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거짓말의 미소 (20/27)

2. 거짓말의 미소

한 달 후, 디날의 유일한 왕세자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의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새로운 디날의 반려가 될 시에리아 니스비 버셋 후작 영애는 엘리어트의 곁에 서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환호하는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정작 엘리어트의 얼굴은 그다지 환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둘은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발코니에 선 두 부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경사가 모두에게 즐거울 수는 없는 법이었나 보다.

"...후."

공작가의 장남으로서 결혼식에 참석한 에밀이 목을 조이고 있는 카라에 손을 넣어 살짝 느슨하게 만들었다. 어두운 적갈색의 재킷은 붉은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고 늘씬한 허리에 빈틈없이 딱 떨어지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갑갑했다.

"괜찮니, 에밀? 불편해 보이네."

"아... 셔츠가 조금 끼네요. 키가 컸나 봐요."

옷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에밀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며 에밀이 흘끔 왕좌 쪽을 바라보았다.

현왕 레뮤엘의 곁에 앉아 있는 이는, 자신의 삼촌이자 레뮤엘의 반려인 이아네 월터 발로아 공작이다. 검술 훈련을 할 때는 매일 마주쳤던지라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면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언제 봐도 사이가 좋아 보이는 한 쌍이었다.

이아네가 살짝 레뮤엘에게 뭐라 말을 건네면, 레뮤엘은 무표정이나마 그의 목소리를 열심히 듣다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그가 팔불출이라는 소문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집에도 하나 있는데.

에밀이 고개를 돌리자 이아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소녀처럼 반짝반짝한 눈으로 뭐라 열심히 수다를 떠는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이아스 역시 부드럽게 그녀의 말을 들어주며 마주 웃었다. 속이 쓰려왔다.

도대체가, 다 큰 아들 앞에서 이게 무슨 닭살들이야. 에밀이 한숨을 내쉬는데 어느새 다가온 에단이 옆에서 시크하게 중얼거렸다.

"보러 안 가?"

"응?"

"전하 '부부'가 첫 춤을 마쳤어."

어느새 음악이 끝나 있었다. 에밀이 고개를 돌리자 첫 춤을 추고 자리로 돌아오는 왕세자 부부가 보였다.

지끈, 하고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아파왔다.

"고마워."

에밀이 에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연회장에 마련된 식탁에서 스콘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어머, 에밀!"

에밀을 먼저 알아본 것은 시엘 쪽이었다.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에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우아하게 입을 맞추고, 에밀이 수없이 연습한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려요."

"고마워, 에밀. 아, 아니지. 에이몬드 공자."

실수한 것이 부끄러운 듯 시엘이 살짝 웃었다. 에밀이 괜찮다는 듯 마주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엘리어트가 묘하게 차가운 표정으로 에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밀이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음."

대답인지 아닌지 모를 침음성이 들려왔지만 에밀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랜만에 보는 엘리어트는 살짝 마른 것처럼 보였다.

"전보다 마르셨습니다...?"

"바빴다."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것만으로도 엘리어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에밀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몬드 공자, 다음 곡은 저와 추시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전하께서..."

"상관없다."

엘리어트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락을 내렸다. 성격이 급하다기보다, 에밀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밀이 특유의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살짝 윙크를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에밀이 시엘과 왈츠를 추는 동안, 엘리어트의 눈은 날카롭게 그들을 훑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엘의 손과 허리를 잡은 에밀을.

엘리어트의 성인식 때도, 에밀과 시엘은 춤을 추었었다.

"...흥."

손가락에 걸린 샴페인 잔을 한 바퀴 돌리며, 엘리어트는 경멸과 우월과 상처가 섞인 눈으로 춤을 추는 남녀를 바라보았다. 시엘이 에밀보다 키가 작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에밀은 시종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떠냐, 에밀. 네가 사랑했던 여자는, 이제 내 것이다. 다시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두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엘리어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치며 보랏빛 눈동자가 짙은 청색을 띠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에밀은 엘리어트에게 동생 이상이었다.

엘리어트가 처음으로 에밀을 만났을 때 에밀은 겨우 네 살이었지만, 에밀은 그 어떤 사람보다 스스럼없이 일곱 살의 엘리어트에게 다가왔다. 발음도 잘 되지 않는 혀짤배기소리로 형아, 라고 부르던 에밀을 처음부터 엘리어트에게 특별했다.

엘리어트가 에밀을 만난 뒤로 그의 유년은 늘 에밀과 함께였다. 에밀이 다섯 살이 될 때부터는 엘리어트가 고집을 부리며 검술 수업뿐 아니라 철자, 역사, 산수 등 성에서만 배울 수 있는 교습에 에밀을 끌고 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엘리어트가 열 살쯤 되었을 때는 그 나이 때의 남자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둘이서 온 성을 헤집고 다녔다. 지름길과 비밀 통로, 시종 숙소나 북쪽 탑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곳을 탐험하거나 몰래 성의 주방에 들어가 간식거리를 꺼내 먹기도 했다.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참 열심히도 따라오던 빨개진 얼굴이 떠오르자 엘리어트가 살짝 눈을 감았다. 그래.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름다웠고, 소중한,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던 시간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엘리어트가 눈을 떴다.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자색의 눈동자가 표정 없이 연회장을 내려다본다.

