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배신
이아네는 흙투성이가 된 옷을 털어내면서도 주위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열세 살 소년일 때 자주 드나들었던 개구멍은 오랜 세월 풍파를 맞아 거의 허물어지기 직전이었지만 이아네는 간신히 성벽 아래의 땅을 파내어 공간을 넓힌 뒤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좁은 구멍을 지나오느라 옷은 흙투성이에 팔과 손이 쓸리고 까졌지만 이아네에겐 이 정도로도 아주 큰 성과였다.
한숨을 내쉰 뒤, 이아네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제르멘이 있어야 할 집무실은 성 깊은 곳에 있어 이아네가 침입하기 어렵다. 예전이라면 그냥 통과했을 복도지만 지금처럼 더러운 모습으로는 잡혀서 쫓겨날 게 뻔했다.
이아네는 잠시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성 뒤뜰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 그러나 경계가 느슨한 건물. 그리고 제르멘이 자주 갈 만한 곳이라면?
딱 한 군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사실 가능성은 희박했다. 무엇보다 제르멘이 왜 거기에 있는단 말인가? 곧 국혼을 올릴 장본인인데.
그렇지만.
이아네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제르멘은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텅 빈 뒤뜰을 지나, 느슨한 경비 사이를 날렵하게 뛰며 이아네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아네의 심장이 뛰는 곳에는 언제나 제르멘이 있었다. 이번에도 부디, 이 심장이 올바른 길이 되어 주기를.
숨이 가쁘도록 달려 도착한 고즈넉한 도서고에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아무도 없었다.
제르멘이 즐겨 찾는 장소였지만 그가 왕이 되고 난 후에 집무실 가까이에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고 난 뒤로는 구관으로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이아네는 알고 있었다.
떨리는 발걸음이 조용히 복도를 밟았다.
눈을 감는다. 익숙한 내음이 코를 찔러 왔다.
햇빛 냄새, 공중에 떠다니던 황금빛 먼지의 냄새, 오래된 종이와 접착제의 냄새.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이아네는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더듬었다.
입구에서 첫 번째 책장을 끼고 돌아 열세 번째 책장. 그 안으로 쭉 가다가 하나, 둘, 세 번째 통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흑..."
다시, 다섯 번째 책장.
"...제롬."
그 책장으로 가려진 창문에, 그가 있었다.
"...안?"
크게 뜨여진 푸른 하늘을 닮은 눈이 이아네를 똑바로 응시하는 순간, 그 그리운 울림에 이아네는 벅차오르는 영혼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이 넘치고 말았다.
"흐으윽, 제롬...!"
이런 날이 전에도 있었다.
그날도 그와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여기까지 왔다. 그때도 제르멘은 놀란 얼굴로 이아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날이 너무도 너무도 옛날 같았다.
그때는 이렇게 오랫동안 그를 떠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이아네의 왕이었고 이아네는 그의 기사였으니까.
"안, 여길... 어떻게...?"
제르멘이 보기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보던 책을 덮었다. 이아네는 눈 안에 가득 찬 눈물을 떨구어 내고 좀 더 자세히 제르멘을 보기 위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순간 제르멘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걸터앉아 있던 창문에서 내려왔다.
"이런."
이아네는 여전히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제르멘을 바라보며 울먹이고 있었지만 제르멘은 이아네의 눈물을 닦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엉망이구나, 안."
"아..."
그제야 이아네는 여기저기 흙이 묻고 찢겨진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이아네였지만 긴 여정 속에서 옷은 상당히 낡아 있었다.
"먼저, 씻도록 할까. 이야기는 그 다음에."
달콤하고도 난처한 미소. 이아네는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르멘이 앞장서 걷고, 그 두어 걸음 뒤에서 이아네가 그를 따랐다.
겨우 서너 달 떠나 있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성의 양식이 낯설었다. 디날에서 보던 아치형의 창문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네모진 창을 보자 이아네는 조금 어색해지는 듯한 느낌에 일부러 더 제르멘의 뒤꿈치만 바라보았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곧 그는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주군이고, 이아네만의 사람인 것 같다.
디날에서 있었던 일들이 사실은 꿈이 아닐까? 국혼이라는 것도, 사실은 제르멘이 이아네를 놀려 주려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이상하게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비병이나 라이오넬 기사가 한 명쯤 복도를 지킬 만도 한데, 제르멘이 가는 곳마다 그곳에는 제르멘과 이아네 둘뿐이었다.
"...저, 폐하."
"응?"
"왜, 아무도 안 보이는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아아. 일부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있는 거야."
"예?"
"누구라도 지금의 안을 보면 곤란할 테니. 거의 다 왔어."
제르멘이 다시 달콤하게 웃었다. 이아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제르멘의 뒤를 따라갔다. 인적이 드문 복도. 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북쪽이다.
이아네는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제르멘은 성의 북쪽으로 거의 간 적이 없었다. 갈 일도 없었거니와 가더라도 이아네와 함께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아네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오는 곳인데, 제르멘은 자주 왔던 사람처럼 발걸음이 익숙했다.
이윽고 평범한 문 앞에 제르멘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아네는 제르멘이 손수 방문을 열어 주는 것을 보고 감동하고 말았다. 제르멘의 인도를 따라 들어간 방은 성의 방답지 않게 썰렁할 만큼 수수했다. 의자가 두 개 딸린 탁자와 딱딱한 침대. 커튼도 부드러운 베개도 없었다.
"여기는...?"
"견습 시종 숙소야."
"아..."
"저쪽에 세면대가 있으니 씻도록 해. 예쁜 얼굴이 망가졌잖아."
