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진실과 진심
이아네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어 갔다. 가끔 어두운 얼굴을 하긴 했지만 하루 두 번 이아네를 진찰한 궁의는 완치가 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어쨌든 이아네도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으니 레뮤엘로서는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가끔씩 리트를 만나 말벗이 되어주거나 함께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할 만큼 몸이 나아지자, 레뮤엘은 침실에 두었던 책상을 다시 집무실로 옮기게 했다. 레뮤엘이 없는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 리트의 시종이 이아네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께서 잠시 시간을 좀 내달라고 하십니다."
리트가 이아네를 부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약간 그 성질이 달랐다.
“...왜 이쪽으로...?”
“쉿.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아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종을 따라갔다.
이아네가 걷는 곳은 늘 가던 성의 후원이나 리트의 공부방이 아니라 처음 들어와 보는 복도였다. 경비병이 문 하나 건너 하나씩 있는 것을 보니 지금까지 봐 왔던 곳과는 차원이 다른 삼엄한 곳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 곳에 리트가...?
“저하?”
“쉬잇!”
시종이 데려간 곳은 커다란 문 앞이었다. 경비병들이 난처한 듯 어린 리트를 말리려 하고 있었지만 디날의 단 하나뿐인 왕자는 체통조차 생각지 않고 열심히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저하, 무슨...”
“소리를 낮춰라. 아버지가 집무를 보고 계시는 중이니까.”
그제야 이아네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지금 그는 레뮤엘의 집무실 바깥에 서 있었다. 문은 두껍고 경비는 삼엄했지만 열쇠구멍이나 문틈에 귀를 대면 가느다랗게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이 들렸다.
“저하, 대체 이게 무슨...”
“조용히 해라.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일이...”
리트는 문득 자신이 일국의 왕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얼굴을 붉힌 리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집무실 바로 옆의 작은 서고로 이아네를 끌고 들어갔다.
다행히 서고는 비어 있었고, 리트는 그제야 조금 목소리를 키웠다.
“아버지께서...”
“예.”
“와... 왕세자비에 대한 안건을 검토하고 계신다.”
이아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물론 왕족들이 어린 나이에 혼약을 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건너 듣는 것과 눈앞에서 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리트는 안절부절못하며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계속 진지하게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이아네는 잠시 이런 상황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곤란해졌다.
“그렇지만... 저하는 아직 일곱...”
“그러니까, 외척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단 얘기다.”
이아네는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이 되지. 이 재미없는 꼬마에게 벌써부터 짝을 지어 주는 것은 아무래도 레뮤엘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폐하께서 막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아버지는 막아주시겠지만... 권세 있는 가문이라면 아버지께도 도움이 될 테고...”
리트가 조금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이아네는 조금 웃었다. 그러니까 이 작은 왕자님은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다가, 자신의 혼사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어린 왕족과 사돈을 맺겠다고 나서는 집안이라면 필시 권세가일 테고, 그쪽과 혈연을 맺는다면 레뮤엘로서도 좋은 일이겠지.
그러나 한편, 그렇게까지 아버지에게 힘이 되고자 하는 리트가 안쓰럽기도 했다. 어떻게든 제르멘에게 힘이 되겠다고 애쓰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지며 이아네는 잠시 슬퍼졌다.
“그러니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굳이 지금 그렇게 할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하지! 아버지는 내가 좋다고 하면 그리해 주시는 분이다. 내가 미리 알아 두었다가 연회나 무도회에서 그 집안 영애를 선택하면 아버지도 흡족해하시겠지.”
이아네는 왠지 리트를 꼭 끌어안아 주고 싶어졌다. 갸륵한 마음과 더불어 보답 받지 못했던 자신의 사랑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리트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럼...”
“쉿! 숨어!”
귀도 밝다. 바로 옆방,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리트가 당황하며 서고 안쪽의 책상으로 이아네를 끌어당겼다.
책상은 작아서 그 아래에는 성인 한 사람 숨을 공간뿐이었지만 리트를 끌어안자 어떻게든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었다. 서고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트의 시종이 아니냐?”
“예, 폐하.”
“왜 여기에 있는 게냐?”
펠록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아네는 숨을 죽였다.
“저하께서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실 수 있으신지 여쭈라 하셨습니다.”
“시간이 늦춰져도 괜찮다면 그리하라.”
레뮤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의심스러워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품에 안긴 리트가 낮게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서고 앞에서 멈춰선 발걸음이 문고리를 잡았다. 달그락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자 이아네는 반사적으로 리트의 입을 막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레뮤엘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크지 않은 서고여서 레뮤엘이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들킬 수도 있었다. 이아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레뮤엘이 뒤돌아 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문이 닫혔다. 발걸음이 조금씩 멀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이아네와 리트는 동시에 숨을 뱉어내었다. 긴장이 풀린 리트가 낮게 킥킥댔지만, 이아네는 원망스러운 듯 리트를 안은 팔을 풀었다.
“다음엔 이럴 때 부르지 마십시오.”
“큭큭, 내 이렇게 재미있었던 적은 난생 처음이다.”
리트가 여전히 숨을 죽여 낄낄댔다. 이아네는 긴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책상에 기대어 버렸다. 십 년 감수했다. 딱히 잘못한 건 없었지만 집무실 바로 옆에, 그것도 허락도 없이 들어왔으니 들켰다면 훈계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이아네의 눈에 책상 서랍의 밑판이 들어왔다.
“...?”
그저 판자일 줄 알았던 책상 밑판에 작은 홈이 패여 있었다. 마치 손잡이처럼 생긴 그 모습에 이아네는 조금 의아해하며 살짝 그것을 만져 보았다.
손 끝에 힘을 주어 홈을 밀자, 판자가 밀려들어가며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타났다. 리트의 놀란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바, 발로아, 그것, 기밀 문서가 아니냐? 저기, 빨리 원래대로 해 두는 것이...”
“...제롬...?”
“응?”
이아네가 어딘가 홀린 것처럼 비밀 서랍 안의 종이를 꺼냈다. 조금 낡긴 했지만 분명했다. 이아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편지에 코끝을 가져다 댔다. 희미하지만 익숙한 용담꽃 향기가 종이에 배어 있었다.
“이건... 델토르에서 온 서신입니다. 델토르 왕실에서 쓰는 고급 종이예요. 이것이 어떻게 여기에...”
“델토르?”
리트는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이아네는 어째서 이런 것이 디날 왕의 서고에, 그것도 비밀 서랍에 들어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 용담꽃 향기는 분명 제르멘의 것이다. 실례되는 일이기는 했으나, 이아네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이아네가 제르멘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유려하고 매끄러운 아름다운 글씨였지만 그 내용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요전 날 라퓨타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드래곤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리고 그 주인이신 아름다운 레이디도.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라퓨타에 등록된 드래고니안 중에 아름다운 누이의 이름은 없더이다. 외람되오나 혹여 누이 분께서 위험한 여흥을 즐기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 이 문제에 대한 것은 추후 의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아네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서둘러 다음 장을 넘겼다.
‘하하, 원하는 것이라니요. 저는 그저, 디날과의 친교를 돈독히 할 기회라 생각해서 기뻤을 따름입니다. 그렇지, 머지않아 델토르에서 왕비를 간택하기 위한 연회를 열 계획입니다만, 누이 분께서도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는 것은 어떠신지? 만일 참석지 못하신다 하면 각 나라의 귀빈이 모인 자리에서 제 칠칠치 못한 혀가 누이 분의 비밀을 흘리게 될 지도 모르겠군요.’
이아네가 이를 악물었다.
