른 폐하께 고해 줘, 소 태감!”
“마마……. 체통을 지키십시오. 이리 외간 사내의 손을 잡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내가 급해서 그래! 빨리!”
고해 달라고 해 놓고는, 그녀는 소문성이 입을 떼기도 전에 신을 벗어 던지고 희건궁으로 강을 붙잡은 채 홱 들어가고 말았다. 도통 말릴 새가 없었다. 소문성이 이마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분은 어째 오랜만에 뵈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 저리 천방지축 말괄량이이시니 어찌 태후가 안심을 하겠느냔 말이다.
“폐하! 폐하!”
강은 거의 실색을 하는 지경이었다. 이 한낮에 내명부의 여인에게 손이 붙잡힌 채로 황상을 뵈러 가기는 또 처음이었다. 능력을 알아봐 줄 이가 있다니! 그는 이미 능력을 알아본 지 오래다!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대낮에 여인과 함께 희건궁에 든 것을 어찌 변명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탁상 앞에 앉아 있던 황상이 여인의 목소리에 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해인이가 아니야!”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그리고 그녀가 천진하게 웃었다. 오라버니? 하고 강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바라보았더니, 산이 강에게 잠시 시선을 주고는 다시 해인을 바라보았다.
“어찌 연통도 없이 왔느냐. 내가 목소리를 잘못 들은 줄로 알았다. 게다가 저자는 어찌 데려온 거야?”
“오라버니, 있잖아요. 이자가 궁내청 낭관이라고 하는데 그림 실력이 출중합니다. 도화청 화공들도 이자를 못 따라갈 것입니다! 사실은 제가 오라버니를 드리려고 엄청 귀한 그림을 가져 왔는데, 그림이 그만 망가져 버렸거든요.”
“저런.”
“그런데 이자가 다 고쳐 주었어요! 정말 대단한 실력이에요. 오히려 이 그림보다 이자가 덧그린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해인이 구겨진 두루마리를 펴 산에게 내밀었다. 산이 그것을 받아들고 한참을 살펴보다가 이내 탁상 위에 내려놓고는 그림 실력이 출중하다는 낭관을 바라보았다. 강이 어쩐지 겸연쩍어 고개를 숙이니, 산이 웃음처럼 대꾸했다.
“그대의 그림을 알아보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한데, 어찌 내 누이에게 들킨 것이냐.”
“……송구합니다.”
“오라버니, 이자를 아세요?”
“알지. 내가 창천성에서 데려왔는데.”
이번에는 해인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해인에게 붙잡힌 강의 손목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것이 어릴 적 습관을 다 버리지 못했구나. 중경에 올 것이라면 미리 연통이라도 할 일이지, 내가 그럼 시간을 비워 둘 수 있지 않아.”
“아니에요, 오라버니. 시간이 많으니 기다리겠어요.”
“이 낭관.”
“예, 폐하.”
“그대가 내 누이와 시간을 좀 보내 주어라. 홀로 기다리면 심심하지 않겠느냐.”
산의 말에 해인이 밝게 웃으며 강을 돌아보았다. 강은 이 정신없는 상황에 잠시 난감한 기색을 비쳤으나, 이내 “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이 동기간에 같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 그자는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느냐.”
강과 해인이 집무실을 나서기 무섭게 금군대장이 입시하여 절을 올렸다. 산이 붓끝으로 턱 밑을 긁적긁적 긁으며 물으니, 금군대장이 송구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무릎을 꿇었다. 산은 이마를 짚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의 불찰이옵니다.”
“혹독한 고신으로도 입을 열지 않는다니 충성심이 대단하구나.”
“……그자의 연고를 모두 찾았으나, 이미 도망을 간 후인지 중경에는 없사옵니다.”
“그랬겠지. 짐에게 그런 불경을 저지르고도 뒤처리를 안 해 놓았을까.”
강은 그자의 입에서 배후가 누구인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것 같았지만, 산은 조금 달랐다. 그는 도통 위험천만한 일을 겪고도 일말의 동요가 없으니, 본래 무심한 성정인 줄은 알았으나 산의 입장에서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미리 중경에 오기 전 채윤직에게 절연장을 청하는 등 각오를 다진 것이 보통이 아니기는 하였어도 이런 일까지 미리 생각을 해 두었다는 것이 다소 신경에 거슬리기도 하였다.
“거세가 되지 않은 것을 보아 태감은 아닌 듯싶사옵고, 일개 시위인 듯하온데 대관절 어느 궁의 시위인지 알 길이 없어…….”
“우선 그 식솔들을 쫓아라. 그자가 보는 앞에서 사지라도 잘라 주어야 입을 열 것이니.”
