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열흘 동안 쉬지 않고 달린 탓에 강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끼니때를 제하고는 쉼 없이 달리다가 해가 지면 객잔에 멈추어 잠시 눈을 붙인 뒤, 다시 일어나 한참을 달리기를 열네 번이었다. 금군 호위무사는 물론이고, 태감과 산마저도 이에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나 강은 달랐다. 이렇게까지 창천성을 등지고 멀리 떠난 일이 없었던 데다 말을 오래 타 본 적도 없어서 허리며 고간이며 근육이 배겨 당장 눕고만 싶었다.
산은 과연, 10년이 넘도록 전장을 누볐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 그에게도 더 편하고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강이 가장 궁금한 것은 어찌하여 산이 이렇게까지 금궐로 빨리 돌아가려 했냐는 점이다.
소문성의 말을 들으니 황상이 행행을 납실 적에는 마차에 오르셨다고 했다. 그래, 굳이 갈 길이 급하였다면 말을 타고 갈 수는 있으나 대관절 왜 잘 시간만 빼고는 내내 말 위에 있었어야 했냐는 것이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를 누리소서.”
한 달 동안 제도를 비운 황상을 가장 먼저 알현한 것은 희비의 아비인 승상 유자명이었다. 황상이 금궐에 당도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입궐하여 보고를 받으니, 희비는 조금 늦게 출발하여 도착하려면 길게 잡아 이레는 더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워낙 북양 땅이 중경과 먼지라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 길이 없었지만, 듣기에 즐겁지만은 않을 터였다.
“짐이 없는 사이에 조정은 어떠하였소.”
태감의 시중을 받아 용포에 팔을 꿰며 산이 물었다.
“심려 마소서. 평소와 같았사옵니다.”
“짐이 없었는데 평소 같았을 리가. 경은 짐이 그립지도 않았는가 보오.”
“하하, 폐하. 그리 하문하시오면 어찌 말씀을 올려야 할지요. 그런 말씀이시라면 평소와 같았을 리가 있었겠사옵니까. 허나 이리 무탈한 용안을 배알하오니 곧 죽어도 여한이 없을 지경입니다.”
“허면 짐이 무탈하지, 골병이라도 들었겠소?”
“…….”
“농이오. 자, 그러면 어디 그간 조정을 비운 사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들어 볼까.”
서슬 퍼런 기색을 순식간에 지우며 산이 좌정하였다. 희비의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 보려던 유자명은 이내 입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산은 도통 틈을 주지 않는다.
*
“폐하께서 희비를 북양에 두고 오시다니, 정말 재미있는 일이야.”
황상이 마악 유자명과의 회동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성귀인과 후원에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던 창빈은 자꾸 그 일이 생각나는지 틈만 나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희비가 요망한 붓 놀리는 재주로 황상을 사로잡은 후 회임을 하였을 때 떨었던 유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솜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는데 어찌 이리 잘 되었는지! 가만히 있다가도 자꾸 웃음소리를 흘리는 창빈을 보고 있던 성귀인이 이내 미소 어린 안면을 굳히며 물었다.
“연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연유? 어떤 연유?”
“글쎄요, 그것은 소첩도 알 수 없지만 회임까지 하여 행행에 따라갔던 희비 마마가 갑자기 찬밥이 된 게 아닙니까.”
“권불십년이라고 했다. 권세가 10년을 가지 않는데, 총애라고 5년을 갈까. 질리실 때도 됐지.”
“폐하께서 희비 마마 다음으로 창빈 마마를 총애하시니, 허면 오늘은 명운궁으로 납시지 않을까요?”
창빈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물론 그러시겠지. 희비가 아니라면 무조건 창빈일 터였다.
사실, 창빈은 내명부 권력 구조의 전복을 위하여 희비보다 먼저 회임할 것을 노리고 있었다. 허나 희비가 선수를 친 탓에 먼저 비의 봉작을 받았고, 결국은 1인자의 체제가 굳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배알이 아니 꼴릴 것인가. 창빈은 오늘 밤 양만에서 조공으로 올라온 산호로 만든 귀걸이를 하고 보드라운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성귀인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 폐하께서 본궁에게 납시면, 내일은 혜인궁에 납시는 것이 어떠하시겠는가 여쭈어 주마.”
“감사합니다, 마마.”
성귀인은 고개를 얕게 숙이며 예를 갖추었지만, 창빈의 말에 기가 막혀 코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는 중이었다. 퍽이나! 혀끝까지 튀어나온 그 세 음절을 다시 삼켜 내는 것이 어찌 이리 고역인가. 더 이상 창빈의 앞에 자리보전하고 있다가는 실수를 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성귀인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피곤하여 혜인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마께서도 폐하를 모실 준비를 하셔야 하니까요.”
“그러렴. 희비가 없으니 이리 사는 게 재미있구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한편, 강은 궁인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봇짐을 어깨에 메고 뒤를 따르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금궐 출입이 처음인 듯 보였으므로, 주변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한 번씩 곁눈질하여 보았다.
게다가 관복을 아니 입은 사내가 어찌 금궐에 드나드는가. 강을 향한 시선들의 성분은 대저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법도를 알지 못하는 강은 변방에서 온 자신이 너무 촌스러운 것인가, 싶어 괜히 입은 옷을 툭툭 털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웅장한 전각 앞에 도착해 있었다. 궁인이 그 안으로 재게 걸음질 쳐 들어가니, 강은 그 이의 뒤를 시선으로 좇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편액을 읽어 보았다. 희건궁熙建宮. 일찍이 산이 자신이 머무는 궁이라 말한바 있었다. 과연 중경은 창천성과 달라서 뭐든지 큼직하고 뭐든지 고급스러웠으며, 뭐든지 화려하였다.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고로, 강은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돌계단을 장식한 이는 누구일까. 보통 솜씨가 아니로군.’
실내에 들여 놓더라도 밤낮으로 닦아 주어야 할 것만 같은 세공이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모되기 마련인데, 바깥에, 그것도 돌계단 측방에 새겨져 있었다. 이런 것을 보아 왔으면서 자신의 그림에 그리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연유를 모르겠다. 강은 저도 모르게 돌계단 가까이로 다가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마모될 것을. 이렇게 좀 만져 본다고 문제 될 것은 없겠지.
“이봐!”
“아이고, 깜짝이야!”
세공에 손을 얹었을 무렵, 갑자기 머리 위에서 큰 소리가 난다. 만지면 안 되는 것인가, 싶어 전신이 뜨끔한 강이 그만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가고 말았다. 가까스로 손을 땅으로 짚으며 위를 바라보니, 난간을 짚고 고개를 내민 산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파안대소를 하고 있었다.
“죄라도 지었는고. 어찌 그리 놀라?”
“……갑자기 그리 소리치시는데 어찌 아니 놀랍니까!”
괜히 산의 말대로 죄를 지었다가 걸린 것 같은 모양이 되어 강은 억울하고 분했다. 쿵쿵 발을 구르며 일어나 산을 향해 짜증을 부리니,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큰 소리를 내고 웃는다. 다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리 즐거워 뵈는 것은 산뿐으로, 다른 이들은 대경실색을 하여 강을 바라보고 있질 않은가.
“일어나 이리 오라.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강이 난간에 발을 내디뎠다. 여전히 손에 장죽을 쥐고 앞서 돌층계를 밟는 그 뒷모습이 어쩐지 창천성에서 보던 것과 조금 달라 보였다. 배경의 탓인가, 입은 옷이 달라 그런가. 황제치고는 그리 화려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어둡고 수수한 용포이구나 싶을 정도인데도 이상하게도 말 그대로의 황제처럼 보인다.
그리고 강은 그때가 되어서야 방금 전 받았던 그 시선들의 이유를 알았다. 감히 지고의 존재인 황상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던가.
“많이 기다렸어?”
“아닙니다.”
심각하게 오래 기다렸다. 이 땅에 태어나 이렇게 무언가를 오래 기다린 역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투덜거릴 때가 아닌 것 같아서 강은 짧게 대답하고 덧붙이려던 말을 줄였다. 산은 턱을 괸 채 심드렁한 강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았다.
“중경으로 오는 내내 힘들어 죽겠다고 그리 툴툴대더니, 어찌 도착하니 그리 입을 꾹 다물고 있느냐. 그리 기다렸는데도 다리 아프단 말 하나 없으니 참으로 이상하군. 나중에 몰아서 터트리지 말고 불만이 있으면 바로 말해야지.”
“소인이 어찌 폐하께 불만을 말하겠습니까. 성도 내려 주셨고, 이제 관직도 내려 주실 테니 소인의 홍복입니다. 그런 말씀 마소서.”
“뭐?”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산이 표정을 팍 일그러트리더니, 이내 기가 막힌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기껏 예를 다하여 입에 발린 소리를 해 주었는데 저러고 있으니, 강은 괜히 심술이 나서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그 모습을 응시하였다.
“그대가 더위를 먹은 게로군.”
“열흘 가까이 뙤약볕 아래서 달렸더니 더위를 먹은 모양입니다.”
“허면 시원한 곳에 얼른 배정을 해 주어야겠군. 궁내청에서 얼음 조금 훔쳐 먹다 들켜도 봐주마.”
“황은이 망극합니다.”
“그건 그렇고, 그대가 궁내청에 가기 전에 입이나 조금 맞추어 볼까.”
그 말에 이번에는 강이 얼굴을 팍 일그러트렸다. 입이나 조금 맞추어 보자니,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이곳이 금궐이라는 자각이 없었더라면 강은 아마 그 말을 듣자마자 “미쳤습니까?” 하고 말했을 것이다. 무릎 몇 번 내어 주었기로서니, 갑자기 입을 맞추자는 것은 어느 나라 예의이며 법도인가. 강이 슬금슬금 의자를 뒤로 물리니, 산이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어찌 그래?”
“폐하께서야말로 어찌 그러십니까?”
“그대는 과거를 보지 않고 등용이 되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나와 입을 미리 맞추어 놓아야 그대가 변명하기 좋을 것 같아 그러는데 어찌 그런 해괴망측한 반응을 보인단 말이냐?”
“…….”
아, 그……. 그 입 맞추자는 것……. 강은 순식간에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상을 하며 오해했던가. 자신이 그러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면 저 성격으로 얼마나 놀려댈 것인가. 눈앞이 아득하여 강이 한참을 어버버거리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고 도로 좌정하였다.
“예, 폐하. 어찌 입을 맞추면 되겠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참으로 이상한 자야. 그러니까, 내 생각은…….”
이야기를 마친 뒤에 강은 지체 않고 궁내청으로 가야겠다고 말하며 물러나더니, 희건궁을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도착하자마자 허공에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강이 어찌 오해했는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만일 알았더라면 분명 놀려 댔을 터이니. 그리 생각하니 그나마 마음에 안정이 오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폐하, 저자에 대하여 소인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저자라니. 이제 이 낭관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예, 허면……. 이 낭관에 대하여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강이 희건궁을 나서자마자 안으로 들어온 소문성이 꽤나 진중한 얼굴로 예를 갖추며 물었다. 산은 그 심각한 얼굴을 흘긋 보고는 마저 하라는 듯 손짓하였다.
“행성에서는 눈과 귀가 적어 너그러이 보아주셨다고는 하나, 이 낭관이 방약무인하니 이를 엄히 다스리셔야 할 줄 아옵니다.”
“방약무인하다니? 귀엽지 않으냐. 짐이 미리 입을 맞추자 하였더니, 그 입을 맞추자는 것인 줄 알고 기겁을 하며 얼굴을 붉히는데 그게 어찌나 웃기던지.”
산은 다시 그 장면을 떠올렸는지, 이내 고개를 젖히고 웃기 시작하였다. 다시 주청을 올리려던 소문성은 산이 웃음을 멈추지 않는지라 결국은 한숨을 쉬며 아뢰기를 그만두었다. 황상의 총애가 결국 그자에게 기울었으니,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귀에 가닿지 않을 것이므로.
차설, 8등관 낭관 직을 제수받은 이강은 관리들이 정신없이 드나드는 궁내청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지, 제가 왔다 고하지도 못한 채 문을 막고 섰다가 비키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틀기를 수십 번이었다.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으니, 양만에서 조공이 들어왔는데 그 대부분이 비빈들에게 소용될 것이라 그것을 들이고 내보내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커다란 자개장이 들어왔을 무렵에는, 거의 다섯이 넘는 이들이 달라붙어 발을 맞춘 채 안으로 옮기고 있질 않은가. 99칸 성채를 옮기는 듯한 난리를 구경하던 강은, 이윽고는 섬돌에 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그리 생각하면서.
“이자는 누구인가? 거의 두 시진 째 여기에 앉아 있는데.”
해가 질 무렵, 그러니까 강이 그 구경을 한 지 두 시진에 접어드니 관리 하나가 그를 발견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강은 제 앞에 여러 개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알고 벌떡 일어서서 그들을 둘러보았다.
“저는 이번에 궁내청 낭관으로 제수받은…….”
“아, 이번에 과거에 급제한 친구겠군. 한데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지금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니. 어서 일어나게.”
갑작스레 팔이 붙들린 강은 땀을 뻘뻘 흘리는 관리에게 이끌려 궁내청사 안으로 비로소 입성하게 되었다. 그 안에서는 각 궁에서 나온 상궁들이 제 궁 살림이 모자란다며 물자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는데, 그 줄이 어찌나 길던지 눈앞이 다 아득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바쁜 곳인 줄 알았더라면 강은 산에게 다른 관직을 주십사 청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불평불만을 내어놓기도 전에 그는 손에 붓이 쥐인 채로 의자에 주저앉게 되었다.
“창빈 마마의 명운궁에서 나왔소.”
그리 말하며, 상궁이 목록이 적힌 종이를 강에게 내밀었다. 앞에 놓인 장부를 보니, 굳이 묻지 않아도 궁내청에서 보유하고 있는 물자 현황인 듯 보였다. 상궁이 내민 종이에 적힌 목록은 명운궁이 필요로 하는 것들일 것이다. 원하는 대로 마구 내어 주어도 되는지는 그가 홀로 내릴 수 있는 결단이 아닌지라, 강은 정신이 없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명운궁에서 달라는 대로 다 주지 말게.”
그때, 강의 곁을 지나가던 낭관이 그의 귓속으로 슬쩍 말을 흘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상궁의 표정이 아직까지 온화한 것을 보면 그 말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라, 강은 우선 안심했으나 달라는 대로 다 주지 않으면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지라. 상궁을 한 번, 장부를 한 번 바라보고는 이마를 짚었다.
“무엇 하고 있는 게요. 낭관께서는 우리 마마께서 이 무더운 날씨에…….”
“아, 정말!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양만에서 이번에 올라온 조공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넉넉하지가 않아요. 아까 인시부터 시작하여 내간 것만 해도…….”
내간 것만 해도. 까지 말한 관리가 눈알을 위로 굴리며 입으로 중얼중얼 개수를 헤아리려 하였다. 하지만 어찌나 정신이 없었던지, 대관절 얼마큼 내갔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지라. 이것은 낭패다, 하고 입을 쩍 벌리는 꼴이었다. 이윽고는 지나가는 관리들을 붙잡고, “몇 개나 내갔었지?” 하고 되묻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허나 그가 붙잡고 물어본 다섯이 넘는 관리들 중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이러다가는 장부와 실제 보유 현황에 차이가 벌어지게 되므로 큰일이지 않은가.
“서른일곱 개입니다.”
그때, 강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낭패를 본 듯 흙빛 얼굴을 했던 관리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확실한가?”
“예,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서른일곱……. 아니, 아까 제가 세어 보았는데 서른일곱 개가 맞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가?”
오차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강의 눈은 이 땅 위의 누구보다 많고 자세한 것을 보았고, 그의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때 세어 보지 않았어도 지금부터 기억나는 대로 하나둘 헤아리더라도 매우 정확할 것이다. 강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자, 관리가 순식간에 기세등등하여 상궁에게 소리쳤다.
“들었소? 더 이상 궁내청에 남은 것이 없으니, 들어오거든 명운궁으로 사람을 보내겠소. 이만 돌아가시오!”
그 뒤로도 강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혹시 이건 기억나는가?”, “이것은?”, “허면 이것은?” 하고 물어대는 통에 족족 다 대답을 하였더니, 이제는 조금만 헷갈리더라도 당장이고 강을 찾아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장부보다 강을 더 믿게 되었다. 실제로도 장부에 적힌 수치가 강의 입에서 나오는 것만 못하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죽겠구만. 양만에서 조공이 오는 날은 죽다 살아난 기분이야.”
그리고 서산 너머로 해가 완전히 넘어간 다음에야 궁내청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루 종일 동분서주하던 관리들은 겨우 숨을 돌리며 바닥이든 의자든 상관없이 주저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해 대었다. 강은 어쩌다 보니 휩쓸려 궁내청의 낭관으로서의 일을 시작하였으나, 아직도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을 듣지 못한 관계로 어찌 물어야 하나 그저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궁내청에 새 인사를 보내신다 하셨는데 어찌 저 이 하나 왔단 말인가?”
“그러게나 말일세. 과거도 보지 않은 이에게 어찌 관직을 주셨는지, 원…….”
“소문은 들었나? 폐하께서 그자에게 성을 내리셨다고 하더군. 건국 당시 있고 처음이라고 하니, 대관절 그가 어떤 공을 세웠는지 궁금해지는 지경이야.”
