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이아네와 제르멘 (2/27)

1. 이아네와 제르멘

이아네와 제르멘은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해왔다.

여덟 살, 겨우 글씨를 깨쳤을 때부터 독서에 취미를 붙인 제르멘은 왕궁 도서고의 절반을 오 년 만에 읽어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하도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통에 왕은 제르멘이 저러다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지 늘 걱정을 달고 살았다.

그리하여 잡게 된 검은, 솔직히 말해 제르멘의 적성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툭하면 검술 수업을 빠지고 도망치는 제르멘의 잔머리는 의외로 상당히 비상해서 검술 스승이던 알소프 경을 질리게 만들었다.

왕은 다시 묘안을 짜내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가 바로 이아네였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라고 합니다.'

제르멘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생글생글 웃으며 한 증언에 따르면, 그때 이아네는 매우 재미없는 녀석이었다.

제르멘보다 두 살 어린 열 살. 겨우 열 살인 주제에 철이 일찍 든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애늙은이 짓이란 짓은 다 했더랬지.

'알소프 경께서 오실 시간이니 안 됩니다.'

'책은 그만 집어넣으세요. 수업 시간입니다.'

'왕자 저하, 수업을 빼먹으시면 안 됩니다. 어서 내려오세요!'

덕분에 제르멘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아네와 검술 수업을 계속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검술을 싫어했던 제르멘도 이아네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아네의 검 때문이었다.

검은 머리칼을 이마 위로 늘어뜨리고서 절도 있게 목검을 휘두르며 초록빛 눈을 반짝이는 이아네는 예뻤다. 검술 수업을 빠지고 도서고에 숨어들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꼬박꼬박 찾아와 제르멘을 끌어내 수업을 듣게 한 미운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이아네는 예뻤다.

'넌 그 눈이 문제야.'

'왜죠?'

'그런 눈으로 검을 잡으면, 네가 엄청 예뻐 보인단 말야.'

이아네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낼 때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왕의 꾀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이아네는 제르멘이 검술에 재미를 붙이도록 하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3년 정도 지났을 즈음에는 둘 다 상당한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아네와 제르멘의 평온한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이아네는 자신이 제르멘을 보는 시선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자신의 감정이 우정보다는 연정에 가깝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달았다. 정확히는 열여섯 살, 처음으로 제르멘을 제롬이라고 부를 무렵의 일이었다.

제롬이라고 부르는 이아네를, 제르멘은 귀여워했다. 검술 수업은 꾸준히 이어졌으며 성장한 소년들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인 후 땀에 흠뻑 젖어 제르멘의 욕실로 뛰어들곤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유난히 더웠던 여름, 커다란 욕조에서 물장난을 치며 놀던 이아네가 머리를 감으려고 먼저 욕조를 나왔다. 제르멘은 물속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이아네가 먼저 나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아네가 비누를 손에 조금 덜어 머리에 거품을 내기 시작했을 때, 제르멘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아네는 그때 열여섯 살이었고 제르멘은 이제 겨우 성년을 넘겼으나 벌써 어른 티가 났다. 여전히 작고 마른 이아네의 등을 느른하게 바라보던 제르멘이 소리 없이 다가가 이아네를 끌어안았다.

"으앗? 뭐, 뭡니까, 제롬!"

"우와, 안, 피부 좋네에?"

능글맞은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하며 제르멘이 장난스레 이아네의 가슴을 더듬어 왔다. 피하려 했지만 샴푸 거품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이아네는 번번히 제르멘의 손을 놓쳤고 제르멘은 아주 손쉽게 이아네의 손을 붙잡았다.

비누 거품이 뚝뚝 떨어지는 이아네의 머리는 솔직히 말해 그다지 섹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르멘의 맨몸에 닿아오는 이아네의 등은 이상하게도 따뜻했고 묘한 열기가 있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제르멘의 아랫배가 뻐근해지며 그의 남성이 부풀기 시작했다.

"윽, 하, 하지 마세요, 간지러워..."

"여기가, 간지러워?"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가 이아네의 귓가를 울리고, 이아네가 흠칫하는 순간 제르멘의 손가락이 이아네의 오른쪽 유두를 집어 올렸다.

"아, 아아-"

"여기, 느끼는구나. 그렇지?"

"놔, 놔주세요, 제롬..."

애처로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열여섯, 처음 맛보는 쾌락의 입구에 바르작대며 이아네가 괴로워한다.

제르멘은 어쩐지 그것이 참을 수 없어 붙잡았던 이아네의 손을 놓고 왼쪽 유두를 꼬집었다.

