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시, 델토르로
이아네가 디날에 머무른 지 그럭저럭 3개월이 조금 지났다.
전쟁의 여파는 이제 완전히 가라앉았고, 민생은 안정되었으며, 무너졌던 성벽이나 군사들의 재정비도 이제 거의 끝나 간다. 슬슬 다시 평화가 찾아오려는 조짐에 맞추어 이아네는 이제 완전히 디날의 생활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리트와의 검술 훈련은 아주 즐거운 일과가 되었다.
리트는 아직 어렸지만 빠르게 성장했고 끈기도 있었다. 한창 클 나이의 운동이란 굉장한 효과를 드러냈다.
본래 입이 짧고 밤잠이 없는 리트가 검술 훈련을 하면서부터 음식을 남긴 적도 밤늦게까지 책을 보는 일도 없어졌다. 덕분에 리트의 유모는 적국에서 온 이 포로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가끔씩 훈련 때 과자나 간식이 보내져 오는 일도 생겼다.
여전히 델토르에 대한 갈망과 제르멘에 대한 충성심은 건재했지만, 이아네는 점점 디날에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레뮤엘까지 이아네의 방에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는데, 동침은 물론 아주 작은 스킨십조차 없었지만 일과가 끝난 후 체스를 두면서 두 사람은 미묘한 유대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이아네는 조용히 디날에서 왕자의 검술 스승으로 생애를 마감했을 것이었다. 그것은 이아네조차 느끼는 강렬한 유혹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 암묵적으로 인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평온은 정확히 3개월하고도 3주째 접어드는 날,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발단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이아네는 어쩐지 성 안이 어수선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아네가 있는 서쪽 탑에는 시녀나 궁관들도 다수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문 밖의 발걸음 소리가 빠르고 급했다.
"...?"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창밖을 내다보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이아네를 찾아올 사람이 없어 놀라 뒤를 돌아보자 문을 열고 펠록스가 들어섰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
"오늘 훈련은 없다."
"...예?"
"오늘 저하께서 바쁜 용무가 있으시다. 불가피하게 수업은 다음 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으니 이번 주까지는 쉬어라."
"아..."
조금 아쉬워진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펠록스는 뭐가 그리 바쁜지 그 말만 전하고 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고 보니 리트를 만나는 것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 일과가 없구나 싶어 이아네는 조금 풀이 죽었다. 티 테이블에 앉아 어제 보다 만 책을 더 볼까 했지만 역시 좀이 쑤시다.
아쉬운 대로 방안에서 간단히 맨손운동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이아네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자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문틈으로 이아네를 지키는 보초들의 말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펠록스가 너무 급히 가느라 문 잠그는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평소 꼼꼼하던 펠록스가 그렇게 부리나케 사라질 정도라면 정말 큰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다음 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음, 그렇다고 해도 좀 빠른데."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아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좀 더 문틈으로 가까이 다가가 귀를 바짝 대었다.
"나랏님이 그렇게 하자고 하면 하는 일이지, 우리 같은 졸병이라고 별 수 있나."
"그렇긴 해도, 안타깝구만. 그 꽃다운 나이에."
"이것 봐, 왕녀 전하도 한참 전에 성인식을 치렀네. 이제 슬슬 가실 때도 되셨지."
왕녀?
이아네는 천천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래,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처음으로 라퓨타에 갔을 때, 압도적인 크기의 드래곤을 강아지처럼 부리던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 분명 그때 처음으로 레뮤엘을 보았었다. 불과 몇 달 전 일인데 아주 오래 전 일인 것처럼 아득했다.
"그래도, 난 그분이 어디 훌륭한 귀족 가문으로 시집가실 줄 알았지."
"하긴 그건 나도 좀 안타깝긴 해. 물론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하필 델토르라니."
이아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문으로 더욱 귀를 바짝 댄다. 디날의 심장에서 델토르라는 단어를 듣다니 신기하고도 어쩐지 불길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디날의 왕녀가 델토르로 시집을 간다는 것 같은데, 그럼 대체 누구에게?
잠시 바깥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아네의 심장이 졸이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 됐을 때, 둘 중 누군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델토르 국왕이 생각보다 좋은 놈이길 바래야지."
눈 앞이 깜깜해져 왔다.
델토르 국왕?
제르멘이? 결혼을? 디날의 왕녀와?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어느 것이든 이아네에겐 죽을 것처럼 괴로운 것들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아네는 서두르지 않고 보초들의 교대 시간을 기다렸다. 펠록스가 그렇게도 바쁜 걸 보니 오늘은 가장 아랫것이라 해도 손을 빌리기 바쁠 것이다. 얌전히 방에 갇혀 있는 포로에겐 신경도 쓰지 않을 테고, 더군다나 문까지 열려 있지 않은가.
이아네는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문을 다시 닫고 때를 기다렸다.
"슬슬 시간이 됐군."
"어어, 그래. 퇴근하라구."
"수고하시게."
일 초가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보초들의 대화가 들리자 이아네는 행동을 개시했다. 다음 교대자가 올 때까지 문 앞의 보초는 하나뿐.
-땡그랑!
갑자기 문 안에서 들려온 쇳소리에 깜짝 놀란 보초가 문을 두드렸다.
"뭐냐?"
"아, 별 것 아닙니다. 꽃병이 떨어져서 엉망이 됐습니다."
"뭐?"
깜짝 놀란 보초가 문을 열려는 순간, 이아네가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죄송하지만 수건을 좀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온 방안이 물바다가 됐군요."
"이런, 쯧..."
보초가 혀를 차며 급히 어디론가 향했다.
