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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 (4/27)

3. 전쟁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아네의 늦은 귀가는 왕의 갑작스런 선언으로 인해 주목받지 못했다.

지난달에 라이오넬 단장으로 취임한 칼릭 경은 고지식하기로 유명했지만 이아네가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일어났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깐깐한 칼릭 경 치고는 대단한 특혜였지만 그 이유를 알고서 이아네는 칼릭 경에게 품었던 의구심을 싹 까먹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붉은 머리의 기사단 동료 살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하루 종일 폐하 곁에 붙어 있었다면서 아무것도 몰랐나?"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습니다."

이아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지만 살라스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어깨를 으쓱 하며 말을 이었다.

"나도 오늘 아침에야 들었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후사에는 관심이 없으시던 분이 갑자기 왜 왕비를 들이시겠다는 건지. 물론 역대 기록을 보면 남들보다 늦은 편이긴 하지만."

"하지만..."

"낸들 윗사람들 속을 어찌 알겠어. 내무대신들은 또 야근이겠군."

살라스가 붉은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폐하...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폐하를 뵈어야 해요."

"진정해, 이아네 군. 폐하께선 칼릭 경을 대동하고 국무회의실에 계시네. 지금 한창 회의중이실 거야."

"안돼..."

이아네의 초록색 눈동자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제르멘의 곁에 있으면서, 그의 옆에 이아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동시에 이아네는 자신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제르멘의 곁을 지켜왔음을 깨달았다.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제르멘은 당연한 듯 이아네의 곁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이아네의 소망일 뿐.

제르멘은 언제든지 이아네를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걷잡을 수 없는 허무와 절망이 발밑을 무너뜨렸다. 차마 서 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 주저앉는다. 살라스가 놀라서 이아네를 부축했다.

"괜찮나? 어제 늦게 귀소했다고 하더니, 잠이 부족했나?"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닙니다..."

살라스의 부축을 받아 의무실로 향하는 동안 이아네는 죽은 눈동자로 멍하니 아니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의 손. 붉은 입술과 달콤한 미소. 매혹적인 푸른 눈동자로 눈꼬리를 길게 휘며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제르멘은 온전히 이아네의 것이었다. 그와 체온을 나누고 그의 정을 삼키고 살 떨리는 열락을 공유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꿈속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내일 봐.'

억지로 침상에 누운 이아네는 제르멘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상처입은 눈동자가 감기며 울먹이던 눈꼬리에 이슬이 흘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혼란 속에서 이아네는 대상 없는 원망을 넘치도록 흘려냈다.

"그것, 참으로 복잡하군."

"허나 폐하. 평생을 함께할 반려이시니 신중하셔야 합니다. 델토르의 국모가 되실 분이 아닙니까."

"평생을 함께 한다, 라."

제르멘이 턱을 매만졌다. 그렇지, 곁에 있을 사람을 아무나 골라서는 안 되지.

"그럼 가까운 시일 내에 연회라도 열어야겠군."

"......"

비안테 공작의 얼굴에 환호가 어렸다.

젊은 국왕, 제르멘 라 스타시아는 그 출중한 외모와 스물여섯 한창때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후궁 하나 없이 홀로 그 커다란 침실을 사용해 왔다.

디날의 어린 놈은-그가 제르멘보다 연상이라는 것은 비안테 공작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스무 살 되는 해에 정비에게서 후사를 얻었건만!

"폐하... 혹, 신이 지금 몽중에 폐하를 알현하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아니군, 비안테 공. 잠이 덜 깼다면 지금이라도 저택으로 돌아가도 좋다."

"아니, 아닙니다, 폐하. 저는... 오, 어머니 로요라여. 제가 죽기 전에 이런 날을 맞이하다니!"

주름이 진 눈가로 눈물까지 글썽이며 비안테 공작은 속으로 주먹을 부르쥐었다. 반드시, 기필코 델토르의 왕비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겠다!

제르멘은 여전히 속모를 미소를 지으며 비안테 공작이 부산스레 연회를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안테 공작은 결코 세 치 혀만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왕성 내 최고대신인 비안테 공작을 설득한다면 그 뒤는 알아서 다 해줄 것이다.

자, 이제 어쩐다? 꼼짝없이 왕비를 맞게 되었는데. 후후, 미소를 흘리며 제르멘은 느긋하게 이아네를 떠올렸다. 벌어진 허벅지와 열락으로 튕겨 오르는 낭창한 허리를 떠올리자 아랫배 부근이 다시 뜨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을 위해서 제르멘은 일단 참아야 했다.

모든 것은 어제 라퓨타에서 델토르 황궁으로 오는 동안 오직 제르멘의 머리에서만 계획됐지만 짧은 시간 생각한 것 치고는 꽤 괜찮았다. 서재에 틀어박혀 반나절을 '계획'을 위해 투자했고 이제 그건 완벽했다. 모든 것이 제르멘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지금 제르멘은 웃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서, 이아네를 괴롭힐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제르멘이 비안테 공작과의 비밀스런 회의를 끝내고도 한참 후에야, 이아네는 기사단의 의무실 침대에서 눈을 떴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던지, 이미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서쪽 창으로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벌떡 일어난 이아네는 의무실을 나와 바쁜 걸음으로 국왕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 가까이 도착했을 때, 이아네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목도하고 한동안 얼이 빠졌다.

"죄송하지만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그... 그럼 들어가서 기다리겠다."

드물게 이아네가 말을 더듬으며 고집을 부렸다. 병사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잘근거리다 힘겹게 입을 연다.

"그것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무... 무슨 소리냐. 나는 폐하의 근위기사다."

"오늘로서 폐하의 호위는 칼릭 경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유감입니다만 왕명입니다."

서재를 지키고 선 병사는 오랜 세월 그 앞을 지켜온 만큼 이아네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다. 아무리 이아네라도 제르멘의 명령 없이는 그를 알현할 수 없었다.

이아네의 눈동자에 다시 절망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죄송합니다."

병사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이아네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돌아가라는 뜻이다. 눈물을 참으며 돌아선 이아네는 문득 뭔가 기억났다는 듯 어디론가로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던 이아네가 도착한 곳은 도서고였다. 십 년 전 그날처럼, 이아네는 도서고 가장 깊숙이 자리한 역사서고로 향했다. 입구에서 첫 번째 책장을 끼고 돌아 열세 번째 책장. 그 안으로 쭉 가다가 하나, 둘, 세 번째 통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다시 다섯 번째 책장.

그 책장으로 가려진 창문에는 늘 제르멘이 느른하게 누워 있곤 했었다.

"헉, 헉-"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이아네는 다섯 번째 책장을 돌았다. 그리고-

"...안?"

이아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마 위로 가볍게 흩어지는 은발. 영리하게 빛나는 푸른 눈. 짙은 콧날과 미소를 담은 붉은 입술.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그가 낯설어 보이는지 몰랐다. 이아네가 숨을 몰아쉬었다.

"헉, 폐... 흐윽, 폐하, 헉..."

"무슨 일이야? 왜 울고 그래?"

제르멘이 정말 놀란 듯 읽던 책을 덮으며 기대 있던 창틀에서 일어났다. 그 작은 움직임에 이아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제르멘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

"흑, 폐하... 윽, 못... 볼 줄 알고... 흑, 크흡, 내일, 윽... 보자고... 흐흑, 칼릭... 흐으엉, 호위...허엉, 변경돼서..."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추한 건 알았지만 이아네는 제르멘의 목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내일 봐, 라고 했는데. 오늘도 당연히 어제와 같을 줄 알았는데.

"아아... 이런. 화가 났군, 나의 기사님."

제르멘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아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재중인 걸 알자마자 도서고로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대단한데.

