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
이아네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디날의 국왕이 일찍 결혼하여 벌써 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니 현실감이 완전히 사라진다. 정말 이 꼬마가 그 냉혈한의, 아- 아들이란 말인가?
"그래. 내가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이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포로?"
"...이아네 월터 발로아."
왕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버지를 닮지 않은 잿빛 고수머리가 사랑스럽게 흔들리며 왕자가 펠록스에게 다시 물었다.
"대체 아버지는 왜 검술 스승으로 저런 예의도 없는 자를 보낸 것이냐?"
"저도 여쭈었지만 폐하의 심중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왕자가 앙증맞은 입술로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만큼은 제 아비와 꼭 닮아 있어서, 이아네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좋다. 그럼 내가 이 자의 실력을 보고 결정하도록 하겠다."
"...에?"
"만일 검으로 내 기사와 싸워 이긴다면 너를 스승으로 인정하겠다. 그러나 만일 이기지 못하면 난 아버지께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고 고할 것이다. 알았느냐?"
한순간에 이아네는 눈앞의 왕자가 재미없는 꼬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이 부자는 논리와 상식에 기초해 판단을 내리는 성격마저 닮아 있었다.
이아네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왕자의 아버지는 이아네로서는 절대 손댈 수 없다. 이 커다란 성의 심장부에서 혹여나 반항이라도 하기엔 이아네가 너무 불리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을 인질 삼아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흠...?"
펠록스가 흥미롭게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포로 주제에 꽤 당차다. 물론 그가 조건을 걸든 안 걸든 이곳은 디날이니 왕자의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왕자도 포로의 태도에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뭐냐?"
"제가 이기면 제 방식에 군말 없이 따라 주십시오."
"뭐, 뭐라?!"
왕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역시 어린아이라, 아버지 같은 냉엄한 자제력까지는 갖추지 못한 모양이다. 이아네는 어쩐지 왕자가 귀엽게 느껴졌다.
델토르의 본가에 있을, 조카 에밀이 생각났다.
"이 무엄한 것!"
"저는 델토르인입니다. 적국의 왕자에게 아첨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해서 이득을 얻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 방식을 따라오시려면 어리광과 응석은 버리셔야 할 겁니다. 저는 왕자 저하께서 제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이, 이이...! 감히, 포로 따위가...!"
"여차하면 죽이라 명하시지요. 제가 디날에 와 가장 소원하던 것을 저하께서 이루어 주신다면 비록 적국의 왕세자이시나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왕자의 작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분명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은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아네는 진심이었다.
자신은 검으로 먹고 사는 기사다. 적국의 왕자이지만 어설프게 검을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죽지 못해 사는 몸, 왕자의 심경을 긁어서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또 뭔가.
"저하. 마음을 가라앉히시지요. 일단 저 자의 실력을 보고 판단하셔야 될 일입니다."
"후우, 후우..."
펠록스의 말에 왕자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귀여운 가슴이 위아래로 파닥거렸다. 이아네는 여유롭게 왕자의 명령을 기다렸다.
"후... 좋다. 파드마!"
"예, 저하."
"가서 저 자와 겨루어 보거라. 지면 용서 못 해!"
파드마라는 기사가 성큼 왕자의 앞으로 나섰다.
체격도 좋고, 키도 이아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듯 이마에 기다란 일자 흉터가 나 있었다. 평균 키에, 약간 마른 듯한 이아네와는 벌써 체급부터가 달랐다.
그러나 이아네가 걱정하는 것은 상대와의 갭이 아니었다.
벌써 두어 달 동안이나 검을 놓았던 몸이 제대로 따라줄지가 걱정이었다. 며칠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빈둥거린 몸은 오히려 살이 올라 보기 좋아졌지만 기사의 생명인 검을 떼어놓고 있자니 나태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이아네를 알고 있었지만 펠록스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매우 궁금했던 데다 이아네의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에 흥미가 생겼던 것이다.
"모두 뒤로 물러서도록. 검은 어디 있나?"
펠록스가 장내를 정리하며 이아네와 파드마에게 목검을 건넸다. 이아네는 오랜만에 잡는 검을 이리저리 매만져 보며 무게중심과 길이를 파악했다.
"어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건가?"
고개를 들자 파드마가 피식 웃으며 목검을 어깨에 메고 이아네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아네는 현명하게도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자세를 잡았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가볍게 쥐고 허리를 쭉 펴 상대방과 눈을 맞춘다. 언제든지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한 발은 약간 뒤로 빼고, 자연스레 뻗어진 검 끝은 상대의 쇄골 사이를 정확히 겨누었다.
순간적이긴 했지만 이아네의 위용은 대단했다. 아름다우리만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자세에 흔들림 없는 눈빛은 과연 기사의 귀감이었다.
"...시, 작."
펠록스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두 그림자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이아네가 꽤나 고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 날 쉬어서 말랑해진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아네는 눈앞으로 숨 가쁘게 날아드는 검 끝을 차분하게 흘려내며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처음에 시작했던 자리보다 다섯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섰지만 이아네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에 비해 파드마는 벌써부터 지루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델토르에서 기사씩이나 했다기에 얼마나 실력자인가 은근히 궁금했는데 방어에 치중하는 모습에 서서히 흥미가 가셨다.
이 정도 체급 차이라면 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 싶어, 파드마는 낮게 혀를 차며 검 끝에 힘을 실어 크게 휘둘렀다.
그 순간 이아네가 사라졌다.
힘을 실은 검 끝이 상대가 없어지자 부웅 허공을 가르며 순간적으로 파드마의 중심을 빼앗았다.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바로 그 순간 무언가 세차게 파드마의 엉덩이를 찼다.
"크앗!"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며 너무도 자연스러운 관성의 법칙으로 잔디에 엎어진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아네가 파드마의 손목을 차 검을 멀리 날려 버렸다.
당황한 파드마가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이아네가 잔디에 누운 그의 머리 옆에 목검을 세게 꽂아 넣었다.
"......"
"......"
이아네가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고요한 잔디밭 가운데 이아네가 단정하게 몸을 세우더니 펠록스 쪽을 바라보았다.
왕자가 입을 딱 벌리고 이아네를 바라본다. 펠록스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아네가 살짝 어깨를 으쓱 하는 순간, 펠록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이야아압!"
바로 귀 뒤에서 엄청난 기합이 터졌다. 그러나 이아네는 이번에도 몸을 비틀어 정수리로 파고드는 검날을 피하고, 재빠른 발차기를 파드마의 다리 사이에 꽂아 넣었다.
-퍼억!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자'들의 미간이 슬쩍 찡그려졌다.
파드마가 거구를 무너뜨리며 잔디 위에 새우처럼 고꾸라졌다. 손에 들고 있던 이아네의 목검은 이미 놓친 채였다.
잔디 위에 놓인 검을 가볍게 들어 흙을 떨어내고, 이아네는 다시 펠록스에게 다가갔다.
"제 승리입니까?"
"...발로아, 승."
재미없는 꼬마 왕자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이아네는 디날에 온 뒤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 * *
하루 일과를 끝내고서 침실로 돌아온 레뮤엘은 티 테이블에 앉은 채 곯아떨어진 이아네를 발견하고 왠지 안심했다.
이아네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는다.
기사답지 않게 단아한 흰 얼굴은 등불의 주홍빛에 비춰 어딘지 부드러워져 있다. 모처럼 편안해진 마음으로 마음껏 포로를 바라보며 레뮤엘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많이 우려하긴 했으나 어쨌든 레뮤엘은 모험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펠록스도 레뮤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정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레뮤엘의 선택은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이아네가 저녁식사를 모두 비웠다는 보고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왕자가 거의 울다시피 하며 레뮤엘을 찾아왔다.
"아, 아, 아버지이이....!"
"...리트?"
전쟁 후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외아들의 눈물바람에 솔직히 말해 레뮤엘은 조금 마음이 언짢았다. 자신을 향해 뻗어진 작은 손을 마주 쥐어주며 아들의 눈을 바라보자 결국 그렁하던 눈물이 팍 터지고 만다.
"흐어어엉-"
작은 등이 서럽게도 흔들렸다. 레뮤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적국의 왕자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무리였나 생각하는 순간, 뒤따라 들어온 펠록스의 이야기를 듣고는 얼마나 웃음을 참았는지 모른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 자가, 왕자 저하를 가르치기 위해 조건을 걸었습니다."
"...무슨?"
"음... '스승의 말에는 절대 복종'입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자가 고개를 들고 작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외친다.
"아버지, 제발 다른 사람으로 바꿔 주십시오! 그 자는 싫습니다!"
"...그 외에는? 리트가 쉽게 수락하지 않았을 텐데."
"예, 저하의 호위기사와 합을 겨루어 이겼을 경우 포로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만, 그것이..."
펠록스가 말을 흐렸다. 레뮤엘은 말 안 해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눈물이 그렁한 채 싫다며 고개를 도리질치는 어린 왕자의 응석에, 레뮤엘은 생각을 굳혔다. 외부와는 완벽히 차단된 구중심처 성 안에서 높은 신분, 그것도 이 나라를 이끌어갈 왕자의 자리에 있는 자라면 싫은 소리를 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
레뮤엘은 조용히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부드럽게 상황을 일축시켜 버렸다.
