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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디날의 후예 (25/27)

7. 디날의 후예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에밀이 자신 아래 깔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엘리어트를 발견했을 때, 엘리어트는 반쯤 가위에 눌려 있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에밀은 온통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는 엘리어트의 목덜미와 쇄골을 보고 한 번, 연한 갈색으로 살짝 물든 배의 붕대를 보고 두 번 놀라고 말았다.

"리...리트! 리트, 정신 차려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엘리어트를 흔들자, 식은땀을 흘리던 엘리어트가 살짝 눈을 떴다. 보랏빛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드러나며 에밀을 흘겼다.

"...바... 바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소리치지 마... 머리 울려."

엘리어트가 굳어버린 팔을 애써 들어 올려 이마를 짚었다. 울상이 된 에밀이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었다. 드러난 상처는 심하진 않았지만 약간 벌어져 핏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제, 제가 그런 거예요?"

"너 아니면 누구겠어."

"흐으으..."

에밀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엘리어트를 바라보았다. 정말 전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에밀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살롱에서 엘리어트를 기다리며 잠든 척했을 때도, 시엘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녀를 쫓아냈을 때도, 엘리어트를 씻기는 척하며 흥분시켰을 때도 에밀은 멀쩡한 제정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어쩌다 엘리어트를 덮치며 자고 있는지, 어쩌다 그의 목덜미에 꽃밭을 만들어 놨는지, 어쩌다 저 배의 상처를 벌려 놓았는지 도무지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전하, 기침하셨... 전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서던 비슈나가 엘리어트의 젖혀진 옷깃 안의 붉은 흔적들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엘리어트가 급히 옷깃을 여몄지만 비슈나는 완전히 당황해서 엘리어트에게 달려왔다.

"전하, 방금 그것..."

"신경 쓰지 마라. 아프지도 않고 병이 난 것도 아니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어쩌다 이런-"

"비슈나."

엘리어트가 위엄 있게 비슈나를 부르자 그가 뭔가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에밀 쪽을 바라보며 묻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게..."

에밀이 축 처진 눈으로 엘리어트와 비슈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없는 강아지 귀가 보이는 것 같다. 가련하고도 처량하게 에밀의 눈이 비슈나에게 무언의 용서를 구하자, 비슈나는 순간적으로 엘리어트의 목덜미를 무자비하게 물어뜯어 놓은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말았다.

비슈나의 한쪽 눈썹이 살짝 더 기울어지며 다물린 입술이 크게 소리를 내려는 순간, 엘리어트의 한 마디가 그의 폭발을 막았다.

"그는 관계없어. 그보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전하의 용태를 궁금해 하십니다. 오늘 언제쯤 내방하실 수 있을지 물으셨습니다."

"아아..."

엘리어트가 흘끗 에밀 쪽을 바라보자, 에밀이 움찔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엘리어트가 손끝으로 살짝 벌어진 붕대 위를 쓰다듬었다. 조금 벌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왕진 후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전해 줘."

"예."

"나가 봐. 에이몬드 공자와 할 얘기가 덜 끝났으니."

아침부터 붙어 있었으면서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았나, 라고 생각했지만 비슈나에게는 그걸 물을 권리가 없었다.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오면서 비슈나가 슬쩍 에밀을 노려보았지만 에밀은 여전히 풀이 죽은 채 시무룩하게 엘리어트의 곁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엘리어트가 기운 내라는 듯 에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침이라 조금 끝이 뻗치긴 했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고수머리가 결 좋게 손가락에 감겨 왔다.

"됐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비슈나는 좀 과잉보호 기질이 있으니까."

"...리트."

"응."

"...이따가 폐하께서 오신다고 하셨죠?"

엘리어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초록색 눈동자가 갑자기 뭔가 결의라도 한 듯 선연하게 빛나며 생각에 잠겼다. 왠지 불안해졌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에밀은 평소처럼 엘리어트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어차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에밀을 알고 있기에 엘리어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평소와 같은 아침을 시작했다.

의원이 와서 살핀 상처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핏물이 조금 배어 나오긴 했지만 그렇게 걱정할 것은 못 되었다. 연고를 바르고 새 붕대를 감고 난 후, 엘리어트는 조금 바빠졌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를 잠옷을 입은 채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밀과 비슈나의 도움을 받아 말끔히 씻고 오랜만에 정복을 갖추어 입었다. 목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평소보다 깃이 좀 더 높은 셔츠와 조끼를 걸치고 배를 조이지 않는 한 치수 큰 바지를 입은 채, 엘리어트는 조심스럽게 티 테이블 앞에 섰다. 지금쯤 오셨을 텐데-라고 생각한 순간,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어떠냐?"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직 앉는 건 좀 아프지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습니다."

레뮤엘의 말투는 다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답지 않게 냉랭했지만 그의 심청색 눈에는 걱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엘리어트가 괜찮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레뮤엘 쪽으로 찻잔을 살짝 밀었다. 레뮤엘이 그 천천한 몸짓을 보다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쳐 드렸다고 생각한 엘리어트가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에밀이 그 곁에서 안타까운 눈으로 덩달아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마치 초상이라도 난 듯 자기 앞에 나란히 고개 숙인 둘을 보며 레뮤엘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서로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그 표정이 빤히 읽혀서 귀여웠다. 옆에서 봐도 이렇게 선명한 마음을 5년이나 빙빙 돌려 왔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늘은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폐하,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레뮤엘이 살짝 눈을 돌려 에밀을 바라보았다. 감히 국왕의 말을 자른 것 치곤 꽤 떨고 있었다. 곁에 앉아 있던 엘리어트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엘리어트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가? 살짝 흥미가 생긴 레뮤엘이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자, 에밀이 심호흡을 했다.

"뭐지?"

"저... 전하를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

갑작스러운 얘기에 레뮤엘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뭐라고...?

"전 아직 부족하고, 많이 어리지만... 그렇지만, 전하를 정말 사랑합니다!"

"에, 에밀!"

"아니, 계속해라."

엘리어트의 얼굴이 붉어져갔지만 레뮤엘은 웃음을 참으며 에밀에게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열일곱 소년의 결의에 찬 고백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전하를 제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에, 에, 에, 에밀!"

너무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엘리어트에 비해, 에밀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레뮤엘을 마주보고 있었다. 단호한 초록색 눈동자에 레뮤엘의 심청색 눈동자가 겹쳤다. 레뮤엘이 느긋하게 생각에 잠기며 조금 웃었다.

"그럼, 후계는 어떻게 할 거지?"

"!"

에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갔다. 물론 후계에 대한 것은 엘리어트와 레뮤엘이 정해야 하는 일이고, 에밀은 그저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라는 것을 잘 안다. 에밀이 엘리어트의 반려가 된 후라고 해도, 엘리어트의 후계를 위해서는 측실이나 후비를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에밀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뜨며 레뮤엘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결코 양보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 번, 사랑하는 이를 빼앗겼다. 두 번은 없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릴 것을 알아서 일부러 그를 멀리해 왔지만 한번 둑이 터진 마음은 이제 엘리어트의 전부를 원하고 있었다.

"그건, 어려운 문제로군."

에밀이 반듯하게 각을 잡고 앉아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그 쭉 편 등을 보며 레뮤엘은 조금 흐뭇해졌다. 과연 발로아의 핏줄이었다. 이아네를 닮은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는 선한 긍지로 빛나고 있었다. 이 아이라면, 아들을 맡겨도 좋을 것이다.

자아,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한다?

레뮤엘은 더 좋은 표현이 없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때로는 정직이 가장 큰 무기이자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레뮤엘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엘리어트, 너는 어떠냐?"

엘리어트가 눈을 깜박였다. 곁에 앉은 에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건 아버지로서 묻는 거다, '리트'. 그만의 반려가 되길 원하느냐?"

"...예."

"그렇군."

레뮤엘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가라앉은 심청색 눈동자가 엘리어트와 너무 닮아서 에밀은 조금 웃을 뻔했다. 한참 말이 없던 레뮤엘이 방 안에 얕게 깔린 긴장을 깨며 입을 열었다.

"그럼, 서둘러야겠구나."

"예?"

"무엇을...?"

에밀이 엘리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엘리어트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본 둘이 다시 레뮤엘을 바라보자, 레뮤엘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미안하다, 리트. 네겐 얘기했어야 했는데."

"...예?"

"비슈나."

레뮤엘이 뒤에 시립한 비슈나를 부르자, 비슈나가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나갔다. 엘리어트가 생각이 깊어진 얼굴로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아버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극비 사항이라 함부로 얘기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다."

엘리어트의 방을 노크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열린 문틈으로 이아네가 들어섰다. 에밀이 반가운 눈을 하며 일어서는 순간, 이아네의 뒤로 누군가 따라 들어왔다.

키가 작은 것을 보니 어린아이였다. 에단보다 조금 작은 듯한 키, 어린 나이임에도 기품어린 몸짓,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 에밀이 입을 살짝 벌렸다. 엘리어트도 놀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갑작스레 침실에 나타난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

레뮤엘이 일어나더니 소녀의 곁에 섰다. 그때, 에밀은 소녀가 누구를 닮았는지 깨달았다. 레뮤엘의 유려한 이목구비는 소녀의 작고 또렷한 얼굴 생김과 겹쳐 보였다.

"좀 더 빨리 소개하고 싶었지만, 너희들의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단다."

에밀이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틀림없었다. 살롱에서 만났던 그 소녀다. 옷차림도 태도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인사하렴."

그때는 보닛으로 가려져 있던 폭포수 같은 은발이 완전히 드러나 허리께까지 부드럽게 흔들렸다. 심청색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지며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치맛자락을 잡고 허리를 숙인 소녀가 우아하게 고개를 들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 왕세자 전하. 델토르의 제 1 왕녀 루시엔 슈 스타시아, 인사드립니다.“

* * *

레뮤엘의 여동생, 베델리어 플로렌스 디날이 델토르의 왕과 결혼해서 쌍둥이를 낳은 것은 디날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델토르의 왕 제르멘 라 스타시아가 젊은 나이에 원인 모를 괴질로 죽은 후, 델토르에는 쭉 베델리어의 섭정이 이어져왔다.