말이 친교일 뿐 내용은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 이아네는 서서히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제르멘이 라퓨타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왜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해 왔는지 비로소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런, 저는 그저 아무런 사심 없이 부탁드린 것이지만. 그리 생각하셨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한 나라를 짊어진 왕으로서 저 역시도 욕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지라, 이런 기회를 그저 조용히 눈감을 수만은 없을 듯하군요. 어떻습니까, 저와 거래를 하시는 것은?’
거기까지 읽었을 때, 이아네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리트가 불안한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방으로 가자.”
“...예.”
이아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편지 뭉치가 구겨지지 않도록 갈무리한 뒤 리트를 따라 방을 나왔다. 리트를 따라 복도를 달리는 동안, 이아네는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트는 어리지만 눈치가 빨랐다. 이아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리트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시간을 벌어 주겠다며 일부러 레뮤엘을 만나러 갔다. 이아네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리트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인 이아네는 리트가 레뮤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제르멘의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누이 분, 또는 라퓨타를 저에게 양도해 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쨌든 그리도 흉포한 드래곤을 불법으로 키우시는 분이라면 배필을 찾기 힘드시지 않을까요...’
‘이런, 저로서도 디날과의 국교는 중요한 문제랍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퓨타는 범법자에게 매우 엄격하니... 누이 분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라퓨타는 기꺼이 델토르 군에게 그 아름다운 포식자의 발톱을 빌려주지 않을지. ...’
‘...삼 일 후, 라퓨타에 군대를 보내겠습니다. 귀하께서는 라퓨타에 주둔해 계시다, 드래곤 둥지의 델토르군을 몰살시키시면 될 일입니다. 어떻습니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아닙니까.’
이아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몰살’이라고? 혹시나 했지만 제르멘의 편지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서 보냈던 군대가 라이오넬이었다. 문득, 제르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네 아버지가 눈치 없이 평화 운운하지만 않았어도, 너를 포함한 라이오넬을 라퓨타로 보내진 않았을 거야.’
이아네는 서둘러 다음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 다음은 라퓨타에서 주고받은 편지인 것 같았다. 가장자리가 유난히 구겨진 편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듯 다른 것들보다 더 낡아 있었다.
'우민한 결정 탓에 귀한 분께 짐을 지워 드린 것이 한없이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 때에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 드리다니, 사죄의 의미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라이오넬의 기사들은 쉽게 뜻을 굽힐 이들이 아닐 것이매, 처분은 귀하의 손에 붙이도록 하겠으니 부디 노여움 푸시길 바랍니다. 아, 다만, 마지막 순간에 고통은 없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이아네는 검은 잡는 기사였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제르멘의 서신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발로아 경이 느꼈던 것과 같은 분노를 느끼며, 이아네는 이를 악물고서 눈물을 훔쳤다. 흐려진 시야를 계속 닦아 가며 이아네느 다음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자신이 바보처럼 허비해 버린 청춘에 대해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그가 사랑한 것이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제르멘과 이별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제르멘의 서신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은 혼사에 대한 의논이나 베델리어 왕녀에 대한-드래곤을 혼수로 요구하는 등의- 내용이었기에 이아네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서신에 이르렀을 때, 이아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혹시, 델토르에서 탈주한 범죄자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으십니까? 최근 델토르에서 살인을 저지른 흉악범이 디날에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만, 혹여 그자를 붙잡게 되시면 즉결처분을 부탁드립니다. 그자의 이름은 이아네 월터 발로아라고 합니다.’
이아네는 침을 꿀꺽 삼키곤 편지의 날짜를 살폈다.
제르멘이 이아네의 다시 만난 후 보낸 서신이었다. 이아네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제르멘인데, 굳이 찾아내서 죽이라는 이유라는 것은...
이아네가 ‘혹시’ 도망쳤을 때를 대비해서?
이아네의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납득이 갔다. 제르멘이 가면을 벗었으니 이제 그 실체를 아는 이아네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혹여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이미 왕비가 있는 상황에선 성가실 것이 뻔하다. 죽었다고 생각한 라퓨타에서 살아왔으니 두 번째는 확실히 하고 싶었겠지.
이아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지금, 자신이 보아 온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이 사람이, 이아네가 반평생을 바쳐 바라봐온 남자가 맞는 건가? 마치 장난을 치는 것처럼 전쟁을 일으키고 간단히 국혼을 결정해 버리는 이 사람이, 과연 이아네가 바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건가?
혼란스러워진 이아네가 멍하니 다음 장을 펼쳤다. 다음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편지로 눈을 내린 이아네는 그것이 제르멘의 서신이 아님을 눈치채고 조금 놀랐다.
제르멘처럼 유려한 글씨는 아니지만 정갈하고 읽기 쉬운 필체는 보지 않아도 주인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자는 모릅니다. 그러나 범죄자를 디날에 풀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발견하는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왜일까.
왜, 한평생 순정을 바친 이는 이아네를 죽이려 하고, 미워만 했던 자가 그를 보호하는 걸까. 단순하지만 알기 쉬운 문장 안에 레뮤엘의 배려가 느껴져, 이아네는 그만 맥이 풀려 버렸다. 끊임없이 눈물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이아네 스스로도 대체 왜 우는지 이유를 몰랐다.
알 수 없이 죄어오는 아픔에 편지를 끌어안고서 이아네는 오래도록 오열했다. 눈물로 마지막 남은 미련을 털어 버릴 것처럼, 이아네는 마침내 죽어 버린 첫 사랑에 이별을 고했다.
그날 밤.
"이제... 오십니까."
침실로 돌아온 레뮤엘은 이아네의 힘없는 목소리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혼까지 빨아 먹힌 듯한 목소리뿐만 아니라, 아직도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는 이아네가 울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당황한 레뮤엘이 성큼 이아네에게 다가섰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폐하."
그렇게나 많이 울었는데도, 레뮤엘을 막상 마주 대하자 또다시 눈물이 났다. 안 그래도 빨개진 눈이 다시 촉촉해지자 레뮤엘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아네의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오싹하도록 차가운 손이었지만 부어오른 열기에는 오히려 청량한 체온이었다. 이아네가 목을 가다듬으며 눈물을 삼켰다. 레뮤엘의 배려가 너무 따뜻해서 그저 엉엉 울고만 싶은 것을 참으며 잠긴 목소리로 쥐어짜듯 묻는다.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레뮤엘은 잠시 이아네를 바라보다 조용히 되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그러나 이아네는 처음으로 레뮤엘이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알 수 없는 확신이 더해져, 이아네는 품에 갈무리했던 편지들을 한 장 두 장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건..."
"죽이셔도 됩니다, 폐하."
레뮤엘이 복잡한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아네는 생각했던 것만큼 막무가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아네가 입술을 떼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주군도, 조국도, 사랑까지도. 이제 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저는 어차피 디날에 수용된 포로입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마음대로 하실 권리가 있는 분입니다."
순정이 깨어진 남자의 마음은 비참하다. 레뮤엘이 생각에 잠겨 이아네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 조금 용기가 생긴 이아네가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는 다 알고 계셨지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이아네의 목소리에 다시 물기가 섞였다. 단순히 동정이든 아니면 이용이었든 간에 레뮤엘은 이아네에게 넘치도록 많은 것을 허락했다. 그 배려가 이제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왜, 모든 것을 알면서 얘기해주지 않았던 걸까. 넌 그저 왕에게 버림받은 기사라고, 한 마디라도 해 주었다면 이아네는 레뮤엘을 마음껏 미워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묵묵히 이아네의 결례를 눈감았던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갈 곳 없는 원망이 오히려 더욱 이아네를 찔러 왔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고...?"
