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
디날의 급습이었다.
동료의 등에 화살이 꽂히는 것을 본 것과 드래곤의 으르렁대는 숨결을 느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간신히 몸을 굴려 드래곤의 어금니를 피하자 방금까지 이아네가 있던 자리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허겁지겁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아네는 디날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다음은, 지옥이었다.
-키아아아아아!
"도망쳐! 드래곤- 끄악!"
"당황하지 말고 전열을 지켜! 목장으로 달려라!"
-캬르륵, 크윽, 캬아아아아!
"살려줘-!"
정신없이 달린다. 드래곤 목장의 목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지만 각종 잡목과 수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처녀림은 달리는 족족 이아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래도 달려야 했다. 바로 뒤에서 쿵 하고 땅을 울리는 진동이 울려 퍼졌다.
-키에에에에!
"끄억!"
"돌아보지 마라! 달려-!"
발로아 경의 목소리가 그 소란스런 와중에도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살짝 뒤를 돌아보았던 이아네는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콧김을 보고서 얼른 진로를 틀었다.
드래곤이 바로 뒤에 있었다!
"이 놈들!"
"안 돼요, 아버지!"
발로아 경이 창을 들고 드래곤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보고 놀란 이아네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발로아 경은 아랑곳 않고 붉은색 비늘로 덮인 드래곤에게 창을 던졌다. 단단한 비늘로 감싸여 있긴 했지만 턱만큼은 말랑말랑했다. 창이 똑바로 날아가 붉은색 드래곤의 턱에 꽂혔다.
-캬르르륵! 키익, 키히이익!
"아버지, 달려요!"
이아네의 목소리와 함께 발로아 경이 달리기 시작했다. 멈칫한 드래곤의 뒤로 디날의 궁병들이 보였다.
"문을 열어!"
가장 먼저 목책에 도착한 기사들이 황급히 목장의 문을 열었다. 드래곤들은 동족을 해치지 않는다. 목장 안으로 들어서면 일단 안전할 것이다.
무거운 목책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문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이아네는 문 가까이에 몸을 숨기고 턱에 창을 맞은 붉은 드래곤의 동정을 살폈다. 다행히 드래곤은 등을 보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먼발치에서 거대한 진녹색 등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숨어 있는 것도 한계다. 한숨을 내쉬며 이아네는 다시 달렸다.
뒤에서 쿵, 하는 진동과 함께 미처 외치지 못한 비명이 사그라든다.
이아네가 이를 악물며 이 공평치 못한 전투에 분노하는 동안, 발로아 경은 목장 문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기사들은 이제 거의 문 안쪽으로 대피했다. 제아무리 디날의 드래곤이라고 해도 동족이 모여 있는 둥지를 침범하지는 못한다. 조금 안심한 순간 이아네는 발로아 경이 문을 등지고 서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
"들어가, 안. 여기는 내가 시간을 벌겠다."
"아, 안 됩니다, 아버지!"
"들어가라니까!"
발로아 경이 고함을 질렀다. 그와 거의 동시에 궁병들의 화살이 쏟아졌다. 발로아 경이 황급히 방패를 들었지만 그중 하나가 넓적다리에 맞았다.
"-윽!"
"아버지!“
이아네가 째질 듯 비명을 지르자 발로아 경은 이아네에게 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들어가, 안!"
그때, 문 사이에서 붉은 것이 튀어나와 쏜살같이 시야로 달려들었다.
"대령님!"
살라스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발로아 경에게 다가간다. 안도한 이아네가 막 목책 쪽으로 돌아서려 했을 때 어디선가 낯익은 포효가 들려왔다.
-키에에에에에!
"피해!"
발로아 경이 외쳤지만 한 발 늦었다.
-우그적.
이아네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린 아이가 땅콩을 깨무는 것처럼 간단하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어금니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크르르륵.
진녹색 드래곤의 빨간 눈동자가 번득이며 잇새에 문 무언가를 한번 휙, 흔들었다.
털썩, 이아네의 옆으로 머리가 물어뜯긴 시체가 날아왔다. 군복과 갑옷이 온통 피로 젖은 건장한 시체에는, 머리가 없었다. 이아네가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체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손끝에 딱딱하게 만져지는 오르헴이 걸린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이 어느 순간 크게 열렸다.
"...살라스-!"
"안!"
발로아 경의 목소리와 동시에 이아네는 등에 꽂히는 강한 충격을 느끼고 눈을 흡떴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크...헉..."
갑자기 닫혀 버린 기도를 힘겹게 열어 숨을 들이쉬자 살이 찢기는 고통이 천천히 온몸으로 번졌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하얗게 질려 간다.
감길락 말락한 눈꺼풀 사이로, 사방에서 튀어나와 발로아 경에게 창검을 겨누는 디날의 병사들이 보였다.
발로아 경의 고함소리가 아주 멀리에서 들리는 것처럼 멍멍했다. 이아네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이아네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큭...“
불에 지진 듯한 화끈한 통증과 온몸의 세포가 죽어가며 비명을 지르는 듯한 기분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쌓여 있는 느낌이다.
눈을 뜨자마자 다시 감으면서도 이아네는 순간적으로 망막에 비친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튼튼한 가죽 천장을 떠받친 견고한 기둥. 적어도 이아네가 살아온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고통에 익숙해지자 다시 가만히 눈을 떴다.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둘러보자 보잘것없는 가죽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천막 안은 조용했지만 문득 바깥에서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드래곤!
이아네의 멍한 머릿속에서 다시금 퍼즐이 빠르게 맞춰져 갔다. 갑작스런 디날의 급습, 붉은 드래곤의 등장과 우왕좌왕하던 기사들. 발로아 경이 창을 던졌고, 목장 입구에서 시간을 벌겠다며 이아네를 들여보내려는데 살라스가 뛰어들고, 그 다음엔...
"...살라스..."
이아네가 이를 악물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드래곤이 나타난 이상 불가항력이었다지만 이아네는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살라스가 아니라 자신일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전우를 대신 죽이고 자신이 살아난 것 같은 의미 없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대책 없는 안도감이 이아네를 덮쳤다.
다 갈라진 입술 새로 한숨이 흘렀다. 살라스는 죽었다. 그가 남긴 것은...
문득 이아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등을 꿰뚫은 자상에서 찡한 고통이 온몸을 울렸지만 이아네는 황급히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를 들추었다. 상의가 벗겨진 가슴께는 붕대로 감겨 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치료였지만 이아네는 목에 걸려 있던 오르헴이 사라진 것을 보고 창백해졌다.
주위를 둘러본다. 침대 머리맡에 더러워지고 찢어진 군복 상의가 놓여 있었다.
서둘러 더러워진 군복을 집어 들고 탈탈 털었지만 작은 가죽 주머니는 물론 제르멘이 친히 선물한 견장도 없다. 그 난리통에 어디엔가 떨어뜨렸던 걸까. 아니면-
실망감에 이아네가 어깨를 늘어뜨리자 그제야 등과 가슴을 관통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 주저앉는 순간 누군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
"깨어났습니다."
천막 안을 들여다본 병사가 다시 바깥을 보고 이아네의 상태를 보고했다. 병사의 가슴에는 커다란 푸른 고래가 수놓아져 있었다. 푸른 고래는 분명히 디날을 상징하는 문장이다. 이아네는 본능적으로 여기가 디날의 막사 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깨어났다고?"
