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다 잎사귀
이아네가 정신을 차린 뒤, 그들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며칠째 굶은 이아네를 위해 따뜻한 미음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아네가 허겁지겁 그릇을 다 비우자 딜로가 다정하게 웃으며 이아네의 더러워진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내 주었다.
아주 오랜만의 환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딜로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젤다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그들의 호의가 단순한 환대가 아니었음을, 이아네는 그때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릴로가 낮은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는 동안, 딜로는 계속해서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이아네를 달랬다.
"순순히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해 주기만 한다면 넌 자유야. 델토르로 돌아가진 못하겠지만 네가 발붙이고 살 곳 정도는 마련해 줄게."
"......"
"이아네, 넌 대체 누구지? 어떻게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을 그렇게나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거야?"
"...나...난."
이아네는 울 것 같았다. 딜로의 말 속에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한마디가 심장을 아프게 찔러 왔다.
"외부인이 아니야."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이아네는 숨을 멈추어야 했다. 간신히 눈물을 추스리자 눈앞에 딜로의 반짝이는 눈이 보였다.
"외부인이 아니라면, 누구?"
"...델토르의 기사다."
"성의 관계자 치고는 꽤나 꾀죄죄한 몰골인데. 그럼 이번에 델토르로 잠입하기 전 디날에 머물 땐 어디에 있었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목이 막혀 왔다.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니, 절대 괜찮지 않다.
'케닛, 레뮤엘 왕의 침실에.'
현재 상황에 그런 말을 했다간 이아네는 꼼짝없이 현행 간첩으로 이 쌍둥이에게 씹어 먹힐지도 몰랐다.
앞뒤 사정은 중요하지 않다. 이아네 역시 기사로서 성에 근무하며 간첩이나 정치범의 되도 않는 변명들을 신물 나도록 봐왔다. 이아네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레뮤엘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아네는 왠지 참담해졌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쌍둥이가 이아네를 믿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자기라도 못 믿을 이야기였다.
"그 전에..."
"?"
"너희들은 대체 뭐지?"
이아네를 계속해서 괴롭혀 온 의문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의 범주를 넘어서는 움직임이라던가, 이아네의 행적을 끈질기게 쫓아온 집요함은 절대 그러려니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이아네는 그들이 훈련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글쎄, 국왕의 대리자라고 해 두지."
"...왕?"
"그래. 여긴 디날령이니, 너의 왕과 우리의 왕은 다르겠지만.“
이아네의 눈에 살짝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여기는 디날이고 그들은 레뮤엘의 사람이었다. 잘만 한다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게 해줘."
"그?"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 그분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흐음?"
딜로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난감하기도 하고,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한 복잡한 미소였다. 그때, 설거지를 끝낸 릴로가 다가왔다.
"어때, 수확은?"
"그다지. 뭐, 폐하를 만나게 해 달라는 건 뜻밖이긴 했지만."
딜로가 어깨를 으쓱하자 릴로가 허리를 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나, 이거 물건이네!"
"글쎄, 대어인지 아닌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
"농담이 아니야!"
벌꿀색 눈동자 네 개가 이아네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를 만나게 해 줘. 만날 수 없다면 적어도 소식이라도 전해 줘."
"하하하, 이아네."
릴로가 하도 웃어서 눈물이 매달린 눈꼬리를 훔치며 부드럽게 이아네의 어깨를 매만졌다.
"대체 네가 뭐길래 폐하를 직접 만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따지고 보면 그랬다. 이아네는 왕자의 검술 스승이긴 했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야기고, 결국 델토르의 포로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제르멘에게도 버려진 기사가, 하물며 레뮤엘에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러나 이아네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
"...?"
"내 이름이다. 이름이라도, 폐하께 전해...웃."
릴로의 손가락이 이아네의 입을 막았다. 이아네가 눈을 깜박이자 딜로가 그 옆에서 릴로에게 눈짓하는 것이 보였다.
"재미있는 친구야. 그렇지, 딜로?"
"흥미로운걸. 오랜만에 캐내는 보람이 있겠어."
둘의 눈빛이 공중에서 얽혀 갔다. 이아네의 눈 위로 불길함이 드리워지는 순간 릴로는 그대로 이아네를 끌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옆방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수수한 돌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평범한 나무 의자 하나와- 잠깐.
이아네는 공기 중에 묘하게 풍겨 오는 향내를 맡고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미묘한 향기였다. 어딘지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듯한, 그러면서도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냄새.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이아네가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릴로의 목소리가 귀 뒤에서 들려왔다.
"얌전히 말했으면 좋았잖아."
"! 아읍-"
릴로가 이아네의 손을 붙들자, 타이밍 좋게 이아네의 머리 뒤에서 딜로의 손이 뻗어 나와 이아네의 입에 재갈을 채웠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듯한 몸놀림이었다.
"자아, 이아네. 우린 네가 다치길 원하지 않아."
"오랫동안 굶었을 테니 힘들 것도 알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일이 있거든."
릴로가 이아네를 억지로 방 가운데의 의자에 앉혔다. 이아네가 발버둥 쳤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하던 일을 마저 할 뿐이었다.
"어때, 이아네?"
"뭔가 이상한 느낌 안 들어?"
"뱃속이 간지럽다든가."
"몸이 뜨겁다든가."
"아니면, 예민해진다든가...?"
의자에 이아네를 묶으면서도 둘은 끝없이 수다를 떨어댔다.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냐고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릴로의 손이 이아네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으웃-!"
"오, 슬슬 시작하는 것 같은데?"
"하아, 빨리 보고 싶다아."
딜로가 입술을 핥으며 이아네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이아네가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몸 상태가 이상했다. 으슬으슬하니 추워지는 것 같으면서도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덩이를 삼킨 듯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평소에는 그냥 그런 일상적인 접촉인데도 너무 예민하게 느껴져서 깜짝 놀라게 된다.
"웃..."
"어때, 이아네, 기분 좋아?"
"여긴 어때?"
딜로의 손이 부드럽게 이아네의 쇄골과 가슴께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살짝 단단해진 돌기가 걸리자 이아네가 몸을 떨었다.
"흐읍-"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네."
"귀여운데. 맘에 들어."
"귀여우니까, 하나 가르쳐 줄게."
"이 냄새, 뭔지 알아?"