"발로아와 한 약속을 지키거라."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깊게 잠이 든 이아네의 흰 얼굴은 레뮤엘에게 죽음으로 대항하던 고집스러운 기사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미남자로 보였다.
살짝 손을 들어 이아네의 뺨에 손등을 대어 본다. 깰지도 모르지만, 깬다고 하더라도 나쁠 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아네는 얼굴에 무언가 닿는 감촉에도 눈꺼풀조차 떨리지 않았다.
"......"
조금 안도했다.
스스로도 이상할 만큼 조심스럽게, 레뮤엘은 이아네를 일으켜 안아들었다. 이아네의 호흡이 안정적인 것을 확인한 후 레뮤엘은 이아네를 침대 위로 옮겨 눕혔다.
잠시 망설이다, 레뮤엘의 손가락이 이아네의 앞머리를 넘긴다. 깨끗한 앞이마가 드러나자 레뮤엘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왕자의 검술 훈련이 시작되었다.
점심 때가 조금 지나서 어제의 정원으로 나가니 왕자의 호위 기사들이 보인다.
그 사이에서 조그만 잿빛 머리통이 오종종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아네는 예의상 살짝 목례를 했다.
"......"
대답이 없다.
꾹 다문 입이 비죽 튀어나와 있는 것을 봐서 오늘도 그다지 순종적이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왕자는 확실히 재미없는 꼬마였다. 결론을 내린 이아네가 어깨를 으쓱 하며 목검을 고쳐 쥐었다.
"저를 공격해 보십시오."
"...뭐?"
"왕자님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저를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공격해 보십시오."
충격적인 첫 수업에 왕자의 하얀 이마가 약간 좁아졌다.
또 무슨 꿍꿍인가 싶어 이아네를 노려보지만 이아네는 어제와 비슷한 복장에 팔 길이 정도의 목검을 약간 앞으로 내민 편안한 자세였다. 분하지만 검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왕자의 눈에도 절도 있고 아름다운 각도가 이루어낸 선은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흥."
심통이 난 왕자가 목검을 집어 들었다. 모든 호위기사와 펠록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왕자가 이아네와 대치하고 섰다.
마주 겨눈 검 끝이 서로를 향한다. 이아네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왕자와 눈을 마주쳤다. 일곱 살 꼬마이긴 하지만 눈빛은 아주 좋았다.
역시 부전자전. 이아네가 속으로 웃는데, 갑자기 왕자가 팔을 치켜들고 이아네에게 돌진했다.
"이야압!"
-따악.
경쾌하게 목검이 부딪힌다. 가볍게 검을 막아낸 이아네가 살짝 힘을 주어 밀어내자 왕자가 맥없이 뒤로 물러났다. 처음 당한 굴욕에 왕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 이이- 야아아앗!"
이아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흥분한 왕자가 목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형편없이 느린데다 기교도 예리함도 없지만 이아네가 보고자 한 것은 그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가 헉헉 숨을 들이쉬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 체력에 한계가 온 것이리라.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이아네가 재빨리 목검을 뻗어 왕자의 손목을 쳤다.
"악!"
찌릿 하고 전기가 오는 충격에 놀란 왕자가 검을 놓쳤다.
얼마나 아프고 놀랐는지 보라색 눈에 눈물이 글썽하다. 놓친 검을 주워 돌려주려는데, 어제의 기사-파드마가 썩 앞으로 나섰다.
"무엄한 것!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
이아네가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파드마의 속을 긁었다.
파드마의 뒤에서는 왕자가 눈물 그렁한 눈으로 울상을 짓고 있다. 제때 딱 나서 준 자기 편에게 고무되었는지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 펠록스가 왕자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괜찮으십니까?"
왕자의 표정이 갑자기 어른스러워지며 아픈 것이 분명한 듯한 입술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으으윽, 괘...괜찮다! 하... 하나도 안 아팠다!"
펠록스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왕자의 붉어진 손목을 쓰다듬었다.
펠록스는 원래 레뮤엘의 보좌관이다. 왕자가 무엇을 하든 분명 레뮤엘의 귀에 반드시 들어갈 것이 뻔했다. 어리다지만 왕자가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왕자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차올라 있었지만 펠록스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바르르 눈물을 참는 모습은 조금 귀여워 보였다.
왕자의 흥분이 잦아들 때를 기다려 이아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프신 겁니까?"
"당연하지 않으냐!"
"아니면 부끄러우신 겁니까?"
"......"
정곡을 찔린 왕자가 입을 다물고 이아네를 노려보았다. 이아네는 왕자 뒤로 늘어선 기사들을 슬쩍 눈짓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스승이 된 이상,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겁니다. 검술은 아이들 장난이 아닙니다."
"닥쳐라! 너 같은 스승 둔 적 없다!"
"만일 내일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 호위들부터 물리시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델토르인입니다. 왕자 저하는 제게 어린 제자일 뿐입니다."
"이이...!"
왕자의 눈이 굴욕으로 물들어 갔다.
펠록스가 보기에도 조금 심했다 싶어 입을 열려던 찰나, 왕자가 새빨개진 얼굴로 호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내일부터 나오지 마!"
"?! 예? 하오나..."
"나오지 말라면 나오지 마! 내가 당하는 꼴을 보고 비웃을 셈이냐?!"
"아니, 그런 것이 아니고, 저하..."
"에이 씨, 너희들까지 내게 반항하는 거냐!"
기사들이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는 사이, 왕자가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이아네를 척 하니 가리키며 선전포고를 했다.
"너! 발로아!"
"예."
"'약속'은 지키겠지만, 반드시 네가 날 포기하게 만들어 주겠다!"
"...아?"
"흥, 제발 그만두게 해 달라고 빌게 만들어 주지!"
하도 당당해서 거기다 대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아네가 피식 웃으며 왕자에게 다가간다.
일순 호위들이 긴장하고 왕자의 얼굴이 겁에 질리는 순간, 이아네가 한쪽 무릎을 꿇어 왕자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뭐, 뭐, 뭐냐?"
"...부었군요."
과연 목검에 호되게 맞은 손목이 붉게 부어올라 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직전에 손에 힘을 빼긴 했지만 보호대도 없이 생으로, 그것도 여린 일곱 살짜리의 손목에 정확히 맞았으니 어쩌면 당연할 일. 최대한 살살 때린다고 했는데, 역시 여리디여린 성 안의 화초에겐 좀 무리였던 모양이다.
이아네가 왕자의 손목을 잡고 붉어진 부분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다행히 뼈에 이상은 없어 보여서, 이아네는 조금 웃었다.
"용케 잘 참으셨습니다."
"...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왕자 저하께선."
이아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왕자의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본다. 약간 겁에 질려 있긴 했지만 제 아버지와 판박이인 눈빛에,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웃고 말았다.
"아버지를 닮으셨군요."
잠시였지만 처음으로 왕자와 이아네가 경계심 없는 눈빛을 마주했다.
어딘지 마법 같은 일이었다.
청량한 바람이 이아네와 어린 왕자 사이를 훑고 지나치는 짧은 순간, 멍하니 이아네를 바라보던 왕자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팩 손을 빼내며 새침을 떨었다.
"흐, 흥! 당연한 말을! 그, 음, 그러니까, 손목을 치료해야겠군.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불만은 없겠지?"
"예, 저하."
덩치 큰 기사들이 조그만 잿빛 뒤통수를 따라가는 것은 정말 장관이었다.
무릎을 펴고 일어난 이아네가 잠시 향수에 잠겼다. 전혀 닮지 않았지만, 왕자를 보면 고향에 있을 세 살배기 조카 에밀이 생각났다. 그래서 적국의 왕자인데도 이렇게 관대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아네를 세 번이나 자결하게 만든 남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렇듯 적국 깊숙한 곳까지 끌려와서도 웃음 짓게 하는 것을 보니, 의외로 이아네는 어린이에게 약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자."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이아네가 고개를 돌리자 펠록스가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 침실로 돌아가는 동안 펠록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아네도 조용했다. 이아네를 침실로 돌려보내고서 펠록스는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벌써 전쟁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레뮤엘은 피로도 잊은 채 집정관을 닦달하며 디날 안팎에 대한 대소사를 해치워 나갔다. 늦게까지 야근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디날은 전쟁 후에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 갔지만 대신 레뮤엘이 하루 분의 집무를 끝낼 때는 늘 늦은 밤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레뮤엘은 한편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리트는 자고 있나?"
레뮤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펠록스에게 왕자의 안부를 물었다.
펠록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정원 너머 왕자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깨어 계십니다."
"이 시간이면 자야 하는 것 아닌가?"
"아마, 오늘 일 때문일 겁니다."
"...오늘 일?"
레뮤엘이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드디어 펜을 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리트에게 가야겠군."
"예, 폐하."
펠록스가 기쁜 얼굴로 레뮤엘의 뒤를 따랐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더 바빠진 레뮤엘이다. 아무리 왕자라지만 그의 아버지는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왕이니,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도 마냥 섭섭해 할 일은 못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록스는 레뮤엘이 그의 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야 펠록스에게 보고받으면 그만이지만 레뮤엘은 굳이 그런 멋없는 짓을 자행할 만큼 무심한 사람은 못 되었다.
