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잎, 흩날리는 3- 3장. 월계화 (上) (8/9)

꽃잎, 흩날리는 3

목차

3장. 월계화 (上)

3장. 월계화 (下)

3장. 월계화 (上)

편전 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강은 승정원에서 올려 보낸 상소문에 관한 비답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세준은 먼저 운을 떼지 않고 정해진 자리에 서서 강을 기다렸다.

일각 정도가 지났음에도 강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공사다망한 도승지를 붙잡고 시간을 축내는 이유를 알지 못한 상선은 강의 곁에 서서 세준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한 식경이 지났을 즘, 상선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전하, 도승지 영감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상선의 언질에도 강은 써 내려가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 상선이 다시 한번 언질을 주기 위해 세준의 눈치를 보았다. 세준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월정당에 가는 일이 너무 빈번하지 않은가?”

마침내 강의 입술이 떨어졌다. 강은 세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계속해서 비답을 끄적였다.

“맡은 책무에 소홀함 없이 잘 끝내고 다녀온 것이옵니다.”

“두 형제의 우애가 좋은 것은 알고 있었다만, 내 다른 생각이 든단 말이지.”

세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오해를 받아 기분이 나빴던 게 아니었다. 은재가 다른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강이었다.

저의 구겨진 눈살을 보지 않는 것처럼 은재의 진심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안 보려고 눈길을 돌리고 있었으니, 안 보는 것이라 하는 게 마땅했다.

그런 강이 야속했던 세준은 고개를 숙인 채 눈썹을 씰룩거렸다.

“아우가 외진 곳에 홀로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옵니다. 두 눈으로 잠깐이라도 보고 와야 할 듯하여 그리한 것이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원망을 품을 수 없다는 마음과 달리 세준이 직설적으로 꺼내 놓은 답은 강에게로 곧장 날아갔다. 그 답으로 붓의 움직임이 멈췄으니, 세준이 강의 정곡을 콕, 하고 찌르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도승지, 자네나 걱정하시게. 명색이 범랑의 도승지가 단칸짜리 초가집에 지내는 게 말이 되겠는가? 어서 회은동으로 돌아가시게.”

“성은이 망극하오나, 소신은 지금 생활도 나쁘지 않사옵니다.”

줄곧 답서에 꽂혀 있던 강의 시선이 위로 들렸다. 꽤 적나라한 언짢음에도 세준은 주눅 들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여간 벽창호 아니랄까 봐….”

매서운 눈빛으로 세준을 쏘아보던 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서로 눈길을 옮겼다.

“귀인에게 가 보시게.”

“귀인이라면….”

“이 궁궐에 귀인이 한 사람밖에 더 있는가.”

“어찌 귀인을 찾아뵈라 하시는 것이옵니까?”

강은 귀찮다는 듯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그 눈빛에 세준은 허리를 반으로 접어 넙죽 머리를 조아렸다.

강과 귀인의 인연은 강이 우연히 함천도에 닿았을 때 맺어졌다고 들었다.

때는 한겨울, 함천도의 추위는 숨을 들이마시면 폐가 얼어붙고, 가만히 있으면 뼈 마디마디가 얼어붙을 것 같아 계속 움직여야 할 정도로 거셌다고 했다.

강을 뒤쫓던 부경은 숨통에 들어차는 공기가 제 몸의 온기를 빼앗아 갈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추운 겨울에 어떤 이유로 강의 걸음이 함천도로 향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삿일이 아니었던 건 분명했다. 눈으로 뒤덮인 산을 넘어 마을을 찾아가던 두 사람의 눈에 희끄무레한 인영이 잡힌 것 역시 우연이 아닐 터였다.

‘사람 같지?’

‘모르겠습니다.’

‘확인해 보거라.’

‘싫습니다.’

두 사람은 소복소복 내린 눈으로 덮여 있는 그것을 보며 주저했다. 강은 부경에게 가 보라고 등을 떠미는 반면, 부경은 가지 않겠다고 그 자리에 뻗대며 버텼다.

그럴싸한 자세로 버티는 부경이 얄미웠던 강은 가자미눈으로 부경을 쏘아보고는 부경의 허리춤에 묶여 있는 장검을 빼앗아 들고 그것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으헉!’

장검의 손잡이를 잡고 검집의 뭉툭한 끝으로 눈을 걷어 내던 강이 소리쳤다.

‘부경아!’

다급한 강의 목소리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부경이 단숨에 강의 곁으로 내달렸다. 미끄러운 눈길 위에서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강의 곁에 선 부경은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고 헛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

‘원래 가시려던 도읍은 한 시진이 걸릴 것입니다. 여기서 이각 정도 걸리는 곳에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렵니까?’

‘그곳으로 가자.’

강은 한 치 망설임 없이 그 여인을 등에 업고 부경의 안내에 따라 길을 걸었다. 부경의 말대로 이각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심마니가 모여 사는 소부락이 있었다.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는 듯 여인은 소부락에 도착하고 하루 만에 정신을 차렸으며, 그곳에 사는 이들이 한여름에 말려 놓은 약재로 몸을 보신할 수 있었다.

‘어찌하다 그런 곳에서 쓰러진 것입니까?’

저를 덮쳤던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인은 짐승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도 달달 떨어 댔다. 시뻘건 코끝에 닿은 강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댁에서 도망치던 길이었습니다. 갈 수 있는 친정도 없어 무작정 길을 걷다 보니 이곳에 닿았더군요. 계속 떠돌아다닐 수 없어 누가 버린 집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어찌 도망친 것입니까?’

세상에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있겠느냐만, 강은 자신이 목숨을 구해 준 그 여인의 사연이 참으로 궁금했다. 부경은 강의 호기심에 질색하면서도 귀를 트고 여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저는 박가 자현이라고 합니다. 변변치 않은 가문이지만, 관아에서 일하시는 홀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이웃 마을의 부잣집 도련님과 혼례를 올렸지요. 지아비였던 도련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단지 건강이 나쁘셔서 자주 아프셨다는 것만 빼면요….’

처음 혼례를 올리고 일 년간은 아무 일도 없이 행복하게 오순도순 잘 지냈다고 했다. 자현은 처음으로 연정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일 년을 딱 채운 것을 기점으로 지아비의 건강은 나날이 안 좋아졌고, 손수 산에 올라 몸에 좋다는 약재를 캐어다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제 곁을 떠났다며 자현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시댁의 구박은 지아비가 세상을 뜬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라며 모진 말을 하는 시부모와 대놓고 구박하는 시동생까지. 자현은 그곳에서 남편 없이 꼬박 삼 년이라는 시간을 굳게 버텼다고 했다.

‘절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강과 부경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은 곧 자현에게 닿았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사는 모두가 절 죽이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자식을 왜 그리 들이고 싶어 안달을 냈나 싶었지요.’

서러움이 깃든 자현의 목소리에 강과 부경은 말을 아끼고 귀를 기울였다.

‘저와 홀아버지가 살던 집은 작아 어쩔 수 없이 시댁으로 들어간 게 문제였나 싶기도 했습니다. 한데 제 아비가 가진 몇 평 안 되는 땅이 몹시도 탐이 났었나 봅니다. 그것을 빼앗은 뒤에야 저를 죽이려고 눈독을 들이시더라구요.’

자현은 강직한 여인이었다. 펑펑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목소리와 달리 눈물 하나 고이지 않은 눈으로 강과 부경을 보며 제 속에서 가시지 못한 분노를 꺼내 놓았다.

‘일찍이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살던 곳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강의 물음에 자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라고 알려드리면 무엇 합니까. 이제 제게는 낭군님을 되찾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뭐, 우리가 땅을 되찾아 주는 그런 해결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빌어먹을 집구석을 부숴 버릴 수는 있습니다. 안 그런가?’

부경은 저에게 싱글거리는 강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땅을 되찾고 남편의 신위도 찾아옵시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방법이 없으니, 남편의 신위라도 품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저하던 자현이 마음을 돌리고 두 사람과 함께 시댁이 있는 마을로 가게 된 것은 하나밖에 없는 남편의 신위를 가져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강이 자신 있게 내뱉었던 대로 자현은 홀아비가 물려준 땅 문서와 남편의 신위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고 들었다.

세준이 아는 사실은 이게 다였다.

강이 어떤 이유로 자현을 궁궐에 들였는지 알 수 없었고, 남편의 신위를 되찾길 바랄 만큼 그이를 잊지 못했던 자현이 어떤 이유로 강의 뜻에 따라 궁궐에 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무엇인가가 세준에게는 불쾌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세준은 자신이 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사가에 있을 적, 전하의 뜻에 따라 작은 상단을 운영했습니다. 지금은 남의 손을 빌려 상단을 꾸려 나가고 있지만, 모두 전하의 뜻이십니다.”

자현이 나인에게 고갯짓을 했다. 나인은 옻칠을 한 나무 함을 세준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홍주도와 서경도에 흉년이 들었다지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구휼하는 데 보태십시오.”

세준은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하고 뚜껑이 열린 함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금덩어리를 보자 세준의 눈이 달처럼 커졌다.

“전하의 뜻이십니다.”

자현이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옵서 폭군이 되시겠다고 늘 말씀하시나, 제 눈에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 뜻이 그러하시다니 이루시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이 일은 함구하셔야 합니다.”

자현의 손짓에 근처에 있던 나인이 다시 움직였다. 세준은 자신의 앞에 놓인 손바닥 한 뼘 정도 크기의 나무 함을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이것은 월정당 도련님을 위해 쓰십시오.”

“하지만….”

“누구의 뜻을 대신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이니 받아 두십시오.”

아우의 자리를 빼앗은 자현이 밉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월정당에 머무는 은재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이 궁궐에서 유일하게 은재의 고달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준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내 저의 부족함을 깨달은 세준은 작게 탄식했다.

“이 은혜를 어찌 갚겠습니까…. 그저 감사합니다.”

“저도 갚아야 할 게 많습니다. 은혜를 갚는 셈 칠 것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군자는 덕을 알고 덕을 행하는 사람이었다. 알기만 하고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군자라 할 수 없었다. 덕을 알고 행하는 자를 존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세준은 감격스러운 눈으로 자현을 보았다. 눈물이 치솟을 것 같았지만, 체면치레할 줄 아는 세준은 자현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 * *

갖가지 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빼꼭하게 심어진 나무는 가슴을 답답하게 했고, 마음을 두렵게 했다. 월정당은 낮에는 고즈넉한 곳이었지만, 밤이 되면 바람에 움직이는 나뭇가지 소리로 잠들 수 없을 만큼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가 꾸벅꾸벅 조는 나인들의 눈을 피해 바깥으로 빠져나온 은재는 쉬지 않고 무작정 후원을 내달렸다. 계속 가다 보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개구멍 하나는 있겠지 싶어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저의 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까지 참아 가며 맨발로 뛰어가던 은재는 환한 불빛을 보고는 잠시 걸음을 멈칫거렸다.

숨을 몰아쉬며 빛으로 가득한 그곳을 바라보았다. 은재는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주저했던 마음을 제가 서 있던 곳에 버리고 다시 걸음을 떼었다.

절실한 마음을 품고 궁궐로 들어왔던 것과 같이 바깥으로 나가길 바라는 마음 또한 절실했다. 조금만 더 달리면 제 발로 들어온 수렁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여겼지만, 맥없이 풀려 버린 다리가 그러지 못하도록 은재를 궁궐 속에 가둬 놓았다.

철퍼덕, 고르고 평평한 바닥으로 넘어진 은재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무릎이 얼얼하고 손바닥이 쓰라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끝내 설움은 삼켰다.

아픔이 느껴지는 몸뚱이보다 마음을 더 아리게 하는 건 언제부터 뒤를 따라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이가 저를 매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그대를 내보낼 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차갑게 식어 버린 목소리가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지만, 은재는 부정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을까. 무작정 어두운 길을 뛴 것도, 그저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일념을 마음에 품은 것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고생 말고 월정당으로 돌아가세요.’

바닥에 깔린 흙에 쓸려 지저분해지고 벌게진 손바닥이 맥없이 허벅지 위에 놓여 있는데도 강의 눈길은 그곳에 닿지 않았다. 제 상처를 봐 달라고 소리 없이 아우성을 쳐도 마음이 변한 강은 봐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은재의 생각대로 그는 눈물을 보면서도 끄떡하지 않았다. 더 매몰차게 밀어내겠다는 듯 냉정한 눈빛으로 은재를 보았다. 흙투성이가 손바닥을 보았어도 괜찮냐고 묻는 헛된 짓도 하지 않았다.

‘형님을….’

설움이 섞인 목소리가 애원하는 것은 고작 피를 나눈 혈육의 안위였다. 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강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제가 있는 궁궐로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은재의 눈에 담긴 수많은 미련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나마 기대했던 일전의 저 자신을 질책했다.

‘서로 원망하며 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원망하세요. 증오하는 눈으로 나를 보아도 좋습니다. 내 몸뚱이에 칼을 꽂아 넣어도 좋지만, 이곳에서 나가는 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옛날 행복했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을 좀먹는 기분 나쁜 기억들만 주구장창 생각나서 술잔을 기울이던 강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김윤덕에게는 적당한 처결이 내려졌기에, 강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연좌로 묶인 김세준을 다시 천양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러니 세준의 복귀가 늦어진 이유는 모두 은재의 탓이었다. 은재가 강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강은 조금 더 빨리 세준을 천양으로 불렀을지도 몰랐다.

미움을 사기로 한 김에 제대로 해 보겠다는 듯 강은 두 형제의 우애를 의심했다. 저와 저의 형제가 나눴던 우애와 다를 게 없었음에도 두 사람의 우애는 무엇인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 애틋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 애틋할 필요가 있을까?

“전하…. 합환을 이루지 않으시면 기가 더 약해지실 것이옵니다.”

침전에 든 어의가 강 앞에 넙죽 엎드려 고했다. 생각에 잠겼던 강은 심드렁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전하….”

어의의 재촉에 강은 술잔을 들고 피식거렸다. 단숨에 목구멍 너머로 술을 넘기고 술잔을 술상 위에 놓았다.

강의 곁에 있던 상선이 비워진 술잔을 채우려고 했다. 흥이 나지 않는다는 듯 상선의 손길을 뿌리쳤지만, 상선은 부득불 술 주전자를 든 손을 치우지 않았다.

강이 다시 술이 담긴 잔을 들자 걷힌 소매 밑으로 드러난 손목에 상선의 눈길이 닿았다.

“여드레 전과 달리 색이 옅어지셨소.”

상선이 본 것을 전해 들은 어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꺼낼 답을 생각했다.

합환 증표의 색이 옅어진다는 의미는 곧 기력이 쇠약해졌다는 뜻이었다.

양인에게는 음기를, 음인에게는 양기를 전달하는 의식이 합환이었다. 규칙적으로 합환하지 않을 경우 병을 앓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합환 전에는 건강했을지라도 합환 증표가 새겨지고 나면 몸에 퍼진 기운의 양에 따라 건강이 결정되었다.

“전하…. 속히 합환을….”

임금도, 합환 증표를 나눈 상대도 위험해질 수 있는데도 임금은 합환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증표를 나눈 상대가 싫다면 새로운 상대를 들여 증표를 바꿀 수 있는데도 임금은 참으로 고집이 심했다.

“그리하지 않으시면 큰일이 날 수도 있사옵니다….”

궁궐 안은 물론이요, 전국을 뒤져도 고집으로 임금을 따를 자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응당 꺾을 수 있는 자도 존재하지 않을 터.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임금에게 대항해도 결국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떨어져 나가게 하는 이가 바로 이 나라의 지존이었다.

“이만 물러가라.”

마신 술의 양에 비해 멀쩡한 목소리에 어의는 바닥에 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자신의 권고가 먹히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패배감을 느끼며 어의는 침전에서 물러났다.

술잔을 집어 든 강을 보며 상선이 걱정스레 말했다.

“전하…. 그만 드시옵소서.”

“청선당(淸選堂)으로 가겠다.”

청선당은 귀인 박 씨, 자현의 처소였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걸음을 하는 게 드물지 않았던 터라, 상선은 서둘러 옷걸이에 걸어 둔 야장의를 챙겨 들었다.

* * *

월정당에서 나와 후원을 따라 걷던 은재 일행은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접어들었던 참이었다.

맞은편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던 아기나인 둘이 저희 앞에 있는 떠꺼머리 도령을 보고는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 서로 눈치를 보더니 미리 맞춰 놨다는 듯 걸음을 다른 길로 휙, 하고 틀었다.

“저것들이!”

은재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고 도망가는 아기나인들이 괘씸해 남이가 소매를 걷고 쿵쿵, 걸음을 내디디며 두 나인의 뒤를 따라가려고 했다.

궁궐 안에서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을 마주치면 악운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이라도 도는가 싶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드는 동급 나인들 때문에 열이 받는데, 어린 것들마저도 윗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라니 남이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남이야. 그만두렴.”

남이는 은재의 만류에 떼었던 걸음을 멈췄다.

“마마! 저것들은 혼이 나야 하옵니다.”

“어째서 혼을 내.”

“그야! 윗전을 보았으면 응당 인사를 해야지, 어찌 보고도 도망을 간단 말이옵니까.”

은재는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는 무심한 얼굴로 남이를 보았다. 은재의 낯을 확인한 송리가 그만하라는 듯 남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마….”

남이가 눈썹을 쭉 늘어뜨렸다. 울상이 짙은 얼굴을 보면서도 은재는 단호함을 지우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치 않다는 걸 내가 잘 알고 있다. 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으니 그만하거라.”

“그렇지만….”

거기서 한 마디만 더 붙였다간 은재에게 혼꾸멍이 날 것이라고 여긴 듯 남이는 쪼르르 달려 은재의 뒤에 섰다.

“지금 나는 분수에 맞지 않게 궁궐에서 지내고 있다. 속상한 네 마음을 알겠지만, 큰소리가 나서 좋을 게 없으니 참을 수 없어도 참아야 한다.”

남이는 속상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는 은재가 안쓰러워 죽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은재가 이 궁궐에서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게 돕는 것밖에는 없었다.

옆에 선 송리가 괜찮다는 듯 남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저와 달리 차분한 송리가 얄미웠던 남이는 눈을 흘기며 쏘아보다 서둘러 은재의 뒤를 쫓았다.

“마마, 같이 가시어요.”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은 다른 후궁들이 거느리고 다니는 궁인에 비해 보잘것없는 궁인을 뒤에 달고 다녔다.

첩지도 받지 못하고, 궁궐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을 안쓰러워할 만도 했는데, 궁인들은 오히려 그 뒤에서 비웃거나 손가락질을 해 댔다.

남이가 처음 월정당에 배정되었을 때엔 그나마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의 동정론이 궁궐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어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지만, 궁궐에 후궁이 들어오면서 여론이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첩지를 내려 주지 않은 것도 임금이고, 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도 임금이었다. 정작 손가락질을 당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건만 궁궐 안에서 임금을 손가락질할 수 있는 자가 없었기에 임금보다 약한 이가 몰매를 맞는 격이었다.

남이는 그게 억울하기만 했다.

후궁들의 문안 인사가 끝나자 대비는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는지 소박하게 다과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세 명의 후궁은 그 뜻을 거절치 않았다.

월정당에 기거 중인 아무것도 아닌 이를 데려오라 명했을 때, 대비는 내전에 있는 몇이 낯을 굳혔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이렇게 모두가 모여 담소를 나누는 게 처음이지 않나요?”

대비는 따뜻한 국화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내전에 앉아 있는 이들을 두루 훑어보았다.

귀인 박 씨는 세 명의 후궁 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사리가 밝았고, 소용 한 씨는 그럴싸한 가문에서 자라서 참 당찼다. 그리고 셋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소용 정 씨는 아직 궁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으나 천성이 착한 이였다.