'그 일'을 기점으로, 엘리어트는 에밀을 일부러 피했다. 열다섯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정식으로 디날의 왕세자로 책봉되고 레뮤엘이 간단한 국정에 대한 부분을 엘리어트에게 맡기기 시작한 뒤부터는 에밀과 거의 만나지도 못했다.

한때는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이제 잊을 거라며 겨우 다독였던 심장은 그의 성인식 연회에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에밀이 아름다운 후작 영애와 춤을 추는 순간 다시 조각났다.

...반쯤은 오기였다.

시에리아 영애를 에스코트하며 연회장을 누비던 에밀이 밝게 웃는 것이 매우 짜증나서, 엘리어트는 그녀를 빼앗고 싶어졌다. 마침 버셋 후작가라면 나쁘지 않은 집안이다. 성인식 이전에도 그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오갔기 때문에 엘리어트가 마음을 정하자 진행은 빨랐다.

시에리아 영애와의 약혼을 직접 에밀에게 전했을 때의, 그 표정이라니.

늘 웃고 있던 얼굴은 그때 처음으로 충격을 받아 일그러졌다. 에밀에게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던 괴로운 얼굴을 보면서 엘리어트는 어두운 만족감에 조금 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엘리어트가 샴페인 잔을 꾹 쥐었다. 춤이 끝나고, 시엘을 에스코트하며 엘리어트에게 다가온 에밀이 한껏 아쉬운 얼굴로 엘리어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도 뵐 수 있겠습니까?"

에밀의 눈이 엘리어트를 향했다. 그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 엘리어트가 싸늘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정의 범위는 여기까지다."

"...그렇겠지요."

에밀이 짓는 미소가 슬퍼 보였지만 엘리어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엘이 살짝 엘리어트의 눈치를 보았지만 에밀은 다시 조용히 허리를 숙이곤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전하, 에이몬드 공자는..."

"안다. 그대와 아카데미 동기일 뿐이지."

"그럼..."

엘리어트가 시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겁먹은 청록빛 눈이 살짝 떨렸다.

"난 그를 좋아하지 않아. 그걸로 됐나?"

"예..."

시엘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어트는 다시 무심하게 샴페인을 마시며 다시 시작된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는 남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군중 속에서도 말린 장미 빛의 붉은 머리카락을 찾느라 시엘의 숙인 고개 아래 희미한 미소를 눈치 채지 못했다.

모두가 걱정하던 시에리아 세자비는 다행히도 성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뮤엘이나 이아네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식사를 함께할 때면 의외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한창 깨가 쏟아져야 할 부부 사이는 꽤 냉정했다. 엘리어트는 초야 이후 단 한 번도 시엘의 침실에 가지 않았고, 그녀에게 친절하긴 했지만 웃어 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 너무 티 나도록 차가운 얼굴에 레뮤엘이 주의를 준 적도 있었지만 엘리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얼버무릴 뿐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시엘은 잘 견뎠다. 그냥 보기만 해도 보호본능이 솟구칠 만큼 가녀린 몸이라, 그 엘리어트라고 해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카데미 친구들을?"

디날의 왕세자비가 정해진 지 이 주일, 그 날의 국정 업무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엘리어트는 뜻밖의 이야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수업 후에 잠시라도 좋으니까요."

엘리어트가 살짝 찌푸린 무표정으로 눈앞에 선 자신의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순금처럼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금발이 하얗다 못해 투명한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다. 살짝 눈꼬리가 처진 눈과 작은 콧망울이 얼핏 어린아이를 연상케 했다. 분홍빛 색료를 바른 입술이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엘리어트를 올려다보며 그의 허락을 갈구하듯 눈을 빛냈다.

그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가 귀여울 법도 한데, 안타깝게도 엘리어트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구를 얘기하는 거지?"

"음, 메이벨 백작 영애와 라우드 자작 영윤, 그리고 에밀... 아니, 에이몬드 공자 정도?"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하나씩 읊는 입술이 작은 새의 부리처럼 움직였다. 엘리어트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상관없다. 그 정도는 왕세자비의 권한이야. 일일이 허가받을 필요는 없어."

"감사해요."

시엘이 생긋 웃으며 엘리어트의 팔을 감싸 안았다. 부부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지만 엘리어트는 그녀가 이렇게 사심 없이 다가올 때마다 왠지 안쓰러워졌다.

그녀에겐 죄가 없다. 에밀과 친하다는 것만으로, 엘리어트는 그녀에게서 친구와 일상을 빼앗은 것이다. 그 정도는 허락해 줘도 괜찮겠지.

"...나도 참, 무르군."

"예?"

"...아니."

엘리어트가 고개를 저으며 침대로 가자, 시엘이 쪼르르 따라붙었다. 엘리어트가 또 뭐냐는 듯 시엘을 내려다보았다.

"...아."

깨달았다. 그녀와 자신은 '부부'였다. 같은 침대를 쓴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는.

