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눈은 칼보다 빠르다
엘리어트가 시엘을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시엘은 복도에 주저앉을 뻔한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천천히 방으로 돌아갔다. 엘리어트의 방과 그다지 멀지 않은데도 발걸음은 천근이었다.
겨우겨우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널브러진 시엘은 이번에야말로 소리를 높여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후작가의 외동딸로서 금이야 옥이야 키워진 그녀에게 이런 일들은 굴욕을 넘어 치욕이 따로 없었다.
시엘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늘 왕비가 될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아무것도 보지 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름답고 우아한 디날 최고의 여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시엘이 살아가는 의지며 긍지였다.
엘리어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상관없었다. 모든 결혼에 사랑이 수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녀도, 그녀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직 '왕비'가 되기 위해 성장했고 왕비가 되기만 한다면 상대가 아름다운 청년이든 할아버지뻘의 노인이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디날 왕가의 일원이 되어 버셋 가의 피가 섞인 디날 왕가의 후계를 생산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가장 완벽한 성공이 될 것이었다. 디날 왕가의 안주인이 될 그녀가 모두의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그녀는 에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엘리어트가 아니라고 해도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고 에밀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왕의 반려라는 자리가 탐이 나긴 하겠지만 후사조차 잇지 못할 넘볼 수 없는 자리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 더 확실하게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남의 것이 되어 버린 엘리어트에게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지, 시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엘리어트마저 에밀을 욕심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에밀을 밀어내던 그 모습이 기억도 안 날 만큼 빠른 변화에, 시엘은 당황과 울분을 동시에 느꼈다. 아직 에밀을 잊지 못하는 것은 좋다. 어차피 그는 시엘의 남편이니까. 그러나 그가 에밀을 감싸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가 에밀을 잊지 못했다고 해도 시엘이 자리만 지킨다면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아직 그녀는 어리니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상관없지만, 에밀에게 짓밟힌 프라이드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문득 시엘이 어두운 독기를 품은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붉어진 눈가를 손수건으로 살짝 누르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날씨 탓으로 어둑한 방 안에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거울 속의 아름다운 자신을 보던 시엘이 조금 진정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 앞에 섰다.
눈물로 화장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 왕자비였다. 부드러운 드레스의 신비로운 하늘색이 그녀의 금발과 어우러져 매혹적이었다. 시엘이 입술을 꾹 다물곤 거만한 눈빛을 했다.
"난 왕자비야. 네까짓 게 날 어쩌진 못해."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시엘은 왕세자비였고 에밀은 아직 어린 귀족일 뿐 공작도 무엇도 아니다. 조금 기분이 나아진 그녀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으니 다음 일을 도모해야- 잠깐만, 저게 뭐지?
조심스럽게 거울 앞으로 두어 걸음 더 다가선 시엘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그녀가 떨리는 손끝으로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부분을 문질렀다.
"...아얏."
붉게 성이 난 뾰루지가 손끝의 힘에 반응하며 짜르르한 고통을 자아냈다. 시엘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아니면 월경이 가까워졌나? 그것도 아니면...
문득 시엘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배와 허리를 매만졌다. 여전히 나긋한 몸매였지만 전보다 확실히 말랑해진 게 느껴졌다. 허겁지겁 팔을 주물러 보고, 목깃을 내려 쇄골도 만져 본다. 확연하지는 않지만 분명 굴곡이 좀 더 흐릿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에밀에 대한 스트레스로 단것을 좀 먹긴 했다. 아니, 사실은... 좀 많이 먹었다. 식후에 달콤한 초콜릿 에클레어라던가, 체리 크림 케이크라던가, 배 타르트나 블루베리 머핀이나 크림치즈를 듬뿍 얹은 브라우니라던가!
시엘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던 시엘의 잇새로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가 억눌린 채 새어나왔다.
"에...밀!"
시엘의 눈이 흐린 방 안에서 광기를 발했다.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다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시엘이 급히 침대 옆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달그락, 하며 평생 쓸 일이 없을 것 같던 물건이 그 안에서 한 바퀴 굴렀다.
시엘의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바들거리는 손끝이 서랍 안을 더듬으며 손바닥에 매끄럽게 감겨드는 그립을 쥐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물건처럼 소중하게 들어 올려 그것을 품에 안은 시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용서 못해...!"
드레스 자락이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 꽉 쥔 주먹에는 이제 핏줄이 비쳐 보이지 않는다. 창 바깥에서 봄비 치곤 강한 빗줄기가 창문을 세게 때렸다.
* * *
"...하아."
에밀이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도저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긴장과 흥분이 반쯤 섞인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에밀의 초록색 눈 위로 드러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허락하고 말았다. 엘리어트의 제안을.
엘리어트는 그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에밀도 여전히 그전처럼 할아버지에게 군사학 과외를 받으러 주에 두 번은 성으로 왔다. 과외가 끝나면 잠시 휴식 후, 아카데미로 돌아가 오후 수업을 받는 것도 똑같았다.
변한 것은, 에밀의 마음뿐.
군사학 과외를 받는 날마다 엘리어트와 살롱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는 것은 이미 암묵적인 스케줄이 되어 있었다. 딱히 무엇도 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엘리어트와의 독대 이후 에밀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어졌다.