잠시 침묵 후에 레뮤엘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아네를 다시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아네는 움찔했다. 지금까지 그가 알던 레뮤엘이 아닌 것 같다. 냉정 침착, 철혈의 왕이라고까지 불리던 그 레뮤엘이, 상처 입은 짐승의 눈빛으로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
"그대가 연인에게 버림받았다고, 어떻게 말하느냔 말이다."
이아네의 눈물이 순간 멎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라퓨타에 있을 때부터, 네 연인이 남성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체념한 듯한 레뮤엘이 빠르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더 이상 숨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해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어떻게..."
"일반적으론, 동성에게 겁간의 공포를 느낄 리가 없지. 그러나 그대는 계속 그래왔다. 라퓨타에서, 내 침실에서, 디날의 모든 곳에서."
이아네가 뻣뻣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레뮤엘은 처음이었다. 마치 독을 뱉어내는 것처럼 힘겹게, 그러나 확실하게 레뮤엘은 그동안 눌러왔던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이용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확인 차 발로아 경에게 물어서 네가 믿고 따르고 사모했던 이가 제르멘 공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놀라기보단 수긍했다. 그런데 그가 포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때, 나는 제르멘 공이 어떤 자인지 확실하게 알았다. 그를 그토록 믿고 따르는 기사들, 심지어 연인이었던 그대에 대해서도 제르멘 공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그대를..."
레뮤엘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짧은 정적. 여전히 멍한 이아네의 귓가에 레뮤엘의 한 마디가 흘러들었다.
"...사랑하게 되었다.“
이아네는 자기가 뭔가 잘못 들었거니 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고 머릿속만 빙빙 맴돌 뿐. 한참 후에야 이아네가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었다.
"...예?"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얼굴도 아마 바보 같을 것이다. 이아네는 맹세컨대 자신의 짧은 인생 중에서 가장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대가 어떤 자를 사랑했든, 내게 무슨 죄를 지었든 좋아.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대가 거부하는 한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레뮤엘이 약간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아네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아네가 제르멘을 생각할 때의 미소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걸 알아도,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마음을 바치는 자의 미소.
"폐하, 전... 저는..."
"그래, 당황스럽겠지. 나도 처음엔 당황했다. 아니라고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데도, 마음만은 솔직해서... 그대에게 상처를 입혀 버렸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으음..."
이아네가 당황을 감추기 위해 작게 헛기침을 했다. 레뮤엘은 이제 이아네를 편안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아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싫다거나 거부하는 것쯤은 이미 각오했지만, 이아네는 그리 싫지 않은 기색이었기에 레뮤엘은 약간 용기를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얘기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뭡니까?"
더 이상 놀라운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레뮤엘은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유리 장식장 쪽으로 가서 안에서 작은 액자를 꺼내 왔다.
지난번에도 보았던 것이었다. 왕자와 똑같은 제비꽃 색 눈동자와 잿빛 머리카락의 왕비.
"...이것은..."
"리트의 어머니이자, 나의 아내였지."
레뮤엘이 액자의 뒤편을 열고 초상화를 이아네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초상화를 받아든 이아네가 시선을 그림으로 내렸다. 다시 보아도 역시 미인이었다.
"뒤집어 보겠나."
이아네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초상화의 뒤편을 보았다. 멋진 필기체로 초상화를 완성한 날짜와 왕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상할 것은 전혀 없어 보이는데, 라고 생각한 순간 이아네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뮤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왕비 전하의 성함이... 그러니까...”
“풀네임은 바이올라 이아세 레다필리스. 디날의 대부분은 바이올라로 알고 있지만, 나와 내 측근들은 그녀를 이아세라고 불렀다.”
3년 전에 죽었다는 비운의 왕비에 대한 이야기는 펠록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에 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아네는 무심코 입술로 그 이름을 따라 읽었다.
이아세.
신기하다. 분명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데도, 아주 생소한 이름을 읽는 느낌이었다.
“...이아세에 대한 것은, 펠록스에게 들었겠지.”
“아, 네.”
“...지금부터 얘기하는 것은,”
레뮤엘이 잠시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말하는 것이 피곤하다기보다 묻어둔 이야기를 다시 회상해야 하는 것이 지친 듯한 느낌이었다.
“리트에겐 절대 얘기해선 안 되는 것이다.”
“...저하께 말입니까?”
“리트가 알아선 안 된다. 리트에게만은...”
이아네는 문득 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진실이 뒤집어지고, 철혈이라 생각했던 남자가 눈앞에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3년, 아니 4년 전쯤이었겠군.”
어딘지 공허한 눈을 하고, 레뮤엘은 오랜 시간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비밀스럽게 웅크린 검은 얼룩에 대해서.
“내가 막 왕위에 올랐을 때, 나라 안팎은 조금 시끄러운 상태였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나는 국혼을 선택해야 했지. 어려서부터 정혼했던 레다필리스 공녀와의 혼사가 진행되고 리트가 태어나자, 그제야 한숨 돌릴 상황이 되었다.”
레뮤엘이 피곤한 듯 눈두덩을 살짝 눌렀다. 늘 이지적이던 얼굴에 그늘이 지며 숨겨왔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디날은 다른 대륙과의 무역을 추진하고 있어서 난 리트가 태어난 후부터 계속 바빴다. 이아세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심약했기 때문에 내 부재를 힘들어했던 모양이야. 그때 만약...”
레뮤엘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좀 더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하고...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아네는 그 고뇌가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자신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작은 동심원으로 시작해 흐르기 시작한 물결은 이제 잔잔하게 심장 아래를 적신다. 차분하게 시작한 감정은 점점 확실해졌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겠지만, 가장 신뢰하는 내 친우를 대신 보내는 것으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디날 최고의 기사였던 질리언 르우엔은 내 오랜 친우이자 펠록스와 더불어 내가 가장 신뢰하는 자였다.”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아네는 펠록스가 얘기했던 부적절한 왕실의 스캔들에 대해 떠올렸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인정하는, 그리고 내가 자랑스러워했던 내 측근이었지. 그에게 주는 것은 아깝지도 아쉽지도 않았지만, 그 날 이후...”
레뮤엘이 잠시 입을 다물고 마른세수를 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아네는 레뮤엘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확인하고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았다.
진짜구나.
레뮤엘이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펠록스도 리트도 알지 못했던 디날 왕가의 '진짜' 이야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솔직히 말해 아직도 모를 일이다. 왕으로서 필요한 모든 교육을 받았지만, 가장으로서는 부족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거기까지 말하고, 레뮤엘은 시종을 불러 와인을 조금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이아네는 살짝 긴장했다. 레뮤엘이 술을 입에 대는 것은 지금까지 딱 한 번 보았지만, 그때 레뮤엘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이아네는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레뮤엘은 괴로움을 삼킨다기보다 토해내려고 술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이아네는 잠자코 시종이 와인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다.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조금 마시고 레뮤엘은 포도향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아세는 처음엔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질리언은 나와는 달리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이어서, 나보다도 훨씬 여성을 잘 다루는 사내였지. 자주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질리언을 보낸 후부터 이아세도 많이 진정되는 것처럼 보였고 나도 드디어 안심하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바빠질수록 질리언의 방문은 잦아졌고, 이제 막 투정이 심해지기 시작한 리트까지 달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질리언의 신세를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레뮤엘이 다시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느릿하게 목젖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나는 리트를 사랑한다. 내 아들이고, 내가 아끼는 아내의 아들이니. 그러나 그 무렵의 리트는, 아버지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이지...”
레뮤엘이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알 만했다. 어린 조카가 있는 이아네도 그 무렵의 아기들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질리언은 능숙했지. 그에게는 동생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아기를 어르는 데는 이미 익숙했었다. 유모도 달래기 힘들었던 리트를 몇 번이나 능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아세뿐 아니라 왕비궁의 모든 시종들에게도 그는 신 같은 존재였지. 그래, 물론 내게도 말이다.”