“……예, 폐하.”
“그리고 이 낭관의 뒤로 호위를 붙여야겠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말이야. 이 낭관이 알지 못하도록 해라. 알면 지극히 신경 쓸 터이니, 짐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아, 그리고…….”
“하명하소서, 폐하.”
“희영원에 남아 있던 자객은.”
금군대장이 그 말에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산이 내밀히 희영원에 자객이 남아 있으니 반드시 잡아 두라 명한지라, 그 뒤를 쫓았으나 결국에는 놓치고 말지 않았던가.
산은 강이 그자를 보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천리안이 있고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는 이가 어찌 그자를 시야에 담지 못하였을까. 하지만 끝까지 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떠한 변고를 걱정하는 듯하여 알지 못하는 구석에서 내밀히 처리하려 하였더니 결국은 놓쳤단다.
“무능하도다.”
황상이 곁에 있던 찻잔을 거칠게 집어 던지자, 금군대장이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하였다.
“죽여 주십시오, 폐하.”
“아직은 네가 쓸 만하니 살려 두지. 죽여 달라 하지 말고 그자를 찾아내라. 금궐을 다 뒤져서라도.”
“……예, 폐하.”
“물러가라.”
황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첫째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는 것. 둘째로는 누군가 두려운 줄을 모르고 지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번 일이 그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였으니 어찌 황상이 거슬리다 생각지 않겠는가. 산은 금군대장이 나간 자리를 가만 노려보았다. 대관절 이 금궐에서 그리 무식한 방법으로 대놓고 총자를 노린 자가 누구던가. 찾아내거든 결단코 살려 두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
“허 태감은 어찌하고 있습니까, 마마.”
한편, 명운궁에는 간밤의 일을 두고 크게 탄식하고 있는 두 여인이 있었다. 그 낭관이 이대로 살아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인 고로, 다소 드러나는 방법임에도 그만큼 확실한 것이 없어 일을 감행하였더니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어 실패하고 말았지 않은가. 자객이 낭관을 죽이고 나면 그 입막음을 하기 위하여 자객을 처리하고 후환을 덜려 하였는데, 낭관도 죽이지 못하였거니와 몰래 보낸 태감의 존재도 그만 황상께 들키고 만 모양이었다.
황상이 명화궁에 납신 고로, 응당 희비와 밤을 지새우시리라 생각하고 감행하였더니 재수 없게 희비의 상궁이 불경한 것을 지니고 있다가 들켜 버렸다. 그리하여 황상이 명화궁을 빨리 떠난 것이 이 일의 화근이었다. 물론, 이강이 칼을 제법 쓰는 자라는 것도 전혀 생각지 못하였던 실패 요인이기도 하였다.
“지금 평상시와 다르지 않게 복귀했다. 금부에서 허 태감을 찾고 있는 모양이지만,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가닥을 못 잡은 모양이야.”
“……마마, 허 태감을 죽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아니 된다. 허 태감은 아직 쓸모가 많은 자야. 본궁이 영지에 있을 때부터 가장 무예가 출중한 자라, 앞으로도 쓸 일이 많을 것이다.”
“금부에서 가닥을 잡지 못하니 다행이지만, 만일 이강이 허 태감을 보았더라면 어찌하시려고요.”
“얼굴을 다 가리고 있는데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그리고 허 태감은 폐하와 눈이 마주쳤으되 심히 거리가 멀고 어두워 그저 인영만 보았을 것이라 했다.”
성귀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키에 평균 체격인 허 태감이 온통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는데 제아무리 황상이라 한들 그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불안한 점은 있었다. 물론 걸린다 하여도 창빈에게 모두 뒤집어씌우고 발을 빼면 되기는 하지만, 그런 번거로운 일이 생기기 전에 허 태감을 처리하면 오죽 편하겠는가. 하지만 더 밀어붙였다간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아 성귀인은 그만두었다.
“희비 마마께선 눈치를 못 채셨겠지요?”
“희비야 폐하의 총애가 떠났을까 전전긍긍하였고, 본궁이 전부터 황상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지시라 입 발린 소리를 하였으니 이번에도 과히 수상하다 여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의 발단은 단순히 이강을 죽이자는 계획을 세우면서부터였다. 독을 먹여 죽이자니 이강이 배정된 처소가 없어 먹는 것에 자연스레 독을 탈 방도가 없었고, 웬만해서는 자미연에 밀어 빠트려 죽이고자 하였으나 자미연에는 그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결국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베어 죽이고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 가장 나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보는 눈이 없기로되 어둔 밤에 처리해야 한다면, 그가 황상을 모시지 않는 날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가뜩이나 황상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희비에게 어찌 그 발길을 당길 수 있을지 함께 상의해 주었고, 희비가 악몽을 꾸었다 고하여 겨우 황상을 명화궁에 납시게 하였다. 다 되었다 싶어, 이강이 희영원에 있는 동안 죽이려 하였으나 재수 없게 상궁의 일로 황상이 심기를 상하시어 낭관을 만나러 간 것이 큰 문제였다.
