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반려
“펠록스, 지난번의 그 쌍둥이는 아직 지하 감옥에 있나?”
“예.”
레뮤엘이 잠시 고민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펠록스는 약간 초조하게 레뮤엘의 미동도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라.”
“무엇을... 말입니까?”
“그들에게 선처를 베풀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나?”
레뮤엘은 설명을 요구하자 펠록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열서너 살쯤 되었을까, 남창 거리에 팔려가는 두 아이들을 돈을 지불하고 데려왔습니다. 부모를 잃은 것은 열 살쯤, 거의 삼 년 정도를 뒷골목에서 좀도둑으로 살았던 아이들이었지만 눈에는 총기가 있었기에 잘만 하면 물건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없었던 펠록스였지만 아버지처럼 그들을 키웠다. 먹이고 재운 것뿐 아니라 교양이나 사교에 필요한 것들까지 꼼꼼히 가르치며 펠록스는 쌍둥이의 남다른 재능을 일깨워 주었다.
고아원과 거리에서 단련한 눈치에 더해 펠록스가 비밀리에 가르친 호신술과 암살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그들은 디날의 어둠으로서 성장했다. 열여덟 살 때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래, 그들은 펠록스가 맡긴 임무는 무엇이든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게 해냈다.
“칠 년 넘게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처리하던 녀석들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그리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그동안의 공헌을 보아서라도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펠록스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긍지 높은 펠록스로서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저자세였지만 레뮤엘은 아무 반응 없이 생각에 잠겼다.
“...펠록스.”
“예.”
“아쉽게도, 고개를 숙일 상대가 잘못되었다.”
펠록스가 아차 싶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뮤엘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실수가 용납될 수 없어.”
펠록스가 희망이 꺼진 눈으로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이 복잡한 서류 양식에 무언가를 적어 넣고서 서명한 후, 펠록스에게 내밀었다.
“여기 적힌 대로 처리하라. 다음은 없을 것이다.”
해가 서산에 슬며시 얼굴을 감출 때쯤 업무를 마친 레뮤엘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저녁식사를 침실에 준비하라 일러 둔 탓이다. 본인이 배가 고파서라기보다, 레뮤엘을 기다리느라 이아네의 끼니가 늦을까 걱정스러웠다.
"이아네."
침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이름을 부르자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레뮤엘을 기다리고 있던 이아네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반가움을 읽고서 레뮤엘은 기분이 좋아졌다.
"미안하군. 많이 기다렸나?"
"아닙니다. 저..."
이아네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자신 앞의 접시를 레뮤엘에게 내보였다.
"조금, 잘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가지런히 담긴 구운 콩과 그 옆에 놓인 젓가락. 레뮤엘은 잠시 그것을 진지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보탰다.
"훌륭하군."
"아, 아하하..."
그렇게까지 칭찬받을 일은 아니어서 이아네는 목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발그레한 목덜미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레뮤엘이 이아네의 맞은편에 앉았다.
"배고플 텐데, 식사부터 하지."
잠시 침실에는 식기가 부딪히며 내는 잘그랑 소리와 다정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아네의 접시에 로스트 비프를 덜어 주던 레뮤엘이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건..."
이아네가 걸고 있는 가죽끈 주머니는 레뮤엘이 이아네의 물건을 정리하다 혹시나 해서 견장과 함께 보관해 둔 것이었다. 내용물을 보니 머리카락 같은데, 지니고 다닐 정도면 범상치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던 기억이 났다.
"아, 저...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특별한... 것인가?"
레뮤엘은 약간 긴장했다. 혹시 제르멘과 관련된 것이라던가...?
"예. 제 동료의 오르헴입니다. 제게는 효과가 상당히 좋았습니다만... 원래 주인은 살라스라고 하는데, 라퓨타에서 전사했습니다."
이아네가 씁쓸하게 웃으며 오르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뮤엘에게 델토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와 함께 기사가 되었던 동료였습니다. 라퓨타 작전 때 함께 상륙했는데..."
식사를 하는 동안 레뮤엘은 열심히 이아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오르헴이 어떤 의미인지, 그 동료가 이아네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도 알았고, 델토르에 있을 때의 기사단 생활에 대해서도 들었다.
이아네가 레뮤엘 앞에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아네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말이 많았나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딱히 대화할 사람도 많지 않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아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연민과 자기혐오, 체념과 분노가 섞여 얼굴에 드러나자 레뮤엘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은가?"
"예, 조금... 옛날 생각이 나서."
이아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레뮤엘은 현명하게도 말없이 식사를 계속하며 이아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델토르에 있을 때는 너무 어릴 적부터 그분과 함께 있어서 친구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기사는 말이 많을 필요도 없고, 같은 기사단원들과도 업무 외에는 할 얘기가 없어서..."
생각해 보면 다른 기사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거나 허물없이 지내곤 했다. 오직 이아네만, 어딘가 다른 공기 속에 있는 것처럼 미묘한 거리감 속에 서 있었다. 그때는 그저 제르멘을 지키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에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들 이아네와 제르멘이 얼마나 친밀한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서툽니다. 가족들과는 허물없이 지냈지만..."
문득 이아네가 다시 만나게 된 가족들 생각에 싱긋 웃었다.
“조카 에밀이 많이 컸더군요. 말은 빨리 트였지만 발음이 엉망이라, 가족들이 다들 걱정하곤 했는데...”
경계심 없이 순수하게 웃는 얼굴이 예뻤다. 레뮤엘은 재잘재잘 조카 자랑에 정신이 팔린 이아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이아네에 대해서는 이미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 그의 가족도, 고향도, 심지어 기사단 생활까지도 이아네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안다.
그러나 레뮤엘은 이아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서류에 던져진 몇 글자가 아닌, 시종이나 측근의 뒷조사가 아닌 이아네의 입으로 하는 이아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격식을 차리는 와중에도 조카 이야기를 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이아네는 자신이 얼마나 마음을 열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 이아네가 레뮤엘에게 품어온 경계를 알고 있기에 레뮤엘은 이아네가 그에게 보여준 호의가 못내 고마웠다.
이아네는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왕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레뮤엘에게 검끝을 겨누었던 이아네의 눈은 강직하고 아름다웠다. 초록빛 잎사귀 같은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때 이아네의 눈에는 온전히 레뮤엘만이 들어앉아 있었다.
레뮤엘은 가만히 맞은편에 앉은 이아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고 싶어서, 그 눈에 다시 한 번 온전히 자신을 담고 싶어서 레뮤엘이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을, 이아네는 알고 있을까. 레뮤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 순간이 레뮤엘에게 얼마나 따뜻하고 감동적인 순간인지, 이아네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식탁이 치워진 후에도 이아네의 이야기를 듣다, 그가 살짝 지친 기색을 보이자 레뮤엘이 갑자기 물었다.
"체스라도 두겠나?"
이아네가 반가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뮤엘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아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이아네가 결심한 듯 그 손을 잡고 일어나 체스 테이블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체크메이트."
"아앗!"
이아네가 안타까운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열심히 레뮤엘의 퀸을 견제하며 킹을 따라다녔는데, 겨우 나이트에게 이아네의 킹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아네는 원망스럽게 하얀 나이트를 노려보았다. 움직임이 변칙적인 나이트는 늘 이아네에게는 어려운 녀석이다.
"쳇..."
승부는 이미 났다. 낮게 툴툴대면서도 이아네는 체스 말을 정리했다. 레뮤엘이 느긋하게 이아네의 부은 얼굴을 바라본다.
평소에는 긴장한 듯 스스로를 절제하는 얼굴인데, 체스를 시작하면 표정은 훨씬 다채로워진다. 평소 볼 수 없는 구경이라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체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아네와 어릴 때부터 계속 체스를 해 온 레뮤엘의 실력이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레뮤엘에게 있어서는 두 수를 무르고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게임이지만, 이아네의 고뇌에 찬 미간은 이럴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아네."