그 말에 또 울컥하는 것을 참으며 이아네가 세면대로 향했다. 깨끗한 물이 담긴 대야에 눈물과 땀과 흙먼지를 씻어내자 울어서 발간 눈을 한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옷은 이걸로."
제르멘이 탁자 위에 놓인 가운을 건넸다. 황송하게 받아든 이아네가 지저분한 옷을 벗고 가운을 입고 나자, 그제야 제르멘이 이아네를 끌어안았다.
"안, 우리 안...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말씀드리자면 깁니다. 그게..."
"쉿..."
제르멘이 이아네를 끌어안고 목에 코를 묻었다. 확 끼쳐오는 용담꽃 향기에, 이아네는 새삼 자신이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찔끔 났다.
"제롬, 저..."
"응?"
"국혼...이라니, 어떻게 된 겁니까? 저는..."
제르멘이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어두워진 푸른 눈동자에 이아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뭔가 사정이 있었던 거다!
"...미안해, 안. 난 그저... 패전국의 왕일 뿐이야."
제르멘이 한숨을 내쉬더니 면목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이아네의 안타까운 눈에 절망이 서린다. 그렇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이아네만의 왕이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그러지 말아, 안. 내가 아끼는 건 너뿐이야. 네가 돌아와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제롬..."
이아네가 다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자, 제르멘이 낮게 웃으며 이아네를 끌어안고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안."
"흑...네, 제롬..."
"이제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지?"
"네, 제롬."
"평생 내 곁을 지킬 거지? 다른 곳으로 사라지지 않을 거지?"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멘의 미소가 짙어지며 달콤한 손길이 이아네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우는 중에도 너무 농염한 손짓에 놀란 이아네가 머리를 들자, 제르멘이 이아네의 이마에 입을 맞춰 왔다.
"하아...나의 안."
"제롬..."
"가족들은 만나고 온 건가?"
"아뇨, 바로 성으로 향하는 바람에..."
잊고 있던 가족 생각에 이아네는 다시 울컥했다. 어머니와 형수는 잘 지내고 있을까. 작기만 하던 조카 에밀은 지금 얼마나 컸을까.
"그럼 여기까지 혼자 온 거야? 가족, 친구, 형제들은?"
"급히 오느라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아네의 대답을 듣고 제르멘의 미소가 짙어졌지만 이아네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델토르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내가 되는 거군?"
"네."
"기뻐, 안."
제르멘이 활짝 웃음을 피우며 이아네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끌어안긴 품에서 예전처럼 용담꽃 향기가 확 끼쳐 왔다.
"날 가장 먼저 만나러 와 주다니, 이렇게 기특할 데가. 고마워, 안."
"아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아네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제롬에게서 듣는 칭찬은 늘 어딘지 낯간지러운 데가 있었다. 레뮤엘은 무미건조하긴 해도 확실하게 이아네의 성장을 집어 칭찬하곤 했었다. 거기에 비하면 제르멘은...
문득 이아네의 얼굴이 확 굳었다. 어떻게 델토르의 심장 이젤다 성 한복판에서, 심지어 제르멘에게 안겨 있으면서도 적국의 왕을 떠올릴 수가 있지?
당황스러운 감정을 감추려고 이아네는 더욱 제르멘의 향취를 들이마셨다. 폐부 깊게 퍼지는 향기를 두어 번 들이마신 후에야 이아네는 겨우 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제부턴 내 옆에 있도록 해."
"네, 기꺼이."
이아네의 눈이 살짝 호선을 그렸다.
"이제 가 봐야 해, 안.“
재회의 기쁨을 더 누리면 좋겠지만 제르멘은 일주일 후 결혼식을 치러야 하는 몸이었다. 짧은 만남 후에 제르멘은 이아네를 도닥이며 섭섭한 듯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제롬..."
"이대로 사라지면, 비안테 공이 날 산 채로 씹어 먹을지도 몰라."
제르멘이 살짝 웃으며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이아네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다시 올게. 그때까지 쉬도록 해."
"네."
고분고분한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제르멘이 빙긋 웃었다. 붉은 입술이 이아네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체온에 이아네는 그만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고 말았다. 그 붉어진 뺨을 살짝 쓰다듬은 제르멘이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이아네는 잠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잠시 방안을 거닐었다.
다시 보아도 여전히 휑한 방이었다. 이젤다 성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생소한 곳이어서 이아네는 어떻게 제르멘이 이런 곳을 알고 있는지 신기했다.
"...?"
방안을 살피던 이아네는 문고리 근처에 이상한 얼룩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릎을 굽혀 문고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정확히는 얼룩이라기보다 무언가에 긁힌 흔적이었다. 꽤 강한 힘으로 긁은 것인지 견고한 나뭇결이 살짝 패여 있었다. 긁힌 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어두운 색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얼룩들이 보였다. 갈색이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물감을 아무데나 찍어 바른 듯한 불규칙한 흔적들이었다.
이아네는 의아하게 그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시종들은 뭘 하고 있기에 이런 얼룩조차 제때 지우지 않는 걸까. 방안은 치울 것도 없이 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보지 않는 것은 명백히 직무태만이었다.
제르멘이 돌아오면 반드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아네는 나무 침대에 누웠다. 매트리스나 푹신한 베개는 없었지만 장시간 긴장과 피로가 쌓인 몸을 누이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 이아네에게 축복처럼 다가왔다.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며 이아네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지만 문득 눈을 떴을 때, 이아네의 눈에 비친 것은 침대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제르멘이었다.
"제, 제롬?!"
"쉬잇."
제르멘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살짝 웃었다. 이아네가 깜짝 놀란 눈을 깜박이며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밤이 깊어진 검은 바깥으로 희미한 달빛이 비쳐드는 것이 보였다.