반쯤 열린 발코니의 너머로 완전히 구름이 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에밀은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러나 좀체 가라앉지 않는 심장의 고동에 에밀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한쪽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포개고 무거운 머리를 내려놓았다.
엘리어트의 곁에 있고 싶다.
자신의 욕심인 것을 아는데도, 에밀은 자꾸만 자라나는 감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될 걸 뻔히 알아서 5년 동안이나 엘리어트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딱 한번- 엘리어트의 성인식만큼은, 먼발치에서 단 한 번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욕심에 결국 연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시엘이 춤을 청해 왔을 때, 에밀은 드디어 그녀가 원하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았다. 그 뒤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엘의 생각대로.
에밀이 다시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가의 장남이라고는 해도 아직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에밀이 이미 정식 왕자비가 된 시엘을 정당한 명분도 없이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엘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유리한 입장인지를 알고 있었고, 에밀의 도발이 아니라면 그녀는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녀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에밀은 발버둥 치고 싶었다. 어차피 엘리어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좀 더 제대로 된-
"거기, 누구시죠?"
"...?"
에밀이 문득 정신이 들었다. 문가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처음 보는 꼬마가 그곳에 서 있었다.
"누구세요?"
에밀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일단 카우치에서 일어나 살짝 허리를 숙였다. 꼬마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살롱으로 들어섰다.
에밀은 찬찬히 꼬마를 쳐다보았다. 열두어 살쯤 되었을까, 에단보다 조금 작은 키의 여자 아이였다. 실내인데도 커다란 보닛을 쓴 하얀 얼굴과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맞춤복으로 보아 분명 어딘가 귀한 집안의 영애일 것이다. 그러나 전혀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소녀의 눈이 에밀이 읽고 있던 '최신 군사학 9판'의 표지를 훑었다.
"기사이신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레이디."
에밀이 살짝 미소를 짓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가를 가리며 화답하듯 웃었다. 겨우 에단과 비슷한 정도의 나이일 텐데, 그 몸짓이며 손끝 하나하나에 기품이 감돌았다. 에밀은 속으로 감탄하며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뉘 집 자식인지 교육 하나는 제대로 받은 모양이다.
소녀가 아직 가시지 않은 미소를 띤 입술로 에밀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여기에 계신 거죠?"
"할아버님께 기사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발로아 가의 에이몬드 공자님이시군요."
에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녀가 필요 이상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었지만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레이디,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어머나."
소녀가 얌전하게 미소를 지었다. 에밀은 그 미소를 바라보다가 소녀가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죄송해요. 사정이 있어서 말씀드릴 수 없어요."
"...네?"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참, 저를 본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반가웠어요, 에이몬드 공자님."
드레스 자락을 펼치며 살짝 무릎을 굽힌 소녀가 뒤돌아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에밀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소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에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대로 카우치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요정 같은 아이네.
왠지 현실감이 없어지는 느낌에 에밀이 멍하니 고개를 돌려 다시 발코니를 응시했다. 시야 한가득 들어오는 초록색 잎사귀가 지난 밤 내린 봄비에 젖어 약간 짙어져 있었다.
"으윽..."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 괜찮으니 계속해."
갈비뼈 전체가 부서질 것 같았다. 시엘이 이를 악물며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시녀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코르셋을 조였다.
몸매에 대한 것을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이제 모든 것이 의식할 것들 투성이였다. 지금까지 몰랐던 게 이상할 만큼 시엘은 자신의 변화가 너무나 확연하게 느껴졌다.
동글동글해진 턱선과 예전보다 요철이 심해진 피부를 볼 때마다 그녀는 죽고 싶어졌다. 피부의 트러블은 성장기니 그렇다 쳐도,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살이 쪄 본 역사가 없던 그녀에게 몸매가 망가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드레스가 조금 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지만, 시녀들이 그녀 모르게 코르셋을 한 단계 낮추어 조였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녀는 어쩔 수 없는 패배감에 무릎 꿇어야 했다.
속으로 에밀을 몇 번이고 찌르는 상상을 하며 시엘은 거울 앞에 섰다. 여전히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거울 속의 표정은 한없이 우울했다. 당장 가벼운 식단으로 바꾸는 바람에 요 며칠 초조함에 배고픔까지 겹쳐져 그녀는 신경이 있는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리나."
"예."
"...에이몬드 공자에게, 최대한 빨리 입성할 수 있겠느냐고 전갈을 보내. 급한 일이니 지금 당장이라도 와 달라고."
이런 꼴을 에밀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엘에겐 할 일이 있었다. 당장 오늘이라도 그 태연한 면상에서 눈물이라도 흐르는 걸 보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에이몬드 공자라면, 지금 성 안에 계실 겁니다."
"...뭐?"
시엘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시녀가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요 며칠 그녀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으려 몸을 사리고 있었건만!
"무슨 소리야? 에밀이 왜 성에 있어!?"
"오전에... 발로아 대공께 군사학을 배운다고..."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야!"
"소, 송구합니다!"
시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사죄했지만 시엘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덥석 시녀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거칠게 그녀를 앞뒤로 잘잘 흔들었다.
"어디야! 어디에 있는데?!"
"지... 지금쯤은 돌아가셨을 겁니다."
"뭐?!"