“예.”
몇 번이나 들었지만, 이아네는 레뮤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딘지 부끄러웠다. 늘 성으로만 불러서 그렇다기보단 왠지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느낌이 들어서 더 그랬다.
델토르에서는 이아네를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족과 제르멘 외에 기사단 동기 몇몇을 빼면 이렇게 다정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이아네를 마주하는 사람은 레뮤엘이 최초였다.
“가족들은, 그대를 어떻게 부르나?”
무심하게 묻긴 했지만 이아네는 조금 놀랐다. 마치 자신의 생각을 꿰뚫는 듯한 느낌에 이아네는 조금 부끄러워져 눈을 내리깔며 체스 말을 바라보는 척 했다.
“애칭은 ‘안’이었습니다. 부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만.”
“그렇군.”
안. 입속으로 이아네의 애칭을 부르다, 레뮤엘이 조금 웃었다. 어쩐지 이아네와 잘 어울렸다.
“괜찮겠나?”
“...?”
이아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레뮤엘이 태연히 체스판에 정렬된 폰을 하나 들어 두 칸 앞으로 옮겼다.
“내가, 그대를 그렇게 불러도.”
“네... 네?”
이아네가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말문이 막혀 버린 이아네의 얼굴이 귀여웠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레뮤엘은 차분히 이아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그렇지만 그건 조금...”
“불쾌한가?”
“아뇨, 아뇨, 아닙니다!”
이아네가 더욱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레뮤엘은 그 반응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검지를 뻗어 이아네 쪽의 체스말을 가리켰다.
“그대 차례다, 안.”
* * *
아침 햇살이 느릿하게 침실을 가로질렀다.
문득 잠에서 깬 이아네가 눈을 깜박이곤 뻣뻣한 눈을 비볐다. 햇빛이 방 안쪽까지 비춰지는 것을 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멍하니 누운 채 흐릿한 머릿속을 정리하다,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음...”
“......”
스륵, 가슴께에 있던 무게감이 이아네의 몸을 따라 떨어졌다. 멍하니,이아네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하얀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아네의 곁에 조각처럼 눈을 감은 하얀 몸이 누워 있었다. 늘 차분하던 딥 블루의 머리카락이 약간 흩어져 있다.
서서히 머릿속에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곁에 누운 레뮤엘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다시 누워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디날의 국왕이 잠들어 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레뮤엘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레뮤엘은 이아네보다 먼저 일어나 업무를 보러 나갔고 이아네가 잠이 들 때쯤 돌아왔다. 포로라고는 하지만 푹신한 침대에서 정오까지 푹 잠들곤 했던 이아네가 오히려 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것은 이렇게나 큰 무게인 것이다. 새삼 수척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다,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레뮤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온기가 손끝에 감겨왔다.
따뜻하구나.
이아네는 조금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레뮤엘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깊은 딥 블루의 머리카락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며 살갗을 간질였다. 그 조그만 마찰이 기분이 좋아서 이아네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레뮤엘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신기해.”
아직 이 마음을 뭐라 단정짓기는 힘들다. 그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제르멘을 바라볼 때처럼 맹목적이고 뜨거운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의 배려 위에 쌓아진 신뢰는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레뮤엘의 단정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아네는 문득 그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애정을 쏟는지 궁금해졌다. 이아네의 멍한 얼굴에 개구진 미소가 피었다. 그걸 묻는다면 레뮤엘은 어떤 반응일까.
당황할까? 그럴지도 몰랐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 당황한 레뮤엘의 얼굴은 상상되지 않았지만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니면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왜 이아네를 좋아하는지 진지하게 읊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아네는 갑자기 흥미가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뮤엘, 이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아네는 조금 난감해졌다.
“무슨 생각이지?”
“이, 일어나셨습니까.”
레뮤엘이 눈을 깜박이며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문득 여전히 레뮤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깨닫고 이아네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레뮤엘이 더 빨랐다. 크고 강한 손이 이아네의 손목을 잡아챘다.
“계속해도 괜찮다.”
“그렇지만...”
레뮤엘은 그답지 않게 부드럽게 웃으며 이아네의 손을 자신의 귀 뒤로 가져갔다. 약간 울상을 지은 이아네가 어쩔 수 없이 조심스레 레뮤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
“뭐가... 말입니까?”
“어머니 외에 내 머리를 쓰다듬은 것은 네가 처음이다.”
“앗...”
이아네가 흠칫 놀라서 손을 뺐지만 레뮤엘이 다시 이아네의 손을 가져다 댔다. 꼼짝없이 레뮤엘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살짝 떨렸다. 무섭다기보다 망설임의 떨림이었다. 레뮤엘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이아네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히익...”
상의를 입지 않은 날가슴이 이아네의 뺨에 닿았다. 빨개진 귀로 레뮤엘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안.”
레뮤엘이 가만히 이아네를 불렀다. 전혀 거리낌 없이 이아네의 애칭을 쓰는 레뮤엘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사실 딱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조금 고민하던 이아네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예.”
“이런 상황에서 얘기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대에게 부탁이 있다.”
“뭡니까?”
레뮤엘이 잠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걱정이 있는 건가 싶어,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오후에 쌍둥이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
이아네의 얼굴이 확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알고 있었지만 레뮤엘은 결국 말해야 했다.
“그 아이들은 펠록스가 오랫동안 키워 온 디날의 심복들이라, 나로서도 결정하기가 힘든 문제다. 괴롭겠지만 그 처분은 그대에게 맡기는 것이 나로서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그대의 결정을 따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펠록스를 만나 보지 않겠나?”
이아네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던 묘한 향기와 빛도 들지 않던 작은 방에서 해소하지 못하는 쾌감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날들이 떠오르자 이아네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꼭... 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는 없어. 그대가 괴롭다면 내가 알아서 처분하겠다.”
레뮤엘이 이아네를 꼭 끌어안았다. 쿵, 쿵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 소리에 이아네는 천천히 마음이 진정되어 갔다. 다정한 온기가 안심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이아네가 고개를 들었다. 레뮤엘의 올곧은 눈이 여전히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이아네가 조금 더 단단해진 눈으로 레뮤엘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심한 일을 당했는데도, 많이 힘들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해 주는 이아네가 반짝반짝해 보였다. 강하고 아름다운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레뮤엘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맙군.”
최근 들어 레뮤엘의 미소를 자주 보긴 했지만, 이아네는 그의 미소를 보고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보는 얼굴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다정한 눈빛으로, 레뮤엘이 살짝 이아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고맙다, 안.”
감히 국왕이 말을 건네는데도 이아네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 때문에 레뮤엘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었다.
“...예.”
한참 후에야 겨우 작은 대답이 들려왔다. 레뮤엘이 만족스레 웃으며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날 오후, 이아네는 리트의 검술 수업을 끝내고 펠록스를 따라 성의 북쪽 탑으로 향했다. 펠록스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아네는 그의 발걸음에서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끼고 있었다.
“여기다.”
탑 안은 감옥이라기엔 너무 평범했고 성이라고 하기엔 너무 썰렁했다. 감옥보다는 감호소나 보호소가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층계를 지나 그 끝의 문을 열고, 펠록스가 조심스럽게 이아네를 들여보냈다.
회색 방에는 커다란 책상과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썰렁한 방에 나 있는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어 벌꿀빛 머리카락에 부딪쳐 스러졌다. 회색 감호복을 입고 온몸이 결박된 쌍둥이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이아네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책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똑같이 늘어져 있던 벌꿀색 머리카락이 움찔하더니 서서히 들어올려졌다. 이아네를 발견한 쌍둥이 중 한 명이 슬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이아네가 보아 왔던 미소 중에 가장 힘겨운 미소였다.