막사 바깥에서 어딘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주 들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이아네는 분명 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아네가 막사 바깥을 경계하며 천막 안을 훑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검은 없었다. 더러워진 군복을 꼭 끌어안은 채 이아네는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
"......"
눈이 마주쳤다.
이지적인 눈매와 남청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견 차가워 보이는 날큼한 입술은 꾹 다물려 고집스럽게 보였다. 막사 안에 들어온 남자가 이아네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허리를 폈다.
그것이, 디날 국왕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과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 * *
디날의 새파랗게 젊은 국왕 레뮤엘에 대해서는 델토르에서도 이미 유명했다. 그는 선대 국왕의 하나뿐인 아들이었으며, 그가 어릴 때부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바다를 닮은 심청의 눈동자도, 무엇이든 금방 익히는 우수함도 아니었다. 그의 유별난 노력과 자로 잰 듯한 원칙주의는 일반적인 왕족에게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남다른 것이었다.
어찌나 깐깐한지 왕실 교사가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고시키려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이면 온갖 질문을 퍼붓는 레뮤엘 덕에 교사들은 죽어났지만 레뮤엘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는데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오히려 선생들을 비난했다.
한마디로 어린 레뮤엘은 재미없는 꼬마였지만, 대신 아랫사람들에게는 유난히 관대했다.
열다섯 어린 나이의 왕자가 궁정 재판소에서 가난한 어부를 변호한 일은 아직까지 전설로 남아 있었다.
레뮤엘은 결코 호락호락한 왕은 아니었지만 공정했고 균형과 조화를 사랑하는 왕이었다. 공정하지 못한 법은 레뮤엘의 앞에서 그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레뮤엘에게 있어 사람은 모두 평등했고 왕과 귀족들은 평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깐깐하고 고지식한 왕이라 할지라도 걸어온 싸움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두 몇 명이지?"
"사망자 열일곱 명, 포로는 총 스물두 명입니다. 그중 여덟이 부상을 입었고 그 외에는 모두 흩어져서 해변에 있던 선박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렇군. ...시체를 수습하라. 드래고니안들을 내 막사로 부르고, 이후 취침해도 좋다."
"예."
그때, 무언가 대장에게 지시하던 레뮤엘이 이아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아네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 제르멘이 알려주었기 때문에 이아네는 그가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 강렬한 심청색 눈동자는 잊기도 힘들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아네는 애써 모르는 척 어깨를 움츠렸다.
"드래고니안들이 돌아가면 저 친구를 데려오도록."
"...부상자 말씀이십니까?"
"음."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하고서, 레뮤엘은 조용히 이아네가 있던 막사를 나갔다. 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뒤에야 이아네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거슬러, 몇 시간 전.
이아네가 살라스의 시체를 보고 넋이 나가 등에 화살을 맞은 순간, 발로아 경의 허벅지와 등에도 화살이 꽂혔다. 그러나 부성은 무서운 것이다. 초인적인 힘으로 이아네에게 달려가 그 위를 보호하듯 덮은 발로아 경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드래곤의 포효가 멎었다. 슬쩍 눈을 뜬 발로아 경의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공격 중지. 시체를 수습하라."
"예."
조용하고 무기질적인 목소리는 인간의 것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발로아 경에게는 구원의 목소리였다. 고통으로 인해 감겨지는 눈을 가까스로 뜨고 발로아 경이 고개를 들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고급스러운 워커는 절대 일반 사병이 신을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로아 경은 그가 뭔가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놀랍군. 화살을 다섯 대나 맞고도 아직 살아 있다니."
"...누구..."
"여기, 부상자를 데려가라."
발로아 경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이아네의 팔을 놓지 않았다. 살짝 혀를 찬 워커의 남자는 한쪽 무릎을 굽혀 이아네의 목에 손가락을 대었다. 미약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지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연다.
"여기도 살아 있군. 데려가도록."
푸른 군복을 입은 병사가 이아네를 둘러업었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발로아 경은 눈을 감았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발로아 경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다음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낯선 막사 안이었고 처음 보는 남자가 날카로운 푸른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구시오?"
"알 필요 없다."
대번에 확 잘라내는 말투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거, 싹퉁머리 없는 청년일세. 아들뻘인 청년에게 무시를 당하자 발로아 경은 기분이 나빴지만 그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청년이 곧 발로아 경에게 물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이 군대의 총지휘자인가?"
"...그렇소."
"이름은?"
"...제라르 케이 발로아 대령이오."
다행스럽게도 발로아 경은 눈치도 있고 분위기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단 고분고분 대답하자 청년 쪽에서도 만족한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지금 이 막사 바깥에는 델토르 군대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포로로 잡혀 있다. 원군은 없을 테니 기대하지 마라."
자기보다 배는 나이 들어 보이는 어른에게 서슴없이 해라체를 쓰는 것을 보고 발로아 경은 이 젊은 남자가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가문의 자제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나 그보다 발로아 경의 관심을 끈 것은 델토르의 원군이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시오?"
"라퓨타는 이제 디날의 영토가 되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지."
옆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이야긴 줄 알았다. 하도 표정에 변화가 없기에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뭐가 어디의 뭐가 됐다고?
"델토르의 군사는 하나도 남김없이 제압되었고 현재 라퓨타에 있는 델토르인은 너희뿐이다. 델토르에서 어떤 군대가 온다 하더라도 드래곤 백이십 마리와 맞먹을 수는 없지 않겠나."
겨우 이해가 되자 발로아 경은 멍하니 입을 조금 벌렸다.
전쟁이 시작된 것은 이제 열흘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발로아 경과 그의 군사가 입은 피해가 너무 막심했다. 도대체 국왕은 이리도 쉽게 빼앗길 라퓨타에 왜 최정예 병력을 보냈단 말인가?
"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에 있는 게 아니다. 자, 선택해라."
"...무엇을?"
"네 부하들의 안위를 위해 그들을 귀화시킬 것인지, 라퓨타에 뼈를 묻을 것인지."
무심히 말하고 있었지만 남자가 말한 내용은 전혀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발로아 경은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알고 싶어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남자가 지지 않고 눈을 맞춰 왔다.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은 너무 조각 같아서 어딘지 현실감이 없었지만 일자로 꾹 다물린 입술은 심지가 굳어 보였다.
"그전에,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소."
"...고집불통인 인사로군."
그러나 발로아 경은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군사들은 그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했다.
남자가 고갯짓을 했다. 곁에 있던 보좌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발로아 경의 옆구리께에 내려놓았다.
이불 위로 떨어진 그것을 주워 올린다. 델토르의 것보다 조금 큰 듯한 동화. 50모드짜리 동전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뒷면을 뒤집은 발로아 경의 눈이 커졌다.
"이 사람은..."
동전을 갖고 다니는 사람이야 많지만 동전에 얼굴이 새겨지는 사람은 그 나라의 국왕뿐일 것이다. 디날의 국왕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에 대해서 들어온 이야기는 많았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레뮤엘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 발로아 경과 눈을 마주쳐 왔다.
그러나 발로아 경은 겨우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가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끝이다.
발로아 경이 눈을 감았다.
"쉬운 결정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처를 치료하면서 천천히 생각하도록."
레뮤엘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발로아 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뮤엘은 딱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오늘 밤만 해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으므로 지체할 틈이 없었다.
