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下)
삼 년 후.
궁궐에는 많은 소문이 존재했다. 그것은 때로는 진실을 담고 있었고, 때로는 거짓으로 똘똘 뭉친 것이었다. 족적을 남기지 않고 사람들의 머리를 타고 넘어 다니는 그것으로 혀가 잘리는 일은 다반사요, 때로는 목숨을 잃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그중에서도 월정당(月正堂)은 궁궐에 떠도는 소문과 단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월정당은 후원 근처에 있는 전각으로 대전과 편전 그리고 중전이 기거하는 서희전(徐熙殿)과 인접한 곳이었지만, 후원에서도 워낙 구석진 곳에 있어 다른 임금이나 중전이 즐겨 찾는 곳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곳을 지나던 아기나인이 바람결에 부대끼는 나뭇가지 소리를 잘못 듣고 놀라 도망친 일이 있었다. 사색이 되어 벌벌 떠는 아기나인을 시작으로 월정당 귀신에 관한 소문이 궁궐 안에 일파만파로 퍼졌다.
아기나인의 말을 들은 궁인들은 모두 월정당 귀신으로 유력한 인물을 떠올렸다.
후원을 아꼈던 선대 임금 중 하나가 총애하던 후궁을 가까이 두기 위해 지은 곳이 바로 월정당이었다.
그때 그 임금이 그 후궁을 얼마나 아꼈는지, 임금은 편전에서 집무를 하다가도 월정당으로 향했고, 중전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도 월정당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나 선왕은 유달리 사랑에 편력이 심했던 사람이었고, 정비와 후궁을 셋 이상 들일 수 없다는 법도가 있었음에도 사랑에 눈이 먼 사내는 하루가 멀다고 자신의 몸에 새겨진 증표를 바꾸곤 했다.
총애는 받으면 받을수록 불안하고 감질나고 욕심이 나는 것이었고, 월정당 후궁은 질투심이 강했었다. 자신이 임금의 곁에 제일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니,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을 것이었다.
임금이 후원으로 오는 날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욕심을 버리지 못한 그이는 결국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임금을 찾아 헤매던 후궁의 걸음이 기어이 중전이 기거하는 서희전으로 향하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기며 월정당 후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임금은 그 후궁을 예뻐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탱자나무만 없을 뿐, 세상과 단절된 월정당에 후궁을 위리안치했다. 그곳에 갇혀 임금과 궁인들에게 점점 잊혀 가던 월정당 후궁은 대들보에 목을 매고 죽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렇기에 아기나인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를 월정당 후궁의 울음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월정당, 그곳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궁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삼 년 전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 떠꺼머리 도령 때문에라도 월정당은 궁궐에서 잊힐 수 없었다.
떠꺼머리 도령이란, 혼인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혼인을 하지 못한 총각을 이르는 말이었다.
궁궐에서 혼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금과 궁궐 문을 드나드는 대신들뿐이었다. 내관으로 지내는 음인 사내도, 상궁이나 나인으로 여생을 보내는 음인 여인들도 궁궐 안에서 승은을 입지 않는 한, 혼인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었다.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그는 궁인도 내명부에 속한 이도 아니었다. 이도 저도 아닌 그이는 후원 속에 파묻힌 월정당에서 숨을 죽인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추운 겨울이었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임금이 내뿜는 기운이 그렇지 않아도 추운 대전을 더 싸늘하게 만들었다. 임금의 앞에 머리를 조아린 문무백관들은 하나같이 주변에 서 있는 동료들의 눈치를 보았다.
적절한 말을 찾아 꺼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을 즘, 임금의 말문이 트였다.
“이미 셋이나 있는 후궁, 하나 더 채운다고 큰일이 나겠소.”
사건의 발단은 임금의 편력으로 시작되었다.
삼 년 전, 가례가 고꾸라지고 임금은 제일 먼저 후궁으로 귀인 박 씨를 궁으로 들였다. 그 이후 차례대로 유경파의 가문에서 소용 한 씨를, 연파에서 소용 정 씨를 책봉했다.
당권을 유합시키기 위한 취지로 느껴지도록 후궁을 들였으나, 임금이 후궁들에게 중궁전을 넘볼 기회를 주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호시탐탐 김윤덕의 복권을 노리고 있는 능경파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서희전을 채우고 싶었지만, 월정당에 기거 중인 떠꺼머리 도령이 모두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유경파와 연파에서 후궁을 뽑아 들이기 전, 누군가가 임금의 앞에 엎드려 간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계절이 한여름이었다.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음에도 푹푹 찌는 더위에 대전에 든 대신들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윤대했던 날이기도 했다.
