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새로운 이름 (26/27)

8. 새로운 이름

감은 눈 위로도 느껴지는 강렬한 햇살에 엘리어트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꾸었던 꿈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뜨게 되면 스스로를 엄청나게 혐오하게 될지도 몰랐다. 멍하니 눈을 감은 채 엘리어트가 중얼거렸다.

"...너무 무서운 꿈이었어..."

"뭐가요?"

움찔, 엘리어트의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꺼풀 사이로 의심이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러니까, 어젯밤 꿈에 밤새도록 엘리어트를 괴롭혔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 눈동자에 비치는 순간, 엘리어트는 갑자기 온 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은 생경한 느낌에 조금 전율했다.

"잘 잤어요, 리트?"

다정하게 귓가에 속삭이며 엘리어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에밀은 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상냥했다. 아, 역시 꿈이었던 거다. 그래, 에밀이 그럴 리 없어. 엘리어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에밀이 배시시 웃으며 엘리어트를 꼭 끌어안았다.

"!"

침대 시트 밑으로 느껴지는 적나라한 살결은 둘 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뜻이었고, 어딘지 우리하게 허리를 울리는 통증은 어제의 꿈이 사실 꿈이 아니라는 외침이었다.

엘리어트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려는 순간 에밀의 얼굴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농밀함을 띠고 엘리어트에게 다가왔다. 하릴없이 마주 닿는 입술은 어제처럼 부드럽지만 어제처럼 격렬하지는 않다. 조금 안심하면서 엘리어트는 에밀에게 낮게 으르렁댔다.

"너... 잘도..."

"죄송해요. 하지만 리트가, 너무 예뻤어요."

정말 미안하다는 듯 살짝 늘어뜨린 눈썹이 귀여웠지만, 이젠 안 속아. 엘리어트가 일부러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 돌아누우려는 순간이었다.

"우흐으윽!"

"리트? 괜찮아요!?"

조금 불편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까까진 허리가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정확히는, 허리가 아니라, 그, 말로 못할 비부가 아리다 못해 쓰려 왔다. 어제 그 난리를 벌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엘리어트는 말로 다 형용 못할 치욕스러움에 왠지 시트를 부여잡고 말았다.

"괜찮으세요? 비슈나를 부를까요?"

"아니! 부르지 마! 부르면 죽어버릴 거야!"

"...아무리 그래도 어제 막 즉위했는데 죽는다는 얘기는 좀."

에밀이 난처하게 중얼거렸지만 그만큼 엘리어트는 절박했다. 필사적으로 말을 안 듣는 몸을 버둥대며 엘리어트가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바닥에 다리를 딛고 일어서 욕실로 향하려는 순간, 엘리어트는 갑자기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기현상을 경험했다.

"뭐, 뭐야! 에밀!"

"쉿. 비슈나가 듣겠어요."

"윽...!"

레이디를 안아올리듯 엘리어트의 허리와 무릎을 받쳐 들어 올린 에밀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듯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 무리하셨잖아요."

"에밀!"

"리트는 가만히 있어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허리를 죄어 오는 팔힘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셌다. 과연 기사 지망생. 열심히 수련했구나.

그러나 엘리어트는 지금 이 순간 열심히 수련한 에밀이 기특하다기보다 무서웠다. 엘리어트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마다 섬세하게 반응하는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았지만 에밀의 행동은 순종적이라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지배적이었다.

"...아프니까 살살 해."

"염려 마세요."

애초에 에밀을 거부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낮게 한숨을 쉬며 엘리어트는 에밀에게 안긴 채 국왕으로서의 기념비적인 첫 날을 시작했다. 그리고, 국왕으로서의 첫 국정업무는 지금까지 그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저, 폐하."

"무슨 일이냐?"

"...외람되오나,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비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어제 막 왕관을 물려받은 국왕은 여전히 얼굴을 살짝 구긴 채 자신 앞에 늘어선 대신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폐하?"

"...아니다. 아무것도."

엘리어트는 한참만에야 아주 불편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이미 정무실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은 뒤였다. 문무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엘리어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런 것을 모를 엘리어트가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엉덩이가 아직도 쑤셨지만 사실 그 부분은 이제 참을 만했다. 진짜 엘리어트를 괴롭히는 것은 엘리어트로서는 전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쪽도, 부탁드립니다. 폐하.'

'스스로 기분 좋게 해봐요.'

'폐하, 정말... 음란하시네요.'

"우으으윽..."

엘리어트는 다시금 떠오르는 어젯밤의 기억에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마친 뒤 정무를 보는 이 순간까지도 어젯밤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침범하고 파고들었다.

‘하아... 정말... 얼마나 밝히는 거예요?’

"하아아아..."

"!?"

점점 더 종잡을 수 없어지는 엘리어트의 행동에 비슈나는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어젯밤 침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얼룩진 시트와 문 너머 들리는 소리로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러나 지금 엘리어트의 상황을 보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겠습니까?"

"...그러지."

방심하지 않기 위해 잔뜩 얼굴이 구겨진 엘리어트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정무실의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정무 보는 동안 살벌한 건 제 아버지보다 더하다고 오늘 오후부터 소문이 날 것이 뻔하게 보였다. 비슈나는 그 광경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어트는 최대한 태연한 척 침실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살롱에서 간단한 다과와 함께 독서를 즐겼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도 상태도 아니었다.

침실로 돌아와 문을 닫은 뒤에야 엘리어트는 무너지듯이 침대로 쓰러졌다. 동시에 욱신욱신하게 몰려오는 하체의 통증에 엘리어트는 결국 속으로만 외치던 욕지기를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젠장..."

"많이 힘들었어요?"

갑작스런 목소리에 엘리어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보아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걱정스런 눈으로 엘리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위험하다. 엘리어트의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졌다. 방어할 새도 없이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것은, 눈앞의 다정한 미소가 아니라-

'후... 좀 더, 움직여줘요.'

"흐윽...!"

"리트?"

아랫배를 달구는 격정에 엘리어트가 허리를 접었다. 에밀이 놀란 얼굴로 다가갔지만 이미 엘리어트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어젯밤 쾌락에 젖어 탄성을 내지르던 얼굴.

"괜찮아요?"

에밀이 걱정스레 물으며 엘리어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온통 예민해져 있는 엘리어트에게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에밀의 손이 닿는 순간, 어젯밤의 신음과 체온과 호흡까지 모든 것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윽..."

"...리트?"

"오, 오지 마..."

에밀은 차분하게 다시 엘리어트를 살폈다. 얼굴은 붉어져 있었지만 식은땀을 흘리거나 괴로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숨이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응?

"...혹시, 흥분했어요?"

"......"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린다. 그 말없는 몸짓이 안겨주는 확신에 에밀은 조금 웃고 말았다.

"리트, 귀여워."

"너, 너...!"

그 와중에 귀엽다는 말은 듣기 싫은지 득달같이 돌아보는 눈동자에는 잔뜩 억울함이 배어 있다. 그러나 침대에 널브러진 채 그래봐야 에밀에게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하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어젯밤 내 밑에서...

"...미안해요, 리트."

"응?"

에밀이 난감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나도 그래요."

"뭘... 설마... 에밀, 잠깐..."

그러나 엘리어트의 저항은 에밀의 입술 사이로 사그라들었다. 끈적하게 얽혀 오는 입술과 혀에 엘리어트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츱, 하는 젖은 소리와 함께 에밀이 촉촉한 눈으로 엘리어트에게 속삭였다.

"해도 돼?"

"잠, 에밀, 잠깐... 읏..."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에밀도 남자라는 걸 느끼게 된다. 강하게 어깨를 붙잡고 셔츠 안쪽을 더듬어 올라오는 손가락이 살갗에 감겨왔다. 상대가 에밀이라서 더 그렇겠지만, 엘리어트는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손을 제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에밀의 뜨거워진 숨이 목덜미에 뿜어지고, 단단해진 에밀의 중심이 엉덩이에 닿는 순간, 잊고 있던 고통이 되살아났다.

"아!"

"!"

단말마의 비명에 에밀의 손이 잠깐 멎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동자만 굴려 엘리어트의 상태를 살폈다.

역시, 아직 아프겠지. 에밀의 손가락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미안해요..."

"...괜찮아."

귓가로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에밀이 고개를 들자, 엘리어트가 터질 듯이 빨개진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렸다. 안절부절 못하는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

"...나... 나도 하... 하고 싶으니까."

엘리어트의 인생에서 최고로 하기 힘든 말이라는 것은 에밀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용기를 내어 준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에밀은 결국 그 빨개진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추고 말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리트가 아픈 건 싫으니까, 다음에."

"...응."

작게 웅얼거리는 듯한 대답에 에밀은 허리 아래가 다시 뜨끈해졌지만 지금 여기서 덮친다면 엘리어트는 정말로 앓아눕게 될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에밀은 엘리어트를 꼭 끌어안는 것으로 타오르는 열정을 얕게나마 억눌렀다.