발소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쯤 이아네는 재빠르게 밖으로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보초가 돌아오기까지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야 했다.
이아네는 가빠지는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 안의 지리는 대충 알고 있다. 어느 쪽으로 나가야 성의 뒷문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아네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성의 그림자에 숨어 조심스럽게 인적이 드문 복도를 밟았다.
이아네가 운 좋게도 시종들이 사용하는 부엌문을 발견했을 때, 문 저편에는 이제 막 출발하는지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몇몇이 분주하게 짐을 올리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인가?"
"어디보자. 하나, 둘... ...스물. 맞네요."
이아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엌에는 몇몇 시종들이 이른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고, 이아네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야 반대편에 보이는 부엌문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아네가 확 튀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예복을 갖춰 입은 시종들과는 약간 다른 평범한 옷차림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어차피 엎질러진 물. 이아네는 도박을 걸어 보기로 했다.
"저어,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누구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처음 보는 얼굴에 경계가 잔뜩 서린 중년의 남자가 자기 몫의 식사가 놓인 접시를 꾹 쥐었다. 이아네가 난처한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저, 빌리스 씨 소개로 오늘 짐을 옮기러 왔었는데요."
"빌리스 씨?"
이아네는 방 앞을 지키던 보초병 이름을 댔다. 아는 이름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아네에게 경계를 풀었다.
"바쁘긴 했지만 오늘 일은 다 끝난 것 같은데."
"허, 이런... 어머니께 또 혼나겠군."
"젊은 친구가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구선.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오나?"
"길을 잃어서... 헤헤."
이아네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남자는 완전히 경계가 풀린 듯 턱짓으로 식탁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기왕 온 김에 식사라도 하고 가게."
"아, 아닙니다.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어머니께 혼날 거예요."
"나가는 문은 저쪽이니 이번에는 헤매지 말게."
이아네가 다시 멋쩍게 웃고는 급히 부엌문으로 달려갔다. 마차가 덜컹대며 막 출발하려는 참이었다. 이아네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 마차 짐칸에 살짝 매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마차는 성을 나와 포장된 대로를 달렸다. 천천히 멀어지는 성을 보며 이아네는 왠지 모를 희열에 몸을 떨었다.
한참을 달린 마차가 처음으로 멈춘 곳은 케닛 끄트머리의 작은 마을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부는 천천히 모자를 벗고 사환에게 말을 맡긴 후 여관으로 들어간다. 그를 눈 여겨 보던 이아네도 마부를 따라 여관 안으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향하려 했다.
"으읍-"
소리 없이 뒤에서 뻗어나온 손길이 이아네의 입과 코를 한꺼번에 막았다.
짧고도 강하게 이아네를 끌어안은 팔을 온전히 인지하기도 전에, 이아네는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폐하, 왜 그렇게 도망치시는 겁니까?"
서류를 바쁘게 넘기던 손이 뚝, 멎었다. 감정 없이 냉막한 눈이 서서히 우리아를 주시했다.
"무엇에서 도망친다는 건가?"
"왕녀님의 국혼은 경사인데다 상대가 델토르의 스타시아 왕가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잖습니까."
"언제 국혼을 올리든 그것은 디날의 권한이다."
너무나도 지당하신 말씀. 그러나 우리아는 이 정도의 페이스에 말려들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서둘러야 할 일이 아닙니까?"
"......"
레뮤엘의 손이 다시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그 당연한 움직임에 우리아는 오히려 확신이 들고 말았다.
"왜 디날이 패전국 흉내를 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요지는 그것이었다.
베델리어 왕녀의 국혼은 국가적인 경사였다. 게다가 델토르의 스타시아 왕가에 디날 왕족의 이름이 오르게 된다면, 그리고 그녀가 혹여 왕손이라도 낳게 된다면 디날의 세력을 키우는 데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디날이 국혼을 서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디날의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우리아 자신마저도 국혼을 서둘러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가장 먼저 나서야 할 레뮤엘은 계속해서 확답을 미루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저도 마찬가집니다."
쿨하게 우리아의 말을 받아친 레뮤엘이 마지막으로 결재한 서류를 우리아에게 넘겨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델러는 어디 있나?"
"왕자 저하와 함께 후원에 계십니다."
"리트는 지금쯤이면 검술 훈련을 해야 할 시간인데."
"왕녀님께서 친히 알현을 청하셔서 다음 주까지는 쉬기로 했답니다."
잠시 무언가를 계산하던 레뮤엘이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열었다.
"후원으로 가지."
디날의 수도 케닛은 신기한 도시였다. 바다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담수가 솟는 호수가 몇 군데나 있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아마 케닛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맑은 호수는 디날 왕성의 후원에 있는 호수였다. 소금기 때문에 풀이 잘 나지 않는 디날이지만 호수 덕분에 성의 후원은 늘 푸른 잔디가 보드랍게 깔려 있어 철마다 장관을 연출하곤 했다.
어린 왕자나 공주들이 그 호수에서 여름마다 멱을 감거나 큰 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뛰는 것은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것은 어린 리트뿐 아니라 레뮤엘과 왕녀 베델리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고모님, 델토르에 가실 때 모르는 게 있으면 제게 물어보세요."
"어머나, 리트에게?"
"저, 요즘 델토르에 대해 모르는 게 없거든요."
이아네 앞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나긋한 말투와 태도로, 리트는 델러에게 귀여운 거드름을 피웠다. 델러가 쿡쿡 웃으며 리트의 잿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요즘엔 우리 저하께서 델토르에 대해 배우고 있나 보지요?"
"제 검술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가 많이 있거든요."
"검술 선생?"
델러가 고개를 갸웃 했다.
