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인생은 실전 (21/27)

3. 인생은 실전

"어머, 에밀! 이제 오니?"

"사... 삼촌?"

에밀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응접실에서 릴리안과 차를 마시던 이아네가 아카데미를 마치고 돌아온 에밀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어떻게...?"

"어제 말도 없이 돌아가서, 무슨 일이 있나 했다."

"아!"

어제의 무례가 생각나자 에밀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시엘의 말로 이성이 흐려졌다곤 하지만 그건 분명히 무례한 짓이었다.

"죄송해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빨리 돌아오고 싶었어요."

"상관없어. 잠깐 앉아라."

에밀이 반가운 눈으로 이아네의 맞은편에 앉자, 이아네가 느긋한 미소를 띠며 훌륭하게 성장한 에밀을 바라보았다. 이아네는 성에서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발로아 저택으로 돌아오면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했다. 성에서 보는 에밀과 본가에서 보는 '조카'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13년 전의 발음조차 애매하던 어린 꼬마가 벌써 이렇게 크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장아장 걸으며 엘리어트를 따라다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키는 평균에서 조금 큰 편. 전체적으로 마르긴 했지만 검을 잡기에 특화되어 있는 조밀한 근육과 균형 잡힌 몸이 그저 보기에도 눈이 즐거웠다. 아버지 이아스를 빼닮은 얼굴이긴 했지만 웃을 때 살짝 파이는 볼우물이나 천진한 눈빛은 어머니를 닮았다.

"아카데미는 어떠니?"

"좋아요. 이번에도 검술은 만점이에요!"

"군사학은 점수가 안 나와서 고민이래요. 낙제할지도 모른다던데?"

"앗, 엄마!"

에밀이 울상을 짓자 이아네가 낮게 웃었다. 릴리안도 같이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아들의 낮은 성적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그럼 오랜만에 실력을 볼 수 있을까?"

"네...?"

"정원으로 가자."

이아네가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목검을 살짝 들어 보였다. 에밀의 눈이 반짝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정원의 빈터에서 조카와 목검을 마주 댄 이아네는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열일곱 살인데도 검을 잡은 기세가 대단하다. 진지한 얼굴로 온몸으로 풍겨내는 기운이 살기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위압감이 넘쳤다.

동체시력이 좋다거나, 반사 신경이 좋다거나 하는 것과는 별개로 에밀은 정말로 검을 좋아했다.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올곧고 확실하다. 그 점은 발로아 공작가의 내력이기도 했다.

이아네가 조금 미소를 짓는 순간, 에밀의 검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폭발하듯 이아네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왔다. 몸을 조금 틀어 그의 검끝을 흘려내며 이아네의 검이 에밀의 옆구리를 할퀴자 에밀이 내뻗은 팔을 거두어들이며 이아네의 팔뚝을 노렸다.

-따악!

"많이 늘었구나, 에밀."

"감사합니다."

이아네가 체중을 실으며 검을 밀자 에밀이 가볍게 두어 걸음 물러나는가 싶더니 다시 몸을 낮추어 이아네의 허벅지를 낮게 베었다. 붕, 하는 소리와 검이 마주치는 딱 소리가 다시 정원을 흔들었다.

"공격하셔야죠."

"글쎄."

이아네가 살짝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에밀을 먼저 공격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에밀의 강점은 수준을 뛰어넘는 동체시력과 반사 신경이다. 섣불리 공격하다간 단순히 헛손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격당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어제..."

순간 에밀의 표정이 굳었다. 작지만 주의가 흐트러진 빈틈을 놓치지 않고 이아네가 에밀의 허리를 치고 들어가자 에밀이 반사적으로 그의 검을 막았다.

-따악!

"무슨 일이 있던 것 같더구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에밀이 거칠게 맞댄 검을 밀어내자 이아네가 팔에 힘을 주었다. 가깝게 대치한 조카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시엘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에밀이 순간적으로 검을 밀어내고 그 반동으로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아네의 검이 집요하게 에밀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자 에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이아네의 허리로 깊게 베어 들어갔다.

예상하고 있었던 듯 이아네가 살짝 몸을 뒤로 빼며 에밀의 검을 막았다.

-따악!

"그렇다고 하기엔, 그 아이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던데."

결정타였다.

완전히 집중력이 흐트러진 에밀이 이아네에게 제압되기까지는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목검이 저 멀리 팽개쳐지며 에밀이 뒤로 넘어지는 순간, 이아네의 검끝이 에밀의 목에 정확히 와 닿았다.

"에이, 져 버렸네요."

에밀이 난처한 듯 살짝 웃었다. 그러나 마주 웃는 이아네가 그의 미소에 넘어갈 리가 없다.

"그 아이."

"......"

"비겁하더구나."

에밀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바람에 스쳐지나갔다. 이아네가 검을 거두고 손을 내밀자 에밀이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에밀이 고개를 들자, 이아네가 안쓰러운 눈으로 에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근신을 당했을 때부터 의심하긴 했지만, 어제 확신이 들었지. 그리고 난 방 바깥이 아니라 옆방에 있었거든."

"그 정도 방음도 안 되다니, 부실공사였던 건가요..."

"오해는 마라. 원래 한 칸이던 방을 두 칸으로 나눈 것뿐이야."

에밀이 한숨을 내쉬었다. 들켜 버렸다. 5년 동안이나 겨우 숨겨 왔는데. 역시 시엘은 에밀의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여자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에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지만 이아네는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엘리어트와 에밀을 가까이에서 보아 온 이아네로서는 에밀이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 짐작이 갔기에 앞으로의 행보가 흥미로웠다.

"...죄송해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생각이 없지는 않다는 얘기구나."

에밀다웠다. 이아네가 피식 웃으며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사랑스러운 조카의 괴로운 모습은 보고 싶지 않지만 에밀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혼자서 해 볼게요."

이아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리고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래.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일도 있지."

"...좋은 말이네요."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야."

문득 뭔가 떠오른 듯 에밀이 잠시 말이 없어졌다. 이아네가 의아하게 그의 침묵을 바라보고 있자니 에밀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저, 부탁드릴 일이 생각났어요."

"뭐지?"

"어머니께 들으셨겠지만... 제가 군사학 점수가 부족해서요."

"...응?"

이아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밀이 부탁하는 것은 이아네가 생각했던 것과는 성질을 전혀 달리하는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할아버지께 군사학을 배우러 가도 될까요?"

이아네는 잠시 이 생각을 알 수 없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천진한 초록색 눈동자가 이아네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고 있다.

