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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中) (6/9)

2장.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中)

부경과 함께 지강문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강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은재는 작은 보따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부경과 함께 지강문 밖으로 나왔다.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너머로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인영이 잡히길 바랐지만, 은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고삐를 쥐고 있던 부경 역시 같은 마음으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걱정이 부경을 에워쌌다.

강에게는 늘 보이지 않는 위협이 뒤따랐다. 지금은 더더욱 강이 위험할 때였다. 강이 세자에 앉길 바라지 않는 자라 강을 노릴 게 분명했다. 등골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부경은 말고삐를 꽉 쥐었다.

“혼자 계실 수 있겠습니까?”

은재는 거리로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부경을 바라보았다.

“제가 가서 대군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혹 길이 엇갈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문이 닫혀도 나올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에 계시지 마시고 저기 저 주막으로 가서 기다리십시오.”

부경이 가리킨 방향으로 은재의 고개가 돌아갔다. 도성 바로 앞에 자리한 주막은 인정이 가까워진 밤인데도 불이 환했다. 은재는 다시 부경을 보았다.

“괜찮습니다. 이곳에 있겠습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네.”

부경은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부경의 호패를 살피지도 않고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혼자 남아 떠나는 부경의 모습을 바라보던 은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든 일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나, 불안한 마음만큼은 쉽게 지워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강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은재는 희망을 가득 품었다. 그리고 제가 비로소 얻게 될 자유를 그렸다. 그러자 마음에 물들어 있던 불안이 천천히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군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안 들어오실 것입니까?”

문 근처를 서성이는 은재를 향해 수문군이 물었다. 은재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문이 닫히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은재는 그저 오지 않는 강이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서 강을 찾아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은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성 안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통행을 금지한다는 신호였다.

큼직한 문에 수문군 둘이 매달렸다. 천천히 닫히기 시작한 문이 쿵 소리를 냈고, 곧이어 거대한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재는 부경의 말을 믿었다. 닫혀도 걱정하지 말라는 그 말을 믿었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부경이 알려 준 주막으로 걸어갔다.

* * *

종이 치기 전 지강문으로 향해야 했기에 강은 말을 타고 움직였다. 이미 어둠이 깔려 있어 길거리에는 사람은커녕 짐승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강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사방에서 갈고리가 날아와 저의 살갗과 근육을 파고들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도성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지강문에 다다랐을 즘, 강은 말을 멈춰야 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를 바라보았다. 흑의를 입은 이는 어두운 곳에 서 있었다. 명주 천으로 가리지 않은 그의 눈에서 예리한 살기가 빛을 내고 있었다.

강은 그 눈빛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물러서라.”

강은 일순간 에워싼 무리를 곁눈질했다. 무리의 대장까지 살수는 모두 일곱. 앞을 막은 이를 매섭게 바라보며 말고삐를 쥐고 있던 손을 옮겨 허리춤에 찬 장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물러서라 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포위하고 있는 무리는 답하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이 날이 선 칼을 들고 경계하며 찰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보낸 것이냐. 김윤덕? 아니면 주상?”

그들의 목적이 강이듯, 강을 위협할 이들도 뚜렷하게 정해져 있었다. 강은 우스웠다.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으니, 저를 죽이려고 누렇고 뾰족한 이를 드러낸 이들이 그저 우스웠다.

싸늘하고 굵은 기합이 울리는 동시에 칼을 든 이들이 광포한 움직임으로 강에게 뛰어들었다. 강은 말 위에 풀쩍 뛰어내려 저를 향해 내리치는 칼의 요동을 막아 냈다. 하나의 검을 치워 내면 또 하나의 검이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강에게 달려드는 이들은 여섯. 관망하는 자는 하나.

강이 휘저은 손짓에 악, 소리가 짧게 울렸다. 장검을 든 살수의 손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제 손모가지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바라보는 살수의 눈에는 살고 싶다는 희망이 서려 있었다. 강은 무참하게 그 희망을 무시했다.

손 잘린 살수의 목을 향해 겨눴던 칼을 다른 이가 막아 냈다. 금속이 맞닿으며 빚어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챙챙, 하며 퍼졌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 동료를 지키고자 나섰던 이는 저돌적이었다. 강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듯한 살기가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강은 예사롭지 않은 살수의 몸놀림을 주시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에만 몰두한다면 체계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상대는 살수도, 사병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으로 훈련한 군사의 몸짓이었으나, 도성 인근에 주둔하는 군영보다 수준이 높았다.

강은 깨달았다. 저를 죽이려고 들 만큼 저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이가 누구인지, 세자가 죽어가는 와중에 저의 숨이 멀쩡하게 붙어 있으면 가장 손해를 보는 자가 누구인지를.

아비이기를 진즉에 내려놓았고, 더 나아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주상의 뜻대로 길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꿈을 품었고, 욕심을 가졌다. 강은 절대로 그들의 손에 죽을 수 없었다.

강의 칼이 살수가 입은 흑의를 뚫고 단단한 살과 근육을 파고들었다. 몸통을 관통한 뾰족한 칼끝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살수가 토해 낸 피와 신음이 강의 어깨를 적셨다.

남은 살수는 모두 다섯.

빈약한 뒤를 노린 살수가 긍지를 담은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강은 이미 숨통이 끊긴 살수의 몸에 박혀 있던 칼을 뽑았다. 저에게 날아든 이를 막아 내기 위해서는 속도가 관건이었으나 강은 이미 찰나를 놓쳤다. 뒤늦게 저를 덮친 살기를 뿌리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살수의 칼날은 강의 왼쪽 어깨를 내리찍었다. 그러나 칼을 든 강의 손을 잘라 버리겠다는 격분은 부경의 칼에 의해 처참하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남은 살수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아군은 늘어났다.

“검술에 능하다.”

“어깨,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강과 부경은 등을 맞댔다. 서로의 뒤를 엄호하며 달려드는 칼에 맞섰다. 살고자 하는 희망을 욕심이라고 비아냥거리듯 살수의 수가 늘어났다.

다섯에서 열.

어쩌면 어둠은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둠은 살고자 했던 꿈을, 은재와 함께 행복을 꿈꿨던 욕심을 집어삼킬 듯이 요동쳤다.

살수들의 날랜 칼을 기민한 칼로 받아쳤다. 강과 부경은 쉬지 않고 덤비는 칼의 욕망을 조롱하듯 거둬 냈다.

그때, 또 다른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기라고 하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연장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많은 것을 모두 해치운 듯 피를 머금고 있었다. 잠을 자려다 말고 바깥으로 나온 듯 입고 있는 옷 역시도 허술했다.

강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군일까, 적일까. 걱정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염려하지도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이, 예기치 못하게 등장한 새로운 무리가 움직였다.

드문드문 때가 물든 누런 옷을 입은 그들은 저희가 입은 옷과 상반된 검은 무리를 향해 날이 선 연장을 휘둘렀다. 배운 바가 없는 듯 그들은 과감했다. 거침이 없었고, 자비가 없었다. 사정없이 휘두른 손짓에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다.

그들이 얽힌 채 칼을 휘두르고 피를 뿜고 있는 사이 부경은 강의 앞을 가로막고 호위했다. 흑의를 입은 자들이 강을 향해 칼을 놀려 댔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무모하고 흉포한 맞섬에 물러나야 했다.

살육이 일어나는 현장임에도 거리는 고즈넉했다. 앓는 소리 하나 없이 일어났던 흙먼지는 가라앉았고, 비릿한 피비린내만을 풍겼다.

조용히 끝이 났다. 누렇고 낡은 옷을 입은 이들은 제 동료의 죽음에도 슬퍼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그곳을 떠나려고 걸음을 돌렸다.

“누가 보낸 것이냐.”

강이 물었다.

“나를 살리라 했느냐.”

제일 선두에 서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살수들을 해치운 이에게 물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던 이는 고개를 틀어 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렇게 강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답을 하지 않고 저의 동료와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강은 기뻐하지 않았다. 살아남았음에도 안도하지 않았다. 분노로 물든 마음으로 관망하던 자의 시체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거리에 드러누워 있는 이들의 얼굴을 가린 무명천을 벗겨 냈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관망하던 자로 보이는 시체도 없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주상이 보낸 자객이다.”

안에서 끌어 올린 목소리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였다. 수많은 시간 동안 억눌렸던 강의 분노는 저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던 살수들의 움직임처럼 과감하게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더는 참지 않겠다.

부경은 강을 우려했다. 수년간 강의 곁에서 보았기에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강의 시선은 궁궐로 향하는 길에 닿아 있었다. 궁궐을 노리기에 강은 연약했다.

“대군….”

“길을 막아선 자, 겸사복장 이조철이었다.”

겸사복장이라면 왕의 친위대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나섰다는 건 임금의 뜻이었다는 것이었다. 부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을 위로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붉은 피가 튄 바닥을 딛고 있던 발이 떨어졌다. 부경은 서슴없이 강의 손목을 붙잡았다. 다친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로 축축하게 젖은 손목을 잡아 만류했다.

“대군.”

“최익수의 집으로 갈 것이다.”

“도령께서….”

떼었던 발이 다시 바닥에 닿았다. 강의 시선이 궁궐로 향하는 길과 반대되는 곳으로 움직였다. 멀거니 길게 쭉 뻗은 길을 바라보는 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댕, 댕.

인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도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얼마 후면 야경꾼이 도성을 돌아다닐 것이었다. 그들이 강과 부경을 가로막을 수 없었기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부경은 강을 기다리고 있을 은재를 염려했다.

짧은 순간, 부경은 강의 갈등을 보았다.

그는 강이 목구멍까지 치솟은 분노를 잠재우고 지강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도령에게 가기를 바랐다. 부경은 강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도성 밖 주막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하고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았다.

“대군.”

“회은동으로 가거라. 택원이라면 그이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따르지 않겠다고 하면….”

강은 버거워했다. 제 입으로 내뱉어야 하는 그 말을 두려워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입술이 지금 가슴속에 일렁거리는 설움을 대변하듯 파르르 떨렸다.

“변덕이 심해 내 마음이 바뀌었다 해라. 그곳에 내가 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이에게 나를 단념하라고 말해라.”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웠을 테지만, 강은 차분했다. 부경은 강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 강은 하기로 마음먹으면 결심한 대로 하는 사내였다. 어떤 조언도, 부탁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부경은 알고 있었다.

“혼자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강은 위협에서 도망쳐 근처에 몸을 숨긴 말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그리고 강의 발이 떨어졌다.

다시 회은동에 도착한 부경은 대문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은재와 함께 왔을 적처럼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잠들었을 늦은 시간, 작은 사랑채에 선 부경은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방 안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불빛에 잡히는 인영을 눈에 담은 그는 시급한 사안을 생각하며 창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창호지를 덧댄 창을 꼭 그러쥔 주먹으로 툭, 하고 쳤다. 난데없는 방문에 놀랐는지 방 주인은 미동하지 않았다.

누가 들을세라, 부경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리, 부경입니다.”

바닥을 딛는 걸음 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매끄럽지 않은 경첩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울리며 창문이 열렸다. 창을 연 이의 얼굴에는 생각지 못한 방문에 당황했으면서도 얼핏 기쁨이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세준은 늘 그렇듯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경은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저에게 닿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세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부경은 아래로 고개를 떨궜다.

“함께 가실 데가 있습니다.”

“네?”

이랬던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세준은 의아했다. 그것도 잠시 세준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인정이 되었는데, 어딜 간다는 것입니까?”

“지금… 아우께서 지강문 밖에 계십니다.”

어렵게 입을 뗀 부경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세준을 보았다. 당황을 넘어서 경악하는 세준을 보며 부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으, 은재가 어찌….”

부경에게 답을 듣지 않아도 세준은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경이 저에게 와 사실을 말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고 짐작했다.

도망가려고 했던 두 사람의 계획이 틀어진 게 분명했다. 세준은 강의 신변을 걱정했으나,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은재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창문에 달라붙어 있던 세준은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그곳에서 떨어졌다. 모습을 감춘 세준의 빈자리에 닿아 있던 눈길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부경의 잇새에서 흐릿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늦은 밤, 대문을 두들기는 객의 난동에 잠에서 깬 최익수 집 겸인이 대문을 열었다. 그는 어둠 속을 지키는 이를 향해 등불을 내밀었다.

피로 흠뻑 젖은 도포와 손에 쥔 칼을 보는 순간, 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절로 등불을 든 손이 덜덜 떨렸고,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안내해라.”

겸인은 묵직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근엄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손에 들린 칼이 무서웠다.

겸인의 근심을 깨달은 듯 다물어졌던 강의 입이 열렸다.

“죽이지 않는다. 해하려고 온 것이 아니니 어서 안내해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좋을까. 그러나 계속 버티고 있다간 낯선 객의 손에 들린 칼이 제 목을 칠 것이었다. 일단 주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힘 좀 쓰는 사내종들을 깨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 어서 들어오십시오.”

낯선 객이 안으로 들어섰다. 겸인은 헐레벌떡 대문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객의 앞에 섰다. 어두운 바닥을 등불로 비추며 늦은 밤, 잠을 자는 대신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주인에게로 향했다.

영의정, 최익수는 경악했다. 허옇게 질린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분노를 응시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잔뜩 묻어 있는 칼을 보았다. 뚝뚝, 손끝에서 떨어지며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강은 서슴없이 그가 앉아 있는 대청마루에 올랐다. 그의 앞에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술상에 제가 지금껏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내리꽂았다. 그릇이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대청에 자욱하게 울렸다.

“살수를 만났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칼을 들이미는 살수였지요.”

최익수는 강의 횡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술을 머금었다.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피를 많이 쏟아 낸 듯한 강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강이 쓰러지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가 내게 살수를 보냈을까. 내 목을 향해 칼이 날아오는 순간, 생각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최익수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강은 나긋하게 독살을 떨어 댔다. 최익수는 겁나지 않았다. 제 앞에서 패악을 떠는 것들이 몇이었던가. 임금의 앞에 서지 않은 최익수는 꽤 강심장이었다.

“저는 아닙니다.”

“영상의 짓이 아니겠지만, 배후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요.”

그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주군이 결국 일을 저질렀다는 것도 피투성이가 된 강을 보고 알아차렸으니 유감스러웠다. 그러나 알고도 일이 이리될 때까지 주군을 말리지 못했으니, 미안한 감이 없다고도 못했다.

최익수는 확실하게 아비에게 버림받은 강을 연민했다.

“어찌하시렵니까? 이 늦은 시간 닫힌 궁궐 문을 여실 수 있겠습니까?”

최익수는 강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길 원했다. 보는 김에 제 주제가 어떤지도 보길 바랐다. 강은 정치적으로는 끗발 하나 날릴 수 없는, 애초부터 임금의 총애를 받지 못한 대군이었다. 조정에 드는 당하관보다도 권력을 쥐지 못한 미천한 대군.

지금 품은 독기는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놓는 게 합당했다. 섣부른 패기는 다시 또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이었다.

“아비라는 작자가 자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옳은 일입니까?”

“옳지 않지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화를 죽이십시오. 지금은 그게 마땅합니다. 누구도 감히 천륜을 끊어 낼 수 없습니다.”

“그동안 억눌렀던 내 노력이 가상하지 않습니까?”

강은 최익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륜을 어긴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건 영상께서 더 잘 아실 듯한데…? 틀렸습니까?”

“어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최익수는 경파의 수장이었다. 실질적인 권력의 핵심이 김윤덕이었으나, 최익수의 가문은 대대로 명문가로서 범랑에서의 입지가 확고했다.

그에 비해 김윤덕은 쥔 권력에 비해 가문이 하찮았다. 김윤덕을 두고 뒤에서 처가의 덕을 본 미천한 이라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강이 최익수를 찾아온 건 최익수의 강한 내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냇가에 던지는 투망처럼 최익수와 촘촘하게 얽혀 있는 가문들을 기대했다. 최익수는 주상의 총애로 실세의 자리에 앉은 김윤덕보다 오래갈 인물이었다.

“내가 그리 궐에 드는 게 싫으시다니, 궐로 가야겠습니다.”

게다가 최익수는 머리가 총명하고 사리가 밝았다. 실리를 따질 줄 알며 권력과 부에 눈이 먼 보통의 속물적인 여러 정치인과 같았지만, 적어도 나라를 위할 줄은 아는 자였다.

“지금 궁궐로 가신다 해도 대군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궐에는 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강은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지었다.

“그럼 기다리십시오. 책봉 교서가 내려올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얌전히 앉아 책봉 교서를 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어야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를 찾아오실 게 아니라 병판에게로 가셨어야지요.”

병판을 회유해서 병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게 되면 강은 역적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임금은 강을 정정당당하게 끌어내릴 수 있었다. 그건 최익수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강이 저를 찾아온 것은 다행이었다. 강의 미래를 지금 당장 점칠 수 없었지만, 최익수는 선구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임금의 앞에서 했던 말처럼 적통 계승이 옳을 터였다.

“아뇨. 영상이어야 했습니다.”

최익수는 강이 자신에게 온 목적을 의심했다.

저를 믿는다는 호의적인 태도조차도 술상에 꽂힌 칼 때문에 의심했다. 중전의 복중에 있을 적부터 임금의 편에 서서 강의 측근을 억압했던 인물이 바로 저였다. 신뢰가 쌓일 수 없는 사이였고, 믿음보다는 원망과 증오가 투철했다.

“나를 택하세요. 그리한다면 적어도 내 손으로 영상의 목을 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최익수는 뚜렷하고 흐트러짐 없는 강을 주시했다. 어제의 숙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을까. 미래 권력을 앞에 두고 자신과 범랑의 앞날을 분주하게 예상했다. 지금 강이 손을 내밀어도 내일의 강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댈 명분이 있는 자였다.

“내 손을 잡지 않겠다면 영상은 지금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최익수는 헛숨을 들이마셨다. 강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무모함에 침을 꼴깍 삼켰다.

최고 권력은 여전히 임금의 손에 들려 있었고 강은 언제 말 위에서 낙마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최익수는 약하지 않은 강을 보았기에 지금의 비루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곧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강에게로 꽂혔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강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까칠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 최익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곧바로 궁궐로 가세요.”

의문이었다. 제가 굳이 궁궐로 가지 않아도 책봉 교서에는 강의 이름이 적힐 것이었다. 강은 확실한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최익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에게 닿아 있던 최익수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자칫하다가는 거사에 실패한 임금의 분노가 저에게 쏟아질 것이었다.