이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펠록스에게도 들었던 얘기였다. 아들이지만 달래기엔 서툰 국왕과, 보라색 눈의 아름다운 기사에 대한 이야기.
“...어느 날, 모처럼 휴가를 내어 이아세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문득 느끼고 말았지. 이아세의 모든 말이 시작도, 끝도 질리언이라는 것을.”
이아네는 물끄러미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빈껍데기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소름끼치도록 슬프다.
“안타깝게도 이아세는 거짓말을 못 하는 여자였다. 그것이 그녀의 장점이자 잔인한 점이었지. 나는 드디어 질리언을 왕비에게 보내지 않게 되었고, 그것이 이아세를 초조하게 했던 모양이야. 리트는 여전히 나를 무서워했고 이아세는 나와 함께 있으면 묘하게 우울해 했지. 무기력하다고 할까, 그녀는 나를 앞에 두고서도 무의식중에 한숨을 쉬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레뮤엘이 느릿하게 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렸다. 적자주색 액체가 흔들릴 때마다, 그 보랏빛 궤적에서 누군가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듯 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 지경이 되도록 눈치가 없던 내가 잘못일 테니 끝까지 몰랐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질리언을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이아세의 짝사랑이라면 내 부덕의 소치라고 넘어간다 쳐도, 질리언은 흔들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질리언이라면.”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레뮤엘의 손을 잡았다. 빙글빙글 돌던 글라스가 멈추고, 레뮤엘이 가라앉은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본다. 평소의 꿰뚫는 듯한 총기가 아닌, 그저 바라보는 느슨한 응시.
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숨기며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글라스를 받아들어 와인을 좀 더 따랐다.
“...계속하십시오.”
“...본론부터 얘기하자면, 깊은 밤에 늦은 업무를 마치고 나오다 왕비의 방에 들렀다. 리트는 한 번 깨면 다시 재우기 힘들기 때문에 아주 조용히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했지. 문 앞에서 졸던 시녀들이 깜짝 놀랐지만 난 그저 그것이 내 갑작스런 방문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아네가 눈을 감았다. 숨막힐 듯한 고요가 침실 안을 메운다. 와인을 한모금 더 머금은 레뮤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질리언이 있었다.”
“그만...”
“왕비의 방에 들어선 것은 나뿐이었고, 문은 리트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잔뜩 기름칠해 둔 상태라 소리도 거의 없었지. 그래서 ‘그들’은 나를 깨닫지 못했다. 달도 구름에 가려 어두운 밤이었지만 억누른 소리는 어둠만큼이나 선명했어. 연인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내 아내의 것이었고, 희미한 등불에 드러난 그림자는 생각보다 볼만하더군.”
“폐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전부 지켜봤다. 분노보다는, 기다림이었다. 내 아내와 한 침대에 있는 자가 제발 질리언이 아니기를, 내 오랜 친우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이아네가 다시 레뮤엘의 소매를 붙잡았지만 레뮤엘은 부드럽게 이아네의 손을 떼어 내려놓았다. 무섭도록 냉정한 손길이었지만 이아네는 그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등불을 켜고 드디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의 참담함이라니. 그토록 아니길 바랐건만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질리언이더군. 그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은, ‘리트를 깨워선 안 된다’는 것이었어. 죽이고 싶다거나, 괘씸하다거나, 배신감보다는, 그저... 내 아들을 보호해야 했다.”
불안해 보이는 이아네의 초록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고, 레뮤엘은 얕게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질리언은 그 자리에서 죽음으로 사죄하려 했지만, 이아세가 소리를 지를 것 같아 그만두게 했다. 그때 리트는 겨우 세 살이었고, 눈앞에서 어머니의 절규와 대부의 죽음을 목격하게 할 순 없었지. 나는 그대로 방으로 돌아갔다. 밤은 늦었고, 하루 종일 바빴던 데다, 아들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심지어 아내의 외도까지 목격한 후였으니 그저 쉬고 싶었지.”
레뮤엘은 글라스를 기울여 남아 있던 와인을 모두 마시고 드디어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디켄터에 반쯤 남아있던 와인이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아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두 분 모두 지금은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것도 들었나?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군.”
레뮤엘이 느긋하게 한숨을 쉬며 무거워진 머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희미한 알코올 향이 이아네의 코끝에 맴돌다 사라졌다.
“...죽은 것이 아니다.”
“예?”
“둘 다, 살아 있지. 어디인지 모르지만, 내가 알지 못할 곳에.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이아네가 멍한 눈으로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취기가 오른 것인지 그 가벼운 움직임이 아주 무거워 보였다.
“그 다음날 질리언이 독대를 청했다. 죽음으로 사죄하겠다는 말을 듣는 것도 지쳐서, 나는 딱 하나만 물었다. 이아세를 사랑하느냐고.”
“......”
“질리언은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지, 이아세에게는. 처음부터 나와는 정략결혼이었던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나로서는 그녀를 붙잡아둘 순 없는 일이지.”
레뮤엘이 성마르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녀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리트는... 그 어린 아이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내 욕심일지라도 리트는 내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리트는 두고 가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도피를 도왔지. 내 손으로.”
“...어떻게...”
“말했잖나.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었던 게지. 질리언은 무역선에 태워 중간에 조용히 빠져나오도록 하고, 1년 후에 사고인 것처럼 위장해 이아세를 궁 밖으로 내보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어슴푸레한 새벽, 서서히 멀어져 가는 뒷모습...”
레뮤엘이 문득 허리를 세워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취기로 흐릿해져 있던 레뮤엘의 심청빛 눈이 다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아네.”
“예.”
이아네가 다시 긴장했다. 레뮤엘은 편안하게 늘어져 있었지만 그 눈빛 앞에선 언제나 벌거벗은 것 같은 느낌이 되고 만다. 이아네는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약간 불안해졌다.
“그대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예?”
레뮤엘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그 찡그린 미간이 너무 색정적으로 보여서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내가 굳이 내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이아네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바보처럼 느껴졌겠지만 레뮤엘은 아무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고 천천히 카우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살짝 비틀거리긴 했지만 레뮤엘은 이아네의 걱정스런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이아세의 액자를 가져온 찬장으로 다가갔다.
제자리에 액자를 다시 엎어두고, 레뮤엘은 무언가를 찾는 듯 찬장 안을 훑었다.
“여기 있군.”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레뮤엘은 찾던 것을 집어 들었다. 이아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손에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온 레뮤엘이 탁자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잘 무두질한 가죽으로 겉을 마감한 보관함이다. 크기는 어른 주먹만 한데 장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고 지나친 후 3분만 지나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특색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 전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많이 고민했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것만큼은 그대의 결정에 맡겨야 할 것 같았어.”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반질반질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생각보다 묵직한 상자는 잠금장치조차 없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그 안의 물건을 확인했을 때, 이아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본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 광채는 여전했다.
황금빛 사자와 그 위로 조각된 붓꽃. 사자의 눈에 박힌 초록빛 가넷은 일렁이는 등불을 반사하며 더욱 생생하게 빛난다. 라퓨타에서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라이오넬 기사단의 엠블럼을 받아든 순간, 기억이 났다.
이아네가 리트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무렵 레뮤엘이 찬장 안에 두었던 상자였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것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아. 그러나... 그러나 그대가 힘겨워하면서까지 내 곁에 남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대가 내 옆에, 내 시야 안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힘들어하더라도, 도망치고 싶어 해도 내 곁에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여전히 함 안을 바라보는 이아네의 턱에 차가운 손가락이 와 닿았다. 손가락은 조심스럽게 이아네의 턱을 들어 올려 그가 레뮤엘을 마주보게 했다.
