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의심
"크으윽...!"
정성껏 손질한 손톱이 부러졌지만 분노가 담긴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애꿎은 베게와 쿠션을 잡아 뜯고 내던지면서도 분을 삭이지 못한 시엘이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최악의 굴욕이었다. 가히 반역이라고 해도 좋았다.
에밀이 본격적으로 바보짓을 시작했다. 7년 동안이나 함께했지만 이번만큼 에밀의 생각이 보이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시엘은 이번에야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에밀은 솜씨 좋게 시엘의 거짓말을 이용해 빠져나갔다. 찻잔을 넘어뜨리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나 왠지 이번만큼은 시엘도 실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찻잔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왠지 에밀은 그녀를 홀로 방으로 보내고 엘리어트와 둘만 남았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부득, 하고 가지런한 잇새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어릴 적 이후 다시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비참한 굴욕에 시엘은 소리라도 마음껏 질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는 버셋 후작가가 아니다. 그녀가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크게 한다면 당장이라도 누구든 달려와 그녀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
아니지.
시엘의 비틀어진 입가에 묘한 미소가 솟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왕자비였고, 에밀은 공작가의 장남일 뿐, 아직은 무엇도 아닌 열일곱 살의 아카데미 학생일 뿐이다.
시엘이 천천히 엎드렸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가라앉은 눈으로 아까까지 실컷 두드리고 있던 베개를 끌어안았다.
"아리나, 밖에 있어?"
"예, 전하."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대답하자, 시엘이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목욕하고 싶어. 준비해줘."
"예."
"그리고 전하께 외출 허가를 받아줘. 내일 오전에 나갈 거야."
"예."
시종이 서둘러 목욕물을 받으러 떠난 뒤, 시엘은 느긋한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색 관목들이 싱싱해 보였지만 시엘에게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일 뿐이었다.
"...에밀..."
시엘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측실은, 취소야."
시엘이 콧방귀를 뀌며 창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굴욕에 젖은 청록의 눈동자가 비뚤어진 승리감에 빛났다.
다음날 아침, 시엘은 엘리어트에게 외출 허가를 받아냈다. 그녀가 탄 마차가 성을 떠나는 것을 보며 엘리어트는 생각에 잠긴 채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창 바깥으로는 완연한 봄이었다. 정원 곳곳에 피어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며 눈을 즐겁게 했고 느긋한 햇살은 어딘가로 한없이 걷고 싶도록 만들었다. 시엘이 외출하고 싶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엘리어트조차 창 밖을 바라보는 눈에 여유가 감돌 정도였다.
어려운 업무는 이제 거의 끝났다. 군대나 무역에 관한 복잡한 것들은 여전히 레뮤엘의 관할이었지만 델토르와의 외교라던가 나라 안의 소소한 일들은 거의 엘리어트의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정치에 몸담았던 엘리어트로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거기다 최근에는 왕자비와 에밀의 일로 도망이라도 치듯 일에 매달렸으니 이렇게 한가한 시간이 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그러나 엘리어트가 한숨을 내쉬자 그 제비꽃의 이채가 사그라들었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지만 엘리어트는 요즘 들어 자신을 휘젓는 이 감정이 힘겨웠다.
에밀이 자신에게 변함없이 다가와주는 것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엘리어트가 그렇게 차갑게 밀어내곤 했는데도 에밀은 늘 똑같은 미소와 똑같은 얼굴로 엘리어트를 대했다. 그 미소에, 자기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늘 너는 내 곁에 있을 것을 알지만, 결코 내 것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생떼나 마찬가지다. 마음 한 조각 내어주지 않을 에밀이 미워서, 그러면서도 좋아서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왔다.
엘리어트가 눈을 감았다.
천천히, 깊게 잠가 둔 과거로의 문을 열었다. 괴롭고 괴로워서 그저 외면해오기만 했던 과거였다.
벌써 5년 전의 일이지만 정확하게 기억난다.
그날은 엘리어트의 왕세자 책봉식이 있던 날이어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바빴다. 아카데미에도 가지 못하고 긴 시간의 행사를 잘 치러낸 엘리어트는 일정이 끝나자마자 에밀부터 찾았다.
에밀은 정원에 있었다. 평소처럼 검술 연습을 하고 있던 에밀은 엘리어트가 달려와 끌어안자 순순하게 그 품에 안기며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이 웃었다. 행복한 듯이, 즐거운 듯이.
'다 끝났어. 하아... 죽는 줄 알았네.'
'고생하셨어요, '전하'.'
너무나 낯선 에밀의 한마디에, 엘리어트는 흠칫 놀라 에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외려 에밀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엘리어트를 올려다본다. 그 맑은 눈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어 엘리어트가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웃었다.
'...전하라고 안 불러도 돼, 에밀.'
'어... 하지만, 이제 왕세자가 되셨잖아요. 전하라고 불러야죠.'
에밀의 얼굴에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살짝 죄책감이 서렸다. 에밀과 함께 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에밀?'
'네?'
'...약속했잖아.'
엘리어트가 애써 웃으며 물었지만, 에밀은 그때 난감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뭘요?'
-우득.
심장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잖아.'
'? 전 늘 ‘전하’ 곁에 있을 거예요.'
에밀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것은 엘리어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미소였다. 그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가슴의 균열이 커져갔지만 엘리어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기억, 안 나?'
'...뭐가요?'