“발로아.”
펠록스가 이아네의 옆에 섰다. 그의 입가는 긴장으로 딱딱해져 있었다. 이아네가 조용히 쌍둥이를 응시하던 눈을 돌려 펠록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다시피, 쌍둥이는 오늘 오후에 처분이 내려질 것이다. 폐하께서는 처형으로 다스리라고 하셨지만... 잠시라도 괜찮으니 시간을 내 달라고 조른 것은 내 쪽이다.”
갑자기 펠록스가 이아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깜짝 놀란 이아네가 고개를 내렸다. 펠록스가 이아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펠록스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세였다. 늘 당당하고 꼿꼿하던 허리가 이렇게 쉽게 숙여질 것이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쌍둥이도 놀랐는지 벌꿀색 눈을 크게 떴다.
“펠록스 님!”
“뻔뻔한 이야기라는 것은 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잘못 교육시킨 내 잘못이니, 차라리 내가 그 벌을 대신 받을 수 없겠나?”
펠록스는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멍하니 그 엎드린 등을 보면서 이아네는 그가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어나십시오.”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펠록스를 일으켰다. 그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우는 것만큼이나 참담한 얼굴이었다.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아네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말았다.
“일단, 저는 어떻게 된 건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 여기로 온 겁니다.”
이아네는 자신이 어떻게 디날로 돌아오게 된 건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델토르의 감옥에서 감금당하고 굶주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쌍둥이의 오두막이었다. 그 모든 여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쌍둥이뿐이었다.
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아네가 그들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펠록스 님이 델토르에 보낸 첩자였어. 술통을 싣고 가는 척하며 델토르에서 쓸 만한 정보를 빼내거나, 이중 첩자를 잡아내거나 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그런데 우리 마차에 델토르까지 가는 기사가 올라탔으니, 우리로서는 당연히 첩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일부러 델토르에 도착할 때쯤 경계를 풀었더니 과연 그 기사가 이젤다 성으로 직행했고.”
이아네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로 수상한 것 투성이였다. 쌍둥이가 착각하게 된 경위도 어쩌면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아네, 너는 몰랐겠지만... 릴로는 성 안에서 널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렇다면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이 릴로인가. 이아네가 시선을 주자 릴로가 조금 웃었다.
“네가 도서고로 향하는 것도, 델토르 국왕을 만나는 것도 봤어. 그리고 북쪽 별관으로 순순히 따라 들어가는 것 까지도. 델토르 국왕이 널 어떻게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지만 죽기 직전에 널 빼내서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캐내야 했어. 난 숨어서 때를 기다렸지.”
지루한 시간들이었지만 릴로는 프로였다. 이아네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를 기다려 이아네를 빼내려던 릴로는 갑자기 다가온 군화 소리에 몸을 다시 숨겨야 했다.
“내가 본 걸 넌 믿을 수 없을 거야. 라이오넬 기사단장이 널 작은 수레에 태우고 성의 뒷문으로 나가더니 릴리타 광장의 뒷골목으로 팔아넘기더군.”
“라이오넬?!”
이아네가 놀라 외쳤다. 릴로와 딜로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딜로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아네를 달래듯이 설명해 주었다.
“이아네, 네가 기억하고 있던 델토르는... 전쟁이 끝난 뒤 많이 바뀌었어. 라이오넬은 다시 설립되었지만 기사단장은 데미안 와드그리드라는, 북쪽의 용병 출신이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이아네가 얼이 빠져 있는 동안 딜로가 마저 설명했다.
“어쨌든 우리는 뱃사람으로 위장해서 너를 그 사창가에서 사 왔어.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하고, 뒤끝 없는 일이었지.”
이아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쌍둥이를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전율했다.
‘날 만족시키면 죽이지 않고 남창으로 팔아 버리는 정도까진 선처해 줄게.’
아직도 끔찍하리만큼 생생히 귓가에 맴도는 제르멘의 목소리는 빈말이 아니었다. 제르멘은 정말로, 자신을 아끼는 애완동물 이상으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아네가 스무 해 가까이 바쳐왔던 충정과 애정은, 사실 제르멘에겐 편리한 구실이었을 뿐.
마지막 남아 있던 과거의 껍질마저 바람에 날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물론 놀라기는 했지만 이미 제르멘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르다. 어쩐지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는 너도 아는 대로야.”
“우린 네가 정말로 디날의 첩자라고만 생각했어. 폐하를 만나게 해 달라는 것도 당연히 배짱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었고.”
“하지만 우리가 실수한 건 맞아.”
“...그 부분은, 죽음으로 사죄할게.”
나란히 숙인 벌꿀색 정수리를 바라보면서 이아네는 머리가 아파졌다.
당장 이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펠록스는 선처를 바라고 있었지만 레뮤엘은 물론이고 심지어 당사자마저도 그들의 죽음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아네가 고개를 젓는다면 그대로 이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아네는 쉽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따지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지만 이아네의 행동이 얼마나 수상했을지는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이들은 정말로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것도 확실히 알았다.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떠올랐지만 사실 그들이 죽는다고 해서 바뀔 것도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이 쌍둥이 덕분에 디날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점점 약해져 가는 마음 앞에서 이아네가 혼란스러운 눈을 감았다.
만일 이아네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해도, 그의 곁에는 레뮤엘이 있었다. 이아네가 혹시 위험해지게 된다고 해도 레뮤엘은 그를 반드시 지켜줄 것이다.
오랜 시간 제르멘과 함께 정을 나누면서도 가슴 한편으로 느꼈던 동통은 레뮤엘과 함께 하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제르멘과 거의 매일 붙어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을 의심하고 갈구했던 반면 레뮤엘과 함께 있으면서는 현실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레뮤엘과 함께 있으면, 이아네는 안심해도 좋았다.
그 사실이 새삼 너무나도 강렬하게 이아네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래. 결정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펠록스 님.”
고개를 떨구고 있던 펠록스가 이아네의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이아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채였지만, 그는 이미 결정을 끝낸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폐하께, 사형은 면해 달라고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발로아!”
펠록스가 드물게 흥분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이아네의 손을 꼭 잡아 왔다. 쌍둥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아네는 애써 뜨거워지는 얼굴을 돌리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다만, 그들을 이대로 심복으로 부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평민으로 살아가거나 성의 하인으로 부리거나, 그것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그것은 상관없다. 상관없어... 고맙다, 발로아...”
펠록스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이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이아네는 손을 빼냈다. 그리고 약해진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차갑게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탑을 내려오는 이아네의 입술 사이로 묘한 한숨이 새었다.
이것으로, 됐다. 마지막 남아 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으니 이제 정말로 델토르와는 안녕이었다. 새삼 견고해지는 마음과는 다르게 이아네의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지금 이 순간, 참을 수 없이 레뮤엘이 보고 싶었다.
* * *
“델러에게서 온 소식은 있나?”
“지난번에 온 것이 마지막입니다.”
레뮤엘이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금 불안해졌다.
물론 그의 여동생은 일반적인 여성과는 좀 달라서 어디에 있든 잘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르멘의 고집으로 드래곤까지 볼모로 잡히긴 했지만 베델리어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연락이 뜸했다. 이제 막 델토르에 시집갔으니 바쁠 것은 알지만 역시 가족인지라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소식이 들리면 바로 보고하라.”
“예.”
거기까지 얘기한 순간, 예의바른 노크 소리가 들렸다.
왕의 정무 도중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안건은 흔하지 않다. 매우 중요한 일이거나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레뮤엘의 업무를 방해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적어도 디날 안에서는 거의 없을 것이다.
“들어오라.”
살짝 찌푸린 눈으로 레뮤엘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레뮤엘은 문틈으로 보이는 뜻밖의 얼굴에 조금 웃었다.
“이아네?”
“폐하, 저...”