"아윽, 아파... 장난하지 마세요, 제롬..."

"...장난?"

장난 아닌데. 난 정말 네가 괴로워하는 게 보고 싶을 뿐이야. 이아네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이며 제르멘이 자기도 모르게 발기한 성기를 이아네의 뒤에 바짝 붙였다.

키가 조금 작은 이아네의 엉덩이와 골반에 단단해진 남성이 비벼지자 제르멘이 젖은 한숨을 토했다.

"하아, 안, 이거... 좋네."

"뭐, 뭐가, 윽, 이것 좀..."

그러나 이아네의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유두를 지분대는 손에 발끝 저릿한 감각으로 채 다 익지 않은 남성이 살짝 발기하기 시작했다.

"웃...안, 아아, 좀 더..."

어디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제르멘은 이상하게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아네의 엉덩이와 등허리에 단단해진 성기를 쉴 새 없이 비벼대며 손가락은 여전히 바쁘게 이아네의 붉어진 가슴을 그러쥐어 온다. 손 위로 겹쳐진 이아네의 손이 핏기가 가신 듯 차가웠다. 샴푸 거품으로 미끌미끌한 이아네의 몸은 감도를 더욱 높이며 뜨거워져 갔다.

"안, 안... 하아, 뭔가...윽..."

채 말을 토하기도 전에 제르멘의 성급한 남성은 쿨럭 움직이며 이아네의 등에 백탁액을 뱉어냈다. 동그란 엉덩이로 흐르는 흰 액을 바라보던 제르멘이 이아네를 갑자기 안아들었다.

등에 와 닿는 따끈한 느낌, 거품으로 꼭 감아 보이지 않는 눈, 아까까지 제르멘에게 실컷 농락당한 가슴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던 이아네는 제르멘의 품에 안긴 것도 저항이 없었다. 그저 가슴께에서 놀던 손이 떨어지기에 이제 끝났나 보다 생각했는데 별안간 안아들리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내, 내려주십시오!"

"쉿, 너무 시끄러우면 시종들이 올 거야."

발버둥치는 이아네를 진정시키며 다시 욕조로 들어간 제르멘은 다리 사이에 이아네를 앉혔다.

"자... 씻겨줄게. 가만있어."

"제가 씻겠습니다."

"쉿, 착하지."

제르멘이 속삭인다. 마치 말을 잘 듣는 인형처럼 이아네가 몸을 웅크렸다. 제르멘은 느긋하게 물을 떠 이아네의 머리부터 씻겨내렸다.

차락, 차락 하는 물소리가 몇 번 난 뒤 맑았던 욕조는 금세 거품으로 흐릿해졌다. 서서히 눈앞이 트이기 시작하자 이아네는 조심스레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고서 미끌미끌한 얼굴을 씻어냈다.

"이제...혼자 할 수 있습니다."

이아네가 부끄러운 듯 살짝 내리깐 눈으로 제르멘을 돌아보며 말하자 제르멘의 푸른 눈이 이채를 띠었다.

수증기와 물기로 촉촉이 젖은 하얀 얼굴, 그 사이 얼핏 비치는 두려움에 떠는 초록 눈동자. 제르멘의 장난기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깨끗이 씻어야지."

"네? 핫-"

순식간에 물을 헤치고 다리 사이로 파고든 제르멘의 손이 이아네의 반쯤 발기한 성기를 쥐었다. 생전 처음으로 닿아보는 손길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아네가 눈을 크게 뜬다. 당혹감이 역력한 눈동자에 제르멘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자, 잠깐, 제롬, 윽, 안 돼, 제롬... 앗!"

"우와, 너 꽤 하잖아?"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제르멘의 손은 아까보다 더 집요하다. 느낄 법한 부위를 꾹꾹 비비고 누르고 잡아당기며 한참을 위아래로 마찰한다.

안 된다며 제르멘의 팔을 잡지만 이아네는 결국 제르멘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너무 기분 좋아서 허리가 움찔움찔 떨리며 간헐적으로 퉁퉁 튕겨 올랐다.

"윽, 아, 제롬, 자...잠깐, 뭔가... 이상... 해엣...!"

퉁퉁 튕기는 허리의 속도가 조금 빨라진다 싶더니 허벅지를 닫으며 제르멘의 손을 조여 온다. 물속에서도 손끝으로 퍼지는 진득한 감촉에 제르멘은 킥킥대며 이아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입가 가까이 다가온 이아네의 귓가에 제르멘이 속삭였다.

