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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프로모션 (6/27)

5. 프로모션

레뮤엘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기둥에 묶여 있던 이아네가 흠칫 고개를 돌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이상하다는 듯 그를 응시하지만 이아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막사 입구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레뮤엘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느껴지는 시선에 결국 고개를 들고 말았다. 이번에는 초록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이아네도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레뮤엘은 잠시 이아네를 바라보다 서류를 덮고 일어났다. 예민한 편이긴 하지만 이런 일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데, 이아네의 이런 이상한 시선은 레뮤엘의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며칠째 따라붙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보면 이아네가 자신을 보고 있다. 아닌 척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면 자기도 뭔가 떳떳한 마음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물어도 대답을 안 하니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레뮤엘은 한숨을 쉬며 탁자에 쌓인 서류들을 내려다보았다.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들은 아니지만 전쟁 중에는 무엇이든 신속해야 한다. 레뮤엘의 신속한 결재 덕에 디날군은 그럭저럭 잘 버텨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저 포로가 다 망치고 있다!

"대체 불만이 뭐냐."

"...그런 것 없습니다."

저것 봐. 또 아무것도 아니라며 넘겨버리는 저 행태가 레뮤엘에게는 몹시 짜증나는 일인 것이다. 살짝 이마를 찌푸렸지만 이아네는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레뮤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리 된 것, 일찍 잠이 들어야 하나 싶어 레뮤엘이 덮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그때, 레뮤엘은 발견했다.

아주 순간적이긴 하지만 이아네의 어깨가 흠칫하며 움츠러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인 데다 이아네는 금세 경계를 풀었지만 레뮤엘은 어딘지 석연찮은 눈으로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이아네가 고개를 들다 레뮤엘의 심청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는다. 왜 보냐는 듯, 오히려 도전적인 눈빛. 아무 말 없이 그 눈을 마주 보던 레뮤엘이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별 의도는 없었다. 그저 이아네 뒤에 있던 침상으로 가려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이아네는 몸을 움츠렸다. 다리를 모아 무릎을 가슴에 딱 붙이며 경계 태세를 갖춘 이아네의 모습은 마치 불한당에게 잡혀온 순박한 마을 처녀 같은 인상을 주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레뮤엘은 충격을 받았다. 방금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아네의 경계 서린 눈빛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탓이다.

그것은 명백히 겁간에 대한 공포였다.

"...너?"

"......"

흠칫 몸을 떨며 이아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 레뮤엘의 입술에서 어이없는 한숨이 흘렀다.

어딘지 위화감이 들던 퍼즐 조각이 끼워 맞춰진 듯한 느낌에 레뮤엘이 조심스레 머릿속 귀퉁이에 적어둔 이름을 내뱉었다.

"제롬, 인가?"

"!"

이아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동공이 확장된 초록색 눈동자에 주홍색 불빛이 비친다.

-그 순간, 레뮤엘은 그 초록색 눈동자가 마법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어, 어떻게 그 이름을..."

"...'그'가 네 연인이었군."

이아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물들었다. 흐릿한 불빛 안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빨개진 귀가 어스름한 막사 안에서도 보였다.

"여, 연인이 아닙니다!"

"아니라면, 뭐지?"

그토록 매달리며 사랑스럽게 불러 대던 이름이 연인이 아니라면, 그럼 그저 혼자 하는 짝사랑인가? 레뮤엘이 살짝 미간을 좁히는데 이아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로서는 감히 바라보기도 힘든 분입니다."

"...이해할 수 없군. 라이오넬 기사단이라면 꽤 높은 직책으로 알고 있다. 네 위치라면 귀족 자제라도 반려로 맞아들일 수 있을 텐데."

레뮤엘은 어느새 이 포로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강직한 초록빛 눈동자가 무슨 마법을 부리는지 몰라도, 레뮤엘은 자신이 늘 지켜 오던 질서와 원칙이 이 고지식한 기사 앞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이아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 따위가... 넘볼 분이 아닙니다."

북받치듯 한 음절씩 깨무는 이아네의 목소리에 레뮤엘은 이제 그가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살짝 몸을 기댔던 탁자에서 허리를 들고 레뮤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아네의 곁을 스쳐 지났다.

그러나 레뮤엘은 바로 침상으로 가지 않았다.

이아네의 곁을 스쳐 지났던 레뮤엘은 잠시 멈춰 서서 머뭇거리다 뒤를 돌아보았다.

막사 기둥에 묶인 채 고개를 숙인 포로의 등이 오늘따라 작아 보였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이아네의 눈이 담고 있던 감정을 너무나도 잘 안다.

절망과 갈등.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분노와, 억울함.

그래서, 레뮤엘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조금 길어져 이제 목까지 덮고 있는 까만 머리카락에 손가락이 살짝 닿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아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레뮤엘의 손가락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거두어졌다. 타닥타닥, 주홍빛 불빛에 반사된 이아네의 귀가 붉었다.

다음날 아침, 이아네는 막사 바깥이 소란스러운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레뮤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의복을 다 갖춘 상태였고 그런 레뮤엘을 약간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이아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독한 남자다.

제르멘도 잠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 남자는 정말 독했다. 요 며칠간 조용히 그를 지켜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이아네가 눈을 뜨면 늘 그는 얼굴을 씻고 있거나 식사 중이었다. 계속 막사 안에 있다 보니 시간관념이 없어진 것도 이유였지만 이아네도 기사단에서 훈련받은 기본이 있어 푸지게 자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아침에 일어나 정무회의를 다녀온 뒤 늘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한다. 저녁은 다른 곳에서 먹고 올 때도 있었지만 대개 막사로 돌아와 해결하고 식사 후 드래고니안 회의에 참석해 보고를 받았다.

겨우 밤이 되어 옷을 갈아입고 난 뒤에는 탁자에 앉아 끊임없이 이어지는 결제서류들을 들추고 첨삭하거나 승인을 해 나갔다. 심지어 이아네보다 늦게 잠드는 날도 있었다. 그에 비교하면 이아네는 팔이 묶였다고 불평하기 미안할 정도로 참 편안한 팔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정말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바쁘고 빡빡한 스케줄을 보내는 디날의 국왕을 보면서 이아네는 어쩔 수 없이 이 고지식한 남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실하고 신속히 자신의 일을 처리해 나가는 모습은 적국의 왕이라도 인정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이것을 알리고 싶으셨던 것일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이아네는 레뮤엘이 막사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쩐지 요즘 정신이 들어 보면 레뮤엘 생각만 계속하고 있다. 그것이 조금 부끄러워 이아네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레뮤엘이 흘끔 이아네를 돌아보곤 탁자로 가 가져온 서신을 폈다. 둘둘 말린 종이에는 무언가 빼곡히 써내려간 흔적들이 박혀 있다.

아무런 동요 없이 서신을 훑어내린 레뮤엘은 다시 흘끗 이아네 쪽을 바라보았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초록색 눈동자를 얌전히 내리깐 채 이아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신을 대충 갈무리해 탁자 위에 올려둔 레뮤엘이 답신을 써내려갔다. 한참 동안 종이 위를 사각거리는 펜 소리만 막사 안을 울렸다.

보내온 서신에 비해서는 한참 짧았지만 어쨌든 생각해야 하는 시간은 길었다. 신중하게 서신을 다 써내려간 레뮤엘이 받은 것과 보낼 것을 다 챙겨 일어나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문득 막사 입구에 멈춰선 레뮤엘은 뭔가 잠시 생각하다 침상 쪽으로 돌아섰다. 한 번도 그가 대낮에 침상으로 향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이아네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아네는 의아함을 넘어 당혹감을 느끼고 할 말을 잃었다.

어깨에 내려앉은 가볍고 부드러운 감촉이 낯설었다.

"...?"

이아네가 해답을 구하듯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레뮤엘은 여전히 무신경한 얼굴로 이아네의 어깨에 담요를 펼쳐 덮는 데만 열중했다.

"뭡니까?"

"...담요다."

누가 그걸 물었습니까. 너무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는 바람에 맞받아치는 타이밍까지 잊어버린 이아네를 그대로 두고 레뮤엘은 막사를 나섰다.

이아네의 헛기침 소리에 혹시 그가 감기라도 들었나 살짝 양심에 찔려 담요를 덮어 주었다는 것을, 이아네가 눈치챘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막사를 나온 레뮤엘이 의료진 막사로 향했다. 옆에 따라붙은 펠록스는 레뮤엘의 손에 쥔 서신을 보고 조금 표정이 어두워졌다.

레뮤엘의 발걸음은 발로아 경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몸은 어떤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확실히 호전되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혈색도 좋고 어느 정도 살이 오른 상처를 감은 붕대에는 더 이상 핏자국이 배어나지 않았다.

"오늘 아침 도착한 서신이다."

레뮤엘이 들고 있던 서신을 내밀었다. 발로아 경이 그것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발로아 경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와그작 가장자리가 구겨졌지만 그는 힘을 빼지 않았다.

교묘하고도 우아한 문장이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대체 이것이..."

"유감이지만,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내게도 힘든 일이다. 그러니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을 테지."

"...알겠...습니다."

발로아 경이 힘없이 편지를 놓았다. 그것을 갈무리한 레뮤엘이 잠시 뜸을 들이다 한마디 덧붙였다.

"...어차피 희생할 거라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그대의 군대까지 피를 흘릴 이유는 없어."

"...폐하."

"귀화한다면 그대들은 이제 내 국민이고 내 보호 하에 있게 된다. 기사가 아니라 평민으로 살게 되겠지만 그 정도는 참작할 수 있겠지."

"...감읍합니다, 폐하. 다만..."

"다만?"

발로아 경이 잠시 머뭇거리다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아네... 제 아들에게는, 이 서신의 내용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왜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초록색 눈동자에 레뮤엘은 내심 당황했다. 이것 참, 같은 지붕을 이고 산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상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로군.

레뮤엘의 표정이 생각보다 언짢아 보이지 않자 발로아 경이 조심스럽게 속을 내보였다.

"...스타시아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국왕 폐하와 함께 검을 맞대며 자라온 아이입니다. 국왕 폐하만을 바라보며 그 곁에서 지내 왔으니 충격이 클 겁니다."

순간적으로 레뮤엘의 머릿속에 델토르 국왕의 이름이 스쳐 지났다.