"어? 아, 아버지!"
이제 일곱 살이 된 왕자가 침대에 앉아 유모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있다 한달음에 레뮤엘에게 달려왔다.
레뮤엘이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사과 같은 뺨이 발그레 물들고 만다.
"왜 아직 자고 있지 않았느냐?"
"잠이 오지 않아서, 유모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책을?"
"'다이나르 돈 바흐라자타, 해상 무역의 기본과 이해'입니다."
펠록스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 꼬마 왕자는 무엇이든 아버지를 따라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이런 '답지 않은' 행동에는 그래도 조금 가슴이 아파지는 것이다.
"재미있었느냐?"
레뮤엘이 천천히 왕자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왕자가 그 옆에 앉더니 아버지를 따라 짧은 다리를 꼬았다.
"사실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해상 무역은 어렵습니다."
레뮤엘이 희미하게 웃으며 어린 왕자의 작은 손을 잡아 주었다. 커다란 손은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지만 왕자는 그 손을 좋아했다.
"무리하지 말거라, 리트."
"그렇지만 저도 언젠가는 아버지 같은 왕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훌륭한 왕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리트."
레뮤엘이 손짓하자 유모가 다가와 왕자를 침대에 눕혔다. 왕자의 얼굴에 불만이 서렸지만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는 얌전히 침대 시트 사이로 파묻혔다.
"너는 아직 어리다."
"어리지 않습니다."
"그래, 왕자로서는 어리지 않지."
레뮤엘이 부드럽게 아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리트'로서는 어리단다. 내 아들아."
뾰로통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지만 어린아이의 얼굴은 금방 달아올랐다.
사실 왕족이나 귀족 아이들은 유모가 맡아 키우고 부모들은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디날이든 델토르든 귀족 아이들은 부모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연례행사로 부모를 뵙는, 왕자보다 더 어린 아이들도 있었지만 레뮤엘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점 때문에 어린 아들은 아버지를 더욱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밤이 늦었으니 그만 자야겠구나."
"...저어, 아버지."
"...?"
보통 레뮤엘이 이쯤 말하면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해 눈을 감는 리트였다. 그러나 오늘은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아이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레뮤엘을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사실은, 저어... 오늘,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레뮤엘은 하마터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실소가 터질 뻔했다. 그러나 그는 현명하게도 조용히 웃으며 리트에게 물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
"그, 델토르의 포로가 그랬습니다."
잠시 레뮤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펠록스도, 그의 눈치를 보던 유모도 레뮤엘의 얼굴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사실 그들에게도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그랬구나."
레뮤엘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다, 보드레한 작은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했다.
리트가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감자 레뮤엘은 조용히 등을 끄도록 지시하고 침실로 향했다.
한참을 걷다 반쯤 왔을 때, 레뮤엘이 펠록스에게 낮게 물었다.
"왜 미리 보고하지 않았나?"
"저하께서 직접 말하고 싶어 하실 것 같았습니다."
"...닮았다니. 확실히 그는 예상을 깨는 데 뭔가 있군."
펠록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레뮤엘은 생각보다 솔직한 사람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오늘 왕자보다 더 충격 받은 것은 레뮤엘일 것이다.
침실에 도착해 문을 열자 손목에 족쇄가 묶인 채 책을 보고 있는 이아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최근 들어 이아네가 일어나기 전에 침실을 나서고 잠들고 난 뒤에야 들어왔던 생활의 연속이라, 깨어 있는 채 마주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이아네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눈앞에 서 있는 상대는 자신을 죽고 싶게 만들었던 사내다. 이아네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수치를 안겨준 남자.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의복도 다 갖춰 입고 있고, 저항할 준비도 되어 있다. 거기에 그동안 레뮤엘이 다가오기는커녕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이아네를 죽일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아네가 천천히 책을 덮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일국의 왕에게 하는 것치고 버릇없을 만큼 간소화된 동작이었지만 레뮤엘은 신경 쓰지 않고 시종에게 겉옷을 벗어 주고 편한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책을 읽고 있었나?"
"...예."
짙은 초록색 양장본을 뒤집자 제목이 보였다.
'환상 동화집'.
"...어른은 아이 책을 보고, 아이는 어른 책을 보는군."
"예?"
그러나 레뮤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기분이 좋은 듯 살짝 미소를 띠었을 뿐이다.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책을 덮으며 레뮤엘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추리해내려 애썼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 동화를 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곤 하지만 시종이 가져온 책이 동화였던 데다, 생각보다 시간도 꽤 잘 가는 소일거리여서 이아네로서는 마음에 들었던 터다.
"발로아."
"...예?"
아주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이아네는 조금 놀랐다. 매일 너, 라던가 포로, 라는 호칭에 익숙해 있다 보니 발로아라는 이름이 낯설 지경이다.
"네가 리트에게 그런 말을 했나?"
"...리트?"
이아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레뮤엘이 아차, 하는 듯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말을 덧붙였다.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 왕자의 애칭이다."
"...애칭을 부르십니까?"
아들을 그리도 아끼던 시리어스 선왕도 늘 제르멘을 왕자 내지는 제르멘이라고 불렀다. 제르멘이 제롬으로 불렸던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잠깐뿐이었고 그마저도 이아네 외에 제르멘의 애칭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왕은 자연스럽게 아들의 애칭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레뮤엘은 대답하지 않고 시종을 불러 낮게 뭔가를 지시했다. 방 밖으로 시종이 나가자 방 안에는 완전히 둘만 남았다.
"내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니다."
"왕자 저하께...?“
이아네가 잠시 고민하는 동안, 레뮤엘이 카우치에 편안히 앉으며 힌트를 주었다.
"왕자가 나와 닮았나?"
"아아."
이아네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바보 팔불출도 아니고 뭐 그런 말에 반응하나 싶어 이아네는 다시 책을 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주 판박이더군요."
아까 책을 어디까지 봤더라. 그래, 죽은 어머니의 환상에 쫓기던 소년이 나무 둥치에 숨은 부분이었다.
다시 책을 읽으려던 찰나, 이아네는 묘한 위화감에 고개를 들었다.
티 테이블을 앞에 두고 카우치에 앉은 채, 레뮤엘은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 뭐 하시는 겁니까?"
"......"
이아네가 책을 내리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웃고 계신 겁니까, 지금?"
"...크큽..."
이아네는 충격을 받았다.
물론 사람으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웃지 않고 죽는 사람은 없겠지만 평생 웃음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고르라면 이아네는 주저 없이 눈앞에 앉은 남자를 고를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냉혈한, 포커 페이스, 철혈의 왕,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저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이 자기 침실에서 소리 죽여 낄낄대고 있었다!
"하아, 미... 후우... 미안하게 됐군, 후후..."
아니, 대체 얼마나 아들바보기에 닮았다는 한마디에 페이스가 무너지는지 알고 싶다. 심지어 아직도 여운이 남은 웃음소리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뭐... 뭔가 잘못 드신 겁니까?"
저녁 식사에 귀신웃음버섯이라도 들어 있었나? 그게 아니라면 저 기현상을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충격에 빠진 이아네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동안 아까 방을 나갔던 시종이 네모반듯한 목제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레뮤엘이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며 시종이 건넨 가방을 받아든다.
"포로의 손을 풀어 주도록."
"예?"
"날 기분 좋게 만들었으니, 상을 줘야지."
이아네는 다시 귀를 의심했다. 시종이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족쇄를 풀었지만 이아네는 발걸음을 옮기기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저, 저어..."
"왜 그러나?"
"...왜 이러시는 겁니까?"
레뮤엘이 다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짓해 시종을 방 바깥으로 보내고, 널찍한 방 한편에 자리 잡은 장식장으로 다가간다. 깨끗하게 잘 닦인 원목 장식장의 유리문에는 조그만 열쇠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장식장 위의 작은 보석함에서 마찬가지로 작은 열쇠를 꺼낸 레뮤엘이 문을 열고 바닥에 엎어 두었던 액자를 꺼내어 다시 돌아왔다.
"이쪽으로 앉도록."
이아네는 잠시 갈등했다. 호기심이냐, 자존심이냐.
그러나 고민은 잠시,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궁금증을 못 이겨 레뮤엘의 맞은편에 앉자 레뮤엘이 들고 있는 액자를 잠시 내려다보다 이아네에게 건넸다.
조심스럽게 액자를 받아든다. 얼핏 단순해 보였지만 흑단목을 정교하게 깎아 만들어 금칠을 한 것으로, 분명 꽤 값나가는 사치품일 것이다.
어른 손바닥을 쫙 펼친 정도 크기의 액자를 받아들고 그 안의 내용을 보는 순간 이아네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정교한 초상화였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단정히 내려앉은 눈썹과 매혹적인 입술이 생생하다. 섬세한 명암과 아주 얇은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미세한 솜씨로 그려져, 손바닥만 한 액자 안에 작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화가의 솜씨가 아니라, 액자 안의 인물이었다.
왕자와 똑같은 부드러운 잿빛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아름답게 늘어져 폭포를 이루었다.
