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 낭관, 어제 하루 못 봤다고 새롭구만.”
오늘도 어김없이 궁내청의 아침을 열던 강은 두 번째로 등청하는 복야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제 성귀인이 궁내청에 일러 이 낭관에게 밤까지 시킬 일이 있으니 찾지 말라고 했다고 전해 들어, 그런 체를 하고 있지만…… 어쩐지 양심에 찔렸다.
결국 산과 노닥거리다가 글씨 몇 자 쓴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질 않은가.
“오셨습니까, 복야 어른.”
“그래. 어제 혜인궁에서 무엇을 했기에 그리 오래 걸렸나?”
“……아, 저기 저……. 귀인 마마께서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셔서 말씀드리기가 난감합니다.”
“그런가?”
복야는 쉽게 수긍하고 물러갔으나, 다른 관원들은 달랐다. 등청하기가 무섭게 강에게 다가와 한마디씩 묻고 가고는 한 것이다. 그것이 점심나절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묻는 사람이야 한 번 묻고 말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스무 명도 넘는지라 슬슬 짜증이 오를 무렵이었을까.
그때가 아마 미시쯤 되었을 것으로, 이제 마악 점심 식사를 마친 관원들이 하나둘 궁내청으로 돌아와 다시금 강을 둘러싸고 귀찮게 굴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느 태감이 문간을 넘으며 “흠흠!” 하고 크게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강이야 그게 뉜지 모르는 고로 신경도 쓰지 않았으나 다른 관원들은 달랐다.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강은 느릿하게 복야의 옆으로 가,
“누굽니까?”
하고 물었다. 복야는 잠시 태감이 다른 낭관을 상대하는 틈을 타 낮은 목소리로,
“명화궁의 수령태감인 장채윤일세.”
하고 대답해 주었다.
“명화궁이라면…….”
“희비 마마의 궁이지. 아마 희비 마마께서 북양에서 돌아오실 때가 된 모양이야.”
강은 그 말에 머릿속에 한 떨기 수선화와 같았던 아름답고 청초한 여인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최고 총궁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도록 얼굴에는 귀한 기운이 돌았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던 여인이었다. 물론 그녀의 상궁에게 따귀를 맞은 전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잘못이었지…….’
강에게는 그리 나쁜 기억으로 남은 여인은 아니었다. 고작 한 번 보았지만, 그저 세상 물정 모르고 귀하게만 자란 여인 같은 느낌이라면 설명이 좀 더 될까. 강이 잠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장채윤이 안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희비가 중경으로 도달하는 대로 부족함 없이 쉴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 먼저 말을 달려 돌아온 만큼, 장채윤 역시 강을 알고 있었다.
강이 북양에 머무는 그 잠시 동안은 자리를 비운지라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상궁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기로는 오만방자한 치라 하였다. 그래서 금궐 문을 넘자마자 사람을 불러 강이 지금 어찌하고 있는지 알아보았는데, 그 며칠 사이에 받은 총애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아 더욱 방자해졌다고 하니. 제 웃전 알거든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이강이라는 낭관은 누굽니까?”
결국 그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싶었는지, 장채윤이 제 일을 보아 주던 낭관에게 물었다. 워낙 궁내청을 찾는 궁인들이 이강이 누구냐 남몰래 물어 얼굴을 확인하고 가는 일이 빈번하였으므로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장채윤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희비의 태감이 아닌가.
“장 공공, 이 낭관은 어찌 찾으십니까?”
“워낙 유명인사라. 저도 구경을 하고 싶어 그럽니다.”
듣기로는 시침까지 들었다고 하던데, 하고 말을 붙이려던 장채윤은 이내 그만두었다. 낭관들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졌는지 알 수도 없었고, 만일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 말을 처음으로 꺼낸 자가 되므로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저기, 저자입니다. 복야 어른 옆에 있는 사람 말입니다.”
“으음…….”
보기에는 그리 무례한 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얼굴이지만, 세상에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많았다. 장채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태감들에게 짐을 들게 하고 궁내청을 빠져나갔다.
*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북양에 황상과 함께 내려갔다가, 끈 떨어진 뒤웅박처럼 올라올 때는 홀로 돌아온 희비는 불편한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인사를 올렸다. 산이 붓끝으로 턱 밑을 긁적긁적 긁다가, 일어나라는 듯 손짓하자 상궁들이 다가와 희비를 부축하였다.
“희비는 예를 갖추지 말라. 회임을 하였으니 일어나기가 불편할 것 아니냐.”
“예, 폐하. 아직까지는 괜찮으니 걱정 마소서.”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마차에서 내려 희건궁으로 오는 내내 장채윤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들은 희비는 사실, 조금 황상의 옆에 서는 것이 조금 암담하게 느껴지는 지경이었다. 본래 회임을 하면 낭군들이 더욱 취지공비 집지공함吹之恐飛 執之恐陷8) 하며 더욱 지극정성으로 돌본다고 아버지가 말하였는데, 산은 별로 그런 눈치도 아니었거니와 이강이라는 자를 만난 이후로는 그나마 있던 관심도 사라진 것 같더란 말이다.
본디 산이 자신을 아끼는 것에도 그리 연정이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하였다. 완구나 되는 듯, 희롱하기 좋은 물건이라 생각하고 귀엽게 여기는 정도라 생각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이제는 황손을 낳을 어미가 되었으니 조금 달라지겠거니 하였던 것이다. 아버지도 일찍이 황실에 시집오기 전, 산의 성품이 심히 변덕이 있으니 그 비위를 잘 맞추라 신신당부를 하였던 고로 각오를 아니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회임을 하여 그런지 감정의 기복이 커져 괜히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기분도 들고는 하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제 처지가 퍽 슬프다. 후궁들 중에서는 월등히 처우가 좋은 것은 사실이나 낭군에게 연심 한 번 얻어 내지 못하는 것 같아 외로워졌다. 희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희비, 어찌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개의치 마소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이리 와서 짐에게 얼굴을 보여라.”
“부끄러워 싫사옵니다.”
“저런……. 네 서운한 일이 있었던 게로군. 짐이 너를 홀로 두고 북양을 떠난 것이 그리 서운하였더냐.”
“신첩은 그것이 아니오라,”
“아니기는. 짐이 창천성에 가느라 생각보다 행행이 길어진 고로, 갈 길이 바빠 그랬다는 걸 네가 모르지 않는데 어찌 그리 서운해한단 말이냐. 눈물을 거두라. 오늘은 명화궁으로 가마.”
“……참말이시지요?”
“지존은 두말하지 않는다. 고단할 터이니 가서 쉬어라. 밤에 보자.”
“예, 폐하. 하오시면 신첩은 더는 방해치 않고 명화궁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시금 예를 갖추려다가 좀 전 황상이 그러지 말라 한 것이 떠올라 희비는 고개만 조금 숙이고 희건궁을 나섰다. 그래도 이렇게 조금이라도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것은 내명부에 희비가 유일하였으므로, 그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었다. 누가 감히 황상에게 제 속을 비추겠는가. 황상이 그것을 보아 넘겨 주는 것도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이강만 아니라면.
“장채윤.”
“예, 마마.”
“아버지께 정전에 가시기 전에 잠시 본궁이 뵙자 한다고 전해라.”
이강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황상이 창천성에 갔다는 이야기도 해야 했다. 한 시진 뒤에 정전에서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마침 시간이 맞았다. 창천성이 보통 땅인가. 유자명의 숙적인 채윤직이 머무는 땅이다. 아마 이강이 금궐로 오면서 황상이 창천성에 들르셨다는 이야기는 전해졌을 것이나, 그 이강이 채윤직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마마, 비빈들이 문안을 여쭈기 위하여 명화궁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가마에 오른 뒤, 명화궁에서 나온 궁녀가 아뢰자 희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안 인사를 받고 나서 유자명을 만나면 딱 시간이 맞았다.
“희비 마마를 뵙습니다.”
가마가 명화궁 뜰에 내리자마자, 상궁이 희비를 부축하여 안까지 모셨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늘어선 후궁들이 인사를 올렸다. 희비는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 다 물리치고 싶었으나, 그간 내명부가 어찌 돌아갔는지 알아야겠기에 힘든 몸을 바로 세우고 겨우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간 본궁이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느냐?”
