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스타시아 왕가의 예언 (17/27)

<외전 2: 스타시아 왕가의 예언>

델토르의 스타시아 왕가에는 대대로 왕족들에게만 전해지는 전설이 있었다.

왕가에 시집을 오는 영애들은 비밀리에 그 전설을 전해 듣고 왕이 될 아들과 며느리에게로 전했다. 근 이백 년이 넘도록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전설은 한 점성술사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갑자기 서쪽 하늘에 나타난 별처럼, 그녀는 검은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가리고 흑요석으로 만든 룬스톤으로 점을 쳤다.

릴리타 광장의 분수대에 하릴없이 앉아 있는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얼굴로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딱 한 번, 그녀는 길을 지나는 뤼실 백작의 어린 딸을 보고 빙그레 웃곤 예를 갖추었다. 어린 아이에게 하는 것치고 너무 격식 있는 인사였지만 일주일 후 여자 아이가 왕자비로 간택되었을 때, 백작의 집안에선 비밀리에 그녀를 불러들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허황과 진실이 섞여 몽환적으로 들렸지만 오랫동안 뤼실 백작가를 지키는 은밀한 파수꾼이 되어 주었다. 왕자가 왕이 되고 왕자비가 왕비가 되었을 때, 왕자비는 그녀를 드디어 성으로 불렀다.

이젤다 성에서, 그녀는 백작가에서 그러했듯 아주 오랫동안 스타시아 왕가를 지켰다.

그녀가 늙고 병들어 더 이상 이생에서의 숨결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했다. 그녀는 왕과 왕비를 비밀리에 불러, 자신의 늙고 말라버린 손을 그들의 머리에 얹고 마지막 예언을 했다. 늙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다.

'델토르의 하늘에 쌍둥이별이 뜰 때, 태양은 그 빛을 잃고 스스로 무너지도다. 달과 별의 빛은 더하고 델토르의 주인은 바뀌리라.'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후, 슬픈 눈으로 자신이 지켜온 왕과 왕비에게 미소를 지은 뒤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그 후 수많은 학자들과 점술사들이 그녀의 예언을 해석하려 성으로 불려갔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스타시아 왕가에 태어난 쌍둥이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를 것이다.

근거도, 이유도 없다. 그저 단 하나, 델토르의 점성술사였던 그녀의 예언뿐.

그러나 그 예언을 무시하기에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델토르의 그늘에서 지혜를 자아냈으며 별들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전해 왔다.

스타시아 왕가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왕가의 핏줄을 잇는 자들, 특히 왕비와 왕후들에게는 그녀의 예언이 암묵적인 룰처럼 전해져 왔다.

다행히도 스타시아 왕가에는 200년 동안 한 번도 쌍둥이가 태어난 적이 없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던 그녀의 비밀도 마치 옛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느슨해졌고 마침내 제르멘 대에 와서는 조심해야 하는 주의사항 정도로 격하되어 버렸다.

제르멘의 어머니 아로아 왕비는 노산으로 제르멘을 낳다 죽었기 때문에 제르멘은 그 전설을 아버지를 통해 들었다. 시리어스 선왕은 반쯤은 비웃듯 그 이야기를 흘렸지만 제르멘은 자신의 왕비가 그 전설의 '쌍둥이'를 낳았다는 것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오셨습니까."

"음, 날씨가 좋군. 아이들은?"

맑은 하늘을 그대로 담아둔 것처럼 푸른 눈이 생긋 웃었다. 조금 길어져 어깨에 닿을 것 같은 은발은 솜씨 좋게 다듬어져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그러나 그의 맞은편에 앉은 그의 왕비, 베델리어의 얼굴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베델리어의 얼굴은 눈앞에 돌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둡고 평온했다.

"지금은 낮잠 시간입니다."

"아쉽군. 보고 싶었는데."

제르멘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웬만한 소녀들이라면 한눈에 마음을 빼앗길 그 미소도 베델리어에겐 그다지 큰 타격이 되지 않는다. 무심하게 차를 홀짝이며 베델리어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오신다고 하셔도, 워낙 까다로운 아이들이라..."

"샤사처럼, 말인가?"

베델리어의 미간이 그냥 보기에도 티가 날 만큼 확 찌푸려졌다. 제르멘이 그녀의 그런 반응을 즐기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드래곤 샤사에 대해서만큼은 냉정해질 수 없었다.

베델리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정확히는 열세 살 소녀였을 때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다혈질이고 정의감에 넘쳤다. 레뮤엘은 법과 규범의 힘으로 사람들을 대했지만 그녀의 생각에 법보다 가까운 것은 주먹이었고, 따라서 법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훨씬 더 눈과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녀가 자주 놀러가는 부두에서 드래곤의 알을 밀수입하는 장면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베델리어는 치안관에게 신고하기보다 드래곤을 알을 훔치는 것을 선택했다. 한 나라의 왕녀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담한 짓이었다. 알이 밀입국 반입 금지 품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거래 대상'을 훔치는 것으로 간단히 거래를 무산시켜 버렸던 것이다.

문제는 그 후였다.

부화 직전의 알은 베델리어의 부주의로 조금 깨져 버렸고,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드래곤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베델리어는 드래곤을 성으로 데려와 키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륙 최초로 인간이 ‘기른’ 드래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열여섯 살이던 레뮤엘이 처음에 베델리어의 방에서 드래곤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감은 레뮤엘은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물었었지.

'라퓨타에서 허가는 받은 것이냐?'

그런 샤사, 어린 시절을 함께했고 늘 자유롭게 살아가던 샤사는, 지금 델토르의 콜로세움에 마련된 초거대 우리에 갇혀 있다. 그 커다란 날개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베델리어가 찾아오기만을 매일 매일 기다리며.

살짝 한숨을 내쉬며 베델리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즐거운 듯,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등을 기대 앉은 작태가 베델리어에게는 오만하게 보였다.

레뮤엘에게 제르멘과의 협상에 대해 들었을 때는 이미 전쟁이 끝난 다음이었다. 전쟁 후 돌아온 레뮤엘에게서 베델리어는 처음으로 자신이 레뮤엘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 때문에 레뮤엘이 고뇌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연히 베델리어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델토르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레뮤엘은 아끼는 여동생을 그렇게 희생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국혼을 무산시키려 했지만 베델리어의 고집은 결국 레뮤엘을 꺾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 아이들은 늘 이 시간엔 낮잠인 건가?"