그러나 엘리어트는 에밀의 이름을 들은 이상 그녀와 함께 침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의 팔을 끌어안은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며 에밀이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군. 오늘은 이만 쉬고 싶은데."

"...죄송해요.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시엘이 얼굴을 붉히며 방을 나갔다. 엘리어트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라는 것이 사랑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다행히 시엘도 엘리어트를 귀찮게 하지 않았으므로 엘리어트는 나름 이 생활도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들었었다. 다음날 저녁, 방으로 돌아가던 길에 에밀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전하."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비전하께서 부르셨습니다."

"...아아."

변함이 없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고수머리도, 맑고 올곧은 초록색 눈동자도. 모두가 엘리어트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자신만 변했다. 자신의 지위도, 의무도, 상황도.

"...오랜만이군."

"네."

에밀이 반가운 눈으로 엘리어트를 바라보며 웃는다. 엘리어트의 입술이 희미하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이야기는 아카데미를 통해 듣고 있다. ...기대되는 인재라고."

거짓말이다. 에밀에 대한 것은 빠짐없이 모두 알고 있었다.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어서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군사학에서 자꾸 점수가 깎여요. 선생님이 제발 기본점수라도 나와 달라고 애원을 하세요."

"...기사라면 공부하도록 해. 군사학 기본점수도 안 나오는 기사는 필요 없다."

"윽, 너무하세요. 열심히 하고 있다구요. 참, 저 지난번에 검술 대련에서 5점 연승을 따내서-"

에밀의 초록색 눈에 생기가 돌았다. 역시 무가의 핏줄이라는 건지, 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즐거워 보였다. 예전부터 그랬다. 확실히, 너는 변한 게 없군.

조금 풀어진 얼굴로 엘리어트의 미소가 짙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달칵.

"에밀? 안 들어오고 뭐 해? 어머나, 전하!"

시엘이 문 앞에 선 둘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에밀이 밝게 웃으며 시엘에게 손을 흔들자 엘리어트의 가슴이 다시 아파왔다.

"어서 들어와. 전하도 함께 하시겠어요?"

"아니. 그만 가 봐야겠군."

시엘이 아쉽다는 얼굴을 했지만 엘리어트는 인사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에밀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엘리어트는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추었다.

깊게 감추어 둔 마음이었는데,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에밀을 마주한 순간 엘리어트의 결심은 여름날 얼음처럼 녹아 버리고 말았다. 본분을 망각한 채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어차피 이제 끝난 일이다. 에밀에게서 그녀를 빼앗았으니 원망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엘리어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꺄악!"

엘리어트의 눈이 커졌다. 허겁지겁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고 거칠게 밀자, 방 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전하?"

에밀이 카우치 위의 시엘에게 몸을 숙이고 있다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아래 눈에 약간 눈물이 고인 시엘이 엘리어트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발치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귀가 멍멍했다. 뇌를 잠식해 가는 분노가 에밀을 향한 것인지 시엘을 향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채로, 엘리어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 주겠나, 발로아 공자."

엘리어트가 에밀을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불렀다. 지금 그가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에밀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저었다.

"전하, 그게 아니라-"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나."

엘리어트가 성큼 걸어가 에밀의 앞에 섰다. 분노로 불타는 보랏빛 눈동자에 에밀이 울상을 지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저-"

"전하, 제가 부탁했습니다."

시엘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여전히 에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제가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앞이 안 보이는 바람에, 바보같이 손에 찻잔이 걸려서..."

그제야 엘리어트가 눈동자를 움직여 티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하얀 자기 찻잔이 찻물에 젖은 채 산산조각으로 깨져 있다.

"전하, 전 아무것도-"

"닥쳐. 넌 그대로 근신이다."

에밀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엘리어트는 왕이 될 자로서의 기품을 지킬 줄 알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면 지금은 그 어떤 변명도 소용없다는 것을 에밀이 가장 잘 알았다.

"일부러 그러는 거냐?"

"...네?"

"네 여자를 빼앗긴 게 분한가?"

"...전하."

에밀의 눈동자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 변화가 엘리어트를 더욱 화나게 했다. 차라리 화를 내. 차라리 소리를 질러. 그딴 인형 같은 표정 짓지 마!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녀는 내 여자다."

"...압니다. 충분히."

"아니, 모르는 것 같군."

엘리어트가 흘끔 겁에 질린 시엘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흠칫 몸을 움츠리자 엘리어트가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엘리어트에게 안기게 된 시엘이 두려움 섞인 눈으로 엘리어트를 올려다보았지만 엘리어트는 여전히 에밀을 노려보고 있었다.

에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 반응을 눈치 챈 엘리어트가 오만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나가. 티타임은 끝났다."

"전하, 저는 정말-"

"죄가 없지. 안다. 허나 그녀는 디날의 안주인이 될 몸. 그러니 더욱, 분수를 알아야 하지 않겠나?"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가 에밀에게 명령했다.

"당장 나가. 그녀가 누구의 것인지, 네 눈으로 보고 싶지 않다면."

에밀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엘리어트에게 달려들 것 같았지만 에밀의 꽉 쥔 주먹은 바지 옆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에밀이 나간 뒤, 엘리어트가 시엘을 안은 팔을 풀었다. 눈을 깜박이며 시엘이 당황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전하,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에밀은 저를..."

