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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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역

1.

창創 제국 최동단에 위치한 창천성創天城.

옛 지명은 청천성淸天城으로, 유난히 하늘이 높고 푸르러 생긴 이름이었다. 해가 진 유시酉時1)의 창천성은 이제 시끌벅적한 활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시전 상인들은 저마다 좌판을 거두고 등을 내렸으며, 밭을 매던 이들도 허리를 두드리며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밤을 맞이하여 유독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 있었다. 창천성 제1의 기방이라 불리는 해연관이었다.

해연관에서는 개관 이래 유례없는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객이 난데없이 모든 기녀를 한방에 모아 두고 갖은 금은보화를 뿌려 댄 탓이었다.

“나으리, 술 한 잔 받으시지요.”

“너무 마셨다, 취할 것 같아…….”

“그러시지 말구요, 한 잔 더 하세요. 자, 아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사내는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꺼떡거렸다. 방바닥을 나뒹구는 병만 하여도 족히 여섯 개를 넘어섰다. 기녀들이 권하는 잔을 마다 않고 넙죽넙죽 받아 마신 결과였다. 제정신일랑은 온데간데없고 틈만 나면 주머니를 열어 한 움큼 보석을 집어 던져 대는 통에 방 안은 난리법석이었다. 그것을 잡겠다고 팔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던 기녀들이 어찌나 물색없이 상을 어지럽혔는지 접시가 깨지고, 내어 온 주안상이 어지러이 널렸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기녀들이 아니었다. 지금 그 사내의 주머니가 벌써 다섯 개째 열리는 와중이고, 그 안에서 나온 금은보화는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이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만일 객의 기분을 못 맞춰 주머니라도 닫혀 버리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나으리, 한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이 변방 창천성에서는 못 뵙던 분이라…….”

“……나? 중경……에서 왔지.”

사내는 힘없이 퍼져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띄엄띄엄 대답했다. 기녀들은 그의 대답에 마음에도 없는 환호성을 지르며,

“어머, 세상에! 중경에는 온갖 귀한 것이 가득하다 들었사온데, 사실인지요?”

하고 비위를 맞추었다. 이에 사내는 김이 새는 듯 피식 웃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중경도 사람 사는 곳인데 다 똑같지 뭐…….”

“아니어요, 나으리! 이 금은보화들은 태어나서 보지도 못했던 귀한 것들입니다! 중경은 신기한 것들이 가득한 곳임에 틀림이 없사와요!”

“별거 없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이건 오다가 주운 거다. 이 몸은 본디 개털이니라…….”

하지만 기녀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복색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감촉이 남다른 것이, 분명 쉬이 구하기 힘든 소재로 지어졌을 터다. 게다가 드러내 놓고 꾸미지는 않았어도 자그맣게 귀에 건 귀걸이, 그리고 타고 온 말에 얹은 안장 또한 몹시 진귀해 보였다. 범상치 않은 자다, 생각하며 기녀들은 그의 팔짱을 끼고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으리는 중경의 높으신 분이시지요?”

“응?”

“나으리는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셔요?”

“아서라, 너희에게 내 그것을 말하겠느냐?”

“아이, 나으리. 그러시지 말…….”

“어허! 안 된다 하였는데 그런다. 에이, 흥이 떨어졌다.”

사내는 옆에 꼭 붙어 앉아 자신을 채근하던 기녀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상이 뒤로 엎어지고, 그릇이 깨지는 등 소란이 일었으나 누구 하나 그를 나무라는 이가 없었다. 저치에게 아직 금은보화가 더 남았으니 나가기 전에 마저 토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기녀들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사내가 깨트린 그릇, 망가뜨린 상 따위야 얼마든지 새로 살 수 있었지만, 저 같은 손님은 다시 없을 것이다. 기녀들은 사내의 여흥을 깨뜨린 이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아이, 나으리! 그러지 마시고…….”

“어허, 놓으래도!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사내는 섬돌 위에서 신을 찾아 신으며, 주섬주섬 허리에서 주머니 끈을 풀어 방 안으로 휘이 내던졌다. 그러자 끈질기게 그의 뒤를 따르던 기녀들이 소리를 지르며 떨어진 곳으로 몸을 던지지 않겠는가. 끝까지 따라올 기세로 매달릴 때는 언제고, 금세 떨어져 나가는 꼴 좀 보라지. 사내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으리, 약주를 많이 하셨사온데 말을 타시면 위험하십니다.”

그녀들이 주머니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사내는 마구간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객 수습을 하는 하인이 뛰쳐나와 비틀거리는 사내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숙인 채 팔자걸음으로 느릿하게 걷던 그는, 문득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하인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하나도 안 취했다.”

“……예에?”

아까까지 혀가 잔뜩 꼬부라져 고성방가를 일삼던 그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단호하게 대답하자, 하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의 어깨를 놓았다. 사내는 하인을 보며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잠시 낄낄 웃더니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 한쪽을 떼어 내었다. 하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저 멀뚱멀뚱하고만 있자, 사내가 말했다.

“손이나 줘 봐라.”

“예, 예. 나으리…….”

“자. 이것을 받고 못 본 것으로 해 줄 테냐?”

“감사합니다요, 나으리!”

“오냐. 알아들었으면 재게 내 말이나 가져와라.”

하인이 고삐를 쥐고 사내의 앞까지 말을 끌고 오자, 사내는 마치 질풍 같은 속도로 안장 위에 앉아 자세를 잡았다. 하인이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사내는 해연관의 문을 나선 다음이었다.

“얘, 얘! 너, 가락지 못 보던 거다? 아까 그 손님이 뿌린 거 맞지? 몰래 꿍칠 생각일랑 말고 빨리 내놔.”

사내가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난 뒤, 해연관은 일찌감치 오늘의 영업을 마감하고 빗장을 걸었다. 그리고 가장 큰 방에 한데 모여 오늘의 수확을 정산하였다. 주운 것을 몰래 숨겨 놓았다가 나중에 장돌뱅이가 오거든 비단옷이나 한 벌 지어 입으려 했던 어린 기녀들이 입술을 삐죽이며 노리개나 가락지 따위를 내어놓았다. 가운데에 수북이 쌓아 놓은 양이 꽤 된다. 뿌릴 때에는 그저 줍기에 급급하여 어느 정도인지 몰랐으나 이렇게 두고 보니 보름이 무어냐, 한 달 치 매출액이나 진배없다.

“누가 왔다 갔다고?”

이 소식을 뒤늦게 듣고 방문을 열어젖힌 것은 이 기방의 주인인 최 행수였다. 최 행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땅 창천성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마당발이었다. 성의 관리들이 하는 내밀한 이야기가 모두 이 해연관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행수인 그는 직접 듣지 않더라도 그들이 오가는 것으로 이 지역의 이해관계를 모조리 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천성의 영주 채윤직의 눈과 귀가 되어 이 땅의 질서를 잡는 중요 인물이기도 했다.

“중경에서 온 사내인데, 주머니에 금은보화를 그득그득 지니고 있었어요. 오다 주웠다며 마구 뿌려 대었는데, 그것은 거짓인 듯 보입니다. 그리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았어도 입고 있는 옷 하며, 작은 장신구까지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그래?”

최 행수는 상석에 앉아 방 한가운데에 가득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살펴보았다. 하나하나 뜯어보니 아니 귀한 것이 없고, 듣도 보도 못한 보석이 가득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다 차치하더라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따로 있었다. 금도, 은도 아닌 철로 만들어진 작은 패찰이었다. 최 행수는 그것을 들어 올려 눈앞에 가져다 대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위에 달린 남색 수술이 꽤 낡았고, 패찰의 끝이 조금 녹슬어 손에 꺼슬꺼슬하게 닿았다. 이 금은보화 무더기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름 아닌 이 패찰에 새겨진 무늬였다.

“창천성의 문장이 아닌가…….”

최 행수는 패를 뒤집어 뒤편에 새겨진 글씨를 손끝으로 훑었다. 이 패는 창천성을 옛 지명인 청천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최 행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청천성이 창천성이 된 데에는 이 창 제국의 건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전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 나라가 간신의 손에 멸망하고, 이 땅이 군소 국가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럴 적에 하늘의 뜻을 받아 난세를 종결하고 스스로 중앙에 올라 창 제국을 건립한 패왕 산이 바로 이 청천성 출신이었다.

산은 자신이 나고 자란 청천성을 몹시 사랑했으며, 그 청천성이 그저 변방의 작은 땅에 그치지 않고 이 창 제국이 비롯한 곳임을 천명하기 위하여 그 이름을 창천성으로 개칭토록 했다. 이후, 황제 산이 옛 지명으로 기록되었던 모든 매체들을 소거하고 모두 창천성으로 새로 만들 것을 명한지라 이 패찰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아까 왔던 그 사내는 누구라 하더냐?”

“말해 주지 않았어요. 백화가 그 사내에게 무엇을 하는 분이냐 물었더니, 크게 화를 내며 나가 버렸습니다.”

“그것참 수상하구나. 나는 지금 당장 영주께 아뢰러 갈 것이니 너희들은 우선 보물을 나누어 갖지 말고 그대로 두거라. 그리고 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사내가 이것을 찾으러 오거든 절대 보내지 말고 그대로 포박하여 영주께 데리고 오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행수 어른.”

최 행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그 낡은 패찰을 들고 급히 뛰어나갔다. 당장 영주 채윤직에게 이 패찰을 보이고 대체 어떤 자인지 알아내야 한다. 마구간지기가 말을 대령하기도 전에, 최 행수는 나와 있는 말을 아무것이나 잡아타고 그대로 해연관 바깥으로 내달렸다.

“아이참, 간만에 돈 좀 생기나 했더니 이게 뭐야.”

최 행수가 나간 방은 뜻밖의 수확에 기뻐하던 기녀들의 한숨 소리만 가득하였다.

*

“아니, 행수 어른.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 발걸음이십니까?”

이제 막 자시子時02가 되어 성문을 잠그려던 문지기가 눈을 꿈뻑였다. 허둥대며 말에서 뛰어내리는 그에게서 고삐를 건네받았더니, 최 행수가 매우 다급한 얼굴로 문지기를 밀치며 반쯤 닫힌 성문 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행수 어른! 행수 어른!”

“영주님을 뵈러 왔다! 급히 아뢸 일이 있으니, 내가 왔다고 고해라!”

“예? 이 시간에요?”

“설사 영주님께서 침수에 드셨다고 하여도 반드시 뵈어야 한다고 말씀드려라!”

최 행수는 도리와 분수를 아는 자로, 웬만큼 촌각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면 이런 무례를 범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최 행수가 일으킨 소란으로 앞마당까지 나왔던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를 내실로 안내하고 다과를 준비하였다. 허나 그는 대접받은 차에는 입도 대지 아니하고 그저 불안한 듯 사납게 다리를 떨어 대었다.

“최 행수.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하게 날 보자고 한 겐가.”

이윽고 이제 막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것이 분명한 옷차림으로 채윤직이 방에 들어섰다. 최 행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직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으나, 채윤직은 손을 들어 그의 인사치레를 거두게 하였다.

“앉게. 대관절 무슨 일인가?”

“이걸 좀 보십시오.”

“……이게 무언데?”

“패찰입니다.”

“이런 패찰이야 흔한 것인데 이것이 왜?”

“뒷면에 청천성이라 새겨진 것이 보이십니까? 일찍이 영주님께오서 중경에서 이곳으로 내려오셨을 때에 모든 관리들의 명단을 대조하여 헌 패찰을 수거하고 새 패찰을 만들지 않으셨는지요. 한데, 어찌 이것이 버젓이 남아 있단 말입니까.”

“그렇군. 내 그때 강이를 일러 명단을 작성하게 하였으니 틀림이 없었을 것인데 어찌 이 패찰이…….”

“이것을 빼돌린 간자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최 행수의 말에 채윤직은 크게 동요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그 하나뿐이었다. 이 패찰은 관리들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성문을 지날 적에 내보여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패찰을 갖고 있으면 성내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신분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만일 외부인이 지니고 있었다면 성이 외부에 노출되었다는 뜻이다.

“으음……. 한데, 이것은 어디서 났는가?”

“해연관에 온 객이 금은보화를 뿌리고는 사라졌는데, 이것을 갖고 있었다 합니다.”

“누구인데?”

“모릅니다. 중경에서 온 자라고 하는데…….”

최 행수의 말을 가만 듣고 있던 채윤직은 탁상을 몇 번 두드려 바깥에 시립해 있던 하인을 안으로 들게 하였다.

“강이를 불러오거라. 이제 명단은 없으나 강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니.”

패찰을 지닌 자의 명단이라 함은 다시 말해 관리의 명단이나 진배없으므로, 그것이 외부에 새어서는 아니 되었다. 하여, 새 패찰을 배포한 다음에는 일찌감치 그 명단을 불살라 없애 버렸던 것이다. 평소 같았더라면 그 사실에 탄식을 했을 것이나,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써 올리겠습니다, 영주님.”

살아 있는 서고로 불리는 채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기억하고 있는 게로구만! 참으로 신통하네. 어찌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을 수가 있지? 대단해, 참말 대단해!”

“변변찮은 능력입니다.”

채강은 채윤직이 숨겨 두었던 첩의 자식으로, 대외적으로는 수양아들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는 채윤직이 첩의 존재를 비밀로 부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산이 창천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채윤직이 그 뒤를 따라 전장을 누비던 시절이 있었다. 10년의 시간 동안 가솔을 돌보지 못한 채 전국시대를 제압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아 오느라 내자가 숨진 줄도 모르고 2년을 타지에 머물렀다.

채윤직은 이에 몹시 슬퍼하였다. 그의 내자가 오매불망 바깥사람의 무사와 안녕을 빌다가 병에 걸려 쓸쓸히 숨진 것을 생각하면, 채윤직은 도저히 다른 내자를 생각할 수가 없다고 공언해 왔다.

그런 내력을 가진 채윤직이 창천성의 영주직을 제수받아 돌아왔을 적, 최 행수는 그에게 젊은 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첩실에게서 아들을 보았다는 것 역시 눈치채었다. 허나 채윤직의 체면을 생각하면, 또 은근히 숨기고픈 티를 내는 것을 보면 쉽사리 떠벌리고 다니는 것은 아니 될 일이라고 판단하여 여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채윤직과 채강은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체를 하고 있으니 최 행수는 그들이 먼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 됐습니다.”

“오, 다 되었나?”

“예.”

“이제 이것을 기반으로 하나하나 추려 보면 되겠습니다.”

최 행수가 희망이 서린 얼굴로 소리쳤고, 채윤직은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전 이만 물러가 잠이나 자겠습니다. 이제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러게, 그러게.”

강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방을 나가자, 채윤직은 강이 작성한 명단을 제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 중 누구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패찰을 수거하고 배포하는 일은 모두 강이 도맡아 했으며, 그의 능력으로 보아 결코 누락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괜히 죄도 없는 이를 의심해야 하는 일이 생길 것인데…….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한창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해졌다. 채윤직이 무슨 일이냐 하인을 불러 묻기도 전에, 먼저 문전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영천입니다.”

“들어오너라.”

“영천이, 무슨 일인가?”

“해연관에서 행수님의 사람이 누군가를 붙잡아 왔습니다.”

“붙잡아 왔다니, 설마……!”

“패찰의 주인이라 말씀드리면 아실 거라고…….”

영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 행수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채신머리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채윤직 역시 워낙 긴급한 사안인지라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잰걸음으로 영천을 따라나섰다.

복도에는 쿵쿵거리는 여러 사람의 발소리로 가득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긴 회랑을 지나 이윽고 찬 공기가 도는 가운데 계단 아래 무릎 꿇려 앉혀진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화톳불을 피웠으나 얼굴에는 검은 자루가 씌워져 있는지라 뉜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다. 채윤직과 최 행수는 돌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이자가 그 패찰을 갖고 있던 그 사내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이자가 그 패찰을 찾으러 해연관으로 다시 돌아왔기에, 이 야심한 시각 무례를 무릅쓰고 끌고 왔습니다.”

채윤직은 조금 꺼림칙한 얼굴로 그 사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를 포박한 이들에게 눈짓했다. 사내 양옆에 서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이들은 사내의 얼굴에 씌운 자루를 거칠게 벗겨 내고는 뒤로 물러섰다.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군. 이 자루에 무얼 담았던 거야?”

사내는 자루가 벗겨지자마자 연신 기침을 해 대었다. 바닥을 향해 콜록콜록거리는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채윤직은 화톳불에서 작은 횃불을 꺼내 들고 사내의 얼굴 앞에 가까이 들이대었다. 그리고,

“……맙소사!”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질을 치더니, 차가운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부복하는 것이 아닌가.

“영주님, 대관절 누구이기에 그리 경악을 하십니까.”

최 행수가 기함하는 채윤직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물었다. 채윤직은 말을 잇지 못하고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만 몇 번 꿈뻑대었다. 그때 그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중경에서 온 산이라고 하는 자다. 그나저나, 노인……. 너무한 거 아냐? 오랜만에 만나러 왔더니…….”

“폐하!”

바닥에 주저앉은 사내는 그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채윤직이 매우 송구스러워하며 물었다. 산은 알 수 없는 얼굴로 채윤직 이하 머리를 조아린 수많은 이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누추한 곳이라니, 노인.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누추하다 할 것이냐. 이곳은 대제국 창이 비롯된 땅이거늘.”

“……죄인을 벌하소서.”

“농이야. ……그건 그렇고, 묶은 거나 좀 풀어 주겠어? 손을 움직일 수 없어서 불편하군.”

산이 눈알을 굴려 포박된 손을 바라보자, 바들바들 떨며 명을 기다리던 최 행수가 부산스럽게 상체를 들어 올려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매듭 쪽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때, 산이 매우 엄한 목소리로 호령하였다.

“어허, 네놈이 감히 짐에게 검을 들이댄단 말이냐!”

산이 이 머나먼 곳까지 연통 없이 왕림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을 못 했던 상황이다. 최 행수는 자신이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제를 배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므로, 매우 혼비백산하여 사고가 멈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그저 밧줄을 풀기 위하여 검을 뽑은 것이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지엄한 말씀에 겨우 깨달은 참이었다. 최 행수는 저 멀리 검을 던져 버리고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읍소하였다.

“폐하, 미천한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농이야. 빨리 끊어 줘.”

“예?”

“농이라니까 그러네. 저 칼로 밧줄을 끊어 줘. 매듭 푸는 건 답답스러워서 못 기다릴 것 같으니까.”

최 행수가 몹시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여전히 엎드린 채윤직이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고 최 행수와 눈을 마주쳐 왔다. 울상을 지은 최 행수가 도움을 바라는 얼굴로 영주를 바라보자, 채윤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응.”

포박된 지 한 식경 만에 드디어 자유로워진 산은 자국이 남은 손목을 허공에 털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한숨 돌리고 나니 이제야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엎드려 있음을 깨달았다.

“왜 그렇게 엎드리고들 있지?”

“주, 죽여 주시…….”

“내가 할 짓 없이 왜 그대들을 죽이고 있겠느냐. 재게 일어나 하던 일이나 마저 하도록 해.”

산의 말에 수많은 하인이 동요했다. 그들이 상상했던 황제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전국시대의 패자覇者, 희대의 풍운아라고 불렸던 그에 대한 소문은 매우 두려운 것들뿐이었다. 이 땅 위에서 황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보다 더 크고 무서운 존재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앞에 앉아서 팔목을 돌리고 있는 저 사내는 어떤가. 무섭다고 하기에는 자비로우며, 어딘가 삼엄함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인들은 저자가 참으로 말로만 듣던 그 황상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 지경이었다.

아무튼, 그들은 산이 더욱 재촉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리고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채윤직 역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딱 한 명, 아직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가 있었다.

“이자가 노인이 말했던 최 행수야?”

“예. 매우 믿음직스러운 자입니다.”

“그대, 그만 떨고 일어나 얼굴이나 좀 보여라. 노인의 곁을 지키는 자가 누구인지 짐이 직접 봐야겠으니.”

산의 말에 최 행수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공수했다. 산이 팔짱을 낀 채로 최 행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하자, 최 행수는 더욱 긴장이 되었다. 가슴이 너무 쿵쿵대어 이 소리가 바깥에 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지경이었다. 황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조금도 예측이 되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흠, 산적같이 생겼군.”

허나 감상은 의외로 단순하기 짝이 없다. 산은 이내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채윤직을 향해 돌아섰다.

“……그렇지, 노인. 방 좀 내줘. 노인이 싫어할 것 같아서 객잔에 묵으려고 했는데, 노잣돈을 기방에다 뿌려 버렸지 뭐야. 거지가 되었어.”

“싫어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소신 살아서 다시 용안을 뵙는 광영이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사옵니다.”

“광영은 무슨. 아무튼 빨리 지낼 곳이나 봐 줘. 그리고 오늘 잘 생각하지 마. 내가 노인한테 할 말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들을 말도 정말 많아. 노인도 나한테 하고픈 말이 태산 같지?”

산은 채윤직을 향해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잘대었다. 최 행수는 그 모습이 참으로 놀라워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개국공신인 채윤직이 이 머나먼 변방까지 내려온 까닭은 다름 아닌 황상의 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산이 이곳 청천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중앙으로 나아가 창을 건국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채윤직은 66년 전 청천성에서 태어났으며, 산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청천성 영주의 가신으로 임하였다.

우직한 성격으로 인하여 채윤직은 산이 어릴 적에는 훈육을 담당하였고, 이후 산이 자라 청천성의 영주가 되었을 때에는 끊임없는 간언과 직언으로 보필하였다. 또한, 상경하여 연나라 땅이 쇠한 자리에 창의 건국을 천명할 적에도 채윤직은 여전히 산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 영광이 오래지 않아 채윤직은 어떠한 사건으로 그의 큰 진노를 사게 되었다. 하여 개국공신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제국의 최동단에 있는 창천성으로 보내졌다고 하였다.

이런 전차로 최 행수는 황제가 채윤직을 매우 꺼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상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지명까지 바꿔 가며 창천성이 창 제국의 발상지임을 천명한 황제가 어찌하여 죄인을 이곳으로 전송하였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허나 이를 직접 채윤직에게 묻는 것은 큰 무례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미 지난 일을 물어 무엇 하겠는가 여겨 그저 속으로만 고민했을 따름이다.

알려진 사실이 이러할진대, 지금 황제가 채윤직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어떤가. 오랜 친구 대하듯 황제로서의 위엄을 모두 떨치고 참으로 격 없이 굴지 않는가.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누구도 대동하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이 머나먼 창천성까지 그를 만나러 왔다. 최 행수는 참으로 마음이 복잡하였다.

“폐하, 어찌 이곳까지 납시었나이까. 이 늙은이, 몹시 놀라 심장이 멎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응? 그건 노인을 만날 때가 된 것 같았으니 그런 것이지. 이번 참에 북양으로 행행을 나왔다가, 마침 북양이 창천성과 매우 가까우니 노인 사는 꼴이라도 좀 볼까 싶었어. 사실 내 그리 길지 않은 평생 노인과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낸 것은 처음이지 않아. 벌써 5년이나 지났군.”

“죄인의 몸으로 어찌 폐하의 곁에 남아 있겠습니까. 소신을 살려 주신 것만으로도…….”

“죄인은 따로 있지.”

산은 급히 얼굴을 굳히며 턱을 괴었다. 채윤직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화제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나 해후를 푸는 자리에서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한데, 폐하. 어찌 호위를 대동하지 않으시고 홀로 이 먼 곳까지 납시었습니까. 옥체라도 상하시면 어찌하시려고요. 소신은 이 땅으로 돌아오기를 저어하지 않았사오나, 폐하께서 체통을 아니 지키시고 이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실까…… 그 한 가지가 유일한 걱정이었습니다. 궐에서 나와 이곳까지 오시기까지 밤낮없이 달리더라도 보름이 넘게 걸릴 것인데 그동안 정무는 어찌하시고요.”

“아……. 잔소리, 또 잔소리!”

산은 얼굴을 팍 찌푸리며 두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처럼 노신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그의 쉼 없는 충언이 그리웠던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중경에는 노인 같은 이가 없어.”

“…….”

“하긴, 나한테는 노인 같은 이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노인이 필요한 것이지만 말이야.”

산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이 늙은 신하에게는 더 없는 광영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채윤직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로 마음먹었으며, 그편이 산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산 역시 채윤직의 그 속을 알기에 투정을 부릴 뿐 억지로 불러올리지 않고 있었다.

“노인, 나한테 아이가 생길 모양이야.”

“그것이 참이옵니까, 폐하! 아기씨라니요, 경사가 아닙니까!”

“바라던 배에서 나올 아이가 아니라 조금 짜증 날 뿐이야.”

황제의 말뜻을 알아챈 채윤직이 송구스러운 얼굴을 했다. 건국 초기인 지금, 조정은 아직 완전한 안정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흩어져 각양각색을 이루고 있던 이들이 한데 모여, 한 황제를 받들고 있는 형국인지라 알력 다툼이 빈번했다.

산은 언제나 그러한 권력 싸움을 지켜보며 쉽게 피로를 느꼈으며, ‘괜히 전쟁에 뛰어들었어. 창천성에서 대충 살다 죽을걸.’이라는 말을 믿을 만한 자들의 앞에서 버릇처럼 했다.

“황자 아기씨가 아니길 바라시옵니까?”

“황자는 아니 될 일이지.”

“……망극하옵니다.”

“화로나 좀 갖다 줘. 남령초를 피워야겠어.”

두 사람의 남령초 연기가 뭉게뭉게 방 안을 휘돌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새벽닭이 운 다음에야 방을 밝힌 불이 꺼졌다. 산이 창의 개국을 선포한 이래, 가장 깊고 편한 잠이었다.

*

─강아.

한편, 첫닭이 울든지 말든지 세상모르게 잠을 자고 있던 강은 갑작스러운 호명에 눈을 떴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킨 강은 어기적어기적 걸어 문을 열었다.

“아버지,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자고 있었구나.”

“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할 말이 있어 왔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심각해 보이십니다. 들어오세요.”

채강은 등에 불을 켜고 구석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채윤직은 조금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의 맞은편에 궁둥이를 붙였다. 아직 강의 눈에는 졸음이 그득하였으나, 적어도 채윤직이 이렇게 ‘할 말이 있다’며 찾아온 일은 처음이기에 경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동안 밖에 나가 있어야겠다.”

“밖에요?”

“그래. 성에 폐하께서 행차하셨다. 만일 그분께 네 존재를 들킨다면…….”

“알겠습니다. 이곳에는 얼마나 계신답니까?”

“잘 모르겠구나. 우선 북양에 사람을 보내 두었으니 족히 사나흘은 계시지 않을까 싶다. 지금 막 침수에 드셨으니 그 틈을 타서 나가는 게 좋겠다.”

채강은 채윤직이 나간 자리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농을 열어 봇짐을 꺼내 침대 위에 얹어 두고는 의자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었다. 자다 일어난 탓도 있지만, 며칠 나가 살 짐을 싸야 하는 것이 몹시 짜증 났다.

“연통도 없이 갑자기 오고 난리야, 귀찮게…….”

“폐하, 기침 하시었…….”

땅거미가 내려앉고 창천성에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 산은 옛날부터 잠이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었던 데다, 제도帝都에서 이곳까지 내달리며 쌓인 여독을 풀고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태 방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채윤직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로 멈추어 섰다. 침상에 어지러이 놓인 이불만이 고요히 방을 지키고 있었고, 산은 온데간데없었기 때문이다.

“영천아.”

“예, 영주님.”

“폐하께서 어디로 납시었느냐?”

“방 안에 안 계십니까?”

“……안 계신다. 나가시는 것 못 보았느냐?”

“예에…….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오, 아직도 남아 있군.”

한편, 산은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소각장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커다란 바윗돌을 치우고 있었다. 바위에 이끼가 잔뜩 앉은 것으로 보아 그가 이곳을 떠난 후 그 누구도 이 개구멍을 발견치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이 개구멍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린 시절 책을 읽으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채윤직을 피하여 바깥으로 마실을 나갈 적에 애용했던 오직 그만을 위한 출입구였다.

이 개구멍을 파기 위하여 모두가 잠든 새벽마다 주변을 살핀 뒤 조심조심 소각장으로 나와 망치질을 한 것만 거의 보름이었다. 처음부터 나 있던 작은 구멍을 제 한 몸 통과할 만한 크기로 넓히는 데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월담을 하거나 문지기들이 꾸벅꾸벅 조는 틈을 타고 도주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아……. 좀 배가 고프군.”

산은 꺼진 배를 두드렸다. 채윤직에게 들키지 않고 나오느라 수라 한 번 들지 못한지라, 갑자기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우선 요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산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시간이 늦되어 좌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전이 철수하기 전에 빨리 무엇이라도 입에 넣으려니 갑자기 마음이 촉박하여 산은 발걸음을 재게 옮겼다.

다시 기방으로 가 볼까 하였으나, 문득 어제 기방에서 갖고 온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산은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슬쩍 만져 보았다. 그래도 쩔렁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는 것을 보니 은자 몇 개쯤은 있는 모양이었다. 술 한 잔과 저녁 요기쯤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전부터 자주 가던 주막이 없을까 시전을 기웃거렸다. 자신이 영주의 적자라는 사실을 들키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 찾아갔던 곳이다.

