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돌아갈 수 없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헉-"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이아네가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이아네의 시선 맞은편에서 침대에 앉은 레뮤엘이 보였다. 놀라서 허우적대는 이아네를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다.
"뭐, 뭡니까!"
"내가 내 침실에 있는 게 이상한가?"
"그, 그게 아니라..."
이아네가 주섬주섬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레뮤엘이 조금 웃었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살짝 부드러워진다.
"뭔가 아주 골똘하더군."
"아... 저..."
이아네는 잠시 망설였다. 레뮤엘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지금이라면 물어봐도 괜찮을까?
"...저, 델토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레뮤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약간 두렵긴 했지만 이아네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저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레뮤엘의 눈이 차가워졌다. 뒷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이아네는 애써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보려 노력했다.
"그것이 아니라..."
"그렇군. 너는... 델토르에 연인이 있었지."
뜨끔했다.
레뮤엘이 이아네 앞에서 직접적으로 연인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러나 레뮤엘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화가 나 보였다.
"연인이 보고 싶은가?"
"아... 저어...“
이아네는 왠지 마음을 들킨 듯해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졌다. 묘하게 죄를 지은 느낌이다. 레뮤엘이 무서운 눈으로 이아네를 노려보고 있어서인지, 이아네는 왠지 자신이 지금 엄청나게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한 발짝이라도 잘못 디뎠다간 분명 벼랑이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이 벼랑을 피하는 방법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네."
"...하?"
안타깝게도 이아네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조심스러운 대답에, 레뮤엘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돌아가게 해 달라...?"
"......"
"지금, 네 처지를 알고 하는 말이냐?"
"물론 잘 압니다. 그렇지만-"
"모른다."
깜짝 놀랐다.
레뮤엘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영혼까지 꿰뚫을 듯한 깊은 심청색 눈동자가 이아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넌 몰라. 아무것도."
"지, 진정하십시오. 저는-"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게다."
레뮤엘이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은 처음 보았다. 이아네의 눈이 두려움에 젖어 가자 레뮤엘은 다시 화가 났다. 왜인지 모르지만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갈 곳 없는 분노가 결국 무너져 버린 느낌이었다.
무작정 이아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화들짝 놀라 이아네가 버텼지만 레뮤엘은 간단히 그를 제압하고 침대로 가 이아네를 던지듯이 눕혔다. 이아네가 발버둥쳤지만 레뮤엘은 이아네의 위로 올라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렸다.
"앗, 으읍-"
거친 키스였다.
치아와 치아가 부딪히고, 혀가 목구멍 깊은 곳까지 타액을 적신다. 숨이 막혔지만 이아네는 그의 혀조차 깨물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갑작스런 분노에 놀라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을 질끈 감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레뮤엘의 손이 거칠게 이아네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셔츠의 단추가 투둑, 끊기고 맨살이 드러나기 무섭게 크고 차가운 손이 그 위를 덮는다.
"웃...!"
이아네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자 레뮤엘의 손길이 약간 부드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키스는 거칠었고 손은 차가웠지만 허리께를 거쳐 배를 더듬어 올라오는 손길은 어딘지 조심스럽다.
손바닥을 넓게 펼쳐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올라오던 손가락에 유난히 부드러운 유실이 걸리자, 레뮤엘은 약간 속도를 늦췄다. 엄지를 살짝 세워 유륜 끝을 건드리고 쓰다듬는다.
이아네가 약간 몸을 틀며 낮게 신음했다.
"읏..."
레뮤엘의 입술이 천천히 귓가를 지나 목덜미께로 내려갔다. 더운 날숨을 그대로 드러내며 젖은 혀가 목덜미를 핥았다. 부드럽게 키스하는가 싶더니, 금세-
"아읏-!"
뭔가 날카롭게 물린 통증에 이아네가 신음을 내질렀다.
그러나 레뮤엘은 멈추지 않고 이아네의 목과 쇄골 이곳저곳을 깨물며 흔적을 남겨 갔다. 끊임없이 유륜을 비비고 당기며 유린하던 손가락 근처까지 내려가더니, 혀가 이미 붉어져 단단해진 유실의 실루엣을 덧그려 왔다.
"으, 읏, 잠깐... 잠까...아앗-"
이아네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레뮤엘은 한입에 보드라운 분홍빛을 삼켰다. 타액으로 젖어 따뜻해진 유륜 끝을 혀로 굴리다 살짝 깨물자-
"하으- 그...마안, 앙-"
발음이 무너지며 이아네가 허리를 세웠다.
하얀 날가슴이 퍼득, 위로 솟구치며 레뮤엘의 뺨을 눌러 왔다. 다른 쪽 유륜을 굴리고 있던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어 유실을 당기자 허리가 씰룩 하며 쾌감을 참아낸다.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레뮤엘이 손을 바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헉- 자, 자, 잠... 아, 앗!"
자지러질 듯한 이아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살짝 속으로 미소를 지은 레뮤엘이 반쯤 발기한 성기를 손으로 덧그리다, 벨트를 풀고 바지를 허벅지까지 잡아 내렸다.
드디어 공기 중에 시원하게 드러난 성기가 부끄럽도록 적나라했다.
주책맞게도 본능에 충실한 살덩이는 벌써 배를 찌를 듯 솟아 있다. 레뮤엘이 손가락을 세워 기둥과 고환을 쓰다듬을 때마다 이아네의 남성은 살살 흔들리며 튕겨 올랐다. 그 모든 것이 레뮤엘에게 보여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이아네는 죽고 싶었다.
"...부끄러운가?"
레뮤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아네가 살짝 실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어쩐지 레뮤엘은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손목이 결박되어 자유를 빼앗기고 지금은 레뮤엘 아래 누워 신음을 흘리는 남자에게, 욕정이라니.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아네에게는 뭔가 눈길을 끄는 색기가 있었다.
"아응-"
뿌듯하게 고개를 든 기둥을 손바닥 가득히 쥐어 강하게 쳐올리자 귀까지 빨개진 주제에 야한 소리를 냈다. 질척한 선단에서 벌써 꿀이 흘렀다. 음란한 몸이었다.
'그의 연인도, 봤을까.'
어쩐지 심술이 솟구치는 듯해, 레뮤엘은 살짝 봉곳해져 있는 유실을 깨물었다. 가볍게 유실을 빨아올린 뒤 혀로 굴리며 자극하자 파득, 이아네의 몸이 튕겨 올랐다. 발음이 무너지며 동그랗게 말린 신음이 비강으로 새었다.
"흐으, 읏, 으응-"
"...그에게도, 이랬나?"
"하아, 아...?"
"'제롬'도, 네 이런 모습을 보며 욕정했겠지."
이아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에는 분노와 짜증이 담겨 있었지만, 어째서 그가 '제롬'을 들먹이며 부러 이아네의 약점을 후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아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나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제롬'에 대해 추궁해 왔다.
"그도, 여길 만졌나?"
"으흣, 그, 그만..."
"그도, 네가 이곳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나?"
"핫, 아앙- 잠, 깐... 읏아..."
"깜찍하게도, 돌아갈 생각을 했단 말이지."
이아네의 여름날 잎사귀 같은 눈동자에 드디어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가슴 곳곳을 빨아들이고 깨물며 감도를 높여 가더니 어느 순간 부드럽게 고환을 굴리다가 강하게 기둥뿌리를 쥐어 온다. 무서울 만큼 몸은 본능에 충실했지만 이아네는 거미줄에 걸린 기분이었다.
"흐앗, 앗, 그만-"
"...언제까지 그만하라는 말이 나오는지, 볼까."
레뮤엘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이아네는 경악에 찬 눈을 홉떴다.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부드러운 점막이 따뜻하고도 촉촉하게 이아네의 남성을 감싸 오더니 곧 더운 숨에 삼켜졌다. 이아네의 커다래진 동공에 레뮤엘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건 반칙이었다!
"아, 안... 안 돼에에, 아, 흐읏, 으으응, 하앙-"
혀와 입술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규칙적으로 이아네의 남성을 삼켜 왔다. 말아 문 입술 사이로 적당한 압력이 가해지자 결국 이아네는 허리를 띄우며 농밀한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의 피가 아래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귀두 사이 미끈미끈해진 요도에 뾰족해진 혀끝이 파고들어오자 이아네는 숨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뒷덜미가 서늘해지며 배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심장처럼 레뮤엘의 입 안에서 삼켜진 남성이 둥둥 뛰었다. 레뮤엘이 다시 기둥을 핥아 올리며 기둥뿌리를 꽉 잡아 쳐올리자 이아네가 허리를 떨었다.