"이 이상."

엘리어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시엘의 입을 막았다.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시엘의 눈이 흐릿해졌지만 엘리어트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텅 빈 방과 깨진 찻잔을 내려다 보던 시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검끝이 대기를 예리하게 가르며 붕 소리를 냈다.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휘둘러 온 짧은 목검이 검법의 기본 초식을 정확한 궤적으로 그려냈다. 땀에 젖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고 셔츠가 축축해졌지만 검은 멈추지 않았다. 윙, 소리가 다시 공기를 갈랐다. 앞으로 깊게 찌른 검이 길게 사선으로 흐르며 크게 원을 그리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에-밀!"

"테리!"

뒤돌아본 에밀이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친구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주황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만큼이나 환한 웃음의 테리가 발로아 가의 정원에 비스듬히 서서 손에 든 쿠키 상자를 들어 보였다.

"한 달이나 근신이라니, 외로울까봐."

"뭐야, 혹시 네가 외로웠던 거 아냐?"

"음, 노코멘트."

"하하, 들어와."

에밀이 반갑게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에밀의 방으로 들어선 테리가 살짝 고개를 갸웃 하며 에밀에게 물었다.

"왜 커튼을 쳐 놨어? 어둡게."

테리의 말대로였다. 정면과 측면에 커다란 창문이 있었지만 에밀은 측면의 창문에 커튼을 쳐 두고 있었다. 에밀답지 않은 짓이라, 테리가 에밀을 돌아보자 에밀이 어깨를 으쓱하며 침대에 앉았다.

"동쪽 창문은 해가 너무 빨리 뜨잖아. 아침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에밀이 투덜대며 테리가 가져온 피칸 파이를 한입 깨물자 테리가 낄낄 웃었다.

"헤에, 에이몬드 렉스 발로아가 늦잠을 잔다고?"

"이럴 때라도 자 둬야지. 합법적인 땡땡이 중이니까."

"부럽다아, 나도 근신이나 먹을까. 대체 전하께 무슨 짓을 했길래 한 달이나 근신을 먹어?"

"간단해. 아무것도 안 했어."

"...잉?"

테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에밀은 쓰게 웃으며 손가락에 붙은 파이 조각을 핥았다. 테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이 가져온 뉴스를 전했다.

"그보다, 얘기 들었어?"

"응?"

"시엘이 임신할지도 몰라."

상자에서 꺼낸 체리 타르트를 막 베어 물던 에밀의 입이 잠시 멎었다. 그러나 테리는 심각하게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기느라 그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아버지가 성에 들렀다가 궁관들이 하는 얘길 들으셨대. 요즘 전하와 사이가 달달하다던데."

에밀이 입을 움직였다. 어금니 사이로 체리 타르트가 짓이겨지며 달콤한 과즙이 흘러나왔다.

"그 시엘이, 맨날 넘어지고 울고 다치던 시엘이 임신을 하다니 왠지 너무 낯설지 않냐?"

"그...러네."

에밀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제대로 된 표정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냐?"

"뭐... 축하드릴 일이 하나 더 생기겠네. 난 근신이라 못 가지만."

에밀이 농담을 하며 웃었다. 입꼬리 끝이 살짝 경련하는 것을 모른 척하며, 테리가 속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시엘을 진짜 좋아했구나.

괜히 얘기했나. 그러나 에밀의 근신이 풀리고 아카데미로 돌아오면 알게 될 터였다. 그러고 보면 차라리 이런 시기에 근신인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지금 아카데미는 하루 종일 그 얘기뿐이니까.

"역시 그 정도 미모면 제아무리 얼음의 후계자라도 살살 녹아버리는 걸까."

"전하가?"

"응. 꽃이나 보석을 사 주시기도 하고, 국왕 폐하 내외와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하고. 시엘이 자주 찾아가는 쪽이라곤 하지만, 전하께서도 자주 찾아 주신다네. 이대로라면 디날의 후계도 곧이지 않겠냐며..."

에밀의 웃는 얼굴에 미미하게 금이 갔다. 테리가 살짝 에밀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응?"

에밀이 멍하니 테리를 바라보자, 테리가 살짝 눈짓했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자, 주먹 안에 뭉개진 체리 타르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렇게 맛이 없었어?"

"엇, 미안, 아니, 맛이 없는 게 아니고..."

에밀이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테리가 모르는 척 웃으며 에밀에게 손수건을 던졌다. 손을 닦아내며 생각에 잠긴 에밀을 내버려두고, 테리는 새 파이를 꺼내 물었다.

잠시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밀이었다.

"저기, 테리."

"응."

"근신이 풀리면, 같이 시엘을 만나러 갈래? 리디아도 같이."

"응? 야, 너..."

"괜찮아.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을 거야."

고개를 든 에밀이 평소처럼 웃었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살짝 처진 눈썹과 입술이 그리는 부드러운 호선에 결국 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전하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너희들이 있으면 괜찮아. 지난번엔 둘이 있다가 당한 거니까."

"응?"