한여름 햇볕은 따가웠지만 나무 그늘 아래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검푸른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나부꼈다. 리트는 부러운 눈으로 제 아버지와 똑 닮은 신비한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문득 리트의 눈이 델러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델러가 리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레뮤엘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아버지-!"
리트가 재빠르게 레뮤엘에게 달려가 안겼다. 레뮤엘이 마주 웃어주며 리트를 안아들었다.
"...오라버니."
"존칭을 쉽게 생략하지 말아라, 델러. 곧 다른 가문의 식구가 될 것이 아니냐."
"...아직도 화가 나 계신 건가요?"
단단히 삐졌군.
델러가 쓴웃음을 지었지만 레뮤엘은 그녀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리트를 내려놓았다.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냉기류를 눈치챘는지 리트는 얌전히 델러 옆에 앉았다.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내가 선택한 길은 아니지."
"......"
델러가 레뮤엘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레뮤엘이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 온 델러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델러의 선택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느끼고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델토르 국왕은 위험한 사람이다, 델러."
"...알고 있습니다."
"나는 적어도 내 하나뿐인 여동생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너뿐이라면 모르지만 그는 네 드래곤도 함께 원했어. 지금이라도..."
"샤사는 제가 달래겠습니다. 어차피 각인이 된 이상 샤사는 저와 함께 가야 해요. 난폭한 아이지만 제가 더 조심하면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델러...“
레뮤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로 스물 셋,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그의 여동생은 올곧고 당찬 눈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시련을 꿋꿋이 견뎌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킹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올라서야 하는 존재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기다리거라."
"...네?"
"....."
레뮤엘은 말없이 리트를 무릎에 앉히고 잿빛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분명 그도 생각이 복잡할 것이다. 나이가 찬 이상 언젠가 시집을 보내야 할 거라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것도 적국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레뮤엘로서는 반가울 리가 없었다.
"...데리러 가겠다."
"......"
델러는 레뮤엘의 눈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를 읽어내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델러가 조심스럽게 레뮤엘의 손을 꼬옥 쥐었다. 약간 떨리는 듯한 손끝에서 그녀의 각오를 읽고서, 레뮤엘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채비하고 있거라. 3주 후 델토르에서 식을 치르게 될 것이다."
"네."
"샤사에 대한 것은, 나도 계속 얘기해 보겠다."
"...네."
거기까지 얘기한 후, 레뮤엘은 리트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착하게도 리트는 칭얼대지 않고 얌전히 레뮤엘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기특한 아들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준 뒤, 레뮤엘은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방에 틀어박혀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델러와 무거운 대화를 나눈 다음날부터 레뮤엘은 무섭도록 빠르게 여동생의 결혼식에 대한 결재를 처리해 나갔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하나뿐인 여동생의 결혼식이다. 레뮤엘은 아낌없이 여동생의 국혼에 국가 예산을 쏟아 부었다. 어디에 비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성대하고 아름답게 준비해 주고 싶었다.
우리아가 제발 쉬라며 서류들을 치워버릴 때까지 레뮤엘은 쉬지 않고 업무에 매달렸다. 덕분에 식에 대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3주라는 짧은 시간에 비하면 기적적일 만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바쁜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 급한 불은 대충 꺼졌을 때에야, 레뮤엘은 겨우 시간을 내어 아들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착하게도 리트는 그 시간 동안 레뮤엘을 괴롭히거나 조르지 않고 유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초췌한 몰골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직 밀린 업무가 조금 남아 있어, 레뮤엘은 겨우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는 데 만족해야 했다.
"고모님이 드레스를 입는 걸 보았는데,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일 겁니다."
레뮤엘이 아무 말 없이 조금 웃었다. 창백하긴 했지만 뿌듯함이 만연한 얼굴이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위해 이 정도 수고쯤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만..."
"다만?"
"요즘 발로아를 만날 수가 없어서 조금 아쉽습니다. 그에게도 자랑하고 싶은데..."
느슨해져 있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았다. 레뮤엘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지만 리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훈련을 일주일이나 못 했는데, 아무런 전갈이 없어서 섭섭했습니다."
"...일주일 동안이나?"
뒷골이 서늘해졌다.
델러가 식을 올리기 전까지 리트와 함께 할 시간을 되도록 많이 가지도록 검술 훈련을 나중으로 미루게 지시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델러도 레뮤엘도 바쁜 지금, 리트는 당연히 펠록스의 감독 하에 이아네의 검술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불길함이 레뮤엘의 심장 한쪽을 억눌러 왔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레뮤엘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쪽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던 발걸음이 두근대는 심장을 따라 빨라졌다.
'제발.'
아프거나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쪽 탑, 이아네가 갇혀 있는 방의 문이 먼발치에서 보이자 레뮤엘은 약간 안심이 되어 발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문 앞에는 생각에 잠긴 펠록스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평소처럼 보초병이 서 있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풍경. 그러나 펠록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레뮤엘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에 스쳐간 낭패감이란!
"폐하, 이렇게 바쁘실 때에 무슨 일로..."
"리트가 일주일째 검술 훈련이 없었다고 하더군.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펠록스가 헛기침을 했다.
불안감이 짙어졌다. 펠록스가 대답을 늦추고 싶어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했고 레뮤엘은 보통 이런 경우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설마, 어디가 많이 불편한 것일까?
"그것이, 곧... 복귀할 수 있을지..."
"그렇게 곤란한 상황인가?"