에밀의 할아버지, 제라르 케이 발로아 대공은 나이가 들긴 했지만 아직도 군 작전에 중요한 발언권을 가진 생생한 현역이었다. 군사학 점수를 보충하기 위해 할아버지에게 개인 과외를 받겠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지당한 이야기이긴 했다.

그러나 왜 하필 지금, 그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에밀의 눈빛에서 그 진의를 읽어내려던 이아네가 결국 그의 생각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이라면."

"감사합니다! 이제 낙제는 면했어요!"

에밀이 눈을 반짝이며 이아네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아네가 무거워진 조카의 어깨를 마주 끌어안으며 이제 모르겠다는 듯 마주 웃었다.

"내일은 오전 수업이 없으니까, 바로 성으로 갈게요!"

"그럼 이번 시험은 기대해도 되겠지?"

에밀의 눈이 기쁘게 반짝였다. 힘차게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사랑스러운 붉은 고수머리가 흩어졌다.

그날 저녁, 에밀은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냈다. 창밖으로 보이는 케닛 성의 성벽에 군데군데 불빛이 보였다. 에밀의 시선이 똑바로 엘리어트의 방을 살폈다. 아직 밝아져 있는 방안의 불빛을 보곤 에밀이 창틀에 걸터앉았다. 밤이 꽤 깊어서야 엘리어트의 방에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에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엘리어트는 지금, 태어나 처음 마주치는 불가사의에 살짝 이마를 찡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비슈나."

"예, 전하."

엘리어트의 곁에 섰던 보좌관 비슈나가 살짝 허리를 숙이자, 엘리어트가 한껏 찌푸린 눈으로 미려한 손가락을 뻗었다.

"...설명해 주겠나?"

"발로아 대공의 부탁이셨습니다."

"...'저게'?"

엘리어트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식사 후 잠시 휴식을 취하러 살롱에 온 것까지는 어제와 모든 것이 똑같았다. 살롱의 문을 열었을 때, 카우치에 길게 드러누운 인영만 없었다면.

약간 불면증이 있었던 터라 식곤증과 겹쳐 자색 눈동자에 살짝 드리워진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두꺼운 책의 표지에 금박으로 장식된 '최신 군사학 9판'이라는 글자가 또박또박 엘리어트의 눈에 박혀 들어왔다.

두꺼운 책을 펼친 채 덮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책 아래로 삐져나온 붉은 머리카락 하며 한 손은 배에, 한 손은 머리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함부로 다리를 뻗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지금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에밀이었다.

"예. 발로아 대공께 군사학 과외를 부탁하셨다고..."

"그런데, 그가 왜 여기 있지?"

엘리어트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겨우 밀어낼 때마다 눈앞에 나타나는 이 인연이 지긋지긋하면서도 반가움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아마, 혼자 복습하시다 잠이 든 게 아닐까요..."

비슈나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비슈나의 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에밀의 모습은 공부하다 잠든 학생 그 자체였다.

"깨우겠습니다."

"아니, 그냥 두도록. 괜히 시끄러워질 게 뻔하니. 나가 봐."

비슈나가 고개를 숙이고 살롱의 문을 닫았다. 엘리어트는 지친 얼굴로 맞은편의 카우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왕세자치고 거친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눈앞에 에밀이 있으니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엘리어트가 살롱으로 쉬러 오는 것은 잠이 부족하거나 업무 중에 잠시 머리를 식힐 때뿐이었다. 자주 오지는 않는 곳이니 에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긴 힘들고, 아마 우연의 일치였겠지.

잠시 카우치 위로 쭉 뻗은 다리를 지켜보다, 엘리어트가 피식 웃으며 카우치에 기댔다. 저렇게 무방비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흐물한 경계심에 자기까지 전염된 것 같았다.

모처럼의 기회니 느긋하게 감상해볼까.

단둘인데다 에밀이 잠들어 있는 상황이라면 엘리어트로서는 감정을 일부러 숨길 필요가 없다. 보라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그러나 욕심스럽게 에밀을 훑었다.

키가 조금 커진 것 같다. 배 위에 올라앉은 손이 호흡에 따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검을 잡느라 엄지와 검지 사이에 굳은살이 박인 것이 보이자 약간 기분이 좋아진 엘리어트가 잠시 망설이다 몸을 일으켰다.

혹시나 깰까 봐, 발소리를 죽여 다가간다. 살롱의 열린 발코니 창으로 기분 좋은 봄바람이 덩달아 조심스럽게 흘러들었다. 살짝 손가락을 뻗어 에밀의 얼굴에 올려진 군사학 책을 집어 든다. 잘못하면 깰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혹시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엘리어트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하얗게 핏기가 가신 손끝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잘못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니, 사실 에밀 앞에선 늘 두근거렸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책이 치워지고 세상모르게 잠든 에밀의 부드러운 이마가 드러났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가지런한 속눈썹이 보이고, 이윽고 시원스런 콧날이, 뒤이어 살짝 벌어져 앞니가 조금 보이는 얇은 입술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엘리어트는 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왠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을 소리 나지 않게 덮어 카우치 아래 내려놓았다.

세상모르고 잠든 하얀 얼굴이 귀여웠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다, 엘리어트가 순간 손을 멈추었다.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보랏빛의 눈동자에 어두운 다정함이 가라앉았다. 그 얼굴에 손을 대는 대신 엘리어트는 턱을 괴고 그 태평한 얼굴을 마음껏 내려다보았다.

가장 아끼는 사람이었다. 감히 소중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단 한 명이었고 지금도 그의 심장을 뒤흔드는 유일한 사람이다.

엘리어트가 열 살 때, 아마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날이었을 것이다. 매일 만나던 에밀과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 엘리어트는 에밀과 늘 올라가던 녹나무 위에서 그에게 청혼했다. 에밀은 몰랐겠지만 열 살의 엘리어트로서는 떨리는 심장과 손끝을 숨기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에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욕심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럼, 맹세의 키스를 해야 해.'

어차피 반려가 될 사람이니까, 라는 어린아이다운 합리화였지만 다행히 에밀은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석양이 비치는 녹나무 위, 첫 키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카데미에 가면서도 에밀과 떨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에밀과 나누었던 맹세 때문이었다.

엘리어트의 눈이 문득 에밀의 입술에 멎었다. 핏기가 도는 연붉은 입술이 내쉬는 호흡은 평화로웠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벌어진 입술이 어딘지 색정적이었다. 이 입술에 닿았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엘리어트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목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와 괜히 더워졌다. 조금 붉어진 얼굴의 엘리어트가 조심스럽게 다시 주변을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딱 한 번만.