"그, 흐윽, 나, 나올 것... 아... 그, 그만, 하응, 안 돼에...!"
레뮤엘이 낮게 웃었다.
이아네의 허리가 가늘게 떨리며 레뮤엘의 입술을 따라 올라왔다. 악다문 잇새로 억눌린 한숨이 샐 때마다 레뮤엘의 혀는 비밀스러운 움직임으로 이아네의 남성을 조였다. 한입에 삼켜 목젖으로 꾸욱 누르는가 하면 귀두 아래 여린 살을 은근하게 쓸어 올린다.
힘을 주지 못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벌려 여린 허벅지를 꽉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안쪽 살을 쓰다듬으며 레뮤엘은 은근히 만족스러웠다.
질척이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이 뒤섞여 뜨거운 화음이 방 안을 맴돌았다. 거의 한계에 다다른 듯해 마지막으로 기둥을 강하게 훑고 입술을 떼는 순간.
"아, 하으응!"
백탁액이 귀두 위로 솟아오르더니 이아네의 배 위로 떨어졌다. 뒤이어 울컥, 못다 한 정해가 다시 한 번 배 위에 흩어진다.
"하아... 하아... 윽..."
잠시 숨을 고르던 이아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사정 후라 나른할 텐데도 조금이라도 몸을 가려 보려 허리를 비튼다.
레뮤엘이 조용히 물었다.
"부끄러운가?"
"다, 당연!...한 거잖...습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귀엽다. 붉어진 얼굴에 정신이 뺏겨, 레뮤엘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귀여운 소릴 하는군."
"......"
이아네의 얼굴 전체에 수치가 차올랐다. 아차 싶었지만 레뮤엘은 그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묘한 오기가 올라온다. 지고 싶지 않다.
-대체, 무엇에?
레뮤엘의 한숨이 길게 이아네의 허리에 뿜어져 내렸다. 약간의 분노와 조금의 오기가 섞여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숨에 이아네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턱을 감싸 쥐었다.
"-내가 제롬이라면."
"......"
"이런 얼굴은 하지 않았겠지."
녹음을 그대로 담아 둔 초록빛 눈동자. 복잡 미묘한 감정이 휘몰아쳐 엉망이 된 그 심연을 들여다보다 레뮤엘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 그 시작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레뮤엘은 이아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돌아가겠다는 말을 한다면."
차가운 목소리가 이아네의 가슴을 후볐다.
"네가 바라던 대로 죽여서 돌려보내 주겠다. '이아네'."
* * *
“..로아. 발로아!”
“..핫.”
문득 정신을 차린 이아네가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덩달아 깜짝 놀란 리트가 눈을 깜빡인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펠록스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냐?"
"...죄송합니다."
이아네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고개를 숙였다. 리트의 보라색 눈이 어딘지 날카롭게 이아네를 훑었다. 그 눈빛에서 익숙한 누군가가 느껴져, 이아네는 어색하게 웃었다.
"돌아가고 싶으냐?"
"예?"
"방으로 돌아가고 싶냐는 말이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물론 이아네가 일곱 살짜리도 알 만큼 어설픈 상태이긴 했지만, 리트의 질문은 확실히 뭔가 의표를 찌르는 데가 있었다. 쓴웃음을 삼킨 이아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괜찮습니다. 그저..."
"그저?"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펠록스의 눈치를 살폈다. 레뮤엘을 통해 대강 사정을 알고 있었던 듯 펠록스는 모르는 척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질 뿐이었다.
"...델토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델토르?"
갑자기 어린 왕자의 눈이 반짝인다. 예상을 벗어나는 반응에 이아네는 조금 흥미가 생겼다.
"델토르에선, 이맘때쯤 등불 축제가 열리곤 하거든요."
"등불 축제?"
"철사를 둥글게 구부려 몇 겹으로 고정한 뒤, 얇은 종이를 바르고 그 안에 작은 등이나 초를 넣어 강으로 띄우는 겁니다. 하늘에는 커다란 열기구가 빛을 밝혀 밤에도 해가 뜬 것 같고, 사람들은 여름 농사와 건강의 안녕을 기원하지요. 연인의 이름을 쓴 등을 띄워 강 하류까지 무사히 흘러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미담이 있습니다."
"오..."
펠록스는 리트의 표정을 살핀 뒤 이아네가 계속 이야기할 수 있도록 두어 걸음 물러났다.
리트의 얼굴이 드물게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어린 왕자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을 안타까워한 것은 펠록스도 마찬가지라, 그는 왕자가 잠시 이국의 축제에 달콤한 꿈을 꾸도록 내버려두었다.
대신 펠록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겼다.
레뮤엘은 대체 이아네를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왕자의 검술 스승이라고는 하지만 성 밖으로 내보내도 충분한 것을, 그는 구태여 왕의 침실에 가두고 그를 '보호'하는 중이었다.
그랬다. 이아네는 '보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레뮤엘의 최측근이긴 했지만 그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권한이 없다. 우리아에게 몇 번 개인적으로 묻긴 했지만 그 역시 모르는 눈치였다.
그의 왕은 온전히 모든 비밀을 끌어안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려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거리로 나가면, 사과에 설탕을 묻혀 굳힌 캐러멜 사과를 팝니다.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아삭거리고, 사과의 과즙과 캐러멜의 달콤함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이 납니다."
"후아..."
"거기까지."
디날의 하나뿐인 왕자가 당장 델토르로 가서 캐러멜 사과를 사달라고 조르는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펠록스는 이아네의 말을 끊었다. 헤 입을 벌리고 이아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트가 퍼뜩 정신이 든 듯 허둥지둥 입가를 닦았다.
"휴식은 여기까지 하고, 진행하도록 하지."
"그럼 나무로 갈까요."
리트의 입술이 대번에 댓 발 튀어나왔다. 구시렁대며 펠록스를 흘기는 품이 깜찍하다. 이아네는 피식 웃으며 리트에게 달콤한 조건을 걸었다.
"저 나무 위로 올라오시게 되면, 델토르 이야기를 더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이냐?!"
"저를 따라오시게 된다면 말이죠."
거기까지 말하고, 이아네는 가볍게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치사해!"
리트의 외침이 나무를 흔들었지만 이아네는 부드럽게 웃으며 리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떻게든 나무를 오르려 버둥거리는 작은 아이가 귀여웠다.
에밀이 생각나서라는 것은 사실 핑계다. 그냥 리트가 좋은 것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지만 근성도 있고, 제 아빠를 닮아 재미없긴 하지만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은 감출 수 없다. 게다가 가끔 철없는 모습을 들킬 때면 부끄러워하는 게 결정적이었다.
리트를 내려다보던 이아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높은 위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위로 올라오면 뭔가 성 밖에 속한 느낌이 든다.
성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롬..."
보고 싶다.
제르멘의 눈도 저렇게 맑은 푸른빛이었다. 다정하고 늘 미소를 머금은 눈이었다. 곤란할 때는 살짝 찡그려지던 눈매가 그리웠다. 가끔 이아네의 위에서 욕정할 때는-
"...윽."
하필 이럴 때.
이아네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하필 이럴 때 레뮤엘이 생각날 게 뭐람. 역시 몸은 솔직했다. 바로 어젯밤에 겪은 그런 '충격적인' 쾌락 따위, 쉽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젠장, 젠장!
배꼽 아래를 간질이며 흔들리던 검푸른 머리카락이 떠나질 않았다. 갑자기 아랫배가 근질거린다. 고환을 훑어 올리던 손가락의 움직임과 선단을 강하게 감싸던 뜨거운 혀의 온도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당황한 이아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래에서 이아네를 올려다보던 펠록스가 주의를 주었다.
"어이, 그렇게 몸부림치면 위험-"
늦었다.
눈앞이 휘청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아네의 시야 가득 초록빛 물결이 요동쳤다. 잠시 멍하니 있었을 뿐인데 쿵 하며 가슴 쪽에 강한 충격이 가해진다. 귓가가 윙윙대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꺽꺽대며 숨을 쉬려 해 보지만 쪼그라든 폐는 공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발로아!"
아프고, 괴롭다.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말 못하는 괴물처럼 힘없이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근육 하나까지 모조리 늘어진 팔로 힘겹게 가슴을 쳤다.
"어, 어, 어떡하지?"
"괜찮습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이, 숨을 쉬어!"
펠록스의 목소리가 윙윙대며 이상하게 작게 들렸다. 컥, 하고 첫 숨이 트이자 폐는 그제서야 조금씩 공기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까지가 정말 억겁처럼 길었다.