“이를 말씀이십니까. 아무 일도 없었사옵니다, 마마.”
“없기는!”
성귀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창빈이 코웃음을 치며 바로 반박했다. 희비는 그 말에 표정을 굳히며 창빈을 바라보았다.
“어찌 그러는가?”
“이강이라는 낭관의 방자함이 눈 뜨고는 못 봐줄 지경이랍니다! 마마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강이라는 사내를 말입니다.”
염려한 일이긴 하였으나, 창빈의 입으로 들으니 더욱 갑갑했다. 북양행성에 있었을 적에도 위험하다, 위험하다 생각하였더니 금궐로 와서는 더욱 활개를 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후궁들의 으뜸인 희비에게도 그리하였는데, 그 밑인 빈이나 귀인에게는 오죽 오만하였겠는가. 보지 않아도 빤했다.
“그 작자가 매일 같이 희건궁에 불려간다는 것은 둘째 치고, 신첩도 그 작자의 오만함을 바로 잡으려다 폐하께 그만 미움을 받았습니다. 소현자는 그 일로 어전에 나서지도 못한답니다.”
“시침을 들었다고 하니, 아마 첩지라도 받을 줄로 알고 그렇게 방자한 것이겠지요. 받아 봤자 뒤를 받쳐 줄 집안이 없으니 믿을 것은 성총 하나뿐인데, 성총 하나로 어찌 그 긴 세월 버틴답니까. 회임도 못 하는 사내인데요.”
혜소의가 말을 보태자,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던 연 상재가 몸을 조금 움츠렸다. 그녀는 이렇게 모일 때마다 서슬 퍼런 대화에 이골이 나는 고로, 칭병하여 몇 번 나오지 않았다. 그랬더니 다른 비빈들의 눈 밖에 난 것 같아, 오늘부로 꼬박꼬박 나오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대화들이 격하니, 으슬으슬 춥기까지 하였다.
“걱정 마소서, 마마. 어제 폐하께서 이강이 아닌 다른 미동을 침전에 들이셨다고 합니다.”
가만 듣던 성귀인이 다시금 끼어들었다.
“다른 미동?”
“예, 마마. 이강에 대한 총애가 그리 깊으시면 몇 번 품지도 않으시고 다른 사내를 찾으셨을 리가 없질 않겠습니까.”
“흠…….”
“아무래도 이강의 방자함에 폐하께서 진노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분수를 모르는 이를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성귀인이 자못 여유롭게 말하며 찻잔을 들어 올리자, 희비도 창빈도 한결 나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화제는 이강에게서 벗어나 북양행성이 어땠는지에 대해 비빈들이 묻고, 희비가 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들 진심인지 가식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그저 “부럽습니다, 마마.” 하고 말해 대었는데 희비는 그것에 기분이 더욱 괜찮아졌다. 자신이 없던 사이 이강을 제한 다른 비빈들에게 총애가 돌아가지 않은 것 같으니, 이 점도 안심이 되었다.
“마마, 승상께서 오셨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상궁이 들어와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희비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팔걸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본궁은 이만 쉬어야겠으니 다들 물러가라.”
그로부터 한 시진이 지났다. 곧 있으면 퇴청할 시간이다. 강은 조금 설레었다가도 그 길로 희건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축 처지고 말았다. 글씨를 쓰는 것도, 산을 만나는 것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심심하지 않고 좋았다. 하지만 아직도 어떤 서체로 편액을 쓸지 정하지 못하였으니, 결국 소득 없이 돌아와야 하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강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뭐라도 얻어지겠지.’
퇴청할 적마다 다른 관원들의 눈에 띌까 염려하며 희건궁으로 몰래 가는 것도 힘들었다. 이러다가 서른 날이 아니라 마흔 날, 쉰 날까지 불어날지도 모르겠다.
“크, 크, 큰일 났습니다!”
다들 퇴청할 시간만 기다리며 지루하게 붓질하던 궁내청 안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낭관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이 희게 질렸고, 오다가 한 번 넘어진 것인지 무르팍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좀처럼 이런 일이 없는지라, 복야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인가! 어찌 소란이야!”
“폐, 폐하께오서……!”
“폐하께서 왜! 우선 진정을 하고 말해 보게. 응?”
“지, 지, 진정을 어찌합니까! 폐하께서 정전에서, 정전에서!”
“정전에서 무엇인가!”
“태, 태중태부의 목을 치셨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웅성대던 궁내청에 온통 적막이 흘렀다.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괴이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벌을 내리기 위하여 끌고 간 것도 아니고, 정전에서 다른 신료들이 다 보는 사이에 목을 날렸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모두 목소리를 모아 말하였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와중 강만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산이 저 최동단의 창천성에서 여러 사람 목숨을 짓밟고 제국을 창건한 것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어찌 새삼스레 놀라는가. 그리 스러져 간 뭇 백성들의 목숨이나 태중태부의 목숨이나 무엇이 다른가. 자신이 알던 산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기는 하였으나, 자신이 알기 전 들어왔던 산의 악명과는 꽤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어찌 태중태부의 목을 치셨단 말인가. 아니, 그 목을 치셨다는 것이 관직을 박탈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말 그대로의 그,”
“예, 그……. 그 목을 치신 겁니다. 폐하께서 행행을 가셨을 때 창천성에 납신 일로 태중태부가 따지고 들었는데, 그 와중에 창천성 영주 이야기를 포함하여 폐하께 과도하게 아뢰기는 하였다고…….”
시종 놀라지 않았던 강은 창천성 영주라는 말 한마디에 가슴 언저리가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사수를 바라보았다.
“자네 연고지가 창천성이라고 하였지?”
복야는 강이 동요하는 것을 보며 물었다.
“……예.”
강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중태부가 채윤직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고했기에 산이 목을 쳤단 말인가. 강은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아서 손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흠흠!”
어떤 낭관의 뒤로 목청을 틔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관원이 시선을 돌린 곳에는 소문성이 서 있었다. 왜 하필 이런 때에 희건궁의 수령태감이! 하고 생각하며 모든 관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무렵, 소문성이 안에서 창백한 얼굴을 한 강과 정면으로 눈을 맞추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소 공공.”
복야가 먼저 나서며 묻자, 소 공공이 복야에게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바로 강을 향하여 다급하게 말하였다.
“이 낭관은 어서 나를 따르게.”
“…….”
복야는 이마를 짚었다. 어인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창천성과 관련된 이번 일. 그리고 창천성 출신인 이강. 그리고 그 이강이 궁내청의 소속이 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결코 안심할 수 없다. 복야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강에게 손짓했다.
“어서, 지체 말고 폐하께 가 보시게.”
“……예.”
강은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궁내청을 나섰다. 시종 손이 떨리고 진정되지 않았다.
희건궁에 도착했을 무렵, 집무실에서 큰 파열음이 강의 귀를 꿰뚫었다. 많은 사람의 발소리가 산만히 복도를 울렸고, 머지않아 다른 둔탁한 것이 문에 부딪혔는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강은 채윤직에게 변고가 생겼는가 하여 두려운 마음에 차마 소문성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하였는데,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로 황상을 배견하면 안 될 것 같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태감 어른. 대관절 무슨 일입니까?”
“……말도 말게.”
“심각한 일입니까? 저는 왜 불려가는 겁니까?”
소문성은 잠시 마른침을 삼키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강의 귓전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자네는 영주님의 아들이 아닌가.”
“……아버님께 무슨 변고가 생긴 겁니까?”
“변고, 글쎄. 자네 아버지에 대한 위협은 늘 있어 왔지만 죽은 태중태부가 말을 심하게 하기는 하였지. 폐하께서는 그 때문에 진노하신 것이라네.”
“대관절 무어라 했기에 폐하께서 태중태부의 목을 날리신 겁니까? 그리고 정전에 있던 이들은 말리지 않고 무엇을 한 것입니까?”
“말릴 틈이나 있어야 말리지. 폐하께서 옥좌에서 내려오시더니, 갑자기 시위의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아서 태중태부의 목을 치셨다네. 정말로 질풍 같아서, 말릴 새가 없었지…….”
소문성은 그 당시를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사람의 목을 날렸으니 정전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고, 완전히 상식 밖의 일이었으니 대소신료들이 아연실색하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정전 풍경을 생각하니 강 역시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이런 때에 산을 만나라니, 어쩌면 강의 목도 온전치 못할지도 모른다.