* * *

디날에 새로운 국왕이 추대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한 뒤 엘리어트는 에밀을 만나기 힘들 정도로 바빠졌다. 레뮤엘이 예상치 못하게 대관식을 너무 앞당겨 버린 바람에 인수인계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레뮤엘은 역시 레뮤엘이었다. 선왕으로서의 역할은 완벽하게 해 냈지만 엘리어트의 몫은 잔인할 만큼 백지로 남겨 두는 바람에 엘리어트의 업무는 사실상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엘리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왕관의 무게를 훌륭히 견뎌내는 중이었다. 살인적인 스케줄이긴 했지만 각오했던 부분이었고 레뮤엘의 도움도-조금이지만-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엘리어트는 여전히 바빴지만, 델토르에서 온 루시엔이 디날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아카데미에 입학 수속을 밟는 것 역시 엘리어트의 일이었다.

"어머나, 폐하. 어서 오세요."

"잘 지냈느냐?"

루시엔이 방긋 웃으며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올렸다. 깜찍한 인사에 엘리어트도 마주 웃으며 살짝 목례를 했다.

아마 루시엔은 엘리어트가 웃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사촌 누이라는 것을 떠나서 엘리어트는 루시엔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방금 차를 마시려고 했는데, 괜찮다면 함께 하시겠어요?"

"그럴까."

사실 엘리어트가 일부러 티타임에 맞춰서 방문했다는 것을 루시엔도 모르지는 않았다. 겨우 열두 살이었지만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될 뻔한 소녀의 시야는 또래보다 조금 더 넓었다.

달가닥, 차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루시엔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에이몬드 공자님이 시간을 안 내어주시나 보네요."

엘리어트의 말끔한 얼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숨겨 봤자 체면만 구길 뿐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엘리어트가 마침내 낮고 빠르게 불만을 토해냈다.

"국왕이 되어서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어. 아버지는 이아네 공과 함께 크라니아로 떠나겠다고 성화이신데다 업무는 줄어들 생각이 없고, 겨우 안정되었나 싶었더니 이번엔 에밀이 특훈으로 너무 지쳐서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아... 하루쯤 빼먹어도 괜찮다고 했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하는 말이 조금만 더 하면 익센 경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잖느냐. 굳이 그걸 가지고 질투할 만큼 내가 속이 좁은 건 아니지만 에밀이 그렇게 말하는 건 왠지 나랑 있는 것보다 익센 경에게 검을 배우는 게 더 즐겁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달까... 아, 그리고..."

...그런 걸 가지고 질투할 만큼 속이 좁은 건 맞는 것 같은데요. 루시엔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생각해보면 엘리어트가 이렇게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상대가 많은 것은 아니었으니 이건 루시엔이 인내해야 할 문제였다.

"그야, 사랑하는 반려님께 조금이라도 더 빨리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에이몬드 공자님은 노력파니까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엘리어트가 언짢은 얼굴을 감추려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는 차향에 왠지 경직된 어깨가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로열 나이트가 되지 못하면 반려로서의 명분을 세우기가 힘들겠지요."

"이미 발로아 공작가는 디날에 소문난 왕후 가문이야. 반려가 한 명쯤 더 나타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투덜대면서도 엘리어트는 사실 에밀의 노력에 토를 달 수 없었다. 루시엔도 그런 엘리어트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아무 말 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어트의 말대로, 에밀이 공작가의 차기 가주가 되어 엘리어트의 반려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이아네라는 선례가 있고, 디날은 해상 무역 왕국인 만큼 여러 가지 문화에 개방적인 편이었으니까.

델토르 출신에다 심지어 남성 반려가 세워지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긴 했지만, 이아네가 레뮤엘의 반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 살이 되기 전에는 델토르 출신이 왕후가 된 데 저항하는 세력이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 엘리어트가 자라면서 왕권 다툼이 없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이아네의 존재는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다.

그러니 아직 후사가 없는 엘리어트 대에 있어서 델토르 출신의 남성 반려가 또 나타나는 것은 거센 저항에 부딪힐 것이 뻔했다.

물론 그가, 디날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혹시 모르지만.

로열 나이트의 직함은 그저 폼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영예의 기준은 오로지 실력이기 때문에 로열 나이트의 이름은 전국 최강의 상징이기도 했다. 만일 에밀이 로열 나이트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낸다면 누구도 에밀을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에밀은 하루하루의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엘리어트가 투덜대기는 해도 에밀에게 서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엘리어트가 걱정하는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신경쓰지 마라. 오히려 내가 미안할 일이지."

루시엔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늘어지는 눈꼬리에서 그리운 고모님의 얼굴을 덧그리며 엘리어트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에밀까지는 어떻게 용인한다 쳐도, 루시엔 대에 이르러서는 어마어마한 저항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디날의 피가 섞였다고는 해도 그녀는 델토르 왕의 적장자였다. 디날의 그 누구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눈부신 은발을 갖고 있지 않았다.

델토르에서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간에 디날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타국인이었다. 디날 왕가의 피가 섞였다고 아무리 주장한대봤자 그녀의 아버지가 델토르의 왕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만일 루시엔이 즉위하게 된다면 누가 생각하더라도 마치 디날이 델토르의 속국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 뻔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레뮤엘과 엘리어트가 충분히 노력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루시엔의 위치는 그러한 것이었다. 자칫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

에밀이 로열 나이트로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는 그러한 이유도 분명 존재했다. 델토르에 대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에밀 나름대로의 싸움이었다.

어쩌면 이리도 상냥한 분들인지.

루시엔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기억할 수 없는 아주 어린 갓난아이 적에, 그녀의 아버지는 괴질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없는 넓은 궁에서 그녀의 가족은 어머니와 루비엔 둘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성인 남성의 부재 속에서 소녀는 아버지라는 이름에 대한 동경을 남몰래 키워갔다. 라이오넬 기사단의 단장 데미안 와드그리드 경이 그녀가 그나마 상상할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그가 웃을 때는 그의 딸 미사를 보고 있을 때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레뮤엘과 엘리어트는 존재는 마치 갑작스럽게 생긴 아버지 같았다. 어머니처럼 작은 일까지 세심하게 돌보는 것은 아니지만 도움을 청할 때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

만일 루비엔이 여기에 함께 있었다면.

아버지의 부재 속에 함께 자란 동생 루비엔을 떠올리자 루시엔은 조금 쓸쓸해졌다. 살짝 늘어지는 그 눈썹 끝을 놓칠 엘리어트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어머나, 무례를 용서하세요, 폐하. 델토르의 가족들 생각이 나서 그만..."

엘리어트가 눈을 빛냈다.

루시엔의 가족은 결국 엘리어트의 가족이었다. 그러고 보면 엘리어트에게는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보지 않은 사촌이 한 명 더 있었다.

"델토르로... 돌아가고 싶으냐?"

루시엔이 아무 대답 없이 생긋 웃었다. 평소와 똑같이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묘한 쓸쓸함을 엘리어트는 눈치채고 말았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그리운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동생 이름이, 음, 루비엔이라고 했었나."

루시엔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폭풍 같은 정치의 암투 속에서 둘은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다.

"루비는 천둥 치는 밤에는 저랑 같이 자지 않으면 잠을 못 잤거든요. 벽장 속에 숨어서 누나 어디 있냐며 우는 루비를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우리 루비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거든요."

사이가 좋았구나. 외동으로 자란 엘리어트로서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간식으로 딸기 케이크가 나오면 루비는 딸기를 제일 마지막까지 남겨 두는데, 제가 먹고 싶다면서 시무룩하게 쳐다보면 자기도 먹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저한테 딸기를 양보하곤 했어요. 제가 딸기를 먹고 있으면 그걸 엄청 간절하게 쳐다보는데, 울락말락한 그 얼굴이 또 백미라서요."

사이가... 음... 좋은 걸까?

"둔하기는 또 얼마나 둔한지, 자고 있을 때 제 옷을 입혀 놓고 화장을 하는데도 모르는 애랍니다. 일어났을 때 진지하게 '무슨 소리야? 넌 루시엔이야.'라고 하면서 거울을 보여줬더니 자기가 갑자기 여자가 됐다면서 어떡하냐고 울먹이지 않겠어요. 정말 너무 귀엽죠?"

루시엔의 환한 웃음이 어딘지 예전만큼 순수해보이지 않는 건, 기분 탓이겠지.

형제 없이 자란 엘리어트에게는 조금 비뚤게 느껴지는 애정이었지만 루시엔은 미묘해지는 엘리어트의 표정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루비엔을 놀리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그저 흐뭇한 남매간의 티격태격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쩐지 루비엔이 점점 불쌍해졌다.

루비엔이 차기 국왕이 된다고 해도, 그때쯤 디날에선 루시엔이 여왕이 되어 있을 테니 결국 루시엔의 마수(?)를 벗어나기는 힘들겠군. 루시엔 몰래 한숨을 쉬며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또 한 명의 사촌을 남몰래 애도하다, 엘리어트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차기 국왕?

"...차기 국왕..."

"폐하?"