‘그곳이 참으로 탁주를 끝내주게 만들었지.’

그리 생각하니 더욱 입안에 군침이 돌았으나, 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산이 중경으로 올라 전국시대를 끝내고 제국을 창건했음을 모르는 이가 이 땅 위에 있을 것인가. 뭇 백성들 사이에 지존이 나타나서 좋을 것은 없었다.

때마침 길의 끝에 불을 밝힌 곳이 하나 있었다. 잘되었다 싶었다.

“주모, 나 술 하나 국밥 하나 줘.”

“잠깐만 기다리세요!”

바깥 평상에 자리하고 잠시 기다리니 백자 병에 담긴 술이 상 위에 올라왔다. 원래 가던 주막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술을 주문하고 있으면 호박전 하나라도 내어 왔었는데, 여기는 영 그런 것이 없다. 인심 하고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산은 자세를 비스듬히 하고 앉았다. 그래도 금궐보다는 나았다.

“고마워.”

제 상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 그릇을 내려놓은 주모에게 인사치레를 하고 나서 산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도태감 소문성이 창천성으로 쳐들어와 채윤직에게 황상을 내놓으라 난리를 피우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한데 어쩐지 기색이 없으니 산은 다소 어리둥절한 것이다. 제아무리 멍청한 놈이라고 타박을 주기는 하였어도, 북양 땅에서 사라졌다면 응당 창천성으로 갔을 거라 생각했을 것인데.

“뭐, 상관없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산은, 문득 저 뒤편에서 사람들이 잔뜩 운집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 소란스럽지 않은 걸음이었으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순간, 운집해 있던 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산은 갑자기 몰리는 시선에 일순 당황하여 혹여 자신이 지존임을 눈치챘는가, 하고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거기, 형씨! 다시 앉으시오. 아까 앉았던 그 위치에 고대로 앉으시오.”

한데, 그 무리에서 들리는 말은 황상을 향한 것치고는 오만불손하다. 산은 우선 아직 정체가 탄로 나지 않았다 여겨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다 치고 어이하여 사람을 마음대로 앉으라 마라 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어 몹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어찌 그래?”

“지금 여기 화원이 있는데, 이 화원이 당신을 그리고 있어 그렇지.”

“뭐? 나를 그리고 있어? 어디 한번 보자.”

“아직 다 안 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다 그리거든 보여 주리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얼굴도 보이지 않는 화원이 소리쳤다. 산은 그 말에 도로 좌정을 하려다가 문득 자신이 아까 전 어디에 앉았던지 기억이 도저히 나지 않아 앉기를 주저하며,

“내 아까 어디에 앉았었지?”

하고 물었다.

“지금 있는 곳보다 좀 더 옆이오.”

“여기?”

볼썽사납게 엉덩이를 끌며 옆으로 몸을 옮긴다.

“아니, 왼쪽!”

“여기?”

“그렇지!”

구경꾼이 주문하는 대로 몸을 옮겨 앉은 산은, 즐거운 얼굴로 앉아 제 뒷모습으로 쏟아지는 시선들을 생각했다. 황상의 최고 관심사가 무엇이냐 물으면 창 제국 만인이 이구동성으로 그림이라고 할 것이며 그다음은 글씨라 할 것이다. 본디 어렸던 시절부터 스스로가 그림을 즐겼으며, 글씨 쓰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지라 그 소일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즐거움이 따르는지라, 산은 제 등에 쏟아지는 시선이 그리 노엽지 않았다. 언제 다 그려질 것인가 기다리는 것이 다만 고역일 따름이었다.

“다 그렸다!”

이윽고 그 무리 안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솟더니, 어떤 젊은 사내가 산을 향해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이것은 당신 주겠소. 당신을 보고 그렸으니까.”

산은 그 종이를 받으며 침음했다. 전국의 출중하다는 환쟁이란 환쟁이는 모두 중경으로 불러 올려 도화청에 넣어 놓았으나, 번번이 진상되는 그림은 늘 보던 것들뿐이었다. 이제 슬슬 새로운 환쟁이 찾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싶었을 즈음 이자가 갑자기 나타나 그려 달라고 하지도 않은 그림을 그려 주었으니 어찌 아니 달갑겠는가.

게다가 그림 그리는 실력이 월등했다. 고작 이 변방 창천성에서 썩기는 아까울 정도로.

“오늘은 이만해야겠군. 슬슬 눈이 감겨서.”

사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평상 위에 펼쳐 놓았던 화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벼루에 고인 먹을 연적에 쪼로록 따르는 모습이 어쩐지 눈에 들어찬다. 산은 그림을 고이 접어 품에 넣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그사이에 봇짐을 어깨에 지고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이렇게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립문을 나서는 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어 걸음을 멎게 하였다.

“뭐요?”

“그대, 나와 중경으로 가자.”

“미쳤소?”

하지만 사내는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하였다. 허나 호락호락 놓아줄 산은 아니었다. 더욱 억세게 잡으며 사내를 끌어당겼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

웬만해서는 놓아줄 기세가 아닌 산을 노려보던 사내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가까이 다가왔다.

“무엇을 좋아해? 재물? 여인? 그것도 아니라면 관직? 다 주지. 나와 함께 중경으로 가자.”

“광증이 있는 자로군. 난 오늘 기분이 안 좋소. 당장 놓지 않으면,”

“왜 기분이 안 좋은데?”

“그걸 내가 왜 당신에게 설명해야 하지?”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정말 기분이 안 좋을 만하면 그대를 놓아주려고 하니 그렇지.”

“집에 말도 없이 귀찮은 객이 들어 쫓겨났소.”

“어찌 주인 된 자가 객이 들었다고 하여 쫓겨나?”

“그건 알 거 없잖소. 이제 놓으시오!”

“……내가 놓아주어야 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아서 못 놓겠는데.”

“진실로 미친 자로군.”

미쳤거나, 아니면 사람을 자극하는 것에 도가 텄거나. 사내는 산을 힘껏 노려보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자의 간계에 휘말려 공연히 아침에 있었던 일들까지 모두 털어놓은 꼴이 되질 않았는가. 이자가 무엇이라고 그 자세한 내막까지 알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어쩐지 밑천이 털린 기분이라 영 찜찜하였다.

게다가 언제 보았다고 다짜고짜 반 토막짜리 말을 하고 앉아 있는가. 조금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 신분 높은 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재물이나 여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관직을 주겠다는 말은 심히 기가 찼다.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잡힌 손목을 한 번, 산을 한 번 바라보았다.

“농이 아닌데.”

“농이든 아니든 나는 재물에도, 여인에도, 관직에도 관심이 없으니 이거 놓으시오.”

“허면 원하는 게 무엇인데? 내 그대 원하는 건 다 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날 놓는 것이오.”

“내 하는 말이 다 거짓으로 들리는 것이지? 나는 진실로 그대에게 재물도, 여인도, 관직도 줄 수 있어.”

“당신이야말로 내 말이 거짓으로 들리는 것이오? 나 역시 진실로 재물에도, 여인에도, 관직에도 관심이 없소.”

“그대의 그림 실력은 이 좁은 창천성에 머물기에 아깝기 그지없다. 중경으로 가면 그대의 그림을 더욱 알릴 수 있을 것이며, 무릇 사내라면 입신양명에 뜻이 있을 것인데 어찌 자꾸 싫다고 하는 것이야?”

“난 입신양명에 관심 없소. 이 좁은 창천성이 좋으니까. 산이 속된 욕망으로 창천성에서 입신하여 살육을 자행하고 중경으로 올라 양명을 하였다고 모든 사내가 그것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산과 사내의 실랑이를 구경하고 있던 군중들은 사내의 말에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외로 돌렸다. 저자가 공연한 자리에서 감히 황상의 존함을 입에 올리고 모욕하였다.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니고서야 감히 황상의 연고지인 창천성에서 저런 주둥이 방정을 떨 리가 없었다. 군중들은 황망히 흩어져 제각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은자 몇 닢을 반상 위에 올려놓고 도망치듯 주막을 나섰다.

“산이 창천성에서 입신하여 살육을 자행하고 중경으로 올라 양명을 하였다고?”

“내가 틀린 말 하였소? 자신의 탐욕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죄는 사는 동안 죗값을 다 치르지 못할 것이며, 죽거든 하늘의 심판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오.”

“…….”

5년 전, 연 제국의 적자를 참수하면서 이 같은 말을 들은 바가 있다. 산은 잠시 고개를 뒤로 빼고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진실로 두려움을 모르는 자다. 아무리 자신이 황상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들, 사석도 아니고 심지어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지존을 비판하는 패기라니. 산은 자신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뒤로하고, 이 사내에 점점 더 흥미가 솟았다.

기실 창 제국이 창건된 이래 산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영주 시절에야 대놓고 그를 더러 망나니라며 비난하는 아랫것들이 많았으나 영주와 황상은 그 지위부터가 다르니 입에 발린 말 외에는 무엇을 들을 수 있었을까. 산이 자신에게 직언을 하는 채윤직을 그리워했던 것도 이런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대 참으로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이번에는 사내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말을 하고 나면 다른 이들이 그랬듯 꼬리를 말고 줄행랑을 칠 줄로 알았는데, 재미있는 소리를 한다니. 역시 보통 광인이 아니었다.

“그대를 더 데려가고 싶어졌다.”

“……미친놈.”

사내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자의 집착이 보통이 아니다. 이제는 말로 구슬려 놓게 하기보다는 한눈을 팔게 하여 놓게 하는 것이 좋겠다. 사내는 산의 동태를 살폈다. 무언가 이목을 끌 만한 것이 나타나 주었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하고 생각했을 때 마을 어귀에서 경천동지하는 소리와 함께 말 울음소리가 났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사내가 사립문 바깥을 가리켰다. 산은 사내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삐뚜름하게 서서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이런 젠장! 하고 사내가 거칠게 발을 한 번 굴렀을 무렵, 의도치 않은 고함 소리가 산을 움직이게 했다.

“주인어른!”

익숙한 목소리이다. 산은 그 음성을 듣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 늦는다 싶더니, 저 요란을 떨며 끝끝내 찾으러 왔다. 산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어른, 어찌 말씀도 없이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말을 담벼락 밑에 멈추어 두고 검은 도포를 입은 이가 사립문으로 달려 들어왔다. 황상을 두고 주인어른이라 부를 이가 태감 외에 누가 있을까. 노려보는 시선이 익숙한 듯 소문성이 싱글벙글 웃으며 산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그래 보인……, 어?”

그때였다. 산에게 붙잡힌 사내가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팔이 공중으로 한 번 크게 들리고 다시 허공으로 곤두박질쳐졌을 즈음 산과 사내, 그리고 소문성은 기묘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마치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이런!”

“소매가 찢어졌잖아?”

“…….”

산이 어찌나 세게 붙잡고 있었는지, 소매의 봉합 부분 실밥이 터져 사내는 맨 팔을 드러내게 되었다. 밤바람을 맞아 너풀거리는 소매와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허허’ 하고 웃고만 있는 사내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소문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상황은 잘 모르나, 제 주인이 또 무슨 일을 벌였구나 싶었다.

“이런 옷을 입고 나다닐 수는 없는 법이지. 내가 묵는 곳으로 가자. 허면 내가 사람을 시켜 이것을 기우도록 하고 새 옷을…….”

“미친놈!”

하지만 사내는 산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산과 소문성은 그 뒷모습을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소문성.”

“예.”

“저자가 누군지 알아봐라.”

“……어찌 그러십니까.”

“저자를 중경으로 데려가야겠다.”

어찌 그러냐는 반문은 기괴한 성품을 지닌 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사내의 찢어진 소매를 품에 접어 넣는 제 주인을 보며, 소문성은 ‘예’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은 소문성이 타고 온 말에 올랐다. 분명히 이곳으로 납실 적에 말을 타고 오셨을 것인데, 대체 그 준마는 어디에 두셨느냐고 묻자니 황상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인다.

“소문성.”

“예.”

“너 때문에 그자를 놓쳤다.”

“……송구하옵니다.”

“그자를 다 잡아 두었는데, 네가 나타나는 바람에 그자가 도망갔단 말이야.”

“반드시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어 대령해 올리겠습니다.”

“못 잡으면 어찌할 것인데?”

황상이 심통을 부리기 시작하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졌다. 소문성은 어떤 대답이 가장 현명할 것인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한숨처럼 아뢰었다.

“그럴 일이 없도록 반드시…….”

“세상에 반드시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일에도 만에 하나는 존재하는 법이다. 네가 무엇인데 감히 반드시라는 말을 입에 올린단 말이냐.”

“하오시면, 최선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는 정도로는 아니 돼. 반드시다.”

감히 반드시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이 목구멍 안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장죽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소문성은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아뢰었다.

“허면 반드시…….”

“멍청한 놈.”

산이 낄낄 웃으며 그를 앞질러 갔다.

“뉘시오!”

성문 앞에 서니 문지기 두 명이서 창을 들이대고 앞을 막아섰다. 일찍이 산이 이 땅의 영주로 머물 적에는 멀리서 산의 준마가 우는 소리만 듣더라도 재게 문을 열어 주던 문지기는 이제 일을 그만둔 모양이었다. 이곳을 아주 떠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늘, 옛 영주를 알아보는 자가 몇 없었다.

산은 말에서 내리지 아니하고 잠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소문성은 문지기들의 무례한 행태에 분개하며 말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윽!”

“나는 중경에서 온 산이다.”

허나 말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산이 등자에 얹어 놓았던 발을 들어 소문성의 뒷머리를 툭 밀치고는 대답했다. 갑자기 몸이 훅 떠밀린 태감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게 무언데?”

문지기가 헛웃음을 지으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하지만 처음 듣는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넘어가고 싶으니 자신이 지존이라는 말은 곧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채윤직이 산이 창천성으로 들어온 지 한나절이 지났음에도 문지기에게 말을 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안위를 염려했기 때문일 터였다.

산은 잠시 한숨을 쉬다가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주에게 가서 산이 왔다고 하면 알 것이라 말하자니, 채윤직의 잔소리가 어찌나 따가울 것인지 걱정부터 앞선다. 산은 걷어차인 뒷머리를 문지르는 소문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얼른 지혜를 짜내 보라.”

“……소인에게 무슨 지혜가 있어 짜내겠습니까.”

소문성이 주둥이를 댓 발 내밀고 대답하자, 산은 혀를 쯧쯧 찼다.

“삐치기는.”

그때, 산의 뒤편에서 말굽이 지축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량한 자세로 산을 올려다보던 문지기들은 그 소리를 듣고 단번에 자세를 바꾸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정렬하였다. 산은 대관절 뉘라서 이자들이 이렇게 구는가 싶은지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비켜라. 뉘 안전이라고 이런 무례를 범하느냐.”

사내는 산의 바로 뒤에 말을 세우고 단숨에 땅으로 내려와 부복하였다. 산은 다소 어리둥절하여 그를 한 번 내려다보고, 또 문지기들을 흘끗 쳐다보기도 하였다. 문지기들의 표정이 매우 일그러지는지라, 산은 어렴풋이 이자가 창천성에서 꽤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산이 소문성에게 누구인지 설명하라는 듯 눈빛으로 채근하였으나, 소문성 역시 그이를 본 바가 없는 데다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는지라 송구스럽게 고개만 몇 번 조아려 대었다. 직접 묻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라. 그대는 대관절 누구이기에 나를…….”

산은 매우 어렵게 고개를 들어 올린 사내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어도 시선만은 여전히 바닥을 향하고 있는지라 자신이 배견한 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아는 듯 보였다. 어둠이 깔린 와중에 소문성이 멍청하게 선 문지기에게서 횃불을 빼앗아 부복한 사내 가까이에 비추니, 그제야 그 안면이 드러난다.

“창천성 영주 채윤직의 장남 채영이라 하옵니다.”

“아, 채영이로구나. 나는 또 누군가 하였지. 못 본 사이 많이 변하여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이곳까지 납시었다는 말은 전해 들었사오나, 국경 지방에 시찰을 갔던지라 이제야 뵈옵니다.”

이제 문지기들의 얼굴은 대경실색에 가깝게 변하여, 쥐고 있는 창끝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이 방금 전까지 그 끝을 겨누고 위협하였던 인물이 뉘인지는 몰라도 영주의 적자가 이리 예를 갖추니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문지기들은 앞다투어 무릎을 땅에 붙이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주, 죽을죄를 지었……,”

“어찌 너희들이 죽을죄를 지었지? 수상한 자가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야. 너희들이 언제 내 얼굴을 보았다고 나를 보자마자 길을 터 줄 수 있었겠어.”

“사, 살려…….”

“어허!”

이번에는 채영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문지기들은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엎드린 몸을 조금 움찔거렸다. 채영은 그들의 앞으로 나아가 매우 엄히 꾸짖기 시작하였다.

“문을 열고 길을 트라 명하시는데 어찌 사사롭게 목숨을 구걸하며 명을 받잡지 않는 것이냐!”

문지기들은 그 말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에 걸린 빗장을 열고 큰 문을 뒤로 밀기 시작하였다. 끼이이익─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고, 땅에 박힌 돌에 문을 단단히 고정시킨 문지기들은 다시 앞으로 달려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황상에게 길을 터 주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채영이 한쪽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이자, 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 말을 움직이지 않는지라.

“공연히 호들갑을 떠는구나.”

귀한 객이 성으로 돌아왔다는 풍문에 채윤직이 혼비백산하여 방에서 달려 나왔다. 그 모습이 목구멍에서 망령이라도 빠져나오는 듯 보여 산은 큰 소리로,

“뛰지 말고 천천히 와, 노인!”

하고 소리쳤다. 채윤직은 그제야 자신이 체통을 아니 지킨 줄을 알고 무안하게 헛기침을 하며 몸가짐을 바로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주님.”

늙은지라 아직도 가빠진 숨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윤직이 황상 앞에 나아가자, 소문성이 얼굴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채윤직은 소문성을 발견하자마자 반색을 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황상이 이 땅에 머무는 하루 동안 곁에서 늘 모시던 태감이 없으니 어찌나 불안하던지, 이제야 한숨 돌릴 것도 같다.

“소 공공……. 어찌 이제 왔단 말이오!”

“송구합니다, 영주님. 폐하께오서 아니 계신 것을 알면 명화궁께서 크게 노여워하실까 하여 조심히 행동한다는 것이 그만…….”

명화궁이라니. 채윤직은 짐짓 불편한 기색을 안면에 잠시 띄웠다가 이내 거두며 헛기침하였다. 명화궁이라 함은 황상의 제1후궁임과 동시에 창 개국공신 승상 유자명의 여식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산이 말했던 ‘바라던 배’가 아닌 여인이기도 하였다.

채윤직이 눈에 띄게 경직되자, 산은 부러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태감과 그의 사이에 급히 끼어들며 큰 소리로 하하하! 웃었다.

“그렇지, 노인. 내 아주 재미있는 자를 만났거든? 그자 이야기를 해 주지.”

“재미있는 자라니요, 어떤 자를 이르시옵니까?”

“소문성이 없는 곳에서 말할 것이야. 괘씸한 놈 같으니.”

채윤직을 제 방으로 이끌며, 산은 뒤따라오는 소문성을 다시 한번 노려보았다. 냉큼 뒤를 따라붙으려던 소문성은 비 맞은 개새끼처럼 낑낑대며 머리를 조아리고 걸음을 멈출 따름이었다. 따라 들어오지 말고 아까 그 사내를 찾으라는 명일 터였다. 소문성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그 재미있는 자가 누구이옵니까. 소신 궁금합니다.”

“노인도 참. 방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를 못하는군. 그러니까, 내가 아까 주막에 갔었거든.”

“주막이라니요, 폐…….”

“시끄러워. 조용히 해 봐. 한데, 갑자기 어떤 자가 나를 그리지 않겠어? 내가 조금 움직이니 가만히 있으라며, 나를 그리는 중이라고 하기에 잠자코 있어 주었지. 그리고 잠시 뒤에 다 그렸다면서 그림을 보여 주었는데, 내 참으로 놀라웠어. 그리 그림을 잘 그리는 자인 줄은 몰랐단 말이지.”

산은 아까 전 일을 다시 회상하는 듯, 금세 신난 얼굴이 되어 떠들어 대었다. 조금도 채윤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이내 말을 이었다.

“내 그자에게 달라는 대로 모두 줄 테니 함께 중경으로 가자고 하였는데, 나를 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더군.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라 정겹기도 하였는데, 그자가 다음에 한 말이 그렇게 가관이야. 날 더러 뭐라는 줄 알아?”

“……뭐라고 하였습니까?”

“입신양명하겠다는 욕망 때문에 살육을 저지른 자라고 하지 않겠어? 물론, 그자는 내가 산이라는 것을 모르고 한 소리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통 배짱은 아니지.”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그자가 대관절 누구이옵니까. 신이 당장 그자를 잡아들여 물고를 내겠습니다!”

“저자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채윤직은 일순 당황하였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제 뒤를 가리키는 산의 손끝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집채 같은 성벽에 달라붙어 넝쿨 줄기를 따라 천천히 아래로 발을 딛고 있는 사내의 인영이 보였다. 이 밤중에 어찌 저런 태연자약한 도둑이 다 있는가 생각하였더니, 그자가 아래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그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왼쪽 소매가 없는 걸 보면 저자가 맞아. 내가 아까 저자의 소매를 찢어 먹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산은 품 안에서 그 소맷자락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채윤직은 대경실색을 하여 손발이 벌벌 떨리는 것만 같았다. 저리 성벽을 타고 내리는 자는 두말할 것 없이 강이다. 강이 아니고서야 경비가 삼엄한 이 성벽을 아무런 소란 없이 기어서 오르내릴 수 없을 것이며, 다 차치하더라도 저 뒷모습을 보기만 하여도 알 수 있었다. 채윤직은 이마를 짚었다. 산에게 강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부러 내보냈더니, 어찌 저 애가 다시 성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감히 성을 범하고 있는데 말리지 않는 것을 보면 노인이 아는 자인 모양이지.”

산이 채윤직에게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아까 전 주막에서 이 사내를 처음 보았을 때, 집에 귀찮은 객이 들어 쫓겨났다고 하였으니 그 귀찮은 객이라 함은 산을 이르는 말일 것이고, 집이라 함은 이 창천성을 더러 하는 말일 것이다. 허면, 창천성을 집으로 두는 자가 누구인가.

“노인, 짐에게 가솔을 숨겼느냐?”

황상이 엄한 목소리로 채윤직을 향해 꾸짖자, 그는 눈앞이 희게 세는 것을 느끼며 단숨에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목숨을 거두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일찍이 채윤직이 단죄를 받아 이곳 창천성으로 내려온 뒤, 황상이 몇 번이고 사자를 보내 채윤직의 아들 채영을 중경으로 부르겠다는 친서를 내렸던 일이 있었다. 채윤직을 곁에 둘 수 없다면 그 핏줄이라도 데리고 있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허나 그때마다 번번이 채윤직은 자신에게 아들은 오직 채영 하나뿐이며, 노인이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므로 적자로 하여금 곁을 지키게 하고 싶다는 이유로 번번이 사양하였다. 이는 채강이라는 또 다른 아들의 존재를 황상께 아뢰지 않은 것이므로, 거짓을 고했다고 하여도 틀리지 않은지라. 채윤직은 그저 덜덜 몸을 떨 뿐이었다.

“저자는 소매가 없는 채로 여기까지 온 모양이로군.”

입을 다문 채윤직에게는 더 이상의 답을 요구하지 않고, 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성벽을 타고 내려오는 채강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았다. 곧 땅에 발을 디디고 나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인, 이제라도 바른대로 고한다면 용서해 줄 것이야. 저자는 노인과 무슨 관계이냐.”

“……폐하, 신 채윤직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노인이 짐에게 거짓을 고하려 하는군.”

처음 산이 창천성 영주의 적자로 태어났을 때부터 채윤직은 그의 보좌로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걸음마부터 시작하여 글을 익히는 것도 모두 채윤직과 함께 하였으며, 천방지축 뛰쳐나가기에 바빴던 12세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부터 다시 몸을 뉘일 때까지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고로 산은 채윤직의 습관, 표정, 몸짓, 말투 모든 것을 꿰고 있었다. 눈알 돌아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 속내를 알아챘으며 말을 꺼내기 전 붙는 단어 몇 개만 듣더라도 변명을 하려는지 진실을 고하려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채윤직은 거짓을 자아 변명하려 하고 있다.

산은 몹시 진노하여 발아래 엎드린 채윤직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배신감이었다. 산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자가 다름 아닌 채윤직이었던 만큼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거라 자부하고 있었다.

한데 어찌 가솔이 딸린 줄도 몰랐단 말인가. 게다가 채윤직이 거짓을 고하려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였으니 산은 차라리 조정의 신료가 반역을 일으켰다고 해도 이와 같은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폐하, 죽여 주시옵소서.”

“허면 짐이 친히 저자가 누구인지 밝혀내야 바른대로 고할 것이냐!”

산이 우레와도 같이 소리치자, 성벽에 매달려 있던 채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고함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거진 나무에 가려 밑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아래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났으니 이렇게 들어갔다가는 들킬 수도 있음이라. 강은 어금니를 부득 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재수 없게 미친 자를 만나 멀쩡한 옷을 다 찢어 먹는 바람에 환복을 하러 들어왔더니만, 하필 사람이 가까이 있을 것이 다 무엇인가. 눈에 띄기 전에 어서 다시 벽을 기어 들키지 않도록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의 마음이 급해졌다.

“어, 어!”

꼭 제 키의 네 곱절 높이에 있었을 때였다. 넝쿨 줄기에 발을 걸쳐 올린 강은 체중을 싣고 조금 더 올라섰으나, 반대로 발이 아래로 쑥 꺼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였다. 이대로라면 반드시 들키게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죽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목구멍 틈에서 비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으아아아악!”

점점 땅이 가까워 온다. 강은 어떻게든 팔을 들어 머리를 감싸려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으으…….”

분명 머리가 깨졌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였으나 이상하리만치 고통이 없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기이하다 여기던 강은 이내 조심스레 눈을 떠 보았다. 바닥에 내려앉은 것은 맞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엉덩이며 다리며 고통스러운 곳이 없다. 오히려 보료 위에 내려앉은 듯 편안하기만 하였다.

“헉……!”

문득 밑을 내려다본 강은 그곳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몸을 튕기듯 일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보 떨어진 곳에서 채윤직이 핏줄이 다 터질 기세로 눈을 크게 뜨고 이곳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괘, 괜찮소?”

“아, 윽……! 그대를 받아 주려 하였는데 그리 뭉개면 어떡해?”

“미, 미안하오……. 고개를 들어 보시오, 다친 곳이 있는지 봐야 하지 않겠소?”

강이 어정쩡하게 다가가 손을 내미니 사내가 팔을 뻗어 강의 팔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강은 문득 어디서 많이 잡혀 본 악력이다 싶은 느낌에 등골이 서늘하여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잘도 나다녔군그래.”

“……이 미친놈이 왜 여기에 있어?”

“미친놈이라는 말은 거두는 것이 좋을걸.”

“절대 안 거둬.”

“참이냐?”

“그래, 이 미친놈!”

“후회할 것인데…….”

산이 의뭉스레 말끝을 흐리자, 강은 짜증스럽게 다시금 그 손을 뿌리치며 가까이 다가온 채윤직에게 소리쳤다.

“영주님, 이자를 포박하십시오. 아까 주막에서 만난 광증에 걸린 자인데 이 성을 침범하였으니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폐하!”

허나 채윤직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찌나 가관인지, 이번에는 채강이 실핏줄이 다 터질 것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수밖에 없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채윤직은 강으로 인해 옥체가 행여나 상했을까 하여 매우 우왕좌왕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산이 겨우 바닥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고 한 손을 들어 그것을 저지하였다.

“소문성은 부르지 마라. 그놈 호들갑 떠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아. 정신이 사납거든.”

하인을 부르는 채윤직을 막은 산은 몸에 묻은 흙이며 검댕 따위를 툭툭 털어 내었다.

“폐하, 이자는…….”

“노인.”

“예, 폐하.”

“난 쉬고 싶다. 방이나 뜨뜻하게 해 놓으라고 해.”

“……폐하.”

“내게 노인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잠시 노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나는 노인을 믿으니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어. 그리고…….”

말꼬리를 흐리며 산은 채강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 대역도당에 대해서는 내일 이야기해야겠어. 피곤해졌거든.”

*

“폐하, 그자의 이름은 채강이라 한다고 하옵니다.”

침상에 앉은 산의 발을 씻기던 소문성이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산은 장죽에 마른 잎을 꾹꾹 눌러 담던 손을 일순 멈추고 그에게 말없이 턱짓했다. 소문성이 몸을 일으켜 화로를 가까이에 옮겨다 주니, 산이 그곳에서 불씨를 장죽 끝에 옮겨 지폈다.

“그 성은 노인의 성이더냐.”

