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엇갈린 시선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응."
더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하루가 바쁘게 시작되었다. 시종이 식사를 먼저 내어 왔다. 간단한 식사 뒤에 씻고 나면 기다리던 시종들이 달려들어 그에게 옷을 입혔다.
왕세자의 직분이긴 해도, 성인식을 치르고 난 지금 그는 거의 현왕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모자란 모습으로 디날 왕가의 명성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디 구겨진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정복을 점검한 엘리어트가 드디어 방문을 나섰다.
어머니의 미모 외에도 아버지의 현명함을 닮은 그는 벌써부터 디날의 차기 국왕으로서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현왕 레뮤엘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집권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언제 왕위를 물려받을 거냐며 성인식을 치렀을 때부터 엘리어트를 닦달해왔다.
물론 엘리어트는 언젠가 자신이 그 왕관을 물려받게 될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아버지의 인생을 매우 존중하고 있었지만-
'이아네 공작과 같이 떠나고 싶다고 해서 아들한테 왕관을 넘기는 건 좀...'
그가 낮게 한숨을 쉬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먼저 와 있던 군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광경에 엘리어트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서류와 업무들을 처리하며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닮고 싶어 하던 왕자는 이제 완연한 청년으로 아버지의 뒤를 훌륭히 잇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반려와의 힐링 러브 라이프를 위해 반강제로 왕관을 넘기려고는 하지만 만일 그의 아들이 자격이 되지 않았다면 절대 그런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엘리어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봄 특유의 따뜻한 향기가 실려 들었다. 해가 높아지며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부드럽게 집무실을 채우자, 시종이 식사 시간을 알려 왔다. 격무 뒤의 점심을 기대하며 복도를 걷던 엘리어트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봄 햇살이 부서지는 정원에 누군가 있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잘 말린 장미 색깔의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흩어지자,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고개를 든 그가 엘리어트와 눈이 마주쳤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깃이 높은 하얀 망토 자락이 휘날리며 그의 발자취를 쓸었다. 봄이 시작되고 색색의 꽃과 싱그러운 풀 향기가 바람에 실려 부드럽게 얼굴을 간지럽혔지만 정작 당사자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어젯밤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전하!"
문득 엘리어트의 발이 멎었다. 긴 복도 저편에서 이제 막 변성기가 지난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엘리어트가 잠시 망설이다 심호흡을 한 후,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햇살 아래서 말린 장미색으로 보이던 붉은 기 섞인 다갈색 곱슬머리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살짝 상기된 사과 같은 뺨과 흥분한 초록색 눈동자는 누구라도 돌아볼 만큼 사랑스러웠다.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이 열리며 다시 한 번 엘리어트를 불렀다.
"전하!"
"...무슨 일이냐?"
숨이 차도록 복도를 달려온 것에 비하면 너무 차가운 대답이었지만 자신의 앞에서 숨을 고르며 활짝 미소를 짓는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나아진 얼굴로, 엘리어트가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열일곱 살쯤, 키는 엘리어트보다 조금 작았지만 또렷한 이목구비가 빛나는 미형의 소년이었다.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엘리어트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에이, 반가워서 그러죠. 요즘 너무 격조하셨잖아요."
"...흥."
엘리어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낮게 코웃음을 치며 그는 여전히 싸늘하게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지며 짙은 청색을 띠었다.
"할 얘기는 그것뿐인가?"
"으-음..."
소년이 의아하다는 듯 엘리어트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얼굴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로 대단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앗, 혹시 변비...?"
"무엄하다."
순진한 얼굴로 엄한 질문을 해 대도 엘리어트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단호한 한마디로 불경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세치 혀를 막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점심 드시러 가는 거예요? 저도 가도 돼요?"
"네가 따라올 주제가 아니..."
거기까지 말했을 때, 소년이 엘리어트의 손을 잡았다. 아무 사심도, 흑심도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럽고 순수한 스킨십이었다. 엘리어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고 당황한 빛을 띠었지만 소년은 아까와 변함없는 깨끗한 미소로 엘리어트를 올려다보았다.
"같이 가요. 네?"
천사 같은 미소가 환하게 번졌다. 엘리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휘어지는 초록색 눈동자는 분명 사랑스러웠지만 엘리어트에겐 오히려-
"...안 돼."
독이 된다는 것을, 소년은 절대 모를 것이다.
"...점심은, 내 방에서 먹을 거다."
"네? 어디 불편하신 거예요? 또 머리 아프세요?"
소년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엘리어트의 이마를 짚었다. 완전히 평정심이 무너진 채 얼굴을 빨갛게 붉힌 엘리어트가 소년의 손을 피해 고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전하, 얼굴이 빨개요. 열도 조금 있는 것 같고..."
"아, 아니, 아니..."