"예."

"그렇군. 나도 이만 가볼까. 차, 잘 마셨소."

입도 대지 않은 밀크티가 살짝 미지근해져 있었다. 빙긋 웃으며 왕비의 방을 나온 제르멘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제르멘은 그대로 느긋하게 성 안에 새로 만든 자신의 도서고로 향했다. 문을 열자 책 특유의 종이 향기가 훅 끼쳐 왔다. 특별히 자신이 사랑하는 책들만 엄선한지라 어디를 보아도 행복한 제목들뿐이다. 왕이 되어서 좋았다고 생각한 유일한 것이었다.

사랑스럽다는 듯, 제르멘의 손이 책등을 쓸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하늘빛 눈동자가 그중 한 권을 골라들었다. 펼친 책은 두꺼웠지만 책등이나 표지 곳곳이 헤어져 있었다. 꽤 오래된 책인 것 같았지만 제르멘은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내어 섬세한 손가락으로 글줄을 훑었다.

"쌍둥이..."

붉은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었다. 푸른 눈이 반짝이며 오래된 글귀를 훑었다. 손가락이 문득 멎었다. 그리고 뭔가 고민하듯 톡톡 글귀를 두드렸다.

'-태양은 그 빛을 잃고 스스로 무너지도다.'

제르멘은 그 글귀가 마음에 걸렸다. 만일 학자와 술사들의 해석이 맞다면, 자의든 타의든 현재 델토르의 왕인 제르멘은 분명 그 '무너지는' 태양이 된다.

베델리어가 쌍둥이를 낳았을 때부터 제르멘은 그 예언을 떠올렸고, 오래된 델토르의 역사를 몇 번이고 훑었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그 예언은 자신을 향한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제르멘은 실망스럽지 않았다.

베델리어는 그 예언을 모른다. 쌍둥이가 스타시아 왕가에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스타시아 왕가의 사람들뿐이다. 심지어 고지식한 비안테 공작도 쌍둥이의 예언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제르멘이 책을 내려놓고 등을 기댔다. 그러나 푸른 눈에는 고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어딘가 즐거워하는 눈으로, 제르멘은 짐짓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제르멘이 몸을 일으켜 도서고의 다른 챕터로 향했다. 빼곡한 책들을 한참 뒤지다 드디어 원하는 책을 발견한 제르멘이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훨씬 얇고 표지도 깔끔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나온 책인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삽화와 글을 훑던 제르멘의 눈이 빛났다. 황홀하다는 듯 제르멘의 손가락이 삽화를 쓰다듬었다. 빙그레 호선을 그리는 입술은 분명 미소를 짓는데도 오싹한 느낌이었다.

* * *

라이오넬 기사단의 현 단장 데미안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그는 늙고 못생긴 상인을 데리고 제르멘에게 가는 중이었다. 뒷문을 통해 조용히 성으로 들어온 상인은 데미안을 따라 어둡고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북쪽 별관 건물에서 제르멘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르멘의 은밀한 명령은 늘 그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하나같이 역겹고 잔인하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데미안은 어떤 명령을 받든 제르멘에게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오오, 왔군."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폐하."

늙은 상인은 변죽 좋게 모자를 벗어 예를 차렸다. 그 몸짓은 예의바르다기보다 우스꽝스럽게 보였기 때문에 제르멘은 웃음을 터뜨리며 상인에게 의자를 권했다. 의자에 달랑 올라앉은 상인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것을 꺼내놓았다.

"말씀하신 녀석입니다."

"아하, 이것이..."

제르멘이 흥미로운 얼굴로 가죽 주머니를 여는 주름투성이 손을 지켜보았다. 주머니가 열리고 그 안에서 손바닥만 한 유리병이 나왔다. 유리병 안의 무언가를 보고서, 데미안은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어차피 제르멘의 일이니 이번에도 좋은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토독, 톡.

병 안에 갇힌 것이 유리벽을 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책에서 봤던 것보다 더 작군."

"작긴 하지만 틀림없는 놈입죠."

제르멘이 감탄하는 눈으로 살짝 손을 뻗어 유리병을 건네받았다. 희미한 등불에 비쳐 밝은 초록색의 몸체가 빛을 냈다.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물리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위험하지만 그만큼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상인의 찬사에 제르멘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데미안이 품에서 금화가 든 자루를 건네주었다.

"그럼, 안녕히 가시게."

상인이 자리를 비운 뒤, 데미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제르멘을 바라보았다.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유리병을 바라보며 쿡쿡대던 제르멘이 데미안의 시선을 느끼곤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궁금한가 보네, 그렇지?"

"...예."

사실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지만 데미안은 제르멘이 그렇게 물을 때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데미안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제르멘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키베라 꽃을, 알고 있나?"

"...?"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뜰 때만 꽃을 피운다는 까다로운 꽃이지. 극상의 달콤함과 향기로 천적 또한 많은 꽃인데, 그 꿀을 얻는 대가로 꽃을 지키는 호위가 바로 이 녀석이야."

제르멘이 유리병을 쓰다듬자 다시 초조하게 유리병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르멘이 황홀한 눈으로 병 안의 털투성이 다리를 가리켰다.

"이름은 쉬비어라고 하는데, 지킴이라는 뜻이지. 이름대로 아주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풀과 꽃을 사랑하는 우아한 아이라고 해. 아름답지 않아?"

"...예."

전혀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데미안은 제르멘이 자신의 의견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충 대답하긴 했지만 제르멘은 역시 데미안의 대답이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녀석이, 나도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싱긋 제르멘이 병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른 손가락만한 밝은 초록색 거미가 그 안에서 제르멘을 마주보고 있었다. 털투성이 다리와 동그란 몸체는 짧고 촘촘한 밝은 초록색 털로 덮여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그저 초록색 잎사귀처럼 보일 정도였다.

거미의 쨍한 초록빛은 누군가의 눈을 떠올리게 했다.

"...이아네를 닮았군."

제르멘이 약간 그리운 듯 중얼거렸다. 이아네. 제르멘밖에 모르던, 평생을 제르멘을 위해 바쳤던 어리석은 기사.

"대체 어디에 필요하신 겁니까?"

데미안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물었다. 웬만해서는 데미안의 질문을 무시하는 제르멘이지만 이번만큼은 마치 좋은 질문이라는 듯 환하게 웃어 왔다.