“예.”

“어찌 노인의 가솔인 자를 짐이 모를 수가 있느냐.”

“이상한 것은, 그자가 처음 나타난 것은 채윤직이 창천성으로 내려온 다음이라고 하옵니다.”

“그전에 그자를 본 자가 없단 말이냐.”

“예.”

산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채강이라는 자는 아무리 나이를 많이 쳐주어도 약관을 갓 넘긴 듯 앳된 청년이었다. 채윤직이 창천성에 내려온 것은 5년 전이니, 그 당시 채강은 소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은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채윤직의 가솔 중 소년을 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더욱이 강이라는 이름도 처음이었다.

“예로부터 채윤직 일가는 짐의 가문의 가신이었다. 한데 채강이라는 자는 짐더러 하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하였거든.”

태감은 산의 말에 일순 발을 씻기던 손을 멈추고 헛숨을 들이켰다. 어찌 황상에게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는가. 이 땅 위에 발붙이고 사는 백성이라면 누구든 산이 하늘의 뜻을 어찌 여기는지 모르는 이가 없다.

산은 금궐의 주인이 되기 전 모든 지역에 세워진 신궁과 사찰에 금줄을 걷어 내고 터에 쇠말뚝을 박아 기운을 막아 버린 것은 물론이요, 모든 신궁에서 거느리고 있는 천군이라는 병사와 사찰의 승병을 해산시켰다.

전란 당시 중경에 있던 대신궁에서는 연 제국의 마지막 적자를 위하여 천군을 내어 주었다. 게다가 산을 적으로 선포하여 대항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산은 그들을 “귀신을 숭배하는 무리”라고 규정한 뒤, 대신궁에 불을 질러 자신에게 반하는 모든 신관과 천군들을 멸절하였으니 그 갈등이 매우 첨예하였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산의 앞에서 하늘의 뜻을 논하지 않았다. 한데 채씨 가문의 사내가 공연한 자리에서 산의 그러한 행동을 비판하고 심지어는 벌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니 아니 충격적일 수 없었다.

“짐이 아는 채씨 가문의 사람 중 가장 유별나다는 소리다.”

“폐하, 어찌 그런 불경한 자가 있단 말씀이옵니까. 역모로 다스려야 할 줄 아옵니다.”

“그래서 채강이 노인과 대관절 어떤 사이인 것인지 알고 싶구나. 짐이 아는 노인은 결코 숨기지 않는다. 사람이든, 사실이든, 과거든.”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그리고 소문성.”

“예, 폐하.”

“해연관의 최 행수라는 자를 짐에게 데려오라.”

“지금 연통을 넣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문성이 움직이니, 산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장죽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최 행수라는 자가 처음 채윤직이 창천성 영주로 제수받아 내려왔을 때부터 곁을 지켰다고 하였으니, 어찌 알아질 것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산은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산만하게 두드리다가, 이내 문밖으로 나서려는 소문성을 불러 세웠다.

“데려오지 말고 그자에게 짐이 날이 밝거든 친히 해연관으로 가겠다고 전해라.”

“폐하, 어찌 그런 광영을 내리시는지요. 그자에게 들을 것이 있으시다면 그자더러 오라고 하실 일이옵니다.”

“주둥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

“……송구하옵니다.”

“잠이나 자야겠다. 명일은 좀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 빨리 자야 아침이 더 빨리 올 것 아니냐.”

이튿날, 산은 새벽같이 일어났다. 본디 잠이 많은지라 금궐에서도 소문성이 여러 번 기침하실 시각임을 고해야만 겨우 눈을 뜨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방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니 바깥에 입시해 있던 태감이 잰걸음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산은 느릿하게 하품하며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푸른빛을 잠시간 응시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인지라, 성을 빠져나가기에는 적절하였다.

“최 행수라는 자에게는 기별을 넣었더냐.”

“예, 폐하. 오늘 언제든 납실 것이라 일러두었사옵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지?”

“인시寅時3)이옵니다.”

“인시…….”

태감이 바깥에 손짓하여 소세할 물을 들이게 하니 산이 침상에 걸터앉아 그 물에 안면을 씻었다. 어제 자시가 지나서야 잠에 들었으니 그리 오래 침수에 든 것은 아니었다. 본래 북양으로 행행을 나온 것은 정무에 지친 옥체를 보전하시라는 신료들의 충언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금궐에서보다 더욱 바삐 지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수라는 어찌 하올까요.”

“짐이 해연관으로 가면 그자가 밥 한 끼 안 주겠느냐. 성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가자. 최 행수를 만났음을 알면 노인이 혼이 빠져 늙은 몸이 쇠할 것이야.”

새벽녘의 창천성은 고요했다.

성이 있는 중앙에서 좀 더 멀어지면 국경이 나오고, 그곳에서는 늘 소요가 있었다. 그러한 소란은 늘 창천성 백성들을 불안케 하였다. 허나 창 제국이 창건된 이후 국경 지역의 보위를 튼튼히 하기 시작하면서 창천성민들의 삶은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창천성을 떠나 있던 15년간, 이 땅은 매우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그 달라진 사이 채윤직이 몰래 가솔을 숨겼던가. 산은 등자에 얹은 발을 한 번 굴렀다. 어찌 화가 치미는지, 어제는 오랜만에 만난 노인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지 않아 가까스로 참았으나 자꾸 그 괘씸한 속내에 배신감이 이는 것이다.

채강이라는 자가 채윤직과 진실로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어렴풋이 조카나 먼 친척쯤으로 예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자가 그림에 그리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고. 산이 그림에 환장하고 달려드는 것을 채윤직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일언반구가 없었던 것은 작정하고 숨기려는 뜻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증거가 바로 산이 창천성에 들자 몰래 채강을 내보낸 것이었고 말이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됐다.”

산은 쯧, 혀를 차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해연관 벽을 따라 이어진 청사초롱이 아직도 꺼지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을 보면 최 행수라는 자가 아직 깨어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변방 기방의 주인 따위가 황상이 직접 납시겠다는데 어느 배짱으로 잠을 자겠는가. 산은 코웃음과 같은 소리를 내었다.

“아이고, 나으리.”

대문을 열자마자 일찍이 산이 귀걸이를 내어 주었던 수습 하인이 잰걸음으로 걸어와 허리를 굽실거렸다.

“넌 아직도 잠을 안 자고 있었느냐?”

“예. 아직 손님들이 다 가시지 않아서요. 일전에 말을 두고 가셨는데, 그것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천한 자가 감히 황상의 앞에 나아가 말을 붙이니, 태감이 무엄하다 꾸짖으려 하였으나 산이 은근히 이를 막으며 대꾸하였다.

“그것도 그렇고. 너희 행수를 만나러 왔다. 산이 왔다고 하면 알아서 할 것이니 가서 전해라.”

“예, 나으리.”

하인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났다. 산적같이 집채만 한 사내가 혼비백산하여 회랑을 따라 뛰어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산은 팔짱을 낀 채로 행수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대청마루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최 행수가 섬돌에 놓인 신을 다 신지도 못한 채로 돌계단을 허겁지겁 내려왔다. 그리고 산이 서 있는 앞마당으로 내려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동네방네 내가 누군지 소문낼 일 있더냐. 재게 일어나 아랫것들 입단속이나 시켜라.”

“송구하옵니다.”

산은 잠시 등 뒤를 흘끗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친근하게 말을 붙였던 하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눈이 마주치자 쿵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 이건 좀 맛있는데.”

방에 들자마자 산이 한 일은 아침 수라를 드는 것이었는데, 어찌나 상다리가 휘도록 대령을 하였는지 산은 오히려 금궐보다 더하다는 생각을 하는 지경이었다. 일전 객으로 이곳에 왔을 때도 변방치고는 꽤 진수성찬이라 생각하였는데, 오늘 받은 이 상과 비하자면 간장 종지에 밥 한 그릇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예전에 노인은 내가 고기만 먹는다고 잔소리를 하였거든. 풀은 쓰고, 맛도 없고, 식감도 나쁘고 하여 가려 먹었는데. 그러면 건강을 해친다고 성화였어. 만일 예전에도 이런 찬이 나왔더라면 풀도 맛있게 먹었을 텐데.”

황상이 조반을 젓수는 동안 최 행수는 장지문 너머에 엎드린 채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 황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고, 그 황상이 자신의 기방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상상조차 한 일이 없었다.

산은 입안에 넣었던 고기 한 점을 끝까지 씹어 삼키며 의미 없이 물었다.

“최 행수라고 하였던가.”

“예, 폐하.”

“왜 그리 떨고 있지. 짐에게 잘못이라도 했느냐?”

“아, 아니옵니다! 폐하, 소인 진실로 그런 일이 없사옵니다.”

“농이다.”

시종 황상이 살 떨리는 농만 해 대니, 최 행수는 오금이 저려 빙판과 불구덩이를 번갈아 가며 오가는 느낌이었다.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더니, 산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곁에 놓인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이곳까지 부러 왕림하신 것으로 보아 분명 은밀히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었으나, 그것이 무엇일지 조금도 예상이 가지 않았다. 최 행수는 처음 기별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제 드디어 말씀하시려는가, 하고 생각하니 산이 팔걸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남령초를 피우고 싶어졌어.”

“속히 화로를 대령케 하겠나이다.”

이내 화로가 들어오니, 산이 습관처럼 쥐고 있던 장죽을 그 안에 넣어 불씨를 옮겼다.

“짐이 너에게 물을 말이 있어 왔다.”

“하문하소서.”

“노인이 창천성 영주로 제수받았을 때부터 곁을 지켰다고 하였지.”

“그러하옵니다.”

“허면 모르는 것이 없겠군.”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사오나, 아는 바가 많은 것은 사실이옵니다.”

최 행수는 황상의 말에 문득, 예전부터 갖고 있던 궁금증을 어쩌면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땅 창천성. 그리고 개국공신임에도 지위를 박탈당했던 채윤직.

죄를 지은 채윤직을 변방이라 할지라도 황상의 연고지로 전송한 이유와, 중경에서 머나먼 이곳까지 직접 납신 까닭을 알고 싶어서 속이 근질거리던 차였다.

감히 그 누구에게도 직접 물을 수는 없었으니 평생 알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최 행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을 기다렸다.

“노인은 짐이 젖먹이 시절부터 함께 지냈었거든. 짐이 영주일 때부터, 아니 훨씬 전부터 집안의 가신이었다.”

“예, 폐하.”

“그래서 짐이 노인의 가솔에 대하여 모르는 바가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작일 참으로 이상한 자를 보았느니라.”

산이 말을 멈추자, 최 행수는 일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채영의 존재를 모르실 리 없으니 분명 채강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채강의 출신 성분에 대하여 최 행수가 아는 바가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지금 그 사실을 모두에게 비밀에 부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말을 꺼내도 되는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는 대로 고하라.”

“……폐하, 어떤 자를 이르시는지 알려 주시면,”

“감히 짐을 능멸하느냐.”

“…….”

이미 모두 알고 왔다는 듯 압박하는 말에, 최 행수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었다. 최 행수 역시 바른대로 고하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이 가벼이 혀를 놀렸을 때 벌어질 일들이 조금도 예상되지 않으니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황상 가까이에 앉아 있던 소문성이 최 행수를 향하여 엄하게 꾸짖었다. 대관절 어찌 되려 이러는가. 채강이 무엇이기에 황상이 친히 그 존재에 대하여 묻는 것이며, 채윤직은 어쩌자고 이를 숨긴 것인가.

일찍이 채윤직이 채강의 출신 성분을 거짓으로 알렸을 때 최 행수는 이것이 단순히 먼저 간 조강지처를 볼 낯이 없어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행수는 침음하며 그저 이마를 바닥에 댄 채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산은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며 최 행수가 입을 열기까지 아무런 다그침 없이 그저 기다리려는 듯 보였다.

“폐하, 죽여 주시옵소서.”

“너희들은 참으로 이상하구나. 짐이 심심하면 사람이나 죽이는 자로 보이는 것이냐. 어찌 말끝마다 죽여 달라, 죽여 달라 하느냐.”

“…….”

“다시 알기 쉽게 말해 주지. 아는 대로 고하라 하였느니.”

산의 호령에 최 행수는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그가 채윤직과 맺은 인연이 벌써 5년째이고, 채윤직은 참으로 존경할 만한 어른이었다. 하여, 자진해서 살림을 꾸리는 것을 돕고 정보망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물론, 창천성에 기반을 둔 장사꾼으로서 영주에게 잘 보여 나쁠 것이 없다는 계산도 있었다. 만일 최 행수가 당장의 두려움으로 채강이 채윤직의 서자임을 고하면, 분명 어떠한 일이 벌어질 터였다.

문제는 최 행수는 앞으로도 계속 창천성에 남아 채윤직 곁에 있을 것이며, 황상은 곧 중경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사실이었다. 최 행수는 고민하였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 하는 것이 더 목숨 보전하기에 나은 것인가.

“폐하, 소인은 아는 바가 없나이다…….”

결국 최 행수가 내린 결론은 함구하는 것이었다. 산은 일순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장죽을 한 번 느릿하게 빨았다가 연기를 뱉어 내었다.

최 행수는 고개를 들지 않아 용안이 어떠한지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있었다. 황상은 분명 진노할 터였다.

“아는 바가 없다?”

산이 웃음을 머금은 채 되물었다. 최 행수는 손에 땀을 쥐었다. 최 행수는 채강이 채윤직의 서자임을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따라서 최 행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끝까지 잡아떼면 황상도 어쩔 도리가 없을 터였다.

“충성심이 대단한 자로군.”

“…….”

“네가 노인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산이 꽤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하자, 최 행수는 참았던 숨을 겨우 몰아쉬며 안도하였다. 어쩌면 황상이 이것을 물은 것은 최 행수가 진실로 채윤직의 곁을 지켜도 되는 자인지 확인하기 위함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러한 말이 결국 최 행수가 알면서도 함구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그는 아직도 두려움을 떨쳐 내지 못했다.

“한데.”

“…….”

“그 충정이 짐에게는 향하지 않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최 행수는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황상은 채강이 채윤직의 서자임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로 창천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전국시대를 진압한 자다. 첫 만남 때 실없는 이로 보이기는 하였어도, 분명 범골凡骨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 그러한 위업을 달성하였을 터였다. 모략과 배신이 판치는 권세의 중심에 선 자이니 분명 최 행수가 헤아리지 못한 한 치가 있을 것이 자명하였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관자놀이에서 땀이 맺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저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어차피 황상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채강은 채윤직의 수양아들 같은 존재이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고하기보다는 널리 알려진 내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 행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중에 어느 입에서든 그 비밀이 새어 나갔더라도 까맣게 몰랐던 체를 하면 무탈하리라.

“그래서.”

“연고는 알지 못하오나, 채강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어 채윤직이 가까이 두고 창천성 살림을 돕게 하였사옵니다. 5년 전에 갑자기 나타났기에 소인도 아는 바가 많이는 없사옵니다.”

“신통한 능력이라 함은 무엇이냐.”

“한 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으니, 일찍이 중요한 문서를 모두 읽게 하였사옵고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도 지척에서 보는 것과 같은 천리안을 지녔사옵니다. 또 그림과 서예에 능통하여 꽃을 그리면 그 위에 나비가 앉고, 벌레를 그리면 닭이 종이를 쪼아 대니 신통하다고 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림에 능한 것은 이미 보아 알았으나, 한 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거나 천리안을 지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찰나, 산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수양아들이라. 허면 피는 섞이지 않았다는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네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으렷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리까.”

산은 잠시 엎드린 최 행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실 산은 채강이 채윤직의 피가 섞였든, 섞이지 아니하였든 그것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채윤직이 채강을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보고를 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숨기려고까지 한 점에 진노하였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채윤직이 왜 산에게 채강의 존재를 숨겼던지. 그리고 그 숨긴 이유가 단순히 인재를 뺏기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산은 채강과 같은 사람을 알고 있었다.

“소문성.”

“예, 폐하.”

“가자.”

산이 이윽고 장죽에 남은 마른 잎을 화로에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최 행수는 그들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저 멀리 희미해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그저 그렇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해연관에서 다시 성으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떠 있었다. 일찍이 황상의 앞을 막았던 문지기 놈은 교대가 끝난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이제 문 앞에 서 있는 문지기는 연락을 받은 모양인지 예를 갖추어 문을 열었다.

“폐하, 북양에는 언제 돌아가실 것인지요. 명화궁이 회임을 한지라, 폐하께서 사라진 것을 알면 크게 놀랄까 저어되옵니다.”

말을 마구간에 넣어 두고 방으로 돌아가며 소문성이 조심스레 아뢰자, 산이 못마땅한 듯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소문성이 그 시선에 놀라 급히 머리를 조아리니, 산은 한숨을 쉬며 가까이에 있는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폐하! 어찌 이런 곳에…….”

“너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바라던 배가 아니라 한들 명화궁의 회임은 창 제국의 창건 이래 처음 있는 경사였다. 복중 태아가 황자이든, 황녀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일찍이 산이 정벌 전쟁을 다니며 십수 년을 지낼 적에 결단코 내자를 맞이하지 않았고, 심지어 후궁을 들인 것도 토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었다. 신료들은 지존이 후사를 보지 않으려 하는 줄로 알고 심히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산이 여색이든 남색이든 가리지 않고 즐기니 후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던 일부 신료들은 한동안 산이 침전에 미동을 들이고 후궁들을 멀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던 차였다. 그런 와중 갑작스레 명화궁에서 회임 소식이 들려오니 어찌 아니 경사겠는가.

허나 문제는 명화궁이 가장 권세가 높은 가문의 여식이라는 점이었고, 외척의 발생을 누구보다 꺼리는 산이 이를 반가이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희비가 북양에 따라온 것부터가 문제다.”

산은 난세를 제압하겠다 처음 선포한 이래, 창천성에서부터 중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지들을 밟고 지나왔다. 그때 일찍이 산에게 천기가 있음을 알고 투항하여 군사를 내어 준 자가 명화궁 희비의 아비인 유 승상이었다.

그의 임관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유 승상은 개국공신 중에서도 으뜸에 속하였으며 재빠르게 황제에게 납녀納女하였다. 내명부에 들리는 풍문으로는 희비가 해산을 하고 나면 황후 봉작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였으니 그 위세를 알 만하다.

아버지의 권세, 복중의 아기씨. 그리고 명실상부 최고 총궁이라는 그녀의 수식어는 충분히 내명부를 장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도 폐하께서는 희비를 가장 총애하지 않으셨는지요.”

“무엄한 놈. 감히 참견을 하려 드느냐.”

산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소문성이 급히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산이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는 재빨리 사죄해야 하는 법이다.

“희비가 난을 치는 솜씨가 괜찮았지. 글씨도 제법이고……. 아양 떠는 것도 뭐, 봐 줄 만하였지. 한데 내 더 단맛을 본지라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단 줄도 모를 것이야.”

산의 머릿속에는 온통 채강의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저 그림만 잘 그리는 줄로 알았더니, 서예에 능하고 심지어는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는 능력에 천리안까지. 게다가 그자가 채윤직의 수양아들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채윤직은 옛날부터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으니 말이다.

채윤직이 어찌 채강을 숨기려 들었는지는 알겠다. 허나 그럴 것이라면 영원히 들키지 말았어야지, 이미 눈에 든 이상 아니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환쟁이기만 했다면 노인에게 경의를 담아 기꺼이 모른 체 넘어가 주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여타 능력이 심히 아까워 중경으로 못 데려가거든 차라리 죽이고 싶기까지 하였다. 만일 그런 자가 불온한 이의 손에 떨어진다면 그보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고 말이다.

“폐하, 그 채강이라는 자를 중경으로 데리고 가시려 하시옵니까?”

“그래. 그자에게 어떤 자리를 내주는 것이 좋을까. 그림을 썩 잘 그리니 도화청에 넣을까 싶다가도 도화청은 금궐과 멀어 자주 불러 보기 귀찮을 것 같고. 노인이 그자에게 서고의 글을 읽게 하였다 하니 짐도 헌문전의 검서관을 시킬까 싶기도 하고. 그자의 재주가 워낙 많으니 어떤 것을 내주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온건히 데려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과연 어찌 될는지…….”

채강의 생각으로 반나절을 꼬박 지냈던 산은, 오늘따라 채윤직이 심히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어젯밤 산이 채윤직에게 경을 쳤던 것을 생각하면 그 노인 충심이 두텁고 주인 모시기를 하늘같이 하는 자라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죄를 받아도 모자라다 생각했어도 과함이 없었다. 산은 잠시 턱 끝을 문지르다가 무르팍을 내리치며 태감에게 소리쳤다.

“소문성! 채강이라는 자를 데려오라.”

“예, 폐하.”

“문방사우도 같이. 글씨를 잘 쓴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대단한지 내 눈으로 봐야겠어.”

한편, 방에 근신하듯 앉아 있던 강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저 때문에 아버지가 곤욕을 치를까 싶어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차라리 산이 괘씸죄로 물고를 낼 위인임이 확실하다면 어찌 구할까 궁리라도 하겠으나, 도저히 어떤 자인지 알 길이 없었다.

밤새 채윤직에게 의견을 구하더라도, “나는 평생 폐하의 속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말만 거듭할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주막에서 황상의 면전인 줄은 꿈에도 몰라 그리 한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대역도당으로 치부되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의 망발을 하였다. 그런데도 재미있는 자라는 말을 들었으며, 시종 미친놈이라며 험언을 하였음에도 허허실실대는 모습이 그리 권위를 앞세우는 자는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가도 대뜸 처음 보는 이를 두고 이런저런 설명도 없이 중경으로 데려가겠다, 왜 설득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모양새를 보면 고압적인 면모도 있는 듯 보였다.

“아버지께선 어찌 그런 분을 주군으로 모셨습니까?”

채강은 결국 방에서 뛰쳐나와 채윤직에게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어허. 어찌 그런 불충한 말을 하는 게야.”

“없는 데선 나라님 욕도 하는 겁니다. 이 어른 정말 참, 황상과 수십 년을 함께 하신 아버지이신데 어찌 그 속도 모르시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 하였다. 범인조차 그럴진대 어찌 폐하의 의중을 읽겠느냐. 허나 강아, 걱정 마라. 내 너를 결코 중경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니 너는 창천성에서 남은 시간을 지내고 돌아가도록 해라.”

“아버지. 제가 남은 시간을 반드시 창천성에서 보내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

“중경에서 시간을 지내고 가더라도 괜찮습니다. 전 그래서 아버지를 곤경에 처하게 하면서까지 창천성에 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분명 중경에 가면 제 흥미를 끌 만한 것들도 있을 테니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겠지요. 다만 제가 밤을 지새운 뜻은 황상을 따라가든, 따라가지 않든지 간에 아버지께 어떠한 사달이라도 날까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천한 여인인 제 몸 어미를 거두어 주시고 끝내 함구해 주신 은혜만 해도 갚지 못할 지경인데, 어찌 폐까지 끼치겠습니까.”

“강아,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네 존재를 숨긴 것은 나의 의지였으니 이는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아뇨. 아버지께선 제가 황상에게 존재를 들키면 중경으로 부름을 받을 것이며, 그리되면 제 출신 성분이 알려지는 것이 시간문제이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황상은 신적神敵입니다. 하늘 사람인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그것을 저어하여 숨겨 주신 것이 아닌지요. 이 변방 땅에서 그리 그리시던 주군에게 거짓을 고하시면서까지요.”

5년 전, 채윤직이 조정에서 관직을 박탈당하고 창천성으로 돌아왔을 적이었다.

내려온 지 고작 3일 만에 변경지역에서 큰 소요가 한 번 일었는데, 이날 강의 어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채강의 어미는 유목민의 딸이었으나, 소란 중에 가족과 헤어져 이곳저곳 흘러 다니는 신세였다. 다만 수태를 한지라 움직임이 둔하여 종래에는 덤불 사이에서 잠들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일어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복중에 태아가 있으므로 굶을 수는 없어 가까스로 풀뿌리를 캐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것이 배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날도 채강의 어미는 흙먼지를 삼키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풀숲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곧 산달이 가까워 오므로 몸은 갈수록 무거워졌고, 계속되는 이동으로 날마다 얼굴이 수척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복중 태아와 함께 숨을 거두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무렵, 우연히 인근을 시찰하던 채윤직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오랑캐의 핏줄이었으므로, 창 제국의 관리인 채윤직에게 죽임을 당할 줄로 알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허나 다행히, 채윤직은 10년을 거듭하여 누볐던 전장에서 살육을 저지른 것에 큰 회의와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그녀를 해하지 않고 마차에 태워 창천성으로 데리고 왔다. 그녀의 부른 배 안에서 태동하고 있는 아이에 대한 연민이 가장 크기도 하였다.

채윤직은 일찍이 전장을 누비며 조강지처가 병으로 죽어 가는 줄도 몰랐던 것에 대한 후회로 결코 후처를 들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여인에게 방을 내주고 번번이 들여다보며 안녕을 살폈다. 의원을 불러 여인을 진찰케 하고, 몸에 좋은 것을 지어 먹이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녀는 처음 발견되었을 때보다는 몸이 좋아졌으나 그럼에도 범인에 견주자면 그리 건강한 육신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시간이 흘러 해산을 앞둔 여인은 은밀히 채윤직을 불렀다. 곁에 있던 산파를 물리게 하고 오로지 채윤직에게만 전할 말이 있다고 하니, 채윤직은 어쩌면 이 여인이 해산을 하고 나서 숨을 거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즉 유언이 아닐까 싶었기에 꽤 염려스러웠다. 허나, 그 여인에게서 나온 말이 몹시 기상천외했다.

‘저는 지아비가 없는 처녀입니다. 복중의 태아는 하늘의 자손입니다. 하늘이 제게 아이를 내려 주었고, 제 태를 빌려 세상에 나오게 하였으니 이 아이는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이 아이를 키우시면 훗날 크게 보답 받으실 일이 있을 터이니, 바라건대 내치지 마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말이 끝난 뒤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해산을 시작하였고, 바깥에 입시해 있던 산파가 달려 들어오며 채윤직을 내쫓았다. 채윤직은 그러면서도 여인의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하였고, 참인지 거짓인지도 판단할 수 없어 그저 착잡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방 안에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순산을 하였구나 생각하며 섬돌을 뛰어올랐는데 뒤이어 산파들의 입에서 기기괴괴한 탄성이 터져 나오는지라.

‘아이에게 이가 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유치가 자라 있었다.

여인은 그 아이를 한 번 안아 보고는 이내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곧바로 숨을 거두었으며, 하늘의 자손이라던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새근새근 그 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채윤직은 은밀히 여인을 장사 지내게 하고, 그 아이를 강이라고 이름하며 자신의 성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성의 후미진 곳에 있는 방에서 키웠다. 그는 하루에 한 번씩 그 방으로 가 아이를 들여다보았는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난 지 7일째 되는 날에는 말을 하였고 1달이 되었을 때에는 뛰어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년째 되었을 때에는 마치 성년과도 같이 자라 채윤직에게 이리 말하였다.

‘저는 하늘의 자손인데, 일찍이 죄를 짓고 홍진에서 8년을 지내는 벌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이곳에 남는 동안 당신을 아버지처럼 모시고자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채윤직이 대관절 무슨 죄를 지어 이곳까지 왔느냐고 물으니 채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하늘에서 있었던 일이 어느 것 하나 기억나지 않으니 이는 홍진에서 헛되이 위 세상의 말을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다. 채윤직은 자신이 본 것이 있기에 차마 이 아이가 거짓을 말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다만, 신적이라 불린 산의 신하로 평생을 보낸 그였으므로 어쩌면 이 아이는 하늘에서 채윤직에게 업으로 삼으라고 내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천인이라는 자들은 기실 뜬구름과도 같은 존재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신이한 것을 보면 하늘의 뜻이다, 신이한 능력을 쓰는 자를 보면 하늘의 사자다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사람들이 서한의 동방삭을 두고 신선이라고 생각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전해지는 것처럼, 제대로 본 것은 없더라도 사람들은 막연히 천인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고 유추했다.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는 이도 있었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강은 제 능력에 대하여 지극한 측근의 앞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숨겨 왔다.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이 천인임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요, 어쩌면 그저 평범한 사람임에도 그러한 이능을 지닌 이들이 있을 수도 있을진대, 작은 의심을 받는 것조차 신적인 황상의 치하에서는 위험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대신 채강은 창천성의 일에 제 능력을 이용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능력을 쓴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제가 가진 능력으로 채윤직에게 보은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였다.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는 비망非忘의 능력으로 일의 능률을 올려 편안케 하였으며,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천리안으로 변경 지방에서 환란이 일어나지 않는지 감시하였다.

그리고.

“황상은 제가 그림을 썩 잘 그리는 환쟁이인 줄로만 알 것이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강아, 그뿐이 아니란다. 너는 네게 비망의 능력이 있다는 것도, 천리안이 있다는 것도 모두 숨겨야 한다. 그 두 능력이 있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말이야. 너는 이 창천성에서 네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자유로이 살았는데 그런 것이 가능하겠느냐.”