이것은 노골적으로 강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은 드디어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어찌 끼어들어 보려 하였으나, 이내 갑작스레 그에게 돌아온 질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한데, 자네는 어찌 그리 기억력이 좋은가?”
“아, 별것 아닌 재주입니다.”
“별것 아니긴. 장부보다 자네가 훨씬 나은 정도야. 자네 같은 인재가 궁내청에 꼭 필요했지. 참으로 잘 왔어.”
“감사합니다. 한데 저…….”
“폐하께서 새로 궁내청에 배속하신 그자는 본래 성도 없는 천것이라지. 생긴 것은 아마 소돼지 잡는 백정 놈처럼 우락부락하고 지저분하여 지나다닐 때마다 냄새가 날지도 몰라. 이름이 이강이라 했던가.”
이것을 농담이라고 한 것인지, 그 관리의 말에 궁내청에 있던 모든 이들이 큰 소리를 내고 웃었다. 이런 분위기였던가. 아까 산이 미리 입을 맞추어 두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들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과거를 보지 않았음에도 황상의 눈에 든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강은 다시 한번 눈치를 보았다가, 스스로가 ‘그 소돼지 잡는 백정 놈처럼 우락부락할지도 모르는 자’임을 밝히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아, 한데 자네 아버지는 어느 관직을 지내고 계신가. 어찌나 바쁘던지, 그것도 못 묻지 않았는가.”
“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쯧쯧, 저런……. 아직 젊은 나이로 보이는데, 아버지를 여읜 모양이로군.”
여의었다고 하기보단……. 강은 입안말로 굴리던 말을 뱉을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금궐로 들어오며 강이 정립한 목표는 최대한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3년이 지난 뒤 떠나면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지금에서는 조금 목표에서 멀리 떨어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자네 이름은 뭔가? 여태 그것도 몰랐구만.”
“어찌 이름도 몰랐어, 그래?”
“……이강입니다.”
강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궁내청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낮 동안 그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던 관리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기 시작하니, 그제야 모든 이들이 강이 농을 하는 줄로 알고 박장대소를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자네 참으로 웃긴 친구로구만!”
“정말로 이강입니다.”
“농담 그만하게. 이름이 뭔가?”
강은 하는 수 없이 품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탁상 위에 펼쳐 올렸다. 산이 그에게 관직을 내리며 하사하였던 임명장이었다. 관리들이 앞다투어 탁상 위에서 임명장을 낚아채고는 가장 밑에 적힌 그의 이름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강理康. 참으로 이강이다.
“이, 이런…….”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냉각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은가. 황상이 친히 발탁한 인사의 앞에서 뒷말을, 아니 앞말을 대차게 하였으니 강의 속이 어떨지는 그들이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다. 허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강은 그리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으므로 아무렇지도 않은 안면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저 그…… 괜찮습니다. 과거를 보지 않았으니 그리 생각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아니, 우리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 괜찮습니다.”
“…….”
“이, 이만 퇴청하겠소.”
“나도!”
진실로 괜찮기에 괜찮다고 하였는데, 모든 이들이 어색하게 하나둘 몸을 일으키더니 쏜살같이 궁내청 바깥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언제 그리 복작대었나 싶을 정도로, 삽시간에 궁내청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고 그 안에는 강이 홀로 남아 있게 되었다. 강은 뺨을 조금 긁적이다가 탁상 위에 펼쳐 두었던 임명장을 접어 민망하게 품 안에 도로 가져다 넣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청사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걸려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강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은 희비가 환궁하지 않은 고로, 이 정도에서 그쳤겠으나 이제 행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문이 퍼지고 나면 몹시 피곤해지리라.
“이 낭관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산은 희건궁에서 강을 내보낸 이후부터 정무에 시달리다가 겨우 마지막 상소를 읽은 참이었다. 낮부터 황상의 명으로 틈틈이 신임 낭관이 어찌하고 있는지 보고 왔는데, 우왕좌왕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그가 수많은 관리들의 부름을 받으며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았던가. 소문성이 한 걸음 나아가며,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그래? 다행이군.”
“예, 폐하.”
산은 붓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며 숨을 돌렸다. 행행을 다녀왔더니, 어찌 이리 일이 쌓였는가. 며칠 전만 해도 할 일 없이 창천성을 누비며 유유자적 지냈는데, 그 온도 차가 너무 크기에 더욱 귀찮고 성가셨다. 산은 곁에 놓인 화로에서 장죽을 건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시간이 나거든 강이 어찌하고 있나 슬쩍 가서 보고 올 요량이었는데, 결국 그러질 못하였다.
“폐하, 패를 뒤집으소서.”
이때다 싶어 등장한 경사방 태감이 시탁을 산의 앞에 받들어 올렸다. 산은 고개를 빼꼼 들어 보고는, 귀찮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저 패에는 후궁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황상이 그중 하나를 골라 뒤집으면 그날은 그이의 처소에 납신다는 의미였다. 산은 허공에 둔 눈을 좌우로 도르륵 굴리며 생각하다가, 이내 몸을 번쩍 일으키며 정가운데에 있는 패를 뒤집었다.
“폐하께서 창빈의 처소로 납신다. 채비하거라.”
*
한편 강은 반쯤 녹초가 되어 관사로 가려다가, 홀리듯 못 앞에 멈추어 섰다. 금궐 한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면 인공연못 같았는데, 그 가를 따라 우거진 나무가 밤바람에 휩쓸려 쏴아아아 소리를 내며 강을 유혹하였다. 강은 아까 전 궁내청을 나서며 챙겨왔던 등을 커다란 바위 위에 내려두고 그 옆에 위치한 정자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여기서 자도 되지 않을까.’
마침 날씨도 후덥지근하니, 바깥에서 잠을 자면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침 선선히 부는 밤공기가 좋다. 잠을 자지 않더라도 조금만 누워 몸을 쉬다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강은 냅다 팔을 베고 누웠다. 오늘은 조금 피곤하였으나, 그래도 양만에서 들어온 조공품을 모두 정리하였으니 내일은 좀 낫겠지 싶었다. 다만, 마지막에 제가 이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꽁무니를 빼고 도주한 관리들을 생각하니 조금 막막하기는 하였다.
“미치겠군.”
“무엇이 그리 미치겠는데?”
“으으아아악!”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강이 아연실색을 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엉덩이를 마구 뒤로 물리며 소리 질렀다. 그리고 멀찍이 팔을 뻗어 켜 놓은 등을 들어 올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비추어 보았다.
장죽을 든 산이 앞에 서 있었다.
“폐하! 십년감수하였습니다!”
“궁상맞게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이 낭관.”
“궁상이라니요! 풍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산은 바로 일다경 전, 창빈의 명운궁으로 향하는 가마에 올라 있었다. 소문성이 미주알고주알 창빈이 어찌 황상을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하여 신이 나서 떠들고 있을 즈음, 산은 무료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뒤, 희건궁과 궁내청 사이에 위치한 못에 옅은 불빛이 도는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후궁을 품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던 황상이 괜히 그 불빛으로 책을 잡으며 가마를 멈추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마치 꿈처럼 강이 누워 있었다.
“풍류? 이 어두컴컴한 곳에 어떤 풍류가 있어 즐기고 있었는데?”
그리 물으니 또 할 말이 없다. 강이 주저하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아무것도 없는 못 위를 가리키며 대답하였다.
“저 물 위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하며, 이 못을 둘러싼 나뭇가지들이 쏴아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소리.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이 풍류 아니겠습니까.”
“가만 보면 그대는,”
그리 말하며 강의 옆에 앉고,
“그 혓바닥이 참으로 요망한 것 같단 말이야.”
옆으로 누워 그 무릎을 베었다. 이쯤 되면 그도 제 무릎은 지존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 운명인가 보다 하며 수긍을 하게 된다. 별 저항 없이 다리를 움직여 머리를 기대기 편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공연못도 못이라고, 제법 찬 기운이 시원하여 그럭저럭 기분은 괜찮았다.
“이 야심한 시각에 어딜 납시는 중이셨습니까?”
“명운궁에 가는 중이었다.”
“창빈의 궁이 아닙니까.”
“어찌 알아?”
한나절 궁내청에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더니 기록을 읽었던 후궁들과 그 궁에 대해서는 모두 외워 버리고 말았다. 강이 머쓱하게 콧대를 긁으며 “장부를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산은 내심, 강이 한 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는 비망의 능력으로 모두 기억해 낸다는 것을 떠올렸으나 알은 체 않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창빈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아니 가 보셔도 되는 것입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 이 낭관.”
“예.”
“오늘 궁내청에서 일한 소감이나 말해 봐라. 듣고 싶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궁내청 관리들이 감히 황상이 발탁하여 성까지 하사한 인재를 두고 천것 운운하며 비하를 일삼았던지라 이를 고하면 괜히 그들에게 누를 끼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야 그들이 어찌 생각하든 관심이 없었으나, 산은 다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일이 잘못되면 요망하게 황상에게 일러다 바친 꼴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저 바빴습니다. 양만에서 조공이 들어온지라, 그것을 정리하는 데에 시간을 거의 다 보냈습니다.”
“일은 할 만하더냐?”
“예, 뭐. 금일은 심히 바빴으나, 본래는 그러지 않다고 하였고 오늘 양만에서 들어온 것들은 모두 정리를 한지라 명일부터는 조금 나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네 상관들은 어떠한데?”
강은 그 말에, 산이 황상의 명으로 덜컥 관직을 하사받은 인재가 어떤 처지인지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거짓을 고하는 것도 영 내키지 않지만 진실을 말하는 것 역시 주저하게 되므로 강은 꽤 오래 망설였다. 산은 입을 열려다가도 이내 굳게 닫아 버리는 강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강을 난처하게 하고 있음을 깨닫고 손을 휙 저었다. 저렇게까지 고민하는 것을 보니 어떤 상황인지 알 만했다.
“그대는 신중한 사람이군.”
“송구합니다.”
어쩌면 천자의 하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으로 불충을 논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생각이 깊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만일 강이 마주한 것이 다른 황제라면 모를까, 적어도 산에게는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성품이기도 했다.
“관사에는 가지 않고 어찌 여기에 있었느냐? 이것은 말할 수 있겠지?”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발 닿는 대로 왔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허면 폐하께서는요. 어찌 창빈에게 향한 가마를 이쪽으로 돌리셨습니까?”
그리 물으니 또 할 말이 없다. 산은 어찌 멋지게 받아쳐 줄 생각이었으나 생각이 나지도 않고 이것을 두고 깊게 고민하고 싶지도 않아서 새털처럼 웃어버렸다.
“요망한 혓바닥이야.”
산은 강의 말에 번번이 무례를 지적하는 한편, 그리하여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있다. 강은 그것을 알면서도 본디 타고나기를 그러한지라 고치지 못하고 그저 민망하게 고개를 틀고 마는 것이다. 산이 대관절 왜 저에게 그리 너그러운 것인지 아니 궁금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내는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더 이상 그 고뇌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대가 이곳에 있으니, 어쩐지 금궐도 창천성같이 느껴져.”
“저는 폐하께서 창천성에 계시니 창천성이 금궐같이 느껴졌습니다.”
“그건 내가 창천성에 있어 부담스럽고 귀찮았다는 뜻이냐?”
“예.”
곁에서 소문성이 들었더라면 오만방자한 것이라 경을 쳤을 것이나, 다행히 그는 창빈의 명운궁으로 달려 황상이 아니 납실 것이라 알리러 간 다음이었다. 산은 강의 얼굴을 한 손으로 쥐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며 마주 보게 하였다.
“거짓을 몰라 선하며 아첨하는 법을 몰라 충성스럽다 해야 할까. 아니면 무례하고 방자하다고 해야 할까.”
창졸지간에 고개를 숙인 꼴이 된 강이 제 무릎 위에 머리를 댄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양 뺨을 쥔 커다란 손의 악력이 꽤 세다는 것을 느꼈을 즈음, 산이 매가리 없이 팔을 바닥으로 늘어트리며 그 얼굴을 놓아주었다.
“어찌 생각하든 그대는 관심이 없는 거겠지. 그대는 자신의 영달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는 것이냐? 물욕도, 식욕도, 색욕도 없는 것 같군. 어떤 것이 그대의 관심사이냐? 그림?”
“어찌 물욕도, 식욕도, 색욕도 없겠습니까. 물욕은 당장 제가 살며 필요한 만큼 있으면 되옵고 식욕 역시 맛있는 것을 느낄 줄은 알지만 그것이 천하일미일 필요는 없습니다.”
“색욕은?”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어찌 그런 하문을 하십니까.”
“그때 내가 여인이든, 관직이든……이라 하였을 때 그대가 여인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지 않아. 허면 사내에게는 있는 것이냐?”
“이만 침수에 드셔야지요. 벌써 시각이 늦되었습니다.”
산의 직설적인 말들에 그리 당황하지 않고 응수해왔던 강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이런 질문을 노골적으로 받아 본 적도 없었고, 깊게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데다, 무엇보다 그 말이 강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운우지락이라는 것은 매우 사사롭고도 은밀한 일인지라 감히 황상의 앞에서 입에 올릴 일은 아니기도 하였다.
“유난스럽기는. 그대가 새침을 떼는구나.”
“새침을 뗀다니요. 폐하께서는 허면, 그러한 질문에 태연자약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못할 것도 없지. 나는 여인이든 사내든 가리지 않고 다 좋다. 안는 맛이 다르고 반응하는 것도 다르니, 어찌 그것을 같은 즐거움이라고 보겠느냐.”
“…….”
“부끄럼 그만 떨어. 이만 놀릴 테니.”
한순간에 장성한 사내를 두고 새침데기 아가씨로 만들어 버린 산이 그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반쯤 넋을 놓은 채로 앉아 있던 강이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자, 산이 그 머리에 손을 얹으며 몇 번 슥슥 쓰다듬었다.
“허면 궁상은 이만 떨고 관사로 돌아가 잠이나 자도록 해. 명일은 그대에게 따로 맡길 일이 있는 고로 소문성을 궁내청으로 보내겠어.”
“제게 맡기실 일이라니요?”
“명일 들으면 안다.”
그리 말을 남기고, 산이 다시 가마 위에 올랐다. 가마는 명운궁으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희건궁 앞에 멈추었고, 그 주인이 안으로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꺼졌다. 강은 정자 위에 멍하니 앉은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관사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
“오늘 창빈 마마께서 시침을 든다고 하지 않았던?”
한편, 혜인궁에서 침수에 들 준비를 마친 성귀인은 갑작스러운 상궁의 보고를 들으며 안면에 옅은 미소를 내비쳤다. 곁에서 그 머리칼을 빗기던 어린 궁녀를 더러 이만 물러가라 명한 뒤,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을 이르니 상궁이 들은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쳤다.
“창빈 마마의 패를 뒤집으셨으면서 납시지 않았다니, 재미있구나. 창빈 마마께서 상심이 크시겠어. 어쩐담. 허면 폐하께서는 희건궁에 계신다고 하더냐?”
“시방은 희건궁에 계시옵니다.”
“시방은? 허면 아까 전에는?”
“명운궁으로 납시기 위하여 가마에 오르셨사온데, 희건궁 앞 자미연에 신임 낭관이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는 그자를 만나셨다고 하옵니다.”
“신임 낭관?”
“예. 그자 있지 않사옵니까. 지존께서 친히 성을 내리셨다는 이강이라는 자 말이옵니다. 아까 궁내청에서 잠깐 보았사온데, 약관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아, 아아. 창천성에서 데려오셨다던 자 말이지? 이 야심한 시각에 이강이 어찌 자미연에 있느냐. 그것도 조금 수상하구나.”
자세한 내력은 상궁도 알지 못했으므로, 소상히 고해바칠 수 없었다. 하지만 성귀인은 그 이야기만으로도 오늘 밤에 들을 것은 충분하다 여겼다. 이강에 대한 소문은 오늘 낮, 황상이 복궐하신 다음부터 돌기 시작한지라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이렇게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 이내는 일거수일투족,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체가 파다하게 소문으로 퍼지기 마련이다. 굳이 나서서 티 나게 알아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궁금하긴 하나, 괜히 눈에 띄게 굴었다가는 좋을 것이 없지. 창빈 마마께서 상심이 크실 것 같아 걱정이 되는 것을 빼면 기분 좋은 밤이로구나.”
*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당직관이 무거운 징을 들고 복도를 누비며 잠든 관리들을 깨워 대었다. 강은 그때 거의 사경을 헤매듯 잠에 취해 있었는데, 누군가가 갑작스레 문간에 바로 대고 징을 치는 바람에 깜짝 잠에서 깨고 말았다.
‘오늘은 어쩐다.’
어제 강의 정체가 탄로 난 뒤 다른 관리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다소 찝찝한 것은 사실이었다. 저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저 때문에 분위기가 망가지면 이래저래 누가 아닐 수 없었다. 강은 관복에 팔을 꿰고, 신을 신고, 또 궁내청으로 향하는 내내 껄끄러운 마음을 떨쳐내지 못한 채였다.