셋 다 모자람이 없었지만, 대비의 눈길은 은재에게 가장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은재의 답을 기다리던 대비는 은재의 고개가 들리지 않자 못내 속상한 마음을 품고 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현은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으며 대비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대비마마의 은혜로 저희가 궁궐에서 잘 지낼 수 있사옵니다.”

“궁궐에 든 이상, 한 가족이 된 것이에요. 정답고 우애롭게 지낸다면 그 기운이 범랑과 이 궁궐을 지켜 줄 것입니다.”

“예, 대비마마.”

자현에게 닿아 있던 대비의 고개가 다시 은재에게로 향했다.

“월정당, 어서 드세요.”

주눅이 든 것인지, 찻잔을 들지 못하는 은재가 어지간히도 안쓰러웠다.

대비를 따라 자현의 시선도 은재에게로 향했다. 자현은 그저 슬며시 웃음을 짓다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는 듯 은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후궁들을 따라온 상궁들은 모두 내전의 복도를 지키고 있었고, 나인과 내관들이 대비전 뜨락에서 간만에 윗전들의 눈을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은재를 따라서 대비전으로 오기는 했으나, 상궁이 아니라서 내전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남이와 송리는 동기들이 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본 나인 하나가 두 사람을 반기며 말했다.

“월정당 떨거지들 왔니?”

“뭐?”

송리는 잔뜩 구겨진 남이의 얼굴을 보고는 뜨악했다.

궁궐 안에는 남이만큼이나 성질머리가 드센 아이들이 많았다. 지독한 궁궐에서 살아남으려면 성정이라도 독하게 굳혀야 했기에 어쩔 수 없지만, 웬만하면 남이를 건드는 일은 없었다.

“남이야. 그냥 무시하자.”

큰일이 날까 싶어 겁을 집어 먹은 송리가 남이의 팔뚝을 잡아끌며 다른 전각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기분이 상한 남이가 잡아당기는 손길에 끌려갈 리가 없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월정당 떨거지들이라고 했는데?”

“떨거지?”

“그럼 떨거지가 아니면 뭐니?”

오순을 선두로 삼삼오오 모여 있던 나인들이 까르르 웃어 댔다.

남이에게 맞서는 아이의 이름은 오순이었다. 후궁 중에서 제일 고약하기로 소문난 소용 한 씨의 처소를 담당하는 아이였다.

느닷없이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 남이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물이유취! 잊어버리지 마!”

남이의 곁에 찰싹 달라붙은 송리가 남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이유취(物以類聚), 같거나 비슷한 것끼리 어울린다는 말이었다.

세준이 남이와 송리에게 단단히 당부한 말이었다. 맞서 싸워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라. 경계하는 것은 좋으나, 은재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은 하면 안 된다.

잔소리로 여기고 넘어가면 그만인 말이었지만, 진심으로 은재를 생각했던 남이와 송리는 세준의 당부를 늘 머릿속에 담고 지냈었다.

남이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하여간 저렇게 멍청한 티를 낸다니까?”

그러나 남이는 남들이 저희가 모시는 윗전을 거리낌 없이 무시할 땐 세준의 당부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오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맞받아쳤다.

“뭐? 멍청한 티?”

“윗전을 보고 배운 바가 없으니 어쩌겠어. 우리 월정당 마마께서는 비록 첩지를 못 받으셔도 얼마나 학식이 높으신데.”

“뭐라고? 야, 남이! 너 말 다 했어?!”

제가 모시는 윗전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오순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남이에게 뛰어들어 멱살을 붙잡을 것같이 상황이 심각해졌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나인들은 괜한 일에 휘말릴까 싶어 슬그머니 오순의 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지루한 궁궐에서 다툼은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기에, 다툼을 말리지는 않았다.

“마마라고 불렀니? 너 그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인 건 알고 있어? 똑똑한 척 유세를 떨면 뭐 해. 제일 중요한 법도도 모르면서!”

“그럼 마마를 마마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니!”

“누가 마마니? 월정당 도령이 아직도 비씨 마마인 줄 아나 보네. 그치, 얘들아?”

오순은 다른 나인들이 제 말에 동조해 줄 것이라고 여겼지만, 주위가 조용했다. 오순이 나인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이미 제 곁에서 멀어진 나인들을 확인하고는 눈을 흘겨 떴다.

“뭐? 너 말 다 했어?!”

남이가 오순의 어깨를 휙, 잡아챘다. 씩씩거리는 콧바람에 오순은 코를 찡긋찡긋하며 열을 냈다.

“아니! 안 했어! 내 당장 감찰 상궁 마마님께 이를 거야! 정식으로 첩지를 받은 후궁 마마님께도 함부로 마마라고 못 하는데 어찌 첩지도 받지 못한 도령에게 마마라고 부를 수 있어?!”

“이게!”

남이의 길쭉한 팔이 오순의 새앙머리로 향해 뻗쳤다.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송리가 남이를 부둥켜안고 붙잡았지만, 손길이 어찌나 거친지 툭, 치는 손길에 송리가 뒤로 휙, 하고 나가떨어졌다.

주위에 있던 나인들은 저마다 어떻게 하냐는 말만 남발했다. 기어코 머리채를 잡은 남이가 오순의 머리를 흔들었다.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수 없다는 듯 오순도 남이의 댕기를 억척스러운 손으로 붙잡고 흔들었다.

멀찍이 있던 내관들이 서둘러 나서 두 사람의 몸싸움을 말려 보았지만, 그 둘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네 이년!”

그래도 무서운 게 있기는 했는지, 벼락같이 떨어지는 불호령에 남이와 오순은 재빨리 손에 쥐었던 것을 놓고 흩어졌다.

사내치고는 몸집이 아담하고 생김새는 고양이와 같았다. 남이는 제 앞에 선 이를 힐끔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유경파 가문의 위세를 믿고 궁궐에서 안하무인으로 소문난 소용 한 씨가 남이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자, 송리가 허겁지겁 남이를 제 뒤로 숨기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마마님!”

짝!

불시에 날아든 손길에 고개가 돌아간 송리가 당황 어린 눈으로 소용 한 씨를 바라보았다. 잘못을 한 것은 저인데 애먼 송리가 뺨을 맞자, 남이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남이는 매서운 한 씨의 눈빛을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잘못을 한 것은 소인입니다!”

남이의 대꾸가 기가 찼는지 한 씨가 코웃음을 쳤다.

“식구를 관리하지 못한 잘못으로 내린 벌이다.”

“송리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벌을 내리시려거든 소인에게 내리십시오.”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바락바락 대드느냐!”

먼저 시작한 것은 댁네 나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뒤늦게 남이의 머릿속에 세준이 일러 주었던 성어가 떠올랐다.

물이유취, 물이유취. 이미 맞서 싸웠기에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은재의 얼굴에 제대로 먹칠을 할 하극상을 벌여서는 더더욱 안 됐다.

남이는 입 안에 억울함을 가득 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소용 마마님 말씀이 맞습니다. 식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소인의 잘못이니, 백번 벌을 받아도 부족하지요.”

송리마저 한 씨에게 넙죽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구하자 남이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분한 마음에 눈물 콧물을 훌쩍였다.

“참으로 무식하기 짝이 없구나. 하긴 배운 바가 없으니 위아래도 알지 못하고 눈을 부라리겠지.”

은재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던 남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남이의 손목을 붙잡으며 송리가 말렸지만, 기어코 남이의 입이 열렸다.

“마마님, 제가 먼저 잘못한 게 아닙니다!”

“지금 누가 먼저 잘못을 했는지 따지는 것 같으냐? 참으로 어리석구나. 내 왕실의 기강을 모르는 네게 큰 가르침을 주어야겠다. 이 아이를 보연당(寶娟堂)으로 데리고 가거라.”

한 씨의 명에 뒤에 서 있던 상궁들이 남이의 팔을 부여잡았다. 가지 않으려는 남이를 보연당으로 질질 끌고 갈 기세였다.

“보연당, 어찌 이러십니까. 아직 어린아이이니 그러지 마십시오.”

난처한 얼굴을 한 소용 정 씨가 나섰지만, 한 씨는 매몰찬 눈빛으로 정 씨를 훑어보다 걸음을 떼었다.

“그만하십시오!”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자현이 나서자, 한 씨의 얼굴이 더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귀인께서는 물러나 계십시오.”

“이 아이가 잘못했다면 월정당에게 말씀하십시오. 소용께서 직접 가르치려 하시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닙니다.”

언짢은 티를 팍팍 내는 한 씨를 보는 자현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만두지 않겠다면 그대로 대비전으로 달려갈 듯한 자현의 기세에도 한 씨는 움찔거리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마지막까지 대비에게 붙잡혀 있느라 뒤늦게 도착한 은재가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마….”

상궁들에게 붙잡힌 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으로 은재를 보았다. 따끔거리는 뺨을 손바닥으로 가린 송리마저 눈시울을 붉히자, 은재는 사달이 났음을 자연스럽게 눈치챘다.

“저희 아이가 마마님께 무례를 끼친 것입니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줄은 모르는지 은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씨는 그 모습이 우습다는 듯 픽, 하고 웃었다.

“방금 월정당도 듣지 않았습니까? 어찌 이름도 올리지 못한 자에게 마마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왕실의 법도를 우습게 본 월정당 때문이지요. 왕실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월정당을 그냥 두고 보면 안 될 듯합니다.”

은재는 동요하지 않고 상궁들에게 붙잡혀 있는 남이를 바라보았다. 남이는 저를 뚫어져라 보는 눈길에 죄책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돌연 은재의 눈길이 한 씨에게로 향했다.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은재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마저도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 같았는지 한 씨의 눈빛이 더욱더 드세졌다. 한 씨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턱을 추켜들었다.

“내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넘어가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하십시오.”

“월정당!”

“이만 저는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은재의 눈길이 남이를 붙잡고 있는 상궁들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를 풀어 주게.”

상궁들은 저희가 모시는 한 씨의 말을 들어야 하나, 아니면 은재의 말을 들어야 하나 갈등했다.

우악스러운 표정으로 은재를 노려보던 한 씨에게 닿았던 상궁들의 눈길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남이의 팔을 붙잡았던 손에서 힘을 뺐다.

“누가 풀어 주라고 했느냐! 내 저년을 데리고 가 벌을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궁인들은 한 씨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지금은 비록 수그리고 있는 처지였지만, 한때 의기양양한 가문을 등에 업고 궁궐로 들어온 이가 바로 은재였다.

가문의 위세가, 임금의 총애가 언제 다시 몸집을 부풀릴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은재에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모두의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듯 한 씨가 비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월정당의 가문은 이미 풍비박산이 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주상 전하의 총애도 잃은 지 오래인데, 진정으로 전하의 성심을 되찾을 것 같으십니까?”

자현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평소에도 거만한 자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생각까지 짧은 사람인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만하십시오. 이 또한 무례임을 모르십니까?”

한 씨는 저를 막아서려는 자현을 흘겨보았다.

한미한 가문조차도 없는 혈연단신의 자현을 보며 한 씨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보다 품계가 높다는 이유로 대들지는 않았지만 자현을 무시하는 기색은 확실했다.

자현의 시선에서 벗어난 한 씨가 은재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월정당, 정신 차리세요. 거머리처럼 궁궐에 붙어 있어도 잃으신 마음은 되찾지 못하실 것입니다.”

제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에 은재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처음 궁궐에 들어왔을 때 품었던 마음을 잊은 지는 오래였다. 그저 보이지 않는 족쇄로 발목이 묶여 나가지 못하는 것인데….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은재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러나 이곳은 궁궐이었다. 나약한 모습을 보여 말의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해도 발악이라도 해 보는 게 마땅했다.

흔들리는 눈빛이 한 씨에게 고정되었다. 은재는 한 씨처럼 그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대단한 가문의 등에 업혀 궁궐로 들어오니까 세상을 손에 넣으신 것 같습니까?”

격분한 한 씨와는 다른 침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세게 때렸다. 얼핏 당황한 듯한 눈으로 은재를 바라보던 한 씨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곧 당황에 물들었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한 씨는 은재의 살갗을 찢어발길 것처럼 매섭게 노려보았다.

“예, 적어도 월정당, 그대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첩지를 받지 못한 주제를 파악하시고 그만 설치고 다니십시오.”

은재는 멀어진 거리를 다시 좁혔다. 주변의 사람들이 귀를 활짝 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한 씨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첩지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 내명부에 이름을 올리면 무엇 합니까. 오지도 않는 분을 기다리다 날밤을 새우는 이보다 제가 못한 게 뭐가 있을까요.”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한 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라고 했습니까!”

분을 이기지 못하고 번쩍 손이 들리자, 주변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이들이 움찔하며 작게 외마디 비명을 흘렸다.

은재는 때리려면 때려 보라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때려 보라는 듯 한 씨를 도발하고자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똑똑히 잘 들으세요. 소용의 몸에 주상 전하의 증표가 새겨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평생 처소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늙어 갈 운명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흥분한 티 하나 내지 않고 있는 대로 상대방의 분노를 끌어 올린 은재는 울분으로 요동치는 한 씨의 눈을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가까워진 거리를 다시 늘리고자 뒤로 천천히 걸음을 물리던 순간이었다.

“이게 어디서 막말이야!”

이를 바득바득 갈던 한 씨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은재에게로 손을 뻗었다. 멀어지기 전에 우악스러운 손길에 옷깃을 붙잡힌 은재는 한 씨가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엉겨 붙은 둘을 떼어 내기 위해 내관, 나인 할 것 없이 주변에 있던 궁인들이 두 사람에게로 몰렸다.

더 큰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모두의 마음과 달리 살갗을 후려치는 따가운 소리가 울렸다.

은재의 하얀 뺨에 도드라진 붉은 기운에 한 씨를 말리던 궁인들의 눈이 달처럼 커졌다. 옷깃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갈 듯하던 은재 또한 맞서 싸우겠다는 듯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손을 들어 올렸다.

“주, 주상 전하께옵서 드시옵니다.”

임금을 배종하는 행렬이 닿는다는 걸 미리 알리기 위해 대비전에 앞서 도착한 내관이 말했다.

은재는 제 옷깃을 붙잡고 있는 한 씨의 손을 거칠게 내치고 귀찮은 것을 떼어 내듯 툭, 밀쳤다.

“으앗!”

힘이라곤 하나 주지 않았음에도 한 씨가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곳에 있던 이들이 놀란 눈으로 한 씨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러운 건 은재도 마찬가지였다.

“월정당! 어찌 이러십니까!”

억울함으로 뭉친 눈물이 그의 눈에서 뚝뚝 흘러내리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며 은재의 눈치를 보았다. 차가운 눈길로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한 씨를 보던 은재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고개를 휙, 돌렸다.

참으로 우습게 때마침 대비전 안으로 들어오는 강과 은재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전하!”

서러움이 깃든 한 씨의 울음소리가 대비전 뜨락에 울렸다. 그 소란을 뒤늦게 알아챈 내전 안에서도 분주한 움직임이 보였다.

저에게 닿아 있는 눈을 바라보며 은재는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주쳤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순간, 은재도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필요치 않다고 여긴 은재는 임금에게 차려야 하는 예도 무시하고 발길을 휙, 돌려 작은 문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강은 처음부터 그곳에 은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마음대로 떠나 버린 은재를 개의치 않아 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강이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한 씨를 일으켜 세웠다. 눈물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모습에 강의 시선이 자현에게로 향했다.

강과 시선을 맞춘 자현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도망치듯 대비전에서 빠져나온 후 은재는 쌀쌀한 기운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후원을 계속해서 걸었다.

남이와 송리는 연신 불안함을 버리지 못하고 은재의 뒤를 쫓았다. 차라리 혼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과묵했기에, 자연스럽게 불편함이 따랐다.

남이가 옆에서 걷는 송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시종일관 은재의 눈치를 보던 송리도 침묵을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입을 뗐다.

“마마…. 날씨가 춥습니다.”

“마, 맞습니다…. 마마,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이 떨어지는 대로 걷던 은재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발을 멈췄다. 은재는 천천히 남이와 송리가 서 있는 곳으로 발길을 틀었다.

“혹… 후원에서 월계화를 본 적이 있느냐…?”

송리와 남이가 눈을 깜박거리며 시선을 맞췄다. 난데없이 월계화를 찾는 이유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벌써 다 잊어버린 것인가, 싶었다.

송리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워, 월계화는 후원에 있지 않사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라서….”

“그렇구나….”

원하던 답을 얻지 못한 은재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문득 월계화가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기억이라는 게 확실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야속했다. 때때로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사람을 괴롭히는 주제에, 잊히지도 지워지지도 않았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더 선명해지는 것이니,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은재는 손목 안쪽에 자리 잡은 증표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었다.

그 손길에 간지러움을 타는 듯 슬그머니 손을 뒤로 내빼던 이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서 가슴을 무너지게 했다.

‘꽃 같습니다.’

은재는 그때의 강이 그리웠다. 그때의 강은 참 잘 웃는 사람이었다. 웃는 것만 잘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손짓에는 애정이, 마주친 시선에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무슨 꽃을 닮았습니까?’

‘찔레꽃…?’

‘하하, 찔레꽃이라니요. 설마 모든 꽃이 다 찔레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요?’

‘예….’

강이 수줍음에 불타는 뺨을 손가락으로 톡, 하고 쳤다.

‘찔레꽃이 그리 좋습니까?’

‘네. 제겐 특별한 꽃입니다.’

‘월계화라는 꽃이 있습니다. 그 꽃도 찔레꽃 못지않게 곱지요.’

생소한 것에 호기심을 가진 듯 은재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본 적도 없고요.’

‘당연하지요. 그 꽃은 주국에서만 볼 수 있는 꽃입니다. 간혹 주국 사신단이 들고 오기는 하지만, 궁궐에서만 볼 수 있는 꽃입니다.’

톡, 톡, 뺨을 간질이는 듯했던 손이 스르륵 뺨을 덮고 아래로 내려갔다. 큼지막한 손이 목덜미에 닿자, 은재는 다시 잘 익은 홍시처럼 뺨을 붉혔다.

‘함께 월계화를 보러 갑시다.’

‘예…?’

강은 은재를 자신에게로 슬쩍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을 듯 닿지 않는 곳에서 멈추더니 작게 속삭였다.

‘월계화를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주국이라도 상관없으니, 함께 가서 그 꽃을 봅시다.’

은재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희망을 품은 시선에는 그 어떤 방해물도 헤치고 나갈 수 있도록 굳은 신뢰가 새겨져 있었다.

강은 그날 똑똑히 보았을 것이었다. 저의 기대를, 저의 희망을.

그것을 산산이 조각낸 게 누구였던가.

회상에서 빠져나온 은재의 눈이 심하게 요동쳤다. 금방이라도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쏟을 것처럼 눈시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마…?”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은재는 정신을 다잡았다. 떠올리면 괴롭기만 한 기억이 모조리 사라지길 바랐건만, 지워 내지 못하는 건 자신이었다.

모든 순간순간이 선명했다. 그 꿈만 같았던 시간을 어떻게 감히 버릴 수 있을까.

“돌아가자.”

월정당으로 향하는 걸음에는 보지 못한 월계화에 대한 미련이 깃들어 있었지만, 뒤를 따르는 남이와 송리는 그 미련은 알지 못하고 묵묵히 은재의 뒤를 따라갔다.

* * *

꿈은 허상이었다. 기억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꿈에서 무엇을 보아도 은재는 믿지 않았다.

잠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꿈을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그저 꿈에서라도 강을 만나길 바랐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꿈을 꾸는 게 고통스러워 차라리 잠이 들지 않기를 바랄 정도였다.

흐릿한 장면, 몽롱한 기분에 취해 바라보는 세상은 밝고 환했지만, 그 세상에는 색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꿈속에 자리한 은재는 속이 우그러지는 듯한 느낌에 두 팔로 제 몸을 껴안았다. 곧 제 눈에 보일 이를 기다리는 마음보다 어서 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느껴지지 않는 바람, 들리지 않는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저를 보며 웃는 강.