“형판의 수가 대군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형판의 뜻은 다릅니다. 형판은 양위를 간언했습니다. 만일 양위를 받으신다면 대군은 외로운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지금껏 그랬습니다.”

강의 비웃음이 짤막하게 울렸다.

“난 형판의 손에 놀아나지 않을 겁니다. 내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단, 행하기 전에 확실히 그 자리에 앉아야겠습니다.”

김윤덕은 옳지 않다. 김윤덕을 향한 강의 적개심을 살폈다. 제가 김윤덕과 선을 그은 마당에 미래 권력이 저에게 손을 내밀었으니, 얼씨구나 할 법한 상황이었다. 가중된 혼란함에 최익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주상에게로 가세요. 나를 세자에 앉히라 말해도 좋습니다. 양위를 얻어 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영상의 뜻을 보이세요. 전일의 말씀을 지키라, 나를 지지하겠다 확실하게 말하고 오십시오.”

젊은 혈기에 사활을 거는 자신의 무모함을 우려했고 강이 이기리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최익수는 결국에는 강의 손을 맞잡았다. 제가 살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건 영상의 목숨입니다. 이 좋은 세상, 천수는 누리다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은 처음부터 최익수의 기세를 꺾을 생각이었다.

만일 최익수가 지금 저의 손을 잡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세자의 자리에 오를 것은 분명했다. 그건 임금이 내보인 증오로 알 수 있었다.

열린 귀가 있으니 응당 들리는 말도 있는 법. 미워하는 자식을 죽여서라도 임금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려고 할 터, 성군이 되길 바라는 임금은 역사를 두려워했다.

강은 그걸 일찍이 알고 있었다. 임금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임금의 왼팔부터 잘라 내야 했다. 오른팔을 잘라 낼 적시적기를 위해서라도 최익수를 내쳐야 했다.

“괜한 욕심 내지 말고 내려오세요.”

감았던 눈이 떠지고 시선이 강에게로 향했다. 강의 얼굴에 떠오른 단호함을 바라본 최익수는 단념을 되새겼다. 동지가 될 것이라 여겼던 자신이 우매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우쳤다.

“그러지요. 이미 늙어 사는 것에 미련은 없지만, 대군께서 어디까지 오르는지 제 두 눈으로 보고 죽어야겠습니다.”

그건 기대감이 아니었다.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는 최익수의 마지막 발악이자 비아냥거림이었다.

할 수 있으면 해봐라. 그 촌철 같은 비난에도 강은 끄덕하지 않았다. 말하는 힘마저 아까워 미소로 답했다.

사랑채 마당으로 겸인이 뛰어 들어왔다.

“대감마님! 궐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와 함께 온 내관은 이제 막 내시부에 들어간 듯 어리고 풋풋했다. 그러나 최익수와 함께 있는 강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기함을 감추지 못한 내관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눈을 굴렸다.

최익수가 틈을 주지 않고 내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세, 세자 저하께옵서… 훙서하셨습니다….”

내관에게 닿아 있던 강의 시선이 최익수에게로 향했다. 강과 눈을 맞춘 최익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 게 온 것이었다.

짐작하고 있던 터라 충격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두 사람은 태연했다.

내관이 슬쩍 강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대군 대감께서는… 어찌하실 것입니까…?”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예…?”

“이곳에서 나를 봤다는 말을 함부로 떠든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강의 겁박에 어린 내관의 두 눈이 커졌다.

“알겠느냐?”

내관은 두려움으로 물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목적을 이뤄 낸 강은 미련이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최익수 역시 강을 따라 일어났지만, 그는 누마루로 향하는 강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영상 또한 명심하십시오.”

최익수는 누마루에 서서 저를 보는 강을 응시했다. 그리고 제가 마음에 품은 체념을 되새겼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살펴 가십시오.”

최익수는 끝까지 김윤덕의 계략을 다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김윤덕의 목적이었지만, 저에게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었다. 만일 강이 우직한 경파를 건들려고 한다면 제가 말하지 않은 김윤덕의 계획이 강의 발목을 휘어잡을 것이었다.

강이 내보인 적개심처럼 최익수도 온전히 강을 품을 수는 없었다.

은재는 불이 꺼진 주막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 오지 않는 강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미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까닭에 지루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다가올 날을 그렸다.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그렸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먹으며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꿈꿨다.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머물 만한 곳을 찾으면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은재야.”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바닥에 닿아 있던 고개가 들렸다. 은재는 주막의 싸리문 앞에 서 있는 세준을 바라보았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허벅지에 올려 두었던 짐 보따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형님.”

세준이 이곳으로 온 까닭을 눈치챘다. 세준과 함께 서 있는 이를 바라보며 은재는 탄식했다. 그럼에도 강이 올 것이라는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은재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세준이 말했다.

“돌아가자.”

“안 됩니다…. 저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은재야.”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형님, 저를 위하신다면… 부디 저를 보내 주십시오….”

옥구슬 같은 눈동자가 이리저리로 굴러다녔다.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보며 세준은 탄식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세준은 고개를 떨궜다.

“곧 나리께서 오실 것입니다. 나리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간간이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잘 살고 있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은재야….”

“제 행복을 바라신다고 하셨지요…. 형님…. 그러셨지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은재의 손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 손이 안쓰러워 잡아 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은재는 뒤로 도망쳤다.

“나리와 함께 떠난다면… 그리하게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행복할 것입니다….”

“은재야, 대군께서는….”

용기 내어 든 눈길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은재가 잡혔다. 세준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늘로 치솟아 올라간 불꽃이 공중에서 터지며 빛이 비산했다. 그 불빛의 흔적을 본 부경은 고개를 떨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결국 세자가 가느다란 생을 놓았구나. 강은 애타게 저를 기다리는 이에게 오지 못하겠구나.

“대군께서는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묵묵하게 서 있던 부경이 나섰다. 세준은 기겁한 눈으로 부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잊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이렇게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이였다는 걸.

“원체 이리 변덕이 심하신 분이십니다. 바뀐 마음을 돌릴 방법이 없으니, 돌아가십시오.”

주르륵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부경에게 닿아 있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혼란스러운 듯,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은재의 고개가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꼭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만나 떠나자고 하셨습니다.”

“이곳에 올 일이 없으니, 단념하라 전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약조를 지키겠다 하셨습니다…. 함께 떠나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혹….”

은재는 고개를 들어 부경을 보았다. 그제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부경의 옷에 흩뿌려진 검붉은 자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기신 것입니까…?”

은재의 눈길이 제 옷에 닿아 있는 것을 본 부경은 제 손으로 옷을 털어 냈지만, 이미 물든 핏자국이 지워지거나 떨어질 일은 없었다.

“무사하십니다.”

무사하다는 말에 세준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준은 직설적인 부경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은재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부경에게 눈치를 줬지만, 부경의 시선은 은재에게 닿아 있었다.

“단념하십시오. 이제는 도령과 함께하실 수 없으십니다.”

“어찌….”

“도령을 위한 일입니다. 멀어지십시오.”

퍽 단호한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은재는 뒷걸음질을 쳤다. 멀리 가지 못하고 평상에 부딪혀 그 위로 털썩 주저앉은 은재는 허망하다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함께 떠나자는 강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했다. 저에게 건넸던 숨결까지도 선명했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던 약조는 지울 수 없는 증표처럼 강건했다. 그러니 변심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세준을 불렀다. 세준은 재빨리 은재의 앞으로 다가가 몸을 낮췄다. 뚝뚝, 허벅지로 떨어지는 눈물을 어찌하면 좋을까.

“정녕… 오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은재야….”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숙였던 고개가 들렸다. 은재는 원망이 가득한 눈초리로 애먼 부경을 쏘아보았다. 소매로 흘렸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나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대군께서는 오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장 오지 못하셔도 언젠간 오실 것입니다.”

은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당에 떨어뜨렸던 짐 보따리를 주웠다. 꽤 걸음이 당찼다.

싸리문으로 향하는 은재의 뒤를 세준이 따라나섰다. 은재는 얼마 가지 못하고 발을 멈췄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부경에게로 고개가 돌아갔다.

“무사하시다면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든 나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 * *

헐레벌떡 궁으로 향한 최익수는 먼저 편전에 들어 있는 김윤덕을 경계했다.

편전에는 임금과 내관, 김윤덕 그리고 도승지가 함께 있었다. 뒤늦게 온 게 아닌가 싶었지만, 우의정이나 좌의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우상과 좌상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과인의 거사는 실패했다.”

임금은 최익수와 김윤덕의 앞에서 진실한 면모를 내보였다. 최익수는 임금의 거사를 탄식하는 반면, 김윤덕은 잠잠했다.

김윤덕이 피 칠갑을 한 강을 봤을 리가 없었다. 세자의 자리에 강을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던 김윤덕이 임금의 거사를 돕고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오니 앉히셔야 합니다.”

김윤덕은 늘 그랬듯이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침착함으로 일관된 김윤덕의 모습에 최익수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강의 뜻을 안고 궁궐로 들어온 최익수는 김윤덕에게 밀려날 생각이 없었다.

“형판의 말이 맞사옵니다. 효원 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시옵소서.”

세자가 죽은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았을 시각이었다. 임금은 자신이 가장 총애했던 두 신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선택은 자신이 몹시도 미워하는 강이었다. 강을 그 자리에 앉힐 바에 죽여 없애겠다고 저의 사람을 궁궐 밖으로 보냈지만, 실패로 끝난 임금의 뜻에는 더는 강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과인은… 강이 싫다.”

김윤덕은 잠자코 시립했다. 고개를 들어 임금을 바라보지 않았다. 임금은 그의 침묵이 달갑지 않았다. 불안했고, 불만스러웠다.

편전에는 침묵이 깔렸다. 최익수는 나설 수가 없었다. 절절 끓는 임금의 애통함과 분노가 저에게 쏟아질까 봐 겁이 나서 입을 꾹 다물었다.

“양위하시옵소서.”

한참 동안 침묵하던 김윤덕이 뜻을 꺼내놓았다. 김윤덕의 뜻은 반역이었다.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호에게 물러나라, 제가 왕권을 가지고 놀겠다는 심보였다. 최익수는 바닥에 엎드려 바닥에 이마를 처박았다.

“주상 전하! 형판의 뜻은 경파와는 일체 상관없사옵니다. 천자의 자리는 선택받는 것이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옵니다! 어찌 신의를 업신여기어 내놓으라, 마라 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저군은 군주가 정하는 것이 마땅하오나, 군주의 자리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옵니다.”

임금의 눈길은 처음부터 김윤덕에게 꽂혀 있었다. 김윤덕은 저를 보는 임금을, 바닥에 엎드린 최익수를 보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전하께옵서 대군에게 빌미를 주셨사옵니다.”

“빌미…?”

“대군은 전하의 거사를 알고 있사옵니다.”

임금은 반박하지 않았다.

“세자의 자리에 앉은 대군은 강해질 테고, 강력한 대군의 무력은 전하의 안위를 위협할 것입니다.”

“형판! 무소불위의 권력은 전하의 것입니다! 어디서 감히 누가 전하의 안위를 위협한다는 것입니까!”

최익수가 경악하며 소리치자 임금의 눈살이 더욱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옥좌의 팔걸이에 닿아 있는 손이 분노에 파르르 떨렸다.

“짓밟기 위해서 처음부터 넘보지 못할 것을 쥐여 주어야 합니다. 실패와 강압을 견디지 못해 대군이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날, 그날을 위한 뜻이옵니다.”

임금은 탄식했고 바닥에 엎드려 있던 최익수는 고개를 들었다. 제 뜻에 강경한 김윤덕을 보며 그의 저의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강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날, 강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권력이 쥐어질 것이었다. 그 권력이 김윤덕의 목을 칠 것이었다.

김윤덕이 바라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대역죄로 옥사에 갇히고도 남을 말을 또다시 꺼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전하의 대의는 저군이었사옵니다. 저군의 훙서로 전하께옵서는 또 다른 대의를 꿈꾸셔야 하옵니다. 전하께옵서는 항시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셨사옵니다. 옥음으로 내뱉으셨던 성심, 사관들의 손에 휘갈겨진 글씨가 전하의 역사이옵니다.”

최익수는 과감하게 김윤덕에게 맞섰다.

“백년지대계에 성심을 바꾼 선왕들이 한둘이 아니옵니다! 역사는 늘 그랬사옵니다. 범랑에 흔들리지 않았던 역사는 존재하지 않사옵니다. 실패도 발판으로 삼을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이 역사이옵니다.”

김윤덕의 시선이 최익수에게 닿았다. 최익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간절함을 임금에게 내보였다.

“역사는 성심을 지키지 않았던 임금까지 모두 기억하지 않사옵니다. 전하, 형판의 간언은 불충이옵고, 흘려들으시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부디 형판을 대역 죄인으로 참하시옵소서!”

임금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팔걸이에 있던 두 손을 들어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양위, 하시옵소서. 지금은 잠시 물러나 계실 때옵니다. 대군의 분노를 잠재우시옵소서.”

“형판!”

최익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전하께 양위를 권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양위가 정답이라 현실이 말하고 있습니다. 영상께서는 대군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주국에 있는 경원군이나 풍홍군을 불러들이면 되지 않습니까! 대군 대감이 아니 된다면 군 대감들 중 하나를 책봉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 두 분은 후궁의 소생입니다.”

임금에게는 물러날 길이 없었다.

한 입으로 두말을 했다는 사실이 조정에 흩어져 백성들이 사는 궁궐 밖으로 퍼지면 비난이 임금에게 향할 것이었다. 비난은 잠잠해진 옛 기억을 들춰낼 테고, 오래전 조정에서 흩어져 백성들이 주웠던 소문처럼 산골짜기까지 임금의 옹졸함과 비열함이 퍼질 것이었다.

임금은 백성들에게 그리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백성들의 아비가 되어 솔선수범을 보였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들의 잘난 아비가 되고 싶었다.

“역사는 사소한 발자취도 기억합니다. 대군을 해하고자 하셨던 전하의 거사 또한 기억할 것이옵니다.”

김윤덕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맞은편에 서서 불신의 눈길로 저를 헐뜯는 최익수를 보지 않았다.

허공에 붕 뜬 시선은 깊은 믿음을 좇고 있었다. 김윤덕은 임금이 저의 뜻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시간이 늘어질수록 믿음이 몸집을 부풀렸다.

“과인은 대의를 잃었다. 이 슬픈 마음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찌 감히 헤아릴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니 대군을 품으시옵소서. 범랑의 미래를 대군에게 바라시옵소서.”

강의 뜻을 품고 궁궐로 온 최익수는 강에게 크나큰 권력을 쥐여 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경파는 무너질 것이었다. 강에게는 최소한의 권력만이 허락되어야 했다. 그래야 나라가 편할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최익수의 생각과 다르게 김윤덕의 뜻은 무모하고 파멸적이었다. 최익수는 김윤덕을 견제했다.

“대군을 품고 막으셔야 하옵니다. 오직 전하께옵서 하실 수 있는 일이옵니다.”

그때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명 세자의 예장은 의례에 따르지 않는다.”

임금의 국장과 다르게 세자의 예장은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장과 다름없이 향로를 놓는 것까지도 예를 갖추는 게 세자의 장례식이었다.

“애도하는 기간은 오 일이면 충분하고, 예장이 끝나면 소명의 신위는 용적사로 옮긴다.”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세자의 신위는 종묘로 향할 수 없었다. 평생 유학을 배우고 유학으로 살았던 세자가 억불을 이겨 내고 절에 안치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선왕들도 자신의 품었던 자식이 죽으면 종묘에 들지 못한 자식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불교에 맡기는 게 허다했다.

“과인은 용적사로 가 대웅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소명의 넋을 기릴 것이다.”

“주상 전하!”

“강에게… 양위하겠다.”

아들을 잃은 부모라서 임금의 이성은 처절하게 무너졌을 것이었다.

임금은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식의 일에는 격앙하는 사람일지라도 범랑을 위한, 백성을 위한 일에서는 꼼꼼했다. 그런 그가 결국에는 김윤덕의 뜻에 따르겠다니, 최익수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임금은 대전 내관을 향해 손짓했다. 내관은 그 손짓에 임금의 곁으로 다가갔다. 문진으로 글을 적을 종이를 문질러 빳빳하게 폈고, 붓에 먹물을 묻힌 후 임금에게 건넸다. 붓을 받아 든 임금은 한 치 망설임 없이 글자를 휘갈겼다.

최익수는 더는 나서지 않았다. 임금이 내관에게 손을 뻗는 동시에 최익수의 입지는 편전 안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작아졌다.

임금은 반드시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것이었다. 아마 강하지 않은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을 적을 후회하거나, 태어나지도 않은 복중 아기씨를 미워한 것부터 후회할지도 몰랐다.

최익수는 까마득한 미래를 앞서 보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조정에 입성한 후로 지금까지 범랑을 위해서, 임금을 위해서 일했던 최익수는 임금의 착오를 보며 극심한 모멸감에 휩싸였다.

뒤늦게 최익수는 강이 저에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강은 이미 앞서 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모멸감이 임금을 향한 복수심으로 변한다면 강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었다. 숙적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기 위해 저의 자리를 내어 놓으라고 겁박했을 터.

최익수는 앞으로 궁궐에서 일어날 일이 궁금했다. 김윤덕이 임금과 강 중에서 누굴 선택할 것인가.

“과인이 형판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소신, 주상 전하의 명을 받아 거룩한 대의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임금의 손에서 붓이 떨어졌다.

문진을 올려 흐트러지지 않았던 종이에 새겨진 먹 자국이 마른 뒤 내관이 종이를 걷었다. 차곡차곡 접은 교서를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봉한 내관은 용의 발톱이 수놓아진 비단 봉투를 들고 도승지에게로 향했다. 도승지는 자리에 엎드려 내관에게서 봉투를 받았다.

“명, 받잡겠나이다.”

최익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립했다. 김윤덕에게 닿아 있는 눈길이 좋지 않았지만, 이미 일은 시작된 후였다.

“나리!”

대문을 연 말복 아범은 기겁했다. 무사히 도성을 빠져나갔을 강이 집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겁할 노릇인데, 강의 모습이 처참했다. 비틀비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문간을 넘는 강을 부축한 말복 아범은 서둘러 말복을 불렀다.

솥단지에 물을 끓이고 깨끗한 명주와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 들고 강의 방으로 향하는 말복의 걸음이 가빴다. 말복 아범은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앉아 있는 강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깨에 난 상처가 심상치 않았으나, 강은 한사코 의원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나리…. 상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피만 멈추면 알아서 붙을 테니, 염려치 마시게.”