"사람들은 말이야... 상식 외의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지."

"...?"

"이를테면, 별의 목소리라든지, 예언이라든지... 신비롭고, 두렵고, 어리석은 것들."

데미안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제르멘의 말은 평소에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오늘은 특히 심했다.

"하지만, 결국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잖아?"

"무슨 말씀을...?"

데미안이 조용히 물었지만 제르멘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피식 웃었다.

"예언을 바꿀 수 없다면... 실체를 바꾸어야지."

데미안은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제르멘에게서 애초에 제대로 된 대답을 얻어낼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좀 심했다.

"이런, 불만스러워 보이네. 그렇지?"

"...아닙니다."

제르멘이 유리병을 내려놓고 살짝 웃었다. 달빛에 비춰진 은발이 오싹한 윤기를 발했다.

"그래, 불만스러워도 참아야지 어쩌겠어. 그대의 사랑스러운 딸은, 그대가 벌어오는 돈이 아니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대를 아빠라고 부르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

데미안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제르멘은 데미안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경멸과 질시 속에서도 자신에게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굴욕의 표정이 즐거웠다. 이아네처럼 온전한 순종의 얼굴도 귀여웠지만, 역시 복종과 굴종의 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는 것만큼 환상적이진 않다.

"이름이 뭐랬더라, 미사...?"

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달빛이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검을 빛냈지만 그럼에도 제르멘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이런 일은 몇 번이고 있었던 데다, 데미안은 제르멘을 절대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흐음, 이런 달빛 아래의 마지막도 나쁘진 않네."

"당신이란 인간은...!"

"음? 잘 안 들리는데. 좀 더 크게 얘기해야지?"

데미안이 이를 가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칼이 목에 들어왔는데도 대단한 여유였다.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릴 테다."

"기대되는데. 어떻게 죽일 거지?"

제르멘이 벌써 흥미가 떨어진 얼굴로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데미안은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낮게 한숨을 내쉰 뒤 검을 거두었다.

"이런, 자네는 너무 감정적이야. 이래서야 기사단장이라고 하긴 힘들겠어."

"...죄송합니다."

어둠 속으로 물러난 데미안의 목소리는 다시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제르멘은 당연하다는 듯 유리병을 소중히 끌어안으며 무심하게 몇 마디 던졌다.

"내 목을 노린 죄는 크지. 그 죗값만큼 이번 달 월급도 깎아야겠어."

"......"

"원래대로라면 사형이라구. 겨우 월급 삭감 정도로 봐 주다니, 난 정말 자비로운 왕이야."

제르멘이 쿡쿡대는 동안, 데미안은 끝없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자신의 '빚'을 생각하며 절망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데미안은 원래 각국을 떠돌아다니던 용병이었다. 디날에서도, 델토르에서도, 닷테 산맥 너머의 썬앤과 카시스에서도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그가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그는 일을 했고, 일이 끝나면 돈을 받아갔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평화로운' 나날들은 어마어마한 거액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그에게 들어온 의뢰는 델토르 국왕의 암살. 위험부담은 컸지만 수당 역시 매력적이었기에 데미안은 잠시의 고민 후 무기를 챙겼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숨어들어간 왕의 침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제르멘과 그의 호위들에게 산 채로 붙잡혔다.

"아픈 딸이 있다지?"

제르멘이 부드럽게 묻는 순간, 데미안의 삶은 그의 의지를 벗어났다.

데미안의 삶의 이유, 그의 마지막 사랑, 살아가기 위한 빛이며 의지이며 소망인 그의 어린 딸 미사는 원인 모를 괴질로 일 년 넘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좋다는 약을 다 써 봤지만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하는 것은 아주 비싼 약재가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 약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살리고 싶었다. 살아만 준다면 좋다고 생각했기에, 데미안은 제르멘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을 인질로 잡히고 역겨운 짓을 계속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데미안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멀어지는 제르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잘난 등짝에 검을 꽂는 상상은 수백 번도 넘게 했지만 오늘은 특별히 천 번쯤 꽂는 상상을 하면서.

베델리어는 왠지 모를 섬뜩함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들 루비엔을 본능적으로 더욱 감싸 안으면서 베델리어는 이상한 오싹함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시엔에게 젖을 먹이던 유모가 의아한 눈으로 베델리어를 바라보았다. 아기들의 방은 평소와 똑같았다.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흘러드는 참이었다. 창 바깥에서 희미한 꽃향기가 풍겨왔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안락한 풍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베델리어는 여자만의 직감으로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다. 어쩐지 목이 마르고 심장이 뛰었다.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젖을 빠는 루비엔은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없이 느긋하게 입을 움직일 뿐이었다.

젖을 다 먹이고 아기들이 잠이 드는 것을 지켜보는 그 순간까지도 베델리어의 심장은 계속 뛰어 댔다. 포대기에 감싸여 요람에 나란히 누운 두 아이가 입맛을 다시며 한참 잠에 빠진 것을 지켜본 후에야 베델리어는 방에서 나왔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곁에 있고 싶었지만 샤사를 돌보러 가도 괜찮다는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베델리어는 낮게 한숨을 쉬며 방으로 돌아갔다.

베델리어가 방을 나서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쯤, 아기 방의 문이 열렸다.

유모는 창가에서 레이스를 뜨다 까무룩 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문이 열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방 안을 훑은 침입자가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아기들이 잠든 요람으로 다가간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기들의 감은 눈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단잠에 빠진 아기들이 반응이 없자, 침입자가 살짝 손을 내밀어 아기의 뺨을 살짝 쓸었다.

막 자아낸 비단처럼 부드러운 살결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만족스러운 듯 거두어진 손이 이번에는 품속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폭, 하고 코르크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깊이 잠든 유모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유리병이 뒤집어지더니 아기들 위로 밝은 초록색 생물이 떨어졌다.

잠시 당황한 듯 미동도 없던 생물은 이윽고 천천히 털투성이 다리를 움직여 왼쪽에 누운 아기의 어깨를 타고 요람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침입자가 조용히 다시 아기들의 방을 나왔다. 소리 나지 않게 방을 나와 자신의 갈 길을 걷던 발이 문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거미를 떨어뜨린 아기가 여자아이였나, 남자아이였나?