막사를 나가 조금 더 뒤쪽의 공터에 있는 전용 막사로 향하자 천막 앞에 무언가 하얀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까 말했던 델토르의 포로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인영이 눈에 들어오자 레뮤엘은 잠시 포로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
포로가 자기 앞에 멈춘 워커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천막 안쪽에서 스며나온 불빛이 포로의 등 뒤로 쏟아지고 있었기에, 레뮤엘은 포로의 선명한 초록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었다.
두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그래. 확실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인형처럼 단아하고 깔끔한 이목구비에 보석을 박은 것처럼 유난히 빛나는 여름날 정원의 잎사귀 색.
요전날 라퓨타에서 자신에게 겁도 없이 검을 들이대던 그 남자가 확실했다.
얼굴을 확인한 레뮤엘은 고개를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열다섯 명의 드래고니안이 아까 지시한 대로 막사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레뮤엘이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거라."
국왕의 천막은 과연 규모가 달랐다. 열대여섯 명이 너끈히 앉을 만한 공간에는 긴 탁자가 놓여 있고 그 탁자를 위시하여 드래고니안들이 앉았다. 탁자 옆에는 구덩이를 파서 만든 아궁이에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달시, 드래곤은 좀 어떤가?"
"지금 치료 중에 있고 다행히 뼈나 힘줄에 무리가 가는 것은 없이 가벼운 자상이라고 합니다."
"다행이군."
레뮤엘이 탁자에 놓인 서류철과 보고서들을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바쁘게 움직이던 레뮤엘의 눈동자가 문득 어딘가에 멈추었다.
"베델리어가 왜 에노타에 있는 거지?"
"그것이... 원군이 필요한 상황이라 했더니 말릴 틈도 없이 출격하셨습니다."
"하여간... 겁이 없군."
레뮤엘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늘 이 모양이었다.
그의 여동생 베델리어 플로렌스 디날은 어릴 때부터 유명한 다혈질이었다. 냉정 침착한 오라버니와 달리 두 번이나 가출해서 항구에서 잡힌 전적이 있을 정도로 말괄량이였지만 정의감만은 알아줘야 했다.
"당장 귀환하라고 전하라. 일을 크게 만들 필요 없다. 그 아이의 드래곤은 불필요한 다툼을 만들어."
그래, 이번 일도. 레뮤엘이 뭔가 사족을 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막 바깥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폐하?"
"...왕녀가 돌아오는 즉시 헤루비나로 출발하라고 전하고, 오늘 밤 자기 전 드래곤들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살피도록. 내일 라퓨타 군대를 만나야 하니 일찍 기다리고 있다가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예, 폐하."
"따로 전할 말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도 좋다. 그리고 문 앞에 있는 포로를 데려오도록."
레뮤엘의 심청색 눈동자가 모닥불 불빛을 받아 보라색으로 빛났다. 이제 포로의 입을 막을 차례였다.
한 시간 후, 이아네는 천막을 받친 굵은 기둥에 손목이 묶인 채 한참 동안 말이 없는 레뮤엘을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막사로 불러들이기에 뭔가 고문이라도 당할 것 같아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레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아네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넒은 막사 안에 이따금씩 장작이 튀는 소리가 조용히 퍼졌다.
벌써 바깥은 취침시간인지 가끔씩 불침번이 천막 옆을 스쳐 지나는 발걸음만 들려 왔지만 레뮤엘은 여전히 잠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아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어낼 생각뿐이었다. 지금 이 막사 안에는 레뮤엘과 이아네뿐이다. 만일 이아네가 지금 밧줄을 끊고 일어나 레뮤엘을 덮친다면.
"허튼 생각은 그만두도록."
깜짝 놀란 이아네가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집무용 탁자에서 고개를 든 레뮤엘이 이아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절 여기로 데려왔습니까?"
이아네는 그냥 세게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여긴 적진의 한가운데였다. 죽을 뻔하긴 했지만 어차피 치료가 없었다면 죽었을 목숨이었다.
"몰라서 묻는 건가. 생각보다 둔하군."
레뮤엘이 탁자에서 일어나 이아네에게 다가왔다. 조금도 흔들림 없는 남청색 눈동자가 이아네를 주시하며 가까워 온다. 이아네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레뮤엘은 성큼성큼 걸어 이아네의 코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커 보이는 장신에 불빛에 비친 심청색 머리카락이 더욱 푸른빛을 발했다.
문득 라퓨타에 처음 오면서 보았던 바다가 떠오르며, 이아네는 멍하니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적국의 왕이지만 확실히 잘 생긴 미청년이었다. 제르멘도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레뮤엘은 뭔가 다른 느낌이다.
"내 얼굴을 아는 포로라니, 당연히 특별대우를 해 드려야지. 만일 이 입이..."
하얗고 긴 손가락이 이아네의 시선 가까이 내려왔다. 길고 마디진 손가락이 이아네의 턱을 쥐어 왔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체온에 이아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국왕이라는 것을 실수로 흘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포로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내 목을 노린다면. 디날은 국왕과 라퓨타를 둘 다 잃는 셈이거든."
이아네가 눈을 깜박였다. 차가운 손가락이 턱에서 떨어져나가고 레뮤엘이 느긋하게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너, 이름은?"
"...발로아."
"발로아-라. 아까 그 대령도 발로아라는 이름이었지."
이아네가 눈을 홉뜨며 레뮤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지독하도록 차가운 시선으로 레뮤엘은 이아네의 눈을 마주쳐 왔다.
"아버지가?"
"...아버지?"
아차. 이아네는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레뮤엘은 흥미를 가진 뒤였다.
"그렇군. 가족인가."
"......"
혹시나 이 발언으로 해서 발로아 대령에게 해가 가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싶어 이아네는 속이 탔다. 그러나 레뮤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막사 한쪽에 마련된 침상에 올랐다.
이불을 들추고 그 안으로 들어가 눕는 레뮤엘을 확인하고 이아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손은 단단히 묶여 막사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시험 삼아 몇 번 당겨 봤지만 어린아이 몸통만 한 막사 기둥은 쉽게 넘어질 것 같지 않았다.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이아네는 기둥에 기대앉았다. 전투의 충격과 아직 낫지 않은 상처는 이아네를 가파른 잠의 길로 안내했고 이아네는 기둥에 머리를 기댄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눈꺼풀 안쪽을 찌르고 들어오는 빛과 코끝에 느껴지는 음식 냄새에 잠이 깼을 때, 이아네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심한 공복감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적군의 막사에서 잠이 들었다. 그것도 상대가 기상한 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심지어 그런 와중에도 배고픔을 느끼다니!
이아네가 수치심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동안 탁자에 하얀 침대보를 깔고 단출한 아침식사 중이던 레뮤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포로'가 잠에서 깨었다.
"일어났군."
그러나 그뿐이었다. 레뮤엘은 식사를 계속했고 이아네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레뮤엘의 식사에 관심이 없는 척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달그락 소리가 나며 식기가 나무 탁자에 내려앉았다. 냅킨으로 입가를 잘 닦아낸 레뮤엘이 옆에 선 시종에게 손짓하자 시종이 그릇에 빵을 한 덩이 담아 이아네에게 다가왔다.
이아네가 조금 기대하는 눈빛으로 시종을 바라보는데, 이아네 앞에 한쪽 무릎을 접어 앉은 시종이 빵을 조금 떼어 이아네의 입가로 가져갔다.
