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애칭>
계절이 바뀌어 갔다.
처음 이아네가 디날에 왔을 때는 햇살이 따가운 여름이었는데, 벌써 바람이 차가워졌다. 디날은 바다와 가까웠기 때문에 겨울에는 꽤 따뜻한 편인데도 저녁에는 바람이 매서웠다.
성의 곳곳에 벽난로를 지피기 시작하고, 해가 짧아지면서 이아네가 레뮤엘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둘은 종종 벽난로 앞에서 체스를 두거나, 책을 읽거나, 리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따각.
이아네의 검은 나이트가 움직였다.
"레뮤엘의 애칭은 뭐였습니까?"
"......"
처음에는 다음 수를 고민하는 줄 알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레뮤엘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아네가 의아하게 레뮤엘을 바라보자 레뮤엘이 못 들은 척 룩을 옮겼다.
"그대 차례다."
"...레뮤엘?"
"......"
반응이 없었다.
이아네는 고개를 갸웃 하며 레뮤엘을 재촉하듯 바라보았지만 곧 레뮤엘이 일부러 무시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좀처럼 이아네의 말을 무시하는 일이 없는 레뮤엘이었기에 이아네는 오히려 호기심이 돋았다.
"애칭이-?"
"안 할 건가?"
"아."
이아네가 체스판으로 시선을 내렸으나 이미 체스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이아네가 결국 비숍을 아무 데나 놓고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어, 레뮤엘은 애칭이 뭐였습니까?"
레뮤엘이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어 이아네와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올곧은 눈-일 줄 알았는데,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당혹감이 심청색 눈을 가득 메우고 있어 되레 이아네가 당황해 버렸다.
"꼭... 알아야겠나?"
"예?"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이아네는 결국 호기심에 지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뮤엘이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퀸을 움직여 이아네의 비숍을 잡았다.
"선왕께서 돌아가신 지금이야, 나를 애칭으로 부를 사람은 없지만..."
"...?"
"...난 내 애칭이 마음에 안 들었다."
"왜입니까?"
이아네의 눈이 더욱 호기심으로 차올랐다. 저 철혈과 냉철의 왕이 겨우 애칭을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했다. 이젠 체스 따위 중요하지 않다. 이아네가 눈을 반짝이며 레뮤엘의 입술만을 바라보는데, 레뮤엘은 여전히 자신의 퀸만 노려보는 중이었다.
이아네가 재촉하듯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잠시 미묘한 대치가 계속된다. 그러나 결국 레뮤엘은 이아네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하... 내... 애칭은..."
드물게 망설이던 레뮤엘이 체념한 듯 이마를 짚었다.
"...레미."
"...아?"
레뮤엘이 애써 태연한 척 체스판을 들여다보았지만 이아네는 그의 귀 끝이 붉어진 것을 보고 조금 웃고 말았다.
"선왕께선 레미라고 부르셨다."
레미.
이아네가 입 속에서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레미, 라고. 그래, 어떻게 보면 여자아이 이름 같기도 하고.
"...무엄하군."
"앗, 송구합니다... 쿡쿡."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가 보다. 이아네가 낮게 웃으며 퀸을 움직여 레뮤엘의 비숍 옆에 놓았다.
"그럼, 저도 그렇게 부르면-"
"절대 안 된다."
레뮤엘이 드물게 날카로운 눈으로 단칼에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미 레뮤엘을 너무도 잘 아는 이아네에게 그의 협박이 먹힐 리가 없었다.
"으음, 저는 애칭으로 부르시잖습니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쳇..."
이아네가 곱게 눈을 흘겼지만 레뮤엘이 너무 단호한 태도로 나이트를 움직여 이아네의 퀸을 쓰러뜨리자 더 이상 레뮤엘의 이름을 놀릴 수 없게 됐다.
"아앗!"
"집중했어야지."
"으으, 너무하십니다. '레미'."
결정타였던 모양이다.
그뒤 레뮤엘의 집중력은 빠르게 떨어져 갔고, 이아네는 보기 드물게 레뮤엘에게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게임을 끝낸 후 카우치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한 레뮤엘은 이아네 쪽으로 등을 돌리고 누운 채 이아네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약간 피곤하게 됐다고 느끼면서도 이아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애칭 때문에 삐지는 국왕이 대체 어디 있냔 말이다.
"화 나셨습니까?"
"......"
"죄송합니다. 저도 당신을 애칭으로 부르고 싶어서 그랬던 겁니다."
레뮤엘의 어깨가 살짝 풀어지는 게 보였다. 이아네가 웃음을 애써 눌러 참으며 레뮤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으면, 특별한 느낌이 들 것 같아서..."
"...그대는 이미 특별하다. 애칭 따위 없어도."
이아네는 잠시 감동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렸다. 그러나 일단 대답해준 것을 보면 조금 풀렸구나, 싶어 이아네가 시트 속으로 파고들어 레뮤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탄탄한 허리가 양팔을 뿌듯하게 채워 왔다.
"아니면, 제가 지어 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흠."
레뮤엘이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웃음을 머금은 이아네와 눈이 마주친 레뮤엘이 한숨을 쉬더니 못 이기겠다는 듯 돌아누워 이아네를 마주 끌어안았다. 폐부 깊이 퍼지는 체취가 다정했다.
레뮤엘은 제르멘처럼 향수를 뿌리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기가 났다. 꽃이나 과일이 아닌, 레뮤엘의 향기.
"뭐라고 지을 건가?"
"으음..."
이아네가 이것저것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충격적인 애칭을 들었기 때문인지 이아네의 머릿속에는 '레미'가 떠나지 않았다.
"음... 렘?"
"...풋."
한참을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것 치고는 너무 단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뮤엘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이아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레뮤엘이 미소 지었다.
"괜찮군."
"마음에 드십니까?"
이아네가 해사하게 웃었다. 레뮤엘이 마주 웃으며 호선을 그린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아네가 지어 준 이름이라면 뭔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었다. ‘레미’라고 부르는 것만 빼고.
"그럼, 그걸로 할까."
살짝 닿았던 입술은 곧 점점 무게를 더해가며 농염해져갔다.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셔츠를 들추며 올라오자 이아네가 벅찬 숨을 들이쉬며 레뮤엘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아, 자... 잠시만, 렘."
"...다시 불러 봐라."
"...? 렘?"
"...나쁘지 않군."
"잠, 잠깐, 렘-!"
그러나 이아네의 애처로운 비명은 레뮤엘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보드랍고 촉촉한 혀가 서로 얽히며 타액을 나누고, 레뮤엘의 손은 이아네를 태초의 모습으로 만드느라 바빴다.
그 급한 손길을 따라가지 못한 이아네가 허우적대며 레뮤엘을 부를 때마다 오히려 레뮤엘을 더욱 흥분시킨다는 것을, 이아네는 로요라 여신께 맹세코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