픽, 웃음이 터진다. 제르멘이 이아네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이아네가 진정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지만 제르멘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제르멘은 이아네가 자신 앞에서 우는 것이 좋았으니까.

"다, 울었나?"

"흑... 크흡... 죄송...합니다. 추태를..."

부어서 빨개진 코끝을 살짝 문질러 주며 제르멘이 킥킥댔다. 이아네는 부끄러웠지만 그가 웃는 것으로 조금 안심했다.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괜찮아, 안... 네가 왜 울었는지, 알고 있어."

"큭...흡..."

다시 눈물이 솟구치려 해, 이아네는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다시 문질렀다. 제르멘이 부드럽게 이아네의 붉어진 눈가를 매만졌다. 울어서 뜨거운 눈두덩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았다.

"실망했겠지, 물론."

"아...아닙...흑...아닙니다..."

이아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아닙니다..."

"그럼 왜 울었지?"

"다신...흑...다시는...곁에 있지...윽...못할까봐..."

이아네가 눈물을 훔쳤다. 제르멘이 가만히 이아네를 바라보았다.

잠시 숨을 고른 이아네가 빨개진 눈가로 제르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제롬의 옆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흑...제가 무지의 소치로, 제롬...옆에는 늘 제가...있을 거라, 교만했습니다."

이아네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저를...내치지 마세요, 제롬. 곁에...있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르멘이 말없이 이아네의 손을 잡아끌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고, 붉은 혀가 눈물자국을 따라 핥는다.

"이건 시험이야, 안..."

"시험...?"

"그래. 안타깝지만...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해. 너를 영원히 내 곁에 두기 위해서는."

"영원히...?"

어리둥절한 이아네를 다독이며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제르멘이 속삭였다.

"그러니, 믿고 기다려 줘."

"...예."

"착하구나, 안. 이리 와..."

단단하게 안긴 팔에서 용담꽃 향기가 났다. 큰 숨을 들이마시며 이아네는 제르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비안테 공작의 경이로운 추진력은 왕성에서 일하며 녹봉 좀 받아먹어 본 인간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국왕의 입에서 인가되어 명령이 떨어졌다 하면 비안테 공작은 무슨 일이든 늦어도 두 달 안에 반드시 해냈다.

라퓨타 원정 때도 그랬지만 간택령이 내린 뒤 정확히 한 달, 제르멘은 솔직히 좀 놀라고 말았다. 공작가와 후작가의 혼인적령기 영애들의 명단을 쭉 뽑아 대령한 것이 불과 이틀만의 일이었고, 일주일 후에는 초대장을 받을 귀빈의 명단을 내밀었다.

국내 굴지의 명문과 무장 가문뿐 아니라 외국의 인사까지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었지만 디날만은 예외로 쏙 빠져 있었는데, 제르멘이 이유를 묻자 비안테 공작은 불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중요한 국가행사와 겹친다고 합니다."

"국가행사?"

"위령제라고 하더군요."

'감히 델토르 국왕의 초대를 무시하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비안테 공작이 툴툴댔다. 제르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명단을 들추었다.

겨우 삼 일 동안의 연회일 뿐인데도 두꺼운 종이철은 보기만 해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많았다.

"바구스 산 담배 오백 타스와 향초 오십 개, 장식용 양초는 백 여든 개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연회장 미관을 위해 새로 테이블보와 태피스트리를 제작 중이며 랙탈에서 와인과 샴페인을 각각 삼십 통, 후에나에서 질 좋은 밀가루를 이백 자루 주문했습니다. 폐하의 의상 가봉은 다음 주 초에 시작되며 두 주일 후에 완성됩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하하, 과연 비안테 공다워.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사실 이번 연회는 비안테 공작에게 있어 매우 중요했다.

자고로 왕이란 아랫도리를 그릇 놀려서는 아니 되지만 너무 자제해서도 옳지 않은 법. 하루라도 빨리 후사를 생산해 스타시아 왕가의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국왕의 후사는 빠를수록 좋았다.

"라이오넬은 그날 어디서 근무하지?"

"연회장 안에 정기사 열여덟 명과 준기사 스물 두 명, 정원과 후원에는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각 방위마다 한 조씩 배치됩니다. 나머지는 성 안을 시찰하고 두 명이 기사단 숙소와 사무실에서 숙직입니다."

"숙직 기사는?"

"어디..."

비안테 공작이 잠시 뜸을 들이며 명단을 훑었다.

"여기 있군요... 보리스 르샤 테어도어와 이아네 월터 발로아, 이상 두 명입니다."

제르멘의 눈에 약간 이채가 띠었다. 이아네가, 연회가 있는 날 숙직이라고?

"확실한가?"

"칼릭 경에게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수고했다, 비안테 공. 부디 이번 연회가 끝나고 그대가 기뻐할 소식을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비안테 공작의 얼굴에 감동, 환희 내지는 충성 어린 눈물이 비치기 시작했다. 오, 로요라시여, 당신은 정말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비안테 공작이 눈물을 닦으며 집무실을 나선 뒤, 제르멘은 턱을 문지르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창공을 닮은 연한 푸른 눈에 어두운 윤기가 돈다.

잘 마감된 마호가니 책상 위를 타닥타닥 손가락으로 굴리다, 제르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으로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국왕의 집무실에서만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젤다 성의 정원에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원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온 그림자는 제르멘이 선 창 바로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꺼져가는 햇살을 반사시켰다. 붉은 빛줄기가 집무실 천장에서 이리저리 춤을 춘다.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제르멘은 겉옷을 걸쳤다.

'손님'을 마중할 시간이었다.

두 달 후, 이젤다 성의 입구에는 초저녁이 되면서부터 엄청난 마차 행렬이 이어졌다.

길게 줄을 이은 마차들은 색깔도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문에는 우아하게 각 가문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었다.

화려한 마차와 불빛들이 연이어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그 시각, 성에서 조금 떨어진 라이오넬 기사단 건물은 그와 대비되도록 조용했다.

라이오넬 기사 전원이 총출동하여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는지라 당연히 건물은 거의 비었지만 그 쥐죽은 듯한 고요 안에서 이아네는 굳은 얼굴로 당직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다.

내궁 근무인 살라스가 슬쩍 이아네와 숙직을 바꿔주려 했지만 이아네는 극구 거절했다. 이아네는 처음부터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제르멘의 곁에 다른 여인이 서는 것을 보는 게 두려웠다.

화려한 불빛과 여기까지 들려오는 웃음소리, 꿈결처럼 실려 오는 맛있는 냄새가 오늘 연회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아네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다시 펜을 잉크에 담갔다. 오늘 밤은 일찍 자야겠다.

보고서를 반쯤 쓰다 잠시 결린 어깨를 주무르던 이아네가 문득 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연회가 끝나는 날, 국왕의 눈에 든 어느 귀족 영애가 제르멘의 손을 잡고 춤을 추게 될 것이다.

"-큭."

이아네가 문득 가슴께를 그러쥐었다. 숨 쉬는 것이 힘들 만큼 울컥 올라오는 질투에 이아네는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이렇게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던가?

이아네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위엄을 갖춘 연회복을 차려입고,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실크 장갑을 낀 여린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날아갈 듯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하는 남녀. 이아네는 그 뒤에서 처연히 울고 있다.

"...안 돼..."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정말로 그분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돼 버려...

"뭐가 안 돼?"

"!"

이아네가 너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지만 이아네는 그 목소리가 이 시간 여기에서 들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누구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폐...폐하!"

"이런, 울고 있었나."

긴장이 풀린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초록색 눈동자가 젖어가자 제르멘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눈으로 그 눈두덩에 입을 맞추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여기에..."

"도망 왔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럼."

제르멘이 킥킥대며 이아네를 끌어안았다. 코끝에 맴도는 용담꽃 향기에 그제야 이아네도 실감이 났다. 아, 정말, 제르멘이다.