제르멘이 죽었을 때, 베델리어의 쌍둥이 남매-루시엔과 루비엔은 겨우 한 살이 될까 말까 한 갓난아이였기 때문에 사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베델리어는 명실상부한 스타시아 왕가의 임시 안주인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그러나 같은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는 없는 법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쌍둥이가 일란성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인 루비엔은 당연히 왕위를 잇기 위한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기 시작했고 루시엔은 저명한 귀족가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자아이인 루시엔 쪽에서 터졌다.

루시엔은 공부를 좋아했다. 책을 좋아했다던 제 아버지 제르멘을 닮은 건지, 루시엔은 어릴 때부터 도서관을 드나들고 루비엔과 제왕학 수업을 들었다.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옷이나 보석에 관심을 가질 때 루시엔은 책과 역사를 사랑했고 가끔씩은 루비엔을 앞질러 대답할 때도 있었다.

베델리어는 루시엔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불안하긴 했지만 루시엔은 분별력이 있는 소녀였고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크게 주의를 끄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까지는.

"더 빨리 소개시키고 싶었지만, 네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늦어져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레뮤엘에게 대답하면서도 엘리어트는 여전히 신기하다는 눈으로 열두 살짜리 사촌누이를 바라보았다. 엘리어트의 시선을 느낀 루시엔이 작고 하얀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리며 이아네에게 속닥였다.

"놀라신 것 같네요."

"왕녀 전하의 이야기는 완전히 극비 사항이었으니까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나, 무례라니요."

소녀가 생긋, 이아네에게 미소 지었다. 그 동그래지는 입술꼬리에서 이아네는 어렴풋이 제르멘의 흔적을 발견하고 아련한 눈을 했다.

선대 델토르의 국왕이었던 제르멘 라 스타시아. 그는 루시엔의 아버지였고 델토르의 왕이었으며, 이아네의 주군이자 또한 첫사랑이었다. 지금은 옛날 이야기일 뿐이지만, 루시엔의 흐르는 듯한 은발을 볼 때마다 이아네는 어쩔 수 없이 제르멘이 떠올랐다. 아주 어릴 때부터 순정을 바쳐왔던 그의 왕.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이아네의 사랑은 끝났을지언정 진심이었다.

레뮤엘이 묘한 미소를 짓는 이아네를 슬쩍 훔쳐보더니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과거의 흔적에 흔들릴 만큼 이아네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충분히 알면서도 질투가 나는 것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그럼,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게 된 겁니까?"

레뮤엘이 조심스럽게 품에 갈무리한 서신을 꺼내어 내밀었다. 엘리어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신을 받아들자, 레뮤엘이 찻잔을 들며 간단히 덧붙였다.

"그걸 읽으면 상황이 이해가 될 거다."

엘리어트가 조심스럽게 서신을 펴자 에밀이 살짝 그에게 다가앉았다. 읽기 쉬운 깔끔한 글씨체를 보고서, 둘은 그것이 베델리어가 보낸 서신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오라버니,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문안 올리지 못하는 점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루시엔의 약혼 상대였던 벨도어 백작이 루비엔을 암살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엘리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들어 레뮤엘을 바라보자, 레뮤엘이 마저 읽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엔은 동생의 자리를 탐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곁에서 지켜봐온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로, 루시엔이 왕위를 위협할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는데다 어떤 이들은 루비엔의 암살을 루시엔이 사주한 것이 아니냐고까지 말합니다. 어떻게든 제가 막고는 있습니다만, 루시엔이 델토르에 계속 있는 것은 너무 위험한데다, 델토르에서는 제대로 된 혼처조차 구하지 못하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엘리어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열두 살짜리 소녀에게는 너무 가혹한 상황이었다.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왕위를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가 된 데다 반역 혐의를 받은 왕녀와 새로 약혼할 간 큰 가문이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을 지켜 줄 가문이나 남편도 없이, 겨우 열두 살의 나이에 왕녀 루시엔은 델토르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어려운 부탁을 드리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루시엔을, 잠시만이라도, 디날에서 지내게 해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이대로 델토르에 있다가는 루비엔의 반대파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게 되거나 평생을 북쪽 별관에 갇힌 채 지내게 될 거예요.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답신 부탁드립니다.'

엘리어트가 고개를 들었다. 서신을 다 읽고 난 후에 바라보는 사촌 누이의 모습은 아까와 조금 달라 보였다. 태연하게 쿠키를 하나 집어 오독오독 씹는 작은 입술을 보며 엘리어트는 점점 화를 주체할 수 없어졌다.

저렇게 천진하고, 저렇게 어린 아이를 정치적인 암투의 대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엘리어트의 표정이 뜻하는 바를 알아챈 레뮤엘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루시엔을 디날로 받아들이고, 왕족으로서 합당하게 대우하겠다고 바로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2주 후, 루시엔이 아무도 모르게 성에 도착했지."

레뮤엘이 고개를 내려 얌전히 차를 들이키는 조카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루시엔이 살짝 고개를 들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결 좋은 은발을 쓰다듬게 될 만큼 사랑스럽고 또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디날에 오긴 했지만 사실상 망명이나 마찬가지다. 베델리어가 잠시 맡아달라고는 했지만 아마 델토르에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혹시 다른 암살 시도가 있을지 몰라, 루시엔이 여기 왔을 때 바로 소개시키지는 못했다. 본의 아니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놀라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레뮤엘의 사과에 꼬리를 물듯 루시엔이 부드럽게 유감을 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에밀을 눈짓하는 것을 보고 에밀은 그녀가 살롱에서의 일을 사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엘리어트가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촌이라고는 하지만 엘리어트에게도 베델리어와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후원의 호수와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함께 물놀이를 하거나, 이야기를 듣거나, 그녀가 델토르로 시집갈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까지도 생생했다.

그런 베델리어의 딸이다. 레뮤엘 뿐 아니라 엘리어트에게도 루시엔은 사랑받아 마땅한 자격이 있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아카데미에 수속 절차를 밟아 두었다. 다음 학기엔 그녀도 아카데미에 다니게 될 거야."

"델토르에는 학원 시설이 없어서, 곤란하다는 걸 알면서도 제가 무리하게 부탁드렸어요.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루시엔이 미안한 미소를 띠며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레뮤엘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네가 델토르에서 어떤 위치던, 내게는 그저 베델리어의 딸일 뿐이다. 사양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도록 해."

엘리어트가 깊은 동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루시엔 쪽을 돌아보았다. 찻잔을 내려놓고 즐거운 듯 미소를 짓던 루시엔이 시선을 느끼곤 엘리어트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서 베델리어의 얼굴이 얼핏 비치는 것 같아 엘리어트도 조금 웃었다.

"델토르에서는 제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거든요. 루비를 위해서도... 어머나."

루시엔이 실수로 동생의 애칭을 불렀다가 살짝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책이 좋아요. 공부하는 것도 즐겁고요. 하지만 델토르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디날에 와도 된다고 하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어머니가 늘 디날에 대해서, 레뮤엘 폐하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거든요."

루시엔이 눈을 반짝였다. 다행스럽게도 이 어른스러운 왕녀는 자신의 처지를 긍정적인 쪽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나 외롭거나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유롭고 심지어는 즐거워 보였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도록 해라, 루시엔."

"어머, 싫다. 그냥 루시라고 불러주셔도 괜찮아요. 어머니와 루비는 늘 저를 그렇게 불렀거든요. 저의 가족에게만 허락된 호칭이지만, 지금은 폐하와 전하가 제 가족이시니 특별히 허락해 드릴게요."

꼬마 숙녀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농을 던지자, 엘리어트가 그만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여동생이 생긴 것 같았다. 에밀과 함께 지내면서 형제애에 대해 충분히 알고도 남았지만 여동생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직 할 얘기가 더 있다만."

레뮤엘의 목소리에 엘리어트와 에밀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미소 지은 레뮤엘의 입술이 어쩐지 굉장히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아까의 이야기를 이어가 보도록 할까."

"예?"

"너희들이 반려가 되면, 후계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루시엔이 반려라는 말을 듣자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호기심 어린 시선에 살짝 얼굴이 붉어진 엘리어트가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 그건 나중에..."

"아니, 지금 얘기해라. 난 너무 오래 기다렸다."

엘리어트가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냉엄한 얼굴로 아들과 아들의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날 크라니아로 보내 줘야지."

"하지만..."

아무리 최신의 의학 기술을 동원한다 해도 동성혼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는 없는 일이다. 에밀이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빼앗겨야 하나. 이대로, 다시 빼앗기고 마는 걸까.

그래, 결국 엘리어트에게 자신으로는 부족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 입으로 그가 다른 여자를 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혀를 겨우 움직이며, 에밀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눌렀다.

"후비를..."

"에밀."

뜻밖에도, 입을 연 것은 이아네였다. 에밀이 눈을 들어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를 애써 감추며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똑바른 시선에, 이아네는 살짝 웃고 말았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데.

에밀은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소년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가 도움을 청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을 텐데."

이아네가 어쩔 수 없는 아이라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에밀이 눈을 깜박이며 이아네의 말을 곱씹었다. 혹시, 어쩌면, 이아네와 레뮤엘은 알고 있었던 걸까?

"폐하."

"말해라."

"저희를... 도와주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에밀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얼굴로 목소리를 흘려내었다.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쉬운 일이었다. 곁에서 엘리어트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깜박이며 에밀을 바라보았다.

레뮤엘과 이아네가 마주보곤 빙긋 웃었다.