제르멘, 라, 스타시아.

‘저 따위가... 넘볼 분이 아닙니다.’

...혹시?

"...이런 것은, 그 아이는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제가 배반의 누명을 쓸지언정... 아비 된 자로서 그 아이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보고 싶지 않습니다."

레뮤엘의 눈썹 사이가 조금 일그러졌다.

가슴 아프도록 잘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안타깝지만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을, 레뮤엘은 너무나 가슴 깊숙이 이해하고 있었다. 레뮤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발로아 경이 한숨을 쉬곤 괴로운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차라리 좋겠습니다."

"......"

"붙잡힌 포로를 어찌 해도 상관없다는 국왕의 밀서 따위...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발로아 경의 그늘진 얼굴이 가장자리가 구겨진 서신 위로 떨구어졌다.

'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 때에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 드리다니, 우민한 결정 탓에 귀한 분께 짐을 지워 드린 것이 한없이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사죄의 의미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라이오넬의 기사들은 쉽게 뜻을 굽힐 이들이 아닐 것이매, 처분은 귀하의 손에 붙이도록 하겠으니 부디 노여움 푸시길 바랍니다.

아, 다만, 마지막 순간에 고통은 없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델토르의 국왕은 그들을 버렸다. 민감하고 부드러운 뱀의 혀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 독을 숨기려 했으나 결국 뜻하는 바는 하나.

그들은 버림받았다.

처음부터 제르멘은 라퓨타를 정복할 생각이 없었던 거다. 라이오넬 기사단의 파견은 그저 허울 좋은 구실일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는 이 전쟁을 일으켰던 것일까.

혼란스러워하는 발로아 경을 말없이 바라보면서도 레뮤엘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날, 히노이 성에 갇혀 있던 델토르 기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델토르 국왕의 서신을 모두 읽었다. 어떤 이들은 분노했고 어떤 이들은 망연자실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들은 라이오넬 기사단이었고, 스타시아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해온 그들에게 델토르 국왕의 서신은 충분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루 동안의 참작 기간이 주어진 뒤, 델토르의 기사들은 귀화 증명서에 서명한 다섯 명만 남겨 두고 모두 처형되었다.

* * *

이아네는 문득 눈을 떴다.

여전히 어두운 밤이었다. 한동안 이아네는 자신이 왜 잠에서 깼는지 알지 못하고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모닥불이 반쯤 꺼져 가고 있는 가운데, 이아네는 마침내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깼군."

레뮤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이아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레뮤엘이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하는 것은 그동안 질리도록 봐왔다. 식사하거나, 집무를 보거나, 회의를 하거나. 그러나 이아네는 그가 취한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홀로 앉은 탁자 위에는 짙은 초록빛의 긴 술병이 놓여 있었다. 이미 꽤 마신 듯 이아네가 있는 곳까지 알싸한 향기가 풀겨 왔다.

늘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고 질서정연한 레뮤엘이 이렇게 무너진다는 것이 이아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냉막한 왕이 밤늦도록 혼자 술잔을 기울인단 말인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

이아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위가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레뮤엘의 얼굴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제르멘은 기분이 좋을 때만 술을 입에 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그 반대의 유형임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 했다."

"......"

"그런데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은 건가?"

이아네의 눈꼬리가 누그러졌다.

제아무리 국왕이라도 인간이었다. 처음으로, 이아네는 레뮤엘에게 반감 대신 동정을 느꼈다. 놀랄 일이었지만 적어도 이아네가 지켜봐온 바로서는 그는 정확한 사람일지언정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아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늦은 밤과, 타다 남은 모닥불과, 눈앞에 취한 적국의 국왕이라니 우스꽝스러운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이아네는 눈을 감았다.

"대가는... 아무것도 없다 해도,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후회는 없습니다."

그래. 후회는 없다.

그것이 솔직한 이아네의 심정이었다.

잘못된 길이든 옳은 길이든, 그 마지막을 맛본 사람은 어찌 됐든 완성의 단계에 서 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아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좋지 않은 끝이 아니라, 제대로 끝이 나지 않는 과정이었다.

"...너는..."

레뮤엘은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레뮤엘의 심청색 눈이 일렁였다. 그 안에 담긴 알 듯 모를 듯한 감정이 이아네를 향한다. 여름날 잎사귀 색의,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저 포로는 자신의 처지를 알까. 그토록 사랑하고 따르며 충성을 바친 그의 주군이, 다름 아닌 자신을 적진 한복판에 던져두고 외면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레뮤엘이 말없이 탁자에서 일어났다. 인기척에 이아네가 눈을 떴다. 레뮤엘이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아네가 눈을 크게 뜨고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을 흐트러진 모습으로, 레뮤엘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아네 앞에 섰다.

어쩐지 두려워져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아네는 고개를 숙이고 눈앞에 보이는 워커의 신발코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너는. 모른다."

레뮤엘의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려온다.

"너는... 몰라."

털썩, 하고 이아네의 몸 위를 무언가가 무겁게 짓눌러 왔다. 깜짝 놀란 이아네가 버둥대는 순간 이아네의 어깨로 몸 전체를 기댄 레뮤엘이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레뮤엘은 눈을 감았다.

잠결에 무언가 괴로운 듯 끙끙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귓가로 느껴지는 괴로운 숨결에 자신마저 심장이 미어졌다.

누군가 괴로워하고 있다.

낮은 신음소리는 끊임없이 귓가를 괴롭혔다. 끊길 듯 말 듯 계속되는 신음은 종국에는 낮은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울지 마. 왜 우는 거야.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 거냐.

"큭..."

"윽... 흐윽..."

눈이 뜨이기 전에 촉각이 먼저 살아났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체온이 느껴진다.

그 다음 살아난 것은 통각이었다. 깨질 듯 아픈 머리와 바닥에 짚은 무릎이 아려왔다. 불편한 자세로 오랫동안 있었는지 몸 여기저기가 배겨왔다.

"하윽... 큭..."

또다.

훨씬 생생하게 들리는 신음소리에, 레뮤엘은 결국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막사 기둥이었다. 그리고 기둥에 묶인 손. ...손?

레뮤엘의 멍한 머릿속에서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걷혔다. 동시에 귓가에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더 크고 또렷해졌다.

"...하아, 읍... 흑..."

레뮤엘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신음소리가 멎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게 무슨..."

"크...윽, 깨어나셨...으면, 좀...비켜 주시겠... 윽."

이아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레뮤엘이 놀라 얼른 몸을 일으켰다.

레뮤엘이 방금까지 기대고 있었던 것은 이아네의 어깨였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레뮤엘은 그가 이아네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팔이 뒤로 묶여 있어 안 그래도 어깨에 쥐가 날 지경인데 불 난 데 기름 부은 격으로, 레뮤엘이 그 위로 엎드려 있었으니 그야말로 팔이 빠지기 직전이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눈물을 보이는 추태까지는 참아냈으나 취한 성인 남자의 체중을 받아낼 만큼 강건한 신체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아네는 밤새 끙끙 앓으며 그대로 레뮤엘의 몸을 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자 레뮤엘은 지체 않고 이아네의 팔을 묶은 줄을 잘라냈다.

"헉, 크윽..."

힘없이 앞으로 무너지는 이아네를 가볍게 한 팔로 받쳐 든 레뮤엘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실수로군.

조심스레 어깨를 잡고 일으키자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린다.

"...아픈가?"

"...아닙니다."

분명히 아플 텐데, 방금까지 울음 섞인 신음소리를 잇새로 흘려내던 주제에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젓는 품이 어쩐지 귀여웠다. 의외로 어린아이 같은 데가 있다고 생각하며 레뮤엘이 이아네의 무릎 아래와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아네가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번쩍 들어올렸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밤새 괴롭힘 당한 포로를 또 묶어 놓을 정도로 야박한 인간은 아니다."

"내, 내려주십시오! 내려놓으라구요!"

그러나 레뮤엘은 이아네의 항의를 싹 무시한 채 자신이 늘 눕던 침상에 이아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아네의 가슴을 지그시 누른 채 조용히 속삭였다.

"가만 있거라. 조금 아플 테니."

그리고서 레뮤엘은 이아네의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처음에는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츰 근육이 풀려갔다. 너무 태연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아네의 어깨를 풀어 주는 행태에 이아네도 화를 내는 것이 무안해져 제풀에 입을 다물었다.

기묘한 분위기 속에 시간이 흘렀다.

레뮤엘 쪽에선 선의로 베푼 행동이었겠지만 이아네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팔을 풀어준 것은 고마웠지만 이런 것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아네는 기사로 자랐고 고위 귀족도 아닌 군인 집안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챙기는 것에 익숙했다. 조금 아프다고 해도 팔이 젖혀진 근육통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왕이라는 고귀한 신분이다. 그런 자가 직접 이아네에게 손을 댄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레뮤엘에게는 그것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레뮤엘은 이 포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밤새도록 시달렸을 텐데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 시간들을 잘 참아낸 것이 대견할 정도다. 물론 그가 포로의 입장인 이상 무슨 짓을 당해도 이상하지는 않겠지만 레뮤엘은 그를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됐습니다.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군."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이아네가 조심스레 레뮤엘의 손을 밀어내자 레뮤엘도 더 이상 고집피우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강렬한 심청색 눈동자는 이아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어서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것이 레뮤엘에게는 본의 아니게 언짢게 비춰졌던 모양이었다.

"...왜 피하는 거지?"

"피... 피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도 똑바로 들지 않으면서 피하지 않았다니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지만 이아네는 사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거북스러웠다. 그 강렬한 심청색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무언가 속에 있는 마음을 들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피하고 있지 않나."

조금 부아가 치민 레뮤엘이 손을 뻗어 이아네의 턱을 잡았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그의 손은 유난히 차가웠다.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온기가 아니라 얼음이 매달린 듯한 냉기가 서려 있어, 손가락이 턱에 닿는 순간 이아네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아."

레뮤엘의 손이 잠깐 멈칫했지만 여전히 이아네의 턱을 잡은 손은 거둬지지 않고 있다.

어딘지 조금 쑥스러워하는 듯한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레뮤엘은 심지어 약간 즐겁기까지 했다. 이 고집스러운 포로가 수줍음을 타다니 생각지도 못한 월척이다.