"컥... 크읍... 헉, 헉..."
"나 참..."
펠록스가 짧게 혀를 찼다. 리트는 옆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아네와 펠록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귀하게 자란 왕자는 눈앞에서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 좀 괜찮은가?"
"컥... 흐읍... 네, 네에... 헉..."
겨우 말이 트였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이아네가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며 팔꿈치에 힘을 주었다.
"...윽."
방금까지 축 늘어져 있던 근육이 금세 힘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힘없이 다시 바닥에 무너지는 몸이 찡 하니 아려온다.
"...가지가지 하는군."
펠록스가 세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면목이 없어진 이아네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리트는 그 옆에서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조막만 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괜찮은 것이냐? 많이 아픈 것이야?"
"아닙니다. 그저 조금 놀란 것뿐-"
"저하, 오늘은 그만 돌아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발로아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 그, 그래도..."
리트가 울상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당당하고 어른스럽던 꼬마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풀이 죽어 있기에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리트의 잿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저하."
"그치만..."
"제 실수로 떨어진 것입니다. 저하 탓이 아니잖습니까."
"그, 그치만, 내일도 검술 수업이 있는데 선생이 다치면 어쩌자는 거냐."
이아네의 손이 멈칫했다. 펠록스도 움찔하며 왕자의 앙증맞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이 고집쟁이 왕자가...?
"...내일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 정말...?"
"예. 약속드리지요."
"...그럼, 됐다."
리트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아네도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직 숨을 쉬기엔 좀 힘겹지만 아까보단 훨씬 참을 만했다.
"저하께서 돌아가시면 의사에게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도 수업이 있을 겁니다."
"...알겠다. 그럼 내일..."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왕자를 데리러 온 기사들이 먼발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작게 한숨을 쉰 리트를 기사들이 데리고 사라진 뒤, 이아네는 펠록스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섰다.
"...한심하군."
"죄송합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나무에서도 떨어질 정돈가?"
펠록스가 투덜대며 앞장섰다. 그러나 여덟 걸음을 걷고 나서, 펠록스는 다시 뒤를 돌아봐야 했다. 이아네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펠록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나?"
약간 짜증스런 음성에 이아네가 핫 하며 문득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서 허둥지둥 펠록스의 뒤를 따랐다.
햇살에 검게 빛나던 머리통이 성 안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 정원 쪽으로 난 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손 대고 있던 창틀에 손 모양으로 습기가 서려 있었다.
"폐하, 가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까?"
"...할 일이 많군."
낮은 목소리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지만 현명한 집정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조용해진 정원에 금빛 햇살만이 초록빛 잔디를 데운다. 여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이아네는 한숨을 쉬며 옆구리의 붕대를 만져 보았다. 단단할 만큼 잘 감긴 압박 붕대가 금이 간 갈비뼈를 지탱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가벼운 타박상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갈비뼈에 금이 갈 줄이야. 그래도 하나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의사는 절대 안정을 취하라며 신신당부를 하긴 했지만.
"...젠장."
그때 왜 하필 그런 생각이 나서!
머리를 헝클어뜨려 보지만 생각이 가라앉질 않았다. 난생처음 자신의 음란함을 대면한 듯한 느낌이다. 내가 이렇게 야한 인간이었다니!
"...최악이다..."
그러나 이아네에게는 야한 생각을 하다가 혼자 흥분해서 나무 위에서 떨어진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곧, 레뮤엘의 업무가 끝난다.
펠록스가 지나가는 것처럼 이제 곧 정시 퇴근이 가능할 거라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아네는 늘 혼자였다. 하루 종일 레뮤엘과 마주칠 일이 없었으므로 이아네는 괜히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보고 얼굴을 붉힐 일이 없었지만, 이제부턴 이야기가 달랐다.
달이 떠오르는 시간, 이아네는 먼저 자는 척을 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런 일'을 겪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얼굴을 대면할 만큼 이아네는 뻔뻔한 사람이 못 되었다. 젠장, 젠장을 연발하면서 이아네는 다시 한 번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달칵.
"......"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이아네는 어둑한 침대 위로 쓰러졌다.
결국 본능이 이겼다. 이아네는 오늘 밤, 레뮤엘을 모른 척하기로 결심했다.
"...벌써..."
레뮤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더 말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 뒤는 잘 들리지 않는다.
이아네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내쉬려 노력했다. 발걸음이 커질수록 심장소리도 함께 커졌다. 침대 위로 내려앉는 무게가 느껴졌다. 한참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레뮤엘이 천천히 손을 뻗어 이아네의 옷자락을 들추었다.
달빛 아래, 단단히 감긴 흰 붕대가 드러난다.
섬세한 손가락이 살짝 그 위를 쓰다듬었다. 붕대 위로도 선연히 느껴지는 손끝에 뒷골이 서늘해져왔다.
"...하아."
낮은 한숨이 울리고 옷자락이 내려왔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이아네의 허리께에 머물렀다. 이윽고 차가운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간다. 레뮤엘이 일어섰는지 갑자기 침대가 출렁였다.
"...잘 자라."
고요하고도 부드러운 어조였다. 차가운 손이 이아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으며 결을 골랐다.
검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때쯤, 레뮤엘이 드디어 손을 떼었다.
달칵, 다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밤 내내 레뮤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깜박.
잠이 들었었나 보다.
문득 뜬 눈 안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이아네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으로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레뮤엘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그가 오자마자 자는 척을 했고, 그리고 레뮤엘이 문을 나가서는...
아.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긴장해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다.
이아네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흐아암, 하품을 한 뒤 아직도 멍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침은 안심할 수 있었다. 어차피 레뮤엘은 아침에는 이아네보다 훨씬 먼저 방을 나가곤 하니까.
"일어났나."
"우와악!"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이아네는 하마터면 침대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 카우치에 몸을 기대고 앉은 레뮤엘이 한눈에 들어왔다.
"...놀래켰나 보군. 미안하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레뮤엘이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티 테이블 맞은편을 가리켰다. 하얀 손가락은 단호하게 의자를 가리켰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안타깝게도 너무나 확실했다.
"잠시, 앉지."
"...네."
조심스럽게 일어나 발을 디뎠다.
폭신한 카펫 위를 걸어 레뮤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 앉았다. 이아네가 피할 것 같은 기색이 보이지 않자, 레뮤엘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그런 짓'을 저질러서 미안하게 됐군."
...더 이상 돌려 말할 수 없는 직구였지만 이아네는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아네와 레뮤엘 사이의 '그런 짓'이라면 뻔하지만 이아네는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런 민망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흠."
잠시 생각에 잠긴 레뮤엘을 보며 이아네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레뮤엘이 이아네에게 저지른 '그런 짓'은 꽤 되는 편이다. 바로 그제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을 다시 리바이벌하는 것은 더욱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고지식한 왕은 이아네의 예상을 가볍게 웃도는 인간이었다.
"...그렇군."
"?"
"생각해보니, 유감스런 일이 많았군. 어떤 것부터 이야기하면 좋겠나?"
"...아뇨, 맨 처음에 하시려던 말씀이면 됩니다. 다른 것은 잊어버리세요."
제발.
속으로 절박한 한마디를 덧붙이며, 이아네는 벌써 달아오르기 시작한 뒷목을 긁적였다.
레뮤엘은 다행히 이아네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별다른 의견 없이 레뮤엘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알았다. ...이미 일어난 일들은 어쩔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레뮤엘이 잠시 망설였다.
이아네는 조용히 레뮤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레뮤엘은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나 말을 하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는 부류여서 반응이 좀 느려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 다른 방에서 머무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예?"
"더 이상 족쇄는 필요 없으니, 다른 방에 머물러도 좋다는 얘기다."
레뮤엘이 턱짓으로 침대 쪽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손목에 족쇄를 채우지 않았었지. 이아네는 멍하니 자신의 멍청함을 후회했다.
왜 레뮤엘이 방을 나간 뒤, 바로 뒤따라 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절호의 기회였다. 깊은 밤 족쇄도 문도 잠겨 있지 않은 침실에서 감시의 눈 없이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이아네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감췄지만 레뮤엘은 이미 그의 생각을 읽은 뒤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일부러 드러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이아네가 다른 방에 있든 레뮤엘의 방에 있든 달라질 것은 딱히 없었다. 포로가 레뮤엘의 방 밖에 있다고 해도 어차피 디날의 성 안이었다. 그리고 그 성은, 바로 레뮤엘의 소유가 아닌가.
"오늘 검술 수업이 끝난 후에 펠록스가 안내해 줄 거다."
