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27/27)

<에필로그>

모처럼 포근하게 내리쬐는 태양 밑에 바삭하게 잘 마른 이불을 걷으며 릴리안은 콧노래를 불렀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어머! 여보!"

갑자기 등 뒤를 감싸오는 든든한 팔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릴리안이 탄성을 지르며 남편의 품에 안겼다. 오후 늦게나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의 이른 귀가가 못내 즐거운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리리가 보고 싶어서 빨리 돌아왔지."

"어머나..."

숨이 막힐 듯한 핑크빛 기류가 주변을 메워 간다. 그 모습을 멀뚱하니 바라보던 에단이 한숨을 내쉬곤 모르는 척 정원으로 들어섰다.

"저 왔어요."

"당신도 차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누가 본다는 거야? 여긴 우리뿐인데."

"그건 그렇지마안..."

에단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에단이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그대로 저택으로 향했다. 중년이 넘어서고 있는 부모님이 금슬이 좋은 건 정말 좋은 일이지만, 가끔 이렇게 본의 아닌 개무시에 상처 받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다.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 전에는 형의 방이었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동쪽 창의 커튼을 활짝 열자, 아름답고 웅장한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디날의 국왕과 자신의 형이 함께 머무는 곳. 예전에 자신의 형이 그랬던 것처럼 에단은 느릿하게 창틀에 걸터앉아 성을 올려다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형, 행복해?"

날렵해진 턱선과 훌쩍 커진 키. 창틀에 올라앉기에는 좀 버거웠던 꼬마는 벌써 성년을 앞둔 소년이 되었다. 포근한 봄바람이 에단의 이마를 어루만지자, 형보다 좀 더 짙은 암녹색의 눈동자가 느긋하게 감겼다.

에단을 보드랍게 감싸 안았던 바람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듯 성 쪽으로 날아갔다. 성벽을 따라 올라서자 활짝 열린 창문 안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는 아름다운 국왕이 보인다. 살짝 미소를 띤 부드러운 입술이 열리며 익숙한 이름이 불려졌다.

"에밀."

"예."

"집무 중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음,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 더 길어진 말린 장밋빛의 고수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듣기 좋은 저음은 난감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지만 굳은살이 박인 손끝은 집요하게 국왕의 귓가와 목덜미를 지분대는 중이었다.

엘리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동그래지는 붉은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에밀이 남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저 입술이, 어젯밤 내 다리 사이에서...

아, 거기까지. 더 이상 상상했다간 집무실에서 거사를 치러버릴지도 모른다. 하긴 그런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엘리어트는 업무를 보고 있을 때만큼은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으므로 에밀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저렇게 예민해졌을 때 땍땍거리면서도 결국 쾌락에 굴복하는 얼굴도 좋지.

엘리어트가 들었다면 기겁을 할 생각을 하면서 에밀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큼하게 웃었다. 시녀들이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안달한다는 그 천상의 미소가 눈앞에서 펼쳐졌지만 엘리어트는 그리 기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야 목덜미를 지분대던 손이 쇄골을 지나 서서히 가슴께로 내려오고 있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얏."

"적당히 해라!"

"너무하십니다..."

결국 엘리어트가 에밀의 손등을 세게 꼬집고서야 에밀은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살짝 늘어진 난처한 눈매에 묻어 있는 웃음기로 보아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리트를 눈앞에 두고 적당히라니, 불가능합니다."

"바, 바보! 가능하거든!"

저 봐.

순식간에 목까지 빨개지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 에밀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럽다. 남들은 절대 볼 수 없는, 오직 에밀 앞에서만 무너지는 가면 속의 얼굴. 국왕이나 엘리어트라는 이름이 아니라, '리트'일 때의 얼굴을 에밀은 가장 사랑했다.

"알겠습니다, 리트. 그럼 나머지는 오늘 밤에..."

"안 할 거야!"

은근슬쩍 오늘 밤을 강조하는 에밀의 말허리를 댕강 자르며 엘리어트가 다시 책상으로 다가앉았다.

엘리어트에겐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몇 백년간 독립되어 있던 나라를 합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요 5년간 부지런히 움직인 성과가 꽤 되었고, 엘리어트가 황제로서 서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아직은 좀 더 고생해야겠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각오했던 바다. 에밀이 아쉬워하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국왕으로서의 정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바쁜 엘리어트에게 한다는 말이...!

엘리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 에밀에게 좀, 많이 소원하긴 했다.

그래, 누구를 탓하겠는가. 에밀은 그저 엘리어트를 사랑할 뿐인데. 잘못이라면 그 사랑에 보답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해야지.

엘리어트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선 자신의 기사를 발견하자 엘리어트의 심장 한쪽이 살짝 무너져 내렸다. 늘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인데, 장난을 좀 쳤다는 이유로 너무 심했나 싶었다.