릴로가 킥킥대며 이아네의 발을 의자 다리에 묶었다. 살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앞섶이 조금 부풀어 있었다.
"이건 최음향인데, 아무리 돌부처라도 일단 맡게 되면 짐승이 되는 강력한 녀석이야."
"아, 물론, 우린 충분히 훈련이 되어 있어서 말야."
"이 정도엔 발정하지 않지만."
"으음, 하지만 이아네라면 지금도 흥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릴로의 손이 이아네의 뺨을 쓸었다. 이아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예민해진 촉각이 낯설었다.
"우왓, 귀여워라."
"이아네, 그렇게 귀여운 반응이면 정말 괴롭히고 싶다구."
딜로가 살짝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달콤한 미소였지만 지금의 이아네에겐 공포의 신호일 뿐이었다.
"금방 끝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입을 연다면."
"우린 네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아."
"자."
"마지막 기회야."
딜로가 살짝 이아네의 재갈을 풀었다.
"디날에 온 목적이 뭐지?"
이아네는 그 순간, 어떤 말로도 그들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실을 말해도, 거짓을 말해도 이아네에겐 그저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뿐.
체념한 이아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죽여."
"이런, 놀라운데."
"그 배짱은 높이 사지만, 이것 봐..."
두 쌍둥이가 낄낄대며 이아네에게 다시 재갈을 물렸다. 여전히 입은 웃고 있었지만 이아네를 바라보는 벌꿀색 눈동자는 섬뜩했다.
"마지막이라고, 했지?"
그것이 이아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들은 이아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변태 쌍둥이 주제에 그런 쪽으로는 담백한 건지, 그들은 그저 두 걸음 떨어져서 의자에 묶인 이아네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 으, 으읏, 큭..."
"꽤 잘 참는데."
"이아네, 흥분한 얼굴 귀엽네."
"하아, 하악- 크앗-"
온몸의 감각이 발가락 끝까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괴로웠다. 체온이 높아져 갔지만 의자에 묶인 상태로는 숨을 크게 몰아쉬는 것이 이아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숨을 몰아쉴 때마다 공기 중의 묘한 향기는 이아네의 몸 속에 진하게 쌓여 갔다. 결과적으로, 이아네가 몸부림을 칠수록 괴로움은 더해져 갈 뿐이었다.
"좀 더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그렇지?"
"응응, 우리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는데."
친구는 개뿔!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아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자주 깨물었는지 살짝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릴로가 속삭인다.
"예쁜 얼굴인데, 자꾸 이러면 흠집 나잡아."
"크윽...!"
"자, 말해 봐. 그럼 금방 편해질 거야."
"싫... 하윽!"
유연한 손가락이 이아네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딜로가 살짝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이아네에게 눈짓했다.
"그러다 죽어, 이아네."
"대동맥이 터지고 싶지 않으면."
"이쯤 해서 말하는 게 좋을 텐데."
"흐... 아아, 으으응-!“
"고집쟁이네. 그런 것도 싫지는 않지만."
쌍둥이가 난처하게 웃었다. 그러나 정말은 난처해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초점이 흐려진 초록빛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을 때쯤, 쌍둥이가 눈빛을 교환했다.
"어때?"
"기분 좋지?"
"흐, 으윽, 그만... 흑..."
"그래, 그래."
"그만 해야지."
릴로가 다가와 이아네의 뒷머리를 잡아 올렸다.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정도의 자극에도 민감해져 있던 몸이 찡하게 울리며 앞섶이 젖어 왔다.
"이아네."
"우린 말야."
"네게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어."
"왜 디날에 있었는지만 얘기하면 끝나."
"'나 사실 디날에서 이런 거 했어'."
"이 한 마디면 짠. 깔끔하게 디엔드."
"어때?"
"괜찮지?"
이아네가 눈을 감았다. 기대를 담은 벌꿀색 눈동자가 이아네의 일그러진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아네의 대답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냥... 죽여."
쌍둥이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딜로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릴로가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그럼, 저녁 먹자."
"...미친... 놈들..."
"어라?"
"안 들리는데."
선명하게 들었는데도, 두 쌍둥이는 해사하게 웃으며 향로를 치웠다. 서서히 정신이 맑아지자 이아네의 얼굴에 당황과 의심이 떠올랐다. 똑같이 생긴 얼굴 둘이 이아네와 눈을 맞추어 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럼, 내일 봐."
탁.
그들이 작은 방문 너머로 사라진 뒤, 이아네는 혼자 남겨졌다. 서서히 가라앉는 흥분 속에서 이아네는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때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거라곤 지긋지긋한 최음향과, 고통과 쾌락에 몸부림치던 시간들.
어슴푸레한 오두막 안에서, 이아네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쾌락과 수치심에 몇 번이나 울었다.
처음에는 몇 시간 정도였던 ‘고문’은 날이 갈수록 길어졌다. 여전히 그들은 이아네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이 선택한 고문은 아주 효과적이고도 간편한 방법이었다. 굳이 그들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사흘- 아니, 나흘이었나? 날짜 개념이 없어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오래 지나진 않았을 것이다.
문득 눈을 떴을 때, 이아네는 사방이 조용한 것을 느끼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묶여있는 상태였지만, 이곳으로 끌려온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평온한 순간이었다.
...평온이라.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단 한 순간도 평온할 수 없는 상황에 '평온'이라니.
그러고 보면, 사실 패전국의 포로가 당해야 하는 대우는 이쪽에 더 가까운가. 솔직히 얘기하면 케닛에서의 상황은 전쟁 포로치곤 너무 과분하긴 했었다.
재미없긴 하지만 이아네를 잘 따르던 어린 리트, 무뚝뚝하긴 해도 이아네의 질문에 답해주던 펠록스, 그리고...
멍하니 뇌리를 스치는 주마등을 회상하다, 이아네는 가까스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벌써 깊은 밤이었다. 낮은 창 너머로 지기 시작한 달이 보였다.
습관처럼 제르멘을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지금 이아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사람은 제르멘이 아니었다.
"...레뮤엘."
빛을 잃은 눈동자에서 절망의 눈물이 흘렀다.
* * *
성으로 돌아온 레뮤엘에게 일상이 찾아왔다.