"안, 기분 좋았어?"

"하아, 으...네에..."

착하게도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는 이아네가 귀여워, 제르멘은 살짝 이아네의 귓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곧이어, 달콤한 목소리가 이아네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이건 우리들만의 비밀이야, 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하아...비밀..."

"응. 비밀... 약속해, 안. 아무에게도, 심지어 국왕폐하께도 말하지 않겠다고."

"네... 제롬."

멍하니 풀린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본다. 그 초록빛이 이렇게나 사랑스러웠던가, 새삼 생각하며 제르멘은 처음으로 이아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아네가 열여섯, 제르멘이 열여덟일 때의 첫 키스는 촉촉하고 부드러웠으며 또한 비릿한 향기가 났다.

불장난처럼 가끔씩 서로의 성기를 만지며 자위를 해 주는 일은 그 뒤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이아네가 라이오넬 기사단에 들어온 뒤부터는 그런 장난도 조금 사그라들었다.

이아네가 성인식을 치렀을 때, 제르멘은 직접 발로아 가로 찾아갔다. 성인식까지 치른 왕세자가 특정 가문을 방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 방문은 이례적인 것만큼이나 발로아 가의 당주를 당황시켰다.

"저하, 여기까지 어쩐 일로..."

"내 친우가 성년을 맞이했는데 그걸 축하하는 것이 그리도 이상한가."

"아닙니다. 그저 조금 놀라서..."

발로아 저택의 응접실에서 이아네가 전에 없이 당황한 듯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제르멘은 살짝 고개를 모로 꼬며 미소를 지었고, 그 시린 미소에 이아네는 또 한 번 제르멘에게 반하고 말았다.

"이아네, 성년을 진심으로 축하해."

"감사합니다, 저하."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니 사양 없이 받도록 해."

제르멘이 손짓하자 뒤에서 위시하고 있던 시종 아이가 어른 손바닥 두 개만 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얄팍한 상자였으나 붉은 벨벳으로 감싸여 자르르한 윤기를 뽐내는 상자는 그 품새부터가 남다르다. 이아네는 조금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사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았다.

가벼운 듯 하면서도 묘하게 느껴지는 무게감. 이아네가 상자의 잠금쇠를 풀었다. 따각, 하며 부드럽게 열린 상자 안을 확인하고서 이아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르멘을 바라보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특별히 제작하라 일렀지."

"그렇지만, 이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이아네의 당황스러운 얼굴에 제르멘이 짐짓 난처한 얼굴을 했다. 받은 선물보다 더 놀라운 제르멘의 풀죽은 얼굴에 이아네는 붕붕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저었다.

열여덟, 이제 이아네도 소년의 티가 거의 벗겨지고 있었다. 목소리도 많이 낮아졌고 체격은 단단해졌으며 키도 커졌다. 여전히 제르멘보다는 작지만 이아네는 이제 귀엽다기보다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르멘은 이아네가 귀여웠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며 진지하게 대응하는 이아네가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다.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그렇게 멀뚱히 있지 말고 어디 한번 차 보도록 해."

"지금...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어서."

제르멘의 기대 가득한 말투에 이아네는 조심스럽게 상자 안에서 왕자의 선물을 집어 올렸다.

잘강, 가볍게 체인이 맞부딪는 소리가 나며 금빛 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효하는 황금빛 사자 위로 가녀리게 피어난 붓꽃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황금 사자는 스타시아 황가의 상징이었다. 그 위를 보호하듯 연약하게 제 잎을 휘어 감싸는 붓꽃은 용맹한 기사의 증표. 국왕의 직속이자 제국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라이오넬 기사단의 엠블럼이었다.

이아네는 할 말을 잃고 영롱히 빛나는 광채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보석 세공으로 이름난 델토르에서도 이렇게 뛰어난 세공은 찾아보기 힘들다. 분명 최고의 장인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일 터.

특히나 감격적인 것은, 사자의 눈에 박혀 있는 이아네의 것과 같은 초록빛.

"이건...?"

"가넷이야."

이아네가 살짝 입을 벌렸다. 표정이 별로 없는 얼굴이라 별다른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제르멘은 이아네가 얼마나 놀랐는지 잘 알았다.

"가넷은, 적색 보석이 아닙니까?"

"네 눈동자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싱긋 웃는 제르멘에게서 눈을 떼고 이아네는 다시 견장을 바라보았다. 싱그러운 여름날 정원의 녹음과도 같은 초록빛. 적색계 보석류로 이름난 가넷 중에서도 초록빛을 띠는 그린 가넷이라면 그 희소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견장의 잠금쇠를 풀어 어깨에 단다. 사자의 녹색 눈동자가 영롱히 빛났다.