잠시 망설이던 발이 곧 확신을 가지고 다시 움직였다.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야.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은발이 봄바람에 나부꼈다. 푸른 하늘을 닮은 연한 하늘색 눈이 즐거운 듯 호선을 그렸다.

* * *

오랫동안 유리병 안에 갇혀 있다가 갑작스럽게 자유를 찾은 쉬비어 거미는 조용히 요람 속으로 숨어들어 한숨 돌렸다. 느긋하고 편안한 방의 분위기가 전염된 것인지, 거미는 일단 자신을 자극하지 않는 이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조용히 젖내가 풍기는 요람 속에 숨어 독침을 숨기고 지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거미도 아기들을 따라 잠이 들었다.

시간이 꽤 지났을 것이다. 갑자기 아기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아기들이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하자, 깜짝 놀란 유모도 잠에서 깨어 아기들을 어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저귀에 실수를 한 모양인지, 유모는 드디어 손을 뻗어 아기를 포대기에서 빼냈다. 갑작스럽게 요람이 흔들려 깜짝 놀란 거미는 포대기 속으로 더 깊게 숨어들어갔다.

"아유, 우리 왕자님 실수하셨네."

유모가 사랑스럽게 아기를 어르며 기저귀를 갈아 주었다. 엉망이 된 기저귀를 빨래 바구니에 넣고, 유모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기를 감쌌던 포대기도 같이 넣었다.

평소엔 다시 포대기에 감싸 눕히지만 어차피 여긴 성이고, 그녀가 돌보는 아기는 보통 아기가 아니라 델토르의 스타시아 왕가를 잇게 될 아기다. 포대기든 기저귀든 넘칠 만큼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새 포대기로 갈아 요람에 다시 눕혔다.

순식간에 빨래 바구니 안으로 자리를 옮긴 거미는 긴장한 듯 경직된 몸으로 가만히 주변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여전히 아기들은 울고 있었고, 유모의 바쁜 발걸음은 잔잔한 진동을 전하며 계속 거미를 자극했다. 살짝 짜증이 난 거미가 입맛을 다시는 순간,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젤, 새 기저귀예요."

"어머나, 매번 고맙기도 하지. 빨랫감은 저쪽이야."

"네."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고, 바구니가 통째로 들렸다. 가장 위에 있던 포대기 안에 있었기 때문에 시종 아이의 목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렸다. 거미는 몸을 움츠리고 언제든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독낭을 열었다.

"참, 셀린. 벌써 스위트젬이 피었니? 향기가 아주 좋더구나."

"앗, 맞다. 말씀드린다는 걸 깜박했네요. 오늘 정원사님이 새로 꽃을 다듬어 주실 거예요. 이따 저녁 식사 전에 꽃병을 갈아드리러 올게요."

"부탁할게."

다시 바구니가 움직였다. 잔뜩 긴장한 거미의 예상과는 달리 빨래 바구니를 양손에 든 시종은 씩씩하고도 익숙하게 시종 식당으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식당 근처의 커다란 빨래터에 먼저 들러야 하지만 오늘은 조금 사정이 달랐다. 시종용 식당의 셰프 브리넬이 어린 시종들을 위해 쿠키를 구워 주었던 것이다. 셀린 몫의 쿠키 봉지를 받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가려다, 셀린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식당 문 옆의 테이블에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통, 하는 작은 진동과 함께 바구니의 움직임이 멎자 거미가 살짝 포대기 자락 사이로 바깥을 살폈다.

"우와아아! 늦었다아!"

갑작스럽게 들린 큰 소리에 깜짝 놀란 거미가 다시 포대기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후다닥 달려온 또다른 시종 아이가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곤 식당으로 달려 들어갔다.

"늦었구나, 제이미."

"제 것도 아직 있죠?"

"다행히도. 자, 여기 있다."

"오오오!"

식당 안에서의 소란은 거미에게 더 이상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거미는 지금 싱그러운 풀과 꽃향기가 풍기는 밀짚모자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상인에게 잡혀 유리병 속에 갇힌 뒤 제대로 무언가를 먹지도 쉬지도 못했다. 본디 풀과 꽃 사이에서 살아가는 쉬비어 거미에게 모자에서 흘러나오는 푸릇한 풀물과 향기로운 봄꽃 냄새는 감격스러울 만큼 그리운 것이었다.

거미의 발이 움직였다.

바구니 끄트머리에 선 거미가 툭, 하고 모자 위로 떨어졌다. 모자는 낡아서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기 때문에 거미는 아주 쉽게 풀 향기 가득한 모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데일 씨에게 안부 전해주렴."

"네!"

거미가 모자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순간, 시종 아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입 가득히 쿠키를 우물거리며 시종 아이가 모자를 다시 머리 위로 눌러썼다.

바구니 안보다 모자 속이 훨씬 흔들리고 불안했지만 거미의 발톱은 날카로웠고 모자는 울퉁불퉁했다. 거미가 붙잡고 있기엔 충분했다.

시종 아이는 시종 식당 뒷마당을 가로질러 왕성 온실로 향했다. 정원과 맞닿아 있는 온실에서는 왕성 곳곳에 꽂혀 복도와 방을 장식하게 될 꽃다발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데일 씨!"

"임마, 늦었잖냐."

왕성 정원사 데일이 짐짓 화가 난 것처럼 어린 제이미의 어깨를 툭 쳤다. 제이미가 낄낄 웃으며 가져온 쿠키 봉지를 건넸다.

"여기, 브리넬 씨가 갖다 달래요."

"오오!"

정원사는 체면도 잊고 테이블에 주저앉아 봉지를 찢었다. 고소한 버터 향기가 참을 수 없게 후각을 자극했다. 데일이 쿠키에 열중하는 동안 제이미가 슬그머니 그 옆에 앉았다. 데일이 방금 완성한 꽃다발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쿠키 봉지 앞에 누워 있었다.

"엄청나네요."

"헤헤, 솜씨 좀 부려 봤지. 어떠냐? 역시 봄에는 스위트젬이지."

화려한 연분홍빛 꽃이 아름답게 중심부를 장식하고, 드문드문 리시안셔스가 끼어들어 향기를 더했다. 봄꽃의 대명사인 스위트젬의 향기가 근처만 가도 황홀했다.

"우와아..."

제이미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이밀며 향기를 맡았다. 코가 벌름대며 봄의 향기를 마음껏 끌어들이는 순간, 그새 쿠키를 다 먹은 데일이 제이미의 뒤통수를 탁 쳤다.