"네가 없으니 재미가 있어야지 말이지."

약간 시무룩한 제르멘의 목소리에 어이없게도 이아네는 희열을 느끼고 말았다. 그도 나를 그리워했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아네는 두 번 생각지 않고 제르멘을 마주 끌어안았다.

"하하, 이거, 이렇게 반겨주니 고마운데."

"...왕비를...들이실 겁니까?"

"뭐...아무래도, 로즈웰 궁을 오랫동안 비울 수는 없겠지."

이아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로즈웰 궁은 제르멘의 어머니 아로아 왕비가 죽은 뒤 주인도 없이 25년째 비어 있었다. 제르멘도 이제 슬슬 후사의 압박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싫...습니다."

이아네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싫었다. 이름뿐인 왕비라 하더라도 이아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의 곁에 공식적으로 선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괴로운 일이었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제롬...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르멘의 목을 끌어안고서 이아네가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난 널 버리지 않아, 안. 말했잖아, 이건 시험이야."

"그렇지만..."

눈물이 그렁한 눈동자가 제르멘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제르멘이 피식 웃으며 약간 짠 맛이 나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날 믿어, 이아네. 적어도 이번 연회에선..."

제르멘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이젤다 성의 불빛을 받아 빛났다.

"...왕비가 선택되지 않을 테니까."

"...예?"

이아네가 멍하니 다시 물었다. 방금 뭔가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러나 제르멘은 설명해주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 이젤다 성에서 열리는 연회라면 라이오넬 전원이 샴페인이라도 한 잔 들어야 하지 않겠어?"

* * *

"여어, 이아네 군!"

"살라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곧 폐하의 축사 말씀이 있으실 테니."

이아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왕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빛나 보이는 국왕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연회장 안에 모인 레이디들을 훑고 있었다.

"그나저나 대단한 연회야. 안 그런가?"

"...그렇군요."

제르멘의 설득으로 일단 오긴 했지만 이아네는 연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좋아했지만 춤을 배운 적은 없어서, 레이디와 함께 춤을 추는 몇몇 동료들을 보자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제르멘의 곁에 있으면서 춤을 배울 필요는 없었지만 이아네는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는 우아한 몸짓들이 조금 부러워졌다.

-챙.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오케스트라가 일순 조용해졌다. 춤이 멎고 좌중의 시선이 왕좌로 쏠린 가운데 비안테 공작이 일어나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오늘 이 자리에 모여주신 귀빈 여러분, 그리고 레이디들, 모두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수고를 치하하고자 델토르의 국왕 제르멘 라 스타시아 폐하께서 축사 말씀이 잠시 있으시겠습니다."

사자와 양이 조각된 금빛 왕좌에서 제르멘이 일어섰다. 그 순간만은 숨소리조차 작아진다.

백금을 닮은 은발과 창공을 닮은 엷은 푸른 눈동자가 연회장을 훑었다. 그리고 이아네는 그가 자신을 보고 웃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이 자리에 모여 주신 귀빈 여러분."

제르멘의 목소리는 조용한 회장에서 매우 선명히 들렸다. 또박또박하고 시원스런 목소리가 좌중의 귀를 울렸다.

"몇몇 분이, 또는 모든 분이 아시다시피 이 연회는 제 30대 델토르 왕비이자 25년간 비어 있었던 로즈웰 궁의 주인을 찾기 위한 자리입니다."

레이디들의 눈이 반짝이고, 딸을 대동한 아버지들의 미소에 기대와 욕심이 흘렀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로즈웰 궁의 주인을 위해, 그리고 제 미래의 반려를 위해서, 저 또한 약소하게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비안테 공작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분명 사전에 미리 언질하지 않은 이벤트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저 흥분으로 웅성대며 델토르 국왕의 선물을 기대했다. 비안테 공작이 조금 크게 헛기침을 하고 좌중을 진정시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제르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져오도록."

제르멘이 손짓하자 레온 홀의 뒷문이 열리고 바퀴 달린 작은 트레이가 흰 천을 덮은 채 밀려 들어왔다. 홀을 가로질러 마침내 왕 앞에 도착하기까지, 수백 개의 눈동자가 트레이만을 쫓았다. 하얀 천 안에는 뭔가 둥그런 것이 들어 있는 듯 실루엣이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이아네조차 눈을 뺏겨 하얗고 조그만 언덕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트레이가 단상 앞에 도착하자, 시종들이 천이 덮여있는 커다란 쟁반을 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잘 모이도록 협탁에 올렸다.

"특별히 비밀리에 공수하여 온 것입니다. 바로 어젯밤, 겨우 이곳에 도착했답니다."

제르멘이 눈부시게 웃으며 손짓하자 시종들이 천을 걷어내었다. 투명한 유리 덮개가 가장 먼저 보이고 그 안에 소중하게 품긴 '선물'이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알?"

조용해진 가운데 누군가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냈다.

웬만한 어른 머리통만 한 둥근 알이 벨벳 쿠션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붉은 벨벳에 대비되어 검푸른 바탕에 점점이 박힌 검은 얼룩이 더욱 선명했다.

"그렇습니다. 드래곤의 알이지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제르멘이 부드럽게 웃으며 알의 매끈한 표면을 쓰다듬었다.

"드래곤은 각인의 동물이라고 들었습니다. 나의 신부가 될 이에게, 곧 태어나게 될 이 드래곤을 선사할 예정입니다."

아직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의 말뜻을 생각하느라, 그의 말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의 말이 가져올 파장을 생각하느라 한동안 레온 홀은 조용했다.

서서히 잉크가 물에 번져가는 것처럼 술렁임이 퍼져 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살짝 벌렸다. 이건 명백한 선전 포고였다.

'라퓨타를 델토르의 것으로 만들겠다'라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모은 것보다도 더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은 이아네였다.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가 라퓨타에 다녀온 뒤 이상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연회 준비로 바쁘던 두 달 반 동안, 그리고 이아네와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제르멘은 혼자서 모든 것을 계획했다!

그것은 이아네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배신이었다. 이제껏 제르멘의 모든 것은 이아네와 공유되어 왔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아네의 멍한 눈동자를 뒤로 한 채, 제르멘은 또 하나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라퓨타를, 델토르 왕비령으로 만들 것입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누구하나 목소리는 물론이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넓은 홀 어디에선가 누군가 놓친 와인 잔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다였다.

"연회가 끝나는 날, 라퓨타의 주인이 결정되겠지요. 그럼 여러분, 즐거운 밤이 되시길."

제르멘이 축사를 마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비로소 이아네의 정신이 돌아왔다. 살라스가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휘유, 과연 폐하는 통이 크시구먼. 그런데 저거, 위험한 거 아닌가?"

"...위험..."

이아네가 멍하니 살라스의 말을 되풀이했다. 살라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디날과 협조한 사항도 아니고, 이거 피바람이 불겠는데."

이아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럼 디날에서는 아직 모르는 것입니까?"

"그야 우리로서는 모를 일이지. 명색이 국왕이라는 분이니 알아서 잘 했겠지만..."

"했겠지만...?"

"조금 불길한데. 최근 들어 디날의 사절이 왔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야. 심지어 지금 이 자리에는 마침 디날의 귀빈들도 참석치 않았으니."

살라스가 조금 불안해진 듯 턱을 긁었다. 어쩐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주변에서도 조금씩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라퓨타 방문 후 갑작스레 내려진 인사이동과 택후령. 많은 귀빈들 앞에서 공개한, 제르멘의 뜬금없는 선전 포고와 디날 귀빈들의 부재.

무언가 거대한 파란을 몰고 올 것 같은 조짐에 이아네는 손에 쥔 샴페인 잔을 꽉 쥐었다.