이아네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제르멘과 마주친 녹빛 눈동자는 이제 단호한 빛을 띠었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 명을 받들라."

"예, 제르멘 라 스타시아 왕세자 저하."

진지한 눈으로, 제르멘이 이아네의 풀 네임을 불렀다. 이아네가 제르멘의 발치에 부복하자 제르멘이 말을 이었다.

"이 순간부터 그대를 라이오넬 기사단원으로 임명한다. 네 생명을 다해 스타시아 왕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겠느냐?"

"맹세합니다."

"이 맹세는 네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유효하며 로요라 여신의 미소가 다할 때까지 스타시아의 사자는 너의 영광이 될 것임을 맹세한다."

제르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 섰던 기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제르멘에게 기다란 검을 내밀었다. 칼자루와 손막이가 아름다운 루비와 사자로 장식된 제르멘 라 스타시아의 검이 부복한 이아네의 왼 어깨에 얹어졌다.

"일어서라, 이아네 월터 발로아."

고개를 든 이아네의 뺨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르멘이 검을 거두고 이아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엄지로 그 눈물을 친히 닦아 주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사람이다."

"...황송...합니다..."

이아네는 오랫동안 울음을 참지 못했다. 초록빛 눈동자를 적시며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눈물의 궤적을 손가락으로 따라 훑으며 제르멘은 그지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델토르 왕실 직속 라이오넬 기사단은 그 명성만큼이나 입단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왕실 직속이라는 것은 괜히 붙은 수식어가 아니다. 라이오넬 기사단 소속 기사는 최고의 실력과 충심을 갖춘 최정예 요원으로 구성된다. 말하자면, 기사단 라이오넬은 스타시아 왕가의 또 다른 보물이었다.

라이오넬의 입단은 국왕 본인이나 왕의 직계 혈족이 인증한 인재가 아니면 조건 자체가 갖춰지지 않았다. 그런 라이오넬 사이에서 이아네의 입단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성년을 갓 맞이한 열여덟 살 풋내 나는 어린 소년에게 무려 왕세자가 직접 라이오넬 엠블럼을 하사한데다 그 엠블럼에 그린 가넷까지 박아 넣으셨단다. 라이오넬뿐 아니라 모든 황궁이 뒤집어졌다.

"너로군."

"이아네 월터 발로아라고 합니다."

어딘지 조금 긴장한 얼굴을 하고서, 정복을 차려입은 이아네는 자신 앞에서 느긋하게 차를 들이키는 장신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왕세자 전하께서 친히 엠블럼을 하사하셨다지."

"...네."

꿀꺽, 목 안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남자, 현 라이오넬 기사단장이자 제르멘의 먼 친척인 에이븐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소년을 훑었다.

강직하고 곧은 초록색 눈동자, 검을 잡기엔 조금 길지만 방해되는 것은 없는 가지런한 흑발, 그리고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

이아네는 사실 검사나 기사로서 좋은 체격은 아니었다. 비율은 좋았지만 팔다리는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했고 이제야 겨우 근육이 붙기 시작한 몸은 도저히 검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븐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라이오넬에 들어온 이상, 너는 이제 스타시아 왕가의 사람이다. 목숨을 다해 국왕폐하와 왕세자 전하를 보필해야 한다."

"예."

"내일부터 아침 여덟 시에 시작되는 훈련에 참여하도록. 돌아가도 좋다."

에이븐이 바깥으로 쳐내듯 손짓했다. 나가도 좋다는 의미였지만 이아네는 그 자리에 서서 지금까지 아무도 묻지 않았던 것을 물어 왔다.

"질문이 있습니다."

"...뭐냐."

"라이오넬 기사로서의 자격이 박탈되는 경우도 있습니까?"

허, 요놈 봐라?

에이븐은 조금 놀라 눈을 가늘게 떴다. 요 풋내기 기사가 물어온 것은 기사단 입단에 들뜬 혈기왕성한 젊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냉정한 것이었다.

"정식 기사가 된 후에도, 혹여나 황가로부터의 제명이 있지는 않는지 알고 싶습니다."

꽤나 당돌한 녀석이었다. 에이븐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정식 기사가 파문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전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밀엄수 임무를 지키지 못하거나 왕가에 누를 끼치는 사회악을 저질렀을 때, 그리고 귀화했을 때. 이 세 가지의 경우다."