그러나 이아네 쪽에서는 조금 달랐다.

어찌 됐든 상대에게 턱을 붙잡힌 이 상황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다. 일단 이 손을 거부한다고 해서 죽일 것 같지는 않았기에 이아네는 조심스레 고개를 흔들며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레뮤엘의 파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잠시 시간을 두고서 레뮤엘은 찬찬히 이아네와 시선을 마주했다. 묘하게도 평온해진 그 시선은 왠지 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느껴졌다.

레뮤엘이 마침내 이아네의 턱을 놓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레뮤엘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아네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오늘은 누워 있어라."

"...예?"

"어깨가 나으려면 한참 있어야 할 테니까."

이아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레뮤엘이 만족한 듯 손을 떼었다. 그리고 문득 재미있는 일이 생각난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때야말로 이아네는 충격을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레뮤엘이 아무리 국왕이라 해도 그 역시 인간이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아네는 지금 그의 눈앞에서 레뮤엘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서야 그가 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견 날카로워 보이는 이목구비지만 입술이 살며시 올라가는 그 희미한 변화에도 순식간에 인상이 바뀐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가라앉으며 눈꼬리가 접힌다. 늘 표정이 없던 얼굴에 부드러운 화색이 감돌았다. 어색할 정도로 극적인 변화에 이아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입을 벌렸다.

아쉽게도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그러나 이아네는 멍하니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뒤돌아 막사 바깥을 빠져나가는 레뮤엘의 등이 그날따라 넓어 보였다.

레뮤엘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발로아 경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피투성이가 된 옷을 버리고 받은 발로아 경의 새 군복에는 푸른 고래 자수가 왼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기분은 좀 어떤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조금 떨떠름한 얼굴의 발로아 경은 어색한 듯 푸른 고래를 계속 내려다보았다.

귀화라고는 하지만 결국 조국을 배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심정을 모를 리 없는 레뮤엘이 따라 나오라는 듯 턱짓을 했다. 발로아 경이 어설프나마 침상에서 내려섰다. 화살이 박혔던 넓적다리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지만 다행히 이제는 걷는 데에 지장이 없었다.

절뚝이긴 했지만 레뮤엘은 그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부터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야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군인에게는 전장에서의 부상이 수치가 아니다. 오히려 발로아 경은 레뮤엘이 자신을 완벽하게 '국민'으로 취급하는 것에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

레뮤엘이 들어선 곳은 작고 깔끔한 회의소였다. 다른 천막보다 조금 작은 듯한 이 막사 안에는 평평한 테이블과 온갖 공문서와 자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 집무를 위한 곳이었다.

레뮤엘이 자리에 앉은 뒤 발로아 경에게 의자를 권했다. 좁은 막사 안에는 레뮤엘과 펠록스, 발로아 경뿐이다.

"우리에겐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지금 델토르와 교전 중인 곳은 헤루비나와 에노타, 스에힐리까지 세 곳이지만 최근 델토르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라퓨타로 내려오기보다 헤루비나를 뚫으려는 듯한데, 그대의 생각은?"

"헤루비나...말씀이십니까?"

디날의 지리는 잘 모르는지라, 발로아 경이 테이블에 펼친 지도를 살폈다. 아델 강 허리쯤에 걸친 커다란 성.

"...수도까지, 일직선이군요."

"뚫리면 가장 난감한 곳이다. 디날 군이 총 출격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

"...드래곤을 보내셔야 할 겁니다."

발로아 경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펠록스의 어이없는 눈빛에도 레뮤엘은 발로아 경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국왕 폐하의 목적은 라퓨타가 아니니까요."

"......"

레뮤엘이 미간을 좁히며 지도를 내려다보는 척했다. 의외로 정곡을 찌르는 구석이 있군.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더니 과연 전세가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눈이 있었다.

이것, 의외로 물건을 건졌는지도.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실제로 델토르에서는 최정예 부대를 가장 먼저 라퓨타에 보냈지 않나?"

"그리고 그 군대는 지금 전멸했지요."

반박하려던 펠록스가 입을 다물었다. 발로아 경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그의 주장을 철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드래고니안을 출격시키셔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전쟁을 끝내게 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뭔가?"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레뮤엘은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만약 국왕 폐하께서 라퓨타를 차지하려 하셨다면, 저희가 갈 곳은 라퓨타가 아니라 여기였을 겁니다."

발로아 경이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헤루비나."

"왜지?"

"저희는 델토르에서도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폐하를 가장 가까이 모시며 충정으로 스타시아 왕가를 섬기는 최정예 기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라면, 디날에서도 가장 먼저 주목하지 않겠습니까?"

"......"

"국왕은 아마 그것을 노렸을 겁니다. 저희는 그저 아주 값비싼 미끼였을 뿐입니다. 덕분에 국왕은 훌륭하게 디날의 국왕을 라퓨타로 유인해냈고 케닛은 비어 있지 않습니까."

펠록스가 할 말을 잃고 발로아 경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인 뒤 지도를 다시 눈으로 훑었다.

"전쟁을 최대한 일찍 끝내려면 차라리 드래곤을 모두 출격시키는 편이 나을 겁니다. 방심하고 있을 때 쳐 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펠록스는 난감한 눈으로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레뮤엘은 아무런 동요 없이 그저 조용히 책상 위의 지도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레뮤엘은 무언가를 고심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막사 안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그대의 의견은."

레뮤엘이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발로아 경이 고개를 들었지만 레뮤엘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깎아 만든 조각처럼 고요한 심청색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고려해 보겠다."

반 긍정의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발로아 경은 왜 레뮤엘이 그토록 오랜 시간을 들여 대답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 디날이 라퓨타를 점령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쟁을 끝낸다면 라퓨타는 자연스럽게 디날의 영지가 된다. 충분히 이득이 되는 부분일 텐데도 레뮤엘은 어딘지 전쟁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막사를 나온 후 발로아 경은 원래 자신이 머물던 천막으로 돌아갔다. 침상에 누워 치료를 받으면서 발로아 경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은 레뮤엘도, 이 전쟁의 원인이 라퓨타가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등골이 서늘해지며 뒷덜미에 식은땀이 솟는다. 어딘지 모를 불길함이 그를 엄습해 왔다.

레뮤엘이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 이아네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레뮤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난 이아네가 침상에서 내려와 섰다.

"어깨는 괜찮은가?"

"...예."

대답하면서 이아네는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이게 그렇게 자존심 상할 일은 아닌데, 적국의 왕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 이아네로서는 상상조차 못 해 본 상황이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레뮤엘은 여전히 그런 이아네의 심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겉옷을 벗어 시종에게 건네준 디날의 국왕은 여느 때처럼 정무를 보려 탁자에 앉았다.

잠시 눈치를 보던 시종이 옷을 갈무리한 뒤 이아네를 다시 막사 기둥에 묶어 두려 줄을 가지고 다가갔다. 어차피 여기에서 반항해 봤자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아네도 얌전히 시종의 손길을 받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뭐 하는 거냐."

"포로를 결박..."

"아직 그를 묶으라고 한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시종이 당황한 얼굴로 이아네 곁에서 물러섰다. 이아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레뮤엘을 바라본다.

동그래진 이아네의 초록색 눈동자가 어쩐지 기분이 좋아,레뮤엘은 살짝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감추려 괜한 헛기침을 했다. 입가를 가렸던 손을 내리고 레뮤엘은 시종에게 손짓했다.

"가서 체스판을 준비해 오거라."

"예."

시종이 나가고 이아네는 여전히 침상 옆에 멀뚱멀뚱 서 있었지만, 레뮤엘은 보던 서류를 다시 훑었다.

국왕과 단둘이 남은 상황.

이대로 그를 제압하고 막사 뒤쪽으로 살그머니 빠져나가 델토르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레뮤엘을 살폈다. 조용한 막사 안에 서류 넘기는 종이 소리가 울린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레뮤엘이 문득 골치아픈 사안을 발견한 듯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감고 팔짱을 끼었다.

절호의 기회다.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다. 지금, 이 남자를 덮치고 저 잘난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 넣는다면.

호흡이 가빠졌다.

델토르에 돌아갈 수 있다. 제르멘의 곁으로, 그의 곁으로. 그 푸른 눈동자를 다시 마주할 수 있어.

이아네가 주먹을 쥐었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대령했습니다."

"그쪽에 두어라."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이아네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아무도 모르는 탄식이 새었다.

도망치지 못했다.

시종이 체스판을 가지고 들어오는 순간 레뮤엘은 눈을 떴고, 이아네는 여전히 침상 옆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왜.

왜, 그를 해치지 못했을까.

이아네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망설임으로 날려 버리다니 이아네답지 않았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이아네는 조금 안도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를 해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아네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며 살짝 미소를 짓던 레뮤엘의 얼굴이 있었다. 이아네에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 준 사람에게 그는 도저히 칼을 들이댈 수 없었다.

자책과 후회와 안도 속에서 이아네는 혼란스러워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레뮤엘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다.

"...로아. 발로아."

"...옛?"

이아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레뮤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깊은 심청색 눈동자에 이아네는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고 목이 뜨거워졌다.

"체스, 둘 줄 아나?"

잠시 고민하다, 이아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배운 적이 없습니다."

레뮤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시선 속의 놀라움을 읽은 이아네의 목이 다시 뜨거워졌다.

체스를 못 두는 것이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지만, 체스는 귀족 자제들의 일반적인 유희였다. 글은 못 배워도 체스는 배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으므로 군인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대중적인 게임을 성인이 되어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는 것은, 체스를 배울 여유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거나 바빴거나 둘 중 하나뿐이었다.

"배운 적이 없나?"

"...폐하를 모시는 데 체스를 잘 둘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레뮤엘이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아네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아네가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모셔왔다는 것은 발로아 경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 동안 필요 없다는 이유로 지극히 일반적인 부분까지 포기했다는 것은 레뮤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이런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델토르의 국왕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레뮤엘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손을 들어 자신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이아네가 쭈뼛쭈뼛 레뮤엘 곁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의자에 앉은 이아네가 의아하게 레뮤엘을 바라본다.