"가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소년은 막무가내로 엘리어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미 성 안의 지리는 완전히 꿰뚫고 있는지라 그 발걸음에는 작은 망설임조차 없다. 그 와중에도 엘리어트를 잡은 손은 놓지 않고 있었다. 뒤에서 디날 유일의 왕세자가 뭐라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소년은 예민한 성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언제까지 끌고 갈 생각이냐!"
참다 못한 엘리어트가 일갈하자, 그제야 깜짝 놀란 듯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간 초록색 눈동자에 엘리어트가 비쳤다. 그 눈동자를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엘리어트는 고개를 돌리며 소년의 손을 쳐 냈다.
"네가 아무리 나와 젖형제였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아... 죄송해요."
시무룩해지는 붉은 고수머리에 축 처진 강아지 귀가 보이는 것 같다. 살짝 힘이 빠진 어깨가 보기 안쓰러웠다. 소년이 풀죽은 목소리로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저는 그냥... 전하께서 어딘가 아프신가 하고..."
"신경 쓸 것 없다."
"그래도..."
엘리어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은 안 돼. 아무 말도 하지 마. 하지만-
짓씹은 잇새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제와 이럴 거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지."
"네...?"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비추기도 전에 엘리어트는 그 곁을 빠르게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소년은 엘리어트의 방문을 바라보다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섰다. 소년이 멀어지고도 한참 후에야 작은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다. 이미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의 자취가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다 엘리어트의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열렸다.
"...에밀..."
생각하면 한숨부터 먼저 나오는 이름이다.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쉬는 그는 이 순간만큼은 왕세자가 아닌 평범한 청년으로 보였다. 조용히 다시 문을 닫으며, 엘리어트는 다시 한 번 후회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흐음..."
에밀이 귀여운 입술을 내밀며 식탁 의자에 올라앉은 채 턱을 괴고 이마를 한껏 찌푸렸다. 열일곱 살치곤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미형의 외모 탓에 안타까울 만큼 박력이 없어서 그의 어머니 릴리안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에밀?"
"...전하께서 요즘 저랑 안 놀아 주세요."
"에밀, 전하께서도 이제 성년이시고 국정 일에 바쁘시잖니. 네가 귀찮게 하는 것 아니야?"
"아니라구요..."
에밀의 턱이 아까보다 더욱 울퉁불퉁해졌다. 숫제 테이블에 팔을 뻗대고 엎드리며 에밀이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저도 그 정돈 알아요. 그래도..."
"그래도, 라고 하면 안 되지. 전하께선 곧 혼인을 앞두고 계시니, 네가 참아야지."
에밀의 초록색 눈동자가 순간 묘한 이채를 띠었지만 릴리안은 에밀에게 등을 돌리고 비프 스튜의 간을 보는 중이라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였더라? 아마 버셋 후작가였던가?"
"네, 시에리아 영애일 거예요."
"그래, 맞아. 지난번 전하의 성년식에서 너와 춤을 추었던 그 영애지?"
"네."
릴리안이 황홀한 듯 눈을 감고 연회를 추억했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귀족의 세계. 델토르의 시골 출신인데다 군인 가문의 며느리인 릴리안으로서는 아직도 먼 세계 이야기 같았지만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델토르의 군인이었던 발로아 가의 차남 이아네 월터 발로아는 특별히 공작 작위를 수여받고 디날의 반려 자리에 올랐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발로아 가는 델토르의 흔한 군인 가문에서 단숨에 발로아 공작가로 격상되었고, 여전히 검소하고 소박하긴 해도 훌륭한 저택과 그에 준하는 영지를 하사받았다.
발로아 가의 가주인 제라르 케이 발로아 경은 이제 발로아 대공으로 불리며 군사 작전에 없어서는 안 될 참모로서 확실하게 자리잡았고 원래 그의 본업이었던 검술 교습소는 그의 장남 이아스가 물려받았다.
"참 예쁜 아가씨였는데. 난 우리 에밀이랑 잘 될 줄 알았더니만."
"에이, 전 아직 어려요."
릴리안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눈으로 접시에 스튜를 담아 에밀에게 내밀었다. 에밀이 입맛을 다시며 스튜에 집중했지만 릴리안은 여전히 꿈속이었다.
"꼭 인형처럼 생겼더랬어. 순금 같은 금발에 청록빛 눈이라니, 엄마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인형도 그렇게 생겼었지."
"엄마."
"허리도 잘록하고, 피부도 하얗고 말이야. 그런데 버셋 영애가 올해 몇 살이었더라?"
"열일곱 살이에요."