"미안하구나. 지금, 급히 가봐야 할 것 같다. 먼저 자리를 비워도 되겠느냐?"

루시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어트가 씩 웃고는 루시엔의 결 좋은 은발을 쓰다듬어 주고 방을 나섰다. 마치 오랫동안 헤매던 미로의 끝을 드디어 발견한 사람처럼, 엘리어트의 제비꽃 색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비슈나."

"예, 폐하."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오늘은 아마 저녁까지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다. 크라니아로 떠날 배를 직접 보러 가신다고 하셨습니까요."

비슈나는 대답하고 나서 엘리어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 했다. 평소 같았으면 묘한 질투로 일그러졌을 엘리어트의 얼굴이 오늘만큼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돌아와 달라고 사람을 보내라.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선왕 폐하께선 발로아 공과 관련한 일이 가장 중요하실 텐데요..."

"베델리어 고모님과 관련한 일이라고 전하도록."

"...예."

비슈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곧 서신을 준비하러 떠나자, 엘리어트는 즐거운 표정으로 레뮤엘의 것이었던 집무실로 향했다.

왕관을 넘겨주고 크라니아로 떠날 꿈에 부풀어 있을 아버지의 단꿈을 깨게 하는 것이 조금은 죄송했지만, 빨리 커서 왕관을 물려받으라며 눈치를 주던 그 세월을 생각하면 그 정도 죄책감 따위는 별 것 아니다.

엘리어트의 한쪽 입꼬리가 묘한 사악함을 띠고 슬쩍 말려 올라갔다.

앞으로 더 바빠질 것이 뻔히 보였다. 그러나 역시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되는 법. 앞으로 서류 더미에 파묻힐 것을 상상하니 토할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와 함께라면 엘리어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울 것이다.

누가 순순히 보내줄 줄 알고?

후후 하고 낮게 웃는 엘리어트의 얼굴은 루비엔을 '귀여워' 해주던 루시엔의 얼굴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다음날, 디날 국왕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의 집무실에는 현왕과 선왕이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사이가 돈독한 부자 관계라고 할 만한 둘이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리 다정해 보이지만은 않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레뮤엘은 지금 짜증과 기특함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감정들이 레뮤엘의 안에서 복잡하게 뒤섞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레뮤엘의 앞에서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엘리어트의 얼굴은 순수한 즐거움을 넘어 거의 환희에 가까웠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입맛이 썼다.

이래서 엘리어트에게 왕관을 넘겨주고 얼른 크라니아로 가려고 했던 건데, 국정 운영에 익숙해질 때까지 도와주는 동안 결국 발목이 잡혀 버렸다. 그놈의 부성애가 뭔지.

게다가.

"대단하네요. 저는 생각도 못 했던 부분입니다."

아름다운 녹색 눈을 반짝이며 엘리어트를 칭찬하는 반려의 얼굴이 레뮤엘을 좀 더 화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상대가 그의 아들이라곤 해도, 이아네의 눈에 담기는 건 레뮤엘 하나면 충분했다.

"도와주시는 거지요?"

"......"

엘리어트는 속으로 웃으며 레뮤엘의 반응을 살폈다. 원래도 표정이 별로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지금 레뮤엘의 표정을 보아하니 매우 난처해하는 것이 확실했다.

"...언제까지 끝낼 예정이냐?"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최소 일 년쯤 생각하고 있습니다."

레뮤엘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뜻하는 바가 너무 명백해서 이아네가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일 년이나..."

"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다. 레뮤엘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이아네가 난처하게 웃으며 레뮤엘을 위로했지만 레뮤엘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이 늦어지긴 했지만 엘리어트는 자신이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레뮤엘이라면 절대 엘리어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알았다."

"감사합니다."

"단."

조건을 다는 레뮤엘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반드시, 일 년 안에 끝내야 한다."

"그건 아버지가 도와주시기 나름일 겁니다."

"결단도, 계획도, 심지어 확신도 없이 일을 저지르는 아들로 키운 적은 없다."

"제게도 아들이 곤란할 때 모르는 척하는 아버지가 계셨던 적은 없었습니다만."

파지직, 하고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이런 상태라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이아네는 두 부자를 내버려두고 엘리어트가 내민 기획안을 다시 살폈다.

예상치 못했던 이름들이 보일 때마다 이아네는 웃음이 나면서도 동시에 씁쓸해졌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엘리어트는 그동안 두 나라 사이에 늘 존재해왔던 보이지 않는 팽팽한 실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디날 출신 왕녀가 델토르를 다스리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 실도 느슨해져 있으니 어쩌면 현명한 결단일 것이다. 이아네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이 쓰이느냐?"

레뮤엘의 목소리에 이아네가 고개를 든다. 엘리어트와의 신경전은 이아네의 작은 한숨에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이아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다만..."

"다만?"

"...될 수 있는 한 상냥하게, 부탁드립니다."

엘리어트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아네가 감사를 담아 미소를 지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비슈나가 조용히 문을 열자 집무실 안으로 묘한 조합의 두 사람이 들어섰다.

이아네가 반가운 얼굴을 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마주친 에밀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건 그 옆에 선 루시엔도 마찬가지였다.

에밀이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엘리어트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돌아왔다. 이아네를 빼닮은 초록색 눈이 그런 엘리어트를 발견하고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비슈나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에밀이 조용히 물었다. 레뮤엘이라면 몰라도 이아네가 함께 있다면 이건 보통 사안은 아니었다. 매우 급박하거나, 매우 신중해야 할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사족은 필요 없겠지.

"델토르에 대한 얘기다."

"델토르?"

에밀이 자기도 모르게 루시엔 쪽을 돌아보았다. 에밀을 마주 보는 루시엔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루시엔도 처음 듣는 얘기인 것이 분명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디날과 델토르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랜 세월 어깨를 견주었던 사이다. 라퓨타 전쟁으로 디날이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지만 여전히 델토르는 디날에 위협적인 존재 중의 하나지."

에밀로서는 갑자기 엘리어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루시엔은 짐작 가는 데가 있었던 듯 참을성 있게 엘리어트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렇게 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국왕인 동안에는 모르지만 루시엔이 내 뒤를 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게 돼. 디날의 피가 섞였다곤 해도 델토르 출신의, 심지어 여왕이니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에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밀도 늘 생각해왔던 문제긴 했지만 이만큼 직접적으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델토르를, 디날령으로 만들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자리의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엘리어트가 쉽게 말하긴 했지만 말처럼 가볍게 할 수 있었다면 이미 선대왕 때 해치웠을 일이다. 국민과 영토와 주권을 가진 한 나라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하물며 델토르 같은 대국이라면 더욱더.

"전쟁을... 일으키신다는 겁니까?"

"전쟁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지."

엘리어트가 루시엔을 바라보았다. 베델리어를 닮은 심청의 눈동자가 엘리어트와 마주쳤다.

"델토르에 있는 또 한 명의 사촌을 디날로 부른다."

"!"

"명목은 양국 간의 친선 교류와 델토르 왕세자의 아카데미 견학이지만, 사실상 디날에서 교육받은 왕세자가 차기 국왕이 된다면 델토르는 디날의 속국에 가까워지겠지."

루시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엘리어트의 계획에는 교묘한 구석이 있었다.

루시엔이 이미 디날에 와서 안전을 보장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델토르에서는 루비엔의 신변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울 수 없었다. 게다가 디날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베델리어 왕비다. 자녀의 교육과 견문을 위해 아카데미로 유학을 보내는 것쯤이야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일인데다 디날은 왕녀 베델리어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델토르가 저항할 시 이미 디날령이 되어 있는 라퓨타의 드래곤 군대가 출동하게 될 거라는 협박까지 살짝 얹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멋진 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델토르에서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왕위를 이을 왕세자가 타국으로 떠났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델토르는 온전히 베델리어의 나라가 된다. 주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델토르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루비엔을 내어주지 않으려 할 것이 뻔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보기 드물게 굳은 표정의 에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엘리어트는 아마 그것조차 예상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을 계산한 사람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엘리어트가 칼같이 대답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더 힘들지 않겠나?"

에밀은 할말을 잃었다.

엘리어트의 말대로다. 드래곤의 섬 라퓨타가 디날령으로 결정되고, 디날의 왕녀가 델토르의 왕비가 되어 왕위를 이을 쌍둥이를 낳은 데다 델토르 왕은 다른 핏줄도 없이 요절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디날에게 유리한 상황은 또 없을지도 모른다.

"옳은 말씀입니다만...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델토르에서도, 디날에서도."

"예상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엘리어트가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만큼은, 엘리어트는 정말로 레뮤엘과 닮아 있었다.

"되게 만들 것이다."

엘리어트의 의견은 단순했다. 강인하고 똑바르고 올곧게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실체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에밀은 그런 엘리어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반려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부족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고맙다."

에밀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엘리어트의 시선은 루시엔을 향했다. 아직까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은발의 꼬마 숙녀는 그로부터도 잠시 후에 첫마디를 떼었다.

"언제부터 시작하실 생각이신가요?"