"...에밀."

"예, 폐하."

화났다. 이건 화났어.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엘리어트가 조심스럽게 에밀의 눈치를 보았다. 에밀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엘리어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엘리어트가 다시 조심스럽게 에밀을 불렀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하던 일, 계속하십시오."

지금은 봄인데, 어디서 한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엘리어트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벌써 20대 중반이 다 되어가는 데도 이럴 때 보면 엘리어트는 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내가 심했다. 화 풀어라."

"화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화난 얼굴인데?"

에밀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끼기긱 하는 녹슨 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만큼 부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안 났습니다. 설령 폐하께서 일주일 내내 먼저 잠들어 버리셔서 제가 욕구 불만으로 죽어버리는 일이 있다고 해도 화나지 않을 겁니다."

...화난 거 맞구만. 엘리어트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어 에밀의 뺨을 만졌다. 에밀의 경직된 미소가 살짝 풀려가는 것이 보였다. 엘리어트가 손가락을 움직여 에밀의 입술 가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올려 그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미안하지만, 이걸로 참아라. 이렇게 부족한 사람인데도, 늘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에밀의 초록색 눈이 뚫어져라 엘리어트를 바라본다. 제비꽃 색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에밀은 왠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애초에 엘리어트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화난 척했을 뿐이다.

"하아... 리트, 당신은..."

에밀의 한숨에 엘리어트가 기쁜 듯 웃었다. 그러나 에밀이 엘리어트의 양 손목을 단단히 잡고 책상에 밀어붙이는 순간 엘리어트의 미소는 딱딱하게 굳어갔다.

"어... 저기, 에밀?"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이제 됐으니, 이제 아래쪽(?)의 화도 풀어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으음..."

순식간에 먹혀 버린 작은 입술이 맥없이 농염한 혀놀림에 얌전해져갔다. 허벅지에 바짝 붙어 문지르는 에밀의 하반신에서 뭔가 뜨거운 열기를 깨닫고 엘리어트의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졌다. 이것, 위험하다!

"잠깐, 에, 에밀...!"

"귀여워, 리트. 역시 못 참겠어..."

에밀의 눈이 욕망으로 반짝였다. 그대로 고개를 내린 채 오랜만에 맛보는 살결을 한 입에 삼키려는 순간, 집무실의 문이 콰당 소리를 내며 갑자기 열렸다.

"폐하, 크라니아에서 편지가... 아..."

반가움으로 들뜬 목소리가 짜게 식어갔다. 엘리어트가 당황해서 에밀을 밀쳐내기도 전에 두 번째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휴, 루비, 집무실 문은 반드시 노크해야 한다고 비슈나 씨가 늘 얘기하잖니. 이번처럼 폐하께서 혹시 발로아 경과 뜨거운 접촉 중이시면 어쩌려구. 루비는 정말 바-보구나."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두 소년소녀가 나란히 서자 그것만으로도 그 주변의 현실감이 옅어졌다. 늘씬한 몸에 작은 얼굴, 하얀 피부와 부드러운 은발에 더해 진하게 빛나는 심해처럼 푸른 심청빛 눈동자.

열일곱 살이 된 루비엔과 루시엔이었다.

"바, 바보라고 하지 마! 그리고 루비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내 애칭은 비엔이란 말야! 델토르에선 다 그렇게 부르는데 왜 너만...!"

"흐응, 그랬던가아-"

"여자애 이름 같아서 싫단 말야! 너 때문에 아카데미에서도 날 루비라고 부르잖아!"

"하지만 보석 같아서 예쁜걸. 너를 상징하는 보석이 있다고 생각해 봐, 멋지지 않니?"

"윽..."

루시엔이 부드럽게 웃으며 루비엔의 손을 맞잡았다. 루비엔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지자 루시엔이 조금 우울한 얼굴을 했다.

"그에 비하면 루시라는 이름은 너무 흔하고, 특징 없고, 재미없는 이름이야."

"그, 그렇지 않아..."

"루비라는 보석은 있지만 루시라는 보석은 없는걸. 너무해, 이대로는 난 시집도 못 갈 거야. 이대로 내게 남는 건 루시라는 멋대가리 없는 애칭뿐이겠지..."

"아냐, 루시! 루시라는 이름이 얼마나 예쁜데!"

"그래! 고모님이 지어 주신 예쁜 이름이다, 자신을 가지거라!"

갑작스럽게 끼어든 엘리어트의 처절한 외침에 루시엔과 에밀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시무룩해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엘리어트와 루비엔은 예외였다.

늘 이런 식으로 애매한 데서 진지하다니까. 에밀이 웃음을 참으며 루시엔의 장난이 더 심해지기 전에 루비엔에게 물었다.

"전하, 무슨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아아, 참."

