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잎, 흩날리는 2-2장.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上) (5/9)

꽃잎, 흩날리는 2

목차

2장.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上)

2장.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中)

2장.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下)

2장. 월정당 떠꺼머리 도령 (上)

소문으로 도성이 들썩거리던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여겼지만, 짧은 외출에서 돌아온 꺽새가 전한 말로 세준은 충격에 휩싸였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던 세준은 아비의 방으로 건너갔다.

아비는 점잖고 학식이 높은 선비 그 자체였다. 입은 옷의 넓은 소매는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수려한 자태를 뽐내며 흔들거렸다. 세준은 김윤덕의 맞은편에 앉아 말할 찰나를 기다렸다.

“어인 일이더냐.”

김윤덕의 시선은 줄곧 책에 꽂혀 있었다. 아비의 얼굴을 바라보는 세준의 기색은 편치도, 밝지도 않았다. 끝끝내 세준은 하고 싶은 말을 꺼내야 했다.

“은재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윤덕은 평온했다. 우애가 남다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늘 순종하던 아들이 저에게 직설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놀랄 일이 아니라서 온화하게 응시했다.

“때가 되면 좋은 인연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품고 있으려고 한다.”

세준의 눈살이 살짝 움찔거렸다.

세준은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저와 함께 살지 못하는 아우에 대해 물었을 때도, 굳이 현천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천양에 데리고 있을 때도 알았다.

아비가 아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현천으로 보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세준은 김윤덕의 눈치를 살폈다.

“은재가 말은 하지 않지만, 현천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아비는 그 제안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듯했다.

“현천으로 가면 더 좋은 수가 있더냐. 이곳에서 연을 찾는 게 그 아이에게도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난 일로 은재가 많이 지쳐 보입니다.”

“정혼자를 잃어 상심이 클 터. 세준이 네가 사촌 아우를 잘 위로해 주렴. 아비가 곧바로 그 아이에게 걸맞은 집안을 알아보겠다.”

사촌 아우라…. 아비를 바라보는 세준의 눈빛에 의심이 깃들었다.

세준이 은재를 꺼낸 것은 진정으로 은재를 위한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김윤덕은 은재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김윤덕은 언제나, 늘 그랬었다. 세준에게는 그러지 않아도, 은재에게는 명확하게 선을 그어 놓았다. 은재의 행복 따위에는 안중이 없었다.

그렇기에 세준은 아비의 반응에 놀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소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아비는 네가 있어 든든하다.”

세준은 은재에 대한 애석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마땅했다. 이 범랑에서 부모를 원망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됐다. 그만큼 효(孝)는 선비에게는 중요한 덕목이었으니 천륜은 함부로 끊을 수도, 이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세준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그리고 문지방을 넘기 무섭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아비 또한 천륜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선비였다. 그러나 아비는 그 무거운 것을 가벼이 여겼다. 그런 아비에게 존경을 품을 수 있을까.

의문투성이였다. 아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제가 과연 은재를 지킬 수 있을까, 싶었다.

* * *

참극은 궁궐에 기이한 바람을 만들어 냈다.

그 수상한 바람에 시달린 중전은 열 달 동안 품었던 아이가 세상으로 나오기 무섭게 자신의 동아줄인 국구에게 아이를 맡겼다.

중전의 동아줄은 강했다. 세상 어느 풍파에 시달려도 낡고 삭지를 않았다.

비단 중전의 동아줄만 경계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현천도 제 부인의 동아줄이었다.

김윤덕은 어미의 간절함을 몰랐다. 혈육의 애달픔은 세준에게만 느꼈고, 그마저도 세준이 가문의 등불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윤덕에게는 그만큼 혈육이 끊기도 쉽고, 이어 붙이기도 쉬운 것이었다.

‘선대 임금 중 평인이었던 임금이 있었습니까. 지금의 주상께옵서도 양인이십니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음양의 조화, 우주의 섭리는 범랑의 군주인 임금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김윤덕은 가문을 위해 사는 사내였다.

올곧게 뻗은 제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자가 있으면 응당 목을 쳐 냈고, 저를 붙잡으려는 자가 있으면 팔을 뿌리쳤다. 아비라 여겼던 자도 그리 버렸고, 아우라 불러야 했던 이도 그리 쳐 냈다.

그게 지금의 김윤덕을 만들었다.

‘범랑은 파국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범랑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김윤덕의 아우, 김윤선은 보잘것없는 가문을 등에 업고 원대한 뜻을 품었다.

대의를 위하여 주상에게 읍소하기로 한 유생들은 안타깝게도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도태된 양반 집안의 자손들이었고, 그 속에는 산림들이라는 조정에 치를 떨고 산으로 숨어든 비겁자들이 섞여 있었다.

김윤덕은 그들을 비웃었다. 당연히 그들이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대의는, 목적이 뚜렷한 그 뜻은 주상과 저의 뜻에 비하면 한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범랑은 네 생각대로 그리 허술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조정 대신들이 입과 귀를 틀어막고 있다 해서 백성들이 모를 것 같았습니까. 이미 범랑은 망징패조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게 평인인 세자 저하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만일 모르는 이가 있다면 우리가 알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자가 평인이라는 점을 앞세워 목에 핏줄을 세웠다.

사실 성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선대의 임금이 양인이었던 것은 그저 궁궐에 휘몰아치는 음기를 잠재우기 위한 미신에 불과했다.

평인도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이었고, 양인이 내쳐질 수 있는 세상이었다.

‘주상의 적장자가 세자의 자리에 앉는 건 이 땅에 범랑이 세워진 후로 지금까지 지켜 온 국법이다. 지엄한 국법 아래에 음양의 조화가 있는 것이지. 섭리 따위가 국법 위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다.’

김윤덕은 국법의 편에 섰다. 그것은 임금의 편에 서는 것과 다름없었다. 법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우매했고, 법을 품지 못하는 자들은 역적과 다르지 않았다.

‘형님, 지금은 당파를 논하지 않고 힘을 합해야 할 때입니다. 제발 우리의 범랑을 위해서 마음을 돌려 주십시오.’

‘우리의 범랑이라…. 그러나 너는 범랑이 패망의 길을 걷길 바라는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의 눈에는 주상이 무능한 존재인 것 같으냐.’

그때 아우였던 윤선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았었다. 사나운 눈초리로 올곧은 저의 마음을 의심했다.

그렇기에 김윤덕은 마음을 확고히 다졌다. 충심으로 뭉친 마음에는 신념이 가득했다.

저의 신념은 보잘것없는 조무래기들의 신념과는 달리 강직했다.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았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너희가 바라본 범랑이 정녕 패망을 앞둔 듯하더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패망을 논하다니. 과연 너희 같은 인물들에게 국정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임금은 무능한 게 맞습니다. 어느 임금이 징조를 보고도 모른 척할 수 있답니까. 주상께옵서 형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시니, 우리라도 나서서 전하의 시야를 밝혀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임금의 무능함을 외치는 윤선을 앞에 두고 김윤덕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지금도 그때 마셨던 짙은 녹차의 향내가 선명했다.

‘우매하다. 젊은 혈기를 가지고 뜻을 품은 것은 좋았지만, 가진 게 아무것도 없지. 너희들은 권력 앞에서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샘을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너희들이 보잘것없는 게 주상의 탓 같더냐. 세상을 바꾸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모여 권세와 영광 앞에서 너희의 숭고함을 뻗대면 권력이 너희의 것이 될 듯싶었느냐.’

‘저희는 그런 속물적인 마음을 품고 모인 게 아닙니다!’

‘범랑을 바꾸고 싶었다면 몽상을 꾸며 풍류를 즐길 시간에 정정당당하게 권력을 손에 쥐었어야지.’

김윤덕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윤선을 바라보았었다.

‘너희들과 같은 이들을 두고 역적이라고 한다.’

아우의 얼굴에 떠오른 수치심을 보며 김윤덕은 비웃었다.

그들의 하찮은 신념을 비웃음으로 짓밟았다. 꿈틀대는 지렁이는 튀어 오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말라 비틀어 죽을 것이었다.

‘형님!’

윤선은 그리 당하고만 있을 이가 아니었다.

차라리 김윤덕은 윤선이 저에게 달려들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혈육을 정정당당하게 끊어 낼 수 있는 명분을 윤선이 만들길 바랐다.

그러나 튀어 올랐던 윤선은 잠잠했다. 더 앞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멈춘 곳에서 좌절을 느꼈을 것이었다.

‘두고 보십시오.’

‘두고 볼 게 아니다. 넌 결국 네가 가지지 못한 권력에 의해 처절하게 짓밟혀 죽을 것이다.’

‘저는 반드시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썩어 빠진 가문을 제 손으로 버리겠습니다.’

자긍심은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자긍심만이 위대했다. 포부와 혈기만 믿고 달려드는 자긍심은 쉽게 지치고 쉽게 무너졌다.

김윤덕은 윤선의 자긍심을 멸시하고 무시했다.

‘처음부터 내 가문에는 네가 있을 자리가 없었다.’

그길로 집에서 나간 윤선은 현천으로 향했다고 했다.

김윤덕이 윤선을 다시 조우한 곳은 의금부의 형장이었다. 그곳에는 임금도 있었다. 현천도 있었고, 공진포와 그들의 대의도 함께 있었다.

‘대역 죄인 김윤선을 율에 의하여 능지처참하라.’

살점이 튀고 피가 흘러내려 눅눅한 그곳에서 그들의 대의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제 할아비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었었다.

김윤덕은 제 두 눈으로 보아 믿었다.

그들의 대의는 하찮았다. 자신을 품었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에 그들의 대의는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가려고 했다. 그들의 대의는 부질없고 미약하며 절망이었다.

‘형님의 손에 지금의 범랑과 앞으로의 범랑이 망가진 것입니다. 저는 이리 불명예를 떠안고 죽지만, 형님을 지켜볼 것입니다.’

김윤덕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죽음을 앞둔 역적을 지긋이 바라만 보았다.

‘저는 죽어서도 이곳에 남아 범랑의 희망을 끝까지 지켜 낼 겁니다.’

김윤덕은 역학이니, 속설이니 항간에서 떠도는 미신 따위를 믿지 않았다. 유교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김윤덕도 그에 따랐을 뿐이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일은 생생했다. 그 이전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피를 쏟아 내며 죽은 이들의 원념은 그들의 살점이 썩고, 짐승의 먹이가 되는 순간 사라졌다고 여겼다.

모순이었다.

김윤덕은 피가 묻은 손으로 패를 쥐고 있었다. 때를 기다리는 마음이 그들과 달랐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원하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 모순을 우려할 법도 했으나, 김윤덕은 그러지 않았다.

김윤덕은 어떻게든 강을 용상 위에 올릴 생각이었다.

나의 가문을 위하여. 나로 인하여 시작된 나의 가문을 위하여.

죽어 나간 이들의 이상이 아닌, 저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오직 제가 품은 뜻만이 원대하다 여겼다.

김윤덕은 뼛속까지 가문을 위해 사는 사내였고, 그런 그에게 임금과 나눈 신의와 의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 * *

사간원에서 궁궐로 향하는 걸음은 분주했다. 수문군에게 궐 출입패를 보인 뒤 웅장한 대문을 넘어선 세준은 얼마 가지 못해 발을 멈췄다.

여섯 보,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였다. 그곳에 서 있는 이는 따로 본 적이 없고 늘 강과 함께 보았었다. 반갑게 인사를 할 만도 했지만, 섣불리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서로 그리 쳐다보기만 했다.

전에도, 지금도 같았다.

그의 곁에 강이 없는 모습이 어색했는지 세준은 우물쭈물하다가 뒤늦게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저도 한 발 다가올 수 있었는데도 세준의 맞은편에 있던 부경은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세준이 내뱉은 인사말은 간결했다. 맞받아치는 방법을 모르는 이처럼 부경은 고개만 꾸벅거렸다. 건넨 인사가 침묵으로 돌아온 게 머쓱했는지 세준이 슬쩍 웃음을 지었다.

“좌익위로 승차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머쓱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고 내뱉은 말이었다. 대답하는 것 대신 고개를 까닥거리는 게 더 편하다는 듯 부경은 입을 꾹 다물고 행동으로 보였다. 그마저도 세준을 멋쩍게 만들었다.

“혹… 대군의 소식을 아시는지요.”

두 사람의 중간에는 늘 강이 있었다.

강이라는 연결 고리가 없었다면 두 사람에게도 접점이 없었다. 소란스러웠던 강의 부재가 아쉬운 건 세준뿐만이 아니었다. 저절로 닫힌 입을 떼지 못한 부경도 이 순간 강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모릅니다.”

일관된 침묵이 깨지자 세준이 피식하고 웃었다. 원래도 그리 과묵한 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늘 한결같음에 웃음이 나왔다.

세준의 주도로 이어지던 대화가 끝날 때였다. 어떻게든 한 마디를 더 내뱉어 보겠다는 듯 세준의 입이 떨어졌다.

“대군의 소식을 들으시면 제게도 알려 주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봇물 터지듯 뒤늦게 터진 입에 세준은 생글거렸다.

“그럼 저는 일이 바빠 먼저 가 보겠습니다.”

부경은 또다시 말 대신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리고 멀었던 거리가 좁혀지고 다시 멀어지던 찰나, 부경의 발길이 틀어지며 저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준이 완전히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자, 부경 또한 그제야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하….”

제가 나가야 하는 대문을 바라보며 부경은 무거운 한숨을 꺼내 놓았다. 그저 그런 한숨인지, 혹은 후회이거나 아쉬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이어 한숨을 내뱉던 부경은 가까스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었다.

* * *

도성으로 돌아온 강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궁궐이었다.

허름한 차림새인 강을 보고 의심을 하던 수문군은 강이 내민 옥패를 보는 순간 깍듯이 예를 갖추고 길을 터 주었다. 마치 암행어사를 연상케 하는 옷차림은 궁궐 내로 들어서자 더 많은 이들의 눈길이 강에게로 향하게 했다.

궐내를 걷는 강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동궁에 들어 강이 마주한 것은 이부자리에 누워 있는 소명이었다.

소명은 어둠이 짙게 깔린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등창의 고통으로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입술이 부르트고 손톱 끝은 갈라져 있었다.

홀쭉해진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이불 속에 감춰져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육체 또한 얼굴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저하께서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세자의 곁을 지키고 있던 지밀 내관이 말했다. 강은 그 말에 섞인 위로를 알아차렸다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못난 아우입니다. 저하께서 이리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신 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저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강은 거친 살갗만 남은 소명의 손을 붙잡고 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뚝뚝 흘리는 눈물을 알아 달라는 듯 울음을 꺼냈지만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고, 약에 취해 잠이 든 소명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명경전(明鏡殿) 내관입니다.”

장지문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의 손을 붙잡고 있던 강은 손을 내려놓았고, 지밀 내관은 세자의 손을 이불 속으로 감췄다.

궁궐에 많은 이들이 강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내관은 괜한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흐트러짐 하나 없게 이불을 정리하고 장지문으로 향했다.

숙덕거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릴 때도 강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자신의 연약함이 부끄러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가 세자에게 느끼는 애달픔마저도 가식으로 변절시킬 이들의 이목을 경계할 뿐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척에서 들리는 걸음 소리가 멎자, 말을 꺼내기 전 내관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대군 대감, 주상 전하께옵서 명경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강은 평소에도 임금을 알현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 강의 속내를 알았지만 내관의 신분으로 왕명을 무시하거나 거스를 수 없었다. 강이 끝끝내 가지 않는다면 제대로 명을 전하지 않은 제 목숨이 아슬아슬해질 것이었음에도 내관은 강을 몰아세울 수 없었다.