레뮤엘이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 섰던 우리아가 약간 놀란 눈으로 레뮤엘의 뒤꿈치를 쫓았다. 정무를 보는 중에 레뮤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다니 전무했던 일이다.
“그들을 만났나?”
그는 이아네가 왜 왔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일로... 바쁘신 것을 알고는 있지만, 혹시 시간을... 조금 할애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이아네의 눈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레뮤엘은 태연히 곁에 있던 우리아에게 눈짓했다. 눈치 빠른 우리아가 집무실을 나서자 방 안에는 이제 둘만 남았다.
“저녁에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기는 힘들었나?”
“앗, 저, 혹시 기다리는 것이 나았습니까?”
호기롭게 먼저 찾아왔으면서 있는 대로 당황하는 이아네가 귀여웠다. 레뮤엘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자, 이아네가 조금 안심한 듯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방금... 북쪽 탑에 다녀왔습니다.”
“음.”
레뮤엘이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물었다.
“답은?”
“...사형만은 면해 주시길 바랍니다.”
레뮤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아네의 대답이 예상과 달랐다.
“나조차도... 지금이라도 당장 그들의 목을 치고 싶은 것을 참고 있다. 그런데도 그대는...”
“따지고 보면, 오해하게 만든 잘못도 있으니까요.”
이아네가 난감하게 웃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그 미소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희망이 모두 뿌리 뽑힌 그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리면 레뮤엘은 아직도 이가 갈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아네의 판단을 따르겠다고 한 것은 레뮤엘이다. 이아네가 결정했다면 레뮤엘은 따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끝낼 수는 없지.
“언제든, 죽이고 싶어지면 말해야 한다.”
“...예.”
살짝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아네는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레뮤엘의 눈이 푸른 분노로 빛나고 있는 걸 보니 저건 농담이 아니었다.
이아네가 원한다면 레뮤엘은 당장 그들을 죽일 것이다. 언제든지.
문득 그 푸른 눈이 보고 싶어졌다.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레뮤엘의 뺨을 감싸쥐어 올리자, 레뮤엘의 눈빛이 정면으로 이아네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분명 평소와 다른 이아네의 행동에도 레뮤엘은 평소와 전혀 다른 표정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 꿰뚫을 것처럼 똑바로 이아네만을 응시하는 깊은 바다빛의 눈동자.
그러나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이아네는 레뮤엘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폐하.”
“말하라.”
“정말... 저로 괜찮으십니까?”
“...?”
레뮤엘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하다기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름답지도, 빼어나지도 않고, 심지어 외국인인데다... 나.. 남자입니다. 이런 저를 정말 곁에 계속 두실 겁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면, 내 반려가 되어 줄 건가?”
“바, 바, 바, 반려요?!”
너무 당황해서 말을 심하게 더듬었지만 레뮤엘은 이미 이아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궁리중이었다. 잠시 할말을 고른 후, 실수가 있지 않도록 조심히 레뮤엘이 입을 열었다.
“디날에서는 후계자만 건재하다면 남성 반려라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겐 리트가 있고, 리트 역시 그대를 마음에 들어하니 그것보다 더 다행인 것은 없겠지. 외국인이라고 해도, 그대의 가족들은 디날에 귀화했고 그대 역시 원한다면 언제든 귀화는 가능하다. 델토르에서 왔다는 것이 그대의 품위를 꺾지는 못할 것이다.”
“아...”
그래, 레뮤엘에겐 이미 정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새삼스레 이아네는 레뮤엘의 정비였던 이아세에게 묘한 감정이 치미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지만 이 감정은 늘 불편하고 음습하게 심장 아래를 죄어 오곤 했다.
제르멘이 정비를 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불순한 감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이아네는 질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엣?”
무슨 뜻인지 이해하느라 반응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이아네의 얼빠진 얼굴을 보면서도 레뮤엘은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다른 이에게는 어떨는지 몰라도 내게는 그대가 아름답다. 올곧은 눈이나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청백함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야. 연인에 대한 지조나 온전히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순정이, 그 고지식함이 내게는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그대에게 나도 모르게 손을 댈 만큼.”
거기까지 얘기한 레뮤엘이 헛기침을 했다. 분명, 과거를 떠올렸을 테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아네는 다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아네 한 사람으로 인해서 레뮤엘이 동요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제르멘과 함께할 때 이아네는 늘 제르멘이 궁금했다. 마음을 알고 싶었고 애매한 반응이 답답했다. 자신을 아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과연 이아네와 같은 마음인지 늘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레뮤엘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이아네가 레뮤엘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레뮤엘이 늘 마음을 확실하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저도, 폐하라면... 괜찮습니다.”
“......”
레뮤엘이 물끄러미 이아네를 바라본다.
“반... 반려라고 거창하게 말하기엔 전 아무래도 부족한 사람이지만...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괜찮고도, 넘치는 사람이다.”
레뮤엘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순식간에 달라지는 인상에 이아네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원래는 나중에 말하려고 했지만...”
레뮤엘이 천천히 책상으로 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아네의 시선이 레뮤엘의 손을 따라갔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
레뮤엘이 이아네의 풀 네임을 불렀다. 조금 긴장한 이아네가 자신에게 다가온 레뮤엘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반려의 증표로 받아 주겠나.”
“!”
레뮤엘이 내민 손에는 흑단목으로 조각한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뚜껑이 열린 상자 안에 영롱한 초록빛이 빛을 발했다.
작은 금빛 반지에 이아네의 눈을 닮은 초록빛 보석이 박혀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순하고 우아한 디자인에다, 선명한 색채며 정교한 마감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 범상한 물건은 아니었다.
“폐, 폐하.”
“비록 지금 당장 식을 치를 수는 없지만... 정식 반려가 되기까지 이것으로 참아 주면 좋겠군.”
레뮤엘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예상치도 못하게 너무 귀여워서 이아네는 그 와중에도 웃음 짓고 말았다.
“...폐하.”
이아네가 조용히 레뮤엘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차갑지만 이제 그 냉기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아네의 말뜻을 알아들은 레뮤엘이 이아네의 턱을 받쳐 올렸다. 드디어 마주보게 된 아름다운 초록빛 눈동자가 사랑스럽다.
“...나야말로.”
낮은 목소리와 함께, 레뮤엘의 입술이 이아네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어두워진 왕의 침실에 두 나신이 어슴푸레한 등불 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차가운 손이 이아네의 목선을 따라 쇄골을 어루만지자, 이아네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울리며 부드럽게 가슴까지 따라 내려온 손가락은 살짝 솟은 봉오리를 건드리며 장난치듯 지분댔다.
“으응...”
자연스럽게 입술 새로 흐르는 신음이 신기했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경계가 잔뜩 서려 있던 목소리는 이제 나긋하게 휘어지며 레뮤엘을 사로잡았다.
“안...”
저도 모르게 찬양하듯 부르는 이름에 살짝 휘어 오르는 입술 끝의 미소가 황홀하였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열감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레뮤엘에게 내미는 손에 초록빛이 반짝였다.
그 손을 잡아 입을 맞춘다. 뜨거워진 입술이 손가락과 손등, 손바닥에 골고루 스쳐갔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랑에 이아네는 울컥 감동마저 받았다.
그는 나를 사랑해.
확고하게 느껴지는 마음이 고맙고도 사랑스러워서, 이아네는 용기내어 레뮤엘의 턱을 만져 보았다. 조심스럽지만 부드럽게, 선명한 턱선을 따라 쓰다듬으며 이아네가 말했다.
“폐하.”
“음...?”
“...저, 폐하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레뮤엘이 피식 웃었다.
진지한 눈으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이아네가 귀여웠다. 이미 눈에서는 레뮤엘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고 있는데, 본인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도 그대를 사랑한다.”
“웃...”
