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월계화 (下)
봄을 맞이한 궁궐에는 탄일을 기점으로 풍악이 멈추지 않았다.
임금은 소문대로 방탕하고 허황이었으며 오만이었다. 조정에 든 대신 누구도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았고, 걱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월정당 저주 사건으로 최익수를 배척해 버린 임금을 곱게 볼 관료들은 없었다.
그 틈이 임금에게 기회였는지, 임금은 주색을 탐했고 술에 전 채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냈다. 왕실의 기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경박스럽게 굴었으며 종묘사직의 보존은, 백성의 삶은 그에게 와닿지 않는 허구처럼 대했다.
유일한 충신 김세준마저 임금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소문이 사대문을 넘어 전국에 파다하게 퍼진 와중에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설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대신들이 김세준의 자리를 탐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도록 임금은 폭군의 절차를 천천히 밟고 있었다.
타락한 군왕을 위하는 신하가 없듯, 백성들 역시 하나둘 군왕의 위엄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범랑에 잔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대로 망진동에 기거하던 이들에게 홍주의 땅을 내어 주었답니다. 홍주 땅이 워낙 불모지라서 터를 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터인데도 다들 좋아했다고 합니다.”
귀인 박 씨는 객주에서 온 서신과 장부를 강에게 내밀었다. 상석에 앉아 자현의 이야기를 듣던 강은 그에게서 장부를 받아들었다.
자현이 궁궐로 들어오게 되면서 객주의 살림은 말복 아범이 돌보았고, 자현은 강의 지시를 말복 아범에게 전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중이었다.
궁궐로 들어오기 전부터, 강이 자신에게 객주 사업을 맡길 때부터 자현은 사업 수완이 좋은 강이 나서서 객주 일을 돌보지 않는 게 이상했다. 백날 이유를 물어보면 무엇 하나. 답을 가지고 있는 이의 입은 주춧돌보다도 무거웠다.
저를 궁궐로 불러들인 게 비단 객주의 소식을 전달받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물어봐도 듣지 못할 것이었다.
강이 장부를 살피고 있는 와중 자현의 처소로 내관 하나가 들어왔다.
“지금 만월지에 계신다고 하옵니다.”
내관에게 들은 것을 강에게 전달하던 상선은 할 말을 한 뒤에 입을 꼭 닫았다.
자현은 심드렁한 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폭군을 자처하는 것도, 월정당을 향한 꾸며 낸 변심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지켜보았음에도 어떤 미동도 없는 강이 답답해 자현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떼었다.
“가 보시지요.”
장부를 들춰 보던 강은 경멸이 조금 섞인 눈으로 자현을 보았다.
“내관을 통해 듣지 마시고 직접 보고 오시라는 것인데, 소인이 틀렸습니까?”
강은 자현에게서 시선을 뗐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라며 친누이에게 하듯 반문할 법도 했다. 그러나 강은 침묵을 지켰다.
자현은 그것마저도 강답지 않아 몰래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찌 그러시는 것입니까?”
자현의 물음에 강은 시선은 장부에 그대로 두고 말했다.
“무엇을.”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재촉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쇠인 강에게 괜한 심통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자현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아니면 그 상황이 불쾌하다는 것인지 강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홍주 땅은 인삼 농사를 짓기 좋으니 인삼 씨를 지원하라고 전하거라.”
자현은 강을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장지문으로 향하는 강을 붙잡고자 외쳤다.
“전하! 답을 주고 가십시오!”
발을 떼었던 강은 귀찮다는 게 역력한 기색으로 자현을 마주했다.
“주지 않았더냐.”
“제가 듣고자 한 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자현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강은 말을 꺼내 놓기보다 도망가는 게 더 쉬운 일이라는 듯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홀로 처소에 남게 된 자현은 강이 떠난 곳을 바라보았다.
“저리 티를 내시면서 어찌 저러실까…. 하긴, 저리 티 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이도 있거늘 누구 탓을 할 수 있을까.”
편전으로 향하던 임금의 행렬이 멈칫했다.
어중간한 곳에서 한참 머물던 걸음이 돌연 후원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틀어졌다.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모두가 걸음이 어디서 멈출 것인지 알고 있다는 듯 침묵을 지키고 강의 뒤를 쫓았다.
상선 또한 속내가 훤한 강의 행보에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후원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손에 꼽히는 만월지가 눈앞에 있었다. 강은 그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딜수록 심장의 울림이 커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익숙한 외격소가 흉부로 들어오자 심장이 꽉 조이기 시작했다.
강은 그저 지그시 방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바람에 실어 보내면 좋으련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애석하게도 저를 스치고 뒤로 날아갔다.
방지 너머에 있는 이에게 시선에 꽤 오래 닿아 있었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애써 발을 떼어 보아도 역시나 그이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저를 피해 도망가듯 너머에 있는 이는 미련 하나 보이지 않고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하염없이 은재를 바라보던 눈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다시 고개를 든 강은 난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돌아가자.”
더는 그곳에 있을 자신이 없었던 강은 미련 가득한 발을 돌렸다.
상념을 품은 강의 뒤를 쫓는 상선은 근심을 한가득 떠안은 얼굴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상궁 나인과 내관들은 상선의 근심을 모를 것이었다. 아니, 알아도 이곳은 궁궐이었으니 함부로 알은체를 할 수 없을 것이었다.
향로에서 타오르는 뿌연 연기가 침전 안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강은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팔을 서안 위에 올려 두고 상소를 보았고, 그 곁을 상선이 지키고 있었다.
상선은 눈에 띄게 색이 연해진 합환 증표를 바라보며 속을 끓였다. 당장 어의를 들이시라 말하고 싶었지만, 강은 괜찮다며 안주할 것이었다.
그때 강이 옅은 기침을 내뱉었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재빠른 상선의 물음에 강은 손을 올려 걱정을 마다했다. 그리고 펼쳐 놓았던 상소를 정리하라 상선에게 내밀었다.
“향을 더 태워라.”
향로 앞에 대기 중이던 내시가 슬쩍 상선의 눈치를 보았다. 상선은 굳이 움직이지 마라, 제지했다.
“어의가 향을 태우는 것만으로는 억제할 수 없다, 그리 고하였사옵니다.”
어의가 처방한 약으로도 상사기의 열기를 막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모두가 함구하기 시작했다. 월정단 귀인뿐만 아니라 임금의 건강도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강이 경계하는 적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걱정과 근심으로 기어코 내뱉은 말이었지만, 살을 에는 것 같은 눈빛이 저에게 들이닥치자 상선은 간언을 아끼고 강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사이 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책을 펼쳤다.
체념한 상선은 머리를 들고 향로 앞을 지키는 내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눈치를 보던 내시는 허겁지겁 청동으로 만든 향로의 뚜껑을 열고 어의가 지어 준 약재를 그 속에 뿌렸다.
자신이 모셨던 소명 세자의 죽음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선은 늘 그랬듯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속을 태웠다. 상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부경에게로 향했다.
얼떨결에 상선과 눈을 맞춘 부경은 모르는 척 회피하려고 했지만, 상선의 간절함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부경이 나서야 했다. 바닥을 딛는 소리조차 조용한 부경이 강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사가에서 즐기시던 송화주를 올리라 하오리까.”
서책을 보던 강은 짐짓 놀란 눈치로 부경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어쩐 일로 네 입이 열리는 날도 오는구나.”
“늘 말벗을 원치 않으셨사옵니까.”
강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부경의 말에 피식거리다 다시 서책으로 눈길을 옮겼다.
“되었다.”
실패가 분명했다. 부경은 어쩔 수 없다는 상선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상선은 포기를 모르고 무언으로 부경을 재촉했다.
약재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향로에서는 연기가 쉼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연기로 상사기에 근접하지 않은 부경마저도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것 같았다.
“월정당 귀인을 생각하시어….”
차마 말을 끝맺을 수 없어 부경은 곧 입을 닫았다. 씨알도 먹힐 이에게나 먹히는 것인데.
오직 고요함이 감도는 그 안에서 부경은 아무 말 없이 서책을 읽는 강을 기다렸다. 강요할 수도 없게 강은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 서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월정당 귀인을 생각하라….”
오랜 침묵 끝에 강은 입술을 떼었다. 부경과 상선은 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
끝까지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강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부경과 눈을 맞추었다.
“생각하는 마음으로 다가가기에는 너무 멀어진 사람이다.”
강은 피식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그때도 부경은 올곧게 강을 지켜보았다.
“그이가 멀리 도망가도록 내몰았던 이가 나인데, 누구 탓을 하겠느냐.”
침전에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잔잔하게 깔렸다.
“상사기를 해갈하려 월정당을 찾아가라, 그것은 그이를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강은 숨을 머금었다.
마치 응어리 같은 것이 가슴에 맺힌 줄 알았건만, 그것이 울컥하고 목구멍으로 튀어 올랐다. 치솟았던 그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강은 입을 떼지 않았다. 계속해서 말을 멈췄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결국에는 입 밖으로 나오려고 발악하던 그것이 강의 고집에 져 숨을 죽였다.
“나는 그이가 나를 완전히 증오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궁궐에는 희망이 없었다. 폭군의 길을 자처한 강이 그리는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했다.
분명한 것은 강은 그 미래에 월정당 귀인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 * *
도성의 사대문 중에서도 광원문은 범랑의 위용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평상시에도 소란스러웠지만, 여느 날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무장한 군관들이 광원문과 도성의 성벽을 포진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좋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정예의 대소 신료들은 광원문으로 집결하여 그들이 이곳으로 오기만을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오랜 세월 주국에서 공부를 하던 경원군과 풍홍군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주국의 임금이 보낸 친서를 사절단 일행이 가지고 오는 중이었다.
이틀 전 육로의 국경을 넘어 범랑으로 온 사절단 행렬이 곧 광원문으로 당도할 것이라는 파발이 광원문을 통해 궁궐로 전해졌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막바지에 치달았던 궁궐이 또다시 분주해진 것도 그쯤이었다.
“전하, 사절단이 광원문을 통해 천양으로 들어왔다 하옵니다.”
침전 밖,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세준이 강에게 아뢨다.
강은 적막한 공간에 울리는 세준의 목소리에 대꾸하지 않고 양팔을 벌린 채 지밀나인이 곤룡포의 소매를 손에 끼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에 달린 보에 새겨진 용이 목덜미를 덥석 물어 살점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강은 심드렁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어 목 근처 매듭단추가 채워졌다. 수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입었던 곤룡포가 오늘따라 유독 버거운 건 그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고름이 단정하게 묶이고 나자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나인 하나가 강의 허리에 옥대를 둘렀다. 그 무게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강은 그 역시도 부담스러웠다.
익선관이 머리에 얹혔을 때는 목뼈가 아스러지는 듯한 느낌이 전신을 타고 퍼졌으니, 지금 저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기운이 괜한 기우가 아니리라 생각했다.
모든 걸 내려놓을 순간이 다가오니 생각보다 허탈하고 심란하구나.
가까스로 오른 용상이 못내 아쉬웠던 것일까. 아니었다. 강의 공허함은 무소불위를 잃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하, 사절단이 곤호문 앞에 당도하였다 하옵니다.”
복도를 지키는 세준이 말했으나, 강은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매만지던 지밀상궁이 뒤로 물러났다. 줄곧 허공을 바라보던 강의 시선이 복도로, 바깥으로 향하는 장지문에 꽂혔다.
강은 주저하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 설사 그 문 뒤에 저를 집어삼킬 암흑이 있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저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강은 불구덩이가 있을지라도 앞으로 나가야 했다.
희경당에서 명경전으로 통하는 회랑에 들어선 강은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배종하는 행렬을 신경 쓰지 않는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이윽고 풍악이 울려 퍼지는 곳에 임금이 도착했다. 좌우로 문무를 나눠 자리한 관료들은 모두 엎드린 채 임금을 맞았다. 가운데 마련된 자리에 적절한 예를 갖추고 있던 사절단에게서 임금의 시선이 멈췄다.
임금은 월대에 서서 명경전을 널리 훑어보았다. 군왕의 위엄을 평가하려 드는 자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저 중에서 자신의 진심을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허튼 생각이었다.
월대에 간이로 설치해 둔 일월오봉도 앞에 옥좌가 있었다.
임금이 하사한 운검을 소지한 겸사복장이 일월오봉도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임금은 옥좌에 앉았다.
사절단의 접대를 주관하는 빈례도감의 정사가 시작을 고했다. 경의를 표하는 사절단의 우두머리가 옥좌에 앉아 있는 임금을 향해 절을 한 뒤 자신들이 이곳으로 가져온 주국 왕의 친서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러 명의 손을 타고 마침내 친서가 임금에게 전달되었다. 임금은 그곳에서 친서를 펼치지 않았다. 그리고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한 채 옥좌에서 일어나 월대 끝에 섰다.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연회를 마련하였소. 범랑에서 편히 머물다 돌아가길 바라오.”
범랑의 임금은 예로부터 전해 온 전통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웃 나라의 임금이, 그것도 수십 년간 형제의 의를 나눴던 나라에서 온 사절단에게도 무성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몇몇 대신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월대에서 사라진 임금을 보는 순간, 돌연 풍악이 끊기며 적막이 휘몰아치는 순간 명경전 앞마당에 때아닌 찬바람이 술렁거렸다.
귀빈으로 궁궐에 들어온 사절단 일행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간략함에 당황을 숨길 수 없었으니, 임금을 모시는 문무백관의 당황스러움이 작다 할 수 없었다.
정사와 부사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나섰다. 끊겼던 풍악이 다시 울리고 사절단 주위로 나서기 좋아하는 백관들이 몰려들었다.
그 혼란스러운 틈을 타 눈치를 보던 풍홍군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풍홍군은 강의 뒤를 쫓아 봤지만, 어느 곳에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풍홍군은 거리낌 없이 복잡하게 얽힌 회랑을 걸었다.
희경당 앞, 안으로 들지 못하는 나인과 내시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풍홍군은 어수선한 마음을 감추고 그곳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자 명경전에서 임금이 벌인 일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이 풍홍군의 눈에 들어왔다. 풍홍군을 확인한 내시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고했다.
“주상 전하, 풍홍군이 뵙길 청하옵니다.”
곧장 안에서 답이 들려왔다. 마음을 졸이는 이들에게 열어 주지 않았던 장지문이 열렸다. 풍홍군은 복도에 있는 이들의 간절함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풍홍군이 그토록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년 만에 만난 아우가 저를 보며 웃는 게 아니라 눈물을 글썽이는 이유를 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은 눈시울이 붉어진 아우에게 달리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마저도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려거든 거두어라.”
강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풍홍군은 바닥에 이마를 처박곤 설움을 쏟아 냈다. 저를 아껴 주었던 소명의 죽음을 접했을 때처럼 풍홍군은 궁궐에 억압되어 있는 강을 보며 진심으로 슬퍼했다.
한가운데에서 하늘거리는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은 무용수들이 풍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사절단은 따로 마련된 자리에서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무용수들의 손짓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절단의 정사와 부사는 범랑의 임금 곁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술자리에 앉은 임금은 아까와는 달리 호쾌한 모습을 과감하게 내보였다. 두 사람은 임금의 심중을 알 수 없었으나, 허례허식에 관심이 없는 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과인의 아우들이 주국에서 어찌 보내는지 늘 노심초사하였소. 장성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힘을 써 준 정사와 부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주국의 정사와 부사는 임금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범랑과 주국의 의리가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라겠소.”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즘, 왕족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경원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원군은 자신의 빈자리에 신경 쓸 사람이 없다고 여겼는지 과감하게 연회장을 박차고 나갔다.
임금은 보았다. 보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궁궐 밖으로 나간 경원군은 육조 거리를 홀로 거닐었다. 그리고 육의전 거리에 닿았을 즘, 말을 이끌고 온 무리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말에 오르십시오.”
미리 언질을 받은 듯 경원군은 낯선 이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들이 몰고 온 말 위에 서슴없이 올랐고, 길을 안내하는 이의 뒤를 따랐다. 저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 호위를 도맡았다는 것을 개의치 않아 했다.
그들은 어둠을 뚫고 도성 밖으로 향했다.
어둠을 집어삼킨 검은 숲이 두렵지 않은 듯 행렬은 과감했다. 말이 어두운 길을 박차고 앞으로 나갈 때마다 풀풀 풍기는 먼지를 들이마시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도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속에 자리한 사찰에 도착해서야 그들의 목표와 조우했다.
말에서 내린 경원군은 미리 소식을 받고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는 이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십 년, 긴 시간이었다.
부왕의 명을 받고 어린 나이에 아우와 함께 주국으로 떠났던 날이 아직도 경원군의 머릿속에 선명했다. 강직해야 한다고 이르던 어미의 목소리를 발돋움 삼아 지금까지 어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국에서 악착같이 버텼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는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아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지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경원군은 자신의 어미 앞에 무릎을 꿇고 먼 타국에서 삼켜 왔던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바꿀 것입니다…. 소자가 바꿀 것입니다.”
오열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는 진중했다. 아들의 눈물에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아들의 포부를 받아들이며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 왔던 순간을 그렸다.
시작은 단순하면서도 혼잡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을 먼 타국으로 보내야 했던 마음으로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는 지아비였던 상왕이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한 짓을 생각했다.
총애하던 세자를 잃은 상왕의 상심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아들, 경원군이 상왕의 뒤를 이으리라 생각했었다.
그것은 자만이었다. 오만이었고, 과욕이었다.
스스로 임금에게 받은 직첩을 내려놓고 상왕처럼 궁궐을 나와 동향을 살폈다. 군왕의 자질이 없는 임금이 스스로 제 목숨 줄을 갉아먹고 있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작은 절에 처박혀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렸다. 때는 반드시 오는 것이었고, 그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움직일 때였다.
장성한 아들을 앞세워 꿈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꿈을 이룰 것이었다.
* * *
전객사에서 주국으로 보낼 폐물과 사절단으로 온 사신들에게 내릴 하사품을 정해 달라고 아뢨다.
강은 사절단이 가져온 화친을 위한 폐물의 목록을 확인했다. 보내온 것에 비해 소박해서도, 과해서도 안 되는 폐물을 주국으로 보내야 했다.
그때 강은 목록에 적힌 월계화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슬그머니 물꼬를 튼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 차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목 안쪽에 자리 잡은 증표에는 여전히 그날의 감촉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늘 살갗이 간지러웠다.