‘주상 전하, 직첩을 받지 못한 자가 어찌 궁궐에서 지낼 수 있겠나이까. 부디 월정당에 기거 중인 도령을 속히 퇴궐시키시옵소서.’
그 안에서 임금의 용안을 직시할 수 있는 자가 하나 없었지만, 그곳에 있던 모두가 임금의 분노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어마무시하게 싸늘하고 살을 에는 듯한 찬기가 불어오는 것은 기분 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적나라했다.
임금에게 간언을 올렸던 내신은 겨울이 되면 동사하기 좋다고 소문난 나산도로 발령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임금의 앞에서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을 입방아에 올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들은 공석으로 비워 둔 중전의 책봉까지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웠다.
“주상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국법에는 후궁은 둘밖에 둘 수 없다고 정해져 있사온데, 어찌하여 만백성의 앞에 모범을 보이셔야 할 주상 전하께옵서 위법을 구중에 담으시옵나이까. 본디 군자란 모자람 앞에서 만족을 느끼고, 넘침 앞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옵니다. 하오니 뜻을 물러 주시옵소서.”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와중에 겁을 상실하고 앞으로 나선 이는 다름 아닌 임금이 가장 아끼는 신하, 김세준이었다.
일 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임금의 뜻으로 다시 복직하게 된 김세준은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의 형제였고, 지금은 잠시 숨을 죽이고 있는 능경파의 수장, 김윤덕의 아들이었다.
당시 김세준의 복직을 두고도 유경파와 연파 그리고 능경파의 피 튀기는 설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된다, 안 된다를 두고 싸우던 이들은 임금이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모두 입을 싹 다물었다.
‘아마 나산도 옆 함천도도 관찰사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지?’
지금도 문무백관들은 백번 천번 김세준의 뜻에 동조하고 싶었지만 나설 수가 없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토록 복귀하는 것을 반대했던 세준이 이제 그들의 기댈 구석이 되어 버린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후궁을 더 늘리는 것은 분수에 걸맞지 않으니, 지금으로 만족하라는 것이오?”
“전하, 송구하오나 홍주도와 서경도에 올여름 일어난 홍수로 흉년이 닥쳤다 하옵니다. 후궁을 들이는 의례에 쓰일 세금을 구휼하는 것에 보태어 쓰신다면 어찌 단단하게 굳어 버린 민심이 성인을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허튼 데 돈을 쓰지 말라는 말이 아니오. 하면 올해는 도승지의 뜻대로 하고, 내년 이맘때 다시 후궁을 들이는 일에 관해 논하도록 하겠소.”
세준은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반으로 접은 허리를 더 굽히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이만 윤대를 마칠 터이니 모두 물러가시오.”
임금은 문무백관들이 차려야 하는 예를 생략하고 용상에서 내려왔다.
임금의 뒤를 따르는 행렬이 멀어지자 허리를 굽혔던 백관들이 하나둘 앓는 소리를 내며 척추를 곧추세웠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직 대전에 남아 있는 세준 때문에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못하고 눈치만 굴리며 바깥으로 향했다.
“흐음, 아무래도 월정당에 있는 아우 때문에 마음이 쓰이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주상 전하의 말씀대로 하나 더 늘린다고 큰 문제는 없을 텐데….”
“김윤덕이 다시 돌아와 초를 치지 않는다면 전하께옵서도 언젠간 월정당을 정리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자가 중궁전 자리를 눈독 들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겠지요.”
대전 밖으로 나와서야 작게 목소리를 낼 수 있던 이들은 대전 문 앞에서 저희를 지켜보는 세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진저리를 치며 석계를 내려갔다.
세준은 넓은 대전 뜨락으로 퍼진 인파를 보며 한참 동안 대전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그곳이 한산해지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마마!”
때아닌 소란스러움이 월정당 마당에 울렸다. 추운 겨울이라 들어열개문으로 막아 놓은 대청마루 안으로 뛰어 들어간 나인 하나가 장지문 앞에서 발을 동동거렸다.
“마마! 답을 안 하시면 정말 소인이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이옵니다.”