음악이 다시 흐르고 홀 안은 부드러운 공기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넘쳐났지만 사람들은 어딘가 경직된 채 낮은 목소리로 서로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이아네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제르멘은 레온 홀을 나와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죽 뻗은 복도는 조용했지만 아직도 연회장에서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 같다. 피식, 제르멘이 웃으며 침실 문 앞에 도착하자 칼릭 경이 문을 열었다.

침실 안에는 벨벳 쿠션에 감싸인 드래곤의 알이 우아한 자태로 제르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알을 쓰다듬으면서, 제르멘은 흡족히 웃었다.

이제 델토르 국왕이 선전 포고를 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디날에 흘러들겠지. 빠르면 내일 저녁, 늦어도 연회 마지막 날에는 디날에서 사절단이 도착할 것이다.

어쩐지 참을 수 없이 즐거워진 제르멘이 쿡쿡 웃으며 단단한 알 표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기묘한 푸른 바탕색이 희미한 등불 아래 요요한 색을 띠었다.

"...시간을 맞춰서 다행이야."

드래곤 관리국에 심어둔 첩자가 꽤 고지식해서 흥정에 애를 먹긴 했지만 다행히 원하는 시간 내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이 알을 비밀리에 공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그러나 제르멘은 이 알에게 들어간 비용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비안테 공작이 한창 연회 준비로 바쁠 때 후원으로 몰래 들여온 이 알은 제국의 귀족이라고 해도 숨이 넘어갈 만큼 거액이었다. 물론 제르멘이 조용히 처리하긴 했지만 하마터면 성공하지 못할 뻔했다.

드래곤 어미에게서 알을 빼앗는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다, 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덕분에 드래곤의 알은 특급 관리 대상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각인의 동물이다. 드래곤을 알에서부터 부화시켜 키우면 따로 각인을 하지 않아도 드래고니안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드래곤의 알을 노리는 이들이 너무 많아, 라퓨타에서는 밀수를 적발하는 즉시 즉결처분으로 다스렸다.

제르멘은 그런 까다로운 녀석을 자랑스럽게 만인 앞에 까발린 것이었다.

"어디, 그러면 지켜보도록 할까."

편안하게 침대에 누우며 제르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 방안의 불이 꺼지고 창백한 푸른빛의 알은 달빛 아래 파묻혔다.

다음날 이른 오후에, 제르멘은 디날로부터 한 통의 비보를 전해 받았다.

델토르 국왕의 처세에 대한 비판과 경솔한 행동에 대한 경고와 라퓨타에 대한 발언을 당장 취소할 것을 촉구하는 비보에는 디날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필시 국왕이 직접 친필로 쓴 것이리라.

웃음을 참으며 책상 위로 서신을 내려놓은 제르멘은 창가 근처에 놓인 창백한 알을 쓰다듬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르멘은 아름답게 피어 짐승을 유혹하는 독버섯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때 문득 창밖을 바라보던 제르멘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건물. 그 뒤로 어렴풋이 보이는 연무장에 군무를 추듯 일련의 정비된 움직임이 보였다. 제르멘의 한쪽 눈썹이 살짝 내려갔다.

"...이아네..."

이아네. 그 아이가 걸린다.

제르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아네는 제르멘을 거역하지 않는다. 제르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무엇이든 따라올 아이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쉽게 용서받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제멋대로인 아가씨를 길들이는 법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제르멘이 비죽 웃으며 창가에서 멀어졌다.

* * *

이아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드래곤의 알이 흔들리더니 빠직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금이 점점 커지며 그 안에서 조그맣고 검붉은 드래곤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아네와 눈이 마주친 그것은 곧 무럭무럭 커졌다.

이아네의 두세 배, 아니 그보다 더 커져 이젤다 성만큼 몸집을 키운 드래곤의 어깻죽지에는 제르멘이 올라앉아 밝게 웃고 있다. 드래곤이 날개를 펴더니 귀가 아프도록 포효했다.

그것이 거대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절망적인 기분으로 이아네가 제르멘에게 손을 내밀었다.

'......?'

내민 손이 조금 이상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이아네는 손에 보송보송한 노란 솜털이 잔뜩 나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키륵-'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놀라 몸을 내려다본다.

이아네는 드래곤이 되어 있었다. 보드랍고, 작고, 연약한 어린 드래곤.

-키아아아악!

갑작스런 포효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푸른 비늘이 덮인 드래곤이 빠르게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사나운 남청색 눈동자를 마주보는 순간 이아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아네!"

"헉!"

"괜찮나? 가위에 눌린 것 같은데."

살라스가 걱정스레 이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아네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단 숙소의 침대가 보였다.

이아네가 눈을 깜박이며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평소와 똑같은, 굳은살이 박인 하얀 손이었다. 솜털 같은 것은 없었다.

"별...별 것 아닙니다. 잠시 악몽을...꿨습니다."

"온몸이 땀투성이야. 가서 세수라도 하고 오게."

살라스가 도닥여 주자 이아네는 양해를 구하고 세면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틀어 얼굴에 적시자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세수를 끝내고 고개를 들자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은 여전히 단아하고 표정 없는 인형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입꼬리가 내려가 있어 우울해 보였다.

"...제롬."

입술이 동그랗게 말리며 내뱉어지는 목소리는 탁했다. 초록색 눈동자와 어울리지 않게 붉어진 눈두덩은 그가 울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아주, 제대로 청승을 떠는군. 이아네는 한숨을 쉬며 찬물로 다시 눈가를 문질렀다.

연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후 밤새 울고 말았다. 다음날은 몸이 안 좋은 듯해 살라스가 대신 병가를 내주었고 이아네는 하루 내내 침대에 누워 우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살라스가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좀 어때?"

이아네가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살짝 목례했다. 살라스가 씩 웃으며 이아네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쳐 주었다.

"이아네 군, 오늘은 둘째 날이어서 괜찮지만 내일도 연회에 참석해야 할 거야."

"...왜죠?"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제르멘을 보는 순간 울어버릴 것 같아서 이아네는 힘겹게 물었다. 맨정신으로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살라스의 대답은 너무 뜻밖이어서 이아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못 들었나? 내일 디날에서 사절단이 도착할 거라는군."

"디날에서... 말입니까?"

세상물정에 어두운 이아네도 이번 연회에 초대된 귀빈 중 디날 대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예 불참 의사를 밝혔던 디날에서 갑자기 사절단을 보내오는 것은 이상하다.

이아네는 문득 지난번 라퓨타에서 마주쳤던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을 떠올렸다. 매끄러운 딥 블루의 머리카락 밑으로 예리하게 자신을 응시하던 깊은 푸른빛.

"폐하께서 갑자기 왕비를 간택하시는 것도 문제지만, 라퓨타를 왕비령으로 만들다니 명백하게 정복하겠다는 의도잖나. 벌써 디날까지 소문이 퍼진 게 이상하긴 하지만 디날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닐 테니까."

"저도 가겠습니다."

어쩐지 심장이 뛰었다. 제르멘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쿵 늑골 안을 울렸다. 불길하다. 무언가 이아네를 잡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젤다 성에서, 라이오넬 숙소에서, 제르멘의 곁에서 이제껏 깊이 뿌리내려온 것들이 한순간에 뽑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찌 되었든 이아네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자는 일이다. 이상할 정도로 쿵쿵대는 심장에 비하면 놀랄 만큼 빠르게, 이아네는 잠들었다. 눈을 뜨면, 연회의 마지막 날이 시작될 것이다.

연회 마지막 날, 비안테 공작은 평소보다 더 바빴다.

오후에 도착할 디날의 사절들에게 델토르의 위대함을 뼛속 깊이 각인시켜 주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공기 중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날 밤도 연회는 계속되었다.