게다가 이강의 생긴 것이 희고 단정하여 영 샌님인 줄로만 알았더니, 허 태감이 이르기를 칼과 몸을 쓰는 솜씨가 보통을 넘는다고 하질 않은가. 단순히 창천성에서 일을 돕던 하인이라고 하기에는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동안은 자숙해야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놈이 첩지를 받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 여겼더니, 오랫동안 발이 묶이게 생겼구나.”
“희비 마마께서 그전에 한 번 움직여 주지 않으실는지요.”
“희비? 어째서?”
“희비 마마께서 지금 가장 불안한 분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이강을 데려오신 뒤로 뒷전으로 밀려났고, 태중태부가 죽었으며 심지어는 상궁이 폐하께서 질색을 하시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희비 마마께서 금궐로 오신 이래 이런 위기가 없을진대 어찌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네 말에 일리가 있구나.”
“하지만 희비 마마께선 성정이 순하시고, 게다가 복중에 태아가 있으니 해산을 하시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겁도 많으신 분이고……. 잘못했다가 폐하께 들통이라도 나면,”
“본궁은 그 희비가 자식을 낳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자식이 태어나……. 그래, 황자라도 된다고 생각해 봐라. 그 아들로 하여금 국본을 삼으라는 움직임이 조정에 가득할 것이야. 희비가 국본의 어미가 되면 황후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고, 심지어 폐하께서 희비에게 아이를 낳기만 하면 귀비로 봉하시겠다 약조까지 하시지 않았더냐.”
“마마, 희비 마마의 자식을 가만두실 생각이었습니까.”
“……허면,”
“유산을 시키기에는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성귀인이 말끝을 흐리며 호갑투를 매만졌다. 창빈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내 찻잔으로 입을 가렸다.
*
“아까 전에는 공주이신 줄을 모르고 감히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허면, 그대는 내가 공주가 아니었더라면 그런 무례를 저질러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해인의 앞에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하였던 강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일순 당황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잠시간 망설이다가 이내,
“그것이 아니오라, 소인이 무례를 범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나 공주님이시니 그것이 더욱 큰 무례가 되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해인이 그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이내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농담이에요. 고개를 드세요.”
강은 잠시 얼떨떨하게 멈추어 섰다가, 해인이 앉을 것을 권하자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그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이 상황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지라.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였더니 곧 머릿속에 비슷한 상황들 여러 개가 팍 솟구쳐 떠올랐다.
‘남매가 어찌 이리 같은가.’
“어찌 그리 보세요?”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라버니와 많이 닮아서 그러신가요?”
“아, 예. 그, 조금……. 아니, 많이 닮으셨습니다.”
“생긴 것이 많이 닮았지요? 저도 오라버니도 외탁을 하여 그렇습니다.”
생긴 것뿐 아니라, 아니 생긴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강이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자, 해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가 이내 웃었다. 황상에게 위로 형이 하나 있고, 아래로 누이동생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산을 보면 그리 동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그 누이를 대면하고 있으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오라버니께선 이 낭관이 창천성 출신이라고 하시던데, 사실인가요?”
“예, 창천성에서 중경으로 온 지 한 달이 조금 안 되었습니다.”
“말씨가 조금 창천성 말씨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창천성에서는 무엇을 하시는 분이셨나요?”
“창천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이었습니다.”
“성에서요? 그러면 가로家老와도 알고 있는 사이인가요?”
가로라 함은 일족의 장로인 채윤직을 뜻함이니, 강은 산이 그러하듯 해인도 채윤직에게 특수한 정을 느끼는가 싶어 조금 웃었다. 저에게도 자애로운 분이셨으나 이리 명망이 높으신 줄은 몰랐다. 비록 중경에서는 대역죄인 취급을 받고 있지만 모신 주군에게 이리도 흠모를 받으시는 것을 보면 제가 본 눈이 틀리지는 않았다 싶다.
“알고 있습니다. 비록 소인이 천한 몸이라,”
“천한 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래도 창천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몸이라 신분이 낮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닌데. 내가 보기엔 그대는 그리 신분이 낮은 이로는 보이지 않는걸요. 오라버니께서 그리 말하라 시키시던가요?”