비록 하나뿐인 누이와 이아네가 없는 성 안이긴 했지만, 그래서 리트가 더욱 심심해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고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집무실의 풍경도, 리트와의 저녁식사도 그대로였다.
다만, 펠록스와 우리아에게만 허락된 집무실에 발로아 경이 조용히 드나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달랐다.
"다음번에는 좀 더 강 하구로 내려가 볼 생각입니다. 만일 이아네가 강을 건넜다면 짐마차나 수레에 몰래 몸을 숨겨서 건널 가능성이 큽니다."
"교역이 활발한 지역은 위험할 텐데,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레뮤엘은 찬찬히 발로아 경을 살폈다. 아들 잃은 심정이야 말해 무엇할까마는, 레뮤엘로서는 발로아 경의 건강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덥수룩한 수염이 초췌한 턱을 가리고 있었지만 짙게 그늘이 내려온 눈두덩에는 그간의 여독과 피로가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오늘은 자숙하고, 내일 떠나도록 하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레뮤엘이 살짝 혀를 찼다.
"우리아."
"예, 폐하."
"발로아 경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라."
"?! 괜찮습니다, 저는 이아네를..."
레뮤엘이 조용히 발로아 경을 바라보았다. 그 고요하고 단호한 눈빛에 발로아 경이 입을 다문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아를 따라가도록. 그대는 이아네의 아버지지만, 동시에 내 수족이 되었다는 점도 잊지 말라."
우리아가 조용히 미소 짓더니 발로아 경에게 손짓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발로아 경이 갑자기 바닥에 엎드리며 절을 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하다면 결과로 보답하도록."
차갑게 내뱉은 레뮤엘이 이번에는 책상에 놓인 공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발로아 경이 우리아를 따라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뮤엘의 손은 여전히 바빴다. 아직 그의 계획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은 산더미 같았고, 정리해야 할 것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그의 충직한 보좌관은 레뮤엘이 더 이상 무리를 하게 둘 수 없었다.
"오늘분 집무는 이것으로 끝내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급할 것 없는 것들이니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드시지요."
펠록스가 결재된 서류들을 정리하며 레뮤엘에게 일침을 놓았다. 펠록스의 뼈 있는 말에 레뮤엘이 결국 펜을 놓았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알았다."
펠록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레뮤엘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펠록스가 레뮤엘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업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급할 것도 아닌데다 왕의 안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조용히 합리화하며 펠록스가 집무실의 문을 연 순간, 그는 문 바깥에 선 벌꿀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딜로?"
"데일로 아크마르,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펠록스 님."
펠록스의 얼굴에 반가움과 낭패가 동시에 서렸다. 릴로와 딜로는 펠록스가 직접 선별한 밀정이었다. 딜로가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뮤엘이 펠록스의 뒤에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펜을 쥐었다.
이제 좀 쉬시나 했더니. 묘한 시간에 찾아온 딜로에게 원망 섞인 시선을 던지며 펠록스는 딜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딜로가 품에서 보고서를 꺼내 내밀었다. 레뮤엘이 건조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훑었다. 내용 자체는 별 것 아니었다. 케닛에서 델토르로 숨어든 자를 발견했고, 그자가 이젤다 성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고, 반죽음이 되어 뒷골목 사창가로 팔리는 것을 빼돌렸고 등등.
"웬만하면 저희 선에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꽤 입이 무거운 친구라서요. 그 친구의 신상은 따로 첨부해 두었습니다. 성에서 도망쳤던 놈이니 어쩌면 눈에 익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클립으로 또 한 장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보고서를 넘겨 첩자의 신상명세의 첫 줄을 읽는 순간, 레뮤엘의 눈이 커졌다.
"...펠록스."
"예."
"가장 빠른 말을 준비해라."
갑작스런 말에 놀란 펠록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레뮤엘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문을 모르는 채 딜로가 펠록스와 레뮤엘을 번갈아 보는 순간 레뮤엘이 딜로의 바로 앞에 섰다.
"안내해라."
"...어디를 말입니까?“
"그가 있는 곳."
"외람되오나, 폐하. 지금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이아네 월터 발로아."
딜로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레뮤엘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집무실을 나갔다. 펠록스가 딜로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의 뒤를 쫓아 달렸다.
그 뒤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성의 마굿간이 온통 뒤집어지며 가장 빠른 말을 찾느라 일대 소란이 일었다. 그 와중에도 펠록스는 직접 가겠다는 레뮤엘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일단 진정하시라고 누차 얘기를 해도, 레뮤엘은 도무지 들을 기미가 없었다.
"폐하, 그렇지만 아직 충분히 쉬지도 못하셨는데-"
"이대로는 쉴 수 있다고 생각하나?"
"폐하, 진정하시고 제 얘기 좀..."
-히히힝!
이미 늦었다. 레뮤엘은 이미 말에게 재갈을 물리고 등자에 발을 올린 후였다.
"내 불찰로, 그에게 말 못할 고통을 겪게 만들었다.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나?"
"폐하!"
엷은 짜증이 치밀었다. 대체 그 포로가 뭐길래, 이토록 그의 왕이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포로가 뱃속에 황금알이라도 품었나 싶을 만큼 레뮤엘은 필사적이었다.
"대체 그가 무엇이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
처음으로 레뮤엘이 펠록스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하고서야 펠록스는 깨달았다.
고요한 바닷속 같던 눈이 요동치고 있었다. 폭풍 속을 헤치는 조각배가 등대를 발견한 것처럼, 그는 필사적이고도 절실했다.
"...내겐 그가 필요하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펠록스의 대답은 아랑곳 않고, 레뮤엘은 말에게 박차를 가했다.
그를 태운 말이 성문 바깥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가는 찰나, 깊게 한숨을 내쉰 펠록스가 그 옆의 말에 올라타 그 뒤를 따랐다.
그 시각.
릴로는 여유롭게 식탁 의자에 기대 앉아 저무는 석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딜로가 성으로 이아네의 처분을 물으러 갔지만 사실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 알아서 하라는 처분이 내려올 것이 뻔하니 더 이상 급할 것도 없었다. 이아네는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으므로 릴로로서는 조금 자비를 베풀고 싶기도 했다.
"후훗."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길래 뭔가 있나 했더니 그냥 고지식한 기사 양반일 뿐이었다. 라퓨타 전투에서 붙잡힌 델토르 기사였겠지, 아마도.