‘꽃 같습니다.’
손목에 피어난 붉은 반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는 그 흉측하기만 한 것을 꽃이라고 칭했었다.
“꽃이라….”
강은 흐려진 색으로 볼품없고 흉측한 업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날이 선 칼로 도려내면 그이가 완전히 저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은재가 저에게서 멀어지길 바라면서도 그러지 않길 바랐다.
‘무슨 꽃을 닮았습니까?’
‘찔레꽃…?’
‘하하, 찔레꽃이라니요. 설마 모든 꽃이 다 찔레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요?’
‘예….’
부드럽고 말랑했던 뺨을 콕, 찔렀던 느낌이 손가락에 생생하게 피어올랐다.
‘찔레꽃이 그리 좋습니까?’
‘네. 제겐 특별한 꽃입니다.’
‘월계화라는 꽃이 있습니다. 그 꽃도 찔레꽃 못지않게 곱지요.’
그때는 그리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던 이였다. 그땐 일이 이렇게 될지 몰라 저도 그이를 따뜻하게 바라보았었다.
옛 기억을 들추자 잠시나마 가라앉았던 화기가 가슴 속에서 펑펑 튀어 올랐다. 강은 증표의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어흑!”
“전하!”
손을 들어서 막는 임금의 모습에 상선은 더는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고통에 일그러진 강의 얼굴을 확인했다.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본 적도 없고요.’
‘당연하지요. 그 꽃은 주국에서만 볼 수 있는 꽃입니다. 간혹 주국 사신단이 들고 오기는 하지만, 궁궐에서만 볼 수 있는 꽃입니다.’
뺨을 건드리던 손가락 끝에서, 목덜미를 덮었던 손바닥에서 느껴졌던 열기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따뜻함은 어디로 갔나. 제 앞에서 얼굴을 붉히던 임은 어디로 갔나. 강은 목울대를 일렁거렸다.
“윽….”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숨을 쉬어도 목구멍 너머로 공기가 넘어가지 않았다. 고통스러웠지만, 강은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저에게 들이닥친 고통을 삼켰다.
‘함께 월계화를 보러 갑시다.’
‘예…?’
강은 제가 그날 은재에게 속삭였던 말을 기억했다.
‘월계화를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주국이라도 상관없으니, 함께 가서 그 꽃을 봅시다.’
기대에 차 있던 은재의 얼굴을 떠올리자 코끝이 찡하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강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울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무너지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전하, 어의를 불러오겠사옵니다!”
강은 수그렸던 몸을 추켜세웠다. 옷자락을 쥐어 잡았던 손을 책상 위로 내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록을 확인했다.
“월계화 꽃을 가져오라 명하게.”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연한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통기가 잘 되는 천으로 뿌리를 감싼 월계화 줄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궐내 어느 전으로 그 꽃을 보낼 것인지 임금의 명을 기다리던 내시는 길고 긴 고심을 참지 못하고 상선의 눈치를 보았다.
“전하, 어느 전으로 보내오리까?”
강은 상선의 목소리에 안중을 두지 않았다.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거리를 둘 것인가.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할 것인가.
이미 강의 머릿속은 월계화를 궁금해하는 은재의 얼굴로 잠식되어 있었다. 정해진 답을 앞에 두고도 강은 입을 떼지 않았다. 이내 고심을 끝낸 듯 강이 월계화에 두었던 눈길을 떼었다.
임금은 친서의 답신과 함께 주국으로 보낼 폐물 목록을 작성하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상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슬며시 감았다. 대기 중이던 내시를 보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다시 임금의 눈길이 월계화로 향했다.
“전하…. 어느 전으로 보내오리까…?”
상선의 재촉에 강은 다시 월계화에서 눈길을 떼었다. 그것을 보낸다면….
“되었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아직 피어오르지 않은 꽃봉오리가 계속해서 가슴 어귀에 떠다녔다. 미련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지 몰랐다.
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적합한 폐물을 적는 손놀림도 멈추지 않았다.
“월정당으로 보내라.”
깊고 무거웠던 근심이 해갈되었다는 듯 상선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상선은 임금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서둘러 내시를 부려 월계화 묘목을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도록 했다.
* * *
민명탁을 필두로 기루에 모인 이들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사절단이 아직 범랑에 머무는 와중에 사적인 모임을 행하는 것이 눈총을 받을 일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그곳에 올 이를 기다리며 담소를 주고받았다. 대부분 사절단이 오던 날, 임금의 부적절한 태도를 흉보는 중이었다.
“도착하셨습니다.”
머지않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곳에 자리한 능경파의 눈길은 응당 문으로 향했다.
경원군은 꽤 언짢은 표정으로 그곳에 있는 이들을 훑어보았다. 자신의 외조부를 보는 눈빛마저도 곱지 않아 사람을 당혹하게 했다. 안으로 향한 걸음은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김윤덕을 위해 비워 둔 상석에 앉는 경원군을 말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뜻을 함께하겠소.”
그가 내던진 그 말을 시작으로 능경파에 환희가 들이닥쳤다.
경원군은 그들의 얼굴에 적나라하게 떠오른 웃음을 보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상왕의 후궁이었던 귀인 민 씨의 아비이자 경원군의 외조부, 민명탁을 바라보았다.
민명탁은 경원군의 눈 속에 섞인 경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웃었다. 마음속에 권력의 복귀만을 그렸다.
“군 대감,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민명탁은 경원군의 못마땅함에도 자신의 뜻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김윤덕, 그이를 다시 천양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경원군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그 이름에 관심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심드렁했지만, 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그들이 자아낸 그것이 특이하고 비박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오롯이 제 어미를 절벽으로 내몬 아비에게 느끼는 증오를 가장 진하게 새기려고 했다.
김윤덕, 그자가 이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해도 경원군에게는 그만큼이나 확률이 좋은 패는 없었다.
“나는 그대들이 마련해 놓은 발판을 딛고 오를 것이니, 뜻대로 하시오.”
* * *
송리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괭이와 삽을 들고 연통도 없이 찾아온 내시들을 보면 누구든 놀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
“연통을 받지 못한 것인가?”
“예?”
“주상 전하께서 꽃을 하사하시었네.”
때마침 월계화 묘목을 든 이들이 월정당으로 들어왔다.
“조용히 심고 오라 명하시었으니, 하던 일이나 하시게나.”
임금에게 직접 명을 받은 내시가 월계화 묘목을 둘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임금의 하사품을 받고도 예를 갖추지 않은 적이 처음이라 모두가 얼떨떨해했다.
화단이라고 하기에는 빈약한 담장 아래에 모인 내시들은 괭이를 땅으로 내리쳤다.
어수선한 바깥의 소음이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인지, 은재가 대청에 서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시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얼 하는 것인가?”
은재의 물음에 가장 상급 내시가 은재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께옵서 월계화를 귀인께 하사하시었습니다.”
은재는 제 귀가 막힌 게 아닌지 의심했다.
“자네가 명을 잘못 들은 게 아니라…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그 물음에 땅을 헤집던 내시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상급 내시를 바라보았다.
“예, 분명 월정당으로 가져가 심으라고 하명하셨습니다.”
정확하게 답을 들었지만, 은재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대신 덜컥 겁이 났다.
“어째서…?”
“예?”
“전하께서 어찌 이곳에….”
혼잣말을 하듯 작게 말하는 통에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한 내시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남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은재는 꽃을 심는 것을 멈추고 다시 확인해 보라고 했을 것이었다.
“도련님! 전하께서 하사하시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전에 월계화를 찾으신 적이 있으시지요? 저 꽃이 월계화랍니다!”
남이의 소란스러움에 은재의 관심이 그제야 월계화로 향했다.
바깥으로 꺼내지 못했던 희망이 이루어질 리가 없어 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거늘, 너무 명확하게 보내온 마음이 그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은재는 일찍부터 자신에게 휘몰아칠 상실감을 걱정했다.
월계화를 심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내시들을 내쫓을 수 없었기에 은재의 걸음이 틀어졌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바깥으로 나오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은재는 이미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를 보았고,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리는 것을 지워 내지 못할 것이었다.
“도련님, 나와 보십시오.”
방 안에서 괜스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책을 들척이던 은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깥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당장 나가고 싶었지만, 은재는 괜스레 느릿하게 움직였다.
관심 없다는 듯 서책을 느리게 덮고는 천천히 일어나 장지문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오자 송리가 밝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개회나무 한 그루 말고는 제대로 된 나무도, 꽃도 없던 월정당 화단에 열댓 송이의 월계화 묘목이 심겨 있었다. 그게 뭐라고 월정당에도 제법 사람 사는 태가 났다.
줄기에 매달려 있는 꽃봉오리가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은재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디딤돌에 놓인 신을 신었다.
수년간 원망하기만 했던 마음이 스멀스멀 사라지는 것인지 차갑게 식었던 몸뚱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찌릿찌릿한 손가락의 감각을 느끼며 은재는 월계화 화단으로 향했다.
그 순간만큼은 제가 느낄 상실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대로 부풀어 오른 마음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희망을 톡톡, 건드렸다.
은재는 손을 뻗었다. 눈으로는 오롯이 꽃잎을 꽁꽁 감추고 있는 꽃봉오리를 담고 있었다. 단단한 줄기에 달라붙은 잎사귀나 한번 만져 보자며 손을 내밀었다.
“아….”
줄기에 돋아난 가시가 바늘보다도 매서워 그 뾰족한 것이 손가락의 살갗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은재는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도련님!”
찔끔 맺힌 핏방울에 남이는 요란을 떨고, 송리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순간에도 은재는 가슴이 뜨겁고 얼얼했다. 그저 좋아 헤벌쭉 웃고 싶었다. 얼굴이 굳어 그럴 수 없었을 뿐, 따끔거리는 손가락 끝의 감각은 아주 가뿐하게 지워 낼 수 있었다.
인간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 제가 던진 돌멩이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이를 보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으면서, 처음부터 길거리에 박혀 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니 화가 났다.
“다 뽑아 버려라.”
“예?”
월정당의 소식을 전한 내시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되물었다. 그러나 임금의 관심은 월정당에 향해 있는 것인지, 폐물 목록을 완성하는 데 몰두한 것인지 내시의 무례한 태도를 꼬집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선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전하…. 월정당으로 간 월계화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래.”
다시 생각할 틈도 없이 임금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또 물어볼 수도 없도록 퍽 단호한 투에 상선이 내세웠던 발을 뒤로 물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궈 놓은 화단을 다시 메우라니, 내시의 얼굴에 상실감이 깃들었다. 그러나 명이라면 목숨도 내놓아야 할 처지였기에, 내시는 상선의 지시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시가 밖으로 나간 뒤 편전에는 소맷자락이 책상에 쓸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삐뚤거리는 곳 하나 없이 정갈하게 글씨를 써 내려가던 강이 움직임을 멈췄다.
“확실하게 뽑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다.”
월계화가 아니라 가시에 찔렸다는 손가락이 마음에 걸린 게 분명했다. 그러나 상선은 방금 내린 명을 거둘 게 아니라면 월정당으로 가지 마시라, 권하고 싶었다.
“예, 전하….”
내주었다 빼앗는 것이 얼마나 치졸한 것인지 알기에 월정당으로 가겠다는 임금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힘이, 권력이 없어 묵묵히 임금의 뜻에 따라야 했다.
괭이와 삽을 든 내시들이 다시 월정당으로 찾아오자, 남이와 송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들이 떠난 뒤 화단을 서성거리던 은재가 피곤함에 지쳐 막 안으로 들어간 참이라 다시 은재를 불러낼 수 없었다.
남이가 화단 쪽으로 모여드는 내시들에게 향했다.
“어쩐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어명이다.”
“네?”
“월계화를 다시 뽑으라고 하시더구나.”
남이는 고개를 돌려 송리를 보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은재가 있는 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래도 이미 심은 것을 어찌….”
삭막했던 화단에 심어진 월계화를 좋아하던 은재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남이가 내시들에게 말을 걸어 봤지만, 어명을 받고 온 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소연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방 안에서 우당탕,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장지문이 벌컥 열렸다. 남이도, 송리도 은재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 시립했다.
“무슨 일이더냐.”
묻는 말에 답을 꺼내 놓는 것 또한 감히 할 수 없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은재가 신도 신지 않은 발로 대청에서 내려와 기단을 밟고는 화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슨 일이냐 물었다.”
내시들에게도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치졸한 일에 저희가 나서야 한다는 게 멋쩍기도 했다.
“주상 전하께옵서….”
일순간, 은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국에서 온 선물을 뽑고 짓밟을 것 같은 표정으로 월계화를 노려보았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곁에 서서 그가 바깥으로 꺼내 보이는 감정을 고스란히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옮겨 심을 것입니다…. 하오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어찌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보다 못한 내시 하나가 나서 은재의 마음을 알은체했다.
“맞습니다, 도련님. 어차피 궁으로 들어오는 꽃은 후원에 심으니 가까운 곳에서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남이 또한 나섰지만, 그 잔 떨림이 어찌나 독한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때, 은재가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손을 뻗었다.
“으헉!”
그곳에 있던 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튀어나왔다.
지금 이 상황을, 앞으로 월정당에 닥칠 일을 걱정하는 이들이 맨손으로 월계화 줄기를 부여잡고 잘 가꾼 화단을 망가뜨리는 은재를 막았지만, 감히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귀인! 이러시면 안 되십니다!”
“도련님!”
남이와 송리 또한 발을 동동 구르며 무지막지한 모습으로 월계화를 뽑는 은재를 말렸다.
하사품도 하사품이지만 다름 아닌 주국에서 보내온 것인데, 이리 함부로 다뤘다가는 큰일을 당할 것이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은재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은재에게는 애타게 저를 불러 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미련하지. 미련했다. 역시나 미련한 것이었다. 일찍이 느꼈던 상실감이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어찌 이러리라 예측하지 못했을까.
“제발 멈추십시오!”
“귀인! 정말 큰일 나십니다!”
제일 먼저 그 소란 속으로 달려온 내시가 월정당 대문을 넘은 뒤 상황 파악을 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으로 보아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 주상 전하께옵서….”
선두로 달려왔던 내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임금의 행렬이 월정당 대문을 넘었다. 상급 상궁과 내관만 달고 그곳으로 들어온 임금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엉망이 된 화단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대포처럼 펑, 하고 터진 격이었다. 임금이 불쏘시개였는지, 난동을 피우던 이가 멀쩡한 월계화를 뽑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임금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이가 아니었다.
“그만하십시오!”
버럭 내지르는 호통에 은재를 뺀 모두가 뒤로 물러나 머리를 조아리고 허리를 굽혔다.
은재는 제 팔을 붙잡은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애썼다. 우악스럽게 손을 쳐 내고 월계화로 달려들었다.
뾰족한 가시에 난도질을 당한 손바닥의 고통 따위는 생각지 않고 그저 제가 깨달은 상실감을 내세웠다.
“그만!”
저의 잘못이라고 꾸짖는 그 목소리가 원망스러워 은재는 발길을 틀었다. 양팔을 붙잡아 저를 옭아맨 이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주지 마셨어야 합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는 듯 거친 숨소리를 들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어 비웃음이 입 밖으로 삐져나올 것 같았다.
은재는 죄 없는 꽃에 미안했고, 이런 수모를 겪게 만든 이가 원망스럽고 억울하기만 했다.
“어째서 매번 주고 다시 앗아 가시는 것입니까?! 어째서요!”
강은 붉어진 눈시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또 나의 과오구나.
“가져가십시오. 단 한 뿌리도 남겨 두지 말고 모두 거둬 가십시오.”
제 손을 뿌리치고 저에게서 멀어져 가는 이를 쫓아가지도 못한 강은 그곳에 서서 생각했다. 이제 어찌하면 좋을까.
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았다. 그곳에 흩어진 묘목을 보았다. 모두가 황망해하는 그곳에서 강은 생각하지 않고 발길을 틀었다.
“따듯한 물과 면포를 준비해라.”
그리고 뒤늦게 도망치듯 그곳에서 사라진 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상선 영감….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임금의 명을 받고 내시들을 이끌고 월정당으로 온 내시가 물었다. 상선은 임금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묘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다시 심게. 일이 번거롭게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이곳이 꽃망울을 피울 곳인데.”
바로 전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 안이었다. 울분을 토해 내던 순간이 어쩌다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은재는 제가 보았던 것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늘 저에게 와닿았던 눈빛에 깃든 온정을 어찌 못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찌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것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소리도 없이 열린 장지문으로 붉은 용포를 입은 강이 들어왔다. 은재는 애써 그곳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보료에 앉아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듯 시침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저의 앞으로 다가온 이가 서안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는 순간, 손바닥이 아릿했다. 따갑고 쓰렸다. 뜨거운 열기가 퍼져 살갗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 찰나에도 은재는 생각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저를 이곳에 가둬 놓은 이였고, 협박과 겁박으로 족쇄를 채웠던 이였다. 그런 이를 더는 사랑하지 않았고, 그러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됐다.
“놓으십시오.”
은재는 강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애초에 이길 수 없는 덩치였다. 시선을 맞추지 않는 것으로 회피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눈길이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역시나 무모합니다.”
그 말이 정곡을 콕, 하고 찔렀다. 무시하기로 했으니, 반박 또한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은재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인 채 피딱지가 천천히 굳어 가고 있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 상처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실은 강의 목소리가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눈물이 핑 돌았으면서, 은재는 괜히 상처 탓을 하며 틈을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에 의미 부여를 했다.
부득불 강은 은재의 손목을 붙잡고 상처를 확인했다. 날카로운 것에 긁힌 살갗이 빨갰다. 송골송골 맺히다 번져 버린 붉은 피를 보며 자연스럽게 입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나의 과오이자, 나의 죄다.
“미안합니다.”
인정하니 말이 술술 잘 나왔다.
강은 피딱지가 천천히 굳어 가고 있는 상처에 감히 손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잊지 말아야 한다. 제가 이 여린 이에게 만든 상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장지문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강은 장지문을 여는 소리에도 은재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놋쇠 대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온 남이는 그것을 임금의 곁에 두고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은재는 남이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라, 저 꽃에 정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손목을 붙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대야 안에서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면포가 머금었던 물이 다시 대야로 쏟아졌다.
뜨뜻미지근한 면포가 상처에 닿자, 손바닥에서 시작한 통증이 머리를 찡하게 했다. 제가 만들어 놓은 상처가 아파 결국 은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상처의 통증은 점점 더 절절해졌다. 절대로 울지 말아야지.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뿌연 눈앞을 해명할 길이 없었다.