"너희들이 정말 잘 해내긴 했지만, 결국 어떤 부분에서는 어른들의 손이 필요할 때가 있지. 고집쟁이들 같으니, 결국엔 리트가 다치고서야 도움을 청한단 말이냐."

레뮤엘이 짐짓 못마땅한 듯 딱딱거렸지만 표정만큼은 부드러웠다. 루시엔이 살짝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에밀이 조심스럽게 반박하자 레뮤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심청의 눈동자가 더 깊어지며 흡족한 빛을 띠었다.

"두 세대의 반려가 남성이었던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후사가 없는 왕권은 이전에도 있었다. 정사(正史)가 아니라 야사(野史)이기 때문에 리트도 몰랐을 거다."

엘리어트가 살짝 침을 삼켰다.

"형제나 사촌에게 왕권이 넘어가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너희들이 반려가 되기로 하는 동안, 우리는 루시엔에게 왕위를 이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예?"

엘리어트가 놀라 반문하는데도 레뮤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찻잔을 들어 목을 조금 축였다. 이아네가 그 곁에서 부드럽게 한마디 했다.

"여기서부터는, 어른들의 일이거든."

이아네의 온화한 미소를 바라보며 에밀은 기분 좋은 패배감을 느꼈다.

졌다. 완전히 졌어. 이것이 바로 어른의 세계라는 건가. 피식, 웃으며 에밀이 허리의 긴장을 풀었다. 루시엔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에밀을 바라보며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잔잔한 폭풍이 몰아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잠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어트가 죄책감이 가득 서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시엔이 엘리어트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다고 해도, 델토르에서 그렇게 정치적으로 상처받았던 소녀를 이번에는 자신이 이용하는 것 같아 마음이 꺼림칙했다. 베델리어를 닮은 루시엔의 눈이 엘리어트를 흥미롭게 주시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루시엔은 아직 디날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저를 걱정해 주시다니 상냥하시네요."

루시엔이 엘리어트의 말을 끊었다. 난감한 얼굴이었지만 엘리어트의 걱정이 기쁜 듯 그녀의 눈은 시종 미소를 담고 있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델토르는 제 고향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어차피 델토르에 계속 있었다고 해도, 저는 백작 부인으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재미없는 삶은 제 쪽에서 사절이에요."

엘리어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루시엔이 난처한 듯 눈썹꼬리를 내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엘리어트는 지금 그녀에게 왕녀가 되어 달라고 하던 레뮤엘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저도 조건이 있었거든요."

루시엔이 생긋 웃으며 레뮤엘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어트가 눈을 깜박였다.

"반려는 제가 원하는 사람으로 고르게 해 줄 것. 그게 제가 요구하는 단 하나의 조건이에요."

엘리어트가 자기도 모르게 에밀 쪽을 돌아보았다. 똑같은 생각을 했던 건지, 에밀도 엘리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엔의 요구가 전혀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합당한 것이라는 듯.

"정말, 그걸로 괜찮겠느냐?"

"그럼요. 혹시 제가 여왕이 되기 싫어지면 제 아이가 뒤를 잇게 하면 될 일이잖아요. 공부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반려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고, 심지어 제 미래도 정할 수 있어요. 제겐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한 걸요!"

루시엔이 꿈꾸는 것처럼 손을 마주 잡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했다. 이 순간만큼은 평범한 열두 살 소녀처럼 보이는 그 천진한 얼굴에 엘리어트는 못 말리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지금은 에이몬드 공자가 근신중이니, 근신이 풀리고 나면 아카데미를 구경시켜 주거라. 정식 입학은 다음 학기부터지만 루시엔이 도서관에 가보고 싶어 하더군."

"네."

"그럼, 이제 그만 가 보도록 할까. 너무 오래 있으면 궁의가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

레뮤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살짝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인 루시엔이 이아네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가자, 방에 남겨진 둘은 왠지 모를 탈력감에 한참을 멍하니 카우치에 기대어 있었다.

"...에밀."

"...네."

"아까 그거, 뭐야?"

에밀이 고개를 돌렸다. 엘리어트가 천장을 바라보며 망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뭐가요?"

"...그거 말야.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느니..."

"아아, 그거요."

에밀이 난 또 뭐라고, 하며 피식 웃었다.

"말 그대로죠.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내, 내 말은!"

엘리어트가 벌떡 몸을 일으키다 배에서 느껴지는 동통에 다시 몸을 움츠렸다. 에밀이 깜짝 놀라 엘리어트의 허리를 감쌌다.

"괜찮아요?"

"으... 괜찮아. 그... 그러니까..."

엘리어트가 완전히 붉어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들어 에밀을 바라보았다. 난처해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에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이자 에밀은 왠지 뱃속이 뜨거워졌다.

'아, 예쁘다.'

"나... 나한테 청... 청혼한 거 같잖아."

"? 청혼 맞는데요."

"바, 바보!"

에밀은 이번에야말로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졌다. 당황하며 에밀의 어깨를 밀어내는 엘리어트의 얼굴이 완전히 빨개져 있는 걸로 봐서 엘리어트도 결코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리트는 싫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에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엘리어트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뭔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정확하게 들리질 않았다. 그보다 흘러내린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쫑긋 솟은 발그레한 귀를 씹어 먹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에밀이 엘리어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희미하게, 엘리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했는데... 네가... 말야..."

"리트?"

에밀이 엘리어트의 턱을 쥐고 자신을 향하게 했다. 엘리어트가 당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붉어지는 입술을 먹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에밀이 일단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꽉 깨물려 있던 아랫입술을 달래듯 핥고, 단단한 치열을 살짝 훑는다. 힘이 풀려가기 시작하는 입술을 두어 번 쓰다듬듯 물었다 놓은 뒤 에밀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뭐라고 했던 거예요?"

"...이익..."

"말 안 하면 키스 한 번 더-"

"아, 알았어! 알았다고!"

엘리어트가 있는 대로 얼굴을 붉히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한 그 감정이 날것으로 그대로 전해져 와서, 에밀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해졌다.

귀엽다. 오직 자신 앞에서만, 엘리어트는 이런 얼굴을 한다. 그 어린애 같은 얼굴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에밀은 왠지 다시 키스하고 싶어졌다.

"청혼은 내가 먼저 했단 말야!"

"알아요."

에밀이 쌈박하게 대답하자, 엘리어트가 뭔가 더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화를 내기에 영 애매한 주제라는 것도 아는 것 같다. 찡그리던 미간이 좁혀지며 엘리어트가 낮게 구시렁거렸다.

"아... 알면 이런 말 하게 하지 말라구."

"왜요? 리트가 청혼했고, 저도 좋다고 했었잖아요. 좀 늦긴 했지만 그걸 이제 폐하께 말씀드린 건데, 그게 왜-"

"그, 그러니까! 그걸 내가 하고 싶었다고!"

"...아."

에밀은 그제야 엘리어트가 심통을 내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직 엘리어트는, 에밀에게 왕세자로서의, 아니면 연상으로서의, 또는 반려로서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에밀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어서, 결국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먼저인지가 중요한 건가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에, 엘리어트는 왠지 맥이 빠졌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닌 것 같긴 하다. 누가 먼저 했냐로 이렇게까지 열을 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어차피 이미 저질러 버린 마당에 이런 걸로 왈가왈부하는 게 왠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다음엔, 내가 먼저 할 거야."

"네에."

다음이라는 게 있는지가 문제지만. 에밀은 머릿속으로 떠오른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살짝 부루퉁해진 엘리어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단단히 삐진 듯 에밀을 밀어내던 엘리어트의 손은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에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닌 것처럼 말해도, 결국 엘리어트는 에밀에게 약했다.

엘리어트가 붕대를 풀고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까지는 그로부터도 2주 정도가 더 걸렸다.

그동안 레뮤엘은 아주 바빴다. 업무를 돕던 엘리어트가 일에서 손을 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정작 레뮤엘이 마음이 급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폐하!"

"목소리가 크구나, 엘리어트. 몸은 이제 괜찮으냐?"

"예. 덕분에... 아니, 그보다!"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젖힌 엘리어트가 태연하게 서류를 내려다보며 대답하는 레뮤엘을 불렀다. 이아네는 그 곁에서 올 것이 왔다는 듯 이마를 짚었지만 레뮤엘은 마치 엘리어트가 아침 문안이라도 드리러 온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대체, 뭡니까? 다음 달에 대관식이라뇨! 저는 아직 들은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이제라도 들었으니 됐다."

"아버지..."

엘리어트가 복잡한 감정을 담아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이 태연히 서류에 마지막 서명을 마친 후 고개를 들었다. 심청색 눈동자가 엘리어트의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제 어머니를 똑 닮은 모습이지만 레뮤엘은 한 번도 그의 아들에게서 전 왕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안쓰럽고 더욱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리트."

"...예."

레뮤엘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엘리어트가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쭉 뻗은 다리와 곧게 편 허리는 엘리어트의 키를 더 커보이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레뮤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너를 지켜주겠다고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

"부족한 아버지일지언정 넌 잘 따라 주었고,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 주었지.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이미 너는 차기 국왕으로서 손색이 없어.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엘리어트가 벅찬 눈을 했다. 레뮤엘이 이렇게 솔직하게 엘리어트를 칭찬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평생을 자신이 바라보며 달려온 그 뒷모습이 이제 애정을 담뿍 담은 눈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엘리어트를 돌아본다. 그동안 어떤 성과보다도, 그 눈이 엘리어트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 왔다.

"하지만 네겐 이제 내가 필요 없다."

"네?"

레뮤엘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살짝 이아네 쪽을 바라보았다. 이아네도 마주 웃으며 레뮤엘의 내민 손에 살짝 손을 얹었다.

"이제, 에밀이 있으니까."

"......"

"내가 아니라도 네 곁을 지켜줄 이가 있으니, 이제 나는 내 소임을 다한 셈이지. 그것이야말로 내가 물러나야 할 때라는 증거가 아니고 뭐란 말이냐."