한 번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뛰었다. 순식간에 열 살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피가 빠르게 돌며 온몸이 맥박쳤다. 조심스럽게 상체를 숙여 무방비한 입술에 가까워진다. 뺨으로 희미하게 에밀의 날숨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늘 느끼는 거지만 엘리어트는 에밀 앞에선 늘 평정을 잃었다.

입술의 간격이 가까워지며 엘리어트의 눈이 반쯤 감겼다. 잘못하면 코끝이 닿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숙이면 된다고 생각한 순간-

"음..."

에밀이 눈을 떴다. 아직도 졸음이 가득한 초록색 눈에 엘리어트의 얼굴이 비쳤다. 엘리어트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사이, 에밀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리트'?"

"!"

퍼뜩 정신이 든 엘리어트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멍한 얼굴이던 에밀이 졸음에 겨운지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아까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 없었다. 에밀이 다시 잠들어버렸다.

비명이라도 지를 것처럼 입을 꽉 틀어막고서 엘리어트는 쿵쿵대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심장 고동소리가 시끄럽게 귓가에 둥둥 울렸다.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어서 설레다 못해 아팠다. 잠결에 스치듯 들은 이름이지만 분명 엘리어트의 애칭이었다. 에밀에게 들킬 뻔했다는 두려움과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기쁨, 그리고 그가 자신을 불렀다는 희열이 복잡하게 얽히며 피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체하지 못한 심장보다도 에밀을 깨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에밀이 다시 잠이 들었는데도 엘리어트는 그가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다시 깨워서는 안 된다. 그가 눈을 뜬 순간 귀까지 빨개진 엘리어트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잠시 쉬려고 했는데, 쉬기는커녕 엄청나게 각성해버린 몸에 부자연스러울 만큼 피가 빠르게 돌았다. 심장 고동이 겨우 안정될 때쯤, 엘리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막았던 손에 힘을 뺐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다리가 저렸지만 엘리어트는 지금 자신이 거기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재촉했다.

에밀만 남겨진 텅 빈 살롱 안에 다시 봄바람이 불어왔다. 여전히 무방비하게 눈을 감은 에밀의 이마에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이 살짝 움직였다.

"...리트..."

에밀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미소와 함께.

* * *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음?"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런가?"

시엘이 생긋 웃으며 엘리어트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잘 우러난 홍차가 찻잔 속에서 부드럽게 소용돌이쳤다.

"...아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에밀이 그저 잠결에 자신의 애칭을 부른 것뿐이지 키스도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어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런 엘리어트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시엘의 눈이 조금 반짝였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것 같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시엘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에밀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짓던 일그러진 표정을 생각하자 안쓰러움과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어차피 발버둥 쳐봤자 넌 제대로 된 반려가 될 수도 없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음?"

시엘이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녀의 얼굴은 낭패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뇨... 아무것도."

그러나 시엘이 걱정할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엘리어트는 별 생각 없이 창 바깥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짜증이 난 시엘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전하, 부탁이 있습니다만..."

엘리어트가 드디어 시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순진한 미소를 띠며 난처하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저어..."

"말해라."

"지난번의 친구들을...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요."

엘리어트의 얼굴이 예상대로 확 굳었다. 에밀과 얽혔던 사건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구나 싶어, 시엘이 덧붙였다.

"그...저기... 혹시, 에밀... 앗, 에이몬드 공자도, 다시 만나게 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

일부러 에밀의 이름을 틀렸다. 시엘은 엘리어트가 에밀을 각별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에밀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시엘이 그저 잘 울고 넘어지는 순진한 후작 영애라고만 생각했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자신을 용서하고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지 그녀는 이미 아주 어릴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몸이 약한 것이나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오히려 그녀에게 유리한 무기였다. 그녀가 울거나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도움을 준다. 울먹이며 도움을 청하는 미소녀를 거절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녀는 언제든 어떤 사람이든 자신을 돕게 만들 수 있었다.

심지어 엘리어트조차, '몸이 약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왕자비에게 친절했다. 꽃이나 보석을 보내고 최고급 비단과 공단으로 맞춤 드레스를 여러 벌 짓는 것은 엘리어트의 호의 안에서 벌어진 일이지 결코 그녀 독단의 일이 아니었다. 저녁 식사 후의 티타임을 함께하는 이 시간조차 엘리어트는 무심할지언정 불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분명 존재했다.

"...에이몬드 공자를?"

"앗, 무리한 부탁이라면, 저기..."

타이밍 좋게 그녀가 당황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시엘의 계산대로라면, 그는 곧 에밀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렇게 하라."

"...예?"

"발로아 공작가의 영윤이니, 초대되는 것까지 내가 막을 수는 없겠지. 근신도 풀렸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에...에이몬드, 공자인데요?"

너무 놀라 정말로 말을 더듬어 버렸다. 크게 뜨인 청록색 눈을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엘리어트가 되물었다.

"이상이 있나?"

"아... 아닙니다. 너...너무 뜻밖의 이야기라...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기뻐서..."

시엘이 더듬더듬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엘리어트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다시 시선을 멀리 던졌지만 시엘의 머릿속은 점점 엉켜 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혹시, 에밀이 얼마 전에 찾아왔던 것을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에밀은 공식적으로는 이아네를 만나러 온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 시간에 리트는 한창 업무 중이었다. 만일 알았다고 해도 엘리어트의 성격상 화를 냈으면 내었지 이렇게 평온한 반응일 리가 없었다.

아니면 혹시, 에밀에 대한 감정이 식어 버리셨나?

시엘이 생각에 잠겼다.

엘리어트가 에밀에게 감정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면 시엘에겐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에밀에 대한 엘리어트의 감정을 확실하게 확인해야 했다.

찻잔을 쥔 시엘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전하. 다음에는 점심을 함께 들지 않으시겠어요?"

"..식사를?"

"네에... 본가에 귀한 고래 고기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조금...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시엘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분홍빛 입술이 귀엽게 말려 올라갔지만 엘리어트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겠지."

"감사합니다."

시엘이 환하게 웃으며 엘리어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부드럽고 작은 손이 엘리어트의 피부에 닿자 그는 순간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머, 죄송해요. 너무 좋아서 그만..."

시엘이 부끄러워하며 손을 거뒀지만 엘리어트는 아까와 전혀 다름없는 눈으로 자연스럽게 옷자락을 정리하며 카우치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봐야겠군."