에밀이 스튜를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릴리안이 자기 몫의 접시를 들고 에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에밀과 똑 닮은 붉은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어쩜. 엄마도 그 나이 때 네 아버지와 결혼했단다. 집안끼리의 소개이긴 했어도 네 아버지는 굉장히 멋지고 정중한 분이어서 첫눈에 그만... 아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엄마..."
에밀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군인 집안인 것과는 별개로, 에밀의 부모님 릴리안과 이아스의 금슬은 발로아 영지 전체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 금슬 사이에서 고생스러웠던 것을 생각하면 열일곱 해 동안도 충분하지 않았나 싶지만, 아직 릴리안은 남편 사랑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 남편 자랑에 푹 빠진 어머니를 바라보며 에밀이 포기하고 스튜를 한 술 더 뜨는 순간, 주방으로 누군가 뛰어들어 왔다.
"다녀왔습니다!"
"에단!"
에밀이 반가운 얼굴로 동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형을 발견한 에단이 그 손에 호쾌한 하이파이브를 날리고는 냉큼 식탁에 앉았다. 릴리안이 스튜 접시를 에단 앞으로 밀어주자 기다렸다는 듯 에단이 접시에 코를 박았다.
이제 열두 살이 되는 에단은 발로아 가문이 공작가가 된 후 낳은 아이였다. 형과 마찬가지로 붉은색 고수머리였지만 눈동자는 조금 더 짙은 초록색이다.
에밀은 정신없이 저녁식사 중인 에단을 사랑스러운 듯 내려다보았다. 형제들은 흔히 싸우면서 큰다고 하지만 에밀은 자신의 동생과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참, 에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버셋 영애가 열일곱 살이랬나?"
"아... 네."
잠시 난처한 얼굴이던 에밀이 곧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릴리안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에밀이랑 동갑이구나."
"네, 아마도..."
"어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우리 집에 자주 오던 여자애, 걔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있잖아, 아카데미에서 맨날 에밀이랑 붙어 다녔던 아이. 요새는 본 적이 없네."
"저기, 엄마?"
"이름이 뭐더라. 시엘이었나?"
문득 릴리안이 뭔가를 깨달은 듯 휘둥그레진 얼굴로 에밀을 바라보았다. 에밀이 어깨를 으쓱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시엘, 시에리아 니스비 버셋! 걔가 그렇게 컸어? 어머나, 완전히 레이디가 다 됐던데! 하여튼 요즘 애들은 발육이 너무 좋아. 난 완전히 어디 다른 집안 영애인 줄만..."
"잘 먹었습니다."
에밀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어머니의 말을 잘랐다. 릴리안이 정신을 차리고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릴리안이 더 줄까, 라고 물으려 했지만 에밀이 더 빨랐다.
"배불러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에밀이 적당히 예의바른 미소를 띠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스튜 접시에 열중해 있는 에단의 머리를 한번 헝클어 준 에밀이 방으로 가자 릴리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턱을 괴었다.
"사춘긴가...?"
"아니야. 시엘 누나 이야기니까 그러는 거예요."
"응?"
스튜의 고기를 씹으며 에단이 우물우물 말을 이었다.
"시엘 누나 얘기만 하면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려고 해요. 형은 착하니까, 아마 첫사랑을 뺏겨도 아무 말 안 하는 거겠지만."
"어머나!"
릴리안이 정말 놀란 듯 탄성을 질렀지만 에단은 열두 살 주제에 세상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짧은 다리를 한껏 꼬아 봤자 어머니에겐 귀여워 보일 뿐이다.
"에단, 왜 말하지 않았어? 그럼 엄마도 얘기 안 했을 텐데..."
"엄마, 나 이거 다섯 번째 얘기하는 거거든요."
"...스튜, 더 먹을래?"
"네."
시크한 꼬맹이이긴 했지만 에단은 어머니를 놀리는 취미는 없었다. 남편에게 폭 빠져서 다른 것엔 관심 없는 어머니지만 에단은 어머니를 엄청나게 좋아했으니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에밀은 침대에 아무렇게나 쓰러졌다. 시트가 마구 구겨졌지만 에밀은 신경 쓰지 않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에밀이 다니는 왕립 에드게일 아카데미는 성과 인접해 있어서 허가를 받거나 야외 수업이 있는 날은 언제든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은 검술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혹시나 하고 정원 근처를 서성였더니 역시나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를 발견했을 때, 에밀은 반가워서 손을 크게 흔들 뻔했다. 이제 성인식을 치른 왕자를 대하는 태도치곤 매우 불경했지만 어릴 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에밀이 자세를 바꿔 침대에 엎드렸다. 어둡게 가라앉은 초록색 눈동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저택을 하사받을 때 에밀은 한사코 이 방을 고집했다. 꼭대기 층이라 전망이 좋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사실은...
"...하아."