마치 세 살짜리에게 음식을 먹이는 듯한 그 작태에 이아네가 하, 하고 자조 섞인 웃음을 웃었다. 레뮤엘이 그 웃음소리를 듣고 조용히 물었다.
"뭐가 불만인 거냐?"
"스스로도 식사할 수 있습니다."
"손이 그 상태여서는 바닥에 그릇을 두고 개처럼 핥아먹어야 할 거다."
싸늘하게 대답하는 레뮤엘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물론 그의 말이 맞았지만 이아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손을 풀어 주시면 되잖습니까."
"네 처지를 잊은 게로군."
레뮤엘은 단 한 마디로 이아네의 입을 다물게 했지만 이아네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저 시종이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차라리 굶겠습니다."
"마음대로."
레뮤엘은 거기까지 대답하고 일어서서 막사 밖으로 나갔다. 레뮤엘이 그릇을 치우라고 하지 않았으니 시종은 잠시 망설이다 그릇을 이아네의 옆에 놓고 식탁보와 식사가 끝난 그릇들을 갈무리해 천막을 나갔다.
텅 빈 막사에 오롯이 이아네만 남았다. 어딘지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이아네는 빵 그릇을 노려보았다.
배는 고팠지만 먹고 싶지 않다. 이아네는 아직 기사로서의 긍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레뮤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처치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라퓨타 드래곤 관리와 아델 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교전에 대한 지휘까지, 긴장을 놓을 새가 없는 것이다.
이아네가 단식을 하든 말든 레뮤엘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포로 하나쯤 굶는다고 해서 그가 과연 죄책감을 느낄지도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이아네는 화가 났다. 그릇에서 시선을 돌린 이아네는 눈을 감고 차라리 잠이 들기로 했다.
그날 저녁, 라퓨타의 장군과 저녁 식사를 마친 레뮤엘은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발로아 대령이 있는 막사로 들어섰다. 레뮤엘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누워 있던 발로아 경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몸은 좀 어떠한가?"
"...괜찮습니다."
발로아 경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레뮤엘이 고개를 끄덕이곤 본론을 끄집어냈다.
"결정은?"
"아직..."
발로아 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레뮤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포로가 된 지 겨우 이틀. 그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네 아들을 데리고 있다."
"! 이, 이아네를 말입니까?"
발로아 경의 잿빛 눈에 경악과 불안이 서렸다. 레뮤엘이 잠시 머릿속으로 막사에 갇힌 '포로'를 떠올렸다.
‘이아네’-라.
"사정을 설명하긴 복잡하지만."
"아, 안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레뮤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이라고?
잠시 후 그것이 '포로'의 애칭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레뮤엘이 어깨를 으쓱 했다.
"걱정은 말도록. 그냥 입을 막기 위해서니까. 결정을 내린다면 아들을 더 빨리 만날 수 있겠지."
"건강합니까? 화살을 맞은 곳은 어떻습니까?"
"그런 것을 알려줄 의무는 없다."
레뮤엘이 냉정하리만치 차갑게 말한다. 조금 움찔한 발로아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결정이길 바라겠다."
거기까지 말한 레뮤엘이 막사를 나섰다. 발로아 경의 한숨이 천막 바깥까지 들렸지만 레뮤엘은 가볍게 떨쳐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아네-라.
레뮤엘의 꾹 다문 일자 입술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씁쓸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미소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즐거웠던 추억을 회상하는,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을 그리워하는 미소.
그러나 그 미소조차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처럼 차갑게 다문 입술로 막사로 들어선 레뮤엘은 오늘 하루 들어 처음으로 약간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막사 기둥에 묶인 포로는 고개를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 손도 대지 않은 빵 그릇에 파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레뮤엘이 손짓하자 곁에 섰던 시종이 얼른 그릇을 치웠다.
인기척을 느낀 이아네가 얕은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든다. 흐릿한 초점 사이로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 말라 터진 입술이 굳게 잠기며 이아네는 고개를 돌려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레뮤엘의 이마가 살짝 좁혀지더니 이내 없는 사람처럼 그 곁을 스쳐 지났다.
옷을 갈아입고 세안을 마친 후 남은 업무를 보는 동안 레뮤엘은 단 한 번도 이아네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아네도 괜한 소동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아네는 촛불을 끄기 직전에 레뮤엘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던 것을 알지 못했다.
* * *
목이 말랐다.
눈을 뜨면 눈앞의 기물이 망막을 어지럽혔고,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단식을 한 지 삼 일째, 손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무슨 심산인지 이아네의 곁에는 늘 새로운 빵 그릇이 놓였다. 딱 한 번, 죽을 것 같은 허기에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일 뻔했지만 뒤로 당겨지는 손목을 느끼고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공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고 이아네는 하루의 대부분을 얕은 잠으로 보냈다. 나중에는 자신이 자고 있는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얕은 잠을 자는 동안 이아네는 많은 꿈을 꾸었다.
눈앞에 엄청난 진수성찬이 차려진 꿈을 꾸는가 하면 드래곤이 살라스의 머리를 깨물고 난 뒤 발로아 경에게 달려드는 꿈도 꾸었다.
어느 때는 이젤다 성이 보였다. 너무나 평소와 똑같은 일상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제르멘에게 달려가는 순간 꿈은 깨었다.
야속하게도 제르멘은 꿈속에서도 나와 주지 않았다. 그의 다정한 눈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 이아네는 잠에서 깬 뒤에도 깨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도 단식한 지 나흘째가 되어가자 소용없었다.
꿈은 더 이상 꾸지 않았다. 오직 암흑뿐이었다. 이아네의 눈은 빛과 어둠을 식별할 뿐이었고 귀는 이제 무언가를 듣는 것을 거부했다. 묶인 어깨가 아려왔지만 자세를 바꿀 힘도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레뮤엘도 이아네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나흘째 되는 날 밤, 여느 때처럼 밤늦게까지 집무를 보고 있던 레뮤엘은 이아네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잠꼬대처럼 이아네가 마른 입술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레뮤엘은 손을 멈추고 이아네 쪽에 청각을 집중했지만 너무 작은 소리여서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로..."
이아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레뮤엘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아네의 곁으로 다가갔다. 평소라면 이 정도 가까운 인기척에는 깨어나던 이아네는 여전히 깨지 않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
또.
레뮤엘이 잠시 이아네를 내려다보다 한쪽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수척해진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이 안쓰러울 만도 하건만 레뮤엘의 차가운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이아네의 턱을 쥐어 들었다. 그제야 이아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며칠째 굶은 얼굴은 수척하고 씻지 못한 몸은 꼬질꼬질했지만 여전히 그 초록색 눈동자는 여름날 잎사귀처럼 푸르다.
"...제...로..."
이아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피었다. 미약한 미소였지만, 레뮤엘이 당황하기엔 충분했다.
처음으로 그가 웃는 것을 보았다.
잠깐이지만 초록색 눈동자에 생기가 돌고 갈라진 입술이 살짝 들리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완전히 인상이 달라진 그의 얼굴에 레뮤엘이 당황하는 순간, 이아네의 얼굴이 툭 떨구어졌다. 이윽고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에 힘이 빠지며 힘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재빨리 이아네를 받아낸 레뮤엘이 허벅지께에 차고 있던 단도를 빼 손목을 묶은 밧줄을 잘라냈다.