"네가 허락만 한다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오래 기다리기는 힘든 분이 계시다."

그것이 레뮤엘을 가리키는 말임을 루시엔도 모르지 않았다. 루시엔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열두 살치고는 무시무시한 얘기를 시작했다.

"나쁘지 않네요. 저를 감히 동생의 밥그릇이나 노리는 치졸한 왕녀로 만든 대가는 언젠가 치르게 할 생각이었거든요."

"괜찮겠느냐?"

"그럼요."

레뮤엘이 다시 묻자, 루시엔이 빙긋 웃었다.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사악한 웃음.

"무엇보다도, 루비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요."

루시엔의 동의까지 얻고 난 뒤 비밀스러운 회동은 조용히 파장했다. 레뮤엘과 이아네가 루시엔과 함께 돌아가고 나자 엘리어트는 경직되어 있던 어깨에서 힘을 빼며 느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하셨어요."

에밀이 빙긋 웃으며 엘리어트에게 다가왔다. 딱딱해진 말투가 부드러워지고 진지하던 입매가 다시 동글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에밀이 엘리어트의 뒤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엘리어트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기사 수업을 받느라 더 단단해진 손이 엘리어트의 목과 어깨 언저리를 가볍게 주무르자 엘리어트가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그 손에 목을 기대었다.

"여기까진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부터가 문제지."

"그렇겠지요."

에밀이 부드럽게 동의하며 엘리어트의 뭉쳐 있는 어깨를 문질렀다. 엘리어트가 슬쩍 고개를 들어 에밀의 표정을 살폈다. 오랜만에 보는 연인의 얼굴이지만 앞으로 닥쳐오게 될 일을 생각하니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마주친 두 눈이 서로 쓰게 웃었다.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집무실에는 비슈나조차 없이 오로지 단둘뿐.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게 얼마만인가. 엘리어트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에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엘리어트는 조금 응석을 부리고 싶어졌다. 오늘은 국왕의 부름이 있어서 에밀도 훈련이 없고, 엘리어트도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이니 업무에도 여유가 있었다.

목을 주무르는 손을 가져와 그 손등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춘다. 에밀이 깜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지만 엘리어트는 일부러 놔주지 않고 손가락과 손바닥을 구석구석 뒤집으며 가벼운 키스를 퍼부었다.

"폐, 폐하."

"싫어?"

"그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와 닿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은 생각보다 더 적나라하다. 에밀이 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대관식 날 밤에 호기롭게 엘리어트를 덮쳤던 얼굴과 너무 달라서 엘리어트가 피식 웃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엘리어트는 에밀의 손에 입을 맞추었고 에밀은 붉어진 얼굴로 멍하니 그 요염하게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엘리어트가 다시 재미있다는 듯 낮게 킥킥댔다. 아마 에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웃지는 못했을 테지만.

"...폐하."

"응?"

"...손은, 이제 됐어요."

엘리어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에밀이 손을 거두었다. 허전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금세 시야를 가득 채우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엘리어트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리트, 리트..."

"응, 에밀."

에밀이 애타게 엘리어트를 불렀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에밀의 목소리에 담긴 욕정까지 눈치 채지는 못했다. 하늘에 맹세코, 에밀이 입을 맞춰올 때까지만 해도 엘리어트는 에밀과 진도를 더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키스해도 돼요?"

대답은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 에밀이 급하게 엘리어트의 입술을 찾아 고개를 내렸다. 조금 놀란 엘리어트가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입술에 닿아 오는 감촉에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젖은 소리가 낮게, 그리고 집요하게 집무실을 울렸다.

에밀의 혀가 엘리어트의 입술을 따라 핥아 올리자 아주 쉽게 입술이 벌어지며 엘리어트가 에밀을 받아들였다. 젖은 혀가 서로 얽히고 타액에 젖어 부드러워진 입술이 서로의 압력으로 납작해진다. 에밀이 엘리어트의 뒤통수로 손을 찔러 넣어 끌어당겼다. 방금까지 엘리어트가 입을 맞추었던 손이 뜨겁게 달아올라 두피를 데웠다.

엘리어트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마음을 확인한 연인이고 아주 오랜만의 키스였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목말라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키스 좀 뜨겁게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에밀의 손길은 그 이상으로 끈적한 무언가가 있었다. 살짝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새어나는 낮은 한숨이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끝에 아쉬움보다 더 진득한 감정이 묻어났다.

"저, 에미... 음..."

"쉿, 리트... 비슈나가 듣겠어요."

에밀의 말에 엘리어트가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착하네. 에밀이 빙긋 웃으며 리트의 뺨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엘리어트에게 입술과 손길이 닿을 때마다, 에밀은 당장이라도 그의 정복을 찢어발기고 좁은 동굴로 성난 분신을 밀어 넣고 싶은 욕구를 애써 눌러 참았다. 물론 평소라면 절대 참지 않겠지만, 요 며칠 제대로 엘리어트와 만나지도 못해 쌓일 대로 쌓인 욕구가 폭발하면 어떻게 될지 에밀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요염하게 자신의 손에 키스하던 그 입술이 손이 아니라 다른 곳에 키스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곧 미친 듯이 바빠질 연인을 앞에 두고 그런 상상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짐승 같았다.

정말 미칠 것 같긴 해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닌데다 엘리어트에게 다가올 살인적인 업무량을 생각하면 적당히 끝내는 게 맞다. 게다가 여긴 침실도 아니었다. 뭐 장소가 문제겠냐마는 적어도 에밀은 엘리어트가 불편할 곳에서 거사(?)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에밀은 거기까지 하려고 했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어차피 평생 함께 할 사람이고 그의 기사가 된다면 싫어도 계속 함께 있게 될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며 에밀이 눈물을 머금고 눈앞의 먹잇감을 놓아주려던 순간, 엘리어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리어트를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봐온 데다 그 누구보다 눈이 빠른 에밀이라면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보랏빛 눈동자 사이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실망감을, 에밀은 발견하고야 말았다. 에밀 혼자만의 욕구라면 밀어붙이기는 미안한 일이지만 엘리어트 역시 원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에... 에밀?"

"쉿..."

다짜고짜 상의 안으로 손부터 밀어 넣었다. 이미 따끈하게 데워져 있어서 차갑지는 않았지만 엘리어트는 놀라서 옷 사이로 치고 들어오는 손아귀를 밀어내려 애를 썼다.

"뭐 하는... 에밀... 으읍!"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에밀의 손이 강하게 엘리어트의 입을 막아 왔다. 셔츠 아래 맨살에 닿은 에밀의 손이 거침없이 치켜 올라가 작은 유실을 건드렸다. 흠칫, 엘리어트의 몸이 크게 요동치자 에밀이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핥았다.

입이 막혀 있어 신음소리가 집무실 바깥으로 들릴 일은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가 엘리어트를 괴롭혔다. 에밀이 눈을 반짝이며 엘리어트의 귀를 길게 핥았다.

"으응...!"

"리트의 이곳, 벌써 딱딱해졌어... 귀여워."

에밀이 엘리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슴을 지분대는 손가락이 때론 부드럽게 때론 강하게 유실을 건드려 왔다. 살살 쓰다듬다가도 갑자기 손끝을 세워 꼬집어 올리면 맥없이 신음이 흐르며 가슴께가 크게 요동쳤다.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에밀의 손을 밀어내지만 로열 나이트 특훈을 받는 몸을 쉽게 밀어낼 수는 없었다. 에밀이 생긋 미소 지으며 조용히 엘리어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엘리어트는 에밀의 눈에서 저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읽었다. 엘리어트가 눈을 두 번 깜박이는 사이 에밀이 아주 쉽게 엘리어트를 일으켜 집무실 책상에 앉혔다. 잠시나마 에밀의 손에서 자유로워진 엘리어트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에, 에밀, 여긴 안 돼!"

대대로 디날 국왕이 앉았던 신성한 집무실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앉았던 의자와 아버지의 손이 탄 책상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책상에 앉아 정무를 보는 아버지를 동경해 왔고 자신도 그런 왕이 되리라 굳게 다짐하며 자라왔다. 엘리어트에게 있어 집무실은 국왕이 국왕답게 있을 수 있는 곳, 디날의 두뇌이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왜 안 되죠?"

"여긴 집무실이잖아! 침실로... 으응!"

그러나 에밀에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서 사랑스럽게 움직이는 입술을 끊임없이 깨물고 핥고 빨아올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책상에 앉은 엘리어트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아까 반쯤 젖혀 올렸던 정복을 순식간에 벗겨 내렸다. 너무 쉽게 벗겨져서 엘리어트 입장에선 오히려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에밀은 낮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셔츠를 팔꿈치 즈음까지만 내렸다. 자연스럽게 셔츠가 엘리어트의 팔을 구속하는 모양새가 되자 보랏빛 눈동자가 경악과 절망으로 젖어갔다.

이 눈이다. 간절하게 에밀을 바라보는 저 청초한 보랏빛은, 먹어버리고 싶게 사랑스럽다. 에밀이 가빠오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자꾸 말라가는 입술을 핥았다. 오랜만의 만찬이다. 당장 욕구를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엘리어트의 구석구석까지 맛보고 싶었다.