수줍은 듯 살며시 웃고 있는 눈매와 사과 같은 뺨도, 약간 작은 듯한 입술과 콧망울까지도 완전히 왕자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중 가장 시선을 끌었던 것은.
"...제비꽃..."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조심스럽게 집어든 제비꽃과 똑같은 보라색 눈동자.
이아네는 초상화 한 장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 왕자에게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이 그림의 인물을 본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웃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이, 이 사람은..."
"궁금한가?"
이아네가 멍하니 고개를 드는 순간, 그를 바라보던 심청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아네의 충격에 빠진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레뮤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아내다."
한참 동안, 침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이아네가 뻣뻣하게 고개를 다시 내려 초상화를 바라본다. 누가 보더라도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이었다. 어딘지 연약한 인상이 레뮤엘의 냉엄함과 조화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딱딱한 혀를 간신히 움직인다. 이아네가 물었다.
"와... 와... 왕비 전하이십니까?"
"정확히는, 왕비였지."
"에... 저..."
이아네가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은...?"
"죽었다. 3년 전에."
이아네가 다시 침을 삼켰다.
입안이 까슬했다. 지금 그가 무엇 때문에 가장 충격적인 건지 생각하기에도 뇌 속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굳어 버린 관절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액자를 레뮤엘에게 돌려준다. 레뮤엘이 그것을 건네받고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장식장으로 가져가 엎어 두었다.
"무, 무, 무례했습니다."
"아니, 잘 했다."
다시 카우치로 와 앉은 레뮤엘은 무서울 만큼 냉정해 보였다. 살짝 내리깐 눈동자는 깍지 낀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며 고요히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레뮤엘의 안색을 살폈다. 그저 죽은 아내를 떠올린다고 보기에는 어딘지 복잡한 눈빛이었다.
"...리트는."
레뮤엘이 조용히 입을 열더니 다시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냉정한 왕인데도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까 시종이 가져온 직사각형의 가방을 열며, 레뮤엘이 말을 이었다.
"나를 닮고 싶어 한다."
문득 이아네는 레뮤엘이 연 가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검은색과 흰색 체크무늬가 어딘지 낯익다 싶더니 가방 안에는 서른두 개의 체스말이 작은 상자에 담겨 있었다. 설마. 제정신인가 싶어 이아네는 메어 오는 목을 가다듬고서 머뭇머뭇 물었다.
"...혹시, 상이라는 것이..."
"좋아하잖나?"
이아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깊은 바다 빛 눈을 가진 이 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아네를 당황스럽게 했다.
처음에는 묶어 놓질 않나, 체스를 가르치질 않나, 그 다음엔 침실까지 끌고 오고, 하나뿐인 아들의 검술 스승을 맡기더니, 이젠 상으로 체스를 두자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이아네는 레뮤엘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다.
"특별히, 먼저 시작하게 해 주지."
"...하아."
대단한 자비를 베푸는 듯한 레뮤엘의 '선처'에, 이아네는 약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체스는 오랜만에 이아네의 승부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유혹에 진 이아네의 폰이 움직였다.
한참 동안, 방 안에는 따각 하는 체스말이 움직이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으음-"
신중하게 다음 수를 고르는 이아네를 보며 레뮤엘은 어쩐지 즐거워졌다.
지금까지 체스를 둘 상대는 차고 넘쳤지만 이렇게 '체스에만' 집중하는 상대는 오랜만이다. 보통 레뮤엘의 앞에 앉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체스보다는 레뮤엘 자신이었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레뮤엘에게 지는 척하며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아네는 다르다.
그는 레뮤엘의 비위를 가장 열심히 맞춰야 하는 위치임에도 레뮤엘을 가장 무성의하게 대했다. 그 점이 꽤 마음에 든다.
그가 타협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면, 레뮤엘은 절대 그를 침실까지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자살하게 싶게 만들지도 않았겠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레뮤엘은 고뇌에 찬 이아네의 미간을 바라보았다.
이아네가 드디어 답을 찾은 듯 조심스럽게 킹을 옮겼다.
"...이름이 뭐였지?"
이아네의 검은 킹을 따라붙으며 레뮤엘이 문득 물었다.
"...예?"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물론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긴 했다. 분명 레뮤엘의 머릿속에는 포로의 이름이 기억되어 있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입니다."
"...발로아..."
-따각.
레뮤엘의 흰 킹 옆에 검은 퀸이 내려앉았다. 피식 웃으며 레뮤엘이 킹을 움직였다.
"많이 늘었군."
"아, 네에..."
"체크메이트를 푸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공격은 가장 완벽한 방어가 되지."
-따각.
레뮤엘의 손가락이 천천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킹을 옮기려다 문득 손을 멈추었다. 잠시 다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아네가 퀸을 움직였다.
"...체크...메이트?"
"잘 했다."
이아네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의 하얀 손가락이 검은 킹과 흰 킹을 번갈아 가리켰다.
"내가 네 킹을 잡는 순간 나도 내 킹을 내어 주게 되지. 이 경우, 무승부로 간주한다."
"...무승부...라구요?"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다시 체스판을 바라보다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상기된 얼굴이 되어 처음으로 맛본 무승부의 여운을 즐기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이아네가 검은 퀸을 잡고 흰 킹을 넘어뜨렸다.
도르르르, 하얀 킹이 체스판을 구르자 레뮤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하얀 킹이 있던 자리에 이제 검은 퀸이 올라앉는다. 이아네가 킹을 체스판 가장자리로 보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레뮤엘이 이아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
"왜 그러십니까?"
"...처음이군."
"네?"
레뮤엘이 조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조그만 티 테이블을 넘어, 동그랗게 눈을 뜬 이아네의 얼굴로 다가간다.
"...처음으로 웃었군."
"...아."
이아네의 얼굴이 당혹으로 젖어 갔다. 레뮤엘이 이아네를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체스판을 정리했다.
다그락 다그락, 체스 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마침내 가방 이음쇠까지 꼼꼼히 닫은 레뮤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이아네는 당황한 채 몸 둘 바를 몰라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당황을 넘어 혼란스러웠다.
레뮤엘의 앞에서 웃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 느슨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의 앞에서 미소를 짓다니?!
"이쪽으로 와라."
레뮤엘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아네가 다시 경계의 눈을 했다.
살짝 쓴웃음을 지은 레뮤엘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이아네를 내버려 두고 등을 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아네는 그저 오늘을 파란의 하루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훅, 하고 불꽃이 꺼지자 사위가 어두워졌다. 이아네가 눈을 깜박이며 어둠에 적응하고 있는데, 레뮤엘이 갑자기 이아네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 어엇?"
"네가 이겼다."
"...예?"
멍하니 다시 되묻는 순간 이아네는 입술을 살짝 스치는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손가락들은 부드럽게 이아네의 얼굴선을 쓰다듬고서 조심스럽게 턱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레뮤엘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승부라고..."
"왕을 쓰러뜨린 건 너다, 이아네."
"에...!"
혹시 귀가 잘못되었나 했다.
방금 레뮤엘이 부른 것은 분명 이아네의 이름이었지만, 이아네는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아네'라는 이름이 너무 오랫동안 불리지 않은 탓에 다른 단어가 그렇게 들린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적국의 왕에게 그렇게 친근하게 불릴 이유가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긴장이 풀린 입술로 차갑고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
어두웠기 때문에 자세히 보기는 힘들었지만, 콧등 위로 부드럽게 부서지는 따뜻한 날숨과 짙어진 체향은 어둠 속에서도 숨길 수 없었다.
놀란 눈동자가 감기기도 전에 레뮤엘은 입술을 떼었다. 키스라기보단 스친 듯한 느낌의 접촉이었지만 이아네의 머릿속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뭐...무슨..."
"다음번에도, 부탁한다."
무엇을?
물어볼 것들이 산더미였지만 그 말만을 남긴 채 레뮤엘은 이아네의 턱을 놓고 침대로 들어가 버렸다.
침대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열두 사람이 들어가도 남을 만큼 널찍했지만, 이아네는 그 침대가 너무 좁아 보여 그 옆에서 밤을 하얗게 새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이 눈을 떴을 때, 레뮤엘은 이미 방을 나가고 없었다.
오히려 이아네 쪽에서는 그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어제 당황스러운 짓을 저지른 것은 레뮤엘이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를 보게 된다면 아마 귀가 익어 버릴지도 몰랐다.
시종이 가져다 준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아네는 검술 수업을 하러 가기 전에 가볍게 침실 안을 걸으며 몸을 풀었다.
그러다 문득, 장식장 앞에 멈추어 선다.
조금 망설이다 유리문을 열고 어제 레뮤엘이 꺼냈던 액자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어제와 같은 화사하고 연약한 미소를 지으며 레뮤엘의 왕비는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비꽃 같은 여인이었다. 드레스는 복잡하고 화려한 레이스와 프릴로 장식되어 풍성했지만 가녀린 몸을 가릴 수는 없었다. 살짝 미소 짓는 입꼬리 옆으로 가볍게 떠낸 생크림 같은 보조개가 패여 있었다.