어제 산과 마주쳤던 자미연을 끼고 도니, 저 멀리 새벽안개 사이로 웅장한 희건궁이 보였다. 저 안에 있는 산은 지금쯤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하는 줄도 모르고 여유나 부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약이 오르는 것이다. 곁에 두기 위하여 관직이 필요하다는 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어찌 되었든 지존된 몸으로 법도 몇 개쯤은 무시해도 되질 않겠는가. 굳이 자신을 이렇게 불편한 상황에 놓아야 했는가.
강은 한동안 희건궁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궁내청으로 향했다.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등청한 관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미 망친 첫인상이라면 차라리 근면한 체라도 해야겠다 싶어 강이 발걸음을 재게 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궁내청 벽에 걸린 횃불에서 불씨를 따다가 초에 옮기고, 뚜껑을 덮어 횃불을 껐다. 그리고 관청을 내내 돌아다니며 불을 켜 두니 금세 환해졌다. 그렇게 한 각을 보냈는데 아직도 등청한 이가 없으니, 강은 자신이 너무 빨리 왔는가 싶어 멀뚱히 아무 자리에나 걸터앉았다.
‘그나저나 오늘 산이 나에게 시킬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기껏해야 그림이나 그리라고 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막중하고 귀찮은 임무를 떠맡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썩 달갑지 않다. 게다가 이미 황상이 직접 강을 창천성에서 발탁하여 데려왔다는 이야기가 돈 시점에서 황상이 드러내 놓고 찾기라도 하면 그로 인한 시샘 같은 것을 어찌 견딜까. 누군가 자신의 머리에 긴고아緊箍兒6)를 달아 놓고 죄는 기분이었다.
“어…… 이 낭관?”
“아, 그……. 좋은 아침입니다.”
갑작스러운 호명에 강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어제 강에게 그리 현황을 물어 대었던 궁내청 복야7)가 어색하게 웃으며 등청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벌써부터 등청했구만. 이 불은 다 자네가 켠 건가?”
“아, 예……. 어제 아시다시피 몹시 바빴던지라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이리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가장 말단이니, 이런 일을 맡아서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음, 그렇군. 아직 다른 이들이 등청하려면 좀 있어야 한다네. 차라도 한 잔 들겠나?”
“예, 복야 어른.”
복야는 강이 차를 드는 모양새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성이 없었다는 천것치고는 몸에 밴 예절이 못하여도 귀족 집 자제만큼은 되어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손길과 찻물을 머금는 방법까지도, 들리는 소문처럼 막돼먹은 자라면 도저히 구사할 수 없는 예법인지라 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강의 안면이 그리 거칠지 않아 고생을 모르고 자란 허여멀건한 도련님 같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말씨가 온화하고 예의 바르니 더더욱 그랬다. 어쩌면 단순히 황상의 눈에 들어 관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로 시샘을 받아 소문이 와전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제는 미안하네. 아무래도 궁내청에 있는 이들은 모두 과거를 보고 등용된지라, 자네 같은 이를 보면 시샘을 하게 되지. 소문이 그리 난 것도 있고. 자네가 폐하께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니, 자연히 성이 없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질 않겠나. 내 지금 보니 자네가 그리 천한 신분을 지녔던 이로는 보이지 않는다네.”
“아닙니다. 성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제게 성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가? 허면 본래 무얼 하고 지냈다가 폐하의 눈에 띈 것인가.”
“본래 저는 창천성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이었는데, 폐하께서 창천성에서 우연히 저를 보시게 되었습니다. 제게 다른 이들에게 없는 잔재주가 하나 있는데, 폐하께서 그것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이리 따라나선 것입니다.”
복야는 강이 거짓을 고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허드렛일이나 하던 자가 어찌 저런 풍채를 보인단 말인가.
“그 잔재주가 무엇인데?”
“아, 그것은 폐하께서 함구하라 명하신 관계로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산이 미리 입을 맞추어 놓자고 했던 바가 이것이었다. 특수한 능력이 있어 관직을 받았지만, 그 능력은 황상이 함구를 명한 관계로 말할 수 없다. 그리하면 어느 정도 캐내려던 관리들이 숙연해질 것이라며, 자신의 생각이 그리 기발하다고 자랑스레 말하던 얼굴이 떠올라 강은 저도 모르게 옅게 미소 지었다. 참으로 천진난만하였지, 그 얼굴. 하고 생각했을 때 복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가. 내 어제 보니 자네 기억력이 대단하던데, 혹시 그런 것은 아닌가?”
“……지존께서 제가 함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실까 염려됩니다. 부디 깊이 묻지 말아 주십시오. 있는 동안 궁내청에 누를 끼치지 않고 근면히 일하겠습니다.”
강은 제 발이 저려 다급히 그 화제로 이루어진 대화를 접으려 하였다. 자신의 기억력이 평범하지 않은 것은 산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어제는 경황이 없는 중에 묻는 대로 다 답을 주었지만, 어젯밤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을 때 어찌나 후회를 했던지. 강이 탁상 밑으로 늘어뜨린 발을 소리 나지 않게 구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내 자네를 좋게 보았으니 걱정할 것은 없네만, 다른 관리들은 아닐 것이네.”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허니 자네에게 다른 능력이 있다는 것은 티 내지 않는 것이 좋겠구만. 그것으로 인하여 자네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야.”
“예, 복야 어른.”
복야가 한마디 더 보태려는 순간, 저 멀리서 관료들이 등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은 더 이상 관련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태감 어른.”
강이 무거운 상자를 몇 개나 들고 창고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그때 태감은 황상의 명으로 강을 데리러 궁내청으로 나온 길이었는데, 이를 다른 낭관이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소문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황상 앞에서는 멍청하다 욕을 들어먹으며 위엄이고 자시고 하나도 챙기지 못하지만, 황상의 옆을 떠나면 이만한 권력이 없었다.
밤낮으로 그 곁을 모시며 일거수일투족의 수발을 드는 도태감인 고로, 작정하고 입김을 불어넣으면 못 할 일이 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앞서 산이 정벌하였던 망국 연이 붕괴된 계기가 바로 태감들의 농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고작 7등관인 낭관이 그 앞에서 긴장을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문성에게 볼일은 따로 있었다.
“수고가 많네. 이 낭관은 어디 있는가?”
황상이 이 낭관을 데려오라 명을 내리니, 소문성이 다른 관리들이 있는 데에서 그리 불러 보시면 이래저래 말이 나올 것이라 간언을 하였다가 장죽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희건궁에서 달려 나와 이제 막 궁내청으로 들어온 참인지라, 빨리 이 낭관인지 뭔지 하는 방약무인한 놈을 데리고 가야 했다.
“이 낭관 말입니까? 지금 창고에…….”
“아, 여기 있습니다.”
그때 강이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창고에서 나와 대답했다.
“이런 뙤약볕에 짐이나 나르다니. 안됐구만.”
“별말씀을요.”
“폐하께서 자네를 찾아 계시네. 따르게.”
“이 시간에요?”
“어허, 황명에 불복할 참인가. 어서!”
“아, 예…… 하지만 제가 지금 가면 업무가,”
황상이 오라고 하였으면 군말 없이 냉큼 따를 것이지! 소문성은 자꾸 말을 덧붙이는 강에게 호통을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랬다가는 장죽으로 한 대 맞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듯싶어 가까스로 성질을 죽였다.
“여긴 괜찮으니 어서 폐하께 가 보시게.”
보다 못한 복야가 한마디 거드니 강은 그제야 무겁게 발을 떼었다. 오늘 따로 시킬 일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오만 관리 다 있는 데에서 대놓고 불러낼 줄은 생각도 못 하였던 고로, 영 찜찜하고 복잡하였다.
“이 낭관 자네 말이야.”
소문성의 뒤를 따라 희건궁으로 묵묵히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말문을 연다.
“예.”
“폐하께 어찌 그리 무례한가. 폐하께서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보아 넘겨 주시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는 눈이 없을 때나 그런 것이지. 이곳은 금궐이고,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으니 조심해야 할 걸세. 명심하게. 자네는 더 이상 영주님의 아들이 아니니 말이야.”
“……예?”
“어허, 어찌 이리 말귀가 어두운가. 자네가 폐하께 심히 무례한 고로, 보기에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황상은 귀엽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소문성은 이리 두었다가는 계속 그럴 태세인 강을 도저히 그냥은 두고 볼 수 없었던지라, 궁색하게 거짓을 늘어놓았다.
“그렇다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강은 생각보다 큰 배신감이 들어 인상을 팍 찌푸렸다.
“폐하, 이 낭관 입시이옵니다.”
─재게 들라 해라.
문이 열리자마자 강의 모습이 보이니, 산이 탁상 앞에 서서 보고를 하고 있던 관리를 향하여 손짓했다. 그만하고 이만 나가라는 뜻이었다. 아직 말을 다 마치지 못한 관리는 당황하였으나, 이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쳐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산은 흘끗 강을 곁눈질하여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라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이쪽으로 와라, 이 낭관.”
강은 그 말에 그 앞으로 나아가 절을 올렸다. 산은 턱을 괸 채로 갑자기 되도 않는 체면치레를 하는 강이 이상하여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황상을 면전에 두고 귀찮다고 말하던 이가 갑자기 이러니, 늘 받던 절임에도 이상하게 어색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하였다.
“무엇 하는 거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를 뵈었으니 절을 올리는 것이 마땅한 일인지라 그리하였습니다.”
“응?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찌 그래?”
“아뢰옵기,”
“그놈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일전에 떼고 말하라 하지 않았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법도에,”
바깥에 서서 그 말을 엿듣던 소문성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예를 차리는 것은 좋으나, 저자는 어찌 중도가 없는가. 저것은 어쩌면 강이 대놓고 저를 나무란 태감을 한 번 먹이려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꽤 약이 바짝 오른다. 제발 내가 시켰다고는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그리 주문을 외고만 있었다.
“관료가 되더니 갑자기 이상한 버릇이 들었구나. 네 그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혼이 나기라도 했더냐?”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아니기는. 소문성!”
산의 입에서 그 이름 석 자가 나오니, 태감이 바짝 쫄아 고개를 들었다. 잰걸음으로 집무실로 들어서면서, 어쩌면 눈치 빠른 산이 강을 나무란 것이 저라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잔뜩 간덩이가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예에, 폐하.”
“궁내청 관리들에게 얼음을 띄운 화채나 내려라. 짐이 멋대로 관직을 내렸다고 그것들이 볼멘소리를 내는 모양이다.”
“예?”
“그자들이 이 낭관을 못살게 구는 모양이라고 하지 않아.”
“폐하, 어찌…….”
“주둥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그 혀를 뽑아 버리겠다.”
“예, 예에! 폐하!”
얼음을 띄운 화채라니! 어찌 그런 것을 관리들에게, 그것도 고작 저놈을 위해서! 총애가 대단타, 대단타 생각은 하였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소문성은 물러나면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을 슬쩍 째려보았다.
“어허, 그 눈깔!”
하지만 강보다는 산이 먼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한 번 호통을 놓았다. 소문성은 화들짝 놀라 잰걸음으로 물러나 집무실 밖을 빠져나갔다.
“자, 내가 이렇게 했으니 그대를 괴롭히는 자들이 드러내 놓고는 못 할 것이다. 물론 속으로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그대의 업보라고 생각하도록 해.”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신은 참말 괜찮으니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아직도 삐친 게 풀리지 않은 모양이로군. 이 낭관, 어찌해야 그 화를 풀 것이냐?”
“어찌 미천한 신분으로 지존이신 폐하께 그런 마음을 품겠사옵니까. 그런 일 없으니 하문을 거두어 주소서.”
“언제까지 그럴 것인데?”
강의 입장에서는 자꾸 저러는 산이 더 어이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리 오냐오냐해 놓고 뒤에 가서는 소문성에게 그 무례함에 대하여 꾸짖었다고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라는 말인가. 강은 한숨을 내쉬려다, 이것 역시 무례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그만두었다.
“내리실 명……. 앗.”
지존에게 먼저 질문하는 것도 큰 무례에 속한다. 강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꺼냈다가 급히 다물었다. 산은 그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궐의 편액을 죄다 갈 요량이니, 그대가 글씨를 쓰도록 해.”
“편액이라 하심은,”
“전각마다 걸린 그 편액 말이다. 방금 관리에게 물으니 족히 600개는 될 모양이다.”
“……그 편액을 신더러 쓰라는 말씀이십니까?”
“왜, 싫은가? 나는 그대의 글씨가 보기 좋아 그러는데.”
그 명이 상상을 초월하는지라, 강은 눈을 번쩍 뜨고 산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어찌 되었든, 지존이신 황상께는 대거리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은 이 낭관은 그러한 무자비한 명을 뒤로한 채 희건궁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산이 “사람을 보내 따로 맡길 일이 있다고 할 터이니 궁내청일랑은 신경 쓰지 말고 편액에만 집중하라”고 하였는데, 강이 다른 관원들의 눈치를 보아 일과가 끝난 뒤에만 편액을 쓰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안 그래도 다른 관원들이 강을 심히 고까워하는데, 특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찌 귀찮게 굴까 가늠하면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이 낭관! 이 낭관! 게 서게!”
궁내청에 거의 다 다다랐을 즈음, 뒤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말이 남았는가 싶어 피로하게 돌아보았더니 소문성이 그 눈초리에 괜히 뜨끔하여 슬쩍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 자네……. 참으로 융통성도 없네.”
“예?”
“예를 차리라고 하였지, 그리 융통성 없게 굴면 어찌하나. 자네도 참……. 답답하구만 그래. 촌사람이라 그런가.”
황상을 두고도 촌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창천성은 황상의 연고지이다. 강은 기가 막혀서 그를 바라보았다.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이제는 황상이 소문성에게 강이 융통성이 없다고 뒷말이라도 한 모양이다. 산이 심히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 역시 무례하다고 말하여 남들 하는 것처럼 했을 뿐인데 대관절 어쩌라는 것인가. 뙤약볕 아래에 있으니 짜증이 나는 것이 그냥 참아지지도 않는다.
“태감 어른.”
“왜, 왜 그러나.”
이제는 소문성이 강의 기색에 조금 눌려 찔끔찔끔 눈치를 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강은 한숨을 푹 내쉬며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아 내기 위하여 손을 들어 올렸다.
“허, 헉!”
하지만 소문성은 강이 황상의 총애를 믿고 제게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던지 괴상망측하게 헛숨을 들이키며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손등으로 땀을 닦아 낸 강이 기이하다는 듯 바라보자, 그제야 소문성이 제가 괜히 겁을 집어먹었구나 싶어 멋쩍게 상체를 뻗대며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저는 폐하께 남들이 하는 것처럼 예를 다 하였습니다. 한데 이제 와서 융통성이 없다니요. 어쩌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자네……. 평소 폐하께 하던 가락이 있는데,”
“하던 가락이 무례하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아, 그야 그렇지…….”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겁니까?”
“아닐세, 그게 아니고 내 말은!”
“허면 아니라고 하셨으니 잘못한 것이 없는 줄로 알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명일부터 편액을 쓰면 된다 하셨으니 더는 궁내청에 자리를 비우면 아니 되질 않겠습니까.”
그리 말하고 강이 휙 가버리니, 소문성은 몇 번 어버버거릴 뿐,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그만 궁내청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기만 해야 했다.
‘무슨 저런 자가 다 있나.’
생각해 보면, 죄인 된 처지이기는 하나 개국공신이었던 채윤직의 양자이니 그리 천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황상을 제한 그 누구에게도 이런 홀대를 받아 본 적이 없던 소문성은 괜히 강이 괘씸하여, 발을 쿵 구르고는 희건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레 자리를 비웠습니다.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까 나르던 것을 마저 나를까요?”
거의 반쯤 허리를 숙인 채로 궁내청으로 들어간 강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부담감에 몸서리를 쳤다. 그렇게 대놓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상에게 불려갔으니 어찌나 밉보였을 것인가. 눈을 질끈 감고 떨어질 질타를 예상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등을 붙잡으며 허리를 곧게 펴 주질 않겠는가.
“하하, 이 낭관 자네. 짐을 나르다니 그 무슨 당치도 않는 소리인가. 저어기 시원한 데에 가서 좀 쉬고 있게나.”
강이 그 황상을 뒷배 삼아 관직을 얻은 ‘이강’이라는 것을 안 뒤부터 줄기차게 외면하던 7등관 낭관이었다. 그자가 갑자기 비굴하게 웃으며 강의 손을 맞잡고 안쪽으로 안내하니,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기만 했던 다른 관원들도 “그래, 그러게!” 하며 맞장구를 치길 시작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지 하고 어리둥절하던 강은, 아까 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상이 직접 화채를 하사하였으니 드러내 놓고 괴롭히지는 못할 것이라던, 그 의기양양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응? 이 낭관 왔는가.”
안쪽에서 장부에 인장을 찍고 있던 복야가 다른 낭관의 다독거림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강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강이 어쩔 줄을 모르고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니, 관원이 그의 앞에 의자 하나를 빼 주며 앉기를 권하였다.
“여기서 잠시 쉬고 있게. 내 할 일이 생기면 말해 줌세.”
“예……. 한데 제가 아까 나르던 것이 있어서, 그걸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부터 먼저 하고 쉬겠습니다.”
“응? 무슨! 아닐세. 아까 자네 가고 나서 우리가 다 했어. 걱정하지 말게.”
“저…….”