"으응-"

"쉿, 리트. 여긴 집무실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이런 걸 하면 안 된다고! 간절히 에밀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에밀은 모르는 척했다. 엘리어트의 원칙주의는 익히 잘 아는 바였다. 하지만 그런 원칙을 깨 버릴 때의 배덕감은 더 잘 알았다. 그래서 에밀은 생긋, 웃고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더 흥분했나 봐요?"

"윽-"

이미 단단해진 선단 끝을 스치듯 어루만지자 엘리어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소리를 죽이려는 그 노력조차 에밀에게는 사랑스러웠다. 손가락을 세워 선단을 지분거리며 에밀이 허리를 숙여 엘리어트의 드러난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며 처음에는 가볍게 닿았던 입술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혀가 맛있는 것을 핥듯 살갗 위를 달렸다. 엘리어트가 흡, 하며 숨을 들이키자 에밀은 조용히 웃었다. 엘리어트는 목 근처가 약했다.

"이쪽은 솔직하네요, 리트. 리트도 이 아이만큼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조... 조용히...! 으흡!"

엘리어트가 에밀을 노려보았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에밀이 타이밍 좋게 유실을 물자 엘리어트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좀 더 놀리고 싶었지만 이제 에밀도 여유가 없었다. 이미 열기가 점령한 바지 안을 더듬으며 에밀의 손가락이 뿌듯하게 엘리어트의 하체를 쥐었다. 단단해진 기둥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흥건한 물기가 묻어나왔다.

"흐응, 아..."

엘리어트가 눈을 꽉 감은 채 신음을 참았지만 밀려드는 쾌락은 어쩔 수 없는지 목덜미가 붉어져 있었다. 에밀은 낮게 한숨을 쉬며 그의 목덜미를 핥았다.

"...너무 아름다워."

조용히 귓가로 흘러드는 목소리는 그대로 척추를 타고 내려가 발끝까지 짜릿한 감각을 선사했다. 엘리어트의 하체가 좀 더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에밀은 피식 웃으며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못 말리게 음란하시네요."

"아니... 야앗... 흑...!"

그러나 엘리어트의 말과는 다르게, 에밀의 손끝은 더욱 젖어갔다. 에밀이 입맛을 다시며 엘리어트의 바지를 벗겼다. 뿌듯하게 일어선 엘리어트의 분신이 공기 중으로 튀어 오르자 엘리어트는 다시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신성한 집무실에서 이렇게 흥분하다뇨."

"읍, 흑... 아니야...!"

고개를 크게 저어대는 모습이 귀엽다. 에밀은 잠시 느긋하게 엘리어트의 부끄러운 얼굴을 즐기며 단단한 기둥부터 귀두 아래 살짝 튀어나온 핏줄 하나하나까지 피부로 새기듯 쓰다듬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허리가 요염했다.

저 허리가 스스로 움직이며 에밀의 것을 품었다고 생각하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리트..."

꿀을 흘리는 선단에 하반신을 붙이고 문지르자 옷 위로 느껴지는 뜨거움에 금방이라도 가버릴 것 같다. 호흡을 조절하며 에밀은 침착하게 바지를 내렸다. 엘리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세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정말로 부끄러움이 많구나, 나의 왕은. 엘리어트 몰래 살짝 웃으며 에밀은 두 분신을 한 손에 잡고 문질렀다. 부드러운 포피가 서로 비벼질 때마다 열이 새롭게 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벌린 입술 사이로 탄성이 터졌다.

"...아, 이거 좋아..."

중독될 것 같다. 예민한 피부 위로 선연히 느껴지는 체온이 기분 좋았다. 에밀만큼이나 엘리어트도 그를 원하고 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에밀을 자극했다. 아니, 사실 엘리어트라면 무엇이든 자극이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부터 잿빛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리트, 어때요?"

"모, 몰라... 흐윽..."

부자연스러운 팔 때문에 엘리어트는 얼굴을 가리지도 입을 막지도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을 감고 하체에서 일어나는 적나라한 접촉을 모른 척하는 것뿐인데, 눈을 감으면 자극이 더욱 강해지고 눈을 뜨면 흥분으로 반짝이는 에밀의 얼굴이 있다. 엘리어트로서도 난감한 일이었다.

"넣고 싶어. ...안 돼?"

"아...!"

"싫어? 넣는 건, 싫어요?"

두 기둥을 한꺼번에 훑어 내리는 손길은 과연 다급했다. 에밀의 속삭임에 가쁜 날숨이 섞였다. 엘리어트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좁은 벽에 자신의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서 마음껏 움직이고 싶다. 뜨겁고 좁은 음부에 자신의 정염을 남김없이 토하고 싶었다. 에밀이 조르듯 엘리어트에게 허리를 밀어붙이자 엘리어트가 울상이 되어 에밀을 올려다본다.

"시... 싫진 않지만..."

거기까지.

에밀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어트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말캉한 혀가 얽혀 오자 다시 등허리가 쭈뼛했다. 좋을 대로 입안을 헤집으며 엘리어트가 경악하는 눈빛을 즐기는 것도 또 다른 백미였다.

이윽고 충분히 젖은 손가락이 엘리어트의 입술을 훑으며 빠져나갔다. 반쯤 넋이 나갔던 보랏빛 눈동자는 좁은 비부에 젖은 손가락이 닿자 순간적으로 커졌다.

"정말 하... 할 거야?"

"...리트, 정말 바보구나."

"응?'

"...힘, 빼요."

에밀이 손목에 힘을 주었다. 엘리어트의 눈에 아픔과 짜증이 밀려들었지만 이제 멈출 수 없었다.

"윽, 아, 아프... 앗, 잠깐..."

"리트..."

"흐읏... 아.... 파앗...!"

"날, 봐."

타액으로 젖어 있긴 했지만 손가락 두 개가 한꺼번에 비부를 밀고 들어갔으니 아플 만도 하다. 그러나 아픔으로 살짝 찡그려지는 엘리어트의 얼굴은 묘하게 색정적인 데가 있었다. 에밀이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할 만큼.

"하아... 나, 매일 밤 리트를 생각해."

엘리어트의 귓가에 야릇한 목소리가 흘러들자 놀랐는지 에밀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조여 왔다. 손가락으로는 밀어내기도 힘든 압력에 에밀이 낮게 킥킥댔다.

"당신이 날 받아들이는 걸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아."

"흐으... 응...!"

"날 원하면서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걸 상상하면, 죽을 만큼 좋아."

"바... 바보...! 흐으..."

에밀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조금 젖은 입구에 에밀의 하체가 닿았다. 엘리어트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눈빛으로 안 된다고 외쳤지만 그는 그 몸짓이 에밀을 얼마나 불타오르게 하는지 맹세코 알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 알아요?"

"아, 안 돼, 에밀...! 아윽...!"

"사랑해, 리트."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상큼한 고백과 함께 성난 기둥의 머리가 엘리어트 안으로 침입했다. 크게 뜨여진 보라색 동공을 보면서도 에밀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겨우 머리만 들어갔을 뿐인데 벌써 확 좁아지는 내벽이 결사적으로 에밀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자고로 뭐든 쉽게 가지면 재미없는 법이다. 에밀은 조여드는 내벽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엘리어트에게 입을 맞추었다.

녹아버릴 듯 부드럽고 데일 듯 뜨거운 혀가 서로를 원하며 얽혀 갔다. 에밀이 손을 뻗어 엘리어트의 팔에 걸쳐 있는 셔츠를 완전히 벗겨 내렸다. 겨우 자유의 몸이 된 팔이 허겁지겁 에밀의 목을 감아 왔다.

사랑스럽긴. 에밀은 속으로 다시 웃었다. 싫다, 안 된다 하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결국 에밀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그 마음이 예뻤다.

그렇다면 보답을 해야지.

키스에 집중하느라 하체에는 살짝 힘이 빠져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강하게 허리를 쳐올리며 동시에 도망가지 못하도록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흐읍!"

"큭..."

뿌듯하게 내부를 채우는 느낌도 잠시, 에밀이 성급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 에... 밀, 흐윽...!"

"리트...!"

정신을 못 차리겠다. 그저 연인의 안으로 들어간 것만 기쁘고 기뻐서, 에밀은 엘리어트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잡았다. 뿌리까지 꽉 죄어 오는 압력에 금방이라도 분출할 것 같다. 뜨거운 한숨을 엘리어트의 목덜미로 뿜어낸 에밀이 허리를 깊게 밀며 내벽에 선단을 비볐다.

"흑, 윽... 우응...!"

엘리어트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는지 내부가 부드러워졌다. 에밀이 살며시 웃으며 엘리어트의 정갈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앗, 잠, 잠깐, 에밀... 으응, 아...! 앗...!"

"하아, 정말...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는군요, 폐하."

에밀의 못된 장난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호칭은 높아졌지만 에밀의 하체는 여전히 엘리어트의 가장 깊은 안쪽까지 맛보고 있었다.