바보처럼 뚝뚝 흘리지나 말자. 그리 생각하며 은재는 앙다문 입술을 바르르 떨어 댔다.
더는 말하지 않는 강에게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언제 또다시 돌아서 버릴지 모르는 이였다.
“어의를 들라 할 터이니, 다친 손으로 아무것도 만지지 마십시오.”
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섭섭하지 않다면서도 은재는 강이 그대로 떠나 버릴까 싶어 눈으로 강을 쫓았다. 장지문 앞에 선 강이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 버릴까 노심초사하며 바라보았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보았다.
남이에게 그랬듯 가지 말라는 말 역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눈치 없이 장지문이 열렸다. 강은 열린 문으로 보이는 바깥을 보며 생각했다.
바로 나가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이를 이대로 두고 가면 저를 원망할 걸 알면서도 어찌 나가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일까.
“줄기에 난 가시가 고약한 걸 몸소 알았으니, 꼭 눈으로만 보십시오.”
눈길이 닿으면 숨어 버리는 작은 짐승처럼, 위로 치솟았던 은재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강은 그런 은재를 바라보다 발길을 틀었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도록 눈이 부셨던 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생기를 잃은 은재의 모습을 지금까지 지켜보았으면서도 새삼스러웠다. 후회가 휘몰아치는 가슴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후회는 심장을 꽉 조였고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았으며 팔과 다리를 잘라 버리고 싶을 만큼 저릿하게 했다.
강은 주저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벅차오르는 숨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긴 행렬을 이끌고 월정당에서, 후원에서 빠져나갔다.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의 슬픔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삶에 미련만 생길 뿐이었다.
* * *
왕실에서 사용하는 고급 한지에 글씨를 써 내려가던 것을 끝맺음한 대비가 벼루 위에 붓을 내려놓았다. 먹물이 마르지 않은 탓에 쉬이 들지 못하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 물기가 가셨을 즘, 종이를 접고 접어 곁을 지키는 상궁에게 내밀었다.
상궁은 그것을 받아 들고 색을 물들여 만든 봉투에 서찰을 넣었다. 입구에 풀칠해 누가 보지 못하게 봉한 뒤 상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체 없이 전해야 한다.”
“예, 대비마마.”
상궁은 봉한 서찰을 소매에 넣어 숨겼다. 그리고 대비에게 예를 갖춘 뒤 뒷걸음질을 쳐 방에서 빠져나갔다.
어둠을 틈타 인적이 드문 곳에 당도한 상궁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배가 비슷한 수라간 상궁에게 서찰을 넘겼다. 수라간 상궁은 그것을 품에 숨겨 바쁘게 어디론가 향했다.
얼마 후 만난 아기나인에게 무어라 속삭이던 수라간 상궁이 품속에 감췄던 서찰을 꺼내 손수 아기나인의 저고리 속에 서찰을 숨겨 주었다.
“어서 가 보거라.”
“예! 염려 마십시오.”
잘 다녀오라는 듯 엉덩이를 톡톡 때려 주고는 아기나인을 배웅하던 수라간 상궁은 주변을 두루 둘러본 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아기나인은 세답방 나인을 통해, 세답방 나인은 궁궐 안의 문을 지키는 내시에게 서찰을 내밀었다. 그게 서찰의 마지막 여정인 줄 알았지만, 수문 내시는 서찰을 소매 속에 넣고 궁인이 출입하는 문으로 향했다.
이미 말을 맞춰 둔 것인지 수문군은 야심한 시간에 바깥으로 나가려는 내시를 막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출입패를 대충 확인한 수문군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 주자, 그제야 내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쁘게 움직였다. 간혹 뒤를 쫓는 이가 없는지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고 서둘러 갈 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의 행적이 퍽 의심스러울 만도 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이 울리지 않은 시간, 늦지 않게 도성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 앞에 모인 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내시는 그들과 달리 곧장 도성의 문을 지키는 수문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성 밖으로 무사히 나간 그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땅에 뿌리를 무사히 내린 것인지 월계화의 꽃봉오리가 눈에 띄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은재는 방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처음에 그 사달이 있고 난 뒤 월계화를 아예 쳐다도 보지 않으면 어쩌나 하던 남이와 송리의 걱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대청에 앉아 화단을 지켜보는 게 은재의 주요 일과였다.
은재가 사용하는 방의 창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개회나무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으니, 화단에 심긴 월계화가 은재에게는 얼마나 애틋한 존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태여 꽃이 피길 기다리는지 묻지 않고 은재의 곁을 지키던 남이는 살짝 불그스레한 은재의 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보는 것이냐.”
시선을 느낀 은재가 물었다. 그러자 남이의 눈이 더욱더 가늘어졌다.
“곧 그날이 올 것 같습니다.”
그날이라는 말에 은재의 얼굴이 시무룩해진다. 잠잠히 듣고 있던 송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두 사람의 시선이 송리에게 꽂혔다.
“너는 무얼 하려고 일어나니?”
남이가 심통을 부리며 말했다.
“독에 물을 채워 둬야지.”
은재가 성주기를 앓을 때면 월정당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야 했다. 은재도 그렇고, 남이와 송리도 월정당 대문을 넘는 걸 자제하곤 했다.
대문은 빗장을 걸어 열지 못하게 했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창문을 봉한 뒤 밤이 되면 문고리에 사슬을 걸어 잠갔다. 모두 성주기로 이성을 잃고 체면과 위신을 깎아먹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더군다나 은재는 궁인도, 비빈도 아니었으니 승은을 얻는 일이 없어 문을 꽁꽁 걸어 잠가야 했다.
“도련님! 저는 가서 땔감을 주워 오겠습니다.”
송리가 물지게를 이고 밖으로 향하자, 남이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 몸집만 한 지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대문을 나섰다.
은재는 괜스레 머쓱해 가만히 있는 월계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나마 저는 기거하는 전각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단체 생활을 하는 궁인들의 사정은 달랐다.
성주기를 앓는 궁인들을 모아 외진 곳에 격리하는 게 당연했고, 음인이 많은 궁궐에서는 제대로 방비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지거나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몸을 감출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은재는 제 처지를 납득하려고 했다.
물동이에 물을 가득 길어온 송리가 비틀거리며 대문을 넘었다. 은재가 돕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송리는 기겁을 하며 물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혹 시키실 일이나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바깥에 나가 구해 오겠습니다.”
은재는 땀을 뻘뻘 흘리는 송리의 곁으로 다가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송리는 활짝 웃으며 은재에 내민 손수건을 마다하지 않았다.
“드시고 싶은 것이든지, 읽고 싶은 서책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되었다. 그러지 말고 잠깐 쉬다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송리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물동이를 부엌간으로 가져가 큰 항아리에 물을 쏟고는 다른 물동이를 들어 올려 항아리를 채웠다.
“소인이 할 일이라 버겁지 않습니다. 염려치 마십시오.”
아직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송리는 다시 물지게를 어깨에 지고 대문간으로 향했다.
송리가 대문으로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나뭇가지로 가득 찬 지게를 짊어진 남이가 월정당 마당으로 들어왔다.
역시나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은재가 남이에게로 다가갔다.
“도련님께서는 그냥 앉아 계십시오. 도와주신다고 팔을 걷고 나서셔도 소인이 할 일을 더 만들지 않으십니까?”
“나뭇가지를 내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소인을 도와준다고 나서셨다가 소인이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는데요?”
억척스러운 손길로 지게에 싣고 온 나뭇가지를 내리는 모습에 은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이의 만류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시 대청마루로 오게 된 은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든 내 마음 같지 않구나.
성주기를 앓는 밤이 되면 여전히 무섭고 두려웠다. 공포에 질려 달달 떨리는 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긴장한 티가 제법 적나라했다.
때마침 일을 끝낸 남이가 은재의 곁으로 다가왔다. 먼지를 닦아 내 축축하게 젖은 손이 마른 살갗을 덮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별일 없을 것입니다.”
그 위로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은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눈길이 월계화로 향했다.
“송리가 돌아오면 후원으로 산책을 하러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신이 난 듯한 남이의 목소리에 은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으면 사나흘, 길면 일주일을 훌쩍 넘기는 성주기가 무에 무서울까. 지금껏 그래 왔듯 물 흐르듯 지나갈 것이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후원으로 나왔지만, 남이와 송리는 꽃이 만개한 왕벚나무 아래를 지나면서도 은재의 눈치를 보는 것에만 급급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꽃비가 내리는데 은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걸음 한 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만 걸어갔다.
“도련님! 이것 좀 보셔요!”
남이가 흩날리는 꽃잎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은재의 고개도 위로 솟구쳤다.
“꽃이… 떨어지는구나….”
감흥이 없다고 하기에는 얼굴에 너무나도 정확하게 떠오른 감정 탓에 남이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저리 울상을 지으실까. 꽃잎이 떨어지면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맺히면 새들이 배를 불릴 것이었다. 뭐, 후원에서 작은 짐승을 본 적은 없다만 배고픈 짐승에게 어찌 먹이가 되지 않을까.
남이는 은재의 기쁨을 끄집어내는 걸 결국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성질을 낼 법도 했지만 고생했다며 어깨를 토닥이는 송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건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할 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후원의 끝과 끝을 걸으면 한 시진은 족히 걸릴 것이었다. 어디로든 발이 닿겠지 싶어 걸음을 내디뎠다.
잔잔한 연못에 톡, 하고 떨어진 물방울 하나로 파동이 일듯 찰나의 순간, 숨통으로 들어찬 향이 머릿속에 가득 찬 잡념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그전까지 저에게 닥쳐 올 성주기를 걱정하는 데 연연하던 은재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사방이 소나무로 둘러싸인 곳에서 풍기는 솔 내음이 무어라고 은재는 그 냄새의 진위를 기어코 알아내기 위해 걸었다.
흡사 허기와 본능으로 먹잇감을 쫓는 짐승의 움직임과도 같았다. 오롯이 꽂힌 것에 몰두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향을 쫓아 움직였다.
뒤를 따르던 남이와 송리가 놀라 따라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제가 무엇을 쫓고 있는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채 은재는 강과 마주쳤다.
긴 행렬이 뒤로 이어진, 수많은 사람이 자리한 곳에서 감추려고 애를 쓰던 본능이 왈칵하고 터질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으읏….”
강을 에워싸고 있는, 강이 뿜어내고 있는 외격소가 저를 향해 달려오자 은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폭이 넓지 않은 소매에 코와 입을 묻고 마치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듯 혐오하는 눈빛으로 강을 보았다.
결코 생소하지 않은 기시감이 꾸물꾸물 머릿속을 기어 다녔다. 그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뒷걸음질을 쳐 봤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았던 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자유로이 툭 떨어져 있던 손을 낚아챘다.
“놓아… 놓아주십시오….”
강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염이 불타오르는 눈을 본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무엇을 예기하는 것인지.
은재는 당장 그곳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붙잡힌 손을 뿌리쳐야 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아래로 주저앉을 것 같아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버티고 섰다.
“이제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겠습니까?”
건조한 말투, 성이 난 목소리가 귓구멍으로 쳐들어오자 다리에 주었던 힘이 맥없이 풀렸다.
“제발….”
은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이곳에서 도망가게 놓아 달라고. 눈빛은 무서워서 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속삭였다.
“나는 그대의 마음이 어땠는지 알 것 같습니다.”
강은 다른 손으로 은재의 뺨을 톡, 하고 건드렸다.
“기분이 참 더러운 것을 보아하니, 꽤 치욕스러웠겠습니다.”
다시 한번 힘을 내 저의 손목을 붙잡은 강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되레 우악스러운 손길이 맥없이 아래로 흘러내리려는 은재의 몸뚱이를 확, 잡아당겼다.
은재는 자신의 몸을 옭아맨 강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퍽퍽, 쳤지만, 임금의 옥체에 해를 가하는 행위에도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강을 밀쳐 내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저를 도와줄 이를 찾기 위해 눈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모두가 발길을 틀어 눈을 감추고 있었다.
“…놓아주십시오.”
“싫습니다.”
은재는 똑똑히 보았다. 욕망으로 물든 강의 눈을 보았다. 전신에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 눈빛이었다. 괴물….
“월정당으로 갈 것이다.”
그가 내뱉은 그 목소리가 무서웠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지나고, 해가 몇 번이고 뜨고 지길 반복할 앞날에 무엇이 저를 덮쳐 버릴지 몰라 두려웠다.
강의 손에 이끌려 월정당으로 가던 중 안간힘을 쓰고 버티던 다리에 결국 힘이 풀려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강은 넘어진 은재를 보면서도 동요하지 않고 몸을 낮췄다.
“괜찮습니까.”
조금 전과 다르게 눈빛이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게다가 큼지막한 손이 다가오더니 뜨끈뜨끈해진 뺨을 덮었다.
“도승지가 내게 와 읍소했습니다.”
강이 세준을 꺼내 들자 은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우를 살려 달라 하더이다. 이 궁궐에서 그대의 목숨으로 저울질하는 이가 없는데도… 내게 그리 말하더이다.”
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어떻게 해야 그대를 살릴 수 있는지 고심하다 보니, 합환을 이루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세준은 이미 두 사람의 인연을 포기한 채였다. 월정당이 아닌 강을 염려한 상선과 부경만이 월정당을 찾아가라고 했었다. 그 두 사람 말고 누구도 강에게 월정당과 합환하라, 간언하지 않았었다.
“형제가 애걸복걸해서 만든 기회를 놓치시렵니까?”
자의로 인한 것이 아니다. 본능에 쫓겨 가는 손목을 붙잡은 게 아니다. 성주기에 근접한 음인이 곁에 있는데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양인이 어디 있겠는가. 때마침 일이 이리됐으니, 타의로 월정당으로 향하는 것이다.
강은 그리 생각했다.
“일어나십시오.”
자괴감이 찾아온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타의로 인한 것이라는 거짓을 내뱉었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처럼 싫다는 이를 끌어당겨 욕구를 채우려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싫습니다.”
은재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참 우습게도 그 말이 성미를 툭, 하고 건드렸다.
“이곳에서 그대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까?”
강은 보았다. 실의에 빠진 눈동자에 깃든 것은 실망감은 물론이요, 원망도 함께였다. 아래로 푹 꺼져 버린 눈길을 좇으면 가슴이 아팠다. 그 말을 꺼내면 체념한 이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제가 곁에 있으니, 저의 향이 허공으로 퍼져나가 숨통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으니, 곧 반응이 올 것이었다.
“싫어도 참으십시오.”
강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은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방으로 들어와 은재를 반듯하게 깔려 있는 이불에 내려놓았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 옷고름으로 다가오자, 은재는 두 손으로 제 옷을 부여잡았다.
강은 멀뚱히 은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제가 입은 용포의 매듭단추를 풀었다. 옷고름을 풀었고, 귀해서 어쩌지 못하는 붉은 옷을 바닥에 훌렁 집어 던졌다. 속곳 저고리까지 바닥에 나뒹굴자 방 안에 체향이 더 강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꼿꼿하게 앉아 있던 은재가 바닥으로 풀썩 엎어졌다. 깔려 있는 이불을 끌어모아 얼굴을 처박고 강의 체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 향을 계속해서 맡는다면 원하게 될 것이었다. 알고 있으니 피하는 게 마땅했다.
은재는 뇌리에 깊숙이 박힌 그 향을 갈망해 고통에 몸부림쳤던 나날을 떠올렸다. 추하고 저급했던 저의 모습을 기억했다.
욕망에 미쳐 제 손으로 제 성기를 쥐고 수음하였음에도 욕정이 해갈되지 않았다. 제 영혼을 갉아먹게 했던 그 추악한 본능을 강에게 꺼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발… 돌아가십시오….”
강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물러나지 않았다. 은재의 양어깨를 부여잡고 바르게 눕혔다.
등이 단단한 바닥에 닿기 무섭게 은재는 모로 누워 아기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싫습니다….”
목소리에는 선명한 울음이 섞여 있었다. 끝까지 이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얼굴. 눈에서는 분명 눈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었다.
강은 주저했다.
원하는 대로 돌아갈 것인가. 살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강제로라도 합환을 이룰 것인가.
몇 해를 참았던 게 욕정이었으니, 피하고 참을 수 있었다. 이겨 낼 수 있었는데도 강은 돌아갈 수 없었다.
생기가 돌지 않는 얼굴을 보았었다. 삐쩍 마른 거지보다도 더 마른 몸집으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몸뚱이를 보았었다.
그것을 보고 마음이 아스러지는 게 무엇인지 느꼈다. 그렇기에 은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원치 않아도 은재를 품에 안아야 했다.
“안 됩니다.”
힘으로 제압하려면 충분히 가능했다. 살살 구슬려 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강은 이불에 파묻혀 있는 얼굴을 제게로 돌렸다. 질끈 감은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릿한 가슴은 나 몰라라 하고 바들바들 떠는 이의 옷고름을 잡아 풀었다.
“싫습니다!”
은재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바닥으로 나뒹구는 자존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으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작게나마 남아 있는 미련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나 더 원망해야 할까. 나름 미워한다고 생각해도 형체를 알 수 없도록 작아진 미련이 난동을 부렸다.
강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강을 제게서 지워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 마십시오!”
팔을 버둥거리며 강의 몸을 밀쳐 냈다. 난리를 피울수록 짙은 체향이 쏟아졌다. 바닥에 누워 저에게 쏟아지는 것에 맞섰지만, 이겨 낼 리가 없었다.
강은 한 손으로 은재의 두 손을 결박했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목선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살집이 없는 살가죽을 깨물고 핥았다. 쪽쪽거리며 빨아 대자, 근처에서 깊은 숨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지를 벗기고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힘이 잔뜩 들어간 다리를 벌렸다. 강은 은재의 손목을 놓고 허벅지를 잡았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은 음문 속으로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다.
“으윽!”
은재는 저절로 움찔거리는 몸뚱이를 느끼며 상체를 비틀어 강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 강은 그런 은재를 기꺼이 제 곁으로 잡아당겼다.
고작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은 것인데 구멍 속을 가득 채운 액이 손가락을 타고 뿌리로 질질 흘러내렸다. 강은 과격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아! 으읏!”