갑자기 달라진 대우에 어쩔 줄을 모르던 강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민망하게 뺨을 긁으며 낭관을 올려다보았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덜 재수 없을까. 그것이 강의 유일한 고민이었다.
“왜 그러나?”
“저……. 폐하께서 화채를 내리셔서 그러시는 것이라면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원체 베푸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고, 마침 궁내청이 희건궁과 가까이 있으니 어쩌다 보니 우연히 그리된 것입니다. 저 때문에 일부러 그러신 것이 아니니 제게 너무……. 그, 저……. 특별 대우는 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연히 그리된 것이라고? 낭관은 강의 말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어찌 그것을 두고 우연이라고 말하겠는가.
시간은 한 식경 전으로 돌아간다. 산이 궁내청 관원들에게 화채를 내리라 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는데, 그때 갑자기 희건궁 태감들이 궁내청 뜰에 나타나 소리쳤다.
─궁내청 복야는 나와 황명을 받으라!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인가 싶어 모든 관원들이 사색이 되어 하던 것도 모두 내던져 두고 뜰로 나왔다. 그곳에는 웬 커다란 가마솥 같은 것이 놓여 있고, 그 주변에 세 명의 태감이 나란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보다 하여 복야가 그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고, 다른 관원들도 함께 바닥에 엎드렸다.
─황제 폐하께서 궁내청 관원들에게 상을 내리셨으니 하해와 같은 황은에 보답하여 충심을 다할지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황은이라고 하니 복야가 서둘러 외치고는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한 태감이 그릇을 꺼내더니,
─줄을 서시오!
하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관원들이 나란히 줄을 섰더니, 그들에게 차근차근 그릇을 나누어 주고는 가마솥 앞으로 모이라 한다. 서로 조근조근 ‘무슨 일인가?’, ‘이게 다 뭔가?’ 하고 물어도 알 턱이 없으므로 웅성웅성 소리만 궁내청 뜰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태감이 가마솥 뚜껑을 열어젖혔다.
─아니, 이것은 화채가 아닌가!
─갑자기 웬 화채입니까?
결국 복야가 조용히 물으니, 태감이 잠시 눈치를 보다가 목소리를 확 낮추어 대답하였다.
─폐하께오서 과거를 보지 않은 이 낭관에게 관직을 주었으니, 관원들이 볼멘소리를 낼 것이라며 이것으로 원성을 낮추게 하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이 낭관을 특별히 총애하시니, 복야께서 관원들을 잘 다독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 말을 그 낭관이 엿듣고 관원들에게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고대로 전한바, 다들 반나절 동안 강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에 막급한 후회를 하며 자세를 고쳐먹기로 한 것이 이 상황의 모든 전말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면전에 대고 하자니 강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기에 낭관은 결국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하하, 아무튼 좀 쉬고 있게. 정말 자네 할 일이 없으이.”
하고는 사라지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날 퇴청을 할 때까지 강은 결국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도 그에게 일을 시키지 않은 고로 강이 일부러 복야에게 가 일을 돕게 해 달라고 청원까지 넣은 참이었다. 복야가 잠시 망설이다가, 일이나 익히고 있으라며 장부 하나를 넘겨주어 그것을 읽은 것이 오늘 강이 한 일의 전부였다. 강의 기억력이 원체 남다른지라, 읽었다고 하기도 애매하였다. 책을 펴 두고 슥 보기만 하여도 마치 판화를 찍은 양 뇌리에 팍팍 들어박히니, 강은 결국 개국 이래 5년 동안 궁내청에서 취급한 물자들을 모조리 외워 버리고 말았다.
“내일도 이렇게 할 일이 없다면 큰일이다.”
강은 모두가 퇴청한 뒤 마지막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뜰로 나왔다. 이미 해가 져 있었고, 이제는 무료하게 관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강은 잠시 그 앞을 서성이다가 어제 잠시 쉬었던 자미연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도 또 마주치지는 않겠지, 안일하게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산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 평가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괘씸한 점은 자신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심지어는 재미있는 자라고까지 말했으면서 소문성에게 뒷말을 한 것이다. 그보다 더 괘씸한 것은 기껏 태도를 고쳤더니 또 보기 안 좋다 말한 것이다. 또 그런다면 아예 대놓고 그 앞에서 무어라 말이라도 해 볼 참이었다. 면전에 말씀하셔도 다 알아듣습니다! 하고 늠름하게 말이다.
정자가 있는 곳까지 당도하자마자 강은 무작정 궁둥이를 깔고 앉았다. 며칠 그림을 안 그렸더니 조금씩 좀이 쑤셨다. 요사이에는 남이 시키는 대로만 그렸으니 오랜만에 제 붓 가는 대로 그릴 마음이 났다. 강은 정자 지붕 아래 놓인 등을 켜고 그 앞에 엎드려 화선지를 문진으로 고정하였다. 그리고 못에서 물을 조금 떠 와 벼루에 먹을 갈았다.
그리운 창천성의 그림을 그려 보자. 전에 그렸던 것은 산에게 주어 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창천성의 모습은 지금도 머릿속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담겨 있으나,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니…….’
생각해 보면, 채윤직이 밤낮으로 강의 걱정을 할 것이라 그의 건강이 가장 염려되었다. 서신이라도 한 장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 그럴 위치는 아닌 듯하여 그럴 수도 없고……. 강은 차라리 자신에게 천릿길도 한달음에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며 붓을 놀렸다.
“아름다운 그림이구나.”
한참 삼매경에 빠져 있을 무렵, 갑자기 머리 위에서 미성이 들려왔다. 결코 산의 것은 아니었다. 여인의 음성이었으니 말이다. 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귀해 보이는 여인이 안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
“네 이놈! 창빈 마마께 당장 예를 갖추지 못할까!”
“예, 예?”
“어허, 아둔하기는. 창빈 마마시다! 당장 예를 갖추어라!”
눈을 한참 껌뻑이고 있던 강이 급히 무릎을 꿇으며,
“궁내청 낭관 이강이 창빈 마마를 뵙습니다.”
하고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라.”
“황송하옵니다.”
“내 산보를 할까 하고 자미연으로 왔더니, 뜻밖의 만남이 있구나. 그대가 그 유명한 낭관 이강이로군.”
창빈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묘한 말투로 말했다.
‘그 유명한 낭관?’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의미 같진 않았다. 설마 희비처럼 귀찮게 굴 요량은 아니겠지. 그러나 낙관하려 하여도 도저히 되지 않는다.
‘따귀나 안 맞았으면 좋겠는데…….’
“유명한 줄은 모르겠사오나, 낭관 이강이 맞사옵니다.”
창빈은 그리 대답하는 강을 올려다보며 입을 가리고 차갑게 웃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야심한 시각에 자미연에 남아 있느냐. 방자하기 짝이 없는지고. 자미연은 폐하와 폐하의 사람에게만 허락된 심처이니, 8등관 낭관 따위가 마음대로 발을 디딜 곳이 아니니라.”
강은 그 말에 당황하여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난밤, 산과 이곳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그러한 말은 들은 바가 없는지라 그저 마음대로 디뎌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같은 말을 하더라도 저렇게 모나게 하는 것으로 보아 어찌 대답하든 이미 강은 창빈에게 미움을 받아 버린바. 하는 수 없이,
“소인이 아둔하여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며 다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창빈은 일어나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고, 여전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그림이 출중한 것으로 보니 어찌 황상의 눈에 들었는지는 알 만하였다. 희비가 그렇게 총애를 얻었으니, 이자도 그러한 요망한 방법을 사용하여 은총을 받았을 것이다.
피부가 희고 생김새가 단정한 것을 보면, 여태 황상이 침전에 들였던 미동들과 판이하게 다른 외양도 아니다. 어쩌면 시침을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창빈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하여, 저도 모르게 호갑투를 한 손을 잘그락거리며 벌벌 떨었다.
어제 황상이 창빈의 패를 뒤집었다는 연통을 받고 나서 얼마나 신이 났던가. 패물을 고르고, 명운궁을 단장하는 데에만 두 시진을 썼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알아보았더니, 이 자미연에서 이자를 만나신 뒤 바로 희건궁으로 돌아가셨다질 않은가.
“천한 것. 궁중의 법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망령되게 희건궁 앞을 알짱대며 황상을 희롱하느냐.”
“마마, 그것이 아니오라 소신이 궁내청의 관원인지라…….”
“마마, 소인이 궁내청에 차를 받으러 갔다가 이자에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창빈의 곁에 서 있던 상궁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그러자 창빈의 눈썹이 한 번 움찔하는가 싶더니 동공이 커진 채로 강을 매섭게 노려보며,
“네놈이 폐하의 은총을 믿고 멋대로 까부는구나! 가만두었다가는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니 본궁이 그 버릇을 고쳐야겠다.”
하고 엄포를 놓는 것이다. 강은 엎드린 낯빛을 굳히며 소리를 내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따귀만 안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더니 더한 짓을 당하게 생겼다.
“소현자! 이자에게 매를 쳐라.”
창빈이 소리치자, 곁을 따르던 태감이 허리춤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봉을 꺼내며 정자 위에 꿇어앉은 강을 흙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같은 시각, 산은 정무를 막 마치고 밤바람을 쐬겠다고 희건궁 바깥으로 나온 참이었다. 따르던 태감들을 모두 물리치고 도태감인 소문성만을 대동한 채로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었는데, 계속하여 아까 낮에 보았던 강의 기이한 태도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지라 영 낌새가 나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소문성.”
“예, 폐하.”
“아까 이 낭관의 행동이 참으로 이상하질 않았더냐.”
“이 낭관…… 말씀이시옵니까.”
“오냐. 본디 짐이라고 하여 그리 예를 갖추고 하는 이가 아니었는데, 어찌 갑자기 그러는 것인지 원. 지켜보는 짐이 다 답답하여 숨이 넘어갈 뻔하였느니.”
“하오나 폐하, 본래 그것이 황실의 법도이니 아무리 이 낭관이라 할지라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으음, 이 낭관이 궁내청에서 관료들과 섞여 지내더니 갑자기 개과를 하였던가…….”
“영명하십니다, 폐하.”
말이야 개과지, 산이 보기에는 그리 탐탁지가 않았던 고로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괜히 찝찝하였다. 산은 장죽을 바로 쥐며, 진로를 바꾸어 자미연을 가리켰다.
“자미연으로 가자.”
“근자에 자미연으로 자주 납시시옵니다.”
“자미연의 풍광이 그리 좋은 모양이다. 짐은 몰랐는데 이 낭관이 그곳에 풍류가 있다고 하질 않아. 짐도 그 풍류를 좀 즐겨 봐야겠다.”
둥글게 깎인 나무 사이를 헤치고 지나면 아름다운 꽃이 만개한 길이 이어진다. 이것을 따라 쭉 나아가면, 저 멀리 반짝이는 것이 보이는데 그것이 달빛에 비친 연못의 표면이며 그 빛을 받은 꽃이 밤바람에 휘청이다 꽃잎을 흩날리는 절경이 이어진다. 산은 닦인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저 멀리 정자가 있는 곳에 가마 한 채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저 가마는 누구의 것이냐.”
“명운궁의 것이옵니다.”
“이곳에서 명운궁까지 거리가 있거늘, 어찌 창빈이 이곳까지 산보를 나왔는고.”
산이 턱을 괴며 물었다.
‘그야 어제 명운궁으로 납시던 페하께서 자미연에서 발목을 붙잡히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분기탱천했기 때문이겠지요.’
소문성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내지 않고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산은 기이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발걸음을 더했다. 이윽고 정자 앞으로 가까워 오자, 소문성이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소리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때 산이 본 것은, 매를 든 창빈의 태감과 그 앞에 꿇어앉은 강. 그리고 아연실색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창빈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창빈은 가까스로 경악한 속을 달래며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사위가 어두운 고로,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산은 잠시 고개를 뒤로 빼고 멀찍이 그 광경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정자 위에는 지필묵이 놓여 있고, 먹이 묻은 붓이 어지럽게 그 위를 나뒹굴고 있다. 강은 신을 채 신지 못한 채로 흙바닥에 꿇어앉아 있으며, 창빈의 태감이 손에 나무로 깎아 만든 봉을 든 채로 그 앞에 서 있다가 황상을 발견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낭관 이강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창빈에게 일어나라는 명을 내릴 것을 기다리고 있던 강은 한참의 침묵에 은근슬쩍 예를 갖추었다. 어차피 바닥에 무릎은 꿇고 있었던지라 크게 자세를 바꿀 것도 없었다. 대관절 상황이 어찌 되려는가 싶어 조금 혼란스러운 것을 빼면, 다행인 줄도 몰랐다. 태감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기 직전이 아니었던가.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창빈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오해하기 좋은 광경이질 않은가 하고 내심 생각했으나, 사실 그것은 오해가 아니었다. 산은 창빈이 태감을 시켜 낭관을 벌주려 하였다 생각했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어찌 네 수령태감이 매를 들고 있느냐.”
산이 삐뚜름하게 서며 여전히 부복해 있는 태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창빈이 잠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목청을 돋우고는,
“이자가 신첩을 모욕하였기에 벌을 주려 하였습니다.”
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방금까지 분기탱천하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지라, 강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 낭관 따위가 짐의 빈을 모욕하면 안 되지.”
다행이다! 창빈은 산의 무심한 말에 크게 안도하였다. 천한 낭관의 편을 드실까 어찌나 걱정했던지, 등허리에 맺힌 식은땀이 아직도 서늘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첩은 마음이 상하였으나 그저 넘어갈 요량이었사옵니다. 허나 신첩의 하인들이 모두 그 모습을 본지라, 지엄한 법도를 아니 가르칠 수 없었나이다.”
“낭관은 고개를 들고 말해 보라. 창빈을 어찌 모욕하였느냐.”
그리 물으면서, 산은 어쩌면 강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억울하다 읍소하는 광경을 기대한지도 모르겠다. 덤덤한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나고, 강이 매우 무심한 목소리로 아뢰기 시작한 것이 꽤 실망스러운 것으로 보아서는 말이다.
“작일 명운궁에서 궁내청으로 차를 받으러 나왔사온데, 물자가 부족하여 내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없던 것이라도 만들어서 드렸어야 하는데, 신의 생각이 짧아 그러질 못하였나이다. 벌하여 주소서.”
하지만 말은 끝까지 들어야 안다고 했던가. 은근슬쩍 빈정거리는 기색이 역시 강은 강이었다. 산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기야, 그의 성정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만한 것은 아니기는 하였다.
“게다가 자미연에 출입하는 것은 황친이 아니고서야 엄격히 금지되었사온데, 이 낭관이 어제부터 사사롭게 드나들었다는 말을 들어 엄중한 법도를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였나이다.”
멍청하기는. 강은 그 말에 코웃음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강이 어제 자미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결국 황상이 간밤에 어디로 발걸음을 하셨는지 알아보았다는 뜻이고, 이는 결국 일일이 황상의 뒤를 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었다. 천성이 자유로운 산이 이를 반길 리가 없다. 강은 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미연에 낭관이 사사로이 출입하는 것은 아니 될 일이지.”
산의 말에 창빈의 낯빛이 한결 더 나아졌다. 매를 들고 있던 소현자는 자신이 황상이 총애하는 이를 때리려 하였던 것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고 여겨 안도하였다. 다만, 산의 곁을 지키고 있던 소문성만은 달랐다. 황상은 그 속을 모르므로, 이야기가 완전히 끝이 나지 않는 한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알 수 없질 않은가.
“허나 짐이 간밤에 이 낭관의 재주로 인하여 심히 즐거웠던 고로 출입을 윤허하였으니 문제는 없단다. 짐은 도리를 모르는 자가 아니지.”
“……영명하십니다, 폐하.”
창빈은 아니꼬운 마음을 힘겹게 감추며 겨우 대답하였다. 황상이 이 낭관의 자미연 출입을 윤허한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다시 생각하니 간밤에 그 재주로 인하여 심히 즐거웠다는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 재주라는 것이 무엇인데 간밤에 황상이 즐거웠다는 말인가.
‘역시 저놈이 폐하를 모신 것인가.’
조만간 소상히 알아볼 생각이기는 하였으나, 이리 황상의 입으로 사실을 알려 주시니 할 일을 덜었다. 창빈은 고개를 숙이며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어두운 탓에 그녀의 불편한 표정을 황상은 눈치채지 못하리라.
“허나 이 낭관이 명운궁에 차를 내어 주지 않은 것은 참으로 불손한 일이옵니다, 폐하.”
보다 못한 소현자가 제 주인의 편을 들고 나섰다. 창빈은 그 말에 오 할의 희망과 오 할의 절망을 느꼈다. 황상은 하인이 상전의 일에 참견하는 방자함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소현자의 말에 납득을 해 주신다면 제가 볼품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창빈.”
“예, 폐하.”
“네 태감이 짐에게 이리도 오만불손하거늘, 어찌 보고만 있느냐.”
몹시도 치욕적이었다. 황상은 결국 창빈의 앞에서 이 낭관의 편을 들어 주었다. 게다가 주인을 구해 보겠다고 말 한마디 거든 태감에게 죄를 묻겠다고 하시니, 오늘은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을 것이다. 창빈은 앞에 모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가리며 주먹을 부르쥐었다.
“……소현자. 이 멍청한 놈! 폐하께 당장 죄를 빌어라.”