시엘이 확 인상을 쓰자, 시녀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달래기 위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가, 가끔씩 1층의 살롱에서 쉬시는 걸 보긴 했는데..."
"안내해! 당장!"
시녀가 울상을 지으며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따라 방문을 나서려던 시엘이 독기를 품은 얼굴로 협탁으로 돌아오더니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품 안에 갈무리했다. 티 테이블에 널브러진 커다란 숄을 어깨에 걸치는 것으로 준비를 마친 뒤, 시엘이 시녀를 향해 도도하게 턱짓했다.
"가자."
시녀의 뒤를 따라 살롱으로 향하는 동안 시엘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엘리어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모르길 바랐지만 에밀을 그렇게 아끼는 엘리어트가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에밀이 성에 드나들고 있었던 걸까?
"...혹시?"
시엘의 뒤통수가 쭈뼛해졌다. 혹시, 엘리어트의 태도가 조금 이상해졌던 것은 에밀을 성에서 만났기 때문일까?
한참 된 일이지만 절대 가능성 없는 일이 아니었다. 시엘이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으로 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도둑고양이 같은 게...!"
"여깁니다, 비전하."
문득 들려온 시녀의 목소리에 시엘이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자 대여섯 걸음 앞에 살롱의 문이 보였다.
"수고했어, 아리나. 이제 가봐."
"예."
"그리고 이 근처로는 아무도 오지 말라고 전해. 에이몬드 공자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예."
시녀가 알쏭달쏭한 얼굴로 대답하고 물러나자, 시엘은 드디어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귀 기울여 본 살롱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그녀가 여기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시녀 한 사람뿐.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분 나쁜 고동을 애써 무시하며 시엘이 조심스럽게 살롱의 문을 열었다.
넓은 살롱 안에, 있었다. 시야에 한 번에 들어오는 카우치에 에밀이 느긋하게 앉아 무릎에 책을 놓고 졸고 있다.
그 여유로운 얼굴이 너무 미워서, 그리고 그새 조금 살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시엘은 인상을 썼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에밀에게 이런 얼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시엘이 조심스럽게 두어 걸음 다가섰다.
인기척을 느낀 에밀이 눈을 떴다. 시엘은 얼른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있었구나, 에밀."
"...전하?"
멍하니 발코니 바깥을 바라보다 살짝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부드럽게 에밀을 깨우는 목소리에 에밀이 졸린 눈을 화들짝 뜨며 고개를 들었다.
문을 닫았던 것 같은데, 어느 틈에 살짝 열린 문틈으로 시엘의 금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에밀이 당황하는 사이 시엘이 생긋 웃으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비가 와서 추웠던 건지, 실내인데도 어깨에 걸친 반짝이는 연초록색 숄은 마치 커다란 잠자리처럼 보였다.
"그렇게 부르지 마. 시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에밀은 왠지 오랜만인 시엘의 미소를 바라보다 약간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에밀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시엘, 혹시 살 쪘어?"
"......"
시엘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빨개지는 목과 전보다 동그래진 턱선을 바라보며 에밀은 자신이 시엘의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알아챘다. 조금 미안해지려는 찰나, 그녀가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에밀에게 말을 건넸다.
"군사학 과외를 받고 있다며?"
그녀가 말을 돌렸다. 너무 어색한 화제의 전환에 살짝 당황했지만 에밀은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응, 오전 수업이 없을 때만..."
"왜 얘기하지 않았어? 알았다면 내가 아카데미로 발로아 대공을 보내서..."
"시엘."
에밀이 조용히 시엘의 말을 막았다. 그녀가 샐쭉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그렇지만 난 정말 괜찮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엘이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
"...전하께 들었어. 내년이 되면 로열 나이트 특훈을 받는다면서?"
"아, 들었어?"
에밀이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에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아마 엘리어트가 전했을 것이다.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고 엘리어트의 기사가 되겠다고 했으니 지금쯤 그 프라이드에 금이 갔겠지. 조금 통쾌해지는 동시에, 에밀은 약간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이전보다 좀 더 통통해진 뺨이 왠지 그녀를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청록색 눈동자를 보면 아마 시엘이 꽤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내 말은 무시했으면서."
"시엘, 그것과는 달라. 전하께서 직접 부탁하시는 거라 거절할 수가 없었어."
"다르지 않아."
시엘이 에밀의 말을 끊었다. 에밀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시엘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엘의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 것은 기분 탓이 아닌 것 같았다. 에밀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니까.
"달라. 전하께서 얘기하신 건-"
"뭐가 달라!"
갑작스레 시엘이 소리를 지르자, 에밀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도 에밀이 필요하단 말이야! 왜 전하는 되고, 나는 안 돼?"
"시엘, 이것과 그건 별개야. 로열 나이트는 왕비의 기사가 아니라 디날 왕가를 지키는 기사잖아."
"그게 그거 아냐? 내가 언젠가 후계를 낳으면 어차피 넌 그 애를 지켜야 되잖아!"
에밀이 살짝 치솟는 울분을 참을성 있게 내리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마음대로 지껄이는 그 입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아무리 어리광쟁이라고 해도 여자를 때릴 만큼 에밀은 막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엘은 에밀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막장이었다.
"설마, 에밀, 아직도 네가 전하의 반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시엘."