“폐하, 이 낭관이 들었사옵니다.”
소문성이 고하였으나 안에서 나오는 대답은 그저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는 잠시 강을 돌아보았고, 강은 어찌해야 하느냐는 눈빛으로 소문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좀처럼 있지 않은지라 그 역시도 방도를 몰랐다. 그는 심히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내 강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들어가 보게.”
“……저더러 차라리 죽으라 하십시오. 제 목도 함께 달아나면 책임지실 겁니까?”
귀천도 하기 전에 죽을 순 없다. 강이 마음을 굳건히 하며 소문성을 바라보자, 소문성이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 자네를 죽이실 리가 있나. 자네에게 성총을 퍼붓고 계시는데.”
“성총이 있다 한들 심기를 거스르면 어찌 될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폐하께서 저리 이성을 잃고 계신데 저라고 예외가 되겠느냔 말입니다.”
“자네는 영주님의 아들이지 않은가. 폐하께 영주님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그래?”
“……모릅니다.”
“모르면 들어가서 배우게. 폐하께서 자네에게 칼을 겨누시면 내가 온몸으로 막아 주겠네.”
“태중태부 목 날리실 때도 못 막으셨으면서 어찌 막는다 하십니까! 전 목숨이 아까운 고로 못 들어가겠습니다!”
계속해서 실랑이가 끊이지 않으니 소문성은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시종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강을 다시 독촉하였다. 뉘라서 지금의 황상을 말릴 것인가. 황상 위에 있는 유일한 웃어른인 태후조차도 경헌궁에서 한 발짝 걸음을 떼지 않는데 고작 낭관 따위가 어찌 말릴 것인가. 강은 그리 생각하였으나 소문성의 의중은 조금 달랐다.
“빨리 들어가게! 폐하께서 더 진노하시기 전에!”
“……제기랄! 빚으로 달아 둘 겁니다.”
“그래, 제발. 제발 들어가 주게. 제발 폐하를 말려 달란 말이야!”
강은 반쯤 떠밀려 희건궁의 회랑을 밟았다. 점점 집무실에 가까워질수록 분주히 집무실을 드나드는 상궁 태감들과 번번이 몸이 부딪혔다. 그들은 손에 온통 박살 난 물건들을 들고 있었는데, 그 내력은 뻔했다. 산이 집어 던져 그리 산산조각이 난 것일 터다.
집무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완전히 난장판이 된 곳에서 산이 홀로 등을 돌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표정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어찌할지 생각이라도 하겠으나, 보이는 것은 등뿐이니 도리가 없다. 강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아뢰었다.
“……폐하, 이……이 낭관이옵니다.”
집무실 앞에서 고하였으나 미동이 없다. 다시 한번 고해야 할까, 어찌해야 할까. 괜히 같은 말 두 번 하면 듣는 입장에서 짜증이 치밀지도 모른다. 강은 대답이 있을 때까지 가만히 있기로 마음먹고 입을 다물었다.
“이 낭관은 들어오지 않고 무얼 하고 섰느냐.”
“……송구하옵니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손발에 식은땀이 찬다. 집무실 안에는 상궁도, 태감도 없다. 황상이 칼을 휘두르면 온몸으로 막아 주겠다던 소문성도 따라오지 않았다. 강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몇 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산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러므로 강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 낭관. 그림을 그려라.”
“……예?”
“그림!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아, 예! 어떤…….”
“아무거나! 아무거나 그려.”
아무거나라는 말이 더 무섭다. 하지만 더 물었다가는 큰 고초를 겪을 것 같아 강은 더는 묻지 않고 살금살금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왔다. 벼루를 써야 하는데 다 깨져 버린 고로, 마땅히 먹과 물을 갤 곳이 없다. 강은 앓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먹을 갈 만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가……. 그 씨팔놈의 새끼가 나를 더러 무어라 했는 줄 알아?”
한참 버벅거리고 있는데 산이 벌떡 일어서며 강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반쯤 까무러칠 듯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레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하고 말았다. 용안에 핏방울이 잔뜩 튀어 있질 않은가. 잔학하고 무도한 모습이다. 강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모, 모릅니다.”
“짐의 앞에서 감히, 감히 노인을 더러……!”
“…….”
“노인을 더러 육시를 해도 모자라고 그 일가가 대대손손 사지가 썩어 들어가는 저주를 받아도 모자란 대역죄인이라고 하였어. 편히 죽게 해서는 안 되며, 죽더라도 부관참시를 하여 그 두개골을 부숴도 모자라다고 하였단 말이야! 이 낭관이 말해 보라. 내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지!”
강은 채윤직이 어떤 이유로 죄인이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개국공신의 위를 박탈당하고 창천성으로 내려가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채윤직이 그것을 함구하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강 역시 구태여 따져 물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전에서 그런 모욕을 당할 만큼의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사정을 다 떼어놓고 고려하더라도 강이 아는 채윤직은 그랬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그런 죄를 지었더라면 산이 채윤직을 그리 그리워할 리가 없었다.
“창천성에 간 것은 대역죄인을 옹호한 일이라 제국을 떠받드는 근간을 짐의 손으로 직접 부순 것과 진배없으니 자중하라 하였다고. 어찌 말이 없느냐, 이 낭관. 이래도 그 늙은 것의 잘못이 없느냐!”
“……어찌 신 따위가 감히 조정의 일을 논하겠습니까.”
“내가 말해도 된다고 하지 않아. 말해 보라. 내가 틀린 것이야?”
강이 엎드린 채로 좀처럼 대답이 없자, 산이 그 앞에 앉아 거칠게 그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게 하였다. 정면으로 마주친 눈이 감히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폭으로 일렁이며 마주쳐왔다. 억세게 붙들린 턱이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하였다.
“신은 아버지가 어떤 연유로 그리 되신지 알지 못하옵니다. 만일 아버지가…… 정말 대역죄인이라면 그런 말을……. 대역죄인임에도 목숨을 보전하였다면, 감수해야 한다고…….”
“다시 말할 기회를 주마.”
지존은 그 대답이 틀렸다고 한다.
강은 바닥을 짚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폐하, 제발…….”
“제발, 제발 무엇이냐.”
정말로 강의 의중이 궁금한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채윤직이 그리운 것이고, 채윤직을 불러올릴 수가 없으니 그의 가솔인 강을 본 것이고, 강의 입에서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태중태부가 죽을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건국 초기였다.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지역이 많고, 심지어는 복구조차 되지 못한 채 구휼을 기다리고 있는 곳도 있다. 법제도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아, 강은 채윤직에게 중경에서 법전을 편찬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한 지금의 창 제국에서 지존은 신료들과의 권력의 한도를 다투고 있다.
어쩌면 산이 태중태부의 목을 친 것은 법령이 반포되어 황상의 권력이 제한되기 전에 자신의 몫을 더 가져오려는 수작인 줄도 몰랐다. 공포정치는 어리숙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곳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산은 속을 모르는 자이니,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행했을 것이다. 단순한 감정의 동요로 태중태부의 목을 쳤다는 것은 강에게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은 머릿속을 부유하는 수많은 생각들을 가까스로 정리하고는 한숨처럼 아뢰었다.
“어찌 신하된 자가 지존의 옳고 그르심을 판단하겠습니까.”
“허면, 내가 지존이 아니면. 그냥 산이면!”
그러나 산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도저히 산이 어떤 생각으로 그리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오리무중인 것은 산의 의중일 뿐으로, 이 상황에 대하여 알아지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채윤직은 어쩌면 조정에서 일종의 금기로 취급되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금기가 깨진 것은 산이 창천성에 다녀갔기 때문이고, 채윤직을 견제하던 이들이 이것을 빌미로 삼아 다시금 그의 처지를 되새김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산은 그것을 그냥은 두고 볼 수 없었을 터였다. 강은 차분하게 머리를 식히며 생각을 이어 갔다.
“폐하께서는 아버지를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
“이미 공공연히 대역죄인이 되어 버린 아버지를, 죄인이라고 아니 생각하시기에 구명하고 창천성으로 보내신 것입니까.”
“…….”
“아버지는 누명을 쓴 겁니까?”
“…….”