“제가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림을 그리라 하면 그리고, 글씨를 쓰라 하면 쓰면 되는 것을요. 시키는 일만 하면 제 능력을 보일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숨겨 주시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저는 죄를 씻으러 왔다가 도로 죄를 짓고 가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황상이 채강을 처음 보자마자 중경으로 데리고 갈 궁리를 하였기에, 채윤직은 이미 들킨 이상 속절없이 내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야 말았다. 허나 채윤직이 걱정인 것은 산이 채강을 대관절 어찌 쓰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그림 때문이라면 참 좋겠으나, 그 속 누가 알까. 어느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마음 편히 내어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찌 채윤직이 눈물로 호소하면 옛정을 보아 놓아줄지도 모르겠으나, 채강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영주님.

어느 정도 결심을 굳힌 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바깥에서 소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윤직이 혼비백산하여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여니, 소문성이 조심스레 들어와 황상의 뜻을 전하였다.

“폐하께서 이자를 데려오라 하십니다.”

“안내해 주십시오.”

그리고 채윤직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강은 소문성의 뒤를 따라나섰다.

사실, 산이 그리 성품이 잔인한 자도 아니었고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패악을 부리는 이도 아니었다. 허나 어찌 저리 철딱서니가 없을까 싶을 정도로 가벼이 보이다가도, 이따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몇 수 앞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기도 하였기에 제아무리 오래 모셨던 채윤직이라고 한들 그 속을 알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채윤직은 대관절 산이 왜 강을 그리 탐내는지 그 내력을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도 어쩌면 다른 속내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채윤직은 앓는 소리를 내며 강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만일 산이 강의 출신 성분을 알게 되면 필경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폐하를 뵙거든 예를 갖추고 고개를 마음대로 들어서는 아니 되네. 일어나라고 하시거든 몸을 일으키되, 역시 고개를 들지 말게. 말을 하기 전에는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라고 할 것이며 질문을 하지 말고 하문하시는 것에만 대답하게.”

황상이 계신 방으로 향하며 소문성이 강에게 나직하게 말하였다. 강은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강에게 사바세계의 황제라는 자는 그리 어려운 존재는 아니었다. 만일 채윤직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꼬리 내리지 않고 대거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창천성은 황상의 땅이며, 창천성에 아버지가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굽혀야 했다. 강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앞서가는 소문성을 노려보았다.

“폐하, 채강이라는 자를 데려왔습니다.”

─일일이 아뢰지 말고 재게 들여라.

방 안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니, 태감이 문을 열며 강에게 눈짓하였다. 강은 태감을 흘끗 쳐다보고는 이내 안으로 들었다. 그리고 일러둔 대로 고개를 숙인 채로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강은 일어나라는 말을 기다렸다. 허나 아무런 음성도 들려오지 않으니 내심,

‘저자가 지난밤의 일로 단단히 골이 난 게로군. 졸렬하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마를 바닥에 댄 채로 한참을 있으니, 강은 이제 짜증이 치밀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치졸한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더니, 상상 이상으로 속이 좁다.

그렇게 한참 속으로 씨근덕대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처음에는 그저 입안에서 공기가 새는 수준이었던 그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박장대소로 번졌다. 한참을 그리 웃다가 이내는 숨이 차는지 끅끅대니 강은 이제 기분이 상해 바닥을 짚은 주먹을 꽉 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창천성이며, 멀지 않은 곳에 채윤직이 있으니 더 참아야 한다. 강은 그리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 하는 거야? 누가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었어?”

“태감이…….”

“그놈이 공연한 짓을 했어. 그만하고 일어나.”

“예.”

간밤에 갖은 욕설을 내뱉으며 면전에 대고 비난을 하던 이가 하루아침에 부복한 채로 조신한 말을 하니, 산의 입장에서는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였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가. 뭐, 어찌 되었든 상관은 없었다.

“저기 앉아.”

“어젯밤, 아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젯밤…….”

“귀찮은 말들은 다 떼고 말해라. 듣기에 답답하니까.”

“예. 그러면, 어젯밤에 월담하다 본의 아니게 깔아뭉개 송구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과가 참 빠른데.”

“그때는 몹시 당황하였고, 영주님께서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니 소인도 같이 그리되어 틈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치지는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조금 허리가 결리는 느낌이기도 한데…….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그대가 나를 깔아뭉갠 다음부터 그랬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단 말야.”

저 말은 즉, 너 때문에 옥체가 상하였으니 대죄를 지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 같아 강은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과연 황상의 몸에는 멋대로 손을 대어서도 아니 되며, 심지어는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것조차 용인되지 않는데 엉덩이로 뭉개기까지 하였으니 그 죗값을 어찌 다 받는다고 할까. 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금궐로 돌아가서 태의한테 침을 좀 놔 달라고 하지, 뭐.”

“……송구합니다.”

“아니,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송구할 것까지야. 그대는 몸으로 지은 죄보다는 그 입으로 지은 죄가 더 많지 않아. 난 그때 처음 봤다니까. 뒤에서 그리 나를 욕하는 자가 있을 줄로는 알고 있었는데, 면전에 대고. 대단해. 그대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자치고는 매우 어투가 심드렁하다. 산은 그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감히 황상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산은 턱을 괴며 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랑 중경에 함께 갈 것이냐, 안 갈 것이냐.”

“소인을 데리고 가시겠다면 가야겠지요.”

“그대는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없구나. 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계집이든, 관직이든, 재물이든 다 줄 수 있다는데. 나를 따라서 중경으로 가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인데, 그리 탐탁지 않은 안면을 보니 영 보람이 없어.”

“앞서 아뢴 것과 같이 소인은 계집에도, 관직에도, 재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에 관심이 있는데?”

“……영주 채윤직이 안전히 여생을 보내는 것에 가장 관심이 많습니다.”

산은 그 말에 일순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저자는 지금 황상더러 나를 데려가는 대신 채윤직이 자신을 숨긴 죄를 덮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산은 헛웃음을 지으며 화로에 손을 뻗었다.

장죽을 건지고 그 안에 불씨를 옮겨 붙이니, 강의 시선이 그 손을 좇는다.

“그대는 내가 노인을 어찌 생각한다고 여기지?”

“채윤직은 폐하의 신하 되는 자이니, 폐하께서도 영주를 신뢰하시고 아끼실 것이라 여깁니다.”

“그리 알고 있으면서 어찌 내가 노인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 대는 것이냐?”

강은 그 말에 잠시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 아뢴 적 없습니다.”

“그리 아뢰지는 않았어도 그리 생각하고는 있다는 뜻인가?”

의표를 찔린 듯 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실로 그러하였다. 제 방정스러운 주둥이로 직접 황상더러 객이 들어 쫓겨났다고 말을 하였다. 이는 채윤직이 일부러 황상에게 강을 보이지 않으려고 내보냈다는 뜻이 되었다.

“내가 수양아들을 숨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노인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 대었느냐고 물었어.”

그리 집어 ‘수양아들’이라고 말하니, 강은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었다. 강과 채윤직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아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창천성 안에서 일하는 자라면 누구든 성씨가 같으니 먼 친척쯤으로 예상할 것이나 단 한 번도 공연히 호부호자呼父呼子한 적이 없었기도 했다. 한데 황상이 어찌 알고 수양아들임을 확신한단 말인가.

“놀란 눈치로군. 그리고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양아들이 맞긴 한 모양이야.”

“…….”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강의 존재를 숨긴 것만이 아니었다. 일찍이 황상이 창천성으로 직접 친서를 보내 아들을 중경으로 올리라 몇 번이고 명하였을 때 채윤직이 번번이 아들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이유로 들어 거절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적자를 곁에 두지 못할 것이 걱정된다면 마땅히 수양아들을 불러올렸을 것이다. 한데 수양아들의 존재를 숨기고 아들은 오직 하나뿐이라며 거짓을 고했으니, 이는 명명백백한 불충이었다.

“노인이라면 어떤 이유가 있어 그리했을 것이라 생각하거든. 해서 그리 화가 나지는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한데 이제 그 이유를 너무 알고 싶은 것이 문제란 말이지.”

채강은 입을 다물었다. 결단코 말할 수 없다. 이제 사바세계에서 5년을 보냈다. 3년만 더 지내면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 만일 산에게 자신의 내력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힘겹게 지냈던 5년이 말짱 도루묵이 되므로, 적어도 3년 동안은 결코 들켜서는 아니 되었다. 강이 입을 굳게 다물자, 산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장죽을 입에 물었다.

“하지만 그대 그림 그리는 솜씨가 내 마음에 차면 이것도 모른 체 넘어가 주겠어.”

그렇게 말하며, 산이 탁상 위에 놓인 지필묵을 향해 턱짓했다.

강은 마른침을 삼키며 붓을 들어 올렸다. 벼루에는 이미 먹이 충분히 갈린 채로 고여 있었다. 강은 화선지를 한 번, 붓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붓을 화선지 위로 놀리기 시작하였다. 처음 한 획은 중간을 가로질렀다.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 아래에서 하늘이 열리고 산이 솟았다.

산 역시 나름대로는 그림을 그려 봤다는 자로,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그쪽으로 방면을 텄더라면 화원이 되고도 남을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즐기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지라, 스스로 그리는 것보다는 남의 것을 보는 것을 더 낙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도화청의 화원이든, 명화궁이든 제 앞에서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그 과정을 지켜본 일이 많았는데 채강 같은 자는 근자에 보지 못하였다.

산은 턱을 괸 채 뚫어지게 그 손끝을 바라보았다. 먹을 다루는 것도 여간내기가 아닌 것이, 붓을 여러 개 쓰는 것도 아닐진대 일필휘지로 긋는 동안 절로 붓끝이 오므라들고 퍼지기라도 하는 듯이 굵기의 변화가 무쌍하였다. 그저 결과물만 놓고 보았어도 대단타 여겼을 것이나, 이리 그리는 모든 과정을 보고 있으니 입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요 눈이 크게 뜨이는지라.

속에서 이자를 금궐로 데려가겠다는 욕망에 불이라도 싸지른 양 눈앞이 뜨거워졌다.

산은 침상에서 일어나 단숨에 강이 앉아 있는 탁상으로 다가갔다. 강은 산이 그리 달려든 줄도 모르고 붓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저런 집중력으로 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라. 산은 어찌 진작 이자를 만나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웠다. 근자에 금궐에서 보았던 그림들은 정녕 그림이 아니라고 하여도 좋을 정도로 머릿속이 희게 비는 느낌이었다.

산은 붓을 내려놓은 강의 뒤로 다가갔다. 강이 그를 향해 그림을 돌려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내다보았다. 이리 보고 있으니 훔쳐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산은 강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조금 더 앞으로 빼었다. 그리고 탄성과도 같은 신음을 내며 말하였다.

“어찌 이것을 사람의 솜씨라고 하지?”

이는 아마 재능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뜻이겠으나, 그 말에 강은 크게 놀라 오금이 저리는 듯하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신적이라 불리는 사내이니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 무슨 사연으로 그대의 존재를 숨겼는지 노인에게 추궁하지 않겠어.”

산의 말에 강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가 얼마나 신의를 지킬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지존 된 자로 허투루 말하지는 않을 것 같아 우선은 믿어 보기로 하였다. 산은 붙잡고 있던 강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다시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말야, 내가 그대를 중경으로 데려가 곁에 두려면 어떤 관직을 주어야 할 것 같거든.”

“소인은 관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도 없다. 그래도 명분이 있어야 곁에 둘 것 아니겠어. 그래서 도화청으로 보낼까도 하였는데, 도화청은 금궐과 조금 멀어서 자주 불러 보기가 불편해. 헌문전에 자리를 내어 줄까도 생각하였지만, 법도 운운하는 것이 귀 따가워서 그대도 버티지 못할 거야.”

“상관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어느 자리라도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

“예.”

어차피 중경에서 3년이 지나고 나면 이 붉은 먼지 휘날리는 사바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떠날 곳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지라, 그 어떤 설움을 당하더라도 그네들이 살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는 것이라 치부하고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헌문전이든, 도화청이든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강은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며 목숨이나 부지하고 있을 작정이었다. 어차피 황제에게 이따금 그림이나 그려 바치는 것만이 강의 임무가 될 것이니.

“소문성!”

산이 팔걸이에 걸친 팔을 뻗어 장죽을 낚아채었다. 그리고 화로를 몇 번 댕댕 두드렸다. 그러자 바깥에 시립해 있던 소문성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예, 폐하.”

“이자를 거세해라. 환관으로 삼아야겠다.”

“……예?”

채강은 기겁에 질겁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며 산의 안면을 살피니 도저히 의중을 알 수가 없다.

‘미친 자다. 광증이 있는 자야.’

아무리 사바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한들 이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거세라는 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양물을 잘라내라는 뜻이다. 이에 수반되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는 사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생살을 칼로 도려내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10년이 넘도록 전장을 누빈 산이 더 잘 알 것인데, 어찌 마음대로 타인의 성기를 잘라내라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내 남색에도 취미가 있으니 가까이 두고 침전에 들여야겠어.”

산이 한마디 더 보태니 강은 눈앞이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저자를 따라 중경으로 가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이거늘, 이제는 밤 시중까지 들게 하겠다는 말인가.

‘아버지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저 자식의 상판에 주먹을 꽂았을 것이다.’

강이 탁상 밑으로 늘어트린 손으로 주먹을 바르쥐고 속으로 그리 외치니, 산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내 소문성에게 말하였다.

“무얼 하고 있어? 당장 거세하라니까.”

“예, 폐하.”

“자, 잠깐! 잠깐, 잠깐만!”

소문성이 가까이에 다가오자 강이 자리에서 번쩍 일어서며 소리쳤다. 산은 그의 돌발 행동에 고개를 조금 뒤로 빼며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였고, 소문성은 산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아무리 무슨 관직이든 상관없다고 했기로서니 환관이라니요! 너무하신 처사가 아닌지요!”

“뭐가 너무해? 그대가 뭐든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어.”

“……뭐든 상관없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거세는 너무하지 않습니까! 소인도 사냅니다! 폐하께서 소인을 침전에 들이시는 것도 운우지락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닌지요! 사내인 몸으로 남근 없이 어찌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남근이 있다고 해서 모시지 못할 것은 없으니 소인의 것은 그냥 둬 주십시오! 정말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닙니까! 소인이 지난밤의 일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소인이 지난밤 망언을 했던 그 상대가 지존이신 줄 알았더라면 결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허공에서 떨어져 뭉갠 것도 죄송하다고 거듭 말씀드렸고, 또……. 또! 또 뭐, 많습니다! 자리 펴 주시면 하루 종일 떠들어 댈 수 있으니 더 떠들어도 되겠습니까? 만일 안 된다 하시려거든 떠든 김에 한 말씀만 더 올릴 테니 조금만 더 들어 주시지요!”

어찌 당황을 했는지 목석같이 심드렁하기만 하던 강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었다. 산은 별말 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참고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소인이 지난밤에 범한 무례에 대하여 말씀드렸을 적에, 사과드린 바는 탐욕으로 인하여 살육을 자행했다는 말뿐으로 광증이 있다는 말은 물리지 않으려 하니 그리 알아주십시오!”

“이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따위 망발을……!”

태감이 강을 향해 소리치며 나아가자, 산이 장죽을 허공에 휘휘 내저으며 나서지 말라 하였다.

“에이, 제기랄! 어차피 거세될 몸인데 못 할 말이 무어 있습니까! 어차피 고자가 될 거라면 하고 싶은 말이라도 다 하렵니다!”

“할 말이 더 있느냐?”

“없을 것 같습니까? 그때 주막에서는 왜 신분을 숨기고 소인을 희롱하셨는지요! 소인이 무례한 언사를 한 데에는 폐하의 책임도 있사오니 부디 참작해 주시길 바랍니다!”

남근을 잘린다고 생각하니 이성이 툭 끊어지기라도 한 듯, 강은 본성을 숨기고 순응하는 체를 하던 것도 다 때려치우고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강이 한마디 한마디 보탤 때마다 뒤에 선 태감은 점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을 그리 떠들어 대다가 이제 숨이 차는지 씩씩 호흡을 가다듬으며 산을 노려보던 강은 순간 자신이 이성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신적으로 이름을 드높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더니, 실로 무례하고 오만한 자다. 자신을 위하여 타인의 거세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지음知音이라 하였다. 실력을 알아봐 주는 이를 평생 하나라도 만난다면 그만한 즐거움이 없으며 그런 인연이 다시없을진대, 어찌 그것을 알아보는 자가 하필이면 저 광증에 걸린 자란 말인가.

“이봐.”

“뭡니까!”

“농이다. 농.”

“……예?”

“농이란 말이야.”

“……어디부터 농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웬만하면 저를 중경으로 데려가겠다는 말부터 농이면 좋을 것인데. 되도 않는 기대를 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산은 절로 웃음이 나서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파안대소를 하였다.

“거세하겠다는 것부터 농이다.”

“…….”

“그리고 지난밤의 일은 사과할 것 없느니.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재미있는 말을 한다고 말이야. 재미있는 말을 하는 것이 어찌 죄란 말이야?”

“…….”

“그대를 어찌 중경에 둘지는 천천히 정하도록 하겠어. 그러니 그리 목덜미 시뻘겋게 달구지 말고 흥분을 좀 가라앉히도록 해라. 어차피 나는 행행을 나온지라 돌아가더라도 바로 중경으로 가지 않고 북양의 행궁으로 가야 해. 거기서 조금 머무른 후에 갈 것이니 급한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폐하의 신하들은 폐하께 무어라 말씀을 올립니까.”

그만 속아 넘어가 이성을 다 내려놓았다는 생각에 강은 눈앞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쪼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찍이 하늘에서 관직을 지낼 때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열외로 두고, 이곳 창천성에서 인간 어미의 태를 빌려 났을 적부터 하여 산을 만나기 전까지는 흥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강에게 몹시 시시하기만 하였고, 그저 하늘로 돌아갈 날을 받아 둔 채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물론 강이 신경을 자극하는 자를 처음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끽해 봐야 내게 욕지거리를 몇 마디 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인간 따위가’ 하고 생각하면 흥분을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한데 이 산이라는 자는 무엇인가. 신궁을 모두 불태우고 서낭신이 깃든 고목나무들을 죄다 베어 건물을 지은 신적임과 동시에, 강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정을 주고 살았던 채윤직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닌가. 이런 자가 그리 압박을 해 오니 어찌 아니 흥분하고 참을 수 있느냔 말이다.

“보통 황은이 망극하다고 하지.”

“소인은 황은은 망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망극하신 언사로 저를 희롱하시는 것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것이 애초부터 나에게 사죄할 요량도 아니었는데 노인의 목숨이라도 건져보자고 거짓을 고한 꼴이로군. 실로 요망한 자다.”

“……폐하께서 소인이 죄송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십니까!”

“그대가 괘씸한 점은 거짓을 고한 것이지 사과할 맘이 없는 것이 아닌데.”

“……이, 이이!”

“그대는 참으로 재미있는 자야. 나는 내일 북양으로 가려 하니 채비나 좀 해 둬. 나는 그동안 그대를 데려가기 위하여 노인과 흥정을 해야겠으니.”

“……무슨 흥정을 말씀하십니까?”

“그걸 내 미리 말해 줄 성싶으냐.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소문성 너는 북양으로 가서 짐이 돌아갈 것이라 말을 전하도록 하고.”

강은 결국 말을 줄이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내일 북양으로 간다 하였으니 이곳에 남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강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우선 자신의 방으로 갔다. 다행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으나 챙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차피 황상과 함께 갈 것이라면 맨몸으로 가도 상관이 없을 것이나, 만일이라는 것이 있으니 지필묵과 옷 몇 벌, 그리고 노잣돈 조금을 챙겼다.

바로 채윤직을 만나러 갈 작정이었으나 산이 흥정을 하겠다 하였으니 지금쯤 그 앞으로 불려갔을 것이다. 채강은 탁상 위에 올려 둔 봇짐을 한참이고 노려보았다. 우선 최 행수를 만나 채윤직을 부탁하는 말을 전하고, 밤이 되면 채윤직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쩐지 쉽기만 하더니.”

생각해 보면, 죄를 지어 하늘에 속한 이가 홍진 내려온 것 자체가 치욕적인 일이기는 하였어도 지난 5년이 심각하리만치 편안하기는 하였다. 이런 벌이라면 세 번쯤은 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복중의 태아로 있을 적에는 몸 어미가 갖은 고생을 하여 조금 힘들기는 하였으나, 난 이후로는 채윤직의 수양아들로 호의호식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제 3년을 남겨 두고 고난이 닥친다면 이는 응당 하늘의 뜻인지라. 강은 이를 거스를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강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채강은 그 길로 해연관으로 가 최 행수를 만났다. 최 행수는 일전 황제가 직접 그에 대하여 소상히 물은 바가 있는지라 어찌 일이 벌어지기는 할 것이라 여겼으나, 채강이 황상의 부르심을 받아 중경으로 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입을 크게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아마 중경으로 가게 되면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저는 다시 돌아오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입신양명을 하게 되었으니 이를 축하해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구만. 그래도 아주 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응?”

“3년 내로 다시 이 땅을 밟지 못한다면 아마 평생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3년?”

“그럴 일이 있으니 소상히 묻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없는 동안 영주님을 잘 보필해 주십시오. 이것을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어허, 강이. 이를 말인가! 영주님은 당연히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모실 것이네.”

최 행수는 강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지는 않을까 기대하였으나, 강의 용건은 거기까지였다. 강은 황제가 자신의 붓 다루는 능력을 어여삐 여겨 데려간다 하였으나, 최 행수가 보기에는 그것보다는 다른 능력에 더욱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으므로 어쩌면 강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속아 넘어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황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어찌 그 입으로 말할까.

“전 이만 가겠습니다.”

“강이, 자네…….”

“예?”

“황상께선 자네가 영주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는가.”

“…….”

뒤돌아 나가려던 강은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내 옅은 숨을 내쉬며 대꾸하였다.

“예. 허나 행수님. 오해하고 계신 게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저는 영주님의 수양아들 같은 이였으나, 실제로는 수양아들이 맞고 친자는 아닙니다. 즉 행수님의 생각처럼 저는 영주님의 서자가 아니며, 저를 낳으신 분은 영주님의 측실이 아닙니다.”

“……자네, 알고 있었나.”

“행수님이 그리 오해하고 계실 뿐, 다른 곳에 말씀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바로잡지 않았으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면 만일이라는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립니다. 그럼, 영주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다음으로 강이 만난 자는 채영이었다. 채영은 창천성의 구석구석을 살필 수 없는 늙은 채윤직 대신에 곳곳을 시찰하며,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우고 넘치는 것이 있으면 다른 지역에 나누는 중한 일을 하고 있었다. 강이 만나러 갔던 그 시각에 채영은 변방의 요새에서 무기류를 점검하고 있었다.

“형님.”

“네가 어쩐 일이냐?”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귀찮다며 잘 나다니지도 않는 네가 별일이구나. 자, 앉아라.”

채영이 작은 탁자 맞은편을 가리키며 좌정하였다.

“어찌 표정이 그러하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게야?”

채영의 말에 강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변방에서 죽을 때까지 살 것만 같았던 이가 중경으로 가 황상의 가까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사역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논하는 홍복일 것이니, 그것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허나 강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시간만 더 보내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인데 갑작스런 풍랑을 만나 좌초된 선박처럼 절망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채영은 강의 출신 성분을 모른다. 그저 갑자기 채윤직이 수양아들로 삼겠다며 데려와 인사를 시킨 것이 첫 대면이었고, 그가 아는 내력의 전부였으므로 말을 보태기가 어려웠다.

“황상을 따라 중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채영의 표정이 변하였다. 채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는, 이내 눈치를 챘던지 천천히 끄덕였다.

“폐하께오서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지대하셨던지라, 네 그림 그리는 솜씨를 보고 데려가고자 하시는구나.”

“……예.”

“허면 가문의 홍복일 것인데, 어찌 표정이 그러냐.”

“아버지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이 쓰여 그렇습니다.”

“아버지께는 내가 있는데 어이하여 헛된 걱정을 하느냐. 그런 생각일랑 말고 폐하의 곁에서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아버지를 돕는 길이다. 일찍이 아버지께서 개국공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잃어버리셨을 때부터 뭇 사람들은 우리 집안이 몰락했다고 떠들어 대었다. 네가 폐하의 눈에 들어 화원으로 이름을 날린다면 아버지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 말은 맞다. 허나 잘 알지는 못하였어도 채윤직이 단순히 죄인으로서 이곳으로 보내진 바는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강에게는 있었다. 채윤직이 그 시절을 논하기를 무척이나 꺼렸으므로 캐어 묻지는 못하였으나 그 생각은 황상이 이곳까지 납시었을 때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 영민한 채영이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저리 말하는 양을 보면 이에 대하여 깊게 떠들고 싶지는 않은 것이리라. 강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이 너는 만사에 관심이 없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니 중경에 갔다가 폐하의 미움을 살까 심히 걱정이 된다. 명심하거라. 네가 황상의 미움을 사면 아버지께도 그 화가 미칠 것이니 부디 조심해야 한다. 우리 집안의 명운이 너에게 달렸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니 아버지 걱정일랑은 말고 부디 폐하의 신임을 받도록 해.”

강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황상을 향하여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무례를 범하였다. 다행히 산이 지금은 강의 능력에 관심이 있어 그런 것이 눈에 뵈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 관심이 사그라지고 나면 화살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야 3년을 지내고 사라지면 그만이겠으나, 그 후 채윤직이 어찌 될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3년이 지나고 귀천歸天할 때가 되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해야겠다. 그전까지는 황상의 눈에 크게 띄지도 말며, 멀어지지도 말아야 해.’

자신의 별것 아닌 그림 실력으로 채씨 가문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다면 그보다 큰 보은이 없겠으나, 강은 그런 일일수록 위험이 따를 것이라 여겼다. 황상을 따라 중경으로 가면 어떤 방식으로도 뭇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될 것이며, 황상의 관심을 갈구하는 자들이 강을 음모에 빠트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찌 납작 엎드려 조용히 지내더라도 채씨 가문에 화가 미칠 것이다. 강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갑자기 어찌 그래?”

“형님. 저로 인하여 집안의 명예가 드높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겠으나, 제가 황상의 눈에 든 까닭은 그저 잔재주를 부리는 환쟁이기 때문이지 학식이 높거나 무예가 출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채씨 가문은 오래전부터 폐하를 모신 충신 가문이니, 그 집안의 사람이 삿된 재주로 황상을 홀렸다는 말을 들으면 집안에 누가 됩니다. 게다가 제가 중경으로 가 폐하의 부름을 자주 받게 되면 자연스레 저에게 간악한 무리들이 꼬일 것인데 그로 인하여 오히려 화가 돌아갈까 염려됩니다.”

“……음, 네 말에 일리가 있다.”

“그래서 저는 채씨 가문에서 절연장을 받고 싶습니다.”

“뭐라, 절연장?”

절연장, 즉 파문을 알리는 문서는 가문에 속한 자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자는 성을 잃게 되며, 가문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니 절연장은 최후의 통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자진해서 받겠다는 이는 난생처음인지라, 채영이 기함하며 눈을 치떴다.

“어찌 그런 망발을 하느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네 정녕 모르느냐!”

“저를 거두어 주신 아버지께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노여워 마시고 부디 아버지를 함께 설득해 주십시오.”

“그럴 수 없다. 너는 피는 통하지 않았어도 내 아우인데, 어찌 내가 아버지께 그런 것을……. 허면 너는 어찌 되겠느냐. 네가 중경에서 어떤 천대를 받을지는 생각해 본 것이냐?”

“예. 하지만 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간특한 무리가 저를 음해하려 들었을 때 채씨 문중에까지 피해가 미치는 것이 싫습니다. 어쩌면 채씨 문중을 겨냥하기 위하여 제가 이용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를 막으려면 절연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곳 관리들에게 저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하여 명쾌하게 대답한 적은 없으나, 이미 저는 채씨 성을 지닌 고로 필연적으로 중경에까지 그 소문이 미칠 것입니다. 저는 성이 필요 없으니 아버지와 형님을 위하여 제가 마지막으로 뜻을 전할 수 있도록 부디 도와주십시오.”

강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채영은 괴로운 얼굴을 하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채영은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말하며 강에게 먼저 돌아가 있으라 하였다. 요새를 나오며, 강은 자신이 그에게 꽤 큰 짐을 지웠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저 담담히 창천성으로 돌아갔다.

하인에게 채윤직의 소재를 물으니, 앞서 황상의 부름이 있었는데 이제 막 알현을 마쳤다 하였다. 강은 그 길로 바로 채윤직을 만나러 갔다.

“어딜 그리 바삐 다니느냐.”

채윤직은 매우 복잡한 얼굴로 걸어 들어오는 강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것이 황상에게 강을 데리고 중경으로 가겠다는 말을 들은 듯 보였다. 하지만 대관절 산이 앞서 말한 그 흥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으므로 그는 말을 선뜻 꺼내기가 힘들었다. 채윤직은 한숨을 푹 내쉬며 강에게 앉으라 말하고 다시 힘없이 허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강은 그런 채윤직에게 절연장을 써 주시라 말하기 힘들었던지라, 머뭇거리다가 이내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

“행수 어른과 형님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네가 떠날 준비를 하는구나.”