"이렇게 음란한 국왕은, 윽,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아, 아니야... 아으응...!"

"제 것, 마음에 드십니까?"

"바, 바보..."

엘리어트가 눈물 어린 눈으로 에밀을 올려다보았다. 농담은 그만 해 달라는 눈이었지만 그 젖은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말은 에밀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네... 네 것인데, 흐응, 다... 당연한 거잖아...!"

아. 정말, 어떡하면 좋지.

이렇게나 괴롭히는데도, 또 괴롭히고 싶어졌다. 에밀의 것이라면 뭐든 좋다고 외치는 저 입도, 뿌듯하게 에밀을 받아들이며 오물거리는 입구도 뭐든 다. 발가락 끝이 오싹하도록 엘리어트가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귀여운 말씀을 하시네요, 리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예요."

"흑, 윽...?! 잠, 잠깐, 에밀...!"

결합부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에밀이 엘리어트를 뒤집었다. 엘리어트가 반사적으로 책상에 팔을 받치며 엎드리자 에밀은 만족스레 웃으며 엘리어트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지금 저 문을 열면, 모두가 리트의 귀여운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 자, 장난치지..."

그러나 마지막 글자는 엘리어트의 목 안쪽에서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엉덩이를 한가득 쥐어 오더니 본격적으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학, 윽, 에밀... 너무, 흑, 너무... 급해...엣! 흐으으읏...!"

바깥에 소리가 혹시라도 새어나갈까 봐 최대로 신음을 눌러 참았지만 살갗이 서로 맞닿는 야한 소리는 죽일 수 없었다. 잦은 마찰에 충분히 젖은 입구로 에밀이 허리를 밀어 붙일 때마다 차작차작 소리가 신성한 집무실을 채웠다. 부드러워진 내벽이 기분 좋게 에밀의 기둥을 감싸오자 에밀의 벌린 입술 사이로 탄성이 새었다.

"리트의 여기, 너무... 좋아, 헉, 진짜 좋아요... 갈 것 같아..."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살짝 풀린 눈을 번들거리며 에밀은 엘리어트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엘리어트의 따뜻하고 좁은 안쪽까지 에밀의 색으로 물들여 버리고 싶다. 기둥의 뿌리까지 처박으며 이 사람이 내 연인이라고, 내 정인이라고 그 몸에 새겨버리고 싶었다. 에밀이 아니면 그 누구도 맛볼 수 없는 천국을, 만족을 모르는 음란으로 채워 에밀만을 원하게 하고 싶다.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아.

에밀의 허리가 더 강하게 엘리어트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엘리어트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막고 에밀을 돌아보았다. 살짝 젖은 제비꽃 색의 눈동자에 에밀은 다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 진짜 미치겠네.

"그렇게... 후, 쳐다보는 건, 반칙이에요."

"아흑!"

에밀의 손이 거칠게 엘리어트의 뒤통수를 휘어잡아왔다. 갑작스럽게 당겨지는 힘에 놀라는 것도 잠시, 순식간에 비틀어진 얼굴에 에밀이 입을 맞춘다.

"으음, 응... 에, 밀... 하응..."

듣기 좋은 비음에 에밀의 이름이 섞여 흘렀다. 한껏 젖어 붉게 번들거리는 입술을 탐하고 또 탐하며 에밀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완전히 풀린 내벽이 게걸스럽게 에밀의 분신을 삼켰다.

한계가 가까워 오자 에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기분 좋은 곳을 문질러 주자 엘리어트의 신음이 한층 간드러지며 화답하듯 허리가 들렸다.

"하, 갈... 갈 것, 같아, 하아, 리트...!"

"응, 응, 에밀, 으응, 에밀...!"

퍽, 하며 강하게 밀어붙인 용두가 마침내 정을 토했다. 뜨겁게 내부를 채우며 퍼지는 충만감에 에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을 하얗게 태워 버린 쾌락이 선단에서 울컥울컥 백탁의 형태로 터져 나왔다.

"흑... 으윽..."

엘리어트가 살짝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에밀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 엉망으로 자신의 아래 엎드려 있는 허리가 보기 좋았지만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훤히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추며 에밀이 살짝 허리를 뺐다. 진한 농액이 분신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리자 엘리어트가 작게 이힛! 하며 몸을 떨었다.

"미안해요, 리트... 괜찮아요?"

"하아... 넌 근신이야..."

에밀을 노려보는 그 새초롬한 눈이라니. 에밀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엘리어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체온이 기분 좋았다.

"리트."

"...왜 자꾸 부르는 거냐."

"리트가 너무 좋아요."

"......"

갑작스런 고백에 엘리어트의 어깨가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요. 당신의 모든 게 너무 좋아요..."

"......"

"다 좋지만... 특히 리트의 안, 최고야... 뜨겁고 오물거리는 게, 꼭 살아 있는 것 같..."

"바, 바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귀까지 빨개진 채 눈도 못 마주칠 연인의 얼굴이 상상되어 에밀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응?"

"나도... 흠... 그... 그거... 기분... 좋으니까."

에밀은 잠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엘리어트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엘리어트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긴 했지만 솔직한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얘기해줄 줄은 몰랐다. 기쁨과 동시에 뱃속에서 새로운 욕정이 피어난다. 에밀은 잠시 고민했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뭐라고요, 리트? 잘 안 들렸어요."

"윽...!"

"자, 다시 얘기해 봐요. 제가 들을 수 있게."

"그... 크윽... 네... 네 것, 기분... 좋다구..."

"흐음, 잘 안 들리는걸요..."

에밀이 짐짓 안 들리는 척하며 엘리어트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옆구리를 지분대는 손길에도 엘리어트는 에밀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여튼 이럴 땐 귀엽다니까.

"그, 그러니까! 네 것, 기분, 조... 좋다구!"

"집무실은 안 된다고 하셨으면서, 사실은 기분 좋으셨군요?"

"윽...!"

"어쩔 수 없네요. 리트가 기분 좋다고 한다면, 신성한 집무실이라고 해도 당신을 만족시켜 드리는 게 먼저겠지요."

에밀은 짐짓 순진한 척 다시 하반신을 엘리어트의 엉덩이에 문질렀다. 그제야 다시 단단해진 에밀의 분신을 눈치챈 엘리어트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미 늦었다.

"에밀, 잠, 잠깐..."

"좀 더 기분 좋게 되고 싶죠?"

"그, 아니, 으음..."

에밀의 입술 속으로 엘리어트의 외침이 넘어간다. 엘리어트가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쾌락을 맛본 뒤의 저항은 에밀의 허리가 힘차게 움직이는 순간 맥없이 스러져갔다.

* * *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일 년이 지났다.

엘리어트의 계획은 컨디션 난조로 늘어진 첫 일주일간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순조로웠다.

델토르에서의 반발은 예상대로 폭발적이었지만, 예상했던 범위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들이었다. 몇 번의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해결하기에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 어렵게 협상을 진행시키지 않아도 라퓨타의 드래곤을 총 출동시켜 델토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결재 도장 한 번이면 끝날 일이다. 그러나 엘리어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델토르의 속국화가 아니라 디날의 제국화였다. 그런 식으로 제국을 세운다고 해 보았자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레뮤엘을 닮아 엘리어트도 불필요한 피를 흘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고, 이미 국제적인 약자에 놓인 델토르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언제 어디서 반란과 폭동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디날 왕가에서 신임 받고 있는 발로아 공작가는 사실 델토르에서 온 가문이다. 농담으로라도 반려의 고향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 조심스럽고 아슬아슬한 상황을 몇 번이나 거친 뒤, 레뮤엘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날 때쯤 엘리어트는 드디어 양국간 정상이 모두 참석하는 만찬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었지만 아마 이 만찬이 앞으로의 방향에 결정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델토르와 디날 간의 친선교류라는 명목이긴 하지만 사실상 가족 모임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찬을 가지는 곳은 라퓨타였기 때문에 그날은 디날도 델토르도 아침부터 매우 바빴다.

"저, 정말 저도 가도 되나요?"

삼백 번은 물어본 것 같은 질문을 새삼스럽게 다시 하면서 에밀은 초조하게 옷깃을 매만졌다.

새로운 기사 정복으로 갈아입고 어색하게 웃는 에밀을 바라보며 엘리어트는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열 나이트로서 꾸준히 받아온 특훈 덕에 에밀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지만 느는 것은 실력뿐이 아니었다. 어깨가 넓어지고 키도 한 뼘이나 자라 버려서, 그 일 년 새 갖고 있던 옷을 모두 다시 맞춰야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 년간 햇빛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했던 엘리어트에 비하면 에밀은 한창 성장기인데다 특훈까지 성실히 수행했으니까.

에밀 특유의 부드러운 눈웃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전처럼 앳되고 서글서글한 눈매는 이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완전히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에밀의 턱은 젖살이 빠져서 각이 지고 선명해졌다. 예전에는 귀엽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요즈음의 에밀은 빈말로라도 귀엽다고는 할 수 없는, 완전히 성장한 수컷의 냄새가 풍겼다.