예상 외의 직설적인 표현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수줍음도 놀리는 재미 중 하나였다. 레뮤엘이 씩 웃으며 이아네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앗...”
살짝 압력을 가하며 부드럽게 살결을 빨아들인 입술이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발그레한 꽃잎이 내려앉았다. 만족스러운 듯 그 흔적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곤, 레뮤엘이 살짝 이아네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슬처럼 가벼운 입맞춤은 곧 폭풍이 되었다. 서로의 혀가 얽히며 타액이 섞였다. 부드럽게 마주치는 입술이 기분 좋은 압력으로 서로를 누르고, 촉촉한 혀가 입안을 적실 때마다 붉게 열감이 피어났다.
호흡조차 곤란할 만큼 강렬하게 몰아치는 키스에 이아네가 레뮤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음을 확인할수록 점점 대담해지는 이아네의 태도가 레뮤엘은 마음에 들었다. 이미 충분히 젖어 버린 입술을 마지막으로 핥아 올리며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다리를 살짝 벌렸다.
“우음...”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아네는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반쯤 일어선 남성이 수줍었다.
부끄러워 빨개진 이아네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레뮤엘은 그를 놀려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전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의 중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으윽! 폐, 폐하!”
전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익숙하지 않은 것은 똑같다. 손이 닿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데 입술이 닿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걸 떠나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고집스럽게 이아네의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처음에는 부끄러워 발버둥 치던 이아네도 막상 귀두 끝의 입술을 느끼자 흠칫 움직임을 늦추었다.
처음에는 키스하듯 입술 끝으로 얇은 포피를 쓸어 올린다. 부드러운 살갗을 살짝 빨아들이고 매끈한 선단에 혀를 세워 새가 모이를 쪼듯 집요하게 쪼아대자 이아네의 입술에서 탄성이 터졌다.
“하아-”
마법을 부리듯 입술이 닿을 때마다 힘이 더해지며 단단히 발기하는 분신이 부끄러운 듯 이아네가 무릎을 닫았지만 레뮤엘의 손이 다시 무릎을 밀어냈다.
부끄러워하는 것과는 달리 본능은 충실해서, 어느새 선단에서 투명한 액이 살짝 비치고 있었다. 맛있는 것을 먹듯 한꺼번에 입 안에 머금고 귀두 아래를 혀로 쓰다듬자 이아네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흐으윽...”
떨리는 손끝이 레뮤엘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왔다. 결코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 손끝에 깃든 간절함에 레뮤엘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께가 뻐근해져 왔다.
완전히 발기한 이아네의 분신에서 고개를 들자, 반쯤 울상이 된 이아네가 난처한 눈으로 레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눈이 레뮤엘의 내면에 불을 붙였다.
“안...”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연인의 이름은 숨결까지 달콤하다. 살짝 물기 어린 초록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레뮤엘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름다워."
“하아... 하...”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아네는 달뜬 숨을 삼켜내었다. 레뮤엘이 그런 이아네의 벌어진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고 익숙한 손길로 협탁으로 손을 뻗어 향유병을 꺼내었다.
“조금 차가울 거다.”
“응... 으...”
미끈한 액체가 비부에 닿자 이아네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레뮤엘의 손이 미안한 듯 부드럽게 이아네의 비부를 문지르다 천천히 주름을 벌리며 진입했다. 조금 움츠리긴 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이아네도 조금 힘을 풀었다.
“괜찮나?”
“으응... 네...”
천천히 손가락이 내부 깊이 침입하며 좁게 닫혀 있던 동굴을 넓혀 갔다. 미끄러지듯 내벽을 문지르다 이아네가 느끼는 곳 근처까지 오자 레뮤엘이 손가락 끝에 조금 힘을 주었다.
“으응-!”
튕겨오르는 허리와 신음이 부끄러운지 황급히 입을 막는 모습이 예뻤다. 천천히 손가락을 깊게 찌르며 굳어있던 근육들을 이완시키자 입을 막았음에도 쾌감에 젖은 탄성이 튀었다.
“하아... 으응...!”
찌걱이는 젖은 소리가 온도를 더해갔다. 이아네의 신음이 간헐적으로 울리며 열기가 퍼졌다. 레뮤엘의 손이 급해졌지만 이아네가 다치지 않도록 부드러운 손길은 여전했다.
달라붙는 육벽이, 조금 버거울 만큼 손가락을 조여 왔다. 손가락을 따라 넓어졌다 다시 좁아지는 그 탄력에 레뮤엘의 허리 아래가 다시 뻐근해왔다.
레뮤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아네가 색색 숨을 내쉬며 붉어진 얼굴로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물기 어린 초록빛 눈에 쾌감과 뒤섞인 갈증을 발견하고 레뮤엘은 조금 만족스러워졌다.
이아네가 그를 원한다.
레뮤엘의 손가락이 점점 젖어왔다. 철벅이는 소리가 더 커지자,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린 레뮤엘이 서서히 손을 거두고 다시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미소를 지었다.
레뮤엘이 천천히 향유로 적신 분신을 이아네의 입구에 맞추었다. 조금씩 허리를 밀며 이아네와 박자를 맞춰 가는 레뮤엘의 배려가 세심했다.
“아응... 읏...”
아래를 뿌듯하게 채워 오며 레뮤엘의 분신이 좁은 내벽을 밀쳤다. 뿌리까지 완전히 하나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어쨌든 두 욕망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맞춰졌다.
레뮤엘은 문득 자신 아래 누운 이아네를 내려다보았다. 기분 좋지만 아직 생경한 감각인지 살짝 찡그린 미간이 이상할 만큼 요염했다. 그 이마 위로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레뮤엘이 좁혀진 눈썹 사이에 입을 맞추었다.
“아... 아읏... 으응...”
천천히 허리가 움직였다. 부드럽게 내벽을 문질러 오는 마찰이 기분 좋았다. 입술 새로 흩어지는 한숨에 레뮤엘이 조금 웃었다. 이아네가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게 짜릿했다. 이아네 외에도 다른 이를 안은 적은 있지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좀 더 닿아 있고 싶다. 좀 더 만지고 좀 더 느끼게 하고 싶었다. 다른 이가 아닌 레뮤엘로 인해 흥분하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안...”
레뮤엘의 몸짓이 거세졌다. 아까보다 좀 더 세게 허리가 부딪혔다. 철주가 내벽을 긁어낼 때마다 한껏 들린 엉덩이로 고환이 닿았다 떨어졌다.
“아... 우응, 웅... 하... 폐하...”
레뮤엘의 팔을 꼬옥 잡고서, 이아네가 조르듯 레뮤엘을 불렀다. 차오르는 흥분에 달뜬 목소리가 매혹적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뮤엘이 허리를 짧게 쳐 올렸다.
“하윽- 으...읏, 아아...”
“이름을, 불러라.”
“흐으, 응... 으읏, 레... 아, 아앗... 레뮤엘-”
“착하군...”
이마를 한 번 더 쓸어주고서, 레뮤엘은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찌걱이는 야한 소리가 더욱 농밀해졌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가장 깊은 내벽까지 진입했다가 한껏 벌어진 입구 근처까지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빈자리를 아쉬워할 틈도 없이, 금세 다시 차오른 용두는 뿌듯하게 이아네의 안을 채우며 자신의 모양을 새겼다.
질퍽이는 젖은 소리가 점점 진해질수록 이아네의 목소리가 녹아내렸다.
“하, 아아, 으응, 흐으응- 조... 좋아, 좋아요... 하아, 앗-”
“후읏...”
이아네가 정신없이 레뮤엘의 목에 매달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격렬하지도 거칠지도 않았지만 느긋하고 부드럽게 내벽을 간질이는 움직임은 또 다른 쾌감이었다.