"어, 언제부터..."
"피곤한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어."
"그래도... 깨우지 그러셨습니까."
제르멘을 좀 더 보고 싶었던 아쉬움에 이아네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쿡쿡 소리죽여 웃으며 제르멘이 손가락을 들어 이아네의 입술을 꼭 눌렀다.
"여전하구나, 나의 기사님은."
"웃..."
이아네가 얼굴을 붉혔다. 푸른 눈이 그런 이아네를 바라보며 다시 호선을 그렸다.
"일단 요기라도 하도록 해."
제르멘이 부드럽게 웃으며 가지고 온 쟁반을 가리켰다. 빵과 우유뿐이었지만 이아네에게는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황송한 것이었다.
"지, 지, 직접 가져오신 겁니까?"
"그럼. 여긴 나 외엔 아무도 안 와. 편히 있도록 해."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에 젖은 시선으로 제르멘을 바라보았다. 그 동경에 가득 찬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제르멘이 감회가 새로운 듯 나른한 눈을 했다.
부끄럽긴 했지만 이아네는 근 한나절을 굶었던 터라 꽤 배가 고팠다. 서둘러 빵과 우유를 먹어치우는 모습을 제르멘은 끝까지 지켜보았다. 왠지 쑥스럽긴 했지만 이아네는 사실 기뻤다.
마지막 빵 조각을 우유와 함께 삼키고서야 이아네는 조금 느긋하게 제르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오늘도 바쁘셨습니까?"
"아아, 응. 식이 앞으로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 말이지."
제르멘이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비안테 공작은 저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바빴고 제르멘도 그의 열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끌려 다니는 중에도 국무는 진행시켜야 한다는 것이 지옥이랄까, 제르멘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살이 빠진 것 같다. 이아네는 안타까운 마음에 제르멘의 옷소매를 살짝 잡았다. 이아네의 마음을 짐작한 제르멘이 이아네의 손을 마주 잡아 왔다.
"괜찮아. 아직 네 얘기를 들을 정도의 여유는 있으니까."
"아..."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아 이아네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손과 자신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드디어 눈앞에 있다는 것이 새삼 믿겨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설명해 봐. 라퓨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아네는 아무 생각 없이 입을 열려다 살짝 멈칫 했다. 디날에서 있었던 3개월 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레뮤엘의 짙은 심청색 눈동자였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이아네는 살짝 침을 삼켰다.
"...안?"
"그게..."
이아네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라퓨타에서부터 디날을 거쳐 델토르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은 생각보다 험난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라퓨타에서 갑작스런 기습이 있었습니다. 디날군이 라퓨타 군과 매복해 있다가 습격을 당했고, 그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체류해 있다가 디날로 끌려갔습니다."
"디날의 어디에?"
제르멘이 놀란 눈으로 묻자 이아네는 왠지 뿌듯해져서 조금 어깨를 으쓱했다.
"케닛에 있었습니다."
"헤에. 수도까지... 꽤 긴 여행이었구나."
"예."
이아네는 머릿속으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제부터는 디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아네가 알고 있는 것들은 상당히 여러 가지였지만 어떤 것이 제르멘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아네는 레뮤엘의 호의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벗어나려고 수도 없이 발버둥치긴 했지만 그래도 레뮤엘은 이아네를 배려해주었던 사람이니까.
"저는 바로 구금되어 버려서...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습니다. 식이 있다는 것도 겨우 일주일 전에 알게 되어서..."
"에? 정말?"
제르멘이 다시 놀란 얼굴을 했다.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날에서는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감금된 곳은 시종 숙소 같은 곳이었는데, 디날에 있으면서 외출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디날에서 있으면서 성 밖으로 나간 적은 한 번도 없다. 리트의 검술 수업을 위해 후원으로 나가는 것을 빼면 이아네는 상당히 심심한 매일을 보냈었다. 책을 읽긴 했지만 제르멘에게 환상동화집의 내용을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흐음, 그랬단 말이지... 그럼 평소엔 뭘 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냥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거기까지 얘기하면서 이아네는 새삼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레뮤엘은 대체 왜 자신을 굳이 침실에 가까이 두면서 감시했던 걸까? 이아네는 일개 포로일 뿐이었다. 제르멘과 친하게 지냈던 것을 빼면 이아네는 다른 포로와 딱히 다른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네. 다른 사람들도 만날 수가 없어서 거의 저 혼자 있었습니다."
"고문이나 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구?"
"그런 일은..."
없었다, 라고 하려다 이아네의 얼굴이 문득 어두워졌다. 그래, 생각해 보면 디날에서의 일들이 유쾌하다고만 하긴 힘들지.
"...안?"
"저... 잠시 안 좋은 기억이..."
제르멘이 측은한 듯 이아네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아네는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남의 얘기처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만..."
"응?"
"...죽고 싶었습니다."
"뭐?"
"세 번인가... 자해를 했었습니다."
이아네가 손목에 남은 희미한 상처를 보여주었다. 길게 그어진 손목의 자상은 이제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세상에..."
제르멘이 안타까운 얼굴로 이아네를 끌어안았다. 코끝에 변함없는 용담꽃 향기가 흩어졌다. 그 향취를 깊이 들이마셨지만 이아네는 조금 울적해졌다.
"이제 괜찮아?"
"예.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 위험한 건 목숨이 아니라 정조였지. 이아네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르멘이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왔어?"
"국혼 때문에 사람들이 꽤 바빴습니다. 관리자가 문 잠그는 것을 잊은 바람에 병사를 다른 데로 따돌리고 델토르로 출발하는 짐마차에 몰래 올라타서..."
"대단하잖아!"