시엘이 아쉬운 눈으로 엘리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엘리어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달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에밀이 반사적으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안 자?"

"에단?"

파란색 파자마를 입은 에단이 뭐 하냐는 듯한 얼굴로 에밀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야말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

"화장실 갔다 오는 중이었어."

에단이 시크하게 대답하며 에밀에게 다가왔다. 창틀에 앉아 있던 에밀이 손을 내밀자 에단이 그 손을 잡고 창틀로 기어올랐다. 아직 열두 살인 에단에게 창틀은 조금 높았다.

"잘 보이네."

"그렇지?"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한 눈으로 엘리어트가 있을 성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었는데도 아직 성의 곳곳에는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침 달빛이 환해서 창밖의 성은 어딘지 몽환적으로 보였다.

"형은 기사가 될 거야?"

"응?"

갑작스런 에단의 물음에 성을 바라보고 있던 에밀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에단은 무심하게 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전하를 좋아하잖아."

"에단...!"

에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눈치 빠른 꼬맹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에밀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에밀이 시엘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엘이 그렇게 행동했었고, 에밀 역시 그 행동을 부러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 두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애늙은이 같은 꼬맹이에겐 전혀 안 먹히는 연막이었나 보다.

"어떻게..."

"모르는 게 바보라고 생각하는데."

"......"

에밀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까지 티를 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역시 가족이라서 더 빨리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다.

"걱정 마."

"응?"

"내가 작위를 이을 테니까."

에밀이 멍하니 이 무심한 꼬맹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에단이 다시 입을 움직였다.

"형은 하고 싶은 대로 해."

"에단..."

에밀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한테까지 걱정을 끼친 것이 미안했다. 죄책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에밀이 에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에단."

"무슨 소리야? 오히려 내가 고맙지."

"응?"

"공작이 되면 노후가 보장되는 거잖아. 이리저리 구르고 다치고 하는 기사보다야 내 영지를 안전하게 관리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공작 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데."

에밀이 눈을 깜박였다. 지금 저게, 열두 살짜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맞나?

"어차피 형이 공작이 되면 나는 공작가의 차남으로서 국가 소속 공원이 되겠지만, 난 그쪽이랑은 안 맞아. 공작이 되면 크게 사고라도 치지 않는 한 아무도 터치 안 할 것 아냐. 역시 말년을 보내기엔 돈 많은 백수가 최고지."

그렇게 말하는 에단의 눈은 열두 살답지 않게 노숙한 욕심으로 빛났다. 그 짙은 초록빛 눈을 바라보다 에밀은 웃음을 터뜨렸다.

"에단, 너무하잖아. 그렇게 대놓고 말했다가 내가 공작이 되면 어떡할 거야."

"아니, 형은 기사가 될 거야."

"왜 그렇게 자신하는데?"

에밀이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재미있다는 듯 묻자, 에단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창 바깥을 눈짓했다.

"전하도 형을 좋아하니까."

"......"

에밀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에단은 느릿하고 조근하게 에밀이 피하려던 현실만 골라 들이대고 있었다. 다정하다고 해야 할지, 잔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에단은 진심이었다.

"책에서 봤어. 남성 반려의 형식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너... 어디서 그런..."

"이 나이 때 남자애들이라면 다 있는 호기심 아니겠어?"

이 나이 때 남자애들은 그런 식으로 부유한 백수를 꿈꾸진 않아, 라고 얘기하려다 에밀이 못 말리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기 동생이지만 대단한 녀석이었다.

"가장 자주 쓰이는 방법이 작위를 내리는 거. 하지만 이미 작위는 있고. 그럼 국왕 직속 로열 나이트로 승격시키는 게 제일 그럴듯하지. 형은 검에 재능이 있으니까. 측실이나 남첩으로 들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반려라고 말하긴 어렵구."

에밀의 가슴이 따끔해졌다.

측실. 시에리아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가, 아직도 가시가 되어 심장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에밀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에단은 모르는 척했다. 자신이 아는 형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형은 될 거야."

"...하지만..."

에밀이 조금 미묘하게 웃었다. 어딘가 매우 아파 보이는 미소였다. 에단은 에밀이 그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후계를 이을 수 없어."

"......"

에단의 이마가 이번에야말로 살짝 찌푸려졌다.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현재 엘리어트가 결혼한 시점에서 그걸 걱정하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에밀의 자리를 빼앗은 여자 따위, 아이만 낳으면 뒷방으로 몰아내는 건 간단할 텐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며 에단이 고개를 갸웃 했다.

"하지만 전하는 결혼하셨잖아. 아이만 낳으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아?"

"에단..."

에밀의 미소가 더 씁쓸해졌다. 좋아하는 형의 아픈 미소를 보면서 에단은 점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왜? 왕의 반려가 되면 간단한 일인데?

"너 말야, 갑자기 아버지가 모르는 여자를 데려와서 엄마를 내쫓으면 기분이 어떻겠어. 너랑 엄마를 생으로 떨어뜨려 놔도 괜찮아?"

에단의 이마가 이번에야말로 팍, 구겨졌다. 에단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에밀이 기특하다는 듯 에단의 이마를 문지르며 주름을 펴 주었다.

"난 그가 누구랑 결혼하든 상관없어. 다만..."

"?"

에단이 눈을 깜박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에밀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정당하게 그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길 바래. 적어도 속임수나, 거짓말 없이."

'거짓말'이라고 말할 때 에밀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이던 것을, 에단은 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건' 어떻게 할 거야?"

에단이 무엄하게도 턱짓으로 성을 가리켰다. 에밀은 에단이 무슨 얘길 하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에단은 눈치가 빨랐다. 에밀이 시엘과 어울리던 것을 바로 옆에서 보아온 에단은 그녀가 에밀 옆에서만 유독 약한 척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사람이 자신 깊숙이 잠들어 있던 가학심을 한번 깨워 버리면 새벽이 오고 날이 저물어도 멈출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에단은 에밀의 어둡게 빛나는 눈을 보고서 어깨를 으쓱한 뒤, 결론을 내렸다.

괜한 걱정이었네.

"나 졸려."

"잘 자, 에단."

"응. 형도 얼른 자. 전하의 방에도 불이 꺼진 것 같은데."

문을 닫는 소리가 나고, 에밀이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며 침을 삼켰다. 성 쪽으로 눈을 주니 과연 아까까지 반짝이던 불빛이 하나 줄어 있었다. 하여튼 눈치 빠른 꼬맹이라니까. 에밀이 빙긋 웃으며 잘 준비를 했다.