“죽여 주십시오, 폐하. 소인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결국 바닥에 엎드려 제 벌을 청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강은 눈을 질끈 감는 수밖에 없었다. 산을 따라 중경으로 온 이상, 자신으로 인하여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못 한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은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궁내청의 관리들이 강이 받는 총애를 두고 뒷말을 하였더라면 잘 감내했을 것인데, 이렇게 비빈들과 엮이니 여인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벌써부터 피로해지고 말았다.
“멍청한 놈! 저놈을 태감부에 끌고 가라!”
목숨을 구걸하는 소현자에게 산이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문성이 나서며 어느새 뒤에 줄지어 서 있는 태감들에게 소리쳤다. 순식간에 그들이 정자 앞까지 뛰어와 바닥에 엎드린 소현자의 뒷덜미를 쥐어 잡았고, 창빈은 한숨을 쉬었다.
‘나서야 하나, 나서지 말아야 하나. 나로 인하여 저 태감이 유명을 달리하게 되거든 후에 창빈의 원망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금궐에서 유명인사로 떠올랐어도, 아직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다녀가는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강은 그 모습을 보며 깊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저따위 태감이 어찌 되든 관심이 없었고, 창빈이 황상의 총애를 받든 받지 못하든 상관없었다. 저만 3년 동안 몸 편안히 잘 있다가 때가 되면 하늘의 부름을 받기만 하면 되었으니……. 지금 어찌하느냐에 따라 남은 3년이 편안할지, 가시밭길이 될지 정해질 것이다.
“폐하. 삼가 낭관 이강이 아뢰옵니다.”
목덜미를 쥐어 잡히고 다섯 보쯤 끌려가던 소현자를 비롯한 태감들이 문득 멈추어 섰다.
“말해 보라.”
“작일 명운궁에 차를 내지 못한 것은 신의 잘못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날에 어찌 귀한 몸이 되어 차도 없이 날 수 있겠사옵니까. 태감이 비록 법도를 모르고 어전에서 망령되게 군 것은 사실이나, 신의 잘못이 없지 않으니 신도 함께 벌하여 주소서.”
설마 산이 저도 같이 벌하려 들지는 않겠지, 하는 건방진 믿음이 있기도 하였다. 산은 지금 강의 재주에 반쯤 장님이 되어 버린 상황이니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 싶은 것이다.
산은 뒷짐을 지었던 손을 풀고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저것이 지금 창빈에게 원망을 사고 싶지 않아서 수를 쓰는 것이 눈에 보이니, 꽤 재미있었다. 본래 영명하지 못한 이들은 황상이 총애를 주면 분수를 모르고 날뛰어대기 마련인데, 이자는 조금 다르질 않은가. 산은 이미 그런 자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왔던지라 이런 반응이 몹시 기꺼웠다.
“없어 못 내준 것을 어찌 그대의 잘못이라 하지?”
“관리를 하지 못한 신의 탓입니다.”
“영오하구나, 이 낭관.”
그리 말하며, 산이 강의 턱 밑을 조금 쓰다듬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창빈은 저 낭관의 혓바닥으로 자신의 하인이 목숨을 건지고, 대외적으로 낭관에게 총애 싸움에서 패하였다는 소문을 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결국 저 낭관의 힘이 자신의 영향력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으므로 더욱 참담하였다. 하기야, 행성에서 희비를 두고 저자만 데리고 온 것을 보면 희비도 결국 그 싸움에서 패한 것인데 어찌 자신이라고 버틸까. 우선은 백의종군해야 한다.
“저자를 놓아주어라.”
소문성이 재빨리 황상의 뜻을 읽고 그를 붙들고 있던 태감들에게 명령하였다. 그러자 태감들이 바닥에 내던지다시피 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대열을 갖추었다. 창빈은 이쯤 되어 스스로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축객하기 전에 물러가는 것이 체면을 덜 깎는 일이었다.
“폐하의 자비로움에 신첩 탄복하였사옵니다. 하인을 잘못 가르친 죄가 있으니 명운궁으로 돌아가 엄히 다스리려 하옵니다. 물러가기를 청하나이다.”
황상이 알았다는 듯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으니, 창빈이 예를 갖추고는 재빨리 가마로 향했다. 그리고 몸을 내리기가 무섭게 태감을 다그쳐 자미연을 빠져나갔다. 아마 이곳에 다시 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후궁이 된 이래로 최고 치욕적인 날이었다. 차라리 희비 앞에서 가증을 떨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낭관, 언제까지 그리 있을 참이지?”
희건궁 태감들도 모두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사라진 뒤, 산이 강을 흘긋 내려다보며 물었다. 강은 그 말에 몸을 일으켰으나, 오랫동안 엎드려 있던 탓에 무릎이 저리고 다리에 쥐가 나는 것만 같아 조금 비틀거렸다. 산이 그 모습을 보고,
“저기 가 앉아.”
하니, 강이 염치 불고하고 정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다리도 쭉 펴고 앉아.”
산이 한마디 보태었고, 강은 그 말에 그런 행동은 무례하니 그러지 않겠다 아뢰려다 다리가 심히 저려 거절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몸을 지탱하며 길게 앉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산은 정자 한가운데에 놓인 등에서 불씨를 옮겨 화로에 던지고는 장죽에 불을 지폈다. 연기가 바람에 실려 강의 코앞까지 다다랐을 때, 강은 이유 모를 편안함마저 느끼게 되었다. 아무래도 산을 만난 이래로 가장 편히 있을 수 있던 곳이 역설적이게도 지존의 앞인지라, 그 곁에 가면 늘 맡는 냄새가 그에게 안정을 주는 모양이었다.
“……무릎베개 해 드릴까요?”
생각 없이 나란히 앉아 있다가 강이 괜히 면구스러운 마음이 되어 물으니, 산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베고 누웠다.
“다리가 저린 것 같아서 일부러 기다렸더니.”
“저린 것이야 금방 풀립니다. 이곳에는 어쩐 일로 발걸음을 하셨는지요. 창빈의 목소리가 자미연 바깥까지 들렸습니까?”
“그럴 리가. 그저 그대 느낀 풍류를 나도 느껴 볼까 해서 왔지.”
풍류는 결국 둘러댄 말인 것을. 강은 괜히 겸연쩍어 헛기침하였다.
“……폐하. 저,”
“물을 말이 있으면 주저 말고 말해라.”
강이 심히 머뭇대는 것을 알고 산이 먼저 말길을 열었다. 하지만 무례함을 지적받은 바가 있어 괜히 신경 쓰였다. 이런저런 불만이 많기는 하여도 금궐에 있는 한 산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벌써부터 그런 꾸짖음을 받았다면 더 피곤해질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물으라 하였으니 묻는다.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다.
“어찌 창빈의 앞에서 신의 편을 드셨는지요. 신이 일찍이 폐하를 따라 중경으로 오면서 세간 사람들의 투기와 시샘을 걱정하였는데, 이리 편을 들어 주시면 신이 창빈에게 미움을 받지 않겠습니까.”
“허면 창빈의 태감 놈에게 매라도 맞을 참이었더냐.”
“그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폐하께서 신의 편을 드신 고로, 앞으로 이 일이 금궐 내에 파다하게 퍼져 신이 피곤하고 귀찮아질 것입니다.”
“나는 창빈의 편보다는 그대의 편이 들고 싶은데, 어찌 그것 하나 마음대로 못 하게 한단 말이야?”
“창빈은 폐하의 후궁이니, 저 같은 것보다는…….”
“그대가 후궁이 되면 내가 그대의 편을 들어도 되는 것이냐?”
“아니, 뭐. 논리는 그렇사옵니다만, 저는 딱히 후궁이…….”
되고 싶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되고 싶은지, 되고 싶지 않은지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산이 저를 총애하는 것은 보아 알겠으나 그것이 그런 방향이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고, 애초에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료들보다 먼저 후궁에게 미움받을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채씨 가문에서 파문을 당한 것은 모로 보든 잘한 일이기는 하였지만…….
“농이야. 진지하기는.”
“매양 그리 농을 하시는데 어찌 아니 진지해지겠습니까.”
“그래서 싫은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흥, 내숭 떨기는. 속으로는 갖은 욕 다 하고 있는 걸 다 안다.”
“아니옵니다. 결코 그런 일 없사옵니다.”
“웃기지 마. 날 바보로 아는 게지?”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정말 아닙니다!”
“입만 열면 거짓이지.”
“……아닙니다. 정말, 진짜, 참말 아닙니다.”
한참을 그리 입씨름을 하다가 이내 강이 씩씩대기 시작했다. 산은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는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심드렁해 보이는 얼굴 사이로 언뜻 비치는 저런 모습들이 꽤 앙살스러웠다.
“알았다. 그대 말이 다 맞지, 뭐.”
“예. 제 말이 다 맞습니다.”
어느새 어둔 하늘에 뜬 달이 조금 기울었다. 창 개국 이래 한시도 시끄러웠던 적 없었던 자미연이 근자에 황상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으니, 그곳을 지키고 선 시위들이 수군수군 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창빈 마마를 뵙습니다.”
창빈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하여 다른 사람을 만날 기분이 아니었다. 성귀인이 인사를 여쭈러 왔다고 하였을 때에도 상궁을 일러 물리라고 할까 하다가도, 괜히 그랬다가 창빈이 신임 낭관에게 대패하여 몸져누웠다는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하는 수 없이 들이게 하였을 뿐이었다.
“일어나라.”
“예, 마마.”
“귀인에게 차를 내주어라.”
창빈은 곁에 선 상궁에게 명하고는 힘없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잠도 설쳐서 눈꺼풀이 천 근 같았고,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으면 언뜻언뜻 어젯밤이 떠올라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만 같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겨우 짚으며, 창빈이 성귀인을 바라보았다. 어쩐 일로 왔느냐 물을 생각이었으나 짜증이 나서 묻고 싶지도 않았다.
“마마,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창빈은 성귀인을 향하여 눈을 흘겼다. 내명부에 도는 소문이라는 소문은 성귀인의 귀를 아니 거쳐 간 적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르는 일이 없는 여인이다. 어제의 일을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황상이 제도로 돌아왔을 때, 그날 그녀와 담소를 나누며 분명 자신의 패를 뒤집을 거라며 희희낙락했던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다 벌겋게 달아오르는 지경이었다. 여러모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몰라 묻느냐.”
“마마……. 어찌 그런 일로 심기를 어지럽히십니까. 한낱 낭관 따위에게요. 게다가 성도 없던 미천한 자인데, 어찌 폐하께서 오랫동안 성총을 주시겠습니까. 잠시 스쳐 가고 말 인연이니 마음에 두지 마소서.”
“아니야……. 그렇게 쉽게 보아 넘길 만한 것이 아니야.”
창빈은 황상이 제도에 창 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희비와 함께 후궁으로 들어왔다. 그림 그리는 재주는 있었으되, 희비만큼은 못 되어 그만큼의 성총을 받지는 못했지만, 창빈의 아비가 개국에 공을 세운 전적이 있던 탓에 금세 시침을 들게 되었고 그 뒤로도 총애를 받아 왔다.
자주 뵈었으니 그만큼 잘 안다. 황상은 그리 쉽게 총애를 내비치는 이가 아니었으며, 나서서 편을 드는 이도 아니었다. 천한 이가 분수를 모르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어찌 아랫것들이 눈치를 보았던지. 명운궁에 황상이 납시면 긴장이 들어 아랫배에 힘을 주는 고로 궁녀들이 먹은 저녁이 얹혀 손을 따곤 하였다.
한데 그 낭관은 어떤가. 황친이 아니고서야 출입도 할 수 없는 자미연에 자유로이 출입하게 두었고, 천한 것에게 그 의미 깊은 성을 내리셨으며, 심지어 품기까지 하셨다. 뿐인가. 알아보니 이강이 과거를 보지 않은 채로 관직에 등용이 된 고로 궁내청 관원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을 염려하시어 상까지 내리셨다질 않은가.
“희비 마마를 제치고 총애를 얻었기 때문에 걱정하시는 거라면 염려 마소서. 어차피 희비 마마를 향한 총애도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하필이면 그 이강이라는 자의 등장과 맞물린 것입니다.”
“아니라니까! 네가 무얼 안다고 떠들어? 본궁이 직접 보았단 말이다! 그놈의 턱 밑을 쓰다듬으시던 그 어수에 애정이 담뿍 들어 있었단 말이야.”
심히 신경질적이었다. 하지만 창빈의 말이 가히 충격적이기는 하였다. 남이 보는 앞에서 그리 어루만지셨다는 그 말은 들어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고 머리에 그려지지도 않는다. 성귀인이 그리 총애를 많이 받던 후궁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모신 시간과 들은 소문이 있어 도무지 그 그림이 합치되지 않는 것이다.
“마마…….”
“이강이 재작일 밤에 폐하의 시침을 들었던 모양이야.”
“…….”
“이러다가 첩지를 내리시진 않을까 걱정이구나. 그런 천것이 내명부에 들어오면 부정이 탈 거야.”
“희비 마마께서 그냥 두시겠습니까?”
“하! 희비?”
창빈이 찢어지는 목소리를 내며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언제 적 희비인가. 행행에 따라갈 때까지만 하여도 큰 은총을 받았으나, 이 보라. 이강이 나타나자마자 후발대로 빠져 아직도 제도로 오는 중이 아닌가. 희비도 속이 말이 아닐 테지만, 그녀는 이제 내명부에서 전처럼 기를 펴고 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 잘난 그림도 결국 이강에 비하면 졸작에 불과하니, 다시 황상을 꾀어낼 방도도 없다.
희비가 천하 미색이기는 하여도 그런 미색은 대륙을 뒤지면 하나쯤 아니 나올까. 게다가 그 낭관이 피부가 희고 단정한 것이 황상이 미동을 고르는 취향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 이는 희비만이 지니고 있던 특장이 모두 이강에게 밀린다는 뜻이다. 그 배에 든 아기씨가 황자라면 모를까…….
“폐하께서 희비에게 은총을 주셨을 때에도 희비는 폐하께 볼멘소리 하나 못 냈다. 지체도 높고 가문도 막강한데 말이야. 한데 이강이 감히 묻지도 않은 말을 아뢰며 착한 체를 했을 때 폐하께서 영오하다 하시며 기꺼워하신 것을 생각하면!”
“……허어.”
들은 것보다 그 총애가 더욱 대단하여 성귀인도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정도일 줄이야. 소문보다 더욱 대단하구나. 나는 소문이 부풀려진 것인 줄 알았는데…….’
“이강이 폐하의 성총을 믿고 안하무인하다면,”
“이를 말이더냐! 안하무인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이강이 그리 뒷배를 믿고 건방을 떠는 자는 아니었으나, 이미 창빈의 눈에는 그리 보이는 고로, 결국 더러운 뒷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귀인은 이강을 직접 본 일이 없으므로 창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머릿속에 그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여 혀를 쯧쯧 찼다.
“천박한 것……. 그것이 폐하의 혜안을 흐리기 전에 어찌 치워 버려야 할 것인데.”
한편, 황상의 혜안을 흐릴지도 모르는 요망한 낭관 이강은 모두가 퇴청한 궁내청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늘도 심각하리만치 할 일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궁내청은 몹시 바빴으나 저만 홀로 한가하였다. 일을 달라고 하여도 시원한 곳에 있으라 한사코 말려 대기에 자진하여 붓과 장부를 집어 들었더니 그것을 도로 빼앗겼다. 복야가 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일을 도우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진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축냈을 것이다.
‘밥값은 해야지.’
아무튼 낭관으로 제수를 받았으니 녹봉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할 일이 없으니 그냥 일찍 퇴청을 하려다가도, 가뜩이나 하는 것도 없는데 칼날같이 시간에 맞춰 나가 버리면 그도 보기 나쁠 것 같아 이강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부터 황상의 명에 따라 편액을 쓰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희건궁으로 가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핑계로 퇴청이 빨라지면 또 특별 대우다 뭐다 말들이 무성할 것이 아닌가.
‘그나저나 창빈의 서슬이 퍼런 것이 걱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속마음을 황상에게 털어놓았다가 창빈에게 불이익이 가해지면 이 고리는 끊을 수가 없게 된다. 끝까지 홀로 속에 지니고 있다가 3년 뒤 귀천할 때나 되어서야 바깥으로 너풀너풀 날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편액은 600여 개가 된다고 하였으니, 하루에 20개씩만 쓰면 한 달 조금 넘는 시간만큼만 희건궁을 드나들면 되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한동안 퇴청도 가장 나중에 해야 할 것이다. 그 길로 희건궁으로 들어가면 어찌 아니 수상할 것인가.
“이 낭관 자네 왔나.”
“예, 태감 어른.”
“폐하께서는 후원에 계시네.”
“후원에요?”
“따라오게.”
팔자 한번 늘어진다.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홀로 후원에서 여유 부리며 갖은 호사 누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퍽 약이 오른다.
그러다가도 제 무릎에 머리를 대고 냅다 드러누우며 천진난만하게 농담을 건네면,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결국은 함께 웃어 주고 마는 것은 나중 생각하면 더 약이 오르는 일이었다. 오늘도 아마 그리되겠지. 강은 거의 반쯤은 체념한 상태였다.
“폐하! 이 낭관이 들었사옵니다.”
“오냐.”