"설마 날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응? 아이도 낳지 못하는 네가?"
에밀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시엘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의 볼멘소리가 다시 터져나왔다.
"넌 남자잖아!"
"......"
에밀의 얼굴이 굳어갔지만 시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발을 구르며 에밀에게 다가왔다. 잔뜩 화가 난 눈이 에밀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왕자비고, 곧 디날의 왕비가 될 거야.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그건 변하지 않아. 네가 아무리 그분 곁에 있다고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밥 달라는 강아지처럼 알짱대는 게 불쌍해서 특별히 기사로 데리고 있어 주려고 했더니, 주제도 모르는 게 어디서 내 자리를 넘봐? 어차피 후계도 못 이을 거면 가만히 엎드려서 네 본분에나 충실하고 있어! 델토르에서 굴러온 출신도 모르는 집안 주제에 분수를 알란 말야!"
"...시엘."
에밀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밀은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고,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화가 나 있었다.
낮은 목소리가 시엘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정말 살 쪘구나. 숄로 가리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이...이...이이이!"
"혹시 이마에 빨간 거, 여드름? 화장이 진해서 몰랐네. 피부 안 좋을 때 화장하면 덧나. 그러게 평소에 세수 좀 잘 하고 자지 그랬어."
시엘이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지만, 에밀은 차가운 눈으로 그 통통한 뺨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숙녀에게 몸매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실례인지는 알지만 시엘은 이미 선을 넘었다.
"후... 후후, 넌 늘 나를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 취급하는데, 이번엔 네가 잘못 생각했어."
또 뭔가, 하며 에밀이 무심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눈빛이 에밀을 응시하며 붉은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비틀어졌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에밀은 시엘의 숄 안쪽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시엘의 손이 에밀의 배 쪽으로 뻗어갔다.
"죽어!"
손끝에서 단도의 짧은 검날이 날카롭게 이채를 발했다.
시엘이 난데없이 손을 뻗긴 했지만 에밀은 충분히 피할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체술이나 검술에 소질이 없었던 데다 에밀의 눈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설 만큼 빠르다. 시엘의 기습이라고는 해도, 에밀에게 있어서는 멈춰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흥분한 시엘이 덤비는 것 정도는 에밀이 진심으로 상대하면 제압 정도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녀가 제 발로 왕세자비 자리를 발로 차는 데에야 어설픈 칼질 정도는 오히려 환영하는 마음으로 당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에밀은 느긋하게 '찔려' 주려고 했다.
"에밀!"
그래, 그 사이로 끼어든 잿빛 머리카락만 아니었다면, 에밀은 오히려 시엘의 칼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크윽-"
"전하!"
새로운 목소리가 살롱을 크게 울렸다. 에밀이 고개를 들자, 문가에 비슈나의 경악 서린 얼굴이 보였다. 이상하다. 왜 여기에, 엘리어트의 보좌관이 와 있지?
"...전...하?"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단도를 쥐고 있던 시엘이 손을 놓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챙강 하며 단도가 두어 번 구르자 붉은 액체가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전하, 어... 어떻게..."
시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원망, 두려움, 죄책감이 한꺼번에 섞인 청록색 눈이 마구 흔들리며 에밀 앞을 막아선 잿빛 머리카락을 바라본다.
"의원을 불러라! 당장!"
에밀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지금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을 막아서서 대신 시엘의 칼을 맞은 사람이, 엘- 엘리어트란 말인가?
"...에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에밀이 가까스로 고개를 내리자, 허리를 숙이고 있던 엘리어트가 조금 뒤돌아보았다. 흐릿한 자색의 눈동자에 에밀이 비친다. 그가 물었다.
"...무사...해?"
"......"
에밀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어트가 웃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엘리어트가, 웃었다.
그 순간 에밀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여전히 허리를 숙인 엘리어트를 끌어안는 순간 손끝에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자 손 전체에 선명하게 물들어 있는 붉은 피가 에밀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리... 리트!"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그를 부르자, 엘리어트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가를 살짝 올렸다. 비슈나가 달려와 엘리어트의 웃옷을 걷고 단도가 찢어놓은 상처에 손수건을 세게 눌렀다. 엘리어트가 약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에밀에게 기대 오자, 에밀의 눈에 다시 핏발이 섰다.
야차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에밀이 고개를 들어 시엘을 바라보았을 때, 시엘은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마구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
"감히, 잘도..."
상처 입은 짐승의 그것처럼 에밀이 으르렁대며 이를 악물었다. 부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나며 사나운 살기가 시엘에게 쏟아졌다.
"잘도, 그에게 손을 댔겠다."
에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시엘은 머릿속에 직접 말하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차갑고, 깊게 가라앉은, 어두운 바다처럼 얼어붙은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서서히, 그러나 격정적으로 에밀을 삼켜갔다. 엘리어트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손과는 달리 그의 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엘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내가 아니, 내가 아니야, 나는, 난..."
"닥쳐, 진짜로 죽여버리기 전에."
시엘이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에밀이 그렇게 거친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평소의 온화하고 명랑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죽여버린다는 말을 이렇게 실감나게 들어본 것 역시 시엘의 일생에서는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지만 그것에 굴욕을 느낄 경황이 없었다.