한동안 침묵으로 방 안이 조용했다. 줄곧 세자만 응시하던 강은 미련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다시 오겠다.”

명경전으로 갈 것이라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지만, 내관은 성심성의껏 배웅에 나섰다. 동궁전 밖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선 강이 다시금 세자가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내관은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주상 전하, 효원 대군 드셨습니다.”

내관이 고했다.

명경전 복도에 서 있던 강은 문이 열리자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곳에는 임금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강은 곧바로 임금에게 예를 갖췄다.

강의 옷차림새에 기함한 영의정은 임금의 눈치를 보았다. 괴이한 모습에 다시금 영의정이 눈길이 강에게로 향했다.

강에겐 눈짓조차 주지 않는 임금이 손에는 상소를 들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라.”

부복을 마친 강은 영의정과 간단하게 목례를 나눴다. 강은 불안을 품은 영의정을 보았다. 영의정에게는 체통 없는 옷차림이나 부자간의 냉랭함이 낯설다 해도 강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가 불안에 떠는 이유는 대충 알겠으나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서 눈길을 떼었다.

“부르셨나이까.”

“어인 일로 대군이 궐에 들었느냐.”

임금은 강에게는 공을 우선시했고, 세자에게는 사를 우선시했다.

임금의 선은 철저했다. 임금은 강이 궐에 드는 걸 싫어했다. 궐에 들어 낯을 비치지 않았다고 호통쳤다. 낯을 비치면 어느 안전에 얼굴을 들이미냐며 비난했다.

불효는 불충보다 못난 것이고, 불충은 불효보다 악한 것이었다. 자식도, 신하도 아닌 강은 못난 악인이었다. 그럼에도 아비이자 임금인 그가 가진 권력에 의해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달갑지 않은 아들의 존재는 늘 그렇게 다른 이들의 눈에도 띄었다.

지금도 그곳에 함께 있는 영의정이 강을 보고 있었다. 강은 낯부끄럽지 않았고, 자존심도 상하지 않았다. 저들이 섬기는 임금의 본모습을 똑똑히 보라고 오히려 임금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세자 저하의 예후가 좋지 않다 들어 입궐하였사옵니다.”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단박에 따라붙은 말에 강의 기색이 어두워졌다.

“저하께서는 소신의….”

강은 다급히 말을 덧붙였지만, 임금은 듣기 싫다는 듯 강의 뜻을 강력하게 막아 세웠다. 들린 손에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은 강의 오기를 자극할 뿐이었다.

“네게도 기회가 온 듯싶더냐.”

임금은 강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마주하는 것조차도 질색이라는 듯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그런 아비가 원망스러웠겠지만, 강은 꿋꿋하게 임금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부자를 지켜보는 영의정이 탄식을 내뱉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냉랭했다.

“그리 여긴 적 없사옵니다.”

“기회를 잡으려 하지 말아라. 너로 인하여 죽어 나간 이들을 생각한다면 틈을 봐서는 안 된다. 하던 대로 조용히 사는 게 마땅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강이 뚝, 뚝, 끊어지는 말을 내뱉었다.

그 속에 깃든 감정을 알아듣지 못할 임금이 아니었다. 그제야 임금은 상소에 닿아 있던 눈길을 들어 강을 보았다.

싸늘하고 신랄한 눈빛이었다. 단 일말의 애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 그것은 아비가 자식에게 절대로 내보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런 시국에는 더더욱 궁궐에 들어서는 안 됐다.”

영의정은 속으로 뜨악했다. 강을 노여워하는 임금의 적나라한 눈빛은 그렇다 쳐도, 단칼에 아들을 쳐 내는 모습이 비관적으로 다가왔다.

영의정은 슬며시 제 곁에 서 있는 강을 힐끔거렸다. 바들바들 떠는 손이 눈에 잡히자 아차, 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는 그대로 나서지 않고 침묵했다. 집안 문제는 집안에서 해결하게 두는 게 마땅한 일이었다.

“네가 다녀간 후 세자의 병환이 심해진다면 모두가 네 탓을 할 것이다.”

“늘 그랬듯 소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소신이 무엇이라도 해야 하옵니까?”

강은 입꼬리를 올리며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임금은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 적개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강을 응시했다.

“소신이 명분을 만들어야 했습니까? 소신이 그러지 않아서 궁궐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소신에게 책임을 전가하시는 것이옵니까?”

“닥치지 못할까!”

“전하께옵서 소신에게 바라는 게 있으신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그 흔한 약재라도 하나 들고 오는 것인데…. 소신이 참으로 미흡했사옵니다.”

임금은 격노로 강을 궁지로 몰고 가려고 했지만, 강은 저를 떠미는 손길에 놀아나지 않았다. 말로 주고 되로 받게 된 것은 임금이었다.

임금에게는 잔혹한 과거가 존재했다. 그것은 임금이 용상에 오른 이후 그 누구도 감히 꺼낼 수 없는 것이었지만, 강은 임금의 과거를 과감하게 꺼내 들었다.

임금은 죽어서도 약재와 탕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군 대감.”

분위기가 원하는 대로 점잖게 이어지지 않자 집안일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이 불쑥 끼어들었다. 강의 고개가 영의정에게로 향했다.

“궁궐은 워낙 보는 눈이 많고, 듣는 귀가 많은 곳입니다.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라는 전하의 심중을 헤아리십시오.”

“그런 깊은 심중이셨군요. 하나 소신에게는 그리 들리지 않아서 말입니다.”

“당장 나가라! 내 눈앞에서 썩 꺼져라!”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임금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분노한 마음이 달달 떨리는 손으로 드러났다. 강은 그곳에 시립한 채 예를 갖췄다.

“소신,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임금은 강이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에도 노여움을 내보였다. 임금의 노여움은 결국 패배를 뜻했다.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영의정은 그리 생각했다.

강이 내전에서 물러간 후에도 그곳에는 침묵이 도사렸다. 감히 먼저 입을 열 수 없었던 영의정은 고개를 낮추고 침묵을 받아들였다. 얼마 가지 않아 임금이 먼저 운을 뗄 것이었다.

“강은 위선이고, 오만이다.”

침묵하던 영의정 앞으로 신랄한 비판이 떨어졌다. 영의정은 고개를 들었다.

“세자 저하의 예후가 좋지 않사옵니다. 대소 신료들이 동궁의 예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사온데, 전하께옵서 대군과 이리 척을 지신다면 종묘사직을 어찌 보존할 수 있겠나이까.”

“종묘사직? 이 자리는 저런 무지몽매한 이가 앉을 수 없다.”

“하오나 형판이….”

영의정은 김윤덕이 꺼냈던 수를 임금에게 피력하려고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저는 김윤덕의 뜻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는 바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날, 임금은 김윤덕의 수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김윤덕은 임금이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킬 기회를 말했었다. 그 기회를 놓친다면 임금은 시도 때도 없이 말을 바꾸는 허땜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었다.

‘효원 대군은 그 자리를 버틸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때 내치십시오.’

김윤덕은 강을 용상에 올리라고 종용했었고, 그 제안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모두를 강의 적으로 만들어 놓고 강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곧 경파의 파멸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김윤덕은 꿋꿋했다.

‘섣불리 결정하고 앉힐 수 없고, 섣불리 판단하여 내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스스로 내려가게끔 하셔야 하옵니다. 그리한다면 비난은 대군에게로 향할 것이옵니다. 만백성의 질타가 제 편이 하나 없는 조정에 선 대군에게로 꽂힐 것이옵니다.’

김윤덕의 종용에는 적으로 가득한 조정에서 강은 감히 군주로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의정의 생각은 달랐다. 강은 그리 약한 이가 아니었다.

‘만일 연파가 일어선다면 어찌할 것인가.’

영의정의 마음을 대변하듯 임금이 물었다. 그때도 김윤덕은 참으로 당당했다.

‘연파는 일어날 수 없사옵니다.’

‘경은 자신하는가?’

‘신은 그리 만들 생각이옵니다.’

김윤덕에 대한 임금의 신의는 높았다. 믿음 또한 남달랐다.

영의정은 그것을 보았고, 샘을 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영의정, 자신에게도 강단이 있었다. 아닌 건 아니었다.

김윤덕과 뜻을 합치지 못한 것, 그것이 어쩌면 분파의 시초가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김윤덕을 경계했다.

“형판의 수는 좋지 않사옵니다. 철칙대로 행하심이 마땅하옵니다.”

“과인의 철칙은 강을 뜻하지 않는다.”

“하면…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임금의 시선은 허공에 닿아 있었다. 영의정은 그런 임금을 주시했다.

“강이 이 자리에 오르지 못할 이유는 죽음이다.”

예상치 못한 답이라 영의정이 질겁하며 눈을 번쩍 떴다.

“저… 전하….”

“혼백으로 오를 수 없는 자리니… 그게 좋을 것이다.”

“부디… 그 성념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과인의 수는 이것이고, 이것이 과인에게는 좋은 수다. 형판의 수는 무모하다.”

영의정은 기함을 감추고 임금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 자리에 제가 아니라 김윤덕이 있어야 했다. 아비이기를 포기한 임금은 점점 더 과격하고 잔인해졌고, 그런 임금을 멈출 사람은 김윤덕뿐이리라.

“물러가라.”

영의정은 명에 따라 움직였다. 지금은 조용히 물러가지만, 후에 임금이 내릴 명을 어찌 따를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임금이 꾀한 거사의 책임이 저에게 돌아올까 싶어 걱정됐다.

그렇다고 아들을 죽이려는 아비를 말릴 재간이 영의정에게는 없었다.

명경전에서 나온 강은 먼 곳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당하관의 관복을 입은 이는 강에게는 익숙한 이였다. 그러나 강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강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던 그 또한 강에게 알은척을 하지 않았다. 반가운 기색이라도 내비칠 수 있었으나, 고개만 까닥거리는 게 다였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목을 감추고 숨소리를 낮춘 채 살아가고 있었고, 강은 그들에게 무심했다.

죄책감을 떠안고 있는 사람들의 마주침은 늘 그랬다. 서로를 위해 마땅한 일이었다. 합심하는 순간이 오면 또다시 이곳에 바람이 불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 그렇게 무심하게 서로를 지나쳐 갔다.

* * *

개금골에 자리를 잡은 부경은 입직을 위해 늦은 오후가 돼서야 집을 나섰다. 입궐하여 익위사 관청을 들러 수기를 작성하고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으로 향했다. 부경은 오늘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느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낮에 효원 대군이 드셨다지?”

동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중 두 번째 문을 넘던 부경의 귀에 세자익위사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문을 지키던 병사가 쉬어 갈 겸 말을 꺼냈지만, 하필이면 그 말을 부경이 들었으니 오늘은 병사의 운이 좋지 않은 듯했다.

“매번 동궁만 들렀다 나가시니 윗전의 원망을 많이 사셨지.”

“조정에 못 드는 대군일지라도 떨어지는 콩고물이 있을 텐데 말이야. 대전에 들어 주상께 알랑방귀를 뀌어도 모자랄 판국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알랑방귀만 뀌겠는가? 나였다면 아첨이라도 싸지를 걸세.”

그들의 대화가 끊긴 틈을 탄 부경이 두 사람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병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왔다 갔다고?”

“좌익위 나리!”

두 병사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부경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복했다.

“방금 떠들어 대던 것을 내 앞에서도 말해 보거라.”

“죄, 죄송합니다!”

그것을 보던 부경의 눈빛이 더욱더 싸해졌다.

“말해라.”

대쪽 같은 질문에 머리를 조아렸던 병사 하나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그가 사시나무 떨듯 이를 달달 떨며 말했다.

“효, 효원 대군 대감께서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오랜만에 대군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희들의 소임이 무엇이더냐.”

“계방 병사의 소임은… 동궁을 지키는 거, 것입니다.”

한심스럽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던 부경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을 풀었다. 검집째로 들고 병사들이 쓴 군모를 툭툭 치자, 그들의 머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가벼운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싶어 안달이라면 언제든 내게 말해라. 내가 너희의 입을 좌우로 쫙 찢어 주겠다.”

무자비한 말을 퍼붓는 부경은 한결같이 무심했지만, 부경을 보는 병사들의 눈에는 공포가 물들기 시작했다.

“하고 싶어 안달 내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을 터인데, 혹 원하느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두 병사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부경은 눈살을 찌푸리고 두 병사를 뒤로한 채 걸음을 떼었다.

동궁 내전으로 들어서던 부경은 내실로 들어가기 전 장지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부경은 세자를 보고 갔을 강의 마음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상심이 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른 아침이 되어 퇴궐을 앞둔 부경은 괜스레 마음이 조급했다. 강은 천양에 오길 싫어하면서도 한번 왔다 하면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다. 그런 강을 잘 알기에 마음이 급해졌을지도 모른다.

궁궐에서 나온 부경은 곧장 안수동으로 향했다. 간발의 차이로 강을 놓칠 것을 우려했기에 천천히 내디뎠던 걸음이 빨라졌다.

뜀박질과도 같은 걸음으로 안수동에 도착한 부경은 숨을 고른 뒤 대문을 부숴 버릴 작정으로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들겼다.

둔테를 긁는 빗장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곧 문 사이로 놀란 말복 아범의 얼굴이 보였다.

“계시는가.”

“예?”

의도를 알아차린 말복 아범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 그렇지 않아도 지금 나가시려고 채비를 하시는 중이십니다.”

강이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한 부경은 거침없이 문턱을 넘어섰다. 여느 때와 같은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말복 아범은 슬며시 웃음을 띠고 부경의 뒤를 따랐다.

큰 사랑채 뜨락에 선 부경이 말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부경은 돌계단을 올랐고, 디딤돌 위에 신을 벗고 누마루에 올랐다. 그리고 최고급 한지를 잘 발라 놓은 장지문 앞에서 멈췄다.

새삼스럽게 문을 열지 못하고 그곳에 서서 생각했다.

강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저를 혼자 천양에 남겨 두고 떠났던 이 년 전 일을 원망해야 할까. 아니면 제가 원하는 대로 저를 다시 세자익위사로 보내 준 것을 감사해야 할까.

장지문을 연 강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쳐들어오겠다는 기세가 너무 빨리 식어 버린 것 아닌가?”

그렇게나 보고 싶지 않았던 웃음을 보면서도 부경은 싫은 기색 하나 떠올리지 않았다.

“오랜만일세.”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인사는 부경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부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을 응시했다. 분명 제가 아는 강이 맞는데, 무엇인가가 달라진 것 같았다.

“자네의 그 짙은 눈빛이 그리웠던 참이었네. 자네가 날 마음에 두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내가 퍽 그리웠나 보군.”

강의 말에 부경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능청스러운 모습도 같았다. 뭐가 달라진 것일까.

“농담하실 때입니까?”

“내가 자네와 농담이나 나누지 무얼 하겠는가?”

부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감사하다, 그 무시무시한 궁궐에서 여전히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시답지 않은 안부라도 주고받아야 하나?”