털썩 레뮤엘의 품으로 떨어진 이아네의 숨결이 미약하였다. 레뮤엘은 단 일 초도 지체하지 않고 이아네의 몸을 들어올렸다. 나흘째 굶은 몸이 힘없이 늘어져 유령처럼 흔들린다. 그 가벼운 몸을 들어 침상으로 옮겼다.
포로가 멋대로 단식을 선언한 것이긴 했지만 레뮤엘은 자기 막사에서 송장을 치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총지휘관의 아들이었다. 죽는다고 해서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죽고 난 이후의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레뮤엘은 이전 같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했다.
침상 곁의 협탁에는 늘 마실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레뮤엘은 지체 없이 물병을 들어 입에 물을 머금고 이아네의 얼굴 옆에 손을 받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려 숙인 입술이 하얗게 일어난 가칠한 입술에 닿는다. 말라붙은 입술을 가르고 젖은 혀가 침입했다. 마주친 입술을 타고 차가운 생명이 흘러들었다.
레뮤엘이 손을 들어 이아네의 목을 더듬었다. 꿀꺽, 성대가 움직였다.
고개를 든 레뮤엘이 살짝 숨을 들이쉬며 이아네를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하얗게 일어난 입술은 이제 젖어 있었다. 다시 물병을 들고 물을 머금은 레뮤엘이 망설이지 않고 이아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세 번째 입을 맞추었을 때, 딱딱하게 마른 혀가 문득 움찔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이 들었나 싶어 레뮤엘이 고개를 들려는 순간 이아네의 손이 덜덜 떨리며 레뮤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녀린 힘이었지만 레뮤엘은 굳이 그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제...롬..."
젖은 혀가 움직이며 아까보다 매끄러운 발음을 했다.
제롬? 레뮤엘이 그 이름을 머릿속 귀퉁이에 적어 넣고서 고개를 들려고 할 때였다.
"...제롬..."
초록색 눈동자가 크게 보이는가 싶더니 이아네의 팔이 레뮤엘의 목을 감싸 안아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레뮤엘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이아네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갔다.
반쯤 닫힌 눈동자에 레뮤엘 자신이 비친다.
이아네의 입술이 농염하게 벌어지며 젖은 혀를 빨아 왔다. 목에 걸쳐진 팔에 약간 힘이 실려 레뮤엘의 고개를 당겼다.
제 스스로 벌어진 입술이 부드러운 압박을 즐기듯 밀착해온다. 방금 수분을 머금은 혀는 느리게 레뮤엘의 혀를 따라 올라가며 입안을 애무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혀가 마치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탄력 있게 그의 타액을 빨아들였다.
신음을 약간 흘리며 이아네가 레뮤엘의 입술을 살짝 빨았다 놓으며 아쉽게 핥았다. 츱, 하고 약간 젖은 소리가 울리며 입술이 떨어졌다.
"...제롬..."
습기를 품고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 입술은 이상할 정도로 요염했다. 레뮤엘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이아네의 손목을 잡아 떼어냈다.
"싫어..."
그러나 이아네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레뮤엘의 목에 매달렸다. 레뮤엘은 약간 한숨을 내쉬곤 그대로 이아네의 쇄골쯤에 고개를 내려놓았다.
몇 날을 굶은 속에 갑자기 수분을 섭취했다면 어차피 곧 기절할 것이 뻔했다. 레뮤엘이 반항을 멈추자 이아네가 만족한 듯 조용히 한숨을 쉬곤 예상대로 정신을 잃었다.
목에 둘러진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레뮤엘이 고개를 들었다. 침상 위로 널브러진 포로의 약간 벌어진 입가에 젖은 물기가 남아 있다. 부드러운 주홍빛 불빛을 받은 입술이 윤기를 머금고 번들거렸다.
손가락을 세워 그 입가를 살짝 훔쳐 주고 레뮤엘은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로 갔다.
여전히 얼음처럼 무심한 얼굴로 탁자 위에 남은 공문을 훑는다. 그러나 그날 밤 레뮤엘은 끝내 잠들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새고 말았다.
그 날, 이아네는 꿈을 꾸었다.
오랜만이라 오히려 생소하기까지 한 꿈에는 처음으로 제르멘이 나왔다. 너무나 기뻐서 이아네는 체면도 잊고 그를 끌어안았다. 제르멘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아네를 마주 안아 주었다.
이아네가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제르멘에게 안겨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자, 제르멘이 낮게 웃으며 이아네의 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약간 차갑게 느껴지는 입술을 통해 생기가 흐르는 듯해 이아네는 열심히 그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제르멘의 목을 단단히 감고서 이아네는 울면서 웃었다.
이제, 끝난 겁니까?
이아네가 묻자 제르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이아네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아네도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시험을 통과했고, 이제 영원히 제르멘 곁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
눈을 뜬 순간 이아네는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제르멘이 곁에 있었는데, 그가 옆에서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었는데.
이아네의 망막에 맺힌 것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도 요 며칠 늘 보아 왔던 가죽 천막의 천장이었다.
뻣뻣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눈에 익은 모닥불과 줄이 풀린 막사 기둥이 보였다. 그 곁으로 길게 놓인 나무 탁자도.
고개를 돌린 채 이아네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눈을 감았다 떠도, 아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초록색 눈동자에 습막이 차오르고, 천천히 관자놀이를 따라 흐르는 습기가 느껴졌다.
끝나지 않았다.
이 지옥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절망한 이아네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막사 문이 걷혀지며 눈에 익은 남자가 들어섰다.
"...정신이 들었나."
"......"
말할 기운도 없어서 이아네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레뮤엘의 기척이 가까이에 느껴졌다.
침상 옆으로 무게가 실리더니 레뮤엘의 손이 이아네의 어깨를 잡았다.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이아네가 그 손을 내쳤다.
탁- 하고, 살갗이 세게 맞닿았다. 이아네가 사납게 눈을 뜨고 레뮤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레뮤엘은 무덤덤하게 내쳐진 손을 다시 뻗어 이아네의 어깨를 잡아 올렸다. 단숨에 일어나 앉게 된 이아네가 굴욕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 레뮤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아네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와 같은 막사 안에서 지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그가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레뮤엘은 꾹 다물린 입술로 늘 냉정한 말을 내뱉고 작은 웃음기는 물론 피곤하다는 기색조차 내비친 적이 없는 남자다.
그런 자가 한숨을 쉬다니 이아네로서는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그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나? 그 편이 서로 편할 텐데."
"......"
이아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도 이것이 매가리 없는 반항임을 알고 있다. 상대는 국왕이었다. 적국의 포로 따위 손가락 하나로도 목을 벨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쓸데없는 송장을 치울 생각은 없다. 손은 풀어줄 테니 마음대로 해."
이아네가 조금 고개를 들어 레뮤엘 쪽을 바라보았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그는 미련 없이 침상에서 일어나 천막 입구로 향한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아네는 그의 심청색 눈동자가 왠지 피곤해 보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늘 밤늦게까지 업무를 보다가 잠들었던 것 같다. 무관심한 것처럼 느꼈지만 사실은 은근히 신경 쓰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딘지 가슴이 짠해져서,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고맙, 습니다."
형편없이 쉰 목에서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러나 이아네의 뜻은 제대로 전달된 듯, 입구에 드리운 천을 걷던 레뮤엘이 문득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레뮤엘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천만에."