"으앗!"

-툭.

세게 치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런 공격에 제이미의 모자가 꽃다발 위로 떨어졌다. 모자 속의 거미가 여섯 개의 까만 눈을 빛냈다. 싱그러운 향기와 자연의 냄새가 훅 끼쳐 오자, 거미는 얼른 안식을 찾기 위해 꽃다발로 내려섰다. 발끝에 닿는 보드라운 스위트젬의 꽃잎과 풀 향기에 파묻히며 거미는 행복한 듯 스위트젬의 꽃잎 뒤에 몸을 붙였다.

"임마, 조심하란 말야. 소중한 스위트젬이 뭉개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냐."

"쳇, 조심하고 있었다구요."

제이미가 중얼거리며 모자를 다시 집어 들었을 때, 이미 거미는 꽃다발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자, 그럼 나는 이걸 장식하고 올 테니까, 스위트젬을 충분히 잘라 둬라. 한 다발에 스물다섯 송이씩이야. 틀리면 안 된다."

"예에에."

제이미는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데일은 그가 결코 일을 건성으로 처리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느긋하게 성으로 향했다.

정원사의 신분으로 성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일 년 중 딱 네 번. 계절이 처음 시작할 때마다 첫 꽃을 성의 심장부에 장식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데일이 부지런히 걸어 다다른 곳은 레온 홀이었다.

왕이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곳은 집무실이나 회의실, 침실이지만 왕좌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레온 홀이다. 황금 사자가 아름답게 새겨진 왕좌 뒤로 금실로 짠 태피스트리가 늘어져 있었다.

"어잇차."

데일이 왕좌 곁에 세워진 수반에 꽃다발을 올려두었다. 꽃다발이 물을 머금으며 한결 생생해졌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잠시 감상한 데일은 흐뭇하게 웃고선 손바닥을 탁탁 털며 레온 홀을 떠났다.

조용해진 레온 홀에 스위트젬의 향기가 느릿하게 퍼져 갔다. 그 향기 속에서 느긋하게 다리를 펴며 쉬비어 거미는 이제 드디어 좀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기지개를 켜듯 쭉 편 다리를 다시 거두어들이며 거미의 눈동자가 졸린 듯 살짝 흐려졌을 때였다.

"음? 스위트젬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계절의 초하루로군요."

"벌써 봄인가."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와 느긋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거미의 눈이 다시 짜증으로 가득 찼다. 이제 좀 쉴 만 한가 했더니 또!

"언제 봐도 아름다운 꽃이군."

아까보다 훨씬 커진 목소리가 거미의 신경을 자극했다. 따닥, 입가의 집게가 독으로 물들며 신경질적으로 움직였다.

부스럭.

싱그러운 스위트젬의 향기 사이로 하얀 기둥 같은 손가락이 스며들었다. 마치 고양이를 어르듯 꽃잎을 쓰다듬는 손가락이 바로 거미의 눈앞에서 움직였다.

거미가 눈을 빛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온다면, 조금만 더...

그대로 손을 뺐다면 거미에게도 사람에게도 아무 일 없었을 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음 순간 손가락은 더욱 깊게 들어와 스위트젬의 꽃받침을 검지와 중지에 끼워 뽑으려 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거미가 제 턱밑으로 들어온 커다란 손가락을 불쾌하게 내려다보았다. 하얀 손가락에선 희미하게 용담꽃 향기가 났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거미는 입가의 집게를 있는 대로 벌렸다. 잔뜩 고인 독낭에서 주체하지 못한 독 한 방울이 동그랗게 맺혔다.

그리고 그대로, 가차 없이-

-따끔.

"...?"

"왜 그러십니까?"

"...아니, 뭔가 따끔한 것이..."

"이런! 괜찮으십니까? 가시를 덜 다듬었나 봅니다!"

백발이 성성해진 노공작이 호들갑을 떨었다.

"정원사를 바꿔야 할 때가 왔나."

어깨를 으쓱하며 수반 옆의 보좌에 망설임 없이 엉덩이를 붙인 제르멘이 부드럽게 흩어지는 은발을 정리하며 미묘한 푸른 눈으로 스위트젬을 바라본다. 왕좌의 주위로 시종들과 군신들이 바쁘게 제자리를 찾아 섰다.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찬 레온 홀에 노공작의 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에, 이 자리는 다음 달에 있을 델토르의 왕자 저하와 공주 전하의 첫 번째 생일을 치하하기 위한 것으로-"

"-!?"

문득, 뱃속에서 치미는 메슥거림에 섬세한 손이 급히 토기가 올라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왠지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었다.

"...폐하?"

"...미안하군. 몸이 좀...!"

말하는 도중에 강렬한 어지럼증이 관자놀이를 타고 올랐다. 앉아 있는데도 몸을 가누기 어려워, 옥좌의 팔걸이를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지만 그것이 고작이었다.

이상했다.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감각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폐하,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창백하십니다."

"...쉬어야겠...어...!"

옥좌를 짚고 겨우 몸을 일으키는 순간, 뜨거운 덩어리가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몸이 크게 꿀렁이자 입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 핏방울이 튀었다.

"폐, 폐하!"

바로 옆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손을 허우적대며 지탱할 것을 찾다, 왕좌 옆의 스위트젬 수반을 넘어뜨렸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은발의 왕이 주저앉는다. 흩어지는 스위트젬의 꽃잎 사이로 밝은 초록색의 잎사귀 같은 것이 살짝 삐져나왔다.

"크...읏..."

고통스러운 신음이 붉은 입술 사이로 흘렀다. 아름다운 선을 그리던 입술이 불규칙하게 일그러져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이 되었다. 입술보다 붉은 피가 바닥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 귀가 찢어져라 높아지는 비명이 아주 멀리 들렸다. 차가워진 손이 부들부들 떨며 울컥, 목구멍을 따라 올라오는 핏덩이를 막았다. 꿀렁이는 복근이 뇌의 명령과 상관없이 강하게 죄어들자, 밭은기침이 덜덜 떨리는 손바닥으로 쏟아졌다.

"어의를 불러라!"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초점을 잃어가는 푸른 눈동자가 오랫동안 닦지 않은 거울처럼 부옇게 흐려졌다. 바닥에 고꾸라진 왕의 정복이 피로 물들어 갔다.