기단 아래에 선 내관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장지문에 대고 목청을 높이는 나인을 보고 있었다. 제가 나서서 장지문을 부숴야 하나 싶었지만, 나인의 기세로 보아 장지문 하나는 충분히 부술 수 있을 듯했다.
“마마! 제발 답 좀 하시옵소서!”
장지문에 대고 소리치던 나인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잔뜩 우그러뜨렸다.
발을 구르는 소리로 대청마루 안이 소란스러웠지만, 방 안에 있는 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혹여나 저희가 잠시 잡다한 일을 하던 사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싶었다.
나인과 내관이 마음을 놓지 못하고 불안에 떨던 순간, 안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슬며시 장지문이 열렸다. 사가의 떠꺼머리들과는 다르게 은으로 만든 상투관을 쓴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울먹이는 나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더냐?”
“마마!”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내관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고, 나인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대청마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인이 얼마나 불렀는지 아시옵니까?”
잠시 책을 읽다 잠이 들었던 은재는 그저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펑펑 눈물을 쏟는 나인, 남이의 모습에 난처해하며 은재가 말했다.
“미안하구나. 잠이 깊게 들어 듣지 못했다.”
은재는 도와 달라는 듯 마당에 서 있는 내관, 송리를 바라보았다. 은재의 뜻을 알아챈 송리가 후다닥 기단 위로 뛰어올랐다.
“괜찮으시면 되었잖아. 얼른 일어나.”
송리가 손가락으로 남이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남이가 짜증을 내며 송리의 손가락을 뿌리쳤다. 걱정했던 것이 많이도 억울했는지 남이는 눈물을 쉽게 그치지 못했다.
특히나 남이의 눈물에 약했던 은재는 역전된 상황에서 어찌 달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송리도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듯 은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월정당 마당에 들어선 세준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도승지 영감의 때맞춘 등장이 꽤 효과가 있는 것인지 남이가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승지 영감, 오셨습니까.”
송리가 예를 갖추자, 대청마루에서 내려온 남이도 세준에게 예를 갖췄다. 얼떨떨한 상황에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보던 세준이 은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마마, 무슨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저… 잠깐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걱정할까 봐 대충 둘러대는 게 분명하다고 짐작한 세준의 눈길이 남이에게 닿았다. 궁궐 안에서도 드세기로 소문이 난 남이가 우는 모습이라니, 세준은 그간 들었던 소문이 사실이 아니구나,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더냐.”
벌게진 눈을 소매로 연신 훑던 남이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입을 떼었다.
“소인이 계속 밖에서 마마를 불렀습니다. 한데 마마께서 답을 하지 않으시니 걱정이 되는 마음에 소리를 높이는 불경을 저질렀지요. 마마께서 무탈하신 모습으로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니, 그만 근심했던 마음이 놓여 눈물이 나왔습니다.”
남이에게 닿아 있던 세준의 눈길이 다시 은재에게로 향했다. 잠이 들어 듣지 못했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 세준이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마, 앞으로 오수에 드시려거든 내관을 옆에 붙여 두십시오.”
난처했는지 은재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벌써 두 번째이십니다. 걱정하는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시어 곁에 두십시오.”
미안한 마음에 은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직첩을 받지 못해 궁궐에서 나오는 녹봉이 없었고, 월정당 살림은 세준이 내어 주는 금전으로 꾸려야 했다.
제가 입고 먹는 것도 아껴야 하는 처지에 남이와 송리까지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세준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은재는 아직 혼례도 치르지 못한 세준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걸렸다.
하물며 정식 내관과 나인인 두 사람을 월정당에서 일하게 하는 것마저도 염치없다고 생각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여섯 칸짜리 월정당을 쓸고 닦는 걸 송리와 남이, 두 사람이 맡아 하고 있었다. 둘 중 하나를 곁에 두면 한 사람 몫으로 떨어지는 집안일을 누가 반기겠는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날이 춥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세준의 말대로 은재는 방 안으로 향했다. 세준은 송리와 남이가 부엌간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식량은 충분하냐?”
세준의 물음에 송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남이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세준이 혼자 벌어 네 사람이 먹고살기에는 빠듯한 게 분명하니 부족한 게 많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세준은 겸연쩍어하는 송리를 보며 말했다.
“내일 사가로 오거라.”
삼 년 전 김윤덕의 가문이 완전히 무너진 이후 몰수된 재산을 되찾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송리도, 남이도 사가에서 지낼 세준의 모습이 눈에 빤히 보였다. 저희 둘을 먹여 살리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걸 어찌 모를까.