릴로는 흐음, 하고 낮게 신음을 빼어 물며 이아네의 처분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아네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려서 디날이든 델토르든 어느 쪽에나 곤란한 존재였다. 조용히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서 바다에 던져버리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긴 하지만, 왠지 그건 내키지 않았다. 델토르로 함께 향하는 일주일 동안 꽤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아네를 주점의 뒷문으로 팔아넘긴 그 남자의 정체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이아네는 알지 못했지만 '패전'한 델토르에는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막상 디날에서는 별 간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델토르 왕가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움직임이 꽤 있었다. 그것 때문에 릴로와 딜로가 델토르로 밀정을 떠났던 것이다.
가는 길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아네와 모른 척 동행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아네는 예상대로 도중에 도망쳤고, 그의 뒤를 밟은 릴로는 이아네가 성의 개구멍을 통해 침입하는 것을 보고 생각보다 대어를 건졌구나 싶었더랬다.
그러나 이아네의 뒤를 따라 잠입한 성에서 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고민에 빠졌다.
성의 북쪽, 가장 골치 아픈 정치범 전용으로 만든 '취조실'. 고급 창녀들에게 들은 정보에 의하면, 말이 취조실이지 정식 명칭은 따로 있다고 했다.
'감옥'.
딜로는 그 부분을 다시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 했다.
이아네는 강직하고 충성심 넘치는 기사 출신이었다. 디날에 지낸 기간이 좀 있다고 해서, 바로 감옥에 가둬 버릴 만큼 이아네가 큰 잘못을 한 건가? 오히려 디날에서 도망쳐 나왔다면 첩자로서 훌륭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릴로의 머릿속에 새로운 가능성이 반짝였다.
델토르에서는 이아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저 쓰고 버리는 체스말처럼, 이아네도 델토르 왕에게 희생당한 것은 아닐까?
"흐음..."
딜로가 살짝 턱을 문질렀다.
이아네가 델토르에서 버림받은 희생양이라고 해도, 이아네가 계속해서 레뮤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은 특이할 만한 사항이었다. 릴로는 슬쩍 이아네가 있을 작은 방의 문을 넘겨다보았다. 향로를 꺼 두어서 이아네는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일단 저녁부터 먹어 볼까.
부엌으로 향하는 딜로의 머릿속에는 이미 오늘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으로 꽉 차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이아네는 갑작스럽게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세례에 잠이 깼다.
"일어날 시간이야, 아가씨."
릴로가 흥얼거리듯 말하며 이아네의 몸을 일으켰다. 작은 창문 너머로 비쳐드는 햇살에 이아네는 부신 눈을 깜박였다.
햇살이다.
정말, 아주 오랜만에 보는, 빛이었다.
멍하니 햇살을 바라보던 이아네가 흠뻑 젖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릴로가 콧노래를 부르며 결박되어 있던 손목과 발목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밀쳐내고 도망칠 만큼의 기력은 없었다. 옷 속까지 흠뻑 적신 물의 감촉은 이상하리만큼 반가운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음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이마시는 맑은 공기였다.
물이 가득 든 양동이와 스펀지를 가지고 릴로는 정말 정성스럽고 꼼꼼하게 이아네를 씻겼다. 오랫동안 씻지 못한 얼굴과 목, 등과 다리의 땟국이 씻겨 나가자 개운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왠지 이아네는 불길해졌다.
"곧 딜로가 도착할 거야. 오면 그때 같이 점심 먹자."
불길함이 더해졌다.
오늘의 릴로는 묘하게 친절하다. 아니, 묘하게가 아니라 티나게.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아네는 그런 경우 예상치 못했지만 결국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발..."
"응?"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쉬어 버린 목. 아주 오랫동안 말하지 않은 탓에 이아네는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어쨌든 이 말은 해야 했다.
"그를 만나게 해 줘..."
"하아? 아직도 그 소리야?"
재미있다는 듯, 혹은 질렸다는 듯 릴로가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이아네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이아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넌 여기서 나갈 수 없으니 그분을 뵈려면 폐하께서 친히 여기까지 오셔야 하는데, 그분께서 직접 오실 리가 없잖아."
-쿵쿵쿵.
그 순간,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딜로가 도착한 것 같다. 릴로의 미소가 커지며 문 쪽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쾅!
갑자기 엄청난 소리가 나더니 가로지른 빗장이 툭 빠져나갔다. 릴로는 물론 이아네조차 깜짝 놀라 부서진 문을 바라보는데, 햇살이 가득히 비치는 문 저편에서 두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하십..."
"이아네!"
공중에 퍼지는 목소리는 부름보다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성난 발걸음이 무너진 문짝을 밟고 거침없이 들어서더니, 멍하니 문을 바라보는 네 눈동자와 마주쳤다.
역광 때문에 눈이 부셔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아네는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 힘을 내어 잘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들었다. 눈이 부셔 가늘어진 초록색 눈동자가 열심히 문가를 훑었다.
커다란 그림자. 후드를 쓰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남자답고 단정한 실루엣 안에서 얼핏 익숙한 심청색을 발견한 것 같다.
"...아."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스스로 부정하면서도 이아네는 넘치는 희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짧은 순간, 순식간에 시야를 가리는 습막이 야속하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이아네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리웠던 얼굴을 마주했다.
릴로가 뭐라 말릴 틈도 없었다. 성큼, 큰 걸음이 릴로를 스쳐 지나가더니 힘없이 벽에 기댄 이아네를 끌어안았다.
"이아네... 이아네!"
그 어느 때보다 격앙된, 그러나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이아네의 귓가를 울렸다. 어깨를 끌어안은 강인한 팔과 누구보다도 진실한 목소리에 이아네는 근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진심으로 안도했다.
"저, 저기...?"
의아해진 릴로가 멍하니 이아네를 끌어안은 불청객을 부르려는 순간, 뒤따라온 그림자가 릴로를 불렀다.
"릴로."
"딜로? 이게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딜로가 한숨을 쉬며 슬쩍 오두막 바깥을 곁눈질했다. 입가에 거품을 문 말 두 필이 아직도 땀이 식지 않은 채 헉헉대며 서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대어를 낚긴 한 것 같은데. 나쁜 방향으로."