해인의 말에 강이 놀라 일순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환히 웃고 있는 낯의, 장난기가 엿보이는 미인이었으나 눈썰미가 날카로운 것을 보아 이것마저도 산과 닮은 모양이었다. 강이 어찌 대답할 바를 모르고 그저 뜸을 들이자, 해인이 말을 이었다.
“그대는 하인이라고 하기에는 손에 굳은살이 없고 부드러워요. 아까 잡았을 때 그리 느꼈지요. 햇볕 아래 일을 했을 리가 없다 생각한 것은 낯빛이 희기 때문이죠. 아무리 타고나기를 그리하였어도 궂은일을 많이 하면 그것이 드러난답니다. 또 말씨가 단정하고 몸가짐이 조심스러우니 역시 천한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내 말이 틀렸나요?”
“……황공하옵니다.”
“오라버니께서 일개 궁내청 낭관에게 그리 대하실 리가 없으니 아마도 그대는 그저 낭관이 아닐 것이고, 아까 제가 그대의 손을 잡고 있던 것을 오라버니께서 의식하셨으니 그대는 아무래도 오라버니의 총애를 받는 분인 모양이에요. 하지만 그대가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면 오라버니께서 그리 명하신 모양인 것 같으니 넘어가겠어요.”
해인이 말을 마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한숨도 쉬지 않고 그리 몰아대니 어찌 변명할 것도 없었고, 변명을 할 수도 없이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다. 끼어들 틈도 없었으니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강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여자 산이다!’
시시콜콜한 잡담이 주로 이어졌다. 해인이 창천성에 못 간지 근 7년이 다 되었다고 하기에, 강이 그때에 비하여 어느 점이 달라졌으며 무엇이 생겼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해인은 마치 미지의 세계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눈을 빛냈다. 이후 채윤직의 이야기로 접어들어, 채영에 관한 화제를 끄집어냈을 때에는 채영이 젖먹이였던 저를 곧잘 업어 주었다며 그립다고 하였다. 채영이 그립기는 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채영뿐 아니라 모든 창천성의 이들의 안부가 궁금한 지경이었다.
한참 그리 옛날이야기에 심취해 있던 해인은 유밀과를 입에 넣던 중,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앗!”
“어찌 그러십니까?”
“어머니께 먼저 문후를 여쭈어야 하는데, 오라버니를 빨리 뵙고 싶어서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강이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허면 경헌궁에 다녀오십시오. 전 예서 기다리고 있,”
“같이 가요!”
“예?”
“상궁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금궐이 하 넓으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는데 혼자 가라는 말씀이세요?”
“……아, 송구합니다. 허면 경헌궁 앞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경헌궁에는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지도를 한 번 보았으니 길을 잃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강은 곁을 지키고 있던 시위에게 문후를 여쭙기 위하여 경헌궁에 갈 것이니 황상께 말을 전해 달라 전하고는 신을 신었다. 그때 이미 해인은 언제 그리 준비를 마쳤는지 저만치 앞으로 가 빨리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산이 창천성으로 멋대로 말을 달려왔을 때 소문성이 이런 마음이었던가. 이러다가 상궁이 그랬다는 것처럼 저도 공주를 놓칠까 강이 부랴부랴 움직였다.
“공주 마마!”
경헌궁에 도착하자마자 바깥에 서 있던 상궁이 해인을 알아보고 크게 반색했다. 해인이 그 상궁에게 달려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오랜만이야! 어머니는? 계셔?”
하고 물었다. 상궁이 이에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물론이옵니다, 공주 마마. 태후께서는 늘 밤낮으로 공주 마마의 걱정을 하셨사옵니다. 공주 마마께서 오신 줄 알면 크게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정말?”
강은 해인이 태후를 뵙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섬돌 위에 신을 나란히 벗은 해인이 문득 그를 돌아보며,
“따라 들어오지 않고 무얼 하세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강이 심히 놀라 손사래를 치며,
“아닙니다. 태후 마마를 뵙고 나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하였지만 해인은 물러서는 기색 없이 빨리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강이 슬쩍 해인의 곁에 선 상궁을 바라보자, 상궁이 마치 ‘공주님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없으니 어서 따라 들어오시오’ 하는 눈빛을 보내는지라. 강이 어쩔 수 없이 함께 신을 벗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긴 회랑을 지나 한참을 들어서니 고아한 향내가 경내를 맴돌고 있으니, 저곳이 태후가 머무는 곳인가 하여 강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해인이 태후의 품에 뛰어들었다. 태후는 창졸간에 전혀 생각지 못한 손님을 맞은지라, 늘 찌푸리고만 있던 인상을 펴며 해인을 끌어안았다.