다음날, 오전 업무가 끝나고 살롱에 도착한 엘리어트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곁에 선 비슈나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발을 재촉했다. 아니, 사실은 더 빨리 문을 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혹시, 깨버릴지도 모르니까.

"......"

살롱의 문이 열렸다. 느릿하게 보이는 살롱 안의 풍경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이전에는 있었던 것이 지금은 없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롱의 사각을 훑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오지 않았나. 엘리어트가 은근한 실망에 마음을 적시며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 에밀을 본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어차피 자신은 결혼한 몸이다. 뭘 기대했던 건지. 왠지 스스로가 바보 같아졌다.

"전하?"

엘리어트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뒤통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뻣뻣한 목을 애써 부드럽게 움직이며 엘리어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말린 장밋빛의 머리카락과 여름날 잎사귀 같은 초록색 눈. 유일하게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단 한 사람이, 놀란 눈으로 엘리어트의 제비꽃 색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내가 할 말이다."

여전히 차가웠지만 엘리어트의 분위기는 전보다 미묘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스스로도 그 변화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에밀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저, 오전에 할아버님께 군사학 과외를 부탁드렸거든요.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에 시간이 남아서, 여기서 복습을..."

에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상했다. 에밀에게 근신 명령을 내린 것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은 것도 엘리어트였다. 그러나 에밀이 자신으로 인해 동요하는 것이 기뻤다. 나쁜 취미라고 해도 좋았다. 어쨌든 엘리어트가 에밀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여긴 전하께서 자주 안 오시니까,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들어와. 귀찮지 않을 테니."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이럴 때의 엘리어트는 아버지와 정말 똑같다. 그 단호하고도 다정한 목소리에 에밀이 조금 미소를 지으며 살롱 안으로 발을 디뎠다.

엘리어트가 먼저 카우치에 앉았다. 뒤따라 에밀이 그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아 군사학 교재를 펼쳤다. 어제 잠들었던 곳과 똑같은 자리였다. 엘리어트는 에밀을 신경 쓰지 않고 맞은편 카우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았다. 왕세자 치곤 무방비한 자세였지만 에밀이 곁에 있다면 위험하진 않을 터였다.

한동안 느긋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상황이 어색하거나 불편할 법도 한데, 너무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이라 둘 사이에는 침묵뿐이라고 해도 불편할 일이 없었다. 예전에 아끼던 옷을 옷장에서 발견한 듯한 반가움과 익숙함이 둘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에밀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귀를 간지럽혔다. 눈은 감았지만 귀를 열고 있었던 엘리어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책장 넘기는 소리가 점점 느려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밀의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하기에 최적의 두뇌는 아니었다. 기본적인 지식이나 상식 수준은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에밀은 검을 잡을 때가 가장 생생했다.

살짝 실눈을 떴다. 에밀이 졸음에 겨운 눈으로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에밀이 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에밀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앉은 채 책을 읽다 잠든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고개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데도 차마 함부로 잠들지 못하는 건 어제는 없던 엘리어트 때문이겠지.

엘리어트의 자색 눈동자가 에밀의 눈이 완전히 감기는 순간을 주시했다. 오뚝이 인형처럼 잠시 흔들리던 에밀이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

간발의 차였다.

카우치에서 굴러 떨어질 뻔한 에밀의 머리를 간신히 받아낸 엘리어트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에밀을 일으켰다. 잠들어버린 에밀이 자신의 손 안에 머리를 누이고 평화로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겨우 마음을 놓은 엘리어트가 에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부산스러웠을 텐데도 잠에서 깨지 않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는 나무 위에서 잠이 들었다고 했었지.

엘리어트가 낮게 혀를 찼다. 어깨에 기댄 에밀의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맞은편의 카우치를 찢을 것처럼 노려보면서 엘리어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엉킨다.

바보 같은 게, 안 하던 공부는 하겠다고 해서 머리통을 깰 뻔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차라리 잠시 쉬었다가 하던지, 아니면 잠이라도 깨려고 노력이라도 할 것이지 거기서 그대로 잠이 드는 바보가 어디 있냔 말이다. 엘리어트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머리를 부딪혔을 텐데, 혹시 어디 잘못되기라도 하면-

갑자기 온몸의 피가 차가워졌다.

뒤통수에서부터 올라오는 오싹함에 엘리어트는 불안해진 눈으로 에밀을 내려다보았다. 어제처럼 살짝 벌어진 입술은 그를 유혹하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엘리어트의 눈이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차올랐다. 에밀이 어디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엘리어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그저 밀어내고 미워하는 데만 급급한 자신이 떠오르자 참을 수가 없어졌다. 에밀이 언제든 자신의 곁에 있을 거라고 자신했지만, 사실은 아닐지도 몰랐다. 에밀이 언제 어디서 위험한 일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는 엘리어트의 마음을 끝까지 알지 못한 채일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이 차갑고 모진 모습으로만 남는 것은 싫었다.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진심을-

엘리어트가 흠칫했다.

그럴 수 없다.

적어도 마지막이라도 마음을 알아달라는 바람 따위, 그저 욕심에 불과하다. 그는 에밀이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았고, 차갑고 모진 말은 있는 대로 퍼부었다. 이제와 에밀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뻔뻔한 바람인지.

엘리어트가 차가워진 손끝으로 에밀의 턱을 받쳐 올렸다. 자신을 향하는 얼굴이 가슴 아프도록 사랑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그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함께 있고 싶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의 앞에서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이 아닌 '리트'로서 있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래서, 엘리어트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두 번째로 입술이 겹쳐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엘리어트의 욕망이 침범하며 가지런한 치열을 적셨다. 부드럽게 에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젖어가는 입가를 핥았다. 입술을 벌릴 때마다 달큰한 호흡이 느껴졌다. 사양 않고 그의 체향을 마음껏 들이키며 엘리어트는 머릿속이 완전히 비어 버렸다. 위험하다. 위험할 만큼 달콤했다.

엘리어트의 팔이 에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턱을 받치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뺨을 감싸 쥐었다. 가까워진 체향과 다정한 체온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10년 전보다 농밀해진 키스는 둑을 터뜨리듯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끊임없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엘리어트는 목마르도록 에밀을 원했다.

그래, 그를 원한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으응..."