몸에 퍼진 열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꽉 막혀 있던 혈맥이 터진 듯 심장이 요동쳤다. 잊은 줄 알았던 감각이 깨어나면서 애가 닳기 시작했다.
자신을 잃을 것 같았던 두려움은 어느 순간 안개처럼 사라져 본능을 쫓게 했다. 은재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거부한 적 없었다는 듯 강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강의 허벅지에 앉아 생기를 잃은 눈으로 강의 눈을 바라본 은재는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거친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당황해서 단단하게 굳어 버린 입술 틈을 파고들어 그 안에 숨어 있던 뜨거운 살덩이를 빨아들였다. 곧 엇갈리게 움직이던 살덩이가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합을 맞췄다.
은재는 턱에 닿았던 손으로 목을 쓸어내리며 강을 끌어안았다. 근육으로 잘 다져진 살갗을 어루만지며 손끝에 그 감각을 깊게 새겼다.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 그리운 체향에 결국 정복당한 은재는 체념을 머금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읏….”
탐욕으로 시작된 행위였으니 장단을 맞추듯 은재는 아래를 휘젓는 손길을 받아들였다.
강은 풀어진 구멍으로 제 성기를 들이밀었다. 푼다고 풀었지만 선단이 걸려 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빠듯했다.
“으읏!”
강이 합환 증표가 새겨진 은재의 허벅지를 짓눌렀다. 녹진하게 젖은 구멍이 빠끔하며 버거운 성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흐, 으읍….”
성기의 뿌리까지 안으로 빨려 들어간 뒤 강은 은재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죽는 한이 있어도 은재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은재를 제 곁에서 보낼 수 없었다.
그래, 차라리 같이 죽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아아… 앗! 너무… 하읏!”
통통함을 잃지 않은 볼기를 붙잡고 몸을 위로 들었다. 진액으로 범벅이 된 살 기둥에 바깥 공기가 닿자 열기가 사라졌다. 강은 몸을 받쳐 들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곧추선 성기가 다시 안으로 스르륵 밀려 들어갔다. 그 속의 매끄러운 감촉이 살 기둥을 에워싸자, 강은 은재의 볼기를 부여잡고 거칠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 아앗! 아으흣!”
빳빳하게 세웠던 목의 힘이 빠진 은재는 강의 널찍한 어깨에 이마를 댔다.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퉁퉁 부을 때까지 수음했던 성기를 붙잡고 흔들었다. 구실도 하지 못하는 씨물을 뿜어낼 것이었지만, 은재는 쉬지 않고 팔을 움직였다.
“싫은 것치고는 꽤 맛이 좋은 듯합니다.”
강이 허리를 튕겼다.
“으읏, 하앗!”
은재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젖혔다가 풀썩하고 다시 강의 어깨에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음양인이… 하아… 합환하는 것일 뿐입니다…. 특별할 게 없지요….”
퉁퉁 붓기 시작한 성기의 선단에서 맑은 액체가 후드득 튀어나와 강의 아랫배를 적셨다. 은재는 저릿한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 계속 얇은 살갗을 쥐고 흔들었다.
“하읏, 하아, 아흣!”
과격했다. 깊은 곳을 쿡쿡 찔러 대는 살덩어리가 저의 추악한 모습을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은재는 더운 숨결과 함께 더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강은 사정을 하기 직전 내벽을 긁으며 쾌락을 느끼던 성기를 바깥으로 빼냈다.
“하아….”
귀두의 끝에서 사출되는 정액이 은재의 회음을 적셨다. 강은 제 손으로 성기를 흔들었다. 절대로 안에 제 정액을 뿌릴 생각이 없었다.
“으읏….”
제 손을 움직여 정액을 쏟아 내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채워지지 않은 갈망의 깊이는 수렁과도 같았고, 지금 이 한 번의 행위로 욕구는 해갈되지 않을 것이었다.
강은 은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재 역시도 강을 응시했다. 그러다 은재가 위로 튀어 오르더니 두 팔로 안기 힘든 강의 몸뚱이를 다시 끌어안았다.
땀이 배어나기 시작한 어깨에 뺨을 문댔다. 그러나 제 정욕을 말로 내뱉을 수 없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은재는 결국 강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매정하게 강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돌아… 가십시오….”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사라졌다.
“돌아가다니요. 내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욕구가 남았으니, 그것을 마저 해소하고 가야겠습니다.”
강은 저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은재의 얼굴에 드러난 경멸을 보며 공기가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 짧은 찰나를 기회로 삼아 은재는 강에게서 벗어나려 풀쩍 강의 허벅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꽁무니가 길어서 강에게 붙잡히게 된 은재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 *
임금이 이틀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정무를 소홀히 보았으니, 대신들은 잠적한 임금을 찾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임금의 소재를 알고 있는 궁인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잡고 길어지고 있었다.
“월정당에 계시다지?”
“그렇다면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이 중궁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인가?”
“아이고, 우리 마마님…. 불쌍해서 어찌할꼬.”
월정당 마당으로도 들어오지 말라는 명이 떨어졌다. 임금의 가장 가까운 곳을 호위해야 하는 무관 또한 그 안으로 들지 못하고 대문을 지켰으며, 오직 상선만이 월정당으로 들어 임금의 수발을 들었다.
밥때가 되면 분합문이 걷히지 않은 대청마루에 거나하게 차린 수랏상을 놓은 나인들이 기미도 없이 물러나곤 했다.
씻는 것도 은밀하게 밤중에 이뤄졌다. 임금과 월정당 귀인이 어둠으로 둘러싸인 바깥으로 나와 욕간으로 향하면 상선이 방 안으로 들어 이불을 새것으로 갈고 후다닥 도망치듯 물러났다.
지금도 상선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거렸지만, 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두 사람은 상선의 마음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으읏!”
은재는 무너져 내리는 몸뚱이를 손바닥으로 지탱하고 바닥에 닿은 무릎에 힘을 주었다. 쉴 틈 없이 몰아세우는 탓에 진이 빠져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강은 추삽질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하으읏….”
하도 신음을 내질러 목구멍을 긁고 나오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럴 때면 강은 제 입에 물을 머금고 은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미적지근한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한결 나았지만, 잠시뿐이었다.
그 며칠 동안 몸을 섞으면서 강은 단 한 번도 은재의 몸속에 제 추악한 씨를 뿌리지 않았다. 피차 괴로울 일을 반복하는 것은 할 짓이 못 됐다.
더군다나 상왕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으니, 강은 누구에게도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볼기짝에 힘을 줘야지요. 이리 헐렁해져서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하긴, 요 며칠간 몸을 섞었으니 풀어질 대로 풀어졌겠지요.”
강은 제 손으로 은재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미끄덩거리는 제 정액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금도 몇 번이나 바깥에 쏟아 낸 정액으로 은재의 엉덩이가 번들거렸다. 뭉글뭉글한 정액이 이부자리를 더럽히고 살갗에 번졌음에도 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은재의 몸뚱이에 제 정액을 흩뿌렸다.
“으읏!”
퍽! 퍽! 살갗을 쳐 대는 소리가 다시 방 안에 울렸다.
“제… 제발…. 그만….”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은재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자 강은 은재에게로 팔을 뻗었다. 가슴팍에 손을 대고 은재를 저에게로 끌어당겼다.
상체가 세워지면서 바로 앞에 있는 경대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군데군데 붉은 자국이 낭자한 허연 몸뚱이를 보며 은재는 식겁했다. 눈살을 찌푸리기 무섭게 성기가 깊숙한 곳으로 쳐들어왔다.
“하읏!”
뒤로 밀려난 성기가 다시 자극점을 쿡 찔렀다. 그 순간 성기의 선단이 깊은 속 어딘가에 툭, 하고 걸렸다. 살 기둥은 좁은 내벽 속에서 점차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은재는 서둘러 강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가까스로 손바닥이 바닥에 닿았다. 엉금엉금 기어 도망가려고 했지만, 더운 손이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 아읏! 아, 아악!”
아래로 떨어지는 몸뚱이를 따라 은재의 아랫배가 이불에 닿았다. 버둥거릴수록 아랫배에서 이물감이 극심하게 느껴졌다. 배를 뚫고 나올 것 같은 기세에 은재는 아랫배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허벅지에 힘을 주고 버텼다.
“제발…. 제발…. 아, 안 됩니다!”
왈칵하고 눈물이 터져 나와 울며 애원했다. 잊히지 않았던 그날의 고통이 아랫배를 타고 몸뚱이를 유유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기꺼이 제 목숨을 내어 놓고 배 속에서 자라던 아이를 지킬 터였다.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기억이 은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싫습니다!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강에게 빌었다. 등 너머의 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듯 거친 숨이 은재의 귓가에 맴돌았지만, 은재는 그 숨결을 듣지 않았다.
“아흣! 아, 아흐윽!”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절정의 정점을 찍는 만고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그간 잘 버텼던 정신이 사르르하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절대로 만고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강의 바람과는 달리 정욕에 이끌려 움직인 대가가 만고였다. 강은 제 아랫입술을 으득, 소리 나게 깨물었다.
“흐, 으읏….”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은재의 눈이 점점 감겼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뚱이가 자꾸만 바닥으로 쏠렸다.
괜찮습니다. 괜찮을 것입니다.
아득해지는 목소리가 거친 숨결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바닥으로 고꾸라진 은재는 그 말을 미처 다 듣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휘말려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저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은 강이었다.
세준은 강이 저를 멀리하는 이유가 은재를 궁궐에서 내보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은재가 중궁전을 차지할 것이라는 소문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강의 위용을 두려워하던 조정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굴러가고 있었다. 세준은 이 변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강을 찾아가야 했다.
강이 궁궐에서 잠적한 지 사흘이 되던 날, 세준은 기어코 강을 찾아냈다.
편전에서 시답지 않은 두루마리를 펼쳐 보는 강을 마주한 순간, 세준은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풍문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사라질 말이 사실이었나.
생기가 돌고 있는 강의 얼굴을 보았다. 놀라서 무례인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강과 눈을 맞췄다.
“할 말이 무엇인가.”
근엄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깔렸다. 두루마리를 상선에게 건넨 강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 보겠다는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세준은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소, 소신이… 전하를 찾아뵌 것은….”
세준은 무엇을 물어보려고 이곳에 왔는지 생각했다. 은재를 어찌할 것인지를 물어보려고 했던가. 아니면 저를 등한시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려고 했던가.
혼란스러웠다. 강의 변덕이 이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준은 강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도대체 무엇을 꾀하고 계시는 것인가.
“궐 안팎으로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사옵니다.”
세준이 그 속을 꿰뚫어 보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강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중지하신 경연과 조회를 다시 여시어 흐트러진 백관의 충심과 민심을 바로잡으셔야 하옵니다.”
강은 피식거렸다.
“벌어질 일은 어찌해도 벌어지게 되어 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일단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준의 기대와는 다르게 강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세준은 강의 미래가 염려스러웠다.
“무엇을 꾀하시는 것입니까? 소신이 전하를 도울 수 있도록 생각하고 계신 것을 말씀해 주시옵소서.”
강은 세준을 지그시 바라본다.
“상선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
집무실 안에 자리하고 있던 내관들이 강의 명을 받고 바깥으로 향했다. 강은 조용한 그곳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겸사복장.”
강의 부름으로 어둠 속에서 숨어 있던 부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경은 강의 앞에 부복했다.
“겸사복장, 부경. 하명하시옵소서.”
강의 눈길은 어중간한 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내가 꾀하는 것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강이 돌연 세준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환국이다.”
환국을 꾀한다는 것은 조정의 대신들을 내치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를 보살피겠다는 뜻이었다.
세준의 눈이 커졌다. 곁을 지키던 상선 역시 몰랐다는 듯 놀란 눈치였다. 부경만 동요하지 않았다.
“하나 나는 그것을 내 손으로 이룰 생각이 없다.”
“전하….”
“조정의 썩어 빠진 더러운 피는 상왕이 거둘 것이다.”
세준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강에게 옥좌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왕이 강의 정치에 개입할 리가 없었다.
“궁궐을 유영하고 있는 흐름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씩 내게서 등을 돌리는 대신들을 보았을 것이다.”
임금이라는 자가 제대로 나라를 돌보지 않으니, 고관대작이라는 자들이 궁궐 밖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것은 백성이었다. 상왕이 아끼다 못해 쩔쩔매던 백성들이 중간에 껴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상왕은 과연 현 상황을 두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강은 상왕의 개입을 기다렸다.
“상왕의 후궁, 귀인 민 씨와 민명탁 그리고 경원군. 이 세 사람을 주축으로 능경파가 모였다. 그들은 김윤덕의 복귀를 추진할 것이며 김윤덕을 내세워 경원군을 어좌에 앉힐 것이다.”
“전하!”
세준이 소리쳤다. 강은 귀가 따갑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세준을 보았다.
“놀라지 마라. 그들 역시 단시간에 머리를 짜내 계획한 것이 아닐 터.”
강의 시선이 부경에게로 움직였다. 강은 미동 않는 부경을 보며 혀를 찼다.
“너는 놀란 척이라도 해야 할 듯한데….”
“전하를 능멸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범랑을 조롱하려 드는 역적 죄인들을 바로 처단하셔야 하옵니다!”
분개하는 세준이 퍽 귀찮았는지 강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나의 의도이다.”
“예…?”
“내가 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준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얼굴로 강을 보았다. 강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들의 역모가 성공한다면 전하의 안위가 위험해지십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세준 대신 부경이 나서서 말했다. 강은 그저 웃음을 끄집어낼 뿐이었다. 짧은 침묵이 감돌고 난 뒤 강은 얼굴에 웃음기를 지웠다.
“내가 삶에 미련이 있었던가?”
강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상왕의 오판을 상왕이 직접 증명할 것이다. 당신이 이룩한 업적이, 당신이 믿었던 충신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인간들인지 상왕이 직접 보고 느끼게 할 것이다.”
낯빛이 질린 세준이 입술을 달달 떨며 말문을 열었다.
“마, 만일… 상왕 전하께옵서… 이 일에 관여하셨다면… 어찌하옵니까….”
“상왕이 나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라고 명했대도 상왕은 그들을 내칠 것이다.”
강은 자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강의 자신감을 의심했다.
“상왕은 성군이다. 아니, 성군이 되길 바라는 탐욕스러운 인간 중 하나지. 역사에 성군으로 남고 싶어 하는 상왕이 쌓았던 업적이 그러했다.”
말을 할수록 그들의 의심은 더욱더 깊어졌다. 강은 허탈한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위엄 있는 왕권에 도전한 역적 무리의 죄를 감추고 그들의 공을 높이 사실 것 같으냐? 아니면 역적 도당을 법률로 다스려 이 범랑의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은 성군으로 남길 바라실 것 같으냐?”
분명 상왕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세준은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이미 군권을 포섭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오군영을 돌보시옵소서.”
세준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굳어질 대로 굳어진 강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세준은 빌어야 했다.
후원 깊숙한 곳, 월정당에 있는 은재가 세준의 마음에 턱 하니 걸려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나를 믿고 군권 지휘를 위임받은 이들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이들이지. 하여 그들은 나를 위해 적의 편에 설 것이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세준이 벌떡 일어났다.
“하오면 어찌!”
세준의 분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어째서 은재를 찾아간 것이냐고 원망을 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강은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꺼내지 않았다.
“상왕에게는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눈엣가시인 나를 없애고 나라의 혼란을 다스린 성군이 되는 것인데, 어찌 군침이 나지 않을까.”
“안 됩니다….”
세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강은 세준의 근심을 보지 않았다.
“전하께옵서 반역 무리를 처단하셔야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나라의 군왕으로… 남으셔야 합니다.”
“나를 막아서려 하지 말게. 자네는 늘 그랬듯 자네 아우의 안위만을 생각하게.”
강은 세준에게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하….”
“자네의 아우가 어떤 부탁을 한다 해도 자네만큼은 아우의 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도울 생각일랑 하지 말고, 충신이 되려 하지 말고.”
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준 앞에 섰다.
“다른 이들처럼 자네와 아우만 생각하게.”
어깨를 토닥이는 강의 손길에 세준은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언제부터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저 혼자 앞날을 기약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앞날을 보았다면 어째서 걸음이 은재에게로 향했을까.
이 잔혹한 세상에 혼자 남게 될 은재는 어찌하라고.
세준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연민과 원망을 다스리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하오면 더는 은재에게 마음을 주지 마시옵소서.”
강의 웃음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다. 향하는 마음을 끊는 게 어지간히도 어렵더군.”
강은 그대로 일어나 편전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열린 문으로 바로 나가지 못하고 주저하던 강이 세준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게. 내 어떻게든 끊어 낼 것이니.”
* * *
부경이 쫓는 자는 대비전에서 나온 서찰을 마지막으로 받은 이였다. 도성 밖으로 나오는 그를 따라 숲길에 들어섰다.
‘대비전은 분명 상왕과 내통하고 있을 것이다.’
부경은 부모를 믿지 못하는 강이 안쓰러워 순순히 그 명에 따랐다.
대비의 서찰을 품은 이는 으슥한 산길이 익숙하다는 듯 서슴없이 산을 탔다. 부경은 주위를 경계하며 그이의 뒤를 쫓았다.
험준한 산길을 오르고 오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빛을 발견했다. 부경은 더는 그를 쫓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주위, 삼엄한 경계가 부경에게 향해 있었기에 부경은 어둠에 숨어 있는 이들에게 나설 수 없었다.
빛이 둥둥 떠 있는 곳이 상왕이 기거하는 절이라는 확증을 얻었으니, 제 몫을 하지 못했다고 쓴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상왕이 궁궐에 심어 놓은 첩자는 대비뿐만이 아니었다. 대비전 상궁에게 서찰을 받아 든 이들 모두가 궁궐의 동향을 상왕에게 알리고 있었다.
제가 알아낸 게 어찌 적다 할 수 있을까. 부경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 * *
화단의 월계화가 만개했을 즘이었다. 열어 둔 창 안으로 개회나무 꽃의 향이 무심코 흘러 들어왔다.
그깟 향이 뭐가 문제였을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은재는 손으로 이불을 꽉 쥐고 그 위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창을 닫았는데도 심하십니까?”
남이가 이불 위에 엎드려 있는 은재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눈으로 보이는 틈이란 틈은 다 막을 기세로 창틀에 한지를 덧붙이던 송리도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욱, 욱하며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남이가 벌떡 일어났다.