에밀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해 봤자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시에리아 영애는 엘리어트 왕세자와 결혼한다. 이미 약혼식은 지났고 앞으로 한 달 정도면 결혼식도 치러지게 될 것이다. 에밀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밀이 빙긋 웃었다. 진심에서 나오는 미소는 아니었다. 서투른 배우가 연기를 연습하듯 입술이 어색한 호선을 그렸다.
"축하해. 축하해요."
딱딱한 말투였다. 에밀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들리게 될 때까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축하한다는 말과 미소를 반복했다.
* * *
엘리어트는 근래 보기 드문 미소를 지으며 빨라지려는 발걸음을 애써 늦추었다. 그가 성년식을 치렀다곤 하지만 아직 스무 살이다. 흠 잡힐 일이 없는지 일부러 이것저것 살피지 않으면 금방 실수하게 되므로 스스로를 잘 단속해야 했다.
들뜬 발걸음을 드디어 멈춘 엘리어트가 조용히 노크를 하고 문을 밀었다. 소리 없이 열린 문 안에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 왔다.
"무슨 일이냐?"
진한 심청빛의 눈동자가 리트를 꿰뚫듯 바라보았다. 엄격하긴 했지만 한없이 다정한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중년의 남성은 현 국왕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이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살짝 문을 닫고 엘리어트가 그의 앞에 섰다. 레뮤엘은 평소처럼 고요하지만 어딘가 기대에 찬 눈으로 엘리어트를 바라보았다.
"지라이 상단과 협상에 성공했습니다."
"아."
레뮤엘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대단하구나. 고생 많았다."
엘리어트가 뿌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레뮤엘은 표현이 서툰 편이지만 늘 진심을 담아 얘기하곤 했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자랑스러움만으로도 엘리어트에겐 큰 보상이었다.
"그럼 이제 대관식을 치르는 거냐?"
"아뇨."
엘리어트가 웃는 얼굴 그대로 부정하자, 레뮤엘이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엘리어트는 재미있기도 하고 속이 쓰리기도 했다.
"대체 언제쯤 네 머리 위의 왕관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현역으로 일하시면서 그런 말씀 마시죠."
"13년 정도면 이제 떠나도 괜찮을 때라고 생각한다만."
"왕관을 너무 쉽게 넘기시려는 것 아닙니까?"
"능력이 되는 후계가 있으니 넘겨도 괜찮을 거라 판단하는 거다."
"그냥 발로아 공과 같이 떠나고 싶으신 것뿐이잖아요."
"알고 있으면서도 대관식을 안 치르는 거냐."
"누구 좋으라구요."
곁에서 부자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남자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십 년째 봐 오는 설전이긴 했지만 늘 맨정신으로 지켜보긴 힘들었다.
"폐하, 대관식은 언제든지 가능하니 서두르지 않아도..."
"쯧, 그대가 그렇게 무르게 행동하니 엘리어트가 대관식을 미루려는 게 아닌가."
"폐, 하..."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가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레뮤엘이 완전히 삐졌다. 저녁에 풀어주려면 일이겠다고 생각하며 남자가 엘리어트 쪽을 바라보았다. 여름날 초록색 잎사귀를 닮은 눈이 빙긋 웃자 순간적으로 엘리어트가 흠칫 당황했다.
그 눈동자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탓이다.
"죄송합니다, 전하. 괜히 저 때문에..."
"...발로아 공 때문은 아닙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남자의 얼굴에 난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마흔이 넘은 나이인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동안인 이아네 월터 발로아 공작이 온화하게 엘리어트를 바라본다.
엘리어트는 그를 바라볼 때마다 미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던 어린 엘리어트가 유일하게 아버지 외에 마음을 열었던 검술 스승인 그는, 지금은 아버지의 반려로서 어딜 가나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잘 어울리는 둘이었지만 엘리어트는 그를 매우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웠다.
물론 그에겐 죄가 없다. 자신이 매우 좋아하던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어릴 때의 기억들도 따뜻하고 다정한 것들뿐이다.
그렇지만-
"엘리어트."
"예."
레뮤엘이 조용히 책상을 두드렸다. 가라앉은 심청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본다.
"대관식보다 더 급한 게 있지 않니?"
"아."
엘리어트가 약간 당황스런 얼굴을 했다. 잊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겠지만, 정말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 쪽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보고가 없구나."
"...제 불찰이었습니다. 곧..."
"곧이라고 할 것 없이, 내가 진행시켰다. 아들의 결혼인데 아버지 입장으로 신경 쓰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레뮤엘이 조금 웃었다. 엘리어트가 뻣뻣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나 어색한 미소라고 하더라도 레뮤엘에게는 안심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가 봐라. 앞으로도 바빠질 테니 몸 관리 잊지 말고. 지라이 상단과의 협상은, 축하한다."
"예."