에밀이 신음처럼 내뱉은 목울음이 아니었다면 엘리어트는 그를 깨워 버렸을지도 몰랐다. 화들짝 놀라 허리를 감쌌던 팔을 풀고 고개를 드는 동시에 에밀이 눈을 떴다. 멍한 얼굴에 타액으로 젖어 반들반들해진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그 짧은 순간에도 엘리어트는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만족감에 스스로도 놀라 버렸다.

"...어...어라? 전하?"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눈으로 에밀이 엘리어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한 초록색 눈동자가 너무 귀여워서 엘리어트는 황급히 미소가 번지는 입을 막았다.

"응? 전하가 여기에? 응? 아깐 분명히...?"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된 듯 횡설수설하며 에밀이 주변을 둘러본다. 다행이었다. 에밀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애써 표정을 다잡은 엘리어트가 헛기침을 하며 짐짓 엄격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렇게 졸면서 무슨 공부를 한다는 거냐."

"우음... 봄이라서 그런가 봐요. 날씨가 너무 좋잖아요."

에밀이 쑥스럽게 웃으며 열린 발코니 창을 가리켰다. 에밀의 말대로였다. 춘곤증이 온다고 해도 탓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은 따뜻함에 엘리어트도 조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데, 제가 왜 전하께 기대고 있는...?"

"죽을 뻔했다."

"...예?"

에밀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엘리어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꾹 다문 입술이 열릴 기미가 없자 에밀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입가가 젖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응...?"

"!"

엘리어트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에밀이 손등으로 아직도 촉촉한 입가를 닦아내더니 의아한 얼굴로 엘리어트에게 물었다.

"전하... 이건...?"

큰일이다.

에밀의 눈이 당황으로 잘게 떨리며 엘리어트를 바라보자 엘리어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싸악 빠져나갔다. 혹시, 눈치 챈 건가?

"그, 그게-"

"설마... 정말...?"

에밀의 입가가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눈치 챘나. 엘리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에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너무 두려워서 그 떨리는 초록색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까. 나를 경멸할까, 아니면 실망할까. 그것도 아니면-

"저, 혹시 침 흘렸어요?"

"......"

맥이 풀린 엘리어트가 이마를 짚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자 에밀이 울상이 되며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창밖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키득거렸다.

* * *

시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좋아하는 터키석 목걸이를 걸지, 이번에 새로 주문한 진주 목걸이를 걸지 고민 중이었다.

"이걸로 할까."

가느다란 손가락이 경쾌하게 진주알을 쓰다듬었다. 시종들이 그녀의 코르셋을 조이고 얇게 분을 바르고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는 동안, 그녀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앉아서 아름다워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조금 짙은 듯한 연다홍의 입술은 약간의 요염함까지 감돌았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살짝 패이는 볼우물이 청초했다. 깜박이는 속눈썹이 평소보다 더 길어 보였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시엘의 눈이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엘리어트 왕세자와 결혼해서 드디어 꿈을 이루었고 디날 최고의 여인 자리에 올랐지만, 엘리어트는 여태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슬픈 일이긴 했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그녀의 자리를 지킬 자신이 있었다. 엘리어트가 지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해도 후계를 위해서라면 결국 그는 그녀를 안게 될 것이다. 이제 겨우 열일곱, 시간은 많았다.

그러니 시엘이 짜증을 느끼는 것은 엘리어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엄청나게 더러운 이야기라도 들은 양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에밀을 떠올리자 그녀의 마음에 다시 엷게 짜증이 치솟았다.

안 되는 것은 빨리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시엘로서는 어차피 반려가 될 수 없는 에밀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은 백 번 양보해서 그에게 측실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왕세자비가 직접 측실로 곁에 있게 해 주겠다는데 그 표정은 뭐야?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시엘이 아카데미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시엘은 곧 자신의 수족이 되어 줄 추종자를 물색했다. 어리고 귀여운 미소녀를 돌봐주겠다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시엘은 아무 감정 없이 고요하게 시엘을 응시하는 에밀의 초록색 눈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에밀의 인맥은 더 마음에 들었다.

엘리어트와 에밀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 온 젖형제라는 것을 알았을 때, 시엘은 좋아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에밀의 곁에 있으면 엘리어트의 눈에 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잘만 하면, 온 나라의 소녀들이 동경하는 디날의 왕자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엘리어트는 시엘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엘은 틈만 나면 엘리어트와 에밀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둘은 소녀를 마치 발에 채이는 귀찮은 돌멩이처럼 여겼다.

한 번도 무시당한 적 없던 소녀가 처음으로 비참함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시엘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찡그려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들이 막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시엘은 수업을 빼먹은 에밀을 찾아다니다 도서관에서 나란히 앉은 그들을 발견했다. 에밀은 엘리어트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고, 깍지 낀 두 손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짝이 맞아 들어가 있었다. 말린 장밋빛의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엘리어트가 에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엘이 짜증스러운 눈을 했다. 비록 에밀이 시엘의 자존심을 짓밟아 놓았지만, 그녀는 에밀이 필요했다.

엘리어트는 에밀을 좋아한다. 그래서 시엘은 둘을 떼어놓기 위해 일부러 모진 현실을 들이댔다. 다행히도 시엘의 계획은 잘 들어맞아서 엘리어트와 에밀은 그 뒤 서로 못 본 척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다음엔 쉬웠다. 엘리어트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에밀과 붙어있기만 하면 되었다.

엘리어트가 에밀에 대한 질투 때문에 자신과 결혼했다는 것을 시엘은 모르지 않았다. 왜 모르겠는가, 그걸 이용한 것이 바로 시엘 본인인데. 그러나 엘리어트가 아무리 에밀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이미 시엘은 그의 아내였다. 에밀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시엘은 여전히 그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시엘에겐 엘리어트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엘리어트가 에밀의 일에 아직도 동요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가시면 됩니다."

"그래."

시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시종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 끝이 카펫 위를 쓸며 나는 사락 소리가 시엘에게는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웠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만족스러운 풍경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발코니가 딸린 다이닝 룸에는 이미 정찬 준비가 끝난 상태였고 금방이라도 쓸 수 있도록 식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반짝이는 은 포크와 나이프를 보며 시엘은 속으로 웃었다. 아직 '손님'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반만 열려 있는 발코니의 문 너머로 부드러운 바람이 드나드는 방 안, 시엘은 참을성 있게 서서 자신의 만찬에 올 손님을 기다렸다. 아마 기다림은 길지 않을 것이다.

"늦지 않았군."