그 해사한 얼굴을 보며 엘리어트는 충격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되묻는 에밀의 목소리가 잔인하게 엘리어트의 가슴을 후볐다. 에밀도 자신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늘 내 곁에 있었고 늘 함께 지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반려 말이야.'
아슬아슬하게 핏기가 흐르는 심장이 애타게 외치고 있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해 줘.
'반려요?...아!'
에밀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엘리어트가 겨우 안심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엘리어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마음에 드는 영애라도 발견하신 거예요? 그렇구나, 전하는 곧 왕이 되실 거니까 후계자가 중요하겠네요. 전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빠각 소리를 내며 엘리어트의 심장 한편이 떨어져 나갔다.
전혀, 생각도, 못 했다고?
엘리어트의 얼굴이 실망과 배신으로 일그러졌다. 분명히 땅을 밟고 서 있었지만 발바닥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엘리어트의 눈이 잘게 떨리며 자기도 모르게 에밀의 어깨를 잡았다. 깜짝 놀란 에밀이 걱정스레 엘리어트를 올려다본다. 그 순진무구한 눈에 오롯하게 엘리어트가 담겨 있었다. 어제와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왜 그래?'
'네?'
'지금, 장난치는 거지?'
'...네?'
장난은 전하께서 치고 있잖아요, 라는 눈으로 엘리어트를 바라보는 눈이 아팠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엘리어트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그 낯선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
'전하, 괜찮으세요?'
'...왜 그러는 거야? 반려가 되어 준다고 했잖아.'
간절한 목소리였다. 차마 그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엘리어트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제야 에밀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움찔했다.
'아... 그거...'
'......'
'에이, 언제 적 이야긴데 그러세요. 완전 깜짝 놀랐네.'
엘리어트가 눈을 홉떴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에밀을 바라보자, 에밀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땐 저희 둘 다 어렸잖아요. 어... 혹시 진심이셨던 거예요?'
-콰직.
엘리어트의 가슴 한편에서 무언가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초록색 눈을 볼 때마다 두근대던 심장이 차가운 회색으로 식어가고, 애정으로 빛나던 제비꽃 색의 눈동자가 점점 짙푸른 감청색으로 가라앉았다.
'...에밀.'
'네?'
엘리어트가 상처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잔뜩 찌푸린 괴로운 얼굴은 에밀이 놀랄 정도였지만 그는 에밀의 어깨를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전하, 괜찮으세요?'
'내 반려가 되어줄 수는, 없어?'
그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이미 자신의 진심을 무시한 에밀인데도 엘리어트는 그에게 다시 매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왕자의 신분이나 체면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매달려서 그를 가질 수 있다면, 엘리어트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너무 어릴 때 했던 청혼이어서 그럴 거야. 지금 다시 한다면, 괜찮을지도 몰라.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엘리어트가 고통스러운 고백을 토해냈다.
'난 네가 아니면... 싫어.'
'......'
에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이 엘리어트에겐 지옥같이 고통스러웠다.
'죄송해요, 저...'
'......'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에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살짝 커졌다가 다시 작아진 보랏빛 동공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
'죄송해요.'
에밀이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지만 엘리어트는 웃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얼굴은 에밀을 향하지 않았다. 바닥을 바라보던 숙인 고개가 천천히 올라왔다. 에밀이 흠칫 놀랄 만큼 차가운 눈으로, 엘리어트는 그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이 서리처럼 에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전하, 괜찮-'
-탁.
엘리어트가 그의 얼굴로 향하던 에밀의 손을 쳐냈다. 에밀이 놀라 손을 거두는 순간 엘리어트가 낮게 으르렁댔다.
'다신... 내 눈에 띄지 마라.'
엘리어트가 눈을 떴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자, 눈꼬리 끝에 물기가 느껴졌다. 엘리어트가 피식 웃으며 눈 위로 손을 덮었다.
그 뒤로 5년 동안이나 엘리어트는 에밀을 만나지 않았다. 왕세자가 되면서부터 국정 일에 참여하느라 바쁘게 지낸 것도 엘리어트가 자처한 것이었다. 아카데미는 물론 자주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간다고 하더라도 에밀과 마주치는 일은 없도록 조심했다.
그러나 그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성 안에서 엘리어트는 레뮤엘 곁의 이아네를 볼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에밀과 똑 닮은 초록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 에밀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눈을 계속 보고 싶으면서도, 상처받은 심장을 몰래 다독이던 나날들.
쓴웃음을 짓던 엘리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는 어쨌든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에밀이 좋아하는 여자는 이미 자신과 결혼했고, 엘리어트가 이제와 에밀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해도 에밀은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준 상처에도 불구하고 에밀이 곁에 있어 주고는 있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시엘을 위한 것이겠지.
아아, 그런가. 요 며칠 자주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은 시엘을 보기 위한 거였나.
엘리어트가 체념과 실망의 한숨을 내쉬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럴듯하다. 좋아하는 사람 곁에 어떤 식으로라도 머물고 싶은 것은 자신도 에밀도 마찬가지-
문득, 엘리어트가 몸을 바로 세웠다. 멍하니 늘어져 있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며 부드럽게 다그락, 책상을 두드렸다.
"어떤 식으로라도...?"
느릿한 중얼거림과는 달리 엘리어트의 두뇌는 바쁘게 돌아갔다. 정찬에서의 일을 떠올렸던 탓이다.