말복 아범은 상처 주변으로 뭉친 피를 따뜻한 물에 적신 명주 천으로 닦아 냈다. 말복은 부엌간과 사랑채를 오가며 더러워진 물을 버리고 새로 길어 오는 것에 집중했다. 마침내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딱지가 사라지자 말복은 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말복 아범은 어깨에 난 상처에 담뱃잎 가루를 뿌렸다. 강은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감쌀 때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쇤네가 곁을 지키겠습니다.”

“물러가게.”

말복 아범의 걱정은 강에게 거추장스러웠다. 강은 가만히 보료 위에 앉아 있었다. 타들어 가는 듯한 상처의 쓰림보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가 강을 괴롭게 했다.

이 긴 밤이 지나고, 시간이 많이 흘러도 낫지 않을 상처가 새겨졌을 마음을 떠올리니 괜스레 울컥했다. 은재와 함께 떠나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순간에도 강은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제 방에 머물며 때를 기다렸다.

강은 방 안에 남아 있는 잔향을 들이마셨다. 잊을 수도, 지워 낼 수도 없는 그리움이 벌써 가슴속에서 사무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

강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분노가 어깨를 짓눌렀다.

“함께 가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다. 강은 말을 멈췄다. 길거리에 서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하려고 했을 적,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휘몰아쳤다.

은재는 저로 인하여 자유를 얻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세준의 말처럼 저는 은재와 이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다. 무엇보다도 강은 은재가 원했던 자유를 빼앗을 수 없었다.

평생토록 갇혀 있던 이를 어찌 궁궐로 데리고 간다는 말인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은 저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그이는 미련하게 저를 기다리겠지만, 저는 그이에게 갈 수 없었다.

그이도 제게 와서는 안 됐다.

이게 옳았다.

밀려온 설움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울음을 꺼내 놓을 수도, 삼킬 수도 없었던 강은 괜히 허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붉어진 눈시울이 어둠에 가려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길 바라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나리!”

바깥에서 말복 아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효원 대군은 주상 전하의 명을 받으시오!”

강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방 안에 스며 있는 잔향이 강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강은 꿋꿋하게 걸어갔다.

그토록 가고 싶지 않았던 궁궐을 향해. 저의 꿈을 버리고, 저의 욕심을 게워 내고 오직 복수를 위해서 궁궐로 갈 것이었다.

암흑에 둘러싸인 길을 걷던 강의 걸음이 궁궐 대문 앞에서 멈췄다. 높은 담벼락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도승지 그리고 그와 함께 온 병사가 강을 지키고 있었다. 강은 지체하지 않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대문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움직임을 확인한 수문군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춘궁은 범랑의 정궁이었다. 나라의 근본이었고, 나라의 역사였다. 범랑이 이 땅에 세워진 이후로 범랑의 정궁은 오직 건춘궁뿐이었다.

다른 이궁도 존재했지만 건춘궁은 그동안 수많은 임금과 함께했다. 그곳에서 생과 사를 맞이한 임금들은 건춘궁을 사랑했다. 강은 유일하게 그 궁을 사랑하지 않을 임금이 될지도 몰랐다.

곤호문은 도성에 인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굳게 닫혔다. 임금이 손수 내어 주는 특별한 출입패가 없다면 세 개의 곤호문은 절대로 열리는 법이 없었다.

범랑의 미래를 배종하는 행렬에 도도하고 까탈스러운 곤건문이 가장 앞에 서 있는 강을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벌렸다. 그것도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가운데 문이 열렸다.

강은 발을 앞으로 내딛지 않고 도승지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도승지는 함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강의 손에 교서가 들린 이후로 도승지는 강에게 예를 갖췄다. 강은 경파의 일원인 그가 저에게 내비치는 예의를 어리석게 보았다.

“나를 역적으로 몰 셈이군.”

“당치 않사옵니다.”

“가운데 문을 열어 놓고 당치 않다? 내가 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역적이 되는 것이다.”

도승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운데 문을 닫고 좌우로 나뉜 곤호문을 열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강은 저에게 머리를 조아린 채 미동하지 않는 도승지를 바라보았다. 궐 앞에 깔린 적막이 강의 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적잖이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금 강의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강은 분노에 어린 눈으로 도승지를 힐난했다. 그의 속내가, 경파의 속내가 강의 눈에 보였다.

“안으로 드시옵소서.”

손에 세자 책봉 교서를 쥐여 주고 임금만 드나들 수 있는 가운데 문을 열어놓았다. 강은 도승지가 저의 무능함과 무지함을 빈정거리는 게 아닌 걸 알고 있었다. 최익수가 말했었다. 김윤덕이 임금에게 양위를 던졌다고.

“문을 닫아라.”

“대군….”

“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 문을 닫아라.”

“하오나….”

강은 더 말하지 않았다. 도승지에게 향했던 발끝이 다시 곤호문 쪽으로 틀어졌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도승지가 고개를 들고 대문 앞에 서 있는 수문군들에게 손짓했다. 끼익, 하는 소리조차 없이 열렸던 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그리고 곧 오른쪽에 있는 곤호문이 다시 열렸다. 그제야 강의 발이 떨어졌다.

부득불 강의 뜻에 따라야 했고, 강의 뒤를 따르게 된 도승지의 낯이 좋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저희의 발밑에 있을 줄 알았던 이였다. 품계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다 하여 무품이었던 임금의 자식을 아래에 두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그의 뒤를 쫓게 되었다니.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곤호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간 강은 한밤중임에도 환하게 불이 밝혀진 길을 따라 대전으로 향했다. 강의 뒤를 따르는 이들의 수가 밖에 있을 적보다 늘어나 있었다.

강은 대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활짝 열린 대전 안, 그곳에서 강을 맞이한 건 임금도, 최익수도 아닌 김윤덕이었다. 강은 고요한 대전을 느끼며 안으로 향했다.

“전하께옵서는 어디 계십니까.”

은은하게 불이 밝혀진 대전을 빙 둘러보며 김윤덕에게 물었다.

“이미 떠나셨습니다.”

“따질 게 많았는데, 자리를 냉큼 내어 주고 도망가셨다니.”

“자식을 잃을 슬픔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사옵니까.”

“뱉은 말이 있으니 지켜야겠고, 지키자니 내 얼굴이 보기 싫으셨겠지. 아니면 추악한 간언을 흘려듣지 못하셨거나.”

강은 용상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용상 위의 거룩한 어좌를 바라보았다. 그 위로 올라가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제 것이 될 수 없었고, 될 리가 없었던 어좌를 보며 강은 입꼬리 한쪽을 올려 자조했다.

“상왕 전하께옵서는 세자 저하의 넋을 기리기 위해 떠나셨습니다.”

“만백성의 아비가 죽은 아들 하나로 백성을 버리고 궁을 떠났다…. 참 재미있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얻고 베푸십시오. 그것이 대군께서 용상에 오르셔서 하실 일입니다.”

“아비의 마음이라? 내가 배워야 하는 아비의 마음은 무책임합니다. 그것을 내 굳이 배워야 할까요?”

어좌에 닿아 있던 강의 눈길이 김윤덕에게로 옮겨갔다.

“대군께서는 용상에 올라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만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하십니다. 이제 범랑의 군주가 되셨습니다.”

“범랑의 군주, 그것을 내게 이리 쉽게 내어 줄 것입니까?”

“상왕 전하의 어심이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아비를, 아비를 잃은 백성을 대군께서 보듬길 바라셨습니다.”

흥미롭다는 듯 강은 웃음을 떠올렸다. 바람이 새는 듯한 짧은 웃음소리는 문무백관이 모이는 조정 앞에서 부는 바람처럼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난 그 누구도 보듬지 않을 것입니다.”

“대군께서는 임금이 되기 위해 이곳에 오셨습니다.”

“나는 임금이 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이 자리를 원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원치 않으셨다면 뿌리치고 가셨겠지요. 이곳으로 걸음을 돌린 건 대군의 자의였습니다.”

강은 김윤덕을 노려보았다. 그 싸늘한 눈빛을 회피하고자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김윤덕은 강이 대전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게 임금이 될 자에게는 마땅한 예의였다.

“대군께서는 감춰진 욕망을 딛고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받드십시오. 보살피고 베풀고, 보듬으십시오.”

강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짧지만 고즈넉해진 대전 안에는 발을 옮기는 소리가 가득 찼다.

“내가 형판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윤덕의 주변을 둥글게 선회하던 강이 그의 앞에 멈췄다. 고개를 숙여 눈길을 피한 김윤덕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내가 꿈을 품고 욕심을 내는 날, 형판의 목숨도 내 손에 쥘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신은 충심을 다해 전하를 보필할 것이옵니다.”

억누르지 못한 웃음이 강의 터진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함께 섞여 바깥으로 튀어나온 분노가 김윤덕을 향해 날아갔다.

김윤덕은 차분했다. 침착했고, 동요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충신은 필요 없습니다. 출세와 권력에 눈이 먼 장님이 충신이라면 불쾌할 뿐이지요.”

“하면 소신을 내치실 것입니까?”

“이대로 내치기에는 내가 당한 게 많습니다. 내가 겪었던 치욕보다 더한 것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때, 김윤덕이 고개를 들어 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신의 자식을 버릴 수 있으십니까?”

강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넘쳐흐를 것같이 목구멍을 술술 타고 넘어오던 분노가 혀끝에 턱 하고 걸려 숨도 내쉴 수가 없었다.

강의 눈빛은 싸늘하다 못해 이글이글 들끓었다. 김윤덕은 강을 직시했다.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조차 하지 않을 만큼 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경의 자식을 버리고 이곳에 왔습니다.”

김윤덕은 강의 비웃음을 응시했다. 제 손에 피를 묻히면서 절벽으로 밀어붙였던 강을 용상에 올려야 했던 이유. 아들이라 인정하지 않았던 은재의 존재를 지금까지 제 곁에 둔 이유.

모두 가문을 위한 것이었다.

김윤덕의 믿음은 올곧았다. 흔들림이 없었고, 꺾이지도 않았다. 강한 신념을 가진 자를 이길 사람은 없다고 여겼다. 강은 절대로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경의 말처럼 나는 임금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무소불위, 그 권력을 내 손에 쥘 것입니다.”

얼굴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던 웃음이 사라지고 경멸이 떠올랐지만, 김윤덕은 끄덕하지 않았다. 그깟 눈빛에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강을 용상에 앉히려는 계산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누가 이길지 해봅시다.”

강은 손을 들어 바깥을 향해 뻗었다. 손길을 따라 움직이던 김윤덕의 시선이 활짝 열린 대전 밖에서 멈췄다.

“그만 퇴궐하십시오.”

김윤덕은 강 앞에 바로 섰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듯 예를 갖춰 읍했다. 강의 시선은 이미 김윤덕에게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저를 멸시하는 태도에 도승지처럼 자존심이 상했을 법도 했지만, 김윤덕은 늘 그랬듯 차분하고 침착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번창할 자신의 가문에 대한 생각밖에 없는 게 확실했다.

김윤덕이 바깥으로 나가고 대전으로 한 무리가 들어왔다.

그들은 동궁에서 소명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강의 눈빛에 슬픔이 스며들었다. 동궁 내관과 상궁, 나인들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고 강 앞에 시립했다.

침묵하던 이들 중 동궁 내관이 발을 내디뎠다. 그는 소명이 어렸을 적부터 동궁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이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처럼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세자 저하께옵서 온전하실 적에 미리 준비해 두셨사옵니다.”

내관은 임금의 교서가 담긴 비단 봉투와는 다르게 네 개의 용 발톱이 수놓아진 비단 봉투를 강에게 내밀었다. 강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매듭단추를 풀어 형제가 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꺼냈다.

『결국 이곳으로 네가 왔구나. 강아, 나는 기필코 너의 바람을 지켜 주고 싶었다. 내가 나약하여 약조를 지키지 못했구나. 미안하다는 말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강아, 나의 아우, 강아. 너와 궁궐은 평온한 겉과는 달리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강과 같다. 나는 늘 강처럼 살아온 네가 너와 닮은 이곳에서 꼭 살아남을 것이라고 여긴다. 힘겹고 외로운 사투에 나의 사람이었던 이들이 너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내가 너에게 진 빚은 저승에서 갚도록 하마.』

흰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려 무엇이 안타깝고, 무엇이 안쓰러운지 알 수 없었다. 대전에 도사리는 비참한 분위기에 궁인들은 숨을 죽였다.

“저하께옵서 명을 내리셨사옵니다. 소신들은 목숨을 바쳐 전하를 보필할 것이옵니다.”

동궁 내관을 필두로 대전에 자리한 궁인들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강은 손에 소명의 서찰을 쥔 채 허망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곧 무관의 철릭을 입은 두 사내가 강의 앞에 부복했다.

“좌익위 부경, 우익위 함세휘는 훙서하신 세자 저하의 명을 받아 전하를 모실 것이옵니다. 소신들의 충심을 받아 주시옵소서.”

강은 그토록 원했던 부경이 온전한 저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기쁘지 않았다.

“우익위 함세휘, 전하를 뵈옵니다.”

소명에게 충성을 바쳤던 이들의 충심은 버겁고 무거웠다.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뛰어든 이상, 강에게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분노를 떠안고 궁궐로 들어온 이상, 강은 저의 숙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들과 손을 잡고 칼을 갈아야 했다.

“상왕 전하의 교지를 받들어 속히 예장 준비를 행하라.”

대전에 울린 첫 옥음은 쓰리고 아팠으며 쓸쓸했다.

강은 예장 행렬을 쫓지 못했다. 강이 형제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모두 상왕의 교지 때문이었다. 단출하게 궁궐 밖으로 떠난 예장 행렬은 백성들이 흐느끼는 울음을 타고 상왕이 기다리는 용적사로 향할 것이었다.

강의 즉위식은 소명이 훙서한 지 오 일째가 되던 날에 거행되었다.

즉위식은 거창하지도, 소홀하지도 않았다. 의례에 따라 의식을 행했다. 대전인 명경전을 지키는 명경문 앞마당에서 강은 대비가 된 윤 씨에게 옥새를 건네받았다. 문무백관이 명경문으로 들어가는 강의 뒤를 따랐다.

강이 마침내 어좌 앞에 섰을 적에는 모두가 강을 향해 사배를 올렸다. 새 임금이 된 강의 앞, 좌우로 나뉘어 자리한 문무백관의 목소리로 명경전 앞뜰이 들썩거렸다.

“천세, 천세, 천천세!”

산호를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새로운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 대신, 비열하고 교활한 악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적어도 세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지만, 세준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세준은 득달같이 강에게 달려들 것처럼 이를 드러낸 백관들을 보았다.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적의를 보았다.

마음이 심란했다. 아우를 버리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강을 용서할 수 없었으면서도 막상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렸다. 강의 삶을 알았고, 강의 바람을 알았기에 궁궐로 들어온 강을 연민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세준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제 속에 가득 찬 미움을 담아 흘려보냈다.

“천세, 천세, 천천세!”

비로소 미움이 사라지고 나서야 세준은 명경전 앞에 선 강을 바라볼 수 있었다.

* * *

“돌아가신 세자 저하만 불쌍하지….”

세자의 훙서 소식이 도성을 비롯해 전국으로 퍼져 나가자, 훙서한 세자에게로 동정과 연민이 쏟아졌다. 보태어 아들을 잃은 아비의 애간장이 끊어질 듯한 애틋함이 백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새롭게 어좌에 앉은 임금에 관한 기대도 부풀었지만, 누구의 예상인지 알지 못해도 강의 즉위와 함께 수상하고 발 없는 소문이 으슥한 산골짜기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한량도 그런 한량이 없다 들었는데? 임금이 되길 바랐으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한량으로 지냈겠는가?”

울창한 느티나무 아래, 평상 위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던 노인들의 눈길이 소문을 가지고 그곳으로 온 이에게 닿았다.

“그게 다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깐 거라니까? 세자 저하께서 돌아가시기 무섭게 그 자리를 독차지한 게 누구냐! 이게 중요하다는 걸세! 더군다나 세자 저하를 잃은 주상 전하를 내차고 옥새까지 손에 쥐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들 대군을 의심하는 게지.”

“그럼 세자 저하가 돌아가신 게 다 그 대군 때문이라는 건가?”

소문을 늘어놓던 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이들의 눈길을 의식한 듯했지만, 지나가다 길을 멈춘 나그네들은 걸음을 멈추고 귓구멍을 그 노인에게로 향한 채였다.

“영감, 계속해 보슈.”

봇짐을 짊어지고 있던 보부상이 노인을 재촉했다. 노인은 사람들의 관심이 저에게 쏠린 게 왠지 기분 좋아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세한 속사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예장 행렬에 그 대군이 함께하지 않은 걸 보면 모르겠는가? 주상 전하, 아니지. 상왕 전하께서는 아무래도 궁궐에서 쫓겨난 듯싶으이.”

장기짝을 들고 있던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럼 지금 임금님이 전 임금님이었던 아비를 내쫓았다는 것인가?”

그가 놀라 놓친 장기짝이 장기판에 툭, 하고 떨어졌다. 장기짝을 놓친 이가 이기고 있던 판이 허사가 되었기에 지고 있던 노인은 난장판이 된 장기판을 보며 히죽거렸다.

“이미 도성에는 소문이 자자하다네. 새로운 임금이 얼마나 포악스러운지, 궁궐에 드나드는 관리들을 들들 볶는다지? 세자도 거치지 않고 임금이 된 걸 보니, 꽤 괜찮은 뒷배를 얻은 모양이야.”

“아이고,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떻게 돌아가긴, 망조에 든 게지.”

퇴궐하고 집으로 돌아온 세준은 가장 먼저 은재가 있는 별채로 향했다. 식은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나오던 꺽새가 마당에 들어선 세준을 보고는 허겁지겁 대청마루를 내려왔다.

“어찌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요?”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단다. 은재는?”

꺽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도 열이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보다… 도련님께서 계속 우셨습니다.”

“울어…?”

“예, 아침에는 몸이 괜찮으셨는지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갑자기 눈물을 보이시는 바람에 쇤네가 당황했지요. 금방 그치시는가 싶었는데 또 우시질 않나…. 아무튼 다른 때와 달리 이상하셨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은재의 눈물 바람이 당혹스러운 건 꺽새만이 아니었다. 세준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꺽새를 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욱신거린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곳도 아프신 건 아닐까 싶어 아재가 의원 댁으로 가셨습니다.”

“그래….”