“그렇다면 아무 잘못도 없으십니다. 잘못이 있다고 한들, 뉘라서 그런 잣대를 폐하께 대겠습니까. 진실은 통하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무고함도…… 무고함도 폐하께서 밝혀 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산은 강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붙잡아 올린 턱을 놓아주었다. 그 힘에 겨우 이끌려 고개가 들려 있던 강은 그대로 다시 얼굴을 떨구었다. 강의 눈에는 그저 산의 발만이 보였다. 그는 일어서지도 않고 여전히 그 앞에 앉아만 있었다.
“이 낭관. 나는 자고 싶어졌다.”
한참 동안 집무실 안을 나돌던 고요를 깬 것은 산이었다. 산은 매우 침착한 음성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화선지를 붙잡고 있던 강은 그를 올려다보며,
“……그림은 그리지 말까요?”
하고 물었다. 한바탕 난리가 겨우 잠재워진 것 같아 한시름 놓기는 하였지만, 방심하자니 아직도 전운이 감돌았다.
“그리지 말고 무릎베개를 해 줘.”
산은 그리 대답하고 강의 손목을 턱 쥐었다. 그리고 단번에 바닥에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산은 발로 집무실 문을 걷어차 열고는 그대로 강을 이끌고 긴 복도를 걸었다. 밖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태감이며 상궁들은 좌우로 갈라져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황상의 역린이 잠든 줄을 알고 크게 안심하였다. 황상이 직접 찾은 것은 아니었으나, 소문성이 꾀를 내어 채윤직의 연고자이며 성총을 한 몸에 받는 이 낭관을 부른 것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산이 강의 손을 붙들고 도달한 곳은 침전이었다. 그 안을 정리하던 궁인이 황상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 바로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상까지 강을 이끌고 가더니,
“앉아.”
하고 말하였다. 강은 우선 시키는 대로 하였으나, 얼굴에 피가 튀긴 용안을 계속 바라보고 있기가 무서운 고로 작은 목소리로 엎드린 궁인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물수건을 하나 갖다 주십시오.”
“물수건은 왜?”
궁인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산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옆에 놓인 작은 거울을 들어 산의 앞에 대어 주었다.
“용안에 더러운 것이 묻어 그렇습니다.”
“닦기 귀찮다.”
“신이 닦아 드릴 테니 물수건을 가지고 오라고 해 주십시오.”
산은 잠시 강을 내려다보다가 궁인에게 손짓하였다. 그러라는 의미였으니, 그 궁인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침전에 낭관 따위가 출입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마 평소 같았으면 천부당만부당하다며 소문성이 가로막았을 것이나, 오늘 일이 워낙 파격적이었던 데다 아무도 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을 것인즉 말렸다가는 그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내가 된다면 되는 것이지.”
“예에. 어서 누우십시오. 주무시고 나면 마음이 한결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그걸 그대가 어떻게 알아.”
“원래 잠은 그런 것입니다. 화타가 다시 태어나 어떤 약을 처방하더라도 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그림을 그려.”
“예.”
“글씨도 쓰고.”
“예.”
넙죽넙죽 대답도 잘한다. 산은 괜히 강을 흘겨보다가, 그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이윽고 궁인이 평소 소세하는 데에 쓰는 금동 대야에 물수건을 개어 안에 들여왔다. 황상이 낭관의 무릎을 베고 있는 모습을 눈에 담은 것이 황망하여 탁상에 금동 대야를 올려놓은 뒤에는 지체 없이 침전을 나갔다.
“눈을 감으십시오.”
산은 몽니라도 부리는 양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감았다. 그러자 강이 물수건을 건져 물을 짜고 용안에 드리운 핏자국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흰 휘건에 불그스름한 핏물이 조금씩 묻어났다. 꼼꼼히 목에 튄 것까지 닦아 내고 나니 어느새 휘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강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대야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다시 산을 내려다보니 그는 어느새 잠에 빠져 있었다. 아까는 그리도 나찰 같더니, 이리 보니 강이 알던 그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강은 집무실에서 턱이 거칠게 들리며 마주했던 그 얼굴을 떠올리고는 괜히 소름이 돋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떠올렸는가 보다.
‘보모도 아니고. 매일 무릎베개라니.’
강은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괜히 용안에 손을 대어 보았다. 짙은 눈썹을 손끝으로 조금 만져 보고, 이마에 드리운 잔머리를 몇 번 쓸어 넘겨 주었다.
‘앞으로 어찌 되려기에 이러나…….’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제아무리 그 뿌리가 하늘에 있다 한들 인두겁을 쓴 이상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
“그게 무슨 말이냐!”
희비는 완전히 질린 얼굴로 장채윤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아뢴 장채윤의 말이 빠른 것도 아니었고, 발음이 나쁜 것도 아니었는데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난감한 기색을 넘어, 완전히 퍼렇게 질린 장채윤은 숨을 고르며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전에서 태중태부가 폐하께서 창천성에 납신 일을 두고 과도하게 논하며 채윤직을 대역죄인이라고 강조하였는데, 폐하께서 진노하시어 시위의 칼을 뽑아 태중태부의 목을 치셨다고 하옵니다.”
창천성으로 납신 일을 두고 논한 것은 당연 승상이 정전으로 가기 전 명화궁을 들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희비는 황상이 아버지의 숙적인 채윤직을 만났고, 채윤직의 사람일지도 모르는 이강을 데려왔다는 사실이 몹시도 위협적으로 느껴져 아버지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의 낭군이 그런 일을 하지 않길 바랐으므로 신료들이 어느 정도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태중태부는 유 승상의 사람이니, 조정에서 말을 꺼낸 것도 물론 유 승상의 명에 따른 것일 터였다. 산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는데, 허면…….
“아버님은, 아버님은 괜찮으시냐!”
희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치자, 장채윤이 부축하기 위하여 달려들며 다급히 아뢰었다.
“예, 승상께서는 괜찮으십니다. 태중태부의 피가 조금 튄 것 말고는…….”
당장에라도 혼절할 것처럼 희비가 이마를 짚으며 다시 주저앉았다. 피라는 말만 들어도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전국시대를 살아온 그녀이지만, 그러한 시절을 감안하더라도 심히 안전한 곳에서만 지냈던지라 이런 이야기에는 영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딱 한 번 성에 자객이 침입하였을 때 오라비가 유자명에게 달려드는 병사를 벤 것을 보았는데, 그때 받은 충격으로 보름을 족히 병상에 있었을 정도였다. 희비는 눈앞이 어지러웠다. 난세가 다 지나고 드디어 태평성대가 왔는데 금궐에서 칼부림이 웬 말이냐. 그것도 내 낭군이, 내 아버지의 사람을.
“어찌, 전시도 아닌데 정전에서…….”
아무리 지존이라 한들 정전에서 관료, 그것도 태중태부의 목을 치는 것은 경악을 금키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 떠나 희비는 한 번도 황상이 그리 진노한 것을 본 일이 없는 데다, 그것이 자신으로 인하여 벌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불안하고 무서웠다. 희비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해야 좋은가……. 아가야, 어미가 어찌해야 좋니…….’
만일 유자명이 그 이야기를 태중태부에게 대신하도록 하지 않고 직접 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른 직위도 아니고 승상이나 되었으니 죽음은 면했을 것이나, 그 진노가 유씨 일가는 물론, 자신과 아이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어찌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마, 희건궁으로 가 보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희건궁……? 본궁이?”
“예, 마마. 폐하께서 진노하셨을 테니 마음도 풀어 드리고……. 마마를 보시면 기분을 푸실 겁니다.”
“……본궁을 보신다고 마음을 푸실까?”
자신이 없었다. 이강이 나타나기 전이라면 한 치의 고민도 없었을 것이나, 그가 나타난 이후부터 점점 불안하였다. 그래도 아까 북양에서 막 올라와 뵈었을 때에는 전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셨으니, 성총이 떠났을지도 모른다 여겼던 것은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희비는 잠시 팔걸이를 세게 쥐었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몸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희비 마마를 뵈옵니다.”
희건궁 앞에 도달하자마자 소문성이 달려와 절을 올렸다. 희비는 가만히 서서 희건궁 안에서 노하신 음성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궁 안에서 시종 깨진 물건 따위를 분주히 나르고 있는 상궁 태감들을 보면 진노가 대단한 것만은 확실한데,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일어나시게. 소 공공, 폐하께서 많이 진노하셨는가?”