“……예, 그리하여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부탁 말씀 올리려 하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어찌 아니 들어주겠느냐. 말해 보아라.”

“저, 무례하고 배은망덕하다 여기실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제 의지가 매우 결연하니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대답을 주십시오.”

“그래, 말해 봐라.”

“절연장을 써 주십시오.”

강은 그리 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채윤직이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며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소리를 칠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변방 요새에서 창천성으로 오는 내내 어찌 채윤직을 설득할지 깊게 고민하였다. 하지만 그의 우직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생각해 보건대 그는 가문의 이익을 위하여 정을 주고 기른 이를 내칠 사람이 아니었다. 허락지 아니한다면 자리를 깔고 읍소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참이었다.

“허…….”

하지만 채윤직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매우 허탈하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는 것이다.

“…….”

“그리하마.”

“……예?”

허나 채윤직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이 예상을 완전히 깨어 버렸다. 강은 믿기지 않아 다시 반문하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그리하겠다고 하였다.”

채윤직은 매우 체념 섞인 목소리로 다시 일러 주었다. 대관절 어떤 연유로 그리 쉽게 납득해 주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채강은 괜히 상황을 끌었다가 채윤직이 말을 거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냉큼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 너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힘들구나. 잠시 혼자 있으려 하니, 그만 나가 보거라.”

강은 매우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으나, 결국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채윤직은 이마를 짚으며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한편, 산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혼란한 틈을 타 창천성을 나온 참이었다. 낮 동안 한참을 누워 생각해 보았더니, 어린 시절 뒷산에 무언가 묻어 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나중에 약관의 나이가 되거든 그것을 다시 파내기로 마음먹었는데, 안타깝게도 산은 18세의 나이로 창천성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그 뒤로는 창천성에 오래 머물지 못하였으므로 아직도 꺼내 보지 못하였다. 산짐승이 파헤치지 않았더라면 남아 있을 것이다. 산은 그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뒷산에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는데, 어차피 그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표시를 해 둔지라 해가 완전히 가물기 전에는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산은 뒷짐을 진 채로 성큼성큼 길을 따라 올랐다. 옛날에는 단숨에 뛰어 정상까지 오르곤 하였는데, 확실히 그때와는 몸이 다른 모양이었다. 걸어서는 가더라도 뛰지는 못하겠다.

“이 근방이었을 것인데.”

그리 생각하고 주변을 휘이 둘러보니, 저어 앞에서 횃불 몇 개가 허공에 들린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뒤늦게 창천성의 관문을 넘으려는 자들인 모양이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은 열 개도 넘는 횃불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정확히는 포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 이건.”

“어딜 가시나, 형씨.”

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너희들은,”

“해가 저물어 가는데 이 산을 넘으려 든다는 건 분명 우리한테 바칠 통행세가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횃불 아래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얼굴을 드러냈다. 턱에서 귀까지 거친 수염이 모양 없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는데, 안면에 잔 상처가 많은 것으로 보아 참으로 삶을 거칠게 산 것만 같다. 산은 찬찬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살펴보았다.

“창천성은 관세가 폐지되지 않았던가……? 15년쯤 전에.”

“관세는 폐지됐는데, 우리가 통행세를 받아.”

한 사람이 그리 말하자, 나머지 사내들이 와하하! 하고 웃어 대었다. 별로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었는데, 하고 산은 홀로 생각했으나 일단은 자신이 큰 위기에 봉착했다 것은 알 수 있었다. 소문성이나 채윤직이 그리 혼자 나다니지 마시라 신신당부를 한 뜻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산은 티를 내지 않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패물은 기방에 뿌렸으니 없고, 돈도 주막에서 다 써 버렸다.’

하지만 마구간지기에게 귀걸이 두 쪽 중에 한쪽만 건네었으니, 아직 내줄 것이 남아 있기도 했다. 또 뒷짐을 진 팔에는 옥팔찌를 끼고 있고, 뭣하면 장죽을…….

‘장죽은 안 될 일이지.’

“너희들은 산적이지?”

“그래, 가진 거 다 내놔.”

“어……?”

같은 시각 강은 망루에 올라 있었다. 강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높은 곳에 올라 창천성의 야경을 보는 것이었는데, 해가 막 졌을 즈음 내려다보면, 시전 창공을 따라 등이 켜진 모습이 그리 보기가 좋다. 물론 매일매일 그 광경이 매우 상이한 것도 아니었다. 멀리서 보면 늘 똑같은 모양이었으나 강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보는 자이니, 전체를 이루는 그 제각기의 요소들은 매일이 같지 않아 늘 다른 풍경을 보는 셈이었다. 강은 망루에 기대어 한참 시가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뒷산을 바라보았다.

“뭐지……?”

산속에 횃불을 든 사내들이 있다. 그것도 곧 해가 지기 시작할 이 시간에.

“이봐, 저기…….”

강은 자신이 본 것이 헛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옆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를 불렀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지 범인의 눈에 저 숲속이 보이겠는가.

“예?”

“아니다.”

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다시 한번 그곳을 바라보았다. 수풀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 횃불을 든 이들이 꼭 한 사람을 둘러싸고 위협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산적인가…….”

산적이라면 지난달에 모조리 소탕한 줄로 알았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다. 강은 얼른 망루에서 내려가 이 사실을 고하려다가 문득 빗겨 보았던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어디서 많이 보았는데. 참으로 낯이 익은데.

“황상?”

에이, 아니겠지. 황상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시간에 홀로 저 산을 올라 산적을 만났을 리가 없다. 아니…….

‘그자라면 그러고도 남지.’

조금만 더 있으면 해가 완전히 질 것이다. 해가 지고 나면 산짐승들이 냄새를 맡고 활동을 시작한다. 만일 산이 그 안에서 멍청스럽게 도적들에게 당하거나, 내지는 산짐승에 의하여 옥체라도 상하게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창천성 땅에서 그리 변고를 당한 것이니 그 화가 모두 채윤직에게 미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 되는 일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저대로 화를 입도록 두고 싶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채강은 망루에서 뛰어 내려갔다.

마구간에서 아무 말이나 꺼내어 당장 시가를 가로질러 내달렸다. 천리안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로막혀 있거나, 시야가 달라 보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볼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비교하자면 평범한 사람보다 시력이 수십 배 좋은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인데, 이렇게 망루에서 내려와 말을 달리고 있으면 수풀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강은 자신이 말을 달려 그곳으로 가는 동안 황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워 가슴 한쪽이 쿵쿵대었다. 그러게, 처음 주막에서 보았을 때도 그러하였고 황제라는 자가 호위 하나 대동하지 않고 멋대로 나다니니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짜증이 치미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으나, 강은 힘껏 도리질 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저 앞에 뒷산의 입구가 보였다.

입구에 말을 매어두고, 강은 냅다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 일다경一茶頃4)만 지나면 다 지게 생겼다. 아무리 강이 길을 기억하고 있고, 시력이 좋다 한들 어둠이 깔리면 말짱 헛되다. 게다가 산짐승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다경 내로 황상을 찾지 못하면 다시 내려오자. 그리 생각하며 강은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윽!”

멀지 않은 곳에서 사내의 신음이 들렸다. 어쩌면 산일지도 모른다. 아까 망루에서 보았을 때 열도 넘는 산적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고, 분명히 산은 어떤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뒷짐을 지고 있던 그 손에 들린 것은 고작 장죽이 아니었던가.

“헉, 허억……!”

이윽고, 강은 목표한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찌 뛰었던지 거친 숨이 폐부를 긁으며 목구멍을 넘나든다. 강은 무릎을 짚고 고개를 숙여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응?”

“……괜찮, 헉……헉, 괜찮으십니까?”

“그대가 이 시간에 여기는 어쩐 일이야?”

“사, 산적……. 산적들은 다…….”

여전히 숨을 고르지 못하는 강을 향해 산이 횃불을 들이밀었다.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스치니 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빼었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한데 어째 돌바닥에 넘어졌는데 통증이 없는가. 이것은 마치, 월담하다가 산을 깔아뭉갰을 때와 비슷한 감촉이다.

“헉!”

“산적을 또 그대가 깔아뭉갰어. 그대는 참으로 대단하군. 사람을 방석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가, 갑자기 그리 얼굴에 불을 들이대니 그렇지요!”

“그런데 그대가 이 시각에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야?”

“예? 아, 그 저…… 산책. 예, 산책을 나왔습니다. 저녁을 먹은 게 배가 안 꺼져서요.”

그 말에 산이 고개를 기울이며 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미친 자가 아니고서야 이 시각에 이 산중에 산책을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산은 팔짱을 끼고 여전히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천리안이 있다고 하더니, 산적들에게 둘러싸인 나를 본 모양이지.’

만일 이 짐작이 맞다면 모든 의문은 해결된다. 강이 산을 구하러 온 것이라면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산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났다.

“이 시간에 산책을 나온 것도, 그 산책이라는 것을 죽을 둥 살 둥 하며 전력 질주를 한 것도 그렇다고 치지. 한데 산적의 이야기는 무엇이야?”

“아, 그것은 그……. 요즘 산적이 기승을 부리는지라, 혹여나 폐하께오서 산적을 만나지는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여쭌 것입니다.”

“그래? 참으로 기특한 자로다.”

산은 성의 없이 대꾸하며 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코앞에 내밀어진 손을 강은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산이 다시 손을 뻗으며, “무엇 해? 잡고 일어나지 않고.” 하니, 강이 조심스레 어수御手를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런.”

그리고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하늘에 별이 떴다. 강은 절망적인 얼굴로 자신이 내려온 길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올라올 적에는 길이 하나였는데, 어찌 이리 보니 수 갈래 길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몹시 당황하여 산을 돌아보자, 산이 손에 들고 있던 장죽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낼 수밖에.”

“어찌 여기서 밤을 지냅니까. 곧 산짐승들이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대는 내가 하는 말이 모두 못 미더운 모양이야.”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내가 여기서 지낸다면 지내는 것이야.”

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할지, 심각하게 자신만만하다고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세상 어느 사람이 이 밤에 산에서 지낼 생각을 하는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려갈 생각을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긴 하였다. 사면초가라는 것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강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방도가 있으신지요?”

“이리 와. 어두워 놓칠 수 있으니 내 손을 잡도록 해.”

“괜찮습니다.”

“허, 참. 아까 조금 장난을 쳤기로서니 아직도 삐쳐 있다니. 그대는 속이 참으로 좁구나.”

“…….”

속이 좁다니! 누가 누굴 더러 속이 좁다고 말하는 것인가. 강이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로 그를 바라보자, 산이 웃음을 터트리며 손에 쥐고 있던 장죽을 내밀었다.

“허면 이거라도 잡아라. 아무튼 흩어지면 내 내려가서 노인을 어찌 볼까. 그대를 팽개쳤다고 나를 원망할 것이야.”

강은 하는 수 없이 끝이 내밀어진 장죽을 잡았다. 이리하니 어찌 모양이 이상하다. 차라리 손을 잡을 걸 그랬나, 싶었으나 이제 와서 그러는 것도 우스워 강은 결국 장죽을 잡은 채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대는 내가 뭣도 모르면서 이런다 생각하겠지만, 난 10년 동안 전장을 누볐다. 산에서 며칠을 보낸 적도 있고 말이야. 그리고 내 이름이 산이 아니냐. 산끼리는 통하는 게 있어.”

“……허면 저는 강하고 통하는 게 있는 겁니까?”

“다음에 강에 함께 표류하게 되면 그대가 앞서서 헤엄치도록 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어찌 저런 실없는 자가 이 땅의 패자覇者란 말인가. 산이 단순히 황제의 적자로 태어나 보위를 이었다고 한다면 저러한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하겠으나, 제 손으로 수많은 토호들을 처리하고 칭제했다는 것이 도통 믿기지가 않는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조금만 더 가면 동굴이 있어. 어린 시절에 거기서 자주 놀았거든. 전시인 척하면서 괜히 식량을 축적해 두고, 땔감도 갖다 넣고 모닥불을 피워서 놀았어. 아, 그때 재미있었는데.”

산은 괜히 입맛을 다시며 손에 든 횃불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앞을 가로막던 벌레 따위가 그 불길에 닿아 타닥,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강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빨리 그 동굴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보채지 마. 거의 다 왔어.”

한참 길을 따라 걷던 산은 이내 수풀 사이로 몸을 틀었다. 강은 묵묵히 장죽을 붙잡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따가운 나뭇가지들이 얼굴에 부딪혀 몇 번이고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만일 진실로 그 장죽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 와중에 산을 놓치고야 말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여기야.”

한참을 그리 걸었더니 정말로 동굴이 보인다. 대관절 이런 동굴을 어찌 찾아냈는가 싶을 정도로 나무들에 켜켜이 둘러싸여 있었다. 산은 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동굴 벽에 횃불을 비추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횃불을 걸 수 있도록 꽂이를 내가 만들어 두었는데,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아, 여기 있다. 모닥불도 하나 피워야 할 것 같으니 이 앞에서 마른 가지를 주워야겠는데.”

강이 황친이라 불릴 만한 이를 본 일이 또 있겠는가마는, 그저 사회적인 통념으로 고려하였을 때 그들은 모든 귀찮은 것들을 아랫것들에게 맡기고 호의호식을 하려는 이들일 뿐이었다. 생활력은 없고, 적응할 줄도 모르며, 어쩌다 험한 환경을 만나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그런 이들 말이다. 한데 이 산이라는 자는 조금 달랐다.

물론 오랜 시간 전장을 누볐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도 태어나기는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분히 수발을 받고 살았을 것이나, 그의 성향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대는 샌님이로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

“이 빚을 다 어찌 갚을 것이냐, 응?”

“그림을 많이 그려 드리겠습니다.”

“그 재능이 그대를 살린 줄 알아.”

산이 마른 가지를 동굴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것을 가운데로 모았다. 그리고 동굴 벽에 걸어놓은 횃불에서 불을 조금 옮겨와 그것을 장작 사이에 던져 넣으며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작은 불씨가 옆으로 옮겨붙으며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내가 옛날부터 불을 좀 잘 피웠지.”

그리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동굴 벽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는 것이다. 두려움도, 걱정도 없는지 심지어는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하는 산을 보고 있자니 강은 어쩐지 심사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어찌 저런 천하태평한 자가 다 있는가. 아마 창천성에 있을 채윤직은 갑자기 사라진 산과 강을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먹을 걸 가져올 걸 그랬지.”

산이 배를 쥐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 그런 생각이 드십…….”

니까, 까지 말을 하려 하였으나 강의 배에서 경천동지하는 소리가 난다. 생각해 보니 강도 오늘 하루 종일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빠 제대로 입에 음식을 대지도 못하였던지라, 갑자기 빈속이 꼬르륵 소리를 내는 것이다. 산은 민망해하는 강의 얼굴을 보며 포복절도를 하였다.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그대는 별로 솔직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아니면 체면을 심하게 신경 쓰든지. 둘 중 무엇이든 스스로를 피곤하게 할 뿐이지.”

“한데 그런 자를 어찌 금궐로 데려가고자 하십니까.”

“재미있으니까. 나는 희대의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재미있게 해 준다면 기꺼이 곁에 두는 편이야.”

“송구하오나, 소인은 희대의 악인까지는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대가 생각하기에 희대의 악인은 나일 테니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리 콕 집어 말하니 강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였다. 아무리 채윤직에게서 절연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 사이의 대외적 명분을 끊어 낸 것에 불과했다. 강이 밉보이면 채윤직도 그리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좀 더 조심해야지, 좀 더 예의를 갖추어야지 다짐을 하더라도 이미 뱃속 가득 불만이 있으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강은 스스로 성숙하지 못하다 탓하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응.”

“소인의 속을 모두 아시는 것 같아 솔직하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강이 채윤직으로부터 절연장을 받겠다는 말은 어쩌면, 황상을 향해 대놓고 반감을 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강이 중경에서 머물게 되었을 때 받을 관심과 그로 인한 마찰들을 산이 막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의 표명이었으니 이를 산이 알게 되면 진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연장을 아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먼저 내질렀으니 양해는 구해야 한다.

“폐하께서 소인을 가까이 두신다면 필연적으로 소인은 뭇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

“소인은 사람의 속성이 그리 선하다 보지 않습니다.”

“그 말이 지당하다.”

“하여 소인은 어떠한 중상모략을 받을지 모르며, 이는 창천성 영주에게도 화를 미칠 것이라 사료됩니다. 어쩌면 창천성 영주를 음해하기 위해 소인을 이용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창천성 영주는 죄인이고, 그 죄인이 목숨을 부지한 채 폐하의 연고지를 맡는 것이 어찌 그들의 눈에 아니 거슬리겠습니까.”

산은 알 수 없는 낯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다. 황상의 앞이라 하여 비굴하게 굴지도 않으며, 무례하다 볼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 무례함이 담대한 그릇을 보여 주는 방증이 되기도 했다. 산은 대답하지 않고 마저 말을 이으라는 듯 턱짓했다.

“소인은 그리하여 창천성 영주에게 절연장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물론 그런다고 하여 사람들이 저와 창천성 영주를 연관 짓는 것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정치적으로 이용될 명분을 제거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이에 대하여 진노하실지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허나 소인이 창천성 영주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은이니 부디 윤허하여 주십시오.”

그리 말하며 강이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사려 깊은 이다. 게다가 가장 흥미로운 점은 강이 정치를 안다는 것이었다. 모든 정치는 명분의 싸움인지라, 그 명분이라는 것이 없으면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을 강이 정확히 짚어 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재미있었다. 아마 중경으로 데려가면 알아서 제 살길을 열 것이다. 게다가 입은 은혜를 모르지 않아 제 분수를 알고 행하니, 사람됨도 제법이었다.

“얼굴을 들어. 내 그대 생각을 모르지 않으니 이를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황은이 망극합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황은이 망극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대는 워낙 입만 열면 거짓인지라, 이번에는 믿어도 될는지 모르겠다.”

“소인은,”

“아아, 시끄럽다. 난 이만 잠을 자야겠어. 그대는 계속 깨어 있을 작정이야?”

“어찌 여기서 잠을 자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요.”

“허면 이리 와서 앉아.”

그리 말하며 산이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어쩔 작정으로 그러는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그리 오라고 하니 거절할 수가 없어 강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산이 그것을 보더니 허벅지를 툭툭 때리며 말하였다.

“그리 앉지 말고 편히 앉아.”

“어찌,”

“속으론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내숭 떨지 말고 어서.”

어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리 얄미운가. 더 얄미운 점은 그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강은 산을 흘끗 쳐다보고는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날이 밝거든 날 깨우도록 해. 자고로 잠은 침상에서 자야 하는 것인데,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리 말하더니, 산이 냅다 강의 허벅다리를 베고 눕질 않겠는가. 몹시 놀라 무슨 짓이냐 소리를 내려 하였으나, 이내 눈을 감은 용안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황상을 더러 돌바닥에 머리를 대고 침수에 들라 말할 수도 없었고, 일단 그리 명하면 내주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강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해가 떠야 할 텐데.’

“으으, 역시 돌바닥에서 자면 몸이 쑤신다니까…….”

산은 뻐근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겨우 개안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여전히 강의 허벅다리를 베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산은 강의 방향으로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잠을 자지 않겠다고 한 이가 누구인데 하늘에 아직 별이 총총 떠 있는 지금 깜빡 잠이 든 것인가.

산은 조심스레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몸만 쏙 빠져나와 다행히 강을 깨우지는 않았다. 산은 그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여니 그 안에 말린 남령초가 들어 있었다. 도적들에게 절대 내어 줄 수 없다고 내심 다짐했던 그 장죽을 주워 들고, 그 안에 잎을 꾹꾹 눌러 담기 시작하였다.

“기침하셨습니까?”

괜히 할 일이 없으니 남령초를 담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산은 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도 잠에 취한 듯 몽롱한 얼굴을 한 강이 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 잔다더니 침도 흘리고 어찌 그리 잘 자는고.”

“치, 침 안 흘렸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강도 걱정이 되는지 슬쩍 손등으로 입가를 닦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어나는 것이 없으니 괜히 산을 노려보았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뜰 모양이야.”

“다행입니다.”

여전히 남령초를 넣는 것에 열중하고 있던 산은 이내 피워 놓은 모닥불에 그 끝을 조금 가져다 대었다. 어떻게든 남령초를 피우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고 강이 내심 생각하며 혀를 찼을 무렵, 갑자기 산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어찌 그러십니까?”

“장죽이 휘었어.”

“……어쩌다가 장죽이 휜 것입니까?”

“아까 산적 놈 대가리를 이것으로 때려 주었는데, 그놈 대가리가 돌대가리였던 모양이야. 망할 놈.”

“그러고 보니 제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도적들이 그리되어 있었는데 홀로 상대하신 겁니까?”

산은 한쪽 눈을 감고 장죽이 얼마나 휘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한참을 그렇게 살피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강은 영 민망하여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른 일을 하는 체하였다.

“허면 혼자 상대하지 둘이 상대해?”

“무기를 갖고 계셨습니까?”

“없었는데, 그 돌대가리 놈이 들고 있던 것을 빼앗아서 그리했지. 아, 장죽이 이렇게 되어 참으로 큰일이야. 어서 북양으로 가야겠다.”

매일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히 아끼는 물건인 듯 보이긴 하였으나, 대관절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기에 그리 호들갑을 떠는가 싶었다. 강이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니, 산은 장죽을 무릎에 대고 휜 반대 방향으로 힘을 주어 굽혀 보려 하였다.

“끄으으……으윽! 안 된다.”

“그게 인력으로 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산적들은 백해무익한 존재인 것 같단 말이야. 그러게 아까 내가 갖고 있는 패물을 받고 그냥 갔으면 그들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고, 내 장죽도 휘지 않았을 텐데. 소탕령을 내리든지 해야겠어.”

심지어는 황상이 산적들에게 패물을 넘기고 지나갈 생각까지 하였던 모양이다. 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런 황제는 다시없을 것이다.

“이제 슬슬 해가 뜨는 모양이야.”

산은 고개를 숙이고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어느새 푸른빛이 동굴 입구를 비추고 있었다. 산은 가슴을 넓게 벌리고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강은 그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이 정도면 내려갈 수 있겠는데. 이제는 잡아 주지 않을 것이니 잃어버리지 말고 잘 따라오도록 해.”

산은 강이 따라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두말없이 흐드러진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보인 것은 이미 예상된 광경이었다. 채윤직과 소문성이 뜰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성문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채윤직과 소문성이 뛰어와 그리 잔소리를 늘어놓으니, 산이 귓구멍을 막으며 짜증을 내는 것으로 아침이 시작되었다.

강은 몸을 씻자마자 지체 않고 채윤직을 만나기 위하여 바삐 움직였다. 그는 오늘 받을 것이 있었다.

“앉아라.”

채윤직이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강이 인사를 올리고 바로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제 앞에 서신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가문의 문장이 찍힌 것으로 보아 이것은 강이 청하였던 절연장임이 분명하였다.

“처음 폐하께서 내게 너를 파문하라고 명하셨을 때 나는 네가 이를 원치 않는다면 그 명을 거역할 작정이었다.”

채윤직은 매우 참담한 얼굴로 말문을 텄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이야기가 심히 기상천외한지라, 강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반문하였다.

“……예?”

“폐하께서 그리 명을 받고 나서 나는 참으로 생각이 많았지. 강이가 싫다고 한다면, 그러한 불명예를 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처음으로 그 명에 거역하리라 생각했단다. 한데 네가 나에게 절연장을 써 달라고 하였을 때,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느냐?”

그 말에 강이 더 놀라 입을 벌렸다. 산이 말했던 그 흥정이라는 것이 그런 뜻인 줄은 생각도 못 하였다. 강이 파문을 당하겠다고 했던 뜻은 중앙에 올랐을 때 그를 이용하여 채윤직을 완전히 사그라지게 하려는 자들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산이 대체 어떤 연유로 그리하라고 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알고 있다. 강과 같은 목적이었을 것이다. 채윤직이 강으로 인하여, 혹은 강이 채윤직으로 인하여 화를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를 둔 것이다. 강은 매우 복잡한 마음이 되어 허벅다리 위로 늘어트린 제 손을 꽉 쥐었다.

“너와 폐하의 의중이 같은 듯싶다. 폐하께선 너와 절연을 하여 연결고리를 끊어 내고 목숨을 부지하라 하셨다.”

“…….”

“폐하께서 아직 이 죄 많은 늙은이를 그리 아껴 주시니 황송하여 눈물이 났으나, 또 한편으로는 내 손으로 너를 거두었는데 너에게 그런 굴레를 씌우는 것이 통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구나.”

강은 그 산이라는 자가 가볍고 철딱서니가 없는 줄 알았던 지난 시간이 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벽 동안 동굴에서 채윤직이 자신을 파문하는 것을 윤허해 달라고 했을 때, 산은 별다른 말없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한데 이미 산이 그러한 명을 내린 다음이었다니!

채강에게는 그것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내심 산이 채강을 탐내어 노신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폐하께 너의 존재를 숨긴 것은 죽음으로 갚더라도 다하지 못할 일이었으나 이를 너그러이 보아주시고, 너와 나에게 미칠 환란까지 염려해 주신 황은이 하해와 같다. 그리하여 너를 이 땅에 남겨 달라는 주청도 드리지 못하였다. 미안하구나.”

채윤직이 그리 말하니 강은 몸 둘 바를 모르고 손사래를 쳤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죄인입니다. 아버지께 거두어져 하늘의 죄인 된 몸으로 호의호식을 하였던 것도, 아버지께서 불충을 저지르는 일을 불사하며 저를 숨겨 주신 것도, 그리 애달파 하시며 제게 절연장을 써 주시는 것도 제가 못다 갚을 은혜입니다. 부디, 부디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채윤직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강은 그 모습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방을 나서고 말았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어?”

뒤뜰의 못 앞에 앉아 둘 곳 없는 시선을 어지러이 하고 있던 강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수수한 옷을 입고 장죽을 든 산이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은 황망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청승을 떠는 꼴이 마치 팔리듯 시집가는 계집 같구나.”

“…….”

“노인이 그대에게 절연장을 주었느냐?”

“예.”

“내가 아무리 그리 명을 내렸어도 그대가 거부하였으면 노인은 절연장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강은 눈을 크게 떴다. 이자는 채윤직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 속없고 가볍기만 한 줄로 알았더니, 강은 산이라는 자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치미를 떼는 것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체 의뭉을 떠는 것이 속을 도통 알기가 힘들다. 강은 일찍이 채윤직이 산을 더러 “평생을 가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 평한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것 같았다.

“황은이 망극합니다. 아버지를 그리 염려해 주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진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산은 그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을 흘끗 보았다.

“노인은 자신이 나를 잘 모른다 생각하지만 세상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또한 나를 가장 위하는 이다. 내 그런 노인이 살길을 열어 두지 않고 사사롭게 그대의 재주를 탐할 거라 여겼느냐?”

강은 자신이 산을 심히 얕잡아 보았던 것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내 뺨을 벌겋게 달구고 고개를 돌리니, 산이 웃음을 흘렸다.

“이봐.”

“예.”

“그러니 죽을 것 같은 얼굴은 하지 말라는 뜻이야.”

“소인이 언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였다고 그러십니까.”

“거참, 말대답은.”

“……송구합니다.”

“노인을 살리기 위하여 그대의 체면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원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도 그런 일이 없습니다. 소인은 면을 중시하는 자는 아닙니다. 파문당하여 성이 없다고 한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랬더라면 직접 절연장을 써 달라 청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소인은 본디 아버지에게 거두어지기 전에는 성이 없었으니 다시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산은 그 말에 이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왜 그렇게 결연해? 사람의 말은 자고로 끝까지 들으라 했어.”

“…….”

“내가 그대에게 성을 하나 지어 주겠어. 그러면 그대도 면이 설 것이 아닌가.”

황제가 직접 성을 하사한다는 것은 길이 남을 영광이었다. 강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하여 지금이 엎드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복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속을 알지 못하여 그저 혼란스럽게 용안을 올려다보았다. 산은 조금 삐딱하게 선 채로 팔짱을 끼며 눈을 마주쳤다.

“왜, 싫어?”

“싫은 것이 아니라…….”

“아니라?”

“소인에게 어찌 그런 황은을 내려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으로서는 성이 있든 없든 그리 상관은 없었다. 말 그대로 체면의 문제일 뿐이었고, 파문을 당하고 나면 이제 인간 세상에서 그를 옥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얼굴은 그리 황은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코 아닙니다.”

“역시 입만 열면 거짓부렁이군.”

“거짓부렁 아닙니다!”

“그대를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노인이 그대의 앞날을 염려할까 봐 그러는 것이니 탐탁지 않더라도 성을 받아라. 그대 이름에 어울리는 성으로 지어 주지.”

“황은이 망극,”

“거봐.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아닙니다, 정말로 거짓이…….”

“또 거짓이야.”

“아니라니까요!”