그 일이 있고 보름이 지났고, 강이 즉위하고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즉위식이 열리기 이틀 전, 은재의 몸에 천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의원이 몇 번이고 문턱을 넘고 탕약을 지어 올렸지만, 한번 자리 잡은 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세준은 이 모든 게 강의 탓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없었다. 품었던 미움을 내려놓았기에, 오롯이 은재를 걱정하는 마음만 품고 방으로 향했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들어와 방 안을 배회했다. 세준은 꺽새에게 장지문을 닫지 말라, 고갯짓했다. 꺽새는 문을 활짝 열어 걸어 놓고는 대야에 새 물을 담아 오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형님….”

은재는 들어온 이를 반겼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면 그나마 살 만했다. 그럴 때만큼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세준이 찾아온 지금도 정신을 사로잡고 있던 열기에서 벗어난 후라 은재는 세준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일어나지 말거라.”

누워 있던 은재가 세준이 온 것을 알고 일어나려고 움찔거리자, 세준이 곁으로 가서 앉았다. 울었다는 꺽새의 말대로 은재는 눈물을 흘린 티가 났다.

“오늘도 잘 다녀오셨습니까?”

삐질삐질 샘솟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와 살짝 부은 눈가가 세준의 마음에 툭, 하고 걸렸다. 갈라진 입술 새에서 바짝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와 잔잔하게 울리자, 세준은 아스러지는 마음을 감추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잘 다녀왔다.”

온몸을 에워싼 열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은재가 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은재는 금방이라도 잠들 것같이 힘이 풀려 가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구나. 좀 괜찮니?”

은재의 기다림을 보고도 세준은 그 애처로운 마음을 못 본 척 넘어갔다. 얼굴에 천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 실망감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렸지만, 은재가 원하는 소식을 전해 봐야 미련만 부풀릴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어서 열이 내려야 할 텐데…. 몸이 나아지거든 내 현천으로 갈 방도를 마련해 보겠다.”

은재는 축 처진 입꼬리를 추켜올려 미소를 지어 보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듣길 바랐던 소식을 세준이 가져올 것이라 여겼던 마음에 실망감이 들어차기 무섭게 눈물이 왈칵하고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저를 걱정하는 형제를 알았기에 은재는 설움을 꾹 참아야 했다.

“네….”

세준이 뱉은 한숨 소리가 바닥에 깔리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눈시울이 붉어진 은재를 보며 세준은 고민했다.

강이 궁궐에 들어가 임금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은재가 빨리 단념할 수 있을까. 가족을 버리고 강과 도망을 갈 생각까지 했던 은재가 과연 그를 버릴 수 있을까.

세준은 많은 걸 알았지만, 은재는 알지 못했다. 세준은 고민에 휩싸였다. 더는 강을 미워하지 않겠다고 여겼지만, 은재의 병이 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은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위해서는 강에게로 향하는 마음부터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재야….”

어렵사리 말문을 뗀 세준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은재의 손을 붙잡았다. 천장에 닿아 있던 은재의 눈길이 세준에게로 옮겨졌다.

“대군께서는….”

세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짙은 설움이 묻어난 목소리가 울렸다. 세준이 뱉을 말을 미리 알아챘다는 듯 은재는 서러워했다. 강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뚝 끊어 내기 위해 형제는 몇 번이고 저에게 잊으라는 말만 했었다.

“오지 않으실 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동그란 눈에 갑자기 차오른 눈물에 당황한 세준이 허겁지겁 명주 천을 집어 들었다.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지만, 둑이 터진 것처럼 은재는 눈물을 흘렸다.

“형님…. 저는 못 하겠습니다….”

“은재야….”

“그게 쉽다면 그리했을 것입니다….”

차마 세준을 볼 수 없었던 은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가… 주십시오…. 저 혼자 있고 싶습니다….”

끅끅거리며 눈물을 삼키고 힘들게 말을 꺼내 놓던 은재가 세준의 손길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등졌다. 은재가 저의 손을 뿌리친 것도 뿌리친 것이지만, 등을 진 채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은재가 당혹스러웠다.

“은재야, 어찌 이러느냐….”

은재에게로 뻗은 손이 허공에 붕 뜬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간 담담한 모습으로 강직했던 은재가 눈물을 내보였다. 그 모습이 세준에게는 퍽 충격적이었다.

“은재야….”

세준은 은재에게 울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제 앞에서만큼은 속으로 삭이지 않고 속 시원하게 제 설움을 꺼내 놓았으면 했다. 꾹 숨겨 놓았던 제 감정을 꺼내는 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붕 떠 있던 손이 은재의 팔뚝에 닿았다. 세준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은재의 팔뚝을 토닥거렸다.

“그래…. 어찌 쉽겠느냐…. 그 마음이 어떤지 나도 안다.”

“형님은 모르십니다….”

“어찌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모로 누워 있던 은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고 반듯하게 누워 세준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쉽게 그칠 수 있었던 건 치고 올라왔던 설움이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진 탓이었다. 은재 역시도 자기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재는 제가 느끼는 기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울었고,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 웃었다. 말로 하지는 못했지만, 휘몰아치는 감정에 당황스러운 건 은재도 마찬가지였다.

“골양반으로 자자한 나도 연정을 품어 본 적이 있다. 그러니 나도 안다.”

세준에게도 연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은재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느라 살짝 부은 눈으로 세준을 바라보았다.

“은재야, 많이 울지 말거라. 너를 걱정하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지.”

세준은 젖은 뺨을 다정한 손짓으로 훔쳤다.

“그새 또 열이 올랐구나.”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샘솟았지만, 은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리하면 잇새로 빠져나오려는 눈물이 마를 것이라고 여겼다.

“형님….”

몇 번이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끝끝내 삼켜야 했던 말을 꺼내겠다고 각오한 은재는 기어코 입을 뗐다.

“나리께서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당황해하는 세준의 모습에도 은재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리에 누워 있는 저를 안쓰럽게 여기는 세준의 마음을 알았다. 은재에게는 한없이 유약한 세준이기에, 세준은 어쩔 수 없이 은재에게 모든 걸 말해 줄 것이었다.

“대군께서는… 즉위를 하셨단다.”

차라리 멀리 떠나셨다 거짓을 말할까 생각했지만, 거짓은 옳지 않았다. 세준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은재가 현실을 직시하길 바랐다.

“네…?”

“네게 오지 않으셨던 그날… 대군께서는 궁궐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상왕 전하께 양위를 받아 즉위하셨단다. 이제… 전하라 불러야 한다.”

전신으로 퍼졌던 열기가 갑자기 머리로 밀집하는 것 같았다. 누워 있어도 천장이 핑핑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은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리께서… 궁궐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이시죠…?”

‘나는 궁이 싫습니다.’

은재는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신열에 빠져 누워 있던 사이, 강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미안하다는 목소리만 들리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 그를 생각하며 은재는 강을 기다렸다. 궁이 싫다던 강이 지금 궁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형님…. 나리께서는… 궁궐이 싫다고 하셨습니다….”

세준 역시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세준은 그저 반듯이 들지 못한 고개로 애먼 은재의 손을 바라보았다. 강이 가까운 곳에 은재를 두고도 찾지 않는 이유를 짐작한 터라, 강에 대한 미움을 버리기로 하지 않았던가.

“궁궐이 싫다 하셨는데… 나리께서는 어찌 궁궐에 들어가신 것입니까….”

“은재야, 사람에게는 피하지 못할 운명이 있다. 대군께서도 맞닥뜨린 운명에 순응하셨을 뿐이다.”

은재는 허탈함에 탄식했다.

궁궐에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대궐보다 작은 아흔아홉 칸의 집에서 살며 외로움을 느낀 은재였다. 이곳보다 더 웅장한 그곳에서 강은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을까. 열기에 사로잡혀 기력 없는 제 몸뚱이를 걱정하기보다 그 크고 넓은 곳에 혼자 있을 강을 생각했다.

“형님…. 제가…. 혹시라도 제가 그곳으로 가면….”

은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이을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저를 찾지 않는 강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은재는 그저 강이 안쓰러웠다.

제가 강이 있는 곳으로 간다 해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자람이 많은 제가 어떤 도움이 될까. 궁궐은 미천한 저 자신이 감히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아마… 원치 않으실 것이다.”

세준은 고개를 들어 은재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곳으로 오지 않길 바라시는 것 같구나.”

눈시울을 붉힌 은재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세준은 손에 쥐고 있던 명주 천으로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그러니 너는 현천으로 가거라….”

세준은 아비가 은재를 천양에 붙잡아 둔 이유까지도 어렴풋이 눈치챘다. 은재의 몸에서 지워지지 않은 증표. 아비는 그 증표를 노리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너를 현천으로 보낼 것이다. 이곳에서의 일은 모두 잊고 그곳으로 가거라.”

아비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면 세준은 기필코 은재를 외조부의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그게 은재와 강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우는 은재를 간신히 달래 놓고 다시 궁궐에 입궁한 세준은 곧장 강이 있을 편전으로 향했다. 집을 떠날 때 홍 씨가 데려온 의원과 마주친 세준은 의원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입궁한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걸렸다. 궁궐을 걸으면서도 은재의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하, 도승지 들었사옵니다.”

세준이 정육품 정언에서 파격적으로 도승지로 승진한 건 오롯이 강의 뜻이었다.

강은 몇 번이고 간청하는 세준의 뜻을 묵살했고, 직접 수결한 교지를 세준에게 내밀었다. 세준은 강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뜻을 물려 달라 간청했었다.

그때 강은 설득 대신 강압을 택해 세준을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앉혔다. 세준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받아들였으면서도 저를 보는 시선을 불편하게 여겼다. 이례적인 승진이 맞기는 한지, 세준보다 먼저 궁궐에 들어온 이들의 눈길이 좋지 않았다.

편전의 문이 열렸다. 복도에 서 있던 세준은 머리를 숙이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경연을 줄여야겠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강의 말에 세준은 허리를 굽혔다.

“경연은 군자의 덕을 쌓기 위한 발돋움이옵니다. 경연을 게을리하는 군왕이 어찌 어진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겠사옵니까. 어진 군왕이 되기 위해서 경연을 늘리시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어진 군왕이 될 마음이 없다. 바깥에서 떠도는 말처럼 나는 저급한 임금이 되련다.”

“전하, 떠도는 말은 원체 사실을 따지지 않사옵니다. 말에 현혹되어 군왕을 손가락질하는 자가 있으면 그자의 손가락을 자름이 마땅하오나, 이미 퍼진 말에 현혹되어 백성의 손가락을 자르는 군왕은 되시면 아니 되옵니다. 선대 임금들도 그런 군왕이 되지 않기 위해 경연을 하셨사옵니다.”

“나는 백성의 신의를 얻지 못하는 군왕을 자처했다.”

편전 안에는 세준에게 익숙하고 친근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고개를 들고 강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어찌 백성들의 신의를 바라지 않으시옵니까?”

강은 대답 대신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따위 신의를 얻어 무엇 하겠느냐.”

마음대로 나오려는 한숨이 세준의 목구멍 끝에 걸렸다. 세준은 숨을 들이마셨다. 즉위한 날로부터 삐딱한 강의 모습에도 익숙했기에,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조정이 아닌 편전이라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사실, 조정 대신들에게도 낯설지 않을 것이었다. 강은 늘 같았다. 무슨 말을 하건 곱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죽거리는 게 일상이었다. 비난하고 멸시했다. 경파도, 연파도 예외를 두지 않고 조정에 든 관료라면 하나같이 헐뜯고 무시했다.

며칠 전에는 호조의 호판이 조세를 올려야 한다는 안건을 들고 조정에 들었었다. 조세를 올려야 하는 이유를 토로하던 호판은 타당한 이유를 들고 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강에게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고 물러났었다.

영의정 최익수가 호판의 편에 섰지만, 고집보다는 억지에 가까운 강의 뜻을 바꾸지 못했다.

“경연을 줄여야겠다.”

고심하는 듯 침묵하던 강이 다시 말을 꺼냈다. 세준은 일단 달래야 한다는 심정으로 읍소했다.

“경연을 줄이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어찌 경연을 줄이려고 하시옵니까….”

“잘난 체하는 노인네들이 떠드는 말을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귀찮기도 하고.”

“전하….”

저의 읍소가 강의 발끝에도 닿지 않자, 세준은 고개를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삐딱하게 앉아 세준을 보며 히죽거리는 강을 보며 세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툭, 하고 꺼내 놓았다.

“성군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경연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법이옵니다. 성심을 보살피는 경연관들의 뜻을 잘난 체한다 여기지 마시옵고 품으소서.”

“성군이 될 생각이 없다니까. 앞으로 조회도 줄일 생각이네.”

“전하….”

“다시 한번 말하겠지만, 나는 성군이 될 생각도, 덕망 높은 군왕이 될 생각도 없네.”

세준은 강 곁에 시립한 장 내관을 바라보았다. 상선의 자리에 앉아서도 막무가내인 강을 막아 낼 방도가 없는 건 세준과 같았다. 두 사람은 난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전하, 영의정이 뵙길 청하옵니다.”

장지문 바깥에서 들리는 내관의 목소리에 안에 있던 시선이 장지문으로 향했다. 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어려울 것 없다는 듯 장지문이 열렸다. 앞에 서 있던 최익수가 달갑지 않다는 눈길로 세준을 보고는 발을 내디뎠다.

“무슨 일인가.”

“사직을 청하기 위해 들었사옵니다.”

“사직?”

“내려오라 하셨으니, 내려가려고 하옵니다.”

강은 웃었다. 강의 웃음은 변함없이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세준은 강이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는데?”

최익수가 고개를 숙여 그 얼굴을 자세하게 보지 못했지만, 강은 최익수가 내보이지 않은 감정을 꽤 만족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영상이 내려갈 때는 과인이 정할 것이니 염려 말게. 이왕이면 과인이 어디까지 오르는지도 보고, 나라를 제대로 망치는 꼴도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전하….”

기겁한 세준이 나섰지만 강은 유유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짓에 세준은 더 나설 수 없었다.

“신이 전하와 뜻을 함께하길 바라시옵니까?”

“당치도 않지. 과인과 경이 함께할 수 있는 사이기는 한가.”

최익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국가가 망조에 들었다는 소문이 허다하게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와중, 최익수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일조한 관료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영의정 자리에 앉아서 임금의 뜻대로 나라가 파국으로 가는 꼴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조정을 떠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신의 사직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아직 때가 아니다.”

“전하.”

“김윤덕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와중에 어찌 경이 나서서 이러는 것인가?”

최익수의 눈길이 맞은편에 선 세준에게 향했다. 제 아비의 이름이 거론되었음에도 세준은 무심했다. 이 상황을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지만, 최익수는 곧 세준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경은 과인의 손을 잡은 사람이지. 내 사람이라 자부하기에는 꺼림칙하지만, 과인은 경을 택했다. 게다가 경이 과인의 뒷배가 되었으니, 책임져야지.”

최익수에게 금상의 막무가내식 정치는 환멸로 다가왔다. 상왕은 적어도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어질었다.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상왕의 정치는 결국 대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휩쓸려 갔지만, 금상의 정치에서는 타협이란 허락되지 않았다.

며칠 전의 호판을 봐도 임금이 조정 대신들에게 얼마나 부정적인지 알 수 있었다.

“하오면 전하께옵서는 소신의 편에 서실 수 있으시옵니까?”

“과인이 경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자비를 베푸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최익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맞물린 이가 으득거리는 소리가 작아 강이 있는 곳까지 퍼질 일은 없을 것이었다.

임금에게 멸시받는 와중, 최익수는 일전 상왕에게 받았던 수모를 떠올렸다. 자신의 간언을 묵살했던 순간부터 범랑은 망조의 길에 든 셈이었다. 상왕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윤덕과 상왕이 이강을 이용해 범랑을 망칠 것이었다.

“신은 범랑이 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사옵니다.”

“그럼 제대로 이끌어 보게. 과인의 마음에 차도록 영상이 해 보란 말이지.”

최익수는 저절로 비틀어지려는 입술에 힘을 가득 주었다.

“사직 대신 경의 집안과 연을 맺도록 하지. 김윤덕이 손에 쥔 권력부터 차근차근 뺏은 뒤에 경의 사직을 생각해 보겠네.”

살짝 숙였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최익수의 눈길이 다시 세준에게 닿았다. 김세준은 김윤덕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들을 앞에 두고 뭘 하겠다고?

“전하.”

“도승지는 신경 쓰지 마시게. 이 사람은 원체 중립적인 사람이라서 과인의 뜻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니. 게다가 말리지도 않을 것이고.”

강과 세준의 시선이 맞닿았다. 세준은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강의 눈길이 저에게 떨어져 나가면서 말할 기회를 놓쳐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대신 세준은 최익수를 바라보았다. 저를 경계하는 최익수를 보며 할 말이 없다는 듯 세준은 고개를 숙였다.

“경에게는 후한 배려가 아닌가? 그러니 때가 올 때까지 열심히 일하게. 과인의 뜻에 반해도 좋고, 동조해도 좋고. 경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과인도 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네.”

최익수는 여전히 떨떠름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언뜻 보면 판이 저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웃고 있는 낯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을지 몰랐다. 항시 경계를 풀 수 없도록 임금이 점점 조정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나 경파는 그 손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최익수는 굳게 믿었다.

* * *

늦은 저녁, 강과 함께 경연에 들었던 세준은 결국 경연관들 앞에서 경연을 줄이겠다고 단언하는 강을 말릴 수 없었다. 하루에 세 번 열리는 경연이 두 번으로 줄었다. 곧 경연이 한 번만 열리는 날이 생길 것이었다.

강은 경연관들의 언짢음을 무시했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말을 귀에 담지 않았다.

목적을 알기라도 하면 그 뜻에 얼마든지 동조를 할 수 있었으나, 강은 말하지 않았다. 궁궐로 들어간 후로 강은 벗이었던 세준에게조차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대문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홍 씨가 세준을 불렀다.

온갖 잡념으로 물들어 있던 세준의 눈길이 홍 씨에게 닿는 순간, 세준은 홍 씨의 염려와 걱정을 보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세준의 걸음이 별채로 향했다.

“은재야!”

장지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간 세준은 은재가 요 위에 얌전히 누워 저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보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은재가 꺽새의 부축을 받으며 앉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세준은 한숨을 훅 내뱉었다.

“의원이 뭐라 하던.”

“그게….”

꺽새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쉽사리 나오지 않는 답에 세준은 은재를 바라보았다. 함께 있었으니 은재도 의원의 말을 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은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두 사람의 침묵에 세준의 마음만 조급해질 뿐이었다.