실제로 성 내에서 몰래 에밀의 훈련을 훔쳐보다 들킨 시녀들이 꽤 되었다. 당연히 에밀은 모른다. 에밀이 눈치 채기 전에 엘리어트가 조용히 그녀들을 완전히 다른 업무로 보내버렸으니까.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이미 내 사람으로 일하고 있으니 상관없다."

"저, 떨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긴장이 가득한 초록빛 눈으로 진지하게 말해 오는 얼굴은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럽다. 엘리어트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에밀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어린아이라니까. 엘리어트가 피식 웃으며 에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괜찮다. 내가 있으니."

"...리트가 키스해 주면 긴장 안 할 것 같은데."

장난스레 웅얼대는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예전이라면 기겁을 하며 놀랐을 엘리어트지만 이젠 이런 식의 장난을 받아줄 만한 여유도 생겼다.

-쪽.

엘리어트가 에밀의 머리를 잡아당겨 뺨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란 듯 에밀이 눈을 깜박이자 엘리어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못 할 줄 알았느냐?"

"...반칙이야..."

살짝 시무룩해지는 에밀의 말린 장밋빛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정리해주려는데, 갑자기 강한 팔이 엘리어트의 허리를 확 감아 당겼다.

숨을 쉴 새도 없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 눈앞에 욕심스런 초록빛이 스쳐 지나며 엘리어트의 입술이 순식간에 에밀에게 먹혀들었다. 자신의 암컷이라고 각인을 새기는 것처럼 에밀은 격하고도 진득하게 엘리어트의 입술을 탐닉했다.

한참을 저 좋을 대로 맛보고 휘저은 다음에야 겨우 엘리어트의 허리를 감싼 팔에서 힘이 풀렸다. 엘리어트의 보랏빛 눈이 멍하니 에밀을 올려다보자, 에밀이 날렵해진 입꼬리를 살짝 치켜 올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남자'의 미소에 엘리어트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았다. 에밀이 엘리어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추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이 다음은, 성으로 돌아간 후에. 알았죠?"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어트가 귀여워 그의 이마에 마지막으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에밀의 팔이 완전히 엘리어트를 풀어주고는 그를 앞세워 방을 나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짭조름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 그 위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여객선이 기분 좋게 흔들린다. 멀리서 불어 닥친 바람이 엘리어트의 잿빛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뒤 달아났다.

저 멀리 푸른 섬이 보였다.

"거의 다 왔나 봐요."

"으응."

"긴장되세요?"

"...조금."

이번에는 엘리어트의 얼굴이 경직되어 갔다. 에밀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엘리어트의 입매를 문질렀다.

"괜찮아요, 제가 있으니까요."

"...흥. 따라 하기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는지 엘리어트가 살짝 입을 내밀었다. 그 삐죽한 입술을 한 번 더 맛볼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두 사람의 공간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엘리어트."

에밀과 엘리어트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레뮤엘이 이아네와 함께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예, 아버지."

"이 정도 거리라면 5분쯤 후엔 도착할 거다. 빠뜨린 건 없는지 다시 살펴보고."

"어린애가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엘리어트는 기분이 좋았다. 한 나라를 짊어지는 왕인데도 레뮤엘의 눈에 아직 엘리어트는 그저 아들일 뿐이었다.

"...그립군요."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던 이아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자 레뮤엘이 기쁜 듯 이아네에게 미소를 지었다.

"기억하고 있었나."

이아네가 하는 생각을, 레뮤엘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곳도, 재회했던 곳도 모두 라퓨타였다.

"후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입니다."

"그때는 고집이 말도 못했지."

"윽, 옛날 얘기일 뿐입니다."

"글쎄, 그럴까."

레뮤엘의 심청색 눈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어젯밤에도..."

"으아앗! 그, 그만 두세요!"

이아네가 당황하며 레뮤엘을 말리고, 레뮤엘은 그런 이아네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순식간에 둘만의 세계에 빠져든 그들을 바라보며 엘리어트는 한숨을, 에밀은 쓴웃음을 지었다.

"에밀."

"네, 폐하."

"...조금만 참아."

"예?"

엘리어트의 보랏빛 눈동자 안에서 뭔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에밀이 당황스럽게 엘리어트를 바라보자, 그가 남모르게 주먹을 부르쥐며 아버지 내외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줄게."

"......"

에밀이 살짝 눈을 치켜떴다가 곧 온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모르는 걸까, 이 둔감한 연인은.

그저 그의 곁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에밀은 이미 모든 행복을 가졌다. 엘리어트가 바빠서 얼굴을 볼 수 없어도, 자주 만나지 못해도, 그에게서 받은 사랑과 행복은 이미 차고도 넘쳐흐른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의 행복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있다고 해도 엘리어트가 에밀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면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은 그저 흩날리는 꽃잎 한 조각의 무게일 뿐.

하지만 지금은 조금 욕심 부려도, 괜찮겠지.

에밀이 엘리어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부쩍 커진 단단한 가슴 안으로 엘리어트의 머리가 맞춘 듯 꼭 들어앉았다.

"에밀?"

"어떡하죠, 리트."

"왜, 왜 그래?"

에밀이 엘리어트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확 끼쳐오는 체향이 만족스러웠다. 엘리어트의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에밀이 중얼거렸다.

"나, 지금도 너무 행복한데. 더 행복하면 죽을지도 몰라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엘리어트의 귀가 빨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에밀이 쿡쿡대며 농담이라고 변명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허락 없이 죽으면, 나도 죽어버릴 테다."

"...그거, 협박?"

엘리어트는 에밀의 말을 무시하고 다가오는 라퓨타를 바라보는 척했다. 자기가 한 말의 무게를 다시 느끼는 게 분명했다. 에밀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엘리어트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죽어버린다니, 너무하시네요."

"...흥."

엘리어트가 슬쩍 에밀 쪽을 곁눈질했다. 에밀이 눈을 내리깔며 다시 웃었다.

"죽여버리는 게 아니라 죽어버린다니, 더 무섭잖아요."

"...알아들었으면 그런 소리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네에에."

"대답은 짧게."

"응."

"!"

당황으로 일그러지는 엘리어트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결국 에밀은 소리 높여 웃고 말았다.

배가 천천히 라퓨타에 가까워지고 히노이 성에서 마중나온 마차로 갈아타고서도 그들은 또 한참을 가야 했다. 성에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포효 소리나 낮게 그르렁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

레뮤엘이 문득 반가운 탄성을 질렀다. 저 멀리, 히노이 성 근처를 빙빙 돌며 날아다니는 붉은 짐승이 보였다. 베델리어의 드래곤이 분명했다.

엘리어트가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에 델토르로 시집간 뒤로는 한 번도 뵙지 못했던 베델리어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오래된 기억이라 얼굴은 희미한데도, 자신을 귀여워해주던 것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긴 복도 끝에 만찬을 갖게 될 홀의 문이 보였다. 훌륭하게 조각된 희고 높은 문이 디날의 귀빈 일행이 다가가자 소리도 없이 조용히 열리고 곧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어머니!"

침묵을 깬 것은 루시엔이었다.

폭포처럼 흩날리는 은발이 홀을 가로질렀다. 그 작은 몸을 마주 끌어안는, 가늘지만 강한 팔의 주인은 오늘 회담의 주빈이 될 베델리어 플로렌스 디날이었다.

"루시...!"

"보고 싶었어요!"

처음으로 보는 루시엔의 어린아이다운 모습이었다. 엘리어트는 베델리어의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모르는 척하려고 일부러 고개를 조금 돌렸다.

"잘 지냈니? 편지는 잘 받았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네, 덕분에... 어머나, 루비!"

루시가 탄성을 질렀다.

베델리어의 푸른 드레스 자락 뒤편에서 루시엔을 꼭 닮은 은빛 머리카락이 빼꼼히 드러났다. 긴장한 푸른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루시엔과 그 뒤에 선 디날의 귀빈들을 살폈다.

엘리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시엔과 쌍둥이라고는 했지만 정말 많이 닮았다. 루시엔보다 조금 처진 순한 눈매와 목덜미까지 짧게 자른 은발만 빼고는 루시엔과 똑같았다.

"보고 싶었어!"

"으아앗!"

루시엔이 느닷없이 루비엔에게 돌진했다. 반가운 마음이야 누가 모르겠냐마는 루시엔의 의도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몸을 부딪혀서 넘어뜨리는 것이었다. 퍼억, 하는 강렬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루비엔이 저 멀리로 튕겨나가 쓰러졌다.

"어머나, 루비. 귀한 분들 앞에서 무슨 추태니. 어서 일어나."

루시엔이 생글생글 웃으며 부끄럽다는 듯 뺨에 손을 대고 몸을 꼬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루비엔이 추태를 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시, 반가운 건 알겠지만 자제하거라."

"죄송해요, 어머니. 너무 반가워서 그만."