레뮤엘이 나간 뒤 아주 오랜만에 이아네는 제대로 식사를 끝냈다. 손목이 아려와 덜덜 떨리긴 했지만 옆에서 불안하게 지켜보는 시종의 도움 없이 이아네는 묽은 수프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보이나?"
보좌관 펠록스가 빙그레 웃었다.
오랫동안 레뮤엘의 가장 가까이에서 일해온 펠록스는 과연 수석 보좌관이라는 이름답게 그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어딘지 후련해 보이는 부분을 발견했던 것이다.
"예, 조금."
레뮤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드래곤이 가져온 서신을 훑었다. 그러나 펠록스의 말에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펠록스는 그저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의 왕은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면 안 하면 그만이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레뮤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를 차갑다거나 예의를 모른다고 욕했을지 모르지만 펠록스가 아는 레뮤엘은 절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에노타 전투는 어떻게 됐나?"
"부상자가 많았지만 다행히도 사상자는 적었습니다. 군사 일만 중에 부상자는 약 삼천 명, 사상자는 이백오십 두 명입니다."
"성은?"
"외벽이 무너지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합니다. 외벽이 무너지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델토르 군사들이 철수했습니다."
"...철수했다?"
레뮤엘의 짙푸른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깔렸다. 펠록스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레뮤엘은 델토르의, 정확히는 제르멘 왕의 ‘방식’에 열이 받았다.
디날은 레뮤엘의 왕국이었고 그는 당연히 그의 왕국을 지킬 의무가 있었지만 델토르의 국경을 건드릴 권리는 없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델토르와의 우호 관계는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헛된 꿈일 뿐이지.
문득 이아네의 초록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어젯밤 간절히 누군가를 부르며 허겁지겁 입을 맞추어오던 이아네. 세상 다시없는 행복한 미소를 짓던 이아네의 눈은 다음날 레뮤엘의 손이 닿자 사납게 식어 버렸다.
어차피 그건 키스가 아니었다. 응급 처치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 다른 감정은 없다.
그러나 레뮤엘은 그가 자신의 손을 뿌리쳤을 때 조금 상처를 받았다.
만일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친구와도 조금 더 기분 좋은 만남이 되었을 텐데.
레뮤엘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펠록스가 걱정스레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레뮤엘은 늘 하던 정무 회의를 평소보다 늦게 마쳤다.
국왕의 막사에서 함께 지내고는 있지만 이아네는 엄연히 포로였다. 푹신한 침대는 국왕의 권한이었으므로 이아네는 식사가 끝난 뒤 당연한 수순으로 다시 막사 기둥에 손목이 묶였다. 여전히 어깨가 조금 아려 오긴 했지만 이번에는 훨씬 참을 만했다.
식사를 마친 이아네가 죽은 듯이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눈을 뜬 이아네의 시야에, 탁자에 앉아 정무를 보는 레뮤엘의 모습이 들어왔다. 늘 똑같이 정갈한 모습으로 사무를 보며 서명하고 꼼꼼히 내용을 훑는 짙은 푸른 눈이 주홍빛 등불에 반사되어 보라색으로 보였다.
레뮤엘은 변함없이 이아네를 무시하고 자기 일에만 시선을 주었다. 어쩌면 이아네가 일어난 것을 몰랐을 수도 있다. 이아네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할까.
막사 바깥에 있을 동료들이 걱정되었다.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무사하신지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레뮤엘은 감히 이아네가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찌어찌 목숨을 부지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적국의 왕이다. 이아네는 새삼 자신이 적국의 왕과 같은 지붕을 이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사각사각, 깃펜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와 불씨가 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어쩐지 편안해지는 느낌에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픽 웃었다. 편안이라니, 적진 한복판에서 태평스럽기도 하지.
그러나 당분간은 목숨의 위협도 없을 것 같다. 생각만 한다고 해서 제르멘 곁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현실에 충실해야 할 때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아네는 조금 체념해 버렸다.
그때 레뮤엘이 맞춘 것처럼 입을 열었다.
"발로아."
듣기 좋은 목소리지만 무기질처럼 감각이 없었다. 이아네가 조금 어깨를 긴장시키자 레뮤엘이 시선을 돌려 이아네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가?"
이아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초록색 눈에 동공이 커졌다.
"아버지를... 뵐 수 있습니까?"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레뮤엘이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이아네가 아차,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꼬질하게 때가 낀 얼굴이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는 지금만큼은 얼굴에 빛이 났다.
레뮤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살려는 놓았으니 이아네의 이용 가치를 높여야 했다. 이 치를 어떻게 해야 발로아 대령의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는..."
그 침묵을 참다못한 이아네가 조심스레 먼저 입을 열었다. 레뮤엘이 고개를 들자 이아네가 불안해하면서도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는 너는 괜찮으냐고 묻고 싶었다.
자기도 꽤 큰 상처를 달고 있으면서, 심지어 그 몸에 사나흘이나 단식을 했으면서 아버지를 걱정하는 꼴이 측은하였다. 레뮤엘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공문서를 살폈다.
한참 동안 막사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조금 심심해진 이아네의 눈이 막 감길 무렵 레뮤엘이 탁자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레뮤엘이 이아네를 싹 무시하고 침상으로 가버릴 거라고 생각한 이아네는 그냥 눈을 감았다. 그러나 레뮤엘은 이아네의 앞에 멈춰 섰다.
"......?"
"델토르에."
거기까지 말한 레뮤엘은 뭔가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이아네는 의아한 눈으로 레뮤엘의 진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는 포로였다. 국왕의 신분으로 포로에게 망설일 말이 뭐가 있단 말인가?
"...연인이 있나?"
이아네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 이아네가 입을 다물자 레뮤엘이 다시 물었다.
"연인이, 있나?"
연인이라.
생각해 보면 제르멘과 많은 날들을 함께했지만 둘 다 특별히 연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아네에게, 제르멘에게 서로는 '그냥' 거기에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레뮤엘은 이아네가 고개를 숙이자 몸을 낮춰 그의 턱을 쥐어 들었다. 붉어진 귀와 안절부절못하는 초록색 눈으로 미루어 보아 연인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거기까지 확인한 레뮤엘은 턱을 놓아 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등불을 껐다. 레뮤엘이 침상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아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놀랐다. 저 냉혈한 같은 국왕이 연인이 있냐고 물을 줄은.
이아네가 놀란 심장을 쓸어내리는 사이, 침상 안의 레뮤엘은 눈을 감고 이 포로를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내일은 발로아 대령을 찾아가야겠군. 어쩐지 협상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해 레뮤엘은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날, 레뮤엘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입가를 닦으며 시종에게 이아네의 손목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손이 풀리자 이아네는 저려 오는 어깨를 주무르고서 서툴게 식기를 들어 죽을 삼켰다.
식사가 끝나면 바로 나가던 평소와 달리 레뮤엘은 느긋하게 탁자에 앉아 이아네의 식사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지막 한 숟갈이 비워지자 레뮤엘이 곁에 서 있던 펠록스에게 손짓했다.
"가서 씻기도록."
"...예?"