꿈은 꿈일 뿐이었다. 실제가 아니라는 생각 에 은재는 제 두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넘실거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주르륵,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절대로 떼지 않으려고 굳게 마음먹었던 것과는 달리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가길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듯 걸음이 멈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더 가까워지면 저에게서 도망가지 않을까.

더 가까워지면 차가운 눈으로 저를 보지 않을까.

더 가까워지면 날쌘 손으로 저를 밀쳐 내지 않을까.

주저하던 걸음이 끝내 떨어지면 강은 웃었다. 그리고 다시 멈추면 실망한 듯 탄식을 내뱉었다.

은재는 강을 똑바로 보았다.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듯 강의 시선이 은재에게 닿아 있었다.

‘어찌 웁니까.’

꿈속의 강이 말했다.

은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초조해하는 강의 목소리를 듣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그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올라 이를 꽉 깨물고 끅끅거렸다.

멈춰 있는 은재에게 먼저 다가올 수도 있으면서 강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은재는 그것마저도 서러워서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남이야, 어쩌지…?”

“일단… 기다려 봐.”

잠자리에 든 은재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은재의 곁에 있던 남이와 송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은재를 지켜보았다. 자칫하다 경기를 일으킬 수도 있었기에, 두 사람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각오를 하며 한시도 은재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한참 은재를 지켜보던 송리가 베갯잇을 축축하게 적시는 눈물을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입을 열었다.

“일어나시라고 깨울까?”

“아니…. 괜찮으실 거야.”

남이가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톡톡, 조심스럽게 명주 천으로 훔쳤다.

“슬픈 꿈이라도 꾸시나….”

“오순이 그년의 주둥아리를 후려쳤어야 했는데….”

울분이 가시지 못한 남이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송리는 곁눈질을 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순간, 잠든 은재가 가지런히 놓여 있던 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다리를 뻗대고 가슴이 천장을 향해 솟아오르자, 남이와 송리의 두 눈이 커졌다.

“남이야!”

송리가 외치기 무섭게 은재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겠는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꺽, 꺽, 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하얗게 질려 가는 모습을 보며 송리는 은재의 머리맡에 앉아 달싹거리는 은재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짓눌렀다.

남이는 명주 천을 돌돌 말아 놓은 막대기를 은재의 입술에 물렸다. 경기를 일으키다 혀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면 죽을 수 있다는 어의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남이의 걸음이 장지문 바깥으로 향했다. 어두운 후원 길을 내달려 내의원으로 향할 것이었다. 궁궐 내에서 달음박질이라면 남이를 따라갈 만한 궁인이 없었다.

방에 홀로 남은 송리의 얼굴에 울상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마… 제발….”

고통스러워하는 은재를 보며 송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마마…. 제발 일어나시옵소서….”

달빛에 의지해 후원을 가로질러 본궁으로 뛰어가던 남이의 눈에 멀지 않은 곳에서 밝게 빛나는 빛이 보였다. 아마도 후원 쪽으로 누군가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이는 더욱더 박차를 가해 뛰었다.

“누구냐!”

행렬 가장 앞에서 등불로 땅바닥을 비추고 있던 내관이 어둠 속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느끼고 소리쳤다.

“상선 영감! 월정당 남이입니다!”

남이는 벅차오르는 숨을 애써 삼키고 외쳤다. 그리고 빛과 가까워지도록 계속 내달렸다.

“월정당… 헉… 헉…. 또 경기를….”

가까스로 행렬 앞에서 달음박질을 멈춘 남이는 허리를 반으로 접고 숨을 몰아쉬었다. 거친 숨결 때문에 드문드문 떨어져 나간 말이 입 밖으로 나왔지만, 알아들은 상선은 강에게로 돌아서서 허리를 굽혔다.

“…전하.”

“어서 어의를 데려와라.”

“예, 주상 전하.”

젊은 내관 하나가 내의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강의 시선이 남이에게서 멈췄다.

“앞장서라.”

남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허리를 굽힌 채 세 발자국 뒤로 물러난 뒤에야 가야 하는 길로 몸을 돌리고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급한 마음에 남이는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제발 이번에는 임금님이 월정당 마마를 안쓰럽게 여기시길….

행렬의 가장 앞에 선 남이는 안쓰러운 은재를 계속 봐 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빌며 월정당으로 향했다.

어의가 돌아가고 월정당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경기를 일으켰던 은재는 아까와는 달리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안에 자리한 이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대비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깨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던 침묵이 강으로 인하여 산산이 조각났다.

장지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남이와 송리는 작게 헛숨을 들이마셨다. 이 사달의 원인인 남이가 이마를 바닥에 처박고 입을 뗐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이 보연당 나인과 문제가 있었사옵니다.”

“문제…?”

되묻는 말에 남이는 바닥에 대었던 이마를 떼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임금의 눈길은 여전히 자리에 누워 있는 이에게 닿아 있었다.

어느 순간 돌변해 제 목을 내칠지 모르는 권력 앞에서 남이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큰일은 아니옵고… 나인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말다툼이었사옵니다….”

“그럼 나인들의 싸움에 휘말려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는 것이냐.”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남이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송리를 보았다. 송리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보연당 나인이라고 했지.”

강은 남이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나인의 이름이 무엇이냐.”

오순과는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사이였지만, 함께 궁궐로 들어온 동기이기도 했다. 쌓인 정이라고는 미운 정밖에 없었음에도 같은 처지라는 생각에 남이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게다가 지금 임금에게서 느껴지는 분노로 보아 오순은 궁궐에서 쫓겨나면 천만다행이었다. 자칫하다 오순을 죽음으로 몰까 봐 걱정된 남이는 애먼 입술을 앞니로 우물거렸다.

“전하….”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꺼림칙했다.

보연당 한 씨의 가문이 현재 조정에서 권력을 득세한 유경파라는 사실을 모를 남이가 아니었다. 권력에 빌붙어 목숨을 부지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지만, 그렇지 않아도 은재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유경파가 진실을 입에 담은 대가로 은재를 공격할까 봐, 남이는 그게 무섭고 두려웠다.

“이름. 무엇이냐.”

재차 묻는 말에 답을 하지 않으면 목숨이 달아날 게 분명했음에도 남이는 말할 수가 없었다.

“주상 전하…. 마마를 잘 모시지 못한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부디 소인의 불찰을 용서치 마시옵소서….”

“혹 뺨을 이리 만든 것이 보연당 한 씨더냐.”

그 말에 기겁한 송리와 남이가 황송하다는 듯 윗몸을 더 바닥에 밀착했다. 바깥의 추위가 따뜻한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 남이와 송리를 한기를 느끼며 몸을 떨어 댔다.

“어찌… 소인의 입으로 윗전의 잘못을 고할 수 있겠나이까…. 차라리 소인의 목을 쳐 주시옵소서….”

줄곧 두 사람에게 등을 보이던 임금이 웃었다.

실소하듯 작게 툭, 내뱉은 웃음이 남이와 송리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보연당의 짓이었군.”

남이는 독을 먹은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던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이후 일어날 일을 상상하는 것은 도리를 어기는 짓이라며 머릿속에 떠오른 잡다한 생각을 지워 냈다. 숨을 내쉬는 것 또한 조심스러웠다.

“어찌하면 좋을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던 강이 허공에 닿아 있던 시선을 옮겨 붉어진 뺨을 바라보았다. 유난히도 하얀 얼굴이라서 뺨에 자리한 붉은 기운이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보지 않았으면 몰라도 눈에 들어온 이상, 강은 머릿속에서 은재의 붉어진 뺨을 지워 낼 수 없을 것이었다.

소용 한 씨를 내치자니, 강은 지금 저를 지지하고 있는 유경파가 아쉬웠다. 이미 자신의 사람으로 조정을 새롭게 환기한 강이라도 권력의 물살을 함부로 예상할 수는 없었다.

연파와 유경파를 가리지 않고 조정에 든 대신들이 저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아예 그 당파를 없애 버릴 생각이었지만, 아직 두 당파가 강에게는 쓸모가 있어 내칠 수가 없었다.

강은 손을 들었다. 허공에 붕 뜬 손을 뻗어 붉어진 뺨을 한 번 쓰다듬으면 마음이 나아지려나 했지만, 들리기만 한 손은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를 맴돌았다.

신경 쓰이는 뺨에 손을 가져다 대는 대신 강은 배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손등을 제 손으로 덮었다.

‘가슴속에 자리 잡은 화기는 타고난 성질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양기를 충분히 받지 못해 화기가 가라앉지 않고 날뛰는 것이옵니다. 주상 전하…. 속히 길일을 받으시어 합환을 이루셔야 하옵니다.’

강은 어의의 말을 떠올렸다. 기운을 전하는 데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강은 한동안 제 손바닥으로 은재의 손등을 감싸고 있었다.

우연일까,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보며 강은 작게 탄식했다. 구겨진 미간, 힘을 주어 앙다문 입술, 바르르 떨리는 턱. 잠이 든 채 서러움에 휩싸인 은재를 보자, 강은 날 선 칼이 제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나리….”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잇새로 빠져나왔다.

지그시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잠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접혔다. 강의 두 눈동자와 마주친 눈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감기고 떠지기를 반복했다.

강은 먼 곳을 보는 듯 초점을 잃은 눈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나리….”

저를 부르는 것일까. 찢긴 줄 알았던 심장이 콩닥거리며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강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간 제가 보았던 눈빛을 기억했기에, 강은 은재가 잠결에 부르는 이가 저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게다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믿을 수 없었다.

강에게 은재를 잃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허상과도 같았다. 지금 당장 애달프다는 눈빛으로 저를 보아도 정신이 들면 저를 원망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은 제 눈으로 보는 것을 믿지 않았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은재는 눈물로 축축해진 눈으로 강을 보았다. 꿈인 듯, 아닌 듯 오묘한 세상 중간에 갇혀 저를 보고 있는 강을 만나 기뻤다. 가슴에 묻어 놓았던 슬픔이, 그리웠던 마음이 한꺼번에 터지며 눈물과 함께 뒤섞여 흘러내렸지만, 은재는 두려웠다.

저를 이토록 다정한 눈길로 바라봐 주는 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애써 솟아나는 눈물을 참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은재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말을 꺼내 놓았다. 제 손등에 닿아 있는 손목을 잡아 끌어 올린 은재는 뺨을 어루만져 달라는 듯 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뺨 위에 강의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강은 헛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 밤을 기억하지 못할 은재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대로, 강은 은재가 이 어둠에 휩싸인 밤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 지독한 궁궐에서 저를 원망하며 버텨 주길, 제 곁에서 떠나지 않길. 더는 제 손으로 버릴 수 없는 은재가 저를 미워하면서 이곳에 머물러 주길 바랐다.

이른 아침, 해가 다 뜨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부름에 달려온 최익수의 걸음이 보연당으로 향했다.

“갑자기 이게 뭐람.”

최익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보연당 내전 안에서 한 씨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마마님, 어서 전대를 두르셔야 합니다.”

상궁이 접복의 허리에 두르는 전대를 들고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바쁘게 오가는 한 씨의 뒤를 쫓았다. 나인들이 들고 있는 상투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 씨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상투관을 든 나인의 손을 내리쳤다.

“그냥 드시라고 하게.”

“마마님….”

한 씨는 솜으로 누빈 접복을 제대로 여미지 않고 보료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 안에 입은 저고리가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자, 보다 못한 상궁이 나서서 접복을 여미려고 했다.

“감히 어딜 손을 대!”

한 씨의 까칠한 목소리에 상궁은 기겁하고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장지문이 열리고 최익수가 안으로 들었다. 이른 아침에 방문한 탓에 기분이 좋지 않은 한 씨처럼 최익수의 얼굴에도 불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외당숙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최익수는 상궁이 마련한 자리에 앉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한 씨의 옷차림새를 보다 쯧, 하고 시선을 한 씨에게로 옮겼다.

“일전에 월정당과 일이 있으셨다지요?”

“일이라니요.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모르는 일이라는 듯 콧방귀를 뀌는 한 씨를 보며 최익수는 더욱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녕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시려 하시는 것입니까?”

최익수의 으름장에 한 씨의 두 눈이 커졌다.

나이가 든 최익수는 임금에게 몇 번이나 파직을 청했지만, 매번 돌아오는 답은 불허였다.

예순 살. 오래 살았다면 오래 살았고, 젊다면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매일같이 입궐하여 정무에 임하는 것은 힘이 들 나이였다.

임금이 친히 내어 준 가마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고 해도 조정에 오래 서 있을 기력조차 없던 최익수는 병을 핑계로 일주일의 닷새는 집에 머물러 거짓 요양을 했으며, 궁궐에는 이틀만 입궐하여 저의 결정이 꼭 필요한 일만 처리하고 돌아가곤 했다.

갑자기 입궐하라는 어명을 받고 힘든 걸음을 한 최익수는 궁궐 어딘가에 있는 임금을 찾아 헤매고 다니느라 기력을 몽땅 써 버린 후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고 긴다는 의적도 아니면서 발놀림이 어찌나 날쌘지, 서고인 장규각으로 갔다는 말에 장규각으로 가면 대전인 명경전으로 갔다고 해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명경전으로 가서도 최익수가 임금을 알현하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지팡이가 없으면 몇 발 걷지도 못하는 최익수를 가지고 놀듯 명경전에 있어야 하는 임금은 그사이 경로를 바꿔 대비전으로 향했다며 대전 내관이 지친 최익수에게 말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추격전은 최익수의 걸음이 편전인 희경당에 닿았을 즘 끝이 났다.

진이 빠진 최익수는 임금이 허락한 의자에 앉아 임금을 알현했다. 이곳저곳 임금을 찾아다니느라 한 고생에 보람도 느낄 수 없도록 임금은 최익수에게 아주 짧게 말했다.

‘과인의 용건은 끝났네. 이만 퇴궐하시게.’

최익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임금을 보았다.

‘전하….’

그가 임금을 부르는 목소리에 상소를 읽던 임금이 고개를 들며 웃어 보였다.

‘아, 몸은 좀 어떠한가?’

‘아직 다 낫지 않았사옵니다.’

‘뭐 하는가? 어서 퇴궐하지 않고. 가서 푹 쉬시게나.’

‘소신을 부르신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혹 신이 불경한 죄를 지은 것이옵니까…?’

불안에 사로잡힌 최익수와 다르게 강은 밝게 웃었다.

‘몸이 안 좋아 자리에 누웠다는 영상이 잘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없네.’

‘하오면 어찌….’

임금은 재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이 떨떠름했던 최익수는 임금이 과연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축 처진 눈을 똑바로 뜨고 임금을 보았다.

‘월정당이 비씨에서 내려오던 날을 기억하는가? 그때 과인을 찾아왔던 나인이 있었지. 과인은 아직도 그 나인이 고했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나인은 어쩌다 월정당을 음해했던 것일까?’

최익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읊조리는 말에 최익수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월정당의 존재가 께름칙했던 이들이 누구였을까. 왕손을 인질 삼아 과인과 월정당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던 이들이 누구였을까.’

잠잠해서 알아채지 못한 줄 알았건만, 임금이 모르는 비밀은 없었다. 임금이 그 일을 수면 위로 올리지 않은 이유 역시 최익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사저 시절, 영상이 과인에게 말했었다. 과인이 양위를 받는다면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고 했지. 기억하는가?’

‘기, 기억하옵니다.’

유경파가 쓸모없었다면 임금은 능경파의 김윤덕처럼 유경파를 모조리 쓸어버렸을 것이었다.

‘과인은 조정을 과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꿨다. 그럼에도 경을 살려 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최익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이 과인의 생각과 달리 움직였기 때문이다. 경의 이득을 위해 과인에게 덤비지 않았기에 살려 둔 것이지.’

고개를 넙죽 숙였지만, 따가운 눈초리가 제게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최익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외로웠던 싸움에서 월정당만이 과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임금의 비웃음 소리가 귀를 찔러 대도 최익수는 임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과인이 이리 말하면 영상이 알아서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인의 자비는 생각보다 얄팍하다.’

오금이 저릿했다. 가까스로 의자에서 일어난 최익수는 좋지 않은 몸으로 임금의 앞에 엎드렸고, 임금은 그런 최익수를 달갑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그만 물러가라. 상선, 영상을 밖까지 배웅하라.’

‘예, 주상 전하.’

알현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는 최익수의 뒤를 상선이 따랐다. 최익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완전히 희경당 밖으로 나왔을 때 상선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상선은 최익수의 질문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했다. 궁궐에서 일어난 일을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 이였기에, 최익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보연당 마마님께 가 보십시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상선의 입이 떨어졌고, 최익수는 퇴궐하지 않고 곧장 보연당으로 향했다.

“월정당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네?”

한 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맞서지 마십시오.”

“외당숙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 씨는 최익수의 불만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문을 위해 궁궐로 들어온 자신에게 이처럼 하찮은 대우가 마땅하지 않다고 여긴 탓에 한 씨는 최익수를 앞에 두고 얼굴을 잔뜩 구겼다.

“이곳에서 이기고 지고가 어디 있겠냐만, 저는 첩지를 받았습니다. 첩지도 받지 못한 그자를 제가 이기지 못할 듯하십니까?”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니 잠자코 있으세요.”

“외당숙님!”

최익수가 자신의 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 씨는 경악하며 소리쳤다. 목청을 높이는 한 씨를 마주한 최익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손에 첩지라도 쥐고 있길 바란다면 제발 그 입을 닥치고 살거라. 만일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내 손으로 널 폐서인 시킬 것이다.”

궁궐에 들어와서 꿈꿨던 중전의 자리와 부귀영화가 모두 허상이었음을 깨달은 한 씨는 허탈감에 휩싸였다. 내뱉는 말과 다르게 심성이 약한 한 씨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최익수를 그곳에 남겨 두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 * *

소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그렇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임금의 탄일을 앞두고 궁인들의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지난해, 임금이 탄신연을 삼가겠다고 선언했지만, 한 나라의 임금의 탄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임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탄신연을 준비하기로 했고, 그들의 성의를 받아들인 것인지 임금은 군말하지 않았다.

진연도감은 무사히 설치되었지만, 진연도감에 속한 관원들은 명일에 행사를 열 것인지 발의하는 것조차도 임금과 눈치 싸움을 해야 했다.

“흠….”

진연도감에서 추리고 추려 임금에게 올린 안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강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린 채 눈치를 보던 관리들의 낯빛 또한 좋지 않았다.

“사냥. 좋습니다.”

등극하여 지금까지 일 년에 한 번 치르던 강무도 등한시했던 이가 의외로 사냥에 관심을 보였다. 반신반의하여 올릴까, 말까를 고민하다 가짓수라도 채우자 싶어 억지로 넣은 것이 사냥이기도 했다.

“하, 하오면 장소는 호청산이 어떠시옵니까?”

호청산은 궁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이었다. 고지가 높지 않고 들판이 반절이라 겨울철 꿩을 풀어 놓고 사냥을 하기에는 알맞았다.

그러나 바라던 바가 아닌 듯 펴진 줄 알았던 강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궁궐 사냥터인 망진동을 두고 무엇 하러 호청산으로 간단 말이오.”

진연도감에서 회의를 할 적에도 망진동이 거론되기는 했었지만, 망진동의 사냥터는 구실을 잃은 지 오래였다.

연파 중에서도 백성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는 이가 나서 말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창영궁(蒼寧弓)을 증축하며 집을 잃은 유민들이 그곳에 터를 잡은 지 오래되었사옵니다….”

오롯이 백성을 돌보아 민심을 얻으라는 뜻으로 입을 열었지만, 그는 삽시간에 어두워진 임금의 용안을 보고는 헛숨을 들이마셨다.

실수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슬며시 고개를 돌려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모두가 침묵으로 상황을 일관하고 있었다.

“망진동은 궁궐에 속한 땅이 아니오?”