이아네를 앉으라고 한 것은 자기면서, 레뮤엘은 이아네가 없는 것처럼 체스판을 펴고 체스 말들을 그 위에 배열했다. 하얀 말과 대조적인 검은 말들이 체스판의 양끝에 놓였다.

"한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듣도록."

"...예?"

"킹. 퀸. 나이트. 비숍. 룩. 그리고 폰."

"......?"

"간단히 말해, 상대의 킹을 잡는 게임이다. 폰은..."

"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이아네가 당황한 얼굴로 레뮤엘의 말을 막았다. 레뮤엘이 뭐 잘못된 거라도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이아네를 바라본다.

"저, 지...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나. 체스를 가르쳐 주려는 거다."

"그러니까, 왜 제게 체스를 가르치는..."

"혼자서 체스를 할 수는 없으니까."

레뮤엘이 이아네의 말을 싹둑 자른 뒤, 하얀 손가락으로 체스판 위의 말들을 가리키며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이아네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해서, 퀸은 가장 강력한 말이 되지. 이해했나?"

"어... 네."

이아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헷갈리긴 하지만 이아네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일단 각 말들의 특성과 움직이는 법에 대해서는 대충 숙지가 끝났다.

"빨라서 좋군. 그럼 나부터 시작하지."

"저, 지금 하는 겁니까?"

"초보자라고 해서 봐주는 건 없다."

따각.

레뮤엘의 하얀 폰이 움직였다. 이아네가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레뮤엘을 바라보았지만 레뮤엘은 네 차례다, 라는 눈으로 무심히 이아네를 응시할 뿐이었다.

"...제길."

낮게 욕을 내뱉은 이아네가 이를 악물었다. 왜 내가 여기서 체스 따윌 두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나 이미 피스는 움직였다. 시작하면 일단 끝을 보는 이아네의 본능은 결국 폰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따각.

레뮤엘의 입가에 보일락 말락한 미소가 피어났다 곧 사라졌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다.

"-체크메이트."

"익!"

"...정말 못하는군."

"당연한 거잖습니까!"

이아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뮤엘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흥분한 이아네의 초록색 눈동자를 감상 중이었다.

내리 몇 판째 지고 있는지 몰랐다. 레뮤엘은 꽤 체스를 즐기는 편이었고, 실력도 상당하니 오늘 처음 체스를 배운 이아네가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뮤엘은 처음 몇 개는 여유롭게 말을 내주었지만 늘 마지막에 허를 찔렀다. 가장 강력한 말이라는 퀸을 쓰러뜨리고 이아네가 좋아하고 있는 동안 폰으로 이아네의 킹을 잡는 식이었다.

"치사해..."

이아네가 툴툴대며 체스 말을 다시 배열했다. 레뮤엘은 속으로 웃었지만 겉으로는 티내지 않고 가만히 이아네의 손을 막았다. 이아네가 의아하게 레뮤엘을 바라보자 레뮤엘이 조용히 입을 연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만 자도록 해라."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제서야 이아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위가 조용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천막 안은 어두웠다.

라퓨타에 온 뒤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러간 적은 처음이었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할 테니까."

"......"

결국, 이아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체스 말을 정리했다. 살짝 불만이 서리기는 했지만 레뮤엘이 어떤 스케줄을 보내고 있는지 잘 아는 이아네로서는 그를 더 이상 조를 수 없었다.

"체스는 여기 둘 테니, 내가 없는 동안 크로이와 연습하도록."

그래서 튀어나간 말이었을 거다.

이아네가 너무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너무 아쉬워해서.

그 초록색 눈동자가 축 처지는 것이 싫어서, 그래서 레뮤엘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낮 동안에 시종과 체스를 해도 괜찮다는 말을 들은 이아네의 얼굴은 볼만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금세 반짝반짝해지는 초록 눈동자와 급격히 상승하는 입꼬리를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 레뮤엘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벌떡 일어나 침상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떠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아네와 눈이 마주친다.

"...이리 와라."

"...예?"

이아네가 깜짝 놀라 반문하자 레뮤엘이 손짓했다.

"또 묶여서 자게 할 수는 없잖나."

이아네는 그때 자신이 미쳤었다고, 아주 오랜 후에 그렇게 회상했다.

분명히 처음으로 체스를 하느라 너무 진을 빼서 그런 거였다고.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 이아네가 레뮤엘 앞에 섰다. 이아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레뮤엘은 그보다 더 컸다. 자연스레 레뮤엘을 살짝 올려다보게 된 이아네가 눈을 깜박였다.

이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서로 마주보고 선 적이 있었던가?

처음으로 제 발로 일어서서 마주보게 된 레뮤엘은 훨씬 더 강인해 보였다.

"누워라."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방금 누우라고 하신 곳이, 혹시 저 침상... 맞습니까?"

"거기 말고 누울 데가 더 있나?"

이아네는 혼란 속에서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더 문제였다!

"...저, 그럼 폐하는 어디에서 주무십니까?"

이아네의 질문은 정말 뜬금없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레뮤엘에게는 아니었던가 보다.

"내 침상을 놔두고 내가 다른 곳에서 자야 하는 건가?"

아, 물론 그건 아니죠. 하지만 포로와, 그것도 남자와, 아니 여자여도 문제겠지만 어쨌든 한 침상을 쓰시겠다는 건 문제잖습니까!

이아네가 속으로 절규하는 동안, 레뮤엘은 이아네의 반응을 빤히 읽고서 속으로 박장대소를 해대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것은 어찌어찌 가능했지만 슬슬 자야 할 시간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뮤엘이 이아네의 손목을 쥐고 당겼다.

"어, 어어?"

"여기에서."

이아네를 일단 침상 안으로 우겨 넣고서 레뮤엘은 조용히 속삭였다.

"더 이상 반항하면 네 아버지가 불이익을 당하게 될 거다."

"......"

좀 치사하긴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이아네가 입을 다물자, 레뮤엘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이아네의 옆에 몸을 눕혔다. 침상이 엄청나게 넓은 것은 아니지만 남자 둘 정도는 너끈히 잘 수 있어서 몸을 딱 붙이는 불상사(?)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

다만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숨결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이어서 이아네는 그날 늦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선잠이 든 다음날 아침 이아네가 눈을 떴을 때, 레뮤엘은 이미 침상에 없었고 탁자 위에 펼쳐진 체스판이 이아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체크메이트!"

이아네의 들뜬 목소리가 막사 안을 울렸다. 어찌나 기쁜지 온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 웃는 얼굴을 딱 5초간 감상한 뒤 레뮤엘이 손을 움직였다.

"아쉽군."

"...예?"

이아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레뮤엘의 나이트가 움직였다. 그리고-

따각.

"킹을 신경 썼어야지."

"......"

이아네는 멍하니 체스판에서 구르는 자신의 검은 킹을 바라보았다. 킹이 있던 자리에는 하얀 나이트가 호기롭게 앉아 빛나고 있었다.

"이익...!"

"더 배워 오거라."

순식간에 이아네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승부욕으로 타오르는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그 눈을 보면서 레뮤엘은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몇 번이고 내리 지기만 했지만, 이아네는 체스를 두는 것이 상당히 즐거웠던 모양이다.

시종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레뮤엘이 정무를 보러 나갔던 동안 체스에 열을 올렸다고 했다. 어찌 보면 웃음이 나올 만한 부분이었다.

"이기고 싶나?"

"......"

이아네가 입을 다물고 레뮤엘을 응시했다. 누가 보더라도 승부욕이 타오르는 눈에, 레뮤엘이 천천히 손을 뻗어 화이트 폰을 집어 들었다.

"체스란 희생이 필요한 게임이지. 정치도 마찬가지지만, 킹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희생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거다."

손 안에서 폰을 굴리던 레뮤엘이 조용히 폰을 체스판 위에 올려두었다. 오롯하게 홀로 선 하얀 폰의 자태가 눈부시다.

"...저는, 포기 못합니다."

레뮤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아네가 억울하다는 듯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뱉는다.

"차라리 내가 다치면 다쳤지, 다른 이를 희생하게 할 수는...없습니다."

그 초록색 눈동자에 떠오른 순진함이 너무 귀여워서 레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전쟁 중인데도 참 태평하군.

그러나 이아네의 미간은 형편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웃어? 웃겨, 이게?

"발로아."

"...예."

"뭔가 착각하고 있군."

레뮤엘이 다시 킹을 집어 들었다. 따각, 폰 옆에 킹이 나란히 놓였다.

"킹은 자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나?"

"......?"

"킹의 사명은 살아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레뮤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나 이아네는 어쩐지 그의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킹은...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알고 있습니다."

"체스를 하는 동안, 킹은 너다. 발로아."

이아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뮤엘의 손가락이 킹을 집어 들고 손 안에서 굴렸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내어주어야 한다면 기꺼이 내어 주도록 해. 그 희생을 헛되지 않게 만들면 되는 거다."

"......"

"그래. 헛되지, 않게."

레뮤엘이 눈을 감았다. 이아네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조심 손을 뻗었다.

"적어도 저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체스말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레뮤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손길을 바라보았다.

"킹 역시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레뮤엘의 시선이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이아네는 일부러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아네는 이런 류의 말을 하는 것이 어색했다.

제르멘은 늘 자신감에 차 있었고 국왕으로서의 권위가 무엇인지도 잘 알았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이아네에게 있어 제르멘은 늘 은빛 태양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이아네가 없어도 모든 것이 완벽했고 이아네 앞에서 무너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아네는 제르멘의 옆에 있어도 늘 외로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레뮤엘은 달랐다.

제르멘보다 훨씬 무뚝뚝한데다 차갑고 조용한 이 왕은 성에서 상황을 바라보기보다는 군사들과 함께 출정하는 것을 택했다. 얼핏 냉정해 보이지만 희생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술을 들이키는 것을 보면 이 왕은 권력에 대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이아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아네는 이날 이때껏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무게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지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아네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고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이아네가 흠칫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하긴, 적국의 왕에게 사로잡힌 포로가 위로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희극이긴 하지. 이아네가 피식, 자조 섞인 미소를 짓는데 레뮤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것을 알려주지."

"...예?"

"체스에는 '프로모션'이라는 것이 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이아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뮤엘이 이아네의 검은 폰을 집어 든다.

"이 폰이."

-따각.