펠록스가 놀란 얼굴로 레뮤엘을 바라보자 레뮤엘은 못할 말이라도 했냐고 묻는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놀란 것은 이아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식사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씻기라니. 물론 거의 대여섯 날을 제대로 씻지 못했으니 반가운 말이긴 했으나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뭔지 짐작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역시 펠록스는 왕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레뮤엘은 거짓말이든 빈말이든 입 밖으로 내놓은 말은 거둬들이는 법이 없었으므로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켜보라."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막사를 나선 레뮤엘은 놀라 휘둥그레 뜨던 이아네의 초록색 눈을 떠올리고 아주 조금 미소를 지었다. 뭔가 한 방 먹인 듯한 기분이 들어, 발로아 경의 막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경쾌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발로아 경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새로 감은 붕대는 깨끗했고 포로치고는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으나 발로아 경의 얼굴은 어딘지 께름칙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레뮤엘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발로아 경은 몸을 일으켜 목례를 했지만 여전히 몸이 불편한지 살짝 이마에 주름이 졌다.
"몸은 어떤가?"
"덕분에...많이 나아졌습니다."
"다행이군."
레뮤엘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팔걸이에 자연스레 팔을 올리고 손을 앞으로 해서 깍지를 낀 레뮤엘이 입을 열었다.
"대답은 아직 생각 중인가?"
"...제 독선으로는..."
"...그렇군."
레뮤엘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머릿속으로 협상할 만한 카드가 있을지 고민했다.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다 죽여 버려도 상관없지만, 앞서 말했듯 레뮤엘은 필요 없는 살생이나 쓸데없이 송장 치우는 일은 반갑지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자신으로 족하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지금... 저희 군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발로아 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치료라는 명목으로 격리되어 있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나 그는 명색이 총지휘관이었다.
"마을의 빈집을 두 채 빌려 수용 중이고 식사도 제때 하고 있으니 걱정 말도록. 어차피 배가 없다면 도망친다고 해봐야 헛수고일 테니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는 것 같더군. 부상자는 의료용 막사에서 치료중이고, 사상자는 시신을 따로 추려 엊그제 델토르로 보냈다. 아마 오늘쯤에는 도착했을 것이다."
발로아 경이 멍하니 레뮤엘을 바라보았지만 레뮤엘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발로아 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감사, 합니다."
진심이었다.
정말로, 지금 이 순간 발로아 경은 적국의 국왕인 그에게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지금 전쟁의 포로다. 지금 당장 죽여서 물고기 밥으로 던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레뮤엘은 그에게 귀화를 권했다. 명백히 명령이 아닌 권유였다. 레뮤엘은 그의 의견을 재고한다고 해서 발로아 경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발로아 경의 감사를 들은 레뮤엘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생전 처음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이상한 눈으로 발로아 경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예?"
"이 세상에 생명보다 중한 것은 없다. 내게 중하다면 당연히 남에게도 중한 것일 터,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그렇게도 감사할 일인가? 그러기엔 너무 당연한 일이잖나."
발로아 경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그러나 레뮤엘은 제 할 말만 마치고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발로아 경의 멍한 눈동자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레뮤엘은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지금 발로아 경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였다. 무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입구에 드리운 천을 걷는 순간 발로아 경이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
발로아 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레뮤엘은 참을성 있게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발로아 경은 어떤 말을 골라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한 듯 굳게 다문 입술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발로아 경과 레뮤엘은 한참 동안 아주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아네가 몸을 다 씻고 막사로 돌아와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레뮤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펠록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기둥에 묶일 때쯤에야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말끔해졌군."
깨끗해진 얼굴을 보고 레뮤엘이 한 말은 그것이 다였다. 이아네가 여전히 경계 서린 눈으로 레뮤엘을 바라보는데, 레뮤엘이 펠록스에게 눈짓하며 막사를 나섰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따라와라."
여전히 불친절한 화법이었다. 불안과 분노로 살짝 입을 내민 이아네가 레뮤엘의 뒤를 따랐다.
막사 바깥으로 나서자, 흩어지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이아네는 앞서 가는 레뮤엘의 뒤통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검푸른 빛에 하얀 햇살이 내려와 앉는다. 그 덕에 푸른색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햇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아네는 그것이 조금 부럽다고 생각했다.
제르멘의 은발은 햇살 아래서 살짝 금빛이 돌았다. 반짝반짝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아름다워 몇 번이고 손대보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 내어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 만져보았을 때, 제르멘이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했던 말을 기억한다.
'미안, 머리를 만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그 뒤부터 이아네는 제르멘의 머리카락에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여름날 냉수 한 모금처럼 아릿한 기억을 떠올리고서 이아네는 괴로운 얼굴이 되었다. 지금쯤 제롬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레뮤엘의 걸음이 멈추었다. 이아네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자 레뮤엘이 뒤돌며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올곧은 눈동자였다.
"들어가라."
"...여기가 어딥니까?"
레뮤엘은 아무 말 없이 막사 입구의 천을 걷어주었다. 약간 자존심 상하기는 했지만 이아네는 천 사이로 흘러나오는 약초 냄새에 이 막사의 용도를 알아차렸다. 치료 때문인가 싶어 막사 안으로 들어선 이아네의 눈에 익숙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아네."
"...아버지!"
이아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쥐어짜듯 소리를 질렀다.
침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히 발로아 경이었다. 살아 계셨구나! 발로아 경의 잿빛 눈동자와 이아네의 녹색 눈동자가 마주친다.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이아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이아네는 그에게 안겨 거의 울고 있었다. 발로아 경은 어색한 손길로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 아버지..."
"...그래, 안. 건강해 보여서...다행이다."
발로아 경의 손이 조심스레 이아네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아네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먹이며 그의 무릎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알싸하게 풍겨오는 약초 향기에 또 한 번 눈가에 눈물이 그렁해지고 말았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다. 살라스의 죽음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아니, 그 전에 자신이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묶인 손이 애처롭게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힘을 준다. 옆에 선 레뮤엘이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다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봉은 다 끝났나."
이아네가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여전히 물기가 남은 눈을 한 주제에 눈빛만은 제법 매서웠다.
"그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대들을 만나게 한 건 아니다, 발로아 대령."
"...알고 있습니다."
발로아 경이 한숨을 쉬었다. 이아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버지를 돌아본다. 무슨 뜻일까?
"기다리고 있겠다."
그 말을 남기고서 레뮤엘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 * *
이아네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귀화를 생각해 보겠느냐고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니죠? 그...그건 무슨 소립니까 도대체?"
"...말...그대로다."
발로아 경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아네는 지금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배신감에 이를 꽉 다물었다. 지금, 아버지가 뭐라고 하신 거지?
"폐하를... 폐하를 배신하라는 겁니까?"
발로아 경의 잿빛 눈이 고통스럽게 이아네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이아네를 바라보던 발로아 경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렇다."
"아버지..."
이아네가 황망히 아버지를 부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 발로아 경은 날 때부터 군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살아오신 분이었다. 이제 와서 귀화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인가!
"...안됩니다. 그럴 수 없어요. 저는 델토르로 돌아가야 합니다."
"안 된다."
"왜입니까!"
결국 이아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발로아 경이 다시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문득 화살에 맞은 상처에 감은 붕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아네가 숨을 몰아쉬며 차오르는 흥분을 내리눌렀다.
"폐하를 너무 믿지 말거라, 안."
이아네는 멍하니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예?"
"넌 절대 돌아가선 안 돼. 그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테다. 반역자, 배신자, 무슨 말을 들어도 좋아. 널 델토르로 돌려보내진 않을 테다."
발로아 경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마치 이아네와 제르멘의 은밀하고도 달콤한 배덕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왜...왜입니까. 왜 제가..."