강은 시시각각 변하는 부경의 표정을 보며 피식거렸다. 불쾌해하는 모습이 썩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뻔한 건 싫으니, 피차 민망할 만한 상황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네.”

부경은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생각으로 혼자 가신 것입니까.”

기어코 묻는 부경을 보며 강은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멀쩡히 살아 돌아왔고, 자네도 꽤 괜찮아 보이니 그건 덮어 두세.”

“자칫했다가는 위험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 글쎄 위험한 일도 없었대도. 사지가 멀쩡히 달라붙어 있지 않은가?”

농담조가 짙은 말임에도 부경은 웃지 않았다. 부경은 고지식한 사내였다. 그런 부경도 재미있었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였을 적이었던가?

강은 옛 시절이 못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떨어져 있던 사이 나에게 뭔가 특별한 감정이라도 생긴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당장 앞을 터 주시게.”

조금 전보다 부경의 표정이 험악했다. 강은 생글거리며 문 앞을 막고 있는 부경의 팔뚝을 살짝 밀어 냈다. 부경은 늘 그랬듯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났다.

“볼일이 있어 나갔다 올 테니 이곳에 있든, 자네의 집으로 돌아가든 알아서 하시게.”

말복 아범의 시중을 받는 강을 보며 부경이 눈을 번뜩였다. 강의 달라진 점을 찾은 것이었다.

강이 언제부터 저에게 격식을 차렸던가. 강의 하대에 익숙했던 부경은 조금이나마 철이 든 것일까 싶어 서둘러 강의 뒤를 쫓았다.

“어딜 가십니까?”

“내가 어딜 가건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자네는 이제 내 호위가 아니지 않은가.”

“대군.”

“내게서 벗어나니 뭔가 아쉬웠던 것이지? 분명 궁궐 안이 답답했을 터. 하나 이미 늦었네.”

강이 대문간 앞에 멈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부경과 강의 눈치를 보던 말복 아범이 문을 열고 배웅에 나섰다.

더는 강을 붙잡을 구실이 없었던 부경은 그곳에 남아 문간을 넘어서는 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 * *

“숙중문(熟仲門) 근처가 아니라, 운종가에 있는 지전이라고 하셨다.”

“아니라니까요. 분명 숙중문에 있는 지전에서 종이를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니래도.”

며칠 전 소문으로 된통 당했는데도 용천댁은 은재가 자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 도련님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럴 때일수록 움츠러들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뭐라 떠들건 당당하게 나가야 그네들이 도련님을 우습게 보지 않지요!’

용천댁의 시달림에 지고 만 세준은 결국 은재의 방으로 향했다. 꺽새는 용천댁의 주장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세준도 이긴 용천댁의 뜻을 기어이 받아들여야 했다.

세준의 부탁을 받은 은재는 옷을 갖춰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집 안으로 숨어들 것이라고 여겼던 걱정과는 달리 은재는 꽤 적극적이었다. 그런 은재가 이해되지 않았던 건 비단 꺽새뿐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집 밖으로 나와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제가 듣기로는 분명히 숙중문에 있는 지전에 다녀오라고 했는데, 별안간 은재가 운종가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인적이 드문 길에서 꺽새는 머리를 갸우뚱거리고는 제가 맞는다며 뻗대는 은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 이상, 걸음을 멈추고 고집을 부릴 은재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으니 너는 숙중문에 있는 지전으로 가고, 나는 운종가에 있는 지전으로 가면 되겠다. 오(午)시에 여기서 만나자꾸나.”

의심이 깃든 꺽새의 눈초리에 은재는 꺽새가 제 속내를 알아챌까 싶어 긴장했지만, 표정을 바꾸지는 않았다.

“서로의 말이 맞는다고 우기니, 각자 들은 대로 가 보는 게 합당하다.”

“그래도 어찌 도련님 혼자 가시게 합니까.”

“내가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천치더냐?”

꺽새가 기겁하며 두 손을 흔들어 댔다.

“예? 그런 것이 아니고요!”

“나는 이쪽으로 가겠다.”

그 틈을 탄 은재는 운종가로 향하는 길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는 저쪽으로 가거라.”

친절하게 꺽새가 가야 할 방향을 짚어 준 은재는 돌연 제가 갈 길로 몸을 틀었다.

꺽새는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점점 멀어져 가는 은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속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꺽새는 은재를 따르지 않았다.

운종가로 가겠다는 말과는 달리 은재의 발은 지강문 쪽으로 향했다. 지강문에 모인 수많은 인파에 은재는 얼굴을 가리려 갓의 앞부분을 짓누르고는 곧장 수문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양반이나 특별한 출입패를 든 자만 나갈 수 있는 곳으로 가 제 호패를 꺼내 보이자 수문군은 의심도 없이 은재가 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졸이던 은재는 지강문을 지나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하나의 난관을 넘었구나, 싶었다. 그곳에서 허투루 시간을 쓰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현천으로 가는 길목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찔레꽃이 피었던 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올 것이었다. 좁지만 사람들의 발이 닿은 만큼 길은 평평했다.

은재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 내내 숲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원하는 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도성 밖의 치안은 좋지 않습니다. 음인을 상대로 부도덕한 짓을 일삼는 왈패가 출몰한다고 하던데, 혹 그런 소문을 듣지 못한 것입니까?’

지금 와 생각하면 거짓이 분명한데도 능청스럽게 꾸며 말하던 이의 목소리가 얄밉기보단 그리울 뿐이었다.

은재는 피식 웃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경고를 잊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에 자란 수풀을 억척스럽게 걷어 내는 용감함을 보이기도 했다.

미끄러운 자갈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낯을 붉히는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은재는 그 험난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난관을 앞두고 있던 은재는 제 옷을 확인했다.

“이런….”

도포 자락에는 도깨비바늘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고, 무르팍은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넘어지면서 까진 손바닥은 붉었고, 손바닥에 묻은 지저분한 것을 대충 도포에 쓱쓱 닦느라 웃옷도 바지와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었다.

“주책없이 이게 뭐람.”

서둘러 바지의 먼지를 털고 도포를 털었다. 비뚤어진 갓을 바르게 쓰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큰 바위만 무난하게 오르면 곧 제가 그리 원했던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은재를 웃게 했다. 옷차림새를 단정히 하도록 했고, 제 키보다 높은 바위를 넘어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혹시라도 저를 덮쳐 올 실망감으로 마음을 상하거나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에 은재는 미끄러운 바위를 두 손으로 짚었다.

굴곡진 바위의 틈에 발을 디뎠다가 헛발질에 주르륵 미끄러지길 반복한 은재는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과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산길이 은재에게는 위협적이기만 했다. 그나마 바위를 오르는 게 제일 무난했다.

은재는 신을 벗어 바위 위로 던지고 버선을 마저 벗었다. 어떻게든 올라가고야 말겠다는 심보로 바위로 달려들자, 밑창이 단단한 신발을 신었을 때보다 바위에 오르는 게 수월했다. 마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긴 듯 산이 길을 터 주는 것 같았다.

기어코 바위 위에 올라선 은재는 제가 조금 전까지 씨름하던 곳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신이 나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무른 채 웃음을 짓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버선을 주워 신고는 신발을 집어 들었다.

찔레꽃이 피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곳에는 이제 막 싹이 움트고 있었다. 동그란 꽃망울은 조금 더 날씨가 따뜻했을 때 터지려는 듯 단단히 오므리고 있었고, 돋아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잎은 여리여리하기만 했다.

“너무 일찍 왔구나. 조금만 더 있다 올 것을….”

애먼 찔레꽃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던 은재는 아쉬움에 괜스레 미소를 지었다. 때에 맞춰 다시 오면 되겠구나. 그리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은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변한 게 하나 없구나.”

바람에 날아간 건이 걸렸던 나무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히게 하는 동굴도 모두 그대로였다. 달라진 게 하나 없는 그곳은 그날, 그 시간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단지 꽃이 피어나지 않았고, 함께했던 사람만 존재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저 좋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뒤늦게 후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설렘을 품고 왔던 제가 미련했다. 실망하지 않겠다던 다짐도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은재는 애써 설움을 삼켰다. 이깟 슬픔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날로부터 혼자 견뎠던 시간을 기억했다. 강해지려고 했던 노력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결국 당장 느끼는 감정에 휩쓸려 버릴 것이었다.

눈물을 뽑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자. 차라리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자.

휙 돌아선 발길에 솔잎의 싱그러운 향기가 밟혔다. 동그랗게 커진 눈에서 슬며시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강은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은재를 바라보았다. 잠시 맞추었던 눈에 담긴 슬픔에 능글맞은 말도, 천연덕스러운 웃음도 감히 떠올리지 못했다.

은재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마주친 눈빛은 조금 전과 달리 초연했다. 묵직한 감정을 숨긴 것일까. 열 보 정도 떨어진 거리를 은재가 망설임 없이 좁히고 있었다.

강은 은재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멋쩍었고, 민망했다. 미안했고, 면목이 없었다.

“으억!”

어디로든 갈 수 없는 꽃에게 다가오던 나비가 돌연 아래로 고꾸라지는 것을 보았다. 강은 넘어진 은재에게로 다가갔다.

암지에 고꾸라진 은재는 슬퍼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무심하지 않았고, 정답지도 않았다. 표정이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입을 뗐다.

“어찌 이리 무모합니까.”

은재는 단단한 돌덩이에 부딪힌 무릎이 아팠지만, 가슴이 벅차올라서 통증은 곧 희미해졌다.

떨어져 있던 시간의 간극을 모르는 이는 바닥을 딛고 있는 손을 잡아 상처가 생기지 않았나, 확인했다. 제 손을 맞잡은 그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은재는 꿀꺽 침을 삼켰다.

온기를 느끼며 무슨 말을 꺼낼지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낸 담담함과는 다르게 마음속에서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난리가 났다.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했고, 좋아서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제가 슬퍼하면 그가 속상해할 게 뻔해 그럴 수 없었고, 기뻐하면 그간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몰라줄 것 같아 웃을 수 없었다.

어쩌면 좋을까.

은재는 붙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떨어진 간격을 좁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을 끌어안았다. 절로 씰룩거리는 입꼬리는 나 몰라라 하고 넓은 어깨에 뺨을 기댔다.

생동감, 산 것의 느낌, 산 것의 숨소리. 숨이 꽉 막히는 것처럼 심장이 뛰어 댔다.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그가 내보이는 감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게 꿈이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꿈에 나오실 적마다 마음을 졸였습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까 봐…. 그게 꿈인지도 모르고 무서웠습니다.”

강은 그저 옅은 탄식을 내뱉었다.

은재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가만가만 속삭이는 목소리에 깃든 슬픔과 희열을 들었다.

저를 버리고 떠난 이를 잊지 못한 이를 안쓰럽게 여겼다. 그 억겁과 같은 시간을 홀로 견뎌 낸 이가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그 마음이 저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라, 함부로 받지도 못하는 주제에 강은 팔을 들어 은재를 얼싸안았다.

“지금도 꿈같습니다. 이곳에 계실 분이 아니신데…. 마치 허상을 보는 것 같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만져 보고 안아 보아도… 참인지 거짓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분히 노력했던, 지워 내려고 애썼던 저의 그리움까지 꺼내 놓으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꿈같다는 착각처럼 잠시만 이렇게 곁에 머물다 사라진다면 저를 끌어당긴 이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럼에도 살 것이었다.

함께할 수 없다면 그리 서로의 마음에 품고 있기라도 하자는 듯 강은 소심하게 굴었다.

“꿈이 아니지요?”

확인하려고 고개를 든 은재를 보며 강은 생글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리 은은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아 은재는 불안했다. 그러나 제 등에 닿은 손은 미련을 가진 듯 떨어지지 않아 아주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무슨 말씀이라도 해 보십시오….”

눈앞에 있는 이는 현실이 분명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보았던 이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저를 보며 미소를 떠올리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은재는 무서웠다. 잠이 깨면 흐려지던 꿈처럼 또다시 그를 잃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은재는 그의 몸통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가지 마십시오….”

울컥 설움이 치고 올라와 은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옷자락을 움켜쥔 손가락에 느껴지는 질감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꿈일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그가 자신의 곁에 머물러 주기만을 바랐다.

“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강은 이를 악물고 속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참았다.

살포시 숙인 고개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은재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지않아 마른 암지 위로 뚝뚝 떨어질 눈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꿈처럼 왔다 허무하게 가실 것이었으면… 차라리 오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눈은 뜨거웠고, 코는 시큰했다. 은재는 찡한 그 기분 나쁜 감각이 사라지면 눈물이 나올 것을 알았다. 쉬지 않고 떠드는 입처럼 눈도 제 할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은재는 눈물로 그를 붙잡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붙잡는다고 붙잡힐 이도 아니었다.

“아닙니다. 가십시오. 가셔도 됩니다…. 잠깐 스친 인연이 어찌 나리를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 쓰지 말고 가십시오.”

그리 말하면서도 은재는 잡은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제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떠나갈 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스러졌다. 그러나 뱉은 말이 있어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

허벅지의 남은 증표는 언젠간 사라질 것이었다. 그것으로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은재는 담담하게 포기를 택했다.

은재는 고개를 들어 강을 보았다. 놓아야 했지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옷을 놔주셔야 가지요.”

힐긋거리다 그의 시선이 저에게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가실 작정이셨습니까? 저는 어찌하라고…. 정녕 저를 두고 가실 것입니까?”

강은 잔잔하게 웃었다.

“보내는 마음이 어떤지 나는 모릅니다.”

맑은 눈동자가 저에게 닿길 바랐다. 그러나 저의 애타는 속은 모르는 듯 떨궈진 고개는 쉬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었기에, 남아 있는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이기적인 말이라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은재는 눈물이 핑 돌았다.

꽉 닫힌 입술이 서러움에 달달 떨리는 걸 두 눈으로 보아도 매몰차게 떠날 사람이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만 보내 줘야겠구나.

은재는 부여잡고 있던 옷을 놓았다. 그 순간, 강이 저에게서 멀어지는 은재의 손을 붙잡았다.

“많이 아팠습니까?”

강의 말에 은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픽하고 내뱉는 잔잔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많이 슬펐습니까?”

잔잔한 목소리로 나긋하게 물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며 강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는 많이 아프고 많이 슬펐습니다.”

강은 자신이 붙잡은 은재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벗어나려고 꿈틀거리면서도 저에게 머물고 싶어 갈망하는 손이었다. 그 모습마저도 서글펐다.

“나에게는 그대를 지킬 힘이 없었기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팠고, 슬펐습니다. 우리가 함께할 기회마저 멍청하게 빼앗긴 것 같아 나 자신에게도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애써 떠올렸던 웃음이 얼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대에게 내어 드릴 마음은 많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그대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강은 그저 자신이 붙잡은 은재의 손만 바라보았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용기를 손을 붙잡는 데 쓰고, 말을 꺼내는 데 써 버리자 마음속에는 공포와 두려움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강은 물불 가리지 않고 저에게 뛰어드는 은재가 두려웠다. 무모함이라면 이길 자가 없는 은재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제가 무예에는 소질이 없지만, 나리를 지켜 드릴 배짱은 있습니다….”

강은 기어이 고개를 들고 은재를 바라보았다. 줄곧 아래로 툭 떨어져 있을 것만 같았던 시선이 언제 제게 닿은 것인지, 강은 은재와 눈을 맞췄다.