“...그대가 없었던 시간 동안 깨달았다.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그대만 행복하다면 좋아. 이아네, 그대가 좋다면...”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뺨을 감싸 왔다. 소중하고도 사랑스러운 듯, 부드럽게 레뮤엘이 허리를 숙였다. 이아네가 천천히 눈을 감자, 이마에 보드라운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 이아네의 눈앞에는 레뮤엘의 심청색 눈동자가 가득 차 있었다. 호흡에 섞여 알싸한 알코올 향기가 코끝에 끼쳐 왔다.
“이것을 가지고 델토르로 돌아가도 좋다.”
“...!”
“...내 곁이 아니라고 해도, 그대가 행복한 길을 가도록 하라. 그대만 행복하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아네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아내와, 그의 친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순간, 레뮤엘은 힘겨운 결정을 해야만 했다. 자신이 있어 사랑하는 이들이 불행해진다면, 그들이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한 것이 나을 것이라고.
담담하고 말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과연 정말 담담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아네는 레뮤엘을 가까이에서 보아 오면서 그가 괴로운 심정을 어떻게 토로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이아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얘기하지만 레뮤엘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그저 왕가의 후계를 잇게 하기 위해 이용할 사람은 못 되었다. 고통스럽더라도, 이아네가 행복하다면, 레뮤엘은 기꺼이 그를 보낼 것이다. 어디라도, 언제라도, 심지어 제르멘의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평생 보지 못해도 괜찮습니까?”
이아네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레뮤엘은 예상했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다.”
“...목소리조차, 소식조차 듣지 못해도, 괜찮으신 겁니까?”
“......”
레뮤엘은 이아네의 뺨을 감싼 엄지를 움직여 이아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달콤하고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레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평안하다면, 오히려 소식이 없는 것이 더 나은 일이겠지. ...그러니, 내 마지막 욕심만은 용서해 다오.”
레뮤엘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살짝 호선을 그린 붉은 입술이 가까워진다.
그대로, 레뮤엘은 이아네에게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알코올 향기와 눈물이 섞인 키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콤했다. 이아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금 용기를 내어 이아네의 입술을 핥아본다. 흠칫, 이아네가 몸을 떨었지만 공포가 아닌 흥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레뮤엘은 좀 더 대담해졌다.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로 넣어 뒷머리를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살짝 벌린 잇새로 혀를 넣어 수줍은 과실을 찾아낸다. 혀끝에 물기 어린 부드러움이 닿자 이아네가 놀란 듯 어깨를 들썩였다.
처음도 아닌데, 입을 맞췄던 일은 전에도 분명 있었는데 이렇게 가슴 떨릴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망설이면서도 레뮤엘의 움직임에 따르는 이아네가 어쩔 줄 모르게 사랑스럽다. 새삼 솟구치는 욕심에 레뮤엘은 다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말았다.
“...이아네.”
“...예.”
레뮤엘이 다시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어떤가?”
“예...?”
멍하니 레뮤엘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당혹의 빛을 띠었다.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며 레뮤엘이 이아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대의 마음을 묻는 것이다.”
“저...저는...”
이아네는 갑작스런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나 동시에, 백지인 머릿속으로 주마등처럼 제르멘의 모습이 스쳐 지났다.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제르멘. 그저 단 한 사람, 이아네의 순정을 온전히 바쳤던 주인.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는 이아네에게 늘 닿지 못했던 별이었다. 그의 망토자락, 머리카락 한 올마저 이아네가 함부로 닿을 수 없었다. 허락 없이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가 제르멘의 주의를 들었던 일이 생각났다.
“폐하, 그럼...”
“음?”
이아네가 주저하다 손을 살짝 뻗어 조심스럽게 레뮤엘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쓰다듬었다.
레뮤엘은 이아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먼저 다가와준 용기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이아네가 손을 떼고 입을 먼저 열 때까지 레뮤엘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불쾌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느냐?”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의 레뮤엘을 보고서야 이아네는 조금 안심했다. 이아네의 눈에 떠오르는 안도를 발견하고서, 레뮤엘은 자신이 옳은 대답을 했다는 확신을 가졌다.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제롬... 아니, 그분은, 제게 있어서는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델토르로 돌아갔을 때."
이아네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르멘의 치부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것은 제르멘의 치부가 아니라 이아네 자신의 치부였다.
"그분은... 저를 눈치 없이 돌아온 옛 연인처럼 대했습니다."
"......"
"처음에는 몰랐습니다만... 디날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가, 제가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이아네는 거기까지 얘기했다가 문득 눈을 들어 레뮤엘을 다시 바라보았다. 레뮤엘은 여전히 약간 취기가 오른 느른한 시선으로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레뮤엘의 눈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레뮤엘이 이아네를 가두었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디날과 델토르 어느 쪽에서도 이아네를 정치적으로 쓰고 버릴 수 없도록, '그쪽'과는 철저히 격리시키며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본색을 드러내며 저를 가두었습니다."
제르멘의 본색에 대한 것은 아마 이아네보다 레뮤엘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굳이 레뮤엘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아네는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제르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흘...? 나흘이었나...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굶어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허무해져서-"
"잠깐."
처음으로 레뮤엘이 이아네의 말을 끊었다. 이아네가 고개를 들자, 레뮤엘이 약간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천천히 물었다.
"그가 그대를 가두었을 때, 아무것도 못 먹었나?"
"예... 세안용 물이 있어서, 처음엔 그것을 마셨습니다만."
"...계속하라."
레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아네는 그의 꽉 말아 쥔 주먹을 보고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아네는 왠지 기뻤다. 거짓 호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 고마웠다.
"거기에서 저는 그분의 마음을 확신했습니다. 저는 분명 그분을 사랑했지만, 그분은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아네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제르멘은 자신이 이아네를 아무렇지 않게 만지면서도 이아네가 자신을 만지는 것은 꺼렸다. 이아네는 늘 그것이 제르멘의 성격 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결 좋은 은발을 정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에 서운함을 가지곤 했다.
유소년기를 함께 해 오면서 귀족들의 일반적인 유희인 체스조차 함께 둔 적이 없었다는 것은 이아네에게 작은 관심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이아네는 늘 제르멘의 곁에 머물러 있었지만 제르멘이 사교 중일 때는 방 바깥에서 제르멘을 기다려야 했다. 함께 어울려 체스를 두는 일도, 체스를 가르쳐 주는 일도 없었으며 하물며 제르멘은 이아네가 체스를 둘 줄 모른다는 것조차 몰랐다.
라이오넬의 다른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갖춘 자들이었다. 일과 후에 체스를 두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 외에도, 연회에서 레이디들과 춤을 추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아네는 오로지 제르멘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춤을 출 줄 몰랐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제르멘을 위해 검을 휘두를 때면 충분했다.
최연소 라이오넬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이아네는 훌륭하게 제르멘의 인형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돌아볼 때마다 맨가슴으로 장미를 끌어안는 것 같았다. 아프고 어리석은 과거, 그리고 현실. 이아네는 멍청하게도 제르멘이 보내는 미소를 애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제가 일평생 전부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거짓이라는 것이, 제게는 너무 괴로운 일입니다.”
레뮤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아네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마음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폐하는...”
“말하라.”
“폐하께서는... 그런 제게 너무 과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디날에서의 생활은 편안하고 즐거웠습니다.”
밤이 깊도록 두었던 체스. 서투른 젓가락질 연습. 델토르의 이야기를 들으며 활짝 웃던 리트. 아들과 닮았다는 말에 숨죽여 웃던 레뮤엘.