엘리어트의 손이 문을 미는 순간, 레뮤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말 괜찮으냐, 리트?"
"......"
엘리어트의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곧 움켜쥔 주먹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지만 대답할 수 없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질끈 감은 눈으로 깊게 호흡을 내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아까의 흔들림은 흔적도 없는 싸늘한 눈빛으로, 보랏빛 눈동자가 아버지와 그의 반려를 마주보았다.
"제가 결정한 일입니다."
"...그래. 결혼, 축하한다."
엘리어트가 문을 밀고 나섰다. 탁 하고 문틈이 마찰하는 소리가 나자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레뮤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레뮤엘은 살짝 내쉰 한숨 외에 그 어떤 감정적인 표현도 없었다. 엘리어트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면, 레뮤엘로서도 지켜봐줄 수밖에 없다.
레뮤엘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아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뮤엘에게 묻는다.
"...이대로도, 괜찮겠습니까?"
"리트가 결정한 일이다.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도 있어. 이미 내 권한 밖의 일이니, 그 이후는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야겠지."
이아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레뮤엘다운 말이었고 이 상황에 그 이상 적절한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이대로는 안타깝다. 자신이 레뮤엘의 곁에 선 것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안."
레뮤엘이 이아네를 부르자, 이아네가 고개를 들었다. 레뮤엘의 손이 뻗어지자,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그대의 탓이 아니다."
"하지만..."
"나 역시 마음이 좋지는 않지만... 리트라면 잘 할 거라 믿고 있다."
"...예."
신기하게도 레뮤엘이 말하는 것은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이아네가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따뜻하게 마주보던 레뮤엘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 이제, 대관식에 대한 얘기를 해 볼까."
...깜박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냉철한 사리판단과 확실한 정의를 가진 디날의 국왕일 뿐 아니라, 반려에 대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팔불출이라는 것을.
그날 저녁, 엘리어트는 심란함을 달래려 정원으로 나왔다. 요 며칠 상단과의 협상을 추진하느라 잠도 충분히 자지 못했지만 오늘은 차라리 협상이 더 길게 끌었다면 좋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미처 증발하지 못한 낮의 봄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으로 끼쳐 왔다. 엘리어트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산책로는 늘 정해져 있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다른 곳으로 가 볼까. 엘리어트가 변덕스런 발걸음을 옮겼다.
"아."
천천히 걷던 발이 익숙한 길을 발견하고 조금 빨라졌다. 잘 포장된 길이 끝나는 곳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에 리트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13년 전, 엘리어트가 일곱 살 때부터 이아네에게 검술 훈련을 받았던 곳이었다. 그때 엘리어트는 정말 영악하고 재미없는 꼬마여서, 이아네와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이아네가 못 미더웠다. 아버지가 억지로 붙여주신 검술 스승이라곤 하지만 예를 갖추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엘리어트의 신경을 일일이 긁었던 이아네가 반가웠을 리 없다.
그러나 자신을 왕자로 대하지 않는 그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성인이 된 지금이야 누가 보더라도 레뮤엘의 판박이지만,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특징만 쏙 빼닮았던 그에게 처음으로 아버지를 닮았다고 해 주었던 것도 그였다.
엘리어트의 발이 자연스럽게 어딘가로 향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꽤 큰 녹나무가 강인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손을 살짝 뻗어 옹이진 나무줄기를 만져 본다.
처음 이 나무를 올랐을 때가 생각났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델토르 이야기를 더 해주겠다는 이아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손에 가시까지 박히면서 올랐더랬다.
그리운 눈으로, 엘리어트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이라면 이전의 이아네처럼 순식간에 오를 수 있겠지. 엘리어트가 피식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군데군데 옹이진 나무줄기는 잡거나 밟기 좋게 되어 있어 오르기 어렵지 않다. 엘리어트가 7살부터 13살이 될 때까지 매일 올랐던 나무였으니 이제 와서 오르는 것은 더 쉬웠다.
가볍게 몸을 날렸다. 늘 밟던 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너 번 정도 손에 힘을 주자 금세 엘리어트는 나무 위의 가지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올랐던 7년 전과는 또 다른 전망에 엘리어트의 눈이 약간 휘었다. 즐거웠다. 아주 오랜만에 7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편안하게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은 엘리어트의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
'나도, 형아, 나도!'
'저하라고 불러라.'
'쩌하, 나도!'
보랏빛 눈동자가 살짝 감겼다. 바로 어제의 일처럼, 귓가에 부서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하, 봐주지 마세요!'
'봐준 적 없어. 난 진지한데?'
'거짓말!'
"...풋."
억울함을 가득 담은 초록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터진 웃음을 참으며 엘리어트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우아앗!"