"어서 오세요, 전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미리 열어 둔 문 너머로 엘리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엘이 생크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춰 허리를 숙였다. 살짝 고개를 까닥인 엘리어트가 자리에 앉으려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셋...?"

테이블 위에 세팅된 식기는 세 사람 분이었다. 시엘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전하를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늦어서 미안... 전하?"

시엘이 반가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초록색 눈동자가 방 안에 들어오려다 엘리어트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엘리어트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네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시엘을 향하자, 사이에 낀 시엘이 분위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손을 맞잡으며 생긋 웃었다.

"전하께서 에이몬드 공자와 화해하셨으면 해서요. 마침 좋은 식재가 들어왔으니, 오랜만에 식사도 함께 하시면서 오해를 푸는 건 어떠신가요? 제가 부탁드릴게요."

물론 시엘은 살롱에서 그들이 만났던 것을 모른다. 엘리어트와 에밀 사이에 눈짓이 살짝 오갔다. 지금은 그저, 모르는 척하자.

"저는 괜찮지만, 전하께서 괜찮으실지...?"

"상관없다. 앉도록."

"어머나, 감사합니다."

시엘이 기분 좋게 웃으며 에밀을 자리로 안내했다.

진한 비스퀴 스프와 오렌지 소스를 뿌린 샐러드가 먼저 나오고 얇게 썬 생햄을 얹은 메론과 크렌베리를 곁들인 치킨 로스트가 뒤를 이었다. 파테로 겉을 싼 고래고기 비프 웰링턴은 에밀에게는 처음이라 에밀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파테를 포크로 콕콕 찔러댔다.

"입맛에 맞으시는지요?"

"나쁘지 않군."

엘리어트가 대답하며 파테를 조금 잘라 입 안으로 넣었다. 시엘이 기쁜 듯 웃으며 이번에는 에밀에게 물었다.

"에밀, 아니, 에이몬드 공자는 어때요?"

"고래 고기는 처음이네요. 맛있습니다."

에밀이 마주 웃자 시엘의 눈이 빛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에밀은 고분고분했다. 시엘을 경계하지도, 엘리어트를 필요 이상으로 멀리하지도 않고 분위기도 나름대로 부드럽다. 시엘의 가슴 속에 희망이 일렁였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동기였다고 했지. 많이 친했었나?"

엘리어트가 지나가듯 질문을 던졌다.

물론 엘리어트는 시엘이 에밀과 춤을 추었을 때부터 그녀에 대한 것은 모두 조사했다. 늘 에밀과 붙어 다니는 것도, 에밀이 아카데미 동기 중에 누구와 친한지도 엘리어트는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엘리어트가 알고 싶은 것은 에밀의 마음이었다.

에밀이 시엘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과연 '그 일'이 시엘 때문이었는지도.

"네, 조금..."

"어머나, 조금이라뇨. 에이몬드 공자 덕에 제가 얼마나 도움을 많이 받았는지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오빠처럼 저를 돌봐 줘서 지금도 감사하고 있답니다."

에밀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시엘의 나쁜 버릇이 나오고 있었다.

"전하와도 함께 유년을 보내셨다고 하셨지요? 어렸을 때 에이몬드 공자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엘리어트의 눈이 살짝 차가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다정한 눈으로 에밀을 바라보며 즐거운 듯 아카데미의 옛 추억을 꺼내기 시작하자, 엘리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는 에이몬드 공자와 결혼하는 쪽이 나았을 것 같군."

"어머나..."

시엘이 손가락 끝으로 입을 살짝 막았다. 엘리어트의 질투는 처음이었다.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기분을 숨긴 채 시엘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전하. 제가 너무 들떠서..."

"그래요, 선을 넘으셨습니다."

시엘이 흠칫 놀라 에밀 쪽을 돌아보았다. 에밀이 연어 카르파초를 살짝 덜어 입으로 가져가며 무심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소싯적의 친구라 해도 왕자비 전하께서는 이미 식을 치르신 몸입니다. 안타깝지만 전하의 말씀대로 우정에도 범위라는 것이 있지요."

"......"

시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이 답답할 만큼 숨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차가워졌다. 이렇게 대놓고 핀잔을 들은 적도 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상대가 엘리어트가 아닌 에밀이라는 것이 놀랍고도 당혹스러웠다.

"그, 그렇... 네요. 미안해요, 에이몬드 공자."

"괜찮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셨으니, 이 정도는 넘어가 드릴 수 있어요."

에밀이 익살스럽게 윙크하자 시엘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곁에서 엘리어트는 표정의 변화 없이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지만 시엘을 두둔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에밀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시엘의 머릿속이 다시 엉켜 갔다.

이상했다. 에밀이 저런 반응을 할 것까진 예상했으나, 엘리어트가 너무 침착했다. 시엘의 예상이 맞다면 그는 에밀을 혼내거나 적어도 불쾌한 기분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엘리어트는 시엘과 에밀이 가깝게 지내면 보란 듯이 에밀을 밀어내곤 했다. 지금까지 그를 보아 오면서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가끔 시엘이 에밀의 이야기를 꺼내면 대놓고 동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감정이 일렁이는 눈을 볼 때마다 시엘은 에밀에게 약간의 승리감을 느꼈고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엘리어트의 마음이 바뀐 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엘 쪽으로 기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자꾸만 기대를 벗어나는 상황에 시엘의 눈이 우울하게 가라앉는다. 그것을 지켜보는 에밀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오른 것을 그 자리의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식사 후에는 발코니로 자리를 옮겨 디저트와 차를 즐기며 모처럼의 봄바람을 만끽하는 느른한 시간이 이어졌다.

티타임이 되어서야 시엘은 간신히 원래의 미소를 되찾았다. 블루베리 크림이 든 파운드케이크를 조금 잘라 입안으로 넣으면서 그녀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눈앞에서는 에밀과 엘리어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라고는 해도 엘리어트는 듣는 쪽이다. 에밀이 뭐라고 종알대면 엘리어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을 하는 정도였지만 그냥 보아도 다정한 눈이었다.

시엘은 차를 마시는 척하며 일단 엘리어트가 아직 에밀을 좋아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아직 에밀을 좀더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손을 써 두어야 했다.

시엘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미간을 살짝 좁히는 것은 덤이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시엘의 손을 보자마자 묻는 품이 과연 눈이 빠른 에밀다웠다. 시엘이 가냘프게 중얼거렸다.

"머리가 조금... 아프네요."

"바람을 너무 많이 쐬셨나 봅니다."

"괜찮은가?"

