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폐하! 어디 계십니까? 폐하?"
깨끗하게 빗어 넘긴 흑발이 정오의 햇살에 검게 빛났다. 당혹감에 젖은 초록색 눈동자가 바쁘게 왕궁 후원을 살폈다.
없다. 없어. 늘 이 시간이면 졸리다며 오수를 청하던 분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꽁꽁 숨어 버리는 분은 아니셨다. 다급해진 남자는 후원의 문을 통할 겨를도 없이 훌쩍 창문을 넘었다. 창문 아래 관목들이 남자의 은빛 갑옷에 스쳤다.
턱, 하고 지면에 남자의 발이 닿았다. 가볍게 무릎을 굽혀 앉아 충격을 줄인 남자가 어깨에 걸친 망토에서 검불을 떼어내려 할 때였다.
-턱.
"흐극!?"
"쉿, 여기야, 안."
낮게 킥킥대는 목소리와 함께 희고 단단한 손이 남자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창문 아래 덤불 속에서 그가 찾던 분이 킥킥대며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폐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지금 성에서는 난리가 났..."
"쉿, 안, 들키겠어. 일단 이쪽으로 와."
싱글거리는 하얀 얼굴. 남자는 한숨을 쉬며 그분의 손길을 따라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자주 와서 쉬었던 건지 의외로 꽤 넓은 공간이 덤불 속에 뻥 뚫려 있다. 창문 바로 옆벽에 바짝 붙어 위치한 곳이라 창문에서 내려다봤댔자 보일 리도 없었다. 이거 참 골치 아픈 곳을 골랐다고 생각하며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어 화를 냈다.
"폐하, 지금 이게 대체..."
"너무하네, 안. 우리 둘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줬을 텐데."
"...제롬."
"응, 무슨 일이야?"
은빛 갑주를 갖춰 입은 남자 앞에는 세상이 끝나더라도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분이 화사하게 웃고 있다. 빛나는 은발과 매혹적인 청안이 아름다운 분.
제르멘 라 스타시아, 델토르의 왕. 그의 애칭을 부른다는 것은 평범한 의미가 아니었다.
"...오후부터, 라이오넬 기사단장의 작위 수여식이 거행됩니다. 부디 늦지 마십시오."
"이런, 귀엽지 않은 아가씨네."
"폐하!"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쓰자, 국왕 제르멘은 낮게 킬킬대며 희고 고운 손을 들어 남자의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의 왕 앞에서만은 이렇게나 귀여운데. 그 누가, 그를 혹한의 바람과도 같은 냉막한 흑은의 기사라고 생각할까. 바보 같은 줄 알지만 그 손짓 하나에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떨리는 그는 왕의 기사.
쪽, 하며 제르멘의 입술이 가볍게 기사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애정이 담뿍 담긴 행위에는 분명 주군과 기사 이상의 암묵적인 맹약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폐, 폐하."
"언제부터, 안이 나를 폐하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하지만..."
"네가 맹세를 스스로 어기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기사는 울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붉어진 눈가가 사랑스러워, 왕은 또 한 번 웃으며 그를 끌어안는다.
"그렇다면 내 이름을 불러줘, 안. 나의 사랑스런 기사."
"...제롬."
"후후, 언제 들어도 달콤한 이름이야. 그렇지?"
"...궁에서는 안 됩니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하지만 여긴 궁이 아니야."
후후 웃으며 왕은 남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푸른 눈. 그 눈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용서할 수밖에 없다. 가끔 이렇게 멋대로 행동할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기사의 주군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더 있다간 안이 정말로 화를 낼 테니, 이제 가 봐야겠지."
"누가 화를 냈다고..."
반발심에 다급히 변명해 보지만 제르멘은 이미 덤불 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급히 그 뒤를 따른 기사는 제르멘의 머리카락이며 옷에 들러붙은 먼지를 말끔히 떨어내고 나서야 자신의 망토 자락을 갈무리했다.
제르멘은 그 모습을 마치 아들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다, 기사가 망토에서 먼지를 다 떨어낸 후에야 발을 맞추어 걷기 시작하였다.
"이아네 월터 발로아 경."
"예, 폐하."
"집무실로 간다. 보좌하도록."
"예."
걸음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젊은 왕의 얼굴에서는 감정이 사라져 갔다. 아까까지 후원에서 안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던 이와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지만, 왕으로서의 제르멘은 한없이 온화하면서도 가차 없는 군주다. 그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고, 그것은 그의 옆에서 아주 오랫동안 호위를 맡아 왔던 이아네 월터 발로아 경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오의 햇살이 기울었다. 살짝 비껴 지나는 햇살은 이제 아무도 없는 왕궁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