“해인아! 어찌 연통도 없이 왔느냐, 소식 하나 듣지 못했다.”
“놀라게 해 드리려고 그랬어요.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조신하게 중경에만 있을 일이지, 어찌 그리 돌아다녀. 걱정이 되어 밤낮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을 것이야.”
“한동안은 중경에 있을 거예요. 못 뵌 사이에 어머니 더 아름다워지셨어요.”
“네가 어미를 놀린다.”
한참 그리 회포를 푸는 모습을 보니 태후에게 예를 올릴 때를 놓친 강이 어쩔 줄을 모르고 기회만 보고 있었다. 한참 제 여식을 보듬고 있던 태후가 문득 그에게 시선을 줄 때까지.
“궁내청 낭관 이강이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강이 부랴부랴 예를 올리니, 태후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낭관 이강이라. 그의 소문은 들어 알았다. 애초에 이 금궐 안에 저이의 이름 두 자를 모르는 자가 있을 것인가. 쓰는 한자는 다르나, 산의 태몽을 꾸었던 배경인 이강과 발음이 같으니 듣자마자 산이 그리 아낀다던 사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어나거라.”
“황공하옵니다, 마마.”
“네가 황상의 총자라는 그 낭관이로구나.”
“…….”
강은 문득 할 말을 잃어 잠시 입을 다물었으나, 계속 그러는 것도 예가 아닌 듯하여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렇다고 하는 것도 우습고, 아니라고 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았다. 강이 고심 끝에,
“부족한 소인을 폐하께서 아껴 주시옵니다.”
하고 대답했다. 태후는 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해인의 손을 붙잡고 있었는데, 해인이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일부러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 낭관, 저기 앉으세요.”
“아니옵니다, 마마. 저는,”
“그래, 앉아라. 황상이 아끼는 이인데 박대하면 황상에게 욕을 듣지.”
하지만 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태후가 상궁에게 일러 자리를 만들었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인지라, 강이 몸가짐을 더욱 조심히 하며 좌정하였다. 강이 침전을 드나들고, 산이 그를 끔찍이 아낀다는 이야기를 다른 이들이 모를 것이라 생각한 일은 없었으나 어쩐지 태후가 그리 노골적으로 언급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것이 사실이었다. 황제의 성벽性癖은 누구도 삿되이 입에 올릴 것이 못 되었으나 태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머니, 이 낭관이 그림을 잘 그립니다. 그래서 오라버니께서 아끼시는 모양이에요.”
“그래?”
“예, 어머니. 아까 전에 오라버니께 드리려고 그림을 가져왔는데…….”
해인이 일전 강과 처음으로 맞닥뜨린 일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하자, 강은 더욱 겸연쩍어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빨리 이곳을 나서고 싶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 금궐에서 가장 어려워해야 하는 분이 황상이신데 그에게는 그리 조심하는 기색이 덜 하면서 여타 다른 상전들이 더 불편하고 어려웠다.
이는 황상이 강의 그런 점들을 심히 기꺼워하며 귀여워하시기 때문이겠으나, 어찌 되었든 강은 그런 연유를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경헌궁을 떠나고만 싶었다. 희건궁에서 사람을 보냈으면, 그래서 집무를 끝내셨으니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으면, 하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황상이 널 어찌 아끼는지 알겠구나.”
“……망극하옵니다.”
“황상께서 사내를 찾으시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니 그리 불편해할 것 없다. 창천성에 계실 적에도 계집보다는 사내 희롱하기를 좋아하셨으니. 채신이 없다 하여도 사그라지는 기색이 없었어.”
태후가 혀를 차며 말하자, 강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찌 그런 말을 나에게 하시는가 싶기도 하였거니와, 그래서 아드님이 저를 귀여워하시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말씀이 하고 싶으신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인 것이다.
“어머니! 사실 오라버니께서 더 있으라고 하신 것을 어머니께 먼저 문후를 여쭈려고 뿌리치고 왔답니다. 이따 밤이 되면 다시 뵈러 올 테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태후가 더 잇기 전에 해인이 말끝을 싹둑 잘랐다. 태후는 잠시 놀란 얼굴을 하였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강을 흘끗 바라보았다. 강은 잠시 그 시선에 당황하였으나, 이내 태후가 해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만 가 보라는 말을 하여 그저 다시 예를 올리고 경헌궁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 어머니께 거짓을 고했는지 궁금해요?”
다시 희건궁으로 돌아가는 걸음에 해인이 문득 물었다.
“예?”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안 쓴다고 하면 거짓을 아뢰는 것이고, 쓴다고 하면 무례라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시니, 늘 난감하답니다. 이 낭관은 오라버니의 연인이신데, 어머니가 지나치셨어요.”