그동안의 에밀을 행동을 생각해 보면 시엘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시엘의 행복을 빌고, 엘리어트를 멀리했으며, 성인식과 결혼식에서까지 춤을 추었고, 심지어 못 만나게 되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동안 에밀의 표정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늘 웃고, 미안해하고, 난처해하는 표정뿐. 그러나 어제 정찬을 함께했던 에밀은 조금 달랐다.
부드럽게 넘어가긴 했지만 시엘에게 정확히 선을 그었다. 그건 엘리어트도 느끼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있긴 했지만, 시엘이 찻잔을 엎질렀을 때의 태도는 사랑하는 이를 대하는 태도라기엔 필요 이상으로 정중했다.
엘리어트는 천천히 머릿속의 영상을 바꿔 보았다. 머리가 아프다며 일어서는 시엘의 얼굴이 점점 에밀로 바뀌어 간다. 예를 들어, 만일 머리가 아팠던 게 에밀이었다면, 엘리어트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 살롱에서 있었던 일이 겹쳐지며, 머릿속의 영상에서 엘리어트는 벌써 에밀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함께였고 평생 함께하길 바랐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눈앞에서 비틀거리는데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 엘리어트였다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방으로 안전하게 돌아가 침대에 누워 잠이 드는 것까지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밀은-
"...이상한데."
엘리어트의 눈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보랏빛 눈동자가 깊은 바다빛을 띄며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는 에밀의 태도가 너무 천연덕스러워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다시 반추할 때마다 의혹으로 반짝였다.
어려서부터 알아왔던 에밀은 생각이 깊고 배려가 있는 아이였다. 못 보던 5년간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5년간 에밀만 몰랐을 뿐 엘리어트는 그에 대해 모든 것을 보고받고 있었다. 엘리어트의 생각이 맞다면 에밀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미소도, 그 친절도, 배려도. 그렇다면 시엘을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엘리어트가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햇살 아래 발로아 공작가의 저택이 설탕으로 만든 집처럼 아늑하게 놓여 있었다. 날씨가 맑아 에밀의 방이 한눈에 보였다. 커튼이 걷어진 에밀의 방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엘리어트는 마치 그곳에서 에밀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에밀의 태도가 바뀌었는지, 엘리어트는 알아내야 했다. 희망이나 절망과는 또 다른 절박함으로 심장이 뛰었다. 어쩌면, 어쩌면-
"...아닐지도 몰라."
그러나 맞을지도 모른다. 맞다고 해도 이제 와서 소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알아야 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아카데미로 간다."
"무슨 일이십니까?"
"중요한 일은 아니다. 잠행이니 내 검과 모자를 준비해. 호위는 마일로와 게일, 둘이면 충분하니까."
"...예."
비슈나가 고개를 숙인 뒤 엘리어트의 옷을 가지러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 급한 발뒤꿈치를 바라보는 엘리어트의 눈이 짙은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 * *
"리디아!"
"세상에! 시엘! 아...아니, 전하!"
리디아가 눈을 반짝이며 시엘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교정에 있던 모든 학생들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지만 두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테리가 프레첼을 씹던 입을 멈추고 갑작스레 아카데미에 나타난 왕자비를 바라보았다. 에밀이 낮게 헛기침을 하면서 테리를 툭 치자 그제야 테리가 입을 닫았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이, 싫다. 지금은 시엘이라고 불러줘. 여긴 성이 아니라 아카데미잖아."
시엘이 예의 그 생크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교정을 둘러보았다. 예고 없이 나타난 왕자비의 모습에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들이 그녀의 순금 같은 금발을 쫓아 움직이고 있었다.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네. 조용한 데로 갈까?"
"응!"
리디아가 속삭이자 시엘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식이라곤 하지만 왕자비의 행차였다. 그녀의 주위로 일개 분대가 에워싸고 있어 멀리 이동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그들은 휴게실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이렇게 나와도 돼?"
"응, 전하께서 허락해 주셨어."
웃는 얼굴에 살짝 금이 갈 뻔했지만 에밀은 잘 참아냈다. 프레첼을 씹던 테리가 에밀에게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제 딴에는 에밀을 배려한다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에밀은 그저 웃으며 그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다아- 나도, 시엘처럼 시집이나 가 버릴까."
"어머나, 리디아가?"
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묻자, 테리가 눈치 없이 입을 놀렸다.
"시엘은 몰라도 네가 어떻게 시집을 가? 너 데려갈 사람도 없잖아."
"...에밀, 나 얘 때려도 돼?"
"엑, 왜?"
에밀이 한숨을 쉬며 테리의 입을 막고는 리디아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테리의 눈을 흘기며, 리디아가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뭘 할 지 아직 정하지 않았거든. 바로 내년이면 취업이나 실습으로 바빠질 텐데."
아카데미의 졸업은 열아홉 살이었으므로 진로는 열여덟 살부터 정해야 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열일곱 살이 되면 마음이 바빠졌다.
"테리는 뭘 할 거야?"
"난 무역이나 외교부로 갈 거야. 이미 허가도 받아 놨으니까 내년부턴 성으로 출근이지. 앗, 잘만 하면 우리, 성에서 만날 수도 있겠는데?"
테리가 웃으며 대답하자 시엘도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에밀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에밀은?"
"으음, 난..."
"기사가 될 거지?"
에밀이 잔잔한 초록색 눈으로 시엘을 바라보았다. 시엘이 기대를 품은 눈으로 에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 수 있다면."