연회장 한구석에 선 디날의 사절을 알아본 사람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드디어 제르멘이 레온 홀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높은 목소리가 레온 홀의 둥근 천장을 때렸다.

"제르멘 라 스타시아 국왕 폐하!"

홀 안이 조용해졌다.

이아네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다. 목소리를 높인 사내는 잘 차려입기는 했으나 연회에 참석하기에는 너무 수수한 복장이었다. 이아네는 오늘 디날의 사절이 올 거라던 살라스의 말을 떠올리고 허리께의 검집을 지그시 잡았다.

"...그대들은?"

"결례를 용서하소서."

조용한 레온 홀을 지나 국왕의 발밑까지 당도한 그들은 일단 허리를 조금 숙여 예를 차렸다. 그러나 고개를 든 얼굴은 어딘지 굳어 있었고 그다지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디날에서 오셨군."

"신, 에드가 시쉘 히모타 인사드립니다. 이번 연회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나타났다고 하여 급히 걸음 하였습니다."

비안테 공작이 낮게 한숨을 토하였다. 이아네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조심스럽게 사절단 가까이 접근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잔뜩 긴장한 살라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라?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제르멘이 여유롭게 왕좌에 기대어 앉으며 짐짓 순진한 얼굴을 했다. 히모타 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은 폐하께서 어제 하신 발언의 추이에 대해서입니다."

"어제 한 발언-이라."

제르멘이 흐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지난날 라퓨타에 원정을 나갔을 때, 그곳에서 처음으로 드래곤을 보았지."

"......?"

"그리고 그곳에서 '있어서는 안 될 사람'도 보았다네."

"!"

"의문이 들었네. 그 사람은 왜 그곳에 있었을까? 뭐, 나로서는 다소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번 일은 그에 대한 강경책이라고 생각하시게."

장내의 사람들이 조용히 수군거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일렁였다. 제르멘은 느긋하게 디날의 사절들을 내려다보며 한 손에 와인글라스를 들었다.

히모타 경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하필 그때 마주치셨던가. 그러나 여기서 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닙니까. 부디 폐하의 영민함으로 판단하시어 어제의 발언을 철회하여 주시고 알은 라퓨타로 돌려보내 주십사 청하는 바입니다. 이는 저희 디날에도, 델토르에도 좋을 것이 없는 경솔한 행동임에야, 저희 국왕께서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셨다는 것도 알아두셔야 할 듯하군요."

비안테 공작이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제르멘은 태연했다.

"그러나 히모타 경. 짐은 국왕으로서 내 입 밖으로 낸 언사에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느니. 안타깝지만 이 라퓨타는 훗날 델토르의 비 될 사람의 영토로서 로즈웰 궁에 소속될 것 같군."

연회장의 레이디들이 살짝 얼굴을 붉히는 것이 이아네의 눈에도 띄었다. 살짝 가슴이 아려 왔지만 이아네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연회가 끝난 후에.

"...폐하께서는 진정, 디날과의 우호조차 깨어 가시며 이런 명예를 회복할 기회조차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유감이군, 히모타 경. 나는 내 행동이 델토르의 명예에 어떤 훼손도 가하지 않았다고 감히 생각하네."

제르멘이 빙긋 웃음과 동시에 히모타 경이 혀를 찼다.

국왕은 진심이었다. 디날과 전쟁을 한다손 쳐도 라퓨타를 정복할 생각이다. 이쯤 되자 히모타 경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델토르에서 디날의 우호를 원하는 만큼, 디날에서도 델토르와의 우호를 바란다.

그러나 이 정도라면 정말 전쟁이 당장 벌어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심호흡을 하며 히모타 경은 재킷 안주머니를 매만졌다. 바스락, 작은 쪽지가 소리를 냈다.

홉리 경이 히모타 경의 손을 보고 조금 흠칫했다. 히모타 경의 손이 재킷 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어두운 밤색 눈이 작은 종이 위를 응시했다.

이 종이를 써 주었던 사람은 단호한 눈으로 히모타 경에게 말했었다.

'만일 국왕의 뜻이 꺾이지 않는다면, 꺼내어 보도록.'

두 번 접힌 종이를 폈다. 깔끔한 글씨로 단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제르멘 라 스타시아 국왕 폐하. 마지막으로 다시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라퓨타에 대한 말씀을 철회하여 주십시오."

"거절하오. 그리할 이유를 찾을 수 없군."

히모타 경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히모타 경의 검은 눈이 제르멘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그리하신다면. 저희로서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는 없겠군요."

"...호오?"

히모타 경이 손에 든 쪽지를 내보였다. 제르멘의 눈두덩이 살풋 가늘어진다. 좁아진 동공으로 검은 글씨가 박혀 들어왔다.

'전쟁'.

"이 시각부터, 델토르와 디날의 전면 적국화를 선언합니다. 이는 국왕 레뮤엘 다프니스 디날 폐하의 어명이시며 다이나르 돈 바흐라자타의 뜻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는 것을, 디날의 백성들도 알 권리가 있으니 말이지요."

장내가 술렁였다.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 그것도 각국의 사절과 귀빈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아네는 입을 약간 벌린 채 레온 홀을 빠져나가는 사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르멘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에 검지와 중지를 가져다 댔다. 비안테 공작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도 제르멘은 느긋했다. 전쟁. 전쟁이라.

홀 안이 점점 술렁이더니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일었다. 전쟁이다!

"귀빈 여러분,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모두 들으시오."

당황한 비안테 공작의 말을 끊고, 제르멘이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레이디들의 불안한 얼굴과 귀족가 자제들의 흥분한 붉은 얼굴 사이에서, 제르멘은 하얗게 표백된 이아네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 하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제르멘이 입을 열었다.

"연회를 즐기고 있던 그대들에게 추태를 보여 유감스럽소만, 델토르는 피하지 않을 것이오. 디날과의 오랜 알력에 대해 이제는 마침표를 찍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오."

비안테 공작의 얼굴에 묘한 희열이 솟았다.

이아네가 숨을 삼키는 순간 제르멘의 눈이 빙그레 휘어졌다.

"전쟁은 시작되었군. 그럼..."

제르멘이 나긋하게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느릿한 움직임을, 수백 쌍의 눈동자가 쫓아갔다.

"...델토르의 승리를 위해."

조용한 장내에 제르멘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홀린 듯, 기사들과 귀족들은 천천히 잔을 치켜들었다. 비안테 공작이 반쯤 울먹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델토르의 승리를 위해!"

"...델토르의 승리를 위해!"

"승리를 위해!"

장내는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델토르의 승리를 외치는 귀족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제르멘은 문득 군중들 사이에서 이아네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레온 홀 뒷문에서 흔들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문득 본 것도 같다. 제르멘이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겨 레온 홀을 빠져나왔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대륙 전체에는 델토르와 디날의 전쟁에 대한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비안테 공작은 절망했지만 과연 백전노장답게 군대를 소집하고 군사 경계령을 발동한 뒤 장군들을 모아 긴급회의를 열었다. 물론 제르멘도 이번만큼은 능글능글 넘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강을 건너야 합니다. 디날 쪽은 해전에 강하지만 우리는 보병과 기병 부대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일단 강만 무사히 건넌다면 승산이 있는 일입니다."

고드릭 장군이 한숨을 내쉬며 흘끗 제르멘 쪽을 곁눈질했다. 어린 국왕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느 한 지점을.

"...장군. 그리고 휘하 경들도 들으라."

"예, 폐하."

"그대들에게 묻는데, 이 전쟁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진중하고 침통한 분위기의 침묵이 아니라 어딘지 황당함이 깔린 당혹스러운 침묵이었다.

네가 전쟁 냈잖아! 모두가 일제히 머릿속으로 외치고 있을 생각을 제르멘도 능히 짐작하는 바였지만, 제르멘은 큭큭 웃으며 드디어 그 깊은 속내를 덜어내었다.