하지만 부드럽기만 해서는 내부의 불꽃을 꺼뜨리기엔 역부족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레뮤엘을 재촉하듯 이아네가 허리를 흔들었다. 아쉬운 듯 레뮤엘의 철주를 꼭 잡아 물며 내벽을 좁히자 레뮤엘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흐응, 더... 더 빨리, 으흣... 흑...”
“요부로군.”
빙그레 웃는 레뮤엘의 이마에도 얕은 땀이 맺혔다. 이아네가 충분히 흥분할 때까지 기다렸던 터라 레뮤엘 역시 여유가 없었던 터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한계였다.
일단 마음을 먹고 나자 들이치는 허리짓이 급해졌다. 이아네의 골반을 단단히 잡고 허리를 강하게 쳐 올린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격한 움직임에 이아네의 탄성이 터졌다.
“흐아앗-”
“큭...”
이아네의 다리가 레뮤엘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강하게 밀착된 아랫배에 닿는 체온이 기분이 좋았다. 속도를 붙여 가며 철주가 이아네의 내벽을 꼼꼼히 핥았다. 이아네의 입구가 탐욕스레 레뮤엘의 분신을 삼키며 자신의 비밀스런 곳으로 끌어당겼다.
“하아, 아, 앗-! 아앙-!”
레뮤엘의 분신이 드디어 느끼는 곳을 스쳐 지나자 이아네가 자지러지듯 허리를 튕겼다. 반쯤 풀린 초록색 눈동자가 쾌락을 갈망하고 있었다. 레뮤엘도 그 눈을 바라보며 이아네가 느끼는 곳을 다시 정확하게 찔러 들어왔다.
“흑, 아, 앗, 흐아앙, 조... 좋아아, 아, 좋아-”
“하... 아름다워. 안...”
하얀 쇄골에 입술을 묻으며 레뮤엘이 허리를 움직였다. 쉴 새 없이 짓쳐드는 쾌감 속에서 이아네는 확실하게 자신이 레뮤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더욱 원했으면 좋겠다. 그가 더욱 확실하게 자신을 사랑하길 바랐다.
“흑, 레... 레뮤엘... 하읏! 앗, 아아응-”
“안, 안...”
“하아, 흐... 흐아앙...”
레뮤엘의 분신이 느끼는 곳을 찌를 때마다 이아네는 무너지는 허리에 힘을 주었다. 레뮤엘의 허리짓 한 번에 무릎이 떨리며 발목이 팽팽해졌다.
레뮤엘이 일부러 느끼는 곳에 대고 허리를 문질렀다. 예고 없이 비벼지는 부드러운 살덩이가 일으킨 불꽃에 머리카락 끝까지 쭈뼛해진다. 감당하기 힘든 흥분에 바르작대며 이아네가 울음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꼿꼿이 일어선 이아네의 분신이 까닥 흔들리며 레뮤엘의 아랫배에 닿자 이아네가 다시 허리를 흔들었다. 사정하기 직전의 아주 조금 모자란 열감이 아쉬웠다. 좀 더, 좀 더를 외치며 이아네가 레뮤엘에게 매달리자, 레뮤엘이 이아네의 손에 깍지를 끼어 잡았다.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는 와중에도 손가락에 걸리는 단단한 반지의 촉감이 만족스러웠다.
“흐아, 아, 아앙, 레뮤엘...! 조... 좋아요... 하읏-”
“하아, 안...”
마지막 피치를 올리기 시작한 레뮤엘이 이아네의 느끼는 곳을 깊숙이 찌르는 순간, 이아네가 움찔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강하게 쳐 올리자-
“아, 아... 흐아아앙-”
“큭-”
머릿속을 하얗게 비우는 쾌감이 척추를 타고 뇌를 울렸다. 꼿꼿해진 허리가 순간적으로 허공에 뜨고, 발가락 끝까지 뻗은 쾌락에 뻗댄 무릎이 바르르 떨려왔다.
강하게 조여드는 내벽에 레뮤엘도 사정감을 참지 못하고 이아네와 동시에 내보냈다. 동시에 깊게 한숨을 토해낸 연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었다. 아직 밤도, 사랑도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아네는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아직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나른한 눈으로, 이아네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나붓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을 느낀 건지 이아네를 끌어안은 팔이 조금 움직였다.
“...깼군.”
“...네...”
반쯤 뜬 심청색 눈은 전에 없이 부드러웠다. 이아네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고개를 숙여 이아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좀처럼 보기 힘든 레뮤엘의 흐트러진 모습에 몽롱한 와중에도 조금 가슴이 뛰었다. 느릿한 미소를 입가에 물며 레뮤엘이 다시 이아네를 깊숙이 고쳐 안았다.
“으응...”
코 끝에 감겨오는 체향이 기분 좋았다. 어젯밤의 흔적이 남아있는 맨 날가슴에 뺨을 비비며 이아네가 짐짓 장난을 치자 레뮤엘의 손이 지지 않고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아주 오랜만의 느릿한 아침이었다.
이아네가 따로 방을 배정받았을 때 빼고 이아네는 늘 레뮤엘과 같은 침대를 썼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함께 아침을 맞이한 적은 없었다. 늘 이아네가 눈을 뜨면 레뮤엘은 나갈 준비를 마쳤거나 이미 나가버린 후였다.
“오늘은...”
“...음?”
“늦게... 나가셔도... 괜찮으십니까...?”
눈꺼풀에 자꾸 달라붙는 졸음 때문에 말하기 어려웠지만 물어야 했다. 레뮤엘이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
이아네가 자기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다. 레뮤엘의 손가락이 호선을 그린 입술을 따라 그렸다. 차가운 손이 입술에 닿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안.”
“네...”
입술을 만지던 손가락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아네의 뺨을 감싸 왔다. 차갑지만 다정한 손길에 이아네가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 레뮤엘의 얼굴이 보였다.
“...사랑한다.”
“......”
잠이 확 달아날 만큼 달콤한 고백이었다. 이아네는 그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조금,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폐하.”
“이름.”
“...레뮤엘.”
아직 입에 달라붙는 이름은 아니지만 이아네는 용기를 내었다. 붉은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흐르자 레뮤엘이 만족스러운 듯 엄지로 이아네의 입꼬리를 쓸었다.
“...저도, 사... 사랑합니다.”
“......”
레뮤엘 역시 아무 말 하지 않고 이아네를 바라보기만 했다.
둘 다, 알고 있다.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말을 꺼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다. 잠시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조용히 웃으며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안.”
“네.”
“나는... 꿈이 하나 있다.”
이아네를 끌어안은 레뮤엘이 느릿하게 속삭였다.
“내가 아직 왕세자였을 때... 딱 한 번, 바다로 나갔던 적이 있다. 그때, ‘여행자들의 섬’을 알게 되었지.”
“...?”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여서, 이아네는 조금 솔깃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눈이 빛났던 모양이다. 사랑스럽다는 듯 이아네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감아쥐며 레뮤엘이 말을 이어갔다.
“정식 명칭은 크라니아라고 한다. 디날과 그리 멀지 않은 휴양지인데, 여행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곳은 꽤 마음에 들었다.”
이아네의 호기심이 동했다. 어떤 곳이길래 그 레뮤엘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어떤 곳입니까?”
“평화로운... 곳이었다.”
레뮤엘이 눈을 감았다.
“바다로 둘러싸인 해변에 아이들이 뛰놀고, 밤이 되면 검은 해면에 달그림자가 뜨는 곳.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가끔 바다 저 멀리 돌고래가 보이기도 했다. 섬답지 않게 펼쳐진 바닷바람 머금은 풀밭에서 연인들이 일광욕을 하고, 바구니에 담아온 간식을 나누어 먹곤 하지. 저녁이 되면 마을 곳곳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맛있는 냄새가 퍼지고, 정원에서는 잠들기 전에 가벼운 칵테일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낮게 들려와.”