"잘 됐다!"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양손을 맞잡으며 꿈꾸는 듯한 눈으로 에밀에게 웃어 보이자 에밀은 뒤통수를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에밀, 괜찮다면 내 기사가 되지 않을래?"
에밀이 흘끔 휴게실 문을 지키고 선 기사들을 곁눈질했다. 어림잡아 열다섯 명쯤 되어 보이는 기사들을 두고서도 아직 부족한 걸까? 에밀의 시선을 눈치 챈 시엘이 선수를 쳤다.
"저 분들은 내 직속이 아니라 전하의 직속이야. 잠깐 외출해도 괜찮냐고 허가를 구했더니 붙여 주셨어."
"헤에... 시엘, 사랑받는구나."
"어머나..."
테리의 놀림에 시엘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모른다는 듯 뺨을 감쌌다. 에밀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자기 앞에 놓인 레몬에이드 컵을 만지작거렸다.
시엘의 기사가 된다?
"어때, 에밀? 규정대로라면 내년부터 견습 기사가 되지만 에밀은 실력이 좋으니까 승급도 빠를 거야."
"나쁘지 않은데. 에밀, 어떡할 거야?"
에밀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상큼한 미소는 눈썹 끝이 살짝 내려가 있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조금 갑작스럽네. 일단 부모님과 상의해볼게."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시엘은 실망하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쉬워하는 기미조차 없었지만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미안해, 난 너를 도와주고 싶어서... 늘 네게 도움만 받아 왔잖아. 그게 고마워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해 주고 싶었어."
리디아가 대견하다는 듯 시무룩해진 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리디아도, 테리도 정말 좋은 친구들인데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녀의 방식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고맙지만,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일도 있어."
"...?"
시엘이 에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밀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래,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그녀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것을 선택한 에밀은 한숨을 삼키느라 시엘의 기사들 사이로 움직이는 인영을 눈치 채지 못했다.
검은 모자를 쓴 인영은 얼핏 평범한 학생처럼 보였지만 기사들 사이에 섞여 잘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서로 곁눈질했지만 인영은 아랑곳 않고 휴게실 문 바로 옆에 기대어 안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암살의 위협에 대비하여 문은 열려 있었고, 네 명의 친구들은 딱히 목소리를 죽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기사들도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검은 모자는 에밀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잠시 기다렸다가 벽에서 몸을 일으켜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두세 명의 남자와 함께 사라진 검은 모자는 아카데미의 지리를 잘 아는 것처럼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에 도착한 검은 모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가장 구석진 자리의 책장으로 향했다. 남자들은 그와 적정한 거리를 두고 일행이 아닌 것처럼 그의 뒤를 따랐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안전한 곳까지 도착한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윤기 흐르는 잿빛 머리카락 아래 제비꽃 색의 선명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의문과 흥분이 섞인 얼굴로, 그는 자신을 따라온 기사들에게 엄호하되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마일로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그의 곁에서 조금 떨어지자, 책장에 기댄 엘리어트의 눈이 생각에 잠겼다.
시엘과 에밀의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저 에밀을 만나러 온 것 뿐인데, 시엘이 외출하겠다는 곳이 아카데미였던 줄은 몰랐다. 처음엔 계획이 틀어져 약간 짜증이 났지만 어쩌면 좋은 기회였다. 엘리어트가 없는 곳에서 에밀이 시엘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엘리어트는 방금의 대화로 결론을 내렸다.
좋아하는 쪽은, 에밀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아카데미의 에밀에 대한 보고를 받을 때부터 시엘이 에밀과 붙어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엘리어트의 성인식에서 함께 춤을 출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에밀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을 만큼 에밀은 물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결혼식 때, 시엘은 에밀에게 먼저 춤을 청했다. 성에 먼저 에밀을 초대한 것도 그녀였다. 엘리어트와 결혼했는데도 에밀의 이야기를 꺼내거나 에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엘리어트가 화를 낼 때 에밀을 감쌌던 것도 모두 시엘이었다. 깜짝 놀라게 해 주겠다며 에밀을 초대한 정찬에서는 엘리어트에게 에밀의 어린 시절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사가 되어 달라는 오늘의 이야기로, 엘리어트는 자신의 추측에 마침표를 찍었다.
좋아하는 쪽은, 에밀이 아니라 시엘이다.
그래, 좋아하는 쪽은 에밀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10년 전인가."
그때도 그랬다.
엘리어트가 곁에 있어 달라고 했을 때, 적어도 그때만큼은, 한 점 어두움 없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에밀의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그래. 확실해졌다. 에밀이 시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시엘이 에밀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럼, 그때 에밀이 얘기한 '좋아하는 사람'은?
엘리어트의 눈이 의문을 품고 깜박였다. 평온하게 가라앉던 보랏빛 눈동자가 살짝 찌푸려졌다.
에밀에 대한 것은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카데미의 수강 시간표나 성적, 방과 후의 활동이나 심지어 주말에 뭘 하며 지내고 누구와 친한지, 엘리어트는 에밀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에밀의 사생활을 아무리 탈탈 털어도 시엘 외에 그가 좋아할 만한 사람은 생각나질 않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엘리어트가 뭔가 놓친 것이 있었거나, 에밀이 거짓말을 했거나.