“마, 맞사옵니다…. 하오나… 창영궁 일대를 무리하게 넓히는 바람에 터전을 잃은 유민들에게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으며, 망진동은 휘소(輝昭) 세자 저하께옵서 훙서하신 곳이라…. 병진년 당시에는 허허벌판으로 방치되어 있었사옵니다….”

쉴 틈 없이 눈치를 봐 가며 말을 잇던 이가 슬쩍 임금의 눈치를 보았다.

“병진년이라….”

제 뺨이 뚫어지도록 노려보는 임금과 눈이 마주쳤을 적, 그는 깜짝 놀라 뒤로 벌러덩 넘어갈 뻔했다. 애써 무릎에 힘을 주고 버텨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함부로 용안을 바라보았으니 오늘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위기의 순간을 목도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그는 자신이 느끼는 위협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목구멍이 좁혀지고, 오장육부가 꿈틀거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임금의 성정은 난폭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화함과 난폭함의 경계를 알 길이 없었다. 일단은 지르고 보자, 하고 말을 꺼낸 뒤 먼 지방으로 좌천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는 스멀스멀 저에게로 밀려오는 임금의 분노를 바라보았다.

“궁궐 재산에 백성이 사사로이 터를 잡고 있다…. 그것은 어느 나라의 법도이오?”

강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모두 내쫓으시오.”

그 말에 자리를 지키는 백관들이 술렁거렸다. 강은 그 일렁거림을 즐기는 듯했다.

“전하, 이미 그들은 병진년에 터전을 잃는 일을 겪었사온데, 어찌 또 같은 고통을 줄 수 있겠나이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나설 때를 가리지 않고 나서는 세준을 보며 강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세준을 필두로 백관들이 통촉해 달라며 통사정을 했다. 강은 그들의 행태가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

“일은 상왕께서 저지르고 왜 과인이 매번 수습을 해야 하는 것이오?”

허리를 굽히고 있던 모두가 입을 벌리고 놀란 기색을 내뿜지는 않았지만, 대전에 깔린 침묵은 다른 날과 다르게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도승지, 창영궁 일대를 증축하자 논한 이가 누구였소?”

세준은 저에게 날아온 화살에 뜨악했다. 병진년이라면 젖먹이 시절이라 세준도 아는 게 없었다.

“소신은… 그때 어려 알지 못하옵니다.”

강은 제 질문에 명답을 꺼내 놓을 이를 탐색했다. 그러다 얻어걸린 게 능경파의 극성 추종자이자, 시들어 가는 권세에 목을 매고 있는 공조 판서 민명탁이었다.

“공판에게 묻겠소.”

갑자기 저에게 쏠린 물음에 민명탁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굽힌 허리를 더 굽혔다. 최익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조정을 휩쓸었던 권세가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의 민명탁에게는 뒷배를 봐줄 김윤덕이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차, 창영궁을 증축하신 것은… 사, 상왕 전하시옵니다….”

“그렇다면 경의 생각은 어떠하오? 과인의 처사가 도를 지나쳤소?”

민명탁은 허리를 숙인 채 고개를 들었다. 임금을 직접 볼 수 없어 발치에 시선을 두었다.

임금이 평소에도 끔찍하게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가 아니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능경파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임금의 편에 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백성의 편을 들자니 병진년에 저희가 일궜던 창영궁 증축이 화살이 되어 돌아올 것 같았다.

“소, 소신은….”

강은 민명탁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보며 비웃음을 꺼냈다. 그때 저희가 내쫓은 백성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겠지.

“아무래도 불법으로 궁궐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무뢰한들을 내쫓는 게 낫지 않겠소?”

임금이 제 뜻에 동조하라는 듯 콕 집어 답을 정해 주었다. 그러나 입을 나불거리기 좋아하던 민명탁도 한물갔는지, 우물쭈물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상 전하, 망진동의 터가 아무리 궁궐의 땅이라 하여도 그곳에 거처를 마련한 백성들을 함부로 내칠 수 없사옵니다. 하오니 그들에게 새로운 터전을 내어 주시옵고 다가오는 봄에 거처를 옮기게 하시는 것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

강은 저에게 맞선 세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준 역시 불경임을 잊지 않았음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강과 눈을 맞추었다. 제 뜻에 반기를 든 세준을 보는 강의 시선이 좋지 않았다.

“과인의 뜻에는 변함이 없으니, 강행하도록 하시오.”

세준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누구보다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라고 여겼는데 그것도 진실이 아닌 듯했다. 세준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이를 의심했다. 탈을 쓰고 벗듯, 강은 성군과 폭군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주상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또다시 세준을 필두로 그곳에 모인 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읍소했다. 그러나 강은 뜻을 물릴 생각이 없는 듯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천양에 주인 없는 땅이 있을 리 만무하니, 이곳에서 자신의 재산을 내놓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과인이 그 공을 높이 살 것이오. 누구 나설 사람 있소?”

한 번 더 조정이 술렁거렸다. 지금의 강은 아까와는 다르게 그 술렁거림을 경멸하고 있었다.

“없소? 하긴 본디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그렇소. 남의 것은 낭비하고 제 것은 아끼는 법이오. 여기에 있는 백관들 중 제 것을 내놓는 사람이 없듯 과인 또한 과인의 것을 함부로 허비할 수 없소.”

무익한 이기를 처음 보았다는 듯 백관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것을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보던 강은 유해한 이기를 보았다는 듯 백관들을 보며 혀를 찼다.

“탄신연이 열리기 전, 망진동 사냥터를 말끔하게 정비하시오.”

* * *

“주상께서 태어나시던 날, 날이 꽤 추웠지요.”

그날 일이 대비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대비는 앞에 다과상을 두고도 연신 은재의 얼굴을 살폈다.

“올 탄일에는 날이 춥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줄곧 대비에게 닿아 있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은재는 김이 풀풀 올라오는 찻잔을 응시했다.

저에게서 떨어져 나간 시선에 대비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얼굴에 근심을 떠올렸다. 시집살이시키는 시어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곱고 뽀얀 뺨에 새겨진 붉은 상처가 대비의 심기를 간지럽혔다.

“월정당.”

대비의 부름에 은재는 허겁지겁 고개를 들었다. 살며시 당황이 깃든 은재를 보며 대비는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올 탄신연에는 꼭 참석하도록 하세요.”

올 것이 왔다는 듯 은재는 잘 지어지지도 않는 웃음을 애써 지어 보였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곳에 계속 숨어 있다간 영영 그대의 위치를 잃어버릴 것이에요. 이번에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둘러댈 것이라면 어미는 실망할 것입니다.”

임금을 낳았고, 궁궐에서 가장 큰 어른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기에 궁 안에서 대비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대비는 이번 탄신연을 통해 며느릿감으로 마음을 굳힌 은재를 꼭 중전의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은재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수없이 강과 은재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마치 그 사이를 단단하고 큼직한 바윗돌이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근처에서 지켜보는 처지만 갑갑할 따름이었다.

대비는 은재가 처음 궁궐에 들어와 문안 인사를 올리던 때를 떠올렸다.

순진한 겉모습과 달리 강한 마음을 엿본 대비는 자신의 벗을 떠올렸다. 어미의 강인함을 물려받았다면 범랑의 국모로도 손색이 없을 터였다.

은재를 향한 대비의 신뢰는 강했다.

“처음부터 중전의 자리는 월정당, 그대의 것이었어요. 비록 주상이 이 어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불효자라 하지만, 어미는 어떻게든 그대를 중전의 자리에 앉힐 것입니다.”

며칠 전에 대비전 뜨락에서 일어난 일로 결심을 굳힌 듯 대비의 포부는 다른 때와 달랐다. 그것을 지켜보는 은재는 그저 마음이 괴로울 뿐이었다.

“하오나 대비마마….”

“다른 말 할 필요 없습니다. 이 어미를 믿으세요. 어미가 그대를 도울 것입니다.”

대비의 결심은 은재의 바람과 맞닿지 않았다. 고장난명(孤掌難鳴), 외손뼉으로는 손뼉을 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은재의 바람을 알 리 없는 대비가 헛물을 켠 셈이었다.

“월정당, 지키세요. 지금까지 잘 버틴 것처럼 꼭 그대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곳은 당장 떠난다 해도 아쉬울 게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은재에게는 의문이 생겼다.

지켜야 하는 자리가 무엇일까. 처음부터 이곳에 제 것이었던 게 있었던가. 왜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일까.

“예, 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은재는 본심을 숨긴 채 미소를 지었다. 은재가 떠올린 미소에 안심한 듯 대비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대비전 뜨락에 내전으로 들었던 은재의 모습이 보이자, 근처 그늘에 있던 남이와 송리가 허겁지겁 은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곁눈질로 은재의 안색을 살피던 송리가 물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눈앞이 살짝 어지럽기는 했지만 은재는 늘 그랬듯 슬쩍 웃음을 짓는 것으로 답했다. 뜨락에서 벗어나 전각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걸음을 옮기던 세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때마침 문을 넘는 보연당 한 씨가 은재를 보고는 티가 나도록 눈살을 찌푸렸다. 그 뒤를 배종하고 있던 상궁 나인들의 표정도 윗전과 다를 게 없었다.

“대단한 뒷배를 둔 모양입니다만, 이곳은 왕실의 법도가 명확한 궁궐입니다. 그러니 자만하지 마세요.”

한 씨는 그대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최익수의 경고에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을 바깥으로 굳이 꺼내 놓아야 했는지 저를 지나치는 은재를 향해 톡 쏘았다.

“가자.”

한 씨는 새침한 투로 자신의 뒤를 따르는 궁인들에게 말하곤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은재 역시 한 씨가 겉으로 내보이는 적개심에도 굴하지 않고 걸음을 떼었다.

두 행렬은 큰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미끄러지듯 서로를 지나쳤다.

은재 일행은 대비전의 솟을대문을 넘어 월정당이 있는 후원 쪽으로 걸었다.

매번 그랬듯 맞은편에서 오던 궁인들은 멀리서 은재의 모습이 보이면 서둘러 방향을 바꿨고, 은재는 그런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커지면 나서서 남이의 분을 다스릴 뿐이었다.

“참으로 분합니다.”

“어찌 하찮은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이냐.”

“마마께서 중전의 자리에 무사히 오르셨다면 저것들이 저리 불경스럽게 행동했겠습니까? 소인은 저것들의 불경함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은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남이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틀었다. 남이는 저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길에 또 은재의 심기를 건드렸구나 싶어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네가 꾀하는 것이 있으니 저들의 불경함을 잊지 않겠다 하는 것이겠지. 나는 그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다.”

남이가 그리는 미래는 무엇일까. 그들의 불경함을 잊지 않는다고 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인은 그저… 마마께옵서 원래의 자리를 되찾으시길 바라는 마음에….”

“원래의 자리…?”

“예…. 마마께옵서는 가례를 올리기 위해 궁궐에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반드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셔야지요.”

저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은재는 마음이 우그러지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 내보일 수도 없었다.

궁궐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처음부터 이곳에 제 것이었던 게 있었던가. 왜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일까.

대비 앞에서도 떠올렸던 의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침묵이 불편했는지 남이가 슬쩍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은재의 얼굴에 깔린 슬픔을 보는 순간, 또 제가 입방정을 떨었다는 걸 깨닫고 얼굴색을 바꿨다.

“마마, 소인의 입이 문제입니다….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벌할 게 무에 있겠느냐. 저마다 바람이 있을 수 있지. 그렇지만….”

떨어졌던 입이 다물어지면서 세 사람이 있는 곳을 다시 적막이 휘감았다. 남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던 송리는 그저 고른 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이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제 입으로 그 말을 꺼내 놓는 순간, 은재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강은 저를 원하지 않았다. 궁궐에 자신을 위한 자리는 없었음에도 억지를 부리고 이곳으로 온 건 바로 저 자신이었다.

자책은 쉬운 것이었다. 남 탓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책하는 게 더 쉬웠다.

은재는 매일같이 자책했다. 궁궐에 들어오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 찔레꽃이 피는 곳을 다시 가지 않았어야 했다. 그보다 더 앞서, 강을 만나서는 안 됐다.

“희망을 품는 것은 좋으나… 나는 이곳에서 무엇도 아니다. 헛된 마음을 품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던 남이는 그저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바깥으로 꺼내 놓는다면 은재도 희망이라는 것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입이 근질근질한데도 말할 수 없는 건, 입단속을 철저히 하라는 임금의 어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날 밤 잠시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것일까? 남이는 의심이 깃든 눈초리로 이미 저에게서 등을 돌린 은재를 바라보았다.

남이가 일을 저지를까, 송리의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눈을 맞췄다. 송리는 조용히 하라는 듯 남이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나 잘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매서운 눈초리로 송리를 노려보며 속삭이던 남이가 은재가 멀어질세라 그 뒤를 바짝 따랐다. 괜히 나서서 남이에게 타박을 받은 송리 역시 억울해하며 서둘러 발을 떼었다.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크지 않은 마당을 홀로 오가던 세준이 마침 월정당으로 돌아온 은재를 보며 쏜살같이 곁으로 다가왔다. 은재는 걱정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세준을 보며 그저 그윽하게 웃음을 지었다.

세준은 기뻐 웃지 않는 게 확연하게 티 나는 은재의 웃음을 보며 눈썹을 살짝 움찔거렸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마음에 걸렸다.

“대비마마께서 부르셔서 찾아뵙고 왔습니다.”

시원하지는 않지만 마음이 놓였다는 듯 세준이 안도의 한숨을 옅게 내쉬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날도 추운데 자꾸 이리 찬 바람을 쐬시면 안 되십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무엇을요?”

“먼저 안으로 드십시오.”

안으로 들기 무섭게 세준은 은재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여러 색깔의 조각보를 이어 만든 보자기는 일전에도 받아 본 적이 있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예상하기 쉬웠다. 그래서 은재는 멋쩍어 세준이 내민 보따리를 바라만 보았다.

“무엇하십니까. 어서 열어 보십시오.”

세준의 재촉에도 은재는 섣불리 보따리를 향해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은재의 머뭇거림이 길어지자, 그 지루한 시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세준이 지척에 있는 남이에게 고갯짓을 했다.

남이는 주저하지 않고 세준이 가져온 보따리의 매듭을 풀었다.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의 뚜껑을 열고 한지를 걷어 내자, 붉은 선홍색이 남이의 눈을 사로잡았다.

“마마, 이것을 좀 보시옵소서. 색이 어찌 이리 고울까요.”

얼마나 고운 옷을 지어 왔는지 보라며 남이가 바구니 안에 고이 담겨 있던 옷을 꺼내 들고 유난을 떨었다. 침모가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지 접복의 주름을 손질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했다.

“이런 색이 나오려면 귀한 홍화로 물을 들였을 것이옵니다. 한번 입어 보시겠습니까?”

새 옷을 입은 은재의 모습을 기대하는 듯 남이와 송리가 눈을 반짝거렸다. 세준도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며 은재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은재의 눈길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쉬이 들리지 않는 고개에 멀리 쓸려 나가는 썰물처럼 그곳에 있는 이들의 기대감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남이가 접복을 고이 들고 은재의 곁으로 가 옆에 앉더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옷을 가져다 댔다.

“도승지 영감, 이것 보십시오. 참으로 마마와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 그렇구나.”

“마마, 정말 고우십니다.”

송리마저 나서서 칭찬을 했음에도 은재의 낯빛은 밝아지지 않았다. 완전히 김이 빠진 듯 남이는 은재의 몸에 대었던 접복을 거두고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어찌 그러십니까?”

세준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은재는 불편한 마음을 지우지 않았다.

“새 옷이라니요. 가지고 돌아가 무르십시오.”

오래 입은 티가 나지 않도록 남이가 심혈을 기울인 탓에 몇 벌 있지 않은 옷은 남루하지 않았고, 너절하지도 않았다.

멀쩡한 옷을 두고 새 옷을 들이는 것은 사치였고, 그럴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은재는 비싸고 귀한 비단으로 지은 접복을 냉큼 받을 수가 없었다.

“형님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곧 탄신연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게다가 새 옷을 마련할 때가 된 듯하여 가져온 것입니다.”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 있는 옷으로도 괜찮습니다.”

세준이 실망하지 않도록 미소를 지었지만, 이미 상심한 듯 세준은 대꾸를 하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긴요. 닳고 닳아서 천을 덧대도 비단이 삭을 지경입니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펼쳐 들었던 접복을 개키던 남이가 중얼거렸다.

유난히도 조용한 분위기에 번쩍 고개를 든 남이는 서둘러 은재의 눈치를 보았다.

은재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남이를 째려보았다. 그제야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남이는 입술을 말아 물고 눈썹 끝을 내려 울상을 지어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리 겉치장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마마를 업신여길까, 소신은 그것이 염려됩니다.”

“형님, 제가 언제 그런 것을 따졌습니까. 개의치 않습니다. 누가 저를 어찌 보든 그것이 무에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더는 맞받아칠 말이 없었지만, 세준은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방법까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신의 면을 생각하신다면 받아 주셔야 합니다.”

“…네?”

당황한 은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신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절약하는 것은 좋으나, 그런 차림새로 내로라하는 사대부들 앞에 나선다면 소신은 아우의 옷 한 벌 제대로 사 주지 않는 자린고비로 소문이 날 것입니다.”

“형님….”

“그런 소문이 난다면 소신이 어찌 남들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기도 싫었다. 입을 타고 다니는 말로 수모를 겪는 건 저만으로 족하다는 생각에 은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비록 은재가 입으로 패배를 말하지 않았지만, 세준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웃음이 떠올랐다.

세준에게서 떨어진 시선이 바닥에 닿았다가 슬그머니 남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곱게 잘 개켜 대나무 바구니 안에 넣어 둔 선홍색 옷을 본 은재의 입에서 끝내 패배를 인정하는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세준은 다른 보따리를 앞에 내려놓았다.

“새로 지어 온 옷과 어울리는 신을 사 왔습니다. 안감을 양의 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서 신어 보십시오.”

신이 난 세준이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 헤치고는 뚜껑을 열고 대나무 함을 은재에게 내밀었다.

“형님….”

“잊지 마십시오. 사치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소신의 체면을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체면을 세워 달라는 그 말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은재는 울컥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저를 걱정할 이들을 생각해 애써 눈물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가슴에 진 응어리가 부풀어 숨통을 막아 버릴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설움이 짙게 깔린 목소리에 세준은 남이와 송리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 눈빛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알아챈 남이와 송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어찌 눈물을 보이십니까.”

은재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뚝뚝 흘려 댔다. 그 모습이 애잔했지만, 세준은 은재의 곁으로 다가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 줄 수 없었다.

“모두 저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으로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형님께서 이리 되시지 않으셨을 텐데….”

“마마….”

“무엇이 잘못이었을까요…. 제가 왕손을 잃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까요…? 형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 때문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세준을 휘감았다. 지금껏 홀로 자책하고 있었을 은재를 생각하니 다시금 가슴속에서 강에 대한 미움이 치밀어 올랐다.

“어찌 그것이 마마의 잘못이겠습니까. 마마… 그리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발….”

바깥으로 새어 나갈 만큼 흐느끼는 소리가 커졌다. 터진 둑을 혼자 틀어막지 못하듯 세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는 은재를 지켜봤다.

“형님… 제발 그리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리 부르실 때마다 제 처지를 깨달으라는 것 같아 싫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불경스러운 일인 걸 알면서도 법도를 생각지 않고 은재를 위해 그리 불렀었다. 이 궁궐에서 주눅 들지 말라고, 나름 위신을 세워 주려고 그리했었다. 그런데 그 말이 은재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이었구나.

너무나도 늦게 깨달아 버린 마음에 제 가슴이 아스러지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 여기는 것마저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세준의 원망이 월정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을 강에게로 향했다.

“울지 마십시오.”