붉어진 눈시울에서는 눈물이 샘솟지 않았다. 잔뜩 붉히기만 한 그 눈으로 웃고 있었다. 강의 입술 새에서 여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가 나리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우습게도 저를 향해 돌진하는 무모한 마음을 보고 있자니 용기라는 게 생기는 것 같았다. 지키고 싶었고,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함께 웃을 수 있길 바라고, 그 웃음을 영원히 저만 봤으면 했다.

“저는 나리께서 어딜 가셔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산으로 가자 하시면 산으로 갈 것이고, 바다로 가자 하시면 바다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저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강이 웃음을 툭 내뱉었다.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짓는 은재를 보며 강은 붙잡았던 손을 놓고 은재를 끌어안았다.

“어찌 이리 무모한 것입니까.”

“무모한 게 나쁜 것입니까?”

“나쁘지는 않지만, 그대의 안위가 걱정됩니다.”

“안위 따위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저는 그저….”

강의 품에 안긴 은재는 그의 어깨에 뺨을 댄 채 그를 꼭 끌어안았다.

“제 마음과 같지 않으십니까?”

강은 대답 대신 눈을 살며시 감았다.

“아니요. 나리께서도 저와 같으십니다.”

저의 품에 안긴 은재가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나리를 연모합니다.”

은재는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두려움을 알지 못했다.

저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저 역시도 넘어야 하는 산이 많았고, 그 산을 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은재는 강이 제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세상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을 강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버텼던 것처럼, 강은 은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자 명분이었다. 당연히 강과 함께라면 두려운 것도 다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저를 연모하시지요?”

강은 쉽사리 대답을 꺼내 놓지 않았다. 은재는 그 역시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이미 엿보았다. 그 마음이 저와 같다는 확신은 마주친 눈빛으로 얻을 수 있었다.

더는 무서울 게 없었다. 답을 듣지 못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연모합니다.”

듣지 못할 답이라고 여겼던 생각과 다르게 강은 자신의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꺼내 놓았다. 그게 좋아 은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렇다면 제게 그 마음을 보여 주십시오.”

“어떻게 보여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나리께서 생각하셔야지요.”

강은 조금 더 은재를 저에게로 당겼다. 완전히 강의 품에 안긴 은재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조잘조잘 떠들었다.

“저는 이미 제 마음을 보여 드렸습니다. 제 마음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정말 나와 함께 갈 것입니까?”

“예.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을 보면 나리와 저는 운명입니다. 그 누구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지요. 나리께서도 이제는 저를 피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책임지십시오.”

강은 제 왼쪽 손목에 자리 잡고 있는 증표를 떠올렸다. 붉게 불타는 꽃과 같은 합환 증표를 생각했다.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을 품고 있었으니, 응당 책임을 져야지요.”

은재는 조금 더 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물리는 손길에 강에게서 떨어져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어린 강의 눈을, 꿈에서도 그리웠던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강은 불그스레해진 뺨을 쓰다듬으며 점점 은재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잊고 있었던 그 감촉을 다시 느껴 보겠다는 듯 곧 두 사람의 숨결이 맞닿았다.

* * *

지강문에 도착한 은재의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앞섰던 강은 따라오지 않은 은재를 느끼며 걸음을 멈추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지강문을 넘어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각자 가야 할 곳으로 헤어져야 했기에, 뒤에서 느릿하게 걷는 이는 그것을 반기지 않는 듯했다.

“이러다 날이 지겠습니다. 몸종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긋한 목소리로 저를 달래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은재는 아쉬움만 가득했다. 게다가 이미 전적이 있었던 이가 아니던가. 무엇으로도 불안함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은재의 불안을 엿본 강은 피식거렸다. 그리고 제가 걸어온 만큼 멀어진 은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나 혼자 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떠나게 된다면 그땐 그대도 함께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도 걱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불안한 마음을 어찌 달랠 수 있겠습니까….”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을 수도 없으니 당연히 불안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돌아가야 합니다.”

은재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그 모습에 강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리 심통을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강은 은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까 싶었다. 살짝 당황한 얼굴로 은재를 뚫어지게 보던 강이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는 이제 정혼자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지만…. 저는 조금이라도 더 나리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맞닿은 손가락이 얼키설키 얽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감춰진 얼굴은 보지 않아도 붉게 타오르고 있을 터.

강은 피식거리다 손을 뻗어 은재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당황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파렴치한.”

굴러다니던 눈동자가 강에게 꽂힌 후 동그랗게 커졌다. 은재가 학을 떼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은 홍시의 빛깔과 견줄 수 있을 만큼 더 새빨갛게 타올랐다.

“저, 저는 파렴치한이 아닙니다! 그저 함께하고 싶다고 했을 뿐, 다른 것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것입니까!”

“꺼내지 않아도 훤히 보였지요. 내 그대의 숨겨진 음흉함을 보았습니다.”

은재는 황당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꿀꺽하고 침을 넘기는 순간마저도 감추지 못했다. 그걸 본 강이 씩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을 피해 은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을 감추고 뜨거워진 낯을 식혀 보려 갖은 애를 썼지만, 입술에 남아 있는 감각이 마음을 요란스럽게 만들었다.

“헤어짐이 아쉽다면 차라도 한잔하겠습니까? 집이 누추하지만, 그대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애먼 입술을 말아 문 은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녕 가지 않을 것입니까?”

능청스러운 물음에도 숙인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강이 손을 뻗었다. 손길이 닿기 직전 은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가겠습니다! 그러니… 이곳에는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강은 주변을 넓게 둘러보았다.

지강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움직이는 행인들은 모두 제각기 갈 길이 바빠 두 사람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강은 은재를 놀려 줄 작정으로 은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붉어진 뺨에 닿은 입술이 쪽, 소리를 내고 달아났다. 은재는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농익어 터져 버린 홍시처럼 금방이라도 얼굴이 펑하고 터질 것 같았다.

강을 따라 들어선 곳은 후원이었다.

땅을 파고 석회와 돌을 발라 만든 네모난 방지는 정자 바로 앞에 있었고, 그 안에서 잉어 몇 마리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방지 둘레에는 갖가지 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정자 가까운 곳에는 굴곡진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비싼 값을 하는 소나무에 샘이 난 듯 바로 옆에 심어진 왕벚나무는 흐드러지게 핀 하얀 꽃을 품고 있었다. 벚나무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꽃은 헤어질 시기가 되었다는 듯 잔바람에도 흩날렸고, 바람에 떠밀리듯 나뭇가지의 품에서 떠난 벚꽃은 네모난 방지로, 정자 안으로 흩어졌다.

강과 함께 후원을 거니는 동안 집안의 겸인이라 소개했던 말복 아범이 정자에 올라 빗자루로 바닥에 흩어진 꽃잎을 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보다 못한 강이 그만두라고 말하기 전까지 말복 아범은 야속한 꽃잎과 씨름을 했다.

“꽃잎이 날려 번잡스러우나, 이마저도 운치가 있지 않습니까?”

말복 아범이 내온 다과상을 서로의 앞에 두고 앉았을 즘이었다. 강이 자신의 찻잔에 떨어진 꽃잎을 내어 보였다.

“예, 아름답습니다. 그동안 이 귀한 풍경을 혼자 보셨군요.”

은재의 눈길이 소나무에서 강의 뒤쪽에 자리한 왕벚나무로 향했다. 강은 그저 피식 웃으며 입술에 닿은 찻잔을 기울였다.

은재는 강을 바라보았다. 제 다과상에 올라간 다기와는 사뭇 다른 강의 상차림을 유심히 보았다.

“그간 이 집에 진득하게 붙어 있었던 적이 있었어야지요. 나 역시도 때를 놓치는 일이 많아 보기 힘든 풍경입니다.”

강은 찻잔을 내려놓고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은재의 눈길이 자신의 손에 닿아 있는 것을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송화주입니다. 차를 음미하는 맛을 몰라 나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강의 손에 들린 하얀 주전자에는 만개한 연꽃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은재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그림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생전 마셔 보지도 않은 술을 달큼하다는 듯 넘기는 강을 보자 그 맛이 퍽 궁금해졌다.

호기심으로 말똥말똥해진 눈을 강이 응시했다. 대놓고 마셔 보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내가 훤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잔해 보시렵니까?”

은재는 김이 올라오는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저는 술을 입에 대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이 좋은 것을 왜 아직도 접해 보지 않았단 말입니까.”

감히 버릴 수는 없고, 단숨에 넘기기에는 뜨거운 찻물을 보던 그가 고개를 들고 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현천의 안 정승도, 천양의 형판도 이 좋은 술 대신 차를 즐기는 골양반들이었지요.”

은재가 눈을 끔벅이며 강이 내뱉은 말의 뜻을 곰곰이 되짚는 사이, 강은 자신이 마시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은재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형님께서도 술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접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맞아요. 택원 역시 골양반이었지요.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입니다.”

저에게로 뻗친 팔을 바라보았다. 은재는 제 앞에 놓인 다과상을 슬쩍 옆으로 밀어 내고 무릎걸음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강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방실방실 웃고 있는 강의 눈치를 슬쩍 보며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술맛을 모르는 문외한이라 감히 맛이 어떻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입 안에 가득 감도는 솔잎 향을 느끼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은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디서 부푼 자신감인지 은재는 술잔을 다시 강에게로 내밀었다.

“한 잔 더 해 보렵니까?”

강의 말에 은재가 살짝 숙인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피식거리며 은재가 두 손으로 든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가득 채우지도, 조금도 아닌 딱 중간에 맞춰 술을 채웠다.

적게 준 것인지도 모르고 은재는 눈을 살짝 접어 웃으며 술잔에 담긴 맑은 송화주를 내려다보았다. 그 정도는 거뜬하다는 듯 입술에 술잔을 대고 홀짝거렸다.

“맛있습니다.”

깨끗이 비운 술잔을 강의 앞에 내려놓았다. 목으로 넘어가며 느껴지는 솔잎 향이 좋았고, 쌉싸름하면서도 단내가 풍기는 술맛이 좋아 연거푸 마셔 보고 싶었다. 그러나 체면치레를 해야 했다.

“찬모의 송화주 담그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술맛을 잘 모르겠지만, 술이 참 답니다. 그리고 솔잎 향이 참 좋습니다.”

강은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렇습니까?”

강은 은재가 내려놓은 술잔에 술을 채우고 그것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은재와 시선을 맞추며 술을 넘겼다. 제게는 유독 쓰기만 한 것이 달다니.

술잔을 내려놓는 강을 보며 은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술이 적당하면 믿음을 얻고, 술이 과하면 신뢰를 잃는다고 했습니다. 나리께서는 제게 믿음을 주신 듯합니다. 저는 술을 처음 맛보았지만, 술의 단맛이 마음에 듭니다.”

“그렇습니까?”

“예, 술은 참 답니다. 나리께서 달다는 듯 넘기셔서 달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제가 술을 처음 맛보니 참 달았습니다. 술이 이리 단 게 맞는 것이지요?”

“술이 달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요.”

“술을 처음 맛본 저도 이렇게 달게 느껴지는데, 나리께서는 술을 많이 드셔서 달지 않으십니까? 저는 오늘 처음으로 두 잔을 마셔 보는 것이었습니다. 술이 참 달지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은재가 쫑알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강이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은재가 반복해 술의 단맛을 극찬할 때쯤이었다.

“괜찮습니까?”

걱정스럽다는 듯 강의 한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은재는 강의 물음에 헤벌쭉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술의 단맛도 단맛이지마는 술은 참 좋습니다. 저는 두 잔밖에 안 마셨는데 이리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보니 술이 참 달아서 기분을 좋게 하는 듯합니다. 맞지요?”

“혹 그 두 잔에 취한 것은 아니겠지요?”

“취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저 술이 달아서 기분이 좋은 것일 뿐입니다.”

헤헤거리며 웃는 은재의 모습에 강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모습을 보고는 좋다는 듯 생글거리던 은재가 별안간 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웠습니다.”

술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멀쩡한 모습으로 강을 보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 바닥을 짚었던 손을 들어 강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 웃음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아 무서웠습니다.”

강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좋습니다. 보기 좋은 웃음과 맛이 좋은 술이 함께하니 세상 부러울 게 하나 없이 좋습니다.”

슬금슬금 다가와 뺨을 어루만지던 이가 손을 떼고 자리를 잡더니 그대로 강의 허벅지에 머리를 두고 누웠다.

“곧 해가 질 것입니다. 돌아가지 않겠다면 나야 좋겠지만, 괜찮겠습니까?”

바닥에 모로 누운 채 눈을 꼭 감은 은재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모습에 강은 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술에 취한 이를 깨울 방도를 몰라 그냥 이대로 두어야겠습니다. 정말 깨우지 않을 것입니다.”

중얼거리던 강이 은재가 그랬듯 손을 들어 은재의 뺨을 어루만지자, 술에 취한 기색 하나 찾아볼 수 없었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예뻐 보여 강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깊이 잠이 든 듯 은재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강은 그런 모습조차도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 그대의 거짓 없는 마음이 내 두려움을 앗아갔습니다.”

잔잔한 바람결에 나부끼는 꽃잎이 저에게로, 제 연정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저도 얼마 보지 못했던 그 절경의 순간, 은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욕심이 납니다.”

그러나 강은 알고 있었다. 얼마 후 꽃은 완전히 져 버릴 것이며, 아름다웠던 이 순간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걸.

그렇기에 강은 은재와 함께 떠나는 것을 소망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넓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은재와 평생 느껴 보고 싶었다. 이 연정이, 이 마음이 오래가길 바랐다. 영원하길 바랐다.

“그대는 자꾸만 내가 꿈을 품게 합니다.”

저를 위해 용기를 끌어안은 이에게 무엇이든 못 할까.

저의 모든 것을 주어도 갚을 수 없는 마음이라 강은 제 모든 것을, 티끌만 한 연정까지도 은재에게 바칠 것이었다. 그게 마땅했다. 은재에게는 그렇게 해도 부족했다.

“연모합니다.”

은재의 뺨을 쓰다듬던 손길이 멈췄다. 강은 몸을 낮춰 제가 은재에게 전한 온기가 남아 있는 뺨 위에 입을 맞췄다.

입꼬리를 길게 늘인 강은 은재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씁쓸했던 술맛이 달아 기분이 좋았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강의 고개가 돌아갔다. 잔잔한 바람에 풍성한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꽃잎이 흩날렸다. 강은 지그시 눈을 감고 저와 은재에게로 쏟아지는 꽃잎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 * *

번쩍 눈이 뜨였다.

저를 바라보며 웃는 이를 보며 은재는 잠시 당황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운 채 정자의 천장 너머로 보이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밖과 다르게 정자 안은 밝았다. 사방에 달린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정자 안을 밝히고 있던 것이었다.

“술 한 잔에 쓰러질 것이었으면서.”

강의 말에 은재는 저절로 민망해지는 낯을 숨기는 데 급급했지만, 곧이곧대로 말을 받아쳤다.

“두 잔이나 마셨습니다.”

강은 그 말에 피식거렸다.

“그대가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다 하여 잔을 반만 채웠습니다. 그러니 한 잔이 맞지요.”

이길 수 없다는 듯 은재는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있는 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게 중요합니까? 저는 그저 이곳에 나리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먼저 시작한 것은 그대입니다. 나는 셈에 그리 야박하지 않아요.”