“어의를 모셔오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장지문을 열고 나갈 기세였던 남이는 저의 손을 붙잡은 은재 때문에 더는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 된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의를 데리고 오겠다며 팔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도련님….”
“꽃이… 꽃이 지면 괜찮아질 것이다.”
“꽃이 질 때까지 어찌 기다린답니까? 이러다 도련님 몸이 상하시면 어쩌려고요.”
남이는 울상이 짙은 얼굴로 은재를 보았다. 그러나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은재는 고개를 저어 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예…?”
건강을 함구하라는 은재의 말에 남이는 의아함을 느꼈다. 남이는 곧장 이불로 얼굴을 처박는 은재를 보며 이유를 물을 수가 없었다.
은재가 잠든 틈을 잡아 남이는 월정당에서 나왔다. 분주한 걸음에 관심을 두는 자가 없었기에, 남이는 환한 대낮인데도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희경당에 발이 닿은 남이는 그곳을 찾는 게 익숙하다는 듯 과감한 걸음으로 집무실 앞 장지문에 섰다.
곧 문이 열리자, 남이가 허리를 굽힌 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낮게 낮추면 상선이 운을 뗄 것이었다.
“고하여라.”
남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침에 기침하시고 입맛이 없으시다 하시어 조반상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도 자시고자 하시지 않아 미음을 올렸더니 반도 드시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은재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뢰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남이는 익숙하게 은재의 하루를 고했다.
“더 없느냐.”
상선이 물었다. 임금에게 아직 고하지 않은 것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남이는 결국 무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뗐다.
“월정당에 개회나무가 있사온데, 꽃이 만개한 이후 그 향을 맡으시면 속이 좋지 않다, 하시었습니다. 소인과 송 내관이 문틈을 한지로 막아 보았으나, 소용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얼핏 살기가 어린 눈이 저를 헐뜯고 있었음에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터라 남이는 그 시선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의를 모셔오려고 했으나, 귀인께서 당치 않다 하시니 소인이 나설 길이 없었습니다.”
임금의 언짢음을 본 상선은 임금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하오리까….”
강은 펼쳤던 서책을 소리 나게 덮고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바깥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남이는 임금과 상선이 바깥으로 나가기 전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곳에 엎드려 있었다.
“일어나게.”
곧 편전을 지키는 내관이 남이에게 말했다.
“전하께옵서… 어디로 가신 것입니까…?”
당황해하는 남이를 하찮게 보던 내관은 어서 집무실에서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임금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은재가 알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휘몰아친 남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임금이 향한 월정당으로 달려갔다.
문이 벌컥 열렸다.
힘 하나 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는 은재를 보자 강의 입술 사이에서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이 흘러나왔다. 비단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은 모습에 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월정당으로 들이닥친 저로 인하여 새파랗게 질린 은재의 얼굴을 보았다. 반응이 답을 말하고 있었다.
알고서도 숨겼다….
강은 은재에게 다가갔다.
“회임을 하고도 감추면…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까?”
차가운 목소리로 돋아난 소름은 그렇다 쳐도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이 강의 심기를 건든 모양이었다. 은재는 분노하는 강을 보았다. 짙은 눈썹이 우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처로운 꼴로 이불에 누워 있는 은재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곧장 방 밖으로 나와 월정당 마당에 선 임금은 거침없이 대문을 넘어 후원을 벗어나려고 했다. 임금의 뒤를 따르는 궁인들은 그 걸음이 중궁전인 서희전으로 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이 또다시 왕손을 잉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무섭게 김윤덕의 복권과 함께 김윤덕의 양자, 김은재를 중전으로 책봉하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은재의 임신은 강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게 어찌 저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궁궐에 비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더욱이 앞으로 왕실을 이어 나갈 왕손의 잉태였으니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울 만했다.
강은 대신들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 경연도, 조회도 마다하던 임금의 호출에 대신들은 한달음에 궁궐로 달려왔다.
대전 앞뜰 한가운데, 사람 서넛이 들어갈 정도로 큰 화로가 놓여 있었다. 순순히 그곳으로 모인 대신들은 임금이 대전 마당으로 들인 화로의 의미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들어 주는 것에도 이제 슬슬 한계가 온 듯하여 준비했소.”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옥좌에 앉아 있던 임금이 내관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들의 품에 안겨 있던 수많은 두루마리가 일제히 화로 속으로 던져졌다. 곧 시커먼 연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보았다. 불온하고 저급한 폭군의 억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경악했다.
“과인은 김윤덕을 다시 이 궁궐로 불러들일 생각이 없으니 괜한 고생들 마시오.”
대신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강은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절대로 내어 주지 않겠다는 의지는 강의 편에 선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이 궁궐에 임금을 위한 신하는 존재하지 않을 터.
강은 범랑의 가장 높은 곳에서 서서 미소를 지었다.
* * *
꽃 내음이 풍기지 않는 곳, 주인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서희전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미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 서희전 담을 넘어 은재에게로 달려들었다.
은재는 서희전에서 단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보다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압박감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보지 못했던 아이의 존재가 여전히 은재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모두가 은재의 부담을 부풀렸다.
“나는 싫다….”
요 위에 앉아 있던 은재가 중얼거렸다. 은재의 시중을 들던 남이와 송리는 눈을 끔벅거렸다.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은재는 남이와 송리를 보았다.
“혼자 있고 싶구나.”
“하오나….”
남이가 반박하려 들었으나, 은재는 남이의 말을 듣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남이와 송리는 은재를 휘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슬픔이었다. 은재는 기뻐할 일을 맞이해 놓고도 슬퍼하고 있었다.
게다가 처소를 서희전으로 옮긴 후 은재는 눈에 띄게 말라 가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남이와 송리는 알 수 있었다. 은재의 마음을 알기에, 은재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물러가 있을 터이니,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남이는 일어나지 못하고 은재의 곁을 지키는 송리에게 눈짓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송리는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계속 은재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지만, 은재는 두 사람에게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온전히 혼자가 된 은재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서글펐다. 잃어버린 아이가 있었기에 기뻐하는 것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참담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에는 배 속에 자리를 잡은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마, 혼자 계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서희전을 맡게 된 상궁이 장지문 밖에서 말했다. 은재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차라리 월정당에 있는 게 나았겠구나.
마음이 어찌나 복잡한지 잠들 수도, 그렇다고 그럴싸한 묘안을 찾아낼 수도 없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멍한 눈으로 벽을 바라보았다.
도망갈 수 있을까. 높은 궁궐 담을 넘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이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강에게서 멀어진 채 살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이 없었다.
궁궐 밖으로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세상 어느 곳으로 사라진다 해도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강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자신할 수 없었다.
“차라리 미워하는 게 나았구나….”
찡해 오는 코끝의 기운을 느끼며 은재는 마른 눈가를 비벼 댔다.
“으윽….”
짜르르, 아파 오는 배를 깨달았을 때 은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웅크렸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처참하게 끝날지 알았기에 은재는 두려웠다. 다시 찾아온 고통이 무서웠다.
“안 돼…. 안 돼….”
괜찮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속으로 되뇌며 제 몸을 타고 다니는 고통을 잊어 보려고 했지만, 참으려고 할수록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하고 터져 나왔다. 은재는 태가 나지 않는 배를 두 손으로 감싸고는 눈물을 흘렸다.
“제발 이러지 말아라….”
은재는 저를 덮치기 시작한 공포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 온몸을 달달 떨어 대면서도 실망한 강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그 얼굴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으윽, 아….”
넓게 편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으나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은재는 엎드려 몸을 웅크리고 깊은숨을 내뱉었다.
바깥에 있는 궁인들이 들을까 싶어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을 들어 벽과 창으로 막힌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넓은 궁궐, 그 어디에도 몸을 숨길 수 있는 곳 하나 없구나.
입술을 바르르 떨며 다시 아래로 무너지려던 찰나, 은재의 눈길에 방에 자리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병풍이 들어왔다.
오직 숨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은재는 엉금엉금 기어 병풍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늦은 밤, 서희전을 찾아온 강은 텅 빈 자리를 보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저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하는 상궁과 나인들이 바닥에 엎드려 임금의 분노에 절절맸다.
강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나간 흔적 하나 없는 곳에서 사라져 버린 은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허탈함이 분노로 바뀌는 순간, 강은 부경의 허리춤에 달린 검집으로 손을 뻗었다. 누구라도 하나 잡아 죽이면 알아서 나오지 않을까.
분노가 정신을 장악했기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전하.”
부경은 나직하게 강을 불러 세웠다. 강은 부경의 눈길이 닿아 있는 곳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돌렸다.
미처 감추지 못한 접복 자락이 흐트러져 있는 병풍으로 강은 서슴없이 걸어갔다. 일순간 찾아온 공포심에 강은 전신이 달달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만일 늦었다면 어쩐단 말인가.
강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병풍을 걷어 냈다. 달뜬 숨을 쉬며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은재가 눈물로 젖은 눈으로 강을 보았다. 강은 헛숨을 들이마셨다.
“어째서….”
버티고 서 있을 힘마저 모두 빼앗겨 버린 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못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은재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눈물을 흘렸다.
“잘못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은재를 바라보던 강의 눈에 허탈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옷에 스며 나온 붉은 자국에서 시선이 닿았으나, 강은 개의치 않았다.
곧바로 은재를 바라보았다. 긴장감에 경직된 손을 들어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차라리 내 탓을 하십시오.”
강은 참담한 마음을 어떻게 꺼내 보이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고 은재를 저에게로 끌어당겼다.
“잘못했습니다….”
은재는 강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기에 거리낌 없이 강을 끌어안았다.
“그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모두 나의 죄입니다. 그대를 지키지 못했으니, 나의 잘못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다는 듯 은재는 그리웠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의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은재는 말했다.
“제발 이 궁궐에서 나가게 해 주십시오….”
강은 은재가 저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웃었다. 턱 끝에 맺힌 저의 눈물을 보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울지 마십시오.”
그리고 은재를 꽉 끌어안았다. 저릿하다 못해 아스러질 것 같은 마음을 추스르고 은재에게 속삭였다.
“궁궐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합니다.”
은재는 제 귓가에 맴돌고 있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위안이 되었는지 희한하게도 요동치던 아랫배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 * *
잠에서 깬 은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인들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셨어요?”
아침마다 늘 곁을 지키던 남이는 언제 보아도 활짝 웃고 있었는데,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얼굴이 어둡기만 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은재의 물음에 남이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남이의 옆에 있는 송리를 보니 송리 또한 침울해 보였다.
“다시… 월정당으로 모시라는 명이 내려왔답니다….”
그러고 보니 나인들은 얼마 없는 세간을 옮기는 데 몰두할 뿐, 은재의 눈에 들기 위해 아첨을 부리지 않았다. 은재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그들에게서 눈길을 떼었다.
남이가 은재의 손을 꼭 그러잡으며 말했다.
“어의가 당분간 움직이지 말라 하였으니, 월정당으로 돌아가시면 몸을 보전하시는 것만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그마저도 관심이 없는 듯 은재의 눈길이 천장으로 향했다.
개회나무의 화려함은 사라졌고, 덩그러니 자리한 밑동만 그곳에 개회나무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렸다. 월정당으로 들어선 은재는 화단에 눈길을 주었다. 만개한 꽃이 매달린 줄기가 꼿꼿하게 서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월계화를 심드렁하게 바라보고는 송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향했다.
판판하게 잘 깔아 놓은 이불에 앉아 힘에 겨운 숨을 내쉬고 활짝 열린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월정당 둘레를 감싸고 있는 담벼락 위로 후원의 울창한 숲이 보였다.
애원해도 소용없구나.
어쩌면 서희전에서 곧장 궁궐 밖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마음을 졸였었다. 애석하게도 월정당으로 다시 돌아오자, 모두 괜한 짓이었다며 허탈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송리가 말했다.
“도련님, 누우시지요.”
은재는 물러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늦은 밤 한바탕 뒤집혔던 일로 은재의 곁을 떠날 수 없었던 송리는 조용히 일어나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궁궐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합니다.’
무슨 뜻이었을까. 은재는 어제 강이 저의 귓가에 속삭였던 말을 곱씹었다.
강해진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인가? 말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말속에 숨겨진 뜻을 헤아려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은재는 곧 창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대로 이불도 걷지 않은 채 모로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무엇을 꿈꾸었을까. 강이 저를 이끌고 이곳으로 왔을 때, 제가 강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을 때. 그때 분명 바람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었다.
그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제가 지금껏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예전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것일까. 그래 놓고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곁을 떠나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것일까.
또다시 머릿속에 혼란이 찾아들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은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이 들락 말락 할 즘이었다.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이와 송리가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는 감았던 눈을 뜨고 두 사람이 있는 곳을 보았다.
“깨셨어요?”
“잠들지 않았었다.”
남이는 우물쭈물하다 말문을 열었다.
“손님이 오셨는데… 어찌할까요…?”
그동안 월정당을 찾은 손님이라고는 세준뿐이었기에 손님이 왔다는 말이 얼떨떨했다. 저를 찾아온 이가 누구일까.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은재는 남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윽고 방 안으로 낯선 사내가 들어왔다.
“몸이 불편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워 계셔도 좋으니, 일어나지 마십시오.”
처음 보는 사내는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감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리둥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은재는 그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도련님…. 경원군 대감이십니다.”
가까운 곳으로 다가온 남이가 언질을 주었다. 경원군, 궁궐에 살면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어쩌면 들었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완전히 경계심을 풀지 못했으면서도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가 궁금해 물었다. 그러자 그가 은재의 곁을 지키는 남이와 송리에게 눈길을 주었다.
“긴밀한 이야기니, 나인과 내관을 물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남이는 그럴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은재를 보았다. 은재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남이와 송리를 보았지만, 이내 경원군의 뜻에 따르기로 한 듯 입을 열었다.
“잠시 나가 있거라.”
은재의 명에 남이와 송리는 난처한 듯 눈빛을 주고받았다. 작정하고 버틸 자신이 없었기에 둘은 조용히 물러났다.
“긴밀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장지문이 닫히기 무섭게 은재가 용건을 요구했다. 경원군은 그런 은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피식하고 웃었다.
같은 핏줄이라 그런지 은재는 경원군의 얼굴에서 강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배에서 태어났어도 핏줄을 감출 수는 없구나.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할 때였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으십니까.”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말에 은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손을 회임하셨다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왕손을 낳으실 겁니까?”
방향을 잃어버린 이에게 확신을 심어 주려는 듯 꽤 그럴싸한 물음이었다.
은재는 눈을 굴렸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섣불리 그러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가 가진 자신감에는 알 수 없는 어둠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바깥으로 나갈 기회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기회를 어찌….”
경원군은 다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은재의 눈에는 그 웃음이 마치 저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듯 계산적이고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저의 손을 잡으시면 됩니다.”
은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인께서 나서서 도승지를 회유해 주신다면 제가 귀인께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대가는 무엇입니까.”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계에 경원군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은재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도승지를 회유하는 것 말고 다른 대가가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귀인께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형님을 회유하여 무슨 일을 벌이실 것입니까.”
심장의 박동이 거세지고 사라졌던 고통이 다시 찾아와 아랫배를 콕콕, 찌르기 시작하자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은재는 달달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감추기 위해 두 손을 맞잡았다.
경원군의 눈길이 좀처럼 저에게 닿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그가 품고 있는 속내를 볼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은재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형님을 옥좌에서 몰아낼 것입니다.”
헛숨을 훅, 하고 들이마시자 뼈가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울화를 경원군에게 쏟아 낼까 싶어 은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뜻을 모았습니다. 도승지가, 귀인의 형님이 우리의 편에 서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또한 우리는 귀인의 부친을 다시 천양으로 불러들일 것입니다.”
눈앞에 처참한 광경이 드리웠다. 감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은재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은재는 치를 떨었다. 괴로워서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은 답을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곧 다시 찾아뵙도록 할 터이니, 그때 답을 주시면 됩니다.”
은재는 양팔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어 경원군을 보았다.
“만일… 제가 그 뜻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경원군은 웃음으로 유난히도 명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선택은 귀인의 몫입니다. 귀인의 부친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으니, 귀인을 적으로 둘 생각이 없습니다.”
은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듯한 모습으로, 절망을 앞둔 사람처럼 애처로운 눈빛으로 경원군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동조하지 않으신다고 하여도 귀인은 자유의 몸이 되실 겁니다.”
할 말이 다 끝났는지 경원군은 지체하지 않고 일어났다. 그가 문밖으로 나갈 때도 은재는 시선으로 그를 뒤쫓았다.
반역….
말로 할 수 없었고, 귀로 들어도 오금이 저릿했다. 그것을 실로 꾀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고, 그들의 표적이 강이라는 사실에 좌절감이 깃들었다.
은재는 가슴을 움켜쥐고 그대로 몸을 낮췄다.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 그리 몸을 굽히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을 다스리려고 했다.
“도련님!”
때마침 안으로 들어선 남이가 소리치며 은재에게로 뛰어왔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뒤따라 들어온 송리 또한 은재를 불러 댔다.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헉헉거리는 은재를 부축해 자리에 바르게 눕혔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누운 은재의 몸이 둥글게 말렸다.
남이와 송리는 혹시나 은재가 경기를 일으킬까 싶어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았다.
“도련님, 숨을 잘 못 쉬시겠습니까?”
“어의를 불러올까요?”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거칠었지만,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자 숨소리가 곧 잔잔해졌다.
“혼자 있고 싶으니 모두 나가거라.”
퍽 단호한 목소리에 남이와 송리는 이번에도 조용히 물러나는 것을 선택해야만 했다.
방에서 나온 남이가 후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벅찬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편전으로 든 남이는 털썩, 주저앉아 임금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경원군 대감께서 다녀가셨습니다.”
집무실 안은 고즈넉했다. 상선도, 임금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남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예상했던 반응과 달라 남이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저, 전하….”
“돌아가라 했다.”
남이는 명에 따라야 하는 신분이었다. 자신의 걱정을 바깥으로 꺼낼 수 없는 위치였기에, 불구덩이로 뛰어들지도 모르는 은재를 지켜봐야 했다.
바깥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남이는 그대로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제 위치에 맞게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게 저의 몫이라는 것을 깨달은 남이의 걸음은 허망하기만 했다.
월정당 나인이 다녀간 이후로도 임금은 책 읽기에 연연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깊은 밤이 될 때까지도 임금의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하, 그만 침전으로 드시옵소서.”