레뮤엘의 물음에 펠록스는 다시 낭패 서린 눈을 했다. 낮게 한숨을 내쉰 그가 별안간 레뮤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신이 게을러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무슨 일인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문득 레뮤엘의 눈이 이질적인 풍경을 잡아내었다. 어릴 적 했던 틀린 그림 찾기처럼,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의 앞에 부복한 펠록스와, 낭패 서린 눈빛이 합쳐져 점점 불길한 퍼즐을 완성해갔다. 홀린 것처럼 레뮤엘의 발이 움직였다.
"...직접 확인하겠다."
"전하...!"
펠록스의 당황스러운 만류에도, 레뮤엘은 있어야 할 자물쇠가 빠진 문을 밀었다. 끼익, 기름칠한 경첩이 약하게 울며 레뮤엘의 시야에 좁은 속내를 비추었다.
"...이건..."
"...저희가 알았을 때는 이미..."
펠록스가 체념 섞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레뮤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천천히 방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하고 깨끗한 실내. 티 테이블에 놓인 읽다 만 책들과 지난번에 주었던 체스판.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러나 레뮤엘은 이런 기분을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훌쩍 없어져 버린 듯한, 텅 빈 알맹이 같은 기분.
제발 다치거나 아프지만 않길 바랐건만,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 뻔했다.
"언제부터였나."
"사흘 정도 지났습니다."
"...알겠다."
이아네가, 델토르의 포로가, 디날의 왕성에서, 레뮤엘의 곁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 * *
"...으윽."
눈앞이 깜깜했다.
눈꺼풀에 돌을 올려놓은 듯 눈을 뜨기가 힘겹다. 천천히 눈을 뜬 이아네는 후두부를 강렬하게 달리는 고통에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이아네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 온몸의 감각이 천천히 살아났다.
어떻게 된 건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마차에 올라타서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고, 그 뒤 여관으로 들어서려다...
아. 그래, 그리고 정신을 잃었지.
폭신한 매트리스와 어깨까지 덮여 있는 침대 시트가 느껴졌다. 시트는 빳빳하고 잘 말라 있었지만 어딘지 인위적인 세제 냄새가 난다. 여관 안인 것 같았다.
그때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이아네는 의아한 광경을 목도하고 아직도 꿈을 꾸나 생각했다.
"오, 일어났어."
"어, 일어났어?"
이아네는 멍한 머리로 생각을 하려 애썼다. 분명 목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이아네의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두 개의 똑같은 이목구비와 똑같은 벌꿀색 눈. 똑같이 눈부신 금발이 등불에 반사되어 주홍빛으로 빛났다.
완전히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눈동자 네 개가 이아네를 응시한다.
"...누구...?"
"에헤이, 아직 더 쉬도록 해."
"좀 더 누워 있으라구."
천천히 뇌가 가동하기 시작하자 이아네는 드디어 이 기현상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쌍둥이?"
"딩동댕."
"딩동댕."
목소리와 억양과 심지어 타이밍까지 맞춘 듯 똑같다. 이아네는 왠지 빙글빙글 웃고 있는 두 개의 붉은 입술에서 불길함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허, 안 되지."
"...어?"
눈앞에서 흔들리던 두 개의 금발이 하나 없어졌다.
멍청하게 고개를 돌린 이아네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벌꿀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대체 어느 사이에...?
"저기, 우린 '우리 마차'에 왜 당신이 동행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거든."
"예?"
"미안하지만 우리가 무임승차를 싫어해서 말야. 이제부터, 왜 우리 마차에 타고 있었는지 불어 보도록 하실까."
빙긋 웃는 요염한 입꼬리가 악마적이었다. 이아네는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아마 델토르로 향하는 디날의 술통 마차를 운행하는 마부들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아까 그들 중 한 명이 보여준 스피드는 엄청난 것이었다. 아무리 이아네가 막 기절에서 깨어났다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아네는 위험을 감지한 작은 동물처럼 영리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델토르에 연인이 있습니다."
"......"
"......"
완전히 똑같은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본다. 이아네는 그들 모르게 조용히 침을 삼켰다. 잠시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것뿐?"
"예."
"아닐 텐데?"
"맞습니다."
"정말?"
"정말입니다."
"이것 봐, 예쁜이. 솔직해지지 않으면 이 오빠가 그 예쁜 초록색 눈동자로 구슬치기 할지도 몰라요."
오른쪽의 쌍둥이가 부드럽게(?) 이아네를 달래자, 왼쪽의 쌍둥이가 맞장구쳤다.
"그리고 머리가죽은 구슬 주머니로 쓰자."
"오, 좋은 생각이야."
이아네는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사실에 안도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보통 쌍둥이가 아니었다.
"정말입니다. 사실 저는 지난번 전쟁에서 사로잡혀 디날로 귀화한 델토르인인데, 델토르에 있는 연인을 보지 못한 지 오래돼서 그만..."
"그만?"
"디날로 온 지 얼마 안 되서 수중에 돈은 없고... 마침 델토르에서 국혼이 있을 거라는 소식에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죄송하고 염치없지만 부디 델토르까지 좀 부탁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쌍둥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그들의 판단을 기다렸다. 여차하면 덮고 있는 시트를 던져 시야를 차단하고 그 뒤의 문으로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흐응."
"그렇다면."
"좋아."
"예?"
이아네가 눈을 깜박였다.
두 쌍둥이는 서로에게 씩 웃어 보이고는 갑자기 살갑게 이아네에게 다가와 양쪽 팔을 붙들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호오, 이렇게 사랑스러운 피부라니."
"으음, 머릿결도 부드러워."
"귀여운데?"
"저기, 그, 어딜 만지시는..."
슬금슬금 윗옷을 들치며 미지근한 손가락이 옆구리 언저리를 더듬어 왔다. 이아네가 소스라치며 몸을 빼려는데 반대쪽의 쌍둥이가 이아네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히익!"