까,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잽싸게 팔을 잡아끄는 손에 다행히 떨어져서 목이 부러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난처한 미소를 담은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노, 노, 놀랐잖아, 에밀!"
"아, 죄송해요."
자기도 모르게 어릴 때처럼 하대를 하고 말았다. 몇 년이나 엄격한 말투를 연습해 왔지만 역시 이쪽이 편했던 모양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자, 그제야 눈앞의 이 소년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어, 어떻게... 어디서? 아니, 언제부터?"
에밀의 눈꼬리가 멋쩍게 휘어졌다. 검지를 펴더니 위의 가지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게... 검술 수업 후에, 잠시 들렀다가 여기서 잠이 드는 바람에."
"자, 잠이 들었다고?"
대단한 무신경이다. 나무 위에서 중심을 잡는 것도 힘들지만 거기서 잠이 들다니!
"그치만 전하께서 이쪽으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오늘은 운이 좋았네요."
부드럽게 웃는 동그란 입꼬리를 보고서 엘리어트는 흠칫 자신의 본분을 깨달았다. 젠장, 역시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 봄 냄새 따위 무시하는 게 나았는데!
"경비병에게 얘기해 둘 테니, 돌아가도록 해라."
"벌써요?"
에밀이 난처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 와중에도 살짝 처진 눈썹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다.
"너무해요. 전에는 언제든지 와도 된다고 하시구선."
"...그때 너는 네 살이었다."
"하하, 그렇네요. 검술 훈련을 같이 할 때는 매일 왔었는데."
에밀이 그립다는 듯 나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덩달아 아래를 내려다본 엘리어트의 눈에, 보일 리 없는 잔디밭 위의 두 꼬마가 보였다.
에밀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엘리어트의 고집으로 에밀은 왕자와 함께 검술 수업을 받았다. 군인 집안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핏줄을 물려받았는지 에밀은 검술에 재능이 있었다. 이아네로서는 조카를 직접 가르칠 수 있어 좋고, 엘리어트는 그것을 핑계로 에밀을 매일 볼 수 있어 좋았던 시절.
"흥, 매일 지면서 봐주지 말라고 하던 꼴이라니."
"응? 그때 정말 진심이었어요? 일곱 살짜리를 상대로?"
"아, 아니야!"
엘리어트가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 끝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그때, 재미있었죠."
"흥. ...나쁘진 않았지."
잠시 둘은 같은 추억을 공유한 자들 특유의 눈으로 나무 아래 펼쳐진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들은 지금도 함께였을지 몰랐다.
-아니. 그래선 안 돼.
"그만 돌아가라."
"조금만 더요."
"안 된다. 곧 성문이 닫힐-"
엘리어트가 숨을 몰아쉬었다. 아쉬움이 가득 담긴 손이 엘리어트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가 움찔하며 손을 빼려 하자 에밀이 다른 손으로 엘리어트의 손목을 잡았다.
"...무엄하다. 놔라."
"전하."
고개를 돌렸다. 보면 안 돼. 보지 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해라."
엘리어트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저녁 공기가 부드럽게 둘 사이를 채워왔다. 에밀의 눈이 조용히 엘리어트를 응시한다. 초록색 눈은 말없이 엘리어트가 자신을 마주볼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뭐냐."
결국 엘리어트는 지고 말았다. 그 침묵을, 그 눈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보자,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엘리어트의 시야에 정면으로 들어왔다.
뭐든지 솔직한 에밀이 오늘은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그 공백은 이제 가라앉아 버린 엘리어트의 심장을 느슨하게 흔들었다.
어쩌면, 혹시, 아직-?
"...시에리아 영애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
"결혼, 축하드려요."
멍하니 보랏빛 눈동자가 에밀을 응시했다. 다시 한 번 무너져 버린 기대와, 심장을 깊게 휘어잡는 절망이 그대로 나타난 날것의 눈이었지만 에밀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너는..."
"네, 전하."
"너는, 대체..."
엘리어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까지 에밀이 잡고 있던 팔을 세게 내젓자 맥없이 에밀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내 결혼이다."
"...네."
"내가 알아서 한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느냐."
에밀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그 바보 같은 미소가 엘리어트의 심장을 날카롭게 쥐어짰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어요."
"당장 꺼져. 이 이상 더 성에 머무른다면 무단침입으로 야경단에 넘겨 버릴 테니."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엘리어트의 목소리에 에밀은 자신이 물러날 때라고 판단했다. 고개를 끄덕인 에밀이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
꽤 높이가 있는데! 엘리어트가 급히 아래쪽을 바라보자, 부드럽게 착지한 에밀이 균형을 잡고선 이내 엘리어트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어트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안녕히."
에밀의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바람에 섞여 올랐다. 엘리어트는 끝까지 그를 외면했지만 에밀은 평소와 똑같은 난처한 미소를 띤 채 뒤돌아 정원을 빠져나갔다.