“연인은요. 어찌 제가 감히 폐하의 연인이 되겠습니까. 크게 괘념치 마십시오.”
해인은 무덤덤하게 말하는 강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망설임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금궐에 발을 붙이고 사는 내명부 사람들이라면 모두 아는 일인데, 구태여 강에게 숨길 것은 무언가.
“어머니와 오라버니는 사이가 좋지 못하시죠.”
“……그렇습니까?”
“네. 옛날부터요. 오라버니께서 영주가 되셨을 때가 제가 다섯 살이었던가 그랬거든요.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지만, 그래도 그거 하나는 알았어요. 어머니가 오라버니보다는 첫째 오라버니를 더 아끼신다는 것을요.”
“…….”
어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공주가 어떤 연유로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저에게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입이 가벼운 여인인가, 생각했다가도 산의 성품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럴 것 같지도 않았으니 다소 헷갈렸다.
강이 말없이 그저 뒤를 따르자, 해인이 다시금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찌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나, 입이 가벼운가. 하고 생각하셨지요?”
“……그런 일 없습니다, 공주님.”
“거짓말.”
하지만 해인이 일언지하에 강의 대꾸를 부정하였다. 속을 들킨 기분이라 얼굴이 조금 벌게지는 것 같았다. 이 남매를 어찌 당할까.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도 남의 속을 꿰뚫는 솜씨가 일품이다.
“오라버니가 그리 남들 앞에서 드러내 놓고 총애하시는 이가 처음이라 그래요.”
“…….”
“뭐, 내명부 후궁들은 예외로 쳐야겠지요. 그분들이야 공공연한 오라버니의 첩실이시니.”
해인이 흘리듯 말하고는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강을 두고는 연인이라 하였으면서, 강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그녀들을 두고 첩실이라 일축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산과 해인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해인이 그 잠깐의 만남에서 무엇을 보아 산이 그리 특출 나게 강을 챙긴다 생각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오라버니!”
경헌궁에서 희건궁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때마침 산이 집무실에서 나와 그들이 있던 곳으로 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지라, 해인이 그를 향해 달려가 품에 안겼다. 갑작스레 달려들었어도 산은 그리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받아 주며 강을 바라보았다.
“넘어진다.”
“안 넘어집니다.”
“그러다가 저번에 무릎이 깨진 적이 있잖아.”
“그건 어릴 때예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데 무얼.”
산이 그리 나무라니 해인이 궁시렁궁시렁 입안말로 불만을 쏟아 내었으나 그는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강이야 그런 모습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으나, 만일 다른 이들이 보았더라면 기함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터였다.
“모후에게는 얼굴을 잘 보여 드렸느냐?”
“그럼요. 어머니께선 오라버니보다 저를 더 귀여워하시니까요.”
“오냐.”
다 큰 아들보다 애교 많은 딸이 더 귀여운 것은 늙은 부모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자 사이에는 그보다 더 큰 감정의 골이 있었으니, 강이 이를 눈치채지는 못하였어도 해인의 말로 말미암아 그저 염두에 둘 수는 있었다. 앞으로 산과 어떤 대화를 함에 있어 이에 대해 조심할 수도 있었고, 또 어쩌면 태후와 어떠한 관계에 놓일 때 어떤 자세를 취할지도 미리 생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미리 그런 염려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저 때문에 하실 일이 많은데 제쳐 두신 것은 아니지요?”
“맞는데.”
“맞아도 어쩔 수 없어요. 오랜만에 뵙는 오라버니인데요.”
“이 낭관은 해인이를 데리고 경헌궁에 갔다고 하였는데, 모후를 만났느냐?”
산이 문득 안색이 어두운 강을 바라보며 물으니, 잠시 두 남매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강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하였다.
“예, 그……. 바깥에서 공주님을 기다릴 작정이었으나, 따라오라 하시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잘했다. 미리 보여 나쁠 것은 없지.”
미리……? 강이 그 두 음절에 잠시 생각에 제동이 걸린 고로 대꾸하는 것을 늦추고 짐짓 안색을 굳혔다. 태후는 강에게 어찌 황상이 그를 마음에 두었는지 알겠다고 하였을 뿐으로, 강에게 딱히 호의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안 드는 물건을 보듯 훑는 기색이 강했다. 물론 그 어른의 성정이 본래부터 그리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이 나쁜 아드님이 총애하는 자라 하면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질 않은가.
“이 낭관이 창천성의 가로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그래?”