제르멘이 쿡쿡 웃으며 이아네의 어깨를 살짝 쳤다. 친근한 그 스킨십이 새삼 눈물 나도록 행복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이제 자유라는 확신이 이렇게 소중한 거구나 싶어 이아네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럼 디날에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갇혀 있었다는 건가?"
"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정말로 이아네는 아는 것이 없었다.
"고생 많았겠네..."
제르멘이 말꼬리를 흐리며 이아네의 턱을 들어올렸다. 상처 입은 듯한 초록빛 눈동자가 우울하게 제르멘을 바라보았다. 제르멘이 다시 빙긋 웃으며 이아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걱정하지 마. 내 곁에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을 거야."
"제롬...!"
이아네가 힘껏 제르멘에게 안겨 왔다. 응석을 부리듯 안겨 오는 이아네를 토닥여 주던 제르멘이 문득 정신이 든 듯 이아네의 어깨를 밀어냈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일 다시 올게."
"네..."
아쉬움에 이아네가 시무룩해졌지만 제르멘이 얼마나 바쁠지는 이아네가 더 잘 알았다. 안타까운 손길로 제르멘을 배웅하고, 이아네는 용담꽃 향기만 남은 방 안에서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아네의 방을 나온 제르멘은 평소의 사뿐한 발걸음으로 어두워진 복도를 걸었다. 여유롭고 우아한 발걸음 소리가 한동안 복도를 낮게 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걸음 소리가 둘이 되었다. 새로운 발소리는 제르멘과는 달리 묵직하고 둔탁했다. 가벼운 샌들을 신은 제르멘과 달리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군화 소리였다.
그리고 앞만 보고 걷던 제르멘도 마침내 그 소리를 알아챈 것 같았다. 살풋 미소를 지은 제르멘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봤나?"
"예."
"어때 보여?"
놀랍게도 제르멘의 바로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지만 제르멘은 놀라지 않았다. 군화의 주인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는데다가, 그를 부른 것이 바로 자신인데 놀랄 리가 없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렇지, 나도 알고 있었어. 그 애는 거짓말을 못 하거든."
즐거운 듯 미소를 띠며 제르멘이 말을 덧붙였다.
"나에게는 특히."
"......"
군화 소리가 살짝 느려지다 다시 빨라졌다.
제르멘은 북쪽 별관 입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덩치가 곰처럼 건장한 사내가 굳은 얼굴로 제르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눈만 마주쳐도 그 눈빛에 서린 살기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제르멘은 그 살기 서린 눈빛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자아, 어떻게 할까."
"...?"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천사 같은 미소 뒤에 어떤 얼굴이 있는지 남자는 질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생긋 웃으면서 거리낌 없이 잔인한 명령을 내리는 이 왕이, 망설이고 있다.
마치 오늘 저녁 메뉴로 어떤 것이 좋을지 고민하듯 즐거운 표정으로, 제르멘은 나름대로 심오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남자로서는 그런 제르멘이 생소하면서도 역겨웠다.
"내 귀여운 기사님을 그냥 보내기엔 아쉬운데."
"대체 어떤 놈입니까?"
남자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러나 제르멘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눈꼬리를 곱게 접었을 뿐이다.
"그래! 마지막으로 회포라도 풀어야겠네. 우리 순진한 아가씨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보내는 건 섭섭하지."
제르멘이 남자를 완전히 무시하긴 했지만 남자는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표정이 없었다.
"그럼, 내일 또."
제르멘이 상큼하게 손을 흔들며 별관을 나가자 남자는 그의 뒷모습에 살짝 목례하곤 어두운 복도로 다시 돌아갔다. 뚜벅, 뚜벅 어두운 복도가 군홧발 소리를 삼키고 한참이 지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조용한 구석에서 작은 그림자가 살짝 나타났다.
기척조차 죽인 그림자가 아주 가벼운 움직임으로 군화 소리를 따라가자 마침내 복도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아네는 델토르에서의 두 번째 아침을 맞았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 이아네는 기지개를 켜고 침상에서 내려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꽤 떨어진 거리에서도 본성의 부산스러움이 전해져 왔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면 희미하게 웅성대는 소리가 저 멀리 들렸다.
이아네와는 관련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역시 외로워졌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제르멘이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느긋하게 기다리려고 했지만, 보고 싶다. 그가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그는 제르멘이었다. 이아네는 평생 제르멘을 따르기로 맹세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르멘의 사람이었다. 평생 드러내지 못한다 해도, 그의 사람인 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아네는 흔들렸던 연정을 다잡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법처럼 문이 열렸다.
"안!"
"제, 제롬?"
깜짝 놀라 돌아본 이아네의 눈에 제르멘이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놀라움도 잠시, 환희로 차오르는 초록빛 눈동자가 제르멘과 마주쳤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이아네가 제르멘에게 달려가 안겼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용담꽃 향기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보고 싶었어."
"웃, 저... 저도..."
이아네가 수줍게 대답하자 제르멘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이아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부끄럽고도 좋아서 이아네가 살짝 웃었다.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십니까?"
"응... 앞으론 시간 내기가 정말 힘들 것 같아서."
제르멘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 지친 얼굴에 이아네가 더 가슴이 아팠다.
"괜찮습니다. 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하아... 나의 안. 이렇게 착하게..."
제르멘이 이아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얼핏 농염한 그 손짓에 약간 당황한 이아네의 시선이 흔들렸다.
"정말, 정말 미안해.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너무 소홀했지."
"아닙니다. 바쁘실 것 알고 있었습니다."
이아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가 바쁜 것은 당연하다. 곧 다가올 결혼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는 왕이었다. 이아네에게 개인적으로 쓸 시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조차 각오하고 돌아온 것이 아닌가.