"...잉?"
릴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눈을 이아네 쪽으로 돌렸다. 검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아네를 끌어안은 남자는 어딘지 좀 낯이 익었다.
"저 사람은...?"
"음, 그러니까."
딜로가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릴로가 의아하니 딜로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한 박자 늦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릴로!"
"페, 펠록스 님?"
"그는 어디에 있나?"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릴로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으로 펠록스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의 쌍둥이 형제를 곁눈질해 보니 딜로 역시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시정할 사항이 있어서. 급한 사안이라 직접 내려오게 되었다."
"급하다니, 어떤...?"
펠록스가 말에서 내려 오두막 앞으로 들어갔다. 방금 씻긴 듯 말끔하긴 했지만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이아네의 얼굴을 확인하고 펠록스는 이마를 짚었다.
"그에게 손을 댔나?"
"아뇨, 저희 방식대로 처리했습니다."
삽시간에 펠록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딜로나 릴로로서는 이유를 모를 따름이었다.
그 사이 이아네를 끌어안은 남자는 조심스럽게 이아네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오두막의 문가로 다가와 수수께끼의 얼굴을 드러냈다.
단아하고도 차가운 심청색의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릴로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국왕 폐하?"
믿을 수 없었다. 품에 안긴 포로를 보석이라도 되듯 소중히 보듬은 채 그는 여전히 이아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명령했다.
"마차를 준비해라."
다시 케닛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느긋했다.
근처 마을의 역사에서 빌린 마차는 왕실의 것보다 흔들리고 훨씬 낡은 것이었지만 이아네를 말에 태워 갈 수 없었던 레뮤엘은 군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펠록스는 마차 옆에서 말을 달리고, 릴로와 딜로가 마차를 몰기로 했다.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쌍둥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아무 말 없이 펠록스의 명령에 따르며, 둘은 이 포로의 정체에 대해 진지하게 궁리해야 했다.
그러나 레뮤엘은 케닛에 도착할 때까지 처분을 미루기로 한 모양이었다. 마차 안에 올라서도 레뮤엘은 아무 말 없이 이아네를 품에 안고 그 파리한 얼굴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아닌 줄 알았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응답이 오는 것조차 기다릴 수 없을 만큼 그는 초조했다. 결국 부수고 들어간 문 안에서, 낯익은 벌꿀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아직 그에 대한 단서가 남아 있겠구나 싶어 처음에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슬쩍 둘러본 오두막 깊은 곳, 빛이 잘 닿지 않는 작은 창문 아래의 이아네를 보았을 때 설마 그가 이아네일 거라고 생각하진 못하였더랬다.
앙상하고 볼품없이 웅크려 있던 몸이, 천천히 그러나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레뮤엘을 마주한 순간 레뮤엘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났다.
텅 빈 듯한, 희망을 모조리 빨아들여 버린 초록빛 눈동자.
그 와중에도, 레뮤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뺨 위를 흐르던 가련한 눈물과 덜덜 떨며 맞추어 오던 눈이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아릿하다.
그에게로 다가가는 그 몇 걸음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눈앞의 작은 남자를 냅다 끌어안는 순간, 손끝에 만져지는 울퉁불퉁한 뼈의 감촉에 벅찬 감동이 아니라 눈앞이 새빨개지는 분노와 죄책감이 먼저 치밀었다.
"이아네..."
품에 얌전히 안긴 모양새가 낯설고도 가슴이 아릿하다. 살짝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어 다시 이아네를 끌어안았다. 못 본 새 너무 작아진 모습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실렸더랬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뮤엘이 문득 눈을 떠 품 안에 잠든 이아네를 내려다보았다.
푸석해진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햇볕을 보지 못해 하얗게 뜬 얼굴에 눈까지 감고 있으니 영락없이 시체꼴이다. 미약하게 움직이는 가슴과 희미하게 느껴지는 날숨이 겨우 이아네가 살아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눈물길이 난 뺨을 쓰다듬었다. 거칠어진 피부가 손가락에 쓸리는 게 느껴진다.
찾았다.
과정이야 어쨌든, 드디어 되찾았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에게서 도망치려던 작은 새.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겨우 곁에 둘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그는 또 도망쳐 이렇게 엉망인 채 돌아왔다. 어디에 있더라도, 어딜 가더라도, 설사 그것이 이젤다 성이라고 할지라도 무사히 행복하길 바랐는데.
레뮤엘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이아네의 뺨을 쓸어내렸다.
이제 알 것 같다.
사실은 좀 더 빨리 알았어야 했지만, 사실 알고도 모르는 척했지만 이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아네가 있을 곳은 레뮤엘의 곁이었다. 이아네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레뮤엘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더 이상 그를 혼자 두지 않겠노라 맹세하며 레뮤엘은 이아네의 이마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 * *
이아네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시종이 떠먹이는 미음을 받아먹는 동안, 진맥을 마친 의원은 왕진 가방을 챙기며 자리를 정리했다. 방 밖으로 나온 의원이 가장 먼저 마주한 사람은 레뮤엘이었다.
"어떻던가?"
"손목, 발목에 찰과상이 있긴 하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 연고를 처방하였으니 잘 바르고 붕대만 갈아 주시면 됩니다. 다만 영양실조 증세가 약간 있으니 당분간은 절대 안정해야 합니다. 식사는 지금처럼 영양가 많은 유동식으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다른 것은?"
"음..."
의원이 잠시 머뭇거리며 레뮤엘의 눈치를 보았다. 레뮤엘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의원이 어깨를 으쓱 하더니 가볍게 첨언했다.
"약간의 중독 증상이 있었습니다. 최음향을 너무 많이 쐬어서 필요 이상으로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나을 수 있는 것인가?"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소될 것입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뮤엘이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손짓을 해 의원을 보내고 직접 이아네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막 식사를 마친 이아네가 침대에 기대앉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초록색 눈동자에 레뮤엘이 담긴다.
"......"
그러나 이내 이아네는 눈을 감아 버렸다. 엷은 짜증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레뮤엘이 천천히 이아네의 침대로 다가갔다.
마른 손이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이다. 차마 이아네의 몰골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둘은 그렇게 다른 곳을 보며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랜만의 재회였지만 반가움도 안부 인사도 없다.