“예, 제가 꼬치꼬치 캐묻기는 하였지만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별 이야기는 없었다. 강은 자신이 창천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이라 거짓말하고 바로 들통 나 버렸다 사실은 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공주가 총명한 탓도 있겠지만, 때에 맞게 둘러대지 못한 제 탓인 것 같아 강이 무리하게 화제를 바꾸려 들었다.
“아, 폐하께는 형님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주님을 이리 뵈오니 두 분이 지극히 닮으신지라, 형님은 어떠실지…….”
그리 말을 해 놓고도, 강은 곧바로 제가 무례를 범했음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온종일 정신이 없었고, 공주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녔으며, 심히 숨기고 있던 것을 첫 만남에 모두 내보인지라 이성을 다잡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멋대로 떠들게 되었다.
그들의 가문에 무슨 사연이 있을 줄 누가 알고 그런 일을 두고 묻는단 말인가. 게다가 아무 일이 없다고 한들 감히 황상의 집안에 대해 묻는 것은 불경이었다. 강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일어나니, 산이 그 전에 그 팔뚝을 붙잡아 꿇지 못하게 하였다.
“다시 앉아라. 그럴 것 없어.”
“……폐하.”
“유난을 떠는구나. 그대가 여태까지 한 언사들 중 이 일을 묻는 말보다 더 무례한 것들이 많았는데, 어찌 새삼스레 이것에만 두고 용서를 빌려 해. 무릎 아까운 줄을 알라.”
팔을 붙잡은 산의 악력을 이겨 내지 못할 것 같은 고로, 강이 어쩔 수 없이 도로 의자에 좌정하였다. 산은 그제야 제 손에 쥔 힘을 풀며 대꾸했다.
“형님은 내가 죽였다. 그래서 그대는 형님을 만날 수 없지.”
강은 그 말에 일순 헛숨을 삼켰다. 어찌 이것이 못 물을 일이 아닌가. 심각하리만큼 내밀하고, 들었어도 대답할 바를 모를 이야기다. 강이 할 말을 잃으니 해인이 잠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무리하게 끼어들며 화제를 바꿨다.
“옛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나요. 아, 그렇지. 오라버니, 당분간은 중경에서 지내고 싶은데 전 어디서 지내면 될까요?”
“지내던 곳에서 지내야지.”
해인은 일찍이 창의 건국이 반포된 직후까지도 창천성에 머물고 있었다. 그 당시에 태후 역시 신궁을 불태운 이후 강제로 창천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속세를 떠난 지 9년이 지난 다음이었으므로 다소 정신없는 때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해인을 끝까지 보우한 것이 태후였다. 스스로 낳은 세 명의 자식 중, 장남은 차남의 손에 죽었고 차남은 대륙을 누비는 데에 여념이 없었으므로 하나 남은 어린 딸에 대한 염려가 남달랐으리라.
그때 해인의 나이가 겨우 열넷에서 열다섯 즈음이라 태후는 산이 해인을 정치적인 이유로 시집을 보내 버릴 것을 염려하여 더욱 싸고돌았다. 이미 선친의 첩실이 낳은 여식들을 모두 정략혼 시킨 다음이라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산은 하나 있는 누이동생인 해인을 퍽 아꼈으나, 태후가 그에게 가진 불신이 워낙 컸고 그 손으로 장남을 죽였으니 해인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여겼을 터였다.
아무튼, 그런 전차로 태후는 금궐로 온 다음에도 경헌궁에서 해인과 함께 지내기를 바랐다. 해인을 곁에 두고 시시각각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곧바로 손 쓸 수 있는 반경 내에 두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인은 산과 같은 방랑벽이 있었으므로, 시국이 안정된 다음에는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이유로 중경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사랑해 마지않는 어머니와 오라버니의 갈등을 보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다.
“경헌궁 말씀이세요?”
“그래.”
“저는 좋아요.”
“내가 다른 곳에서 지내라 하여도 모후가 널 경헌궁으로 들이려 하실 거다.”
“어머니는 오라버니께서 절 정략결혼 시키실 거라고 생각하시죠. 그것 때문에 더욱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지 않을 거라는 뜻을 내비치시면 적어도 제 일에 있어서만큼은 경계하시지 않을 거예요.”
해인의 말에 산이 옅게 웃었다. 산은 그리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찻잔 끝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은 슬슬 이대로라면 자신이 황상의 내밀한 가정사를 알게 되는 것이라는 자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신은 이만 궁내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할 일이 있었는데 공주님을 혼자 계시게 할 수 없어 있었던 것이니……. 두 분께서 오랜만에 보신 만큼 나누실 말씀도 많으실 것인데 신이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산의 성정상 강이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그 앞에서 드러내 놓고 할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듣고 있는 것도 영 불편하였다. 강이 물러나기를 청하자, 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낭관, 만나서 반가웠어요.”