"그래... 알고 있다니 기뻐, 안.. "
제르멘이 안타까운 듯 이아네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아네가 짐짓 괜찮은 듯 미소를 지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미안해. 대신... 평생 내 옆에 있어야 해."
"네."
어린아이 같은 약속이 귀여웠다.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르멘이 말을 덧붙였다.
"죽을 때까지."
-쿵.
둔탁하게 들려온 문 소리에 이아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방문 바깥에서 누군가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났다.
"누, 누구냐!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쉿, 괜찮아, 안."
본능적으로 제르멘을 감싸는 이아네의 어깨에 제르멘의 손이 올라갔다.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이아네를 진정시키려는 듯 제르멘이 짧게 설명했다.
"널 지키려는 것뿐이야."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이아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이 모르는 기류가 방안에 흐르고 있었다. 불안해진 이아네가 제르멘의 옷자락을 쥐었다.
"어라, 겁먹은 거야? 괜찮아, 안. 해치지는 않아."
"제롬..."
알 수 없는 상황에 불안이 극에 달한 이아네가 조심스레 제르멘을 불렀다.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제르멘이 난처하게 웃으며 이아네의 손을 옷자락에서 떼어냈다.
"미안해, 안. 이제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숨이 막힐 듯한 충격에 이아네가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왜, 왜, 왜 그러십니까? 제, 제롬,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이아네, 이아네, 이아네. 나의 기사."
제르멘이 고개를 저으며 이아네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아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제르멘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슴 아프도록 사랑스럽고, 멍청한, 나의 안.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슨..."
서늘해지는 등허리에 한기가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키지만 제르멘은 아랑곳하지 않고 뜻 모를 말들만 늘어놓았다.
"미안, 내게도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하지만 그건 모두, 너 때문이야."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제롬, 저는..."
"한 번만 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제르멘은 단호히 이아네의 말을 잘랐다.
"그렇게 부르면, 이번엔 혀를 뽑아 버릴 거야."
"......"
이아네가 고장난 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르멘이 빙긋 웃으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아네가 부들부들 떨며 입을 막자, 제르멘이 한결 낫다는 듯 느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주인 말은 잘 들어야지?"
낮게 킥킥댄 제르멘은 여전히 얼빠진 이아네의 턱을 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래, 안. 기억나? 처음으로 라퓨타에 갔을 때, 엄청 큰 드래곤에게 산 채로 먹힐 뻔했던 일."
"기억... 납니다."
"그래, 엄청났어! 대단했지, 안 그래? 누구라도 그 아름다운 끔찍함에 무릎 꿇게 될 거야! 길들이긴 힘들겠지만, 그런 녀석이라면 사람 머리 몇 개 정도야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지. 그런데 그때, 그녀가 나타났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아네는 알 것 같았다. 이아네의 표정에 떠오른 낯익음을 눈치채고 제르멘은 즐겁게 말을 이어갔다.
"기억나겠지, 분명. 디날에서 그녀를 봤었잖아. 아하, 잘 모른다면 내가 얘기해 줄까. 베델리어 플로렌스 디날, 내 반려자를 드디어 찾았다는 걸 알았을 때, 난 내가 꿈을 꾸는 줄 알았지. 하하, 이토록 완벽한 ‘드래곤’의 주인이라니!"
이아네는 문득 제르멘의 말에서 모순을 느꼈다.
제르멘은 그가 말했듯 패전국의 왕이었다. 당연히 국혼을 추진하는 쪽이 아니라 억지 결혼을 당하게 되는 쪽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믿고 싶지 않지만, 이 국혼이 제르멘의 계획인 것처럼 들렸다.
어떻게?
이아네가 멍한 눈으로 제르멘을 바라보았다. 이아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제르멘은 황홀한 듯, 꿈꾸는 듯 찬미의 말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제르멘이 찬미하는 대상은 드래곤의 주인이 아니라 드래곤 자체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네 가치가 다한 거야, 안."
제르멘이 똑바로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늘 몽롱한 듯 느긋하던 푸른 벽안은 무서우리만치 선명하게 이아네를 마주본다. 이아네는 그 순간 처음으로 제르멘의 진심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정말 잘해 줬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넌 늘 내게 충성을 다했지. 밖에서도, 안에서도, 내 침대에서도."
"윽..."
"네 아버지가 눈치 없이 평화 운운하지만 않았어도, 너를 포함한 라이오넬을 라퓨타로 보내진 않았을 거야. 네 아버지만 보내기엔 속 보이잖아. 새 애완동물을 찾은 마당에 너를 계속 데리고 있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네가 라퓨타에 가서 죽으면 잘 된 거고 살아 돌아와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지. 아, 사실은 살아있길 바랬어. 드래곤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 가랑이를 핥지는 못하니까."
이아네는 충격에 빠져 제르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이아네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제르멘이 맞나?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 때부터 곁을 지켜 왔던, 온 마음을 다해 지키고자 맹세했던 그의 주인이, 지금 눈앞에서 자신과 부친을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얘기하는 건가?
"전쟁이 시작됐을 때, 제라르 케이 발로아만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다 죽이라고 써서 보냈지 뭐야. 네가 살아있는 줄 알았으면 협상할 걸 그랬어. 라이오넬은 내게도 좀 아까운 인재들이었거든."
"자, 잠깐... 잠깐만..."
제르멘이 방해받은 것이 불쾌한 듯 짜증 섞인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이아네는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제르멘에게 재차 확인했다.
"다... 다 죽이라니요? 라퓨타에 있던 군대는 포로로 수용된 게 아니었습니까?"