함구하라, 톡 쏘아붙였던 말이 은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었지, 세준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언급하지 않았으니 말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송리와 눈빛을 주고받던 남이가 말문을 뗐다.
“영감마님…. 사실 며칠 전에 대비마마께서 마마 몰래 식량을 보내 주셨습니다.”
“대비마마께서?”
“예. 마마께서도 종종 대비마마께 문안 인사를 여쭈러 가시고, 대비마마께옵서도 자주 마마를 찾으십니다.”
세준은 말을 잇지 못하고 별 볼 일 없는 세간살이를 훑어보았다.
이 년 전, 다시 천양으로 돌아와 직첩을 받은 후 강의 허락을 받고 이곳에 들렀던 세준은 그날을 머릿속에서 지워 낼 수 없었다.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그땐 송리가 없이 남이와 은재가 월정당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궁이에 땔 나무도 없어 후원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 모아 불을 때던 남이를 떠올린 세준은 눈시울을 붉혔다.
세준의 근심을 본 송리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질 수 없다는 듯 남이도 세준을 안심시켰다.
“정 부족하면 제가 수라간 나인들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세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풀어 송리에게 건넸다.
“얼마 없지만, 보태 쓰거라.”
받기를 주저하던 송리가 남이의 눈치를 보았다. 남이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송리는 조심스럽게 세준이 건넨 주머니를 거두었다.
“탕약은 잘 드시고…?”
“예, 때 놓치지 않고 잘 올리고 있습니다.”
“혹….”
송리와 남이에게 물을 게 더 남아 있었는지 세준이 입을 떼었지만,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말문을 닫았다.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세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이만 마마를 뵈러 가야겠다.”
“예….”
강이 이곳을 찾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부정으로 돌아왔다. 더 물어도 소용없는 일이라 아예 묻지 않기를 택한 세준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멋쩍은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 바깥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엌간에 남은 송리와 남이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오가는 눈빛은 실로 심각했다. 월정당을 찾아온 손님에게 내어 줄 게 없다는 것이 두 사람의 큰 걱정거리였다.
“몸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방 주인은 그럴싸한 보료도 없는 곳에 방석을 두고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은재를 바라보는 세준의 눈빛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형제의 걱정을 일찍이 알고 있던 은재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웃음에 세준의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마, 궁궐에서 지내는 데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첩지를 받지 않은 몸이라 마마라는 호칭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월정당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은재는 스스럼없이 마마라 부르는 이들의 고집만 아니라면 마음이 불편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불편한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꺼내다 보면 한둘이 아니게 되니, 염려치 마세요.”
세준은 뭔가 불안해 보이는 은재의 모습에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름대로 벌어진 일을 무마해 보려고 했지만 월정당에 처박혀 사는 은재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도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려고만 했다.
“형님…. 그리고….”
세준을 부르던 은재는 서로의 눈길이 맞닿아 있음에도 쉽사리 말을 꺼내 놓지 못했다. 되레 제가 먼저 세준의 눈길을 피해 버리니 세준은 그저 의아함을 품고 은재를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말하기를 주저하는 모습에 세준이 나서 재촉했지만, 꽉 다물린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은재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세준을 보았다.
“바쁘실 텐데… 매일같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을 하는 의중은 모르겠지만, 세준은 은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마저도 아렸다.
오지 말라, 매몰차게 내뱉은 말도 아니었건만 어찌나 코끝을 찡하게 하는지, 세준은 뜨거워진 눈가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바쁜 시간을 피해 찾아뵙는 것이니 괘의치 마십시오.”
“그렇지만… 괜히 이곳에 걸음을 하시다 눈총을 받으실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괜찮으니, 형님께서도 마음 쓰지 마십시오.”
세준은 누가 누굴 걱정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애써 어금니를 꽉 깨물고 목울대를 울렁거렸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원망이 지금 편전에서 집무를 보고 있을 강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귀양지에서 서서히 죽어 갈 운명이었던 제가 살아서 은재를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강을 원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도승지 영감, 계십니까?”
밖에서 대전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나마나 강의 명을 받고 저를 찾아왔을 것이었다.
“마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나가지 않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세준은 은재를 이곳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장지문 앞에 섰지만, 문을 나갈 용기가 없는 것처럼 몇 번이고 은재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은재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강의 명을 어길 수 없는 처지라 세준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