어딜 보나 남자로서의 선이 확연한 이아네와는 다르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봐서 레뮤엘은 절대 남색 취향이 아니었다. 아내로 맞이한 것뿐이라면 모르지만 그 어머니를 쏙 빼닮은 아들까지 있지 않은가!
이아네는 서서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레뮤엘이 남색 취향이 아니라면 왜 어제 이아네에게 키스했을까?
이아네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져 갔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인데, 레뮤엘은 이아네의 이름까지 불렀다. 뭐 엄청나게 비싼 이름은 아니지만,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근한 사이가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야 물론 불린다고 해서 해가 될 건 아니지만-
'왕을 쓰러뜨린 건 너다, 이아네.'
화악- 이아네의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아니, 왜 이럴 때 얼굴이 빨개지는 거지? 별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이름 한 번 불렀다고 이렇게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나?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이아네.'
귓가에 맴도는 레뮤엘의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달콤하다.
어딘지 인정받은 느낌이라, 이아네는 그만 조금 웃고 말았다. 제르멘이 부르던 '이아네'와는 어딘지 다르지만, 아-
문득 이아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제르멘.
이아네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방금까지 미소 짓던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까먹고 있었던 걸까? 생각나자마자 가슴 시린 이름을, 방금까지만 해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왕의 기사로서 평생을 살아왔던 자신이 단 며칠 만에 그를 잊고 있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물론 생각하면 눈물 나도록 그리운 사람이지만 이아네는 자신이 단 하룻밤이라도 그를 잊고 있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엄청난 무게의 죄책감이 이아네를 짓눌렀다.
그래, 그는 제르멘의 기사였다. 레뮤엘과 체스를 둔다거나,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거나, 그의 아내를 보고 충격을 받아선 안 되는!
이아네의 머릿속이 핑글핑글 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레뮤엘의 침실에 갇혀 일반 포로보다 훨씬-굳이 따지자면 과분한-좋은 대우를 받고 있긴 했지만 이런 일로 마음이 돌아설 수는 없었다.
레뮤엘이 이런 것을 노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약 노렸다면 그의 수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하튼, 이아네는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이제 레뮤엘을 훨씬 사무적인 태도로 대하기로 결심했다.
이아네가 결심 후 고개를 든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아네가 뒤를 돌아보자, 여느 때처럼 펠록스가 서 있었다.
* * *
"...해서, 곧 왕녀님께서도 준비가 끝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뭔가 절차가 간소화된 것이 있나?"
"지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문득, 우리아는 레뮤엘의 발걸음이 멈춘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접견실에서 관료들을 알현 후 집무실로 돌아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한 레뮤엘 덕에 우리아는 레뮤엘이 접견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기다란 두루마리를 읽어 나가야 했다.
그런 레뮤엘이 복도 중간에서 멈추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살면서 별난 일도 다 있다 생각하며 우리아가 별 생각 없이 창 밖에 흘끔 눈길을 주었다.
그 순간 우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헉, 헉, 으, 으으..."
"아직 두 바퀴 남았습니다."
"하아, 하아!"
창 밖 정원에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감색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검은 머리에 유난히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
우리아는 그 남자를 먼젓번 왕의 침실에서 본 적이 있었다. 분명히 델토르에서 온 포로라고 알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그와 왕자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대체 왜? 우리아가 얼빠진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뭐... 뭡니까? 왜 저 자가 저하와 함께...?"
"검술을 가르치고 있다."
'저게'?
우리아는 다시 창 아래를 내려다봤다.
얼굴이 빨개진 리트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포로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다. 포로의 달리기는 약간 빠른 듯한 정도였지만 왕자의 입장에서는 있는 힘껏 달려야 하는 속도니 누가 봐도 불공평한 경주였다. 그러나 포로의 얼굴은 인형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검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분명 생각이 있겠지. ...가지."
리트가 두 바퀴를 기어이 채우고 잔디밭에 주저앉는 것을 확인한 레뮤엘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아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헉, 헉... 콜록, 큽... 허억, 헉..."
"잘 하셨습니다. 이제부턴 매일 여기를 일곱 바퀴씩 도셔야 합니다."
"헉, 큭- 하아, 하아... 헉..."
말할 힘도 없어진 리트가 터질 것 같이 빨간 얼굴로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왕자라는 자각을 가진 후부터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경거망동이지만 이 순간 잔디밭에는 펠록스와 이아네뿐이었으니 마음이 풀어졌던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숨을 고른 리트가 울상이 되어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고급스러운 셔츠에 초록빛 풀물이 들어 있었다.
"이런 짓을, 하아... 왜... 하아... 하는 거냐?"
이아네는 솔직하게 말해줄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고집불통 왕자를 잘 다루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저하께서 저를 따라잡을 정도는 되어야 상대를 해 드릴 것 아닙니까."
"이이이...! 헉, 헉..."
어머니와 빼닮은 보라색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 찼지만 역시 숨을 다 고르기 전이라 금세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아네는 속으로 조금 웃고서 리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리트는 고집스럽게 제 혼자 힘으로 일어나 잔디밭에 섰다.
하얗기만 하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라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보드랍기만 하던 이마는 촉촉해졌고 사과 같던 뺨은 잘 익어 있다.
이아네가 조금 미소 지으며 리트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잘 했습니다."
"...흥. 함부로 손대지 말아라."
말과는 달리 이미 기분 좋은 듯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어머니와 똑같은, 생크림을 떠낸 듯한 보조개가 귀여웠다.
그러나 이아네는 왠지 리트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꼬마 왕자의 행동은 어딘지 레뮤엘과 훨씬 닮아 있었다.
"다음은 뭐냐?"
"다음은..."
숨을 다 고른 리트가 이제 제법 매끄럽게 말을 이어 갔다. 이아네가 잠시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펠록스 님."
"음?"
"저 나무..."
이아네가 가리킨 곳에는 굵은 밑동과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는 녹나무가 서 있었다. 어른 두 사람이 팔을 벌려 감싸야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꽤 장대한 나무였다.
이아네에게라면 오히려 낮은 편이지만 리트 정도의 어린아이에게는 딱이다.
"나무?"
펠록스가 의아하게 되묻는다.
"올라갈 수 있습니까?"
"...성 안에서는 나무타기가 금지되어 있다."
펠록스가 약간 꺼림칙하게 말했지만 이아네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곧바로 왕자 쪽을 향해 돌아섰다.
"가시지요."
"어...어딜 말이냐?"
"저 곳으로요."
이아네의 목적지를 파악한 리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리트가 약간 불안한 듯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나무에서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가, 그런 것은 위험하다고..."
리트가 드물게 말을 흐렸다.
이아네는 리트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 어린 왕자가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혼이 날까봐 두려우십니까?"
"......"
리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역시 꼬마는 꼬마다. 왕자라곤 하지만 아직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만은 사절인 것이다.
도리질치는 작은 머리통을 보면서 이아네는 약간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저하."
"왜, 왜 그러느냐?"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가죠."
"으, 으아아아!"
"자, 잠깐! 발로아!"
이아네가 갑작스레 리트를 번쩍 들어 안자 펠록스가 당황해 소리쳤다.
왕자는 너무 놀라 그저 비명만 지르고, 이아네는 성큼성큼 나무를 향해 달렸다. 펠록스가 그 뒤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인질이 왕자다 보니 안 올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끼가 좀 끼긴 했지만 옹이구멍이 많아 오르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도, 돌아가라! 다친단 말이다!"
"다치지 않을 겁니다."
이아네가 왕자를 내려놓고서 나무 둥치를 끌어안았다. 찍, 하고 이끼를 짚은 손이 미끄러졌지만 세게 끌어안으면 그럭저럭 올라갈 만했다.
고개를 올리자 이아네의 키 두 배만한 높이에 굵은 나뭇가지가 뻗어 나와 있었다.
"저거면 되겠군요."
"우, 우와아앗?"
말을 마친 이아네가 가볍게 몸을 날렸다. 깜짝 놀란 왕자가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이아네는 아랑곳 않고 나무 이곳저곳을 신중하게 밟으며 가볍게 나무를 탔다.
왕년에 제르멘을 쫓아다니느라 나무타기에는 이미 도가 텄다. 다람쥐가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이아네가 순식간에 굵게 뻗어 나온 가지에 올라앉았다.
"어... 어떻게 간 거야?"
"아- 전망이 좋군요."
리트의 얼굴에 엷은 동경과 선망이 서리기 시작하는 것을 눈치 챈 이아네가 느긋하게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댔다. 적당한 바람이 불어와 이아네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전망이 좋았다.
"뭐가 보이는데?"
"...비밀입니다."
리트의 기대에 찬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펠록스는 어딘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지금 이아네가 노리고 있는 것은,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흥, 이까짓 거 나도 할 수 있다!"
펠록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 센 왕자는 당장에 그 조그만 고사리 손으로 나무를 오를 듯 기세가 등등했다.
"올라와 보시지요. 저하."
이아네의 미소가 짙어졌다. 녹나무의 푸른 잎사귀와 이아네의 초록색 눈동자가 잘 어울렸다.
리트가 심통이 난 얼굴로 결국 나무 둥치를 끌어안았다.