지금이 아니라도 좋은 수가 생길 것이었다. 세준은 때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설사 그 수가 강과 나누어 가진 의리를 해치는 일이라고 해도, 세준은 은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곧이어 세준은 토끼 눈과 조우했다. 그 붉은 눈시울이 가슴에 콕 박혔지만, 세준은 제 속상한 마음을 티 내지 않았다.

“이겨 내셔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더 굳세지라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은재를 보았다.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다른 때와 다른 세준의 모습에 턱 끝까지 맺혔던 눈물이 쏙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세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은재는 눈물로 촉촉해진 눈을 깜박거렸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또한 깨달으실 것입니다.”

이 궁궐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처음부터 이곳에 제 것이었던 게 있었던가. 왜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일까.

월정당에 머무는 동안 줄곧 반복되었던 의문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은재는 차마 세준을 올곧게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도승지 영감, 마마께옵서는 괜찮으십니까?”

“오수에 드셨다.”

장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세준에게 들러붙은 남이가 물었다.

“이젠 마마라 칭하지 말거라.”

남이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세준은 그 구겨진 얼굴을 보면서도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남이 앞에 다른 이가 있었다면 매를 맞을 만한 불경한 짓이었다.

“그렇지만 마마께 마마라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한단 말입니까.”

“마마라 불리길 원치 않으신다.”

저희끼리 마마라고 불러도 은재의 신분이 높아질 리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세준의 기대처럼 남이와 송리도 은재가 주눅 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그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은재는 이미 전부터 그러지 않길 바랐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결국 저희 마음이 편해지자고 은재의 마음을 무시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럼… 이제 어찌할까요….”

세준이 내쉬는 긴 한숨에 남이의 입에서도 한숨이 나왔다. 말없이 곁을 지키고 있던 송리도 한숨을 내뱉었다.

“사가에 계셨을 적처럼… 도련님이라 불러 드려야지.”

“예?!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궁궐입니다! 어찌 귀한 분께….”

남이가 울먹거리자 송리는 눈을 크게 뜨고 울상을 지은 남이를 보았다. 은재의 일에 매번 눈물을 아끼지 않는 남이였지만, 늘 우악스러운 모습만 보았던 송리에게 남이의 눈물은 볼 때마다 생소했다.

“싫으시다는데 억지를 부릴 수 없지 않겠느냐.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드려야지.”

그게 제 일인 양 어지간히도 서운했는지 남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세준은 그런 남이를 위로하듯 바라보다 발을 떼었다.

송리의 시중을 받고 디딤돌 아래로 내려온 세준은 다시금 은재가 있는 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또 한숨이 나올 것 같아 그는 입을 다물고 월정당을 빠져나왔다.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에 의지가 담겨 있었다.

* * *

“주상 전하, 도승지가 뵙길 청하옵니다.”

편전 복도 앞, 장지문을 지키고 있던 내관이 고했다. 여느 때와 같이 세준은 곧 임금과 대면한다는 사실에도 떨림 하나 없이 올곧게 서 있었다.

“들라 하여라.”

안에서 들리는 상선의 목소리에 문이 열렸다. 세준은 주저하지 않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강의 눈길은 언제나 그랬듯 상소에 닿아 있었다. 세준은 그의 시선이 저에게 오길 기다리지 않았다.

“소신, 전하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도 이상한 일인데, 고루한 샌님이 먼저 나서 청이 있다고 말하니 강의 관심이 당연히 세준에게로 쏠렸다.

“말하게.”

“어떤 벌을 내리셔도 괜찮으니, 소신의 무례함을 용서하시옵소서.”

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과인과 맞먹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아직 소신의 청을 말하지 않았사옵니다.”

비뚤어진 강의 눈썹을 보면서도 세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용기가 과히 가상해 강은 헛웃음을 꺼내 놓고는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벗으로서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벗으로?”

“예.”

세준은 도발이라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은 사내였다. 무엇을 원하기에 이리도 건방지게 구는가 했더니 실상은 가소로운 것이었다. 벗이었을 적에도 무례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 강은 코웃음만 쳤다.

“윤허하신 것이라 생각하고, 여쭙겠사옵니다.”

은재의 눈물을 본 탓에 무작정 강에게로 왔던 세준이었다. 그러나 막상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강을 마주하고 있자니, 목구멍까지 차올라왔던 말이 턱 하고 걸려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준은 제가 본 은재의 설움만 기억하려고 애썼다. 언젠간 터뜨려야 했던 일이기도 했다.

“반말이라도 할 듯한 패기로 와서는 어찌 아무 말도 하질 못해.”

강이 그런 세준을 도발하듯 빈정거렸다. 줄곧 바닥에 닿아 있던 눈길이 강을 향해 올라갔다.

“어쩌실 것입니까.”

세준의 질문은 포괄적이었다. 강으로서는 불명확한 그 물음이 의아할 뿐이었다.

“무엇을.”

“제 아우 은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준은 무지한 사람처럼 강의 앞에서 월정당에 속박된 은재를 입에 담지 않았었다. 아마 세준이 강에게 은재의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준은 그간 공적으로 강을 대했었다.

벗으로서 묻겠다, 그것은 곧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 놓겠다는 뜻이었다.

모른 척 덮어놓을 수만은 없는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강은 세준이 당혹스러웠다. 아군을 잃은 것 같은 허탈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고약스러운 성정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네.”

“있습니다. 내보내시든, 들이시든 결정하셔야 합니다.”

“어째서?”

되돌아온 말에 세준은 헛숨을 들이마셨다.

“어째서 내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거지?”

“그것은….”

강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그 웃음은 세준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자네의 아우가 궁궐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는 원치 않았다. 이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이 내게 있다, 내 탓을 하고 싶겠지.”

일순간 비웃음을 머금었던 입꼬리가 무너져 내렸다. 세준은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자네의 아우가 원하는 대로 이 궁궐에 남게 해 줬다. 아우의 처지가 딱하겠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정녕 은재가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빗겨 나간 강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다 다시 세준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은 짧았다. 얼굴에 함께 떠오른 미소를 보며 세준은 이를 부득 갈았다.

“나가고 싶다면 나가도 좋네.”

원했던 결과가 맞든, 아니든 세준은 아주 미약한 희망을 본 것 같았다. 너무나 쉽게 떨어진 허락에 마음이 허한 것은 기분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세준은 하해와도 같은 성심에 감복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세준이 강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 그 누구도 자네의 아우를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것이네.”

강은 충격으로 일그러진 세준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네 또한 돕지 못할 걸세.”

웃음이 어렸던 얼굴에 새롭게 떠오른 매정함을 보며 세준은 입을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세준을 비웃듯 강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갈 수 있다면 언제든 이 궁궐에서 나가도 좋다고, 월정당에게 전하게.”

세준이 돌아간 뒤에도 강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저를 원망하는 눈빛을 본 탓에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억울함으로 뭉쳐진 원망이 애먼 부경에게로 향했다.

“모두 내 잘못인가.”

일선에서 임금의 호위를 책임지는 겸사복장이 임금의 좌측을, 상선이 우측을 지키고 있었다. 질문이 누구를 지목하지 않았기에, 상선도, 부경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한 분위기가 지루하고 짜증이 났는지, 강은 잘 읽히지 않는 상소문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상선은 서둘러 강이 풀어 헤쳐 놓은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걷어 가 둘둘 말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군.”

강의 고개가 부경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순간, 강과 눈을 맞춘 부경은 불경을 저질렀다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강 앞에 몸을 낮췄다.

“겸사복장, 부경. 한낱 무관이 어찌 군주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겠나이까. 거두어 주시옵소서.”

강은 딱딱하고 무뚝뚝한 부경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되었네. 전처럼 말 상대나 해 주면 좋으련만…. 허수아비를 두고 말을 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흥이 나지 않네.”

그간 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법도 했지만, 부경은 허점을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 그 자체였다.

생명을 지니지 않은 무(無)의 존재처럼 강의 곁을 지켰다. 그 존재가 신경 쓰여 말이라도 걸어 보았지만, 매번 부경의 답은 짧고 간결해 싫증이 나게 했다.

강은 예전의 부경이 못내 섭섭하고 아쉬웠다.

“택원이 그랬듯 자네도 벗으로 지냈을 적으로 돌아가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앞서 세준이 다녀갔기에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강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부복한 부경은 그 뜻에 동의하지 않는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늘도 무슨 말만 하면 황공하옵니다, 혹은 황송하옵니다, 하는 재미없는 말만 줄줄이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황송하옵니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부경의 모습에 강은 흥미를 잃고 쯧쯧, 혀를 찼다.

“재미없다.”

부경은 저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관심이 없는지 부동자세를 지키며 입을 뗐다.

“황송하옵니다.”

강이 코웃음을 쳤다.

“붉은색 용포를 입고 어좌에 앉은 대가치고는 너무 많은 걸 잃은 것 같단 말이지.”

“전하….”

귀한 것을 손에 넣은 듯 두루마기를 공손하게 들고 있던 상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을 바라보았다. 상선과 눈을 맞춘 강은 슬쩍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상소를 건네받기 위해 손을 내놓았다.

염려되는 것은 많았지만, 상선은 감히 임금의 앞에서 먼저 나설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고이 들고 있던 상소문을 임금에게 내밀었다.

* * *

밤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시간이 바로 자시였다. 깨어 있어야 할 이 말고는 모두가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나무 사이를 비집고 불어 대는 차가운 바람을 뚫고 홀로 길을 걷던 이는 품속에 무엇인가를 꼭 품고 자리를 지키는 나무의 눈치를 보며 서둘렀다.

그이가 걷는 곳은 궁궐의 후원, 그리고 목적지는 월정당이었다.

이내 월정당에 닿은 이는 굳게 닫힌 월정당의 문을 바라보았다. 월정당을 에워싼 담벼락 너머를 훔쳐보는 불경스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고요한 사위를 얼마간 지켜보던 그이는 월정당의 평대문 어귀에 자리를 잡았다.

맨손으로 흙을 부숴 보았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좋은 수가 없을까,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입김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운이 좋았는지 그이의 눈에 잡힌 손가락 두 마디를 합쳐 놓은 굵기의 나뭇가지가 잡혔다. 그이는 그것을 주워 들고 단단하게 굳은 흙을 쪼개기 시작했다.

깊지는 않지만 제가 품속에 떠안고 온 것을 파묻기에 딱 좋은 깊이의 구멍을 보며 그이는 달뜬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빨간 보자기로 꽁꽁 싸맨 작은 보따리를 꺼내 흙투성이가 된 손에 쥐었다. 그것을 묻기 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헤집어 놓은 흙을 모아 보따리를 감추고 두 발로 꾹꾹 눌러 가며 그것의 존재를 은폐했다. 다시 사위를 둘러보던 그이는 다시 어둠 속으로 은밀하게 사라졌다.

* * *

탄신연이 당장 코앞으로 다가오자 더 많은 궁인이 바빠졌다. 연회장을 꾸밀 장식품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고, 연회에 낼 다과에도 많은 정성을 들였다.

범랑에는 임금의 탄일을 무사하게 보내면 나라에 좋은 징조가 생길 것이라는 미신 같은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탄신연을 기획하는 진연도감도, 나서서 일해야 하는 궁인들도 허튼 마음을 품지 않고 성심성의껏 제 할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명대로 궁궐 사냥터인 망진동에 살고 있던 유민들은 애써 찾은 터전을 잃고 도성을 떠돌아야 했다.

그 원성이 도성 안에서만 일어난 것이라면 천만다행이겠지만,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유민들이 도성 밖으로 나가면서 임금의 포악한 성정에 대한 소문도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다.

상서로워야 할 기일을 앞두고 그 소문을 접한 대소 신료들은 이를 임금에게 고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고한다고 해도 임금이 관심이나 가질까 싶었다.

“주상 전하, 선왕들께오선 탄신일을 앞두고 형편이 어려운 백성들에게 구휼을 베푸셨나이다.”

대전에 있는 모두가 도성 안팎에서 떠도는 소문으로 눈치를 보고 있는 와중, 호조 판서가 나섰다. 신료들의 눈길이 삽시간에 그에게 닿았지만, 그는 그 눈길을 알지 못한 듯 다시 입을 뗐다.

“탄일을 맞이하였으니, 구휼청을 열어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성군이 되시옵소서.”

비뚤게 어좌에 앉아 있던 강의 눈길도 당연히 그에게로 향했다. 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대전에 울리지 않을 그 미약한 웃음이 들릴 정도로 신료들의 신경이 강에게로 쏠려 있었으나, 강은 그것을 알아채고도 내색하지 않았다. 강은 어떻게 하면 신료들을 경악하게 할 수 있을지, 하찮은 고민을 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듯 호조 판서가 고개를 빼꼼 들고 주변을 살폈다. 눈치를 보지 않고 의례를 말했거니와, 저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시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도승지밖에 없다고 여겼는지, 호조 판서의 시선이 용상 가까이에 있는 세준에게 닿았다. 그와 시선을 맞춘 세준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길일을 맞이하여 구휼하는 것은 범랑에서 꼭 치러야 하는 의례와 같사옵니다. 주상 전하께옵서도 선왕들의 지혜를 본받으시어 구휼청을 여시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강은 눈길을 옮겨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 세준을 보았다. 그리고 호조 판서에게 했듯이 똑같이 코웃음을 쳐 주었다.

빈정거림이 분명한 그 웃음에 신료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군주를 함부로 예측하는 것은 죄와 같지만, 지금의 임금은 예측이라도 해야 맞설 수 있었고, 그렇게 해야 충격도 덜했다.

세준뿐만 아니라 모두가 임금의 하명을 침묵으로 기다렸다. 누구 하나 나서서 재촉할 만도 했는데 이미 포악스러운 성정을 보았으니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헛숨을 내뱉는 듯한 웃음소리가 짤막하게 울렸다.

“망진동에 살던 유민들을 내쫓고 구휼을 베풀라…?”

앞으로 나섰던 호조 판서는 비록 당파로 나뉘어 있지만 함께 국정을 논해야 했던 동지들이 저를 왜 달갑지 않게 보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것이 호조 판서의 다리를 달달 떨리게 했다.

“과인이 축하를 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어찌 과인이 구휼을 베풀어야 하는지 모르겠소.”

심드렁한 강의 목소리에 신료들은 아연실색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국가의 사직이 그다음, 군주가 가장 가볍다는 가르침을 배웠다고 하기에 임금은 너무나도 백성을 등한시하는 군왕이었다.

애초에 군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전하, 탄일에 구휼하는 것은 왕실의 전통이었사옵니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것 역시 군왕의 도리이온데, 어찌….”

조정에 서 있는 이들 중 임금에게 간언할 수 있는 사람은 세준밖에 없다는 듯 이번에도 제 몸을 바쳐 나선 사람은 세준이었다.

“왕실의 전통, 군왕의 도리. 좋소. 그러나 과인이 불쌍히 여겨야 하는 백성들이 어찌하다 곤경에 빠졌는지 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구휼한다면 그들의 처치가 더 나아지는 것이오?”

“그것은….”

“흉년에 들었다. 재해를 입었다. 다들 같은 말을 떠들지만, 그에 대한 방도는 하나 내지 못하면서 과연 국정을 논하는 백관들이라 할 수 있는지…. 과인은 그저 의문이 들었소.”

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료들의 허리가 굽어졌다.

“꺼내 놓는 대책이라고는 하나같이 얕은 수로 속이려고 하는 꼴이니, 제대로 고민했다면 망진동에 유민들이 정착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겠소?”

세준은 혼란스러웠다. 또다시 성군과 폭군을 넘나드는 강이 의뭉스러웠다. 이유가 무엇일까. 왕을 모셨던 대소 신료들을 공격하기 위함이라면 선을 분명하게 그어 놓고 질책과 함께 악선례를 바로잡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강은 변덕스러운 사람 같았다.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일까.

“길일을 맞이하여 구휼을 베푸는 것은 허하겠소. 그러나 양식을 내주어 잠깐 배를 불리는 게 좋은 방책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각 처에서는 이에 따른 방도를 찾아오시오.”

강은 그제야 입꼬리를 늘려 웃음을 지었다. 제 발아래에 있는 신료들의 낯빛이 참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편전으로 드는 강을 뒤따라온 이는 세준이었다. 강은 그런 세준이 귀찮다는 듯 혹은 지난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듯 달갑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잔소리하려 따라왔겠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강이 책상 앞에 앉아 세준이 그 앞으로 다가갔다.

“무엇을 원하시는 것이옵니까.”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네.”

“소신에게 귀띔이라도 주시옵소서.”

강은 다른 때와 달리 저를 바라보는 세준의 눈빛에 담긴 애절함에 헛웃음을 쳤다. 며칠 전, 제 아우를 어찌할 것이냐며 따지고 들었던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성군이 되시길 바라시옵니까, 아니면 폭군이 되길 바라시옵니까.”

돌려 말하지 않는 세준을 보며 강은 방실방실 웃었다.

“굳이 듣길 원한다면 말하겠네.”

강은 웃는 것 말고는 다른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이처럼 참 해맑게 웃었다.

“나는 폭군이 되고 싶네.”

“예…?”

강은 하얗게 질린 세준의 낯빛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이왕이면 역사에 길이 남을 폭군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전하….”

“숨을 죽이고 있는 조정 대신들에게 그럴싸한 명분이 되지 않겠는가.”

세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전하께옵서 폭군이 되시겠다고 늘 말씀하시나, 제 눈에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 뜻이 그러하시다니 이루시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귀인 박 씨, 자현이 장난스럽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강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게 확실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제 입으로 그 말을 꺼내는 것은 대역죄나 다름없기에 세준은 턱에 힘을 가득 줄 수밖에 없었다.

“염려 말게. 내가 바라는 그날이 온다고 해도 자네의 아우에게는 해가 미치지 않을 것이니. 자네는 내 안위보다 아우의 안위가 우선이지 않은가.”

의뭉스러웠다. 웃음 속에 가려진 본심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어 제 눈으로 보고 있는 강의 존재 자체가 의문으로 다가왔다. 곧 세준은 강이 어려운 길을 택했고, 스스로 그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세준은 강을 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강이 파멸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임금의 곁을 지키는 상선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용상에 앉은 이들은 항상 그랬다. 당연한 것을 하면서도 생색을 내기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의 임금은 그렇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이 나라의 백성을 생각하는 임금이었기에, 스스로 폭군이기를 자처한 임금이 안타까웠다.

임금이 가장 아끼는 신하이자 아군인 도승지가 임금을 의심하는 눈으로 보았다. 감히 나설 수 없는 처지였기에, 상선은 제가 알고 있는 것을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선은 기대감을 잃지 않았다. 역사가 임금을 등한시한다고 해도 언젠간 임금의 넓은 성심을 알아봐 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 *

“혹여 무슨 일이 있거든 꼭 깨워야 한다.”

“걱정 마라. 잠귀 밝기로는 내가 이 궁궐에서 으뜸이다.”

월정당 큰방에 잠자리 준비를 마친 남이가 건넛방으로 넘어가기 위해 문을 나서며 작은 목소리로 송리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마음 놓고 푹 자지 말고!”

“알겠어. 걱정 말고 어서 건너가렴.”

월정당은 궁궐 안에 있었지만, 궁궐의 다른 전각과는 달리 단청 하나 없고 사삿집처럼 수수했다. 제일 넓은 방에는 다락이 있었고, 시중을 드는 하인이 머무는 쪽방도 있었다.

회은동에 있을 적 꺽새가 잠들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송리가 몸을 누이는 곳이었다.

송리는 이미 잠이 든 은재를 바라보았다. 한번 잠이 들면 깨는 법이 없어 밤을 새우는 일이 적었으니, 송리는 오늘 밤도 안녕할 거라는 듯 자신 있는 모습으로 남이를 배웅했다.