비슈나에게 엘리어트를 맡기고, 에밀이 시엘의 단도를 주워 일어섰다. 시엘이 부들부들 떨며 다시 두어 걸음 물러섰지만 뱃속까지 차가워질 만큼 강렬한 눈빛이 시엘을 쏘아보자 무릎 뒤가 단단해져왔다. 못으로 박은 듯 그 자리에 선 시엘에게 천천히 다가간 에밀이 씨익 웃었다.
그건 정말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절대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보는 웃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두려운 것인지 시엘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비릿한 미소를 짓는 에밀의 목소리가 낮게 시엘의 귀를 자극해 왔다.
"분수를 모르는 건 너야, 시엘."
"흐...흐윽...읍..."
"감히 나의 '리트'를 건드린 대가는, 너의 평생으로 받겠어."
에밀의 미소가 짙어지며 송곳니가 살짝 드러난다. 에밀이 친절하게 손을 들어 시엘의 입을 막은 손을 떼어냈다. 벌벌 떨리는 입술과 눈물에 젖은 통통한 뺨이 드러나자, 에밀이 더러운 것을 보듯 눈동자에 경멸의 미소를 담았다.
쉭, 하는 소리가 났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시엘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눈을 깜박였다.
불안하게 떨리는 청록색 눈동자의 바로 앞에 예리한 검날이 이채를 발했다. 에밀이 손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시엘의 눈은 단도에 꿰뚫릴 것이다. 그러나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채, 시엘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자신을 향한 단도의 끝을 바라만 보았다.
“왜, 또 지껄여 봐. 후계도 낳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분수를 모르고 날뛰냐고.”
“......”
“착각하는 모양인데, 시엘.”
에밀이 천천히 단도를 뒤로 거두었다. 그러나 시엘의 겁먹은 눈은 여전히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에밀이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살기에 지금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다.
“내가 물러난 건 그를 위해서지, 너를 위해서가 아니야.”
단도를 쥔 손이 힘껏 시엘 쪽으로 뻗어졌다. 시엘이 눈을 꽉 감는 순간 바로 귀 옆에서 퍼석한 소리가 났다.
“너 따위로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지. 스스로 물러나 줘서 고마워, ‘전’ 왕자비 전하.”
시엘은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멀어지는 에밀을 바라보았다. 바로 귀 옆의 벽에 꽂힌 단도의 손잡이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시엘에게서 등을 돌린 에밀은 주저 없이 엘리어트 쪽으로 향했다. 이미 그의 얼굴에 살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비슈나에게 안겨 바닥에 주저앉은 엘리어트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창백한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장 돌아가서 시엘의 얼굴을 그어버릴 것 같아, 에밀은 단도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무거운 족쇄가 더해지듯, 그에게 다가갈수록 에밀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천천히 엘리어트의 앞에 무릎을 꿇자 그가 힘겹게 눈을 떴다.
"...에밀...?"
"리트."
에밀이 엘리어트를 부르자, 엘리어트가 힘없이 미소를 짓는다. 에밀의 초록색 눈동자가 젖어 갔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엘리어트의 손을 쥐자, 차가워진 손이 희미하나마 그의 손을 맞잡아 왔다.
"다행이다..."
바보.
에밀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어트는 기사가 아니었다. 함부로 다가서지도 못할 만큼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은 에밀의 일이다. 그는 그저 내내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에밀의 무사 따위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의 마음을 그렇게 매정하게 잘라버린 첫사랑 따위 그냥 없다고 생각해도 되는데, 그런데도...!
에밀의 어깨가 떨렸다. 애써 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에밀은 이를 악물었다. 울음을 참느라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이쪽으로!"
비슈나가 바쁘게 의원을 부르는 소리가 어쩐지 멀게 들렸다. 에밀이 겨우 눈물을 억누르고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말해야 했다. 이 한 마디만큼은, 전해야 했다. 눈물에 젖어 울먹이는 목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미안... 미안해요, 리트..."
* * *
‘리트.’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돌아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뭐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찾아 걷는다. 머릿속에서 직접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들리는 것 같기도 들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리트.'
그것은 어린 날의 이름.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한 이름이,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불리고 있었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듣는 이조차 가슴이 아플 만큼 간절한 목소리.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되었다. 꼭 끌어안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리트.'
아아, 그런가. 어쩐지 납득이 되는 것 같다.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서, 그는 '눈을 떴다'.
"리트!"
"에밀..."
엘리어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너무 울어서 빨개진 에밀의 눈이었다. 채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일그러진 얼굴로 끅끅대는 것이 꽤 걱정을 많이 한 모양새였다. 잠시 멍한 머리로, 엘리어트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오전 업무를 끝내고 여느 때처럼 살롱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시엘의 목소리가 들려와 잠시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더니,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지.
조금 위험하겠다 싶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엘리어트의 눈에 시엘의 움직임이 보였고, 말릴 틈도 없이 에밀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뱃가죽이 찢어지는 고통과 커다란 청록색 눈동자가 보이고, 그리고-
에밀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리트'를 불렀다.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응..."
엘리어트가 애써 웃어 보였다.