레뮤엘은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왕관을 넘기겠다는 말다툼이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정된 진심을 전하는 진지한 눈빛이 엘리어트를 마주하자, 엘리어트는 이제 더 이상 왕관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엘리어트가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아쉬움과, 감사와, 두려움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단단한 의지가 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레뮤엘의 입술 끝이 움찔했다. 엘리어트가 북받치는 감정을 잠시 억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 싶어서 저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자랑스러워할 사람은 오히려 접니다. 제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국왕이었습니다."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엘리어트의 잿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레뮤엘과 이아네가 서로를 마주보더니 낮게 웃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아네가 잠시 빨개지는 눈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레뮤엘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잠시간의 침묵 끝에 겨우 들린 목소리의 끝은 살짝 젖어 있었다.

"...천만에."

고개를 든 엘리어트의 얼굴은 결연한 긍지로 가득했다. 왕세자의 얼굴이 아닌 국왕의 얼굴이었다.

"가 보거라. 내일부터는 너도 바빠질 테니."

"...예."

엘리어트가 방을 나가고, 레뮤엘과 이아네는 한참 말이 없었다. 둘 다 멍하니 창 바깥의 봄볕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엘리어트는 레뮤엘뿐 아니라 이아네에게도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켜보아왔고, 그의 갈등과 번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다. 문득 손을 강하게 잡아오는 힘에 이아네가 고개를 돌렸다. 레뮤엘이 시원섭섭한 얼굴이었다.

"...끝났군."

"...그렇군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가 어떤 마음인지 서로보다 더 잘 알았다.

"...리트가 태어났을 때."

"...?"

"난 그때,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그 아이를 국왕으로 키워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니 꿈같았어. 실감이 나지 않았지."

이아네가 살며시 레뮤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레뮤엘이 말할 때마다 진동이 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아이의 어머니가 떠나고... 잔인한 현실에 내던져진 세 살짜리 리트의 눈을 마주봤을 때, 나는 꿈에서 깨고 말았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만큼은 후회 없이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레뮤엘이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습기를 살짝 머금은 입김이 이아네의 이마 위로 흩어졌다.

"지금까지의 행보에 대해, 후회는 없다. 하지만..."

레뮤엘이 이아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아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레뮤엘의 손에 몸을 맡겼다.

"...역시, 조금 섭섭하려나."

뒤돌아 집무실을 나가는 아들의 등은 곧고 단정했다. 그 어깨 위로 지워진 디날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엘리어트는 강하고 결연하게 받아들였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아들의 뒷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활짝 펼친 그 날개가 어딘지 아련하게 심장을 죄어오는 것이다.

"당신을 닮았습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대가 처음으로 그렇게 얘기했었군."

제 어머니만 쏙 빼닮은 일곱 살짜리 왕자를 보며 레뮤엘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단 한 명, 전쟁에서 붙잡혀 온 델토르의 포로를 빼고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레뮤엘이 이아네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레뮤엘을 올려다보자, 레뮤엘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사실은 꽤 기뻤다. 아닌 것 같아도,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구나, 싶더군."

"...후후."

어쩔 수 없는 아들바보였던 건가. 이아네가 살짝 웃자, 레뮤엘이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듯한 키스가 지나고, 레뮤엘이 살짝 속삭였다.

"그럼, 이제 크라니아로 떠날 준비를 해 볼까."

"......"

아들의 인생은 아들의 인생. 이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려는 심청의 눈동자에는 오직 이아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한 달 후, 디날의 새로운 국왕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하얀 대관식 정복을 갖춰 입은 엘리어트의 얼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곁에서 옷매무새를 만지던 비슈나가 살짝 웃었다.

"긴장되십니까?"

"...조금."

엘리어트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을 못 잔 것은 아니지만 긴장했던 탓에 잠이 얕았던 모양이었다. 밤새도록 대관식에서 실수하는 꿈을 꾼 탓에 엘리어트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잘 해내실 겁니다."

"...음."

엘리어트가 애매하게 대답했지만 비슈나는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견장을 달고서 두 걸음 물러나 섰다.

엘리어트가 마르긴 했지만 꽤 키가 큰 편이라 몸에 꼭 맞게 재단된 정복을 입자 날렵한 몸매가 더 부각되어 보였다. 부드러운 곡선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단정한 몸선은 남자답다기보다 아름다웠다.

"리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엘리어트가 살짝 뒤돌아보며 드디어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정장을 한 에밀이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목 끝까지 잠근 스탠딩 칼라에는 교차된 까마귀 깃털의 엠블럼이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금욕적인 복장에 엘리어트는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괜찮아요?"

"...잘 모르겠어. 조금... 걱정돼."

에밀이 살짝 웃었다. 엘리어트가 '조금' 걱정된다고 얘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에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왕세자로 책봉될 때도, 엘리어트는 지금과 똑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잘 해낼 거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에밀이 빙긋 웃으며 엘리어트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엘리어트는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조금 끄덕일 뿐이었지만 비슈나는 엘리어트가 약간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곁에서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광경이었다. 엘리어트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작은데다 세 살이나 어린 에밀이지만 왠지 지금은 에밀이 더 커 보이는 것 같았다. 에밀의 초록색 눈동자는 다정하고 관대하게 엘리어트를 똑바로 바라본다.

'뭐랄까, 어머니 같은? 아니, 그것보다는 좀 더...'

분명히 어디선가 본 눈빛이긴 한데, 왠지 익숙한 눈빛이긴 한데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비슈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에밀이 시선을 느끼고 문득 비슈나 쪽을 돌아보았다. 멍하니 둘을 바라보고 있던 비슈나가 혼자 살짝 뜨끔해져 시선을 돌리자, 에밀이 조금 웃었다.

그 순간, 비슈나는 깨달았다.

"전하, 이제 가셔야 합니다."

"음."

"그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에밀이 엘리어트를 달래듯 속삭이고는 그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엘리어트가 고개를 끄덕이곤 살짝 한숨을 내쉬고 비슈나를 따라 방을 나갔다. 방에서 멀어지며 엘리어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아까와는 다른 근엄함으로 차올라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비슈나는 확신을 가졌다.

에밀이 아까 비슈나를 바라보며 지었던 미소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아끼고 돌보는 수컷의 얼굴이다. 온전히 나의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랑이 변하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 듯한 단호한 초록색 눈동자.

어머니가 아니다. '남편'의 눈이었다.

'그가 반려여서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비슈나가 복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넓은 홀의 정중앙에 길게 깔린 붉은 우단 위를 하얀 망토가 스치며 지났다. 사락, 하며 흔들리는 하얀 대관식 정복은 옷자락의 움직임조차 우아했다.

조용한 관현악이 깔린 홀 안에는 사람들이 빼곡 들어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요했다. 디날의 새로운 국왕이 될 남자가 곧게 편 등을 하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고한 걸음을 옮기는 동안 함부로 입을 열기 어려운 엄숙함이 웅장한 관현악에 맞추어 흘렀다.

엘리어트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당당하고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아침에 그렇게 떨던 것 치고는 꽤 카리스마 있는 표정에, 에밀은 조용히 웃었다.

모두가 엘리어트를 주목하고 있었다. 대관식이 치러지는 홀의 강단에는 로요라 여신의 가장 신성한 사제가 서 있고, 그 한 단 아래의 왕좌에 레뮤엘이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머리 위에 얹어져야 할 왕관이 오늘만큼은 레뮤엘의 머리 위에서 벗어나 바로 옆의 협탁에 모셔져 있다.

커다란 사파이어는 엘리어트의 눈동자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보라색이었다. 레뮤엘이 아들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것이 틀림없었다.

엘리어트가 드디어 붉은 길의 끝에 당도하자, 사제가 앞으로 나서며 신성한 홀과 보주를 엘리어트의 양손에 각각 쥐어 주었다. 관현악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음악소리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사제의 축사와 어우러졌다.

"...그대에게 흐르는 디날의 피와 로요라 여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가?"

"예."

사제가 성수를 손가락 끝에 찍어 엘리어트의 이마에 살짝 찍었다. 그대로 이마 위로 성호를 그은 뒤, 사제가 엘리어트의 어깨를 살짝 누르자 엘리어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제가 조심스럽게 푸른 망토를 엘리어트의 어깨에 두르고 조용히 물러났다.

레뮤엘이 천천히 일어나 왕관을 들었다.

에밀이 숨을 멈추었다. 왕관이 엘리어트의 머리 위로 완전히 내려앉자 홀 여기저기에서 환희에 찬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로서, 로요라 여신의 축복과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의 이름으로 그대를 다이나르 돈 바흐라자타의 64대 국왕으로 임명하는 바이다."

사제가 홀과 보주를 받아 다시 함에 넣었다. 엘리어트가 조용히 일어나 방금 레뮤엘이 앉았던 왕좌로 다가간다. 평생을 바라봐 왔던 그 자리가 바로 한 걸음 앞에 있었다. 엘리어트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뒤돌아 왕좌에 앉았다. 그 순간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홀 안을 울리는 커다란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창 바깥에서 펑, 하며 커다란 불꽃이 쏘아올려졌다. 밤이 아니라 낮이었지만 그 반짝이는 불꽃을 필두로 성 바깥에서도 함성 소리가 올라왔다.

머리 위로 왕관이 내려앉은 엘리어트를 보며 에밀은 조심스럽게 미소 지었다. 형언할 수 없는 뿌듯함이 가슴에 번져 온몸 구석구석이 살짝 달아올랐다.

막 즉위한 국왕이지만 에밀에게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신만의 반려일 뿐이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끌어안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에밀은 벅찬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안심하지 마."

"응?"

"아직 후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잖아.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딸들을 밀어 넣을걸."