“저 역시 영광이었습니다, 공주님.”
사실 강은 산의 내밀한 사정에 대하여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기껏 산에게 품은 호의가 모두 무너질 것 같은 기이한 예감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산이 지나온 발자취는 지극히 강의 사상과 대척점에 있었고, 그리하여 강은 창천성에서 그렇게 그와 첫 대면을 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좋은 감정을 지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껏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곳에 머무는 3년 동안은 갈등 없이 잘 지내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이 금궐에서 강이 의지할 수 있는 데라고는 산뿐이 아니던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산에게 편견을 지닌다면 괴로운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낭관, 어딜 다녀오는가?”
궁내청에 돌아왔을 무렵에는 대부분의 관원들이 한데 모여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이 궁내청문을 밟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들이 잠시 말을 멈추고 돌아보며 인사하니, 강이 갑작스레 모인 시선에 당황하며 짧게 대꾸했다.
“아, 잠깐 희건궁과 경헌궁엘 다녀왔습니다.”
“거기는 어쩐 일로?”
“아, 명받은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한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어찌 이리 모여 계십니까?”
“자네, 혹시 명화궁에 대해 들은 것 없나?”
“명화궁이요?”
“작일 명화궁에서 상궁 하나가 죽었다네.”
“상궁이 죽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그 상궁이 희비 마마께서 친정에서 데려오신 유모인데 희비 마마께서 북양에 가실 적에도 함께 데리고 가셨을 정도로 수족처럼 부리던 이였던 모양이야.”
강은 문득 제가 북양에서 희비에게 불려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강이 희비 하는 소리가 하도 기가 막혀 코웃음을 흘렸고, 이를 보고 있던 상궁이 강의 뺨을 쳤던 일이 있었다. 어찌 그것을 잊을까. 그 일로 말미암아 제가 그리 굴면 튄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세법을 바꾸기까지 하였질 않은가.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니 응당 죽을 때가 되어 죽은 것이겠으나, 어쩐지 께름칙하여 강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 죽었답니까?”
“그게, 폐하께서 죽이셨다는구만.”
“폐하께서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태중태부에 이어 상궁까지 죽였다니, 대관절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개 상궁이 채윤직에 대하여 나쁜 말을 했을 리도 없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딱히 황상의 심기를 거스를 일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폐하께서 친히 그러셨다는 것입니까? 태중태부처럼요?”
“그것은 아니고, 정확히는 죽이라 명하신 것이지. 자네 매일 희건궁을 드나들면서 그것도 몰랐나?”
“……예, 그런 말씀은 받잡지 못하였는데요.”
“그 상궁이 불경스럽게 사찰의 물건을 지니고 있다가 실수로 폐하의 앞에서 흘린 모양이네. 폐하께서 그것을 어찌 그냥 넘어가시겠나. 그리 신불에 학을 떼시는 분인데 말이야.”
강은 그 말에 일그러진 안면을 굳혔다. 산이 신적으로 이름을 드높인 일에 대해 몰랐던 것도 아니었고, 그가 어찌 굴었는지 모두 알고 있기에 저를 죽이지 말아 달라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제 생사가 걸린 일이니 누구보다 산의 신불 혐오를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산이 신불을 믿는 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들으니 소름이 다 돋아나는 것이다. 옷깃을 타고 한기가 스미는 기분에 강이 팔을 쓸었다.
“그 상궁도 참으로 멍청하긴 했지. 희비 마마씩이나 모시면서 어찌 그것 하나 끊어 내지 못했단 말인가. 그 일로 희비 마마께서 총애를 잃으실 거라는 말도 있던데. 희비 마마가 참 안됐지. 사람 하나 잘못 들였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가 말이야.”
“예, 예…….”
강은 그만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 탁상을 손으로 잡아 몸을 지탱했다. 고작 3년이니 그동안 숨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으나, 만에 하나 들킨다면 어찌 될 것인가. 몇 번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이질 않았던가.
조심해야 한다. 천리안이든, 비망의 능력이든 들킨다면 그저 일개 인간임에도 타고나게 된 특수한 능력이라 변명하여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최 행수에게도 그리 둘러대었고 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산에게는 그런 변명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든 하늘과 연결 지으려 들면 강도 빠져나갈 구석이 없을 것이니, 특히 이 사실을 숨긴 채윤직에게 화가 미칠 것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걱정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만사에 미련이 없는 강에게 걱정할 것이 무에 있을까. 그저 천인임을 들켜 자신과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하는 것만이 유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