이아네는 이아네대로 감은 눈 안으로 뜨거워지는 눈물을 열심히 참고 있었다. 레뮤엘의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이미 이아네는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안다.
마차에 올라탔던 것만 기억이 났다. 기절하듯 다시 잠이 들고, 깨고를 반복하다 눈을 떴을 때 이아네는 어느새 이젤다 성보다 더 익숙한 침실에 누워 있었다.
서쪽 탑에 있던 시종용 숙소가 아니었다.
하루 온종일 갇혀 지내던 레뮤엘의 침실.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창문 옆에는 고급스러운 유리 찬장이 예전처럼 서 있었다. 전과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아네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주 오랜 침묵이 흐른 후에야 레뮤엘이 드디어 입을 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저도... 모릅니다."
쉰 목소리가 거칠게 성대를 타고 올라왔다. 미음과 물로 목을 축이긴 했지만 여러 날 동안 끌려 다닌 피로는 녹록치 않은 것이었다. 레뮤엘이 다시 물었다.
"많이 지쳤느냐?"
"......"
"...쉬거라."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이아네는 대답이 없었다. 레뮤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레뮤엘이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 이아네가 한 말은 레뮤엘을 놀라게 했다.
"괘씸하지... 않으십니까?"
"......"
"그토록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제가 도망친 것에 대해, 노하지 않으십니까?"
레뮤엘이 고개를 돌려 이아네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감은 눈 주위가 약간 붉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혼자서 울고 있는 것인가.
손을 뻗으려다 레뮤엘은 문득 멈칫했다. 의원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분간은 절대 안정해야 합니다.'
"물론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이아네가 처음으로 눈을 들어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레뮤엘의 눈이 아닌, 레뮤엘의 손을. 딱히 손을 보려고 했다기보다 눈높이에 손이 있어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전에 회복이 먼저다."
이아네의 시선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천천히 고개가 들쳐지며 멍한 시선이 레뮤엘의 팔과 목, 마침내 찌르는 듯한 심청색 눈동자와 맞닿았다.
"저..."
이아네가 약간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곁에, 있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레뮤엘의 눈이 커졌다.
이아네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수용의 말이었다. 흥분으로 들뜬 심장을 억누르며 레뮤엘이 재차 확인했다.
"여기에 말이냐?"
이아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뮤엘이 아무 말 없이 곁에 섰던 시종을 손짓해 부르더니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시종이 나간 후, 레뮤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아네의 곁에 다시 앉았다.
"내키지 않으면, 말하라."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이아네는 피곤한 눈을 다시 감았다. 펠록스가 그날 마쳐야 할 업무자료를 가지고 침실로 왔을 때, 이미 이아네는 잠이 들어 있었고 레뮤엘은 그날 끝내 침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레뮤엘의 집무실은 침실이 되었다. 넓은 침실 가운데 어제까지 없던 마호가니 책상과 그 책상을 빽빽이 메운 서류에 눈이 어지러웠다.
레뮤엘이 눈앞에 있다고 해서 이아네가 별다른 반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멍하니 레뮤엘이 집무를 처리하는 옆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문득 이아네는 레뮤엘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라퓨타의 전쟁용 임시 막사에서도 레뮤엘은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독할 만치 부지런한 모습이 첫 인상이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런 그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찬찬히 그를 바라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레뮤엘은 이아네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서류에 서명하거나 펠록스와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아네에겐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빛도 들지 않는 좁은 방에서 괴로워 몸부림쳤던 게 믿어지지 않는 풍경들. 그래서 이아네는 가끔씩 자기가 지독한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석양이 내려앉고 이윽고 마지막 햇살이 빛을 잃어갈 때쯤, 드디어 레뮤엘이 업무를 마치고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그렇게 보고 있는 거냐?"
"...앗."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불시에 날아온 화살 같은 말에 이아네의 멍한 얼굴이 무너졌다. 분명히 얼굴 전체에 '낭패'라고 적혀 있을 거다. 아주 오랜만에, 이아네의 얼굴에 감정이 살아났다.
"그게..."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머뭇거리는 이아네를 바라보던 레뮤엘이 그를 배려하듯 선수를 쳤다.
"기운이 좀 나는가 보군."
목소리에 약간 웃음기가 묻어났다. 이아네는 조금 부끄러워져, 몸을 웅크리고 침대 안으로 고개를 묻었다. 느릿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레뮤엘의 무게가 침대 한쪽에 실렸다.
"자거라. 내일부턴 바빠질 테니."
"......"
잠시 후 등불이 꺼지고 레뮤엘이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약간 놀라긴 했지만 레뮤엘이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므로, 이아네는 잠시 후 마음을 놓았다.
호흡이 점점 느릿해지며 감은 눈 안의 어둠이 짙어진다.
얕게 잠이 든 이아네는 비몽사몽간에 커다란 손이 어깨를 부드럽게 감아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깨어나기엔 너무 깊게 잠이 든 터라 이아네는 저항하지 못하고 손길에 몸을 맡겼다.
체온이 낮은 듯한 차가운 손은 천천히 이아네를 돌아 눕히고 조심스럽게 이아네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손은 차가웠지만 얼굴을 감싸 안은 가슴은 적당히 기분 좋은 온기를 전하고 있어서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그 온기에 뺨을 비볐다.
뜻밖의 반응에 잠시 멈칫한 손은 곧 조심스럽게 이아네의 어깨를 토닥인다. 꿈인 듯 아닌 듯, 이아네는 그제야 마음 놓고 잠으로 향하는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 * *
"발로아! 대체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윽, 저하..."
이아네에게 맹렬하게 달려든 리트가 그제야 이아네의 몰골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착하게도 이아네를 배려해 주는 모습이 귀여워, 이아네는 애써 웃으며 리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델토르 말이냐?"
"예."
리트의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아네에게서 들었던 것들을 생각하며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는 다음에 해 드리겠습니다. 저 없는 동안 훈련은 잘 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않으냐! 이제 나무는 문제없이 오를 수 있다!"
이아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디날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레뮤엘의 침실에서 잠이 들 때도, 레뮤엘이 눈앞에서 집무를 보고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던 것들이 리트를 보자 생각나는 것이 신기하다.
"그럼 다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다만..."
리트가 슬쩍 이아네의 위아래를 훑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이아네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여위어 있었다. 리트가 잠시 가늠해 보려다 무리였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겠느냐?"