에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크한 표정의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지루한 얼굴이었지만 에단의 암녹색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루시엔에 대한 이야기는 성 밖의 사람에게는 극비사항이었지. 에단이 심각한 것도 그럴 법 하다고 생각하며, 에밀이 에단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뭐하는 거야?"

"...에단."

"왜?"

에밀이 씨익, 웃으며 살짝 찡그려진 에단의 미간을 문질렀다.

"너, 그렇게 걱정 많다간 빨리 늙어."

"괜찮아. 난 아직 어리니까. 피부 관리는 열다섯 살부터 시작할 거야. 난 나보다도 형이 걱정인걸."

"......"

에밀이 할 말을 잃고 재잘재잘 떠드는 에단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자기 앞가림은 확실하게 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목소리가 열두 살의 입에서 나오는데도 이상하게 건방지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에이몬드 공자님."

"아, 루시엔...양."

순간적으로 전하라고 하려다, 에밀은 루시엔이 살짝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허리까지 물결치는 아름다운 은발을 우아하게 땋아 올린 하얀 얼굴이 청초하게 빛난다. 루시엔이 변함없이 빛이 날 듯한 얼굴로 에밀에게 미소를 지었다.

"연회는 어떠신가요? 답답하진 않으십니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전 즐거워요. 모르는 사람뿐이라 조금 외롭긴 하지만."

루시엔이 짐짓 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양볼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그 소녀다운 몸짓에 에밀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라도 괜찮다면, 에스코트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럼, 첫 춤을 시작할 때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에밀이 손을 내밀자 루시엔이 그 위로 작은 손을 올렸다. 형이 생전 처음 보는 소녀를 에스코트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에단이 무언가 깨달은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형."

"아아, 에단. 이쪽의 레이디는..."

"델토르 사람이야?"

에밀이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했다. 루시엔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이 느릿하게 그녀의 진청색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귀여운 또래의 여자아이를 쳐다보는데도 에단의 얼굴에는 일말의 홍조조차 없었다.

"그런 머리카락은 디날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머나."

"대신에 들어본 적이 있어. 스타시아 왕가 특유의 은발에 대해서."

에단은 무심하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에밀은 주위를 둘러보며 에단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정작 에단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루시엔이 에단에게 관심이 생긴 것 같았다.

"델토르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시네요."

"그야, 우리 집안도 델토르에서 왔으니까. 지금은 디날에 귀화했지만 내 뿌리에 대해서 알아두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에단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루시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에밀이 속삭이듯 루시엔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루시엔 양. 이쪽은 제 동생 에이단 카일 발로아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눈치가 빠른 아이라서..."

"괜찮아요. 어차피 곧 모두 알게 될 것을요."

둘의 대화를 들은 에단이 흐음, 하며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지금, 뭔가 자신이 정곡을 찌른 게 맞긴 한 것 같다.

"혹시나 해서 떠본 건데, 정말이었나 보네."

"후후, 소개가 늦었네요. 루시엔 슈 스타시아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냥 루시엔이라고 불러주세요."

루시엔이 조그만 입술 앞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살짝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였지만 에단은 고개만 까닥인 후 무뚝뚝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응."

에밀이 살짝 불안해졌다. 지금은 엘리어트가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그 엘리어트의 뒤를 이을 사람은 눈앞의 이 소녀였다. 사랑하는 동생이 혹여 차기 여왕에게 민폐라도 끼칠까 싶어 에밀이 초조하게 속삭였다.

"저, 루시엔 양. 에단이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괜찮아요. 아직은 저도 그저 델토르에서 온 손님일 뿐인걸요."

"아직은, 이라는 건 곧 디날에서 뭔가 하게 될 거라는 소리?"

에단이 툭, 하고 말을 던지자 에밀이 이마를 짚었다. 뭔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에단에게 힌트만 잔뜩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에단, 이건 그러니까..."

"다음 주에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그때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어떠신가요?"

루시엔이 한 발 빨랐다. 에단이 처음으로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잠시 현재의 호기심과 분위기를 저울질해 본 에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성에서는 루이제 셰프의 디저트가 유명하다지."

"물론 그분께 부탁드릴 생각입니다만."

"콜."

성공적으로 거래를 성사시킨 에단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에밀!"

"수고하셨어요."

대관식이 끝난 후, 엘리어트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에밀의 얼굴이었다. 5년 전 어느 날 그랬던 것처럼 엘리어트는 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에밀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피곤하시죠?"

"역시 이런 건 내 체질이 아냐..."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파래진 얼굴로 엘리어트가 투덜대자, 에밀이 피식 웃으며 엘리어트를 마주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굳어진 어깨가 에밀의 체온이 닿자 마법처럼 풀어졌다.

"멋졌어요. 저, 다시 반한 것 같아요."

"...흐음."

의문스러운 신음이 다였지만 에밀은 지금 엘리어트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속으로 킥킥대며 에밀이 엘리어트에게 달래듯 속삭였다.

"오늘은 씻고 푹 쉬세요."

"으응..."

엘리어트가 응석을 부리듯 에밀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포마드를 발라 말끔하게 넘겼던 앞머리가 살짝 흩어지며 이마 위로 늘어졌다. 에밀이 그를 토닥이며 견장을 풀어내었다.

느긋하게 에밀의 어깨에 기댄 채 그의 손길을 느끼던 엘리어트가 문득 뭔가를 느끼고 흠칫 고개를 들었다. 에밀이 의아한 눈으로 그의 갑작스런 몸짓을 바라보았다.

"...? 왜요?"

"...에밀, 혹시... 키 컸어?"

"에?"

에밀이 완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엘리어트를 바라보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성장통을 한 번 겪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데... 컸나요?"

"바, 바보! 네 몸이라구! 내가 모를 리가 없어!"

"...네?"

왜 제 몸인데 당신이 알고 계시냐고 물으려다, 에밀은 입을 다물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에밀 자신이 엘리어트의 몸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에밀은 곧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그런가 봐요."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엘리어트의 표정은 복잡했다. 분명히 전에는 에밀이 더 작았다. 물론 지금도 에밀이 작긴 하지만, 예전에는 고개를 내린다는 감각이었는데 지금은 마주본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엘리어트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야."

"네?"

"아니야."

엘리어트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자, 에밀은 눈을 깜박이다 곧 엘리어트의 옷을 벗기는 데 집중했다.

어깨를 덮은 망토와 겉옷을 모두 걷어낸 후, 이번에는 복잡하게 얽힌 매듭과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한겹 한겹 옷이 벗겨질 때마다 엘리어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드디어 셔츠 한 장만 걸치게 되자 엘리어트는 느릿하게 걸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씻으셔야죠. 비슈나를 부를까요?"

"아니, 이리 와."

에밀이 바닥에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를 걱정스레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하곤 엘리어트에게 다가갔다. 엘리어트가 손을 내밀었다. 어리광 부리는 아이를 보는 느낌에 에밀이 피식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는 순간, 갑자기 강한 힘이 에밀의 손을 확 당겼다.

"앗..."

"피곤해..."

중심을 잃은 에밀이 엘리어트 위로 쓰러지자 엘리어트가 장난스럽게 에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에 코를 문질렀다.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촉에 에밀은 엘리어트 몰래 침을 삼켰다.

"좋은 냄새..."

아, 이거 위험하다.

엘리어트가 에밀의 가슴에 코를 박고 킁킁대기 시작하자 에밀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과연 엘리어트를 마주 안아야 할지 아니면 밀어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야 끌어안고 싶긴 한데, 그러면 이미 흥분하기 시작한 몸을 보이게 되는 게 부끄러웠다.

"저기, 폐하...?"

"리트라고 불러."

"...리트, 이건 너무 가까운 것 같아요..."

"흐음..."

에밀이 조심스럽게 엘리어트의 어깨에 손을 대었을 때, 엘리어트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 아까까지 매우 피곤한 얼굴이었는데도 엘리어트의 보라색 눈동자는 묘한 즐거움을 담고 에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위험해.

"뭐가 문제야?"

당신이 너무 아름다운 게 문제죠. 에밀이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며 애써 미소 지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저 매혹적인 자색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에밀은 뭔지 모르게 심장 아래가 간질거리며 참을 수 없이 뭔가를 분출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씻-"

"내가 이러는 게 싫어, 에밀?"

"아뇨."

즉답이었지만 엘리어트는 뭔가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비죽이 튀어나온 아랫입술은 이미 성인식을 치른 데다 이제 한 나라의 국왕이 된 남자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귀여웠다. 에밀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위험해. 지금 당장 여길 나가. 당장!

그러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커져버린 욕망이 에밀의 심장을 강하게 두드리는 순간, 엘리어트가 투덜대며 에밀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알았어. 씻을 테니까-"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에밀의 가슴은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한 얼굴이 된 엘리어트가 고개를 들고 에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밀이 무언가를 엄청나게 갈등하는 표정으로 엘리어트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왜, 왜 그래?"

"리트..."

"응?"

"...책임져요."

"응? 으음-"

갑자기 입술로 포개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엘리어트가 놀란 순간 단단한 팔이 그의 허리와 어깨를 감싸 안아왔다. 뒤통수를 단단하게 잡은 손이 엘리어트를 에밀 쪽으로 밀었다.

"흐읍-"

자기도 모르게 벌려진 입 안으로 부드러운 살덩이가 흘러들었다. 마치 처음 하는 키스처럼 남김없이 엘리어트의 입안을 훑는 혀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뜨거워.'

맞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마주치는 혀가 열기에 전염되며 에밀의 더운 숨이 엘리어트의 콧등으로 흩어졌다. 참을 수 없다는 듯 엘리어트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가며 에밀이 하체를 엘리어트의 다리에 꾹 밀어붙였다.

"으응...!"