"? 무슨 소리야. 레뮤엘, 그 사람이 라이오넬의 처분을 묻길래 그냥 알아서 하라고 했지. 한참 된 이야긴데, 몰랐어? 아, 하긴. 디날에서 들은 것이 전혀 없다고 했지.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던 모양이네."
제르멘이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끔찍한 말을 하면서도 미소만큼은 여전히 달콤하다는 것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그런데 말이야, 안. 그렇게 오랫동안 디날에 체류해 있으면서 쓸모 있는 정보 하나 못 물어 오다니. 역시 내가 잘못 키웠던 건가."
"폐...하, 저, 저는..."
공포와 혼란으로 굳어 있던 혀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말해야 했다.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알아야 했다.
"저는, 폐하를..."
"알아, 안."
그러나 제르멘은 이미 이아네가 무슨 말을 할지도 알고 있었다.
"네 마음이 뭔지, 네가 날 어떻게 바라봤는지도 알고 있어.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주군이라 해도 같은 사내의 사타구니에 코를 박는 건 힘든 일일 테지."
"제, 아니, 폐하... 저를 어떻게... 생각하신... 겁니까?"
제르멘이 난처한 듯 웃었다. 대답하기 곤란해서라기보다,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비웃는 미소였다.
"이아네, 이아네... 설마, 내가 아랫것의 더러운 구멍에 몸소 씨를 뿌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망연해진 이아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제르멘은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역시 좀 아쉽네. 조금만 더 빨리 돌아왔어도 널 내 침실에서 ‘기를’ 수 있었을 텐데. 유감이야. 내 왕비는 널 맘에 안 들어 할 테니까. 또 모르지, 그녀의 드래곤은 널 마음에 들어 할지도?"
제르멘이 문득 해답을 찾은 듯 기쁜 얼굴을 했다. 소름끼치도록 현실과 동떨어진 천사의 얼굴에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했다.
"아, 그래. 빨리 그녀의 드래곤과 함께 있게 해 주고 싶군. 그 아이도 널 반가워할 거야. 델토르로 오고 나면 마음껏 놀기는 힘들 테니까. 특별히, 그 아이와 놀게 해 줄게."
제르멘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생각이 만족스러운 듯 턱을 문질렀다.
"어때? 나쁘지 않지?"
"폐, 폐...하..."
"오오, 안... 내 가여운 기사. 이제 사흘이면 넌 사라지겠지만 난 네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기억할 거야."
제르멘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아름답고 나른한 몸짓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이아네가 더 잘 알았다.
"그래, 네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줄게."
제르멘이 생긋 웃으며 벨트를 풀었다.
"비천한 것에게 씨를 뿌릴 생각은 없지만 내 물건을 핥는 영광은 내려줄 수 있지. 너도 좋아할 거야. 음란한 안."
이아네의 눈이 젖어 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제르멘은 태연히 그 눈물이 맺히는 턱을 쥐어 올리며 속삭였다.
"날 만족시키면 디날에 남창으로 팔아 버리는 정도까진 선처해 줄게. 그러니 당장 엎드려서 내 물건을 빨아, 이 발정 난 암퇘지야."
흐릿한 시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르멘의 손이 이아네의 머리를 잡아 고간에 문지른다. 이아네의 뺨으로 뜨거운 남근이 닿자 제르멘이 낮게 탄성을 질렀다. 억지로 벌린 입술 사이로 제르멘의 욕망이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이아네의 귓가에 아주 오래 전 아버지에게 들었던 한 마디가 스쳐갔다.
'폐하를 너무 믿지 말거라, 안.'
제멋대로 이아네의 입안에 사정한 제르멘이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간 뒤, 한참 동안이나 이아네는 기절한 듯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는 한참을 울고, 울고, 울다 지쳐 잠들고, 다시 눈을 뜨면 우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나중에는 아예 흘릴 눈물조차 말라 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후, 이아네는 문득 방의 근처에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문고리를 비틀고 잡아당겼지만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금장치뿐 아니라 바깥에 달리 자물쇠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이봐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쾅쾅 문을 두드리다, 이아네는 그대로 탈진한 채 문에 기대어 주저앉고 말았다. 혼란과 배고픔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간다.
문득 손끝에 간질간질한 자극이 느껴졌다. 힘없이 손으로 시선을 내리자 언제인지 모르게 까진 손바닥이 보였다. 얼마나 문을 두드려 댔는지, 끝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말라붙은 갈색 핏자국.
이아네의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고리를 바라본다. 비틀리고, 당겨지느라 문고리 근처에는 잔 흠집들이 가득했다. 시선을 더 위로 올린다. 어두운 색의 방문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갈색 얼룩들이 어제보다 조금 더 늘어나 있었다.
앞으로 들를 일 없을 만큼 바빠질 거라던 목소리가 희미하게 뇌리를 스쳐 갔다.
그제야 이아네는 제르멘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제르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아네가 굶어 죽는다고 하더라도 제르멘은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제르멘에게 버림받았다.
이아네가 이젤다 성의 북쪽 방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국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레뮤엘이 델토르에 도착하고 제부가 될 제르멘에게 예물을 건네는 것으로 혼주의 역할을 모두 마친 후, 국혼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었다.
베델리어 플로렌스 디날은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바다를 닮은 머리카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랑이며 진주와 레이스로 장식한 면사포를 흔들었다. 최고급 실크와 새틴으로 단장한 우아한 드레스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는 곳에 단아한 흔적을 자아내고, 어깨에 걸친 망토가 흐르듯 여린 어깨를 감싸 안는다.
레뮤엘은 눈물 한 방울 없이 하나뿐인 누이가 이국의 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로요라 여신의 가장 신성한 사제가 두 부부의 순조로운 미래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베델리어의 작은 머리 위에 화려한 보석 왕관이 얹어지고, 그대로 발코니로 올라가 델토르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왕비의 탄생을 알린다.