"흐음, 냄새도 나쁘지 않아."
"감도도 좋고."
"흐으응..."
귓가에서 깜짝 놀랄 만큼 색기 어린 목소리가 흐르자 이아네는 놀라 몸을 퍼득였다. 그러나 이 망할 쌍둥이가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이아네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흔치 않아, 흔치 않아."
"역시 델토르인은 다르군."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아네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어떤 식으로든, 델토르로 가는 길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하긴 했지만 그 수많은 선택지 중에 이런 변태성욕자가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보면 모르겠어? 차비 걷잖아?"
"히, 히이익?"
"셋이서 하는 건 처음이야?"
"괜찮아, 괜찮아. 곧 좋아서 울게 될 테니까."
"시, 싫어엇!"
손가락이 허리춤을 쓰다듬다 바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아네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다 쌍둥이의 발에 걸려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꽈당, 엄청난 소리가 나고서 방 안이 조용해졌다.
"...풉."
"...풉."
"비웃지 말아욧!"
동시에 터진 웃음이 쪽팔린 와중에도 심히 기분 나빠서, 이아네는 빨개진 코를 쥐고 빽 소리를 쳤다. 처음으로 탈출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왜 가는 데마다 이런 식인 걸까. 아픔과 서러움에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순간 쌍둥이들이 킥킥 웃으며 이아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형씨?"
"장난 좀 친 것뿐이야, 예민하긴."
"...씨이..."
여전히 낄낄대는 쌍둥이의 손은 섣불리 잡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이아네의 경계를 알아챈 왼쪽 쌍둥이가 이아네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통성명부터 할까. 난 라일로 아크마르. 릴로라고 불러줘."
"난 데일로 아크마르. 딜로라고 불러."
릴로와 딜로라고 서로를 소개한 둘은 호기심 가득한 벌꿀색 눈동자를 이아네에게 집중했다.
"넌?"
"아... 아아, 저는, 이... 이아네 월터 발로아라고 합니다."
"이아네?"
"이름도 예쁘네?"
이아네의 얼굴이 다시 구겨지자 딜로가 낄낄대며 이아네의 어깨를 쳤다. 손을 내밀었던 릴로가 다시 한 번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해."
"...앗, 네. 저,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엉겁결에 이아네는 릴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레뮤엘의 차가운 손과 비교될 만큼 따뜻한 손이었다.
이아네는 순간적으로 떠올린 레뮤엘의 기억에 스스로 당황하고 말았다. 제 발로 탈출한 주제에 이제 와서 그 손길을 기억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엔 딜로가 이아네의 손을 잡았다. 릴로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손이었다.
"우리야말로."
"...네?"
릴로와 딜로는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더니 이아네를 확 끌어당겨 양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엇?"
"이아네, 완전 우리 타입이거든."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구."
명백히 흑심 가득한 눈, 제 입술을 핥아 올리는 붉은 혀, 엉덩이를 차지게 쥐어 오는 손가락. 이아네는 그제야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쌍둥이와 함께 있다면, 생명을 지킨 대신에 정조(?)가 위험하다!
멍하니 똑같이 싱글거리는 벌꿀색 눈동자를 바라보다, 이아네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디날의 수도 케닛에서 델토르와의 국경인 아델 강까지는 마차로 가더라도 약 일주일이 걸렸다. 술통을 가득 실은 짐마차로 가자니 시간은 더욱 걸렸지만 이아네로서는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그러나.
"이-아-네!"
"우와앗!"
"흐응, 잘 잤어어?"
못 잤다, 네놈 때문에! 이아네가 속으로 부르짖으며 따끔거리는 눈을 비볐다. 아침잠이 없어질 것 같다.
매일 아침 눈을 조금이라도 늦게 뜨면 늘 침대 안에 릴로나 딜로, 둘 중 하나는 꼭 함께 누워 있었다. 기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면 나머지 한 명이 침대 위로 슬슬 기어온다. 아침마다 두 쌍둥이와 전쟁이었다.
결국 이아네는 쌍둥이보다 조금이라도 더 먼저 일어나기로 마음먹었고, 쌍둥이들은 이미 일어나 있는 이아네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 하며 입술을 핥았다.
붉은 입술을 핥는 더 붉은 혀를 볼 때마다 이아네는 입속이 까슬해졌다. 하필 뽑아도 이렇게까지 꽝을 뽑을 줄이야.
그러나 갈 길은 멀고 국혼은 다가오고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아네는 결국 오늘도 두 쌍둥이 사이에 낀 채 길을 떠났다.
"이아네, 델토르인이었다고 했지?"
"예에..."
"흐음, 델토르 어디에 살았어?"
"카토라에 본가가 있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미들 네임이 있었지. 혹시 귀족?"
딜로인지 릴로인지 아직도 구분이 되지 않지만, 쌍둥이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세히 보면 미묘한 부분들에서 차이가 보였다.
그들의 소개로는 딜로가 형, 릴로가 동생인 모양이었다. 형 쪽인 딜로가 아주 조금 더 차분하고, 동생 쪽인 릴로가 아주 조금 더 장난스러웠다. 그러나 둘 다 변태에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하든 이아네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귀족이라기보다는... 아버지가 군인이셨습니다."
"헤에! 군인!"
"히에! 군인!"
놀라는 타이밍도 같다. 똑같이 장난스럽게 치켜뜬 눈썹을 보면서 이아네는 쌍둥이의 신비에 대해 진지하게 감탄했다.
"대단하네에, 그럼 이아네도 군인?"
"우린 그냥 일개 모집병사일 줄 알았는데에."
"예... 뭐."