작은 연못을 둘러싼 돌에 채신없이 앉아 있던 산이 손에 들고 있던 장죽을 저으며 강을 반겼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붙이고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한량이 따로 없었다. 입은 것이 화려하지 않고 색이 어두우니 용포처럼 보이지 않아 더욱 그랬다.
“황제 폐하를 뵙,”
“이 낭관! 가까이 오라. 앞으로 그런 인사는 하지 마라. 귀찮고 듣기 같잖다.”
인사를 해도 참. 투덜대었지만 안 하면 저는 좋았다. 강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산의 뒤까지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산이 한참 발장구를 치다가 문득 멍하니 서 있는 강을 돌아보더니, 불쑥 그 손목을 붙잡고 제 옆으로 거세게 끌어당겼다. 강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가해지자 어쩔 줄을 모르고 그 힘에 딸려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몇 걸음 어설프게 걸어 겨우 황상의 바로 옆에 도달했을 때, 발밑이 미끄럽다는 것을 느꼈다.
“어, 어어!”
“자, 이렇게 하면 안 빠지지.”
산이 커다란 손으로 강의 허리춤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혔다. 그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기는 하였으나, 하마터면 못에 빠질 뻔하였던지라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하다.
“내가 그대 목숨을 구했지?”
“애초에 폐하께서 절 잡아당기지만 않으셨더라도 미끄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야. 내가 그대의 목숨을 구한 거야. 적어도 십 년어치는 구했을 것이야. 방금 십년감수를 하지 않았어. 그러니 지금 가슴에 손을 얹고 있지.”
강은 저도 모르게 제 가슴팍에 손을 얹고 안정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손을 풀어 앞으로 모았다. 산은 그 모습을 한참이고 보더니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웃어대었다.
“그럼 이제 그대는 나에게 십 년의 목숨을 빚진 것이다. 알았지?”
“십 년이요? 십 년 갖고 무얼 합니까.”
“십 년이면 나라 하나를 세울 수 있지.”
산이 일찍이 창천성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이었다. 10년 동안 대륙을 누비며 전쟁을 벌였고, 지금은 건국 후 5년. 그리 말하니 10년이 참으로 길어 보였다.
“예, 허면 십 년 빚을 지었습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그건 천천히 알려 줄 거야.”
어차피 3년 뒤에는 떠날 몸인데 십 년 빚이 대수랴. 강은 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예” 하였다. 산은 그 대답이 퍽 만족스러운 모양인지, 더욱 못에 담근 발로 물장구를 치며 몸을 뒤로 빼었다.
“이곳에는 어인 일로 계십니까.”
“더워서 저 안에는 도저히 못 있겠어서 그렇지. 문을 다 열어 놓아도, 부채질을 하여도 영 그래. 역시 해가 진 다음에 바깥바람을 쐬는 것이 좋지.”
“예에.”
“한데 우리 이 낭관은 오늘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로군. 왜, 궁내청 관원들이 또 그대를 괴롭히는 것이야?”
“아닙니다. 절대, 결단코 아닙니다. 제발, 제발 그런 오해 마소서. 살 떨립니다.”
화채를 내린 것으로 자신이 궁내청에서 받는 대우를 생각하면 다시 시간을 돌려 어떻게 해서든 그 명을 거둬 달라고 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이 강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강도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복야가 겨우 그와 어울려 주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연민 어린 시선일 뿐인 것을.
“어찌 살이 떨려? 나를 동원하였다고 그것들이 또 그대를 나무라는 것이야?”
“아, 폐하. 제발……. 제발, 그런 일 없으니 염려 마소서. 제발.”
“아니야. 내 당장 그것들을,”
“아니옵니다. 결코 그런 일 없사옵니다.”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아 강은 저도 모르게 산의 팔뚝에 매달려 절절매었다. 태어나서 이런 부담은 처음이었다. 특별 대우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줄은 몰랐다.
“농인데.”
“…….”
“그대는 놀릴 때마다 이렇게 귀여운 반응을 보이니 아니 놀릴 수가 없어.”
“…….”
“하하! 재미있었다. 허면 이제 들어가자. 오늘부터 편액을 써야지. 희건궁을 제일 먼저 쓰도록 해라. 조각하라 보내 두면 그만큼 시일이 걸리니 어찌 기다릴까.”
산이 여전히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훌훌 털고 일어났다. 곁에 서 있던 상궁이 재게 다가와 휘건으로 물이 묻은 족장을 닦고 신을 신으시는 것을 돕고는 급히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강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산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태 그러고 있느냐? 서둘러라. 가자.”
“안 갑니다. 안 쓸 겁니다.”
“응? 어찌 그래?”
“폐하께서 매양 절 그리 놀리시니 마음이 안 납니다. 글씨는 쓰는 사람의 마음이 못나면 함께 못나지는 고로, 희건궁의 위엄에 누가 될 것이라 아니 쓰겠습니다.”
“허어, 이런. 또 삐쳤군. 따라오면 맛있는 걸 주마.”
“……전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누가 그대더러 어린아이라고 했나.”
“…….”
“어서 가자.”
“…….”
“어허, 고집하고는. 안아서 들고 가면 따라올 것이냐.”
강이 그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말없이 앞질러 희건궁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산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으음.”
산은 바닥에 엎드려 붓을 놀리고 있는 강을 내려다보며 한참이고 서 있었다. 처음에는 팔걸이에 비딱하게 기대어 앉아 흘끗흘끗 쳐다보았는데,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떼고 서서히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글씨가 다르잖아?”
희熙 자의 불 화 부수를 쓰고 있는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강은 방금 후원에서 놀림을 당한 고로, 괜히 복수심에 불타 어찌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산이 마음에 들어 하던 서체가 아닌, 다른 모양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애간장을 태우다가, 다시는 장난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다음에야 그가 원하는 서체로 글씨를 써 줄 작정이었다.
“특히 이 신臣 자가 아주…….”
보기가 싫겠지. 강은 그리 생각했다. 산이 좋아하는 서체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던 데다, 산이 그리 칭찬하였던 삐침 부분에서 느껴지는 여유가 이 서체에는 없었다. 강은 내심 즐거워하며 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찌 이런 글씨로 금궐의 편액을 장식할 생각을 하느냐며 분기가 탱천하여 다시 쓰라 명할 것이 분명하다.
“아주 좋군. 좋은데? 그대는 참으로 재주가 많아.”
“……예?”
“두 가지의 서체가 모두 아름다우니, 그대는 참으로 다복한 사람이야.”
“…….”
“다만 이런 서체는 내명부에는 어울리지 않을 테니, 그때에는 원래 쓰던 대로 쓰도록 해.”
산이 그리 말하며 제 앞에 아예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산을 골탕 먹이려던 그의 원대한 꿈은 일장춘몽에 불과하였던 고로, 결국에는 산에게 좋은 일만 하고 말았다.
“다른 서체도 있어?”
“예, 만들면 있겠지요?”
“만들어 봐. 그대는 글씨도 참으로 그림처럼 쓰는구나.”
있지도 않았던 서체를 대여섯 개는 만들어 대었을까. 희건궁이라는 글자도 벌써 스무 번은 쓴 듯했다. 두 사람을 둘러싸고 세 글자로 꽉 찬 종이들이 주변을 너풀거리며 조금씩 쌓여 가고 있었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군. 아무래도 이건 좀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존의 위엄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하아……. 하지만 아름다운데. 어찌할까.”
“폐, 폐하……. 체통을 지키소서.”
산이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몇 개를 뽑아 나란히 늘어놓고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소문성이 시간이 늦었음을 알리려 안으로 들어왔다가 바닥에 앉아 있는 산을 발견하고는 몹시 황망해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종이에 고정하고 있던 눈을 떼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소리로,
“시간이 얼마나 되었지?”
하고 물으니 소문성도 어쩔 수가 없던지라 체념한 얼굴로,
“해시이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하루에 스무 개씩, 서른 날만 희건궁을 다닐 요량이었던 강은 아직도 다음 편액을 쓰지 못한 데다가, 희건궁에 무엇을 쓸 것인지도 고르지 못한 채로 벌써 시각이 이리도 늦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였다. 어찌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는가, 어느 하나 제대로 한 일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산이 글씨 하나를 쓸 때마다 “오, 오! 오!” 하고 반기는 탓에 저도 조금은 우쭐하였는지 이 글씨 저 글씨 써 보았다는 것, 그래서 저에게 생각보다 서체를 많이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 정도일까. 강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지었다.
“침수에 드실 시간이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아직 나는 무엇이 좋은지 못 골랐다.”
“우선 침수에 드셨다가, 명일 날이 밝자마자 다시 보시면 어심이 정해지지 않을는지요.”
“그대 말이 맞아. 생각나지 않는 것을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지. 그만해야겠어. 머리가 찢어질 것 같다.”
산은 그리 말하며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겉옷을 아무렇게나 탁상 위에 벗어 던져 두며 느릿하게 의자 위에 몸을 내렸다. 소문성이 이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에 서 있던 경사방 태감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들은 나무로 만든 큰 시탁 따위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잰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패를 뒤집으소서, 폐하.”
재작일에는 창빈의 패를 뒤집었으나 창빈에게 가는 걸음을 멈추고 자미연에 머물러 낭관과 시간을 보냈으며, 또한 작일에도 그 누구의 패도 뒤집지 않은 채로 자미연에서 낭관과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낭관이 시침을 드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두런두런 무슨 담소를 나누는지 황상이 크게 웃는 소리와 낭관이 볼멘소리를 내는 것이 전부였던 그런 밤들이 아니었던가. 오늘은 반드시 어디에든 납셔야 했다. 쟁반을 든 손에 힘을 준다고 하여 더 잘 뵈는 것도 아닌데, 태감이 더욱 세게 시탁을 쥐었다.
“내키는 것이 없다.”
수많은 패들이 있는데 내키는 것이 없다니. 이 금궐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오매불망 한 낭군을 기다리고 있는데 없다니. 후궁들이 싫다면 수녀를 뽑으면 되고, 그마저 싫다면 궁녀들 중 마음에 드는 이를 취하면 된다. 그런데도 산은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번번이 퇴짜를 맞을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하지만, 이것이 제 주인의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폐하, 금일은 꼭 뒤집으셔야 하옵니다.”
하고 소심하게 피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은 짜증스러운 손길로 장죽을 들고 팔걸이를 몇 번 두드렸다. 그 신호에 소문성이 다시 한번 문간 뒤에 시립한 태감들에게 손짓하였고, 그들이 재빨리 화로를 들고 들어와 장죽 안에 불씨를 피워 바쳤다.
강은 그 모습을 그저 조용히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는 언제 돌아가야 할지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고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패를 뒤집으시라는 태감의 아룀이 산의 좋았던 기분을 크게 저해한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기에 어쩐지 조심해야 할 듯싶었다.
한참 동안 허공에 연기를 뱉어 대던 산은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종이 따위를 정리하고 있는 강을 발견하였다. 강의 딴에는 일부러 산이 있는 곳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탁상 뒤에 몸을 숨겼다고 생각했으나, 각도가 미묘하게 달라졌으므로 금세 잊힌 줄 알았던 존재가 들통나고 말았다.
“이리 온, 이 낭관. 그대가 내 패를 고르도록 해라.”
“……폐하!”
황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문성이 얼굴이 누렇게 뜬 채로 산의 발치로 달려와 한사코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하였다. 시침을 들 이를 정하는 것은 태후도 범할 수 없는 황제만의 권한인데 어찌 이를 낭관 따위가 하게 두신단 말인가. 아무리 총애가 깊더라도 그것은 아니 될 일이었다. 강 역시 그 말에 다소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어찌 신이 감히 패를,”
“이 낭관은 말이 이상하구나. 이까짓 패가 뭐가 대수라고 감히 황명을 거스른단 말이야.”
그리 말하니 또 대꾸할 만한 명분이 없다. 법도에 어긋난다고 말하자니 자신이 곧 법도가 아니냐는 말을 할 것이고, 이 창 제국이 결국에는 그의 손에서 태어난 것이니 법도 운운도 조금 우습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패를 뒤집자니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의 후환이 두렵기도 하거니와, 애초부터 패를 뒤집는 것이 그리 상식적인 행동이라 생각되지 않으므로 계속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 하고 있어. 어서 뒤집으래도.”
“…….”
강은 옆에 선 소문성을 곁눈질하였다. 평소에는 잘도 무례히 굴지 말라며 잔소리를 해 대던 그가 이제는 어전이라고 맥도 못 추리는 꼴이라 한숨만 나온다. 어찌하라고 말이라도 좀 해 주면 함께 우겨 보겠으나,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강이 우물쭈물하며 산의 눈치를 보았다.
가령 강이 창빈의 패를 뒤집었다고 하면 뭇 사람들은 창빈의 후환이 두려워 그리했다고 떠들어 댈 것이며, 창빈이 아닌 다른 후궁들의 패를 뒤집으면 창빈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입방아를 찧을 것이니 어떤 의미도 담지 않고 행하더라도 결국에는 소문의 구실이 되기 마련이다.
“허면 신이 눈을 감고 아무거나 집겠습니다.”
“들었느냐. 이 낭관이 짐의 패를 눈을 감고 집겠다고 한다. 소문을 내려거든 이 이야기까지 꼭 함께 내야 한다.”
그리 말하며 산이 즐거운 듯 웃었다. 태감들이 그 말에 몹시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며, 결코 그런 일 없다 읍소하였으나 산은 그리 주의해 듣지는 않고 그저 강을 독촉하였다.
“그리 눈만 감으면 그대가 실눈을 뜨고 그리했다는 소문을 면치 못할 거야.”
눈꺼풀을 닫고 늘어선 패를 향해 손을 뻗던 강이 그 말에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로,
“허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였다. 그러니 산이 별 고민 없이 커다란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리어 주며,
“이렇게 하면 되지.”
하고 답하였다.
“……너무 어두워서 어디에 패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낭관에게 가까이 대 주어라.”
“예, 폐하.”
태감은 여기 있다는 듯 일부러 강의 손바닥 끝에 쟁반 장식을 스치며 더욱 가까이 대어 주었다. 강이 겨우 손가락 끝으로 짚어 패를 찾아내니, 산이 강의 어깨너머로 그 패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가 괜히 헛기침을 하였다. 강은 내심 그 소리에,
‘싫은 모양이다. 그럼 다른 걸 골라야지. 호오가 있으면서 왜 날 더러 고르라고 하는 거야…….’
하며 그 옆 패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뒤집었다.
“흐음…….”
하지만 산은 그의 눈을 놓아주지 않고 괴이한 신음만 내고 있다. 스스로 눈을 떠서 제가 무엇을 뒤집었는지 보고 싶은데, 도통 손바닥을 열어 주지 않으니 그저 시야가 막힌 채로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어야 했다.
“폐하, 손을 놓아주십시오.”
“그대가 누구의 패를 뒤집었는지 한번 맞혀 봐.”
“소인은 내명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고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궁내청의 낭관이 어찌 내명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하느냐. 또 거짓을 고하였지.”
“아,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으면서, 뒤에 앉아 있는 산을 마주 보지도 않았으면서 도리질을 친다. 산이 그 꼴이 우스워 작게 웃음을 흘렸더니, 강이 그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뒤를 돌아보려 하였다.
“맞히거든 놓아주마.”
“서, 성귀인……?”
“틀렸다.”
“연 상재가 아닌지요?”
“아닌데.”
“혜소의인 것 같습니다. 혜소의가 맞을 겁니다.”
“그것도 아니다.”
차마 제 손으로 창빈을 골랐다고 하고 싶지가 않아 계속 다른 후궁들의 이름을 불러 대었으나, 다 아니라고 하니 강은 점점 서글퍼졌다. 창빈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일부러 패를 뒤집었다는 소문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면 귀찮겠지만, 그 일로 강에게 직접적으로 손해가 나거나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다만, 창빈이 강이 저를 뽑은 저의를 오해하고 괴롭게 할 것이 염려될 뿐이었다.
그는 늘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피해는 직접적으로 자신이 움직여야만 하는 것에 국한할 뿐, 여타 소문이나 평판 따위에는 조금도 흥미를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신이 창빈의 패를 뒤집었습니까?”
“어쩐지 창빈의 패는 뒤집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들리는데.”
“아니,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니기는.”
“것 참. 몇 번을 아뢰어도 믿어 주시지 않으니 신도 그만두겠습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리 말하며 오만하게도 황상의 손을 뿌리치고 벗어나려 하였다. 이것이 창졸지간의 일인지라, 산도 때에 맞추어 그의 눈을 가린 손에서 힘을 놓지 못하였으니 강이 뒤로 휘청거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헉!”
바야흐로 강이 두 번째로 산을 깔고 앉은 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에는 온몸을 엉덩이로 뭉갰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요망하게도 무릎에 앉은 정도일까. 당장 낭관의 무례를 꾸짖어야 할 태감들도 너무도 급작스레,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인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황상의 눈치를 살폈다.
“패는 그대가 뒤집어 놓고 가지 말라 요망을 떠는구나.”
“그, 그런 일 결단코 없사오니 얼른 창빈에게 가, 가시지요!”
물색없이 여태 그 무릎 위에 앉아 있던 강이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잠시 쭈뼛거리다가, 이내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태감들을 바라보았다. 태감들도 어째 주인의 사생활을 목도한 기분이 되었는지라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저 허리를 숙인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 하오시면 밤새 강녕하시고 시간이 늦은 고로 전 이만……!”