엘리어트조차 고개를 돌려 시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관심이었다. 시엘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실례지만,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하라. 우리도 그만 일어나지."

"그럼, 에이몬드 공자."

시엘이 살짝 손을 내밀며 예의 그 연약한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도 끝까지 하면 참이 되는 법이다. 오랫동안 써 왔던 가면은 시엘의 얼굴에 착 붙어 원래부터 그녀의 얼굴인 것처럼 생생했다.

"전하께선 정무가 있으시니, 방까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전하."

시엘이 눈을 휘며 웃었다. 역시 에밀이었다. 타고난 온화함과 다정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친김에 시엘은 약간 용기가 났다.

"아..."

"전하!"

일어서던 시엘의 무릎이 나른하게 풀리며 작은 몸이 기울어졌다. 에밀이 그녀를 받아내긴 했지만 시엘의 손이 엎지른 홍차가 테이블 위로 뚝뚝 흘렀다.

엘리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밀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그 얼굴은 분명 파리했지만 그녀를 당연한 듯 받아내는 에밀을 보는 것은 역시 짜증나는 일이었다. 속이 울컥하며 제비꽃 색의 눈동자가 다시 차가워지려는 순간, 에밀이 기겁을 하며 시엘을 놓더니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렁찬 목소리가 발코니를 울렸다.

"죄송합니다!"

"...?"

"제 불찰로 전하께 폐를 끼쳐 드렸습니다!"

시엘의 눈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얘 왜 이래?

"전하의 드레스가..."

"아."

그 말대로였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붉은 갈색의 찻물이 뚝뚝 떨어져 최고급 비단이 엉망이 되어 갔다. 시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지만 그것은 드레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대로 방까지 전하를 모시다가 제 부주의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번에는 접근금지 명령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에스코트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겨우 드레스 한 벌 망친 걸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 싶지만 귀족들 중에 심한 경우에는 마실 물이 너무 차갑다는 이유로 하녀를 해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시엘이 그런 류가 아니라는 것은 에밀이 더 잘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왕자비가 되었다면, 이런 일에 호들갑을 좀 떤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곁에서 엘리어트가 그 광경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에밀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저렇게 필요 이상의 예를 차린다고 하기에는 에밀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충성'이라는 딱 한 글자만 새긴 듯이 우직한 눈동자가 시엘의 얼룩진 드레스를 바라보며 이글거렸다.

시엘은 정말로 머리가 아파졌다. 얘 진짜 왜 이래?

"그도 그렇군."

"저, 전하?"

"비슈나, 비를 방까지 안전하게 모셔라. 에이몬드 공자는 그만 일어나고. 고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괜찮다고 했다."

마지못한 듯 에밀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시엘은 두 번째로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에 놀란 눈만 깜박거렸다. 엘리어트의 시종장 비슈나가 조용히 들어와 그녀를 모시자, 시엘은 멍하니 그를 따라 발코니를 나갔다.

둘만 남은 발코니에 어딘가 썰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엘리어트가 냅킨으로 살짝 입가를 누른 뒤, 여전히 곁에 선 에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괜찮다."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거냐?"

에밀이 조금 고개를 들어 엘리어트를 바라보았다. 상처 받았다기보단 침통한 표정이었다.

"...전하, 혹시 예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무, 무슨 일 말이냐?"

에밀이 예전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살짝 당황한 엘리어트가 말을 더듬었지만 에밀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카데미에서 독이 든 초콜릿을 받았던 적이 있었지요."

"...아아."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어트의 눈이 흐려졌다. 에밀이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에밀이 익명으로 초콜릿 한 갑을 받았는데 그 안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에밀이 엘리어트와 초콜릿을 나눠 먹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질 나쁜 암살이었다. 다행히 엘리어트가 그 초콜릿을 먹지는 않았지만, 먹었다면 에밀도 함께 저승길 길동무가 될 뻔했다. 그날 에밀은 하루종일 엘리어트와 함께 지내야 했다. 엄청난 수의 호위 기사들도 함께. 그 안에는 할아버지인 발로아 대공과 아버지인 이아스, 심지어 이아네도 있었다.

그때 엘리어트는 왕자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일그러진 얼굴로 내내 에밀의 곁에 붙어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한 왕이 되겠다고 속삭이며 에밀을 끌어안고 놓지 않아서, 결국 그날 에밀은 엘리어트의 방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그때, 전하는 저를 지켜주시겠다고 했지만 저 역시 전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

"기사단에 들어가고자 한 것도, 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다만..."

에밀이 슬픈 눈을 했다.

"찻잔이 넘어지는 짧은 순간에도, 사람의 목은 노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의 실책이 더욱 커 보이는 것입니다."

에밀은 지금 정확하고 똑바른 경어를 쓰고 있었다. 깊고 올곧은 초록색 눈동자는 아름다운 고뇌로 얼룩져 있다. 엘리어트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간 끌어안아 버릴 것 같았다.

계속 밀어내고 모질게 대했는데도, 에밀은 이렇게나 확실하게 엘리어트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에밀의 태도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의 똑바른 눈에 엘리어트는 점점 약해졌다.

그에 비하면 엘리어트는 너무나 유치하게 굴었다. 차갑게 굴면서도 그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아서 생떼를 부렸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여자를 빼앗아 관심을 받고 싶었다. 엘리어트가 에밀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깨달았다고 해도, 너무 늦었다. 이제 다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엘리어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에밀."

에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엘리어트가 에밀을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반가움 반 의문 반으로 복잡해진 눈이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엘리어트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고맙다."

"!"

에밀이 감격한 얼굴로 환하게 웃자, 엘리어트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유려하게 올라가는 입술에 에밀이 잠시 넋을 놓았다가 문득 앞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정신을 차렸다.

"제 이름을... 불러주셨네요."

"...아아."

엘리어트가 다시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에밀에겐 뒤통수만 보일 뿐이지만 목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한 얼굴을 그대로 보이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네가 불러주었으니까."

"예?"

"아무것도 아니다."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라 잘 듣지 못한 에밀이 반문했지만 엘리어트는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가라앉혔다.

"저, 그렇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

엘리어트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에밀이 드디어 평소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에클레어, 하나 더 먹어도 될까요?"

엘리어트가 눈을 깜박이다 피식 웃으며 에클레어와 티라미수가 담긴 디저트 접시를 에밀 쪽으로 밀었다.

"다 먹어도 된다."

"헤헤, 잘 먹겠습니다."

크림을 묻히지 않게 조심하며 에클레어를 깨문 에밀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