군인이라기보단 왕실 기사단 소속이었지만. 뒷말을 속으로 삼키며, 이아네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저기, 저기."
"혹시 델토르 왕도 봤어?"
"진짜 그렇게 잘 생겼어?"
"아..."
이아네의 얼굴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제르멘을 떠올리니 다시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그 푸른 눈동자와 흩날리는 결 좋은 은발은 곧 다른 이의 것이 된다.
언젠가 그리 될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갑작스런 전개에 이아네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제르멘이 결혼한단 말인가?
"이아네?"
"이아네?"
문득 이아네가 정신을 차렸다. 두 쌍의 눈동자가 이아네를 똑같이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얘기였죠?"
"델토르 왕을 본 적 있어?"
"...네. 뭐..."
"헤에? 어디서?"
"아... 성 안에서, 몇 번..."
이아네는 누가 듣더라도 특이한 점을 찾아낼 수 없도록 말끝을 뭉뚱그렸지만, 릴로와 딜로가 서로 의미심장하게 눈짓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헤에, 대단하네."
"히에, 대단하네."
뭐랄까, 이 둘은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원래 한 사람이었는데 분신술이라도 쓴 것 같다. 한 사람이었는데 잘못해서 두 사람으로 태어난 건 아닐까. 멍하니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이아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왕녀님은 말이야, 디날에선 유명하거든."
"그야말로 케닛의 진주랄까, 모두가 아낀달까."
"아아... 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라퓨타에서 처음 만났을 때 드래곤의 첫인상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주인의 기억은 흐릿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아름다웠다는 것은 기억난다.
제르멘이 먼저 이 국혼을 제안하진 않았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갈 만큼.
거기까지 생각한 이아네가 문득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응?"
"응?"
"이 국혼, 어디서 추진한 겁니까?"
릴로와 딜로가 서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이아네를 바라본다. 잠시 사이를 두고, 두 쌍둥이가 똑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크핫!"
"뭐야, 이아네! 군인이었다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으음, 그렇지만 난 그쪽도 좋아. 백치미가 있잖아?"
"앗, 하지만 난 요염하게 유혹하는 이아네도 좋을 것 같은데."
어느새 화제가 이렇게 변태스러운 쪽으로 흘러온 걸까. 이아네는 살짝 아파오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쌍둥이들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성적 취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으음, 난 한번 울려 보고 싶더라."
"아, 기분 좋아서 앙앙대며 매달리는 것도 좋지."
"살짝 묶어 보는 것도 색다르긴 한데.“
반쯤 체념한 채, 이아네는 쌍둥이 사이에 끼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냉정하게 순리를 따라가 보면 그다지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라퓨타 전쟁에서 이긴 쪽은 디날이다. 전쟁에서 이긴 디날이 델토르 왕실에 디날의 핏줄을 잇게 하려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델토르의 스타시아 왕가는 외국인을 반려로 맞이한 적이 없었다. 각 지방 귀족의 영애들로 왕의 꽃밭을 채우긴 했지만 타국에서 온 공녀들은 공작이나 후작들에게 하사될 뿐, 스타시아 왕가의 피를 잇는 일은 일절 없다.
물론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 어디까지나 불문율이었지만 그런 가풍에서 자란 제르멘이 타국의 왕녀를 정비로 맞이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이아네 역시 델토르의 안주인이 타국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아네는 외면하고 싶었던 가능성을 슬쩍 들춰 보았다.
레뮤엘이, 이 국혼을 추진했단 말인가?
레뮤엘로서는 평화를 깨고 전쟁을 추진한 델토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깊게 갈 것 없이 펠록스의 반응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전쟁에서 이긴 디날이 뒤탈이 없도록 패전국 델토르와 사돈을 맺는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델토르 왕실에서는 타국의 왕비를 맞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치욕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누가 보더라도 이 국혼은 디날 측에서 추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아네는 어쩐지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것은 어떤 위화감 때문이었는데, 그것만큼은 밤이 새도록 전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디날이 전쟁에서 이긴 뒤 패전국을 속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그 간단한 논리는 당연할 만큼 이해가 되지만 왜 이렇게 납득이 되지 않는 걸까.
"국혼을 추진한 것이, 혹시 디날 쪽입니까?"
"엥?"
"엥?“
둘의 눈동자에 동시에 어이없음이 떠올랐다.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우뚱, 하는 쌍둥이가 소름 끼칠 만큼 똑같아서, 이아네는 다시 한 번 유전자의 신비한 힘을 느끼고 말았다.
"당연한 거 아냐?"
"으음, 혹시 이아네, 우리 생각보다 더 백치였다거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아네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물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자꾸만 치고 올라오는 위화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검을 잡으면서 단련된 육감은 가끔씩 예상치 못한 곳에서 촉을 발휘하곤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그냥... 왠지 이상해서요."
"뭐가?"
"뭐가?"
둘이 동시에 물어보았지만 거기까지는 이아네도 잘 모르는 부분이었다. 일단 생각을 찬찬히 정리하며 이아네가 느낀 위화감을 조금씩 언어로 표현해 본다.
"왕녀 전하가... 아깝지 않으실까요?"
이아네로서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디날에 있었던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이아네는 레뮤엘이 리트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혈육을 아끼는 레뮤엘이라면 이렇게 쉽게 여동생을 내어줄 것 같지는 않다. 레뮤엘이 왕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디날에서 그렇게 평이 좋을 정도라면 레뮤엘도 그녀를 아끼고 있지 않았을까?
"흐음?"
"더 얘기해 봐."
"그, 글쎄요... 더 이상은 딱히..."
릴로와 딜로가 흥미로운 눈을 했다.