“어휴, 거짓말쟁이 같으니. 그대야말로 죽을 때까지 그 입으로 지은 죄를 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야.”

산은 그리 말하며 새털처럼 웃었다. 모난 구석이 없는 안면으로 그리 철없이 웃어 대니 강은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그가 10년의 시간 동안 이 광활한 땅을 정벌하고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수많은 이들이 저러한 일면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노인, 멀리 나오지 말고 들어가. 늙은 몸이 새벽바람에 상하기라도 하면 장사를 치르게 될 거야.”

이튿날 새벽,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북양행성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 그들에게 채윤직이 다가왔다. 강은 어제 간단하게 꾸려 둔 짐을 어깨에 메고 마구간지기가 내어 온 말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산이 갑작스레 말을 하는지라 채윤직이 나온 줄을 알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폐하, 살펴 가시옵소서. 신이 죽기 전에 폐하를 다시 뵐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노인은 참으로 바보야. 어찌 그런 우는소리를 한단 말야? 다시 노인이 죽기 전에 다시 보러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

“폐하, 중경에서 창천성은 너무도 먼 곳입니다. 다행히 북양에 납시어 계신지라 이곳까지 오시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셨을 것이나 중경에서 납시는 것은,”

“아아, 정말! 또 잔소리, 잔소리. 노인은 잔걱정만 덜면 더 오래 살 것이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산이 양 귀를 틀어막으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채윤직이 구슬픈 안면으로 흐리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산은 쯧쯧, 하고 혀를 찼으나 그 역시 채윤직과 헤어지는 것이 퍽 아쉬운 모양으로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몸을 홱 돌려 등자에 발을 올리고 말 위로 휙 올라탔다.

“영주님.”

“…….”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간 베풀어 주신 은혜 한량없으니 떠나는 걸음이 무겁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강이 채윤직의 앞에 절을 올리고 하직 인사를 하니, 채윤직은 주름진 얼굴로 강의 몸이 움직이는 모든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제 곧 3년의 시간이 지나면 귀천할 몸으로, 별다른 일이 없다면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5년간 들었던 정이 어찌 그리 깊은가. 채윤직은 끝내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폐하께서 기다리신다. 얼른 가 보아라.”

강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 이내 힘겹게 몸을 돌려 말 위에 몸을 얹었다. 산이 흘끗 뒤를 살펴 강이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고삐를 후려치며, “이랴!” 하니 태감과 북양에서 황상을 보필하러 나온 금군 호위무사가 함께 발을 굴렀다.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은 말이 대신하여 창천성 뜰에서 떼어 내었다. 이윽고 성문이 열렸으며, 어스름이 깔린 새벽의 시가를 다섯 필의 말이 내달렸다.

창천성에서 북양까지는 말로 쉬지 않고 달리면 한 식경食頃5)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북양은 창천성에 속해 있던 작은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창 제국이 건국된 이래 수많은 공신들과 그에게 협조를 하였던 토호들에게 영지를 내려 주려 하니, 이들끼리 크게 싸움이 나는지라 산은 결국 성 단위로 땅을 갈라 각기 나누어 주고 어린 시절 자신이 영주로 있었던 북양을 행성으로 바꾸었다. 이는 자신이 비롯된 창천성 가까이에 행성을 두어 살피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행행을 북양행성으로 납신다는 말을 처음 조정에서 꺼냈을 때 채윤직을 경계하는 대신들의 반발이 어찌 컸던가. 죄인을 보기 위함이라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상소를 올렸던 관료도 있었다.

하지만 산은 이 모든 것을 묵살하고 끝끝내 북양행성으로 피접지를 정하였다. 목적한 대로 채윤직을 만났으며 또 채윤직의 가솔을 중경에 데리고 있고 싶다던 바람을 이루었고, 그리 찾아다니던 출중한 환쟁이를 얻게 되었다. 소문성은 말을 달리다가는 이내 뒤쫓아 오는 강을 돌아보았다.

‘일석삼조는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저 채강이라는 자는 참으로 의외의 소득이다. 허나 저자는 정쟁의 희생양이 될 것이니 폐하께서는 이후 영주님을 버린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다 여기시어 절연장을 쓰게 하신지도 몰라.’

산이 진실로 소문성의 생각대로 그리했는지, 채윤직을 걱정하여 그랬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배고프다…….’

하지만 소문성이 그리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강은 빈속을 달래며 신물을 삼킬 뿐이었다.

이윽고 이 길의 끝에 쇠말뚝이 박힌 거대한 나무 밑동이 보였다. 드디어 북양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저 쇠말뚝이 박힌 나무 밑동은 본디 커다란 당산나무였는데, 모든 지역의 관문에 놓여 있었다. 신의 경건함이 담긴 그 나무가 지역을 수호한다는 믿음이 서려 있는 것이니, 산이 이것을 그냥 두지는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궁에 불을 지르고 천군을 멸절한 다음 산이 가장 먼저 내린 명이 모든 지역의 당산나무를 베고 그 위에 쇠말뚝을 박으라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 이 땅 위에 당산나무가 남아 있는 지역이 있을까. 강은 그 잘린 밑동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미리 연통이 되어 있었으므로 북양의 관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성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산이 쏜살과도 같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가니, 이내 금군 호위무사와 태감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들어간 것이 강이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출발하였으나, 어느새 날이 완전히 밝아 있었다. 동쪽에서 따가운 햇볕이 쏟아져 왼 얼굴을 따갑게 내리쬐니 산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폐하, 홍복…….”

“번거로우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

매우 화려한 치장을 한 여인이 두 내인의 부축을 받으며 이제 막 말에서 내린 산의 앞에 다가왔다. 강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찌 말씀도 없이 그리 가셨나이까. 신첩 얼마나 놀랐는지요. 우리 아기도 폐하가 보고 싶어 밤을 지새웠사옵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무엇을 안다고.”

실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화려한 비단으로 지어진 옷에 가리어져 있어도 그녀가 달빛에 빛나는 눈과 같은 살결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양 뺨에 여리게 든 홍조가 발그레하였고, 촉촉이 물든 눈망울이 선하게 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강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폐하, 저자는 뉘인지요?”

여인이 채강을 바라보며 물으니,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소문성이 이내 멀뚱히 고개를 빳빳이 세운 강을 발견하고 급히 허리를 숙이게 하였다. 등허리가 꾹 눌리니 강은 어쩔 수 없이 굽힌 자세가 되었다.

산은 여인의 말에 흘끗 뒤를 돌았다가 소문성이 강의 상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입에서 숨을 흘리며 웃었다.

“희비는 회임한 몸으로 어찌 그리 세상일에 관심이 많으냐.”

“창천성 사람인가 보옵니다. 금궐에서 행행을 나올 적에는 보지 못한 얼굴이니…….”

강은 저 아름다운 여인이 산의 후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찍이 미인이라고는 해연관의 기녀들만 보아 온지라, 세상에 저리 고아한 여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고로 강은 조금 놀랍기도 하였다. 어쩌면 산을 따라 중경으로 가면 이런저런 흥밋거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폐하, 작일 낮에 태의가 다녀갔습니다.”

“짐의 아이는 건강하다 하더냐.”

“물론이지요. 난세의 영웅이신 폐하의 아기씨인데요. 무탈하고말고요.”

“허튼소리를 하는 도다. 희비는 그만 돌아가 쉬어라. 짐이 할 일이 많다.”

“어찌 행행을 나오시어 정무를 보시겠다 하시옵니까. 신첩이 아랫것들을 일러 탕전에 모실 준비를 하였사오니 그곳으로 드심이 어떠하신지요?”

지친 몸을 탕전에서 쉬게 하는 것은 산이 가장 좋아하는 요양 중 하나였다. 소문성은 그 말에 잰걸음으로 산의 곁으로 나아가 의중을 물었다. 산이 이후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희비가 크게 반색하였다. 강은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그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저 들리는 음성으로 미루어 저 산이라는 자가 사람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니 진실로 표리가 부동하다 생각하였다.

“태의는 복중 태아에 대하여 무어라 했다더냐.”

탕전에 이르러 산이 옷을 벗는 것을 돕던 소문성은 뒷걸음질 쳐 조금 떨어지며 아뢰었다.

“희비가 회임한 이후 그리 행동을 조심하고 태아에 좋기로 이름난 것들만 입에 대니 심려하실 일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래?”

산은 알 수 없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내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잠시 뒤로 물러났던 소문성이 한숨을 쉬며 돌바닥에 떨어진 의복을 주워 올리고는,

“폐하, 그리 의대를 다 탈의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그러니 산이 목에 걸고 있던 작은 목걸이를 태감을 향해 휙 던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짐이 벗고 싶다는데 뉘라서 그걸 말린단 말이냐? 시끄럽고, 가서 그자나 데려오라.”

“그자라 하시면, 채강 말씀이옵니까.”

“그자 말고 그럼 다른 자가 있느냐.”

“탕전으로 말씀이시옵니까?”

“허면, 짐더러 목간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하라는 소리냐?”

산의 성정이 참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성정이 급한지 느긋한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떨 때는 도통 기다리는 것이나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재촉해 대기도 하고, 또 서둘러야 할 때에는 느긋하게 굴어 주변 사람들의 소갈머리를 다 태워 대니 그중 한 모습만을 염두에 두고 굴었다가는 큰 불호령을 맞는 것이다.

“폐하, 어찌 천한 자에게 옥체를 보이려 하시옵니까. 내의라도 입으시옵소서.”

“짐의 몸을 짐이 보여 주겠다는데 어찌 그리 종알종알 말이 많은고. 어서 데려오라.”

그리 말하고 산이 더운물 안으로 몸을 내렸다. 태감은 등을 지고 앉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 ‘예,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한참 훈기가 오르는 물 안에 몸을 담그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주 잠깐 이대로 눈을 감고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채윤직을 조금 더 붙잡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곳에도 결국에는 보는 눈이 있으니 그러지 못하였던 것이 영 아쉽다. 채윤직의 말마따나 그가 살면 얼마나 더 살 것인가. 어쩌면 다시 살아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산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뒤집힌 시야에 채강이 걸렸다. 탕전 안의 눅눅한 공기에 강은 영 불편한 듯 허공에 손을 몇 번 휘저었다가 이내 뒤에서 문을 닫고 들어오는 소문성에 의하여 그 손이 내려졌다. 황상의 앞에서 조신하게 굴지 않는 강이 소문성은 영 못마땅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산은 손을 휘휘 내저어 소문성에게 나가 있으라는 뜻을 전했다. 소문성은 아까도 산이 옷을 모두 탈의하고 탕전에 앉은 채 채강을 부른 것도 법도에 맞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으므로, 계속 곁에 두었다가는 영 귀찮고 번거로울 것이다. 다시 한번 아니 될 일이라 말씀을 올리려던 소문성은 결국은 자신의 주청이 묵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이내 포기하고 탕전 바깥으로 나갔다.

“어찌 부르셨습니까?”

분명 소문성이 먼저 질문을 하지 말라 일렀을 것인데도 강은 아예 그 말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먼저 황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용건을 묻는 투가 꽤 맹랑하였다. 산은 여전히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관절 이자가 어쩌다 노인의 양자가 된 것인가.’

어찌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으며, 천리안을 지녔고 심지어는 서예와 그림에 능한 자가 하필이면 채윤직의 양자가 되었던가.

“그대는 나이가 어찌 돼?”

“약관입니다.”

거짓이었다. 이미 사람이 아닌 자인데 사바 세상의 나이가 무슨 소용일까. 허나 채윤직과 약속한바, 외양이 약관의 사내와 같으니 앞으로 약관의 나이로 지내기로 하였던 고로 우선 그렇다고 해 둔다.

외양을 보았을 때 약관의 나이라 하면 딱 알맞겠으나 산은 그에게서 더 오래 삶을 영위한 자의 느낌을 받았다. 정쟁의 한가운데서 인생의 전부를 살았던 그는 사람을 보는 눈이 꽤 날카로운 편이었다. 그 느낌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창천성에 오래 머물지 않은지라 그곳을 다 눈에 담지 못하였으니 그대가 창천성의 모습을 그려 줘. 가만히 눈을 감고 떠올리려 하였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영 서운하다.”

“창천성의 모습이라 하심은 어떤 것을 이르십니까?”

“으음……. 성안의 모습이 좋겠어.”

“기억나는 대로 그리되 흐릿한 부분은 보완하여 붓 가는 대로 그려도 되겠습니까?”

산은 그 말에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저자가 거짓을 말하는군.’

그리 생각하니 재미있다. 채윤직과 채강, 그 두 부자가 아예 작당하고 속이려 드는 것이 아닌가.

“…….”

강은 산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정면을 응시했다. 그저 산의 벗은 등이 겨우 보일 뿐이었는데,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리 사납게 생긴 등은 생전 처음이다. 존귀한 황상의 몸에 흉터가 가득하였다. 십 년이 넘는 동안 전란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 하여도 놀라운 것은 사실이었다. 한참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강은 이윽고 들려온 대답에 고개를 외로 틀었다.

“그대 좋을 대로 해라.”

“제가 지필묵을 챙겨 왔으니 바깥에서 그림을 그려 다시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나는 기다리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으니 내 보는 앞에서 그리도록 해.”

“……여기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밖에 누구 없느냐!”

산이 그리 소리치자 바깥에 시립해 있던 소문성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자에게 지필묵을 주어라.”

“예, 폐하.”

머지않아 강의 앞에 지필묵이 대령 되었다. 강은 잠시 창천성의 전경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어찌 그 모습을 잊었겠는가. 층계 옆에 작게 자란 풀뿌리마저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아니 되니…….

‘저자는 창천성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그대로 그려도 고쳐 그린 줄로 알 것이다.’

강은 이윽고 붓을 잡았다.

산은 그동안 화로를 들이게 하여 남령초를 피웠다. 가장 좋아하는 요양과 남령초, 그리고 곧 세상에서 다시 찾을 수 없는 진기한 그림을 그려 줄 환쟁이까지. 아니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다. 다만 속으로는 언제 저자가 사실대로 고하고 자신의 죄를 구할 것인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 붓을 벼루에 개어 놓으며 그리 고하자, 산이 느릿하게 탕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휘건과 야장의를 가져다다오.”

희비가 일찍이 황상을 탕전에서 모실 준비를 마쳐 둔지라, 강에게 멀지 않은 곳에 모두 놓여 있었다. 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수건과 의복을 들고 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찌 바쳐야 할지 알지 못하니 잠시 망설이자, 산이 그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왜 그대에게 이것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지 궁금해?”

친히 옥체를 닦고 야장의 소매에 팔을 꿰어 넣으며 산이 물었다.

“예, 조금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런 것을 두고 광영이라 하던데. 내가 방금 그대에게 광영을 내린 것이야.”

“황은이 망극합니다.”

산은 그 무뚝뚝한 말투에 실소를 뱉었다. 참으로 두려움을 모르는 자다. 배운 것이 없기에 어전에서 어찌 굴어야 하는지 몰라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대는 참으로 재미있는 자야.”

“참으로 갑작스러우십니다. 어찌 그리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그런 게 있어. 그림이나 재게 가져와 봐.”

강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바닥에 놓인 그림을 주우러 갔다. 어전에서 대놓고 한숨을 쉬며 무엄하게 등을 보이는 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강이 파문되지 않았더라면 저리 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믿는 구석이 있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기억나는 대로 그렸으나 정확하지는 않을 줄로 압니다.”

“흠, 이 부근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지 않았더냐?”

그림을 한창 들여다보던 산은 구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아무리 산이 창천성을 떠난 지 오래되었어도 나고 자란 곳을 잊을 리는 없었다.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똑똑히 떠올리고 있었다. 그 부근에 나무는 없다.

“……아! 그랬습니다. 송구합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은지라 잊었습니다.”

“그대는 기억력이 참으로 나쁘구나.”

산이 흘리듯 그리 말하니 강이 흘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그렇다 하여도 이 그림은 꽤 마음에 든다. 내 때에 따라 이것을 귀히 여기겠어.”

“황은이 망극합니다.”

“그런 거짓부렁은 언제 그만두려고 그래?”

“거짓이 아닙니다.”

“형틀에 붙들어 매고 매우 쳐야 그 요망한 주둥이를 닥치겠군.”

강은 이제 산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응하지 않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니, 산이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함께 마주 보고 웃었다.

*

북양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강은 그리 탕전에서 그림을 바친 이후, 처음 보는 궁녀의 안내에 따라 머물 곳을 배정받았다. 어느 방이든 상관은 없었으나 좋은 곳이라고는 말하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산이 골이 났는가, 하고 생각을 하였으나 딱히 불만을 갖지는 않고 바로 바닥에 몸을 뉘었다.

오늘따라 참으로 피곤했다. 아마 금궐로 가게 되면 피로한 날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자신이 죄인 된 처지라는 사실이 상기된다. 사실 창천성에서 살았던 5년간 그는 영주의 아들로서, 또 창천성의 관리로서 너무도 편안한 삶을 영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번번이 자신의 처지를 잊고 살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도, 정말 안 되는데도.

“황제 폐하 납시오!”

한편, 희비는 단장을 하는 중이었다. 회랑 끝에서부터 황상이 발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시녀들이 헐레벌떡 늘어놓은 경대를 접고 패물 따위를 갈무리하였다. 어떤 비녀를 꽂을까 내내 고민하였던 희비는 결국 처음 보았던 것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고, 황상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복을 점검하려던 것도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마마, 걱정 마소서. 늘 그렇듯 아름다우시옵니다.”

곁에서 황상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상궁이 나직하게 말하자, 희비는 이내 안면에 미소를 띠며 “그러하냐?” 하고 대꾸했다. 점점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희비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황상이 본래 후궁들에게 무뚝뚝하고 그리 애정을 주지 않는지라, 어찌 편히 대하지 못하고 늘 지아비의 앞에서 긴장을 하기 마련이었다. 이는 최초로 회임을 하였고, 최고의 총궁이라 불리는 희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비빈들의 앞에서는 아니 그런 체, 황상이 그녀의 앞에서는 마음을 놓는 체하였으나 희비는 늘 불안하였다.

“만세 만세 만만세. 폐하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

문이 열리자마자 희비가 예를 갖추니, 산이 느릿하게 손짓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선을 주지 않고 바로 침상 위에 자리하니, 이윽고 상궁과 궁녀들이 뒷걸음질 쳐 방 밖으로 나갔다.

“주안상을 내라고 할까요, 아니면 다과상을…….”

“주안상이 좋겠다.”

사실 희비는 오늘 산이 데리고 온 사내에 대하여 몹시 궁금하여 좀이 쑤시는 지경이었다.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성은 없고, 그저 강이라 불린다고 하였다. 나이는 알 수 없고, 어떤 연유로 그가 황상의 뒤를 따른 것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희비가 가장 불안한 것은 강이라는 사내가 황상이 창천성에 머무는 동안 밤 시중을 들었을까, 그리고 죄인 채윤직이 복권을 노리며 붙인 간자는 아닐까 하는 점들이었다. 채윤직과 자신의 아비 유 승상은 오래전부터 그리 사이가 나빴으니 말이다.

황상은 일전부터 남색을 한지라, 그 많은 후궁들을 다 제치고 침전에 미동을 들인 일이 많았다. 다행히 매번 다른 미동을 들인 고로 따로 첩지를 주지는 않았으니 염려할 바는 되지 못하였으나, 이번에는 콕 집어 한 사람인지라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회임을 했더라도 이에 대하여 크게 기뻐하는 기색이 없는 지아비는 희비에게 늘 두려운 존재였다.

“폐하, 미령하신 기색이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희비가 그리 아뢰니, 산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위에 오른 이래로 창천성에서 머무른 그 며칠만큼 즐거웠던 나날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냐.”

그리 말하며 산이 희비를 끌어당기며 그녀의 젖가슴을 희롱했다. 희비가 부끄러운 기색을 하며 양 뺨을 붉혔으나, 그렇다고 하여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안겨 작게 대꾸했다.

“예. 금궐로 귀환하시오면 신료들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너는 빨리 금궐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계신 곳이 신첩이 있을 곳이어요.”

그리고 희비의 입장에서는 북양행성에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왜냐하면 다른 후궁들은 행행에 함께 따르지 못했으니, 이곳에 있으면 황상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언질도 없이 몰래 창천성으로 떠난 것이 영 서운하였으나, 그래도 다른 궁에 납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지체 말고 말해 보라.”

“아니옵니다, 그런 것은…….”

희비가 황상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속내를 읽는 눈치가 남다르기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거울을 보며 언짢지 않은 체하는 연습을 그리하는데도 흘끗 보는 그 시선에 늘 마음을 읽히고야 말았다. 희비는 손사래를 치며 우선 아니라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후회하였다. 거짓을 고한 것이 되질 않았는가.

“족장足掌을 씻겨 드릴까요?”

“회임한 몸으로 어찌 더러운 것을 만지려 하는고. 그만두어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더 배가 부르면 하고자 하여도 하지 못하니 하게 해 주셔요.”

희비가 말을 돌리는 것을 산은 모르지 않았다. 희비는 지금 강이 대관절 어떤 내력을 지닌 이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분명 홀로 있는 동안에 궁인들을 채근하여 알아오라 하였을 것이나,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름뿐이었을 테니. 산은 팔걸이에 기대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희비를 내려다보았다.

“짐이 네게 말을 하지 않고 행성을 비워 골이 난 게지?”

“아니옵니다, 결코 그런 일 없사옵니다.”

“시치미를 떼기는. 창천성은 승상과 숙적인 채윤직이 머무는 곳이거늘.”

“폐하,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는지요. 신첩은 정치라고는 하나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인입니다. 아비는 아비이고, 신첩은 폐하의 사람이니 그런 말씀 마소서.”

그럴 리가. 산은 내심 비웃었으나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 욕심 많은 유 승상이 희비를 어찌 가만히 두겠는가. 여식을 주군의 후궁으로 주면서 속내를 떠보도록 하였을 것이니, 금궐로 올라가는 대로 산이 창천성에 갔던 일이 곧 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희비가 고운 손으로 산의 발등에 물을 끼얹으니 잘박이는 소리만이 방 안에 고였다. 산이 입을 열지 않으니 희비 역시 망령되게 화제를 지어내지 않았다. 언제든지 귀찮음을 느낄 것 같아 희비는 늘 눈치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 되었습니다.”

희비가 휘건으로 그의 발을 닦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밖에 입시해 있던 궁녀들이 이내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들을 내어갔고, 이윽고는 주안상이 놓였다.

잔에 술을 따르고, 희비는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회임한 몸으로 술을 마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산이 잔을 비우니, 이내 희비가 황상이 가장 즐기는 전병을 집어 건네었다.

“희비.”

“예, 폐하.”

“그림을 그려 봐라.”

“어떤 것을 그릴까요?”

“주막이 있는데, 바깥 평상에서 어떤 사내가 등을 보이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좋겠다.”

산은 처음 강이 그림을 주었을 때를 떠올렸다. 가만 생각하니, 한 번 본 것을 잊지 못하는 그가 산이 움직였다고 하여 그리지 못할 것도 없는데 원래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으라고 한 것이 생각났다. 평소에도 그리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다녔던 것이다.

“폐하, 송구하오나 신첩 주막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소상히 알려 주시면…….”

희비는 몹시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산은 제 팔에 매달려 있는 희비를 바라보았다. 이 여인은 평생을 고귀하게만 살아왔다. 지방의 세력 높은 영주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며, 온통 귀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살다가 황제의 후궁으로 입궐하였다. 그런 여인이 주막을 알 리가 없다. 산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였다.

“모르는 것을 짐이 설명한다 하여 그릴 수 있을 턱이 있나. 허면 평소 치던 난이나 쳐 보라.”

희비가 수많은 후궁들을 제치고 최고 총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그림 실력에 있었다. 여느 화원과 견주더라도 손색이 없는 솜씨가 산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희비는 반색하며 붓을 잡았다. 그리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산이 어느새 그 앞으로 다가와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하였다. 희비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음…….”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거의 다 그려 가는데도 침상에서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멀찍이 떨어져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 그린 것이 그리 보기에 나쁜가. 늘 그리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희비는 점점 불안했다.

“폐하, 다 되었습니다.”

“영 심심한데.”

“…….”

가슴 한구석이 철렁 주저앉는 것만 같다. 황상을 모신 이래로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희비는 어찌 대꾸해야 할지 모르고 잠시 황망히 손을 떨었다.

“희비는 이만 침수에 들도록 해라. 시간이 늦었으니 말이야.”

“예, 폐하.”

“짐은 이만 가마.”

그리고 산이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희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멍하니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내일도 다시 올 것처럼 말씀하시고는 다른 궁으로 납셨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보다 더욱 당황하였다. 심심하다니, 그리고 밤시중도 받지 않고 떠나시다니. 희비는 상궁과 궁녀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굳어 있었다.

같은 시각, 강은 거의 잠들기 직전의 상태로 누워 있었다. 문을 조금 열고 이불을 덮으니 바람이 솔솔 불어 기분이 좋았다. 이 땅에 내려온 이래 한 번도 창천성이 아닌 곳에 머문 적이 없었지만 걸리는 것을 모두 해결하고 온지라 마음만은 편했다. 빨리 3년이 흘렀으면,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방 밖에서 태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의식을 놓기 직전이었던지라, 강은 짜증이 일어 머리칼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갈무리하였다.

“이봐.”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산은 무턱대고 문지방을 넘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방이 조악하고 좁았다.

“어찌 이런 방에서 잠을 잔단 말이야?”

“소인이 고를 처지가 되지 못하니 주시는 대로 받을 따름입니다.”

“뭐, 그건 됐고. 빨리 지필묵을 가져와 봐.”

“예?”

“그대의 그림이 보고 싶어졌어.”

“……지금 말씀이십니까?”

“어허, 날 새겠다. 재게 가져와.”

강은 아무도 몰래 산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정말 황상만 아니라면 진작 저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번 날렸을 것인데. 금수도 잠에 들었을 시각에 갑자기 방에 난입하여 다짜고짜 그림을 그려 내라는 것은 대체 어느 나라 법도인가. 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은 몸을 일으켜 채 정리하지 못한 봇짐을 뒤졌다.

“무엇을 그리면 되겠습니까?”

“난. 난을 쳐 봐.”

“난만 치면 됩니까?”

“그래. 큰일이 났다. 그대 때문에 다른 그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되었으니 말이야.”

강의 입장에서 더 큰 일이었다. 산이 앞으로 어찌 귀찮게 굴지 눈에 선연했기 때문이다.

모로 누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산이 영 부담스럽다.

강이 먹을 가는 동안 바닥에 팔을 괴고 머리를 받친 채로 한참을 있다가, 산은 이내 번쩍 일어나 좌정하고 앉았다. 그 바람에 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빼자, 그 손에 들린 먹을 빼앗아 들었다.

“이리 내. 어찌 그리 손이 느리단 말이야?”

“저는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습니다. 어찌 손이 빠르겠습니까?”

산은 그 말을 듣기는 한 것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벼루에 먹을 벅벅 갈기 시작했다. 강은 한숨을 내쉬며 봇짐 안에서 화선지를 꺼내고 문진으로 곧게 펴서 바닥에 고정하였다. 산이 그 모습을 보고 벼루를 그 옆으로 밀어 주니, 비로소 그림 그릴 준비가 되었다.

“무엇을 그리라고 하셨습니까?”

“난! 난이야.”

“아, 그렇지요. 난…….”

강은 여태 잠에 취해 있던지라, 어찌 그려야 심미성이 뛰어날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종이에 붓을 대었다. 그리고 채윤직이 창가에 두고 아끼던 난을 떠올렸다. 그 난을 어찌 아꼈던지 하인이 방을 청소하면서 그 곁을 지나기라도 하면 경을 치며 멀리 물러나라 엄히 꾸짖기까지 하질 않았던가. 그것을 그대로 그리면 되겠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그 끝을 놀렸다.

“여기엔 새를 그리는 게 좋겠어.”

“예, 허면 여기에 새를…….”

꽃망울을 마무리 짓자마자 산이 여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이 휘갈기듯 몇 번 그 부분을 스치니, 금세 하늘로 포르릉 날아오를 것 같은 참새 한 마리가 생겨났다. 산이 그 모습을 보며 크게 반색하며 다른 한쪽을 가리켜,

“여기는 메뚜기.”

하고 말했다.

“예, 메뚜기…….”

이번에는 붓을 길게 잡고 얇은 선 몇 개를 슥슥 그어 내니 당장에라도 방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닐 것만 같은 메뚜기 한 마리가 흙 위에 놓였다. 산은 좀 더 자세히 보겠다는 듯 몸을 낮추어 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화풍이 참으로 이상해. 이렇게 먹으로 친 난에 이런 미물이 잘 어울리는 모양은 볼 일이 잘 없거든.”

“칭찬이십니까, 아니면 소인이 부족하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대는 바보야? 당연히 칭찬이지.”

“망극합니다.”

“이 그림에 손을 집어넣어 저것들을 다 꺼내고 싶어지는 지경이야. 대단해. 참으로 대단해.”