은재는 토라졌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얄궂다는 눈길로 강을 보자, 강은 늘 그렇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신 다른 것에는 야박하십니다.”

강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은재를 보았다. 아직도 술에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내 그대에게 무엇을 야박하게 굴었단 말입니까?”

강의 곁에 누운 채 오순도순 이야기를 주고받던 도중,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강렬했다.

“말로 해야 아시는 것입니까…?”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 지쳐 버린 은재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엉겁결에 뻗은 손으로 강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이겠다는 듯 강을 저에게로 끌어당겼지만, 강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다.

입술이 닿기 직전, 아주 근접한 거리에 멈춘 강이 속삭이듯 말했다.

“정녕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려는 것입니까?”

은재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당차게 말했다.

“나리께서 함께 가 주신다면 괜찮습니다.”

“허어, 사통일지라도 상관없습니까?”

탄식하는 강을 보면서도 은재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내뱉어진 말 뒤로 말이 따라붙었다.

“예, 괜찮습니다.”

강은 피식 웃었다. 제 입술 위로 닿을 줄 알았던 입술이 빗나가더니 제 귓가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마음을 품었고, 확인했습니다. 나누어 가진 증표가 있는데, 어찌 이것을 사통이라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강은 저에게서 떨어진 은재를 바라보았다. 저를 요사스럽다고 여기는 듯한 눈길에도 은재는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은재의 눈이 감기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강이 은재에게로 뛰어들었다.

은재를 사로잡은 것이 술기운이건, 정자 안에 가득 찬 서로의 체향 때문이건 강에게도 더는 거리를 둘 명분이 없었을 뿐이었다.

입술이 맞닿는 동시에 은재는 제 쪽으로 기울어진 강의 몸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쿵하고 찧기 직전, 큼지막한 손이 뒤통수를 받쳐 들었다.

“흐읍.”

천천히 바닥에 안착한 몸뚱이 위로 두 배는 될 것 같은 큼직한 몸이 덮쳐 왔다. 강은 단단한 두 팔로 제 윗몸을 받치고 입술을 맛보았고, 그 속에 누구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여린 점막을 희롱하듯 혀를 놀려 댔다.

“하아…. 하아….”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면 은재는 숨을 들이마셨다. 서로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다시 맞붙으면 물컹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입 안 곳곳을 누볐고, 뾰족하게 세운 뒤 목구멍 바로 앞까지 침범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강은 수줍음이 많은 입술을 탐하면서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도포의 고름을 풀고 그 안에 가려진 저고리의 고름을 푸는 손길은 과감했다. 은재의 뒤통수를 받치고 있던 손까지 가세해 옷을 벗겨 정자 구석으로 던지고는 완전히 민낯을 드러낸 살갗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꽉 조여 맨 바지의 허리끈을 푸는 손놀림은 꽤 많은 끈을 풀어 본 듯 날랬지만, 강은 당당했다. 백년고락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만큼 앞으로 제 손으로는 은재의 옷고름만 붙잡을 것이었다.

강의 등에 닿아 있던 손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듯 꽉 주먹을 쥐더니 넓은 등판을 툭, 하고 때렸다. 강은 은재에게서 떨어져 일어났다.

“호기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시뻘겋게 달아오른 은재를 보며 강이 피식거렸다. 은재는 얄궂다는 눈으로 강을 쏘아보며 부족했던 숨을 들이마셨다.

“그거 아십니까? 지금 그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습니다.”

강은 은재가 숨을 몰아쉬는 틈을 타 은재의 다리를 집어 들었다. 버선을 벗겨 뒤쪽으로 내던지고, 발목을 옥죄고 있는 대님을 풀었다. 다른 쪽 다리도 똑같이 했다.

허리와 발목을 포박하고 있던 바지의 통이 커져 그 상태로 일어난다면 여린 다리를 훑으며 주르륵 흘러내릴 것이었다. 강은 그 모습도 제법 볼만하겠다, 그리 생각하고는 푸른 기가 도는 바지의 부리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바지를 들고 잠시 바라보다 옆으로 홀라당 집어 던졌다.

손이 가는 것도 많고, 벗길 것도 많았다. 그러나 그게 흥을 돋우기도 했다.

바지를 벗긴 뒤에도 관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강은 속살이 어렴풋이 비치는 항라로 만든 속옷 바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겉모습은 단정한 선비 그 자체인데, 어찌 까놓고 보면 이리 음란한지.”

“제게 수치를 안겨 주시려는 것입니까?”

찌푸린 눈살에 강은 피식거렸다.

“설마요. 이 모습을 혼자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져서 그럽니다.”

은재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강을 쏘아보았다. 그 따가운 눈초리마저도 감격스럽다는 듯 강은 생글거렸다. 그리고 더운 손으로 은재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얇은 옷감을 가운데 두고 손길을 느낀 은재는 파르르 잘게 떨었다. 강은 순진하게도 그 떨림이 싸늘한 밤공기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고는 바닥에 누워 있는 은재를 감싸 안고 차분해진 은재의 숨결을 다시 탐내기 시작했다.

제 덩치로 야리야리한 몸을 깔아뭉개는 게 괜찮을까 걱정하면서도 쾌락을 원하는 본능은 매우 충실하게 반응했다. 고간과 고간을 맞대고 살며시 허리 짓을 하며 입을 맞췄다. 바닥에 나뒹굴던 은재의 손이 강의 옆구리 옷자락을 붙잡았다.

“으… 음….”

얇은 옷감에 쓸리면서도 맞닿은 살덩이는 그 자극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강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고, 바닥에 누운 은재는 고목처럼 가만히 누워 느껴지는 감각에 몰두했다. 찰싹 달라붙어 있을 줄 알았던 성기가 겉돌기 시작하자, 진득한 선액이 얇은 항라에 젖어 들었다.

강은 허리 짓을 멈췄다.

“그대는 참으로 진솔합니다. 부끄러우면 붉어지는 뺨도, 조금만 톡 건드려도 충실히 반응하는 몸도 숨김이 없어 좋습니다.”

그가 얇은 속옷 바지마저 벗겨 내고는 몸집을 반쯤 키운 은재의 성기를 제 손으로 조몰락거렸다.

“흐앗!”

맞대었던 얼굴이 떨어지자 은재의 입에서 큰 숨이 터졌다. 붉어진 뺨에 입술을 맞추고 얼굴선을 따라 내려가 턱 끝에도 입술을 맞댔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쪽쪽거렸고, 입술이 떠난 곳에는 붉은 순흔이 자리 잡았다.

달뜬 숨에 팬 빗장뼈에 닿았던 입술은 훈색이 감도는 유두에 잠시 머무를 뿐, 목적을 다른 곳에 두고 움직였다.

“아, 아읏!”

반쯤 섰던 것이 단단해졌을 즘, 강은 무사히 제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덩이진 것처럼 뭉글거리는 선액을 머금고 있던 선단을 엄지로 문지르자, 타액으로 번들거리던 입술에서 비음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얇은 표피를 잡고 흔드니 하얗고 여리여리한 몸이 발작하듯 잘게 튀어 오르다 바닥으로 푹 꺼졌다.

“그대의 몸짓마저도 감탄스럽습니다.”

제 손길 하나하나에 충실하게 반응을 내보이는 은재를 바라보며 강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쉬지 않고 움직이던 손짓을 멈추고 얼굴에 피어난 흥분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뒀다.

“으읏!”

이 남사스러운 행위가 다 끝나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신음이 또다시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민망스러운 소리에 은재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저희가 있는 곳이 정자라는 것을 의식했다. 집 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후원이었으나, 수복들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아, 아흣….”

그러나 제 입 속인 양 입 안을 휘저으며 흥분을 부추기던 그 말캉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둥그스름하고 매끄러운 성기의 끝을 농락하자, 물었던 입술이 잇새에서 빠져나가며 달아오른 신음이 천연덕스럽게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하, 하지 마십시오! 으읏!”

뾰쪽하게 세운 혀끝이 선단에 난 좁은 틈을 오빗거리듯 파고들었다. 고통보다는 환락에 가까운 감각이었으나, 은재는 몸을 비틀었다. 물밀듯이 치고 올라오는 감각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그 감각을 일깨워 준 이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도망가지 마세요. 이대로 멈춘다면 아쉬움은 내 몫이 아닙니다.”

가만히 두고 볼 강이 아니었다. 강압적이지 않게 부드러운 손짓으로 바닥에서 붕 뜬 골반을 짓눌렀다.

“흐읍!”

그는 고개를 위로 젖히고 이를 꽉 문 채 신음하는 은재를 힐끔거리며 제가 하던 것에 열중했다. 맑고 투명한 선액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혀로 쓸어 올리며 자극시키고, 쾌락에 물들어 가는 은재를 지켜보았다.

제멋대로 들썩이는 서투른 허리 짓이 고조될 즘 마지막 발악이라는 듯 은재가 윗몸을 벌떡 일으켰다.

고간에 얼굴을 파묻고 음낭을 빨아들이는 모습에 은재는 헛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달싹거릴 만큼 깊게 숨을 마시고 내뱉으며 제 것을 탐하는 강을 바라보았다. 은재는 농염에 젖은 눈으로 강과 눈을 맞췄다.

요의와는 사뭇 다른 감각이 발끝으로, 손끝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박거렸다.

“으읏….”

곧 은재의 얼굴에 울상도 아니고, 환희도 아닌 오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불그스레했던 뺨의 온도는 더욱 짙어졌고, 벌게진 눈시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촉촉했다. 입맞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입술은 살짝 벌려진 채 파르르 떨며 더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 그만하세요….”

“개운하게 내보내세요. 그럼 한결 편해질 것입니다.”

“제발…. 흐읏….”

혀가 곧게 잘 뻗은 기둥을 핥으며 점점 선단을 향해 움직일 때였다.

“읏, 아흣!”

밀어 내려고 단단한 어깨를 붙잡았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희고 묽은 정(精)이 터져 나와 강의 얼굴을 더럽히고 있었다. 은재는 말을 내뱉지 못하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강의 어깨에 닿았던 손을 떼었다.

“실수였습니다…. 이를 어찌….”

제법 충격이었다는 듯 손까지 달달 떨며 다가오는 것을 보며 강은 피식거렸다.

“심려치 마십시오.”

그는 은재보다 선수를 치겠다고 앞서 손바닥으로 저의 얼굴을 훔쳤다. 번들거리는 손바닥을 바라보다 은재에게 내보이고는 보란 듯이 은재의 정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그, 그것을… 어찌….”

기함하는 은재를 보며 강은 씩 웃었다.

“술보다 더 단 것이 있었습니다.”

“…예?”

“어쩌면 이것보다도 더 단 것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강은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은재는 흉물스럽게 축 처져 있는 제 성기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올렸던 손을 슬며시 내려 그것을 감췄다.

슬쩍 눈치를 본 은재는 여전히 아래에 꽂혀 있는 강의 눈길을 확인했다. 미심쩍어 살짝 눈살이 찌푸려지기 무섭게 강이 은재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입 안에 감도는 비릿함을 느끼며 은재는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제 뒤통수를 받친 손 덕분에 이번에도 바닥에 머리를 찧는 불상사는 면했지만, 고간에 닿은 단단한 것을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처음이 아니었지만 새삼스럽게 낯설었다. 저의 고간을 짓누른 양물이 제게 증표를 남겨 주었던 것인데도 생소했다.

계속에서 맞닿아 있을 줄 알았던 입술은 아쉬움을 남기고 저에게서 멀어져 갔다. 기이할 정도로 꺾인 허벅지에 은재의 시선이 멈췄다. 안쪽, 여린 살에 새겨진 증표에는 강의 시선도 닿아 있었다.

강은 푸른 반점을 제 엄지로 문질렀다. 지워도 온전히 지워 낼 수 없는, 저와 은재를 이어 주는 표식이었다.

그곳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영원토록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는 염원을 담았다.

강은 증표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들어 올린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쳐 놓았다. 다른 쪽 다리도 마찬가지로 강의 어깨에 올라갔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은재는 심히 불안한 눈빛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은재는 정염에 사로잡힌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강 또한 당황을 품은 눈을 보았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 강은 은재의 하체를 들어 올렸다.

“나리!”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 회음을 따라 움직인 강의 눈길이 축축한 진액을 머금은 비문에서 멈췄다.

은재가 내지른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말은 듣지 못했다는 듯 강의 얼굴이 그곳과 점점 가까워졌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진액 범벅이 된 구멍에 닿는 순간, 은재가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을 토했다.

“으, 으읏….”

굵은 성기가 구멍을 들락날락 할 때마다 투명한 진액이 함께 딸려 나왔다. 엉덩이골마저도 축축하게 젖었기에, 살갗이 달라붙으며 쩍쩍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정자에 울렸다.

“아흣!”

두 팔로 은재의 머리를 끌어안은 강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은 이의 모습이었지만, 목을 긁으며 나오는 소리가 갈라졌음에도 자비를 모르는 사람처럼 허리를 움직였다. 배 속을 뚫어 버리고 튀어나올 것 같은 성기 또한 자비가 없었다.

얼마나 더 커질 건지 좁은 구멍을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서는 그 안에서 몸집을 키웠으니 자비롭지 않았다.

“하아…. 으응, 아으읏!”

은재는 제 귀에 바로 꽂히는 강의 짙은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등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올록볼록 튀어나온 근육을 스치는 손가락 끝에는 이해하기 힘든 전율이 튀었다. 굵은 것이 몸 안 깊숙이 쳐들어올 때마다 어느 부분을 짓누르면서 터지는 감각과 비슷했다.

“아, 아읏, 아, 아흣!”

환락에 휩싸인 듯 강은 난폭했다. 쩍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느리게 움직이던 몸이 박차를 가하며 퍽퍽, 소리를 냈고, 온몸에 자리 잡은 근육처럼 단단하고 굵은 것이 깊숙한 내벽을 쿡쿡 찔렀다.

은재는 강의 몸통을 끌어안고 그 몸짓에 따라 움직이며 쾌락을 느꼈다. 강은 싸늘한 밤공기에 식어 버린 몸을 달궈 놓았고, 살갗에 닿는 바람에 돋아난 소름을 잠재웠다. 한 무더기의 바람이 몰고 온 꽃잎이 땀이 배어난 피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흣, 흐읏!”

“느껴집니까? 그대는, 참으로 진솔합니다.”

한 번 정을 토해 냈던 은재의 성기가 발딱 서서 제 존재를 과시했다. 강의 것과는 감히 견줄 수 없었으나, 단단한 몸과 부드러운 살갗에 짓눌리며 다시 발기한 은재의 성기가 쏟아 내는 투명한 선액으로 강과 은재의 아랫배가 번들거렸다.

“아읏! 더, 더는…. 아, 아앗.”

강은 눈망울에 방울방울 맺힌 눈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거칠게 허리 짓을 했다. 달아나려면 강을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었지만, 은재는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하, 안 됩니다.”

강은 이미 보아 알고 있었다. 제가 파정하는 동시에 죽은 이처럼 축 늘어지던 은재를 알았다. 절정의 끝에 다가선 순간 저를 혼자 남겨 두지 말라는 듯 강은 은재와 눈을 맞췄다. 은재는 그에 화답하듯 맥을 추지 못하는 눈에 힘을 주었다.

“흣, 아, 아읏!”

살갗에 비벼지던 성기의 끝에서 왈칵하고 정액이 터졌다. 순식간에 쏟아진 쾌락에 몸부림치듯 내벽이 그 안을 가득 채운 성기를 감쌌다.