밤이 지나면 탄일이었다. 궁궐에 있는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큰 잔칫날이라, 오늘 밤은 잠들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었다. 남이도 내일 있을 탄신연이 기대됐지만,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내일 돌연 은재의 마음이 변해 도승지 영감이 손수 마련한 새 옷과 새 신을 넣어 두라는 말을 하지 않길 바랐다. 몇 번이나 대비의 명을 거역했으니, 이번에도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닫힌 문을 보면서도 남이는 시름을 놓지 못하고 대청마루를 얼쩡거리다 아궁이에 불이 죽지 않았는지 살필 겸 대청마루를 막아 놓은 분합문을 열고 디딤돌에 놓인 신발을 주워 신었다. 기단을 딛고 건물을 따라 걷던 남이는 아궁이가 있는 쪽문을 열고 좁은 문 속으로 쏙 사라졌다.

깊은 새벽,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잠귀가 밝은 송리가 잠에서 깼다. 송리는 쪽방 문을 살짝 열고 그 틈으로 방으로 들어온 이를 확인하려 숨을 죽였다.

어두웠던 방 안에 환한 빛이 들어차기 시작하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이의 모습도 환히 드러났다. 송리는 와야 할 손님이 잊지 않고 찾아왔구나, 그리 생각하고 쪽문을 살며시 닫았다.

그리고 자리에 누워 웃음을 지어야 하나, 걱정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매일같이 새벽이 되어서야 월정당으로 찾아오는 손님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애틋한 마음으로 찾아오면서 밝은 낮에는 보고 싶은 그 마음을 어떻게 참을 수 있는 것일까. 오해를 품고 있는 마음을 달래어 준다면 이리 밤손님처럼 늦은 밤 걸음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만약 저였다면, 잊을 수 없어 밤에라도 찾아와야 할 만큼 가슴에 품은 연정이 크고 깊다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제 연심을 꺼내 보였을 것이었다.

송리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애써 이해되지 않는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그리고 좁은 방에 누워 낮은 천장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오랫동안 머물지 않을 손님이 방을 나설 때를 기다렸다.

동이 트기도 전에 잠에서 깬 송리는 은재가 기침하기 전 남이와 함께 살림을 보기 위해 쪽방에서 기척 없이 나왔다. 곤히 잠이 든 은재의 이부자리를 살피고 방을 나서려던 찰나, 콜록대는 잔기침 소리가 방 안에 짧게 울렸다.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춘 송리는 괜한 기우겠지, 하는 생각에 장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도련님께서 기침을 하시더라.”

부엌간 아궁이 앞에 앉은 송리는 밤새 죽은 불씨를 살리며 남이에게 말했다.

“뭐?”

“딱 한 번 콜록, 하셨어.”

솥단지에 차가운 물을 붓고 소세물을 올릴 준비를 하던 남이는 돌연 손에 쥐고 있던 바가지를 내려놓고 큰방으로 향했다.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그사이 하늘에 빛이 들어차 있었다. 일어날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게 또 큰 걱정이었기에 남이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장지문을 열었다.

보폭을 좁게 해 바닥을 딛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어 은재의 곁으로 간 남이는 그 앞에 낮게 앉았다.

그리고 살림하느라 차가워진 손을 맞대어 쓱싹쓱싹 비벼 대며 찬기를 뺐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입으로 호호 불었다. 어느 정도 손이 녹자 남이는 은재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꽝꽝 언 손이라 온도가 평소보다 높게 느껴졌지만, 기침 소리가 짧았다던 송리의 말대로 별일이 아닐 것이라는 게 남이의 결론이었다.

“도련님.”

슬쩍 은재를 깨워 보려고 불렀다. 지긋이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은재가 잠에서 깼다.

“…늦었구나.”

“어디 편찮으신 곳이 있으시나 싶어서….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아픈 곳이 있으면 말할 터이니, 섣불리 걱정하지 말렴.”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은재는 밤사이 흐트러졌을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상투관을 다오.”

방금 잠에서 깬 사람치고는 참 부지런했다.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오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은재는 경대와 상투관을 찾았다. 남이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에 싱긋 웃음을 짓고는 은재에게 경대와 은으로 만든 상투관을 가져다주었다.

“도련님, 소세물을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남이는 서둘러 장지문 앞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김이 폴폴 올라오는 대야를 든 송리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송리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걸으며 무사히 은재의 앞에 물이 담긴 대야를 내려놓았다.

잘 말아 묶은 상투에 때가 타지 않고 반짝거리는 상투관을 덮어쓴 은재가 상투관을 고정하기 위해 얇은 비녀를 꽂았다. 단장을 마친 은재의 눈길이 송리에게로 향했다.

“송리야.”

따뜻한 물에 명주를 담가 적시던 송리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예, 도련님. 말씀하십시오.”

“혹… 밤사이 누가 다녀갔느냐?”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에 송리는 하마터면 밤사이에 다녀갔던 손님의 존재를 말할 뻔했다. 입을 꾹 다물고 남이를 보자, 은재의 시선도 남이에게로 움직였다.

“누가 다녀간 것이더냐…?”

잠결에 무엇을 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밤손님이 왔다 간 게 분명하다는 듯 은재의 얼굴에 확신이 들어찼다. 그 손님의 존재를 은재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남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 송리 대신 재빨리 입을 뗐다.

“아뇨. 밤에 문이 닫힌다 해도 안전치 못하다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합니다. 누가 그 늦은 밤에 이곳을 찾아오겠습니까?”

“그렇지…. 궁 안이라고 해도… 쉬이 오갈 수 없었을 테지.”

“밤새 무엇이라도 보신 것입니까?”

남이는 은재가 의심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떠보듯 슬쩍 물어보는 말을 알아챈 듯 은재는 남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도련님…?”

“아니다. 잠결이라 헛것을 본 것 같구나.”

곧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송리와 남이는 안심할 수 없었다. 혹여 은재가 밤마다 찾아오는 손님에 대해 알게 된다면… 이후 벌어질 일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을 졸여야 했다.

“도, 도련님…. 어서 소세를 하십시오.”

송리는 명주 천을 은재에게 내밀었다. 왠지 모르게 겁을 먹은 것 같은 송리가 이상했지만, 은재는 벌벌 떠는 손을 보고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았다.

헛것이든 실제든 마음도, 생각도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깊숙하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종묘에서 의례를 마친 뒤 사냥복 차림으로 환복한 문무백관들이 사냥터 입구에 몰려들었다. 이번 사냥에 참석하는 신료들은 모두 당상관으로 나이가 많았지만, 실력은 녹슬지 않은 이들이었다.

대대적으로 계획하여 실행하는 강무와는 달라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사냥복을 입고 화살과 활을 꽂아 넣는 동개를 맨 신료들의 낯빛은 싸늘한 추위 탓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다, 하고 그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들에게 화살을 쏘는 건 아니겠지요?”

당파별로 옹기종기 모여 곧 열릴 사냥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있던 와중, 창영궁 증축과 망진동 유민 건으로 임금의 눈엣가시가 된 민명탁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주변에 몰려 있던 대신들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물씬 담겨 있기도 했다.

능경파의 당원 하나가 말했다.

“주상께서는 그리 무모하지 않습니다.”

능경파 대부분은 김윤덕의 위세를 기억했다. 언젠가 그가 다시 손에 쥘 권력을 기약하며 그들은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김윤덕이었다. 지금 민명탁에게 닥친 위기는 능경파와는 거리가 멀다는 듯 모두가 권력에 기생하는 민명탁을 멀리했다.

그러나 민명탁의 생각은 달랐다. 임금은 매우 무모한 자였다.

억울했다. 한마음으로 일을 벌인 유경파는 질타받지 않아 분하고 화가 났다. 나서서 저를 돕지 않는 능경파 동지들에게도 배신감을 느꼈지만, 민명탁에게는 김윤덕이라는 뒷배가 없었으니 참아야 했다.

그런 민명탁의 시선에 세준이 잡혔다. 민명탁은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걸음을 물렸다.

“준비는 잘했는가?”

세준은 다른 신료들과 동떨어져 내관들과 임금이 사냥에 지니고 갈 화살과 활을 살피는 데 몰두했다. 날붙이가 가득한 사냥에서는 한 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임금이 사용할 화살 하나도 심혈을 기울여 점검하는 와중 찾아온 민명탁은 세준에게 경계 대상이었다.

“예? 예….”

날카롭게 세운 경계를 눈치챈 듯 민명탁은 난색과 함께 허허, 하고 웃었다.

“자네의 부친과는 막역한 사이지만, 자네를 보는 게 참 염치가 없네. 타지에 가 있을 벗을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지금 하던 일이 있습니다. 중하게 논할 것이 아니시라면 곧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살짝 찌푸려진 세준의 눈매에 높게 추켜올린 민명탁의 입꼬리가 경련하는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렇지! 아무렴 공사다망한 것을 내 모르겠는가. 중한 것은 아니고….”

민명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세준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름이 아니라, 내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네.”

가까운 거리가 못마땅했는지 세준이 뒤로 슬쩍 걸음을 물리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주상 전하께 잘 좀 말해 주게.”

“예?”

“일전에 내 주상께 밉보인 일이 있지 않았는가. 그 당시에는 그것이 마땅하여 그리했을 뿐인데… 인제 와서 그 일을 잘못했다 질책하신다면 내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민명탁을 그간 살아남게 한 조정의 추악한 섭리를 몸소 깨달은 세준은 그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이 일절 없었다. 아무리 청탁하는 자가 아비의 오랜 벗일지라도 청렴과 관계가 먼 사람에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추악한 섭리를 이용하여 배를 불렸던 만큼 속죄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내 자네의 아비와 오랜….”

“그리할 수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주상 전하께옵서 따로 창영궁 증축에 관하여 조사를 명하시지 않으셨으나, 사헌부와 의금부에서 당시 그 일에 관여했던 이들을 조사할 것입니다.”

“뭐… 뭐라고?”

“바르지 못한 일을 하셨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이니, 받아들이십시오.”

삽시간에 얼굴을 구긴 민명탁은 그곳에서 크게 소리를 치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 몰려 있는 눈길이 언제 저를 헐뜯을지 몰라 숨을 죽였다.

“그 일에 자네의 아비도 발을 담갔네.”

“하여 제 아버님께서는 많은 것을 잃으셨지요.”

“도승지….”

“도움을 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세준은 가볍게 목을 끄덕이고는 민명탁에게서 멀어졌다. 그곳에 홀로 남겨진 민명탁은 주먹을 꽉 쥔 채 설욕을 꿀꺽, 삼켰다.

“뭐가 중한지를 모르고 있군. 아비를 저버리는 불효자가 되지 않으려면 적당히 장단을 좀 맞춰 줄 것이지. 쯧쯧.”

민명탁의 시선은 한동안 세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불온함이 깃든 눈길이 저를 배회하는 것은 비단 지금만이 아니었다. 하여 세준은 추악한 그들의 속내를 애써 모른 척하려고 했다. 동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멀지 않은 곳에서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관은 동쪽, 무관과 종친은 서쪽에 시립했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단상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휘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왕실의 위엄을 뽐내는 휘황찬란한 깃발이 미약한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가마를 거부하고 하얀 말을 타고 모습을 드러낸 임금은 내관의 수발을 받으며 말에서 내렸다.

용이 그려진 흉배가 붉은 답호에 달려 있었다. 허리에는 푸른색 끈이 둘려 있으니 사냥하기 퍽 좋은 차림새였다.

강은 말에서 내려 공수시립한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백관들을 지나쳐 단상으로 올랐다. 어좌에 앉자, 내관이 오늘 사용할 활과 화살을 임금에게 바쳤다.

유엽전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강은 화살 중 하나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꿩을 가장 많이 잡은 대신에게 과인이 친히 상을 내릴 것이고, 과인보다 적을 시에는 벌을 내릴 터이니, 모두 분발하시오.”

강무도, 대사례도 아니었으니 오늘 치르는 사냥은 한낱 놀이에 불과했다.

진연도감에서 준비한 허례허식은 거부하겠다는 듯 강은 활과 화살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저 없이 내딛는 걸음에 내관과 임금의 호위를 맡은 겸사복장이 서둘러 임금의 뒤를 쫓았다.

내금위와 겸사복, 우림위가 사냥터 곳곳에 포진하여 임금의 안위를 살필 것이었다. 그럼에도 임금의 뒤를 바짝 따르던 세준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을 적이 두려웠다. 세준의 감각은 시종일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망진동 사냥터의 반절은 평야였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얕은 숲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새벽 일찍이 사냥터에 풀어 놓았던 짐승들은 제각기 살길을 찾기 위해 나무가 울창하지 않은 숲으로 도망쳤을 것이었다.

모두가 사냥터에 들어서 고요한 평야를 바라보았다. 하늘의 빛을 가린 구름으로 한낮인데도 사위가 어둡고 음습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고스란히 지워 내지 못한 사냥터에 발을 들인 백관들은 못내 씁쓸함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했다. 어느 부류는 찝찝했기에, 또 다른 이들은 갈 곳을 잃은 백성이 안쓰러웠기에 각기 품은 마음이 달랐다.

소매 폭이 좁은 협수를 입고서도 펄럭이는 소매가 꽤 불편했는지 임금이 내관에게 일러 팔에 둘러 소매를 고정하는 토수를 가져오라 하자, 곧 감청색으로 염색한 사슴 가죽으로 만든 토수를 대령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강이 손을 위로 들었다. 동개를 찬 이들이 숨을 죽였다.

강의 팔이 아래로 떨어지자, 사냥이 시작되었다는 나팔이 사냥터에 울렸다. 벌을 받고 싶지 않았는지 꽤 관록 있는 양반네들이 사냥터 주변으로 잽싸게 퍼지기 시작했다.

강은 여러 갈래로 퍼진 대신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내관들을 물리고 겸사복장과 몇몇 무관만 거느리고 커다란 미루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냥에 적극적으로 나설 줄 알았던 강이 반쯤 불타 버린 미루나무 아래에 털썩 주저앉자, 세준이 기함했다.

“전하, 군주의 옥체는 만백성의 안위와 같사옵니다. 언 땅 위에 앉으시오면 혹여나 전하의 옥체가 상할까 심려되옵니다.”

“지금 이 사냥터에 뛰어다니는 인원의 절반이 나이 많은 노인들이네. 누가 먼저 쓰러질 것 같은가? 근심 말게.”

세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강이 계속 그곳에 앉아 있는 꼴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하, 백관들이 모두 어명을 받들어 사냥을 즐기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옵서도 함께 어울리는 것이 도리이옵니다.”

꼼짝도 하지 않는 강을 보다 세준은 그나마 믿을 구석이 부경뿐이라 당연하다는 듯 부경을 보았다.

먼 곳을 보듯 시선이 허공에 닿아 있던 부경의 눈길이 살짝 움찔거렸다. 애처로운 세준의 눈빛을 본 것일까.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던 발이 떨어졌다.

“꿩입니다.”

“하찮다.”

“네발 달린 짐승은 모두 숲으로 도망쳤을 터라, 이곳에서는 토끼와 노루를 잡을 수 없사옵니다.”

“대충 장단이나 맞춰 주다 돌아갈 셈이었는데, 참으로 귀찮게 구는구나.”

강이 귀찮다는 기색을 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준은 감명을 받았는지 부경을 보며 싱긋 웃었다. 부경은 그 별거 아닌 웃음마저도 제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무심한 얼굴로 눈길을 떼었다.

평야와 달리 숲은 부산스러웠다. 짐승을 모는 몰이꾼들이 치는 징 소리와 북소리가 요란스럽게 숲을 들쑤시고 있었다. 숲 곳곳으로 퍼진 신료들은 사냥에 완전히 몰입한 듯 여기저기서 환호와 탄식이 울렸다.

그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곳을 산책하듯 천천히 걷던 강은 애초부터 흥이 없었다는 듯 품위를 지키지 않고 길게 하품했다. 세준이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전하…. 체통을….”

세준의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리고 동개에서 활과 화살을 꺼내 들었다.

세준은 강의 눈길이 닿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수풀 속에 무엇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길게 자란 풀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으로 보이냐.”

“작은 짐승 같사옵니다.”

“체면이 있으니 한 마리라도 잡아야 할 터인데, 꿩 가지고 되려나.”

부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자세를 잡은 강을 지켜보았다.

죽천골에서 배운 솜씨를 지금 와서 보는구나.

팽팽하게 시위가 당겨졌고, 화살촉은 미약하게 움직이는 풀숲에 향해 있었다. 퍼져 있던 몇몇 신료들이 활을 쥐고 있는 강을 발견하고는 숨을 죽이고 관망했다.

아주 짧은 순간 강은 쥐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꽤 빠른 속도로 날아간 유엽전으로 풀숲에 숨어 있던 짐승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살육의 순간이 뭐라고 숨을 죽이고 있던 몇 명의 신료가 환호성을 질러 댔다.

무관 하나가 사냥감을 주워 오기 위해 풀숲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당대 그 누가 주상 전하와 활 솜씨를 비할 수 있겠나이까!”

“맞습니다. 명성이 자자했던 격비호가 살아 있다고 해도 주상 전하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것이옵니다.”

격비호는 범랑에서 명사수로 이름을 떨쳤던 무관이었다.

강은 격비호의 살아생전을 보지 못한 눈으로 그와 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곁으로 몰려든 아첨꾼들이 귀찮다는 듯 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꿩이옵니다.”

풀숲으로 달려갔던 무관은 화살이 꽂힌 꿩을 가지고 돌아와 강 앞에 낮춰 앉고는 두 손으로 꿩을 내밀었다.

상왕만 해도 자신이 잡은 짐승을 확인할 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은 선대 임금들과 달리 손을 뻗었다. 그리고 죽어 가는 짐승을 꿰뚫은 화살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짐승의 살을 파고든, 강이 손수 비틀어 잡아 뺀 화살이 박혀 있던 곳에서 피가 솟구쳤다.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꿩이 날갯짓을 하며 파드득거리자, 그곳에서 솟구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모두가 경악하는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누구랄 것 없이 그곳에 있던 모두가 강 앞에 부복했다. 심지어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신료들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피 칠갑을 한 강을 발견하고는 제자리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세 척(尺)도 되지 않는 짐승은 곧 숨이 끊겨 축 늘어졌다. 강은 죽은 짐승의 모가지를 꽉 쥐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로 얼룩진 얼굴을 토수로 훔쳤다.

“별일이 다 있군.”

“주상 전하! 성심껏 보필하지 못한 소신의 탓이옵니다! 소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세준 말고도 그 자리에 있던 신료들이 서로의 잘못이라며 죽여 달라 외쳤다. 강은 제게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느끼며 피식 웃었다.

“사냥을 게을리하여 기본을 잊은 것은 과인이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 모두 일어나시오.”

그 말에 세준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차가운 흙바닥에서 일어났다. 겸사복장의 손길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난 세준은 염치가 없다는 듯 붉어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이런 모습으로 임했다간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잡을 듯싶으니, 과인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소. 모두 개의치 말고 사냥을 즐기라 전하시오.”

강은 사색이 된 무관에게 제가 들고 있던 꿩을 내밀었다. 축 처진 꿩의 모습이 저의 모습 같았는지, 무관은 손을 파르르 떨어 댔다.

세준과 겸사복장, 몇몇 무관들은 임금을 배종하며 그곳에서 떠나갔다.

“얘기 들으셨습니까?”

“예! 어찌 이런 불경스러운 일이 있단 말입니까!”

임금의 행렬이 사냥터에서 떠나자 사냥터에 나팔 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울리는 나팔에 곳곳에 퍼져 있던 백관들이 의문을 가득 품고 평야로 나왔다. 꿩이나 토끼를 잡은 자는 있었지만, 노루를 잡은 자는 없는지 모두 손이 가벼웠다.

여기저기 모여 떠드는 소리에 민명탁의 관심도 그들에게 쏠렸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주상께서 짐승의 피를 뒤집어쓰셨답니다.”

“피요?”

“예. 왜 굳이 손수 화살을 뽑으려 하신 것인지…. 쯧쯧.”