“뭐라 하더냐. 큰 문제가 있다더냐?”

“형님….”

낮만 해도 쓸데없이 눈물을 쏟았다던 은재였다. 저를 부른 은재는 아까와는 달리 평온해 보였다.

세준은 손을 뻗어 은재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열은 여전히 은재의 몸에 자리하고 있었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중병이 든 것일까, 세준은 걱정하는 눈치로 은재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대었던 손을 떼고 은재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가 많이 안 좋다고 하더냐? 좋은 약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병이야 고치면 그만이다. 은재 너만 나약해지지 않는다면 이겨 낼 수 있다. 그러니….”

은재는 세준에게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고는 세준의 손을 맞잡았다.

“형님…. 아픈 게 아니고….”

“으엉, 도련님! 우리 도련님 어떻게 해요! 으허엉!”

갑자기 꺽새가 엉엉, 하며 우는 소릴 냈다.

“도련님께서 회임하셨대요…. 당최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이 사실이 바깥에 새어 나가면 큰일이 날 텐데, 이를 어쩌냔 말이에요!”

몸서리를 치는 꺽새를 보던 세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세준의 시선이 은재에게로 향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듯 은재는 담담했다.

살포시 떠올라 있는 웃음, 그 웃음이 세준을 비탄에 빠지게 했다.

“저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은재야.”

“형님, 나리께서 바라지 않으신다고 해도 피하지 못할 운명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은재가 지어 보인 웃음에 세준은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을지 생각할 수조차 없이 은재는 밝게 웃었다.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궁궐로 가겠습니다.”

“은재야….”

“아이의 아버지가 그곳에 계십니다.”

세준의 허망함을 못 보았다는 듯 은재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제 배를 쓰다듬었다. 얼굴에 옅게 피어난 홍조를 바라보며 세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결국에는 아비의 바람이 이뤄진 것이었다. 아비가 그토록 경멸했던 자식이 아비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왔다는 사실에 세준은 망연자실했다.

세준은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강과 은재가 사지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방관자가 되어야 했다. 야속한 현실이 두 사람을 자꾸만 사지로 내몰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무력하기만 한 세준은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손에 들려 있던 상소문이 책상으로 나가떨어졌다. 고개가 들리며 얼굴이 훤히 드러났지만, 상대방은 감히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무얼 했다고?”

“그 아이를 양자로 들였사옵니다.”

강의 입꼬리가 괴팍하게 틀어졌다.

“친아들을 양자로 들인다는 경우는 내 처음 들어 본다만, 이 늦은 밤에 과인을 찾아와 그런 말을 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아셔야 하실 듯하여 고하는 것이옵니다.”

비웃는 듯한 까칠한 웃음소리가 편전에 퍼져 나갔다.

“누가 보면 과인과 우상의 사이에 끈끈한 정이라도 있는 줄 알겠군.”

강은 경멸이 깃든 눈으로 김윤덕을 노려보았다. 시선이 맞닿아 저의 경멸을 보았다고 해도 김윤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과인은 경의 집안일에 관심 없네. 상왕 전하께 일일이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다 이야기를 했는가?”

“어찌 사소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집안의 큰 경사이옵니다.”

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멈춘 시선에 담긴 경멸과 혐오로 늙어 버린 뺨이 따가울 법도 했지만, 김윤덕은 평온했다. 강은 김윤덕이 뿜는 분위기가 싫었다. 여전히 제가 우위에 서 있는 듯 그가 가진 여유와 평온이 싫었다.

“관심 없다 했네. 축하를 받고 싶다면, 용적사로 가시게. 하면 상왕께서 하사품이라도 내리실 테지.”

책상 위로 떨어진 상소문으로 손이 향했다. 상선이 나서 상소문을 집어 들어 강에게 건네려던 찰나였다.

“신의 양자가 회임하였사옵니다.”

상선의 손에 들린 상소문을 건네받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김윤덕에게 닿은 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선은 강의 동요를 보고는 상소문을 들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오늘 낮에 다녀간 의원이 말하길, 그 아이에게서 태기가 보인다고 하였사옵니다. 늦도록 성주기가 찾아오지 않았던 아이였는데, 회임을 하였다 하옵니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를 악문 턱 근육이 작게 씰룩거렸다. 허공에 떠 있던 손이 책상으로 떨어지며 강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아시는 바가 있지 않으실까 하여 이리 무례를 범하게 되었사옵니다. 전하께옵서 사저에 계실 적, 그 아이를 가까이 두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바닥으로 떨어졌던 강의 눈길이 다시 김윤덕에게로 향했다.

김윤덕의 수를 너무나도 뒤늦게 깨달았구나.

강은 속에서 일렁거리는 탄식을 차마 바깥으로 꺼내지 못했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분노도 애써 꿀꺽 삼켰다.

“혼인하지 않은 몸으로 회임을 한 것이 발각된다면… 그 아이에게 참형이 떨어질 것이옵니다.”

강은 태연한 척 웃음을 꺼냈다. 입 안에 감도는 쓴맛이 느껴져 꾸며 낸 웃음일지라도 달지 않았다.

“역시… 상왕께서 우상을 괜히 가까이에 둔 게 아니었군. 대단하네. 이날을 위해 그 긴 시간을 버틴 것인가? 어쩐지…. 주국으로 간다던 이가 천양에 있을 때부터 이상했지.”

비아냥거림이 명확한 그 말이 성은이라도 된다는 양 김윤덕의 허리가 굽혀졌다. 그 모습조차 보기 싫어 강의 눈살이 구겨졌다.

“국구, 그 자리를 바란 것인가?”

넙죽 굽혀진 허리가 천천히 곧게 펴졌다. 김윤덕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 모습은 지엄한 군왕의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충신과도 같았다.

“그저 신은 전하와 그 아이의 운명을 지켜보았을 뿐이옵니다.”

“지켜보았다…. 우상은 방관하지 않았어. 이리 되길 간절하게 바랐겠지. 하여 상왕께 양위를 권하지 않았는가? 상왕께서는 경의 시커먼 속내를 알고 계신지 모르겠네.”

“어찌 군자로서 순리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상왕 전하를 모셨던 충심으로 새로운 군왕을 섬기는 것 또한 신하 된 도리로 응당 따라야 하옵니다.”

강은 김윤덕의 가증스러움에 환멸을 느꼈다. 제 손으로 김윤덕의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가도 김윤덕이 가진 조정에서의 입지를 떠올렸다.

강의 손에는 아직 온전한 군권이 쥐어지지 않았다. 군왕의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강은 여전히 무력했다. 김윤덕으로 인하여 자신의 무력함이 증명되자, 강의 속에서 오기가 날뛰었다.

여유를 떠올렸다. 자신의 숙적이 가진 여유를 보며 강은 평정심을 찾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우상의 양자이니, 우상이 결정하시게. 과인이 사사로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 우상의 뜻대로 해도 좋을 터.”

“실로 그리하오리까?”

김윤덕이 보지 못하지만, 강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하시게.”

허락 없이는 임금의 용안을 함부로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김윤덕은 고개를 들어 강을 보았다.

“전하께옵서는 그 아이를 내칠 수 없으실 것이옵니다.”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과인의 손으로 경의 자식을 버렸다. 이미 버린 사람, 뭐가 아쉬워 다시 붙잡겠는가. 과인에게는 미련이 없으니 원하는 대로 하시게.”

저에게 닿아 있는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김윤덕의 마음은 곧았다. 평온함을 머금은 채 김윤덕은 고개를 숙여 읍했다.

“소신,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필히 평온한 밤 보내시옵소서.”

강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는 김윤덕에게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편전의 장지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 강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겸사복장, 부경. 명하시옵소서.”

신하가 서는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경이 나와 강에게 부복했다.

“회은동으로 가라. 가서 도승지에게 서찰을 전하라. 그리고….”

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선은 종이를 준비했다. 말을 잇지 못하던 강은 한동안 아무도 없는 빈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상선이 벼루에 먹을 가는 소리만 은은하게 편전에 차올랐다.

은재를 지금이라도 당장 그곳에서 빼 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김윤덕이었다. 강의 무력함을 알고 있는 김윤덕은 강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하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궁궐로 찾아왔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은재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무사히 은재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 해도 안전한 곳이 없었다.

현천을 떠올렸지만 그곳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공진포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있는 궁궐은… 절대로 은재가 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겸사복장은 그곳에 남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고 와라.”

마침내 명이 떨어졌다. 부경은 강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명 받들겠나이다.”

“이게 무슨 일이냐!”

별안간 별채로 들이닥친 병사들의 모습에 세준이 버럭 소리쳤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마당을 횃불이 밝히고 있었다. 엄숙한 표정을 한 그들이 나라에 속한 군병이라는 것을 입고 있는 옷이 알렸다.

“어찌 군병이 민가를 지키고 있는 것이더냐!”

군병 무리 중 상급자로 보이는 이가 세준의 앞에 나섰다. 가늘게 뜬 세준의 눈초리에도 그가 두른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도제조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도제조는 오군영 중 도성 수비를 담당하는 금위영을 통솔하는 군부의 핵심이었고, 현재 금위영 도제조의 자리는 좌의정이 겸직으로 맡고 있었다. 사관의 입에서 도제조라는 말이 나왔을 때, 세준은 흠칫 놀랐다.

군병을 사사로이 쓰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게다가 도제조가 누구의 부름을 받고 이곳으로 병사를 보낸 것인지 세준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속한 곳으로 복귀하라!”

“받들 수 없습니다.”

“뭐라?”

“상관의 명을 받드는 부관입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라고 했다!”

세준은 자신이 가진 자리를 내보이며 사관에게 명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담벼락을 에워싼 불길로 세준의 고개가 움직였다. 주먹을 그러쥔 세준의 발길이 중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버님!”

큰 사랑채로 들어선 세준은 자욱하게 깔린 담배 연기 속에 파묻힌 김윤덕을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어찌 이리 흥분한 것이더냐.”

“제발 그만 멈추십시오.”

세준의 간곡한 청에도 김윤덕은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물부리를 물고 빨아들이자, 담배통에 담긴 담배가 타들어 가며 연기를 뿜었다.

김윤덕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세준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병사들을 물리십시오. 군권을 이리 함부로 남용하시는 것은 중죄입니다.”

“그럴 수 없다. 이 아비의 명분은 너이다. 너를 위해서라면 아비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청동으로 만든 담배통이 요강에 맞닿으며 깡, 깡,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귀청 따가운 소리에도 세준은 절박한 마음으로 아비를 보았다. 저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유약했던 아비였기에, 세준은 내심 기대를 품고 아비에게 청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아이를 염려해 주십시오. 소자의 청입니다.”

“이 아비의 명분이 어째서 너인 줄 아느냐.”

그 말에 세준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망함이 가득한 눈길로 아비를 보았다. 저에게 닿은 아비의 눈길에 가득 찬 야욕을 보며 세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가 양인으로 태어났기에, 네가 총명했기에 아비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 아비가 손에 피를 묻히며 세워 놓은 가문의 위세를 네가 더 높이길 바랐다. 후세에도 기억될 수 있도록 이 가문은 번창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아비의 기대가 큰 것이냐?”

“아버님….”

“아비의 뜻에 따르거라. 궁궐에서 지낼 그 아이의 안위도 아비가 보장하마.”

저 자신이 아비의 명분이라면 제 몸을 던져 아비의 뜻에 따랐겠지만, 아비의 손에 들린 화살의 끝이 은재를 겨누고 있었기에 세준은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끊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자는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한다.”

“소자는 은재를 궁궐에 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너는 그저 침묵하거라. 그게 지금 네가 할 일이다.”

“아버님, 어찌 이리 욕심을 내시는 것입니까! 군자로서의 덕을 논하시는 분께서 어찌 군자로서는 할 수 없는 선택을 하려 하십니까?”

김윤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세준을 응시했다.

“모두 너와 가문을 위한 일이다.”

“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아버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요강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차츰 약해졌다. 방 안을 유유히 떠돌아다니던 담배 연기 또한 활짝 열어 놓은 바깥으로 빠져나가며 혼탁했던 방 안이 맑아졌다.

세준은 더욱 선명해진 아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리고 자랐다. 호의호식하며 하고 싶은 것을 했지. 아비가 욕심을 채우는 동안 너는 많은 것을 얻지 않았더냐. 네가 아무것도 누리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들끓던 마음조차 부끄럽게 만드는 말로 속에서 수치심이 떠올랐다. 분개하던 마음이 수치심에 져 버리자, 세준은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제가 가진 죄책감을 아프게 꼬집는 아비를 바라보는 눈빛에 힘이 풀리더니 곧 세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세준아, 정녕 무엇이 그 아이를 위한 일인지 모르겠느냐?”

은재가 비열한 야욕을 채우기 위해 아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상처를 받을 것이었다. 게다가 범랑의 주춧돌인 궁궐에서, 은밀하고 조용한 음모와 낭설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그곳에서 은재가 버틸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도 없었다.

아비에게 짓눌러진 자신감이, 아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울뿐인 자신의 권력이 한탄스러웠지만 세준은 질 수 없었다. 이기지 못할 것이라면 납작 엎드려야 했다.

“소자가 천륜을 어기지 않도록… 마음을 돌려 주십시오.”

김윤덕은 아주 가뿐하게 세준의 마지막 발악을 걷어찼다.

“아비의 그늘을 벗어나면 더위가 너를 집어삼킬 것이다. 지금껏 누렸던 대로 아비의 품에 있거라. 그리고 그 그늘 안에서 네 뜻을 펼치거라.”

김윤덕의 위용은 조용하면서도 드셌다. 바닥에서 위로 더 올라가지 못하도록 김윤덕은 세준의 기세를 꺾어 버렸다. 그러고는 김윤덕은 아들이 순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 자부할 것이었다.

“아버님…. 소자, 가문을 위해 살겠습니다. 아버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은재를 보내 주십시오.”

“왕손을 잉태한 몸으로 갈 수 있는 곳은 궁궐뿐이다.”

“…전하께옵서 원치 않으십니다.”

“이 아비가 받아들이시도록 만들 것이다.”

큰 사랑채에서 나와 작은 사랑채로 향하던 도중 어두운 곳에 잠겨 있던 부경이 세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부경은 가슴팍에서 서찰을 꺼내 세준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부경은 저에게 닿은 시선에 헛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때와 달리 시무룩한 얼굴이 낯설었다. 세준이 느끼는 기분을 파악하기도 전에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곳에 울렸다.

“저는… 전하를 도울 수 없습니다….”

부경은 세준의 목소리에 감긴 설움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도 부경이 내밀 수 있는 건 강이 세준에게 보내는 서찰뿐이었다. 부경은 무심한 표정으로 서찰을 받으라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전하의 비찰입니다.”

“받아 무엇 하겠습니까…. 전하께 저는 아무 쓸모도 없는 놈입니다….”

세준이 강의 서찰을 거부한대도 부경은 어떻게든 그 서찰을 세준의 손에 쥐여 주어야 했다. 양옆으로 맥없이 늘어져 있는 팔을 향해 부경이 손을 뻗었다. 세준의 손목을 쥐고 오므라져 있는 손바닥 위에 비단 봉투를 올려놓았다.

“읽으십시오. 그리고 뜻에 따르시면 됩니다.”

세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손목을 잡은 부경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듯 부경은 부여잡고 있던 세준의 손목을 놓았다. 억지로 서찰을 쥔 손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만약…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곧바로 발을 돌려 높은 담으로 뛰어들려고 했지만, 부경은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어리숙한 미련으로 풀이 죽은 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마저도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 부경은 천천히 뒤로 걸음을 물렸다.

“저 역시도 전하를 의심했었습니다. 하나 지금 곁에서 전하를 보필하며 느낀 바,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강하십니다.”

부경의 발끝은 이미 가야 할 길로 향해 있었다. 세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할 말만 하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눈앞에서 부경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허탈감에 헛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전하께서 강하길 바라지요. 그래야 제가 원하는 바도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세준은 곧 걸음을 떼었다. 부경이 무작정 제 손에 쥐여 주고 떠난 서찰을 읽기 위해서 더 밝은 곳으로 가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세준은 등 앞에 앉아 강이 저에게 보낸 서찰을 펼쳤다. 흰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는 세준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 * *

명경전에서 열린 조참은 매월 네 번, 천양에 있는 관리들이 모두 모여 임금을 알현하는 의식이었다.

북소리 한 번에 병조에 속한 병사들이 의장과 무기를 갖추고 명경전 앞에 정렬했다. 북이 두 번 울리면 종친과 문무백관은 관복을 입고 명경문 밖에서 지시를 기다렸고, 북이 세 번 울리면 문무백관이 명경전 마당으로 들어가 지정된 자리에 시립했다.

의례를 관장하는 집사관의 구령에 따라 사배를 마치면 의식은 끝이 났다.

조참은 비교적 간결한 의례였지만, 천양 인근에 있는 문무백관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임금을 알현하는 의식이기에 특별했다.

조참이 끝나면 조계를 행했다. 문관과 무관이 명경전에 두 열로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용상에 오른 임금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문무백관을 응시한 뒤 어좌에 앉았다.

“매달 네 번씩이나 이 지루한 의례를 치러야 할 필요가 있겠소.”

임금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리자 백관들의 숨소리가 작아졌다.

“다들 국정을 돌보는 데 힘을 쓸 것이지, 뭣 하러 이 허례 가득한 의식에 참석하려 힘든 걸음을 하시오. 앞으로 조참을 줄이도록 하겠소.”

용상 가장 가까운 곳에 시립해 있던 세준은 터져 나오려는 헛숨을 막기 위해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삼년불비(三年不蜚).』

삼 년 동안이나 날지 않는다. 말인즉슨, 기다리면 뜻을 펼칠 날이 올 거라는 것이다. 어젯밤 부경을 통해 강이 세준에게 보낸 서찰에 적힌 글귀였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아비였다. 천륜을 어길 수 없었기에 세준은 강에게 기대를 걸어야 했다.

그렇지만 강은 선대 임금들과는 달랐다. 조정에서 평범하지 않은 군왕은 왜곡될 가능성이 컸다. 곡해하고 탄압할 것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임금의 손에 들려 있어도 언젠가부터 조정은 관료들의 힘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정해진 법도에 따르지 않고 도외시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옵니다.”

영의정이 나서 강의 뜻을 철회하려고 했다. 강은 그가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정해졌다고 하여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나라가 어찌 발전할 수 있겠소. 필요하지 않은 일에 힘을 쏟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국정이 잘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더 이득이오.”