테리가 문득 이상하다는 듯 에밀을 바라보았다. 에밀의 수사법이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심각한 분위기에 미안한데, 이런 말 해도 돼?"

에밀이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손짓하자 테리가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에밀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테리가 가까워지자 에밀이 조용하고 묵직하게 속삭였다.

"나 그거 한 입만."

에밀이 테리의 손에 있는 한 입 베어 문 레몬 머랭 타르트를 가리켰다. 맑은 초록색 눈동자가 간절하게 테리를 마주보자 잠시 고민하던 테리가 손을 내밀었다.

"다 먹어. 치사한 자식."

"헤헤, 고마워."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안 줄 수가 없잖아."

테리가 분하다는 듯 눈을 흘기며 행복하게 타르트를 입 안 가득 물고 우물거리는 에밀을 바라보았다. 고수인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 없는 녀석.

어깨를 으쓱하고, 테리는 아까의 의심을 완전히 잊어버린 뒤 쿠키 상자를 뒤적거렸다.

에밀의 근신이 풀린 것은 그로부터도 닷새 후였다. 오랜만에 아카데미에 나온 에밀이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일상으로 돌아간 것도 잠시였다.

"오늘?"

"응. 오늘."

에밀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테리와 리디아가 얼굴을 마주보았다.

"물론 같이 가자고 얘기하긴 했지만... 꼭 오늘 가야 해?"

"응. 시엘에게 할 얘기가 있어."

둘이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에밀의 초록색 눈은 검을 들었을 때처럼 깨끗하고 확실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에밀이 평소엔 순한 듯해도 한번 고집을 피우면 꽤 골치가 아프다는 것을, 둘은 7년 동안 그의 곁에서 함께하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치만 전하나 비전하를 뵈려면 적어도 하루 전부터 알현을 신청해야 해."

"괜찮아. 비전하는 우연히 만날 거니까."

"...응?"

"알현 신청은 삼촌에게 할 거야. 4촌 이내 직계니까 신청은 당일에 해도 상관없어."

테리가 입을 딱 벌렸다. 리디아는 반대로 입을 다물었다. 에밀의 삼촌이 누구인지는 아카데미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무려 디날의 국왕 레뮤엘의 반려다. 말하자면 디날의 왕비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공식 행사 때나 볼 수 있는 구름 위의 사람을, 에밀은 마치 오늘 저녁 어머니가 한 비프스튜를 갖다 줘야 하는 옆집 삼촌처럼 얘기하는 중이었다.

그래, 매일 얼굴 마주치고 파이 한 조각에 아웅다웅하는 사이라 까먹고 있었지만 인맥으로 따지면 왕국 내에 에밀을 능가할 자가 없다는 걸 깜박했다.

"발로아 공을?!"

"빨리 얘기해. 갈 거야?"

세 번째로 얼굴을 마주본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갈래!"

에밀이 빙긋, 친구들을 향해 애정이 담긴 미소를 보냈다.

* * *

거울 앞에 선 시엘이 살짝 몸을 틀며 새로 산 드레스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순금 같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고정시킨 커다란 진주 핀과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터키석 목걸이는 화려하고 우아하게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생긋,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시엘이 하얀 비단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렸다.

"후후."

시엘의 눈이 반짝였다. 대륙 너머에서 건너온 비단 장갑은 마치 끼지 않은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장갑 위로 끼워진 반지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한순간에 앗아갈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다섯 가지 색으로 빛나는 오팔과 맑은 보랏빛의 자수정, 정교하게 세공된 청금석이 가느다란 손가락 위에서 한껏 빛이 났다. 시엘이 손을 뻗어 시종이 받쳐 든 보석함에서 새로운 반지를 꺼냈을 때, 갑자기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 공께서 데이나 룸으로 급히 부르십니다."

"발로아 공께서?"

시엘의 눈에 한순간 긴장이 스쳐 갔다. 청록색 눈동자가 보석함을 눈짓하자 시종이 보석함에 테이블 위로 흩어진 패물들을 정리해 넣었다.

"바로 가겠다고 전해라."

긴장되긴 했지만 시엘에게 있어 그는 엄연한 윗사람이었다. 엘리어트가 곧 후계를 잇게 되겠지만 대관식 전이므로 현왕은 레뮤엘이었다.

시엘이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데이나 룸은 성에 마련된 수많은 응접실 중 하나였는데, 레뮤엘이 특별히 반려를 위해 델토르의 양식으로 꾸며둔 곳이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하얀 자작나무로 만든 문은 멀리에서부터 눈에 확 띄었다. 시종이 조용히 시엘의 도착을 알리자, 바다 물결과 잎사귀가 새겨진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시엘이 약간 긴장했다. 함께 식사한 적은 있지만, 독대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순히 이아네가 바빠서인 탓도 있겠지만 시엘은 그를 대하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이쪽으로."

카우치에 앉아 있던 이아네가 시엘을 발견하곤 느긋하게 앉을 곳을 권했다. 그 눈동자가 누군가와 매우 많이 닮아 있어서, 시엘은 살짝 그의 시선을 피하느라 이아네가 그녀의 등 뒤로 손짓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풍성한 치마의 레이스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시엘이 우아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짜잔!"