놓친 것은 없다. 그것은 자신할 수 있었다. 에밀과 함께 있을 때는 늘 부드럽고 애정 어린 엘리어트지만 일처리에 대해서만큼은 빈틈 따위 없었다. 에밀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에밀이 거짓말을 했다. 왜, 무엇 때문에?
엘리어트의 눈이 자색으로 빛났다. 파르란 안광이 무시무시하게 맞은편 책장을 노려보았다. 도서관의 침묵이 조용히 엘리어트의 생각을 감쌌다. 한참이 지나서야 엘리어트는 도서관을 나섰다. 할 일이 아주 많았다.
그 날 오후, 리디아는 집으로 돌아가려다 아카데미의 호출을 받았다. 의아한 얼굴로 아카데미의 진로 상담실로 들어선 리디아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잿빛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는 위엄을 간직하고 느긋하게 리디아를 바라본다. 리디아가 당황해서 얼어 있는 사이, 그의 기사들은 리디아를 엘리어트 앞에 앉혔다. 그 짧은 시간에 리디아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대체 왜 디날의 왕세자가 자신을 부른 걸까?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리디아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 나가는 것이었다.
"에이몬드 공자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리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외, 외람되지만... 저,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에이몬드 렉스 발로아 공자에게, 연인이 있냐고 물었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흔들림 없는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리디아는 왠지 현실감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에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그러나 남자가 대답을 종용하듯 눈을 가늘게 뜨자 리디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친하게 지내지 않았나?"
그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리디아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물론 친하긴 하지만... 에밀은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아요."
"...음?"
엘리어트가 살짝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리디아가 눈썹 끝을 늘어뜨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늘 웃고, 밝고 긍정적인 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고 할지..."
"......"
리디아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엘리어트는 현명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디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리디아가 생각에 잠겨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마 작년에, 아카데미에서 수학여행을 갔을 때인 것 같아요. 친구들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더니-"
엘리어트가 리디아의 입술을 주시했다. 리디아가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차였다고 했어요."
"뭐?"
"네?"
리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엘리어트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리디아에게 다시 물었다. 느긋하던 모습과는 달리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감정적인 태도였다.
그것이 에밀을 대할 때만 나오는 얼굴이라는 것을 리디아는 물론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의 직감으로, 리디아는 엘리어트가 무언가 자신을 통해 캐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차였다고?"
"네."
리디아가 조심스럽게 엘리어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이미 리디아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끄고 이 새로운 사실에 몰두해 있었다.
'찼다'도 아니고, '차였다'고?
그러나 에밀의 학창 시절에 대한 보고를 받는 동안 에밀이 누군가에게 다가가거나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따로 편지를 보내서 마음을 고백했거나 아카데미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엘리어트가 아는 한 에밀은 검과 연애를 했으면 했지 고백을 했다가 차이는 일은 절대 없었다.
다시금 생각에 잠긴 엘리어트에게 리디아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복잡한 표정을 지은 엘리어트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그렇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리디아는 조금 안심했다.
“직접... 이라고?”
“네. 음,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에밀과 꽤 가까우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
엘리어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리디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리디아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에밀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아, 하긴, 에밀이 시엘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면 엘리어트에겐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다.
혼자서 납득한 리디아를 돌려보내고 성으로 돌아온 엘리어트가 고민에 잠긴 채 한쪽 벽에 세워진 장식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에밀의 변화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에밀이 좋아하는 사람이 시엘이 아니라 달리 있다면 그것도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에밀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엘리어트의 눈이 빛났다. 책상에 붙어 앉은 엘리어트가 펜을 들어 급하게 편지지에 무어라고 갈겨쓰고는 보좌관을 불렀다.
"비슈나."
"예, 전하."
"발로아 공작가에 전해라. 에이몬드 공자 앞으로. 아, 그리고 이아네 공께 잠시 시간을 할애해 주실 수 있는지도 여쭈도록."
"예."
비슈나가 편지를 받아들고 나가자, 엘리어트가 자동적으로 창문으로 다가가 앉았다. 어제까지 화창하던 날씨는 흐릿한 구름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희끄무레한 안개가 옅게 발로아 저택을 감싸고 있었다.
자신이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밀에게 그렇게 대한 주제에 정작 이렇게 사적인 감정으로 에밀을 불러들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시엘의 마음이 확실해진 이상, 엘리어트는 에밀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엘리어트의 입꼬리가 한쪽만 치켜 올라갔다. 비릿한 미소가 붉은 입술 위로 올라앉았다.
"감히..."
감히 에밀을 넘보다니 가소로웠다. 결혼식을 올린 후 처음으로 엘리어트는 그녀와의 결혼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저런 여자가 에밀 옆에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괴로웠다. 차라리 자기 곁에 두고 영영 에밀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아 버리는 것이 안전하다.
엘리어트가 에밀에게 큰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이미 에밀은 엘리어트를 잊고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여자가 에밀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엘리어트에게는 엘리어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밀만은 지킬 것이다.
굳은 의지를 품은 단단한 얼굴이 발로아 공작가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어트의 미소와 오해가 안개를 따라 짙어져 간다. 흙냄새가 공기를 타고 코끝에 끼쳐 오기 시작했다.
* * *
찌푸린 하늘은 그다지 보기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흐릿한 집무실 창문에 빗방울이 하나 둘 새겨지는 것을 보며 레뮤엘은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로 책상에 놓인 서신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침에 도착한 급보였다. 그 안의 내용은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결론은 레뮤엘로서는 약간 고민스러운 부분이었다.