“법도를 바꾸는 것 또한 걸리는 시간과 소모될 인력이 만만치 않사옵니다. 이미 정해진 법도를 건들지 않고 국정을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영의정은 법도를 바꿨을 때와 바꾸지 않았을 때, 언제 가장 백관들이 국정을 잘 돌볼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오시오.”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임금의 모습에 그곳에 모인 대신들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임금 홀로 그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중요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이 없다면 모두 돌아가도 좋소. 과인 또한 경들 못지않게 바쁘오.”

조계를 파하면 육조와 삼사의 관원이 편전으로 들어 국정의 현안을 논하는 윤대가 열릴 것이었다. 경연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경연이 끝나면 주요 현안을 다룬 문서에 수결을 한 뒤 상소문에 비답을 내려 주는 일까지 해야 했다.

“모두 물러가시오.”

강이 돌아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그곳에 자리한 이들의 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강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립한 이들의 허리가 저절로 굽혀졌다.

용상에서 내려가려 발을 뗀 순간이었다. 김윤덕이 앞으로 나섰다.

“소신, 주상 전하께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앞으로 내디뎠던 걸음이 멈추고 강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 다시 어좌에 앉았다.

“기어코 이 자리에서 꺼내시겠다…?”

“종묘사직을 잇기 위해 문무백관이 보는 자리에서 다시 주상 전하께 읍소할 수밖에 없었나이다. 또한 국가를 위한 중대한 사안이기에, 이 자리에서 아뢰어야 했사옵니다.”

“그리 하고 싶어 안달을 냈을 터이니, 하시오.”

최익수는 앞으로 나선 김윤덕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난들 알겠소.”

최익수의 매정한 말투에 속삭이던 대신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김윤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김윤덕의 입이 떨어졌다.

“소신의 양자가 왕손을 잉태하셨사옵니다.”

조정이 술렁거렸다. 백관들은 저희가 있는 곳이 대전이며, 그곳에 임금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새기고는 침묵했다.

“어찌 증명할 셈이오.”

“합환 증표 말고 무엇으로 진위를 밝힌단 말이옵니까. 주상 전하의 옥체에 새겨진 표식이, 제 양자에게도 있사옵니다.”

울리던 김윤덕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임금의 웃음이 그곳에 요동쳤다.

“경이 과인의 옥체를 들여다본 것처럼 말을 하니, 과인이 달리 할 말이 있겠소.”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용상을 내려왔다. 다들 허리를 굽히는 와중에 김윤덕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경의 말이 맞소. 과인이 궁궐로 들어오기 전 경의 양자와 합환을 치렀소. 국법에서는 혼인하지 않은 음양인이 합환을 하면 중죄라 말하고 있소. 그러니 과인을 참할 것이오?”

대전 안에 있던 백관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백관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대전이 떠들썩했다. 저 혼자 꿋꿋하게 서 있던 김윤덕도 마지못해 걸음을 뒤로 물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은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 김윤덕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임금의 발끝과 김윤덕이 쓴 관모의 끝이 닿을 듯 가까워졌을 즘, 임금이 말했다.

“죄를 지었다고 해도 과인은 벌을 받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우상의 양자는 어찌 되오?”

납작 엎드린 예조 판서가 소리 내 말했다.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우의정의 양자를 비씨로 들여 국모로 삼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그의 뜻에 동조하는 듯 다른 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예조 판서의 말이 맞사옵니다. 왕손을 잉태한 자를 어찌 국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사옵니까.”

임금이 내뱉는 헛웃음은 차가웠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면서도 임금에게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두려워하거나 업신여기는 등의 내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강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이들을 넓게 둘러보았다.

이중 김윤덕의 사람과 자신의 사람을 가르는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조정에 가득 찬 속물들로 인하여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강은 이런 곳에서 자신의 사람을 찾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강의 눈길이 다시 김윤덕에게 멈췄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우의정의 양자를 비씨로 들여야겠소. 예조는 속히 비씨를 맞이할 준비를 하되, 복중의 왕손을 생각하여 절차를 줄이도록 하시오.”

강의 하교에 바닥에 부복하고 있던 이들이 또다시 크게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강은 제 발아래에 납작 엎드려 있는 김윤덕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고는 그에게서 눈길을 떼었다. 곧 김윤덕의 관모를 걷어찰 듯 가깝게 닿아 있던 발이 틀어졌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임금의 웃음소리가 대전에 크게 울렸다.

나가는 임금과 배종하는 이들의 걸음 소리로 대전이 어수선했다. 발을 딛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자 백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웅성거림이 분주하게 사방으로 퍼졌다.

최익수의 측근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가례는 임금이 최익수에게 쥐여 준 패였다. 최익수는 임금이 혼사로 무엇을 꾀할지 알고 있었다. 임금은 물고기를 잡는 투망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는 최익수 가문의 위세를 얻을 셈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임금이 전략으로 꺼낸 혼사가 의아했었다.

지난 범랑의 역사에서는 외척으로 조정에서 권력을 쥐지 않았던 자가 없었다. 오죽하면 임금의 장인이 되어 백 평짜리 곳간을 황금으로 채우지 못하면 반병신이라는 말이 있기도 했다.

제 목숨 줄을 가지고 협박을 했던 임금이 과연 외척을 두고 볼 것인가.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가문에서도 가장 별 볼 일 없는 이의 자식을 택할 생각이었다. 금상의 정치에서 외척을 꿈꾸느니, 차라리 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손에 넣는 게 더 쉬울 터.

“어쩌긴요. 그 자리가 탐난 듯하니, 내어 주어야지요.”

눈앞에서 김윤덕에게 패를 빼앗긴 최익수는 꽤 불만이 깊은 눈초리로 김윤덕을 응시했다. 승리를 예감한 김윤덕 일파의 기쁨을 응시하던 최익수는 미련을 품지 않았다.

임금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궁금했다. 생각 외로 꽤 흥미진진한 대결이 될 것 같았다.

“내어 준다고 앉을 수 있으려나.”

최익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밖을 향해 움직였다.

* * *

가례에서 간택은 제일 중요한 절차였다. 금혼령이 떨어지는 동시에 10세 전후의 여인과 음인 사내들은 가례 단자를 올려야 했다.

전국에서 모인 가례 단자가 임금에게 올라가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왕실의 큰 어른인 대비가 주관했다. 대비의 선택을 받은 음인 사내와 여인들은 마지막 한 명을 뽑을 때까지 삼간택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번 가례에서는 이미 복중에 자리 잡은 왕손으로 간택이 절차에서 빠졌고, 복잡한 절차를 생략하라는 하교가 있었기에 임시로 설치된 가례도감의 관원들은 재빨리 중전이 될 비씨를 궁으로 모셔야 한다고 판단했다.

관상감에서 비씨를 들이기 좋은 날짜를 잡아 임금에게 올렸고, 임금은 관상감에서 올린 여러 날 중 한 날을 집어 다시 관상감으로 비답을 내렸다.

비씨가 별궁으로 들어올 날이 잡히면 임금과 가례도감의 관원들은 종묘와 사직으로 가 왕비를 들이게 되었음을 알렸다.

국구가 될 가문에서는 임금이 내리는 교명문과 기러기를 받을 준비를 했고, 왕비가 될 비씨는 별궁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길일이자 임금이 선택한 그날, 높은 솟을대문 앞에 궁궐로 향할 가마와 가마를 배종할 궁인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졌다. 여기저기서 구경꾼이 몰려와 길가는 정신이 없었다.

곧 중전이 될 비씨의 얼굴을 보겠다고 함부로 양반 집 담벼락 위에 올라선 이들과 포졸들이 씨름하는 소리도 간간이 울려 퍼졌다.

“도련님 없이 어찌 살라고….”

별채 마당에서 중문으로 향하던 도중, 꺽새의 설움 섞인 목소리가 은재의 발목을 붙잡았다. 도포와 갓을 갖춰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을 한 은재가 난처한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어찌 살긴…. 잘 살면 되지….”

은재는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다 못해 넘쳐흐르는 꺽새의 얼굴을 보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음인이 아닌 사내는 궁궐로 들어갈 수 없다는 법도가 꺽새를 울게 했고, 은재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곳에 서서 속상함을 토로할 시간이 없었지만, 은재는 기어코 궁인의 쌀쌀맞은 눈초리를 무시하고 꺽새에게로 다가갔다. 통통한 꺽새의 볼때기를 이제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은재는 울지 않기 위해 턱이 힘을 가득 주었다.

“도련님은 쇤네 없이 괜찮으시겠어요?”

“아예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래….”

“그래도… 으헝!”

은재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 꺽새를 꼭 끌어안았다. 평생지기라고 생각했던 꺽새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얼떨떨했지만, 은재는 꽤 태연한 척하며 우는 꺽새의 등을 토닥였다.

“울지 말거라. 내 간간이 너를 보러 올 것이다. 그러니 누를 끼치지 않도록 아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알겠니?”

꺽새는 대답 대신 으어엉, 하며 울어 댔다. 은재의 허리를 두 팔로 꽉 끌어안고 놔주지 않자, 곁을 지키던 궁인이 헛기침하며 꺽새에게 눈치를 주었다. 꺽새는 은재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꼬리가 축 늘어진 은재의 눈썹을 보며,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더는 은재를 붙잡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꺽새는 뒤로 천천히 걸음을 물렸다.

“비씨 마마.”

상궁의 독촉에 꺽새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은재가 다시 중문을 향해 발길을 틀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마음이 잘게 흔들렸다.

몇 개의 중문을 넘어 마침내 대문간에 선 은재는 김윤덕의 앞에 섰다. 정사와 부사에게서 임금이 보낸 교명문과 기러기를 받는 납채 의식이 끝났고, 임금에게 보낼 답장까지 정사에게 전달된 후였다.

비씨의 신분이 되어 장차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부모에게 예를 차릴 수가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으로 예를 차릴 수 있는 때였다. 은재는 김윤덕에게 절을 올렸다. 난생처음으로 아비에게 제대로 올리는 절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김윤덕은 자상한 얼굴로 은재를 바라보았다. 그것 역시도 은재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저를 예우하는 아비를 보며 은재는 그게 진심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기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대문으로 향하는 행렬의 뒤를 세준이 쫓았다. 은재는 가마에 오르기 전, 지금까지 계속 눈길을 피했던 세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줄곧 불편한 마음으로 은재의 눈길을 좇던 세준은 별안간 붉어진 은재의 눈시울을 보며 아차, 했다.

“형님….”

동그랗고 큰 눈망울에 가득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준은 은재에게 다가가 제가 지니고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감축드립니다….”

저에게 존대하는 형제가 어색했는지, 은재는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감췄다. 그러고는 세준이 건넨 손수건을 손에 꽉 쥐고 어깨를 달싹거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마…. 부디 무탈하시길 빌겠습니다.”

세준은 두 손으로 손수건이 들린 은재의 손을 붙잡았다. 세준의 손등 위로 식지 않은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형님께서도… 무탈하십시오.”

“소신이 곧 마마를 찾아뵐 터이니, 너무 걱정치 마십시오.”

은재는 자상한 형제의 목소리에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고개를 들어 제 곁에서 떠나지 않은 상궁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의 무뚝뚝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은재가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세준은 은재의 손을 놓았다.

“어머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는 은재를 보니 세준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기뻐할 일이 맞았지만, 앞으로 궁궐에서 지낼 은재의 모습이 눈에 훤했기에 세준은 기뻐하는 것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애가 끓는 심정으로 제게서 돌아선 은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궁으로 향하는 행렬에 따라붙을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던 세준은 은재가 가마 앞에 서자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비씨 마마, 가마에 오르시옵소서.”

대기 중이던 궁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은재는 가마에 올라탔다.

“비씨 마마, 가마의 문을 닫겠사옵니다.”

가마의 문이 닫히고 온전히 혼자가 된 은재는 세준이 제게 준 손수건을 꼭 쥐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제가 꺽새에게 했던 말대로 앞으로 영영 보지 못할 것도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슬펐다.

비씨의 행렬은 건춘궁의 서쪽에 있는 홍운궁(紅雲宮)으로 향했다. 임금이 별궁으로 사신을 보내 대궐로 맞이하는 명사봉영을 치르기 전까지 은재는 회은동과 가까운 홍운궁에서 기거할 것이었다.

눈물을 그치고 제정신으로 현실을 마주한 은재는 홍운궁에서의 생활을 상상했다. 그곳에서 왕실의 법도를 익히고 태교에 전념할 테지만, 은재는 과연 제가 그것을 잘 해낼지 의문이었다.

불안함이 엄습한 가운데 가마의 사방이 꽉 막혀 답답했던 은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비씨 마마, 홍운궁에 당도하였사옵니다.”

상궁의 말과 함께 붕 떠 있던 가마가 바닥에 닿았다.

“비씨 마마, 가마의 문을 열겠사옵니다.”

곧 가마의 문이 열렸다. 은재는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서 나왔다. 그리고 제가 발을 들여놓은 홍운궁을 둘러보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은 보통 사가와 별다를 게 없었지만, 그곳을 지키는 군관과 궁인들이 궁궐의 위엄을 내보였다.

“이곳이 앞으로 비씨 마마께옵서 지내실 홍운궁이옵니다.”

내심 궁궐에서 지낼 걸 두려워했던 은재는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광경과는 사뭇 다른 소박한 모습에 안심할 수 있었다. 은재는 걸음을 옮겨 가며 홍운궁을 빙 둘러보았다. 그러던 차, 가쁜 걸음으로 상궁에게 다가오는 내관에게 은재의 시선이 닿았다.

상궁의 가까이에서 속닥거리는 내관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 상궁이 은재에게로 몸을 틀고 다가왔다.

“비씨 마마, 주상 전하께옵서 거둥하셨다 하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불안해 보이는 상궁과는 달리 은재는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양옆으로 늘어져 있던 손이 자연스럽게 아랫배에 닿았다. 은재는 제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앞으로 제가 지낼 내전을 바라보았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강을 그리며 은재는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강과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에게로 향했다.

“주상 전하, 비씨 마마 들었사옵니다.”

내전의 복도에 선 은재는 열린 장지문 사이로 보이는 강의 모습에 눈을 반짝였다. 서슴없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뒤를 따라오던 상궁이 은재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속삭였다.

“비씨 마마…. 어서 예를 갖추시옵소서.”

왕실의 법도를 잘 알지 못한다 해도 임금과 처음 대면하는 비씨이기에 은재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눈길을 아래에 두면 강을 보지 못할 것이라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괘념치 않았다.

“비씨와 둘이 있고 싶으니, 나가라.”

강의 하교에 상궁은 곧바로 뒷걸음질을 쳤다.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은재는 내심 가슴에 기대를 떠올렸다. 고개를 들면 저를 보고 강이 웃어 줄 것이라, 그리 여기며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렸다.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랐던 것과 달리 차가운 목소리가 은재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은재는 제가 품었던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영원히 강과 함께할 것이라는 희망이 은재의 눈을 가린 것이었다.

은재는 강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눈과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강이 이토록 저를 냉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아서 손꼽아 이것 때문이라 할 수 없었고, 현실 또한 직시하고 있었다.

양부가 된 아비와 강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세준이 전한 강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같이 강이 저를 반기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지만, 은재는 강을 마주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지금도 은재는 강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떠나세요.”

“나리….”

강은 은재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애처로움이 깃든 그 목소리가 가슴 속을 후벼 파고 있었음에도 강은 은재의 마음을 무시해야 했다.

“지금 바로 가야 합니다.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를 따라가세요.”

그리던 순간에 닿았지만, 강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재와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싫습니다.”

억지를 부리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은재는 저를 보내려고 하는 강에게 매달려야 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강과 함께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저 자신이 강을 간절하게 원했다.

더는 강이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도록 머릿속이 온통 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 가라 하십니까…. 저는 나리와 함께 있고 싶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어찌….”

“이곳은 그대가 올 곳이 아닙니다.”

설움이 북받쳐 오른 듯 은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간신히 그친 눈물이라 다른 때와 달리 더 쉽게 맺히고 더 쉽게 흘러내렸다. 감정을 억눌렀던 마음에 잔금이 생기자 어쩔 도리가 없도록 감정이 툭, 하고 터졌다.

“하지만… 이곳에 나리가… 계십니다.”

흐르는 눈물을 보았고, 잇새로 흘러나오는 설움을 들었다. 강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고, 가까이 다가가서 달랠 수도 없었다.

여섯 보.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거리에 서서 강은 은재를 응시했다. 그러다 그마저도 차마 제 두 눈으로 보고 있을 수 없어 바닥으로 시선을 툭 떨궜다.

“저는… 나리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연정에 휘둘러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이곳은… 그대에게 버거운 곳입니다.”

섣불리 걸음을 뗀 은재는 강에게 더 다가가지 못하고 멈췄다. 제가 다가간 만큼 떨어진 거리를 보며 눈물을 흘렸고,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보내지… 마십시오….”

눈물,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스러질 듯한 것이었다. 저의 두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은재의 눈물을 보면서도 강은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고, 지금을 놓친다면 강은 진정으로 은재를 잃을 것이었다.

“가야 합니다.”

떨궜던 고개를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가워진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살을 베는 듯한 눈빛에 은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눈빛을 보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아, 계속 보고 있으면 더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투정을 부릴 듯하여 차라리 보지 않기를 택했다.

“그대를 위한 결정입니다. 내가 야속하겠지만, 지금 나가지 않는다면 필시 후회할 것입니다.”

은재는 고개를 저었다.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절박한 마음을 담아 내보였다. 강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의 차가운 눈빛이 무서워 고개를 숙여 놓고도 봐야 하는 것은 보지 않았다.

“제가 나리를 지킬 거라 약조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강의 손을 붙잡고 그 마음을 돌리고 싶었지만, 떨어진 거리가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은재는 그곳에 서서 계속 말했다.

“저는 그 약조를 지키려고 왔습니다. 그러니 나리께서도 약조를 지키십시오.”

은재는 고개를 들고 강의 답을 기다렸다. 실망을 품어 놓고도 이제는 떠나라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해 줄 것이라 또다시 기대를 떠올렸다.

“나는….”

은재의 눈 속에 담긴 수를 셀 수 없는 사랑을 보며 강은 탄식했다.

애처롭기 짝이 없는 은재를 부둥켜안고 저도 그러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강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앞날이 은재를 어떤 절망에 빠지게 할지 눈에 선했기에, 강은 은재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나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떠나세요.”