“예, 마마. 저들이 깨어진 물건을 들고나오는 것을 보셨지요? 폐하께서 어찌나 무섭게 집어 던지시던지……. 창천성에서 어린 시절부터 쓰시던 것이라며 가져오셨던 벼루도 그만 깨어졌습니다.”
희비는 그 벼루를 알고 있었다. 일전에 생긴 것이 투박하여 지존의 위엄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희비가 새로운 것을 선물하였을 때에도 어린 시절부터 쓰던 것이라 좋다고 했던 벼루였다. 그것까지 집어 던졌을 정도면 진실로 눈앞에 보이시는 것이 없었다는 뜻이니, 희비는 그런 모습의 황상을 뵌 적이 없어 더욱 걱정되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어찌하고 계시는가?”
“지금은 조금 진정을 하시고 침전으로 가셨사옵니다. 하지만 어찌 될지는 소인도 잘…….”
“허면 침전에서는 어찌하고 계시는가?”
“모릅니다. 보고 올까요?”
“그래 주게.”
소문성이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 희건궁 안으로 들어가자, 희비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진정을 하셨다니 우선은 정말 다행이었다. 희비는 미간을 짚으며 내심 태중태부를 원망했다. 그저 창천성에 납시지 마시라 고하면 되지, 대관절 어찌 채윤직을 모욕하였기에 목숨까지 내놓게 되었단 말인가.
태중태부의 남겨진 가솔들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게 되었으나, 그로 인하여 지금 금궐에서는 수백, 수천도 넘는 사람들이 황상의 눈치를 보며 가슴을 졸이고 있다. 전부터 승상이 태중태부가 멍청하다며 욕을 하는 모습을 몇 번 보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리 허망하게 갔으니 참으로 안되었다. 아버지의 사람이었는데.
“그 이 낭관이 참 대단하지?”
침전에 들어간 소문성을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깨진 물건을 들고나오던 궁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비는 숨을 죽였다. 방금 이 낭관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우리도 폐하를 오래 모셨는데도 어쩔 줄을 몰랐는데, 그래도 대담하게 그 안으로 들어가 제 할 말을 하는 것이 아주 대단하더군. 물론 폐하의 총애가 있으니 그만큼 두려움이 적었겠지만, 일개 낭관 치고는 기백이 대단해.”
‘폐하의 진노를 잠재운 것이 이강이란 말인가…….’
희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상이 이 정도로 진노하신 적은 처음이지만, 가끔 심기가 불편하시면 아랫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 한 일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태감이 명화궁으로 찾아와 황상의 기분을 풀어 달라 부탁하여 희비가 희건궁으로 들어 늘 달래 주곤 하였다. 한데 이제는 희비보다 먼저 이강이 불려간 것이 아닌가. 황상이 직접 찾았든, 태감이 찾으러 갔든 모두 희비에게는 충격적이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어허!”
“희, 희비 마마를 뵈옵니다!”
희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재잘대던 궁인이 장채윤의 호통에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이강이 폐하를 뵈었느냐?”
“예, 예. 마마……. 도태감이 궁내청으로 가 이 낭관을 데리고 왔사옵니다.”
“폐하께서 명하시어 데리고 온 것이냐?”
“그, 그것은 아닌 줄 아옵니다.”
“허면, 이 낭관은 지금 어디 있지?”
“폐하께서 이 낭관을 데리고 침전으로 가셨습니다…….”
희비는 그 말에 조금 휘청거렸다. 그럼 지금 소문성이 황상에게 희비가 왔다 고하러 갔다면 이강이 그 이야기를 함께 들을 것인데 그 상황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침전은 지밀이다. 곁에서 모시는 궁인들이 아니고서야 내명부에 속한 후궁들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인데, 어찌 낭관 따위가!
한편, 강은 세상모르게 잠을 자는 산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채윤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산이 채윤직을 보통 신하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창천성에서 보아 알았다. 채윤직을 지키기 위하여 강에게 절연장을 주게 하는 꾀를 대신 내어 주었고, 죄인이라 불리는 채윤직을 보기 위하여 북양에서 창천성까지 몰래 홀로 말을 달린 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 그의 손에서 컸던 정이 있어 그런 것일 터였다.
하지만 태중태부가 감히 지존의 앞에서 담을 말이 아니기는 하였어도, 정전에서 그렇게 고했을 정도면 채윤직의 죄가 보통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대체 무엇일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채윤직은 황상의 아픈 손가락이 되고 말았나.
산이 채윤직을 바라보던 시선과, 거칠기는 하여도 시종 그의 염려를 하는 듯한 말투는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산이 창천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그리고 그곳을 몹시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보아 알았다.
대관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황상은 채윤직을 지키지 못하고 속만 썩게 되었을까…….
“이 낭관!”
강은 속삭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산의 이마를 쓰다듬던 손을 떼었다. 장지문 뒤에 어느새 소문성이 다가와 있었다. 강이 입 모양만 벙긋하여,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소문성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바깥에 희비 마마께서 계시네.”
“희비 마마께선 어쩐 일로…….”
“아마 폐하의 어심을 달래러 오신 것이 아닐까 싶네.”
“폐하께선 지금 주무시는데, 희비 마마가 오셨다고 깨우는 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게 말일세……. 폐하께서 지금 일어나셔서 좋을 게 없는 것 같은데. 어차피 폐하께서 밤에 명화궁으로 납시기로 하였으니, 그때 뵈라고 전해야겠군.”
“예, 그러십시오.”
소문성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 바깥으로 나서자, 강은 다시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한참 하던 것을 다시 하다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쩐지 지금 상전 노릇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지금 희건궁에 있다는 걸 희비가 알면, 내가 일부러 저를 쫓아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산을 깨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들어오시라고 하면 황상이 제 무릎을 베고 주무시는 모습을 희비가 볼 것인데 그걸 보이느니 차라리 오해를 받는 것이 낫질 않은가. 게다가 희비는 회임을 하였으니 이런 꼴을 보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마마, 폐하께서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오늘 밤 명화궁으로 납신다고 아까 말씀하셨으니, 그때 뵙는 것이 어떨는지요.”
소문성이 바깥으로 나와 희비에게 아뢰었다. 자신이 침전으로 갔을 때 그 안에 이강이 있는 것을 어찌 볼까 걱정을 하였더니, 이제 아예 축객이 아닌가. 축객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했던지라 더욱 충격이 컸다. 차라리 눈으로 봤으면 봤지, 망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희비는 고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폐하께서 주무시는데, 어찌 이 낭관이 여태 안에 있는가.”
“……그, 그것은.”
“어찌 감히 침전에 낭관 따위가 들어 있느냔 말이네.”
“마마, 어찌 소인이 폐하의 침전에 대하여 세 치 혀에 올리겠사옵니까. 밤에 폐하를 배알하시면…….”
“알겠네. 그만 돌아가지.”
희비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황상을 뵙기 전에 어찌 된 일인지, 태중태부가 황상에게 무어라 아뢰었는지 정확히 듣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이 잠든 후로 한 시진 반이 지났다. 강은 그때도 채윤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고, 역시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어쩌면 몰라도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강이 금궐에 머무름에 있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채윤직이 미리 언질을 아니 주었을 리가 없질 않은가. 어차피 3년만 지내고 떠날 것이라면 굳이 긴밀하게 엮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강은 한숨을 쉬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가락이 움직인다.’
산의 발가락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강은 다시 산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움직이고 있다. 강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잠에서 깼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여태 자는 척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장난을 치는 것을 보면 잠들기 전보다는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이겠지, 싶어 강은 조금 웃었다. 그리고 산의 코를 쥐었다.
“…….”
“…….”
“푸하! 숨 막혀 죽을 뻔했잖아!”
한참을 참던 산은 결국 숨을 안 쉬고는 못 배기겠는지 입을 열며 소리쳤다.
“기침하셨으면서 어찌 자는 체를 하셨습니까.”
“그대가 잠을 자면 이마를 만져 주니까 자는 체를 했지.”
“……거참. 삼척동자도 아니신데 어찌 그러십니까.”
“시끄러워. 빨리 다시 해.”