"열흘 정도 시간을 주시면 얼추 회복할 듯합니다."
리트는 묻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왕족으로 살면서 가끔씩은 모르는 게 더 나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리트는 아쉬운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답지 않은 모습을 보며 늘 안타까워하던 이아네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리트의 어른 흉내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럼 오늘은 쉬도록 해라. 건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느니라."
겨우 일곱 살 주제에 인생의 깊이를 다 안 것 같은 얼굴로 하는 말이 웃기면서도 귀여워서 이아네는 무심코 리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버렸다. 손가락에 감기는 잿빛 머리카락이 찰랑이는 게 기분 좋다고 생각한 순간, 리트가 깜짝 놀라며 이아네의 손에서 고개를 뺐다.
"너, 너어...!"
금세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이아네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리 아이라곤 하지만 일국의 왕자다. 자기도 모르게 귀한 몸에 손을 댔다는 사실에 이아네는 자기도 깜짝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어린애 취급하지 마라!"
"...예?"
"내 비록 아직 어리다곤 하나 어린아이가 아니다! 흥, 이... 이번은 봐줄 테니, 또 어린애 취급하면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너무도 지당하신 말씀이긴 했으나, 이아네는 리트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리트가 하는 말은 분명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조금 다른 논리였던 것이다.
"...저하, 송구하오나..."
"뭐냐?"
"비천한 것이 손을 대어 화가 나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이번엔 리트 쪽에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비천하다고?"
"...네."
"네가 인륜을 저버리지 않은 이상 사람이 사람에게 비천하다 할 수 있는 것이냐?"
이아네는 한 대 맞은 것처럼 뚫어져라 리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린 아이조차 자신을 당연하게도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디날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순히 레뮤엘 개인의 성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얼마 전에 제르멘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이아네에게는 신선을 넘어 충격적인 말이었다.
"아버지가 늘 얘기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란 다 같은 무게라고."
"...저하께서는."
이아네는 문득 흘러버릴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애써 리트에게 웃어 보였다.
"훌륭한 왕이 되실 것입니다."
"응? 헤헤, 그렇게 생각하느냐?"
천진하게 웃는 어린아이의 얼굴에서 언뜻 레뮤엘의 웃음이 덧비친 것 같이 보였다.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저만치에서 펠록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하, 발로아를 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괜찮다. 오늘은 쉬기로 하였으니."
"감사합니다. 따라오거라."
급히 리트에게 인사하고 펠록스 뒤를 따르며 이아네는 그가 자신을 부를 일이 있었나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자기 전에 레뮤엘이 내일부턴 바빠질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이건가?
혹시 그동안의 죄를 물을 생각이신가?
등골이 서늘해져왔다. 쌍둥이에게 당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뒤통수에 식은땀이 솟았다. 척추가 딱딱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턱이 굳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고통스러워질 무렵, 드디어 펠록스가 평범한 방문 앞에 섰다.
"들어가라."
"저, 무슨 일로..."
"들어가면 알 것이다."
이아네는 두려움이 가득 찬 얼굴로 펠록스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그러나 펠록스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문을 향해 살짝 턱짓했을 뿐이다.
체념한 이아네가 약간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슬쩍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일단 평범한 방의 풍경이 보였다. 조금 안심한 이아네가 문을 좀 더 밀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이아네 쪽을 바라본다.
“안!”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거의 넘어질 것처럼 이아네에게 달려와 그를 와락 껴안은 여인에게서 익숙한 체취가 풍겼다.
“...서... 설마.”
“안... 아아, 우리 안...”
“오랜만이구나, 안.”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자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이아네만큼이나 초췌해 보였지만 그의 눈은 강인하고 총기가 빛나고 있었다.
“아, 아...아버지...!”
“고생 많았다.”
발로아 경이 이아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제야 눈물이 터진 이아네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웠던 온기들이 가슴 아프도록 따뜻하다.
“안.”
“형님, 형수님.”
“보고 싶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던 이아스가 이아네 앞으로 나섰다. 곁에 서 있던 이아스의 아내 릴리안은 벌써 울고 있었다.
“에밀, 삼촌이야.”
“...산촌?”
아이 특유의 혀짤배기소리로, 릴리안에게 안겨 있던 에밀이 이아네를 불렀다. 이미 눈물에 젖어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아네는 더듬더듬 에밀을 받아 안았다. 그새 에밀은 꽤 무거워져 있었다.
“쌈초온.”
방긋 웃으며 이아네의 얼굴을 쓰다듬는 작은 손에서 아직 젖내가 났다.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이아네는 오래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 뒷모습을 확인하고 방문을 닫은 펠록스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레뮤엘의 곁으로 돌아왔다. 레뮤엘이 한창 결재해야 할 서류와 씨름 중이었다.
“발로아가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음.”
레뮤엘의 반응은 싱거울 만큼 간단했고 여전히 펜을 놓지 않은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펠록스는 레뮤엘의 입가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을 눈치챘다.
“별다른 일은 없었나?”
“저하를 잠시 만나셨던 것 외에는...”
“그래.”
문서의 마지막 장에 서명하고서, 레뮤엘은 고개를 들었다. 펠록스는 조금 움찔했다. 쌍둥이 사건 이후 펠록스는 레뮤엘 앞에서 당당할 수가 없었다. 물론 변명할 거리라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레뮤엘이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 펠록스 쪽에서 먼저 변명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 쌍둥이는.”
“예.”
올 것이 왔구나. 펠록스가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레뮤엘은 분별 있는 왕이고, 펠록스는 그런 레뮤엘을 오래도록 봐 왔기 때문에 그가 잔인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르다.
“지금 어디에 있나?”
“일단 근신 중입니다.”
“따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시키도록. 이아네의 상태가 좋아지면 그때 신문할 것이다.”
“예.”
레뮤엘은 무심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가 하는 말 속에 숨은 뜻은 분명했다. 그가 이아네를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평소처럼 무감각하고 평온해 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달랐다. 레뮤엘이 이아네를 이름으로 불렀다.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피해오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펠록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업무는 유난히 길었다. 밤이 늦은 시간, 침실에 들어서던 레뮤엘은 자신을 반기는 목소리를 듣고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셨습니까.”