"네가 지금 레뮤엘 폐하의 막사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발로아 경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이아네가 어리둥절하는 동안, 발로아 경은 이아네의 손을 힘 있게 쥐어왔다.
"안, 내 말을 듣거라. 지금은 어찌 보일지 모르지만 그분과 함께 지내고 있다면 그를 잘 살펴 보거라."
발로아 경의 눈동자는 간절히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아네는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안?"
"......"
이아네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빠르게 회전했다. 레뮤엘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어쩌면 지금이 이아네에게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적국의 포로지만 그는 무슨 연유에선지 이아네를 곁에 두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적진 가장 깊숙이에, 이아네가 있었다.
여차하면 위험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곁에서 중요한 정보나 전쟁의 주도권을 쥘 실마리를 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도망치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확실한 것은 이아네가 레뮤엘 옆에 가까이 있을수록 디날의 정보를 파악하기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이아네가 굳은 얼굴로 말이 없자 발로아 경의 얼굴이 불안해졌다. 그러나 이아네는 곧 고개를 들고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귀화는 할 수 없습니다."
"안."
"귀화를 하면."
이아네가 고통스럽게 말을 잇는다.
"...저는 라이오넬 기사단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
발로아 경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천막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의 무게에 못 이겨 발로아 경이 입을 열려는 순간 이아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되면 저는 폐하 곁에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아버지."
발로아 경의 가라앉은 눈에 어두운 이채가 떠올랐다.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했을 때의 눈이었다. 발로아 경이 무언가 말하려다 그저 무거운 한숨을 한 번 더 쉬었다.
"...일단 돌아가라, 이아네. 그리고 그분을 잘 지켜보도록 해라."
"귀화는 안 할 겁니다."
"나중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발로아 경이 강하게 나오자 이아네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이아네가 천막 밖으로 나섰다. 그 등을 바라보며 발로아 경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늘 그랬다.
이아네는 묘하게 외골수 같은 데가 있어서, 정도라는 것을 몰랐다. 모 아니면 도,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는 정직 일면도의 신념은 높이 살 만했지만 문제는 이아네의 좁은 시야였다.
이아네의 세계는 아주 좁다. 군인 가풍에 물들어온 탓도 있겠지만 너무 어릴 때부터 제르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이아네에게 있어 그의 세계는 제르멘 자체였다.
이아네가 라이오넬에 들어갔을 때 발로아 경은 오히려 조금 안심했다. 눈만 뜨면 제르멘 제르멘 노래를 부르는 녀석이었으니 솔직히 말해 제대로 성인 남자 한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 탓이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이아네가 무사히 정기사로 승격되고 난 뒤, 여름 한낮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기사로 승격되고서야 겨우 얼굴을 본 아들은 인형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제르멘에게 맞춰져 움직이고 제르멘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한 '사육'에, 발로아 경은 이아네를 라이오넬로 보낸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아네에 대한 발로아 경의 우려는 제르멘의 라퓨타 주둔령이 떨어졌을 때 극에 달했다. 이아네는 아무것도 모르고 제르멘의 명령에 따랐지만 발로아 경은 이아네도 예외 없이 라퓨타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서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실망하고 말았다.
제르멘에게 있어 이아네는 대체, 어떤 존재였단 말인가?
침통한 표정의 발로아 경을 감싸 안으며 라퓨타의 하루가 저물었다. 이따금 멀리서 드래곤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빼면 전쟁이라곤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고요한 날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젤다 성.
매일 아침 열리는 정무회의에서는 각지에서 보내온 보고서들을 읽는 데만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다.
회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세지고 있었지만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는 여전히 태연하고 느긋한 얼굴로 보고를 듣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서는 전쟁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태평천하가 한창인 것처럼 착각할 얼굴이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다행히도 전세는 델토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라퓨타는 여전히 디날의 차지였다.
-똑똑.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정중한 노크 소리 후에, 열린 문틈으로 말쑥한 정복을 차려입은 궁관이 쟁반에 서신과 작은 주머니를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서신은 곧바로 제르멘에게 전해졌고 제르멘은 내용을 눈으로 훑은 뒤 비안테 공작에게 서신을 넘겼다. 비안테 공작이 큰 소리로 서신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서신은 요약하자면 단 한 마디를 담고 있었다.
"-하여, 라퓨타에 주둔해 있던 델토르군의 시신을 확보해 돌려보냅니다."
"지금 어디에 수습해 두었나?"
고드릭 장군이 씁쓸하게 궁관에게 물었다. 궁관이 약간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지금 라이오넬 기숙관에 있습니다."
"신원은?"
"대부분 확인 가능합니다만, 시체 한 구가 완전히 머리가 뜯겨 나가 확인 불명입니다."
"이런."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궁관 역시 역겨운 장면을 떠올린 듯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신 시체의 가슴주머니에서 이것이 나왔습니다."
궁관이 조심스럽게 쟁반에 함께 받쳐 든 주머니를 열었다. 납으로 된 손바닥만 한 오르헴이 피에 젖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가져오라."
제르멘이 손을 내밀자, 비안테 공작의 손을 거친 오르헴이 제르멘의 손바닥에 놓였다. 묵직하고, 납작하고, 피에 젖어 갈변한 납 오르헴.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상징이 제르멘의 푸른 눈동자에 비쳤다.
"...까마귀 깃털이라."
제르멘의 중얼거렸다.
까마귀 깃털 두 개가 방패 위에 교차된 문장. 그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청년의 것이었습니다."
"......"
제르멘은 아무 말 없이 일렁이는 푸른 눈으로 오르헴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에 뿌듯하게 쥐이는 차가운 감촉.
음각으로 새겨진 까마귀 깃털은, 발로아 가의 문장이었다.
"...들으라."
낮고, 차갑고,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제르멘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눈이 제르멘을 향하자 제르멘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라퓨타는 내버려 두도록. 지금은 헤루비나 성을 친다."
누군가의 얼굴에는 희색이, 누군가의 얼굴에는 패색이 만연해진다. 제르멘은 희비가 엇갈리는 그 얼굴들을 내려다보며 살짝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폐하, 그럼 라퓨타는..."
"어차피 입구에 불을 피우면 너구리는 기어 나오게 되어 있지. 케닛으로 진격하게 되면 디날의 국왕도 어쩔 수 없이 출격하게 될 테니."
"...알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드릭 장군은 한숨을 내쉬며 국왕의 전언을 받아 적었다.
제르멘은 정무회의를 정리하고서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서, 제르멘은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민감했으며 예민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제아무리 제르멘이라도 머리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심한 뒤 완성된 편지는 눈처럼 새하얀 깃털을 가진 매의 발목에 묶였다. 매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주인을 바라보자 제르멘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동그란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이걸 가지고 라퓨타로 가렴, 티즈. '그'에게 전해 주도록 해. 그리고 밤을 틈타 돌아와야 한다."
-키이.
얌전히 고개를 살짝 숙인 티즈가 펄쩍 날아올랐다. 금세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는 흰 점을 바라보며 제르멘은 엷은 미소를 입에 물었다.
제르멘은 본능적으로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 그가 정말로 원하던 것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물론, 이아네의 일은 안 되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제르멘의 입가가 살짝 떨려왔다. 아아, 어쩌면 좋을까. 이것 참, 삶의 재미가 하나 없어졌군.
-하지만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아네에게는.
팔을 감싸안고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는 제르멘의 등 뒤로 흐릿한 구름들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