루비엔이 깜빡할 뻔했던 용무를 떠올리고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내밀었다. 크라니아의 소인이 찍혀 있었지만 서신을 봉한 밀랍에 찍힌 인장은 바다 물결 위의 잎사귀 모양이었다. 엘리어트가 피식 웃으며 서신을 뜯었다. 벌써 오래 전에 크라니아로 떠난 선왕 내외의 편지가 틀림없었다.

'지난번 편지는 잘 받았다. 일이 순조로워 보이니 다행이구나. 나도 잘 지내고 있다. 크라니아는 벌써 조금 더워지기 시작했단다. 아마 지금쯤이면 케닛은 한창 봄이겠구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재미없는 얘기를 좀 하겠다.

혹시 모를 암살에 대비해서 에밀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 네게 반감을 가진 반대파들이 언제 어떻게 접근할지 모르니.

어렸을 때도 잘 지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겠지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즘도 식사 중에 가지를 빼놓고 먹고 있진 않느냐? 열을 내리고 눈을 보호하는 작용이 있다고 하니 편식하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는 배를 잘 덮고 자거라. 네가 어릴 때부터 이불을 차는 습관이 있어서...'

엘리어트는 익숙하다는 듯 레뮤엘의 잔소리로 이어지는 그 뒤의 한두 장을 빼내서 에밀에게 건넸다. 레뮤엘의 편지를 받을 때는 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루시엔과 루비엔에게, 아카데미가 방학이 되면 크라니아로 놀러 올 수 있는지도 물어보겠느냐? 그동안은 힘들었지만 이번에 관광무역법을 개정했으니 그 애들도 성년이 되기 전에 여행을 할 수 있겠지. 바다를 제대로 본 적이 없을 테니 이번 기회에 구경시켜 주고 싶구나.'

"갈래요!"

"갈게요!"

쌍둥이가 상기된 얼굴로 동시에 대답하자 엘리어트가 웃었다. 이럴 때만큼은 아직도 어린아이들이었다.

'...참, 에밀의 생일이 얼마 안 남았다는 얘길 들었다. 크라니아에는 재미있는 특산품이 많으니 선물로 뭘 갖고 싶은지 물어 보거라. 너를 위해 밤낮 고생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해도 괜찮다.'

아뇨, 아버지. 괜한 걱정을 하신 것 같은데요. 엘리어트는 들떠서 반짝이는 얼굴로 평소 갖고 싶었던 것들을 손에 꼽는 에밀을 슬쩍 훔쳐보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밀은 분별력 있고 다정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이득을 놓쳐 버리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디날을 제국으로 만든다는 선대의 오랜 숙원을 드디어 내 아들이 이루어내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너를 국왕으로서가 아니라 내 아들로서 바라보게 되는구나.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일도 물론 있지만, 가끔씩은 아버지에게 의지해 주었으면 한다.

이건 네 능력을 얕잡아보는 것도, 너를 어리게 생각해서도 아니고, 아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은 아버지의 욕심이란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거라.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있겠다. 사랑한다. 내 아들, 리트.'

"아버지도 참..."

"좋은 분이지요."

살짝 붉어진 엘리어트의 눈가를 보며 에밀이 웃었다. 엘리어트는 일부러 붉어진 눈을 숨기려고 창 바깥 먼 곳을 보는 척했다. 저 멀리, 레뮤엘이 그의 반려와 함께 떠난 바다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디날 제국이 서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의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연합국의 형태를 취하던 디날-델토르-라퓨타 연방은 엘리어트 국왕의 진두지휘 아래 서서히 디날에게 흡수되었다.

성년을 맞이하고서 왕위에 앉은 루비엔 왕은 기꺼이 자신의 왕관을 엘리어트에게 바쳤고, 로요라 여신의 가장 신성한 사제는 첫 황제에게 세례를 함으로써 디날 제국의 시작을 알렸다.

엘리어트 황제를 모두가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반대 세력들은 언제나 호시탐탐 그의 목을 노리고 그의 피를 바닥에 뿌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엘리어트 황제의 곁에는 언제나 에이몬드 렉스 발로아 경이 있었다. 엘리어트 황제가 직접 임명한 제국 최고의 기사는 집무나 연회는 물론이고 식사나 침실에서도(!) 함께 했기 때문에 암살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여담이긴 하지만 황제 자신 스스로는 그런 시도가 있었다고 깨닫지도 못했다.

그것은 에이몬드 경의 초인적인 시력 때문이었는데, 거짓말을 할 때의 표정이나 눈동자의 떨림까지 잡아내는 그의 눈은 황제에게 접근하는 그 어떤 위협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에이몬드 경의 보호와 사랑 아래 엘리어트 황제는 새로운 제국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 갔다. 그의 현명하고 공정한 통치 외에도, 그와 평생을 함께한 반려였던 아름다운 녹색 눈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사랑의 노래로 전승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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