강은 멈추지 않았다. 제 뿌리를 더 깊숙한 곳으로 처박겠다는 듯 움직임이 빠르고 깊었다.

“흐읍…!”

강은 은재의 품을 파고들었다.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안으로 쿡 찔러 넣었던 성기를 뒤로 뺀 뒤 다시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경련하듯 바들바들 떨리는 내벽이 강의 것을 자극했다.

그때 제 몸통을 옥죄고 있던 힘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최고점을 찍고 천천히 가라앉는 감각을 아쉬워하던 강은 은재를 응시했다.

“이리 유약해서 어찌합니까.”

짙은 농염에 휩싸인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감겼다. 꺼져 가는 은재에게 생명을 불어넣듯 강은 기진맥진한 은재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붙였다.

* * *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허탈해하는 강의 얼굴이었다.

잠에서 깬 은재는 요 위에 누워 멀뚱멀뚱한 눈으로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대들보가 낯설었다기보다는 사방이 뻥 뚫린 정자에서 아늑한 방으로 언제 왔는지가 궁금했다.

“기침하셨습니까?”

때마침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은재는 괜한 생각을 뒤로 미뤄 두고 일어나 앉았다.

“들어오거라.”

남의 집 종을 마음대로 부리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말복을 보며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열댓 살 먹은 듯한 아이가 노련미를 뽐내며 말했다.

“저는 말복이라고 합니다. 나리께서는 잠시 궐에 드셨는데, 일어나시면 조반상을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준비할까요?”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어젯밤 그렇게 정신을 잃은 뒤 씻지 않은 몸이 찝찝했다. 지저분한 몸으로 집에 돌아올 강을 맞이할 수 없었던 은재는 괜스레 수줍어하며 운을 뗐다.

“그것보다… 좀 씻고 싶은데….”

말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른 새벽부터 솥단지에 물을 퍼다 붓고 아궁이에 불을 땐 게 말복이었다. 따뜻하게 끓인 물을 상전에게 가져다 바치지 않았던가.

강이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 집에는 드나드는 손님이 없었을 뿐더러, 손님이 주인의 방에서 머물고 있었으니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나리께서 이미 수건질을 하셨을 텐데, 개운치 않으십니까? 소세물을 준비할까요?”

다시 생각해 보니 몸은 목욕을 한 듯 보송보송했다. 개운치 않은 것은 마음이었다. 은재는 어린아이의 적나라함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기름종이가 발라진 바닥을 바라보았다.

“우리 나리의 짝지시지요? 나리께서 말씀은 안 하셨지만…. 손수 수건질을 해 주는 것을 보면 어지간한 사이가 아닐 것 같은데요?”

능글스럽게 웃는 말복을 보면서 은재는 애먼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젯밤 후원에서 일렁거린 제 목소리가 멀찍이 떨어진 행랑채까지 퍼진 것일까. 저절로 낯이 뜨거워졌다.

“그래. 내 짝지다. 부러우냐?”

갑자기 열린 문으로 강의 모습이 나타났다. 은재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던 말복이 귀신을 본 것처럼 기겁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나, 나리! 어찌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

“내 짝지를 홀로 두고 나가 있으려니 마음이 놓여야지. 그래서 일찍 돌아왔다.”

강은 불그스레한 은재의 뺨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홀로 있는 짝지가 배를 곯으면 안 된다고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더냐. 벌써 상이 나간 것이냐?”

“아뇨, 지금 막 일어나셔서….”

“그럼 어서 가서 상을 내와야지. 어찌 예서 수작질이야. 우리 짝지가 탐나냐?”

강의 찌푸려진 눈살을 본 말복이 두 손을 파닥거리고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완강한 태도로 부정했다.

“아닙니다! 제가 왜 나리의 짝지를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인은 이만 나가 조반상을 들이겠습니다.”

말복이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해 투박하게 걸어갔다. 대청마루에서 누마루로 건너간 말복이 짚신을 갖춰 신고 사랑채 뜨락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강은 그곳에서 물러나는 말복을 가만두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내 짝지에게 눈길을 두었다간 어찌 될지 알지?

“잘 잤습니까?”

은재는 관복 차림을 한 강을 흠숭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관복을 입은 사내의 모습은 숱하게 보았지만, 강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다른 이들과 남달랐다. 마치 관복을 입으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참 멋졌다.

“그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강의 능청에 은재는 서둘러 눈빛을 바꿨다. 민망함을 이기지 못한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아래로 향할 것이라고 미리 짐작한 강은 곧 바닥에 내리꽂힐 시선을 붙잡기 위해 은재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쳤다.

강은 여느 때처럼 능글맞고 능청을 떨어 이상할 게 없었지만, 부끄러움이 오롯이 제 몫이라는 듯 은재는 유난히 어젯밤 일을 쑥스러워했다.

“아름다워 계속 보고 싶은데 어찌 감추는 것입니까? 나를 그런 눈빛으로 봐 주는 이들은 많았으나, 그대가 나를 그런 눈빛으로 보니 마음이 간질거립니다. 계속 그리 봐 주십시오.”

“놓아주십시오….”

수줍어 붉어진 뺨을 보며 강은 피식거렸다. 제게서 도망치려 고개를 슬며시 돌리는 은재의 그 뜨거운 뺨을 붙잡고 제 얼굴을 은재에게 가까이 가져다 댔다.

쪽 하고 입을 맞춘 뒤 능청스럽게 물러나는 강을 보며 은재는 다시 눈동자를 굴려 댔다.

술이라는 게 그렇게도 무서운 것인지 깨달은 참이었고, 스멀스멀 떠오르는 민망스러운 기억에 후회의 발길질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관복을 입은 강의 모습을 보니 후회는 안개 가시듯 가뿐하게 사라지고, 욕망이라는 것이 서서히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무엇인가 바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을 즘, 야살스러운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은재는 저 혼자 화들짝 놀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은재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듯 강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피하는 시선이야 그렇다 쳐도 점점 더 붉어지는 뺨은 어째 해명하려고요. 말해 보십시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강은 눈을 흘기며 은재를 살짝 쏘아보았다.

“거짓말.”

“참입니다. 무엇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는 따라붙지 않는 말이 이상해 은재는 슬쩍 고개를 들어 강의 눈치를 보았다. 저에게 닿아 있는 곁눈질에 괜스레 입을 우물거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꼼지락꼼지락하는 손가락을 보며 강이 말문을 열 때를 기다렸다.

“내 짐작으로 보아….”

말을 줄이는 목소리에 은재는 한 번 더 침을 꼴깍 삼켰다.

강의 눈빛이 어떨까 궁금했다. 슬그머니 숙였던 고개를 들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생글거리는 강을 올려다보았다. 화끈거리는 얼굴에 은재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리, 조반상 들이겠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온 말복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강은 아직도 이부자리에서 나오지 않은 은재를 바닥에 눕혔을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문이 열리며 이를 드러내고 히죽거리는 말복과 강의 눈이 마주쳤다.

내심 아쉬움이 휘몰아쳤던 강은 조반상을 들이는 말복을 얄밉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맛있게 잡수십시오.”

“어서 가라. 당장 나가.”

달랑 은재의 몫만 올라간 상을 보며 은재는 강을 힐끔거렸다. 말복이 나가기 무섭게 상을 가운데 놓고 앉은 강이 어서 먹으라는 듯 기대에 찬 눈으로 은재를 보고 있었다.

강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탓도 있었지만, 혼자 숟가락을 들기가 멋쩍어 쉽사리 손을 들 수가 없었다.

“어서 드시지 않고요.”

“나리께서는요.”

“나는 그대가 먹는 것만 보아도 배가 부릅니다.”

은재의 콧잔등이 아주 잠시 구겨졌다가 매끈하게 펴졌다. 풉, 하고 웃던 강이 은재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게 저에게 닿을 줄 알았는지 은재가 새삼스럽게 움찔거렸다.

“파렴치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아, 아닙니다….”

목적이 숟가락이었다는 듯 강은 유유히 상 위에 놓여 있던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김이 풀풀 올라오는 밥을 크게 한술 뜨더니 씩 웃으며 은재에게 숟가락을 내밀었다.

“아, 하십시오.”

“예? 제가 먹겠습니다….”

“아, 하십시오.”

“이러지 마시고… 주십시오.”

강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숟가락과 그 위에 올라간 밥을 보며 은재는 난색을 보였다.

“아.”

입을 벌리라 종용하는 강을 난처한 눈으로 보았다.

강은 강직한 몸처럼 마음도 굳건했다. 뜻한 바를 이루겠다는 듯 한 치 물러섬이 없었다. 제법 고집이 센 사내였다.

물러나지 않을 듯 제 앞에 머물러 있는 숟가락을 보며 은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함부로 내보여서는 안 되는 입 안을 강에게 내보였다.

감았던 눈을 뜨고 밥을 우물거리며 슬쩍 강을 곁눈질했다. 흡족하다는 듯 생글거리는 강을 보고 있자니 그게 또 감격스러워 은재는 눈을 반짝였다.

젓가락도 마저 제 손에 쥔 강은 잘 무친 숙주나물을 잘 말아 집고는 곧바로 은재에게 들이밀었다. 은재는 민망해하다가 나물을 먹었다. 재미났는지 강은 아예 밥과 국의 위치를 제 앞으로 바꿨다.

“어떻습니까?”

“맛있습니다.”

“우리 집 찬모의 솜씨가 좋습니다.”

“참으로 맛납니다.”

과한 욕심에 강은 숟가락으로 밥 한술을 뜨고 잘 익은 동그란 애호박 전 한 조각을 올렸다.

“이건 좀….”

“아.”

민망함도 잠시, 은재는 새끼 새처럼 강이 내미는 밥과 반찬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음식을 꿀꺽 삼킨 은재가 말했다.

“밥을 다 먹고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글쎄요. 무얼 하면 좋을까요? 혹, 하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음….”

다시 되돌아온 질문에 은재는 곰곰이 생각했다.

강과 함께 집 안에 머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도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강에 나들이 가는 것도 좋을 듯했다. 아니, 무엇이든 강과 함께하는데 좋지 않을 게 있을까.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마저 밥을 먹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밥 위에 잘 구운 섭산적이 올라간 것을 보며 은재는 질색했다.

“근데 정말로 저 혼자 먹을 수 있습니다….”

강은 말없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웃어 보였다.

“으…. 알겠습니다….”

입이 찢어지면 어쩌나, 싶은 생각도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깨끗하게 빈 밥상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강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리 제 앞에 앉혀 두고 먹이면 빼빼 마른 몸에 살집이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자연스럽게 부풀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이상하게 밥맛이 좋아 가득 담긴 밥 한 공기를 해치운 은재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물도 제가 먹이겠다는 듯 강이 물 잔을 들고 달려들자, 그것만큼은 저 혼자 할 수 있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강은 꽤 섭섭해 보였지만, 은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삐친 강을 달래 보겠다는 듯 은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밥을 다 먹었으니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볼까요?”

뾰로통한 강이 슬쩍 돌려졌던 고개를 은재에게로 도로 돌려 놓았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의 사이를 막고 있던 밥상이 서서히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밀하게 계획된 움직임인 듯했다.

오랫동안 갈증에 시달렸던 이가 샘물을 만나 성급하게 들이마시는 물처럼 비문을 축축이 적신 진액의 맛은 달았다.

강은 그것에 중독된 이처럼 하염없이 은재의 구멍을 탐했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내뱉는 은재의 몸부림은 저에게는 상관없는 것인 듯 강은 회음을 핥았고, 음낭을 빨았다.

“으앗!”

발작하는 듯 튀어 오른 은재의 입에서 신음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비교적 자유로운 두 다리로 강에게서 벗어나겠다고 엉금엉금 기어갔지만, 강은 저에게서 도망가는 은재의 골반을 붙잡아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으, 흐읏.”

어제와 오늘 다시 맞붙어 비문의 색은 은재의 유두 빛깔처럼 불그스레했다. 핥고 들이마시는 것으로 부족해 그 좁은 틈 속으로 뾰족하게 세운 혀를 집어넣고 헤집자, 은재의 입에서 아스러지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만두라는 듯 허공에서 퍼덕거리던 손이 가까스로 강의 어깨에 닿았지만, 기이하게 굽어진 허리에 비해 손짓에는 힘이 없어 강을 밀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은재는 강을 뿌리치는 것을 포기하고 철푸덕, 푹신한 이불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로 이불자락을 짓씹으며 제게 파도처럼 밀려온 육감을 받아들였다.

“하읏! 으, 으읏!”

그러나 품으면 품을수록 더 과감한 것을 원했다. 강이 제게 안겨 준 쾌락이 감격스러웠지만, 그것은 정신을 놓고 탐닉할 만큼 강했다. 이러다 정말 욕정에 사로잡혀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하는 파렴치한이 되면 어쩌나, 은재는 심히 걱정했다.

“생각보다 그대는 포기를 잘합니다.”

은밀한 곳에 닿은 숨결에 은재는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더운 숨을 원한다는 듯 마음대로 벌름거리는 그곳의 느낌도 꽤 적나라하게 느꼈다. 은재는 더 붉어지지 않을 새빨간 얼굴을 이불에 감춘 채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든 것에 그대의 향이 담겨 있습니다. 다 내 품에 담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지요.”

말을 내뱉으면서도 강은 비문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진액을 혀로 핥았다. 타액과 뒤섞인 진액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감탄을 하기도 했다.

은재는 모든 게 부끄러웠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반응이 창피했다.

“으읏!”

제대로 부풀어 오르고 풀어진 구멍 사이로 손가락이, 그것도 세 개가 한꺼번에 쳐들어왔다. 이불 위로 쓰러졌던 몸이 번쩍 들리며 고개가 위로 젖히고 신음이 우악스럽게 튀어나왔다.

강은 은재의 반응 하나하나를 즐겼다. 깊숙이 밀어 넣은 손가락으로 매끄럽고 좁은 내벽을 느끼다 욕망을 자극하는 부분을 찾아 휘저었다.

“아, 아흣!”

작은 손짓에도 은재는 비를 맞은 강아지처럼 달달 떨어 댔다. 그만하라는 듯한 무의미한 손길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강은 그 손을 붙잡아 손목에 입을 맞췄다. 손바닥에도, 손가락에도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강의 입맞춤에 녹아내린 은재의 팔이 바닥으로 풀썩 떨어졌다.

“좋지 않습니까? 수줍은 것은 잠시지만, 쾌락은 그대의 몸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천천히 바깥으로 빠져나갈 줄 알았던 손가락이 다시 안으로 깊숙이 쳐들어왔다.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가는 부분에서 열감이 피어올랐다.

은재는 부끄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음인으로 태어나 양인 여인이나 양인 사내와 혼례를 올리면 치러야 하는 부부관계를 서책을 통해 배워 본 바가 있으나 이런 식의 음탕하고 음란한 행위에 관해서는 서술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은재에게는 강이 저에게 행하는 모든 게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러나 죄책감을 가지게 할 만큼 좋은 것이었다.

머릿속으로는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는 납득하고 있었다. 은재는 점점 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건 강이 간과한 사실 중 하나였다.

은재는 뼛속까지 골양반이었다. 고리타분했고, 정석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증이 생기는 얌전하고 고루한 샌님이었다.