이아네가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는 검술 수업이 끝난 후였다. 왕자가 이아네의 키 반만큼도 나무를 오르지 못한 것은 물론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이아네는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거의 하는 것 없이 침실에 감금되어 있어야 했지만 이제 레뮤엘이 더 이상 족쇄를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침실 안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문득 얼굴을 빨갛게 익히며 용을 써 대던 리트가 생각나자 이아네는 살풋 미소를 지으며 창 밖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리트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조금씩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리트는 적국의 왕자였지만 동시에 어린아이였고, 그런 어린아이한테까지 적대심을 가질 정도로 이아네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이아네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레뮤엘이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이아네는 자신이 그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명색이 기사인데 바로 등 뒤에 누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다니?
"어, 언제 오신 겁니까?"
"조금 전."
레뮤엘이 성큼 이아네 앞으로 다가섰다.
이아네가 조금 두려운 눈으로 뒷걸음쳤지만 레뮤엘은 곧장 장식장 쪽으로 향했다. 조금 무안해진 이아네가 레뮤엘을 바라보는데, 레뮤엘이 손에 쥔 무언가를 장식장에 올려두곤 문을 닫았다.
이아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작은 함이었는데, 크기는 어른 주먹만 했지만 장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배고프지 않나?"
"예?"
이아네의 눈길을 눈치챘는지 레뮤엘이 뒤돌아서며 갑자기 말을 걸었다.
놀란 이아네가 당황하는 사이 레뮤엘이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바깥으로 나가더니 금세 식사를 날라 왔다.
아무것도 없던 방 한가운데 식탁이 놓이고, 이아네는 어느새 레뮤엘과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수프 단지와 통으로 구운 칠면조, 구운 콩 요리, 아직도 기름이 지글거리는 베이컨 접시가 이아네 앞에 놓였다.
거기까진 잘 아는 것들이었기에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름 모를 생선이 날것으로 저며져 나온 것을 보고 이아네는 결국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레뮤엘이 그것을 눈치채고 살짝 접시를 이아네 쪽으로 밀어 주었다.
"이건 어떻게 먹는 겁니까?"
"간장과 겨자를 섞어 찍어 먹으면 된다."
"익히지 않았잖습니까?"
레뮤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틀어졌다.
"델토르에서는 먹어본 적이 없나?"
"생선은 익힌 것만 먹었습니다."
"회라고 하는 것이다."
레뮤엘이 거기까지만 말하고 수프를 떠 입에 넣었다.
더 이상 물어보기도 뭐하고 맛있는 냄새를 맡은 덕분에 이아네도 회가 동한 터라 두 번 묻지 않고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들었다. 어차피 먹든 안 먹든 레뮤엘은 식사할 테고, 이 식사 시간이 지나가면 이아네에게 따로 점심을 챙겨주진 않을 터였다.
레뮤엘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럴 바에야 줄 때 배불리 먹고 뻔뻔해지자는 것이 이아네의 속셈이었다.
한동안 방 안에는 낮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아네도 레뮤엘도 말 한 마디 없이 열심히 먹었다. 앞의 접시가 거의 비워졌을 무렵, 레뮤엘이 식탁 가운데 놓인 통에서 막대기 두 개를 꺼내들었다.
"...?"
먹다 말고 웬 막대기인가 싶어 레뮤엘을 바라보는데, 레뮤엘이 막대기를 한 손에 쥐더니 이아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섬세한 놀림으로 '회'를 한 점 집었다.
"어..."
그리곤 겨자에 찍어 입으로 가져가 넣고 잠시 씹다가 삼킨다.
이 일련의 움직임에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회를 두 점째 집던 레뮤엘이 이아네를 곁눈질하더니 조금 웃었다.
"그게...뭡니까?"
"젓가락이다."
"젓가락?"
생전 처음 듣는 말에 이아네가 고개를 갸웃하자 레뮤엘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저 동방으로 배를 타고 끝없이 가다 보면 또 하나의 대륙이 나오지. 그곳에선 생선을 이렇게 먹곤 한다. 전통적인 식기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이아네는 신기하게 레뮤엘의 정교한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한 손에 막대기 두 개를 쥐고 움직이자 얇고 흰빛이 도는 생선살이 딸려 올라온다.
"해 보겠나?"
"아... 네."
갑작스런 제안에 조금 놀랐지만 이아네는 레뮤엘이 건넨 '젓가락'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 한 손에 쥐었다.
처음 써 보는 거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지만 레뮤엘의 손 모양을 대충 따라 해보니 그럴듯하다. 시험 삼아 접시에 담긴 회를 집어 들려는 순간, 젓가락이 교차되며 회를 놓쳤다.
"어..."
이아네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부끄러운 것보다도 승부욕이 다시 발동했다. 이아네가 미간을 좁힌 채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는 것을, 레뮤엘은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이아네가 다섯 번째로 회를 놓쳤을 때 갑자기 레뮤엘의 젓가락이 다른 회를 집었다.
"입 벌려라."
레뮤엘이 너무 뜻밖의 말을 하는 바람에 이아네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분명히 이아네의 표정을 읽었을 텐데도 레뮤엘은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이아네의 벌린 입 속으로 회를 넣어 주었다.
"우음... 음...?"
차가운 생선살이 혀 위에서 매끄럽게 바스러지며 고유의 감칠맛을 뿜어낸다. 살짝 턱을 움직여 씹어 보자 탱글탱글한 속살이 쫄깃해지나 싶더니 금세 목구멍 뒤로 녹듯이 넘어갔다.
이런 음식은 처음이라, 이아네는 상기된 얼굴로 멍하니 감탄하고 말았다.
"...맛있다..."
"더 먹겠나?"
레뮤엘이 조금 흐뭇한 얼굴이었다. 이아네는 부끄러운 것도 잊은 채 얌전히 레뮤엘이 입에 넣어 주는 회를 받아먹었다.
잠시 우물거리면 혀 위의 차가움은 곧 없어지고 매끄러움만 남았다. 두 번째 맛을 본 순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회 한 접시가 다 없어질 때까지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레뮤엘이 회를 집어 주면 이아네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받아먹는다. 기묘한 광경이었지만 이아네는 처음 맛보는 별식에 정신이 팔려서 뭐가 이상한지도 몰랐다.
마지막 한 점을 삼킨 뒤, 이아네는 아쉬움에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레뮤엘이 옆에서 웃는 소리에 이아네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레뮤엘이 시종을 시켜 식탁을 치우도록 하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방을 나갈 때까지도 이아네는 그가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시종이 공손히 받쳐 들고 온 네모지고 납작한 작은 통을 열어보고서, 이아네는 미칠 듯한 부끄러움에 한참 동안 침대를 퍽퍽 쳐댔다.
"폐하께서 연습용으로 쓰라고 하셨습니다.“
티 테이블 위에 반듯하니 놓인 작은 통 안에는 한 쌍의 젓가락이 곧게 누워 있었다.
"...쿡."
"...?"
"아무것도 아니다. 조금... 재미있는 일이 생각나서. 계속하라."
우리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계속 문서를 읽어 나갔다.
산더미 같던 공문은 레뮤엘의 몸을 사리지 않는 야근으로 인해 꽤 줄어 있었다.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쯤이면 평소의 업무량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야근과도 안녕이었다.
우리아가 얕게 한숨을 쉬며 처리되지 않은 공문을 넘겼다. 이렇게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서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온 레뮤엘이 이해되지 않았다.
꼭 이렇게 바쁜 중이 아니어도, 레뮤엘은 웃음이 흔한 사람은 아니었다. 왕자 앞에서는 자주 웃긴 해도 본래는 차갑다 싶을 만치 조용한 사람인데...
우리아는 슬쩍 레뮤엘을 곁눈질했다. 아직 웃음의 여운이 남았는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꾸었는지 굉장히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아는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단 입을 다무는 아주 적절한 선택을 했다.
이윽고 마지막 공문에 서명한 레뮤엘이 가도 좋다고 말했을 때, 우리아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물어볼 기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폐하."
"...?"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우리아의 말을 듣는 순간 레뮤엘의 얼굴이 확 굳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우리아는 잠시 쓸데없는 걸 물었나 싶어 살짝 후회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최근, 웃음이 많아지셨습니다."
"...아아."
거기까지만 말하고 레뮤엘은 잠시 입가를 가린 채 생각에 잠겼다. 우리아는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집무실은 침묵으로 휘감겼다.
"...그랬나."
"예."
"추한 꼴을 보였군."
레뮤엘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아가 당황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굳이 말하자면, 보기 좋은 쪽..."
거기까지 말하고, 우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레뮤엘의 표정이 볼만했다. 어딘지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레뮤엘은 우리아를 쳐다보다가 한마디 했다.
"...고맙군."
레뮤엘이 마침내 일과를 모두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이아네는 열심히 티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레뮤엘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다.
살짝 다가가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문가에 기대어 서서 이아네의 웅크린 등을 한참 바라본다.
대여섯 걸음을 사이에 둔 거리지만, 어쩐지 레뮤엘은 그 사이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델토르에서 자신의 일생을 바쳐 단 한 사람만을 보위해 왔던 기사. 그런 충직함에 이끌려 그를 억지로 곁에 두긴 했지만, 레뮤엘은 아직도 왜 그를 곁에 두려고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왕이었고, 왕이 굳이 고집을 피우는 데야 아랫사람들이 뭐라 할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디날의 심장, 왕이 사는 성 안-그것도 침실에 적국의 포로가 감금당하고 있다면 늦든 빠르든 이 일은 관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그때는.