민명탁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주변에 몰려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곧 민명탁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좋은 수를 찾았구나!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사롭지 않다니요?”

“피를 뒤집어쓴 임금이라…. 왠지 불길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오늘은 탄일이지 않습니까. 좋기만 해도 부족한 날인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쯧쯧.”

그곳에 있던 대신들의 눈길이 민명탁에게로 쏠렸다. 열렬하게 임금을 지지했던 연파의 백관들은 식겁한 얼굴로 민명탁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징조. 하찮게 여길 수 있는 그 징조가 이 범랑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모두의 가슴속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임금이 조정에서 끌어낸 공포가 지금의 불신을 키우는 씨앗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남이는 선홍색 접복과 두록색 접복을 양손에 들고 은재의 몸에 견주었다.

“어찌 이리도 잘 어울리실까요.”

“민망하니 농은 그만하렴.”

하얀 얼굴에 울긋불긋 피어오른 홍조를 보며 남이는 헤벌쭉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농이라니요. 소인은 절대로 농을 하지 않습니다. 성효전(聖效殿)에서 열리는 연회는 이 접복을 입으시고, 새 옷은 저녁에 청회루(淸會樓)에 가실 적에 입으시면 되겠습니다.”

“단정하게 입고 가면 되는 것을….”

“단정한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간 은재가 했던 말은 또 모두 잊어버렸는지, 남이는 그동안 겪었던 수모를 생각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내명부와 외명부의 양반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입니다. 주눅 들지 않고 되레 당당하게 드셔야 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원체 후원에 있는 곳이라 듣는 귀가 막혔고, 월정당 밖으로 외출이 적었으니 보지도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묻지도 않았으니, 과히 세상과 척을 져도 단단히 진 셈이었다.

은재는 월정당 바깥에서 어떤 말이 떠돌아 다니는지, 어떤 눈으로 저를 동정하고 있는지, 혹은 비웃고 있는지 몰랐다.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꺼내기 쉬운 것이 말이다. 하기 쉬운 것에 현혹되어 신경 쓰고 마음에 두면 잘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니, 그런 하찮은 것에 마음 쓰지 말아라.”

격분하는 남이와는 다르게 은재는 차분한 모습으로 남이가 들고 있는 두록색 접복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부처가 오신 줄 알겠습니다.”

남이는 잘 다려 놓은 접복의 깃을 붙잡고 펼쳤다.

“내 불교를 섬기지 않지만, 불교에서는 허튼 것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중생 모두가 부처라고 했다. 남이 너 역시도 부처가 될 수 있겠지. 사소한 것에 몰두하는 마음만 다스리면 된다.”

남이가 접복 소매를 곧게 뻗은 팔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조금 퉁명스럽게 은재에게 대꾸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누가 뭐라고 떠들든 화를 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 성인이 괜히 성인이겠느냐.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부터 해 보렴.”

“소인의 성품은 도련님과 같지 않아 불의를 보면 화가 불끈불끈 솟아나는데, 참 이상합니다. 정말 정말 도련님은 화가 없으십니까?”

남이의 질문에 은재는 답하지 않고 그저 피식 웃었다. 세상에 화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말을 하려다 그런 말을 하면 무엇 하나 싶어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송리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송리요? 제가 후원에 가서 장작으로 쓸 만한 것을 주워 오라고 했습니다. 올 때가 되었는데….”

남이는 푸른 전대를 은재의 가슴팍에 둘렀다. 등 뒤로 가져와 곱게 매듭을 짓자 치장이 끝났다. 은재는 괜스레 구김 없는 접복의 주름을 툭툭 털어 내다가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연회에서 얻어먹는 다과가 맛있다고 하더니 어찌 안 올까.”

“분명 오다가 넘어져서 힘들게 주운 나무를 다 흘렸을 것입니다. 소인이 어서 가서 데리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셔요.”

애써 다림질해 놓은 옷이 구겨질세라 은재는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계속 이리 서 있을 바엔 송리나 함께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같이 가자.”

“예? 밖이 춥습니다.”

“하도 불을 많이 때서 안이 덥구나. 덥다 못해 땀이 나올 지경이니 나가서 찬 바람을 쐬고 싶어 그런다.”

“예, 그러세요.”

그러나 마당에 발을 딛기 무섭게 남이가 버럭 소리치며 달려갔다.

“송리야!”

대문 바로 밖에 넘어져 있는 송리가 남이와 은재를 발견하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으이구! 이 미련퉁이!”

“괜찮니?”

“괜찮습니다. 소인이 부족해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지 뭡니까.”

“다 와서 넘어지는 건 뭐니? 으구!”

끊임없이 날아오는 타박이 서러웠는지 송리의 얼굴에 드러난 울상이 더욱더 짙어졌다. 은재가 살짝 흘겨보자, 그 눈빛을 눈치챈 남이는 눈을 굴리며 바닥에 흩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아야!”

은재와 남이의 부축에 일어나던 송리가 맥없이 다시 주저앉았다.

“아프니?”

“네…. 발을 접질린 모양입니다….”

“그럼 연회에 같이 못 가잖아!”

“그렇겠지….”

송리가 속상해하자 남이도 아쉬웠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두 아이의 모습을 보던 은재는 그저 그 순수함이 예뻐 보여 미소를 지었다.

“송리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남이는 내의원으로 가서 어의를 모시고 오너라.”

“그치만… 곧 연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야진찬도 있지 않더냐. 지금은 송리가 우선이다. 오는 길에 성효전에 들러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하고 오렴.”

남이와 송리는 어렸을 때 궁궐에 들어와 지금껏 눈칫밥에 치이며 오로지 생존하는 것에만 몰두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은재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도련님…. 저는 그냥 건넛방에서 쉬면 됩니다.”

자신이 눕는 자리를 내어 준 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은재는 손수 물을 떠 와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갔다.

“제대로 불을 때지 않는 방에서 어찌 쉬겠다는 것이냐. 잔말 말고 여기서 푹 쉬어라.”

그게 얼마나 송구스러운지 송리는 누워 있으라는 말에도 몇 번 자리에서 일어나 은재의 보살핌을 마다했다.

“도련님….”

“남이가 어의를 데리러 갔으니 금방 올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무에 있어. 둘이 하기에는 벅찬 살림이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은재는 송리의 발목에 두었던 명주를 거뒀다. 차가운 물로 명주를 적시고 물기를 쫙 짜서 접질린 발목 위에 올려 두었다. 부어오르기 시작한 발목이 마음에 걸렸는지 은재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연회에게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식구가 다쳤는데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이냐. 마음 쓰지 말거라.”

“그렇지만….”

입을 뗀 송리는 벌컥 문을 열고 등장한 남이와 어의 때문에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모두가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월정당을 거들떠보지 않을 때, 유일하게 은재의 건강을 염려하던 어의였다. 남이의 간곡함을 모두가 외면해도 그가 먼저 나서서 이곳으로 왔을 것이었다.

“어디 보시게.”

그는 거창하게 예를 차리지 않았다. 은재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만큼 적당한 인사치레를 하고는 제가 이곳으로 온 목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명주 천을 꺼내 대야에 담고는 부어오르기 시작한 송리의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윽, 하고 앓는 소리가 송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게 은재의 심장을 쿡, 하고 찌르는 것 같았다.

침을 놔 주고 뜸을 뜨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의는 미시 정각에 뜸을 거두라는 말과 함께 의녀를 두고 그곳에서 떠났다.

남이는 연신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은재의 눈치를 보았다. 늦지 않게 연회에 간다면 밉보이는 일은 없을 터인데….

가시방석을 깔고 앉은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큰방에 머무는 것마저도 불편해지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도련님, 지금이라도 연회에 가셔요.”

은재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뜸으로 눈길을 옮긴 채 퍽 단호한 투로 말했다.

“되었다.”

“그래도… 다른 분도 아니고 대비마마께서 꼭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같은 아랫것들에게 마음을 쓰시다 야단을 맞으시면 어쩌시려고요.”

“대비마마께서는 이해해 주실 것이다.”

“도련님.”

의녀는 그곳에 없는 사람인 듯 조용히 있었지만, 남이는 슬쩍 의녀를 곁눈질했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어 그 뒤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먼 곳에서 미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제가 나설 차례라는 듯 의녀는 송리의 발목에 놓여 있던 뜸을 하나씩 거두기 시작했다.

송리의 발목에 좁은 나무판자를 덧대고 천을 휘감은 의녀는 삼 일 정도 무리하면 안 된다던 어의의 말을 다시 새겨 주고는 은재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가 나갈 수 있도록 장지문 앞에서 대기하던 남이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최 상궁 마마님!”

때마침 월정당 앞뜰에 들어선 대비전 상궁과 눈이 마주친 남이는 서둘러 대청을 내려갔다.

최 상궁이 나인을 거느리고 그곳에 온 이유를 대충 눈치챘지만, 남이는 두려운 눈으로 최 상궁을 바라보았다.

“무슨 걱정을 하느냐.”

“도련님께서… 연회에 불참하시어 오신 게 아닙니까…?”

“맞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부덕하여 도련님을 못 모셨습니다….”

최 상궁은 잔뜩 주눅이 든 남이를 보며 피식거리고는 제 뒤를 따라온 나인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일렬로 나란히 최 상궁을 따라왔을 나인들의 반절은 부엌간으로 향했고, 나머지는 대청마루에 찬합을 내려놓았다.

“대비마마께서 연회 음식을 가져다드리라고 하시어 온 것이다. 그리고 전할 말도 있고.”

최 상궁은 저에게 인사를 올리고 대문으로 향하는 의녀를 곁눈질했다.

“송리가 조금 다쳐서 지금 누워 있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대비마마의 명을 어기시다니…. 월정당 귀인도 참….”

은재가 있는 방을 힐끔 보던 최 상궁이 작게 혀를 찼다. 그게 또 마음에 걸려 남이는 팔자 눈썹의 애처로운 얼굴로 최 상궁을 바라보았다.

“상궁 마마님께서 말씀 좀 잘 올려 주십시오. 마음이 약하시어 아픈 송리를 두고 가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야진찬에는 꼭 참석하시라 하셨으니, 이번에는 명을 어기지 마시라고 전해라.”

“예, 마마님!”

배시시 웃는 얼굴에 어찌 침을 뱉으랴. 최 상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최 상궁 행렬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남이는 그들이 대청마루에 놓고 간 보자기로 눈길을 돌렸다.

“도련님, 이것 좀 보셔요! 대비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양손에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 남이를 보며 은재가 부담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슬쩍 웃었다. 헐레벌떡 보자기를 풀고 찬합을 헤쳐 놓자, 송리가 찬합에 담긴 군것질거리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은재는 찬합에서 약과 하나를 집어 송리에게 건넸다. 받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송리에게 어서 받으라 재촉하자 송리는 마지못해 두 손으로 약과를 받아 들었다.

한 입 베어 먹는 모습을 보다 눈길이 남이에게로 향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풉, 하고 웃다가 남이의 손에도 약과 하나를 들려 주었다.

오물오물 약과를 씹는 소리와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은재는 다과에 손을 대지 않고 두 사람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귀한 음식이 차고 넘친다는 궁궐에서도 윗전의 아량이 없으면 먹어 볼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두 아이가 어찌나 안쓰러운지 은재는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먹으라는 말과 함께 찬합을 내어 주었다.

“도련님도 드셔 보세요.”

은재는 말없이 고개만 젓다가 등쌀에 이기지 못하고 다식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아 참! 대비마마께옵서 야진찬에는 꼭 참석하시라고 하셨답니다!”

“소인은 정말 괜찮으니, 꼭 가시어요.”

약과를 우물거리던 송리가 급하게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송리를 두고 나가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던 은재는 답하지 않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날이 점점 어두워질수록 불편함은 배가되어 은재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런 은재의 마음을 엿본 듯 또다시 남이가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되었대도.”

“송리가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러십니까? 어서 채비하시어요.”

정말 괜찮다는 듯 씩 웃어 보이는 송리를 보며 은재는 눈썹 끝을 아래로 축 내렸다. 당장에라도 옷을 벗길 듯 틈을 노리는 남이를 견제하던 은재는 끝내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럼 대비마마께 인사만 올리고 오겠다.”

“예!”

남이는 제 일인 양 신이 나서 선홍색 접복을 걸어 둔 곳으로 향했다.

“무엇 하려고.”

“구겨진 옷을 입고 가실 수 없습니다.”

“되었다. 그냥 이대로 갈 것이다.”

“소인이 세답방 출신이라는 것을 잊으신 것입니까? 구겨진 옷을 입고 가셨다간 몰매를 맞는 것은 소인입니다. 소인의 얼굴을 봐서라도 꼭 갈아입고 가셔야 합니다.”

세준이 앞서 써먹은 방법이라 그 수를 눈치챈 은재의 눈살이 가늘어졌다. 남이는 서둘러 건을 넣어 둔 함을 가져와 은재에게 내밀었다.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허탈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방실방실 웃고 있는 남이를 혼낼 수 없었던 은재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뚜껑이 열린 함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것은 어떠세요?”

그것은 참으로 사연이 많은 감청색 건이었다. 흔하디흔한 것인데도 찔레꽃이 수놓인 건을 보는 순간, 은재는 말문이 턱 막혔다. 멀건 눈으로 남이가 건넨 것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은재는 대답을 하는 대신 옻칠이 된 함으로 손을 뻗었다. 남이는 은재의 손에 들린 천청색 건을 보았다. 밝은 선홍빛과 어울리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 * *

대비전인 성효전에서 열린 연회가 끝난 참이었다.

“지루하다 못해 진절머리가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마마님….”

야진찬이 열릴 때까지 각 전으로 돌아가 쉬어도 좋다는 대비의 허락에 보연당으로 돌아온 한 씨는 제일 먼저 가슴에 두른 전대를 풀어 바닥에 집어 던지고 성큼성큼 보료로 향했다.

뒤따라 들어온 조 상궁이 나인들에게 눈짓했다. 모두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마마님, 아랫것들도 보는 눈이 달렸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보료에 누워 있던 한 씨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조 상궁을 보았다.

“내가 이제는 아랫것들 눈치도 봐야 해?”

“보는 눈이 많은 것을 보면 입으로 말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라고 해! 내가 갈 곳이 중궁전인데 누가 감히 나를 입에 올릴 수 있겠어.”

조 상궁은 한 씨가 사가에 있을 적 한 씨의 유모였기에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성품이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한 씨의 성품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한 씨 대신 귀를 연 것은 조 상궁이었다. 지지 않으려면, 죽지 않으려면 먼저 움직여야 했다.

“월정당 꼬락서니가 안 보이니 내 속이 다 시원하더라. 그 부적이 효험이 있기는 한가 보네.”

갑작스러운 말에 조 상궁은 저와 한 씨 둘밖에 없었음에도 눈을 희번덕거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마마님, 조심하십시오!”

“조심할 게 뭐 있어. 걸릴 일도 없을 텐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듣는 이가 있으면 어찌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어찌하긴. 귀를 잘라 내고 드러난 구멍에 석회를 발라 막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조 상궁, 마음이 이리 약해서 어디에 쓰겠어. 곧 이 궁궐에서 나갈 월정당을 마음에 두지 말아. 알겠지?”

제가 젖을 먹여 키운 아이가 괴물이 되는 중인 것을 모를 턱이 없었다. 조 상궁 역시 담력이 만만치 않은지라 여느 때처럼 낯빛이 평범했다. 최소한의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듯 제가 키운 아이가 소중해 철부지처럼 부리는 패악을 지켜 주며 그 뜻에 동조했다.

한 씨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조 상궁 역시 서서히 괴물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 * *

채비를 마친 은재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나서던 남이는 몇 보 걷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혼자 다녀올 터이니, 송리와 함께 있거라.”

“그렇지마는….”

“궁궐이지 않더냐. 그리 어둡지도 않으니 혼자 다녀올 수 있다.”

“도련님….”

“다녀오겠다.”

만류에도 따라나서겠다는 남이를 한사코 물린 은재는 남이가 밝혀 놓은 초롱을 들고 길을 나섰다.

좌우로 나무가 꽉 들어차서 숲길이나 다르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혼자 걸었다. 그러나 산길처럼 울퉁불퉁하지 않았고, 나뭇잎 하나 정도 떨어져 뒹굴고 있을 만도 했지만 매일 청소를 하는 것처럼 깨끗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겨울, 초롱을 들고 걷는 것보다 하늘에 떠 있는 달빛에 의지해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해 은재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혹여나 초롱 없이 길을 나섰다는 걸 남이가 알게 된다면 성화를 부릴 게 뻔했다.

“하아….”

뿌연 입김이 공중으로 바쁘게 흩어졌다. 왠지 모르게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떠안고 내디딘 걸음이었으니, 마음이 온전히 편할 리가 없었다.

청회루에 다다른 은재는 청회루로 드는 중문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이런….”

눈앞에 선 이는 머리에 쓴 상투관부터 이마에 두른 건 그리고 몸 위에 걸친 접복까지 고급스럽고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소박하기만 한 저의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기보단 저에게 날아온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 싶지 않아 그 눈길을 피했다.

괴기한 얼굴로 은재를 노려보던 한 씨가 입을 뗐다.

“내 잘 몰라 묻는데, 진찬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더냐?”

질문을 받는 이는 그 앞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은재가 아니었다. 한 씨의 뒤에 딱 달라붙어 있던 조 상궁이 대답했다.

“내명부와 외명부의 직첩을 받은 양반이라면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궁궐 연회가 개나 소나 다 몰려드는 동네잔치가 아니거늘, 어찌 내 눈에 개 한 마리가 어른거리는 것일까?”

주 상궁은 한 씨 너머에 있는 은재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눈치챈 은재는 한동안 주 상궁과 눈을 맞췄다.

“괜한 것에 마마님의 마음이 흐트러지실까 걱정됩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은재는 서운하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눈에 띄어야지.”

은재는 비참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중궁전을 차지한 줄 알겠다. 분수도 모르고 붉은색이라니. 쯧쯧.”

은재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까칠한 웃음소리가 제 면전에 쏟아질 때도 은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홀로 그 수모를 감당했다.

후원을 걸었을 때 느꼈던 마음을 되새겼다. 심란하고 복잡했던 마음을 뒤늦게 깨달은 은재는 한 씨 일행이 사라진 중문을 바라보았다.

없는 사람 취급하며 내뱉는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은재는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자신이 생각해도 이도 저도 아닌 이가 왕실 가족과 높은 양반들만 참석할 수 있는 진찬에 간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청회루에 들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명분 또한 없었다.

제 처지가 그랬다. 개나 소와 어울릴 법한 딱 그 정도. 이 궁궐 안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먼지와도 겨룰 수 없는 하찮은 사람.

은재는 중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는 다른 세상인 듯 너무나도 밝았다. 그래서 그곳으로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바로 코앞에 있는 밝은 빛을 바라보았다. 당장 그곳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돌연 발걸음을 틀었다.

달달 떨고 있던 손이 초롱을 놓쳤지만, 은재는 그마저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나무틀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 속에 등잔을 넣어 불을 밝힌 초롱은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불이 번졌다.

근처에 있던 내관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발로 짓밟고 흙을 내뿌리며 불을 껐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 초롱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내관의 눈에 흐릿한 인영이 잡혔다.

“저분은….”

청회루 반대편으로 가던 이는 곧 어둠에 잡아먹혔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내관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무를 얽매고 있는 줄에 매달린 등불이 어두운 궁궐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겉돌던 걸음은 자연스레 그 불빛을 따라 걸었다.

만일 대비마마께서 노하시면 어떻게 하지….

괘씸하다 버림받으면 그때는 이 궁궐에서 어찌 버틸 수 있을까….

그래도 가지 않는 게 바람직하지.

등불이 끝나는 곳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챈 은재는 가만히 서서 아득하기만 한 곳을 응시했다.