"예..."
"그럼."
"아, 저어."
몸을 일으키려던 레뮤엘이 흥미로운 듯 눈을 치켜떴다. 그래 봤자 아주 약간 눈썹이 올라간 정도지만, 레뮤엘은 이아네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에 충분히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저,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또, 인가.
레뮤엘은 아무 말 없이 이아네의 초록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아네 역시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똑바로 레뮤엘과 눈을 마주쳤다.
"폐하는 제 적국의 왕이십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잘해주는 이유라?"
레뮤엘은 전에도 이아네가 같은 질문을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오늘은 그도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리 적국의 포로라지만 나는 그런 것으로 사람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그렇...습니까?"
그것만으로는 그동안 그가 이아네에게 저지른 이런 거, 저런 거, 그런 거 등등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아네는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1분 동안만.
"...저기, 정말... 외람되지만... 하, 한 가지만 더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말해라."
"...그... 그... 저기..."
이아네의 귀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몸이 달아오르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이거, 물어봐도 되는 걸까?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수 없을 것 같다...!
"...저, 폐하께서는..."
"...?"
"왜... 왜 그렇게 느... 능숙하신 겁니까?"
"......"
왜 저렇게 귀가 빨개지나 했지. 레뮤엘은 예상을 뛰어넘는 이아네의 대담한 질문에 잠시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거야 원, 허를 찔렸군.
레뮤엘이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동안 이아네는 빨개진 얼굴로 다시 폭탄을 던졌다.
"그, 그리고 그게 왜, 하...하필 접니까?"
한 나라의 왕을 앞에 두고 그의 야사에 대해 이렇게 직구로 물어보는 인간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나 레뮤엘은 솔직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정직하게 물어보는 것이 레뮤엘에게는 편한 일이다. 그러나.
"...잘도 사생활을 캐는군."
"앗, 그, 죄, 죄송합니다."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이아네는 눈을 꼭 감고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일개 포로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했으니 지금 당장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런 이아네를 앞에 두고 레뮤엘은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꽤 수상할 만도 하지. '디날'에서 나고 자랐다면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명색이 정비에 적통 왕자까지 낳은 왕인데 어떻게 남색에 대해 그리 밝은지 보통은 궁금한 것이 정상일 것이다.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할 방법이 없을까. 약간 고민한 후 레뮤엘은 머릿속을 정리했다.
"...디날은."
"...?"
"해상 왕국이다."
"......"
생략이 과했군. 레뮤엘은 이아네의 얼굴에 떠오른 커다란 물음표를 발견하고 잠시 자신의 실책을 반성했다.
"배를 타고 나가는 선원들은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항해를 하기 마련이고, 그 긴 항해 동안 욕구를 풀 대상이 필요하지. 보통은 항해 전에 창녀 몇 명을 함께 태우는 방법을 쓰지만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선장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어?"
"처음에는 민간인 여자나 소녀를 납치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연히 법으로 금지시켰지만 그랬더니 납치당한 여자를 죽인 후 바다에 유기하는 일이 일어났지. 더 큰 범죄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시행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남창이었다."
"...에?"
이아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레뮤엘은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사내로서 꽤 수치스런 일이겠지만, 남창이 등장한 후로 여자들의 인신매매나 창녀들의 성병 발병률이 크게 줄었고 약 150년 전부터는 남창 제도가 정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이유로 해서 디날은 동성애에 그렇게 적대적이진 않다. 델토르에선 상당히 터부시되는 것으로 기억하지만 디날에선 실제로 왕의 남첩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그, 그렇지만-"
당신은 정비가 있었잖아요!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눈치 챈 듯 레뮤엘이 엷게 웃었다.
"디날 왕가의 아이들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상대하는 성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뭔가 엄청나게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기, 말하자면-
"그리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지. 대답이 되었나?"
"...아... 네."
"그럼 이만 일어나지. 식사 시간이군."
영혼까지 탈탈 털려버린 이아네를 그대로 둔 채, 레뮤엘이 카우치에서 일어났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문까지 도착한 레뮤엘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리트에게 위험한 짓을 몸소 가르치는 건 삼가라. ...하긴 죽으려면 더 높은 나무가 필요하겠지."
"...예?"
대답 대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썰렁하게 이아네의 귀를 때렸다.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던 이아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으려면'?"
* * *
밤이 깊어가는 서재 안.
희미한 등불이 빛을 밝히는 가운데 혼자 덩그러니 앉은 남자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대고 자는 것처럼 한참 미동이 없던 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고 그가 앉아 있던 책상 아래로 허리를 숙였다.
텅 빈 것처럼 보이던 책상 바닥에 붙은 판자를 옆으로 밀자, 사르륵 소리를 내며 좁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로 비죽이 얼굴을 내민 종이를 손가락 사이로 잡아채 끌어내린다.
손가락에 딸려 나온 종이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편지였다.
유려한 글씨체를 따라 남자의 심청빛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마지막 글자까지 다시 꼼꼼히 훑은 남자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도대체가..."
할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대상도 없는 텅 빈 집무실에서 쏟아놓을 말들은 아니었다.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다시 서랍 안으로 서찰을 숨겼다. 누구에게든 보여서는 안 되는 비밀이 그렇게 다시 잠들자 남자는 이번에는 펜을 집어 들었다.
한동안 집무실 안에는 깃펜이 종이를 긁으며 내는 사각사각 소리만 울려 퍼졌다. 마침내 남자가 손을 멈추었을 때, 먼 곳에서 첫닭 우는 소리가 났다.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남자는 결심한 듯 마지막에 그의 서명을 새겨 넣었다.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
서명을 마친 레뮤엘이 서신을 다시 비밀 서랍 속으로 들여 넣고 눈 사이를 매만졌다.
요 몇 달 무리하긴 했지만 이제 완전히 원래의 업무량으로 돌아왔다. 내일부터는 우리아와 펠록스도 조금은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고생했던 측근들에게 조금 미안함을 느끼며 레뮤엘이 시종을 불렀다.
"침실로 가자."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동쪽 창에서는 먼동이 트기 시작한 옅은 하늘이 언뜻 보였다. 폭신한 카페트에 발소리마저 죽어버려 완전히 고요한 복도를 걸으며 레뮤엘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모퉁이를 두 번 돌고, 저 멀리 호위기사가 선 침실 문이 보이자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순식간에 문 앞에 다다라 기사들이 예를 갖추고 문을 열기까지 사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짧은 시간동안 레뮤엘은 자신이 약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침실 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남향으로 난 커다란 창으로 아침빛이 번지는 장관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레뮤엘은 첫 걸음을 떼는 순간 너무도 명백하게 낙담한 자신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아."
단 한 마디로 충분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늘 보던 풍경, 심지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지친 몸을 뉘었던 곳인데, 너무나 너무나 낯설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델토르의 포로는 바로 어제, 이 방을 떠났다. 다름 아닌 자신의 명령으로.
근 두어 달 간 침실에 들 적마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배어 있던 호흡의 습기. 어렴풋한 온기가 배어 있던 공기는 차갑게 식어 건조하게 떠다닌다.
멍하니 시선을 침대로 돌렸다. 볼록하게 언덕을 이루어 규칙적으로 위아래로 움직이던 하얀 시트는 납작하게 꺼져 잔인하도록 정갈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깔끔, 단정, 질서란 레뮤엘의 생활 습관이었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그는 늘 어김없이 기분이 언짢았다. 겨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하며 안락했던 풍경이, 이제 미치도록 이질적이 되어 있었다.
레뮤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변화에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잠이 오지 않는 머리로 창가의 카우치에 기댄 채 새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아주 한참 후에야, 그는 겨우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정립해냈다.
"...성가시군."
매우, 성가셔.
아주 힘겹게 그 말을 뱉은 뒤, 레뮤엘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이야앗!"
"손목에 힘이 너무 들어갔습니다. 손목이 아니라 어깨와 팔 전체에 힘이 고루 분배되어야 합니다."
"이익...!"
왕자의 검술 수업은 생각보다 꽤 순조로웠다.
일곱 바퀴가 열 바퀴로 늘고, 나무를 타며 악력이 어느 정도 키워졌다 싶자 이아네는 드디어 리트에게 목검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해봐야 대련까지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타격대가 된 대나무 십자가를 백 번 가까이 내리치고 리트가 제풀에 나가떨어지자 이아네는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른 목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단 몇 분 만에 내리치기 백 번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솜씨로 끝냈다. 여기저기 흠집이 난 리트의 타격대에 비해 단 한 군데만 하얗게 벗겨진 대나무 타격대를 보란 듯이 옆에다 세워둔 뒤, 이아네는 리트의 반응을 묵묵히 기다렸다.