"그렇지만 정치란 건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않겠어?"
"이번 국혼은 꽤 디날에 이득이 되니까 말이지."
이아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쌍둥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물게 장난기가 사라진 어리둥절한 눈이 꽤 신선했지만, 어쨌든 이아네는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낸 것 같았다.
"디날에 이득이 된다고 하셨습니까?"
"응."
"그게 왜?"
"......"
이아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 국혼이 왜 이렇게 이질적인지, 왜 이아네에겐 이 국혼이 당연하지 않은지 드디어 알았다.
이 국혼은 레뮤엘답지 않았다. 그는 절대 이득을 따라 움직이는 왕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아네가 아는 레뮤엘은 디날에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행동하는 사람이지만 그 이득을 욕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레뮤엘이라면 앞으로 오게 될 이득을 생각해서 아끼는 여동생을 거리낌 없이 적국의 왕에게 시집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아네도 레뮤엘을 좋아했던 것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 국혼은 너무나 레뮤엘답지 않다.
성을 탈출한 것이 두 번째로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성의 다른 사람들에게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나올 것을, 성급히 행동하고 말았다.
"이아네."
"괜찮아?"
이아네가 문득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쌍둥이가 걱정스레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우린 또, 이아네가 어디 아픈 줄 알구."
"조금 위로해 줄까 했는데."
이아네가 흠칫 놀랐다. 정신 차려 보니 이미 허리는 릴로에게, 어깨는 딜로에게 끌어안겨 있다.
"...으이잇!"
-따악.
릴로와 딜로의 이마가 맞부딪히는 청량한 소리가 울린 후, 마차는 겨우 조용해졌다.
성에서 탈출해, 어딘지 맛이 간 쌍둥이와 마차를 타고 아델 강으로 향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이아네는 드디어 아델 강에 도착했다.
찰박, 하고 뗏목 옆면으로 강물이 치대는 소리가 낯설고도 설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이아네는 마차 포장 바깥으로 흘러드는 그리운 고향의 향기에 울컥 눈물이 났다.
디날에 있었던 시간들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발가벗겨진 채 감금당한 일이라던가 손목을 긋고 투신을 하고, 리트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레뮤엘과 체스를 두었던 일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앞으로 한 시간 후면 델토르였다. 강에서 웬만큼 멀어지고 나면 이아네는 조용히 그리운 델토르의 품 속으로 숨어들 테고, 그럼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델토르에 돌아왔다는 기쁨과 쌍둥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희에 젖어 이아네는 조용히 눈물을 닦아내었다.
-덜컹!
갑자기 뱃전이 어딘가에 부딪힌 듯 세게 흔들렸다. 익숙한 델토르 사투리가 들려오자 이아네는 벅차는 가슴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슬쩍 마차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아네의 심장이 갈비뼈를 부서뜨릴 것처럼 뛰어댔다. 당장 마차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보았다.
마차는 천천히 강에서 멀어졌다.
처음에는 잘그랑대던 갑옷과 무기들의 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뜸해진다. 주변을 살피자 아까까지 흔하게 보이던 병사들이 많이 적어져 있었다. 경계가 느슨한 민가에 도착하면 마차에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아네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릴로와 딜로는 델토르에 도착하면 왕궁이 아니라 국혼이 진행될 릴리타의 광장으로 향할 거라고 했었다.
국혼이 가까워진 것이 한눈에 보였다. 바쁘게 일하는 상인들의 가게에는 색색의 가랜드가 드리워져 있었고 예식에 입고 갈 새 옷을 맞추느라 양장점의 재봉틀이 바쁘게 돌아갔다. 입맛이 썼다.
이아네는 다시 마차의 짐 사이에 쪼그려 앉아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제르멘을 만나고 싶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식이 진행되기 전에 제르멘을 만나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가족들에 대한 향수도 엄청났다. 어머니와 형수, 그리고 조카 에밀.
에밀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리트가 생각났다. 잘 지내고 있을까, 내 건방진 제자는.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갈등이 피어올랐지만 이아네는 마음을 굳혔다. 먼저, 제르멘을 만나자.
릴리타 광장에서 이젤다 성까지 가는 길은 잘 알고 있었다. 성에 들어가는 게 일이긴 했지만 아마 어릴 적 드나들던 개구멍이 아직 있을 것이다.
마침 마차는 번화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물건을 사고팔며 걸음을 재촉한다. 복잡한 사거리까지 왔을 때 이아네는 날렵하게 마차에서 뛰어내려 태연히 인파 속을 걸었다.
마차가 멀어진다. 천천히 마차와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이아네는 잠시 후 완전히 거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제라르 케이 발로아. 델토르에서 태어나 50여 년간을 군인으로서 국가와 사회에 충성봉사하고, 겨우 석 달 전 디날로 귀화한 사내.
그는 지금, 살아서는 절대 밟지 못할 것이다 싶어 이미 마음속에 고이 묻은 고향 델토르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발단은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급히 입성하라는 전갈을 받은 그는 이아네가 성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아네가, 지금 도망쳤다고요? 어디로 말입니까? 대체 어떻게요?"
"그것 때문에 그대를 불렀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가 도망쳤다면 어디로 갔을 것 같은가?"
발로아 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침착하자. 떠올려야 한다. 이아네가 도망친다면, 어디로...?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발로아 경은 떨리는 입술로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생각한 곳을 말했다.
"...델토르입니다."
"당연하겠지.“
레뮤엘이 예상했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국혼에 대한 일로, 나는 내일 델토르로 떠난다. 그 여정에 그대가 함께 해 주어야겠다."