정말은 괜찮지 않다. 배에서부터 시작된 기분 나쁜 우울함이 엘리어트의 몸을 진득하게 끌어안고 한없이 바닥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밀의 우는 얼굴을 보니 아프다거나 괴롭다는 말을 한 마디만 하면 당장 그 자리에서 자기 배에도 구멍을 낼 것 같아 엘리어트는 입은 다물었다.
"바보,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려고..."
에밀의 목소리 끝에 다시 울먹임이 묻어나자, 엘리어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손에 얼굴을 비비며 에밀은 다시 눈물을 흘려내었다. 파리하고 차갑긴 하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예전과 전혀 다른 것 없는 다정한 손길이다. 그것이 너무도 감사해서 에밀은 그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바보 같은 사람.
죽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당해야 할 고통을 엘리어트가 대신 당하고 있는 것이 싫었다. 차라리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진 않았을 텐데.
"에밀..."
"네."
"울지...마."
그 한마디에 그쳐가던 눈물이 바보처럼 또 솟구쳤다. 아까보다 더 많이 우는 에밀을 보며 엘리어트가 난감한 듯 웃었다. 이런, 울리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름을... 불러줘. 에밀."
에밀이 멍하니 엘리어트를 바라보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리트."
"응."
"리트. ...리트, 리트...!"
끝내 이름의 끝에 울음이 묻어나온다. 열일곱씩이나 되어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엘리어트에겐 그저 사랑스러웠다.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에밀은 오랫동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그 젖어 버린 뺨을 계속 쓰다듬으며 엘리어트는 부드럽게 에밀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가 우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그 눈물에 섞여 들리는 자신의 이름은 짜릿하도록 기분 좋았다. 온전히 자신만을 생각하며 마음을 담아 부르는 그 이름이 엘리어트에겐 너무나 사랑스러운 음악이었다.
"에밀..."
"흑... 네. 흐윽..."
엘리어트가 에밀의 빨개진 눈가를 살짝 문질러 주었다. 에밀이 젖어 버린 초록색 눈동자로 엘리어트를 응시하자, 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
커진 동공에서는 순간적으로 눈물마저 말라 버린 것 같았다. 에밀이 엘리어트를 응시하며 눈을 깜박였다. 엘리어트가 몸이 불편한지 한숨을 내쉬다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해, 에밀..."
"...리트."
"어디로도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에밀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에밀이 그를 그렇게 차갑게 쳐내고, 그의 마음을 짓밟았는데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변함없이 에밀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아름다운 자색의 눈동자로, 에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이 받아들여지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예뻤다. 갸륵하도록 간절한 그의 고백이 다시 에밀의 눈으로 넘쳐흘렀다.
"가지 않아요."
"응..."
"곁에 있을게요."
"응..."
엘리어트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에밀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엘리어트의 손을 쓰다듬었다.
"피곤하죠? 좀 더 자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에밀..."
"네, 리트."
엘리어트의 눈에 졸음이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에밀의 대답을 들으려면 왠지 지금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묻지 않으면, 에밀은 또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다.
"...날... 사랑해?"
"......"
에밀이 대답하지 않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에밀이 고개를 숙이자 엘리어트가 다시 물었다.
"사랑하지...않아?"
치사해. 에밀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엘리어트를 바라본다. 아름다운 제비꽃 색의 눈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에밀을 마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밀은 다시 울고 싶어졌다.
그렇게 간절하게 물으면, 거짓말을 할 수 없잖아.
"...사랑해요."
"......"
"미안해요, 리트. 나, 리트를 사랑해... 미안해요..."
드디어 자신에게 솔직해진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엘리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눈을 감았다. 곧 편안해지는 호흡을 확인하고 에밀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닦아내었다.
엘리어트가 건강해지는 걸 확인하고 나면, 에밀은 이번에야말로 떠나버릴 생각이었다. 그의 곁에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에서. 델토르든 라퓨타든 바다 저편의 미지의 대륙이든, 엘리어트를 떠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 에밀이 곁에 있다고 해서 엘리어트에게 좋은 일은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그런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곁에 있어달라고, 어디에도 가지 말아 달라고 말해 주었다.
자신이 너무 어려서일까, 아니면 이 사랑이 너무 지독한 걸까. 에밀은 마지막까지는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그 자색의 눈동자를 더 아프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의 곁에 설 수 없다는 걸 알아도 그를 사랑한다는 걸 더 이상 속일 수가 없다.
"치사해..."
아프다는 걸 이용해서 에밀의 마음을 끌어낸 엘리어트가 미우면서도 사랑스러워, 에밀은 조금 미소지었다. 인형처럼 잠든 엘리어트의 얼굴에 흘러내린 잿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에밀은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어트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도 자체가 손바닥 정도 길이로 꽤 짧은데다, 시엘은 그 검신을 엘리어트의 몸에 끝까지 찔러 넣을 만큼 힘이 세지는 못했다. 기껏해야 가죽을 찢었을 뿐이고 장기나 뼈에도 손상을 입히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레뮤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가 엘리어트의 일에 간섭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레뮤엘은 자신의 외아들을 매우 사랑했고, 엘리어트의 참상을 눈으로 확인한 후 그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버셋 후작이 소환되었다.
핏기가 다 빠져나간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엘리어트를 마주한 버셋 후작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는 아직 누가 이런 대참사를 일으켰는지 몰랐기 때문에, 딸의 미래에 혹시라도 문제가 될 엘리어트의 안위가 엄청나게 걱정되었다.