그에 비하면 다시 돌아간 델토르는 지옥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결혼과 배신, 그리고 버려진 자의 괴로움뿐.
“이 마음이 무엇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아네는 목 아래가 따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분명 귀까지 빨개져 있을 것이 뻔하다. 기사로서 살아온 이아네에게 이런 낯간지러운 상황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저... 저는... 폐하가 싫지 않습니다.”
“......”
모기만한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을 것이다. 레뮤엘이 어떤 표정일지 궁금했지만 부끄러워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변절자라고 욕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델토르로 돌아가는 일은, 이제 없을 겁니다.”
이아네가 마지막 말을 끝맺고서 깊은 숨을 토해내었다.
말했다. 생각만 했던 것보다 말로 꺼내 놓고 나니 훨씬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아네는 델토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는 레뮤엘에게서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그토록 숨기고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하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문득 레뮤엘이 일어서더니 이아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 손을 바라본다. 노르스름한 등불에 비춰, 하얀 손이 조금 따뜻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레뮤엘의 손은 늘 차가웠다. 그러나 따뜻하고 보드랍던 제르멘의 손보다 흠칫 놀랄 만한 그 냉기가 오히려 이아네에게는 따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밤이 늦었다.”
“......”
“...잠자리에 들겠나.”
이아네는 레뮤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손을 잡으면, 이아네는 돌아갈 수 없다. 그는 이제 온전히 레뮤엘의 사람이 된다.
잠시 망설이던 이아네가 낮게 한숨을 쉬더니 놀랍게도 생긋 미소를 지었다.
“...예.”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아네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읏, 잠깐... 폐하... 음...”
말할 틈도 없이 입술을 거칠게 물어오는 감촉에 이아네는 당황스러운 탄성을 속으로 삼켰다. 레뮤엘의 숨은 전에 없이 거칠어졌고 뺨 위로 흩어지는 날숨이 알코올과 섞여 달아올라 사라졌다. 정신없이 이아네의 머리와 허리를 끌어안은 든든한 팔은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그를 옥죄어 왔다.
입안을 헤집는 혀가 낯설도록 뜨거웠다. 레뮤엘의 혀가 이아네의 입천장을 훑고 혀뿌리를 감아올리며 타액을 빨았다. 두 입술이 몇 번이나 마주치며 그 사이로 달큰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울 만큼 가파른 키스에 이아네는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다.
“으음, 자... 잠시만... 하윽...!”
겨우 입술을 떼었나 싶었더니 레뮤엘은 곧바로 이아네의 목줄기에 이를 세웠다. 이아네가 흠칫 놀라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작은 신음이 튀었다. 레뮤엘이 살짝 웃는 것이 여린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듣기 좋군.”
“윽... 그런... 앗...”
이아네가 원망스레 바라보는 순간 레뮤엘이 다시 이아네의 쇄골에 고개를 숙였다. 암컷을 차지한 대장 수컷이 그리하듯 레뮤엘은 이아네의 피부에 낙인을 새겨 넣으며 코끝에 감도는 체향을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공중에 반쯤 뜬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이아네의 손이 머뭇머뭇 레뮤엘의 어깨에 얹어졌다. 결코 무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레뮤엘은 어깨에 얹어진 이아네의 손에 또 한 번 작은 감동을 하고 말았다.
‘나의’ 사람이구나.
문득 가슴 깊숙이 차오르는 충만함에, 레뮤엘은 달콤한 사탕을 아껴 먹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달큰한 속살을 핥으며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셔츠를 풀어헤쳤다.
“앗...”
차가운 손이 닿는 느낌에 이아네가 약간 허리를 튕겼다. 어슴푸레한 등불 아래 이아네의 가슴이 드러났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러 날 고생한 몸은 볼품없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가장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 천천히 이아네의 심장 근처를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가락은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이아네의 가슴을 쓸었다. 그 묘한 접촉에 이아네가 깊이 한숨을 내쉬자, 레뮤엘이 조금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차가운가?”
“아... 조... 조금...”
“...미안하군. 이것만큼은... 어릴 때부터, 손은 늘 차가워서...”
이아네는 멍하니 레뮤엘의 풀죽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연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수족냉증을 원망하고 있었다. 어쩐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이아네는 웃고 말았다.
“차갑긴 하지만...”
이아네가 여전히 웃으며 레뮤엘의 손을 잡았다. 진지하게 눈을 맞춰 오는 레뮤엘이 새삼스럽게 달라 보였다. 이렇게 보니 그저 한 사람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사내구나. 가슴이 따뜻해짐과 동시에 이런 사랑을 받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연민이 밀려왔다.
“...괜찮습니다.”
손끝에 레뮤엘의 냉기가 스몄지만 아랑곳 않고 이아네는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레뮤엘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레뮤엘의 손을 감아쥐고 뺨에 가져다 댔다. 이아네의 달아오른 얼굴을 감싼 손이 시원했다.
“이아네... 그대는 정말이지...”
한숨을 토해내며 레뮤엘은 다정히 이아네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이아네의 초록빛 눈이 사랑스러웠다. 갖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레뮤엘은 너무나도 이아네를 원했다.
“...사랑한다.”
“웃...”
“이아네. 그대를 사랑해.”
이 남자의 치명적인 부분은 너무 진지하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고백에 이아네는 허리 아래쪽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고 당황하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한계로군.”
“앗-”
예고도 없이, 차가운 손이 이아네의 바지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반쯤 열이 오른 고간에 레뮤엘의 손가락이 흘러들었다. 깜짝 놀라 다리를 움츠렸지만 레뮤엘이 이미 허벅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읏, 잠깐, 거긴... 아으응-”
아니라고 하지만 몸은 솔직하다.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한 남근이 원망스럽도록 성실하게 본능을 따라갔다. 왜인지 모르지만 오늘따라 그 손길이 더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좀 더 소리 내어도 괜찮다.”
“그, 그렇지만... 하앗, 앙...”
고환 밑부터 훑으며 기둥을 한 손에 뿌듯하게 잡아 온다. 뜨거운 남근에 비해 놀랍도록 차가운 손이 더욱 자극적이었다. 이아네가 당황하며 허리를 들썩이자, 레뮤엘이 조금 웃으며 이아네의 귀에 속삭였다.
“아름다워.”
“아, 하응... 흐읏, 아, 아응...”
부드럽게 젖은 소리가 이아네의 신음을 삼켰다. 단정치 못하게 벌어진 입술을 핥아 올리며 레뮤엘이 정욕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혀가 얽히며 색정적인 변주곡을 자아냈다.
“하윽, 그... 그만, 아, 하앗, 흐읏... 아...!”
리드미컬하게 기둥을 훑으며 중간 중간 꽈악 쥐어주는 손이 소름끼치도록 기분이 좋았다.
어느새 정신없이 레뮤엘의 목을 끌어안은 채 이아네는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넘실대며 밀려오는 쾌감의 파도가 짜릿하게 허리를 타고 올라와 자기도 모르게 레뮤엘의 손에 맞추어 허리를 흔들었다.
“으응, 아... 폐... 폐하, 하윽...”
“기분 좋은가?”
“우웃, 그... 으응... 아흥, 응, 아으응...”
이아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찡그렸다.
기분 좋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아네는 몰랐지만 쌍둥이의 최음향에 중독된 몸은 있는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절정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강렬한 파도가 이아네를 덮쳤다.
“으응, 흐... 좋아... 아흑...”
레뮤엘의 눈이 기쁜 빛을 띠었다.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레뮤엘이 가장 원하던 말이었다. 레뮤엘은 기꺼이 이아네의 바지를 벗겨 내리고 맑은 액을 흘리는 꽃나무를 입안에 머금었다.