강이 은재에게서 몸을 돌리던 찰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은재는 강에게 손을 뻗었다. 은재에게 붙잡힌 강은 발을 떼지 못하고 아주 잠깐 은재의 손에 담긴 온기를 느꼈다.

그립고 그리웠던 그 온도를 계속해서 탐낼 것 같아 강은 다른 손으로 제 손을 덮은 은재의 손을 밀어 냈다.

떨어져 나간 손은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곁에서 떠나지 않을 듯했던 걸음은 너무나도 쉽게 멀어져 갔다.

강이 밖으로 나가고 장지문이 닫히는 순간, 은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찢겨 나간 듯한 마음의 상처에서 눈물보다 더한 시뻘건 피를 툭툭 흘리면서도 은재는 홍운궁을 나설 수가 없었다.

그건 오롯이 저에게서 멀어진 걸음이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저에게 닿을 것이라는 미련한 믿음 때문이었다.

* * *

경파의 숙적이었던 이강이 집권한 뒤로 은밀하게 나뉘기 시작한 경파는 가례도감이 설치된 이후에 명백하게 선이 그어졌다.

흐르는 유경파와 머무는 능경파로 나뉘었지만, 서로를 향한 적개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유경파와 능경파의 견제는 뚜렷했다.

“제대로 된 군권을 손에 넣어야겠다.”

임금의 반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도 최익수의 유경파가 적나라하게 임금의 편에 섰을 때였다. 임금이 제일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군권이었다. 오군영에서도 가장 핵심인 훈련도감과 금위영을 손에 넣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좌의정이 금위영 도제조를 겸임하고 있사오며, 병판은 변강에서 세력을 모은 자로 군영에서의 영향력이 큰 자이옵니다.”

“사헌부를 움직여 좌의정과 병판의 비리를 뒤지게 하고, 없을 시 만들어 내서라도 두 사람을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

“만일 위조한 일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전하께옵서는 실권을 잃게 되실 것이옵니다.”

임금의 웃음소리가 편전에 울렸다.

“권력을 쥔 자 중에서 어찌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영상은 실로 자신이 청렴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최익수는 답할 수 없었다.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은 꼬리에 항상 께름칙한 것을 달고 다니는 법. 조정에 선 대신 모두를 믿지 않는다. 그러니 털면 무엇이든 나올 것이다.”

경파를 향한 임금의 불신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과녁판이 된 좌의정과 병판의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떨떠름했다. 최익수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말했다.

“군권은 본디 군왕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옵니다. 어찌하여 군권을 잃었다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까칠한 웃음소리가 사나운 기세로 귓구멍을 찔렀다. 최익수는 머리를 조아린 채 허리를 굽혔다.

“군권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군왕은 그들을 통솔하기 위한 자이다. 변강을 돌던 이가 세력을 모으고 영향을 미친다면 어찌 군권이 군왕의 손에 들려 있다 할 수 있겠는가? 해야 하는 일은 배척하고 권력에 눈이 멀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바꿔야지.”

“혹 우려하시는 일이 있사옵니까?”

“많다. 하여 군영의 실권을 쥔 자들이 과인을 우롱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손에 쥐어져야 과인이 마음껏 과인의 뜻을 펼칠 수 있지 않겠는가?”

최익수는 바닥을 바라보며 고심했고 그의 고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진포와 현천을 따르던 자들이 변방의 군영을 지키고 있사오니, 그들을 불러들여 오군영에 배치하신다면 전하께옵서 바라시는 뜻을 얻게 되실 것이옵니다.”

“좋다.”

막무가내로 부딪치기를 택한 강은 사헌부를 통해 병조의 우두머리인 판서 오사철과 금위영의 도제조를 겸임하고 있는 좌의정 이명인의 비리를 캐내게 명했고, 사헌부에서 청한 사직 대신 지방직으로 좌천시키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능경파는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팔을 베였음에도 강이 내린 인사 발령에 반발할 수 없었고, 강은 제대로 된 군권을 손에 넣으면서 반정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권을 손에 넣고 강력해진 강은 죽천골의 산림을 조정으로 불러들였고 회의와 환멸을 잊지 못한 이들은 강의 부름에 한달음에 천양으로 달려왔다.

자신의 사람들로 반절을 채운 조정, 아무나 감히 오를 수 없는 용상에 앉은 강은 대전에 든 대신들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강의 입이 떨어졌다.

“다들 갑자옥사를 기억하오?”

용상에 올라서도 강은 과거의 일을 꺼내지 않았었다.

지금 와서 자신의 손으로 이뤄 낸 권력을 뽐내듯 강은 강력한 자신을 문무백관 앞에 내보였다. 적시적기에 꺼내 든 패는 능경파의 수장인 김윤덕을 겨냥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듣고 보았다.

“그때 그들의 반정을 고변했던 상소를 누가 올렸소?”

임금이 처음 반격을 꾀했을 때, 능경파는 그저 앞으로 김윤덕이 손에 쥘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 김윤덕을 향해 뾰족한 이빨을 과감하게 드러낸 임금을 보며 그들은 탄식을 머금었다. 김윤덕과 한때 동지였던 최익수가 앞으로 나서자 울분을 삼켜야 했다.

“성현관 유생이었던 김윤선과 네 명의 유생, 그들과 관련이 있던 세 명의 관원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고변 상소는 당시 의금부 지사였던 김윤덕이 올렸사옵니다.”

능경파의 일원 하나가 겁 없이 목을 드러내고 앞으로 나섰다.

“주상 전하, 이미 처결이 끝난 옛일을 꺼내신다면 조정의 기강이 틀어질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김윤덕은 그때까지도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그를 가소롭게 여기는 듯 강은 입꼬리를 추켜올린 채 항변하는 이를 응시했다. 그는 능경파의 골수이자 임금이 아닌 김윤덕의 위세에 충성을 바친 이였다.

“주상 전하, 소신은 유생 시절 김윤선과 성현관에서 글동접을 한 사이입니다. 김윤선은 당시 소명 세자의 책봉에 불만을 품고 같은 뜻을 품은 유생을 모아 권당하였고, 재회를 열어 상왕 전하께 유소를 올리려고 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유소를 올리는 것이 잘못되자 당시 좌부승지 신병주, 상서원 판관 정덕수, 이조의 좌랑 김만성과 모여 흉계를 꾸민 것이옵니다.”

죽천골의 산림이었으나,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궁궐로 든 좌승지 공태호가 나와 바닥에 엎드려 고했다.

“그들의 죽음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옵니다. 그들이 당시 반역을 도모했다는 의심을 받기는 했으나, 공진포 국구의 가택을 방문했다는 이유만으로 어찌 반역을 도모했다 단정 지을 수 있겠나이까. 그때 그들의 처결에는 여전히 의문점이 많사옵니다. 그들의 죄를 입증하는 증좌 하나 없이 진행된 처결에서 그들이 어찌 진실을 토할 수 있었겠나이까.”

공태호의 설움이, 그와 함께 뜻을 가지고 죽천골로 향했던 동지들의 울음이 대전을 에워쌌다. 그들의 슬픔에 동조하는 이가 있었지만,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함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과거 저희의 손으로 일궈 냈던 일이 공이 되어 권력을 가져왔지만, 지나고 난 뒤 그것이 화살이 되어 저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때 김윤덕의 목표는 공진포의 국구였다. 늙어 기세를 잃은 권세가의 뿌리를 뽑아낼 작정으로 공진포를 엮어 상소를 올렸지만, 상왕의 판가름은 김윤덕의 뜻과 달랐다.

상왕은 국구를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이들을 김윤덕에게 내어 주었다.

“과인이 죄인을 추문한 추안을 보아도 그들의 죄를 입증할 만한 증좌가 없음을 알 수 있었소.”

임금은 내관에게서 받아 든 문서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용상 아래에 있는 백관들은 감히 그것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섰던 이는 영원히 감춰져 있을 줄 알았던 것이 바깥으로 나오자, 바짝 세웠던 꼬리를 내리고 슬그머니 걸음을 물렸다.

“김윤덕의 상소는 진실로 경솔한 것이었사옵니다. 하오니 간사하고 올바른 것을 분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따진 연후에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 합당하옵니다.”

최익수는 때가 되었다는 듯 임금이 만들어 놓은 판에서 칼을 집어 들었다. 임금은 그게 못내 흥미진진하다는 듯 지켜보았다.

“또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유생 김윤선과 세 관원의 관직을 회복시키는 것을 윤허해 주시옵고, 무고로 상소를 올린 김윤덕을 멀리 귀양을 보내소서.”

대전을 울리게 한 술렁거림은 빨랐지만 연약했다. 침묵이 도사리는 곳에서 강은 김윤덕을 바라보았다.

“당시 국옥을 추진했던 우상은 달리 할 말이 없는 것이오?”

김윤덕은 그저 미동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김윤덕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망함도, 좌절감도. 김윤덕은 늘 그렇듯 여유롭고 차분했다.

“유생은 본디 관작이 없어 회복할 명예가 없으나, 김윤선이 생전 성현관에서 수학했을 적의 성적을 토대로 직첩을 내리는 게 마땅하오. 또한 관작이 있던 이들은 관작을 회복하여 치욕을 씻기고 원한과 누명을 풀어 주는 것이 옳소.”

“전하, 성은이 황공하옵나이다.”

하교가 떨어지기 무섭게 공태호와 함께 궁궐로 들어온 산림들이 엎드려 통곡하였다.

“무고의 상소를 올려 죄 없는 이들을 극률에 처하도록 청한 일이 종묘와 사직을 기만하고 어찌 상왕을 능멸하지 않았다 할 수 있겠소. 군왕의 위엄을 모략으로 더럽힌 김윤덕의 재산을 몰수하고 북쪽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시오.”

강은 자신이 외척 세력으로 성장할 김윤덕을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분으로 삼아 그를 내칠 생각이었기에, 그의 아들인 세준 역시도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사람이라 여겼던지라 강은 제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세준의 모습을 보며 숨을 머금었다.

“연좌의 죄를 물어 그의 아들 김세준 또한 남쪽으로 귀양을 보내시오.”

세준에게 머무르던 강의 시선은 미련이 없다는 듯 떨어져 나갔다.

“주상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초상을 치르는 듯 능경파의 일원이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또한 갑자옥사에 가담한 관원을 철저히 조사하여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릴 수 있도록 하시오.”

뜻을 물려 달라는 읍소에도 강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같지 않은 이유로 엎드려 통곡하는 이들 사이에서 김윤덕은 우뚝 서 있었고, 최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다시 나섰다.

“비씨는 어찌하오리까.”

강은 침묵했다. 흐느끼며 읍소하는 소리와 죽은 이들이 되찾은 명예에 기뻐하는 이들의 환호 속에서 강은 서쪽에 있는 은재를 떠올렸다.

“사가에 있을 적에도 왕손을 잉태했다는 이유로 면책을 받았던 비씨에게 어찌 연좌의 죄를 물을 수 있겠소. 비씨는 제외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강은 어좌에서 일어나 용상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전을 빠져나갔다.

죄인을 데려가기 위해 대기 중이던 의금부의 관원들이 대전에서 나오는 강을 향해 부복했다. 강은 그들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곧장 편전을 향해 걸어갔다.

* * *

“먼저 비씨를 처리해야 합니다.”

능경파가 모인 자리였다. 그곳에 함께 있던 최익수는 침묵했다.

“홍운궁 나인 하나를 포섭하겠습니다. 나머지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최익수는 열의로 가득 찬 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임금의 원대로 권력의 쟁점에 있던 김윤덕을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그의 아들까지 연좌해 처리했다지만, 궁궐에는 여전히 눈엣가시가 존재했다. 그리고 임금은 복중 왕손을 핑계로 비씨를 궁궐에 두었다.

의문이었다. 과연 비씨의 복중에 왕손이 없다 할지라도 임금이 비씨를 궁궐 밖으로 내보낼 것인가.

최익수는 확률이 보장되지 않은 승부가 떨떠름했지만, 자신과 함께 뜻을 모은 이들의 열정은 궁궐에 잔존하는 작은 불티를 말끔히 꺼 버리고 싶어 했다.

임금은 속내를 모르는 자였다. 하루아침에 죄인의 자식이 된 비씨를 어찌 생각하는지, 동지들이 뜻을 펼친다면 임금이 어찌 반응할지 최익수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대감!”

그들의 재촉에 최익수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뜻대로 해도 좋으나, 만약 이 일이 주상의 귀에 들어간다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게.”

말을 마친 최익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우러러보는 이들의 눈을 피해 바깥으로 나와 어둠이 깔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녕 비씨를 궁궐에서 내쫓을 수 있을 것인가. 임금은 과연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최익수는 감히 임금을 판가름할 수 없어 예상의 수를 늘어놓았지만, 그마저도 승률이 적었다. 하여 임금에게 저희의 수를 들켰을 때, 저 혼자 빠져나갈 수 있는 개구멍을 파 놓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익수와 함께 일을 도모했을 적, 그 자리에는 세준도 함께였다.

‘자네도 화를 면하지는 못할 것이야.’

강은 김윤덕과 김세준을 같은 선상에 두지 않았음에도 그 둘에게 얼키설키 엮인 혈육의 연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김윤덕의 세력을 소화시키려면 세준도 응당 제 곁에서 내쳐야 했다.

그러나 저에게 세준이 어떤 존재였던가.

‘소신은 자식 된 도리를 저버릴 수 없사오며 군왕을 섬기는 신하 된 도리 또한 어길 수 없사옵니다. 소신을 상관치 마시옵고 전하께옵서 바라시는 뜻을 펼치시옵소서.’

그때 강은 연민과 동정 따위가 섞인 눈으로 세준을 바라보았었다. 그간 쌓였던 우애의 크기가 너무나도 벅찼기에, 제 손으로 내쳐야 하는 이를 안쓰럽게 여겼다.

강의 마음을 눈치챈 듯 세준은 웃음을 지었다. 불편함을 떨치라는 뜻이었다.

‘전하께옵서 소신에게 삼년불비라 하셨사옵니다. 이제는 비상하실 때가 되셨사오니, 펼치시옵소서. 그저 소신이 바라는 것은 비씨 마마의 안위이옵니다. 부디 안쓰럽게 여기시고 잘 보살펴 주시옵소서.’

강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엇인가를 느꼈었다. 그것은 제 손으로 세준을 내친 지금도 가시지 않고 강의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장기가 쪼그라드는 듯한 고통을 가지고 찾아온 것은 슬픔이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잔소리도 서슴지 않았던 충직한 신하를 잃어 임금은 슬펐고, 제 마음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벗을 잃어 강은 슬펐다.

“겸사복장.”

편전에 든 강은 의자에 앉아 부경을 불렀다.

“겸사복장 부경, 명하시옵소서.”

공진포의 국구를 견제하던 이들의 적의로 희생된 좌부승지 신병주가 강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던 부경의 아비였다. 강은 이제야 떳떳하게 부경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부경은 한 나라의 지존을 대하는 충직한 신하의 모습으로 강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강을 고독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부경은 참 깍듯했다.

“이제 자네의 원통함이 풀렸는가.”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던 어린아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 걷다 보니 부경에게도 고요가 찾아왔다. 지금은 강을 적대시했던 철없던 마음조차 몽땅 사라진 후였다.

부경은 아비의 명예를 되찾아 준 강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그래서 강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비의 명예가 회복되어 자네의 원통함도 풀었으니, 이제 자네도 진정한 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바닥에 닿아 있던 부경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요동쳤다.

강은 부족할 게 없는 자리에 앉아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밖에서도, 궐 안에서도 강은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부경은 그것을 알아채고 속으로 탄식했다.

“겸사복장에게 묻는 것이 아닐세. 함께 유랑하러 다니던 벗에게 묻는 것이니… 답해 주시게.”

“소신은 전하께 충성을 바쳤사옵니다.”

부경의 무뚝뚝한 말투에 강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늘 그랬듯 씁쓸했다. 얼굴을 들어 강을 볼 수 없었지만, 부경은 알고 있었다. 강의 텅 빈 웃음을, 제 손으로 아끼던 벗을 내친 마음을, 그 마음에 내려앉은 슬픔을.

“내 손으로 벗을 내쳤네. 그러나 자네를 얻었으니,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 없겠지.”

부경은 그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때를 놓친 후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인정하는 것 역시 할 수 없었다. 부경은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세준은… 내게 참으로 절실한 이였지.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쓸쓸하다네.”

강이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부경이 보는 앞에 꺼내놓았다. 부경은 전무후무할 그 순간이 찾아왔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얼떨떨한 부경이 바닥만 응시하던 중, 밖을 지키는 나인과 내관들의 목소리로 장지문 너머가 어수선해졌다. 난데없이 굳게 닫혀 있던 편전의 문이 벌컥 열렸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위협으로 부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찬 장검의 손잡이를 잡아 꺼냈다.

그러나 웃돌았던 긴장감은 한겨울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고, 부경은 재빨리 손에 쥐었던 장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눈시울을 붉힌 은재는 서슴없이 강에게로 발을 내디뎠다.

* * *

“정부인과 내가 어렸을 적 친우 사이였네.”

은재가 정식적으로 왕비로 책봉되는 의식인 책비를 앞두고 대궐로 향한 이유는 왕실의 어른에게 문안 인사를 여쭙기 위함이었다. 은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대비가 된 윤 씨의 처소였다.

지금까지 별궁 생활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왕실 어른에게 처음 문안 인사를 올리게 된 어색함을 무릅쓰고 은재는 숨을 죽인 채 보료 위에 앉아 있는 대비를 마주했다.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신중을 가했지만 어설픔을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어찌하다 주상과 비씨가 인연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비씨에게는 대비가 있으니 궁궐 생활이 어렵지는 않을 것일세. 힘들면 언제라도 좋으니 대비에게로 와서 기대도 좋네.”

대비 윤 씨는 자신의 벗과 똑 닮은 은재를 보았을 적 감탄했다. 동글동글한 눈과 오뚝한 코, 적절하게 도톰한 입술이 꼭 생전 안 씨를 보는 것 같았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함께하는 자리마저 기분을 좋게 하니, 대비는 진정으로 은재와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

“예…. 대비마마.”

“몸은 좀 어떤가?”

밤사이 배가 찌르르 아파 잠을 설치기는 했지만, 입덧도 그리 심하지 않아 나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면 근심하실까 싶어 은재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래. 무리하면 복중의 왕손에게도 좋지 않으니, 별궁에 머무는 동안은 문안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아도 되네.”