닫혔던 귀가 열린 것인지 임금이 반응을 내보였다.
“월정당으로 약을 보냈는가.”
“보내었사옵니다.”
상선은 허리를 굽혀 답했다.
임금의 결정이, 그 선택이 앞으로 무엇을 초래할지 알았기에 상선의 얼굴에는 근심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그 결정으로, 그 선택으로 임금이 무엇을 잃을 것인지 알기에 상선은 감정을 허투루 꺼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청선당으로 가겠네.”
상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걷는 임금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이 밤이 지난 이후로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밤사이 은재에게 또다시 신열이 찾아왔다.
어의가 찾아와 진찰하였음에도 복중의 왕손 탓에 약을 쓸 수 없다며 달리 방도가 없으니 잘 지켜보라는 말만 남길 뿐이었다.
대전에서 나온 상궁이 건넨 탕약이 문제라는 건 알지 못하고 남이와 송리는 열이 잔뜩 오른 은재를 걱정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
희한하게도 아침이 밝아 오자 은재를 괴롭히던 열은 말끔하게 가셨다. 남이는 안도하며 땀으로 젖은 이불을 정리했고, 송리는 따뜻한 물에 적신 면포로 은재의 몸을 닦았다.
바짓단을 걷고 가늘고 흰 다리를 면포로 훔치던 송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멈춘 손길에 은재의 시선이 움직였다.
송리도, 은재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허벅지 안쪽, 여린 살갗에 새겨져 있던 증표. 지우려면 쉽게 지울 수 있지만, 백년가약을 약속한 부부가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
그러나 이 궁궐에서는 참으로 가벼운 것이 증표였다. 게다가 증표를 나누어 가진 이와 평생 함께할 것이라는 무거운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
은재는 증표가 자리했던 자리, 티 하나 없이 말끔해진 저의 허벅지를 내려다보다 걷어 올린 바짓단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결심했다는 듯한 얼굴로 송리를 바라보았다.
“송리야.”
은재가 월정당에서 지냈던 나날을 떠올렸다. 임금에게 버림받고도 의연했던 은재의 모습을 기억했다. 누구도 찾지 않는 밤이 되면 잠결에 서러운 마음을 꺼내 보였던 은재를, 안쓰러운 이의 울음을 생각하며 송리는 슬퍼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예, 도련님….”
“형님을 뵈어야겠다.”
송리는 은재에게서 보았다. 초연하고 담담했지만,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알아차렸다.
“예, 곧장 모셔오겠습니다.”
단단하게 굳어 버린 마음을 알기에 송리는 주저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 * *
화단에서 풀벌레가 찌르르 소리를 내며 우는 늦여름이었다. 무더운 더위가 사그라지고 밤이 되면 찬 바람이 부는 계절. 곧 범랑에 가을이 찾아올 것이었다.
민명탁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얼굴로 사랑채 마당에 서 있었다. 친분을 쌓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고 하기에는 그곳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잠시 후 민명탁과 경원군이 사랑방에서 나오자, 여러 쌍의 눈이 두 사람에게 닿았다.
민명탁은 그들에게 종이가 붙은 비단을 내보였다. 흰 종이와 대비되는 붉은색으로 적힌 글자에 눈길이 닿는 순간, 사랑방에서 한 사내가 나왔다.
“금상의 계략에 빠져 관직을 잃었으나, 우리의 뜻에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준 것이 바로 우의정, 김윤덕이오. 또한 그가 제일 먼저 이 명부에 이름을 올렸으니 어찌 충신이 아니라 할 수 있겠소.”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지에 있어야 할 김윤덕이 그곳에 등장하자 관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 건춘궁으로 들어가 이 나라를 망친 폭군을 몰아낼 것이오. 폭군은 생을 부지할 수 없을 터, 우리의 목표는 금상을 죽이고 경원군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오.”
민명탁의 곁에 선 김윤덕은 심오한 눈빛으로 뜻을 한데로 모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명부에 이름을 적는 자는 우리가 바로잡을 범랑의 충신이자 공신이 될 것이오. 우리와 뜻을 함께할 자는 주저하지 말고 이 명부에 자기 이름을 적으시오.”
민명탁은 그들의 환심을 사려는 듯 날이 선 단검으로 제 손가락을 그었다. 벌어진 상처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핏방울이 대청마루로 뚝, 떨어졌다. 그는 몸을 낮추고 흰 종이에 저의 이름을 적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명부는 종말에 본래의 흰색을 잃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민명탁은 그것을 접어 품에 넣었다.
경원군을 주축으로 민명탁의 마당에 모여 있던 자들이 하나둘 대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대문 밖으로 나온 경원군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임금은 어찌하다 신의를 잃은 것인가.
유생과 학자, 선비들이 어둠이 내리깔린 길거리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모두가 밝게 불타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대의를 위하여!”
임금은 어찌하다 이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릴 때까지 방치하였는가.
잔바람에 일렁거리던 횃불이 경원군의 눈동자 안에서도 흔들거렸다.
“모두 군 대감을 추대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경원군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쁜 임금을 몰아내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그러니 저들의 충심 또한 군 대감께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불길에 홀린 듯했던 경원군이 걸음을 틀어 김윤덕을 바라보았다.
반정이라 내세웠으나 반역이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경원군의 시선이 자신의 외조부인 민명탁에게 닿았다.
“군 대감, 건춘궁으로 가십시오. 모두가 경원군을 따를 것입니다.”
민명탁은 그저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경원군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섞인 환멸은 알지 못하고 어서 인파 속으로 뛰어들어 대의를 이루자며 성화를 부렸다.
“명부를 제게 주십시오.”
경원군의 청에 민명탁은 기꺼이 자신의 품에 넣어 두었던 명부를 넘겼다. 그것을 받아 든 경원군의 발이 머지않아 떨어졌다.
마음을 모은 이들은 고즈넉한 밤을 건너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잠든 적폐를 몰아내기 위해 건춘궁으로 향했다.
그 시각, 희경당 곳곳에 놓인 등롱에서도 밝은 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희경당의 불이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단 한 명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꾸며 내지 않은 임금의 속마음을 아는 자가 있었다면 오늘의 불찰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겉으로 폭군인 양 핍박을 일삼았던 임금이 누구보다도 백성을 살리는 데 급급했다는 것을 어찌 알아주지 못하는가.
상선은 마음이 아렸다. 가려진 임금의 마음을 제 입으로 내뱉을 수 없어 가슴이 갑갑했지만, 상선은 마지막까지 제 소임을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하.”
겸사복장, 부경은 무장한 채 임금을 불렀다. 부경의 곁에서 임금의 또 다른 충복, 금위대장 함세휘가 임금을 향해 부복하고 있었다.
“동태를 알려라.”
“회은동의 민명탁 자택에서 집결하여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 하옵니다.”
“궐내 병력은.”
임금의 물음에 함세휘가 입을 열었다.
“금위영 병사 백 명을 휘경당 근방에 배치하였사옵니다.”
“훈련대장은.”
“그들을 따르고 있사옵니다.”
“좋다.”
그 무엇도 임금의 심기를 더럽히지 않았는지, 임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때가 되었음을 청선당에 알려라.”
곧 임금의 명을 받들기 위해 대기 중이던 내관 하나가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피하셔야 합니다.”
부경이 말했다. 강은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으로 대신 대답했다.
“전하.”
“내 누누이 일렀지만, 삶에 크게 미련이 없대도.”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경에게로 향했다.
“내 비록 범랑의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지 못하겠지만, 나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가는 이가 또 있겠느냐.”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부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괜찮다.”
부경은 고개를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찌하겠는가. 나는 그저 이로써 내가 그이에게 지은 죄가 사라졌으면 한다.”
강의 얼굴에 젖어 든 슬픔을 보는 순간, 부경은 고개를 계속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슬슬 명경전으로 가 봐야겠다. 손님들이 오시니, 기꺼이 맞아야지.”
임금의 뒤를 따르는 모두, 오늘이 마지막으로 임금을 배종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분위기가 무거웠다.
웅장한 궁궐 대문, 곤호문 앞을 지키던 하나의 무리가 경원군과 그를 따르는 이들을 맞이했다.
“희경당과 명경전을 통하는 중문은 잠그는 일이 없지만, 명경문은 해시가 되면 잠깁니다. 이것은 명경문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입니다.”
세준은 자신의 아비, 김윤덕에게 열쇠를 넘겼다.
오랜만에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세준은 개의치 않았다.
이 무자비한 궁궐에서 은재가 벗어날 수 있도록 세준은 기어이 역적 무리의 편에 서서 충심을 바쳤던 저의 군주에게,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벗에게 칼을 겨눠야 했다.
김윤덕은 세준에게 받은 열쇠를 경원군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경원군은 못 미덥다는 눈길로 김윤덕을 바라보고는 활짝 열린 곤호문의 가운데 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갔다.
* * *
때가 되면 소식을 알릴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들이 벌인 일은 저와는 상관없다며 그 틈을 타 궁궐 밖으로 도망가라 했었다.
은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저를 이곳에서 빼내 줄 동아줄이었으니, 그것이 낡고 악취가 풍길 만큼 썩었다고 해도 붙잡아야만 했다.
늦은 밤이 되었음에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월정당 마당을 서성거리던 은재가 결심을 내리고 방으로 향했다.
“짐을 챙겨라.”
“도련님…?”
남이와 송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은재를 보았다.
“오늘 밤, 궁에서 나갈 것이다.”
은재는 경악하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챙겨 갈 것이라고 해 봤자 세준이 사 준 옷가지 몇 벌과 신 몇 개 그리고 어미가 손수 만들어 준 감청색 건이 다였다.
부랴부랴 짐을 챙기는 은재의 모습에 넋을 놓고 앉아 있던 송리가 정신을 차렸는지 서둘러 은재를 돕기 시작했다. 남이는 그때까지도 임금에게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오늘은 대전과 편전 근처에 얼쩡거리지 말거라.”
매몰차지는 않았지만 퍽 딱딱한 말투에 남이는 뜨끔했다. 놀란 마음에 식겁하고 은재를 보았다. 은재는 그간 간자 노릇을 했던 남이를 이해한다는 듯 너그러운 눈으로 남이를 보고 있었다.
“나와 함께 갈 것인지,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인지,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은재가 남이와 송리를 번갈아 보았다.
“소인이 도련님께 지은 죄가 있는데 어찌 도련님을 홀로 보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혈혈단신의 몸, 소인은 기꺼이 도련님을 따르겠습니다.”
남이의 눈길이 송리에게로 향했다. 은재의 짐을 싸던 송리는 쭈뼛거리며 은재의 눈치를 보았다.
“소인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식솔이 있습니다. 녹봉이 나오는 날만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을 두고… 소인의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은재는 머릿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넣어 둔 함을 꺼내 송리에게 내밀었다.
“별거 아니지만, 내 이것을 가지고 나가 어디에 쓰겠느냐. 그간 내 시중을 들어 주어 고맙다는 뜻이니 받거라.”
은으로 만든 상투관, 그걸 패물이랍시고 내미는 게 낯부끄러웠다. 그러나 송리는 큰 것을 받았다는 듯 감탄하다 못해 펑펑 눈물을 쏟을 듯한 얼굴로 은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도련님….”
“그간 고생했다.”
은재는 송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매일같이 좁은 쪽방에 몸을 욱여넣고 잠이 들었던 송리의 노고를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계속 눈을 맞추고 있다간 저도 송리처럼 눈물이 펑펑 나올 것 같아 은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방 밖으로 나온 은재는 대문을 넘어 소식을 가져올 이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초롱으로 길을 밝히는 이가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은재는 벌떡 일어나 그이를 맞이했다.
곧 어둠 속에서 잔잔하게 피어오르는 불빛에 모습이 확실히 드러났다.
“저를 따르십시오.”
느닷없이 월정당에 나타난 자현이 말했다.
“어찌….”
“반란이 일어나면 도령을 모시고 궁궐에서 나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도령의 형님께서 직접 저를 찾아오셨지요.”
자현과 함께 온 군관들이 어둠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은재는 자현의 말을 순순히 믿을 수 없어 우두커니 자리를 지켰다.
“혹 나라를 배신한 이들의 말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자현이 은재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들은 도령께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도령께서도 그 이유를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촌철같이 쏘아붙이는 말에 은재의 손이 자연스럽게 태가 드러난 아랫배로 향했다. 고된 병치레를 겪으면서도 배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의 존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들은 제일 먼저 이곳으로 찾아와 도령과 복중 아기씨를 볼모로 삼을 것입니다.”
귀가 얇지 않았지만 은재의 마음이 저절로 자현에게로 기울 즘이었다.
“도련님, 귀인 마마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들은 변절자입니다. 주상 전하를 노리고 이곳으로 쳐들어오는 역적 죄인들이 어찌 도련님과 복중 아기씨를 살려 보내겠습니까?”
은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남이는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송리 역시 애걸복걸하듯 빌었다.
강과 나누어 가졌던 증표가 사라지던 날, 그때 강의 걸음이 청선당에 닿았다고 들었다. 제가 잃은 총애를 청선당의 주인이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적의 상실감이 또다시 은재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그래서 저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이를 따라나설 수 없었다. 저의 초라함에 치여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분을 버리시려는 것입니까….”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자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애초에 저는 그분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퍽 단호하고도 분명한 진심에 은재는 바닥으로 눈길을 떨궜다. 치졸한 시기에 강을 버렸던 자신과 달라 그저 입가에 헛웃음이 맴돌았다.
자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은재를 보았다. 강이 미처 저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구나. 강이 저의 처소를 다녀간 이후로 궁궐에 떠돌았던 소문이 머릿속에 솟아올랐다.
‘어심이 청선당 귀인 마마님께 기울었으니,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은 완전히 버림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복중 아기씨는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총애를 잃었으니, 어찌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을 동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도령,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기엔 많이 늦은 감이 있으나, 저는 그분을 마음에 둔 적이 없습니다.”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은재의 혼란을 부추긴 듯했다. 자현은 은재가 있는 곳까지 들릴 만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전한 곳으로 몸을 옮기면 그때 해 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 더는 머물 수 없으니 어서 저를 따르십시오.”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판단하려 머리를 써 봤지만 이미 복잡해진 머리로는 생각하는 게 어려웠다. 은재는 어쩌지 못하고 남이를 보았다.
남이는 대청마루에 두었던 짐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머뭇거림 하나 없이 그것을 끌어안고는 은재의 손을 붙잡고 자현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후원 동북쪽에 있는 작은 문으로 향했다.
산세가 험한 곳에 자리한 그 문은 변란같이 궁궐에 큰일이 닥치면 왕족이 도망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문이었다. 궁궐 안에서도 그 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가 몇 없었으니, 퇴로로 사용하기에는 꽤 적합했다.
지체한 시간 탓에 걸음이 급했다. 쉼 없이 산길을 오르다 보니 아랫배가 당겨 왔다.
“으윽….”
짧은 신음과 함께 은재가 자리에 주저앉자, 남이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은재에게로 달려왔다. 바로 은재의 앞에 섰던 자현 역시 서둘러 걸음을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배가….”
은재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았구나 싶었던 자현이 군관에게 손짓했다.
“조금만 더 가면 소문이 나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자현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눈길에 붉은 기운이 잡혔다. 궁궐에서도 제일 높고 웅장한 명경전에서 치솟아 오른 불길에 사로잡힌 자현은 그곳을 바라보며 작게 탄식했다.
당연하다는 듯 산길을 오르던 이들의 이목이 그곳으로 향했다. 어둠을 밝히는 불은 이 나라의 군왕을 휘감은 화마였다.
“안 돼….”
은재는 경원군이 저를 찾아왔을 적에 미처 묻지 못한 게 있었다.
“안 돼….”
그들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들의 표적은 어찌 되는지.
“도령,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강이 있는 궁궐로 돌아가야 했다. 활활 불타오르는 대전, 그곳에 있을 강이 살아 있는지 제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어서 도령을 모셔라!”
자현의 외침과 함께 군관들이 은재를 붙잡았다.
“도련님!”
궁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이었을까. 밑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 몸을 급습하기 무섭게 은재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승리를 거머쥔 자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불에 타오르는 명경전 앞마당에서 그들은 임금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자신들이 바로 세울 범랑의 미래를 자축하며 뺨으로 들이닥친 뜨거운 열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사위를 포위한 이들의 존재도, 그들이 꿈꿨던 미래가 박살이 났다는 것 역시도. 바로 눈앞에 보이는 승리를 취하는 것에 급급해 저희를 겨누고 있는 날카로운 화살의 촉을 볼 수 없었다.
“상왕 전하 납시오!”
비로소 월대에 상왕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은 저희의 목숨을 노리는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들이 회유했던 군권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아챈 순간, 사지를 벌벌 떠는 이가 있는 반면 주눅 들지 않고 월대에 오른 상왕을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순간, 가장 선두에 서서 불타오르는 명경전을 눈에 담던 경원군이 상왕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상왕 전하.”
경원군은 그의 앞에 몸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려 단단한 돌바닥에 이마를 댔다.
“소자, 기꺼이 상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불순분자들을 이곳으로 모았사옵니다.”
그의 뒤를 따랐던 이들은 침묵 속에서 퍼진 혼란을 감당하지 못하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상왕의 발걸음이 명경전 뜨락에 닿았을 때, 그때부터 그들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기에 그곳에서 도망가지 못하고 명경전을 감싼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재미난 일을 벌였군.”
넓은 뜨락에 상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장난하겠다고 이곳에 모인 것은 아닐 테고…. 과인이 묻겠다.”
상왕은 월대에서 내려와 그들과 동등한 곳에 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리쳤다.
“지엄한 왕실에 칼을 겨누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몇몇 이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았다. 그리고 엉엉 우는 소리를 내며 저희의 죄를 고했다.
이 일을 꾀했던 민명탁마저 상왕의 무지막지한 기세에 짓눌려 늙어서 잘 굽혀지지도 않는 무릎을 억지로 꺾어 가며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김윤덕, 오롯이 그자만이 상왕과 같은 높이에 서서 상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랑의 역사는 전하께옵서 내디딘 첫발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과인을 부정하려 드는 것인가.”
상왕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모두가 알고, 모두가 들었나이다. 입으로 전해지는 말을 전하께옵서 막으실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과인의 역사는 티끌 하나 없이 청렴하다.”
김윤덕 역시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지었다.