자아, 어떻게 할까.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안."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레뮤엘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이아네가 레뮤엘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조금,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서."
"...?"
"이것."
레뮤엘이 서신을 펼쳐진 채 이아네에게 넘기자,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그 위로 시선을 내렸다.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가 읽기 쉬웠다. 내용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기에 이아네는 금방 고개를 들었지만, 그 초록색 눈동자에 떠오른 당혹을 보고 레뮤엘이 약간 한숨을 쉬었다.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아네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아네가 알아야 한다.
"놀랐나?"
"조금... 뜻밖이긴 합니다."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더 빠르군."
"허락하실 겁니까?"
레뮤엘이 아주 어려운 질문을 받은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이아네는 상반된 감정의 갈등을 읽었다.
"...어려운 문제야."
이아네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레뮤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이아네가 빙긋 웃으며 레뮤엘의 손을 쓰다듬자, 그가 복잡한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참을 수 없는 것을 겨우 참는 표정으로 이아네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집무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달콤해졌지만, 아직도 창밖은 흐렸다.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에밀이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평소보다 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눌렀다.
성에서 온 급한 전갈을 받고서 에밀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주말이지만 딱히 약속도 잡혀 있지 않아서 점심을 먹고 몸이나 좀 풀까 생각했는데, 디날 왕가의 문장이 찍힌 하얀 봉투를 받아든 순간부터 에밀의 '평화로운' 주말은 산산조각이 났다.
'내일 점심 후, 입성할 것. 긴히 할 얘기가 있다.'
거꾸로 봐도 뒤집어 봐도 그 외에 다른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하얀 편지지 안에 급하게 갈겨쓴 글씨체는 에밀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의 것이었다.
5년 전 에밀이 엘리어트와 사이가 소원해진 이후 엘리어트는 단 한 번도 에밀을 먼저 부른 적이 없었다. 에밀이 비교적 성으로의 출입이 자유로운 편이긴 했지만 엘리어트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찾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주제넘은 짓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엘리어트가 에밀을 부르고 있었다.
혹시, 이것도 시엘의 계획일까?
고민했지만 에밀은 곧 고개를 저었다. 만일 시엘의 계획이었다면 편지를 보낸 것은 시엘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곧, 엘리어트가 에밀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였다. 시엘을 통하지 않고, 직접!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며 에밀은 조심스럽게 습기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입술 새를 비집고 흘렀다. 이러면 안 돼,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뺨을 짝짝 쳐 보지만 금세 헤벌쭉해진 얼굴이 스스로도 바보 같았다.
편지를 내보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문장이 에밀을 안내했다. 에밀이 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알현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너무 빨리 왔나.
에밀이 살짝 실망한 기색을 감추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인데도 찌푸린 하늘 때문인지 정원은 우중충해 보였다. 살며시 손을 뻗어 창문에 갖다 댔다. 흐릿하게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일찍 왔군."
"!"
에밀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어트가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에밀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단련된 시력은 빈틈없이 엘리어트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그의 안색과 몸 여기저기를 살핀다.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어 보이고, 평소보다 조금 저기압인 것 같은 얼굴은 아마 날씨 때문이겠지. 몸매는 요즘 들어 약간 살이 붙은 것도 같다.
에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다행이다, 식사는 잘 챙기고 계시는구나.
"앉아라."
"네."
에밀이 조심스럽게 엘리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엘리어트는 에밀을 바라보지 않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가를 가린 채 티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밀은 살짝 위화감을 느꼈다. 왠지 오늘의 엘리어트는 평소와 조금 다르다.
"5년 전 그날, 기억하나?"
"......"
에밀이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머리 꼬리 다 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지만 그럼에도 에밀은 그 질문의 진의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모르는 게 이상하다. 제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을 부숴 버린 날이니까.
에밀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점점 마음이 복잡해져갔다. 엘리어트가 원하는 대답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기가 조금 애매했다. 상처를 받은 것은 엘리어트다. 그가 먼저 5년 전 이야기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와 그런 해묵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과거를 잊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밀의 표정을 모르는 것으로 받아들였던지, 엘리어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조용히 다시 물었다.
"그래, 오래된 일이지.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질문을 바꿔서. 5년 전에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였지?"
에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눈에 떠오르는 놀라움을, 엘리어트가 흔들림 없는 보랏빛 시선으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심청색이 눈동자의 저편에서 일렁였다.
"...좋아하는...사람, 이요?"
엘리어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은 뭔가 아주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어트를 바라보았다. 5년 전, 엘리어트를 거절하면서 혹시 그가 이렇게 물을 경우를 대비해 그에 대한 대답까지 준비해 놓았었다. 그러나 그는 5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모든 것이 무력화된 이 순간 그때 물었어야 할 것을 묻고 있었다.
"말...할 수, 없어요."
에밀이 힘겹게 대답했다.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솔직하고도 확실한 정답이었다. 엘리어트가 화를 낸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엘리어트는 화를 내는 대신 더욱 냉정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어 왔다.
"...왜지?"
"...이미, 결혼했으니까요."