"디날이다."

"...!"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디날과 대륙을 양분해왔지.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아예 우리의 영토로 만들겠다. 그 누구도 디날의 이름을 내걸지 못하도록."

비안테 공작의 눈에 희열이 언뜻 스쳐 지났다.

그것은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던 문제였다. 디날의 정복, 이 얼마나 단물이 뚝뚝 흐르는 말인지!

"다시 말해, 우리의 목적은 라퓨타의 정복이 아닌 디날의 멸망이다. 가장 먼저 디날의 왕성을 저격한다. 디날의 국왕도 참전하게 된다면 왕궁은 조금 한산해지겠지."

제르멘의 말이 끝났다. 모두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제르멘을 바라보았다.

"...하오나 폐하, 그동안 델토르와 디날은 꽤 우호적으로 현재의 관계를 잘 이어 왔습니다. 이런 갑작스런 도발은 오히려 델토르의 국위에 해가 될 뿐입니다."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낸 사람은 발로아 대령이었다. 제르멘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은 머리의 고지식한 군인을 자세히 보았다. 그 꾹 다물린 고집스런 입매에서 언뜻 아는 사람의 얼굴이 스친 것 같다.

그래, 발로아 대령. 이아네의 아버지였다.

모두의 눈이 그에게 쏠렸지만 그는 꿋꿋했다. 전형적인 군인이긴 했지만 발로아 경은 평화주의자였다. 누가 그의 핏줄 아니랄까봐 이런 것까지도 부자가 꼭 닮았다.

제르멘이 속으로 조금 웃었다.

"발로아 경."

"예, 폐하."

"그대에겐 라이오넬 기사단의 지휘를 맡기도록 하지. 닷새 후에 라퓨타로 출발하도록."

모두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발로아 경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갔다. 제르멘만이 속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라퓨타. 평소에는 꿈의 섬이고 환상의 땅이지만 전쟁이 난 지금은 다르다.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델토르의 황금 사자를 삼키려 기다리고 있는 곳.

라퓨타에 군대를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지옥에 발을 담그는 일이었다. 라퓨타에 상륙하는 순간 군대는 디날과 드래곤이라는 두 가지 적과 싸워야 한다.

"...예. 폐하."

발로아 경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것을, 제르멘은 흡족히 바라보았다. 가늘어지는 눈꼬리에 웃음이 맺혀 흘렀다.

사흘 후, 라이오넬 기사단 전체에 하루 동안의 귀소령이 내려졌다.

전쟁은 어린애 장난이 아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라이오넬 기사단은 대부분이 스타시아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어서 성 밖의 가족들이 면회하는 것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아주 오랜만에 집에 돌아간 이아네는 자신을 맞아 주는 어머니와 네 살 위의 형 이아스를 조우하고 자기도 모르게 울 뻔했다. 이아스의 아들 에밀은 이제 겨우 세 살이었다.

"인사해야지, 에밀."

"앙냐하에오..."

불안전한 발음을 굴리며 그 조막만한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는 에밀이 귀여워서 이아네는 웃으며 조카를 안아들었다.

부드럽고, 가볍고, 너무나도 연약한 작은 에밀은 이아네의 팔에 안겨서 똘망한 암록색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단다."

"...네."

제라르 케이 발로아 경은 응접실에 있었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발로아 경은 이아네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별 반응 없이 고개를 까닥여 앉으라는 뜻을 전했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구나. 안."

어쩐지 가슴 저 밑에서 따스한 것이 스미는 느낌이었다.

라이오넬에 들어간 뒤 육 년간, 이아네는 제르멘의 입에서만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제르멘에게서 듣는 '안'이라는 이름은 어딘지 비밀스러운 냄새가 났다.

"라이오넬은 어떠냐?"

"좋아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아네도 발로아 경도 국왕의 횡포에 가까운 결정으로 사지로 내몰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로아 가의 가주와 차남이 라퓨타로 가고 나면 그 뒤를 따라 장남 이아스도 징병될 것이다. 혹시라도 모두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세 살배기 에밀만이 대를 잇게 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모두가 각오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아무도 에밀이 지게 될 무거운 사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군인 집안이란 그런 것이다.

"안. 길게 얘기할 것 없다. 한 마디만 하마."

"예."

"...살아남아라."

순간 이아네의 초록색 눈동자가 발로아 경의 잿빛 눈과 마주쳤다.

한 번도 자식들에게, 심지어 하나뿐인 손자에게조차 살가운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뼛속까지 군인인 발로아 경은 어릴 때부터 이아스와 이아네를 강하게 키우려 했고 감상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아버지?"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이아네가 반문하기 무섭게 발로아 경이 말을 끊었다. 이아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발로아 경은 매우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것은 발로아 경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이를테면 '절망' 같은.

"...넌 충분히 할 만큼 했어."

발로아 경은 이해할 수 없는 한 마디를 내뱉으며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말없이 눈을 감는 아버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아네는 의미 없이 발로아 경의 말을 곱씹었다.

무슨 의미일까.

"방으로 돌아가거라, 이아네. 그리고 저녁식사 때, 깨끗한 손수건에 네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 가지고 오거라."

이아네는 물끄러미 아버지를 응시하다 목례를 하고 응접실을 나왔다.

델토르를 떠나기 전날, 이아네는 제르멘의 방으로 불려갔다.

두근대는 가슴을 살며시 억누르며 들어선 제르멘의 침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정갈하고 깨끗하게 각이 잡혀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느른하니 흐트러져 있는 제르멘과는 이상할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이리 와, 안."

이아네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제르멘의 옆에 앉았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희미하게 과실주 향기가 났다.

"취하셨...습니까?"

"조금 마셨어.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서."

평소에는 늘 이아네를 끌어당기던 제르멘이 이아네의 어깨에 머리를 내려놓았다. 살랑이며 어깨로 흩어지는 은발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여지없이 느끼고서 이아네는 제르멘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안. 내가... 밉지?"

"...예?"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아네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방금 제르멘이 뭐라고 한 거지?

"너와 발로아 경을 사지로 내몬 것... 미안하다."

"...아닙니다."

이아네는 그의 기사였다. 제르멘이 주군이고 이아네가 그의 수족인 이상 명령하면 가야 했다.

그것이 설령 죽음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다만..."

"다만?"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저의 가족들을 부탁드립니다."

"안!"

제르멘이 벌떡 머리를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깜짝 놀란 이아네가 찡 울리는 귀를 막자, 제르멘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제, 제롬?"

"너, 지금 그런 식으로 내 곁을 떠날 생각을 했던 건가?"

"무슨...!"

"아니라고 대답해, 어서!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말해!"

제르멘의 격렬한 고함은 점점 커졌다. 귀를 꽝꽝 울려 대는 고함은 둘째 치고 이아네는 그의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 돌아오겠습니다."

"...정말?"

"네. 반드시."

제르멘이 그제야 씨익 웃었다.

정말은, 상당히 많이 취한 것 아닐까? 이아네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무렵 제르멘의 팔은 이미 이아네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다.

"약속이다. 나와 한 약속이야, 안."

"...네."

이아네는 어딘지 조금 안심이 되는 듯해 제르멘의 등을 마주 안았다. 제르멘은 이토록 이아네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아, 아버지. 저는 여전히 이분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것 보세요. 제가 없으면 이토록 슬퍼할 분입니다.

"반드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내게 와줄 건가?"

"네."

"재회의 키스도 당연히 해 주겠지?"

"...네, 제롬."

"아아, 나의 안."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제르멘은 이아네의 뺨을 잡고 입술을 부딪혔다. 촉촉한 입술 새로 알코올 향기가 풍기는 숨결이 흐른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조각마저도 달콤해서, 이아네는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눌러 다잡았다.