레뮤엘은 마치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멋쩍은 듯, 이아네가 살짝 목례를 하며 읽던 책을 덮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아네는 알지 못했지만 레뮤엘은 조금 긴장했다. 지난번에도 이아네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행히도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레뮤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냐?”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얘기였나. 레뮤엘은 조금 안심하며 편안히 카우치에 기댔다. 이아네가 쭈뼛대며 레뮤엘 근처로 다가오자, 레뮤엘은 손짓해서 이아네를 맞은편에 앉게 했다.
“저... 저희 가족을, 디날에서 살게 해 주셨다고...”
“별 것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발로아 경의 청을 들어준 것뿐이었다. 일가족을 전부 빼내는 것은 이민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절차가 복잡하긴 했지만 결혼식 준비로 국가 전체가 바빠진 틈을 이용해서 꽤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아네에게 레뮤엘은 그저 감사한 사람이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일가를 한 명도 아니고 모두 만나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제르멘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은 마당에 레뮤엘의 배려는 차라리 감동에 가까울 만큼 따뜻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그 얘기를 하고 싶었나?”
“예, 꼭 한번...”
“시시하군.”
이아네가 살짝 레뮤엘의 눈치를 살폈다. 레뮤엘은 어딘지 지루한 듯한 얼굴로 턱을 괴고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할 말은?”
“아... 그...”
이아네가 망설이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제르멘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토록 충절을 다했던 주군이 어떻게 그를 농락했으며 어떻게 그를 속여 왔는지에 대해. 델토르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을 당했고,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심정이었는지, 무엇보다도 얼마나 레뮤엘을 떠올렸는지.
내용 자체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할 말이지만, 그래도 이아네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아네에겐 그럴 권리도 자격도 없었다. 애초에 상대가 잘못됐다. 지금 이아네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제르멘의 가장 중요한 숙적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주군이었던 자의 흉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천천히 듣기로 하지.”
레뮤엘은 마치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더니, 탁자 밑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그 직사각형의 상자는 이아네의 눈에도 익은 것이었다. 따각 하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상자가 열리며 안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아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혹시... 지금...?”
“지금이 아니면 할 때가 없지 않겠나.”
무심히 얘기하며 레뮤엘은 태연히 손을 움직였다. 일사불란하게 제자리에 놓이는 희고 검은 조각들.
“...체스를 말입니까?”
“시작한다.”
따각.
이아네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허둥지둥 말을 옮겼다. 완전히 레뮤엘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간 이아네가 귀여워 레뮤엘은 조금 웃었다. 어이없어할 때는 언제고, 금세 체스판에 집중하며 말을 옮기고 있다. 이렇게 한가롭게 말을 옮긴 것이 아주 오랜만인 것만 같았다.
“델토르는.”
“!”
-따각.
“어땠느냐?”
이아네가 흠칫 놀라며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을 옮길 뿐이다. 이아네가 잠시 고민했다. 과연 솔직히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그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해야 할지.
“연인은 만났느냐?”
“...아...”
체스말을 잡은 이아네의 손끝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집중할 수 없었던 이아네의 말이 엉뚱한 곳에 놓였다. 그러나 레뮤엘은 이아네가 흔들리는 것을 모르는 척했다. 발로아 경에게 들어서 이아네가 연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제르멘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레뮤엘은 이아네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예. 만났...습니다.”
-따각.
레뮤엘의 나이트가 이아네의 폰을 넘어뜨렸다.
“반가웠겠군.”
“...예...”
이아네의 손이 비숍을 엉뚱한 곳에 놓자, 레뮤엘이 기다렸다는 듯 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아네는 실수를 자각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어 레뮤엘의 승리로 끝났다.
“네가 졌다.”
문득 정신이 든 이아네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레뮤엘은 그런 이아네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 꿰뚫릴 듯한 심청색 눈동자가 이아네를 주시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아네는 발가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괜한 것을 물었나 보군.”
“...아니, 아닙니다. 그저...”
이아네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왜 레뮤엘 앞에서는 이렇게 약해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
“저에게, 왜 이렇게 잘 해 주시는 겁니까?”
레뮤엘은 조금 웃었다.
이전에도 같은 말을 들었지만, 그때와는 너무 달라진 상황에 스스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레뮤엘의 속을 모르는 이아네는 조금 긴장했다. 레뮤엘이 웃는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대는.”
천천히 레뮤엘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긴장한 이아네가 뻣뻣한 목을 움직여 레뮤엘을 바라본다. 레뮤엘은 천천히 걸어 테이블을 돌아 이아네의 위로 허리를 숙였다. 드리워지는 그림자 아래에서 이아네는 겁먹은 눈동자로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모르는 건가?”
“무, 무엇을...?”
“...잡아먹기엔 아직인가.”
“옛...?”
하는 말마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동그랗게 뜬 초록색 눈동자가 귀여워서, 레뮤엘은 평소엔 전혀 하지 않았을 말을 하고 말았다.
“귀엽군.”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드는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이아네는 모르겠지만 레뮤엘은 그 눈 안에 온전히 자신이 담겼다는 것을 확인하고 상당히 흡족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레뮤엘은 좀 더 이아네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잘 자라.”
“...!”
갑자기 이아네 위로 레뮤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무의식중에 눈을 꼭 감아버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조금 의아해진 이아네가 눈을 뜨려고 하는 순간, 무언가가 이마에 닿아 왔다.
살짝 이마에 닿았다 떼어진 입술은 차갑고도 부드러웠다. 깜짝 놀란 이아네가 잠시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 레뮤엘은 벌써 저만치 침대에 가 있었다.
“저, 저기...!”
황망히 허공에 흩어진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레뮤엘이 살짝 뒤돌아보았지만 이아네의 말을 듣기도 전에 평소와 똑같이 전혀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간단히 제 할 말을 할 뿐이다.
“졌으니, 정리는 그대 몫이다.”
이아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등을 끄고 침대로 들어간 레뮤엘은 조금 웃음을 머금은 채 이아네의 반응을 기다렸다.
잠시 후, 낮게 구시렁대는 소리와 함께 체스판을 정리하는 달그락 소리가 났다.
체스 정리가 끝난 후에도 이아네가 침대로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레뮤엘은 전혀 개의치 않고 먼저 잠이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한 숙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