에밀은 엘리어트를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엘리어트가 잠시 말이 없었다. 조용한 알현실에 희미하게 얇은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린 날의 기억이 선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곁에는 늘 엘리어트가 있었고 그 사랑을 의심했던 적도 자신의 마음에 의문을 품은 적도 없다. 어린 마음에 했던 맹세의 키스라고 해도 거짓은 없었고 에밀의 사랑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엘리어트의 선을 넘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다. 엘리어트의 심장을 부수는 그 순간에도, 에밀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어트가 에밀의 말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리고 오해한다면 어떤 오해를 하게 될지 에밀은 모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엘리어트도 에밀이 시엘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게 될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시엘을 좋아하게 될 일은 없겠지만 에밀은 차라리 그렇게 오해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엘리어트가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엘리어트는 왕이 될 남자였다. 자신이 반려로서 곁에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엘리어트를 둘러싼 현실은 그에게 새로운 후계를 원할 테고, 늦든 빠르든 엘리어트가 다른 이를 안게 되는 일은 어차피 있게 된다.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겠지만, 자신으로 인해 엘리어트의 평가가 절하되는 것은 절대로 싫었다.
"...아직도 사랑하는군."
"......"
"그렇지 않나?"
에밀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엘리어트의 눈은 집요하게 반짝였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였다. 에밀이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엘리어트의 가려진 입술이 초조함에 말라갔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에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급해지려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에밀은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네."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에밀은 거짓의 장막 뒤에서 조용히 본심을 토해 놓았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맞았다. 그녀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결혼했으니 마음을 접어간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엘리어트도 시엘에게 쓸데없는 자극을 받지 않을 테고, 에밀의 마음에 누군가가 없다는 것에 안심할 터였다. 그러나-
거짓이라 해도, 엘리어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시엘을 좋아한다고 생각되어도 상관없다. 엘리어트를 사랑한다고, 사실은 평생 함께 하고 싶다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이 사랑할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늘 말하고 싶었다. 수백 수천 번을 외쳐도 모자랄 사랑을 단칼에 부정할 만큼 에밀은 강하지 못했다.
"그렇군."
다행히 엘리어트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에밀이 살짝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른 여유로운 얼굴로 다시 생각에 잠겨 창문으로 흐르는 빗물을 응시할 뿐이었다.
알현실이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로 메워져 갔다. 엘리어트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기 때문에 에밀도 잠시 멍하니 엘리어트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
"?"
예고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에밀이 눈을 깜박였다. 엘리어트가 미묘한 미소를 지은 채 에밀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제비꽃 색의 눈동자에 에밀은 살짝 숨이 막혔다.
"내년이면 너도, 18살이다. 진로에 대한 것은 생각하고 있나?"
"아..."
갑작스럽게 코앞에 들이대는 현실에 에밀이 꿈에서 깬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의 엘리어트는 정말 이상하다. 이렇게 기막힌 타이밍에 시엘과 똑같은 것을 묻다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엘과 뭔가 이야기라도 오갔던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예. 내년에는 라일베르그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려고..."
엘리어트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넌 공작가의 영윤이니까, 시험을 치를 필요는 없을 텐데."
"제 실력을 시험하고 싶어서요. 적 앞에서는 신분이나 출신 같은 것은 상관없으니까요."
에밀이 그렇게 말하며 웃자 엘리어트는 조용히 그 해사한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저 올곧은 고지식함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안을 하나 하지."
"무슨...?"
에밀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엘리어트를 바라보았다. 엘리어트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것을 에밀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로열 나이트를 알고 있나?"
"...네. 국왕이 직접 자격을 내리는 왕실 전속 기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요."
디날에서 검을 잡아본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검사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흠모의 대상. 그러나 로열 나이트는 매 해 뽑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그의 실력과 충성을 모두 인정한 단 한 명에게 내려지는 것이었다.
기준이 까다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국왕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디날 왕가의 로열 나이트는 선선대 국왕이 마지막이었다. 거의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로열 나이트의 이름은 잠들어 있었지만 디날의 모든 검사들은 자신이 디날 왕가를 지키는 검이 되기를 소망하곤 했다.
그런 명예로운 이름을 에밀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엘리어트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엘리어트가 흡족한 듯 웃었다. 그 여유로운 미소가 에밀에게는 이상한 위화감으로 다가왔다. 엘리어트가 저렇게 웃는 것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언제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는 에밀의 속을 모르는 채, 엘리어트가 난데없이 폭탄을 떨구었다.
"난 폐하께 너의 로열 나이트 자격을 요청할 생각이다."
에밀이 입을 딱 벌렸다.
"저...저, 저, 전하, 저는 아직-"
"걱정 마. 아직 네가 열일곱 살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니. 하지만 아카데미의 성적이나 재능을 보면 나이트가 되기 위한 자질은 충분해.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도 좋지만 성인식을 치르고 정식 작위를 받게 될 때까지 로열 나이트가 되기 위한 특훈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만."
"하, 하지만 전..."
"물론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어젯밤 발로아 공과 상의는 끝났으니 네 의사만 있다면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에밀이 멍하니 또박또박 움직이는 엘리어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엘리어트의 얼굴은 진지했다. 농담이나 사적인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에 에밀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로열 나이트라는 것이 분명 매력적인 이야기이긴 했지만 에밀은 아직 어렸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로열 나이트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아카데미에서의 에밀의 성적은 분명 발군이었고 공작가라는 이름도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에밀의 생각은 꽤 길어졌지만 엘리어트는 참을성 있게 물고기가 미끼를 물길 기다렸다. 에밀이 엘리어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엘리어트는 그렇게 될 경우까지 생각해 놓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엘리어트는 느긋하게 고민에 빠진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에밀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유혹이었다. 로열 나이트라는 그 이름보다는, 엘리어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그 현실이.