"나의 안. 우리, 이아네..."

취중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딱 붙인 하체로 열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제르멘의 호흡이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급하게 이아네의 입술을 물고 혀를 들이밀었다.

혀끝으로 알싸한 체리주 향기가 났다. 역시 꽤 드셨던 모양이다. 별로 강하지 않은 과실주인데도 이렇게 흐트러지다니 제르멘답지 않았다.

제르멘은 오랫동안 갈증을 겪은 사람처럼 이아네의 혀를 빨아올렸다. 촉촉한 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진다. 이아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숨을 고르려 고개를 젖히자 제르멘의 입술이 그대로 턱선을 더듬으며 목선까지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축축하고 따뜻한 혀와 함께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앗-"

"안... 세상에, 널 보내야 하다니... 하..."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르멘은 탄식하며 이아네의 목덜미를 몇 번이나 물어뜯었다. 덕분에 얼룩덜룩해진 목덜미에 열꽃이 피어났다.

"앗... 아응, 제롬... 그만..."

"안 돼, 안... 아직 부족해..."

제르멘이 셔츠를 벗겼다. 목선을 미끄러져 쇄골까지 내려간 입술은 찬 공기에 닿아 뾰족하게 선 유실까지 한입에 삼켰다.

"앗... 아흐...! 하, 아... 제롬...! 앙, 거긴..."

제아무리 무뚝뚝한 기사라지만 유두가 부드럽게 혀로 뭉개지며 젖어가는 야릇한 느낌은 익숙해질 수 없었다. 이아네가 허리를 틀며 무의식적으로 도망가려 하자 제르멘이 화가 난 눈으로 이아네를 노려보았다.

"도망치지 마, 안. 넌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흐으, 아... 하지만... 앗...!"

제르멘의 성난 손이 급하게 이아네의 샅을 잡아 훑었다. 약간 거친 손길이 아파 살짝 비명을 내지르는 이아네의 입술 위를 제르멘의 손가락이 야하게 훑었다.

"그래, 이거야. 좀 더 소리를 내 봐."

"그, 그런- 하윽! 아, 자, 잠깐, 흐아-"

제르멘의 손이 바짓단을 헤치고 들어왔다. 다시 가슴께에 머리를 박고 유두를 깨무는 치아가 따끔하면서도 자극적이어서 이아네는 울 것처럼 허리를 튕겨 올렸다. 열기가 뻗친 기둥을 잡아 오며 제르멘이 킬킬댔다.

"봐, 싫다고 하면서도 여긴 만져주는 걸 좋아하는데? 이젠 완전히 요부가 다 됐군."

"아흑, 아... 응, 아니... 아닙니다..."

"좀 더 솔직해져 봐, 여기가 좋지? 아님, 여긴가?"

"아, 아-! 앗, 거기, 하앙-!"

"좋은 소리야, 안... 좀 더 소릴 내봐. 이 음탕한 기사님."

제르멘의 입술이 귓가에서 질척하게 울렸다. 뜨거운 혀가 귓바퀴를 핥으며 선정적인 젖은 소리를 냈다. 소름이 돋은 허벅지를 꽉 끌어당겨 제 것을 비비자 제르멘의 열기가 이아네의 탄탄한 엉덩이를 찔렀다.

동그란 엉덩이가 탄력 있게 제 것을 밀어내자 제르멘이 크게 웃으며 이아네를 엎드리게 했다. 눈물이 맺힌 이아네가 벗은 엉덩이를 위로 하고 침대에 엎드리자 제르멘이 눈을 반짝이며 하얗고 통통한 엉덩이를 슬슬 쓰다듬었다.

"읏... 제롬, 이상해요... 으응..."

"이것 참 물건이군. 하얀 둔덕이 움찔대면서 조금씩 떨리고 있어. 대단한데, 안. 이만큼이나 느끼게 되다니, 역시 안은 검보단 침대가 어울려."

킥킥대는 제르멘의 목소리에 이아네가 눈물 젖은 눈을 돌려 제르멘을 바라보았다.

기사로서 자존심이 구겨진 듯, 상처받은 초록색 눈동자에 제르멘은 빙그레 웃으며 곧게 뻗은 등에 입을 맞추었다. 엉덩이를 여전히 쓰다듬는 것도 멈추지 않고.

"칭찬이야, 나의 기사님. 아아, 할 수 있다면 벗겨 놓고 매일같이 함께 있고 싶어. 넌 정말... 대단해."

제르멘이 별안간 이아네의 엉덩이를 세게 쳤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엉덩이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이아네가 이를 악물며 시트를 쥐었다.

"괜찮아, 소리 내도.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안."

"하... 하지만- 아!"

짝 소리가 한 번 더 나자 손자국이 다시 붉어졌다. 이아네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장난이 아니었다. 정말 아프도록 힘껏 때린 엉덩이에서 다시 고통스런 열기가 피었다. 그러나 제르멘은 손찌검을 멈추지 않았다. 하얀 엉덩이에 약간 피멍마저 올라올 때쯤 제르멘의 손이 겨우 멈춘다. 화끈한 열기가 허리까지 달구어 올라왔다.

제르멘이 허리 벨트를 끌렀다. 미련 없이 추락한 바지 안에서 제르멘의 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화하게 열기가 남은 이아네의 엉덩이에 남근이 닿자 벌써 허리께가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흐흑... 제롬..."

이아네가 흐느끼는 소리는 제르멘을 부추겼다. 빨갛게 남은 손자국을 덧그리듯 제르멘의 귀두 끝이 슬슬 엉덩이를 문질렀다. 탱탱한 감촉에 제르멘이 웃으며 자기 아래 엎드러진 이아네를 내려다본다.

흐트러진 채 빨개진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치부를 남김없이 드러낸 그의 기사.

기분, 최고다.

"안..."

악문 잇새로 이아네를 부르며 제르멘이 수음을 시작했다.

탁탁, 제르멘의 손이 상하운동을 하면서 이아네의 엉덩이에 귀두가 닿는다. 꾹꾹 찔러오는 보드라운 귀두를 느끼며 이아네는 왜 자신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잠시 멍해졌다.

"큭, 제길... 윽, 안, 안!"

호흡이 가빠진다 싶더니 다른 쪽 엉덩이에 다시 눈앞이 번쩍 할 정도의 매운 손찌검이 작렬했다. 이아네가 이를 악무는 것과 동시에 뜨겁고 끈적한 감촉이 엉덩이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믿을 수 없었다.

"하... 으..."

액을 뿜어낸 귀두를 엉덩이 전체에 비벼 후희까지 야무지게 즐긴 제르멘이 헉헉대며 더워진 몸을 이아네 옆에 누였다.

이아네의 젖은 초록색 눈동자를 발견한 제르멘이 손을 뻗어 이아네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직도 열기가 남은 입술에 이아네가 은근한 기대를 품는 순간 제르멘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설마, 하며 이아네가 눈을 뜨자 눈을 감은 제르멘의 얼굴이 보인다.

"...제롬?"

조심스레 손을 들어 제르멘의 코 밑에 대자 규칙적인 숨결이 느껴졌다. 숨결에 섞여 흐르는 알코올 향기가 아까보다 진해진 것 같다. 황당함보다도, 어딘지 모를 억울함에 이아네가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주사가 고약하시군. 이아네는 체념하며 벗겨진 바지와 흐트러진 셔츠를 갈무리했다. 어두워진 창문에 비춰 보니 제르멘이 물어뜯은 몸은 가관도 아니었다.

바지를 추스르던 이아네는 잊고 있었다는 듯 앞가슴 주머니의 손수건을 꺼내 엉덩이를 닦았다. 끈적하게 묻어난 정액은 식어 있었다.