"상대편 진영의 끝에 도달하게 되면, 폰은 킹을 제외한 다른 피스로 변형이 가능하다. 그걸 '프로모션'이라고 부르지."

"아...?"

레뮤엘이 조용히 물었다.

"너라면, 어떤 것으로 프로모션 할 텐가?"

"...퀸?"

레뮤엘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그 미소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한 이아네에게, 레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퀸으로 바꾸곤 하지.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나?"

"...왜...입니까?"

레뮤엘이 폰을 들어 손 안에 쥐었다. 그리고 이아네에게 주먹째 내밀었다.

이아네가 엉겁결에 손을 내밀자, 레뮤엘이 손가락을 풀었다. 검은 폰이 툭, 하고 이아네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장 말단인 폰이라고 하더라도 적진 깊숙이 뛰어든다면 가장 강력한 수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너도."

한동안 막사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이아네는 손바닥의 폰을 조용히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는 가운데 이아네의 초록색 눈이 레뮤엘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레뮤엘은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하게 이아네를 마주 응시했다. 그러나 그 심청색 눈동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부드러움을 품고 있다.

이아네가 입을 열었다.

"...감사, 합니다."

이아네의 손에 들린 검은 폰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레뮤엘은 간단히 대답했다.

"천만에."

* * *

이젤다 성.

아침에 눈을 뜬 제르멘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급보를 받아들고 아직 잠에 취해 멍한 머리로 서신을 훑었다.

"드래곤... 총 출격?"

"폐하!"

벌컥, 국왕의 침실 문이 열리며 비안테 공작이 허겁지겁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얼마나 급했으면 늘 매끄럽게 넘겨 있던 반백의 머리칼이 반쯤 흐트러져 늙은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다.

"무슨 일인가."

"헤루비나 성의 군대가 격침당했습니다!"

"...뭐?"

"디날 군이 강을 건너 렐라 항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항구를?"

"비상사태입니다! 지금 드래고니안이 이끄는 드래곤 군대가-"

"폐하!"

비안테 공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드릭 장군이 달려 들어왔다. 장군 역시 늘 말끔하던 정복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급보입니다! 방금 라테나 성이 포위되었습니다!"

"...성이, 말인가?"

제르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흐트러진 모습의 고위 관료들. 아직 잠옷을 다 갈아입지도 않은 채 침대 위에서 받아든 비보. 포위당한 성과, 드래곤의 출격.

제르멘의 멍한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붉은 입술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 하핫..."

조용해진 침실에 이질적인 웃음소리가 흘렀다. 비안테 공작은 자신이 드디어 환청을 들을 만한 나이가 되었나 의심했다.

그러나 환청이 아니다. 제르멘의 입꼬리는 확실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핫! 하하, 하, 하하핫!"

섬뜩할 정도로 맑은 웃음소리가 천장에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한참을 웃은 제르멘은 간신히 웃음을 진정시키면서 손을 살짝 들었다.

"하하, 하... 큭, 비안테 공."

"예, 폐하!"

"당장 이젤다 성의 경비를 강화하라."

"예!"

"그리고, 군대를 성으로 부르도록."

"...예?"

"라테나 성은 그냥 둬. 지금은 이젤다 성이 먼저다."

"...폐하,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해."

비안테 공작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라테나 성은 델토르의 성들 중에서도 꽤 큰 편에 속했다. 비옥한 대지와 풍부한 자원은 델토르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라테나 성은 이젤다 성으로 향하는 도로가 잘 닦인 곳이었다.

그런데도 국왕은 너무 간단히 라테나 성을 포기하고 이젤다 성의 경비 강화를 명령했다. 비안테 공작은 예상을 깨는 이러한 국왕의 행보에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그의 말대로 급히 공문을 써 내려 보냈다.

혼자 남은 제르멘은 여전히 큭큭 거리며 티즈를 쓰다듬었다. 하얀 매는 제르멘의 허벅지께에 머리를 내려놓고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보렴, 티즈..."

제르멘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천사의 것처럼 화사한 미소가 티즈를 향해 지어졌다.

이젤다 성은 무사할 것이다. 더불어 제르멘과 그의 '욕망'도 무사할 테지.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제르멘이 후후, 웃으며 주먹을 살짝 쥐었다.

"...멋져. 아주, 멋져..."

이제 곧 그가 원하던 것이 이 손에 들어온다. 제르멘이 손꼽아 기다리던 그것.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제르멘은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전쟁은 디날의 승리로 끝났다.

라테나 성은 지원군의 부재로 인해 결국 디날 군 앞에 무릎을 꿇었고, 확 트인 도로를 통해 이젤다 성으로 진격한 디날군은 성 앞에 진을 친 지 삼 일 만에 델토르 국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델토르의 항복을 받아내는 그 순간에도 레뮤엘은 여전히 라퓨타에 머물러 있었다.

이아네와 잠시 체스를 두던 중 국왕의 친필 서신을 받아든 레뮤엘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그 위에 서명을 했다.

이아네는 그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레뮤엘은 늘 저렇게 표정이 없는 사람이어서 서신의 내용을 유추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궁금한가?"

"...뭐... 네."

잠시 고민하다, 허세를 부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뮤엘이 잠시 이아네를 응시했다.

어쩐지 그 눈에 꿰뚫리는 느낌이 들어 이아네는 시선을 피했다.

"전쟁이 끝났다."

"...예?"

"델토르가 항복했다. 바로 오늘, 조금 전에."

이아네의 턱이 살짝 벌어졌다.

"바...방금, 뭐라고-"

"못 들었나. 디날의 승리다. 라퓨타는 이제 디날령이 된다."

"...그...그런! 그럼...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레뮤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사실 이아네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진작 결정한 상태긴 했지만, 저 고집불통이 레뮤엘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줄지가 문제였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레뮤엘이 대답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어쨌든 이아네와 직접 이야기할 때가 아니었다.

"잠깐만요! 폐하!"

이아네가 그를 따라 벌떡 일어났다. 급히 일어서는 통에 체스판을 건드려 피스들이 바닥에 널브러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답해 주십시오!"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안 됩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레뮤엘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고집에는 고집인가. 레뮤엘이 곁에 섰던 시종에게 손짓했다.

"크로이. 이자를 묶어라."

"안 돼! 기다리십시오! 저는, 저는 어떻게... 폐하!"

이아네의 찢어지는 비명을 들은 펠록스가 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흩어진 체스 말, 시종에게 붙잡힌 이아네, 그리고 한쪽에서 의연히 선 레뮤엘을 보고 금세 사태를 파악한 펠록스가 발버둥치는 이아네를 붙잡았다. 그 틈에 시종이 얼른 밧줄을 들이댄다. 두꺼운 막사 기둥에 등이 닿고, 어깨가 결박당했다.

"안 돼! 폐하, 폐하! 저는,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폐하!"

그 순간 펠록스가 이아네의 뒷목을 세게 내리쳤다. 순간 숨을 들이켠 이아네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펠록스가 레뮤엘을 바라보자, 레뮤엘은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 폰이 데구르르 굴러 이아네의 발에 닿았다.

레뮤엘이 막사를 나가 라퓨타 전체에 디날의 승리를 알리자, 군사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듯이 웃으며 난리가 났다. 레뮤엘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그들을 제지하는, 찬물을 끼얹는 짓은 하지 않았다.

마음껏 기뻐하라는 뜻에서 레뮤엘은 일단 그들을 내버려 두고 발로아 경을 불러내어 일전의 회의소로 들어갔다.

"축하드립니다."

"아직 시작일 뿐이지. 지금부터 바빠질 테니, 준비하도록."

"...송구합니다만, 무엇을...?"

"카토라로 간다."

"...예, 폐하."

"그대의 전략이 잘 먹혀들었으니, 이 공을 높이 사도록 하겠다. 디날에서도 기대하지."

"...송구합니다."

발로아 경이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다. 그 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닌 바, 레뮤엘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특별히, 그대의 가족들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증표나 서신을 준비하도록."

"...감사합니다. ...저, 폐하."

레뮤엘이 고개를 들었다. 발로아 경이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이아네...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펠록스도 레뮤엘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펠록스 역시 레뮤엘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 포로는 자신이 아직도 델토르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이제 델토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쩌면 평생.

"...케닛으로 데려간다."

"그럼, 그 아이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그대가 설명할 필요는 없어."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 레뮤엘이 뭔가를 계산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발로아 경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막사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레뮤엘이 입을 열었다.

"내 곁에 두겠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말귀를 알아챈 펠록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레뮤엘은 태연히 자신의 결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대와 함께 있게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해. 언제 델토르로 돌아가려고 할지 예측불허인데다, 전쟁이 끝난 이상 그는 디날의 국민이다. 내 성에 시종 하나쯤 더 둔다고 해서 나쁠 것이야 없지."

"하지만 폐하, 그는 델토르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그러니 오히려 더 잘 된 것 아닌가. 델토르의 국왕은 확실히 미지의 인물이니, 그에게서 단서를 캐내어야지."

발로아 경이 입을 다물었다. 국왕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디날의 젊은 국왕은 이 전쟁을 역사에 마지막으로 기록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펠록스가 말했다.

"...그러다 도망치면 더 골치 아파질 겁니다. "

"국왕의 옆이라면 도망치기는 더 힘들 테지."

"대체 어떤 명분으로 한낱 적국의 포로를 폐하 곁에 두시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발로아 경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두 쌍의 눈동자가 레뮤엘을 응시한다.

"왕자의 검술 스승이다."

"폐하!"

"...옛?"

발로아 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레뮤엘은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태연하기만 했다.

"왕자 저하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이십니다. 그분의 검술 교사라니 일러도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그런 어불성설을 누가 믿습니까?"

"발로아."

"예, 폐하."

"그대의 아들은 몇 세 때 처음 검을 잡았나?"

"...여섯 살입니다."

펠록스가 이를 갈았다. 그러나 발로아 경은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아네가 형보다 발육이 조금 느린 듯해 검술을 좀 일찍 가르치기는 했지만 일곱 살이면 충분히 검을 잡고도 남을 나이였다.

"...어떻게 되어도 저는 모릅니다!"

"도망친다면 그건 내 부주의겠지. 알아두겠네."