“이 불화를 만든 게 바로 전하이시옵니다. 신하의 손을 빌려 아들을 쳐 내려고 했던 자비 없는 아비를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그 역사는 글자로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나 절대로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상왕은 또다시 호탕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소신 간언컨대, 범랑의 역사는 전하를 등진 지 오래이옵니다. 권력으로 억압하려 해도 역사는 바꿀 수 없을 것이옵니다. 또한 전하께옵선 폭군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반역자치곤 말이 참 많단 말이지.”
상왕의 그늘에 숨어 있던 이조철이 김윤덕의 앞에 섰다.
“경이 원했던 그 바람 역시 이루지 못할 욕심이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장검이 곧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김윤덕의 끝은 그가 꿈꿨던 미래와 같지 않게 참 허망했다.
* * *
추국장에 울리는 신음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다시 자신의 것이었던 용포를 되찾은 임금은 지루함을 뿜어내며 죄인, 김세준을 바라보았다.
“김은재를 어디로 빼돌렸는지 말하거라!”
“소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의금부 도사의 외침에도 오라에 묶인 김세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월정당에서 도령을 모셨다던 내관은 이미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세준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임금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명경전에서 나온 시체, 그것은 이강이 아니다.”
김세준 역시 비틀거리며 바닥에 이마를 댔다.
“내 아들, 이강이 죽지 않았다고 말해라.”
생살을 바늘로 꿰맨 듯 김세준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김이 식은 것일까. 임금은 발길을 틀어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참으로 희한하지. 그 쓸모없는 것에게 목숨을 거는 이들이 많았어. 목숨을 건 대가가 죽음이었는데도 어찌 그것을 지키지 못해 안달을 냈을까.”
강은 달랐다.
폭군이 되겠다면서도 뒤에서 백성을 돌봤다. 그것은 절대로 역사에서는 찾을 수 없을 진실이었다.
아마도 임금은 강이 태어났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강을 시기해 못살게 굴었을지도 몰랐다. 겉치레로 꾸며 놓은 가식과 달랐기에, 임금은 타고난 성품을 질투했다고 보는 게 마땅했다.
김세준은 붉은 핏자국이 선명한 멍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멍석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임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김세준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곧 추국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저의 곁을 지키는 이조철에게 손짓했다.
“김세준의 아우를 들쑤셨다가 그놈이 애새끼를 데리고 나타나면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김세준의 아우는 오늘 이후로 죽은 셈 칠 테니 찾지 말아라.”
임금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임금은 광활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놈… 이강은 죽지 않았다. 반드시 살려서 과인의 앞에 데리고 와라. 과인이 직접 그놈의 명줄을 끊어 낼 것이다.”
* * *
오 년 후.
마른 싸리를 엮어 만든 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아이가 뛰어 들어왔다.
마당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누군가를 찾던 아이가 부엌간으로 향했다. 가마솥에서 팔팔 물이 끓고 있었지만,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이의 눈길은 부뚜막으로 향했다. 장작이 거의 타들어 갔으니 분명 장작을 가지러 갔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는 집 뒤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무더기의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곳에도 아이가 찾던 이는 없었다. 서서히 아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꽤 성이 난 듯 콧바람을 씩씩거리며 아이가 마당으로 향했다.
마침 싸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재를 보자 아이의 큼지막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부지!”
아이는 버럭 소리를 치고는 은재에게 달려가 허리춤을 붙잡고 늘어졌다.
“도대체 어딜 갔다 왔어?!”
불쑥 뛰어들어 안기는 아이가 익숙한 것인지, 은재는 다리에 아이를 매달고 부엌간으로 향했다.
“우리 소월이 오랜만에 미역 감으라고 인삼 잎 좀 얻어 왔지.”
목욕이 꽤 싫었는지 아이는 찰싹 매달려 있던 다리에서 떨어져 슬금슬금 뒤로 걸음을 옮겼다.
“에잇! 나 미역 감기 싫어!”
은재는 팔팔 끓는 물에 품에 안고 있던 인삼 이파리와 줄기를 넣었다. 그러곤 뚜껑을 닫고 도망치려고 기회를 보고 있는 소월을 보며 싱긋 웃었다.
“씻지 않으면 어머니한테 혼날 텐데?”
삐죽 튀어나온 소월의 입술을 보며 은재가 어서 오라는 듯 소월에게 손짓했다.
“아부지가 나 미역 감았다고 거짓말해 주면 안 되나?”
그것도 고민해 볼 만하다는 듯 은재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 콩, 주먹이 소월의 정수리에 꽂혔다.
“아얏!”
소월은 손바닥으로 제 머리를 감싼 채 은재의 뒤로 후다닥 도망쳤다.
“거짓말하면 안 들킬 줄 알고? 꼬질꼬질 때 낀 것 좀 봐라. 까마귀가 와서 친구 하자고 하겠구나!”
소월을 잡기 위해 남이가 우악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오자, 소월은 은재를 끌어당기며 남이를 피해 도망 다녔다.
“힝! 어머니 미워!”
“저것 봐라? 어디서 가서 말을 반으로 잘라서 먹고 왔나? 어른한테는 말을 높이라고 했지!”
중간에 낀 은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갓 네 살이 된 소월에게 질질 끌려다녔다.
소월의 투쟁은 결국 남이에게 붙잡히고 나서야 끝났지만, 은재는 소월이 안쓰러워 팔자 눈썹으로 아이를 보았다.
“싫어! 싫단 말이야!”
“조용히 하지 못해?!”
남이는 고래고래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소월을 질질 끌고 부엌간으로 향했다. 잠잠해진 틈을 타 은재는 방과 방을 잇는 툇마루로 걸어갔다.
“가만히 안 있어?!”
“미워!”
여전히 부엌간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아하니, 모녀의 다툼은 오늘도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앞날이 깜깜했던 은재는 한숨을 지었다.
“어찌 한숨이십니까?”
그사이 마당으로 들어선 자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은재는 저 둘의 싸움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왔다는 사실에 벌떡 일어나 자현을 반겼다.
“아아아악!”
그때 부엌간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비명에 자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고…. 오늘도 조용히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은재는 그저 피식 웃었다.
“어림도 없겠지요. 볼일은 잘 보고 오셨습니까?”
은재의 물음에 자현이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이 희한해 은재는 자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인삼을 사러 온 천양 상인을 만나러 간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랬지요….”
마치 숨기는 것이 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자현의 모습에 은재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부엌간으로 향하는 자현이 이상할 리가 없었음에도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은재는 다시 툇마루로 가 앉았다. 그리고 입이 삐죽 튀어나와 흡사 오리와 같겠지만, 말끔해진 모습으로 달려 나와 제 품에 안길 소월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 * *
“홍주에 가지 않으실 것입니까?”
현천의 앞바다에는 날이 지기 시작하면 붉은 노을이 자욱하게 깔리곤 했다. 동네 어린아이들을 모아 놓고 글을 가르치는 것에 재미가 들어 시간이 가는 줄 몰랐었다. 낡은 옷을 입고 대충 바윗돌에 앉아 하루의 끝을 바라보는 게 세준의 낙이었다.
세준은 저를 찾아온 손님을 마주했을 때, 그날로부터 벌써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지내고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하나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객은 자신의 제안을 수긍하지 않는 세준이 이상했다.
“제가 은재를 볼 낯이 없어 그럽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세준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빛이 가득한 하늘을 보자, 혼자 우두커니 그곳을 지켰을 어린 은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는 은재가 이곳에서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때가 되어 이곳을 찾아오면 저를 그리 반기던 은재가 좋았으면서도, 은재가 제 동복형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재가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준의 입에서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세준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운명에 휩쓸리지 않게 은재를 이곳으로 보냈어야 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대군과 제가 인연을 맺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세준에게 은재와 강은 목숨만큼이나 소중했다. 두 사람을 잃었을 때 가슴 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살아 있으니 다행이었다.
“모두 제 탓인 것 같아 은재를 볼 때마다 저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재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 역시도 그간 아비의 기대에 억눌려 제대로 살아 보지 못했다고, 저 또한 자유롭지 않았다고 하소연이라도 해 보았으면 속이 덜 갑갑했을까, 싶었다.
은재를 볼 때마다 주눅 들게 했던 죄책감 탓에 입 한 번을 벙끗할 수 없었던 나날이 세준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제는 저의 삶을 살겠다.
두 사람을 향한 진심보다도 세준은 함부로 꺼내 놓을 수 없었던, 내보이지 않았던 연심이 더 아팠다. 그러나 굳건하게도 저의 속에 꽁꽁 감춰 둔 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세준은 침묵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슬픔이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아 그것이 내려갈 때까지 꾹 참아야 했다.
가까스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탓에 세준은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은재에게로 갈 수 없었다.
죄책감, 그것을 덜어 내야 저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가슴 한편에 후회가 가득 찼기에 그것을 덜어 낼 수 없었지만, 살아 있으니 살아야 했다.
꺄르륵 웃으며 바닷가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로 세준의 눈길이 움직였다. 이내 침묵하던 세준의 입이 떨어졌다.
“어쨌든 제 손으로 막는다고 해도 그 둘은 만날 운명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를 찾아오셨겠지요.”
세준은 객이 모시는 이의 생사 따위에는 안중이 없는 듯 묻지 않았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앙금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한 뭉텅이로 뭉쳐 있던 아이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곧 세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죽어서도 갚지 못할 죄를 짓지 말아 달라고, 이 말을 꼭 좀 전해 주십시오.”
객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 세준은 곧 아이들이 달려간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객은 그곳에 서서 멀어지는 세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객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양 감쪽같이 사라졌다.
* * *
근처 산에서 소쩍새가 시끄럽게 울어 대는 밤이었다.
잠에서 깬 소월은 졸린 눈을 비비며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에 어린 인영이 무엇일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머지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장지문으로 향했다.
벌컥 열린 장지문 너머로 사내가 보였다.
“아저씨는 누구시오?”
앳된 목소리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를 불렀다. 돌아볼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인지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 아부지랑 어머니를 깨워야겠소?”
소월의 협박이 통한 것인지, 그가 슬그머니 소월에게로 몸을 틀었다.
“그리하면 내가 곤란해진다.”
“그럼 누군지 알려 주시오.”
달빛이 어른거리는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그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저 이곳을 지나가던 나그네다. 쉴 곳을 찾지 못해 잠시 이 툇마루에 머물다 가려고 한다.”
경계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소월은 고개를 위아래로 파닥거리며 끄덕였다. 나그네의 입가에서 피식하고 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본격적으로 나그네와 친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소월은 장지문 밖으로 조심스럽게 기어 나왔다. 그리고 툇마루에 서서 장지문을 닫고 나그네의 옆에 앉았다.
“아저씨는 어딜 가는 중이었소?”
네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치고는 꽤 그럴싸한 질문에 나그네는 헛숨을 내뱉었다.
“나는 정인을 찾으러 가고 있었다.”
“정인? 그것이 무엇이오?”
“정인이 무엇일까…?”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소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묻지 않았소?”
“흠…. 정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서 그런다.”
“그럼 알지도 못하는 것을 찾으러 간다는 말이오?”
“알긴 아는데, 그것을 말로 어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소.”
나그네는 눈을 가늘게 뜬 소월이 마냥 귀엽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정인은 어디에 있소?”
나그네의 눈길이 공허한 하늘에 떠 있는 달에 닿았다. 나그네는 한참이나 그 밝은 달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지 않을 것이오?”
“저 달이 비추고 있는 곳에 있다.”
나그네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소월의 눈길도 하늘로 향했다. 고개를 잔뜩 추켜올리고 달을 보던 소월은 저에게로 한달음에 달려드는 달빛을 느끼며 길게 하품을 끄집어냈다.
“나는 가서 자던 잠을 마저 자야겠소. 아저씨는 여기서 자다가 떨어지지 말고 잘 자고 잘 가시오.”
툇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문 앞으로 간 소월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꼬마야.”
“왜 그러오.”
“내가 이곳에 머물다 갔다는 것을 집안 어른들에게 말할 것이냐?”
몸의 반쪽을 방으로 집어넣었던 소월은 걸음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 좋다.”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이 닫히기 전에 나그네에게 손 인사를 했다. 나그네는 아이가 하는 대로 손짓을 따라했다.
문이 닫히자 다시 소쩍새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곳에서 있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럴 수 없었던 나그네는 일어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동이 틀기 무섭게 잠에서 깬 소월은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툇마루에서 자고 있을 사내의 빈자리가 아쉬웠는지 소월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찌 그러니?”
자현의 물음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소월이 디딤돌 위에 놓인 신을 주워 신었다.
“소월아, 아침부터 어딜 가니?”
은재가 소월을 불러 보았으나, 소월은 대꾸하지 않고 싸리문으로 향했다. 남이에게 붙잡힐 걸 걱정했는지 싸리문을 열기 무섭게 마을로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가야지!”
자현이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 동시에 은재와 눈이 마주친 자현은 슬쩍 웃음을 내보였다.
“어린애 하나가 어른 셋을 놀려 먹습니다.”
자현의 푸념에 은재는 그저 실없이 웃음을 지었다.
나그네가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바깥으로 나온 소월은 동네를 한 바퀴 빙 둘러보고는 나그네 찾기를 포기하고 목표물을 바꿨다.
“언니, 놀자.”
“나 지금 바빠.”
소월이 이웃에 사는 아이 하나를 붙잡고 매달렸다. 아이가 안 된다며 눈을 부라리자 겁이 났는지 소월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다른 표적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오빠, 같이 놀자.”
“밭에 거름 주러 가야 돼.”
믿었던 동무마저 저와 놀 수 없다고 단번에 거절을 하자 소월이 바닥에 발을 쿵쿵 구르며 울상을 지었다.
“오늘 개구리 알을 잡는다고 했는데 못 들었니? 거기 가서 놀아.”
소월은 울음이 터지면 감당하기 힘든 아이였다. 소월의 얼굴에 드리운 울음이 무서웠던 동네 아이가 손가락으로 소월의 또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것들은 맨날 나만 빼놓고 놀아?!”
몰랐던 사실에 성질이 난 소월이 바닥에 발을 쿵, 쿵 내려찍으며 개울가 쪽으로 걸어갔다.
개울가가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역시 가까워졌지만, 곧 아이들이 찾는 개구리 알보다 더 재미난 것을 발견한 소월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풀숲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풀숲에 드러누워 있는 나그네를 발견한 게 신이 났는지 소월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툇마루에서 자고 가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일찍 갔소?”
나그네가 벌떡 일어나 소월을 마주 보았다.
“쉴 곳을 몰래 빌릴 때에는 집주인이 일어나기 전에 떠나야 하는 법이다.”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뭐라 하지 않을 텐데? 혹 겁을 먹은 것이오?”
“당연하지. 몰매를 맞아 본 적이 없다만, 그게 꽤 아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소월이 꺄르르, 웃었다. 나그네가 잘 빗어 단정하게 묶어 놓은 아이의 머리를 헝클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냥 괴롭혀 보고 싶었다.”
“사내가 되어 어린아이를 괴롭히면 되겠소?”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이 없으니, 그리 해도 되지 않겠느냐?”
소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그네를 흘겨보았다. 때맞춰 꼬르륵, 소월의 배가 요동을 쳤다.
“아침밥은 먹고 나온 것이냐?”
나그네가 소월에게 물었다.
“어서 들어가 밥이나 먹고 나오거라. 어릴 땐 밥을 잘 챙겨 먹어야지.”
“그러는 아저씨는 먹었소?”
“나는 먹었다.”
“그럼 밥을 먹고 다시 올 테니 이곳에 있으시오.”
소월이 풀숲에서 일어났다. 그때 나그네가 소월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꽃이다.”
“꽃인 건 나도 보아 알고 있소.”
나그네는 심드렁한 얼굴로 소월을 바라보다 다시 풀숲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눈을 질끈 감아 버린 나그네에게 꽃의 이름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요동치는 배를 이길 수 없었던 소월은 곧장 집으로 가는 길로 발을 틀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당에 놓인 평상에 먹음직스러운 상이 차려져 있었다. 허겁지겁 평상에 올라 숟가락을 집어 든 소월에게 꿀밤을 먹이려고 했는지 남이의 주먹이 위로 올라갔다. 자현이 말없이 남이의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은재는 밥을 퍼 우걱우걱 입에 밀어 넣는 소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저고리 매듭에 끼워진 하얀 꽃을 보았다.
“이게 무엇이니…?”
은재의 물음에 소월이 제가 가슴팍에 꽂아 둔 꽃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떤 아저씨가 줬어.”
“아저씨?”
“응. 무슨 꽃이냐고 물어봤는데도 답을 안 해 주더라고.”
“이게?! 너 자꾸 도련님이랑 맞먹을래?”
남이가 더는 들어 주지 못하겠는지 작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 팔을 번쩍 들었다. 이번에도 자현이 남이를 막았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이것이 제 못된 성질머리만 빼닮아서 천지 구분을 못 합니다….”
은재는 웃어 보이고는 밥 먹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하얀 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밥을 해치우기 무섭게 평상에서 훌쩍 뛰어 바닥으로 착지한 소월이 부리나케 싸리문으로 뛰어갔다.
“소월아!”
남이가 뒤늦게 불러 보았지만 이미 멀찍이 달려간 아이를 붙잡을 방도가 없었다. 남이의 곁에 있던 자현이 풉, 하고 웃었다.
“한참 뛰어놀 때가 아닌가. 그냥 두시게.”
소월은 은재와 자현의 그늘 아래에서 이쁨만 받아서 그런지 나날이 버르장머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기에 남이의 속만 쩍쩍 갈라졌다.
온종일 나그네를 찾으러 다니는 것에 바빠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소월은 잘 깔아 놓은 이불에 누웠다. 어떻게든 새벽이 올 때까지 참아 보려고 했지만,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이겨 내지 못했다.
하얀 꽃을 건네주었던 나그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못한 게 어린아이의 마음에 턱 하니 걸린 것이었을까. 바깥에서 들리는 소쩍새 울음에 눈을 번쩍 뜬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일어난 것도 모르고 잠에 빠진 은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엉금엉금 기어 바깥으로 향했다.
“또 왔소?”
소월은 장지문을 열자 보이는 나그네에게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밤이 되면 갈 곳이 없단 말이지.”
“해가 뜨지도 않았을 적에 갈 것이면서.”
“그게 아쉬웠느냐?”