은재는 슬쩍 상궁의 눈치를 보았다. 상궁은 알아서 하라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럴 때 적절한 말이 무엇인가 머리를 굴리던 은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대비의 눈치를 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마마.”

그 엉성하고 미숙한 모습이 꼭 저와 같았는지, 대비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 웃는 모습이 꼭 저의 어미와 같아 은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잠을 설치게 했던 찌르르함이 다시 배를 콕콕 찔러 대자 은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어디 불편한 겐가?”

놀란 대비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리 무리하면 좋지 않으니 어서 물러가시게.”

“예, 마마.”

대비는 근처에 앉아 있는 상궁에게 눈짓했다. 자리를 지키던 상궁이 일어나 은재에게로 향했다.

“마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직 만삭의 몸이 아니었지만,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은재는 대비에게 다시 예를 차렸다. 상궁의 눈치를 보며 장지문을 향해 내딛는 걸음마저 어설퍼 은재를 지켜보던 대비가 싱긋 웃었다.

대비가 기거하는 대비전에서 나와 뜨락에 선 은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대비의 싱긋 웃는 모습을 보며 어미를 떠올렸고, 강을 생각했다. 별궁으로 든 지 이레가 지나던 참이라 그때 느꼈던 슬픔도 많이 가신 후였다. 그러나 은재는 그날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강이 야속하기만 했다.

내일이면 오시겠지. 하루하루 그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은재는 서둘러 머릿속에서 강을 떨쳐 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았는가?”

“예, 처음인데도 매우 잘하셨사옵니다.”

“내일도… 문안 인사를 여쭈러 와야 하는가? 아까 말씀하시기로는….”

대비의 위엄에 사로잡힌 듯 은재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궁은 잠시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입꼬리를 달싹거리며 웃었다.

“예, 대비마마께서 허락하시었다 해도 안부를 여쭙는 것을 소홀히 하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알겠네.”

별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익숙하지 않았던 은재가 대비전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은재의 뒤를 따르던 상궁이 별궁 방향으로 손짓하자, 은재는 그에게 웃어 보이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은재는 위는 저고리와 같고 아래는 무관들이 입는 철릭과 같지만, 그 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접복을 입고 있었다. 내관을 제외한 왕실의 음인 사내는 모두 접복을 입었다.

지금은 비씨의 신분이라 은재의 접복에는 보가 달리지 않았지만, 책비를 치르고 나면 가슴과 등, 양어깨에 용보를 달 수 있었다.

은재가 걸을 때마다 접복의 주름이 살랑거렸다. 그 살랑거림이 못 미더웠는지 상궁은 이전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은재의 뒤를 따랐다.

“대전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는데 들었니?”

“또 무슨 난리가 났길래?”

은재와 상궁이 대궐로 든 사이, 홍운궁을 지키고 있던 어린 나인들이 오순도순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임부에게 좋은 약재를 받아 오기 위해 내의원에 들렀다가 소문을 물고 온 나인은 또래 나인들이 소식을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며 잘난 체하듯 콧대를 높였다.

“주상 전하께옵서 국구가 되실 우의정 대감을 내치셨대. 옛날 일을 들춰 가며 잘잘못을 따지셨다지. 아무튼 국구는 귀양을 가시게 됐고, 잘생긴 도승지 영감도 연좌제로 함께 귀양을 가시게 됐대.”

“뭐? 도승지 영감도?”

잘생긴 외모로 나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자자한 세준의 소식에 나인들의 얼굴에 울상이 떠올랐다.

“어째서?”

“내가 궁궐에서는 세력이 제일 무섭다고 했지? 비씨 마마가 직첩을 받으시면 우의정 대감의 세력이 얼마나 커지겠어! 그리고 지금 복중에 계신 아기씨가 왕자님이셔 봐. 우의정 대감이 임금님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앉을걸?”

“설마…. 주상 전하께서 멀쩡하게 살아 계시는데 그럴까….”

“응, 그럴 수 있대. 외척하면 전(前) 상선 영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실걸? 아무튼 전하께옵서는 애초에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내치신 거랬어.”

소식을 물고 온 나인의 이야기에 제일 집중하던 나인이 물었다.

“그럼 비씨 마마는 어떻게 되시는 거야?”

“이 멍충아!”

“왜? 비씨 마마의 가족인데 내치면 비씨 마마에게도 안 좋은 거 아니야?”

“으구!”

줄곧 대궐에서 들은 소식을 말하던 나인이 주먹을 쥐고 또래 나인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자, 그 나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모를 수도 있지! 나보다 궁궐에 며칠 빨리 들어왔다고 윗사람 행세하지 마!”

“당연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비씨 마마는 괜찮아! 전하께옵서 복중 아기씨를 회임하신 비씨 마마를 내치시겠어?”

“네 이년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갑작스럽게 내리친 호통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나인들이 팔딱거리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호통을 친 이를 바라보던 눈길이 두려움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나인들이 허겁지겁 나란히 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나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은재는 꼼짝하지 않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다시… 다시 말해 보거라….”

달달 떨리는 목소리에 저희의 목숨 줄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 나인들은 함구했다.

새파랗게 질린 은재의 얼굴을 본 상궁이 심각함을 인지하고는 말했다.

“비씨 마마, 어린아이들이 철없이 떠드는 소리이옵니다. 괘념치 마시고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다시… 말해 보아라. 누가… 어찌 되었다고…?”

“비씨 마마….”

바들바들 떨고 있던 나인 중 하나가 소식을 가져온 나인을 팔꿈치로 툭, 하고 쳤다.

“비씨 마마! 소인이 잘못하였사옵니다!”

콧대를 높이고 조잘조잘 떠들 때와는 달리 사색이 된 나인이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참으로 우의정 대감과 도승지 영감이 원류된 것이더냐….”

“소인은 대궐에서 들은 것을 전했을 뿐이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은재가 아래로 무너졌다.

“마마!”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아 가며 벌어진 일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눈앞이 점점 새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그대로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은재는 찌르르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닿은 손바닥을 그러쥐었다. 저를 부축하고 있는 상궁의 손길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

뒤에서 저를 부르는 상궁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은재는 대궐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눈물이 솟구쳐 올랐지만 이를 꽉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인의 입에서 술술 나오던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일 것이라는 미약한 희망을 품고 은재는 강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걸음 했습니까.”

며칠 만에 만나게 되었지만, 은재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강을 보았다. 그 눈빛을 보던 강의 눈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모두… 다 듣고 왔습니다….”

바들바들 떠는 은재의 손을 바라보는 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궐 안에서 떠드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참입니까…. 아버님과… 형님이….”

은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속에 배어 나오는 설움에 강은 헛숨을 머금었다.

처음 일을 꾀했을 적, 강은 지금을 예상했다. 제가 느끼는 상실만큼이나 은재의 상실감도 클 터. 그렇지만 이 궁궐 안에서 일어날 일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줘야 했고, 이해시켜야 했다. 무너지지 않아야 은재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예. 우의정과 도승지를 파직하였습니다.”

은재는 맥을 추지 못하는 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바닥으로 떨궜던 시선을 들어 강을 바라보았다. 태연한 듯한 모습에 은재는 가슴속에서 울분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찌르르한 배의 통증보다 심장을 꽉 쥐는 듯한 고통이 선명했다.

“어찌 그러셨습니까….”

“내가 이러리라 예상치 않았습니까?”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씨, 이 궁궐에서 이깟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고 칼로 목을 베는 곳입니다. 우상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니 마음 쓰지 마세요.”

턱에 숨이 걸렸는지 숨을 들이마셨는데도 속이 갑갑했다. 숨통을 삽시간에 막아 버린 응어리에 몸부림을 치고 싶었지만, 은재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꽉 쥔 주먹을 덜덜 떨며 강을 바라보아도 강은 저를 걱정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고, 제게 닿은 눈길마저도 따가웠다.

“형님께서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맞아요. 도승지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어째서… 형님까지 내치신 것입니까….”

“도승지의 일은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또한 김윤덕의 자식이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강은 보았다. 저를 원망하는 은재의 눈빛을 똑똑히 응시했다. 곧 강의 마음도 일렁거렸다.

벗을 내친 저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으나, 은재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강은 제 입으로 말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앉은 자리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그래서 꺼내 놓을 수 없었다.

“비씨가 궁궐로 들어오는 날, 모두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비씨 또한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끝내 은재의 울분이 터졌다. 함께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이더니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는 이리될 줄 몰랐습니다….”

“내가 그대의 아비를 어찌 생각하는지 몰랐습니까? 비씨의 아비가 어째서 비씨를 궁으로 보냈는지 정녕 알지 못했습니까?”

숨이 꽉 막히는 듯한 불쾌한 느낌에 은재는 숨을 헉헉거리며 눈물을 쏟았다. 차마 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형제의 안위가 마음에 걸려 은재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고개만 떨궜다. 그러자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강은 그 눈물을 보면서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은재를 더 서럽게 했다.

“비씨의 아비는 비씨를 정치적 수로 이용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니긴요. 김윤덕은 그대가 갓 태어났을 적 현천으로 보냈던 자입니다. 그런 매정한 이가 그대를 왜 천양에 두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합환했을 적, 그때 김윤덕은 패를 쥐었습니다. 하여 그대를 현천으로 보내지 않았지요. 내가 다시 천양으로 돌아왔을 적, 아비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제 아비를 날조하지 마십시오….”

꺼내 놓은 답과는 다르게 은재는 알고 있었다. 아비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비가 저를 행랑채에 기거하는 몸종보다도 멸시하고 혐오했다는 것을 보았고, 느꼈었다. 그랬던 아비의 모습이 달라진 건 세준이 돌아왔을 때였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을 땐 강과 재회 했을 적이었다.

“아닙니다…. 아버님께서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은재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아비의 모습을 거짓으로 꾸며 낼 수 없었다. 그저 아비가 저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에 속으로 기뻐했던 저 자신이 애처로울 뿐이었다.

“그대가 중전의 자리에 오르면 김윤덕은 필시 왕실과 조정을 기만하려 들 것입니다. 하여 그러기 전에 내 손으로 내쳐야 했습니다.”

은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쉬어지지 않는 숨을 가까스로 내쉬고 들이마시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입에 머금었다. 바깥으로 꺼내고 싶지 않아 주저하는 말도 함께 머금고 다시 눈을 떠 강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더는 따뜻함을 느낄 수 없는 강의 눈빛을 마주 보며 은재는 숨을 터뜨렸다. 마음이 변한 것일까, 별궁에서 지내는 동안 오롯이 강을 생각했던 마음이 다시금 은재의 가슴속에 둥둥 떠다녔다. 은재는 결심했다는 듯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제가 궁궐을 나가겠습니다.”

주저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뭐라 했습니까?”

“궁궐에서 나가겠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강은 제 눈빛이 매서워진 것도 모르고 그 차가운 눈으로 은재를 보았다. 모든 결단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것이었지만, 저를 떠나겠다는 은재는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몸뚱이로 들이닥친 충격이 심했다.

“안 됩니다.”

“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뜻을 물러 주십시오.”

은재는 조정에서 보았던 대신들처럼 바닥에 엎드렸다. 그런 은재를 바라보는 강의 시선은 더욱더 싸늘해져 갔다.

“제가 나간다면 아버님과 형님께서 조정과 왕실을 능멸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나가겠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운 것인가. 아비라는 작자가 저에게 한 짓을 생각한다면 유배 정도는 약한 벌이라고 강은 생각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이 궁궐로 들어와서는 안 됐다는 내 말을 잊었습니까? 그때 내가 그대에게 준 기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살에 와닿은 매정한 말이 살갗을 할퀴는 것 같았다. 창자가 꼬이는 듯한 통증에 은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멈췄던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명치에 자리 잡기 시작한 죄책감으로 세준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조차 감히 할 수 없었던 은재는 짙은 설움을 잇새로 흘려보냈다.

“증오합니다….”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강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제 앞에 주저앉은 은재를 일으키는 것도 하지 않았고, 마음을 달래는 것 또한 하지 않았다. 저의 마음도 아프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은재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또한 내보이지 않았다.

“나리를 마음에 담았던 저 자신이 미치도록 싫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마음에 품지 않았을 것입니다….”

꽉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헛숨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강은 은재의 마음에 자리 잡은 원망을 보았다. 화살을 쏘듯 살을 뚫고 심장을 쿡, 하고 찌른 그 원망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대의 연심이 이렇게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하나 어찌합니까?”

지금껏 의도하지 않았지만, 강은 적나라하게 차가운 시선을 은재에게 내보였다. 제가 느낀 실망감을 보라는 듯 은재를 쏘아보았다. 이내 들린 얼굴에 담긴 경멸을 보며 조소하는 듯 웃음을 떠올렸다.

“모두가 그대의 복중에 왕손이 자리 잡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왕손이 건강하게 태어나기 전까지 그대를 이곳에서 내보낼 수 없습니다. 궁 밖으로 나가는 일에 관한 이야기는 차후에 다시 하지요.”

허탈한 눈길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재에게로 향할 줄 알았던 발길은 더없이 매정한 미움을 품고 은재에게서 멀어졌다.

임금을 배종하는 행렬이 그곳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울음소리가 편전 안을 가득 메웠다.

뒤늦게 편전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상궁은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고 있는 처참한 모습의 은재를 보고는 저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이리하시면 복중의 아기씨께서도 힘드시옵니다.”

상궁이 부축하는 손길에 이끌려 윗몸을 일으켰지만, 칼로 배를 쑤시는 듯한 통증에 은재의 등이 다시 굽어졌다. 울음과 함께 섞여 나오는 신음을 예사롭지 않게 본 상궁이 바닥으로 기울어진 은재를 부둥켜안았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배가….”

난생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었다. 숨을 내쉬는 것마저도 아파 덜컥 겁이 났다. 무엇보다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잘못될까 싶어 무서웠다.

신음을 토해 내던 은재가 다시 몸을 둥글게 말고 끙끙거리며 앓았다.

“마마!”

앓는 소리에 상궁이 급하게 은재를 불렀지만,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몸뚱이에서 힘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은재가 상궁의 품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거기 누구 없느냐!”

상궁의 외침이 바깥으로 튀어 나가자 복도에 있던 내관과 나인들이 안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왔다.

“어서! 홍운궁으로 모셔라. 너는 내의원으로 가서 어의를 모시고 오너라!”

상궁의 진두지휘로 내관과 나인들이 움직였다. 진땀을 흘리던 상궁은 후일이 두려워졌다. 만일 복중 아기씨가 잘못되는 날에는 저의 목숨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며 내관의 등에 업힌 은재의 뒤를 따랐다.

* * *

“비씨 마마께서 산모가 접하면 안 되는 약재가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곁에 있기 위해 스스로 걸음을 내디뎠던 이가 바로 은재였다. 그러나 은재가 저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는 사실이 강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상선은 곁에 있는 임금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전의 바닥에 엎드린 나인에게 물었다.

“하여 어찌하였느냐.”

시종일관 임금의 눈치를 보던 나인이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답했다.

“산모가 접하면 안 되는 약재라 함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소인의 손으로 어찌 복중 아기씨를 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소인은 약재에 눈이 어두워 그런 것을 잘 알지 못한다고 고하였습니다.”

상선의 눈길이 임금에게로 향했고, 하얗게 질린 임금의 낯빛을 확인한 상선은 그대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사실 여부를 살피오리까…?”

임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매서운 눈으로 한곳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설령 그곳에 있던 나인을 그리 바라보았다고 해도 그곳에서 임금을 탓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선은 마음을 졸였다. 임금의 입에서 어떤 명이 나온다 해도 그것을 막을 자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또다시 궁궐에 비극이 찾아오리라 예견한 탓이었다.

“그리 들어오지 못해 안달 내던 궁궐이지 않던가.”

강이 작게 중얼거렸다.

‘모두가 그대의 복중에 왕손이 자리 잡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왕손이 건강하게 태어나기 전까지 그대를 이곳에서 내보낼 수 없습니다. 궁 밖으로 나가는 일에 관한 이야기는 차후에 다시 하지요.’

오롯이 제 귀로 들은 것에 현혹되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강이었다. 강은 은재를 바로 보지 않았다. 은재를 살피려고 하지 않았다.

이곳으로 은재를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애썼던 지난날을 모두 잊어버린 듯 강은 분노에 휩싸여 천천히 증오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리도 악독한 수를 써서… 내 곁을 떠나겠다…?”

곧 강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 비씨가 왕손을 잃었다면… 원하는 대로 비씨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해야지.”

강의 분노는 은재에게 향했다. 그 분노가 순순히 은재의 손을 놓지 않으리라는 걸 강은 잘 알고 있었다.

미련이 없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불구덩이와 다름없는 궁궐에 은재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역시도 거짓이었다.

이 악독한 곳에 어찌 저를 데리고 왔냐는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은재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곳에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겼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 두었던 추악한 본심이 살판났다는 듯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은재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눈에 잡힌 것은 강이었다. 은재는 강을 바라보았다.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강을 마주 보았다.

“그리 궁궐에서 나가고 싶었습니까?”

차게 식은 목소리를 들으며 은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나가라고 할 땐 있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으라고 하니 나가겠다 하고. 도통 그대의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찡해지는 코끝을 느꼈다.

“그러나 왕손을 잃었다 해도… 이제는 내가 그대를 보낼 수 없습니다.”

은재는 몸을 도륙하는 듯한 고통에 정신을 차리고 잃기를 반복하며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기억했다. 저를 원망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대를 궁궐에 들였다는 명분으로 우상을 내쳤으니, 그대가 궁궐에서 나가게 된다면 우상을 다시 복권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싸늘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계속해서 마주할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설움을 삼키며 은재는 강에게 맞닿아 있던 고개를 돌렸다.

“원망하려거든 하세요. 나 역시도 그대를 원망하며 살 것입니다.”

강은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씨를… 아니, 이제 비씨가 아니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던 강은 매정하게 발길을 돌렸다.

“이자의 거처를 월정당으로 옮겨라.”

더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은재를 흘깃거리고는 임금은 더없이 무정한 걸음으로 은재에게서 멀어져 갔다.

임금의 명을 받기 위해 머물렀던 궁인들만이 그곳에 작게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를 귀담아들었다. 하루아침에 운명이 달라진 은재를 보는 눈길에는 연민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월정당. 그리고 더는 비씨가 아니게 된 운명.

그러나 궁궐에 영원히 갇혀 버리게 된 운명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은 얼마 가지 않아 궁궐에서도 가장 으슥하고 구석진 곳에 머무는 이를 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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