레뮤엘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표정이 다양하지 않은 얼굴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어쩐지 그가 풍기는 오오라에 버셋 후작은 살짝 긴장한 얼굴을 했다.
"폐하, 대체 이게... 이제 어떻게 된 겁니까? 감, 감히 누가 전하를..."
"나도 그것을 알기 위해 온 것이다."
레뮤엘이 침대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깊지는 않다 해도, 생살이 찢어진 고통은 그저 맨정신에 참기는 힘든 것이었다. 침대 위의 엘리어트는 인형처럼 잠들어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의사를 바라보자, 의사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피를 순간적으로 많이 흘리는 바람에 기절하긴 했지만, 금방 깨어나기도 하셨고 전하께서 아직 젊으시니 한 달 정도면 금방 차도를 보일 겁니다. 다만..."
"다만, 뭐냐!?"
후작이 급하게 묻자, 의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 건 아닙니다. 옆으로 길게 베인 상처라, 흉터가 좀 남게 될 것 같습니다."
후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엘리어트의 안위에는 문제가 없다. 한시름 놓은 후작이 곧 다시 인상을 썼다. 후작이 벌게진 얼굴로 이번에는 레뮤엘 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굽니까! 감히 누가, 누가 왕자 전하께...!"
레뮤엘이 살짝 눈짓하며 후작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신중하게 물었다.
"엘리어트의 몸에 상해를 입은 죄는, 어떻게 다스려야 한다고 보나?"
"당연히 사형이지요! 어떻게 왕자 전하의 몸에 칼을 댄단 말입니까? 이건 반역입니다! 엄중히 다스려야 합니다!"
레뮤엘의 입술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그러나 후작은 그 미소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레뮤엘이 그를 달래듯 다시 조용히 물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다시 생각하고 말고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저렇게 누워 계신데...!”
“그게, 그대의 결론인가?”
후작은 문득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레뮤엘은 상과 벌에 대해서는 확실한 국왕이었다. 그러나 후작은 그의 묘한 표정의 진의를 읽을 수가 없었다. 후작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가... 잘 알았네. 펠록스."
"예, 폐하."
펠록스가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열고 손짓했다.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문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에밀과 비슈나, 두 사람이었다.
"...발로아 공자?"
에밀이 살짝 목례를 하더니 펠록스를 따라 레뮤엘의 곁에 섰다. 버셋 후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분위기를 읽어 갈수록 점점 눈에 광기를 띠어 갔다. 오호라, 네놈이 엘리어트를 이렇게 만든 놈이렷다?
"네놈이냐?"
"......"
"네놈이, 감히 왕자 전하를...!"
"조용히."
레뮤엘의 목소리가 위엄 있게 후작의 화를 내리눌렀다. 버셋 후작이 이를 갈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국왕. 게다가 자신의 사돈이 되는 사람이니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아직 상황을 다 듣지 못했다. 어째서 엘리어트가 이렇게 됐는지 이 자리에서 소상히 보고해라. 생각이나 마음을 섞지 말고, 있는 그대로. 무슨 대화를 했는지까지."
후작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레뮤엘의 말을 들어 보면, 에밀은 범인이 아니라 증인이었다. 그럼 에밀이 범인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 그의 의문을 눈치챈 듯 에밀이 살짝 헛기침을 했다.
"오전에 할아버님께 군사학을 배우고 1층의 살롱에서 쉬고 있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보니 왕자비 전하께서 와 계시더군요. 지난번에 제게 기사가 되어 달라고 하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시 하셨습니다. 제가 전하께 부탁받은 것이 있어 못 한다고 했더니, 화를 내시면서..."
에밀이 잠시 말을 끊었다. 살짝 버셋 후작의 눈치를 보는 품이 뭔가 머뭇거리는 것 같았지만 버셋 후작은 참을성 없이 되물었다.
"그래서!?"
"...저를 찌르셨습니다."
"...뭐?"
뭔가 그 중간에 많은 것을 생략하긴 했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버셋 후작이 처음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딸아이의 이름이 새삼 낯설었다.
"우리 시엘이, 자네를... 찌...찔렀다고?"
"예."
"자네는 멀쩡하잖나!"
"당연히 멀쩡할 거다. 찔린 것은 엘리어트니까."
후작은 잠시,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몰라 눈을 깜박였다. 레뮤엘이 눈짓하자 그 곁에 서 있던 비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오전 업무를 끝내시면 살롱에서 휴식을 취하십니다. 그런데 살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에이몬드 공자와 왕자비 전하께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셨습니다. 왕자비 전하께서 굉장히 화가 나 계셨는데, 전하께서 무엇을 보셨는지 갑자기 두 분 사이로 뛰어드시고는 쓰러지셨습니다."
비슈나가 차가운 눈으로 냉정하게 증언을 끝내자, 후작이 침을 삼키고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 시엘이... 아니, 왕자비 전하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분이고... 그, 그래! 발로아 공자가, 전하를 찔렀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왕자비 전하께서 엘리어트 전하를 단도로 찌르는 것을 저와 기사 두 명이 보았습니다. 왕자 전하께서도 잠에서 깨어나시면 충분히 증언해 주실 겁니다. 무엇보다도, 방에서 발견된 단도는 왕자비 전하의 것이라고 그분의 시녀가 증언했습니다. 원하신다면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일부러 주어를 강조하는 비슈나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후작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침대에 누운 엘리어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새삼 하얗게 질린 엘리어트의 얼굴이 보였다.