베델리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좀 떨어져 있으면 나으려나 했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루비엔에게 악감정이 없다는 건 알지만 루시엔의 애정 표현은 아무래도 과격한 데가 있었다.

문득, 베델리어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의식하고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소란스럽게 한 데 대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던 아이들이니 너그러이 보아 주십시오."

"...오랜만이구나, '델러'."

베델리어가 흠칫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레뮤엘의 얼굴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저 표정 없는 얼굴이나, 조용한 심청의 눈동자나, 자신을 '델러'라고 부르는 것이라거나. 두 번째로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눌러 참으며 베델리어가 미소를 지었다.

"네, 오라버니. 오랜만이지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네요."

베델리어가 레뮤엘 곁에 선 하얀 정복의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이아네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살짝 목례를 했다.

"델토르의 선왕비전하를 뵙습니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라고 합니다."

"이아네 공!"

베델리어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중년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소녀 같은 감성과 호기심으로 얼굴이 빛났다. 레뮤엘과 닮은 심청의 눈동자가 이아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 짓자, 이아네는 혼자서 속으로 웃었다. 이런 부분은 정말로 레뮤엘과 닮았다. 남매는 남매구나.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오라버니께서 이아네 공의 이야기를 어찌나 많이 했는지-"

"델러."

레뮤엘이 조용히 베델리어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베델리어는 이 즐거운 순간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제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이아네 공의 이야기가 태반이었답니다. 제가 이아네 공을 뵙고 싶다고 했더니 글쎄, 발로아 공이라고 성을 붙여서 이야기하라지 않겠어요?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자신의 반려의 이름을 함부로 불리게 하지는 않겠다면서-"

"델, 러."

이아네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붉어진 얼굴을 바닥으로 향했다. 그러나 베델리어는 레뮤엘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았다. 후후 하고 미소 짓는 얼굴이 어딘지 루시엔과 닮아 있다고 느낀 순간, 엘리어트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입니다. 고모님."

베델리어의 눈이 엘리어트를 향했다.

"현 디날 국왕,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입니다."

단단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와 부드럽게 이마에 내려앉은 잿빛 머리카락. 베델리어의 눈이 그리움으로 젖어갔다.

일곱 살, 정치에 관심 많고 제 아버지를 닮아 보겠다 용을 쓰던 꼬마 왕자가 벌써 이렇게 커서 자기 앞에 선 것이 신기하고도 대견하다. 베델리어가 천천히 걸어 엘리어트의 손을 꼭 맞잡았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저하'."

엘리어트가 피식 웃었다.

일곱 살 적의 호칭을 이런 식으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그 이후로 십 년 가까이 지났지만 베델리어의 기억에 그는 그저 일곱 살 적 꼬맹이였던 '리트'일 뿐이니까.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저하, 아니, 폐하께서도 좋아 보이십니다. 어머나, 이쪽의 기사 분은..."

베델리어가 엘리어트의 뒤에 선 에밀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밀이 살짝 미소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내년부터 폐하의 로열 나이트가 될 에이몬드 렉스 발로아입니다. 델토르의 선왕비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발로아?"

베델리어가 눈을 깜박였다. 심청색 눈동자가 에밀과 엘리어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곧 이아네의 초록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흐-음, 그렇게 된 거로군요."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베델리어의 입꼬리가 아주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어느 틈에 어머니의 곁에 선 루시엔이 베델리어와 매우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웃었다.

"그렇지요, 어머니?"

"그렇구나, 루시."

두 모녀가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후후,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영문 모를 한기가 만찬장을 훑고 지나갔다. 디날의 귀빈들은 짧은 순간이나마 루비엔이 그동안 이 모녀 사이에서 어떻게 지냈을 지를 상상하고 잠시 소년에게 동정 섞인 시선을 던졌다.

십 년 가까운 세월이었지만 혈육이라는 것은 시간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되면서 이야기는 다소 딱딱해졌지만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루비엔이 조금 겁을 먹고 있긴 했지만 어머니에게서 디날의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자란 소년은 눈을 반짝이며 엘리어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루시엔만큼 영악하지는 않았지만 영리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분명 좋은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폐하, 루비엔이 디날로 간다고 했을 때 델토르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이득이 없다면 그들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델토르가 탐낼 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 두었습니다. 델토르에서 실질적으로 운영되는 항구는 렐라 항, 하나뿐이지요. 디날의 남동쪽 해안 항구 중 하나를 내어줄까 생각중입니다."

베델리어가 고기를 썰던 칼을 멈추었다. 엘리어트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디날 측에서도 손해가 꽤 클 텐데요."

"원 거주민들에게는 국가적인 보상금도 있을 테고, 항구의 소속만 바뀌는 것이니 사실 큰 타격은 없을 겁니다. 타격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도 감수하지 않고 타국의 왕세자를 모실 수는 없는 일이지요."

엘리어트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베델리어는 속으로 웃었다. 원칙주의에 평화주의였던 레뮤엘과는 달리, 엘리어트는 적당한 모험이나 거래를 할 줄 안다. 레뮤엘 역시 그릇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엘리어트라면 정말로 '제국'에 어울리는 인재가 될 것이다.

잘 자라준 조카를 자랑스럽게 바라본 뒤, 베델리어는 루비엔 쪽을 돌아보았다.

"비엔, 어떻게 생각하니?"

루비엔이 눈을 깜박이며 어머니와 눈을 맞추었다. 갑작스레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루비엔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예의바르고 배려심 깊은 목소리가 조용하게 식탁 위로 흘렀다.

"제가 폐가 되지 않는다면, 디날로 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결국 가는구나. 비엔마저 가게 되면, 이 어머니는 혼자서 델토르에 남게 되겠지...?"

루비엔의 얼굴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그건 디날 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레뮤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지만 엘리어트는 베델리어의 말에 진심으로 당황한 듯 반쯤 벌어진 입술을 하릴없이 달싹였다.

"어,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자주 놀러 올게요, 편지도 할게요! 매일 매일 할게요!"

"고맙구나, 우리 착한 비엔. 하지만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아니, 기약할 수 없어도 괜찮단다. 어머니는 우리 비엔을 잊지 않을 거야."

루비엔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루시엔은 그 옆에서 식사를 멈추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핏 눈물을 닦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시엔이 웃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루비엔과 엘리어트뿐이었다.

"저, 저도 잊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훌륭하게 성장해서 어머니를 모시러 올게요!"

"그렇습니다! 디날에서도 최고의 교육과 편의를 약속드릴 겁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엘리어트가 쓸데없이 비장하게 외쳤다. 에밀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지만 엘리어트는 그 안에 담긴 묘한 안타까움을 눈치 채지 못했다. 레뮤엘이 살짝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고는 일부러 엄격하게 베델리어에게 경고했다.

"그쯤 해두는 게 좋을 거다."

"오라버니도 참..."

베델리어가 살짝 입술을 비죽였다. 나이가 들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는데도 아직 레뮤엘에게는 그녀가 어린 소녀 같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저런 뻔히 보이는 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저 둘은 대체...

그러고 보면 엘리어트는 가끔 이렇게 헛다리를 거하게 짚을 때가 있단 말이지. 갑자기 나은 지 오래된 편두통이 재발하는 것 같았다.

"루비엔에 대한 것은 걱정 마라. 엘리어트가 일 년 가까이 고심해왔고, 그에 대한 대응은 완벽하다. 사실상 이번 회담은 루비엔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부분은 방금 해결된 듯하군."

루비엔과 엘리어트가 구세주를 바라보듯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 같은 피라는 게 이런 데서 티가 나는 건 곤란한데. 레뮤엘은 잠시, 진지하게 크라니아로 떠나는 것을 미뤄야 하나 고민했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문제라고 금방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후후, 제가 너무 지나쳤군요."

"...리트에게 그런 농담은 안 통한다."

레뮤엘이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른 채 베델리어를 바라보는 보랏빛 눈은 의문과 당혹감으로 젖어 있다. 눈앞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 밑에 깔린 기류를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베델리어가 재미있다는 듯 엘리어트와 그 뒤의 에밀을 곁눈질했다. 엘리어트와는 달리 에밀은 처음부터 베델리어의 의중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엘리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거면 됐다. 어차피 에밀은 엘리어트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에밀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를, 잘 부탁해요."

베델리어의 미소가 에밀에게 향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에밀은 순발력 좋게 허리를 숙여 그녀의 '허락'에 화답했다.

그녀의 허락이 에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마 엘리어트는 절대 모를 것이다. 오늘 라퓨타로 오는 내내 에밀이 결혼 전 상견례를 가지는 예비신랑의 심정이었다는 것을 엘리어트가 알았다면 아마 그렇게 얌전하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어쨌든 에밀은 결국 해냈다. 마지막 관문을 넘어섰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레뮤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래서."

아직 할 얘기가 남았던가?

모두가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의 얼굴은 짜증과 희열이 반씩 섞인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참아 왔던 그 말이 드디어 레뮤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언제쯤 크라니아로 떠날 수 있는 거냐?"

조용해진 만찬장 안에, 저 멀리 드래곤의 포효가 웃음소리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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