레뮤엘이 눈을 감았다.
그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 오셨습니까?"
"...아."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레뮤엘이 눈을 떴다. 이아네가 몸을 반쯤 틀어 레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고 투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레뮤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쁘군.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레뮤엘은 스스로 당황했다.
'예쁘다'고?
"무슨 일이십니까?"
평소답지 않은 레뮤엘의 모습에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러나 레뮤엘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몇 걸음 앞으로 옮기며 이아네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확인했다.
"...연습 중이었나?"
"아, 앗..."
테이블 위에는 작은 접시 두 개와 콩 몇 알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반질반질한 젓가락이 보이자 레뮤엘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말았다.
"잘 안 되고 있나 보군."
"어느 정도는 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긍정인지 부정인지 애매한 침음을 흘리며 레뮤엘이 이아네의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정교하게 쥐어진 하얀 젓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여 콩을 집어 든다. 그리고 다른 쪽 접시로 옮겨 담았다.
통, 하고 콩이 살짝 튀며 매끄럽게 접시 안으로 들어가자 이아네는 순수한 감탄이 서린 눈으로 레뮤엘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 섬세하게 움직이려면 얼마나 연습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상당히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이아네는 젓가락 연습이 재미있었다.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내는 성격상, 이아네는 자신이 해낼 거라고 확신했다.
"해 보아라."
"지금... 말입니까?"
레뮤엘이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이아네 쪽으로 밀었다. 이아네가 머뭇거렸지만 레뮤엘은 생각을 바꿀 것 같지 않았기에 결국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서툴긴 하지만 그래도 훨씬 나아진 솜씨로 조심스럽게 콩을 집어 든다.
집었다기보다 올려놓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기울어지면 콩이 떨어질 것 같아, 이아네는 온 정신을 모아 집중하며 천천히 다른 접시 쪽으로 콩을 옮겼다.
토옹-.
"됐다!"
이아네의 얼굴이 확 펴진다.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어지며 기쁨의 미소를 지어냈다.
사실 제대로 된 젓가락질이라고 보긴 힘들지만 하루 만에 이 정도라면 꽤 성장이 빠른 터다.
레뮤엘은 좋아하는 이아네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두 번 숙고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아네를 뒤에서 끌어안는 것처럼 몸을 숙이고 팔을 뻗어 젓가락을 쥔 이아네의 손을 덧잡는다. 이아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레뮤엘의 옆얼굴이 바로 코앞이었다.
"뭐,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당황한 이아네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서 한껏 말을 더듬었다.
놀랐다. 진심으로 놀랐다. 그러나 이아네의 손을 덧잡은 레뮤엘의 반응은 오늘 저녁 메뉴가 맛있었지, 정도의 평이한 어조였다.
"그건 젓가락질이 아니다."
"......"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등 뒤에서 이아네를 감싸 안다시피 하지만 않았어도 이미 뭐라고 한마디 했겠지만 아주 안타깝게도 레뮤엘은 이아네의 앞이 아니라 뒤에 있었다.
"가운데 손가락이 사이에 들어가야 한다."
"읏..."
레뮤엘이 덧잡은 손이 어딘지 뜨거웠다. 등에 닿은 체온 때문에 묘하게 더워지는 느낌이다. 레뮤엘이 부드럽게 이아네의 손을 매만져 주며 올바른 자세를 잡아 주었다.
"아래는 가만히 두고, 위를 움직여서..."
레뮤엘의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려왔다. 얼굴이 붉어졌지만 레뮤엘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이아네는 적국의 왕에게 안기다시피 한 채 젓가락질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웃기지도 않은 희극이었다.
"아."
토옹.
접시에 콩이 떨어지자 이아네의 얼굴에 희색이 스쳤다. 이상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쨌든 젓가락질은 성공한 것이다. 이아네가 배시시 웃는다.
그 순간, 귓가에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
"...?!"
"쉿..."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아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른쪽 귀에 직접 와 닿은 것은 보드랍고, 어딘지 물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이아네는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가 너무 가까워서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다.
"앗...!"
레뮤엘의 입술이 닿는가 싶더니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한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이아네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레뮤엘이 살짝 체중을 실어 이아네의 등을 부드럽게 눌러 왔다.
"그, 그만 두..."
"넌."
레뮤엘이 이아네의 턱을 당겨 그와 눈을 맞춘다. 초록색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경악과 당황에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지만 공포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어딘가 만족스러워, 레뮤엘은 전혀 그답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두렵지 않은가?"
"예...?"
"나는 디날의 국왕이다. 내 한 마디면 너는 지금이라도 죽을 수 있지. 델토르는 너무 멀고 네 목숨은 내게 달려 있는데, 그런데도 넌 내가 두렵지 않은가?"
이아네가 살짝 눈을 내리뜨자 초록색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다.
레뮤엘은 문득 갈증을 느꼈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붉은 입술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두렵지는... 않습니다."
억겁처럼 느껴지던 침묵을 깨고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저..."
"?"
"제게 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레뮤엘이 잠시 이아네의 입술을 노려보았다.
안개가 부옇게 끼어 있던 머릿속이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다. 레뮤엘조차 잊고 있던 문제의 본질이 이아네의 혀 위에서 드러나고 말았다.
레뮤엘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아네의 의아한 시선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선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냉막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가 이아네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 자야겠군."
"네, 네엣."
왠지 거부해선 안 될 분위기였다. 이아네가 고분고분 일어나서 레뮤엘을 따라 침대로 갔다. 이아네는 왠지 숨이 막혔다. 잘 자라는 말 한 마디도 없이 레뮤엘은 침대에 누웠고, 이아네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느낌이 들어 밤이 맟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아네가 눈을 떴을 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였다. 왠지 다행이다 싶어, 이아네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몸을 풀었다.
어제는 갑자기 분위기가 냉랭해져서 놀랐다. 대체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몰라도 어쨌든 그가 기분이 상한 것만은 확실했다.
굳어 있던 근육을 풀며 생각에 잠긴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가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그리고 심지어 적국의 국왕이지만, 사실은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아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확실했다.
"...윽..."
어젯밤 일이 다시 떠오르자 이아네의 얼굴이 붉어졌다. 직접 머릿속에 말하는 것 같던 귓가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이제는 이아네도 슬슬 인정해야 했다. 그도 레뮤엘이 싫지는 않았다. 애정이나 사랑의 의미가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으로서 레뮤엘은 호감이 갈 만한 사람이었다.
겨우 두 달 남짓 되는 시간이긴 했지만-그리고 대부분이 적대적이거나 무시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이아네는 본의 아니게 레뮤엘의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의 고뇌나 생각들을 엿볼 수밖에 없었다.
늘 냉철하고 이성적이었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아끼기도 했고 이아네와 체스를 두기도 했다. 좋은 왕일 뿐만 아니라, 좋은 아버지이자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만일 그가 적이 아니었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아네는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햇살이 내리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 너머로 하얀 매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하얀지 은색으로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서서히 멀어져가는 새의 궤적을 눈으로 좇다가, 이아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를 시작했다.
"아얏!"
"괜찮으십니까?"
"우, 우으으으..."
누가 제 아버지 아들 아니랄까봐 일곱 살짜리 왕자는 또래들에 비해 꽤 독한 편이었다.
잔디밭을 일곱 바퀴 뛰고 난 뒤 대짜로 드러누워 버린 것은 어제와 똑같았지만, 근육통이 꽤 심할 텐데도 이를 악물고 완주하는 모습이 볼만했다. 이아네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이 재미없는 꼬마에 대한 평가에 점수를 조금 더 주었다.
나무 타기는 어제보다 아주 조금 좋아졌다.
평생 거친 것은 만져본 적 없는 보드라운 손이었지만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겨우 손가락 한 개 정도 높이였지만, 이아네는 왕자의 근성을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며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왕자가 손에 가시가 박혔을 때, 이아네는 더 이상 리트를 시험하는 것을 그만두고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펠록스가 급히 시종을 부르러 간 사이 나무 아래에는 리트와 이아네 둘만 남았다.
이아네만큼이나 펠록스도 경계가 풀리긴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무기가 없다 해도 적국의 포로와 왕자만 남겨놓고 자리를 뜨다니.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왕자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지만.
이아네는 어깨를 으쓱하고 왕자를 바라보았다. 살짝 피가 배어나오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고운 이마를 찡그린 왕자는 귀여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왕자의 어머니, 그러니까- 레뮤엘의 전 왕비도, 찡그릴 때 저런 얼굴일까?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왕자의 작은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리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아네를 바라본다.
"...저하."
"왜, 왜 그러느냐?"
"왜 아버지를 닮고 싶어 하시는 겁니까?"
리트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갛게 물들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운 부분을 찔린 것 같았다.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저하는 충분히 아버지를 닮은 것 같은데, 굳이 닮고 싶어 하실 이유가 있으십니까?"
"......"
리트가 약간 겁먹은 눈을 했다.