산이 그리 말하며 종이 위에 손을 뻗었다. 강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말리려 하였으나, 이미 그 위에 손을 대고 난 다음이었다.

“폐하, 아직 먹이 다 마르지 않았습니다.”

“아……. 왜 그것을 이제야 말해 주는 거야?”

산은 손바닥을 뒤집었다. 손에 한가득 검은 얼룩이 졌다. 강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소매에 물을 적셔 그것으로 산의 손바닥을 문질러 대었다. 먹은 바로 지우지 않으면 오랫동안 남는다. 어찌 황상의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힌 채로 있겠는가. 행여 그 잔소리 많은 태감이 알기라도 하면 어찌 잔소리를 늘어놓을지 벌써부터 끔찍했다. 산은 멍하니 강이 닦아 대는 대로 손을 내밀고만 있었다.

소문성이 보았더라면 성도 없는 천한 자가 감히 황상의 어수에 손을 대었다며 경을 칠 일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얼룩이 다 남을 것입니다.”

“얼룩이 대수야? 내 손이 그대의 그림을 망쳤는데.”

이미 다 번져 버린 그림을 내려다보던 산은 진심으로 서글픈 얼굴을 하며 문진 아래 놓인 화선지를 들어 올렸다. 방금 마악 그린 메뚜기가 산의 손에 뭉개어져 못난 모양새가 되었다. 강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 손에서 화선지를 빼앗아 다시 문진으로 바닥에 고정하였다.

“이렇게…… 하……면, 괜찮아집니다.”

다시 번진 종이 위에 강의 붓이 미끄러졌다. 통통하게 살진 수탉 한 마리가 부리를 메뚜기 위에 처박고 툭툭 쪼아 먹는 모습이 단번에 종이 위에 나타났다. 빳빳이 세운 꽁지깃과 날카로운 발톱이 참으로 용맹스럽다. 물감도 아니고 고작 먹 따위로 표현되었음에도 그려진 사물에 윤기가 흐르는 듯하였다.

“하, 이것 참…….”

산은 입을 벌리고 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재능은 하늘의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차라리 마귀의 저주처럼 기이하기까지 해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산은 다시 종이를 눈앞에 들어 올리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대가 다 잘못한 거야.”

“예?”

“다시는 희비가 나에게 그림을 그려 주지 못하게 되었으니, 희비의 책망을 듣더라도 그대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강은 그 말의 영문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산이 저리 좋아하니 다행인가, 싶다가도 이렇게 마음에 들어 버리면 또 이렇게 불쑥 나타나 뜬금없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할 것이 뻔하기에 어찌 하는 것이 좋을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내가 시를 한 수 부를 테니, 저 구석에 그대가 받아 적도록 해.”

“예.”

“어려서부터 세속과 맞지 않고少無適俗韻, 타고나길 자연을 좋아했으나性本愛丘山 어쩌다 세속의 그물에 떨어져誤落塵網中 어느덧 십오 년이 흘러 버렸네一去十五年. 떠도는 새 옛 숲을 그리워하고羈鳥戀舊林, 연못 고기 옛 물을 생각한다池魚思故淵.”

도연명의 귀전원거였다. 그림과 썩 어울리는 시조는 아니었다. 강은 산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황상이 하필 저 구절을 붙여 부른 까닭은 무엇인가. 난세를 진압하고 스스로 황위에 오른 자의 입에서 나올 만한 구절 역시 아니었다. 강이 마지막 한 행을 받아 적기를 주저하였으되 이내 마음을 고쳐 잡고 시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내가 불러 준 것과 다르지 않은가.”

그러나 바다 용은 나라를 근심한다然海龍患國. 산은 마지막 구절에 표정을 굳히며 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안면으로 산과 눈을 마주쳤다.

“어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하여 후회하시는지요. 이미 폐하의 탓으로 죽은 이들의 넋은 참으로 갈 곳 없게 되었습니다. 이리 시를 바꾸어 적으면 그들의 죽음이 대의명분을 위한 것이 되어 헛되지 않으니, 폐하께서는 사사로운 욕망이 아닌 나라의 안녕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황위에 오르신 것입니다.”

산은 강의 대답에 점점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전 주막에서 강이 산을 더러 사사로운 욕망으로 살육을 자행한 이라 칭한 일이 있었다. 그 말을 취소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속으로는 그러한 산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지를 않은가. 그 말은 즉 네 손으로 죽어진 넋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투정을 부리지 말라는 꾸지람이기도 했다.

“그대가 나를 가르치려 드는구나.”

“…….”

“그 되바라진 입을 찢어 놓지 않은 것은 그대의 그림이 아름답기 때문이야.”

“소인의 말이 맞기 때문은 아닌지요?”

강이 지지 않고 되받았다. 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그 당당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으나,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이 없는 모습에 이윽고는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파안대소를 하였다.

“그대는 참으로 재미있는 자야. 그 같은 직언을 한 이가 노인과 헤어진 이래 처음인고로, 내 그대에게 무언가를 하사하도록 하겠어. 그것이 무엇인지 맞혀 봐.”

강은 그 말에 한참을 고민하였다. 대관절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어찌 자신의 입에서 그러한 진심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은 황상에게 무례한 말을 한 것에 대한 죗값은 치르지 않아도 되는 건가……. 아니, 설마.

“……사약?”

“뭐?”

고민 끝에 강이 내어놓은 답에 산은 이내 쓰러질 듯이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리 당당하게 불온한 말을 해 놓고는 바로 죽음을 각오하는 꼴이 참으로 기묘하다. 여태 수많은 전장을 누벼 오며 갖가지 사람을 다 만나 보았으나 저런 자는 진실로 처음이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그대 하는 소리가 너무 웃겨서 그만. 내가 무엇을 줄 것인지는 받아 보면 알 것이다. 아마 그것이 이후 그대를 크게 구할 테니 말이야.”

산은 그리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고는 그림을 집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이 제멋대로 고쳐 놓은 도연명의 시구가 산의 마음을 거스른 줄로만 알았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었다.

“허면 이만 자도록 해라. 내일은 그대가 조금 바쁠 것이니.”

그리고 알 수 없는 말만 남겨 두고 산이 방을 나섰다.

태감은 방을 나서는 산을 발견하자마자 신을 바로잡아 밑에 대어 주었다. 산이 그 안에 발을 밀어 넣고 돌계단을 내려가니, 이내 태감이 그 뒤를 따랐다.

“저 채강이라는 자 말이다.”

“예, 폐하.”

“참으로 물건이야.”

“예, 그림을 그리는 솜씨가…….”

“아니, 그림이 아니야. 총명하고 의지가 강한 자이니 어디에 떨어트려 놓더라도 제 살길을 열 것이다. 허니 짐이 노인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어졌어.”

“그렇사옵니까.”

“금궐로 돌아가면 내명부는 물론이요, 대소신료들이 저자 때문에 한꺼번에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이야.”

이튿날 새벽, 희비는 상궁이 기침할 시각임을 알리기 전부터 이미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어젯밤 황상이 그 길로 그 강이라는 사내의 처소를 향했다는 전갈을 받고 나서 어찌 서러운지 남몰래 눈물을 찍어 내기도 하였다. 희비에게 있어 그림은 퍽 대단한 존재였다. 다른 후궁들과 차등을 만들어 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희비는 어제 황상에게 바쳤던 그림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붓을 몇 번 더 놀렸다. 다섯 장, 여섯 장쯤 되었을 때에도 희비는 어찌 황상이 갑작스레 심심하다는 감상만을 남겨 두고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마, 수라를 드십시오. 어찌 그러시옵니까…….”

수라상을 받아 놓고도 희비는 수저를 들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그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황상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함께 행행을 나왔을 때만 해도, 그리 곁에 품으시고 아껴 주질 않았던가. 본래 황상의 성품이 무심하다고는 하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희비는 고운 입술을 사려 물었다.

“마마…….”

“린아야. 네가 말해 보거라. 본궁의 그림이 어떠니?”

상궁의 옆에 입시해 있던 궁녀 린아가 한 발 다가가 그림을 바라보았다. 단연 희비의 그림은 그녀를 닮아 고아하고 아름다웠다. 기실, 희비가 그림으로 황상을 홀렸다는 말을 듣고 홀로 방에서 몇 번 난을 쳐 보기도 하였으나 도저히 희비의 것에 따르지 못하여 이내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 린아는 일말의 거짓도 없이 아뢰었다.

“마마, 너무도 아름답사옵니다.”

“하아…….”

그리 아름다운 그림인데 어찌 황상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단 말인가. 희비는 이마를 짚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중 태아를 위해서라도 수라를 들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지만,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지라 쉬이 입맛이 돌지 않는다.

“폐하께서 본궁의 처소를 떠나시자마자 그 강이라는 사내에게 가셨다고 하였지?”

“예, 마마. 하지만 오래 계시지는 않은 줄로 아옵니다.”

“얼마나 계셨느냐?”

“두 식경쯤 계신 줄 아옵니다.”

“본궁의 처소에는 고작 한 식경을 머무시지 않았더냐.”

희비는 크게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조용히 손을 모으고 서서 희비의 눈치를 보던 린아는 한발 나아가며 작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그 강이라는 자의 방에서 폐하의 웃음소리가 났다고 하옵니다.”

“…….”

“네 이년.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가뜩이나 희비가 기분을 상해 있는데 눈치 없이 떠들어 대는 린아를 상궁이 꾸짖었다. 희비는 이마를 짚었다. 어찌 화가 치미는지 손가락이 절로 꿈틀거리니 호갑투가 부딪혀 자잘한 쇳소리를 내었다. 희비는 눈을 감고 화를 삭였다. 이런 것으로 어찌 화가 나는가. 황상이 그 강이라는 자를 안으신 것도 아닌데. 이 모든 것이 회임으로 인하여 감정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일 것이다. 희비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 강이라는 자를 본궁에게 데려오도록 해. 어떤 자인지 봐야겠으니 말이다.”

강은 갑작스레 제 처소에 나타난 상궁을 올려다보았다. 희비 마마의 부르심이 있으니 재게 준비를 하라고 하는데, 딱히 준비할 게 없는지라 그저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궁이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강은 지금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고, 지켜야 하거나 집착하고 있는 것도 없었기에 어떤 대우에도 흥분하거나 기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까닭 없이 까칠하게 구는 상궁의 태도가 다소 의아할 뿐이었다. 강은 희비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문전에 다다라 상궁이 희비에게 강의 입시를 아뢰니, 그 안에서 들이라는 미성이 들려왔다. 희비는 분명 북양행성으로 오자마자 산을 마중 나왔던 그 여인일 것이다. 먼발치서 잠깐 보았으나 그에게는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다를 것은 없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그리 생각했을 무렵 문이 열렸다.

“희비 마마를 뵙습니다.”

강이 그리 인사를 올리니, 희비가 그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황상이 그간 침전에 들인 미동들과는 인상이 조금 달랐다. 분명 미남이라는 말이 아까운 외모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여인네처럼 나긋하지도 않았다. 다만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이 어느 가문 자제 같은 분위기를 풍기니, 성이 없는 천것이라 생각하기가 어려울 따름이었다.

“네가 강이라는 자이냐?”

“예.”

“폐하께서 너를 창천성에서 데려오셨다지?”

앉으라는 말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니 강은 하릴없이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산은 앉으라는 소리는 하였는데 말이다. 자신을 천대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리가 조금 아팠다. 그리 실속 없는 감상을 속으로 내어놓으며 강이 다시 한번 “예” 하고 대답했다.

“폐하를 어찌 뵙게 되었느냐?”

사연이 길었다. 게다가 후궁에게 말하기에 그리 듣기 좋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주막에서 불온한 말로 황상을 능멸하였고, 그날 밤에는 벽에서 떨어져 그대로 깔아뭉갰다. 저 고운 귀로 들으면 기겁할 것이다. 강은 잠시 망설이다 간결하게 대답하였다.

“우연히 오다가다 뵈었습니다.”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무례를 범하느냐!”

강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를 이곳으로 인도하였던 상궁이 큰 소리로 나무랐다.

‘하여튼 웃전은 가만히 있는데 꼭 아랫것들이 주둥이를 놀린단 말이야…….’

상궁과 태감을 연관 지으니 실로 그렇다. 어찌 되었든 태도를 문제 삼으니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 강이 짧게 덧붙였다.

“송구합니다.”

“너의 직분이 무엇이지?”

“관직을 받지는 않았으나 폐하께서 제 볼품없는 잔재주를 높이 사 주시어 이리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잔재주?”

희비가 기대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되물었다. 그리고 설마, 하고 생각했다. 만일 저 입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라는 말이 나온다면 작야 황상이 희비를 내버리고 저 사내를 만나러 간 연유가 모두 설명된다. 희비가 호갑을 한 손으로 팔걸이를 세게 쥐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온데, 우연히 폐하께서 제 그림을 보신지라,”

“역시.”

희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어 강의 말허리를 잘랐다. 강이 슬쩍 시선을 올려 희비의 표정을 확인하였다. 드러난 표정이 안온하기는 하여도 손끝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히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어찌 저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자가 이 땅에서 죄인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본궁 역시 폐하와 함께 그림을 즐기는지라, 네 그림이 궁금하구나. 본궁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도록 해라.”

“……어떤 그림을 이르십니까?”

“어디 보자……. 본궁이 시방 회임을 하였으니, 보기에 아름답고 따뜻한 그림이 좋겠지. 폐하께서 네 재능을 높이 사셨다고 하니 본궁도 기대가 되는구나.”

대관절 어떤 그림이기에 황상이 자신을 내버리고 저자를 귀히 여기는지 궁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희비가 손짓하자 상궁이 지필묵을 들여와 강의 발밑에 늘어놓았다. 강은 결국 바닥에 앉아 먹을 갈게 되었는데, 벼루에 그것을 문대는 내내 치미는 짜증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강 역시 그림 그리기를 즐기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억지로 붓을 잡는 것이 마냥 기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황상을 향한 반감을 그 후궁에게까지 미치게 할 수는 없는지라, 별말 없이 연적의 물을 벼루에 쪼르륵 따를 뿐이었다.

“허어…….”

희비는 강의 손이 화선지 위를 누빌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모양 하며, 그 손 밑에서 피어나는 그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유려하니 어찌 황상을 홀렸는지도 십분 이해가 되는 지경이었다. 강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수풀이 우거졌으며, 기골이 장대한 산등성이 생겨났고, 물감을 쓰지도 않았는데 하늘에 진 노을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였다. 희비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런 그림을 보면 자신의 것이 당연히 하찮아 보일 것이다.

“다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 도화청의 화원 그 누구도 이자를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희비는 강의 솜씨에 경탄과 시샘을 하면서도 저자의 손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내 그러한 잔인한 공상이 태아에게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만두었지만, 그 정도였다. 행여 산이 그림을 즐기지 않았더라도 저 그림을 보면 빠져들었을 것이다.

“훌륭하구나.”

“황송하옵니다.”

“폐하께서 너를 어찌 아끼시는지 알겠다. 허면 작야에도 폐하께 그림을 바친 것이냐?”

“예.”

그림만 바친 것이냐. 그 말이 가장 하고 싶었다. 더 속되게 이르자면 그림뿐 아니라 그 천한 몸뚱어리도 함께 바친 것은 아니냐. 그리 묻고 싶었다. 하지만 황상의 후궁 된 처지로 그런 천박한 말은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너는 본래 창천성에서 무엇을 하였느냐?”

원래는 창천성의 관리였지만, 그 말을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어떻게 성도 없는 이가 관리가 되었는지 의문이 생기면, 강이 절연을 당한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강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대답하였다.

“기방을 돌며 기녀들에게 그림을 팔았고 창천성에서 허드렛일을 하였습니다.”

“쯧!”

희비는 혀를 찼다. 참으로 천한 자가 아닌가. 그런 자가 운수대통하여 황상의 눈에 들었으니, 조상 대대로 공덕을 쌓았더라도 이만큼의 광영은 과분하였다. 제아무리 속을 알 수 없는 황상이라 할지라도 천것에게 승은을 주실 리 없다. 그리 생각하니 그나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재주가 대단하나 본분이 천한지라 크게 출세는 하지 못할 것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는 힘들겠구나.”

희비가 그리 말하니, 강은 듣고 있기가 우스워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신분 운운을 듣고 있자니 그런 것에 일절 개의치 않는 듯 보였던 산이 떠오르질 않은가. 지존이 하지 않는 말을 그 후궁 따위가 하고 있는 모습이 호가호위가 따로 없는지라 그저 같잖았다.

“이…… 이 미천한 놈이 감히 뉘 안전이라고……!”

희비는 단번에 표정을 일그러트렸고, 상궁은 그녀를 대신하여 호통을 내질렀다. 강은 문득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이 사바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한들, 한동안 황상의 곁에서 지내야 한다면 그의 후궁에게 밉보여 좋을 것이 없었는데 말이다.

“송구합니다. 소인도 모르게 그만…….”

“소인도 모르게 그만?”

상궁의 억센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강의 뺨 위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강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갔고, 상궁은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거칠게 호흡을 다잡고 있었으며, 희비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황상이 이 사내를 총애한다 할지라도 천한 것이 감히 희비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진노하시리라.

“폐하, 폐하!”

침상 위에 누운 채로 간밤에 강이 그려 주었던 그림을 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산은 정적을 깨는 소문성을 향하여 서책을 내던졌다. 정통으로 소문성의 이마를 맞고 튕겨 나간 서책이 매가리 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허나 그는 그것에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폐하, 큰일이옵니다.”

“채강이 그림과 서예에 능하다고 하더니, 그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구나. 서체가 예사롭지 않다.”

“폐하!”

“마음 같아서는 짐에게 올라오는 상소는 모두 그자를 일러 새로 쓰게 하고 싶을 정도야.”

“……폐하!”

“짐은 귀머거리가 아니다.”

“채강이 희비에게 불려 갔다고 하옵니다.”

불려 간 정도가 아니었다. 희비 앞에서 코웃음을 쳤다가 상궁에게 따귀까지 맞았다고 하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소문성은 궁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길이었는데, 산이 이에 어찌 반응할지 조금도 예상된 바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였다.

산이 보위에 오른 이래로 특정인에 드러내 놓고 관심을 보인 일이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한다면 희비가 유일할 것이다. 한데 희비 이후로 지대한 관심을 받은 이는 강이 또한 유일하였으니, 산이 그 두 사람 사이의 우열을 어찌 가를지도 궁금하였다.

“그래서?”

“채강이 희비가 하는 말에 코웃음을 친지라, 곁에 입시해 있던 상궁이 채강의 뺨을 쳤다고…….”

“건방진 년이로구나. 그래서 희비가 그 상궁을 어찌했다고 하던?”

산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되물었다.

“예?”

“희비는 짐의 아이를 가졌으니 그 아이의 어미가 되려면 지혜로워야 하지. 희비가 진실로 현명하다면 그 상궁을 엄히 다스릴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부화뇌동할 것이니 둘 중 어찌 굴지 궁금하구나.”

“……하오시면,”

“너는 짐이 희비의 처소로 가 물고를 내길 바랐던 것이냐? 물고를 낸다면 둘 중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희비? 아니면 채강?”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옵고…….”

“방금 채강이 짐에게 매달려 그 일을 고해바치고 상궁 년을 요절내 달라 간청하는 상상을 하였는데 조금 재미있었다.”

그리 말하며 산이 웃었다. 소문성은 고개를 틀며 눈을 질끈 감았다. 황상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할 이가 아니라는 것을 매번 잊고 마는 멍청한 머리를 탓하면서.

“희비가 단단히 골이 난 모양인 게지. 짐이 어제 채강의 처소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어 환장병이 난 게야.”

“하오시면 희비의 처소로 납시지 않으시는 것이옵니까?”

“짐이 일개 환쟁이가 고초를 겪는다고 하여 일일이 참견을 할 수야 없지.”

그렇게 말하는 산의 손에는 여전히 강이 그린 그림이 들려 있었다. 소문성은 한참 눈치를 보다가, 이만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소문성.”

“예, 예! 폐하.”

“채강이 처소로 돌아가는 대로 짐에게 전해라. 그자가 삐치기라도 하면 짐에게 그림을 아니 그려 줄 것 아니냐. 놀아 주기라도 해야지.”

오히려 누가 보더라도 강이 산과 놀아 주는 상황이었다.

“희비야 몇 번 도닥여 주면 금세 화를 풀 테지만 그자는 짐이 가진 것으로 어찌해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단 말이지. 그건 그렇고, 장죽은 언제 다 고친다더냐?”

“반각만 기다리소서. 곧 되옵니다.”

“답답해 죽을 것만 같다. 더 늦으면 목을 날리겠다고 전해라.”

산이 짜증스럽게 말하니 태감이 더욱 자세를 낮추며 “예, 폐하” 하고 답하였다. 평소 같았으면 농담이나 몇 마디 하고 말았을 것이나 미묘하게 신경이 곤두선 듯 보인다.

“…….”

“상궁은 그만두어라. 본궁은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단다. 네가 본궁을 비웃은 속내가 무엇인지 어디 들어 보자꾸나. 허면 네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지, 받지 않아도 되는지 판단하겠다.”

강은 그 뺨을 감싸 쥐지도, 그렇다고 불쌍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뺨이 부어오르지만 않았더라면 아무도 강이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눈초리로 희비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오서도 소인을 두고 천하다 하지 않으셨는데, 폐하의 후궁이신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 황당하여 웃었습니다.”

“이자가 그래도……!”

“상궁은 물러서 있거라.”

희비는 이대로 갔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이라고 판단하여 상궁이 다시 한번 손을 휘두르기 전에 이를 막았다. 저 강이라는 자가 오만방자한 것이 황상이 조금 그 재주를 귀엽게 여겨 주었다고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황상처럼 변덕이 심한 분이 이 땅에 없을 것인데, 언제 떠날지 모르는 성심을 믿고 기고만장하는 꼴이 볼만했다.

“그만 물러가라. 본궁이 험한 것을 보았더니 아기가 피곤하다고 하는구나.”

저자를 막 대했다가 나중에 황상이 불호령을 내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 희비는 몸을 틀어 강을 외면하였다. 물러가라고 하니 물러가는 수밖에. 강은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희비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그저 자고 싶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 못다 잔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진다. 강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발을 내디뎠다. 강은 느릿하게 걷다가도, 이렇게 모습을 내보이다 보면 또 어느 눈에 띄어 불려갈지 모르는 노릇이므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방에 거의 다다라 문고리를 잡았을 무렵,

“이봐!”

하는 호명 소리가 들렸다.

강은 설마, 하면서도 저 목소리의 주인이 산임을 알았기에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후원에 있는 작은 정자 위에 산이 난간에 기댄 채로 장죽을 흔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 살피니 태감은 온데간데없고 산이 홀로 정자를 지키고 있었다. 강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쩌면 산이 희비에게 하였던 발언에 대하여 전해 듣고 다그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리된다면 어쩌면 감사한 일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곳에서 쫓겨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홍복일지도 몰랐다.

“뺨이 부풀어 올라 바늘로 찌르면 터질 것 같아.”

맞은편에 선 강을 두고 산이 말했다. 강은 그제야 제 뺨이 부어올랐음을 알았다. 상궁의 억센 손바닥이 따귀를 스쳤을 때 잠시 얼얼하고 놀랍기는 하였으나, 그리 호들갑을 떨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았기에 그런 줄로 몰랐는데 말이다. 강이 괜히 손바닥으로 뺨을 꾹 누르며 고개를 외로 틀었다.

“어찌 뺨이 그래?”

강은 그 말에 산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놓인 다과상에 오른 매작과를 입에 밀어 넣으며 멀뚱하게 올려다보는 표정이 참으로 기이하다. 어찌 보면 순진하게도 보였고, 또 어찌 보면 의뭉스럽게도 보였다.

‘진실로 산이 몰라 묻는 것일까.’

몰라서 물었든, 알아서 물었든 강이 생각해 둔 답은 하나였다.

“벌에 쏘여 그렇습니다.”

괜히 희비의 처소에서 있었던 일에 떠들어 대었다가 갖은 보고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 저렇게 말해 두면 그래도 어느 정도 귀찮은 담화는 할 필요가 없었다. 산은 그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그래? 그럼 앉아. 약이라도 바르도록 해라.”

하며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내가 오늘은 그대에게 주기로 약조한 것을 주려고 해.”

“후에 저를 구할 것이라 말씀하셨던 그것 말씀이십니까?”

“……음, 그건 아닌데. 그것은 이것보다 좀 더 낫다.”

산은 바닥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옆에는 문방사우와 문진이 있었으니, 강은 또 그림을 그리게 하려는 모양이라 생각하여 한숨을 쉬었다. 새 문방사우와 고급 화선지를 선물할 테니 앞으로 더 그림을 많이 그리라는 소리인가. 본래 황상이 그럴 목적으로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환장하는 줄은 몰랐기에 골이 다 아팠다.

“이번엔 무슨 그림을 그리면 됩니까? 아니면, 글씨를 쓸까요?”

“그대가 써 보겠느냐?”

“아, 제가 쓰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무엇인데요?”

“전교.”

강은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강의 서체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한들, 전교를 대신 써 보겠느냐 묻는 황제가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기는 하였을까. 강이 손사래를 치며 연신 거절하니, 산이 대신 머루에 개어 놓았던 붓을 쥐었다.

“두 개를 쓸 건데, 하나는…….”

말끝이 흐려지니, 강은 다음의 윤음을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산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하여 글씨를 써 내렸다. 다른 자의 서체를 그리 아끼는 자치고는 그의 솜씨도 못지않았다. 하기는, 그리 즐기는데 직접 해 볼 생각을 아니 하지는 않았겠지. 시원하게 떨어지는 붓끝이 자아낸 서체가 산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강은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이건,”

“내가 그대에게 성을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몇 개 생각해 보았는데, 마음 가는 것으로 정해 보도록 해.”

“황은이 망극합니다.”

“하나는 최씨다.”

“예……. 예?”

당황하여 고개를 쳐드니 산이 어느새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황상이 또 농담을 한 것이다. 강이 그를 노려보자 산이 손사래를 치며,

“알았어, 알았어. 장난 두 번 쳤다가는 그 눈빛에 꿰뚫려 죽을지도 모르겠군.”

“다른 건 무엇입니까?”

“이理가다. 난 그대가 이 성을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

강은 산이 어떤 생각으로 이씨를 주려는지 알 것 같았다. 창천성에는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깊고 넓은 강이 있다. 그 이강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그중 민간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로 산의 모후가 꾸었던 태몽에 대한 것이다.

당시 영주의 정실이었던 그녀가 석양이 지는 저녁, 한가롭게 이강에 산보를 나왔다가 시녀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몹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이강 한가운데서 거품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별안간 그 안에서 집채만 한 용 한 마리가 승천을 하였다. 그녀가 몹시 놀라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으니 용이 한참 창공에서 유영하다가 이를 발견하고 갑자기 한 줄기 섬광으로 변하여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산이 강에게 그 성을 준다는 것은 창천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음에 듭니다.”

“그래?”

“예. 앞으로는 이가로 살겠습니다.”

강이 그리 대답하니, 산이 전교에 비워두었던 성씨 란에 이理 자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한쪽에 놓아두었던 옥새로 끝을 장식하였다.

“자, 이걸 그대에게…… 주려 했으나, 아직 먹이 안 말랐을지도 모르니 이따가 주마.”

“예를 차리지 않고 이렇게 내리셔도 되는 겁니까?”

“귀찮게 그런 것을 어찌. 정 마음에 걸리면 금궐로 돌아가거든 성대한 연회라도 열어 줄까?”

“말씀이 참으로 감사하지만 싫습니다.”

“오늘은 볕이 참으로 좋구나. 이대로 낮잠이나 자고 싶다.”

“행행을 나오셨는데 못 하실 것이 무에 있습니까. 전 이만 돌아가 보겠으니, 폐하께서도…….”

말을 맺기도 전에 산이 강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이제는 처음도 아니니 펄쩍 뛸 것도 없으나, 저번처럼 동굴도 아니었고 이렇게 사방이 트인 곳에서 이랬다가는 소문성이 귀찮게 굴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강이 난감하다는 듯 산을 내려다보자, 산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한 시진쯤 있다가 깨우도록 해라. 오랜만에 글씨를 썼더니 피곤해.”

“매일같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저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매일 놀아 주잖아.”

“제가 놀아 드리는 것이 아니고요?”

“어허, 그 주둥이. 어찌 맞는 말만 골라 하는고. 그러니 내가 할 말이 없질 않아.”

강은 그 말에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산이라는 자는 참으로 이상하다. 그리 귀찮게 구는데도, 하는 행동 하나하나 마음에 차는 것이 없음에도 미워하기 힘들었다. 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산이 무어라 더 말로 희롱을 하기 전에 그의 눈을 제 손바닥으로 감겼다.

“잠이나 주무십시오. 그러다 한 시진 다 지나겠습니다.”

산은 이윽고 그 무릎 위에서 잠에 들었다.