드디어 혼자 남은 나무 위, 엘리어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력을 다해 깨문 입술에 핏방울이 맺히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온몸을 휘감으며 소용돌이치는 패배감에 엘리어트의 부릅뜬 눈에서 습막이 피어올랐다. 보랏빛 눈동자 아래 차오르기 시작한 눈물이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뺨을 가로질러 흘렀다.
"기억...기억하지 못하는구나."
'18살이 되면, 내 반려가 되어 줄래?'
'반려가 뭐예요?'
"...웃기지도 않는군."
낮은 웃음소리가 악문 잇새로 흘렀다.
'음, 평생 함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죽을 때까지.'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뭐가, 행복하게 해주세요, 냐."
너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왜 내가, 다름 아닌 네게 청혼했던 장소에서 그런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채, 엘리어트는 오랫동안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너덜너덜한 순정을 끌어안은 그의 등이 지독하도록 슬펐다.
* * *
"으랴아아압!"
"으앗!"
"발로아, 1승!"
붉은 깃발이 하늘 높이 치켜지자, 에밀이 장갑을 벗으며 넘어진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땀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괜찮아?"
"뭐야,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에밀의 손을 잡은 상대가 투덜대며 일어나더니 흙투성이가 된 엉덩이를 털었다. 에밀이 그의 검을 주워 건네자, 대련 상대였던 소년이 씩 웃으며 목검을 받아들었다.
"너무하잖아. 힘으로 날려 버리다니."
"아... 그, 미안..."
에밀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난처해하자 상대가 킬킬대며 팔꿈치로 에밀을 장난스레 밀었다.
"아침을 잘 먹었다고 해도 오늘은 좀 심한데. 뭐, 열 받는 일이라도 있었어?"
"어, 으응?"
에밀이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상대가 꼬리를 잡았다는 듯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오오, 진짜!? 역시 시엘 때문인가?"
"아냐, 그런 거..."
에밀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미 당황한 빛이 역력한 초록빛 눈동자는 의심할 여지 따위 없었다. 소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쯧쯧, 능숙하지도 않은데 거짓말을 하면 안 돼."
"정말 그런 게 아니라..."
"하아아아, 청춘이구만."
"테리!"
"네에, 네에-"
소년이 건성으로 손을 흔들며 자신의 장갑을 벗었다. 검술 수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안 그러면 자리 없을 거야."
"먼저 가, 난 정리 해 두고 갈게."
에밀이 자신의 목검을 살짝 흔들었다. 테리가 김샌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혀를 찼다.
"에밀, 가끔씩은 좀 얍삽해지는 건 어때? 늘 그렇게 진지하게 살면 피곤하지 않냐?"
"...그렇지도 않은데."
"그럼 난 먼저 간다."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며 세면대로 뛰어갔다. 에밀이 살짝 웃으며 그 뒷모습에 손을 흔들고는 보관대 근처에 주저앉아 부드러운 기름천으로 자신의 목검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에밀이 검에 소질을 보이자 할아버지인 제라르 케이 발로아 대공이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목검이라고는 하지만 옻칠이 되어 있는 검은 몸체며 날렵한 검신으로 볼 때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준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낄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텅 빈 연무장에 앉아 기름천으로 목검의 얼룩을 닦아내던 에밀이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능숙하지도 않은데 거짓말을 하면 안 돼.'
"그렇지 않아..."
검을 닦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에밀이 조용히 자조 섞인 얼굴을 했다.
"거짓말은 매일 하고 있는걸."
반질반질한 검신에 에밀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에밀이 고개를 들어 아카데미 너머의 성을 바라보았다. 엘리어트 왕세자와, 그의 왕자비가 살게 될 성을.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쥔 에밀이 벽을 쳤다. 퍽, 하는 메마른 소리가 났지만 에밀은 그대로 일어나 손질이 끝난 검을 보관대에 걸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왕립 에드게일 아카데미는 엘리어트가 열 살 때 설립된 왕정 직속 후학 양성 기관이었다. 배움에 뜻이 있는 자에게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로 세워진 아카데미는 인재 발굴과 양성을 동시에 목표로 했다. 엘리어트가 1회 입학자였고,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함으로써 아카데미의 존재 의의를 확고히 다졌다.
아카데미가 설립된 지 꼭 십 년. 그동안 그늘에서 보이지 않던 인재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지금에 와서는 대륙 굴지의 고등 교육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아카데미에서도 에밀의 실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발로아 공작가는 원래 델토르의 무인 집안이었고, 현재 레뮤엘의 반려인 이아네 월터 발로아는 예전에 국왕 직속 기사단의 최연소 입단자였다.