시종들의 비명과 바쁘게 오가는 발자국 소리가 자꾸만 멀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추스르며 일어나려 하지만 감각이 없어진 손은 유령처럼 하얗게 핏기를 잃어갔다. 모든 것이 뒤집어진 시야에 딱 하나, 밝은 초록빛으로 빛나는 느릿한 움직임만 선명했다.

그것은 느긋하게 털투성이 다리를 움직여 반질반질한 돌바닥을 가로질렀고, 그 움직임의 궤적을 좇는 푸른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이윽고 그 밝은 초록빛의 마지막 움직임마저 보이지 않게 되자 마침내 죽어가는 목소리가 어떤 이름을 내놓았다.

"...이...아네...!"

공포에 젖은 술렁임이 성 전체를 휘감았다.

손가락의 마비와 괴사를 막기 위해 시종 대여섯이 달려들어 밤낮으로 팔다리를 주무르고 음식조차 제대로 삼킬 수 없는 퉁퉁 부은 목구멍으로 물과 약을 흘려 넣느라 의사들의 옷이 엉망이 되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팔다리에 방 안은 금세 부서진 집기들로 가득해졌고, 피가 섞인 토사물의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다.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것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노공작이 부르짖었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름답던 푸른 눈은 고통에 젖어 흐릿해졌다. 늘 깨끗하고 윤기가 흐르던 은발은 기름이 끼고 토사물이 묻어 짧게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피부 위로 검푸른 핏줄이 보기 흉하게 불거져 부드러운 하얀 피부는 흔적도 없다.

단 이틀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쉬비어 거미의 독은 단 한 번의 입질로 어린아이를 순식간에 죽일 만큼 강하다. 끔찍할 만큼 빠른 속도로 퍼진 독은 피와 신경을 타고 단숨에 제르멘의 몸을 지배했다. 고통을 부르짖는 혀가 검푸르게 부어올라 가끔씩 뜻 모를 괴성을 질러댔다.

"이이아에엑-!"

가끔씩 괴성은 고통이 아니라 분노에 가득 찬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 고통이 가라앉을 때뿐이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마다 곧 호흡이 모자란 가슴이 씨근대며 아래위로 흔들렸다.

"......"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위하는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데미안은 그 참상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주군이 끔찍한 몰골로 변해가는 것을 기꺼이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밤을 새면서까지 그의 침대 곁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그의 왕이 증상이 심해질 것 같으면, 의사가 비상시에 쓰라고 쥐어준 강한 마약을 먹였다. 마약의 성분으로 잠시 고통이 늦춰질 때마다, 그의 왕은 핏줄이 검게 도드라진 손을 덜덜 떨며 데미안의 손을 거부했다.

'차라리 죽여.'

겁에 질린 푸른 눈동자가 데미안에게 외치고 있었지만 데미안은 그럴 때마다 안타까운 듯한 얼굴로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죽일 거냐고 묻지 않았나?"

"크...으...으으으...!"

고통에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지그시 누르며, 데미안은 어쩔 수 없는 복수의 기쁨을 맛보았다.

독의 종류만 안다면 약의 조합으로 독이 퍼지는 것을 막거나 해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제르멘이 당한 독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쉬비어 독거미를 직접 목격한 데미안뿐이었다. 어쩌다 그가 독거미에 당한 것인지는 모르나, 데미안은 용병으로서 살아오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던 사람이었고 놀라운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 놀라운 일이 자신에게 즐거운 방향이라면 기꺼이 마음을 내려놓고 즐거워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사들에게 독거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미 독이 상당히 진행되어 시종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이 괴사하고 있었지만 데미안은 제르멘이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을 때 말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의 고통이 더욱 지속될 테니까.

데미안의 눈이 음습한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더욱 더 고통스러워해라. 네가 준 고통만큼, 네가 뿌린 악행을 거두고 가라.

데미안은 고통 속에서 겨우 헐떡이는 볼품없는 왕을 내려다보았다. 독이 신경에까지 작용하기 시작한 듯, 쓰러진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오른쪽 눈의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의사냐!"

비안테 공작이 길길이 날뛰며 난동을 부렸지만 제르멘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 시력 따위 아무래도 좋다. 고통을 멈추게 하기 위해 좋다는 약재는 다 내어왔지만 오른손의 검지는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

왕의 손가락을 잘라내다니 안 될 말이라며 비안테 공작이 다시 난리를 치지만 않았어도, 독은 더 이상 퍼지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안테 공작은 의사가 아닌 귀족이었다.

"폐하께 손가락 하나 대지 마라! 무능한 놈!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다른 방법을 생각하란 말이다!"

씨근대던 노공작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눈으로 다시 델토르의 왕을 내려다본다. 단 이틀 만에 볼품없어진 몰골로, 제르멘이 고통에 잠겨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비안테 공작은 울먹이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감히 간 크게도 델토르의 왕을 암살하려 한 인물을 추렸다. 가장 의심 가는 것은 지금 제르멘의 곁에 서서 제르멘이 몸부림칠 때마다 내리누르는 저 기사단장이었다.

그러나 제르멘이 쓰러질 때 그는 곁에 없었다. 그것은 비안테 공작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비안테 공작이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서 있는 왕비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짙푸른 눈동자를 공포와 의문으로 물들이고 간신히 서서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는 여자. 비안테 공작에게 평생의 숙적인 디날의 핏줄을 이은 왕비.

비안테 공작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지만, 안타깝게도 왕비 역시 왕이 쓰러질 때 성에 없었다. 그때 그녀는 콜로세움에 있는 자신의 드래곤을 돌보러 가 있었다. 끔찍스럽게도, 그 허가를 내어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비안테 공작이 다시 그의 왕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순수한 스타시아 왕가의 마지막 혈통이 이대로 사라지고 마는가. 너무 기가 막혀서 이젠 눈물도 나질 않는다.

"더 이상 방법이 없어...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썼어. 겨우 죽지 않게 연명할 뿐이야."

"차라리 돌아가시는 것이 더 편안하지 않을까..."

우연히 침대 곁에서 의사들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서, 데미안은 아무도 모르게 레온 홀로 향했다.

델토르의 왕이 쓰러진 지 사흘째 되던 날, 레온 홀 구석에서 밝은 초록색 거미가 발견되었다. 거미를 발견한 데미안이 의사들에게 그것을 알렸고, 의사들은 서둘러 거미의 독에 저항할 약의 조합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제르멘의 상태는 이미 손쓸 수 없이 악화된 상태였다. 새로운 약의 조합으로 독의 진행은 늦출 수 있었지만 그것은 제르멘에게 있어 또 다른 지옥이었다.