정자 위에 든 바람이 강에게 내려진 전교 위를 한 번 스치니 화선지가 나부꼈다. 황상이 직접 성을 내린 일은 건국 당시 공신에게 그리하였던 것이 유일했으므로,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찌 될지는 참으로 흥미롭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강이 희비의 처소에서 나서자마자 황상이 그를 불러 보았다는 소식은 하루 종일 희비를 근심케 하였다. 그녀는 한 식경마다 상궁을 일러 강이 어찌하고 있는지 보고 오라 하였는데, 여섯 번이 넘도록 “폐하를 뵙고 있다”는 말만 되돌아오는지라 어쩌면 그자가 황상에게 희비의 처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거짓되게 아뢰어 혜안을 흐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리고 자시가 막 넘었을 즈음이었다. 희비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해 보려 소복 차림으로 침상에 앉자마자 소문성이 문밖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희비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모습이 아름다운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아니, 그러한 마음가짐조차 되지 못하였다. 황상이 낮의 일을 문책하기 위하여 납셨다면 어찌 반응해야 하는 것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세 만,”

“그만두라.”

야장의 차림의 황상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예를 갖추는 희비를 흘끗 바라보았다. 희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꿇은 무릎을 펴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상이 익숙하게 그녀의 침상에 가 앉으니, 희비가 그 앞으로 나아가며 조신하게 말하였다.

“야심한 시각에 어찌 납시셨사옵니까.”

“희비, 이리 와라.”

대답 대신 황상이 손을 내밀었다. 문책을 하러 납셨다면 응당 다정스레 옆자리를 내주지는 않으시겠지, 그리 생각하니 무거운 마음이 다소 가벼워진다. 희비는 그 손을 조심스레 맞잡으며 그 옆에 몸을 내렸다.

황상의 손을 맞잡은 그 두 섬섬옥수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황후가 없는 지금의 내명부에서 희비는 명실상부 최고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후궁들을 다스리고, 그 갈등을 중재하며 처벌을 정하는 등 황후와 진배없는 영화를 누렸다. 황상도 이에 대하여 희비를 나무란 일이 없었다. 오히려 늘 수고가 많다, 그리 말하며 다독여 주었다. 그러니 설마 성도 없는 천것을 조금 불러 무례를 다스린 것으로 진노하실 리가 없다.

“어찌 야심한 시각에 아직도 불을 끄지 않은 것이냐.”

“수를 놓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폐하께오선 어찌 침수 아니 드시고 신첩을 찾아 주셨습니까?”

“짐이 너를 보러오는 데에 어찌 이유가 있을까.”

그리 말하며 황상이 희비의 무릎을 베고 누우니, 그녀가 익숙하게 용안에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이렇게 되고 나니 한나절 동안의 심려가 말짱 헛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어쩐지 허망하기까지 하였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황상이 친밀하게 구는 것은 후궁들 중에서도 희비가 유일하였다. 이따금 모여 담소를 나눌 때에도 황상이 제 무릎을 베고 주무셨다고 하면 다들 어찌나 부러운 시선으로 보았던가.

“금일은 태의가 다녀갔느냐?”

“예, 폐하. 신첩도 아기도 건강하니 염려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너도 아기도 무탈할 테지.”

희비는 안면에 고운 미소를 띠며 황상의 뺨을 쓰다듬었다. 사실 희비는 황상이 자신의 태에서 황자가 나기를 바라는지에 대하여 확신이 없었으므로, 언젠가는 꼭 떠볼 작정이었다. 자신이 황자를 낳아도 되는 것인지, 낳는다면 태자로 봉해 주실 것인지. 그리된다면 황후는 물론이고, 못하더라도 황제의 모후는 될 수 있으니 그녀는 내명부에서 자신이 지닌 권력을 내려놓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희비는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그리 신첩과 아기에게 신경을 써 주시니 그 황은이 하해와도 같사옵니다. 실은 근자에 회임을 한 탓인지 별것 아닌 일에도 자꾸 신경이 쓰여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라…….”

“어떤 것이 희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는데?”

“아니옵니다, 신첩이 과민한 탓이니 염려 마소서.”

희비는 이 여세를 몰아 강이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아뢰기에 조금 이른 감이 있었다. 아무리 황상이 그 일에 대하여 문책할 마음이 없다고 한들, 강이라는 자와 두 시진이 넘도록 함께 있었다고 하니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도로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짐이 맞혀 볼까.”

“폐하, 신첩을 옹졸한 여인으로 만드시려 하시옵니까. 심려하실 일이 아니니 아니 들으신 것으로 해 주소서.”

“어찌 이미 들은 것을 아니 들은 것으로 하느냐. 짐이 맞혀 보겠다.”

희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로부터 황상의 고집은 아무도 꺾지 못했다.

“너를 모시는 상궁이 주제를 모르고 설쳐 대는 것이 같잖으나, 네 심성이 고와 책하지 못하니 그것이 속에 쌓여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게지. 아니 그러하냐?”

그 말에 희비가 헛숨을 들이켰다. 방심했던 탓에 그 충격이 곱절은 되었다. 희비는 용안에 올려 둔 손이 다시 경련하는 것을 느끼며 급히 손을 오므렸다.

황상께서 낮의 일에 대하여 보기에 나쁘다 하신다. 감히 황상의 눈에 든 자에게 손찌검을 한 것에 대하여 심기가 불편하다 하신다.

희비는 눈앞이 거멓게 죽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깥에 시립하여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상궁도 마찬가지였다.

“…….”

“희비는 착해서 탈이구나. 아랫것이 눈에 차지 않으면 웃전이 이를 나무라 개과하게 해야 하는 것이란다. 천한 것의 속까지 다 신경을 써 주다가는 귀찮고 골치 아프니 말이야.”

“……예, 폐하.”

“정히 하기 어렵다면 짐이 분수를 아는 자로 네 수발을 들 이를 찾으라 명하겠다.”

“아니옵니다, 폐하. 신첩이 부덕한 탓으로 상궁이 잘 몰라 그러는 것이니 날이 밝거든 엄히 가르쳐 바로잡겠나이다.”

희비가 작은 목소리로 급히 아뢰자, 황상이 뉘었던 몸을 일으켰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자신을 황상이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으니, 희비는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그 천한 것이 황상에게 어찌 고해바쳤기에 이러시는가. 상궁이 못할 짓을 한 것도 아니거니와, 그 강이라는 자가 어찌 오만방자했는지 아신다면 결코 이러실 리가 없다. 희비는 젖은 눈을 가까스로 추스르고는 지아비를 올려다보았다.

“신첩이 어리석어 폐하께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속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으나, 희비는 무례한 화공을 탓하지 않은 덕으로 그날 밤 황상의 품에 안겨 침수에 들 수 있었다.

다만, 강이라는 자를 그냥 두었다가는 이후 큰 화근이 되리라 확신하였다.

*

산은 날이 밝기 전에 말을 달려 북양을 한 바퀴 돌 작정이었다. 이제 명일이 밝으면 다시 금궐로 돌아가야 했으니, 먼발치에서라도 창천성을 한 번 굽어보고 싶었다. 해가 뜰 무렵 높은 절벽으로 오르면 창 제국 최동단인 창천성이 가장 먼저 밝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따금 산은 그것을 보며 어떠한 벅참을 느끼기도 하였던 것이다.

굳이 따라나서겠다는 소문성의 머리를 장죽으로 툭 때리며 건방 떨지 말라 한 뒤, 산은 홀로 마구간으로 향했다. 작은 수통에 물을 담아서 새끼로 그 주둥이를 묶고 있는데, 저 멀찍이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산은 일순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강이었다. 산은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봇짐이 없는 것을 보면 탈주하려는 속셈은 아닌 듯 보이지만, 동이 트기도 전에 마구간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 수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산이 등자에 발을 걸치고 휙 말 위에 몸을 얹으며,

“그러는 그대는?”

하고 물었다. 강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산을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쏟아지는 잠도 마다하고 새벽부터 나왔더니 하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와 만나고 말았다. 여전히 자신을 흘끗 내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산에게, 강이 체념하듯 대답했다.

“명일 북양행성을 떠나 중경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마지막으로 창천성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 높은 곳에 오를 생각이었습니다. 결단코 폐하께서 침수에 드신 사이에 탈주하려고 한다든지……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함께 가면 되겠군. 나도 그대와 같은 생각이었으니 말이야.”

두 필의 말이 산속을 내달렸다. 북양의 동산은 험하지 않았으며, 길이 넓고 평평하여 말이 달리기에 좋았다. 한때 북양성의 성주였던 산은 그런 고로 매양 말을 달려 이 절벽으로 와서 아래를 굽어보고는 하였다.

목적한 곳으로 달리는 내내, 점점 동이 터오고 있다. 그러고 보니 창천성에서도 꼭 이런 시간에 북양으로 향했던 것이 떠오른다. 늘 이 시간에 이리 서운한 감정이 들게 되는 것은 왜인가. 죽지야 않는다면 언젠가 또 올 수 있겠으나, 한번 중경으로 돌아가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마음이 영 불편하다.

“나는 높은 곳에서 창천성을 내려다보는 게 좋아. 옛날에는 망루에 올라 매일 밤 야경을 보았다. 노인 같은 사람들은 어차피 매일 같은 광경인데 왜 그리 보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달랐거든.”

“…….”

강은 그 말에 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꼭 저와 같은 소리를 하지 않은가. 물론 강이야, 보는 눈이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기에 그 모습이 늘 달랐지만 산의 눈에는 다르지 않을 것인데, 대체 왜.

어쩌면 저자의 눈에는 제 눈에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이는지도 모른다.

“폐하께선,”

“…….”

“창천성이 그리 좋으십니까?”

이번에는 산이 강을 돌아보았다.

“창천성이 그리 좋으시면서, 어찌 창천성을 떠나셨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을 걸 그랬지. 내가 좋아하는 창천성에서 노인과 더불어서. 봄에는 모를 내는 농민들을 구경하고, 여름에는 오색 등롱을 켜 두고 축제를 즐기며, 가을에는 수확을 한 것으로 며칠 동안 잔치를 열었지. 노인은 늘 내가 놀기만 좋아하고 체면을 차리지 않으니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창천성 사람들은 그래서 나를 좋아해 주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왜.”

“널리 알려진 대로 난세를 진압하는 것이 내 숙명이었기 때문이지. 그렇게 원한 적도 없었는데 그리 집착했던 것을 보면 숙명이란 게 정말로 있는 모양이야.”

산이 돌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이내 뒤로 벌러덩 누우며 대답했다. 신은 없다, 신궁은 귀신을 숭배하는 무리이다, 그리 말하며 신궁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산이다. 그런 자가 숙명에 대해 논하는 것은, 또 숙명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듣기에 황당한 이야기였다.

“차라리 돌연 죽었으면 좋겠구나. 더 이상 이 풍진 세상에서 고통받고 싶지 않으니 말이야.”

푸르스름한 새벽의 기운이 걷혔다. 태양이 그들이 있는 높다란 절벽 위에까지 따사로운 기운을 내리쬐기 시작하였다. 저 멀리서는 창천성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던 이강이 반짝이고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북양행성에 강에 대한 이야기가 일파만파 떠돌기 시작했다. 황상이 강이라는 성 없는 환쟁이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였는데, 그 이씨라는 성이 비롯된 구석이 창천성의 이강理江이라더라. 황상의 모후가 이강에서 승천하는 용의 꿈을 꾸고 황상을 낳았으니, 그 강이라는 자에게 그 성을 준 이유가 따로 있지 않겠느냐는 식의 말들이었다. 린아는 새벽같이 희비가 소세할 물을 뜨러 갔다가, 수돗가에서 속닥이는 소리를 주워듣고는 쏜살같이 희비에게 달려갔다.

희비는 아침에 일어나 이미 떠나고 없는 황상의 빈자리를 그저 보고만 있었다. 황상이 행성에 계시지 않고 말도 없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거의 혼절을 하고 싶어지는 지경이었다. 또 어딜 납셨단 말인가. 일찍이 창천성으로 가실 때에도 그리 말없이 떠나시더니, 그분에게 어찌 그런 얄궂은 방랑벽이 있단 말인가.

“한데 강이라는 자도 없다고 하옵니다. 말도 한 필 더 없사옵고, 아무래도 폐하께오서 강이라는 자를 대동하고 납신 것이 아닌가 사료되옵…….”

“마마, 마마! 희비 마마!”

황상이 총애하는 천한 환쟁이를 엄히 다스린 죄로 1계급 강등과 함께 2년의 감봉이 예정되어 있는 상궁은, 물색없이 뛰어다니는 참새 같은 린아를 눈빛으로 꾸짖었다. 상궁의 주의를 받은 린아는 제 잘못을 알아채고 급히 머리를 조아렸으나, 희비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지존의 때를 모르는 방랑벽에 갖은 칠정울결이 도지는지라, 단장을 할 생각도 않고 소복 차림으로 끙끙 앓는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린아. 이 아침부터 소란을 다 피우고 말이야.”

“폐하께서 강이라는 자에게 성을 내리셨다고 하옵니다!”

“성? 무슨 성을 주었다고, 이 땅에 분배되지 않은 영지가 있더냐? 땅이 모자라 공신들끼리 싸우던 것이 엊그제의 일이거늘.”

“그 성城이 아니옵고, 성姓 말이에요! 그자가 본래 성이 없는 천것인데, 폐하께서 새로 성을 내리시어 신분이 높아졌다고 하옵니다. 게다가 그 성이 이가인데, 그 이씨 성을 창천성의 이강에서 따오셨다고…….”

“하아…….”

희비가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낯빛이 다 죽어 가는 꽃사슴과 같다. 상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망령되게 말을 전한 린아를 향해 다시 한번 엄히 꾸짖었다. 희비는 손을 들어 상궁에게 입을 다물게 하고,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심호흡을 하였다.

“성을 하사하시다니……. 그것은 개국 당시에나 있었던 일이거늘, 어찌 그따위 환쟁이에게……. 그자가 본궁의 처소에서 고초를 당했다고 여기시어 본궁이 그자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면…….”

채씨 문중에 강과 절연할 것을 명하면서 애초부터 성을 주기로 약속을 해 두었던 것이나, 이미 희비에게 그런 전후 상황을 고려할 혜안은 감긴 지 오래였다. 희비는 손바닥이 눈에 띄게 얼음장처럼 변해 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금궐로 돌아가거든 아버님을 만나야겠다. 대관절 그자가 무엇인데 폐하께오서 그렇게까지 하시는지 알아야겠어.”

“예, 마마. 사람을 보내 승상에게 말을…….”

“폐하께서 아무리 속 모를 분이라고는 하나, 본궁은 5년간 곁에서 모셨다. 그분께서는 호오가 극명하시고 변덕이 심하신 고로, 총애도 쉽게 하시고 주셨던 마음도 빨리 거두어 가시지만……. 이번처럼 하신 일이 없으니 이는 방심하고 있을 게 아닌 것 같구나. 그자는 단순한 환쟁이가 아닐 것이야.”

비록 들어선 길은 잘못된 길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찾아가는 방향만은 들어맞았다. 희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겨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

“아, 그렇지. 내가 생각을 곰곰이 해 보았거든.”

“어떤 것을 말씀이십니까?”

같은 시각, 두 사람은 개울에 나란히 앉아 찬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산이 멀지 않은 곳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으니 땀이라도 닦고 가자는 말에 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게 된 곳이었는데, 진실로 도연명이 찾았다던 무릉도원이 이런 모습일 것이라 여겨질 정도로 자연풍광이 좋은 고로 두 사람은 결국 예상에도 없던 두 번째 일정을 시작하며 자리를 깔았던 것이다.

“그대에게 어떤 관직을 줄지 말이야.”

“환관은 싫다고 말씀 올린 것 기억하시지요?”

“그래. 어찌 잊어, 그걸. 환관 말고 있어. 내가 사는 희건궁熙建宮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관인고로, 그곳으로 정하였지.”

“그것이 무엇인데요?”

“궁내청.”

궁내청이라 함은, 궁에 배정되는 살림살이 일체를 분배하고 기록하는 기관이다. 가령, 황상의 후궁인 성귀인의 혜인궁에서 일찍이 배정받은 장작을 과하게 쓴 탓에 다 떨어지면, 궁내청에 고하고 새로 물자를 받아가야 한다. 물론 그 소비가 심각하게 많다고 여겨질 때에는 희건궁의 제가를 받아 지급을 중단할 수도 있다.

“희건궁이 여기에 있으면, 궁내청은 여기에 있거든.”

산이 강의 손바닥 위에 열십자를 그으며 위치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강은 멀뚱히 그것을 보고만 있었는데, 한참 신나게 설명을 하던 산은 대답이 없자 그를 돌아보며 대뜸 그러는 것이다.

“그대는 기억력이 나쁜데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것이냐?”

“예, 그럼요.”

“허면 그대가 다시 설명해 봐.”

하며, 제 손바닥을 내민다. 아직도 그날 밤 그림을 만진 탓에 손에 가득 묻은 먹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송구하지만, 제가 기억력이 나쁘진 않습니다.”

“그런 자가 오랫동안 살았던 창천성에 나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야?”

강은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생각대로 일부러 설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체 그의 손바닥 위에서 한참을 헤매었다.

“여기였습니까? 아니면 여기?”

“하하, 간지럽잖아!”

행성에서 다들 어쩌고 있는 줄은 아는지 모르는지, 팔자가 늘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행성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오시가 지나 있었는데, 태감은 반각만 더 늦으시거든 금군 호위무사들을 풀어 황상이 납신 곳을 알아낼 참이었다. 성문 앞에 집결한 호위무사들을 발견한 산이 “워, 워” 말을 멈추고 참으로 한심스러운 얼굴로 태감을 내려다보며,

“무슨 소란이냐.”

하고 물었다. 태감이 산을 발견하고는 헐레벌떡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어찌 이리 늦으시냐 물으니 산이 말에서 번쩍 뛰어내려 귓구멍을 쑤셨다.

“배고프다. 요기할 것이나 내와.”

“예, 어서 안으로 드소서.”

강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삐를 당겨 마구간으로 향하니, 산이 그것을 흘긋 바라보고는 강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아 금군 호위무사에게 넘겼다. 강이 어찌 이러시냐는 듯 돌아보니, 산이 태감을 향하여 소리쳤다.

“이자의 것도 함께 내와라.”

“예? 폐하, 어찌 그런 하명을 내리시옵니까.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재고하여 주십시오.”

“짐이 말하는 것이 법도이지, 이 땅에 법도가 따로 있느냐. 주둥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

하며, 강을 데리고 휙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감은 진작부터 희비가 이것을 깊이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지라, 아랫것들을 일러 명화궁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하였다. 하지만 궐의 벽에는 눈귀가 있는 법. 이 사실이 명화궁전을 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안내받은 대로 산의 맞은편에 앉기는 하였으나, 강 역시 조금 마음이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강이 관심을 두지 않기는 하나, 보지 않으려 하여도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 희비라는 여인이 회임을 한 탓인지 황상의 관심을 받는 저를 퍽 신경 쓰는 모양이라, 강은 이러다가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산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모양으로, 손을 휘 내저으며 화로에서 장죽에 넣을 불씨를 불쏘시개로 쑤시기만 하였다.

산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일찍이 채윤직더러 강에게 절연장을 쓰게 하였던 것이 그가 강을 향할 제반의 관심들을 알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허나 산이 강의 고뇌에 대하여 너 알아서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으므로 강은 귀찮고 번거롭기만 하였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채윤직의 보육으로 성인이 되었으니, 그리 성품이 그릇되거나 모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채윤직에 대한 신뢰였다. 산이 채윤직의 훈육으로 컸더라도 모난 사람이 될 수는 있으나, 그런 자가 채윤직을 그리 곁에 두고 싶어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산이 희비가 나로 인하여 더 이상 저에게 그림을 줄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지.’

그렇다면 희비는 본래 산에게 그림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그것이 강에 의하여 일그러졌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강은 몰래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보다 더 이르게, 그리고 더 심각하게 귀찮아질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그림을 본 뒤로 희비를 찾지 않게 된다면 그 미움은 누가 다 받을까.

“표정이 개떡 같은 이유가 뭐야?”

산의 거친 말에 강이 상념에서 겨우 헤어 나왔다. 강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상 위에는 수라상이 차려진 다음이었는데, 이를 내오는 궁녀들이 계속해서 강을 흘긋대는지라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자가 개국 당시를 제하고는 처음으로 황상에게 성을 하사받았으며 심지어는 겸상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 받아 마땅했기 때문이었다.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닌 게 아닌데.”

“그냥…….”

“그냥?”

강은 말을 꺼내기에 앞서 방 안에 입시해 있는 이들을 곁눈질 쳤다. 태감은 물론이고, 기미를 하려 들어온 기미 상궁과 수라를 내온 궁녀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말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밥이나 제대로 목구멍 너머로 넘기겠는가 하고 생각했을 즈음, 산이 말하였다.

“모두 물러가라.”

“폐하, 아직 기미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기미 상궁은 짐의 수라에 독을 탔느냐?”

산의 말에 기미 상궁이 사색이 되어 바로 바닥에 엎드리며 읍소하였다.

“폐하, 아니옵니다! 결코 그런 일 없사옵니다!”

“누가 그렇다고 했느냐. 그러하냐고 물었지. 아니라면 일없으니 일어나 물러가라.”

천 길의 겁화가 들끓는 지옥에 내던져진 듯, 기미 상궁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고 재게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황상의 화법은 심히 거칠고 직설적인지라, 법도에 물든 궁인들이 들으면 번번이 기함을 토하는 지경이었으므로 물러나라 할 때 물러나는 것이 좋았다. 태감은 하는 수 없이 앵알앵알대던 것을 그만두고 다른 궁녀들을 데리고 퇴전하였다.

“자, 이제 한번 말해 봐.”

“재미있으십니까?”

“응? 무엇이?”

“이렇게 하시는 것이요.”

산은 그 말에 크게 웃기 시작하였다.

“재미있지.”

“폐하께서는 지존이신고로, 저들은 폐하의 말씀 하나에 삶과 죽음을 넘나듭니다. 소인에게 긴히 들으실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그리 말씀하시면 되옵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그대는 그대의 아비를 닮아 하는 말도 똑같구나.”

수양아들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비라 칭하는 것을 보면, 산의 눈에는 강이 그리 채윤직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강은 어쩌면 산이 자신을 데려온 까닭이 단순히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이 아니라 채윤직의 가솔을 어떻게 해서든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했다.

“희비가 그대를 귀찮게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

“게다가 따귀를 쳤다지.”

“그것은 희비가 아니라 희비를 모시는 상궁이었고, 상궁이 그리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먼저 무례를 범하였고, 그럴 만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대가 어찌 무례를 범하였는데?”

“희비가 한 말에 제가 코웃음을 쳤습니다. 폐하께선 다 알고 계셨군요. 어찌 제가 벌에 쏘였다 거짓을 아뢸 때도 그리 태평하게 계셨습니까.”

“그것은 그대가 어찌 구는지 궁금해 그랬어.”

산은 문득,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머릿속에 했던 상상을 되뇌어 보았다. 황상이 납셨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방에서 버선발로 뛰쳐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다리에 매달려, “희비가 망령되게 아무 잘못 없는 저를 학대하였으니 물고를 내어 주십시오!” 하고 흐느끼는 모습이었는데 결코 그럴 일이 없을 것임을 알지만 재미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산이 낄낄대며 웃자, 강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폐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뭔데?”

“소인을 중경으로 데려가시는 까닭은 단순히 소인의 그림을 즐기시기 때문입니까?”

“그것 외에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으냐.”

“소인은 모르기 때문에 여쭙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 줄을 모르는 자가 어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고. 그대가 또 나에게 거짓을 고하는구나. 그대가 생각하는 연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라. 허면 대답해 주지.”

“…….”

강은 잠시 고개를 뒤로 빼었다. 저 산이라는 자는 참으로 기이해서, 마냥 철딱서니 없고 한량 같다가도 문득 저렇게 의표를 찌르는 말을 하고는 한다. 채윤직이 대관절 어찌 모셨는지 궁금해지는 지경이었다. 저런 살 떨리는 주군이 있으면 배알할 때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것이다. 강은 잠시 상 위에 놓인 물을 마시며 입술을 축였다.

“채윤직의 가솔이기 때문입니까?”

“또 다른 것은?”

“소인이 아둔한지라 다른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설마 산이 자신의 능력들을 알고 있을 리는 만무하니, 그것 때문에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산이 강에게 함께 중경에 가자는 타령을 한 것은 채윤직의 양자임을 전혀 알지 못했던, 주막에서부터였기도 했으니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라도 참으로 알아채기가 애매하였다. 산은 느릿하게 장죽을 들어 올려 빨아들였다.

“내가 그대의 그림을 아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납득하고 따라오기 힘든 것인가?”

“……납득할 수 있습니다. 지존께서 소인의 하찮은 재주를 그리 여기시는데 어찌 아니 따르겠습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소인에게 내리시는 것들이 단순한 환쟁이에게 향한 것치고는 몹시 분에 넘치는 일이기에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사람들은 내 앞에서 오줌보를 터트리며 빌빌 기기에 바쁜데, 그대는 참으로 총명해.”

“……송구합니다.”

“그래서 하지 못할 말, 할 말을 모두 그 세 치 혀 위에 올리고 무례히 묻고는 하지. 그래, 내 그대를 심히 총애하니 대답해 주마.”

황상의 입에서 ‘심히 총애한다’는 말이 나오니, 강은 시선을 내리까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무례한 말이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 넘겨 주던 산이 이번만큼은 강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 역시 자신이 실수를 하였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내가 그대를 데려가는 이유는 첫째, 그대의 그림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그대가 채윤직의 양자이기 때문이 맞다. 셋째로는,”

“……셋째로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그대도 창천성이라는 변방에서 그 아까운 재주를 썩히는 것보다 중경에 와서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며, 창천성에 없는 것이 중경에는 가득하니 그것을 보는 재미가 그대에게도 있을 것이다. 내 말이 틀린가?”

사실이었다. 강이 산을 따라나선 데에는 그 이유도 있었다. 물론 앞으로 3년, 귀양을 온지라 무료하고 적적하게 창천성에서 보내도 상관은 없었으나 이왕 황상의 눈에 들어 중경에 가게 된다면 재미라도 찾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흥미 있는 일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고 판단하였고, 그 위험을 막기 위하여 절연장을 받아내었지만……. 강은 미묘하게 인과관계가 뒤바뀌는 기분이 들어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수라를 들고 나서 바로 금궐로 돌아가야겠어.”

“예?”

“그대가 영 무료하고 찜찜한 것 같으니 금궐로 데려가 무엇이 그대의 이목을 끌 수 있을지 보여 주겠어.”

그리 말하고는, 산이 수저를 들어 올렸다.

변덕이 심한 황상의 명으로, 다시 금궐로 돌아갈 준비를 반도 채 하지 못한 궁인들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황상의 성정이 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하고 말아야 하는 고로 어쩔 수 없이 태의와 태감, 금군 호위무사들, 그리고 강이 황상의 뒤를 따르는 선발대로 행성을 나서게 되었다. 산이 일부러 희비를 따돌릴 작정은 아니었을 것이나, 희비가 회임 중인지라 말을 탄 산과는 거리가 벌어질 것이 자명하여 계획했던 대로 명일 중경으로 향하는 마차를 타게 되었다.

“폐하께서 본궁을 미워하시는 까닭은 창천성에서 채윤직이 노망이 나 망령되게 아버지를 모함했기 때문일 것이야…….”

희비의 아비인 유 승상이 채윤직과 숙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산이 여태까지 희비를 총애했던 것이 이상할 지경이기는 하였다. 그들의 경쟁이 그저 그들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 건국 당시 개국공신의 지위를 받았던 채윤직이 죄를 받아 창천성으로 내려가면서, 유 승상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당시 산이 죄인인 채윤직에게 옛정을 보아 파면을 하지는 않고 지방관으로 명했던 것을 두고 조정에서는 “폐하의 신임이 채윤직을 떠났다”고 떠들어 대었으나 역시 행행을 북양으로 올 때부터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음을 알아야 했다.

“그 강이라는 자는 아무리 보아도 천것은 아니었어. 말씨가 단정하고 안면이 고와 고생을 몰랐을 것이다. 그자는 어쩌면 채윤직의 심복일지도 모르니, 곁에서 폐하께 망령된 말을 하여 본궁과의 금슬을 깨어 놓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본궁은 이미 폐하의 사람인데 어찌 폐하께선 본궁의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신단 말이냐…….”

애초부터 희비가 황상의 사람이 된 배경이 그녀의 아버지인데 어찌 따로 두고 볼까. 허나 이미 지아비에게 매료된 여인에게는 말짱 헛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금궐로 돌아가면 그자로 인하여 일대에 파란이 일겠구나.”

“마마, 마음을 단단히 하소서. 폐하께오서 그런 간신의 세 치 혀에 놀아나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마께오서 가장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알다마다……. 허나, 그자가 그림으로 폐하를 홀린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자신이 바로 그리하여 총애를 얻어 내지 않았던가.

“재게 채비를 하려무나. 늦지 않게 금궐로 가 미리 큰 사달의 준비를 해 두어야 할 거야. 그래야 우리 아기의 앞길이 평탄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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