레뮤엘이 문득 눈을 뜨며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언젠가... 언젠가 리트가 내 뒤를 이을 때가 오면...”
이아네가 설렘 가득한 눈으로 레뮤엘과 눈을 맞추었다. 레뮤엘이 부드럽게 이아네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응...”
“왕위를 물려주고 나면... 그곳으로 가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대와 단둘이.”
이아네의 얼굴이 기쁨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심장 아래를 따뜻하게 적셔 오는 애정에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기뻤다.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말이 이렇게나 기쁠 줄은 몰랐다. 현재뿐 아니라 당신의 미래를 갖고 싶다는 욕심이 사랑스럽고도 고마웠다.
“저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
“레뮤엘...”
이아네가 배시시 웃으며 레뮤엘의 손을 덧잡았다. 움직이는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이아네의 눈과 같은 색의 반지가 반짝였다.
“당신이라면... 어디든 좋을 겁니다.”
레뮤엘은 조금 웃었다.
이아네가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기뻤다. 이아네를 다시 꼭 끌어안으며 레뮤엘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안...”
그날, 결국 레뮤엘은 하루를 통째로 쉬었다.
성인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이후 이런 일은 이례적이었지만 우리아와 펠록스는 오히려 기꺼이 왕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레뮤엘을 대신해 정무를 진행시켰다.
* * *
“하앗!”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제법 폼이 잡히는 리트의 목검을 가볍게 피하며 이아네가 리트의 오른쪽 어깨를 꾹 찔렀다. 금세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른 리트가 심기일전, 다시 검을 휘둘렀다.
“으랴앗!”
-따악!
“잘 하셨습니다.”
이아네가 웃으며 리트의 검을 막아냈다. 일곱 살이 휘두른 검인데도 목검이 맞닿는 순간 짜릿하게 손목이 울려 왔다.
오랜 시간 타격대와의 싸움을 드디어 졸업하고, 본격적인 검술 대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리트는 즐거워 보였다. 이아네의 도발이나 공격에 흥분할 법도 한데 냉정하게 곧잘 따라오는 모습이 아버지를 꽤 닮아 보였다.
“헤헷, 내가-”
리트가 뿌듯하게 이마에 난 땀을 소매로 훔치는 순간이었다.
“쌈초온!”
무엄하게도 왕자의 목소리를 단칼에 잘라낸 목소리가 후원에 크게 울렸다. 이아네는 물론 펠록스까지 놀라 돌아본 곳에 난처한 표정의 발로아 경이 서 있었다.
그리고 발로아 경의 앞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장아장 달려오고 있었다.
“에밀!”
당황과 반가움이 뒤섞인 얼굴로 이아네가 달려 나가 조카를 들어 안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가 방글방글 웃으며 이아네의 목을 끌어안았다.
“송구합니다, 펠록스 님. 잠시 들렀다가 얼굴만 보고 간다는 것이...”
“사과는 저하께 하시게.”
발로아 경이 조금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잿빛 머리카락과 호기심과 경계를 담은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발로아 경이 지체 없이 고개를 숙였다.
“누구냐?”
“발로아의 아버지입니다.”
“아하.”
리트가 조금 경계를 풀었다. 이아네가 에밀을 안은 채 리트 쪽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라...”
“우웅?”
에밀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리트를 바라본다. 이제 네 살이 다 되어가는 에밀의 뭉툭한 발음이 귀여웠다. 그러나 리트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에밀을 마주보았다. 성 안에서 어린아이를 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에밀이 바르작대며 이아네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리트를 향해 다시 다가왔다.
“뭐, 뭐야...?”
“주께.”
뒤뚱뒤뚱 다가온 에밀이 해사하게 웃으며 작은 주먹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손을 내밀자 그 위로 얼마나 쥐고 있었는지 꼬질꼬질해진 사탕이 하나 뚝 떨어졌다.
“...준다고?”
“하라부지이-”
발로아 경에게 다시 달려가는 에밀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붉게 빛났다. 다시 발로아 경에게 답싹 들어 안긴 에밀이 까르르 웃으며 발로아 경의 까슬한 턱수염을 문질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당황한 리트의 말꼬리가 흐릿해졌다. 그러나 이아네도 발로아 경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인사해야지.”
“아녕!”
에밀이 작은 손바닥을 짝 펴며 크게 흔들자 리트도 깜짝 놀라 조금 손을 흔들었다. 삼촌을 닮아 반짝이는 진한 초록색 눈동자가 티 없이 웃으며 멀어지자 리트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시작...”
“저 애는 누구냐?”
이아네가 난처하게 웃었다.
“제 형님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에밀이라고 하는데...”
“에밀?”
“네, 풀 네임은 에이몬드 렉스 발로아입니다. 내년이면 네 살이 되는데, 아직 발음이 엉망이라...”
이아네의 조카 자랑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리트는 이아네의 말을 끊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델토르의 이야기를 할 때만큼이나 높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니 에밀로 인해 리트가 불쾌한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성에 온 거지?”
“아마 가족들의 귀화 관련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래?”
리트가 고개를 끄덕이곤 문득 이아네를 올려다보았다.
“다음에도 볼 수 있을까?”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이아네가 조금 웃었다. 또래에게 흥미를 보이는 리트가 오랜만에 제 나이 또래로 보였다.
그날 저녁.
“리트.”
“아, 아버지!”
정무가 끝난 후 레뮤엘이 리트의 방에 들렀다. 책을 읽고 있던 리트가 반갑게 레뮤엘에게 달려가 안겼다. 점점 무거워지는 리트의 튼튼한 몸이 기특했다. 리트를 한번 꼭 끌어안은 레뮤엘이 똘망한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저녁식사에 발로아를 초대해도 괜찮겠느냐?”
“으으음...”
리트가 고민에 빠진 눈을 했다. 물론 리트는 이아네를 매우 좋아했지만 오늘 검술 수업에서 이아네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마냥 좋다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네, 괜찮습니다.”
“착하구나.”
그러나 리트는 레뮤엘이 이아네를 좋아하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인 작은 머리통을 레뮤엘의 손이 쓰다듬었다. 쓱쓱,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자 리트가 행복한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헤헤...”
“...리트.”
레뮤엘이 잠시 망설이다 리트를 불렀다. 레뮤엘이 망설이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리트가 의아한 눈으로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사실 네게 할 말이 있다.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
“발로아에 대한 얘기란다.”
레뮤엘이 한쪽 무릎을 내려 리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자연스럽게 마주친 두 눈은 부자지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흔들림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트.”
“네, 아버지.”
“발로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음, 좋은 사람입니다. 가끔 열 받게 하긴 하지만...”
리트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노골적인 언사에 살짝 입을 막고 레뮤엘의 눈치를 보았다. 레뮤엘이 그저 웃고 있자 용기를 얻은 리트가 다시 말했다.
“...저를 왕자가 아니라 제자로 대하는 게 마음에 듭니다.”
“그렇구나.”
레뮤엘은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한 것일까, 이아네를 마음에 들어 했던 이유마저 레뮤엘과 비슷했다. 슬며시 새어나온 미소를 애써 갈무리하며 레뮤엘이 조심스럽게 본론을 말했다.
“나도, 그가 마음에 든단다.”
“?”
리트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한 그 모습에 레뮤엘이 다시 곰곰이 말을 골랐다.
“그를, 이아네라고 불러도 되겠느냐?”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뜻입니까?”
리트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되묻자 레뮤엘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트의 대답은 레뮤엘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물론 리트가 싫다 해도 레뮤엘은 설득시킬 생각이었지만, 리트가 싫어하는 것을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으음... 그러니까... 이름은 특히 친밀한 사람에게 부르는 거고... 아버지가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특별하게 친하게...”
거기까지 중얼거린 리트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천진하게 물었다.
“특별한 사이가 되신 겁니까?”