고통은 조금 사그러졌지만 이번에는 사경을 헤매는 고열이 지속되었다. 독에 저항하는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해독제를 드셨잖느냐, 왜 아직도 나아지지 않는 거냐!"

발을 동동 구르는 비안테 공작의 얼굴이 그 며칠 새 더 늙어 있었다.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안타까운 눈이었지만 의사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미 독이 너무 진행되었습니다. 일주일을 넘기실 수 있을지..."

"오오, 폐하, 폐하...!"

비안테 공작이 오열하며 제르멘의 침대 곁에 머리를 묻었다. 평생을 바쳐온 스타시아 왕가의 '순혈'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그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일일 터다.

그러나 데미안은 노공작의 오열을 들으면서도 차가운 눈으로 제르멘을 내려다보았다.

미사도, 늘 이렇게 아팠다.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금세 열이 올라 헛것을 본 적도 여러 번이었고 독한 약을 너무 자주 먹어 여자아이인데도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버렸다. 누가 보더라도 볼품없지만, 데미안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천사 같은 아이였다. 그 아이를 모독했던 것 치곤, 이 정도면 꽤 봐줄 만하지 않은가.

꼴좋군.

"으, 허어... 이, 아네..."

"...?"

데미안은 열에 들뜬 그의 목소리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들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더운 숨을 내쉬는 입가 근처로 귀를 가져갔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아아! 안... 돼에... 으으아..."

데미안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아네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 기억이 났다. 일 년쯤 전에 겁도 없이 성으로 숨어들어와, 빼낼 것이 없어지자 가차 없이 사창가에 팔았던 가엾은 첩자.

그의 헛것을 보는 걸까. 데미안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갑자기 제르멘이 데미안의 손목을 잡았다. 꺼멓게 괴사한 데다 사흘 밤낮을 앓은 것치고는 꽤 센 힘이었다.

"안돼!"

붓기가 조금 가라앉은 혀가 제법 또렷하게 외쳤다. 비안테 공작의 눈이 반가움을 띠는 것도 잠시, 제르멘이 빠르게 고개를 저어 댔다.

"싫어, 시, 싫어...! 나, 나, 나도, 나도 데려가, 데려가, 이아네에에!"

"진정하십시오."

"안 돼, 안 돼, 가지 마, 가지 마...!"

데미안이 너무나도 간단히 제르멘의 손을 떼어냈지만, 앙상한 손은 계속 데미안의 옷자락을 잡으려 허공을 긁었다. 애처롭다고 해야 할지, 순간 오싹할 만큼 처절한 광경이었다.

"잘못...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 그만...!"

"폐하."

"여기는 싫어, 시러, 데려가... 가치 가아..."

"폐하!"

그 순간, 데미안은 평생 이 인간에게서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 것을 보았다. 허옇게 까뒤집힌 푸른 눈의 점막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습막이 피어오르며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흘렀다.

"데려...가..."

"......"

데미안은 조용히 환각에 시달리는 제르멘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데미안에게도 꽤나 못된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고열에 시달리는 환각 속에서 본 것이 '이아네'였다면 그에게는 얼마나 심한 짓을 한 건지 가히 짐작이 가질 않는다.

아니, 그러고 보면 거미의 초록색을 보고서, 그의 눈동자를 떠올렸는지도. 얼핏 본 것이 다지만 분명히 초록색 눈이었던 것 같다.

흐음, 하고 낮은 침음을 흘리며 데미안은 쇠약해진 제르멘에게 이불을 다시 정리해 덮어 주곤 그 위를 두어 번 다독였다. 어린 딸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다정하게, 그러나 여전히 즐거움으로 빛나는 차가운 눈으로.

제르멘의 고열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미음이나 우유로 미약한 생명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독은 여전히 조금씩 그의 몸을 갉아 들어갔다. 오른쪽 눈이 완전히 실명한 뒤에도 제르멘은 약 일 주일 정도를 더 버텼다.

"가! 저리 가! 오지 마아아아!"

"미안해, 미아내, 잘못해써... 잘못해... 했어..."

"가지 마, 두고 가지 마아...! 가지 마... 이... 이, 이아네!"

약 덕분에 독의 진행은 느려졌지만 여전히 환각은 보이는 것 같았다. 반쯤 미친 사람처럼 검게 썩어 들어간 손가락을 허공으로 내지르며 비명을 지르거나,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두려운 것에게서 숨으려고 하거나,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의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제르멘이 예전처럼 돌아올 수 있을 가망은 없어 보였다. 충분히 제르멘의 '벌'을 즐기고 난 후, 슬슬 제르멘의 비명이 시끄럽게 느껴지자 데미안은 제르멘에게 주어야 할 약을 '실수로' 주지 않았다.

해독제로 겨우 누르고 있던 독의 진행은 마치 억누른 용수철이 튀는 것만큼이나 거세게 밀려들었다. 아침에 먹었어야 할 약을 건너뛰기 무섭게 제르멘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다시 방을 뒤흔들었다.

퍼득이는 마른 가슴이 애처롭도록 거세게 흔들렸다.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비와 비안테 공작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핏발이 터진 붉은 눈으로, 제르멘은 끝없이 버둥거렸다. 의사와 시종들이 그의 팔다리를 눌렀지만 입은 막지 못했다.

문득, 제르멘의 숨이 잠시 멎더니 몸이 뒤틀렸다. 이윽고 제르멘의 얇아진 배가 움푹 들어가더니-

"-커헉!"

"폐하!"

제르멘이 다시 피를 토했다. 이번만큼은 사태가 심각해 보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피는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색이 아니었다. 제르멘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어 가더니, 손발의 경련이 서서히 멎어갔다.

"...폐하?"

"...크...으..."

"폐하?!"

멍해진 눈이 허공을 응시했다. 속절없이 벌어진 피에 젖은 입술이 힘겹게 공기를 빨아들였으나, 결코 다시 내뱉지는 못하였다.

"죽었어?"

"죽었어...!"

"숨을 안 쉬어!"

"세상에!"