가만히 있어도 잘생긴 얼굴이 웃으니 더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일지라도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꽤 해박했다. 아이는 서슴없이 나그네의 옆에 앉았다.
나그네가 손가락에 쥐고 빙빙 돌리고 있는 하얀 꽃을 보던 아이는 나그네가 어젯밤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인이 무엇인지 알아냈소?”
촌철을 휘두르는 아이의 질문에 나그네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도 모르겠다.”
소월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그네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찌 정인을 찾는단 말이오. 잘 생각해 보시오.”
나그네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나그네의 곁에 앉아 나그네가 정답을 찾아낼 때까지 침묵하며 기다렸다.
곧 나그네의 눈길이 아이에게 닿았다.
“정인은 나를 살리는 존재인 것 같다.”
답이 어려웠는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인이 나를 살게 해.”
나그네는 어리둥절해하는 아이를 보며 피식거렸다. 아이는 나그네를 흉내 내듯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럼 정인은 소중한 것이 아니오?”
“소중한 것이라….”
“소월이는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라고 자현 어머니와 아버지가 말했소. 그치만 남이 어머니는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소. 왜 맨날 구박만 하는지.”
실없이 흘러나오는 나그네의 웃음을 귀담아듣던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 소중한 것이면 꼭 찾아야 하지 않겠소? 정인이 어디에 사는지는 아시오?”
“안다.”
“그렇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찾아가 보시오. 내 저번에 막동이랑 싸웠는데, 다시는 안 놀려고 했다가 심심해서 찾아갔더니 날 엄청 반겨 주었소. 아저씨의 정인도 아저씨를 반겨 줄 것이오.”
확신에 찬 아이의 말에 나그네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정인은 막동이처럼 나를 반기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찾아가 보겠다.”
나그네는 빙빙 돌리고 있던 하얀 꽃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꼬맹아, 부탁이 있다. 이 꽃을 머리맡에 두고 자거라.”
“왜 그래야 하오?”
“그럼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툇마루에서 자고 갈 생각이 없는지 오늘은 나그네가 먼저 툇마루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저에게 손 인사를 하는 나그네를 바라보았다. 나그네가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다 긴 하품을 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머리맡에 놓인 하얀 찔레꽃을 보는 순간, 은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보았던 그 꽃이겠거니 생각하고 아이의 저고리를 들추자 시든 꽃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울 수 없어 두 송이의 꽃을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자현도, 남이도 어두운 은재의 낯을 보고 그냥 지나칠 이들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은재는 말없이 손바닥에 놓인 꽃을 내밀었다.
“요것이 가시 있는 꽃을 어찌 꺾어 왔을까?”
남이의 말에 은재는 고개를 저었다.
“혹 이 꽃이 문제인 것입니까?”
자현이 물었다. 은재는 꽃에 닿아 있던 시선을 올려 자현을 바라보았다. 순간 많은 생각이 은재의 머릿속에 들이닥쳤다.
붉은빛을 뿜어내며 불타오르던 명경전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정신을 잃고 도성을 빠져나와 홍주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상왕이 다시 복권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은재는 또다시 아이를 잃고 성치 않은 몸으로 귀를 열고는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걸하듯 소식을 물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강에 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도성에서 쫓겨난 마을 사람들은 은재가 알고 있는 임금을 입에 올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완전한 비밀은 없었다.
‘임금이라는 작자가 백성들 등쳐 먹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으니, 당연한 처사였어.’
‘잘 죽었지. 천하의 그런 쌍놈은 죽어 마땅하지!’
그날 보았던 붉은빛, 그것은 꿈이 아니었구나.
제 두 눈으로 차갑게 식은 육신을 본 것도 아니었으면서도 은재는 그 말에 현혹되어 천천히 강을 내려놓았다.
“도령?”
그런데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아이에게 꽃을 쥐여 주며 흔적을 남긴 이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몰랐다.
은재는 금방이라도 펑펑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제 손바닥에 놓인 하얀 찔레꽃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재는 부엌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찔레꽃을 아궁이에 던져 넣고는 개운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왔다.
남이와 자현은 그저 은재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아부지,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딜 가려고?”
“갈 데가 있어.”
아이의 손에 이끌려 집에서 나온 은재는 신이 난 아이의 뒤를 쫓았다. 큰 마을로 가는 산길에 접어들어서야 은재는 아이의 목적이 다시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소월아, 어디 가려고?”
앞선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걷기만 했다. 은재는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뒤를 쫓았다.
양옆으로 즐비한 나무가 점점 더 많아졌고, 조금만 더 가면 큰 마을로 넘어가는 험준한 산길이 시작될 것이었다.
문득 스치고 지나간 눈길에 잡힌 찔레꽃이 없었다면 은재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계속 걸었을 테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이 너무나도 눈에 잘 들어왔다.
은재는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보았다.
언제부터 아이는 그 꽃을 보며 길을 걷고 있었을까. 누가 아이에게 그 꽃을 보고 따라오라 했을까.
“아부지!”
어느새 멀리 떨어진 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은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은재는 앞으로 발을 뻗을 수 없었다.
아이의 곁에 자리 잡은 이를 보는 순간, 바닥으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방방 뛰고 있는 아이의 곁에 서서 쭈뼛거리는 이를 바라보며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말아 물고 눈물을 참아야 했다.
“다 알고 계셨습니까?”
엉엉 우는 아이를 어깨에 들쳐 메고 집으로 들어온 은재가 버럭 화를 냈다. 평상에 앉아 큰 마을에 보낼 말린 인삼을 손질하고 있던 남이와 자현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너도 알고 있었느냐?”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는 듯 은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이는 슬쩍 자현에게 눈길을 옮겼다.
“도령… 일단 진정하고 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세요.”
자현이 나서서 흥분한 은재를 말렸다. 엉엉 우는 아이가 남이의 품으로 달려들어 더욱 서럽게 울어 대자, 남이가 아이를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은재가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현이 은재의 곁으로 다가왔다.
“알릴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아무것도 듣지 않겠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없는 사람으로 치고 살겠습니다.”
싸리문 너머를 기웃거리는 이에게로 자현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상왕께서 도령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군 또한 상왕께 쫓기고 있던 터라 이곳으로 올 수 없었고요.”
은재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자현을 보았다. 그리고 싸리문 너머에 서 있는 이에게로 눈길을 주려다 바닥으로 툭, 떨궜다. 어떤 일이 있었다 해도 괘씸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저 역시도 도령과 같았습니다. 그날 그리 세상을 떠난 줄 알았으니 멀쩡하게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저 또한 대군의 생사를 접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자현이 파들파들 떨리는 은재의 손을 붙잡았다. 은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왕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나는 전국을 떠돌다 못해 주국으로 피해야 했습니다. 내가 살아 돌아온 게 반갑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도망치려는 은재를 붙잡고 강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은재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때때로 꿈속에 찾아와 그리움만 안겨 주고 떠났던 이가, 다시는 만날 수 없어 꿈에서 보낼 적에 눈물과 함께 보내 주었던 이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제정신일 사람은 없었다.
‘반갑지 않습니다! 놓으십시오!’
‘그대를 되찾기 위해 나는 수천 리, 수만 리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먼 길을 돌아 다시 그대를 마주하게 되어 나는 너무나도 기쁩니다. 정말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까?’
그때 은재는 답을 하지 않았다. 제 어깨를 부여잡은 강을 뿌리치고, 제 다리에 매달려 우는 아이를 들쳐 안고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마저도 허황된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은재에게 닿았던 눈길이 다시 위로 치솟았다. 그 눈빛이 따갑지도 않았는지 싸리문을 서성이던 강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결심했다는 듯 자현이 입을 열었다.
“도령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없던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고 싶다면 그리하십시오. 내키지 않는다면 받아 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되는 이입니다. 저이가 그간 도령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내쫓고 소금을 뿌려도 시원찮습니다.”
정말 강을 내쫓고 소금을 뿌릴 생각이었는지 자현은 걸음을 떼었다. 은재는 부엌간으로 향하려는 자현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길에 자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참 같아도 너무 같았다.
“어찌할까요? 내쫓을까요?”
자현의 성화에도 은재는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현의 눈길이 다시 강에게로 향했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듯 내젓는 고갯짓에 강의 시선 역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그곳에서 떠나기 아쉬워 조금 더 머물러 보았지만, 은재는 도망가듯 방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 근처를 떠돌다 그것마저도 지친 강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그 인기척이 익숙해 경계를 풀었다.
현천을 다녀온 함세휘가 강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주변을 수상한 이가 떠돌고 있습니다.”
“상왕의 사람이더냐.”
함세휘는 고개를 저었다.
“짐작 가는 곳은 없고?”
“혹 세자 저하께옵서 보낸 사람이 아닐지요.”
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날 때가 되었지.”
“그럼 제가 나서겠습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곧바로 처리해라. 상왕이 이곳에서 눈길을 돌렸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
함세휘가 떠나고 강은 불이 켜진 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럴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까. 멍석을 깔고 석고대죄를 해도 부족할 만큼 큰 죄를 지은 죄인이 누구던가. 바로 저였다.
최대한 빨리 은재의 마음을 돌려야 했었다. 그게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멍청했구나. 강은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함세휘는 깊은 산속에서 저희를 쫓는 자와 접선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강은 소명이 저에게 주었던 검을 허리춤에 차고 산길을 올랐다.
오래전부터 그곳의 터줏대감인 듯한 나무 앞으로 다가가자, 무복을 입은 자가 강에게 부복했다.
“세자 저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강이 그곳에서 떠난 후 다시 상왕의 치세가 시작되었고, 상왕의 뜻대로 환국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점차 활기를 찾기 시작한 범랑은 강의 존재를 하나씩 지워 냈고, 상왕의 역사는 그가 바라던 대로 범랑의 성군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강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했던 조력자, 대가 없이 자신의 편에 서 주었던 강의 이복형제 경원군은 상왕에게 반역 도당의 명부를 넘기는 것으로 목숨을 건졌고, 아들에 의해 꿈을 짓밟힌 생모와 함께 주국으로 도망쳤다.
강은 풍홍군을 떠올렸다. 옥좌에 앉아 있던 저를 보며 기꺼이 눈물을 흘려 주었던 아우이자, 누구보다 마음이 선했던 아이를 생각했다.
“잘 지내고 있느냐.”
“저하께옵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제법 그 자리가 입맛에 맞는가 보군.”
강의 우스갯소리에 세자가 보낸 무관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하께오선 이 나라의 성군이 되실 것입니다.”
“그럴 재목이지 않던가. 풍홍군이 그 자리에 앉아야 마땅했다.”
저의 업보를 떠넘겨 받은 풍홍군이 그저 안쓰러워 강이 짓는 미소는 씁쓸하기만 했다.
“세자 저하께옵서 뵙길 바라십니다.”
무관이 그제야 목적을 말했다. 강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 아이를 볼 수 없을 듯하다. 이 무책임한 이는 조용히 살다 조용히 사라질 것이니, 걱정치 말라고 전해 주게.”
강은 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그에게 내밀었다.
“형님께서 내게 주신 검이지. 이것을 그 아이에게 가져다준다면 매우 좋아할 걸세.”
무관은 미련 없이 돌아서는 걸음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산 아래로 향하던 걸음이 돌연 다시 틀어졌다. 그는 저에게로 다가온 강을 보았다. 다른 용무가 있는 것일까.
곧 강이 전하는 말을 귀담아듣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그 뒤로 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왔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법이 어디 있나. 은재는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지만 며칠째 보이지 않는 강을 제법 걱정하는 듯했다.
하염없이 열리지 않는 싸리문만 바라보는 은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남이는 마음이 꽤 갑갑했다.
“도련님.”
남이는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은재에게 다가갔다. 은재는 말없이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성질이 나서 제가 임금으로 모셨던 이를 욕해 볼까 했지만, 궁궐에서 익힌 버릇이 꽤 오래갔다.
“아부지, 나랑 놀러 가.”
고사리 같은 손이 은재의 손을 붙잡았다. 은재는 눈치를 보느라 바쁜 아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 그러자.”
혹여나 길을 걷다 마주치지는 않을까.
저의 뒤를 소리 없이 따라오지는 않을까.
아이의 손을 맞잡은 은재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
홍주의 작은 마을인 삼미골에서 나오는 인삼이 꽤 품질이 좋아 전국에서 인삼을 사기 위해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로 인하여 바빠진 자현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객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기에 바빴다.
은재가 소월과 함께 객주를 지나치려던 찰나, 말복 아범이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련님! 그렇지 않아도 모시러 가려고 했습니다.”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은재는 말복 아범에게 끌려가듯 객주로 발을 돌렸다.
“삼미골에서 나는 인삼이 주국에서도 소문이 났는지, 주국에서 인삼 수매권을 사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답니다. 그래서 이번 사절단이 주국으로 떠날 때 우리 상단 사람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자현은 매끄럽게 말을 이어 갔다.
“다들 인삼 농사짓는 데 바빠서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제 생각에는 도령이 함께 갔으면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자현의 말에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은재는 어물쩍거렸다.
“객주께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저는 남이와 소월이를 두고 갈 수 없을뿐더러 제가 자리를 오래 비운다면 객주 살림은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은재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국에 훤한 이가 함께 갈 것입니다.”
자현이 누군가에게 손짓하자, 은재의 시선이 낯선 사내에게 닿았다.
“함세휘라 합니다.”
“이자는 천양에서 주국과 거래를 하는 상단에서 일했던 자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지만 저는….”
“도령에게는 미안하지만, 가기 싫어도 가셔야 합니다.”
은재는 당황이 가득한 얼굴로 자현을 보았다. 그가 지어 보인 웃음을 이해할 수 없던 만큼,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힘에 부쳤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보며 자현은 더욱더 해맑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인연이 쉽게 끊어질 인연이던가.
* * *
육지의 끝, 가파른 절벽에 섰다. 바닷바람이 몸을 휘감고 지나가자 평소에도 맥을 추지 못하던 몸뚱이가 휘청거렸다.
뒤에 있던 함세휘가 등에 멘 봇짐을 부여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오금이 저려 오기 시작했다.
험한 산길을 내려가면 곧 부두에 도착할 것이었다. 부두에서 떠난 배는 공진포로 향할 것이고, 그곳에서 주국으로 가는 사절단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은재는 처음 나서는 여행길이 낯설고 신기했다. 믿음직스러운 함세휘라는 이와 눈에 익은 일꾼 몇과 함께 가는 길이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서 가십시다.”
삼미골 인삼이 담긴 함지박을 메고 있던 일꾼이 말했다. 은재는 그들에게 짐이 될 수 없어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출항 준비를 하느라 바쁜 부둣가에 당도해서야 쉴 틈이 생겼다. 은재는 부둣가 바로 앞에 있는 주막에서 대기했고, 인삼을 가져온 일꾼들은 배에 인삼을 싣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바쁘지 않으십니까?”
은재가 제 곁에서 떠나지 않는 함세휘에게 말했다. 함세휘는 슬쩍 은재에게 곁눈질을 하다 일꾼들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답이 돌아오지 않자 꽤 머쓱한 마음에 은재는 서둘러 그에게서 눈길을 뗐다.
짠 내가 짙은 바닷바람이 다시 은재에게로 휘몰아쳤다. 은재는 코를 킁킁거리며 그 짠 내를 맡았다. 배를 타고 가는 긴 여정 동안 질릴 만큼 맡게 될 냄새였는데도 신기해서 자꾸만 코가 벌렁거렸다.
배에 올라탄 일꾼 하나가 팔을 위로 들고 흔들어 댔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함세휘의 말에 은재는 어물쩍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더딘 걸음에 앞섰던 함세휘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함세휘가 물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뜬금없는 은재의 물음에 함세휘는 입을 다문 채 은재를 응시했다.
“함께 왔던 게 아닙니까…?”
들킨 것인가. 함세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계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했다. 짜기만 한 바닷바람에 섞여 있는 솔 내음이.
숲에서는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소나무 한 그루 없는 주막 주변을 맴돌고 있는 그 시원한 솔 내음이 은재에게는 참으로 또렷했다.
은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강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곧 함세휘의 입에서 한숨이 툭, 튀어나왔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함세휘는 그대로 발길을 틀어 배로 향했다.
홀로 남게 된 은재는 점점 더 진해지는 향을 느끼며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해 보려고 애를 썼다.
“어찌 이곳까지 따라오신 것입니까.”
곧 뒤에서 들려오던 인기척이 멎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객주께서 주국으로 가라 했을 때, 그때 어렴풋이 눈치챘습니다.”
뒤에서 탄식이 들렸다. 은재는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듯 무심한 눈길로 강을 보았다.
“저는 떠나려고 합니다.”
강의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런 게 자유겠지요.”
은재의 눈길도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 닥쳐오면 어쩔 수 없구나, 그리 이해하고 순응한 채로 살았습니다. 나리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 생각했었지요.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피할 수 있는 방법도 많았습니다.”
은재는 고개를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미련하게 살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좀 늦은 듯하지만 이제는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합니다.”
바닥에 나뒹굴던 강의 시선이 은재에게 닿았다. 헛헛한 저의 마음을 내보이면 조금이라도 연민을 품어 주지 않을까.
“그러세요. 행복이 뭐 특별하겠습니까? 그대가 좋다면 그게 행복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강은 늘 그랬듯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약하지 않으니, 무엇이든 잘해 낼 것입니다.”
곧 저에게서 멀어질 이를 향한 그리움이 툭툭,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며 강이 밝은 웃음을 내보였다.
그제야 은재의 얼굴에도 웃음이 드리웠다. 은재를 마주 보고 있던 강의 입꼬리가 더 높게 올라갔다.
천천히 돌아서는 은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강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저에게서 멀어져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보내 주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래도 한 번은 돌아봐 주지 않을까. 우스운 미련이 자꾸만 손을 앞으로 뻗으라고 했다. 그러나 강은 양옆으로 떨군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연한 잿빛의 도포 자락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강은 저에게로 달려드는 은재의 외격소를 깊게 들이마셨다. 진정한 작별이었다.
저에게서 돌아선 은재가 돌연 저에게로 몸을 틀기 전까지, 강은 은재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저를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는 이가 저에게 손을 내밀기 전까지, 강은 은재와의 이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에게 닿은 그 말이 살갗을 뚫고 제 심장에 처박히기 전까지만 해도, 강은 은재를 제게서 떠나보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인연이 쉬이 끊어지는 것이었던가.
강은 기꺼이 은재에게로 달려갔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