산이 그리 말하며 아래로 늘어뜨린 강의 손을 쥐어 제 이마에 올려놓았다. 강은 시종 심술을 내는 것이 딱 어린애다 생각하였지만, 싫은 체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계속 이마를 쓸어 주었다.
“내가 자는 동안 무얼 했어?”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어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그냥 생각을……. 아, 저…….”
강은 문득 희비를 떠올리고 말꼬리를 흐렸다. 오늘은 희비가 북양에서 중경으로 돌아온 날이었고, 하필 오늘 정전 회의에서 태중태부가 채윤직의 이야기를 꺼냈으니 어쩌면 이 일이 희비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황상이 겨우 기분을 풀었는데 희비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또 심기를 거스르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산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손을 저었다. 계속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아까 주무시는 동안,”
“음, 희비가 다녀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예.”
“그러고 보니, 내가 오늘 명화궁에 가겠다고 했었지.”
“그러셨습니까?”
“오냐. 하지만 심기가 불편한 고로 가지 않을 것이다.”
“예에, 하오시면 어디로 가실 겁니까?”
“그대와 함께 있을 거야.”
강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황상이 태중태부의 목을 날렸다는 이야기는 굽이굽이 각 궁의 담벼락을 넘었다. 처음으로 이 이야기가 전달된 곳은 명실상부 황손의 어미가 될 희비의 명화궁이었고, 이에 그리 늦지 않게 물정에 밝은 성귀인의 혜인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다음이 창빈의 명운궁이었는데, 성귀인은 지금쯤 희비가 황상을 달래러 갔을 줄로 알고 꾀를 내어 그녀를 만나러 갔다.
“창빈 마마를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하, 어찌 이런 일이!”
“마마께서도 들으셨습니까?”
“듣다마다!”
“허면 어서 채비하십시오.”
“무슨 채비? 어딜 가려고? 설마 희건궁으로 가자는 말이냐?”
갑자기 서둘러 궁을 나서려는 성귀인을 보며 창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세 얼굴이 파리해져서는 호갑투가 제 살 끝에 닿아 따가운 줄도 모르고 제 팔을 꽉 쥐는 꼴이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늘 황상의 진노는 희비만이 달랠 수 있었다. 창빈이 희비와 자신의 총애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5년 전이었던가. 그때는 창 제국이 창건된 지 오래지 않은 고로, 패망한 연 제국의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활개를 치고 있었다. 번번이 토벌한 땅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으며 마지막 기승을 부려 댈 적이었는데, 성주의 과실로 북단의 땅을 잠시간 피탈당한 일이 있었다. 그 보고를 산이 처음 받았던 것은 밤 시침을 든 창빈에게 아침 시중을 받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때 산은 아무 표정 없이 두 손을 허리춤에 얹고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창빈은 산이 화를 삭이려는 줄을 알고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내 가까이 다가가 고정하시라 청하였는데 산이 창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곁에 놓인 도자기를 손으로 휙 쓸어 바닥에 나동그라트렸다. 창빈이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서 엎드리자, 산이 간다 말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버리지 않았던가. 벌써 5년도 지난 일인데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얼마 뒤, 비슷한 일로 한 번 더 연의 잔당이 산의 심기를 거스른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희비의 명화궁에 계셨단다. 희비가 어수를 두 손으로 붙잡으며 몇 마디 말씀을 올렸는데, 황상이 진노를 풀고 희비를 품에 안으셨다고 했더랬다. 창빈은 그리하여, 자신과 희비 사이에 완연한 능력 차이가 있는 줄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희비가 희건궁으로 불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꼴을 보자고 자신이 성귀인과 희건궁을 간단 말인가.
“미쳤느냐! 희비가 있을 터인데 우리가 무슨 영화를 누린다고 희건궁으로,”
“마마, 아니옵니다. 태후 마마를 뵈러 가야지요.”
“태후?”
“태중태부는 마마의 아버님이신 대사농과도 절친하지 않습니까. 경헌궁에 가서 비는 시늉이라도 하면 태후 마마께서 적어도 마마께 피해는 가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 그렇지……. 내 아버님과 태중태부가……. 소현자! 빨리 가마를 준비하거라! 경헌궁으로 갈 것이야! 네가 아니었더라면 본궁은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두려워만 하고 있었을 것이야. 고맙구나, 성귀인.”
“마마, 소첩은 자나 깨나 폐하와 마마의 걱정뿐이랍니다.”
창빈이 발을 동동 구르고 우왕좌왕하는 동안, 성귀인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현자가 창빈의 가마를 명운궁 앞에 대령하였다. 성귀인은 창빈이 가마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제 것에 오른 뒤, 태감에게 창빈의 뒤를 따라갈 것을 명했다.
“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경헌궁의 황태후는 일찍이 창천성의 영주에게 정실부인으로 시집을 가, 산과 그 손위 형과 손아래 누이를 낳은 생모였다. 산이 18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지아비를 여의었으며, 곧 산이 그 뒤를 이어 영주가 되자 더는 의지할 곳이 없다 하여 신궁으로 들어가기를 바랐다.
이에 산이 창천성에 작은 신궁을 지어 태후를 그 수장으로 봉하였는데, 어찌 된 것이 그로부터 9년 뒤 전국시대의 막이 내려갈 무렵 갑자기 산이 태도를 바꾸어 하늘을 부정하고 신궁들을 모조리 부수기 시작하였다. 태후가 이에 산을 만나 말렸으나, 산이 “귀신을 모신다면 아무리 생모라도 용서할 수 없다”며 태후를 억지로 모셔 가게 하고 그 신궁마저 불태워 버렸다. 그 뒤로 태후는 산의 뜻에 따라 금궐로 들어가 황태후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나 그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리 사이가 좋은 모자지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 산이 그때 태후에게 모질게 했던 것이 걸렸는지 효자 노릇을 하곤 하였으므로, 후궁들이 믿을 어른은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창빈은 어찌 그리 표정이 좋지 않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태후 마마,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하셨사옵니까?”
“창빈 마마, 태후께서는 본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시는지라 경헌궁에서는 삿된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사옵니다.”
상궁이 한 발 나서 아뢰자, 창빈이 그 상궁을 한 번 홱 쏘아보더니 개의치 않고 태후에게 매달렸다.
“태후 마마, 폐하께오서 정전에서 태중태부의 목을 치셨답니다. 신첩의 아비가 평소 태중태부와 연이 있던지라, 심히 걱정되어 염치 불고하고 걸음 하였습니다. 마마, 폐하께 말씀을…….”
“하아…….”
태후는 그 말에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신궁에서 마음을 다스릴 때 읽도록 하는 경전의 몇 구절을 중얼거렸다. 신불神佛을 부정하여, 신적임을 자칭하는 산의 나라에서 이렇게 드러내 놓고 경전을 외는 이는 태후가 유일할 것이다. 창빈은 그 모습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 태후의 팔에 매달린 몸을 떼어 내었다.
“황상이 어인 연유로 그리했다고 하느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태중태부가 폐하께 죄인 채윤직의 무도함을 사뢰어 그리된 줄 아옵니다.”
놀란 창빈을 대신하여 성귀인이 대신 대답했다.
“그건 태중태부가 잘못했구나.”
하지만 태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너무도 의외의 것이었다. 성귀인도 그 말에는 그만 입을 조금 벌리고 말았을 정도였다.
태후는 본래 산에게 몹시 엄한지라, 이는 어릴 때부터 학문에는 임하지 않고 천방지축 나돌아다녔을 때부터 그러하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내 아들이 천하 망나니 같으니 당장 북양성을 형에게 넘기고 신궁으로 들어가 평생 전생의 죄를 씻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을까. 이는 산이 이후에 능히 영주의 소임을 다하게 되었을 때에도 달라짐이 없어서, 조금의 흠일지라도 태후는 못내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는 하였다.
그런데 금일은 어떤가. 산이 어찌 말하더라도 명명백백히 과히 행동하였는데 어찌 이번에는 태중태부가 잘못했다고 하느냔 말이다. 태후는 곁에 놓인 찻잔으로 입술을 조금 축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황상과 채윤직의 관계를 잘 몰라 그러는구나.”