끝까지 여유만만인 레뮤엘의 목소리에 펠록스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5. 델토르의 포로

엄청난 백성들의 환호 속에 케닛으로 돌아왔지만 레뮤엘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성에는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미루어둔 공문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레뮤엘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일들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성은 어땠나?"

"덕분에 별 일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레뮤엘이 성에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집무실에는 집정관 우리아가 단정하게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뮤엘보다 열두 살이나 많지만 그는 늘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자신의 왕을 섬겼다. 레뮤엘도 그의 예의바른 태도와 똑 부러진 일처리를 마음에 들어 했으므로, 둘은 레뮤엘이 즉위하는 순간부터 꽤 친해져 있었다.

"전쟁도 끝났는데 연회는 열지 않으십니까?"

"우리아."

"예, 폐하."

"할 일이 많군."

우리아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씨알도 안 먹힐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아는 레뮤엘이 좀 더 방탕(?)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짝반짝한 마호가니 책상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레뮤엘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언제 전쟁이 났었냐는 듯, 레뮤엘은 곧바로 깃펜을 집어 들고 급한 것부터 서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아는 얌전히 그의 곁에서 레뮤엘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릴없이 몇 시간이고 서 있는 것은 못할 짓이지만 레뮤엘은 공문을 처리하다가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우리아와 상의했으므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첫 날이 그렇게 지나가나 싶었다.

"우리아."

"예, 폐하."

거의 마지막 공문을 처리하고 있을 때 드디어 레뮤엘의 입이 열렸다.

"가서, 왕녀를 불러오게."

"...베델리어 전하 말씀이십니까?"

"방에 없으면 아마 샤사와 함께 있겠지. 집무실로 오라고 해 주겠나."

"예."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우리아는 일개 신하일 뿐이었다. 왕을 거스를 배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런 객기를 부릴 정도로 우리아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아, 그리고."

"...?"

"내 침실에 들러서 델토르의 포로가 저녁을 먹었는지 확인하게. 별 이상이 없으면 바로 귀소해도 괜찮네."

"...예?"

너무 당황한 나머지 우리아는 레뮤엘이 즉위한 후 처음으로 말대답을 했다. 그러나 레뮤엘은 흘끗, 그 심청색 눈동자로 우리아를 바라보았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저, 외람되오나... 지금... 델토르라 하셨습니까?"

레뮤엘이 마지막 서명을 한 후 고개를 들었다. 우리아의 당황스러운 눈동자를 마주하며, 레뮤엘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생각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아는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뻐근한 어깨를 쭉 펴며 레뮤엘은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댔다. 얼마만의 평화인지 몰랐다. 바로 오늘 라퓨타에서 돌아왔지만 레뮤엘은 그동안 라퓨타에서 있었던 일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특히, 그 포로.

마차에서 깨어나 침실로 옮겨졌다는 보고까지는 받았지만 레뮤엘은 오늘 이아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바로 집무실로 달려와 무섭도록 공문을 해치웠으니 당연한 결과다.

자아,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을 벌이려나.

레뮤엘은 잠시 속으로 웃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디날이라 당황했을 터. 거기다 이송되어 온 곳은 감옥이 아니라 왕의 침실이니.

당황한 초록색 눈동자를 생각하자 조금 즐거워진다. 어째서 그 포로에게 이렇게 관대한지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조금 즐거운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레뮤엘은 지금까지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베델리어 왕녀가 도착할 때까지 레뮤엘은 그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 * *

레뮤엘은 잠시 이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몰라 생각에 잠겼다.

분명 성에 돌아와 정무를 보고, 잠시 잠이 들었을 때까지는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모든 일과가 끝나고 침실로 돌아갔을 때 상황은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어서, 그는 잠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옷은 어쨌나."

"씻는 사이 시종들이 세탁을 위해 가져갔습니다. 그렇지만 죽어도 디날의 의복은 입기 싫다고 해서..."

그래서 지금, 저 꼴로 디날 국왕의 침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는 건가.

우리아가 어떤 지시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이아네의 상황으로 보아 꽤나 꼼꼼히 지시를 내렸던 모양이다. 얼마나 제대로 씻긴 건지 때가 꼬질하던 피부가 빛이 날 지경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아직 물기가 제대로 마르지 않아 촉촉하게 가라앉아 있는데다 살짝 터 있던 입술은 보들보들해져 있었다. 얼핏 좋은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잊게 만들 만큼 충격적인 것은 이아네가 알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시종이 그의 어깨까지 시트로 감아 둘러 방 한가운데에서 치부를 드러내는 봉변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그 안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질서와 균형이 무너지는 느낌에 레뮤엘은 머리가 아파왔다. 역시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나...

그러나 다음 순간, 이아네의 숙인 목덜미가 조금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노출증이 있지 않은 한, 그 포로 역시 좋아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디날의 의복은 입을 수 없습니다."

"...하?"

레뮤엘이 어이없다는 듯 시종을 쳐다보자, 시종이 겁에 질린 눈으로 푸른 고래가 수놓아진 셔츠를 내보였다.

"고작 그런 이유냐."

"......"

고집스레 입을 다문 이아네가 살짝 레뮤엘을 올려다보더니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아, 머리야. 저 고집이 또 시작인 건가.

다행히도 이번에는 목숨을 가지고 생떼를 쓰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레뮤엘은 이아네가 입을 만한 다른 옷-디날의 엠블럼이 없는-을 시종에게 구해오도록 지시하고 우리아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방 안에 온전히 둘만 남자, 레뮤엘은 조금 식은 머리로 상황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이 골치 아픈 포로는 적진 깊숙이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델토르에 대한 충심으로 옹골지게 뭉쳐 있었다. 쉽게 충절을 버리지 않는 강직함은 마음에 들지만 이런 식의 생떼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시점에 포로가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것은 성가시기 그지없는 일이다.

해서, 레뮤엘은 결국 몸소 이아네에게 벌을 주기로 결정했다.

"으읏!"

"아직 네 처지가 어떤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이아네의 목을 틀어쥔 레뮤엘이 귓가에 천천히 속삭였다. 제르멘의 달콤한 속삭임과는 너무도 달라서, 이아네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아파왔다.

"모르지...않습니다..."

"아니, 모른다. 지금부터 가르쳐 주지."

레뮤엘이 차갑게 속삭이며 이아네의 목을 틀어쥔 채 몸을 일으켰다. 호흡이 곤란해진 이아네가 마침내 시트를 놓고 레뮤엘의 팔을 절박하게 잡아왔다.

풀썩, 마른 소리를 내며 시트가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드디어 완전히 알몸이 된 이아네를 훑으며 레뮤엘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은 몸이군."

빈말이 아니었다.

호흡곤란으로 빨개져 있는 얼굴에 대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레뮤엘은 순수하게 이아네의 몸에 감탄했다.

기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흰 피부에 잘 발달된 근육들은 조화롭게 음영이 져 아름답기까지 했다. 큰 힘을 쓰는 근육들은 아니었지만 유연하고 날랜 몸이었다.

"큭...크흡..."

그러나 막무가내로 목이 졸리는 이아네 입장에서 그런 칭찬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폐가 쪼그라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이아네를 살린 것은 작은 노크 소리였다.

레뮤엘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쿵, 하고 공중에 반쯤 떠 있던 이아네가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그러나 레뮤엘은 손목을 조금 매만지고서 문 쪽을 향해 물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의복을 세탁해 왔습니다."

문 바깥에서 시종이 조용히 속삭였다.

잠시 레뮤엘은 바닥에 엎드려 급히 공기를 들이마시며 기침을 해대는 이아네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하얀 몸이 간헐적으로 흔들리며 생명을 들이마신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 레뮤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필요 없다."

"...예."

시종이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대답했지만 레뮤엘은 그 외에 다른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이아네의 나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침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침실에는 이아네 혼자 남았다. 이아네는 여전히 경계 서린 얼굴로 다시 몸을 시트 안으로 감추었지만 그날 밤 침실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이아네는 넓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눈이 뜨이긴 했지만 아직 머리는 멍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본다. 사르락 소리가 나는 잘 마른 시트가 낯설었다.

"...?"

창문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조금 눈부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다, 이아네는 불현듯 어제 일을 기억해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제 이아네는 침대가 아니라 방 구석에서 시트를 몸에 감고 잠들었다. 미친 게 아니라면 디날 국왕의 침실에서 속 편하게 침대에서 잘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가 눈을 뜬 것은 침대 위였다. 이아네가 잠든 사이 누군가 이아네를 침대 위로 옮긴 것이 분명했다.

흘러내리는 시트 위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이 여과 없이 드러나자 이아네는 기겁하며 다시 시트를 끌어올려 가슴을 가렸다.

찰그랑.

맑은 쇳소리가 묵직하게 손목을 따라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린 곳에, 왼 손목에 감긴 수갑이 보였다.

"...하?"

살짝 손목을 흔들어 보지만 잘그랑대는 쇠사슬 소리는 여전했다. 잠시 멍해졌던 머릿속이 점점 맑아져 왔다. 동시에 뱃속 깊숙이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진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악문 잇새로 이아네가 숨을 들이쉬었다. 눈을 돌려 쇠사슬의 궤적을 좇았다. 침대 밑으로 이어진 쇠사슬의 흔적을 확인한 이아네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그만 시트를 걷고 침대 바깥으로 거칠게 발을 디뎠다. 그리고 무작정 사슬을 잡아당겼다.

"-크윽!"

어떻게든 끊어내 보려 한참을 발버둥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소용없는 발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아네는 계속 사슬을 당겼다. 초록색 눈동자로 눈물이 고여 갔다.

"...젠...장..."

그 말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쇠사슬과 씨름하던 이아네는 결국 포기하고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꼴 좋군. 이아네가 냉소를 지었다.

이제 무슨 낯으로 제르멘을 봐야 할까. 아니, 그전에 일단 돌아갈 수는 있을까.

깊이 한숨이 새었다.

적국의 성, 깊고 조용한 왕의 침실. 이아네는 자신에게 닥친 이 끔찍한 시련에 머리를 싸쥐고 말았다.

델토르로 돌아가고 싶다. 제르멘의 밝은 하늘빛 눈을 보고 싶었다. 부드럽게 녹아내리듯 지어 올리는 그 미소가 그립다.

"...후우."