에라, 모르겠다. 손자도 병법서에 위급할 때는 줄행랑을 놓으라 말했다. 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희건궁을 뛰쳐나가 버렸다.
“소문성.”
강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고 있던 산이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태감을 불렀다.
“밤이 깊어 어둡다. 이 낭관이 관사까지 잘 들어가는지 가 살펴 주어라.”
“예, 폐하. 그, 명운궁으로 납실 채비를 할까요?”
“이 낭관이 패를 뒤집지 않았던. 짐은 명운궁으로 가야겠다.”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
창빈은 태감에게 오늘 황상이 납실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은 시침을 들 수 없을 줄로만 여기고 울적해져서 궁의 하인들에게 몹시 짜증을 부려 대었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몇 시진 되지도 않았다. 창빈은 침상으로 가 앉는 산의 눈치를 조금 보다가, 이내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외로 틀며 숙였다.
“창빈은 어찌 내외를 하느냐. 가까이 와라.”
창빈은 그 말에 크게 반색하며 산의 옆에 가 앉았다. 그리고 다부진 팔뚝에 제 팔을 걸며 온순히 기대고,
“……내외라니요,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셔요. 폐하께서는 신첩의 낭군이시고, 신첩은 폐하의 여인인 것을요.”
하고 작게 말하였다. 산은 이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으나 창빈을 흘긋 내려다보고는 뿌리치지 않고 그냥 두었다. 사실 산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들이 부유하는지라, 창빈이 무어라 말했는지도 제대로 듣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까 그 무릎 위에 앉았던 이 낭관의 뒷모습과, 질겁하고 멀리 떨어져서 목덜미를 시뻘겋게 붉히며 줄행랑을 놓던 것이 자꾸 떠올라 웃음이 났다. 계집 같지도 않은 것이 어쩔 줄을 모르며 우왕좌왕하는 것이 어찌나 귀엽던지, 아직도 제 무릎 위에 앉았던 그 잠깐의 감촉이 고여 있다.
“폐하,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게 기분 좋은 일이었던가. 그저 이 낭관이 귀여웠던 일이다.
“별일 아니다. 한데 창빈은 짐이 왔는데 차도 한 잔 안 내주니 야박하다.”
“어머, 폐하께서 납신 것이 기뻐 신첩도 모르게 그만……. 여봐라, 어찌 폐하께서 납셨는데 차 한 잔 아니 내오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마마. 당장,”
“창빈이 직접 내오라. 그게 마시고 싶다.”
창빈은 그 말에 산이 일전에 제 손으로 우린 차를 두고 맛이 좋다 한 것을 떠올리고는 기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전 행행을 납시기 전에 한 번 드린 것을 어찌 아니 잊고 이리 말씀하시는지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역시 성총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창빈은 산의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침전 바깥으로 나갔다.
“마마, 어찌 나오십니까.”
“폐하께서 본궁이 직접 만든 차를 드시고 싶다고 하시지 않으냐. 유려는 그걸 빨리 갖고 와라. 그리고 소현자,”
서두르는 사이에 창빈의 시야에 소현자가 들어찼다.
“너는 폐하께서 납셨는데 심기를 거스르면 어쩌려고 여기에 서 있느냐! 저기 안 보이는 데에 가 있어라.”
소현자의 정강이를 사납게 걷어차며 창빈이 말하자, 소현자가 울상을 지으며 “예에…….” 하고 답하고는 빠르게 달려 궁 바깥으로 사라졌다. 창빈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고는,
“저 애는 어찌 저리 눈치가 없을까.”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편, 창빈에게 차를 내오라 일러 침전에 홀로 남은 산이 장죽으로 화로를 두 번 두드렸다. 그 소리에 바깥에 시립해 있던 소문성이 몇 걸음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 낭관은?”
“그 길로 관사로 바로 들어갔다가, 잠시 산책을 하려는지 관사 옆에 있는 희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관사라는 데는 지낼 만한 곳이냐?”
“예?”
“짐이 관사에 가 본 일이 없어 그곳이 지내기 좋은 곳인지 몰라 묻는 거다.”
“……개국 이래 관리들이 그곳에서 머물고 있사온데, 불만의 소리가 나온 적은 없는 줄로 아옵니다.”
“불만이 없는 건 그저 그렇다는 소리겠고. 지내기 좋냐고 물었다. 멍청한 놈이 짐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도다.”
“소, 송구하옵니다. 그……. 소인도 잘은 알지 못하오나, 이 낭관의 신분에 적합한 줄로 아옵니다.”
“이 낭관의 신분?”
본래도 채윤직의 수양아들이니, 적자보다는 신분이 더 아래일진대 심지어는 그 채윤직이 공공연한 죄인의 몸이다. 한데 거기에 더하여 그 채윤직에게 절연장까지 받았으니 신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리 높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조금의 가감도 없는 매우 객관적인 진실이었다. 하지만 산은 소문성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편한 기색으로 장죽을 입에 물었다.
“예, 폐하. 이 낭관의 신분이…….”
“이 낭관은 짐이 직접 성을 하사하였는데, 어찌 이 낭관의 신분이 낮다 할 수 있지?”
“……허나 이 낭관이 신분에 비하여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지금도 폐하께서 이 낭관을 총애하고 있다는 소문이 금궐을 덮었나이다. 이 낭관도 그것을 믿고 방약무인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으음, 소문성. 더 가까이 와 보라.”
산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소문성이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재게 침상 앞으로 다가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산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로부터 약 3보쯤 떨어진 거리에 소문성이 들어왔을 때 들고 있던 장죽으로 그의 머리를 툭 내리쳤다.
“너로구나. 이 낭관에게 무례하다 눈치를 주었던 것이.”
“……폐하!”
“이 낭관이 며칠 전 갑자기 같잖게 예를 갖추는 것이 이상하여 잠시 생각을 했더니만, 네가 그런 것이지?”
“폐하, 소인은 그것이 아니오라…….”
“아니기는 무엇이 아니야. 감히 도태감이나 되어 짐에게 거짓으로 주둥이를 놀리려 드는 것이냐?”
소문성은 일단 지금은 엎드려 잘못을 빌 때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응당 해야 하는 일을 했음에도 이리 호통을 치시는 황상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선 저리 말씀을 하시질 않는가. 어쩔 수 없겠다. 소문성은 바로 발치에 엎드려 읍소했다.
“소인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폐하. 잘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잘못은 이 낭관에게 가서 빌어야지, 어찌 짐에게 그러는고.”
이 말을 들은 귀는 비단 소문성뿐만이 아니었다. 다기를 은쟁반에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오려던 창빈이 ‘이 낭관’ 세 글자를 어찌 잡아내고는 발걸음을 멈추어 여전히 바깥에 서 있었던 것이다. 창빈은 쟁반을 시녀에게 들게 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문에 귀를 대었다. 잘못을 이 낭관에게 가서 빌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몹시 궁금했다. 도태감은 2등관인 고로, 제아무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이라 하여도 함부로 하대를 하지 못할 만큼의 위엄이 있었다. 그런 도태감이 고작 8등관 낭관 따위에게 잘못을 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침 이 낭관이 잠을 자지 않고 희영원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 낭관이 괜찮다고 할 때까지 잘못을 빌어라.”
“……예, 폐하.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짐의 심기가 불편하니 주둥이 닫고 꺼져라.”
소문성은 하는 수 없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쳐 침전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명운궁 밖으로 가려는데 옆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 창빈과 눈이 문득 마주쳤다. 어쩐지 이 낭관 때문에 수모를 당한 이와, 수모를 당하게 될 이 사이의 미묘한 공감이 형성된 듯 그리 바라보고 있다가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창빈이었다.
“소 공공. 폐하께오서 많이 진노하셨는가?”
“예, 마마.”
“이 낭관의 일로 그런 것이냐?”
“……고하기 어려우니 이만 물러가옵니다.”
하지만 태감이 그렇다 하지 않아도 이미 들어 안다. 소문성이 이 낭관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고, 그것을 황상이 알고 진노하여 가서 잘못을 빌라 한 것인데 대관절 어떤 잘못을 하였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이 낭관에 대한 총애가 이리도 하늘을 찌르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 이 낭관이 등장하기 전에는 희비가 그리도 눈에 거슬리더니, 더 대단한 것이 나타나질 않았는가.
‘그 두 연놈을 같이 없애야 하는데…….’
그리 생각하던 창빈은 제 안면이 일그러진 줄을 알고, 곁에 시립한 시녀에게 거울을 대령케 했다. 황상을 모실 것인데 얼굴에 근심이 어려서는 안 되었다.
“차를 내오는 것이 어찌 그리 오래 걸려?”
산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다기를 들여오는 창빈을 향해 물었다. 창빈은 당황하지 않고 자못 여유롭게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일전에 폐하께서 맛이 좋다 하신 것을 찾느라 늦었습니다.”
“안 내킨다. 그만 치워라.”
산이 손을 휙 내젓자, 창빈이 시녀에게 눈짓하여 다기를 내가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금 조심스레 산의 옆으로 다가가며,
“폐하. 시간이 너무도 늦되었사옵니다. 그만 침수에 드시지요.”
하며 아양을 피워 대니, 산이 못 이기는 체 침상에 누웠다. 창빈은 기다렸다는 듯 초 심지를 자르고 그 옆으로 가 몸을 뉘었다.
내일은 성귀인을 불러 이강을 어찌 없앨지 논의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이보게, 이 낭관!”
한편, 희영원을 거닐고 있던 이강은 갑작스러운 호명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 목소리는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황상의 태감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정도로 귀에 익어 버렸다. 저 멀리서 소문성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던 강은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소문성이 사사롭게 이곳까지 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황상의 명일 것이다. 분명 강이 창빈의 패를 뒤집었으니 그곳에서 그녀의 시중을 받고 있을 터인데 어찌 찾는단 말인가.
“무슨 일입니까?”
“……그, 내가 할 말이 있네.”
“폐하께서 보내신 게 아닙니까?”
“아니, 뭐. 폐하께서 보내신 것도 맞지만……. 아무튼 할 말이 있단 말이네.”
“무엇입니까?”
그저 무례히 굴지 말라 경고했던 것에 대해서만 사과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생각해 보면 그것을 황상의 뜻이라고 왜곡하여 전하질 않았던가. 소문성은 이마를 탁 치며 얼굴을 팍 찡그렸다. 고작 8등관 따위에게 사과하는 것도 굴욕적인데, 이렇게 황상의 핑계를 대었다는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 전에 저……. 내가 폐하께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나?”
“하……. 정말, 태감 어른. 너무 하십니다. 그래, 오늘 일은 제가 잘못한 게 맞습니다. 감히 제가 패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찌 거절을 하겠습니까. 또 제가 감히 폐하의 옥체에…… 그, 아무튼 그리 한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무례하게 아양이나 떨어 보자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태감 어른이 가장 잘 아실 겁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아니, 이 낭관! 나는 그게 아니고…….”
“됐습니다. 뜻은 잘 알겠으니 그만하십시오. 이만 갑니다.”
강은 대단히 기분이 상했는지 소문성의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희영원을 빠르게 빠져나가고 말았다. 소문성은 그 뒷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이강이 괜찮다고 할 때까지 잘못을 빌라는 황명 때문에 소문성은 골이 다 깨질 지경이었다. 강이 그렇게 희영원에서 나가 버린 뒤, 얼이 빠진 채로 잠시 그렇게 앉아 있다가 급히 뒤를 쫓아갔으나 이미 관사로 들어가 버린 듯 온데간데없던 데다 시간이 너무도 늦되어 관사 안을 뒤질 수도 없었다. 소문성은 결국 그렇게 희건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황명이 지엄하니 이 낭관에게 사과하기 전까지는 폐하의 눈앞에는 나서지 말아야지. 나섰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소문성은 자신의 처지가 퍽 서글펐다. 내일 날이 밝으면 황상의 기침은 누가 알릴 것이며, 조반은 어찌할 것이며, 조회에는 누가 모실 것인가. 태감부의 계율이 명확하니 소문성이 없다면 부태감이 대신하면 될 일이었으나, 소문성은 괜히 산을 떠올리면 물가에 자식 내놓은 듯 불안하고 더욱 걱정이 되었다.
사실, 강의 무례를 꾸짖은 것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라면 어심을 빙자한 것뿐이었는데……. 어찌 제 주인은 그리 눈치가 빨라 단숨에 태감이 안 좋은 소리를 한 것을 알았단 말인가.
‘그래도 내가 잘못했지, 뭐…….’
그것이 예사 총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창천성에 있었을 때부터 데려가겠다고 요란을 피우시던 것이나, 희비나 창빈 앞에서도 은근히 편을 드시던 것을 떠올렸어야 했다.
‘하지만 황실의 법도가 지엄하고, 태후 마마조차도 폐하께 무례하게 대하지는 못하시는데 어찌…….’
그렇게 새벽 내내 뜬눈으로 지샜을까. 강이 궁내청으로 등청하는 시간을 보아 재빨리 어젯밤 일에 대하여 오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이 일을 더 오래 묵히면 분명 더 큰 오해를 낳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 어전에 나서는 것조차 금지된 고로 제 위신을 깎아 먹는 일이었다.
저 멀리서 동이 트고, 희건궁에도 불이 밝혀졌을 무렵 소문성이 움직였다. 지금 바로 가서 사과를 하면 적어도 조회 때에는 황상을 모실 수 있을 것이다.
“이 낭관 있는가?”
마침 궁내청에서도 어슴푸레한 빛이 밝혀져 있었다. 이 낭관이 궁내청의 아침을 연다고 했으니 아마 저 불을 켠 것도 그일 터였다. 소문성은 잠긴 목청을 틔우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저……. 이 낭관?”
“소 공공.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하지만 대답이 돌아온 곳은 다른 입에서였다. 복야가 2층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1층을 서성이는 소문성을 발견하고 내려왔다. 소문성은 다소 당황하여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아, 이 낭관이 아직 등청하지 않았습니까?”
“어제 인진궁에 볼일이 있어 그곳으로 바로 등청하기로 하였습니다만, 어쩐 일로……. 폐하께서 이 낭관을 찾아 계시는지요?”
“아뇨, 그게 아니고 제가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이 낭관은 그러면 언제쯤 등청하겠습니까?”
“글쎄요…….”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누가 보면 금궐에서 가장 바빠야 할 도태감이 참으로 할 짓도 없다 생각하겠다. 하지만 실제로 강에게 용서받지 못하면 평생 할 짓이 없는 것은 사실이기에 소문성은 눈물을 삼키며 이 낭관을 기다렸다.
“소문성은 어찌 아니 보이지?”
창빈의 처소에서 가마를 타고 희건궁으로 향하던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턱을 괴고 있다가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어제 자신의 말에 바로 명운궁을 나가 희영원으로 간 것은 알지만, 어째 여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영 수상했다. 산을 대신하여 수행하던 부태감은 조용히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새벽 나절에 알아보니 이 낭관에게 용서를 받지 못한지라 아침 일찍 다시 궁내청으로 갔다고 하옵니다.”
“용서를 받지 못했다고? 이 낭관 성깔 한번 고약하구나.”
산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소문성을 오래 보아 온 만큼 그의 성정을 아는지라, 그가 그리 거칠게 말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네 태도가 불손하니 폐하께 예를 갖추라는 식으로나 말했을 터다. 사과를 하면 용서를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 낭관이 쉽게 용서를 해 줄 줄로 알고 잘못을 빌러 가라 한 것인데, 아직도 똥 마려운 개새끼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을 소문성을 생각하니 퍽 딱했다.
“이 낭관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짐의 도태감이나 되어 그런 것 하나 하지 못하면 세간 사람들이 능력이 없다 비웃을 것이야.”
“이 낭관의 성품이 곧으니 무언가 오해가 있지 않고서야 용서를 아니 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부태감이 말을 거들자 산이 그를 흘끗 내려다보며,
“네가 이 낭관의 성품을 어찌 안다고 곧다고 하느냐?”
하고 괜히 심술을 부렸다.
*
어느새 시간은 흘러 벌써 오시가 되었다. 소문성은 그때까지도 궁내청에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강을 기다리고 있었고, 강은 그 시각 인진궁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소문성이 저를 기다릴 줄은 꿈에도 모르고 여름날의 햇볕에 메말라가면서.
“자네가 궁내청 이 낭관인가?”
인진궁에서 혜소의에게 생각보다 너무도 오래 붙잡혀 있던 고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강은 갑작스레 제 앞을 막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이니 황상이나 창빈의 태감은 아닐 것이고, 허면 뉘라서 강을 찾는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뉘신지요?”
“나는 성귀인 마마께서 계신 혜인궁의 수령태감일세. 마마께서 잠시 보자시니, 따라오게.”
“저를 부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궁내청 낭관을 부르시는 겁니까?”
어떤 대답이든 어차피 강은 웃전의 부르심에 따라야만 했으나, 그래도 미리 알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콕 집어 강을 부르는 것이라면 당연히 황상의 총애를 받는 저를 두고 논하려는 것일 터였고, 단순히 궁내청 낭관을 부르는 것이라면 혜인궁에 부족한 것이 있어 그러는 것일 터다.
“말이 많군. 감히 마마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잔말 말고 따르게.”