“……폐하께서 죄인 채윤직이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옛정을 보아 개국공신의 직위를 빼앗되, 창천성의 영주로 삼아 구명한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성귀인이 다시금 차분히 대답했다. 태후는 잠시 성귀인에게 시선을 주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황상에게 채윤직은 돌아가신 선친보다 더 아버지 같은 이란다. 황상이 처음 걸음마를 떼고, 처음 말을 하고, 처음 천자문을 익히고……. 그것을 다 채윤직이 보아 주었거든.”
태후는 잠시 옛 생각을 하는 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청천성에서 황상은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었으니, 그 누구도 황상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아니, 기대를 걸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시를 한 거였겠지. 그때도 유일하게 황상이 반드시 큰일을 하실 것이라 믿어 주었던 것도 채윤직이란다. 지금이야 황상이 완전히 환골탈태하였으나,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어찌하여 채윤직이 황상을 그리 믿어 주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채윤직에게 황상은 주군이 아니라 귀여운 아들 같았던지도 몰라.”
“그런 채윤직이 어찌 폐하를 배반하고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단 말씀이옵니까.”
“나도 궁금하구나. 하지만 채윤직이 무슨 죄를 짓든 황상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야. 자식 된 도리로, 어찌 부모가 잘못을 하였다고 목숨을 앗겠느냐. 황상은 그리 생각했던 거야.”
한 번도 누군가에게 채윤직에 대해 자세히 들은 일이 없었고, 그것은 입궐해서는 더욱 마찬가지였다. 금궐에서 채윤직이라는 말은 황상의 진노를 향한 불씨와도 같아서, 그 누구도 그 이름을 망령되게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후가 내어놓은 대답은 매우 놀라웠다. 채윤직을 그저 아끼는 신하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창빈은 이 화가 네 아비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운 것이지?”
“예, 예. 마마…….”
“황상이 그리 분별이 없는 분은 아니란다. 하지만 정 걱정이 된다면 내가 황상에게 말을 전하마. 창빈은 황상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 존귀한 몸이니 걱정하지 말렴.”
“감사합니다, 마마. 감사합니다.”
“희건궁에는 희비가 가 있겠구나. 희비가 황상의 화를 잘 달래 주어야 할 텐데…….”
*
“뭐가 그리 놀랍다고 눈을 그렇게 떠?”
산은 아직도 깜짝 놀란 얼굴을 한 강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리 별스러운 일이었던가. 매일 해시가 넘고 자시가 되도록 희건궁에 늘 함께 있었는데, 그보다 몇 시진 더 같이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은가.
“그,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어, 어떤 그림을 그리면 되겠습니까? 아, 그때 북양의 동산에서 보았던 창천성의 전경을…….”
강이 부산스레 몸을 일으키려 하자, 산이 뒷머리로 다리를 짓누르며 강의 손을 붙잡았다. 상체만 조금 꿈틀대었을 뿐, 강은 일어날 수 없었다. 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강의 손을 붙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희비는 내가 무릎을 베고 누우면 얼굴을 쓰다듬어 준다.”
“……신이 어찌 감히,”
“낭관이 감히 말대꾸를 하는 것은 괜찮고?”
“…….”
거참 이상하게도 강이 말주변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말싸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와 붙여 놓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을 지경인데, 꼭 산과 마주하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 강은 그 손길에 이끌려 그의 뺨을 조금 쓸어 보았다.
“낭관은 놀란 얼굴을 가다듬어라. 언제까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셈이지?”
“……아, 예. 송구하옵니다.”
“밤에 함께 있겠다는 말이 그렇게만 들리는 귀라 부끄럼이라도 타는 모양이구나. 머릿속에 든 망상이 가히 민망하여 이제 얼굴도 붉히는 도다.”
“그, 그런 일 없사옵니다. 어찌 모함을 하시는지요!”
강이 언성을 높였다. 제 손 아래 그 얼굴이 있으니 그 입이라도 손바닥으로 눌러 말을 못 하게 막아버리고 싶어졌다. 어찌 음담패설로 접어드는 것이 이리도 자연스럽단 말인가. 하마터면 그런 줄도 모르고 또 예에, 할 뻔하였다. 강은 산을 노려보았다.
“그대는 일전에 내가 입을 미리 맞추자는 말에도 그리,”
강은 목덜미가 새빨개진 채로 산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 버렸다. 불경임은 알고 있지만, 벌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받고 말겠다. 일단 저 입을 막아야 자신의 창피함이 줄어들 것이 아닌가.
산은 입이 틀어 막힌 채로 잠시 강을 올려다보다가, 침상 위로 늘어트려 두었던 손을 들어 그 손목을 쥐었다. 입에서 손을 떼어 내려는가 보다, 하며 강이 더욱 힘을 더하자 산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이, 이……!”
강이 이번에는 정말로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더니, 산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부끄럼 많은 낭관의 얼굴을 양손에 가두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며 백사가 불여일행이니라百思不如一行9), 이 낭관.”
진실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강은 그 말에 잠시 대답할 바를 모르고 가깝게 안면을 드리운 산과 눈을 마주쳤다.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을 계속 보기가 차마 힘들어 강은 그만 눈꺼풀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입술이 대신 열렸다.
“……이 낭관.”
“……예에, 예?”
“어찌 눈을 감고 있느냐?”
강은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이게 대관절 무슨 조화이냐. 멍청하게 눈을 껌뻑이던 강은, 그만 자신의 얼굴을 놓아주고는 포복절도를 하는 산을 발견하고 말았다. 목덜미에 고여 있던 체열이 턱과 뺨, 귀, 그리고 관자놀이 마지막에는 정수리로 팍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정수리에 찻잔을 놓는다면 찻물이 끓어오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 재미있다. 배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살려 줘.”
급기야는 허망하게 헛웃음을 짓고 있는 강을 향해 말려 달라는 듯 손을 내밀며 웃음을 멎으려 하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소용없었다. 산은 어떻게 해서든 참아 보려는 듯 안면 근육을 있는 대로 굳히며 허리를 바로 세웠으나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파안대소하였다. 헛웃음과 함께 산을 바라보던 강은 이내 주먹을 부르쥐었다. 딱 한 대만, 정말 딱 한 대만 때리면 좋겠는데. 정말 딱 한 대만.
“이……이이!!”
하지만 어찌 감히 황상의 존안에 삿되이 주먹을 내지르겠는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몇 번 주먹질을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문제는 그것으로 참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은 체통도 다 잊고 그대로 뒤로 누워 허공에 발길질을 해 댔다. 제발 한 대만 때렸으면 좋겠다. 나도 저자를 약 올리고 놀려 주고 싶다!
“폐하께서 단 한 식경. 아니, 일다경이라도 저보다 신분이 낮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낮을 것도 없습니다. 폐하만 아니셨으면 좋겠습니다.”
강이 이를 악물고 말하자, 산이 겨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왜?”
하고 묻는다. 몰라 묻나. 당연히 한 대 때리고 싶어서다. 강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겨우 눌러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불경인데, 가뜩이나 아비의 일로 마음이 번거로운 황상에게 채윤직의 자식 된 처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냥, 평생소원입니다. 그냥.”
“평생소원? 그 정도야?”
“예.”
“좋아. 내 이 낭관을 심히 총애하는 고로, 그 소원 이루어 주마.”
“……예?”
생각보다 시원스럽게 대꾸하는 통에, 강이 조금 당황하여 되물었다. 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용포를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 두고는 다시 강을 바라보았다.
“용포도 벗었으니, 나는 이제 일다경 동안 지존이 아니다.”
“……정말이십니까?”
“오냐.”
“나중에 다른 말씀하시기 없습니다.”
“내가 그런 자로 보인단 말이냐?”
‘예.’
강은 속으로 냉큼 대답했으나, 차마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것도 농담일지도 몰라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 이라고 해 두고는, 나중 가서 다 농담이었는데 분수를 모르고 날뛰었다고 책망하면 강은 할 말이 없어지지 않는가.
“어찌 대답이 없느냐?”
“……참이시지요.”
“그렇다는데도.”
“어딘가에 맹세하십시오.”
“맹세? 허어, 이 낭관이 감히 군주의 맹세를 받아 내려 하는군. 오냐, 좋아. 무슨 맹세를 해 주면 되느냐?”
“만일 농담이라면.”
“농담이라면?”