"히익!"

갑자기 어깨를 치는 감촉에 깜짝 놀란 시엘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자, 테리가 낄낄대며 무엄하게도 왕자비의 말랑한 뺨을 꼬집었다.

"테, 테리?"

"오랜만이야, 왕세자비 전하!"

"리디아!"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가 천장 높이 치솟았다. 아름다운 얼굴 전체에 환한 미소가 번져가자, 이아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됐니?"

"네, 고마워요."

익숙한 목소리에 시엘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이아네의 곁에 서 있는 에밀이 보였다. 그녀의 청록색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에밀, 괜찮아? 근신은..."

"어제까지였어. 걱정했었어?"

"응, 이제 나와도 괜찮은 거야?"

"응."

시엘이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에밀도 그녀의 웃음을 마주본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미소에 시엘은 살짝 안심했다.

"너를 즐겁게 해 주고 싶다고 해서, 조금 놀라게 했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오랜만의 우정을 위해 이아네가 자리를 비우자 넷은 예전처럼 둘러앉아 쿠키와 파이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아카데미의 대머리 선생님 이야기나 성적에 대한 것 등 소소한 이야기였지만 그녀에겐 오랜만의 일상이었을 터였다.

시엘에게 시간은 많았지만 그녀의 친구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짧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엘리어트를 맞이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 정도가 다였다.

"아쉽네. 다음엔 일찍 올게."

"응, 꼭이야. 그땐 내가 초대할게."

시엘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시엘."

"...?"

"가기 전에, 잠시 시간 좀 내 줄래? 중요한 얘기야."

리디아가 테리에게 살짝 눈짓했다. 그러나 테리는 고개를 저었다. 테리도 모르는 얘기였다.

"얘기? 그건 다음에..."

"전하께서는 날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셔. 테리나 리디아는 몰라도 난 초대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에밀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엘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테리와 리디아는 눈빛을 교환하곤 방 바깥에서 기다리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에밀이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행복하니?"

"응! 행복해! 전하께서도 정말 잘 해 주시고, 폐하도 정말-"

활짝 웃는 시엘의 목소리를 에밀이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끊어냈다.

"날 이용해서, 정말로 행복해?"

"......"

시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부정해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에밀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다름없었지만, 여동생을 보는 것처럼 부드럽고 온화하던 초록색 눈은 차가웠다.

"무슨 소리를..."

"난 너를 7년 동안 봐 왔어.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쯤 모를 리 없거든."

에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시엘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결혼식 때 에밀과 춤을 추면서 지었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에밀에게 고운 입술로 그렇게 말했었다.

'성인식 때 함께 춤춰줘서 고마워. 덕분에 전하께서 날 봐주셨어.'

"네가 그분과 결혼하든 아이를 가지든 상관없어. 내가 도와준 것도 아니지만 도와주는 거라도 신경 안 써. 아니, 오히려 아이가 생긴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 말대로 디날의 후계는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시엘의 눈빛에 살짝 귀찮음이 섞였다. 에밀의 손아귀에 힘이 강해졌다.

"그렇지만 그분을 속이는 짓은 그만둬."

"에밀."

시엘이 평소의 백치미 넘치는 눈으로 돌아왔다.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에밀의 눈동자에 비쳤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건 실수였어. 내가 덤벙대는 바람에 찻잔이..."

"시엘, 그러지 마. 넌 충분히 아름답고 왕비로서의 자격도 갖췄어. 좋은 집안에 아이도 낳을 수 있어. 하지만 난..."

에밀이 악문 잇새로 짓씹듯 한 글자씩 내뱉었다.

"할 수 없어. '네 말대로'."

"......"

드디어 시엘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에밀의 괴로운 얼굴을 보면서도 그녀의 눈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렇다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네 몫이야. 거기에 날 이용하지 마."

"안 되잖아."

에밀이 고개를 들었다. 시엘이 다시 또박또박 되풀이했다.

"안, 되잖아."

"...뭐?"

"안 된다구. 무슨 짓을 해도, 전하께서 날 안지 않으신다구."

에밀이 살짝 입을 벌렸다. 시엘이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스코트할 때 외엔 손도 안 잡아 주시는걸. 초야에도 와인을 너무 많이 드셨다며 그냥 주무셨단 말이야."

시엘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며 팔짱을 끼었다. 에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초야도 치르지 않았다고? 엘리어트가?

"그치만 에밀이랑 있을 때는 달라. 그때 안아주시는 거, 너도 봤지? 에밀이 조금만 도와주면 나 잘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어차피 내가 세자비가 된 김에 조금만 더 도와주면 안 돼?"

"뭐...라고?"

에밀의 동공이 커졌다. 시엘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듯 짝, 손뼉을 쳤다.

"그래, 전하께서 왕이 되시면, 그땐 너를 측실로 들여도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내가 특별히 잘 말씀드려 볼게. 아마 전하께서도 좋아하실 거야."

에밀의 미간이 한껏 좁혀지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모욕적이었다.

"시...엘!"

"화내지 마, 에밀."