제르멘의 옷매무새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이아네가 등잔에 올린 불꽃을 불어 껐다. 이아네가 나가고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은 방안, 침대에 누워있던 제르멘의 입가에 아무도 모르는 미소가 그려졌다.

라이오넬 기사단을 태운 배는 새벽에 조용히 출항했다.

그러나 기사단의 가족들은 이른 새벽임에도 선착장까지 나와 델토르의 아들들을 마중하였다. 발로아 경의 아내는 남편과 아들에게 도시락과 납으로 만든 손바닥만 한 오르헴(부적)을 건넸다.

배가 출발하고 더 이상 가족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아직도 파르스름한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이아네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제르멘은 보지 못했다.

라이오넬 전체가 직접 움직이는 일은 흔하지 않았지만 끝내 제르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야속한 사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마지막 미소라도 보여 주시지 않고서.

어젯밤의 그를 떠올리자 골반께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엉덩이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엉덩이에 닿았던 매끈한 귀두와 끈적한 정액의 감촉은 아직도 기억난다.

어딘가 처참해지는 기분에 이아네는 괜히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살라스."

어느 틈엔지 살라스가 뱃전으로 나와 이아네의 곁에 섰다. 큰 키에 건장한 살라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긴장한 것이 역력한 갈색 눈동자가 수평선을 훑는다.

"안개가 짙군."

"그렇군요."

짙은 물안개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라퓨타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어디론가 계속 가버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대로 제르멘의 곁을 떠나, 어디론가 알지 못할 미지의 곳으로.

"좀 자 두도록. 라퓨타에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은 걸릴 테니."

"대, 대령님."

살라스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발로아 경이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다. 이아네가 가볍게 목례하고서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두 시간이라면 차라리 깨어 있겠습니다."

"아니, 들어가서 자도록 해. 어차피 라퓨타에 도착하고 나면 잘 시간이 없을 것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발로아 경은 뒷말을 꿀꺽 삼켰다. 괜히 이 자리에서 안 좋은 여론을 형성할 필요는 없었다.

"...예."

이아네는 얌전히 선실로 돌아갔다.

철제 선박은 조용히 바다를 미끄러져 간다. 라이오넬 기사단 마흔다섯 명과 병사 백오십 명, 그리고 생각에 잠긴 발로아 대령을 실은 배는 새벽 바다를 가르며 속력을 내었다.

라퓨타에 도착한 것은 동쪽 하늘이 붉게 달아올랐을 때쯤이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지만 주변은 꽤 환해져 있는데다 드래곤이 코고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목장을 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것이었다. 디날의 드래곤이 고국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그들은 목장으로 진격해야 했다.

그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일단 그들 중에는 라퓨타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었고, 드래곤의 생리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심지어 드래고니안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발로아 경은 썩 잘 해내고 있었다. 군인이지만 그는 명령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었기에 라퓨타의 지리나 특성을 어느 정도 공부해 두었고 다행스럽게도 반나절이 지나자 그들은 드래곤 목장 가까이 목책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잠시 쉬도록 한다. 불을 피워선 안 되지만 식사는 해 두도록.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이아네는 수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왼 가슴 주머니에 넣어둔 어머니의 오르헴을 더듬었다. 군인에게 선물하는 오르헴은 보통 화살이 꿰뚫지 못하도록 심장 위의 가슴 주머니에 넣는 것이 관례였다.

"거, 부럽구만."

"아, 아닙니다."

살라스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살라스의 붉은 앞머리는 살짝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말야, 내가 열아홉 살 때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내 오르헴은 이거야."

살라스가 목에 걸린 가죽 주머니를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가느다란 붉은 실 같은 것이 가지런히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머니의 머리카락이지. 효과는 좋은 것 같아. 정기사 승급 때, 이 목걸이를 하고 갔더니 한 번에 딱 붙어버리지 뭐야."

살라스가 킬킬 웃었다.

이아네는 물끄러미 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동정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는 외면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살라스, 이것."

이아네가 자신의 오르헴을 꺼내 내밀자 살라스의 눈이 커졌다.

"이아네 군?"

"무사히 델토르에 돌아가면...다시 바꾸도록 하죠. 저는 아직 어리고 젊으니, 효험이 좋은 오르헴이 탐이 나는군요."

살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방 먹었다는 듯 낄낄 웃었다. 이아네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곧, 살라스의 손이 이아네의 오르헴을 건네받았다.

라퓨타에서의 하루는 길고도 짧았다. 낮에는 드래곤의 눈을 피해 목책 밖에서 목장의 동태를 살피고, 밤에는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쪽잠을 잤다. 기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불편한 임무였지만 모두들 잘 견디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일주일 남짓 지났을 때, 모래사장에 주둔해 있던 병사가 조용히 접선해 왔다. 병사는 국왕의 친서와 가족들의 위문품을 들고 있었고, 거기에는 디날과 델토르의 대치 상황에 대해 적혀 있었다.

'아델 강 상류와 렐라 항 근처에서 교전이 있었으나 방어에 성공하였다. 3일 내로 디날의 헤루비나 성을 친다. 그때 델토르군이 라퓨타로 향할 예정이니 상륙과 동시에 목장을 급습하라. 드래곤 부대를 보내겠다.'

라퓨타에 일주일 동안이나 머무르다 보니 바깥 돌아가는 상황은 전혀 몰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국왕의 친서를 읽고 난 후 발로아 경은 침중한 중에도 기사들에게 친서의 내용을 공유하였다.

"전군, 전투태세를 갖춰라. 3일 동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상대는 드래곤이니 섣불리 공격하다간 화만 입는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보고하고, 드래곤과 마주치면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말고 목장 안으로 도망치도록."

"예."

"각자, 위치로."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기사들은 신속하게 목장을 빙 둘러싼 대형을 만들었다.

3일. 3일이다. 그 순간만 참으면 제르멘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아네의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

제르멘이 화를 내며 이아네를 놓아주지 않겠다던 모습이 떠오르자 이아네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아, 정신 차리자. 이러고 있다간...

"이아네 군."

"...예."

"잠깐, 이쪽으로."

이아네는 조금 긴장했다. 라퓨타에 와서 처음으로 발로아 경이 이아네에게 독대를 청한 것이다. 조금 놀란 이아네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발로아 경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안. 내 말 잘 듣거라."

"...예."

'안'이라고 불렀다. 이아네는 발로아 경이 상관이 아닌 아버지로서 그에게 무언가 당부하리라는 것을 느꼈다.

"혹여라도 작전이 잘못되거나, 계획이 틀어진다면 즉시 디날로 가거라."

"예?"

"아무것도 묻지 마라, 안. 반드시 디날로 도망치거라. 델토르로 돌아가 보았자 좋을 것 없다."

이아네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무슨 말씀을..."

"약속해라.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아버지?"

"네 명예를 걸고 약속해."

발로아 경답지 않게 으름장을 놓는 그의 목소리에서 이아네는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아네는 군인이었다. 입술을 한번 꾹 깨문 이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아버지. 발로아의 이름을 걸고."

"...그래, 잘 했다. 위치로 돌아가라, 이아네 군."

"...예."

이아네는 위치로 돌아가 섰지만 자꾸만 이상하다는 생각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이아네는 제르멘을 보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디날로 도망치라고 했다.

왜? 도망치는 것은 적어도 고국인 델토르여야 했다.

그러나 이아네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의 냉정한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그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멈추지 않는 고민을 안고 꼬박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목장에서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지만 기사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델토르군이 도착하는 것은 이제 이틀 이내. 이틀만 기다리면 이 지겨운 임무도 끝난다. 그러면 다시 제르멘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볼 수 있다. 시험에 통과했는지를 확실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며 재회를 축하하는 키스를 나눌 것이다.

반드시 살아서 델토르로 돌아간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바로 옆에 서 있던 동료 기사의 등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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