"이, 이, 이이이이!"
예상대로 악에 받친 어린아이는 검을 들고 벌떡 일어나 다시 타격대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여전히 지쳐있긴 하지만 어쨌든 결국 내리치기 200번을 채울 기세라, 이아네는 흐뭇하게 한마디 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어차피 자세가 안 잡혀 있으면 천 번을 채워도 소용없답니다."
"허억, 헉..."
리트는 일곱 살답지 않은 독기를 품고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이아네는 다시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옆을 보자 펠록스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얼굴로 이아네와 리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네, 네놈은 정말..."
"예?"
"자각이 있는 게냐? 왕자 저하는 아직 일곱 살이시다."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연한 이아네의 대답에 펠록스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왕자 스스로 해내고 말겠다는 데야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숨을 내쉬며, 펠록스는 시종에게 깨끗한 수건 두 장과 차가운 생수를 준비시켰다.
"헉, 허억, 헉, 컥..."
"잘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쳐도 되겠군요."
"헉, 네놈, 잘도..."
"오늘은 다른 것 하지 마시고 푹 주무시고 유모에게 팔다리를 잘 주물러 달라고 하십시오. 내일은 다른 의미로 좀 힘드실 겁니다."
"히, 힘들까 보냐!"
그러나 이아네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리트를 돌려보냈다. 리트의 잿빛 뒤통수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펠록스가 이아네 앞으로 앞장서 걸었다.
"아직 어린 분인데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분이 걸어갈 길보다는 나을 겁니다."
짤막하게 대답한 이아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펠록스를 따랐다. 할 말이 없어진 펠록스가 살짝 혀를 내두르며 이아네의 방으로 향했다.
지난주에 바뀌게 된 새로운 방은 아직 어딘가 을씨년스러웠다.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침대의 흰 시트는 수수했지만 구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아침까지만 해도 붉은 달리아가 꽂혀 있던 협탁의 꽃병에는 아직 봉오리가 덜 여문 튤립이 두 송이 꽂혀 있었다.
"지낼 만은 한가?"
"예, 나쁘진 않습니다."
포로 주제에 건방진 대답이긴 했지만 펠록스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요 며칠 이아네를 지켜본 결과 그가 거짓말을 못 할지언정 나쁜 뜻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펠록스가 문을 닫고 열쇠로 바깥에서 자물통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도 역시 이아네는 감금 상태나 마찬가지다. 하긴 적국의 포로를 성 안에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손목이 묶이거나 굶거나 고문을 당하고 있지는 않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답답하긴 했지만 이아네는 일단 그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방 안을 둘러보다 조심스레 침대 위로 앉는다. 침대 옆의 협탁에는 어김없이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마치 미취학 아동이 시간이 지나며 더 어려운 학문을 익히는 것처럼 이아네에게 주어지는 책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어려워져 갔다.
오늘 읽을 책은, 그러니까... 이아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용한 상식 시리즈... 나이트 테크닉?"
뭔가 사람을 굉장히 당황시키는 제목이었지만 다행히도 이아네가 상상한 그런(?) 책이 아니라 사위가 보이지 않는 밤에 유용하게 쓰이는 부싯돌 보관법이나 간단히 수제 램프를 만드는 등의 기술서였다.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아네는 자기가 생각한 것이 부끄러워서 책을 읽는 내내 때때로 얼굴이 붉어졌다.
레뮤엘과 한방을 쓰지 않으니 확실히 얼굴 볼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레뮤엘의 손길과 호흡은 지워지지 않고 이아네의 귓가를 간지럽히곤 했다. 가끔은 너무 자극적인 회상에 스스로도 놀라 아무도 없는 주변을 멋쩍게 둘러보는 일도 있다.
"...윽."
애써 책에 집중하려다가도 이아네는 이미 열기가 몰리기 시작한 하반신에 결국 책을 덮고 말았다. 아아, 이걸 어떡해야 하나.
하긴 관계는커녕 자위를 한지도 꽤 되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아네는 문이 잘 잠겨 있는지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다리를 벌리고 편안하게 눕다시피 앉는다. 허리띠가 풀어지고 살짝 바지를 내리자 반쯤 단단해진 남근이 튕겨 오르며 이아네의 손을 쳤다. 살짝 스치는 뜨끈하고 부드러운 감각에 이아네는 약한 날숨을 내쉬며 시트 안에서 뿌듯하게 솟은 기둥을 찬찬히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아...하으..."
부드럽게 위아래로, 간헐적으로 거칠게. 기둥을 감싸 쥔 손이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자 거침이 없었다. 포피를 스치는 감각이 허리 깊숙이까지 간질이며 야릇한 열기를 피웠다.
"웃..."
손에 힘을 주어 강하게 쳐올리자 짜릿하게 척추를 울리는 느낌에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자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귀두 바로 아래까지 부딪혀오는 마찰에 숨을 들이키며 신음을 참았다.
이아네의 손이 빨라졌다. 좀 더, 좀 더 강한 쾌락이 필요하다.
"아응, 으..."
손가락이 제멋대로 고환을 지나 항문의 오그라든 주름을 매만졌다. 꼭 다문 분홍빛 입구가 민감하게 움찔거렸다.
처음에는 주름을 하나하나 펴는 것처럼 문지른다. 통통한 소시지처럼 탄력 있는 입구가 손가락에 밀려 이리저리 치이다 결국 살짝 입을 벌렸다. 그 사이를 손가락이 스친다.
"아하응...!"
신음소리가 약간 커진 것 같아 이아네는 자세를 바꾸어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소음은 한층 줄어들었지만 뜨거운 숨결이 그대로 얼굴에 닿는다.
"응, 윽..."
기둥을 잡고 흔들며 자기도 모르게 마구 주름을 문지른다. 뜨겁게 엉덩이 사이를 비벼대던 철주, 부드럽게 휘어지며 이아네를 열락으로 안내하던 푸른 하늘같은 눈동자.
"아아...제롬...앗..."
손놀림이 빨라지며 고환이 흔들리는 소리와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함께 울렸다.
엉덩이를 높게 치켜 올리고 달뜬 한숨을 내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입구로 손가락이 침범했다.
생소한 이물감도 잠시, 손가락은 곧 둘이 되고 셋이 되면서 질척한 소리를 끄집어낸다. 숨 막히도록 기분이 좋아, 이아네는 낮게 헛기침을 하면서도 손목을 멈추지 못했다.
"하아, 아, 앗... 으응, 조.... 아앙, 더, 더..."
손목에 힘을 주어 어느 지점을 쿡, 찌르는 순간 이아네의 머릿속에 얕은 불꽃이 튀었다.
"하앗-"
손가락을 쉼 없이 움직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여전히 신음소리는 죽인 채였지만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는 점점 박자를 빨리해갔다.
꾹꾹 손가락이 민감한 곳을 누르고 문지른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귓가에 들리는 거친 숨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환청인지 애매하였다.
"헉- 아하응... 더..."
깊게, 더 깊게!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충족되지 않은 꽃잎이 불만스레 벌름거렸다. 더 굵고 뜨겁고, 그리고 더 길고 단단한, 무언가가-
'이아네.'
상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달큼하게 흘러들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달콤하고 아련하며 욕정이 가득한 목소리.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이아네의 전립선을 비비고 문지르는 동안, 이아네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목소리에 범해진다.
"아읏, 그, 마안... 아, 가...가앗...!"
헉, 하고 큰 숨을 들이쉬는 순간 이아네의 머릿속이 싸해지며 척추가 꼿꼿해졌다. 간질간질하던 배 깊은 곳에서 쾌락이 터지며 이아네의 손바닥에 흰 백탁을 뿌렸다.
"헉... 하아... 하..."
잠시 숨을 고르던 이아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시트가 더럽혀지지는 않았지만 이아네의 표정은 안도보다는 경악에 가까웠다.
"...맙소사."
베개에 고개를 묻은 이아네가 자책하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지막 사정하는 순간, 이아네의 머릿속에서 그를 범하던 얼굴은 부드러운 벽안이 아닌 꿰뚫는 듯한 심청의 눈동자.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분명히 이아네가 최근에도 들었던 목소리였다.
이아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다시 중얼거렸다.
"어째서...?"
절정의 순간 들렸던 레뮤엘의 목소리에 이아네의 얼굴 위로 혼란이 드리워져 갔다.
* * *
펠록스는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으으으아!"