“하읏!”

지그시 누르는 손길에 쓸모도 없는 정액을 금방이라도 뿜을 것처럼 폭풍 같은 쾌락이 몸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것마저 알아챈 강은 제가 방금 짓눌렀던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은재는 이부자락을 손에 꽉 쥐며 신음했다. 제발, 그만…!

무릎으로 지탱하고 있던 허벅지가 달달 떨리며 허공에서 혼자 꺼덕거리던 성기에서 맑은 정액이 후드득 이불 위로 떨어졌다. 사정과 동시에 바닥으로 풀썩 떨어진 몸뚱이에는 힘이라곤 하나 없었고, 숨통이 짓눌려 상체가 들썩거리는 것만 확연하게 보였다.

“그만, 아읏, 그만하십시오…. 으읏….”

강은 저돌적이었다. 어제처럼 파정을 끝낸 은재가 단 한시도 쉬지 못하도록 몰아붙였다. 손가락이 박힌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으로 제 손이 축축해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만하라는 말이 거슬려 강은 충격받은 사람처럼 몸이 굳어졌다.

“진정으로 그만하라는 것입니까.”

“원, 원하지 않습니다.”

강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원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게 충실하게 반응을 내보이는 몸을 보았기에 의아했다.

“원하지 않아요?”

“…예.”

“그럼 무엇을 원합니까.”

강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 은재는 이불에 뺨을 댄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게다가 몰아쉬는 숨이 벅찼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은 바깥으로 빼던 손을 다시 안으로 깊숙이 처박았다.

“하읏!”

“안 돼요. 오늘은 절대로 안 됩니다.”

강은 아쉬웠다. 희열에 휩싸인 은재를 보고 싶었다. 색욕에 젖은 얼굴로 저를 봐 주길 바랐다. 그리고 해 주고 싶은 말도 있었다.

매번 정신을 잃고 기절해 버리는 은재가 살짝 얄밉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잠이 드는 은재가 아쉬웠다. 제대로 풀지 못한 제 욕정이 쓸쓸하기도 했다.

“내 오늘은 작정하고 그대를 안을 것입니다.”

“그럼 안아 주십시오….”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잠시 동안 방에 울렸다 사라졌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강은 제 몸으로 은재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이미 성이 날 대로 난 제 양물을 은재의 회음에 비비며 물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차라리… 안아 주시라고….”

“어찌 안아 줄까요. 두 팔로 꽉 끌어안으면 되는 것입니까?”

단단한 것이 들어갈 구멍도 없는 회음을 푹 찔렀다. 동그스름하고 말랑한 음낭을 슬쩍슬쩍 찌르기도 했다.

굵고 길쭉한 양물을 이미 축축하게 젖은 곳에 문지르자, 그 느낌이 또 은재의 아랫배를 간질거리게 했다. 은재는 말 대신 애먼 발가락을 옹송그렸다.

“말해 봐요. 어찌 안아 주면 됩니까. 아기처럼 내 위에 앉혀 목을 받치고 엉덩이를 토닥거려 줄까요?”

은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적나라한 말을 감히 제 입으로 내뱉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찰싹-!

“아읏!”

매서운 손길은 아니었지만, 말랑한 볼기에 닿은 손바닥은 꽤 쓰렸다. 팔짝 뛰지도 못하게 제 몸을 깔아뭉갠 강의 몸집에 은재는 자유로운 팔다리만 버둥거렸다.

찰싹-!

“아읏!”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대가 참 밉습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데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아픕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 볼기짝에 닿은 손바닥이 자아낸 촉감은 실로 요사스러웠다. 아프기는 한데 그 아픔 뒤에 피어오르는 감각이 그랬다. 제 입으로는 절대로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이기도 했다.

“말하세요. 내가 어찌할까요. 그대를 어찌 안으면 되겠습니까.”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하지 않았다간 큼지막한 손바닥이 또 제 볼기짝을 때릴 것이었다. 은재는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그리고 숨을 훅 들이마셨다.

“…보통의… 이상하지 않은… 그런….”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평범하게….”

그 말을 내뱉은 저 자신이 수치스러워 은재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긋한 웃음소리가 잠시 허공을 배회하는가 싶더니 곧 묵직한 강의 몸통이 느껴지며 귀로 더운 숨이 느껴졌다.

“내 양물을 그대의 밑에 넣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럼 그게 평범하게 안는 것입니까?”

속삭이는 목소리에 은재는 귀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강이 풍기는 향내가 코를 찌르자,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던 정당하고 옳은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양심만이 존재하고 있을 때, 단단한 그것의 머리가 구멍을 콕 하고 찔러 댔다.

“으… 읏….”

“이곳에 넣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강은 외설적이었다. 원래도 그런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천박하고 요염한 자인지는 몰랐던 은재였다.

은재는 콕 처박은 머리를 슬며시 끄덕였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마저도 결국 강에게 물들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정신을 잃지 말아요. 잠이 든 그대를 바라보는 내 외로움을 생각한다면 지금만큼은 나와 함께해 줘야 합니다.”

“으, 읏….”

강이 내뱉은 묵직한 숨과 함께 성기의 귀두가 주름진 살집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잔뜩 풀어진 구멍은 굵고 단단한 강의 성기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뿌리까지 모두 들어온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짓눌려 있는 배 속이 가득 찬 것 같았다.

“으읏….”

귀 가까운 곳에서 흩어지는 깊은 숨처럼 은재의 입에서도 숨이 터져 나왔다. 강은 윗몸을 일으켜 제 뿌리까지 모두 집어삼킨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흡족하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허리를 뒤로 뺐다.

은재가 바라는 대로 다시 안으로 밀어 넣는 몸짓은 과격하지 않았다. 느릿한 움직임에 애가 달아 보라는 얄궂은 장난이기도 했다.

“흐으….”

“이게 그대가 원하는 것입니까?”

강은 이부자락을 쥔 은재의 손을 감쌌다. 오므려지려는 다리를 제 다리로 벌린 채 여유롭게 추삽질을 했다.

“흐… 읏….”

구멍 속으로 성기의 기둥이 들어갔다 나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강의 움직임에 맞춰 은재의 엉덩이도 들썩거렸다. 성기가 내벽을 긁고 나가면 따라갔고, 내벽을 짓누르며 들어오면 물러났다. 뭔가 아쉬움도 살짝 피어올랐다.

깊숙이 넣을 수 있는 곳까지 넣는 몸짓에 뱃가죽이 들썩거렸다. 그 느슨한 움직임에도 은재의 성기 또한 착실하게 몸집을 부풀렸다.

다리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채 발기한 성기를 찰싹 달라붙은 음낭이 애무했다. 비문 속으로 성기를 들이밀면 음낭이 음낭을 쓰다듬었고, 성기를 뒤로 내빼면 성기의 기둥을 훑고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속으로 경망스러움을 따지던 이가 저였던가?

“으흣….”

은재는 다시금 저에게 쏟아진 감각에 자연스럽게 휘감겨 신음을 토했다. 뭔가 아쉬웠다. 느릿한 움직임에도 달달한 맛이 있었지만, 어제 제가 느꼈던 폭풍 같았던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살짝 아쉬움을 품고 있을 즘, 살짝 몸을 낮춘 강이 은재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그거 압니까?”

은재는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강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사통을 하고 간음을 하는 사이입니다.”

“예?”

“평범한 다른 이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지요.”

의아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강의 말을 헤아리기 위해 정신을 팔았다. 아주 잠깐, 짧은 찰나였다.

“아, 아흣, 아, 아앗!”

갑작스럽게 강의 움직임이 광포해졌다. 헉헉, 깊은 내벽을 거칠게 찌르고 들어왔지만 등을 어루만진다거나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등, 아래의 움직임 빼고는 모두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은재는 결국 이리 될 줄 알았다며 수긍했다. 아니, 짧은 사이에 깨달아 혼란스러웠지만, 이게 진정으로 제가 원하는 것이었다.

살짝 눈이 풀렸지만 은재는 또렷한 정신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하염없이 예쁜 것을 본다는 눈으로 은재를 응시했다.

모로 누워 강의 품에 안겨 있던 은재가 물었다.

“내일도 궐에 가셔야 합니까?”

“가야지요.”

도성에 도는 소문을 꺽새를 통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세자의 오래된 병환으로 곧 나라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때는 개의치 않고 넘어갔었지만, 지금은 새삼스럽게 걱정스러웠다.

“다시 돌아오실 것이지요?”

“그럼요. 어찌 묻습니까.”

강은 상투 끈이 풀려 풀어 헤쳐진 은재의 머리카락을 제 손에 휘감았다. 입을 맞추기도 하고, 휘감은 것을 풀어 쓰다듬기도 했다.

“궐에서 지내시지는 않을까 싶어서….”

“저하께서 그곳에 계시기에 가는 것이지,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궐에 가지 않았을 겁니다.”

강은 은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지금 은재를 사로잡은 것은 걱정이었다. 강은 그것을 보았다. 다시 혼자 남겨질 은재의 불안을 보았다.

“나는 궁이 싫습니다.”

은재는 강을 바라보았다. 강의 얼굴에 선명하게 떠오른 감정을 보았다.

그것을 감추겠다는 듯 강은 미소를 지으며 은재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멀어진 후에도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우리는 떠날 것입니다.”

막연한 강의 꿈을 보았다. 그 곁에 자신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득하게 먼 일로 다가왔지만, 은재는 머지않아 강과 함께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요?”

“때가 오면 어디든 함께 갈 것입니다.”

그제야 은재의 얼굴이 환해졌다. 강은 자상하게 웃으며 살짝 올라간 은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리,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알겠다. 물러가거라.”

“예.”

밖에서 들리는 말복 아범의 말에 강은 일어났다. 얇은 이불을 은재의 몸 위에 덮은 뒤 제 품에 안고 바깥으로 향했다.

목간으로 향하던 도중, 이른 아침의 싱그러움이 사라지고 붉은 노을이 낀 하늘을 보던 은재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벌써… 날이 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오늘도 그대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만, 그랬다간 택원이 철퇴를 들고 이곳으로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모두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내 그대를 보내기 아쉬워 벌써부터 마음이 미어지지만, 씻고 돌아가도록 합시다.”

은재는 강에게서 떨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강의 목덜미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 * *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냐!”

호통치는 세준 앞에 모인 사내종 여럿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곳에는 꺽새도 함께 있었다.

“도성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냈어야지! 벌써 하루가 지나지 않았느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세준이 아무리 호통을 친다고 해도 이 넓은 도성에서 은재를 찾아내는 건 어려웠다. 게다가 멀쩡히 두 발이 달려 움직이는 사람이니 한곳에만 머물지 않으면 집 나간 개를 찾는 것보다도 더 힘든 일이었다.

막 퇴궐한 김윤덕이 겸인들을 야단치는 세준에게 말했다.

“어찌 이리 소란이냐.”

세준은 근심이 가득한 눈치로 김윤덕에게 예를 갖췄다.

“아버님, 은재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그러나 은재는….”

“음인이라도 제 처신을 할 줄 아는 성인이다. 심려치 말거라.”

세준은 아비를 보며 후회했다.

늘 한결같은 사람에게 기대를 품은 것을 자책했다. 위로하며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마저도 세준은 께름칙했다.

분명 저에게는 좋은 아비였다. 이 세상에 찾아보기 힘든 그런 헌신적인 아비였다. 그러나 세준에게는 오늘따라 아비의 이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걱정이 되지 않으십니까?”

김윤덕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세준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다면 이미 내게 연통이 왔을 것이다.”

“만일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이라면요. 어딘가 붙잡혀 갔다거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화를 입었다거나….”

세준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감히 상상하면 안 되는 끔찍한 장면을 떠올려 괴로웠다.

소중한 아우의 처참한 모습을 그리는 것마저도 부정한 일이었다. 세준은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에 떠오른 환상을 지워 냈다.

“다들 물러가 할 일을 하거라.”

“은재를 찾아야 합니다.”

세준이 물러서지 않고 맞서자, 김윤덕의 시선이 주변에 몰려 있는 수복에게 향했다.

그들은 집에 머물지 않고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었다. 달갑지 않았으나, 김윤덕은 말을 경계했다.

세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 김윤덕이 작게 속삭였다.

“네가 그 아이를 아끼는 마음은 알겠으나, 조심하거라.”

세준의 얼굴빛이 파리해졌다.

“…예?”

“정겨운 우애도 다른 이들은 곡해할 것이니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버지!”

제 뜻을 곡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비였다. 세준은 경멸이 어슴푸레하게 물든 눈빛으로 김윤덕을 바라보았다. 김윤덕은 평소와 다름없이 인자한 모습이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찾아보거라. 길이 엇갈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김윤덕은 홍 씨의 수발을 받으며 큰 사랑채로 향했다.

세준은 제가 있는 곳에서 멀어지는 아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비가 향하는 길목으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어둠이 꼭 자신이 품은 원망과도 같았다.

“도련님, 포도청으로 가 볼까요?”

죄인의 모습으로 숨을 죽이고 있던 꺽새가 세준에게 다가갔다. 세준은 비루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꺽새를 보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문간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틀었다.

* * *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은재는 제 모습이 우스워 몇 번이고 걸음을 멈췄다. 이런 꼴로 집에 들어갔다가는 걱정은 무슨, 오히려 비웃음을 당할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옷 색이 잘 어울립니다.”

어두워진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있지도 않은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은재가 강은 마냥 귀엽기만 했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갔다가는 추궁을 하실 것입니다.”

“누가요. 택원? 형판?”

“형님이 그러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걱정치 마십시오. 그러나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좋지 않을 듯싶습니다.”

은재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강을 보았다. 언제는 자기 탓이라 둘러대라고 해 놓고.

“우리가 함께 떠날 거라는 걸 아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어째서요?”

그리 말했지만, 은재는 곧 강의 뜻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강은 궁궐로 가지 않기 위해, 은재는 주국보다 더 먼 곳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위험도 커지는 것이었다. 은밀하게 치렀던 밀회처럼, 두 사람은 조용히 이곳에서 사라져야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대의 뒤에 숨어 있어야 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지만, 이게 최선입니다.”

“아닙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강은 웃음을 머금었다. 어둠 속에 있으나, 불 앞에 있는 듯 환한 은재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한 발 가까이 다가가 품에 은재를 꼭 끌어안았다.

“날이 밝으면 나리 댁으로 가겠습니다.”

은재는 강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그럼 이곳에서 말복이와 만나 오십시오.”

“예.”

“끝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바로 코앞입니다.”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었지만, 강은 끝내 은재를 저의 품에서 떼어 놓아야 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은재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곳에서 보고 있을 테니 어서 가십시오.”

“그러지 마시고 나리께서 먼저 가십시오.”

“실랑이할 시간이 없습니다. 곧 인정입니다.”

팔자 눈썹을 한 은재가 강을 올려다보았다. 강은 장난스럽게 은재의 어깨를 살짝 툭 쳤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걸었지만, 은재의 고개는 자꾸만 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강은 우두커니 서서 은재를 지켜보았다. 어둠이 완전히 은재를 집어삼킬 때까지 그곳에 서서 보이지 않는 이를 바라보며 그리워했다.

강이 걸음을 뗀 것은 은재가 충분히 집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즘이었다. 되돌아가는 걸음 역시도 무거웠고, 개운하지 않았다. 걸음을 떼면 뗄수록 은재를 향한 그리움이 더해졌다.