단단하고 뜨거워진 중심을 느끼고 엘리어트가 흠칫 놀라는 사이, 에밀이 셔츠 위로 엘리어트의 등을 쓸어내렸다. 묘한 감촉에 엘리어트가 부르르 몸을 떨자 츱, 하며 에밀이 엘리어트의 혀를 얽어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엘리어트의 몸에 다시 긴장이 깃들기 시작했다.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가 에밀에게서 멀어지려 움찔거렸다. 그러나 에밀이 팔에 힘을 주자 엘리어트의 몸이 간단하게 다시 에밀에게 붙어왔다. 바지 위로 어렴풋이 엘리어트의 중심이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아아, 어떡하지.

"...리트."

"하아... 응..."

"날 사랑해요?"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엘리어트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미간을 가로지르는 주름을 살짝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에밀이 다시 속삭였다.

"날, 사랑해요?"

"응... 응, 당연하잖아..."

엘리어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에밀이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목소리는 충분히 전해졌다. 에밀이 피식 웃었다. 붉어진 얼굴과, 입술과, 그 안으로 살짝 보이는 혀가 귀여웠다.

"나도, 사랑해요. 리트."

또 한 번 확 붉어지는 얼굴이 귀엽다. 에밀이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어트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곤 셔츠의 깃을 잡아 벌렸다.

"으앗!"

채 풀리지도 않은 단추가 맥없이 뜯어지며 하얀 가슴이 에밀의 눈앞으로 펼쳐졌다. 납작하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와 갑작스레 공기에 닿아 살짝 솟아오른 유실을 바라보며 에밀이 입맛을 다셨다.

"에, 에밀! 앗...!"

엘리어트의 비명이 가냘프게 들렸다.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분홍빛 유실을 살살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굴리자 엘리어트가 황급히 제지해왔다.

"잠깐, 에... 으음..."

엘리어트의 제지는 안타깝게도 에밀의 입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뜨겁게 비벼져오는 혀에 정신이 팔린 사이, 에밀의 손은 아주 쉽게 엘리어트의 두 손목을 한꺼번에 잡아 결박했다. 팔을 위로 올리자 셔츠가 벌어져 하얀 가슴이 더 잘 보였다. 에밀이 살짝 입술을 떼며 달뜬 한숨을 섞어 속삭였다.

"리트, 사랑해요."

"그, 그, 그런 얘기, 지금... 아읏..."

사랑스럽다는 듯 에밀의 손가락이 엘리어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로 단단해져 가는 유두의 감촉이 귀여웠다. 에밀이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을 세워 단단해진 붉은 열매를 살짝 꼬집어 올리자, 엘리어트의 허리가 움찔 요동을 쳤다.

"아, 으응-"

"예뻐요, 리트..."

신음을 참으려 이를 악문 연인의 뺨에 살짝 키스하며 에밀이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부드럽게 비벼 올리다 어느 순간 강하게 잡아챈다. 손바닥으로 굴리는가 하면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 올리며 음란한 색으로 물들어 가는 붉은 유두를 마음껏 농락했다.

엘리어트의 붉어진 얼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에밀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에밀의 얼굴은 지금까지 엘리어트가 알아온 그 어떤 얼굴과도 달랐다. 엘리어트만큼이나 붉어지긴 했지만, 느긋한 입가와는 반대로 초록빛 눈동자는 깊숙한 곳에 품어온 강렬한 욕망이 숨김없이 파헤쳐져 빛나고 있었다.

"에밀, 자, 잠, 잠시만..."

"쉿... 비슈나가 들을지도 몰라요."

"우읏...!"

에밀이 부드럽게 속삭이며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손가락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접촉이 엘리어트의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하읏...!"

억지로 참아냈지만 차마 다 걷어내지 못한 흥분이 잇새로 흘렀다. 뜨겁고, 부드럽고, 충분히 젖은 혀가 살살 유두를 핥았다. 손가락과는 다른 유연하기 그지없는 감촉은 엘리어트의 허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에, 에밀..."

"귀여워, 리트."

"아, 아앗- 앙, 그... 그만, 읏..."

완전히 삼켜진 붉은 유두를 빨아 당겨 혀끝으로 문지르자 엘리어트가 자지러지며 목을 뒤로 젖혔다.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움츠리며 도망치려 하지만 에밀은 그의 그런 부끄러운 반응이 기분 좋았다.

좀 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결국엔 더 큰 쾌락에 매달리고 마는 음란한 모습을 상상하자 에밀은 잠시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아플 만큼 부풀어 오른 앞섶이 딱 맞는 바지에 가둬져 괴로웠다.

"리트, 예뻐요."

"아응...!"

에밀의 손이 매끈한 배를 지나 리트의 다리 사이로 흘러들었다. 망설임 없이 속옷을 헤치고 엘리어트의 분신을 쥐자, 엘리어트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지르며 눈을 홉떴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엘리어트가 너무 귀여워서 에밀은 또다시 그를 괴롭히고 싶어졌다.

"여기, 좋아하는 곳이죠?"

"그...렇지, 않... 앗.... 흐응..."

부드럽게 감싸 쥔 기둥을 위아래로 훑으며 엄지를 세워 선단 아래를 문지르자 엘리어트가 신음을 참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귀여우니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여기가 아니면, 이렇게...?"

"앗..."

기둥을 강하게 잡고 위로 쳐올리자 엘리어트가 흠칫 놀라며 허리를 들썩였다. 에밀의 엄지가 농염하게 선단과 귀두를 쓰다듬으며 다시 부드럽게 손을 흔들자 엘리어트가 살짝 실눈을 뜨고 에밀을 올려다보았다. 흘깃 에밀을 향하는 자색 눈동자에는 명백하게 기분 좋다고 쓰여 있는데도 엘리어트는 인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윽... 안돼... 아, 으응... 그만..."

에밀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방금까지 엘리어트의 분신을 휘어잡고 흔들어 대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상큼한 미소에 엘리어트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네."

"!?"

갑자기 에밀이 손을 떼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닿아오던 접촉이 없어지자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밀려오는 허무감에 엘리어트는 스스로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밀이 빙긋 웃으며 손을 놓고 엘리어트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 에밀?"

"그만 두라고 하셨잖아요."

엘리어트는 황망히 방긋 웃는 에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엉망으로 풀어헤쳐진 엘리어트의 셔츠와는 달리 에밀은 스탠딩 칼라의 단추조차 풀지 않은 깨끗한 정복 차림이었다. 입가가 조금 젖어 있는 것을 빼면 절대 아까까지 그런 짓을 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저기, 나는..."

"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이 끝낼 수도 있었다. 에밀을 밀어내고 그대로 욕실로 가서 씻으면 될 일이다. 그만 두라고 한 것은 엘리어트였으니까.

그러나 이미 달아올라 버린 몸은 좀 더 강한 자극을 원했다. 아직 가라앉지 못한 흥분이 욱신대며 엘리어트의 아랫배를 울려 왔다.

"혹시, 아쉬우신 건가요?"

“...윽.”

엘리어트가 정곡을 찔린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에밀이 짐짓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제 리트는 왕세자가 아니라 국왕이시잖아요? 당신의 명령이라고 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따를 수밖에요."

"우웃..."

엘리어트의 자색 눈동자가 곤혹으로 물들어갔다.

에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그만두라고 한 건 엘리어트고, 그가 국왕인 이상 에밀은 절대 그를 거역해선 안 되었다.

엘리어트가 갈등이 섞인 눈으로 에밀을 올려다보자, 에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어트의 뺨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리트가 원한다면 기꺼이 무엇이든 할게요."

"웃..."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폐하?"

이런 때 일부러 말을 높이는 에밀의 목소리가 얄밉도록 달콤했다. 분명히 에밀도 알고 있었다. 엘리어트가 에밀을 거부하는 일 따위 있을 리 없다. 억울하긴 하지만 엘리어트는 결국 에밀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줘..."

"잘 들리지 않습니다만."

에밀이 그렇게 말하며 굳이 몸을 숙여 엘리어트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엘리어트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조, 좀 더... 기분 좋게 해 줘."

"이런. 폐하, 명령을 하실 때에는 눈을 마주쳐 주십시오."

"이익..."

뜨거운 숨결과는 달리 에밀의 목소리는 더욱 차분해져 있었다. 결국, 엘리어트가 졌다. 살짝 눈물이 어려 촉촉해진 자색 눈동자에 에밀이 비쳤다.

"그런 거, 상관없잖아! 계, 계속해! 명령이다!"

아아, 이 눈이다.

에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고한 긍지가 서려 있던 보라색 눈동자는 분함과 억울함과 앞으로의 쾌락에 대한 기대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렇게 만들 수 있다는 고양감에 에밀은 다시 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폐하. 이렇게 불편한 차림으로,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에밀이 난처한 듯 목 끝까지 잠긴 단추를 가리켰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엘리어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에밀의 벗은 몸은 엘리어트에게도 꽤 큰 유혹이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에밀의 단추를 풀어내고 재킷과 셔츠를 벗겨내었다.

"...음..."

엘리어트의 손가락이 에밀의 맨살을 스치자 에밀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낮게 목을 울렸다. 에밀이 흥분했다는 느낌이 들자, 엘리어트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에밀의 옷을 벗겨내는 손이 빨라졌다.

완전히 드러난 에밀의 상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남자다웠다. 각진 어깨와 촘촘하게 달라붙은 근육들은 완연히 남자의 것이었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살결은 부드러웠지만 단단했고 묘한 음영을 자아내고 있었다.

엘리어트는 멍하니 손을 내밀어 쇄골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약간 차가운 손가락이 가슴께에서 멈추려는 순간, 에밀이 엘리어트의 손목을 잡고 더 아래로 이끌었다.

"! 에, 에밀!"

"이쪽도, 부탁드립니다. 폐하."

에밀이 부드럽게 엘리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살짝 얼굴이 붉어진 엘리어트의 손이 머뭇거리며 에밀의 허리띠를 끌렀다.

얼핏 스친 손끝으로도 에밀의 앞섶이 단단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엘리어트가 눈을 꾹 감고 바지 끝으로 손가락을 걸어 내렸다.