가문이 그렇다고 해서 에밀이 꼭 재능이 있으리란 법은 없지만 에밀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으로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이아네에게서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웠던 엘리어트도 실력은 상당했지만 에밀은 그의 검을 피할 수 있는 눈과 발이 있었다.
검술 선생이 행정과에 진지하게 에밀의 월반을 의뢰할 만큼 에밀은 뛰어났다. 아직 열일곱 살이니 완전히 원숙해지고 난 다음엔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막상 그의 주변인들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지만.
"에밀!"
"우왓!"
갑작스럽게 등에 작렬한 손길에 멍하니 걷던 에밀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학년의 리디아 시나 메이벨이었다.
"리디아! 노, 놀랐잖아."
"테리한테서 들었지롱. 우리 에밀이 청춘의 열병을 앓고 계시다면서?"
"...아니라니까."
에밀이 이마를 짚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 한해서긴 했지만 테리는 너무 입이 쌌다. 겨우 십 분 남짓 지났을 뿐인데 벌써!
"알아, 아니라는 거. 하지만 친구가 없어지는 건 나도 슬프거든."
리디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에밀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에리아 영애는 같은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기였다. 테리나 리디아와도 친했지만 원체 낯을 가리는 시엘은 유독 에밀과 자주 붙어 다녔었다. 에밀은 오빠처럼 그녀를 돌봐주었지만 남녀 사이가 친하면 늘 오해는 생기는 법이다.
"잘 지내려나?"
"글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언제인지 벌써 가물가물했다. 왕세자비가 될 시엘이 아카데미를 다니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이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결혼식뿐이다.
"그래도 넌 전하와 친하니까, 자주 놀러 갈 수 있잖아. 발로아 공께 부탁하면 언제라도-"
"리디아."
에밀이 리디아의 말을 끊었다. 리디아가 샐쭉한 얼굴을 하자 에밀이 부드럽게 달래듯 웃었다.
"...이제 전하께 놀러갈 수는 없어."
"흐음, 사랑의 라이벌이라는 건가요오, 에이몬드 공자?"
리디아가 짐짓 능청을 떨었지만 에밀은 아무 말 없이 미소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전하께서 날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
"너를? 왜? 너 입학했을 때 전하께서 아카데미 입구까지 마중 나왔던 충격적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으으아..."
에밀이 난처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확실히 그땐 그랬었다. 에밀이 열 살 때 아카데미에 입학하자 엘리어트는 친히 수업까지 제치고 달려가 아카데미 입구에서 그를 끌어안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 일로, 엘리어트 왕세자와 에이몬드 공자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에밀이 검술에 발군의 소질을 보인 것과는 별개로 둘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젖형제라는 것은 아카데미 내에 에밀의 존재감을 더 크게 만들었다.
엘리어트가 국정 일에 바빠지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자 자연스레 소문은 수그러들었지만 이미 에밀은 '왕세자의 친구'로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건 벌써 7년 전 일이잖아."
"그 뒤로도 전하께서 쏟으신 애정폭탄을 정말 모르고 얘기하시는 건가요, 에이몬드 공자?“
"옛날 이야기야, 정말로."
에밀이 씁쓸하게 웃었다. 리디아는 이쯤에서 그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리디아의 눈이 살짝 아쉬움을 띠었다.
"하긴,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결혼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
"응..."
리디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에밀의 어깨를 토닥였다. 시엘과 매일 붙어 다녔던 에밀을 생각하면 그가 허전해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괜찮을 거야."
리디아의 말에 에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다. 엘리어트는 좋은 남편이 되어줄 것이다. 함께 복도를 걸으면서 리디아는 에밀의 낮은 한숨을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청아한 종소리는 바람을 타고 보이지 않는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 마침내 버셋 후작 저택에 닿았다.
"수업, 시작했겠네."
시엘이 심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창가에 앉아 턱을 괴었다.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순금을 녹인 듯한 금발은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나른한 청록색 눈동자는 살짝 깜박이며 특유의 백치미를 마음껏 발산하는 중이었다.
"흐으음."
시엘이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 다시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결혼식을 앞둔 처자 치고는 한가해 보였지만 국정 업무로 바쁜 엘리어트라면 몰라도 그녀는 딱히 바쁠 일이 없었다. 곧 결혼식이라곤 해도 중요한 것은 버셋 후작이나 어머니, 집사 등이 다 알아서 해 주니까.
시엘이 건성으로 아까 다 읽은 책을 넘겼다. 팔락, 팔락 하며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의 침묵을 베었다.
"...재미없어."
시에리아가 책을 덮고 무료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아카데미의 푸른 지붕이 보이자 그녀의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돌았다.
"잘 지내려나, 에밀."
시에리아의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피어났다. 즐거운 추억을 회상하듯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즐거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