이 모든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베델리어는 고개를 꼿꼿하게 세운 채 단 한 차례도 웃지 않았다.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겠소?"
"......?"
"이제 당신의 자녀가 될 국민들인데 말이지."
제르멘의 목소리는 어딘지 재미있어하는 구석이 있었다. 제르멘의 말을 무시하고 베델리어는 다시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굳은 강심을 품은 심청의 눈동자가 발코니 저 너머를 응시하며 슬픔과 수모를 삼켜냈다.
그 날은 이아네가 감금된 지 나흘째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이아네는 힘겹게 눈을 떠 축 처진 팔다리를 움직이며 천천히 기었다. 방에 단 하나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힘겹게 고개를 내민다. 검은 하늘에 청초하게 뜬 달이 파랗게 빛을 발하는 넓은 성 안에서 이아네는 홀로 죽어가고 있었다.
"누구...없어요?"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가늘게 창밖으로 스며 나왔다. 철창으로 막힌 창문 사이로 이아네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고요하고 고요한, 그리고 결국 아무도 오지 않을 창의 바깥.
낮은 오열 속에서 이아네는 멍하니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레뮤엘의 심청색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떠올랐다.
보고 싶다.
평소라면 절대 부인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이라도.
이아네가 아무 말도 없이 성을 빠져나와서 많이 걱정할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잘 대해줬는데, 배은망덕하다며 화를 내고 있진 않을까. 화를 내는 레뮤엘을 생각하자 이아네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피었다.
재미있겠다. 그 철혈의 왕이 이아네를 상대로 화를 내다니.
그와 함께 했던 체스. 많이 늘었다며 칭찬하던 얼굴. 진지하고 올곧게 이아네를 부르던 목소리.
말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그렇게 잘 해줬는데 아무 말도 없이 뛰쳐나가 미안했다고.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보게 된다면, 좀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어느새 제르멘은 안중에도 없고,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오직 레뮤엘뿐. 후회 섞인 한숨과 함께, 이아네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아네가 잠든 지 한참이 지난 후, 문 저편에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중후하고 절대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가 이아네가 기댄 방문 앞에 멎었다. 잘가닥, 자물통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미 기절한 이아네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와 이아네 앞에 쭈그려 앉은 커다란 그림자는 손을 내밀어 이아네의 뺨을 몇 번 툭툭 쳤다. 깨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준비해 온 안대를 이아네의 머리에 씌운 남자는 너무도 간단하게 축 늘어진 이아네를 어깨에 들쳐 업고 복도를 걸었다. 무겁고 진중한 발걸음이 완전히 멀어졌을 때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어두운 복도 구석에서 작고 날렵한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소리조차 없지만 어두운 복도를 지나는 속도는 믿을 수 없게 빠르다. 부드럽고 유연한 몸짓이 공기를 가르며 복도를 걷는 군화 소리를 뒤쫓았다.
바깥으로 이어진 발자국 소리가 잠시 멎은 뒤, 털썩 하고 무거운 것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말고삐를 쥐는 소리와 가벼운 채찍 소리가 뒤를 따른다.
검은 그림자는 지체하지 않고 마차 뒤를 쫓았다. 덜그럭 덜그럭, 세련되지 않은 마차는 길을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후원을 지나 북쪽 어귀의 쪽문을 통해 성을 벗어났다.
미리 언질을 넣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오늘 있었던 왕과 새로운 왕비의 결혼식 때문인지 성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문지기는 없었고 그림자는 수월하게 마차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일단 성벽을 빠져나오자 아직까지 축제 분위기에 둘러싸인 광장이 순식간에 마차를 집어삼켰다.
밀려드는 인파는 아직도 폭죽을 쏘아 올리거나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면서 오랜만의 큰 이벤트를 마음껏 만끽 중이었기에 작고 허름한 마차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당히 요란하면서도 적당히 조용한 길을 골라 마차가 굴러간다. 그것만 보아도 마차를 모는 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짐작이 간다.
마차는 어느 순간 인적이 드문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늙은 노새는 꾸준히 발걸음을 옮겼고 남자도 초조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차는 꽤 빠르게 골목을 지나쳤다. 좁고 더러운 골목을 한참 동안 꼬불꼬불 거쳐 간 마차는 마침내 커다란 건물의 뒷문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군화 소리를 울리며 작은 뒷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다시 짧게 두 번.
"오셨네요."
"자, '물건'이오."
남자가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문을 열고 나온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마차 안을 확인하더니 낮게 뭐라 중얼거렸다.
"뒤는 맡기겠소."
"염려 놓으셔요. 장사 하루 이틀 한답니까."
남자는 마차의 짐칸을 비우고 텅 빈 마차를 끌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여자가 열린 문 안으로 두어 번 박수를 치자, 건장한 사내 둘이 마차 안에 던져진 것을 둘러메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영리한 경계심이 서린 눈으로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여자가 드디어 문을 닫자, 그림자에 숨어 있던 작은 인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얼굴을 가린 복면 사이로 겨우 내놓은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잠시 그 문을 주시하던 그림자는 이제 소임을 다한 듯 다시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시간, 레뮤엘은 발로아 경의 보고를 받으면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득이 있었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아네가 곧장 성으로 향한 듯합니다. 주변 사람 아무도 이아네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가."
레뮤엘이 미간을 좁혔다.
그전부터 이아네의 도주에 대해 생각해 오면서 내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발로아 경이 대답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쪽도 확인해 두어야 했다.
"그에게 연인은 없었나?"
"예?"