어쩌나, 아직 좌절하기엔 이른데. 에밀이 침통한 얼굴로 살짝 한숨을 내쉬자, 비슈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엿듣는 것은 옳지 않은 줄 압니다만, 왕자비 전하께서 발로아 공작가에 대해 하신 말씀에 대해 들었습니다."
"...뭐라?"
처음으로 레뮤엘의 눈에 감정이 돌았다. 후작도 흠칫 레뮤엘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비슈나가 잠시 생각을 더듬다, 느릿하게 시엘의 말을 곱씹었다.
"'델토르에서 굴러온 출신도 모르는 집안 주제에 분수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인가?"
"거기까지 들으셨던 겁니까..."
레뮤엘이 묻자 에밀이 우울한 눈으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후작이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레뮤엘은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번뜩이는 눈으로 에밀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그... 틀린... 말도, 아닌걸요. 발로아 가는 델토르에서 왔고... 하지만 제가 아닌 저의 가문을 욕보이는 데에는... 게다가 전하께서 저 같은 것 때문에 대신... 흐윽...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윽, 하며 에밀이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울음소리가 가늘게 섞여 끝이 무너지는 발음에서 처절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왕자비 전하께서 '미리' 단도를 준비하셨을 정도로 저를 싫어하셨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시엘은 제 아카데미 친우였는데... 대체 왜 이렇게..."
에밀이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려내자 레뮤엘이 스윽, 고개를 돌려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이미 핏기 하나 없이 하얘진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엘리어트에 대한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물론 칼부림을 했던 것은 바뀌지 않지만 적어도 왕족 시해죄가 아니라 단순한 과실치사로 취급하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그 정도는 후작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엘리어트가 아니었다.
발로아 가문이 공작가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아네 월터 발로아가 디날의 반려인 이상 '발로아'는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이름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국왕 본인이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공작의 작위를 내리고 반려로서 그의 자리를 굳히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후작 자신이 더 잘 알았다.
말하자면 발로아 가문이 디날에서 입지를 얻는 것은 레뮤엘에게 있어 국왕의 프라이드가 걸린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발로아라는 이름은 그저 국왕의 반려가 아니라 절대 더럽혀서는 안 되는 성역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민감한 부분을 시엘이 덥석 건드린 데다, 엘리어트는 몰라도 에밀을 만나러 오면서 악의를 갖고 단도를 준비했다는 것은 살해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시해할 의지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왕세자비라고 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명백했다.
오히려 레뮤엘이 당장 시엘의 목을 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작은 방금 레뮤엘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뒷골이 서늘해졌다.
‘당연히 사형이지요! 어떻게 왕자 전하의 몸에 칼을 댄단 말입니까? 이건 반역입니다! 엄중히 다스려야 합니다!’
후작이 가늘게 떨리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듣기에도 안쓰러웠다.
"폐, 폐하! 시엘은 이제 겨우 열일곱입니다! 제발 그간의 정을 보셔서라도, 선처를-"
"선처라."
레뮤엘이 느릿하게 중얼거리자 후작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뒷목을 서늘하게 핥고 지나갔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레뮤엘의 목소리는 여유로웠지만 절대 부드럽지 않았다. 또박또박, 마디가 확실한 한마디가 후작의 귀에 박혀들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폐하, 제발... 우리 시엘이 아직 어려 철이 없어서..."
"아직 어리다-라. 그래, 아직 어리지. 열일곱 살이라면."
레뮤엘이 느리게 중얼거렸다. 에밀이 살짝 침을 삼켰다. 잠시 생각에 잠겨 눈을 감고 있던 레뮤엘이 곧 형형한 안광을 발하며 눈을 떴다.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레뮤엘이 다시 한 번 엘리어트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엘리어트의 치료가 먼저다. 처분은 그 후에 내리도록 하지."
펠록스에게 턱짓하자, 그가 그 몸짓이 뜻하는 바를 알아듣고는 버셋 후작을 문 밖으로 내보냈다.
“아, 그렇군.”
버셋 후작이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하는 간절한 눈빛이었으나, 레뮤엘의 목소리는 높낮이 없이 무미건조했다.
"이제 더이상 왕자비가 아니게 되었으니, 성을 나갈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 되도록 빨리."
"폐, 폐하-!"
후작의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엘리어트가 살롱에서 칼을 맞고 피를 흘린 지 이틀만에, 하나뿐인 나라의 후계자에게 칼끝을 겨눈 대가로 시엘은 왕자비 자리에서 내려왔다. 버셋 후작의 간곡한 부탁으로 겨우 사형은 면했지만 그녀는 북쪽 산맥의 수도원에서 평생 유폐되어 살아가야 했다.
"죽여버릴 거야! 내 평생을 걸고 널 저주할 거야! 듣고 있어? 대답해! 듣고 있잖아! 에미일!"
시엘이 반미치광이처럼 마차에 감금되어 떠나는 걸 보며, 에밀은 차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