예에. 강이 그리 대답하고 어쩔 수 없이 태감의 뒤를 따르는 동안,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자가 있었으니. 이는 강이 몇 시진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직접 인진궁 앞으로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강이 궁문을 나서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뛰어가려던 소문성이었다. 소문성은 갑작스레 혜인궁의 수령태감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몸을 숨겼는데, 그의 표정이 험악하여 어쩌면 강이 고초를 겪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폐하께 아뢰면 폐하께서 내 죄를 조금은 가볍게 생각해 주실지도 모른다.’
태감은 결론을 내리자마자 희건궁으로 향했다. 성귀인의 성품이 창빈과 같이 불같지는 않은 데다 황상께 큰 성총을 받던 이도 아니기에 더욱 수상하였다. 단순히 궁내청의 낭관이 필요하여 강을 찾는 것치고는 꽤 강압적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이 낭관에게 용서는 받았느냐?”
붓을 들고 쉴 새 없이 전교를 써 내려가던 산은 여전히 두루마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앞에 선 소문성을 향해 물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젯밤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하여 아직 용서를 받지는 못하였사옵니다. 어젯밤에도,”
“어젯밤에 이 낭관이 널 용서해 주지 않았다는 것은 들어 안다. 허면 어찌 그 뻔뻔한 낯짝을 짐 앞에 보이는고. 황명을 가벼이 여긴 것이냐.”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소인이 이 낭관이 인진궁으로 등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궁내청에서 기다리다가…….”
“요점만 말하라.”
“성귀인의 태감이 이 낭관을 데리고 갔사온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산은 그 말에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성귀인의 태감이 이강을?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다. 희비나 창빈은 본래도 총애를 받았으니 갑자기 뒷전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이 낭관에게 관심을 보일 수는 있지만, 성귀인이 그랬다는 것은 꽤 의외였다. 성귀인은 본디 제 분수를 알아 산에게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였다.
“혜인궁이 이 낭관을 데리고 갔다?”
“예, 그러하옵니다.”
“한데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 말이냐?”
“예.”
이상하게도 산은 강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강이 굳이 지켜 줄 필요가 없는 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귀인이 강을 향한 산의 총애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초를 겪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 믿는 것은 아무래도 전자였다.
희비의 상궁에게 따귀를 맞았을 적에도 심드렁하였고, 창빈의 태감에게 매를 맞을 뻔하였을 때에도 심히 침착하였으니 이번에도 아마 산에게 달려와 자신을 지켜 달라 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은 강에게 조금 아쉬운 면이었다.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귀여울 것인데 말이다.
“네가 그러질 않았느냐. 이 낭관에 대한 짐의 총애가 금궐을 모두 덮을 지경이라 이 낭관이 방약무인해졌다고 말이야. 짐이 나서서 이 낭관을 도우면 그 소문이 더욱 일파만파 퍼져 제국을 모두 덮을 것인데. 그리되면 이 낭관이 오만해질 것인데도 이 사실을 짐에게 고하는 것이냐?”
“……폐하, 실언을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이,”
―폐하, 궁내청 이 낭관이 들었사옵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부태감이 아뢰는 소리가 들려오니, 소문성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들라 하라.”
고초를 당하는 줄로만 알았더니, 이 시간에 갑작스레 어전에 드는 것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여 소문성이 얼이 빠진 얼굴을 하니, 산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곧이어 강이 안으로 들었다.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강은 옆에 서 있는 소문성을 보고, 산을 또 바라보았다. 이는 예를 갖추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산이 예를 갖추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여 갖추지 않았더니 갑자기 소문성이 와서 예를 차리라고 하는 통이니 어느 것이 황상의 진의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 낭관이 이 시간에 어인 일이냐.”
하지만 산은 인사를 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또 하기에는 어찌 왔는지가 더 궁금하여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귀인이 신에게 폐하께 이것을 전하라고 하여 대신 왔습니다.”
“성귀인의 것이라면 제 하인을 시키면 되는 일인데, 어찌 그대에게 그것을 전하라 일렀는고?”
“소인도 연유를 알 수는 없사오나, 낭관 된 처지로 명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이리 다오. 내가 보겠다.”
“예.”
강이 더욱 앞으로 나아가 바치니, 산이 덮개를 벗겨 내었다.
“대단한 것이나 든 줄 알았더니.”
산은 작게 웃었다. 산이 가장 좋아하는 유밀과와 쪽빛으로 장식된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접시 밑에는 작은 봉투가 깔렸다. 산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것을 건져내어 꺼내니 압화를 붙인 연분홍빛 종이가 드러났다. 허나 그 앞에 쓰인 이름은 산의 것이 아니었다.
“그대에게 주는 것 같은데.”
산이 그리 말하며 서찰을 강에게 건네주자, 강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뉘라서 낭군의 즐거움을 방해할까誰妨君樂
일에 대한 근심일랑은 하지 마라勿患於事
젊은 사내가 낭군을 기쁘게 하니郞爲君喜
어찌 첩 된 도리로 사례하지 않으리오何妾不謝
강은 잠시 의미를 알 수 없어 그 서신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이것을 쓴 이가 성귀인이니, 낭군이라 함은 당연 황제인 산일 것이며 첩이라는 이도 성귀인일 것이다. 허면 산을 기쁘게 하는 젊은 사내는 아마도 저일 터였다. 한데 어쩐지 서찰 속에서의 ‘즐거움’이 단순히 강의 그림이나 글씨를 귀히 여기는 뜻이 아닌, 마치 운우지락이라도 나누는 것처럼 느껴지질 않은가. 강이 연방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자, 산이 물었다.
“어찌 그러고 있느냐, 이 낭관.”
“해석이 이상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 그렇습니다.”
“다오. 내가 보마.”
산은 그것을 한 번 읽고는 강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 내렸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이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하지는 않았다. 후궁들이 강을 어찌 생각하는지쯤은 산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젊은 낭관이 시침을 들었으니 머지않아 봉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궁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전해 들었다. 모두 허튼소리였지만, 산은 그 그릇된 소문을 굳이 바로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 오해로부터 빚어진 것들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꽤 재미있지 않은가. 어차피 금궐에서 산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없었으니, 일이 심각해지거든 강을 구해 주면 그만이다.
“귀인이 그대가 궁내청으로 돌아가지 말고 나와 시간을 보내며 즐겁게 해 주길 바란다고 하는구나. 이 유밀과를 먹으면서.”
“한데,”
“아마 궁내청에는 그대에게 시킬 일이 있어 계속 붙잡아 두었다고 말을 전할 테지.”
강은 그 말에 문득 창빈을 떠올렸다. 성귀인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사람이었다. 창빈은 강이 황상의 총애를 얻었다는 이유로 투기하여 흠을 잡고, 이로 매를 치려고도 했던 이였으니 황상이 강과 시간을 보낸다는 일 자체를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귀인은 오히려 그것이 황상의 즐거움임을 알고 있으니 더욱 그러기를 바란다며 명분을 제공하고 자리를 만들고 있질 않은가.
“모처럼 귀인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 좀 쉬어 볼까.”
그리고 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덧붙였다.
“그대는 내 태감과 할 말도 있지 않으냐.”
후원의 정자는 늘 산이 몸을 쉬는 곳이었다. 이따금 정무를 보다가도 갑자기 사라지셨다, 싶으면 늘 여기에서 화로를 끌어안고 있는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상궁들은 귀인이 바친 유밀과와 일전 양만에서 진상해 올렸던 차를 함께 우려 다기를 다과상에 올리고 그 정자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소문성. 아래에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재게 올라와라. 네가 능력이 없어 짐이 직접 대면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놓치지 말고 반드시 용서를 받도록 하여라.”
정자 아래에 시립해 있던 소문성이 조심스레 그 위로 오름과 동시에, 강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용서를 받으라니 그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소문성이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소문성을 향해 눈을 흘기니, 그가 조금 동요하였다.
“일전에…… 이 낭관 자네에 무례하다고 한 것 사과하겠네. 나야말로 자네에게 무례했던 것 같으이.”
강은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상황의 전말을 알 것 같았다. 어제도 강에게 감히 황상의 무릎에 앉은 무례함을 힐책하기 위함이 아니라, 황명을 받아 억지로 사과하러 온 것이었다.
이는 즉, 소문성이 말했던 것처럼 강이 무례하다는 말이 황상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수령태감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였다는 것이고. 또 이는 소문성이 황명을 빙자했다는 뜻이 되었다. 하지만 소문성이 하는 말에 황명을 거짓으로 칭했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을 산은 모르는 것 같으니……. 강은 이내 설핏 웃어 버렸다.
“괜찮습니다. 제가 폐하께 무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창천성에서 줄곧 자라 제국의 거대함과 황제 폐하의 위엄을 알지 못하였으니 무지이며, 무지로 인하여 결례를 범한 것은 명명백백히 제 잘못입니다.”
소문성은 그 대답에 깜짝 놀랐다. 당연히 ‘황상이 날 더러 무례하다고 했다면서! 거짓말을 했습니까!’ 하며 씩씩댈 줄로 알았더니, 그 이야기는 하나 꺼내지 않고 쉽게 말을 들어 주지를 않겠는가. 소문성은 강이 자신의 체면을 보아 비밀에 부치고 넘겨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니 스스로 부끄럽고 더욱 미안하여 괜히 손을 꿈지럭거렸다.
“이 낭관의 그릇이 커 네 잘못을 이리 쉽게 용서해 주는데, 어찌 어젯밤에는 빈손으로 돌아왔느냐?”
“아, 그것은……. 태감이 제게 또다시 잔소리를 하는 줄로 알고 먼저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태감 어른.”
그리 말하며 고개를 조금 숙이는 강을 산이 찻잔 너머로 바라보았다. 저 둘 사이에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큰일이 아니니 굳이 따져 묻지 않기로 하였다.
“폐하께선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소문성이 자리를 피하고, 다시 둘만 남자 강은 어젯밤부터 걱정거리였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 편액에 쓸 글씨 말이다. 글씨가 다 똑같은 글씨이지! 하고 말을 하자니 스스로도 자신의 서체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빨리 정해야 ‘하루에 스무 개씩! 서른 날!’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지 않은가. 아직 하나도 완성된 것이 없다.
“마음을 못 정했다.”
“언제쯤 마음이 정해지시겠습니까?”
“귀인은 나더러 쉬라고 하였는데, 그대가 나를 괴롭게 하는구나. 그 괴로운 고민을 하라는 것을 보니 그대는 악귀다.”
악귀는 폐하시겠지요. 라고 괜히 쏘아붙여 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처음에 산을 보았을 때, 그러니까 산이 산인 줄을 모르고 보았을 때 자신이 입으로 뱉은 말을 생각하면 악귀라는 수식어는 잘 어울렸다. 한데 며칠을 함께 지냈다고 그런 산이 천진난만하다 느낀 것이 여러 번이었다. 아무리 장난을 치고 놀리더라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산이라는 사내가 지닌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강도 이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천하인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능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부리는 자에게는 매력이 있어야 했고, 그 매력은 강에게도 유효하였다. 그것이 귀인이 말하는 지극히 사적이고도 내밀한 영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말이다.
“폐하께서 저를 더 괴롭게 하시니 폐하께서 더 악귀이십니다.”
그래도 한마디 괜히 쏘아 주니, 산이 표정을 굳히며 다과상에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 낭관. 짐이 귀엽다 귀엽다 하였더니, 어찌 두려운 줄을 모르고 황상을 더러 악귀라 하느냐.”
평소 강의 앞에서는 자신을 두고 짐이라 칭한 적도 없었는데 저리 말하니, 강은 괜히 속이 뜨끔하였으나 또다시 당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한 달도 되지 않은 사이 몇 번째인지 이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놀림을 당했지 않은가. 강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꾸하였다.
“……놀리시는 것이지요? 그만하십시오. 이제 안 속습니다.”
“어허,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하지만 이쯤 되면 그만두어야 했을 산이 여즉 표정을 굳히고 있다. 악귀라는 비유가 물론 감히 지존이신 황상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보였던 산의 성품이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인데…….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서 강이 입을 다물고 그저 바라보자, 산이 다과상을 옆으로 밀어 버렸다.
“네가 짐을 업신여기는 고로, 벌을 내려야겠다.”
“……폐하, 신이 잘못하였습니다.”
조금 늦었는지도 모른다. 강이 급히 아뢰었으나, 산은 동요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잘못했으면 어찌해야 하지?”
“……신이 아둔하여 잘 알지 못하니 말씀해 주시면,”
“잘못했으면 무릎베개나 해 줘야지 뭘 모른다고 하느냐. 그대는 참 바보야. 매양 속는구나.”
그리 말하며 산이 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강은 그대로 멈추어 있다가 자신이 또 속았음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분했다. 이번에는 안 속을 수 있었는데, 괜히 불안해서 일을 다 그르치고 말았다. 자신을 아래서 바라보고 있는 산과 눈이 마주치니 얄미워서 뺨이라도 한 번 꼬집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주 약이 올라 죽겠다는 얼굴이구나.”
“어찌 약이 안 오릅니까! 매양 놀리시니 앞으로는 그림을 아니 그려 드릴 것입니다. 글씨야 편액을 쓰겠다고 제가 직접 아뢰었으니 그 일은 하겠습니다만, 궁내청 낭관의 본분이 있으니 앞으로는 그림도 아니 그릴 것이며, 글씨도 아니 쓸 것입니다.”
“아니 쓰면?”
“아니 쓰면! ……아니 쓰는 것이지요.”
“어찌 그런 무서운 말을 하는 거야? 오금이 저리고 소름이 돋는 것 같군. 내가 그대 그림을 아니 보면 어찌 되는 줄 정녕 몰라 그래?”
“……어찌 되십니까?”
“나라가 망하지.”
“하, 참나. 비약도 대단하십니다. 어찌 신의 그림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망합니까?”
강이 코웃음을 치자, 산이 자못 진지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참 물정 모른다, 싶은 얼굴이라 보는 내내 어처구니가 없었다. 산은 강의 손을 붙잡고 들어 올려 저와 강의 시선이 만나는 곳에 두었다. 그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산이 강의 엄지를 접으며 헤아리기 시작했다.
“봐라. 그대가 그림을 아니 그려 주면, 내가 슬퍼질 것 아니야. 아니 그래?”
“그러시겠지요.”
강이 고개를 끄덕이니, 이번에는 산이 검지를 접는다.
“내가 슬퍼지면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할 것 아니야.”
“……그러시겠지요.”
이번에는 중지를 접으며,
“내가 정무를 보지 못하면 나라에 혼란이 생길 것 아니야.”
하니 강이 기가 막혀 대답하지 아니하고 그저 산을 바라만 보았다. 그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손가락을 접던 산은 이제 막무가내로 마음대로 약지를 접어버리며,
“나라에 혼란이 생기면 난세가 된단 말이야.”
마지막으로는 소지를 접고는,
“난세가 되면 나 같은 사내가 나타나 나를 죽이고 새 나라를 세우지 않겠어? 그대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엄청난 일이다. 알겠느냐?”
억지도 참, 하고 코웃음을 치려다가도 왠지 맞는 말인 것 같아서 강은 혼란스러워졌다. 산이 심히 진실되고 정직한 눈을 하고 올려다보니 강은 결국,
“예에…….”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한참을 같이 웃다가, 산은 곧 낮잠을 잤다. 정자 밑에서 기다리던 소문성이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자, 층계를 밟아 올라왔다가 그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강에게 다가왔다. 강이 소문성에게 귓속말로 황상이 주무신다고 말을 하니, 그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주무시게 두라 이르고는 다시 내려갔다.
어제 강이 빠질 뻔하였던 후원의 작은 연못에서, 잉어 한 마리가 수면으로 올라와 아가리를 내밀고 끔뻑끔뻑 대었다. 시원한 바람 한 단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심히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
“이 낭관은 바로 관사로 들어갔습니다. 곧 자시가 되니 바로 잠들 것입니다.”
자시에 가깝도록 또 희건궁에서 글씨만 써 재끼던 강은 오늘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관사로 돌아가야 했다. 소문성이 그 뒤를 살피고 돌아와 산에게 아뢰니, 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걸이에 몸을 기대었다. 이제 패를 뒤집을 시간이 되었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경사방 태감이 걸어오는 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리는 듯도 하였다. 하지만 산은 오늘 패를 뒤집을 생각이 없었다.
“오늘은 미동을 들여야겠다.”
“……아, 예. 폐하, 허면.”
산은 화로에서 장죽을 꺼내어 삐뚜름하게 입에 물었다. 깊숙이 빨아들인 연기가 뱉어지고, 그것이 다시 공중에 뿌옇게 흩어지자,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피부가 희고, 눈빛이 곧으며 단정한 이가 좋겠다. 마치…….”
이 낭관처럼 말이야.
이튿날 새벽 흰 비단 천으로 눈을 가린 젊은 청년이 희건궁을 나섰다. 태감들은 그 청년을 작은 샛길로 인도하여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였다. 한 번 시침을 든 미동은 황상이 다시 찾으시기 전까지 금궐 안의 구석진 처소에 머물게 된다. 이따금 몇몇 이는 다시 시침을 들기도 하였지만, 이자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강의 대용품이 아니었던가. 조만간 황상은 원하는 바를 이루실 것이며, 그리되면 미동은 더는 필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