원래 아이들은 빠르게 배우고 빠르게 큰다곤 하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펠록스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 위, 이아네가 앉은 가지를 쳐다보았다.
리트가 나무타기를 정복한 것은 일주일 전. 얼굴이 빨개진 채 의기양양하게 펠록스를 내려다보던 반짝이는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이아네는 지치지도 않고 다음 도전을 준비해 놓았던 모양이었다.
다음날 밧줄을 구해달라기에 무엇을 하려나 보았더니 이젠 밧줄만으로 나무를 오르게 한다!
이것만큼은 리트도 조금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계속 수련한 성과가 나타나는지 리트는 다시 열흘 만에 이아네의 발치에 닿을 만큼 성장했다.
"잘 하셨습니다."
"헉, 헉..."
온 얼굴이 빨개져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면서도 리트는 반짝이는 눈으로 펠록스를 내려다보았다. 펠록스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리트는 다시 이아네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자, 약속은?"
"지켜야지요."
흐뭇하게 웃으며 이아네는 리트를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웠다.
"으, 으아아아?!"
"꽉 잡으십시오."
태연하게 말한 이아네가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나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려왔다.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 손바닥이 다 까졌을 것이다.
펠록스는 허겁지겁 이아네에게로 달려와 리트를 받아 안았다. 겁이 잔뜩 묻은 보랏빛 눈동자가 넌 내가 죽이고 만다는 듯 이아네를 쏘아본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미리 말씀드리면 제게 순순히 안기실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 이이이이!"
"그럼 약속을 지키러 가시죠."
이아네는 분명히 아이들을 다루는 것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자존심을 벅벅 긁긴 하지만 이 콧대 높은 왕자는 결국 이아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마는 것이다. 리트가 왕성 내의 모든 귀족과 고관대작들을 질리게 만들었던 걸 감안하면 이아네는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델토르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펠록스는 혼자 생각하며 리트와 함께 걷는 이아네의 등을 쳐다보았다.
이아네가 레뮤엘도 펠록스도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어린 리트에게만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상하게 굴었다. 레뮤엘이 모든 보고를 받고 있긴 했지만 만일 리트와 이아네가 어떤 식으로 농담을 주고받고 장난을 치는지 눈으로 본다면 그 철혈의 왕이라도 눈썹을 치켜뜰 것이 틀림없었다.
"헤에, 이쪽에 침실이 있었나?"
"와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내 방은 동쪽이니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놀랍게도 이아네의 침실이었다. 밧줄타기를 정복하면 어떤 보상을 줄 것인가로 이아네와 리트 사이에 일대 회담이 이루어진 후, 이아네가 나무를 깎아 오르헴을 만들어 주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디날에서는 오르헴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해상무역 왕국에서는 칼이나 화살에 맞아 죽을 일보다 바다에서 좌초되어 행방불명될 일이 더 많다. 그래서 나중에 해안으로 떠내려 올 때 신원확인이 가능하도록 이름과 출항 날짜, 나이, 주소를 적은 나무 명패에 타르를 칠해 목에 걸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아네가 델토르의 오르헴에 대해 이야기해 줄 때 리트는 그 드라마틱한 실용성(?)에 마음이 뺏겼던가 보다. 납 부적을 심장 부근에 두어 화살이나 검을 막아준다니 이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그 순수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에 이아네는 결국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기사라 조각칼을 다루는 데는 소질이 없습니다."
"알고 있다."
"이상하다고 내치셔도 저는 다시 만들어 드리지 않을 겁니다."
"알았다니까."
이아네는 난감한 한숨을 내쉬고 손바닥만 한 단풍나무 목판에 조각칼을 대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리트는 이미 목재와 조각칼은 물론이고 사포까지 전부 최고급으로 갖춰 놓았던 것이다. 조각을 하는 장인이 최고급이 아니어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리트에게는 그게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목재가 셔츠의 가슴주머니 모양으로 깎여 나가고, 투박하지만 조심스럽게 사각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이아네의 방안을 울렸다.
눈을 반짝이며 이아네를 바라보는 리트의 뒤통수는 영락없이 일곱 살짜리 꼬마의 그것이라, 펠록스는 그 기묘한 광경을 그대로 가져다 레뮤엘에게 보여주고 싶어 좀이 쑤셨다.
"일단 기본적인 모양은 잡혔고, 뭔가 새기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응?"
"일반적으로는 가문의 문양을 새기곤 합니다만 연인의 이름이나 존경하는 이의 이름을 새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오!"
리트가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시간이 꽤 걸렸지만 이아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마침내 리트는 첫 번째 오르헴에 새겨질 문양을 생각해냈다.
"그럼, 바다 잎사귀로 해줘."
"...네?"
"이런 느낌으로."
리트가 깃펜을 잡고 잉크를 묻히더니 종이 위에 나뭇잎을 그리고 그 배경으로 구불구불한 물결을 그렸다. 물 위에 떠다니는 나뭇잎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아 이아네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뭡니까?"
"바다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거다. 디날은 해상 무역 왕국이고 아버지는 디날 그 자체니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위의 잎사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징이라 이아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 잎은...?"
"그건 너다."
"아, 저였군요. ...네?"
이아네뿐 아니라 펠록스까지 깜짝 놀랐다. 리트는 의기양양하게 이아네를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눈이 잎사귀 색이니까."
"...아."
"...아."
두 사람 분의 탄성이 동시에 터졌다. 리트는 의기양양하게 모양이 잡힌 오르헴 위에 깃펜으로 이아네가 새기기 편하도록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은 손이 사각사각 거친 목판 위를 스칠 때마다 이아네는 어딘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린 제자는 착하게도 이아네를 스승으로 인정하고 오르헴에 그를 가르친 이를 새기고 있는 것이다.
검은 잉크를 따라 서툴게 조각칼이 지난다. 거칠고 투박하긴 하지만 바다 물결 위의 잎사귀가 완성되자, 리트는 신이 나서 셔츠 가슴주머니에 오르헴을 넣었다 뺐다 하며 즐거워했다.
리트는 오르헴이 완성된 후에도 한참을 이아네의 방에서 놀다 식사 시간이 되어 겨우 방을 나섰다. 조그만 잿빛 뒤통수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서야, 이아네는 어딘지 모를 감동에 조금 울고 말았다.
"...뭐라고?"
"그가 왕자 저하께 오르헴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펠록스의 예상대로 레뮤엘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는 않았지만 레뮤엘이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라는 것은 그의 찌푸린 미간만 보아도 쉽게 짐작이 가능한 것이었다.
"...포로의 방이 어디라고 했지?"
"서쪽 탑 2층입니다."
"...용케 거기까지 데려갔군."
퉁명스럽긴 했지만 펠록스는 그가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레뮤엘은 포로의 생각지 못한 재능-아이 돌보기-에 완전히 탄복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까다로워 유모와 보모를 다섯이나 두었던 아이다. 어머니 없이 오해 속에서 자라다 보니 믿을 사람은 오로지 아버지 레뮤엘뿐. 그토록 까다롭고 의심 많은 아이가 다른 이에게, 심지어 타국인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알았다."
무엇을 알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펠록스는 지금이 입을 다물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슬슬 그도 퇴근할 시각이었다. 펠록스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아주 오랜만에 집에 돌아가 부모님과 아내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오후였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질 때쯤, 마지막 공문에 결재를 마친 레뮤엘이 드디어 집무실을 나섰다. 시종이 냉큼 그 뒤를 따라붙었다.
시종은 당연히 레뮤엘이 침실로 갈 거라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뒤꿈치를 밟으며 걸었다. 그러다 문득 땅거미가 지기 직전의 햇빛이 정원을 비추는 것을 보고 멍하니 생각했다.
'이상하군. 평소엔 해가 지는 게 보이는데 말야... 오늘따라 침실로 가는 길이 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잠시 후, 시종은 레뮤엘이 침실이 있는 남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정말 깜짝 놀랐다.
궁의 서쪽은 보통 잡일을 맡는 시종들이나 하인들, 시녀와 궁관들이 기숙하는 곳이었다. 지체 높은 귀족이나 하물며 국왕이 직접 발걸음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시종의 경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뮤엘은 묵묵히 걸었다. 서쪽 탑에 도착해 화강암 계단을 두 번 거치자 다른 방보다 조금 특이한 방이 눈에 띄었다.
겉으로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방이었다. 다른 방과 다른 것은 평범한 나무문으로 굳게 닫혀 자물통이 걸리고, 병사 둘이 창을 들고 앞을 지키고 있다는 것뿐.