"웃..."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손가락 끝에 속옷도 같이 걸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자극에 에밀이 살짝 허리를 떨었다. 완전히 나체가 된 에밀이 허리를 낮추자 단단해진 분신이 엘리어트의 배에 문질러져 왔다. 엘리어트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저, 흥분해버렸어요. 미안해요..."

평소의 에밀이었다. 엘리어트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에밀의 목을 끌어안고 살았다는 듯 입을 맞추었다. 혼자가 아니라 둘 다 나체라는 것이 생각보다 꽤 안심이 되었던 모양이다. 조금 여유를 되찾은 엘리어트의 키스에 응하며 에밀이 엘리어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맞아 들어간 두 나체가 가슴을 마주 붙이고 체온을 데웠다.

아랫배에 맞닿은 에밀의 선단이 살짝 젖은 것 같다고 느낄 때쯤, 에밀이 입술을 떼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리트, 나... 나도, 기분 좋게 해 줄래요?"

엘리어트가 묘한 표정으로 에밀의 괴로운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망설여졌다.

"빨리..."

에밀이 살짝 찡그린 눈썹으로 투정부리듯 속삭이자, 엘리어트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었다.

엘리어트가 약간 두려운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에밀이 엘리어트의 위에서 내려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엘리어트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머뭇머뭇 에밀의 무릎 사이에 앉았다. 허리를 낮추자 단단하게 솟아 배를 찌르는 페니스가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왠지 보고 있는 쪽이 더 민망해져 자기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자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턱과 뒤통수를 당겼다.

눈을 질끈 감은 엘리어트의 입술이, 에밀의 고간에 닿았다.

"음...! 핫, 리트...!"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불끈대며 금방 발기해 올라오는 에밀의 기둥 끝을 핥으며 엘리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어 고간을 쓸자, 에밀의 손가락이 엘리어트의 머리카락을 꽉 쥐어왔다.

이전에 에밀이 자신에게 했던 것을 생각하며 엘리어트가 혀를 움직였다. 에밀이 살짝 허리를 움찔하는 것이 느껴지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리트... 아, 거기..."

솔직한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다. 엘리어트가 기둥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흔들며 에밀의 귀두 끌을 입 안으로 완전히 물었다.

"하... 아, 좋아... 리트의 입, 기분 좋아요..."

에밀의 손이 애타게 엘리어트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왔다. 뒤통수를 쓰다듬는 에밀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엘리어트가 묘한 뿌듯함에 에밀의 페니스를 좀 더 깊게 밀어 넣었다.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뒤통수를 단단히 잡아왔다. 살짝 의문을 느끼는 순간, 강한 힘이 엘리어트의 머리를 밀었다.

"우웁-"

순식간에 목젖까지 깊숙하게 처박힌 페니스가 당황스러웠다. 코끝에 에밀의 음모가 닿자 엘리어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아, 더 깊이... 읏, 기분, 좋아..."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엘리어트가 고개를 들려는 순간 에밀이 엘리어트의 뒤통수를 잡고 다시 고간으로 밀어붙였다.

"으음, 우, 우움!"

"하, 좋아... 리트...!"

눈앞이 핑핑 돌았다.

뜨거워진 살덩이가 마치 섹스하는 것처럼 엘리어트의 입 안을 범했다. 에밀이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엘리어트의 머리가 움직이며 귀두가 목구멍 깊숙한 곳을 문질렀다. 한껏 벌린 입가로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흐르자, 에밀의 손이 오히려 빨라졌다.

"후, 귀여워, 리트... 아... 젖어 버렸네..."

"흐읍... 움, 으음...!"

이번에는 에밀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어트의 머리카락 사이로 뒤통수를 단단히 잡은 손이 허리의 흔들림에 맞추어 페니스를 그의 입안으로 더 깊게 쑤셔 넣었다.

"흐... 아, 윽...! 큭, 좋아...!"

에밀의 입에서 만족스런 신음이 새었다. 타액으로 점점 미끄러워지는 엘리어트의 입술과 따뜻하게 선단에 닿아 오는 목 안쪽의 말랑한 감촉에 등에 소름이 돋았다. 자기도 모르게 엘리어트의 머리를 깊게 다리 사이로 누르자 엘리어트가 숨이 막히는 듯 쿨럭였지만 그 잔 진동조차 에밀에게는 자극적이었다.

"흐읍... 욱..."

쾌감에 젖어 몽롱해진 초록색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꼬리에 살짝 눈물을 단 채 여전히 어리둥절한 보랏빛 눈동자가 에밀을 애처롭게 바라보자, 에밀은 그만둘지 말지 미약하게 피어나던 갈등을 단번에 잘라버리고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으욱...!"

"읏, 하아...! 리트...!"

에밀이 허리를 들썩이며 엘리어트의 입안에 깊게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엘리어트가 괴로운 듯 신음을 내지르는 순간 에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우으...?"

엘리어트가 살짝 눈물이 맺힌 눈꼬리로 에밀을 올려다보았다. 에밀이 뭔가 매우 괴로운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엘리어트의 입안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타액으로 흠뻑 젖은 선단이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리트, 미안해요."

"너, 너...!"

그러나 에밀을 마주본 엘리어트는 왠지 모를 불길함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에밀의 얼굴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미안함이 아닌, 앞으로 있어질 일에 대한 미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굳어버린 얼굴로 엘리어트를 일으킨 에밀이 한마디 말도 없이 엘리어트를 아주 쉽게 침대에 들어 눕혔다.

"자, 잠, 잠깐, 에밀!"

"하아, 미안, 리트... 나, 더 이상은..."

"기, 기다려!"

그때 처음으로, 엘리어트는 힘으로 에밀을 이기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밀이 몸 전체로 엘리어트의 어깨를 꾹 밀어 누르며 동시에 치부가 잘 드러나도록 무릎을 벌린다. 그 일련의 과정에 군더더기란 없었다. 엘리어트를 내려다보는 에밀의 얼굴은 진지했다. 본능만 남은 초록색 눈동자는 타협 따위 없다는 듯 강렬하게 엘리어트를 응시했다.

그 눈에는 엘리어트를 당장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소유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강렬함에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든 엘리어트가 당황하며 에밀의 손을 제지했다.

"야, 약속했잖아!"

"응?"

"가지는 쪽은 나라고 했잖아!"

엘리어트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에밀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열기와 흥분으로 어지러운 머릿속이지만 에밀은 용케 엘리어트와 했던 약속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맞아요. 약속했었죠."

"응. 약속했잖아."

"네."

엘리어트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에밀이 정신을 차린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엉덩이를 힘껏 쥐어왔다.

"히익!?"

"약속은 약속이니까."

에밀이 느릿하게 속삭이며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점점 엄습하는 불안에 엘리어트가 울상이 되어 갔다.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리트가, 가져요."

"히익!"

예고 없이 비부를 문질러 오는 손가락에 엘리어트가 몸을 움츠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엘리어트가 멈칫하는 사이, 에밀이 걱정스레 혼잣말을 흘렸다.

"괜찮을까...?"

안 괜찮을 것 같으면 하지 마! 마음의 소리가 장렬하게 울려 퍼졌지만, 에밀의 젖은 손가락이 꼭 다물린 입구를 헤집고 들어오려 하자 엘리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버둥대며 에밀의 손을 저지하려 했지만 에밀이 빙긋 웃으며 손에 힘을 주자 쿨쩍, 하는 소리가 났다. 긴장해서 꼭 닫힌 봉오리를 억지로 연 손가락은 무자비하게 엘리어트의 안을 헤집었다.

"아으으..."

"여기, 대단해... 따뜻하고, 굉장히 조여... 손가락을 먹어버릴 것 같아."

감상을 얘기할 동안에 빼라고 얘기하려는 순간 에밀이 손가락을 뒤집었다. 뱃속을 휘젓는 감각에 놀란 엘리어트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질렀다.

"하읏!"

"귀여워..."

"윽, 그... 만, 아, 안 돼, 에밀... 아... 으응!"

엘리어트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순간, 에밀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엘리어트의 황홀한 지옥이 시작되었다.

"핫, 아앗! 아, 아, 하윽, 자, 잠... 아아앙! 에밀, 하으... 읏!"

"여기, 좋아요?"

"그런, 응...! 읏, 아... 앗, 하앗!"

에밀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전립선을 찍어 누를 때마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흐물흐물해진 무릎이 자기도 모르게 벌어지며 사정없는 신음이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입을 막았지만 움찔 떨리는 허리와 한껏 발기한 채 끄덕이는 선단에서 솟는 맑은 액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강력한 쾌감에 신음을 참는 것도 힘겨웠다. 에밀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엘리어트는 그만 눈물이라도 흘릴 듯이 흥분해버렸다.

"흐, 으윽... 으응, 아... 아읏, 하...아!"

"처음인데 이렇게 느끼는 거예요?"

"아, 아, 아냐아...!"

"사실은 기분 좋으면서, 솔직하지 못하네요."

"흑, 그... 그만... 아앙, 앗, 아핫..."

에밀이 살짝 입술을 핥으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반쯤 날아간 정신을 겨우 추스르며 극구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 엘리어트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이제 정말 한계였다. 충분히 적셔져서 질척이는 소리를 내는 비부를 만족스레 한 번 더 찌른 뒤, 에밀이 손가락을 뺐다. 엘리어트가 숨을 몰아쉬며 애원하듯 에밀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에밀..."

"예뻐요, 리트..."

에밀이 엘리어트의 젖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엘리어트의 눈가는 살짝 눈물마저 어려 있다.

"리트가 가지기로 약속했었죠?"

"응, 응..."

"자, 마음껏 가져요."

"응? 으, 으, 으아아앗!"