“하앗, 아, 으음... 흐앙...!”
이아네의 손이 레뮤엘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경직된 무릎이 딱딱해졌지만 민감한 몸은 오히려 자극을 반기며 활짝 벌어졌다.
츱, 하고 젖은 혀가 기둥을 훑어 올렸다. 귀두 아래를 꼼꼼히 물어 올리는가 하면 혀끝으로 요도를 찌르듯이 핥는다. 다물지 못한 입술 새로 흐르는 타액을 놓칠세라 차가운 손이 기둥을 잡고 문질렀다.
기둥을 뿌리까지 깊게 타고 내려오는 젖은 혀가 생경한 감촉을 전하며 부드러운 뱀처럼 이아네의 고환을 감아올렸다. 작은 콧숨이 얇은 피부에 닿자 바르르 떨리는 무릎이 요염했다. 치아가 닿지 않도록 부드럽게 빨아들였다가 입김을 후 불어넣기도 하며 마음껏 눈앞에 드리워진 금단의 과실을 맛본다.
레뮤엘은 느긋하고도 소중하게, 사랑스럽고도 달콤하게 이아네의 고간을 촘촘히 맛보았다. 그 느긋한 움직임에 미쳐가는 것은 결국 이아네였다.
“흐윽, 으... 폐하... 아... 하응...”
“좋은가?”
“응... 으응, 좋아요... 아... 기분... 으흥, 좋아... 앗, 하아...!”
레뮤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타액으로 흥건히 젖은 이아네의 고간도, 활짝 벌어져 하얗게 열린 허벅지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이아네의 안타까운 손길도 모두 기분 좋았다. 그 모두가 레뮤엘을 원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워. 이아네.”
“하아...”
이아네가 붉어진 눈가로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그 원망스러운 눈빛이 또 귀여워서 레뮤엘은 다시 허리가 뻐근해졌다. 이런, 곤란하게 됐군.
“...괜찮겠나?”
물론 지금도 이성의 끈은 아슬아슬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혹시나 이아네가 곤란할 만한 짓은 털끝만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괘... 괜찮습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이아네에겐 몸속에 지핀 불을 끄는 것이 먼저였다. 끊임없이 이아네를 괴롭히는 갈증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레뮤엘이라면,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알았다.”
레뮤엘이 협탁의 서랍에 손을 뻗었다. 작은 향유병의 마개를 열자 순식간에 식물성의 향기가 퍼졌다.
“...! 으....응...”
고간 사이로 차가운 액체와 향기가 퍼졌다. 꼼꼼히 향유를 밀부에 문지르던 손길이 조금씩 다물린 입구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부드럽게 주름을 늘려 가며 탐색하듯 입구를 매만지다, 손가락을 세워 부드럽게 안으로 밀어 들어간다. 숨을 훅 들이키긴 했지만 이아네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레뮤엘의 손가락은 의외로 쉽게 은밀한 곳으로 들어섰다. 뜨겁고 부드러운 내부가 착 달라붙었다. 천천히 내부를 넓히며 레뮤엘은 아프도록 단단해진 아랫도리를 진정시키느라 조금 고생했다.
“아...우... 으응...”
조금 익숙해지자 이아네의 잇새로 부드러운 신음이 흘렀다. 그 신음소리를 표지판 삼아 서서히 손목을 움직이자 이아네가 무릎을 모으며 입을 막았다. 모아진 다리로 인해 더 좁아진 내부가 손가락을 압박해 오자 레뮤엘은 좀 더 힘을 주어 왕복을 시작했다.
“하앗...! 아... 으응, 으... 크읏... 아, 아, 폐, 폐하...!”
내벽의 주름을 따라 올라가며 느긋하게 안쪽을 꾹꾹 누른다. 내벽 안 어딘가 봉긋한 언덕이 손에 걸리자 이아네의 목소리가 갑자기 다급해졌다.
“핫, 아학, 아, 아... 아아아앗, 폐하, 하윽, 으으응, 아앙...! 거기, 아, 거기는...!”
직접적으로 전립선에 걸려 오는 손길의 위력은 대단했다. 집요하게 느끼는 곳을 꾹꾹 눌러 문지르고 비벼 오는 동안 이아네는 꼴사납게도 다리를 활짝 벌리며 더 큰 자극을 원했다.
좀 더, 좀 더 깊은 곳까지 원한다. 더...!
이건 분명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을 허락했다지만 이렇게 홍수처럼 밀려드는 갈증은 분명 인위적인 데가 있었다. 레뮤엘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나쁘진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좋은 쪽이었지만, 아마 이아네가 이렇게까지 감도가 좋아진 데에는-
...그 망할 쌍둥이.
국왕답지 않은 욕지기가 낮게 흘러나왔다.
“...그놈들은 대체...”
레뮤엘이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마저도 이아네의 신음에 묻혀 버렸다. 레뮤엘은 묘한 심정으로 이아네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하아, 아...?”
쾌락에 흐릿해져 있던 이아네의 눈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허겁지겁 손이 빨라지며 레뮤엘의 벨트를 풀어헤친다. 헐거워지는 허리춤이 만족스러웠다.
레뮤엘이 완전히 알몸이 된 순간, 갑자기 이아네가 레뮤엘을 밀어 눕히더니 그 위로 타고 올랐다. 놀랄 새도 없이, 이아네는 반쯤 멍한 눈으로 레뮤엘의 단단하게 선 철주 위에 주저앉았다.
“...?!”
“우... 아으읏...”
이건... 예상치 못했군.
레뮤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이아네의 골반을 잡았다. 뜨거운 내벽이 철주를 순식간에 감싸며 사방으로 조여 왔다. 순간적으로 허리께가 쭈뼛하며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잠시 숨을 고르고, 레뮤엘은 가슴팍에 얹은 이아네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하읏, 아... 아핫, 앙...!”
깊게 앉아 내부를 뿌듯하게 채우는 만족감을 즐기는 것도 잠시, 이아네는 다시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정신없이 스스로를 자극했다. 철주가 지나는 곳마다 뜨거운 열이 피어나며 이아네의 깊은 곳을 간지럽힌다. 허리를 돌리며 기분 좋았던 곳을 찾아 열심히 레뮤엘의 것을 문질렀다. 레뮤엘의 잇새로 억눌린 탄성이 흐르자, 왠지 기분이 좋아진 이아네가 다시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아, 응... 으음, 아, 흐응...”
“후...”
철벅, 하며 엉덩이가 허벅지에 닿는 찰진 소리가 울렸다. 레뮤엘이 이아네의 엉덩이를 쥐자 이아네가 다시 낮게 신음을 지르며 엉덩이를 낮추어 제 성기를 레뮤엘의 배에 문질러 왔다.
“아, 아앗, 조... 좋아...! 아, 흐읏...!”
레뮤엘은 조금 웃었다. 허리에 힘을 주자 이아네가 금세 반응하는 것이 귀여웠다. 손을 뻗어 어슴푸레 드러난 가슴과 리드미컬한 허리를 쓰다듬어 본다. 그 와중에도 이아네의 입구는 남근을 꾹꾹 조이며 욕심스레 기둥뿌리를 핥고 있었다.
뜨거운 기둥이 뿌듯하게 내벽을 채우며 만족스럽게 이아네의 깊숙한 곳까지 꾹꾹 찔러 들어왔다. 들어왔다 빠져 나가는 연속적인 움직임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쾌감을 찾으려고 열심이었다.