“...음.”
누가 제 아버지 아들 아니랄까봐 얼굴도 붉히지 않고 돌직구로 물어 오는 리트의 질문에 레뮤엘은 이아네의 기분을 조금 이해해 버렸다. 그렇지만 레뮤엘은 리트를 이해시키기 위해 빙빙 돌리는 것보다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이르긴 하겠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그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구나.”
“후으응...”
예상과는 달리 리트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을 뿐이었다. 앙증맞은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잠시 고민하는 그 짧은 시간이 레뮤엘에게는 숨이 막히도록 길었다.
나름 길게 고뇌의 시간을 거친 뒤, 리트가 심각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레뮤엘이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그건 아직 생각하지 못했지만... 식사를 들면서 결정하도록 할까.”
리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레뮤엘이 내민 손을 잡았다. 발걸음 소리가 나란히 멀어져 가는 복도 위로, 주황빛 노을이 나른하게 두 부자의 발뒤꿈치를 따라 드리워졌다.
저녁식사는 즐거웠다.
리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볼 때마다 이아네는 얼굴을 붉히며 물을 마시는 척했다. 늘 마주하던 얼굴이지만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된다.
그 광경을 비스듬히 바라보면서 레뮤엘은 속으로 웃었다.
"발로아."
"예, 저하."
리트가 우물거리던 고기를 삼키고선 입가에 소스를 조금 묻힌 채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아네가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리트가 똘망한 눈동자로 이아네를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다.
"발로아도, 아버지가 좋은 것이냐?"
"...예."
조금 고민했지만 어차피 레뮤엘이 리트와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할 때부터 정해졌던 대답이다. 쑥스럽긴 해도 이아네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아네의 대답은 처음부터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푸흡!"
이아네가 마시던 물을 화려하게 공중에 뿜어냈다. 레뮤엘은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큭큭대고 있었다. 급히 탁자에 흩어진 물을 닦아내며 이아네가 레뮤엘을 곱게 흘겼다. 좀 도와달라고요!
"그, 그, 그렇게까지는..."
"응? 그럼 뭐라고..."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그치만, 아버지의 반려라면 말도 높여야 하고."
"아뇨! 아뇨아뇨아뇨! 지금까지처럼 하셔도 됩니다! 전 괜찮으니까아!"
이아네가 빨개진 얼굴로 사태를 수습하자, 리트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디날의 아이. 이아네의 집안이었다면 난리가 났을 텐데도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연애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럼, 이아네?”
“네.”
“흐음, 뭐어, 일단은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다.”
귀여운 거드름을 피우며 리트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이아네라는 발음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아네가 냅킨을 들어 리트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이아네의 손길을 받고 있는 리트의 모습이 레뮤엘에게는 꽤 생경하다.
펠록스에게 듣기는 했지만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까다로운 리트가 이아네를 따르는 것이 레뮤엘의 눈에는 그저 신기했다.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레뮤엘의 눈이 문득 리트의 하얀 셔츠 가슴주머니로 향했다. 무언가 들어있는 듯 살짝 처진 가슴주머니를 보자 문득 레뮤엘의 호기심이 올라왔다.
“리트.”
“네!”
“바다 잎사귀가 무슨 뜻이지?”
이아네를 구했던 그 한마디가 떠올랐다. 무엇을 새겼는지 이아네에게 듣기는 했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 그게...”
“바다는 아버지를 뜻하는 것이고요, 잎사귀는 발로... 아니, 이아네를 뜻하는 겁니다.”
이아네가 당황해서 리트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리트는 기뻤는지 줄줄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아네의 눈 색이 잎사귀 색이고...”
리트가 기쁜 듯이 오르헴을 꺼내 레뮤엘에게 보여주며 재잘대는 동안 이아네는 그냥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말없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인 이아네를 알고 있으면서도 레뮤엘은 리트가 계속 말하도록 두었다. 해맑게 웃는 리트의 흥을 깨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부끄러워하는 이아네를 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저하, 그... 그만...”
“그래, 그래서 바다 잎사귀였군.”
“네!”
방긋방긋 웃는 리트가 혼낼 수도 없게 귀여웠다. 이아네가 망했다는 얼굴로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이아네,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픈 것이냐? 얼굴이 빨간데...”
“아니... 아닙니다, 저하...”
천진난만한 얼굴이 차라리 부러울 정도였다. 이아네가 고개를 저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리트가 일곱 살 주제에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보자 레뮤엘도 웃음을 참으며 짐짓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건넸다.
“그렇군. 좀 쉬어야 될지도 모르겠다.”
“아뇨! 괜찮습니다!”
리트의 말보다 레뮤엘과 둘과 남게 되는 것이 더 큰일이었다! 이아네가 손사래까지 치며 고개를 저었지만 리트는 이아네를 바라보며 어른스럽게 한마디 했다.
“뭐든 건강이 최고이니라.”
...분명 웃음이 나와야 하는 상황인데, 그것을 확실히 아는데, 왜 이렇게 탈력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왠지 두 부자에게 끝없이 놀아나는 느낌에 이아네는 조금 지쳐버렸다.
“그래, 식사는 다 끝냈느냐?”
“네, 아버지!”
레뮤엘의 대답에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리트가 야속하다.
“그럼 돌아갈까.”
리트가 돌아간 후, 레뮤엘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앉아 끊임없이 킬킬거렸다.
그 옆에서 원망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이아네가 귀여워서 다시 웃고, 귀까지 빨개져 있던 얼굴이 생각나 또 웃고, 나중엔 이아네가 새치름해져서 뾰로통한 입술을 내밀 때까지 레뮤엘은 계속 웃어 댔다.
“하아, 하...”
“그, 그만 웃으십시오.”
“아아, 하... 미안하군. 하하...”
어느 정도 웃음이 내려앉자 레뮤엘이 평소의 미소로 돌아왔다.
요즘 부쩍 레뮤엘의 웃음이 많아졌다. 그의 차가운 얼굴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어색하면서도 반가웠다. 그 미소를 바라보면서 이아네도 조금 표정을 풀었다.
“안.”
완전히 웃음기가 가라앉은 레뮤엘이 팔을 살짝 벌렸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이아네는 조금 망설였다. 그러나 레뮤엘의 고집은 익히 알고 있다. 어차피 반항해봤자 소용없었다.
여전히 약간 삐진 듯한 얼굴이었지만 이아네는 순순히 레뮤엘에게 다가가 안겼다. 품에 안겨오는 기분 좋은 무게감에 레뮤엘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웃으십니다.”
“그랬나. 미안하게 됐군.”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레뮤엘도 알게 될 이야기였고, 레뮤엘의 웃는 얼굴도 실컷 봤으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부끄럽긴 했지만 나름 소득도 있었으니 이 정도로 해 둘까.
“그대가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어.”
“웃...”
고개를 돌리면서도 이아네는 또 금세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레뮤엘에 대해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런 애정표현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운 손가락이 살짝 이아네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손가락이 사이로 빠져나가고, 나른한 호흡이 서로의 목덜미로 뿜어져 내렸다.
“리트와 많이 친해진 모양이더군.”
“네... 저를 마음에 들어 해 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레뮤엘이 피식 웃으며 이아네의 눈을 바라보았다. 맑은 초록빛 눈이 편안하게 레뮤엘을 마주보았다. 여름날 잎사귀처럼 언제까지나 푸르른 듯한 싱그러운 초록색.
정말 모르는 걸까, 이 맹한 연인은.
“그대이기 때문이다.”
“예?”
“확실히, 리트는 나를 닮은 모양이야.”
얼굴에 물음표를 그린 이아네를 다시 끌어안고 레뮤엘은 다시 낮게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생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행복감에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안.”
"예.”
“고맙다.”
“...?”
영문을 모르는 이아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레뮤엘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대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