"...특훈은... 내년부터라도, 괜찮을까요?"
엘리어트가 빙긋 웃었다. 에밀은 그 미소를 보고 아까의 기시감이 다시 살아났다. 분명히 본 적이 있는 미소인데.
"물론. 그럼 그렇게 알겠다."
엘리어트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자락을 정리하고 문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에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하나만 더..."
"뭐지?"
엘리어트가 살짝 뒤돌아본다. 결연한 얼굴이 엘리어트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작위를 내리는 것은, 국왕 폐하십니까?"
"......"
엘리어트가 물끄러미 에밀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밀의 질문을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안의 진의가 보이지 않았다.
현재 국왕은 엘리어트가 아닌 레뮤엘이었다. 레뮤엘이 엘리어트에게 왕관을 넘기기 전까지 로열 나이트의 작위를 내릴 수 있는 권리는 레뮤엘에게 국한되어 있고, 만일 레뮤엘이 에밀에게 작위를 내린다면 에밀은 레뮤엘의 기사가 된다.
엘리어트는 에밀의 진지한 눈동자를 마주보다, 약간 도박을 걸어 보기로 했다.
"폐하께서 내리시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에밀이 당혹스러운 눈을 했다. 엘리어트의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어서, 처음으로 에밀은 그의 눈을 먼저 피했다.
"...아닙니다."
자신의 눈을 피하는 에밀을 잠시 쳐다보다 엘리어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알현실을 나왔다. 드디어 혼자 남은 에밀은 힘이 풀린 다리를 겨우 추스르며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억났다. 그 미소.
녹나무 위에서 맹세의 키스를 하자고 얘기했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미소였다.
알현실을 나온 엘리어트는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추스르며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빨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음껏 웃고 싶었다.
에밀이 자신의 앞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늘 태연하게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당혹감에 젖어가는 것이 기분 좋았다. 아직 엘리어트는 에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엘리어트는 두근대는 심장을 살짝 억누르며 깊게 호흡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기분 좋은 고양감이 오랜만에 엘리어트의 피를 뜨겁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에밀의 대답에 엘리어트의 마지막 의심은 사그라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밀이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네'라고 대답하는 순간, 엘리어트는 확신했다. 몰랐던 것이 이상할 만큼 선명한 현실에 엘리어트는 벽에 머리라도 찧고 싶어졌다.
5년 전 그날, 엘리어트가 다시 한 번 청혼한 그때. 에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에밀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리나 그것이 엘리어트가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녹나무 위의 맹세를 잊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때 에밀이 거짓말을 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5년 동안 몰래 지켜봐 온 에밀에게 다른 연인이 생겼을 리 없다는 것은 엘리어트가 가장 잘 알고, 가능성이 높았던 시엘은 에밀이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에밀은 오늘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미 결혼했다'고 얘기했다.
에밀은 아직 엘리어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결론이 나질 않았다. 착각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지금만큼은 착각이라 해도 그 달콤함에 기꺼이 물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에밀이 어째서 엘리어트를 밀어냈는지를 알아내는 것뿐. 방으로 가는 발걸음이 모처럼 가벼웠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을 무렵, 엘리어트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엘리어트의 방 앞에 서 있던 시엘이 그를 보고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신가요?"
엘리어트는 잠시 멈춰 서서 자신에게 생크림처럼 미소 짓는 시엘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빙긋이 휘어진 눈꼬리가 엘리어트에게는 비열하게 보였다. 왠지 모를 심술이 솟구쳤다. 엘리어트의 미소가 좀 더 비릿해졌다. 어디, 감히 에밀을 넘본 대가로 조금 놀아 볼까.
"에이몬드 공자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에이몬드...공자요?"
시엘이 눈을 크게 뜨며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엘리어트는 그녀의 당혹을 기분 좋게 바라보며 놀리듯이 말을 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끝날 때마다 그녀의 표정이 볼만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로열 나이트가 되지 않겠냐고 물었지."
"로열...나이트요?"
"발로아 공과도 이야기는 끝냈다."
"바...발로아 공까지 말인가요?"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그렇게 하기로 결정됐다."
"하기로 했다고요?!"
시엘이 입을 뻐끔거렸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늘 혈색 좋던 분홍빛 뺨이 창백해졌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에밀이 엘리어트에게서 어떻게든 멀어지려고 하는 것을 시엘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에밀이 엘리어트의 기사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엘이 에밀에게 자신의 기사가 되라고 했던 것은 엘리어트가 에밀을 확실하게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에밀은 물론 망설이겠지만 엘리어트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메리트를 에밀이 포기할 리가 없었다. 시엘의 기사가 된 에밀을 보며 엘리어트는 아마 에밀이 완전히 시엘의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둘을 떼어놔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자주 마주치게 해서 오해를 키우려는 의도였다.
"그...그럼, 언제부터...?"
창백해진 시엘의 얼굴을 보며 엘리어트는 알 수 없는 승리감에 젖었다.
"내년부터 시작할 예정이니, 혹여라도 사적인 일로 그를 함부로 부르는 일은 없도록 해라. 로열 나이트는 오직 국왕을 위해 존재하니, 그대가 부른다고 하여 올 일도 없을 것이다."
엘리어트가 차갑게 웃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충격에 입술이 떨리는 시엘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엘리어트는 오늘 그가 거둔 두 번째 성과에 속으로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