앞뒤로, 또는 좌우로 교합한 부위가 움직였다. 부끄럽도록 적나라한 몸짓으로 엉덩이를 흔들어 댄다. 평소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발정한 모습이 볼만했다. 타닥 타닥, 박자가 빨라질수록 제 스스로 움직이면서도 주체가 되지 않는 듯 이아네는 헐떡이며 레뮤엘과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아, 흑, 아아... 흐으, 아, 흐아앙..!”
이아네의 신음에 약간 물기가 섞였다. 자극이 최고조에 오르기 직전, 갑자기 레뮤엘이 몸을 일으켰다.
“하아, 아...?”
“혼자서만 즐길 셈인가. 생각보다 욕심쟁이였군.”
레뮤엘이 허리의 이아네를 끌어안고 통째 들어올려 침대에 다시 눕혔다.
대단한 힘이었다. 아무리 이아네가 몸이 약해져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성인 남자 한 사람의 무게인데, 너무 가볍게 달랑 들어 눕히는 것에 이아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앗, 으아앗!”
“...겁도 없이 내 위에 올라타다니, 각오는 했겠지.”
낮게 을러대는 목소리와는 달리 레뮤엘의 눈가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이아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각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아네는 레뮤엘이 말한 각오의 뜻을 온몸으로 느끼고 말았다.
“하, 하윽! 앗, 으응, 흐아, 흣, 폐, 폐하, 아우웅...!”
“하아, 윽...”
레뮤엘이 이아네의 무릎을 잡아 벌리고 무자비한 폭격을 시작했다. 쉴새없이 짓쳐들어오는 진한 대시에 이아네의 머릿속이 다시 헝클어졌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쾌감이 다시 등허리를 내달렸다.
분신이 내벽을 비비며 일으키는 기분 좋은 마찰에 허리께가 뻐근했다. 급한 마음에 허리가 빨라졌지만 이아네가 느끼는 곳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여기였나.”
좀 더 좁아지는 지점을 찾아 꾸욱 허리를 누르자 이아네가 흠칫 놀라며 시트를 세게 쥐었다. 반응으로 확신을 얻은 레뮤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 으응, 응, 아... 아앙, 조... 좋아, 좋아아...!”
초조한 울음을 터뜨리며 이아네가 레뮤엘의 어깨에 매달려 왔다. 레뮤엘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정확히 극점을 찔렀다. 스치기만 해도 흥분할 곳을 집중적으로 찔러 들어오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배 안쪽에서부터 흥분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좋아, 좋아를 연발하며 이아네가 레뮤엘의 움직임에 맞추어 엉덩이를 흔들었다. 차박차박 살갗 닿는 소리가 야하게 침실에 퍼지며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서로를 탐한다.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으며 혀를 얽고 타액을 삼켰다. 빠르게 절정으로 향하는 흥분에 이아네가 울먹이며 레뮤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으응... 으응, 폐하, 폐... 하윽-!”
“레뮤엘이다.”
목을 끌어안은 이아네의 귓가에 레뮤엘이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
“이름을, 불러라.”
“하앗, 앙, 아응! 하아, 아앗... 레... 으응, 흐아앙-”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아네는 여전히 밀려드는 쾌락에 눈물바람이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다시 속삭였다.
“어서.”
“흐, 으읏, 응...! 레... 아, 레, 레뮤엘... 하앗...!”
레뮤엘이 만족스레 웃으며 마지막 피치를 올렸다. 타닥타닥 살갗 닿는 소리가 빨라지며 마찰이 강해지는 순간, 이아네가 숨을 몰아쉬며 레뮤엘의 어깨에 손톱을 박았다.
“아, 아, 아앗- 흐아- 아, 레뮤엘...! 흐앙, 레뮤엘...!”
“...!”
이아네의 무릎이 레뮤엘의 허리를 감아 조여 오는 순간 내벽 깊숙이 극점을 강하게 누르며 레뮤엘이 사정했다. 동시에 배가 축축해져 오는 것을 보니 이아네도 사정한 모양이었다.
잠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체온과 호흡으로 따끈해진 공기가 약간 식은 듯한 무렵, 이아네가 먼저 긴 한숨을 토해내었다. 레뮤엘이 이아네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아직도 촉촉한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온몸으로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듯한 다정한 속에서, 이아네는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문득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이미 환해져 있었다.
더 자고 싶었지만, 이아네는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보송한 침대 시트와 어제 그 난리를 부린 아침 치곤 개운한 몸으로 보아 분명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시종들이 시트를 갈고 몸을 씻긴 것 같았다.
"......"
이아네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어젯밤의 기억에 그만 다시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세상에나,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러니까, 레뮤엘의 비밀을 듣고, 마음을 고백하고, 손을 잡고 침대로 와서... 음음. 그 이후는 일부러 반추하지 않고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침대 바깥으로 나왔다.
아침이긴 했지만 공기는 꽤 쌀쌀해져 있었다. 맨살에 사정없이 달려드는 냉기를 피해 협탁 위에 개켜진 이아네 몫의 옷을 서둘러 꿰어 입었다. 허리가 약간 뻐근하긴 했지만 몸상태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시험 삼아 이리저리 걸어보다, 탁자 위에 그대로 올려진 상자에 눈이 갔다.
잠시 망설이던 이아네는 다시 탁자 앞에 앉았다. 아무런 장식 없는 수수한 보관함을 살짝 열자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찬란한 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지 그리운 얼굴로, 이아네가 견장을 쓰다듬었다.
이 견장을 처음 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막 성인식을 치른 이아네에게 찾아와 친히 라이오넬 엠블럼을 하사했던 제르멘. 그때 이아네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 엠블럼을 보면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감흥이 없었다. 그저 제르멘이 아끼는 강아지에게 손수 채워준 개목걸이와 다를 바 없는 물건이다. 좀 더 화려하다는 것을 빼면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이아네가 피식 웃으며 견장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견장의 화려함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상자 바닥의 물건이 또 하나 보였다.
"...?"
견장을 내려놓고 그것을 집어 든다. 샤무드 가죽끈으로 이어진 끝에 작은 주머니가 달린, 견장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수한 물건이었지만 이아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설마."
최초로 라퓨타에서 붙잡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디날의 습격 후 정신을 잃고, 눈을 떠 보니 레뮤엘의 막사 안이었다. 그래, 그때 이아네는 무기 하나 없는 완전 무장해제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작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가느다란 실 뭉치 같은 것이 조심스럽게 말아넣어진 모습에, 이아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돌아가신 모친의 머리카락을 넣었다던, 살라스의 오르헴이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었지만 바로 어제처럼 기억났다. 빨간 머리의, 친절하고 남자다웠던 기사 동기 살라스. 라이오넬 기사였던 그가 죽기 직전, 오르헴을 바꾸어 목에 걸었던 기억이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납 오르헴은 효험이 없었던 걸까. 피식 웃으며 소중하게 오르헴을 목에 건다.
"오랜만입니다, 살라스."
주머니를 만지작대며 살라스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나이가 많았지만 이아네를 많이 아끼고 동생처럼 귀여워했던 살라스. 좋은 연인을 찾아보라던 오지랖도, 예쁘다고 농담하던 순간도 생각났다. 마지막 순간 드래곤의 이빨에 잔인하게 전사했을 때도 이아네는 그의 곁에 있었다.
"덕분에 제가 살아 있나 봅니다."
오르헴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는 살아 있을까. 때 지난 후회와 죄책감이 빛바랜 애국심을 조용히 적셨다. 오르헴을 쓰다듬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고맙습니다."
그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이아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아네는 잊고 있었던 전우를 다시 기리며 오랫동안 울었다. 그것이야말로 델토르가 이아네에게 남겨준 마지막 조국의 조각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