시엘이 짐짓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에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널 이용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그치만 전하께서 선택하신 건 결국 나잖아. 그분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네가 무슨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는 디날의 후계를 이어야 하는 사명이 있어. 에밀이 도와줘서 내가 임신하게 되면, 그것도 발로아 가의 영광 아니겠어?"

"시엘!"

참다못한 에밀이 소리를 지르자 시엘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입가에 갖다 댔다.

"쉿. 진정해, 에밀. 또 근신 당해도 좋아?"

에밀의 악문 잇새로 뿌득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에밀은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분하지만 시엘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그녀가 훨씬 유리한 위치였다.

"고마워. 역시 에밀이야. 그럼 나는 먼저 가볼게. 전하께서 기다리실 거야."

시엘이 여전히 생긋 웃는 얼굴로 에밀의 손을 토닥이고는 방을 나갔다. 탁, 방문이 닫히자 에밀의 꽉 감은 눈꺼풀 밑으로 인색한 눈물이 속눈썹을 적셨다.

어릴 때부터 시엘은 그런 아이였다.

몸도 약하고, 성적은 중상. 어떻게 아카데미에 들어왔는지 의문일 만큼 그녀는 맹했다. 곧잘 넘어지거나 울곤 했지만 귀여운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 덕분에 교사나 학생들은 또래보다 몸집이 작고 약한 그녀를 여동생처럼 귀여워하며 돌봐주곤 했다.

처음 시엘을 만났을 때, 그녀는 에밀을 바라보며 어린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 다리가 삔 것 같아.'

거짓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엘리어트와 함께 검술 훈련을 함께 하면서 열 살 치곤 예리한 눈을 가진 에밀의 눈에는 그녀의 거짓말이 보였다.

시엘은 편리할 때 늘 아프고 넘어졌다. 그러나 그 근육의 인위적인 움직임과, 짧은 찰나 관성을 거스르는 움츠림은 에밀의 눈에 확대라도 한 것처럼 잘 보였다.

'미안해, 못 봤어.'

'흐아앙, 못 일어나겠어. 업어줘, 에밀.'

'좀 어지러운 것 같아. 잠시 쉬어야겠어. 미안해.'

그녀는 늘 에밀에게 도움을 청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제쳐 두고 늘 에밀만을 찾았기 때문에 어느새 에밀은 늘 시엘을 돌봐주게 되었다.

처음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시엘이 꾀병을 좀 부리거나 숙제를 베낀다고 해서 에밀에게 해가 될 것은 없었다. 적당히 맞춰주거나 넘어가 주는 것 정도로 생색을 낼 만큼 에밀은 속이 좁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아카데미에 출석한 엘리어트가 반갑게 에밀을 찾아왔을 때, 시엘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 에밀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저하... 조금, 어지러워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평소라면 축 늘어져야 하는 몸이 이번에는 엘리어트에게 기댈 수 있는 만큼만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엘리어트는 별 생각 없이 곁을 지나던 교사에게 그녀를 보건실로 데려가도록 했지만, 에밀은 그날 이후 시엘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에밀을 벼랑 끝의 현실로 잔인하게 떠밀었던 그 일이 일어났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마치 그림책처럼 펼쳐졌다.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고 선명했다.

아카데미의 보건실이었다. 아직 애띤 얼굴의 에밀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멍하니 시엘을 바라보고 있다. 침대에 앉아 있는 열두 살의 시엘이 에밀에게 순진한 얼굴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 에밀. 매번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괜찮아.'

에밀이 빙긋 웃으며 어린 시엘의 손을 토닥였다. 어차피 에밀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수학 시간이었으므로 수업을 빼먹을 수 있다면 그에게는 더 좋았다.

'에밀은 착하네. 저하께서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가.'

'응?'

느닷없는 엘리어트의 이야기에 에밀이 놀란 얼굴을 했다. 왜 거기서 엘리어트의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에밀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에밀은 저하의 반려가 되진 않을 거지?'

에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허를 찔렸다기보다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이었지만 소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마치 침대에 앉아 동생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에밀은 남자잖아. 저하는 디날의 왕이 되실 텐데, 에밀이 반려가 되면 후계자는 어떻게 해.'

에밀이 처음으로 현실에 눈을 뜬 순간이었다. 시엘이 고의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니 분명히 고의였겠지만 에밀은 그때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까발려진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늘 함께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할 거라 생각했었다. 엘리어트가 평생 함께 해 달라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녹나무 위에서 나누었던 첫 입맞춤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데.'

에밀이 입을 다물었다. 시엘은 눈치가 없는 건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눈을 깜박이며 순진한 소녀의 눈으로 에밀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에밀은 못 하지만, 내가 세자비가 된다면 꼭 아들을 낳아드릴 거야.'

그리고 시엘은 에밀을 바라보고 웃었다. 그때 처음으로 에밀은 순진한 미소 뒤에 숨은 욕심과 이기심을 목격했다.

'도와 줄 거지? 에밀.'

-깜박.