"예?“
내일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듯한 일상적인 말투였으나 그 내용은 절대 일상적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채비한 뒤 내일 아침 일찍 성으로 오도록. 이야기는 해 둘 테니."
"자, 잠시만요. 폐하, 전 델토르인이'었'습니다. 제가 혹여나 델토르에서 도망이라도 친다면..."
레뮤엘이 시선을 돌려 발로아 경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발로아 경이 움찔 입을 다물자 레뮤엘이 느릿하게 물었다.
"디날에 있으면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었나?"
"아니, 아닙니다."
"그러면 돌아가서 채비하도록. 긴 여행이 될 테니."
거기까지 얘기하고 레뮤엘은 몸을 일으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는 함께 마차에 타고 있는 지금도 그의 표정은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발로아 경의 눈에는 어쩐지 레뮤엘이 좌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그는 이렇게도, 자신의 아들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델토르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며 불길한 감정이 발로아 경을 감싸왔다. 인형처럼 제르멘을 그저 바라보며 따르기만 하던 이아네. 그리고 그의 좁은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제르멘.
"...저어, 폐하."
"뭔가?"
이런 것을 물었다간 목이 그냥 날아갈 수도 있겠지만 발로아 경은 확인해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 된 도리로서 지당한 것이다.
"...저, 송구합니다만..."
"뭐지?"
"...제 아들... 이아네를, 왜 찾으시는 겁니까?"
"......“
레뮤엘은 대답 대신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발로아 경은 레뮤엘의 반응을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레뮤엘이 망설이고 있었다.
늘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망설이는 모습은 발로아 경에게 매우 이질적이었다. 혹시, 그의 아들이 뭔가 엄청나게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약간 불안해지려는 찰나, 레뮤엘이 무겁게 반문했다.
"...어떤 대답을 원하나?"
"...예?"
"정치적인 대답과 사적인 대답. 둘 중 어느 것을 원하느냔 말이다."
"......"
이번엔 발로아 경 쪽에서 꿀 먹은 벙어리였다. 설마하니 레뮤엘이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던 터라, 그는 잠시 고민 끝에 누구나 원하는 것을 골랐다.
"둘 다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를 닮았었군."
영문 모르게 피어나는 레뮤엘의 미소에 발로아 경은 얼굴 가득 의문을 띄웠지만 다행히 레뮤엘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외려 좋아졌다고 할까, 한층 밝아진 얼굴이었다.
"그는 성 안에서 특별한 보호감찰 아래 있으면서 디날 왕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이든, 나는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 델토르의 귀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
지당하신 말씀.
너무나 아귀가 잘 맞는 대답에 발로아 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납득이 될 법 하지만 레뮤엘은 소신껏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
"내 아들에겐 그가 필요하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발로아 경이 귀를 세웠다. 허공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레뮤엘의 귀가 아까보다 붉어 보였다.
"그는 성에 있으면서 왕자의 검술 수업을 담당했다. 왕자도 그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데다, 몸도 예전보다 건강해졌지."
괜히 흐뭇해지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발로아 경은 잠시 아들 칭찬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아들이군.
"...나 역시, 그가 마음에 든다."
"...예?"
레뮤엘이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발로아 경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황스럽겠지, 디날과는 달리 델토르엔 남색 문화가 없다고 들었으니. 그러나 레뮤엘은 똑바로 발로아 경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든다, 발로아."
"...저어, 마음에 드신다는 것이 혹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 레뮤엘은 그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이런 사적인 문제에서 거짓을 말하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모른다. 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그를 다시 만나서 확인해야 할 문제다."
"그럼..."
"그를 찾는 건 나 때문이다, 발로아. 그를 만나서 이것이 사랑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발로아 경이 무례하게도 입을 딱 벌렸지만 레뮤엘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언젠가 해야 할 일이다.
"저, 저, 저는..."
"그대의 허가는 필요 없지만, 그래도 역시 협조해 주었으면 좋겠군. 그의 성격상 가족을 핑계 댈 것이 분명하니."
"그, 저, 그러니까..."
"그대가 지고 있는 책임이 막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디날 왕가의 반려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대의 충심을 의심할 수밖에."
명백한 협박이었으나 레뮤엘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겁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생전 처음으로 선량한 사람을 협박할 만큼 레뮤엘은 절박했다.
발로아 경이 충격을 받아 새하얘진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바... 반려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말했다."
"이아네는 허락한 겁니까?"
"...허락하게 만들 것이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쩐지 이것, 아직 사귀지도 않으면서 일단 찾아가 무작정 딸을 달라고 졸라대는 스토커 청년 같지 않은가. 입 밖으로 낸다면 분명히 왕족 능멸죄로 목이 베일 생각을 하며 발로아 경이 생각에 잠겼다.
사람 됨됨이로 보았을 때, 제르멘에 비하면 레뮤엘이 훨씬 나았다. 언제 어떤 돌발행동을 저지를지 몰라 조마조마한 제르멘에 비해 레뮤엘은 앞으로의 행보가 예상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 기대되는 사람이다.
왕으로서는 레뮤엘이 훨씬 훌륭하지만, 연인으로서는 어떨까?
발로아 경은 제르멘과 함께 있던 이아네를 떠올렸다.
그의 손짓 하나에도 얼굴을 붉히며 순수하게 미소 짓던 이아네. 그리고 그런 이아네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제르멘.
마차가 한참 동안 달려 케닛을 벗어날 때쯤, 발로아 경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아네가 갈 만한 곳을 몇 군데 압니다."
그날 밤, 레뮤엘의 숙소에는 밤이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모종의 계약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딸을 달라던 스토커 청년은 순조롭게 목표를 향해 일발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