울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무사의 자식으로 자라 뼛속까지 기사로 성장한 이아네였다. 여기서 무너져선 안 되었다. 제르멘에게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들뿐이지만 이아네에겐 제르멘 외에 돌아갈 곳이 없었다.

잠시 진정한 이아네가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아네가 있는 곳은 디날의 중심 케닛이다. 제르멘과 도서관에서 대륙 지도를 봤던 적이 있었다. 더 동쪽에 있는 항구도시 올란데를 제외하면 케닛은 델토르에서 가장 먼 도시였다.

"...젠장..."

저절로 욕지거리가 새어나왔다. 케닛을 탈출할 수 있다 해도 델토르까지 그 먼 거리를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찌어찌 아델 강까지 간다 해도, 국경을 대신하는 강인 만큼 군인들이 깔려 있을 것이 분명했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뒤, 이아네는 탈출에 대한 부분은 일단 접어 두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아버지에 대해서였다.

"...대체..."

라퓨타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아버지는 다치긴 했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고 계신 것 같았다. 레뮤엘이 전쟁포로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인 것 같진 않아 다행이었지만, 이아네는 아무래도 아버지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귀화해라. 넌 절대 델토르로 돌아가선 안 된다.’

귓가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아네는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버지는 대를 이어 온 델토르의 충신이셨다. 언제 보아도 든든하고 존경스러운 분이었으며 또한 절대 틀린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왜...?

이아네는 혼란스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만일 아버지가-생각도 하고 싶지 않지만-귀화하셨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아네가 겪어 온 레뮤엘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아네를 범한 것은 이해가 안 갈 일이지만 레뮤엘은 이유 없이 권력을 휘두르는 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레뮤엘이라면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는 청을 거절할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꺼워하며 부자상봉을 장려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레뮤엘이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배알이 틀렸다. 그가 좋아할 만한 일을 부러 하고 싶진 않았다. 이아네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어 잠시나마 피어오른 희망의 불씨를 꺼뜨렸다. 그리고 다시 쇠사슬과의 씨름을 시작했다.

* * *

케닛의 태양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저녁놀이 궁 안 구석구석을 채워갈 때쯤, 레뮤엘은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처럼 느긋한 발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천천하고도 올바른 걸음걸이가 조용하고 묵직하게 복도를 채운다. 복도 모서리 끝의 침실 문이 저만치 보였다.

한 발짝씩 문으로 다가갈 때마다 레뮤엘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무엇을?

왕으로 태어나 자라 무한한 자유와 또 그만한 책임과 통제 속에 살아오면서 레뮤엘은 단 한 번도 특정한 무언가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디날을 지나치는 음유시인조차 '그에게 무서울 것은 백성의 호통뿐'이라고 노래하는 레뮤엘이다. 그런데 한낱 포로에게 요동치는 마음이라니 그답지 않았다.

그 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펠릭스의 목소리가 레뮤엘의 정신을 돌아오게 했다.

"문을 열어라."

흔한 경첩의 마찰조차 없이 문이 열리자 레뮤엘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익숙한 침실 내의 정경이 눈에 들어오고, 이윽고 어딘지 이질적인 침대 위의 실루엣에 눈이 가 닿자 레뮤엘은 그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주변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방 안을 밝히는 마지막 저녁노을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와중에 침대 위의 나체가 시리도록 희었다.

"......"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여 이아네에게 다가간다. 지쳤던 건지, 지루했던 건지 모르지만 이아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색색 숨을 내쉬며 잘도 자고 있었다.

살짝 손을 내밀어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칫, 어깨가 떨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머리가 들리며 잠에 겨운 초록색 눈동자가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경계가 풀린 눈동자는 어린아이 같았다. 조금 흐뭇한 기분이 되어, 레뮤엘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편히 누워라."

"...!"

갑자기 게슴츠레하던 눈이 확 뜨이며 잠이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갑작스런 변화에 레뮤엘이 당황하는 순간 이아네가 어깨에 얹은 레뮤엘의 손을 탁 쳐냈다. 손목에 묶인 쇠사슬이 신경질적으로 흔들리며 잘그락 비명을 지른다.

"무슨...?"

"손대지 마십시오."

화가 났다기보다 당황스러워진 레뮤엘이 이아네를 바라본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팔꿈치를 감싸 안고 침대 모서리 쪽으로 최대한 몸을 붙이고 있는 이아네는 작은 동물 같았다. 그 표정이나 태도에서 뜻하는 바가 너무나 명백하여, 레뮤엘은 그만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겁간이라도 할까봐 그러느냐?"

"......"

"너는..."

약한 한숨을 내쉬며, 레뮤엘이 입을 다물고 두 걸음 물러났다.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제 일을 생각하면 이아네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이아네는 알몸이었다. 레뮤엘이 원하기만 한다면 두 손목에 족쇄를 채운 포로쯤이야 겁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흘끔 이아네의 붉어진 목을 확인하고 아무 말 없이 침대 옆으로 늘어진 설렁줄을 당겼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라. 포로의 몫도 함께.”

이아네가 조금 기대하는 듯한 눈으로 레뮤엘 쪽을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시종이 가져온 셔츠에는 여전히 푸른 고래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아네의 손이 닿는 곳에 셔츠와 바지가 놓였다.

이아네가 옷을 갈아입는 레뮤엘과 가지런히 접힌 셔츠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러나 레뮤엘은 아무 말 없이 옷을 모두 갈아입고 이아네에게 단 한 마디만을 했을 뿐이었다.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입어라.”

이아네가 뿌득 이를 갈았다. 푸른 고래의 자수에서 이아네는 레뮤엘의 자신감을 읽었다. 네겐 선택권이 없다고, 곧 내 아래 무릎꿇게 될 거라고 말하는 듯한 오만함이었다.

"...당신..."

희미한 목소리에 레뮤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인간도 아냐."

"...자주 듣는 말이군."

레뮤엘의 낮은 대답을 들었는지 이아네가 눈을 치떴다. 그러나 알몸으로 손목에 족쇄를 채운 상태에서 그런 눈빛이 위협이 될 리가 없다.

"...죽어 버릴 거야..."

욕실로 들어가는 레뮤엘의 귀에 얼핏 그 비슷한 말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죽인다'는 것인지 '죽는다'는 것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지만, 레뮤엘은 신경 쓰지 않고 준비되어 있던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뮤엘은 그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었다. 레뮤엘은 기다리느 것만큼은 자신 있었으므로, 이아네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포로의 고집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디날에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부터 팔십 넘은 노인까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속담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작은 자의 말 한 마디라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낫다.’

레뮤엘도 이 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 꽤 좋아하는 속담이기도 했지만, 설마 자신이 그에 해당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이아네에게 족쇄를 채운 다음날부터 레뮤엘은 새로운 개념의 지옥을 맛보았다.

시작은 평범했다.

"전하, 델토르의 포로가...!"

한창 식사중에 허겁지겁 달려온 시종을 따라 침실로 들어섰을 때, 레뮤엘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다가오지 마라."

알몸인데다 손목이 쇠사슬에 묶인 채였지만 이아네의 눈은 기사다운 광채를 띠고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꽉 움켜쥔 포크가 오늘따라 예리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

"시, 식사를 들고 갔는데 갑자기..."

다 듣지 않아도 바닥에 흩어진 식기와 음식이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식사 쟁반에 올려진 포크를 집어 들어 자살 시도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시종들이 달려들어 막으려 하자 그 포크로 한 시종의 얼굴을 그어 놓았단다.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레뮤엘은 미간을 꾹 눌렀다.

"죽을 작정이냐?"

"......"

이아네는 말없이 포크로 목을 눌렀다. 하얀 피부에 도드라진 푸른 동맥이 선명해지자, 레뮤엘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펠록스에게 고갯짓을 했다.

펠록스가 잽싸게 칼을 뽑아 이아네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으나, 펠록스는 날렵하게 칼등으로 이아네의 손목을 때리고 그가 주춤하는 사이 떨어뜨린 포크를 발로 차 멀리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다음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든 시종들이 이아네를 찍어 눌렀다. 대여섯 명의 장정들에게 깔려 발버둥치는 초록 눈동자에 악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도 레뮤엘은 조용히 등을 돌려 침실을 나왔다.

그 다음날부터 이아네의 식사 쟁반에는 식기가 올라가지 않았다. 접시에 올려진 빵과 작은 종지에 담긴 잼, 그리고 한 잔의 우유가 이아네의 식사였다.

한동안 이아네는 짖는 법을 잊어버린 개처럼 멍하니 지냈다. 레뮤엘이 부러 도발해도 대꾸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시종이 다시 레뮤엘에게 달려왔다.

"전하, 그 포로가-"

이번에는 욕실이었다.

침실에 딸린 욕실에는 자살할 만한 도구가 아무것도 없었지만, 요 며칠 얌전해진 이아네를 두고 시종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접시를 깨고 그것으로 손목을 그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두 번째부터는 레뮤엘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난동을 부려봤자 제지만 더 커진다는 것을 눈치챈 이아네가 이번에는 수를 쓴 것이었다.

시종이 욕실 문을 열었을 때 온 욕조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다행히 접시로는 깊게 긋기 어려워 동맥까지 닿진 않았지만 레뮤엘은 온몸에 핏물을 뒤집어쓰고 창백해진 이아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아네는 그 후 만 이틀 동안이나 깨어나지 못했다. 레뮤엘은 아무 말 없이 일상을 지냈지만 밤에는 한참 동안이나 이아네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아네가 마침내 깨어났을 때, 침실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욕실 문은 바깥에서 잠기도록 했고, 이아네를 묶은 족쇄는 양손을 함께 묶는 무거운 것으로 바뀌었다.

식사는 변함이 없었지만 사기 접시 대신 나무 접시 위에 빵이 올라왔으며 레뮤엘이 침실로 들어오기 전까지 시종 둘이 묵묵히 이아네의 곁을 지키고 서게 되었다.

손목에 감긴 붕대 안에서 상처가 욱신대긴 했지만 이아네는 자신을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는 심청색 눈동자를 보며 묘한 성취감을 맛보았다. 여전히 한 침대에서 잠이 들긴 했지만 레뮤엘은 이아네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며 잠자리에 들었고 이아네 역시 레뮤엘을 외면했다.