병사들도 레뮤엘을 알아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단 병사 신분으로는 평생 가야 한 번 얼굴을 직접 알현할까 말까한 국왕이라, 병사들은 어쩔 줄 모르고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명령을 기다렸다.
"델토르의 포로는 이쪽인가?"
"예, 옛!"
제대로 찾아왔군.
레뮤엘은 우아하고 단호하게 턱짓을 했다. 병사가 달달 떨며 자물통을 끌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빗장이 벗겨지고 서서히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체향이 풍긴다. 어딘지 가슴이 뛰는 그 향기에 레뮤엘은 지체하지 않고 방 안으로 걸음을 두었다.
작고 단순하지만 아늑한 방 안에 놀란 초록빛 눈동자 한 쌍이 레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놀란 눈은 또 처음이라 레뮤엘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했다. 어쩐지 어릴 적 레뮤엘의 질문에 허를 찔린 역사 선생을 놀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멍하니 레뮤엘을 바라보고만 있던 이아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작군."
뜬금없는 대답이었지만 레뮤엘은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얘기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왕의 침실에 비한다면야 훨씬 작고 좁은 것이 당연하지만 레뮤엘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다. 왜냐하면.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쭈었습니다만."
"......"
대답할 말이 없어서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레뮤엘은 화제를 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만족하나?"
"...네. 제겐 오히려 과분할 정도입니다."
"다행이군."
그렇게 대답하고 레뮤엘은 이아네가 쓰는 침대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체향이 더욱 짙어졌다. 왕의 침실과는 달리, 아랫것들이 쓰는 침실이라 이부자리가 매일 바뀌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저어, 송구하지만-"
말 안 해도 안다. 이아네의 눈은 이제 약간의 의심을 담고 가늘어져 있었다. 레뮤엘은 이아네의 변화를 재빠르게 눈치 채고 이아네가 묻기 전 선수를 쳤다.
"리트에게."
"?"
"뭔가를 만들어 줬다고?"
"어, 아아, 네."
이아네는 멍청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아랫것들의 숙소까지 걸음 하시다니, 아들 사랑 하나는 정말 끔찍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어쨌든 거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말씀드려야지 별 수 있나 싶어 이아네는 말을 이었다.
"저하께서 오르헴을 가지고 싶어 하셨습니다. 대장장이를 시키라고 해도 꼭 제게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
"그런가."
"만드는 김에 원하는 문양도 새겨 드리고..."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레뮤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문양?"
"...별 건 아닙니다."
이아네는 조금 망설였다. 어떤 문양인지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상징을 말하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다.
...따지고 보면 이 방 안에 둘 다 있지 않은가.
"바다... 잎사귀였습니다."
"바다 잎사귀...?"
레뮤엘이 이아네의 말을 되씹었다.
레뮤엘로서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디날 왕가의 문장은 왕관을 둘러싼 푸른 고래 두 마리였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리트도 디날 왕가의 문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 아닐 터, 이 수수께끼는 레뮤엘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안겨주었다.
"그게 무슨 뜻-"
"이제 돌아가셔야 할 시간 아닙니까?"
레뮤엘은 좀 의아스럽다는 듯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분명 레뮤엘이 먼저 말머리를 돌렸지만 지금은 확연하게 이아네가 화제를 돌렸다.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에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알고 있나 보군."
"밤이 늦기 전에 침실로 드셔야 펠록스 님도 안심하실 텐데요."
더욱 의심스럽다.
생전 입에도 올리지 않던 펠록스의 안위를 걱정하는 품이 묘하게 귀여워서 레뮤엘은 조금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
"크로이."
"예, 전하."
문 밖에 서 있던 시종이 공손히 대답하기 무섭게 레뮤엘이 폭탄을 떨구었다.
"가서 가운과 체스를 가져오너라. 오늘 밤은 여기서 침수하겠다."
"예."
"예?"
과연 뼛속까지 왕의 시종장으로 살아온 이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문을 나가는 태연한 뒷모습은 나가서 죽으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무게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아네는 다르다.
"무, 무슨 말씀을...!"
"말 그대로다."
"그, 그게 아니라,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라퓨타에 체류했을 때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그, 음, 그러니까... 어, 어째서 여기서..."
순간 레뮤엘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피어오르며 한 톤 낮아진 목소리가 달콤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그대에게, 끝나지 않은 용무가 있지."
"!"
순간 이아네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설마?
며칠 전에 했던 은밀한 상상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상상 속에서도 선명하던 숨결과, 가장 비밀스런 곳을 거침없이 범하던 뜨거운 철주가 연달아 이아네를 괴롭힌다. 거기다-
'이아네.'
터지기 직전의 욕망과 일그러진 정복욕으로 얼룩진 목소리. 아랫도리에 확 피가 몰리는 것 같아 이아네는 레뮤엘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이 빨갛군. 더운가?"
"아, 아, 아, 아닙니다!"
아차.
필요 이상으로 너무 높아진 목소리는 삑사리를 내며 상황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뮤엘은 평소의 건조한 표정으로 이아네를 빤히 바라본다.
"전하, 명하신 것들입니다."
마침 시간을 맞춰 들이닥친 시종장이 아니었다면 이아네는 정말 얼굴이 터져버렸을지도 몰랐다. 레뮤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로이의 시중을 받으며 나이트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사르락 소리를 내며 피부 위를 감싼 실크가 보기 좋게 몸매를 드러내자 이아네는 이제 눈을 둘 데가 없어졌다.
"왜 그러는 거냐?"
"아니, 아무것도..."
"...몸이 안 좋은가. 할 수 없군."
레뮤엘이 약간 아쉽다는 듯 직접 등을 껐다. 갑자기 어두워진 방안에 이아네가 더 놀랐다.
"부, 불은 왜 끄십니까?"
"? 몸이 안 좋은 것 아니었나?"
"그, 저, 딱히 안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어, 그러니까..."
이아네가 허둥대는 꼴을 딱 3초간 참고 바라봐준 레뮤엘이 이아네의 두서없는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체스라도 둘까 했는데,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쉬도록 해라."
"...앗."
거짓말처럼 이아네를 괴롭히던 붉은 기운이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체, 체스! 그래 맞다, 아까 나이트가운뿐 아니라 체스도 가져오라고 했던 것 같다. 왜 그 말을 못 들었지?
이아네가 남몰래 자책하는 동안 레뮤엘은 침대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혼자서 자기엔 충분히 넓지만...
"눕거라."
"어, 음, 네."
이아네는 허둥지둥 침대로 가서 누웠다. 완전히 내려앉은 어둠 속, 어슴푸레하게 봉긋 솟은 시트가 이상하리만큼 귀여워서 레뮤엘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가운을 한번 여민 후,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이아네가 벌떡 일어났다.
"?"
"여, 여, 여기서 주, 주, 주무시는 겁니까?"
"...왕을 바닥에서 재우려 하다니 포로 주제에 건방지군."
"아니, 아니, 저, 소, 송구합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바닥으로..."
"시끄러우니 그냥 눕도록. 할 말이 더 있다면 내 침실로 다시 옮겨 주겠다."
"......"
이아네가 얌전히 입을 다물더니 시트를 덮고 누웠다. 레뮤엘은 소리 죽여 웃고서 이아네의 옆에 누웠다. 매트리스는 딱딱하고 침대보도 까슬했지만 왕의 침대보다 폭이 좁아 바로 옆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레뮤엘은 만족스럽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른 저녁시간이지만 그동안의 업무 스트레스와 과로로 뭉쳐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저어."
달이 떠오를 즈음, 갑자기 이아네의 목소리가 좁은 방을 울렸다. 살짝 선잠에 빠져 있던 레뮤엘이 귀를 열었다.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지만 레뮤엘이 들을 거라 생각한 것 같지는 않았다. 평소 그의 목소리보다 부드럽고 나긋하다. 잠결에도 느낄 수 있었다.
이아네는 '국왕'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레뮤엘'에게 말하고 있었다.
"...왕자 저하께서...총명하시더군요."
"......"
어둠 속인데다 레뮤엘은 등을 돌리고 있어 반응을 알기는 힘들었지만, 이아네는 듣든 안 듣든 말을 이어 갔다.
"다시... 검을 잡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아네는 어쩐지 뿌듯해져서 조심스럽게 침대 끄트머리 쪽으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한참 후 이아네의 숨소리가 규칙적이 되자 레뮤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슴푸레한 침대 위, 불편하게 침대 끝 쪽에 누운 동그란 인영을 보고 얕게 한숨을 쉰다.