발로아 경이 놀란 눈을 했다.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지만 레뮤엘은 그 안에서 일렁이는 미묘한 감정을 캐치하고 재차 물었다.
"라퓨타에서 같은 막사를 쓰고 있을 때 그는 델토르에 연인이 있다고 했었고, 그를 그리워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글쎄요... 어릴 때부터 국왕 폐하를 친형처럼 따르고 나중엔 라이오넬 기사단에 들어가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한 아이입니다. 기사단에 입적하기 전에는 여자와는 거리가 멀었고, 기사단에 들어간 후로는 거의 얼굴을 볼 일이 없어서..."
"...솔직하게 말하라."
발로아 경이 움찔했다.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해 왔던 진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발로아 경도 느끼고 있었다. 이아네, 그 아이가 제르멘을 바라볼 때 어떤 눈이었던가를.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애초에 정말 몰랐다면 이아네에게 델토르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로아 경은 모든 것을 묻어놓고 싶었다.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그가 성으로 간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닌가?"
발로아 경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의 침묵이 지난 후 발로아 경이 입을 열었다.
"...이아네는, 제 예상에, 제르멘 전하를 흠모했던 듯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분의 곁에서만 맴돌았고, 기사단에 입적한 후로는... 어딘지 인형 같다고 할까, 세상이 제르멘 전하를 중심으로 도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제르멘 공의 반응은 어땠나?"
"...그것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아네를 귀여워해주기는 하셨지마는..."
"그가 이아네를 사랑한 것 같나?"
이것 참, 당황스럽구만.
발로아 경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제 새끼 허물을 남 앞에서 얘기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 젊은 왕은 돌려 말하는 일 없이 정곡을 찌르고 있으니.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연정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이아네를 정말 사랑했다면. 발로아 경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랬다면 이아네를 서슴없이 사지로 내모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든 이아네는 지금 제르멘 공을 만나러 갔을 거라는 얘기군."
어쩐지 불안해졌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한순간에 사지로 내몰아 버린 왕이, 국혼까지 진행된 마당에 이제 와서 옛 연인을 만나게 되면 과연 어떤 반응일까.
무거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이아네의 행방은 묘연한 채, 아무것도 모르는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이아네는 낯선 소음에 문득 눈을 떴다.
처음에는 아직 밤인가 싶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인 후에야 이아네는 눈에 안대가 씌워진 것을 깨달았다.
내리 나흘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이아네는 당장 아사하기 직전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그가 있는 곳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분명 정신을 잃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젤다 성에 있었다. 썰렁하고 차가운 방, 딱딱한 침대, 굳게 잠긴 쇠 문고리의 냄새와 창살 너머 달밤의 공기를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이아네는 이젤다 성의 북쪽 방이 아니라 좁은 상자에 갇혀 있는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으..."
극심한 두통과 장이 꼬이는 듯한 고통에 이아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터진 입술 사이에서 메마른 한숨이 새었다.
죽는 건가.
배고픔에 지친 몸으로, 이아네는 천천히 체념에 빠져들었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는 결국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테니까.
체념한 채 멍하니 흔들리기를 한참. 까무룩 잠이 든 순간 갑자기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조심히 옮겨. 자... 어라? 깼나?"
"어이, 정신이 들어?"
여전히 안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느껴졌다. 이아네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물..."
"물?"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이아네의 얼굴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갑작스런 물세례에 놀라면서도 이아네는 기쁘게 물을 받아 마셨다. 급히 마시느라 기도에 물이 들어가 쿨럭대기는 했지만, 바짝 마른 식도로 물이 스며드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꽤나 굶긴 모양인데."
"으음, 그 편이 우리로서도 편하긴 하지만."
수분이 몸에 골고루 퍼져 슬슬 귀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고 이아네에게 생명수를 부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닌 것 같았다.
이아네가 눈을 뜨려 노력했지만 이제 물을 조금 마셨을 뿐이었다. 나흘 만에 겨우 입술에 축인 수분은 이아네를 일으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아네가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었지만 시야는 점점 좁아졌다.
"좀 더 자 두라구."
"갈 길이 아직 머니까."
낮게 웃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이아네의 시야가 다시 어두워졌다.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이아네가 든 상자의 뚜껑이 닫혔을 뿐이지만 멍한 정신에 그것을 분간하긴 힘들었다.
그 뒤로도 몇 번씩, 죽지 않을 만큼의 물이 이아네에게 부어졌다. 죽지 않는 정도가 고작이긴 했지만 이아네도 서서히 자신이 어딘가 먼 곳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정신이 들 때마다 이아네는 아직 상자 속에 있었고 바깥은 어둡다가 밝았다가 했다. 덜컹거리는 진동은 이아네의 약해진 몸을 사정없이 굴리며 곳곳에 멍을 남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하루, 이틀, 아니면 일주일?
-덜컹.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진동이 드디어 멎고,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자, 일하러 갈까."
축 늘어진 이아네의 몸을 두 사람이 들어올렸다. 저항할 힘도 남아있지 않아, 이아네는 멍하니 그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빛이 약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실내로 들어온 듯하다. 두 사람은 의자에 이아네를 앉히고 드디어 안대를 풀어 주었다.
"하하, 이런 우연이 있을 줄이야."
"아깝네, 이렇게 귀여운데."
"자초한 거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이상했다.
이아네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기척이 어딘지 익숙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것도 아주 최근에 알게 된 목소리였다. 힘겹게 이아네가 눈을 떴다. 수수한 돌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울어진 머리를 겨우 가누며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또 만나네?"
환각처럼 똑같은 벌꿀색 머리카락. 똑같이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이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오랜만이야, 이아네."
릴로와 딜로, 악성 변태 쌍둥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아네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