에밀이 눈을 떴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테리와 리디아에게 둘러대긴 했는데, 이아네에게는 송구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와버렸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에밀이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스럭, 하는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든 모양이었다. 성에 갈 때 입었던 셔츠와 조끼, 심지어 재킷까지 다 갖춰 입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재킷과 조끼를 벗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두 번째 단추를 풀었을 때, 방이 환해지는 느낌에 에밀이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동쪽 창문은 커튼이 쳐진 채였다. 남향으로 난 창문에 구름에서 벗어난 달빛이 하얗게 비쳐들고 있었다.

그 달빛을 바라보던 에밀의 멍한 눈이 서서히 광채를 더해 갔다. 느릿하게 발이 움직여 창문을 향했다. 달빛이 내려앉은 창밖의 정원을 내려다보던 에밀이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 커튼이 쳐진 창문이 있었다.

에밀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창문에 쳐진 커튼을 한 번에 걷어냈다.

촥 소리가 나며 달빛이 금세 방안을 채웠다. 신비로운 달빛을 받으며 우뚝 솟은 성의 측면부가 에밀의 눈동자에 비쳐들었다. 에밀이 이 방을 고집했던 진짜 이유였다.

성의 한쪽, 엘리어트의 방이 있는 위치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에밀의 눈이 살짝 그리움을 띠었다. 짙은 초록색으로 물든 눈에 걱정이 차올랐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에밀이 창틀에 기대앉으며 닿지 않을 안부를 물었다.

"많이 바쁘신 거예요...? 그래도 식사는... 잘 하고 계시죠?"

꿈결처럼 움직이는 입술 옆으로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흐르는 것 같다.

"...행복, 하세요?"

평소처럼 에밀이 부드럽게 웃었다. 엘리어트 앞에서는 늘 이렇게 웃었다. 그는 에밀이 웃는 것을 좋아했다. 에밀이 웃을 때마다, 자신이 더 행복한 듯 웃곤 했다.

"...보고 싶어요. '리트'."

에밀이 무릎을 끌어 모아 고개를 묻었다. 귓가에 시엘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에밀이 도와줘서 내가 임신하게 되면, 그것도 발로아 가의 영광 아니겠어?'

에밀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그의 곁에 서지 못하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이제 받아들였다. 디날은 왕이 필요하고, 엘리어트는 현 국왕 레뮤엘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만일 엘리어트가 자신과의 과거를 잊고 새로운 반려와 함께한다 해도 에밀로서는 속이 문드러질지언정 미소를 보낼 수 있었다. 엘리어트가 주었던 유년 시절의 행복과 첫 입맞춤, 그것만으로도 에밀에게는 과분했다. 반려가 되어 달라던 어린 날의 청혼까지도 에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소중해서 그 편린으로도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엘은 아니었다.

시엘은 엘리어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짓밟으면서까지 그를 지켜왔다. 엘리어트가 자신에게 차갑고 모진 말을 해도,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조각내고 찢어발겨도 참을 수 있었다. 에밀은 그저 곁에서 그를 지킬 수만 있다 해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켜온 소중한 사람을, 시엘은 마치 특별한 훈장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어."

합법적인 아내로서 엘리어트의 곁에 섰으면서도, 시엘은 여전히 비겁했다. 에밀에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차마 다가가지도 못했던 사람을 간단히 손에 넣은 주제에, 그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으른 미소가 가증스러웠다. 에밀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 놓고서, 그녀는 에밀에게 또 도와달라며 욕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7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야, 에밀이 눈물을 참아가며 축하한다는 말을 연습한 보람이 없었다.

"시엘, 넌 잘못 생각했어.“

정말로 소중하다면, 스스로 얻어내야 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에밀의 눈이 어두운 이채를 발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 아래 에밀이 엘리어트의 방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커튼을 쳤다.

그 순간, 마지막 남은 서류에 서명을 마친 엘리어트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방의 분위기는 평범했고 암살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그가 조금 웃었다. 하긴, 살기라고 하기엔 너무 다정한 느낌이긴 했다.

업무도 끝났겠다,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 엘리어트가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눈 아래 디날의 수도 케닛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곧 자신의 것이 될 시가지를 애정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엘리어트가 문득 그중 하나에 시선을 주었다.

원래 엘리어트의 방은 동쪽이었지만, 발로아 공작가에 저택과 영지가 하사되면서 서쪽으로 방을 옮겼다. 이 방에서 13년 째 같은 천장의 무늬를 보며 눈을 뜨는 이유는 사실 단 하나.

엘리어트가 창틀에 기대어 앉으며 모처럼 느긋해진 보라색 눈동자로 어두워진 발로아 저택을 바라보았다.

하얀 달빛이 발로아 저택을 비추었다. 에밀이 방금 커튼을 친 커다란 창문을 내려다보며 엘리어트가 웃었다. 엘리어트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이 방에서 거울로 빛을 반사해서 에밀과의 신호를 만들어 놀곤 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방 안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이기도 했다.

"...보고 싶어."

말라버린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다정하게 대상이 없는 고백을 흘려보냈다.

"...보고 싶어, 에밀."

조용히 밤이 깊어 갔다.

닿을 수 없는 고백이 퍼져 가며 엇갈린 마음 위로 닿지 못하고 스러진다. 성의 서쪽 방에 마지막으로 켜져 있던 불빛이 마침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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