발끝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 곳이 있었다. 은재는 그곳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가득 차올라 있던 고민이 말끔하게 사라질 정도로 눈앞에 보이는 곳은 매혹적이었다.

활짝 열려 있는 홍헌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자유가 활개 치고 있었다. 그 자유를 바라본 은재의 심장도 쿵쿵, 우람찬 소리를 내며 뛰었다. 문밖으로 나간다면 이 지독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은재는 자유를 꿈꿨지만, 차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왕실의 위엄을 내뿜고 있는 대문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면 그리던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음에도 발을 옭아매고 있는 족쇄가 가슴속에 존재하는 한 궁궐에서 나갈 수 없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다고 해도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계속 마음속에 바람을 그리기만 할 것이었다.

불현듯 떠올랐다.

족쇄를 누가 채웠는가. 왜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은재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발을 들었다. 허공에 붕 뜬 발을 앞으로 뻗었다. 뒤에 남겨진 발도 자연스럽게 자유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움직인다면….”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서슬 퍼런 목소리에 떨어졌던 발이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닿았다.

“그대의 형제와 아비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은재는 무정한 투로 가슴을 찔러 대는 겁박 따위가 무섭지 않았다. 그저….

“갈 수 있으면 가 보세요.”

홍헌문을 바라보던 은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바로 코앞에서 놓쳐 버린 자유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곧 대문 쪽으로 향해 있던 발끝이 방향을 바꿨다. 터벅터벅 힘없이 움직이기만 하던 발걸음은 겁박으로 억압하려는 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아주 작고 사소한 바람이 재가 되어 봄철, 흩날리는 꽃처럼 허공으로 퍼졌다. 은재는 마음이 아렸다. 공허한 그 속을 어떻게 채우면 좋을지 몰라 속으로 울음을 쏟아 냈다.

지금 은재가 스쳐 지나간 이는 그 바람도, 깊숙한 곳에 새겨진 속마음도, 겉으로 흘리지 못하는 눈물도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은재는 바랐다.

말로 내뱉을 수 없는 바람을 알아주길 바랐고, 깊숙한 곳에 새겨진 속마음을 들여다봐 주길 바랐다. 겉으로 흘리지 못하는 눈물을 닦아 주기만 해도 그를 스쳐 지나가지 않고 마주 보며 사랑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 * *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럼에도 궁궐은 여느 때와 같이 조용했지만, 발 없이 떠도는 소문만 은밀하게 사람의 입을 타고 이리저리로 옮겨 다녔다.

“대비마마께도 밉보여 완전히 버림당했다지?”

“궁궐 밖으로 도망가려다 붙잡혀 다리가 잘렸다고 하던데?”

“아니야. 주상전하께서 인두로 눈을 지져 버리셨대.”

월정당은 물론이거니와 후원에서도 나오지 못한 까닭에 남이와 송리는 궁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는 깜깜했다. 아니, 지금 두 사람에게는 궁궐에 도는 소문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몸 곳곳에 자리 잡은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일주일, 그보다도 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월정당의 주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맥을 추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기만 하던 은재가 발작하듯 벌떡 일어나 거친 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그 곁을 지키던 송리와 남이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쩌지 못하고 안달했고, 목구멍을 긁고 나오는 기침 소리에 큰일이 난 것처럼 발발 떨어 댔다.

“쿨럭!”

메말랐던 기침에 축축한 것이 섞여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값 싼 비단으로 대충 구색을 갖춘 금침 위로 툭, 떨어진 붉은 피에 남이와 송리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도련님!”

펄펄 끓는 몸뚱이에 정신까지 혼미했지만, 은재는 그 순간에도 의연했다. 그저 멀뚱한 눈으로 제가 토해 낸 핏덩이를 응시했다.

“괜찮다….”

울기 직전인 남이가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어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염려치 말거라…. 별게 아닐 터이니….”

되레 저희를 안심시키는 은재가 어찌나 아리던지, 결국 남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쏟아 냈다.

“으윽….”

경련하듯 짧게 바들바들 떨던 은재가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지자, 정말 큰 사달이 일어날 것을 알아챈 남이가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의식을 찾지 못하는 환자의 진맥을 보던 어의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합환을 치르지 못해 생기는 병세와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피까지 토한단 말이오.”

“오장육부의 기가 막혀 있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심장에 울혈이 생겨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 깨어나겠소.”

기다릴 수 없었던 세준이 득달같이 물었다. 어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은재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어의는 몸을 낮추고 끅끅거리며 우는 세준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약을 짓기 위해 방을 나섰다.

방 밖으로 나온 그에게 의녀가 챙겨 온 약재를 내밀었다. 옳은 처방을 하기 위해 유심히 약재를 살피던 어의는 별안간 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온 세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에 원망이 깃들어 있음을, 그 걸음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누가 모르겠는가.

어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한지에 싸여 있는 약재를 살폈다.

“제발 내보내 주십시오!”

“아픈 이를 어찌 보내겠는가.”

눈물을 쏟아 낼 듯한 붉은 눈시울과 그 속에 감긴 원망을 강은 똑바로 직시했다. 그러나 그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듯한 얼굴로 세준을 보고 있었다.

“이게 누구 때문인지 모르십니까?”

“내 잘못이라 탓을 하고 싶은 것인가? 그래, 내 탓을 하려거든 말리지 않겠다. 하나 나는 붙잡은 적이 없다.”

“전하!”

꼿꼿하게 서 있던 세준이 온갖 자긍심과 자신감을 내려놓고 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은 그 모습이 놀랍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리고 흐느끼는 벗을 보아도, 그 벗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 제 속을 몰라주어도 강은 아무 기색도 하지 않았다.

“소신이 평생 전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더는 은재를 볼모로 삼지 마십시오.”

“볼모…?”

“그게 아니라면 달리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옵서는 소신의 아비를 꺾기 위해 은재를 저버리셨습니다.”

강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세준을 향해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자네의 아우를 볼모로 삼은 적이 없어.”

“아닙니다. 그러셨습니다.”

세준은 저를 원망하는 눈빛을 볼 수 없었다.

“자네 아우의 성정은 자네를 닮아 벽창호와 다를 게 없지. 평생 한 사람만 마음에 품을 지고지순이지 않던가.”

세준의 머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 고결하고 순수한 이가 합환 상대를 바꾸겠는가? 궁 밖으로 나가면 그 몸이 온전해질 수 있겠는가? 자네가 아우를 설득할 자신은 있고?”

음양인에게 합환 증표는 족쇄와도 같았다.

한번 새겨지면 부족한 기운을 계속해서 채워 줘야 했다. 설사 처음 몸을 맞대고 증표를 새긴 첫 상대가 아닐지라도, 다른 이와 합환을 해서라도 그 기운을 채워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날뛰는 기운을 가라앉히는 약을 평생 입에 달고 살아야 했다.

처음 은재가 앓기 시작했을 때도 그 약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효과가 없는 것인지 은재는 매번 성주기가 올 때가 되면 괴로워했다.

은재가 강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간다면…. 합환 상대를 바꾸지 않겠다 고집이라도 부린다면….

은재는 그런 아이였다.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기어코 해내는 아이였다. 지금까지 냉대로 가득한 궁궐에서 버틴 것도 모두 고집으로 가능했을 것이었다.

세준은 그 고집에 강을 향한 마음이 담기지 않았으리라, 자신할 수 없었다. 은재가 이 궁궐에서 버틴 까닭은 분명 강 때문이었다.

“하오면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소신은… 이리 아우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세준이었다. 그렇기에 강은 무너져 내린 세준을 보며 제가 품었던 원망을 지워야 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강 또한 세준과 다르지 않았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와중, 안으로 든 내관 하나가 조심스럽게 상선에게로 다가갔다.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하던 내관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관의 소식을 들은 상선은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파리해졌다.

“전하….”

상선은 서둘러 강의 곁에 섰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강의 눈길이 상선에게 닿았다.

“보연당 궁녀가 꼭 전하께 아뢸 것이 있다 하옵니다….”

강은 한 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상선의 지시를 받은 내관은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다시 바깥으로 향했다.

내관의 따라 편전 안으로 든 궁녀는 이제 갓 열댓 살을 넘긴 듯했다. 강은 침묵한 채 사시나무 떨듯 달달 떨어 대는 궁녀를 바라보았다.

“어서 아뢰거라.”

상선이 궁녀를 채근했다.

“소… 소인이 아, 아뢸 것이….”

한 발 뒤로 물러난 세준은 그 궁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마음을 조아렸다.

“주상 전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던 궁녀가 갑자기 납작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냐.”

강은 궁녀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기시감을 느꼈다. 궁녀가 토해 내는 울음이 편전에 가득 차자 조바심이 부풀어 가슴을 갑갑하게 했다.

“똑바로 말해라.”

“소인이… 월정당에 부적을 묻었습니다….”

모두가 놀랐지만 그 누구도 말문을 뗄 수 없었다. 침묵으로 휩싸인 그곳에선 작은 숨소리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준은 기꺼이 그 침묵을 깨부쉈다.

“그, 그게 무슨….”

“며칠 전, 보연당 마마님의 명을 받고 소인이 월정당 대문에 부적을 묻었습니다…. 그것으로… 지금 월정당 마마님께서….”

두 다리에서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세준은 굳세게 버텼다. 그리고 강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소인의 아비가 건강이 좋지 않아 큰돈이 필요했사옵니다…. 소인은 돈에 눈이 멀어서 인간으로 태어나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사옵니다. 부디 소인을 용서치 마시옵소서.”

강은 평소처럼 무정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궁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이더냐.”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실이옵니다…. 어찌 소인이 감히 주상 전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 있겠나이까….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진실을 지금에서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달달 떨던 궁녀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법도 탓에 궁녀는 연신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월정당 귀인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소인은… 그때 묻었던 부적이 월정당 귀인을 저주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더 늦기 전에 죄를 고하고 싶었사옵니다.”

강은 그 틈을 주시했다.

“윗전의 부도덕함을 고하는 이유가 정녕 죄책감 때문이다?”

흐느끼는 소리마저 사라진 그곳에 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 맞사옵니다….”

“견딜 수 없는 고초를 겪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죄책감 때문이더냐?”

나인은 더는 울지 않았다.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며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답했다.

“예.”

강의 시선은 나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감추고 있는 속내를 알아내겠다는 듯 따갑게 쏘아 대는 눈빛에도 나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최익수가 제 식구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것인가?

“월정당으로 가 그곳을 샅샅이 뒤져라. 증좌가 나오거든 의금부에 일러 소용 한 씨를 압송하여 사실을 토설하도록 추국하라.”

자리에서 일어난 강은 그때까지도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최익수를 들라 하여라.”

강은 명을 남기고 편전에서 나갔다.

그 걸음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알지 못하는 세준은 강의 뒤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저 허탈한 눈으로 내관이 끌고 나가는 궁녀를 바라보았다.

홀로 남은 편전 안,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세준은 그대로 자리에 무너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무능력함에 좌절했다. 흑흑, 울음이 목구멍을 긁으며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혼자 있을 줄 알았던 그곳에서 미약하게 들려오는 걸음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세준은 계속해서 저 자신에 대한 원망을 꺼내 놓았다.

눈물을 펑펑 쏟던 그는 제 앞에서 멈춘 발걸음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들었다.

“나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던 부경이었다. 세준은 다시 고개를 떨궜다.

“제 잘못이 맞습니다…. 그 아이를…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는데….”

“자책하지 마십시오. 일이 이렇게 된 탓은 주상 전하께 있습니다.”

다정함이라고는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뭐라고. 세준은 무뚝뚝함으로 똘똘 뭉쳐 있는 부경에게 위안을 느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그곳에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부경은 곧장 걸음을 떼어 바깥으로 향했다. 완전히 혼자가 된 세준은 입술을 앙다물고 치밀어 오르는 설움을 삼켰다.

강을 탓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려나 싶었지만, 그것 역시 세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 * *

월정당 대문 앞에서 붉은색 보자기가 발견된 이후 의금부 앞 뜨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강은 고초를 당하는 주 상궁을 무심한 얼굴로 지켜봤다. 그가 내지르는 비명이 귀를 따갑게 해도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았고, 다른 곳으로 눈길 한 번 옮기지 않았다.

소복 차림으로 멍석에 엎드려 살려 달라는 말만 반복하던 소용 한 씨는 더는 읍소할 기력이 없었는지 그대로 쓰러져 기절했다. 엉망진창이 된 주 상궁과는 달리 멀쩡했지만, 그마저도 충분히 죄인의 모습이었다.

“누가 시킨 것이더냐.”

똑같은 답을 들을 걸 알면서도 강은 주 상궁에게 물었다.

“소인이… 독단적으로… 행한 것이옵니다….”

“그 부적은 무엇이었느냐.”

“월정당… 귀인이 궁궐에서… 나가기를 기원하는… 부적이었사옵니다….”

주 상궁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묻는 말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했다. 강은 곧은 기세를 보며 비웃음을 내뱉었다.

“월정당 대문에서 나온 그 부적은 월정당 귀인을 저주하는 것이었고, 그 부적에 월정당의 이름 석 자가 있었다.”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한 씨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씨의 반박에 자리를 지키던 의정부 대신들의 눈길이 한 씨에게 닿았다. 그중에서도 최익수가 가장 매서운 눈빛으로 한 씨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결백을 믿지 않는 분위기가 계속되자 한 씨는 자리에 엎드려 통곡했다.

“저는 정말… 월정당을 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강이 손짓했다.

강은 증인, 증좌가 완벽한 사건에서 질질 끄는 처결을 원치 않았다. 설사 죄인이 기꺼이 자신의 편이 된 최익수의 식구라 할지라도 강은 과감하게 처결을 내릴 생각이었다.

최익수를 향한 배신감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를 믿지 않았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저 그 속에 숨어 있을 명백한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죄인의 입에서 답이 나왔으니 강은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었다. 그게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고, 그 누구도 월정당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경고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소용 한 씨는 백산도에 위리안치한다. 소용 한 씨의 명을 받아 부적을 구매한 주 상궁과 그것을 월정당에 묻은 나인을 참형에 처한다.”

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실의 위엄? 그깟 게 무엇인지 몰랐다. 제가 은재에게 한 짓은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은재에게 마수를 뻗은 종자에게 분노를 느꼈다.

“이 처결은 왕실의 위엄을 내보이는 것이며,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정치적으로 궁궐에 들인 것을 증명하듯 강의 눈길은 한 씨에게 닿지 않았다. 지아비로 섬길 것이라 다짐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한 씨는 그제야 월정당을 향한 임금의 미련을 보았다. 그리고 곧 한 씨의 눈에 체념이 깃들었다.

“영의정.”

앞으로 나선 최익수가 강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하명하시옵소서.”

“한 씨를 어찌하면 좋을지, 경이 직접 판단하여 과인에게 답을 가져오시오.”

최익수는 한 씨를 곁눈질했다. 애초에 싹을 잘라 버렸어야 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죄인에게 향했던 분노가 뒤늦게 깨달은 후회를 집어삼켰다.

강은 잠깐 왔다가는 바람처럼 그곳에서 사라졌다.

의금부 나장들이 고문으로 혼절한 나인과 피 칠갑을 한 주 상궁을 끌고 옥사로 향했다. 최익수는 멍석에서 울부짖는 한 씨에게 다가갔다.

“어리석은 것.”

눈물을 펑펑 흘리던 한 씨가 고개를 들어 최익수를 바라보았다. 저에게 꽂힌 경멸과 혐오, 증오를 바라보며 한 씨는 제 살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는 공포를 깨달았다.

“외숙부님… 살려 주십시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네 입으로 네가 지은 죄를 고했다. 그것만큼 확실한 증좌는 없다.”

“억울합니다…. 저는 월정당을 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 부적은 연을 맺은 부부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최익수는 간악한 변명 따위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투기심이 심한 사람의 말로는 분명하게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더는 들어 주고 싶지 않았던지라, 최익수는 한 씨에게서 매몰차게 발길을 틀어 버렸다.

“외숙부님! 정말 억울합니다!”

제게 마지막 동아줄이었던 최익수가 미련 없이 돌아서 버리자 한 씨는 절규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하고 나장에게 붙잡혔다.

한 씨는 허망한 눈길로 형장에서 사라지는 최익수를 바라보았다.

꺽, 꺽,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시던 한 씨는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쩍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 *

수문군에게 출입패를 내민 내관이 궁인들이 이용하는 문을 나섰다. 길은 어둠으로 꽉 막혀 있었지만, 길눈이 밝은 듯 뻗어 나가는 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내관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향하지 않고 저잣거리로 향했다. 시전 상인들이 장사를 접고 가판을 정리할 늦은 시각, 그는 기루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붉은색 홍등을 내건 기루 앞에서 그의 걸음이 멈췄다. 내관은 반짝이는 눈으로 제가 접해 본 적 없는 세상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청지기의 안내를 받으며 기루로 들어간 내관은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내관은 가야금 소리가 장지문을 뚫고 나오는 곳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곧 장지문이 열렸다.

먼저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내관에게 들이닥쳤다. 지금껏 흥에 사로잡혀 있던 내관에게도 어렴풋이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주역이 오셨구먼!”

내관은 저에게 날아드는 환대가 기뻤다. 그간 보연당에서 일하면서 겪었던 수모가 다 씻겨 내려갈 정도로 저를 반기는 그들의 반응이 기분을 좋게 했다.

내관은 빈 상석을 의아해할 새가 없이 자리를 내어 준 양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치레를 했다. 그러고는 그가 내민 술잔을 받아 들고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자네가 없었다면 일이 힘들었을 걸세!”

“이로써 우리가 다시 일어날 날도 멀지 않았으니, 어찌 자네의 공이 작다고 하겠는가. 오늘 배불리 먹고 거나하게 취해 보세.”

저를 추켜세우는 이들은 명예와 재물, 관직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에 비해 하찮기만 했던 자신이 추앙받는 기분에 우쭐해진 내관이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성공을 자축했다.

거짓으로 보연당을 음해한 나인은 고향에 큰돈을 보내고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다. 깊은 밤, 월정당 대문 앞에 빨간 보따리를 묻은 것은 바로 내관이었다.

그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내관과 나인의 손이 필요했으니, 응당 그 성공이 두 사람으로 인하여 이뤄졌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내관은 그들이 무엇을 성공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새로운 도약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한껏 들뜬 내관은 그들의 일원이 된 것처럼 호기심을 부풀렸다. 그 계략을 꾀한 사람이 누구일까.

“어느 분의 뜻이었습니까?”

내관은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그 순간, 왁자지껄하던 곳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 고요해졌다. 급속도로 바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관은 눈을 굴렸다.

“하하하!”

민명탁, 그를 시작으로 방 안에 웃음이 가득 찼다. 민명탁은 내관을 주시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목구멍으로 술을 넘기고 다시 씩, 웃었다.

“누구겠는가.”

민명탁은 침묵했다. 그러자 다른 이가 내관의 질문에 답했다. 덧붙여 묻기도 전에 내관의 술잔에 술이 채워졌다. 내관은 어서 술을 마시라는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꿀꺽 술을 넘겼다.

그리고….

“쿨럭!”

상 위로 고꾸라진 내관의 머리통을 보며 그곳에 있는 능경파가 시끄럽게 웃음을 내뱉었다. 내관의 입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 뚝, 소리를 내며 떨어져도 능경파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돈을 대가로 제 목숨을 넘기고 적시적기에 임금을 찾아간 나인도, 윗전을 배신하는 대가로 명예를 얻길 바랐던 내관도 그들에게는 한 번 쓰고 버릴 패일 뿐이었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이용했다. 그들이 바라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빈 상석, 그곳을 곧 채우게 되리라.

유경파의 최익수는 신뢰를 잃었다. 그로 인하여 능경파가 다시 날아오를 것이었다. 그들은 저희가 다시 권력을 쥘 그날을 기약하며 기꺼이 기쁨을 취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