“신을 창천성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산은 그 말에 일순 헛숨을 들이켰다. 창천성으로 돌려보내 달라. 이것은 강이 마치 금궐에 있는 것이 싫다는 의미로 보여지기에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강을 산이 억지로 절연장까지 받게 하면서 데리고 온 것이니 당연히 창천성이 더 좋기야 하겠으나, 그래도 그 속내를 내비친 것은 처음이었다.
“이 낭관.”
“예.”
“나와 금궐에 있는 것이 싫으냐?”
“……예?”
“내가 그대를 중경으로 데려온 것이 싫으냐는 말이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다. 산이 자신의 필체와 그림에 반하여 있으니, 제가 창천성으로 돌아가 버리면 몹시 서운할 것이라 생각하여 내걸었을 뿐이었다.
물론 5년 동안 채윤직과 함께 보낸 정이 있어 아비가 그리운 것은 사실이나, 금궐에서 지내는 나날이 크게 불만인 것은 아니었다. 가끔 희비와 창빈 때문에 피곤한 것만 아니라면, 창천성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고 지내는 것보다야 더 활기찼다. 강은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신은 그런 뜻이 아니옵고,”
“노인이 보고 싶은 것이야?”
“……아버지가 강녕한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오해 마소서. 신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는 노인이 보고 싶은데.”
“…….”
“그때 창천성에 갔을 적에, 실은 조금 놀랐다.”
“어찌 놀라셨습니까?”
산은 한숨을 쉬며 도로 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 강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어쩔 수 없이 아까 전에 해 주던 대로 매만져 주었더니 산이 마저 입을 열었다.
“노인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늙어서 그렇지.”
“어찌 사람으로 태어나 세월을 거스르겠습니까.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늙는 것입니다.”
“그대는 창천성을 떠나던 날에 노인이 한 말을 기억하느냐?”
황상이 뜻하는 바는 살아서 다시 볼 수 있겠느냐는 말일 것이다. 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은 나면 죽는다. 이것은 아무리 산이 하늘을 거스르는 신적이라 하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한 가지였다. 채윤직 역시 명이 다하는 날 숨을 거둘 것이다. 크게 아픈 구석도 없지만, 그렇다고 건강하지는 못한 노쇠한 몸이 아니던가. 문득 정말 귀천하기 전에 채윤직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은 절로 숙연해졌다.
“조정의 신료들이 노인의 이야기만 나오면 저리 벌 떼처럼 일어나 죽이려 드니 이 내 근심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대가 말해 봐. 어찌해야 노인을 저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해 줄 수 있겠느냐.”
“한낱 낭관인 신이 감히 조정의 일을 아뢰어도 되겠는지요.”
“그대는 낭관이나, 사사롭게는 채윤직의 자식이니 기탄없이 말해 보라.”
“금일 있었던 태중태부의 망언은 폐하께서 북양에 행행을 납시면서 창천성에 들르시어 벌어진 일이 아닌지요.”
“그렇지.”
“……그러니,”
“다시는 노인을 보지 말고 놓아주란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사실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저들이 채윤직을 완전히 잊도록 하면 그는 모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산이 채윤직에게 더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하지만 산은 그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난리가 날 줄을 알면서도 홀로 말을 달려 창천성으로 왔고, 신하의 목숨을 멋대로 앗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하질 않았던가.
“그래, 나도 알아. 내가 노인을 놓아주기만 하면 노인은 안전하겠지. 어쩌면 노인도 내가 귀찮을지도 모른다.”
“아니옵니다.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응?”
“아버지는 앉으나 서나 폐하의 걱정만 합니다. 강녕하실지, 변고는 없으신지, 그리고 진심으로 폐하께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중경에 다녀오는 관리들에게 늘 소문을 듣지 못하였느냐고 묻곤 하니……. 폐하를 귀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노인은 바보야. 그때 나에게 누명을 벗겨 달라고 말하지 않아서 내가 노인을 구해 줄 수가 없었단 말이야.”
“……폐하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랬을 겁니다.”
“알아. 알아서 그래. 알아서 내가 더 이러는 거야. 그대도 바보구나. 내가 어찌 이러는 줄도 모르고 노인을 놓아주라는 소리나 하고 있어.”
산은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산이 채윤직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리고 채윤직이 산을 생각하는 마음이 서로의 약점이 되어 어떠한 비극을 낳은 것이다. 강은 그렇게까지 결론을 내리고 산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그 약점이라는 것이 언젠가는 죽어 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놓을 줄을 몰랐고 약점이 아니게 만드는 방법을 알면서도 집착을 버릴 줄을 몰랐다. 산은 결단코 바보가 아니었다. 스스로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되지 않는 것이 힘든 것이다.
“저, 예전에 창천성에서 최 행수가 알려 준 것인데요.”
“뭔데.”
“최 행수는 기분이 울적해지면, 해연관의 기녀 아이를 불러서 귀를 파 달라고 한답니다.”
“귀?”
“예. 무릎을 베고 누워서 귀를 파 달라고 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그대가 내 귀를 파 주도록 해. 소문성!”
넓다 못해 광활하기까지 한 침전 안에 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소문성이 문을 열고 들어와 허리를 숙이며 부르심에 응했다.
“찾아계시옵니까.”
“귀이개를 가져와라.”
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이개가 올려진 시탁이 침전 안으로 들여졌다. 산이 무릎을 베고 일어나지 않는 탓에 강이 움직일 수가 없어, 소문성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강에게 그것을 쥐여 주고 다시 침전을 나갔다. 산은 모로 돌아누우며,
“여기부터 해.”
하고 대꾸하였다.
“손을 이렇게 해 보세요.”
강은 손을 조금 오목하게 오므리며 산의 눈앞에 예를 들어 보였다. 산이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며,
“그걸 내 손 위에 올려 두려고 그러지?”
하고 말했지만, 결국 시키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강은 그 모습이 어쩐지 심통을 부리는 애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숨을 뱉으며 작게 웃었다.
“간지러워.”
“원래 조금 간지럽습니다.”
“그대의 귀는 누가 파 주었어?”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요.”
“아버지? 노인을 이르는 말이냐?”
“아……아, 아뇨. 제 생부 말입니다.”
산이 아는 어린 시절과 자신의 어린 시절이 심히 다른지라, 강이 저도 모르게 말을 몇 번 더듬으며 말을 고쳤다. 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넘기며,
“내 것을 다 하면 내가 그대 귀를 파 주지.”
“예? 어찌,”
“그놈의 어찌. 자꾸 그대가 천하여 안 된다고 하면 희비의 아비를 승상에서 폐하고 그대에게 승상 자리를 주어 버릴 거야. 허면 그대는 천하지 않으니 그놈의 어찌 소리는 그만두겠지.”
산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니, 강은 내심 제가 그리 어찌 소리를 많이 했던가 싶어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한 번 본 것을 모두 기억하는 능력뿐 아니라, 접한 모든 것을 잊지 않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 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두 세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을 것이다.
“예, 허면 황은이 망극합니다.”
“감히 짐에게 귀를 파 달라 하다니. 오만방자함이 지나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강은 놀라지도 않고 바로 응수하였다.
“거 보십시오. 아무튼 그리 농을 좋아하시니 큰일입니다.”
“시끄러워.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봐.”
산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자, 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태 이 홍진 세상에 나서 본 이들 중에 이렇게 장난을 좋아하는 이는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춘추가 어리신 것도 아닌데 어쩌면 저리 개구진지, 어린 시절 그가 채윤직의 속을 대단히 썩였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버지는 폐하의 약점이니, 그 약점을 내버릴 수가 없다면 축소시키는 법을 찾아야지요.”
“그런 방법은 없어. 더 큰 약점을 찾지 않는 이상. 내가 귀하게 여기고 필요로 하는 것 말이야.”
“저 말입니까?”
강은 괜히 농담을 던져 보았다. 그러니 산이 잠시 얼이 빠진 얼굴로 강을 바라보았다.
‘이게 아닌가…….’
산이 그리 농을 하니, 저도 해 보았는데 어쩐지 돌아오는 반응이 영 석연찮다. 강이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니, 산이 이내 낄낄대며 웃고는 좀처럼 부끄럼을 숨길 줄을 모르는 낭관의 뺨을 쥐었다.
“맞아. 그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