이아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곤 작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이아네가 나간 방안에서, 에이븐은 오랜만에 이 어린 견습 기사에 대한 흥미로 불타올랐다. 어릴 때부터 제르멘과 함께 검술 수련을 받았다 하니 그 실력을 보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물었을까?

어쩐지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에이븐은 파이프를 물었다. 바구스 산 담배 연기가 한가로이 방안에 피어올랐다.

그로부터 육 년이 지났다.

열여덟 살의 젊은 견습 기사는 이제 남자 티가 완연한 스물네 살의 정식 기사가 되었고 장난스러운 푸른 눈을 반짝이던 스무 살의 왕세자는 이제 어엿한 델토르의 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델토르의 왕이라면 반드시 골머리를 앓아 왔던 안건이, 드디어 국정회의의 도마에 올랐다.

"지금부터 델토르-디날 간 라퓨타 협정 대책 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비안테 공작의 목소리가 어쩐지 멀었다. 이아네는 제르멘의 호위를 위해 그의 뒤에 서서, 실버 블론드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생각에 잠겼다.

제르멘은 늘 그렇듯 약간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열기를 더해가는 위원회 상황을 관망하듯 바라보는 중이다.

"디날과 라퓨타 협정을 맺은 것은 5년 전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라퓨타에 가시는 만큼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아하, 그거 엄청 피곤하겠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으른 목소리가 제르멘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외무장관 엘페소 경이 곤란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르멘이 형식이나 예법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처사는 조금 심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아네도 제르멘이 이렇게 겁 없이 굴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혹여 반란이라도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영예로운 델토르의 역사상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비안테 공작의 구겨진 얼굴은 당장이라도 국왕의 정복 중앙에 칼침을 놓고 싶어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협정은 라퓨타가 어느 누군가의 영지가 되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테지."

제르멘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비안테 공작의 얼굴이 약간의 희망으로 빛났다. 드디어 이 정신 나간 왕이 철이 들 때가 되었나 보다.

"폐하, 이번에야말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델토르가 만만한 곳이 아님을 똑똑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상. 어차피 라퓨타라는 것이 드래곤 말고는 특별한 메리트가 없잖나. 관광 수입으로 먹고사는 공국은 내 쪽에서도 흥미가 없군."

비안테 공작의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에 빠직, 하고 작게 핏줄이 솟았다. 붉어지기 시작한 얼굴을 보면서도 제르멘은 망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곳, 차라리 넘겨주면 어때? 어차피 그것이 누군가의 소유가 된다면 더 이상 이런 대책회의를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폐하!"

참다못한 비안테 공작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다르다. 다른 대신들도 평소의 난처한 기색이 아닌, 어딘가 분을 참는 분위기가 역력하였다.

비안테 공작은 선왕 때부터 일해온 델토르의 충신이었다. 종종 충심이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 있긴 했지만 비안테 공작은 그간의 경험을 잘 살려 노련하게 델토르의 왕을 보좌해왔다.

막내아들뻘 되는 저 애송이가 왕만 아니었다면, 그가 일궈 온 모든 것을 날려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세 치 혀를 당장 잘라 피 뚝뚝 흐르는 채로 씹어 먹었을 것이다.

"폐하, 그렇지만 라퓨타는 무역상의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라퓨타가 디날의 소유가 된다면 이제 공용 항구는 이용할 수 없게 됩니다."

외무장관 엘페소 경이 조심스럽게 이견을 내었다. 그것은 제르멘으로서도 매우 납득이 가는 의견이었기에 좀 더 놀려 볼까 하려던 생각은 그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라퓨타.

제르멘이 살짝 눈을 내리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책으로, 구전으로 수없이 들어왔던 이름. 그러나 막상 그 이름을 이렇게 명확히 마주하게 되자 제르멘은 어딘지 동화 속에 들어온 듯 현실감이 엷어짐을 느꼈다.

델토르의 국민들이라면 모두가 라퓨타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라퓨타라는 이름을 모르는 대륙인은 하나도 없다.

라퓨타.

그것은 델토르와 디날 사이, 아델 강 하류에 위치한 작은 섬의 이름이다.

비옥한 대지와 토양, 기묘하고 희귀한 수목, 깊은 곳에서 솟아나 흐르는 폭포와 손대지 않은 처녀림. 하지만 델토르도 그에 못지않게 비옥하며 디날은 라퓨타가 없이도 충분히 부요했다.

문제는 섬이 아니라 그 섬에 무엇이 사느냐이다.

드래곤.

신비의 섬 라퓨타에는, 드래곤이 서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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