잠시 고민한 후, 레뮤엘은 잠든 이아네의 허리를 끌어당겨 침대 가운데로 끌어 왔다. 달빛 아래 무방비로 잠든 단아한 얼굴이 드러난다. 살짝 여윈 턱선을 쓸어 보다 레뮤엘이 낮게 속삭였다.
"...고맙다."
아치형의 작은 창문 너머 깨끗한 반달이 빙그레 웃었다. 그날 밤의 달빛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다음날도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레뮤엘이 없는 것을 보고 이아네는 왠지 모르게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펠록스와 리트를 만나러 갔다. 목각 오르헴을 가슴주머니에 당당하게 차고 온 리트가 너무 귀여워서 이아네는 속으로 조금 웃으며 리트를 평소보다 조금 더 놀려먹었다.
몸과 마음(!)이 망신창이가 된 리트가 시간이 다 되어 찡찡대며 떠난 후, 방 안으로 돌아와 비로소 혼자가 된 이아네는 티 테이블에 앉아 책도 읽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하는 데 골몰했다.
그래, 솔직해지자.
그가 이아네에게 난폭하게 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정치적인 부분을 떼어 놓고 보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만 본다면 이아네도 레뮤엘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어."
문제는 그것이었다.
이아네가 아무리 디날의 왕성 깊숙한 곳에서 레뮤엘과 숙식을 함께 한다고 해도 그는 델토르의 사람이었고 제르멘을 충심으로 모시던 기사였다. 레뮤엘의 호의는 고맙지만 그런 호의에 넘어가 조국을 배신할 정도로 이아네는 비겁하지 않았다.
델토르의 기사가 델토르를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 근래 성에 머무르면서 알게 된 여러 가지 디날의 사정들은 다들 깜짝 놀랄 만한 것들이었다. 잘하면 델토르로 돌아간 후 디날의 꼬리를 잡아 국격을 떨어뜨릴 만한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런 짓을 하고 싶진 않지만 제르멘이 원한다면 이아네는 입을 열 것이다. 그러나 레뮤엘에게 받은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아네는 괜히 마음이 찔렸다.
그런 자신의 이중성에 잠시 놀라, 이아네는 머리를 싸쥐었다.
'네가, 리트에게 그런 말을 했나?'
'체크메이트.'
'웃기도 하는가?'
'그건 젓가락질이 아니다.'
'왕을 쓰러뜨린 건 너다, 이아네.'
처음으로 이아네가 체스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던 밤에 가볍고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입맞춤과, 그렇게 냉막한 얼굴을 한 주제에 아들 얘기에 소리 죽여 킬킬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아네는 자신의 두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 어떤 족쇄도, 아무런 구속도 없다.
만일 하려고만 한다면 조용히 성을 빠져나가는 것도 가능할 수 있었다. 지금의 이아네는 누가 보아도 델토르에서 붙잡혀온 포로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을 꿰뚫어볼 것 같은 심청색 눈을 떠올리자 얼굴이 붉어졌다.
제르멘 외의 남성에게 그런 식으로 닿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르멘도 물론 이아네를 만지며 욕정하곤 했지만, 레뮤엘은 뭔가 이상했다.
엄밀히 따지면 제르멘 쪽이 훨씬 부드럽고 능숙하게 이아네를 다루었다. 그 손길에는 늘 여유가 배어 있었고 귓가의 목소리는 달콤하게 이아네를 원했다.
따뜻한 손이 엉덩이와 허벅지, 은밀한 곳까지 깊게 뻗어갈 때에도 그 손길은 급한 법이 없었다. 차분하고, 서두르지 않게. 제르멘은 이아네를 귀여운 애완동물을 대하듯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곤 했다.
그에 비하면 레뮤엘은.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거칠었다. 우악스런 손길이 이아네의 손목을 잡아 결박하고, 다리를 벌릴 때는 헉 소리가 날 만큼 급하고 격정적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허리와 배를 지나 뻣뻣해진 기둥을 쓰다듬을 때의 섬뜩함은 또 어떤가. 이아네가 반항을 심하게 하긴 했어도, 레뮤엘은 심하다 싶을 만큼 거친 부분이 분명 있었다. 가끔 이아네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청빛 눈에서 짐승의 그것을 발견하고 뒷골이 오싹했다.
그래, 그랬다. 레뮤엘은 숫제 이아네를 자신의 암컷으로 만들려는 짐승의 우두머리 같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아네는 무의식 중에 레뮤엘의 손에서 진한 감정의 흔적을 느끼고 있었다.
금세 어디론가 증발할 것 같은 제르멘의 푸른 눈동자는 이아네가 아무리 닿으려 애써도 닿을 수 없었다. 그에게 닿겠다는 것 자체가 이아네에겐 너무나도 과분한 것이었지만, 가끔 제르멘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을 바라보자면 그가 자신이 아는 제르멘이 아닌 것 같아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레뮤엘이 대하기 편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태도만큼은 분명하고 단호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믿어도 좋았다. 그의 손에 벗어나기 위해 괴로움에 몸부림쳤지만 이아네는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레뮤엘은 마음에도 없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심지어 의도가 어떻든 같은 침대를 쓸 수 있는 유형이 전혀 아니었다.
이제 슬슬 인정해야 했다.
이아네조차 레뮤엘을 마음에 들어 한다. 그것은 레뮤엘도 마찬가지였다.
애정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지만 적어도 두 남자는 상대방을 친구로서든 남자로서든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이아네는 멍하니 티 테이블의 체스판을 어루만졌다.
어젯밤 레뮤엘이 두고 간 체스판은 왕의 방문이 머지않아 다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레뮤엘의 방문이 겁이 나면서도 기대가 되는 것은, 비단 체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아네를 내리누르며 성급히 옷을 벗기는 진한 손길과 달큰한 날숨, 결국 헐떡이며 교성을 지르게 하는 척추를 달리는 쾌락-
"으아아악!"
이아네가 별안간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괴로운 신음을 내질렀다. 쓸데없이 너무 구체적인 상상에 아랫도리가 벌써 뜨끈해진 상태였다. 적국의 왕을 떠올리며 흥분하다니!
벌떡 일어난 이아네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더니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백 번을 채우고 나서야 조금 가라앉은 상상에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는 순간, 어젯밤 레뮤엘이 다리를 꼬며 짓던 미소가 생각났다.
"...으, 으아아아!"
이아네의 괴성은 윗몸 일으키기 200번을 채운 후에야 간신히 진정되었지만 그날 밤 내내, 이아네의 방을 지키던 보초들은 드디어 이 포로가 미쳐서 날뛰기 시작한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 시각, 레뮤엘의 집무실에서는 기묘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하, 왕녀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물러가라 해라."
"오늘만큼은 물러서지 않으실-"
"오라버니!"
벌컥 문이 열리며 레뮤엘과 똑 닮은 푸른 머리카락의 왕녀가 들어섰다.
왕녀의 눈썹 끝은 올라가고 미간은 잔뜩 주름져 있어 그녀가 대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레뮤엘은 그녀 앞에서 아주 작은 힌트도 발견하지 못한 눈치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사전에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오다니, 법도에 어긋난다."
"지금 법도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오라버니! 대체 왜 저를 피하시는 거죠?!"
"...그런 적 없다."
레뮤엘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 베델리어 왕녀는 안타깝게도 그를 너무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 오라버니! 제가 몇 번이나 알현을 청했는지 알고는 계신가요? 자그마치 열다섯 번이에요!"
"몰랐구나. 일이 바빠서."
델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치켜 올라간 눈썹이 '나 심기 불편하니까 건드리지 마.'라고 외치고 있다.
"어쨌든 저는 갈 거예요. 말리지 마세요."
"델러...!“
"지금은."
델러가 레뮤엘의 말을 끊었다.
"저보다 디날을 생각하실 때예요. ‘국왕 폐하’."
"......"
레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집무실을 채웠다. 이윽고 레뮤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거라. 그 얘긴 다음에 하도록 하지."
"오라버니!“
"오늘은 돌아가라, 베델리어. 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레뮤엘이 풀 네임을 불렀을 때에야 델러는 혀를 한 번 차곤 집무실을 나왔다. 쾅, 하며 커다란 소리가 난 후에 우리아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레뮤엘을 돌아보았다.
"다정하시군요."
"......"
레뮤엘은 우리아를 완전히 무시하고 결재하던 공문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우리아 역시 레뮤엘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 꼭 델토르 측의 변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레뮤엘을 얼마나 짓누르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아는 약한 한숨을 내쉰 뒤 레뮤엘이 처리한 공문을 가지고 집무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