손가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피감이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엘리어트가 깜짝 놀라 도망치려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에밀은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어깨를 꽉 잡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처음에는 살짝 밀려나는가 싶더니, 곧 봉오리가 벌어지며 성난 물건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젖은 육벽이 에밀의 분신에 맞추어 자리를 늘려간다.

"아앗! 흐, 으으응, 하윽... 아, 아파아...!"

"후-으, 리트의 안... 엄청... 뜨거워."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턱을 쥐어 잡고 입을 맞추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입안으로 침범하는 혀를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 없다. 속수무책으로 입안이 범해지며 엘리어트는 아래의 화끈해지는 고통을 조금 잊은 것처럼 보였다.

"하아... 이제... 움직일게요. 읏..."

"아, 안, 안돼...에, 아으으응..."

엘리어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에밀의 손은 그의 골반을 단단히 잡은 채였다. 뜨겁게 맞닿은 교합부가 드디어 마찰을 시작하자, 에밀이 깊게 탄성을 내쉬었다.

"윽... 하, 진짜... 미치겠어..."

아까까지 풀어두었는데도 안은 에밀을 꽉 죄어왔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아서 에밀은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흑, 으... 으응...!"

시트가 구겨지도록 꽉 쥔 엘리어트의 주먹이 잘게 흔들렸다. 잔뜩 찌푸린 얼굴은 안쓰럽기까지 했지만 에밀은 물러설 수 없었다.

찌걱, 하는 젖은 소리와 함께 에밀의 페니스가 움직였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핥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잔뜩 긴장했던 엘리어트가 살짝 허리에 힘을 풀었을 만큼 에밀은 조심스러웠다. 천천히 허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에밀이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허리를 밀었다.

"으응..."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신음이 안타깝게 흘렀다. 에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엘리어트의 허리를 붙잡고 뿌리 끝까지 빈틈없이 밀어 넣었다. 빨아들일 듯 뜨겁게 자신을 감싸 오는 내벽이 기절할 만큼 기분 좋아서, 에밀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리트, 이거... 좋아...!"

"으, 으응... 흣..."

잘게 허리를 흔들며 엘리어트의 깊은 곳을 문질렀다. 고통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깨문 엘리어트의 잇새에서 작은 신음이 새자, 에밀이 조금 만족스럽게 아까 알아두었던 전립선 근처로 허리를 찍어 올렸다.

"하윽...!"

엘리어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여기, 기분 좋았죠?"

"윽... 흐윽, 안돼... 에..."

에밀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허리를 리드미컬하게 비벼 올리자, 엘리어트가 흐느끼며 허리를 움츠렸다. 그 도망가는 허리를 꽉 끌어안아 하체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엘리어트의 허리가 튀어 오르며 야한 신음이 새었다.

"흐응...!"

"사랑해, 리트."

이성은 거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하악, 앙! 아, 아아앗, 흐윽, 응... 아...! 에밀, 아, 하읏!"

"윽, 리트... 아, 진짜 좋아... 리트...!"

살갗이 맞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에밀의 배가 엘리어트의 허벅지에 붙을 때마다 퍽 하며 찰진 소리가 울렸다. 뜨거운 기둥이 엘리어트의 깊은 동굴을 파고들면 기다렸다는 듯 내벽이 달려들어 조여 왔다.

이미 엘리어트의 팔은 에밀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다. 전립선을 깊게 찌르며 강하게 쳐올리는 압력에 생전 겪어보지 못한 쾌락이 척추를 타고 뇌를 울렸다.

"흑, 윽, 아... 거긴... 이, 이상해, 흐으, 이상해질, 것, 흐아앙!"

"기분, 좋아요?"

"모, 몰라, 앗, 아... 응, 하앗...!"

"리트의 허리, 저절로 움직이는걸. 그렇게, 후, 좋아요?"

"하앗...! 으응, 앗...!"

에밀이 짓궂게 허리를 문지르자 엘리어트가 자지러지며 에밀의 허리를 다리로 감아 당겼다. 상상도 못한 야한 자세에 에밀이 만족스러운 듯 다시 엘리어트의 안으로 강하게 허리를 부딪혔다. 퍽, 하고 깊숙이 내벽을 파고드는 페니스에 엘리어트가 또 한 번 쾌감이 서린 한숨을 내쉬었다.

"응... 응, 조... 아, 으... 기분... 좋아...!"

"후후..."

드디어 솔직하게 된 엘리어트의 목소리에 에밀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일부러 엘리어트가 기분 좋을 곳을 깊게 찔러 올리며 문지르자 엘리어트의 입술에서 쾌락에 젖은 음악이 흘렀다.

"흐, 아아... 아, 아, 좋...아, 아, 에밀... 흐앙!"

"벌써 이렇게... 느끼다니, 야한 몸이네요."

"아니... 야, 앗, 아아..."

"벌을 줘야겠어."

에밀이 문득 엘리어트의 골반을 잡고 허리를 뺐다. 순식간에 공기 중에 드러난 페니스는 체액으로 젖어 반들거렸다. 갑작스럽게 빠져나간 페니스에 놀란 엘리어트가 눈을 깜박이자 에밀이 빙긋 웃더니 엘리어트를 끌어안고 간단하게 반 바퀴 굴렀다.

순식간에 에밀의 위로 올라오게 된 엘리어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에밀을 내려다보자, 에밀이 부드럽게 엘리어트에게 속삭였다.

"스스로 기분 좋게 해 봐요."

"!"

엘리어트의 눈이 커졌다.

"벌이라고 했잖아요?"

"으..."

엘리어트가 울상을 했다. 아직 사정하지 못한 간질간질한 뱃속이 원망스러웠다. 자기도 모르게 허전해지는 아래를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큰 시험으로 다가왔다. 에밀은 느긋하게 엘리어트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엘리어트가 졌다.

"아... 으응..."

"하아... 정말... 얼마나 밝히는 거예요?"

"그렇... 지... 으응... 않... 앗...!"

천천히, 에밀의 페니스가 엘리어트의 안으로 사라졌다. 조금씩 비부가 오물거리며 안쪽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느낌에 엘리어트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아... 흑....!"

"귀여워, 리트..."

드디어 에밀의 것을 담아낸 엘리어트가 묘한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씩 허리를 움직였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해 왔던 사람이 자기 위에서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에밀이 살짝 침을 삼키며 엘리어트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흐읏, 아... 좋...아, 아, 좋아, 으응...."

"응... 나도, 좋아. 더, 움직여줘요."

"으응..."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찡 하고 종이 울렸다. 묘한 간질거림이 감질나게 허리를 적시자, 엘리어트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앞으로 비벼 올렸다.

기분 좋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내벽을 뿌듯하게 채워오는 에밀의 남성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짜릿하게 척추를 울렸다.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되면서 엘리어트가 조급하게 허리를 흔든다. 찌걱, 찌걱 하며 젖은 소리가 귓가에 요란했지만 지금은 그저 에밀의 페니스가 주는 쾌락이 먼저였다.

"헉, 아, 기분 좋아... 아읏..."

"리트의 안... 굉장해... 하아, 달라붙어..."

"윽... 거긴..."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유두가 걸릴 때마다 엘리어트가 묘한 교성을 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으응... 거기, 만지면... 하응...!"

에밀의 손가락이 유두를 살짝 꼬집었다. 예민한 살갗으로 전달된 자극에 허리가 뻣뻣해졌다. 엘리어트가 조르듯 허리를 잘게 떨자, 에밀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정말... 음란하시네요."

"응, 읏... 아... 아니야... 흐읏..."

"아니라뇨. 이렇게, 맛있게... 윽, 먹고 있으면서."

"흐아아앗!"

에밀의 손이 엘리어트의 고간을 훑었다. 이미 쿠퍼액으로 잔뜩 젖은 선단이 에밀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자, 엘리어트가 힘없이 에밀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렸다. 기회라는 듯, 에밀이 엘리어트의 엉덩이를 꽉 쥐어 왔다.

"흐응, 응...?"

"더 보고 싶지만... 나도, 이제 한계라."

"으...읏! 깊...어, 아응!"

에밀의 손이 강하게 엘리어트의 엉덩이를 쥐고 허리로 끌어당긴다. 허리의 반동으로 엘리어트의 안으로 자신의 것을 각인시켰다. 마찰이 계속될수록 엘리어트의 신음과 함께 철퍽이는 젖은 소리가 점점 커졌다.

"흐앗, 아- 으흑, 에밀, 아, 에밀!"

"후, 리트, 윽... 좋아...!"

"앗, 아, 좋아, 응, 거기, 거... 거기, 좋아, 흐아앗!"

엘리어트의 허리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귀두 끝이 전립선을 누르며 저릿저릿한 쾌감에 온몸이 절여져 간다. 에밀의 손은 여전히 엉덩이를 쥐고 있었지만 엘리어트는 이미 자의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철퍽이며 허리가 내려앉을 때마다 끈적한 교성이 혀끝에 피어났다.

"으... 나, 나, 이상해, 이상해져... 앗, 가... 하아, 나, 가, 아앗...!"

"크, 윽...! 아, 리트...!"

에밀이 세게 엘리어트의 안으로 파고든 순간, 엘리어트의 내벽이 한순간 강하게 페니스를 조여 왔다.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감도에 눈앞에 하얗게 불꽃이 튀었다. 아랫배에 강하게 힘이 들어가며 치켜세운 허리가 뻣뻣해진다. 지나친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에밀이 사정하는 순간, 엘리어트도 함께 오르가즘에 올랐다.

"흐...앗...!"

숨을 들이쉰 잇새에서 잠시 소리가 멎었다. 에밀의 것을 깊이 품은 골반이 잘게 바르르, 떨리더니 엘리어트의 경직된 허리에서 천천히 힘이 풀려갔다.

"하아... 리트..."

아직까지 넋이 나간 엘리어트의 머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흐느적거리는 혀를 감아 달콤하게 쓰다듬듯 빨아들이며, 둘은 정사 후의 나른한 여운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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