그렇게 다시 조용한 날이 흘러갔다.

전쟁의 여파도 서서히 희미해질 무렵, 레뮤엘은 모처럼 일찍 끝난 정무를 뒤로하고 홀린 것처럼 침실로 향했다.

되돌아보면 왜 하필 그날이었을까 싶은 일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검술 연습을 하거나 활을 쏘러 나갔을 것이다. 마치 홀린 것처럼 이끌려 이른 오후의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레뮤엘은 와장창 하는 소리를 듣고 잠시 멍해졌다.

이른 오후의 햇살은 통유리를 지나 화창하게 침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남향으로 난 창문 너머, 아직 지지 않은 태양의 눈부심 속에 이아네가 있었다.

마치 막 나는 법을 배운 새처럼, 이아네는 그렇게 서 있었다.

침실 한가운데, 아니 정확히는 유리창 바로 앞에 선 이아네는 레뮤엘을 등진 채 서 있다가 고개만 조금 돌려 레뮤엘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고 생각한 순간.

"꺄악!"

"사람이 떨어졌어!"

"어의를 불러라! 소란 피우지 말고!"

침실 안에는 방금 이아네가 깨뜨린 통유리 조각이 산산이 흩어져 있다. 레뮤엘이 시선을 돌려 침실 안을 둘러보자, 이아네에게 붙였던 두 시종이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유리창의 커다란 구멍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별 모양의 모서리에는 이아네가 몸을 날리다 긁힌 듯한 핏자국이 살짝 묻어 있었다.

생각났다.

왕의 침실은, 3층이었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뒤늦게 요란한 소리를 듣고 달려온 펠록스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모든 것이 채 2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레뮤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 밖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날개 부러진 새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파르르 떨리는 척추를 보고 레뮤엘은 결국 깨달았다.

평범한 새장으로는, 이 새를 가둘 수 없을 것이라고.

"전의를 불러라."

레뮤엘은 단 한 마디만을 했을 뿐이지만, 이아네를 살리지 못한 의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임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알고 있었다.

* * *

꿈을 꿨다.

어깻죽지에 날개가 돋아나더니, 몸이 가벼워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구름 속이었다. 너무나 홀가분한 기분에 이아네는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얼마나 날았는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이아네는 그리운 집에 도착해 있었다. 모두가 거기 있었다. 어머니도, 형님도, 어린 조카와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그러나 제르멘이 보이지 않아, 이아네는 조금 걱정스레 다시 비행을 시작했다.

이젤다 성의 끄트머리가 보이고 왕의 집무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이아네는 문득 날개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작은 깃털들이 끝없이 흩날리더니 이아네를 지탱하는 힘이 점점 줄어든다. 있는 힘껏 날개를 퍼덕였지만 이아네는 마침내 날개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돼!'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는 순간 이아네는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눈을 떴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지독한 갈증이었다. 말라서 입천장에 달라붙은 혀를 겨우 움직여 첫마디를 뗐다.

"...물..."

그 한 마디에 방안은 난리가 났다.

의사들은 기적이라며 로요라 여신께 기도를 드리고, 시종들은 급히 미지근한 물을 대령했으며 그중 몇몇은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갔다.

이아네는 멍하니 그 소동을 지켜보며 눈을 깜박였다. 아무튼 몸이 너무 아프고 피곤해서 대체 여기가 어딘지, 어쩌다 이런 곳에 있는 건지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이아네는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다. 의사가 말하길 한 닷새는 꼬박 잤다고 하니 그 정도 잤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 다음 눈을 떴을 때 이아네는 왕의 침실에 있었다.

부서질 듯한 몸은 좀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아린 통증이 남아있었다. 이아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 깨끗한 통유리로 저녁노을이 비쳐들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바라보다 이아네는 왠지 눈물이 났다.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막막했다. 자기도 모르게 차오른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관자놀이를 적시던 찰나, 달칵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아, 일어났나."

깜짝 놀라 바라본 곳에는 펠록스가 서 있었다. 이아네는 잔뜩 경계 서린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켜 세우려 했다.

"아아악!"

"이런, 벌써 일어나긴 이르다. 갈비뼈가 다섯 군데, 왼팔과 오른다리가 부러지고 출혈도 심했으니 죽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아네는 고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포로로군. 펠록스가 속으로 혀를 차며 이아네에게 다가갔다.

겨우 두 걸음 다가갔을 뿐이지만 이아네는 예민하게 펠록스를 쏘아보며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침대 시트를 부여잡았다. 상처 입은 작은 동물처럼 몸을 사리는 이아네를 보면서 펠록스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까지 겁먹을 필욘 없다. 받거라."

"...뭡니까?"

펠록스가 침대에 내려놓은 것은 평범한 흰 셔츠와 바지였다. 지금까지 봐 온 것과는 달리 아무런 자수가 없이 그저 하얬다. 이아네는 의아한 눈으로 펠록스를 다시 바라본다.

"언제까지나 알몸으로 지낼 수는 없지 않겠나?"

"......"

"지금은 몸도 몸이니 제대로 의복을 갖추진 못할 게다. 한동안은 시종들이 도와줄 테니 제발 얌전히 있거라."

이아네는 어딘지 멍하게 침대에 놓인 셔츠와 바지를 바라보았다. 막 빨아서 풀을 입힌 듯 빳빳한 칼라가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지금은 몸이 나아질 때까지 가만있는 게 좋을 게다. 한 번만 더 자결을 시도했다간..."

문득 펠록스가 말을 끊었다. 이아네가 조심스레 뻣뻣한 목을 들어 올리자, 펠록스가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이아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뮤엘은 어떨지 몰라도 펠록스가 이번 사태로 얻은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나라 안팎으로 바쁜 레뮤엘을 지켜보는 것도 모자라서 말 안 듣는 포로가 침실에서 부리는 난동까지 수습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오늘은 식사부터 하도록."

펠록스가 종을 울리자 시종이 식사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 빈속에 놀라지 않게 따끈한 김이 오르는 묽은 미음이 가벼운 종이 그릇에 담겨 나왔고, 시종이 쥐어 준 수저는 어린아이가 쓰는 것 같은 뭉툭한 나무 수저로 바뀌어 있었다.

이아네의 자살 소동은 그 이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자살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레뮤엘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짓을 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이아네가 자살 기도를 한 뒤 얻게 된 단 한 가지 소득은, 레뮤엘이 더 이상 이아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식사 쟁반이 종이로 바뀐 뒤로 이아네는 레뮤엘과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다.

이아네가 눈을 뜰 때면 레뮤엘은 이미 침실을 빠져나간 뒤였고, 레뮤엘이 돌아올 때쯤 이아네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정말 들어오긴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아네는 근 한 달 동안이나 레뮤엘을 보지 못했지만 덕분에 몸은 편안했고 이아네는 처음에 가졌던 경계심을 살짝 풀기까지 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이아네는 침대 발치에 놓인 대여섯 권의 책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늘 곁에 붙어 있는 건장한 시종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시종은 굳은 얼굴로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침 하루 종일 왕의 침실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따분하던 나날들이라,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책을 집었다.

책의 종류는 대부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소설이나 아이들이 볼 법한 동화집이었다.

사람을 무시하는 건가 싶었지만 델토르의 동화와는 또 다른 신선함에 이아네는 한동안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책들은 다 읽을 때쯤이면 늘 다른 책으로 바뀌어 있었다. 궁 어딘가에 도서고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책이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별 반항 없이 얌전히 독서에 집중하는 나날이 일주일쯤 계속되자, 레뮤엘은 드디어 이아네의 처분에 대한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갈아입고 나오도록. 네가 할 일이 있다."

멍한 눈으로 펠록스가 던져준 새 셔츠와 바지를 바라보다 얼빠진 목소리로 이아네가 되물었다.

"...제가 말입니까?"

"신발은 이걸 신어라.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가면서 하도록 하지."

야속하게도 그는 그 말만 남기고서 방을 나가 버렸다. 의아하긴 했지만 침대 아래 놓인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다. 마치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아, 어딘지 이아네는 뒷골이 서늘해졌다.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나오자 펠록스가 기다렸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이아네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펠록스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넓은 성 안은 이젤다 성과는 또 다른 이국적인 양식이어서, 이아네는 몇 번이나 넋을 놓고 있다가 펠록스를 놓칠 뻔했다.

디날에 와서 처음으로 하게 된 바깥구경이었다.

이젤다 성의 네모진 창문과는 다른 아치 형 창문 너머로 왕궁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열려진 창문 너머로 델토르와는 다른 묘한 짠 내음이 흘러들었다.

"한눈팔지 말도록. 그분이 기다리고 계신다."

"아, 예."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홀린 듯 공기 중의 향기를 들이마시던 이아네에게 펠록스가 일침을 놓았다. 깜짝 놀란 이아네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펠록스 뒤를 쫓았다.

...그런데, '그분'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조금 궁금해져서 펠록스의 눈치를 보았으나 펠록스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조금 체념한 이아네가 펠록스의 뒤를 따라 다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회백색 화강암 층계를 두 번이나 내려간 후에야, 이아네는 펠록스가 데려온 곳이 아까 창문 너머로 보이던 정원임을 깨달았다. 가늘고 부드러운 잔디가 넓게 깔린 잔디밭 위에 누군가가 지루함을 삼키며 서 있었다.

처음에 이아네는 자신이 뭔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잔디밭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가는 동안, 이아네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왜 이제 오느냐?"

"송구합니다, 저하."

"흥."

멍하니, 이아네는 눈앞의-정확히는 눈 아래의-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어린아이답게 젖살이 통통한 분홍빛 뺨에, 보들보들한 흰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깜찍하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선명한 제비꽃 색 눈동자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설마."

"네 놈이냐?"

"저하, 말씀을 높이시지요. 오늘부터 저하의 검술 스승이 될 자입니다."

"...내게는 그런 스승 필요 없다."

펠록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입을 삐죽이는 소년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소년이 한숨을 쉬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 이아네는 무엇부터 놀라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펠록스는 그를 '검술 스승'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눈앞의 이 꼬마는, 펠록스의 태도로 보나 저 깜찍한 눈빛으로 보나-

"...왕자?"

"말을 삼가거라. 디날 유일의 왕세자 엘리어트 샤를리 디날 저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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