공포와, 역겨움과, 경악이 섞인 웅성거림이 방 안에 퍼져 나갔다. 그 소란 속에서 오직 베델리어 왕비와 기사단장 데미안만이, 냉정하고 차분한 눈으로 검은 피에 젖어 있는 볼품없는 시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델토르의 하늘에 쌍둥이별이 뜰 때, 태양은 그 빛을 잃고 스스로 무너지도다. 달과 별의 빛은 더하고 델토르의 주인은 바뀌리라.'

그렇게 제르멘 라 스타시아, 델토르의 국왕은 26살의 젊은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 * *

레뮤엘이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천천히, 깊은 심청의 눈동자가 생각에 잠겨 천장을 응시했다.

'오라버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를 데리러 오실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국왕 제르멘 라 스타시아께서 원인 모를 괴질로 어제 저녁 승하하셨습니다.'

서신을 달리는 유려한 필체는 베델리어의 것이었다. 충격 따위 전혀 받지 않은 듯한 또박또박한 글씨에는 작은 번짐도 떨림도 없다.

'델토르에는 국왕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 저의 아이들을 델토르의 왕으로, 또 디날의 아이들로 키울 생각입니다. 반드시 오라버니께 도움이 되도록 할 생각이니 제 걱정은 말아 주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유일한 스타시아 왕가의 핏줄은 베델리어의 아이들 뿐. 게다가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 당분간은 베델리어가 섭정을 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레뮤엘에게 이 이상 좋은 일은 없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델토르를 여동생의 나라로 만들다니, 로요라 여신께 감사드릴 일이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레뮤엘이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다시 서신을 훑었다.

'다행히도 제 힘이 되어줄 수족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데미안 와드그리드, 현 라이오넬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델토르인은 아닙니다만 믿을 만한 사람이니 괜찮습니다. 저와 제 아이들을 지켜주기로 했으니 제 신변도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없다면 샤사가 폭주할 테니까요.'

레뮤엘이 조금 웃었다.

샤사를 원한 것은 순전히 제르멘의 욕심이었다. 그는 드래곤을 가지고 싶어 했고, 자신이 책임을 지기보단 책임자가 있는 드래곤을 원했다. 아마 그래서 베델리어를 처음 보았을 때, '반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닌데도.

레뮤엘이 살짝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성 안의 잔디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리트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이아네가 보였다.

그에게는 모르는 일로 해 두는 것이 낫겠지. 모처럼 제르멘의 일은 잊어버리고 있으니.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결국 제르멘은 자신의 나라와 라퓨타, 거기다 반려까지 동시에 레뮤엘에게 쥐어준 꼴이 된 것이다. 사람을 장기말로, 전쟁을 게임으로 생각한 그것이 결과적으로 델토르의 주인을 바꾸었다.

레뮤엘이 펜을 들었다. 여전히 여동생의 일은 걱정되지만, 샤사는 어릴 때부터 베델리어가 인정한 사람 외에게는 모두 위험한 존재였다. 베델리어의 허락 하에 몇 번 그 거친 등 위에 올라탄 적도 있었지만 샤사는 마지막까지 레뮤엘에게조차 경계를 늦추지 않았었다.

뇌물이나 배신 따위 모르는 충직한 샤사가 곁에 있는데다 기사단장이 호위를 맡았다면, 당분간은 베델리어의 뜻대로 해도 괜찮을 것이다.

'제르멘 공의 일은 유감이구나. 그렇다고 해도 네 곁에 힘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다. 너라면 잘 해 낼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부탁하마. 당분간 섭정을 하게 될 테니 언젠가 회담을 가지면 만날 수 있겠지. 아, 그리고...'

"오라버니도 참."

베델리어가 쿡쿡 웃으며 신변의 안전과 건강에 대한 잔소리-식사를 잘 챙기라거나 옷을 따뜻하게 입으라거나 잠을 충분히 자라던가 하는-를 건너뛰었다. 왠지 두툼한 서신에 깜짝 놀랐더니 첫 세 줄을 빼고는 완전히 여동생을 챙기는 오빠의 잔소리뿐이지 않은가.

'다음 번 회담에서 조카들을 보여 주겠느냐. 내 반려도, 그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한다.'

레뮤엘의 반려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었지만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가슴이 설레었다. 베델리어가 빙긋 웃으며 아기들이 잠든 요람을 살짝 흔들었다.

"비전하, 이제 가셔야 합니다."

"고마워요, 데미안."

베델리어가 데미안의 호위를 받으며 국정 회의실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가는 이젤다 성의 복도에는 아직도 제르멘의 죽음이 남긴 공포와 우울이 눅진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미사는 좀 어떤가요?"

"좋아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데미안의 거친 얼굴에서 정말 오랜만에-아마 제르멘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제르멘이 죽은 뒤, 베델리어는 비밀리에 그를 불렀다. 제르멘의 사람이긴 했지만, 베델리어는 제르멘에게서 지나가듯 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베델리어는 조용히 데미안에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했다.

'아이를 성으로 데려오세요. 왕국 최고의 의료기술과 그대의 충성심을 거래하도록 하죠.'

처음에 데미안은 그녀를 믿지 못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베델리어의 돈이 아니라 말 한 마디였다.

'저 역시 두 아이의 어머니이니까요.'

미사는 좋아지고 있었다. 제르멘의 수명을 이어받기라도 하듯, 느리긴 하지만 예전처럼 아빠라고 부르며 그에게 미소 지어 준다. 그거면 충분했다. 데미안에게 그 이상의 확실한 보상은 없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이름을 위해 살아온 데미안은 이 새로운 주인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했다.

"그럼 이제..."

베델리어가 미망인을 상징하는 검은 베일을 머리 위로 내려 썼다. 아름다운 얼굴이 베일에 가려지자 준비가 되었다는 듯 그녀가 데미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이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긴 반원형의 책상과 높은 의자들에 앉은 관료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표했다. 우아하게 상석에 올라앉은 베델리어가 문득 빈자리를 보고서 물었다.

"비안테 공께서는...?"

"지병이 악화되셨습니다. 잠시 출사는 무리라고..."

"...어쩔 수 없군요."

심호흡을 한 베델리어의 눈이 엄격하게 빛났다. 두 아이의 어머니임을 떠나, 그녀는 델토르의 왕비다. 국왕이 없는 지금 그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청아한 목소리가 높은 회의장을 울렸다. 창밖으로 붉은 드래곤의 커다란 날개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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