살짝 좌우를 둘러본 어린 왕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헛기침을 했다.
"그야...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으니까."
"아."
"나도 아버지 같은 왕이 되고 싶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고,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존경하니까... 내가 아버지같이 되면, 사람들이 더 이상은 내게 아버지를 안 닮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리트의 눈은 동경을 가득 담고 반짝이고 있었다. 대단한 아버지. 훌륭한 왕. 모두가 존경하고 영광을 돌리는 왕국 최고의 남자.
리트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었지만 이아네는 리트의 말에서 걸리는 것을 발견했다.
"누가, 저하께서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고 했습니까?"
"...그건..."
아까까지 동경과 환희에 가득 차 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이 꺼졌다. 어린아이 주제에 꽤나 심각한 고민으로 가득한 눈에 우울함이 서린다.
"...내가 어머니만 닮았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머니만?"
그 순간, 이아네는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왕자가 짊어져온 진짜 고민을 깨닫고 말았다.
아이는 보통 어머니와 아버지를 골고루 닮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머리카락 색은 아버지로부터, 눈동자 색은 어머니로부터 하는 식이다.
그러나 리트의 보라색 눈동자는 아버지의 심청색 눈과 너무나도 달랐다. 잿빛 머리카락은 말할 것도 없다.
"다들 내가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했다."
말을 퍼뜨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왕자를 두고 무슨 말을 했을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하께선 어머니를 빼닮으셨네요.'
'그렇죠? 저도 깜짝 놀랬다니까요. 어쩜 저렇게 어머니만 닮을 수 있는지.'
'설마, 왕비 전하께 달리 연인이... '
'어머, 그런 망측한 말을.'
이아네가 주먹을 쥐었다.
"저하."
리트가 고개를 들어 이아네와 눈을 마주쳐 왔다.
"저하를 강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응?"
"열심히 강해지셔서, 지금보다 더 강해지게 되면."
이아네가 잠시 말을 끊고 리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사람들을 혼내주세요."
"흐, 흥! 당연히 그럴 것이다!"
왕자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들을 혼쭐내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리트는 오랜만에 일곱 살짜리의 미소를 지었다.
"저하!"
이아네가 고개를 돌리자 구급 파우치를 든 시종과 펠록스가 보였다.
왕자의 검술 수업은 중단되었고, 펠록스는 화가 나서 왕자를 돌려보낸 뒤 이아네를 레뮤엘의 침실로 데려가는 내내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러나 이아네는 묵묵히 그의 꾸짖음을 견디며 그저 펠록스의 곁에서 걷기만 했다. 반성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진 태연한 그 태도에 엷은 짜증을 느꼈지만 펠록스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아네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은 복도 저편으로 침실 문이 보일 때였다.
"펠록스 님."
"뭐냐?"
펠록스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물었지만 이아네는 아랑곳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저하의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이번에는 펠록스가 말이 없었다. 말을 해줘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침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펠록스가 입을 떼었다.
"...잠시 차 한 잔 할 수 있겠나?"
"네."
이아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펠록스가 방향을 바꾸어 왕궁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성 안에는 기다란 복도가 여기저기 뻗어 있고 수많은 방들이 있었지만 이아네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신기하게 이 쪽 저 쪽을 둘러보며 펠록스의 뒤를 따른다.
아치 형 창문 너머 성 뒤편의 호수 끄트머리가 보였다.
수많은 문들 중에서 펠록스는 비교적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작긴 했지만 벽이나 천장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태피스트리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화려했다. 복도를 지키던 시종에게 간단한 차를 내올 것을 부탁한 뒤, 펠록스가 티 테이블에 앉아 이아네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정교하게 세공된 자작나무 의자에 앉으며 이아네는 방을 둘러보았다. 누가 보아도 상당히 정성을 들인 곳임에 분명했다.
"귀부인들의 유희실이었다."
"...아아, 네."
이아네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는 태피스트리의 그림에 더 관심이 간다.
훤칠하고 늠름한 장신의 남자가 서 있고, 그 곁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남자의 눈과 머리카락은 짙은 푸른색이었고 여인은 잿빛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였다.
시종이 들어와 간단한 다과와 차를 담은 쟁반을 내려놓았다.
펠록스가 별 말 없이 차를 들이켜기에 이아네는 다시 태피스트리의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대편 벽에는 아름다운 기사가 왕관을 쓴 남자에게 기사 작위를 받고 있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훌륭한 솜씨로 기사의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가 표현되어 있었다.
...어라?
"저, 펠록스 님."
"그래."
"저 그림 말입니다. ...누구...입니까?"
펠록스의 입술이 희미하게 호선을 그린다. 이아네가 한 말의 어느 부분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펠록스를 흡족하게 한 것은 분명했다.
"폐하의 호위 무관 르우엔 경이다."
"르우엔?"
"질리언 던롭 르우엔. 충직한 신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좋은 친우였지. 그가 어린 폐하에게 달려드는 표범을 맨손으로 무찌른 일화는 이미 디날에선 전설에 가까운 미담이다."
"아..."
이아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태피스트리의 구조상 초상화처럼 세밀하지는 못했지만 실루엣이나 윤곽으로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소녀들을 설레게 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데 저 사람..."
잠시 펠록스의 눈치를 본다. 그러나 펠록스는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더 머금었을 뿐이었다.
최대한 이상하게 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동자가... 보라색이군요."
"그래. 보라색이지."
펠록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이아네가 스스로 깨닫길 기다렸다.
왕의 호위기사. 그를 가장 가까이 보필했던 사람. 왕은 물론, 왕비와도 친근했던 자. 그리고 왕자와 같은 눈동자 색.
"...말도 안 돼..."
"그렇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펠록스의 입술이 한숨을 품는다.
이아네는 자신이 방금 엄청나게 실례되는 상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당시 보편적인 소문이었음도 깨달았다.
왕자의 눈이 보라색인데다 어머니만 빼닮은 사실을 알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왕이 아니라 왕 곁에 시립한 아름다운 기사였을 것이다. 왕과 왕비의 가장 가까운 곳에 늠름하게 선 보라색 눈의 기사.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전 왕비의 외도 여부는 공공연한 나라 안팎의 이슈였고, 그런 말은 폐하의 귀에는 전혀 들어갈 수 없었기에 소문은 점점 커져만 갔지. 게다가 저하께선 당시 너무 어리셨다. 폐하는 훌륭한 왕이셨지만, 갓난아기를 어르는 데에는 서투르신 분이었고."
문득 이아네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두세 살,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아기. 레뮤엘의 서투른 손길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어머니의 품 안에서 금세 잠이 든다.
"폐하께서는 왕비 전하께서 외도를 하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저 아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정도만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훨씬 복잡하고 은밀한 상상력으로 디날 왕가를 모욕하기 시작했지."
"그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아네의 질문에 펠록스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
"사실 성내에서는 그를 추궁하려는 움직임이 꽤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왕비 전하를 모욕하지 말라며 화를 냈고, 그 강경한 태도에 더는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는 꿋꿋하게 폐하 곁을 지키다..."
펠록스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성을 떠났다."
"...예?"
"폐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떠났다기보단 먼 동방으로 떠나는 상선의 호위 임무를 맡아 출항한 것이지만 실상 기사직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지."
"대체 무슨 이유로..."
"아무도 모른다."
펠록스가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서 그를 따로 불러 여러 모로 설득하셨지만 아무도 그의 강경함을 꺾을 수 없었다. 뭐 왕성 쪽에서는 좋은 일이었지. 소문의 근원이 되는 이가 사라진다면 소문은 얼마 안 가 잠잠해질 테고, 저하께서 자라면서 폐하를 닮게 된다면 남은 의심도 자연히 사그라질 테니까."
"그렇군요."
이아네가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마음이 조금 밝아진 느낌이 든다.
"그럼 그 기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
펠록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
"죽었다."
"엇."
이아네는 전에도 이런 상황을 겪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최근에도 누군가 저렇게 담담한 얼굴로 '죽었다'라고 말한 것 같은 느낌이-
"...앗."
이아네의 눈이 문득 태피스트리의 여자에게 가 꽂혔다.
아름다운 왕비. 레뮤엘의 곁에 서서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왕자의 어머니.
"어, 하지만 왕비 전하도 돌아가셨다고-"
"돌아가셨지. 3년 전에."
"......"
"르우엔 경이 죽은 것은 4년 전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아아..."
이아네가 살짝 뒷목을 긁었다. 으음, 민망하구만.
그러나 펠록스는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 둘의 죽음을 연관 짓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출항했던 상선이 돌아왔을 때 그는 없었다. 뱃사람들 말로는 그가 바다에 빠진 선원을 구한 뒤 기력이 다해 그대로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답다고 해야 할까..."
펠록스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펠록스도 그와 친분이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소문에 휩싸인 르우엔 경을, 펠록스는 동정했을 것이 분명했다.
"폐하와 왕비 전하께선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1년 후 왕비 전하께서 돌아가셨지."
"아..."
"사고였다."
펠록스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끔찍한 사고였지."
"어떤...?"
"궁금증은 풀렸나?"
펠록스가 이아네의 말을 끊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문득 이아네는 여기에서 더 이상 궁금해해선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