걷다가 멈춰 한숨을 내쉬기 몇 번. 가만히 서 있던 강의 귓가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강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은재만을 생각했다.

순간 머리가 쭈뼛쭈뼛 설 만큼 서늘하고 오싹한 기운이 등골에서부터 머리로 올라왔다. 강은 숨을 죽이고 지척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행? 암살?

둘 중 어느 것일지라도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는 일이었다. 강은 도망가기보다 그에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음을 뗐다.

저를 쫓아오는 추격자의 걸음은 조용하기는 했지만 서툴렀다. 쫓는 이는 한 명. 강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그러나 강은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듯한 어설픔을 눈치챘다. 강의 걸음이 곧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굽이진 골목으로 들어서서도 추격자의 미행은 멈추지 않았다. 강을 돕는 듯 구름이 달빛을 집어삼켰다.

지천이 어두워진 틈을 타, 길이 굽이진 틈을 타 강은 다른 곳보다 어둠이 더 짙은 곳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때를 잘못 잡거나 놓친다면 오히려 제가 당할 터였다.

흙바닥을 스치는 추격자의 걸음 소리에 집중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강이 주먹을 꽉 쥐었다.

추격자가 가까워졌다. 강은 위협에서 저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 없이 맞섰다. 손을 뻗어 추격자의 멱살을 잡았고, 허공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주먹이 얼굴을 향해 날아가기도 전에 강에게 멱살을 잡힌 이가 소리쳤다.

“대군!”

강은 눈살을 찌푸려 어둠에 가려진 얼굴을 응시했다.

“접니다, 택원!”

한껏 치솟아 오른 경계심이 단숨에 꺾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세준의 얼굴을 확인한 강이 들었던 주먹을 내렸다.

꽉 쥐었던 멱살마저 풀자 세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강 역시 허탈감에 탄식을 내뱉었다.

“자네가 무슨 일인가.”

강은 자신의 앞에 있는 세준이 낯설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느꼈던 기운은 거짓이 아니었다. 악의를 품은 자의 발걸음은 그랬다. 등골을 서늘하게 했고,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했다.

세준은 선의를 품고 저를 따라온 게 아니었다.

“제가 여쭤야 하는 말입니다.”

강의 뒤를 쫓기 전, 세준은 자신이 보았던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아우를 분별할 수 있었다. 아우와 함께 있었던 이 또한 낯설지 않았다. 쫓았던 건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세준은 화가 치솟았다. 불쌍한 내 아우, 은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말하게.”

“어찌 대군께서 그 아이와 함께 계신 것입니까.”

세준은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이였다. 아비도 그런 이였다. 세준이 제 아비와 닮은 모습을 내보이자, 강은 그게 못내 섭섭했다.

“어째서일까.”

“대군.”

강은 세준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깔린 골목길에 마주 서서 응시했다.

한때는 정겹게 서로를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의 사이에 깔린 기류는 예사롭지 않았다.

세준이 술을 즐기지 않는 탓에 함께 술잔을 기울여 본 적은 없었지만, 열띤 혈기로 형국의 문제점을 논하기도 했었다. 가끔 철이 없는 권호의 간청으로 물놀이를 가면 세준이 시조를 짓고 강은 그림을 그렸었다.

함께할 적 강이 깊은 속내를 드러낸 일은 없었지만, 세준은 말하지 않아도 그의 고민을 알아주던 이였다.

그런 이를 벗이라고 불렀다. 강은 세준이 김윤덕의 자제인 것을 알고도 그를 벗으로 삼았다. 세준이 강에게 내보인 우애가 그리 깊었었다. 친형제와 나눈 우애처럼 진했었다.

강이 웃으며 말했다.

“화났는가?”

세준이 거침없이 드러낸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강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의 아우와 마음을 나누었어. 그런 걸 정분이 났다고 하지?”

“대군!”

“내어 주고, 받고. 사람이 마음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어찌 이리 화를 내.”

“안 됩니다. 안 되는 이유는 대군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세준에게 닿아 있던 시선이 천천히 흔들렸다. 세준은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강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아십니까? 평생을 억누르고 살았던 아이입니다. 평생을 외롭게 살았던 아이인데…. 대군께서는 그 아이를 채워 주시지 못합니다. 아니요. 그 아이와 연을 맺으시면 안 됩니다.”

세준은 그런 말을 한 제 입을 찢어 놓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세준에게는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숙적의 자식인 자네와도 벗이 되었어. 한데 연정은 안 된다?”

“화가 은재에게 미칠 것입니다. 은재가 다쳐도 상관없다는 말씀입니까?”

강은 떨궜던 시선을 들어 세준을 보았다. 세준이 품은 걱정을 보았다. 그리고 비웃었다.

“난 이제 자네의 아비가 무섭지 않아.”

“대군께서는 제 아버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은재를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강의 입술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전혀 기쁘게 와닿지 않고 전신을 오싹하게 했다.

“대군은 나약하십니다.”

세준은 강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강의 눈빛은 차가웠다.

“이미 주고받은 마음이네. 강제로 떼어 놓으려고 해도 자네의 아우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대군께서 끊어 내셔야 합니다.”

“내가?”

“끊으십시오.”

강이 코웃음을 쳤다.

“싫은데?”

“대군.”

“자네의 아비가 묻거든 전하게. 내가 꿈을 품기로 마음먹었다고. 내가 욕심을 내 볼까 한다고. 그리 전하면 자네의 아비가 다 알아서 할 터. 하나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네. 이만큼 져 줬으면 이겨 볼 때도 되었지.”

강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대로 세준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강은 세준과 쌓았던 추억을 잊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 당장 세준에게 배신감을 느낄지언정, 옛 기억마저 곡해하며 세준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세준은 벗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형제이기도 했다.

* * *

나갈 채비를 마친 은재를 꺽새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은재와 함께 자란 꺽새는 단 하루도 떨어져 있던 날이 없었을 정도로 가깝고 형제와도 같은 사이였지만, 입고 있는 옷부터 달라 신분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꺽새는 나가면 안 된다고 막아설 용기가 나지 않아 분주한 은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도련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개운하게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내내 몸에 자리 잡은 열기를 느꼈던 은재였다. 꺽새의 말이 신경 쓰였는지 은재는 애기장 위에 놓인 경대를 열어 낯을 살폈다. 평소와 같은 얼굴에 불그스레한 홍조가 번져 있었고, 콧잔등과 망건으로 가려진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괜찮다. 나 혼자 가도 좋으니, 너는 이곳에 남아 있거라.”

“…도련님.”

안절부절못하는 꺽새를 방에 홀로 남겨 두고 은재는 장지문을 열었다. 대청마루로 발을 딛기도 전, 은재의 시야에 집안일을 하는 사내종의 모습이 잡혔다.

“무슨 일이냐.”

은재의 물음에 마당에 모여 있던 사내종들은 서로 눈빛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이상함을 눈치챈 은재는 물러서지 않고 디딤돌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도련님, 나가시면 안 되십니다.”

가장 덩치가 큰 사내종이 은재를 막아섰다. 은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 안에 머무는 꺽새에게 눈짓을 하자 꺽새는 후다닥 대청마루를 지나 맨발로 기단에 섰다. 은재가 내민 발에 고운 신발을 신겨 주고 다른 쪽 발에도 신을 신겨 주었다.

사내종들이 어수선해졌다.

은재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돌계단을 내려와 기단을 밟고 마당에 닿은 발길은 거침없이 중문으로 향했다. 마당을 지키던 사내종들이 졸졸 중문으로 가 은재의 앞길을 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길을 트지 못할까!”

은재가 내지르는 호통에 그들은 낯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은재가 그들을 파헤치고 중문으로 가려고 발을 떼어도 단단히 결속된 그들을 뚫는 것은 어지간한 힘으로도 소용없을 듯했다.

“비켜라.”

은재의 눈빛이 차갑게 돌변해 그들을 노려보았다. 은재의 곁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꺽새는 상전의 눈치를 보는 것에만 급급했다.

“당장 비키라 하지 않았느냐!”

이들이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재는 이 집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이었다.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았다. 부귀와 영화를 꿈꿔 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자유만을 원했기에 누가 제 뜻에 따르고 따르지 않고를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 눈앞에 펼쳐질 자유를 막아섰기에, 은재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부리는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비키지 않으면 모두 요절낼 것이다.”

협박 따위도 먹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나마 믿을 구석이 있었기에 은재는 과감하게 그들을 겁박했다. 세준이 저를 도울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은재야.”

그때 중문을 통해 들어온 세준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재는 아군이 왔다는 듯 환한 얼굴로 세준을 바라보았다.

“형님, 이들을 좀 보십시오.”

“내가 시킨 일이다.”

“네?”

“안으로 돌아가거라.”

은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세준을 바라보았다. 이 집안에서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변심을 보았기에 당황스러웠다. 은재는 믿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가면 안 된다.”

“안 된다니요.”

“나갈 수 없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거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은재는 눈을 깜박거리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또렷하게 뜬 눈으로 세준을 바라보았다. 세준 역시 한 치 물러섬이 없었다.

단호함으로 물든 세준의 얼굴을 보며 은재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게 탈이 난 듯싶었다.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 터이니, 길을 터 주십시오.”

“안 된다.”

“어찌 안 된다 말씀하십니까…. 아우가 참말로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지요. 하여 반성하고 있습니다.”

“은재야.”

어림도 없었다. 세준은 애처롭게 바라보는 눈빛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딱 잘라 버린 애원은 어중간한 곳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은재는 도무지 세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찌… 나가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입니까.”

“이유는 없다. 네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거라.”

“이유 없이 어찌 막으십니까. 제 잘못이 아니라면서 어찌… 못 나가게 하십니까.”

“내 결정은 너를 위한 것이다. 지금은 내가 원망스럽겠지만, 후에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세준은 은재에게 한 발 다가갔다.

“안으로 들어가거라. 안색이 좋지 않구나.”

손을 뻗어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지만, 은재는 세준의 손길을 거부했다. 뒤로 물러난 걸음과 저를 바라보는 경멸의 눈빛을 보며 세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길을 터 주거라.”

갑자기 그곳에 나타난 김윤덕이 몰려 있던 사내종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세준의 눈치를 보았다. 이 집안에서 제일 윗사람이 누군지는 분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준의 실권 또한 만만치 않았다.

“혼례를 올리려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던 아이다. 그동안 집에만 머물렀으니, 그간 못한 도성 구경을 마음껏 해야지. 나가거라.”

“아버지!”

“이곳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세준은 돌연 방향을 틀어 버린 김윤덕을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은재를 눈에 담았지만 은재는 이미 세준을 외면하고 있었다. 저에게 품은 선명한 미움을 보는 순간, 세준은 전처럼 은재에게 웃음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올 터이니, 잠시 기다려라.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은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에게서 등을 돌려 중문을 나서는 세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문간이 조용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들끼리 무언의 말을 주고받던 사내종들에게 은재의 시선이 닿았다.

“막을 생각하지 말아라.”

그 말을 끝으로 은재는 서슴없이 중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어찌 그러십니까! 은재가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저 운명이 정한 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아버지!”

장죽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은은하게 방 안에 퍼지고 있었다. 세준은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김윤덕을 주시했다.

“저 둘은 운명이 아닙니다.”

“누구도 단정할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두 사람은 이어질 수 없는 악연입니다!”

“우연으로 만들어진 인연이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 같으냐. 네가 대군과 벗이 되었을 때, 그때부터 두 사람은 맺어질 운명이었다.”

세준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너로 인하여 시작된 인연이다.”

원망을 담은 시선에도 김윤덕은 반응하지 않았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부리를 물고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내뱉는 숨에 희뿌연 것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지독하고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악랄함이었다.

“제 탓을 하시려거든 그리하십시오. 그러나 막아야 합니다. 두 사람의 인연을 악연으로 만든 것은 아버지십니다.”

적나라한 비난에도 김윤덕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다. 나 또한 끊어 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었다. 하나 그 아이의 운명이 대군인 것은 어쩔 수 없더구나.”

“지금이라도 은재를 현천으로 보내십시오.”

줄곧 무표정했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누굴 향한 비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준은 아비가 내보이는 웃음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 속에 담긴 꿍꿍이를 다 들춰내겠다는 마음으로 그리 날카롭게 보았다. 그러나 김윤덕은 단단한 자였다.

“두 사람의 몸에 새겨진 합환 증표가 사라진다면, 떼어 내기도 쉽겠지.”

세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버거웠지만 세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위험해지는 건 그 아이다. 그리되길 바라느냐?”

지엄한 국법을 어겼다는 사실을 빌미로 아비는 은재의 안위를 손에 쥐고 있었다. 제가 내뱉는 말 한 마디에 은재의 생사가 결정될 것 같았다. 뒤늦게 세준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살그머니 피어올랐다.

“아무 말 말고 지켜보거라. 그리함이 마땅하다.”

세준은 보았다. 아비의 시커먼 속내를 깨달았다. 아비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보았다.

아비는 여전히 은재를 도구로 보고 있었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소모할 도구. 아비는 권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비는, 다정하고 사랑이 깊은 아비는 음흉했고, 추악함으로 똘똘 뭉친 위선자였다. 그러나 세준에게는 그런 아비를 막을 힘이 없었다.

가까스로 집 밖으로 나온 은재는 말복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갑자기 찾아온 어지럼증에 떼었던 걸음을 몇 번이나 멈췄다. 마치 오뉴월의 더위가 저를 집어삼킨 듯 온몸에서 열이 뿜어져 나왔고, 속에서 뭔가가 치고 올라오는 듯한 울렁거림까지 느꼈다. 그제야 제 몸 상태를 알아챘지만, 이미 뗀 걸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도련님!”

멀지 않은 곳에서 말복이 은재를 보며 팔을 들어 휘저었다. 말복의 곁에 혹시라도 강이 있을까 은재의 눈길이 분주했다. 보이지 않는 이를 찾아 헤매던 시선에 아쉬움이 깃들었지만, 은재는 웃음을 지었다.

금세 은재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말복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은재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많이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괜찮다. 나리께서는?”

“나리께서는 일찍이 입궐하셨지요. 근데 참말로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괜찮다는 말과는 다르게 은재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은재의 뒤를 따르던 말복이 몇 번이나 휘청거리는 은재의 몸을 부축했다.

꿋꿋한 걸음으로 강의 집 앞에 도착한 은재는 꽤 힘겨운 여정을 마친 사람처럼 많이 지쳐 보였다.

“도련님!”

부축했던 말복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은재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 * *

대문간을 들어선 강은 집 안에 깔린 향내에 킁킁거리다 은재의 향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금방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는지 공중에 향이 떠다니고 있었다.

말복 아범이 강에게 알은체를 했다.

“나리 오셨습니까.”

“어디 계시냐.”

“그게…. 몸이 좋지 않으셨는지 오시자마자 쓰러지셨습니다.”

“쓰러지다니?”

“의원을 부를까 했는데…. 도련님께서 쉬면 괜찮다고 하시기에, 작은 사랑채에 모셨습니다.”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강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약한 이에게 너무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알겠으니, 일 보시게.”

강은 가벼운 걸음으로 작은 사랑채로 향했다. 사랑채와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향의 정체를 알면서도 강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걸음을 떼었다.

방문을 열자 짙은 꽃 향이 코를 찔렀다. 강은 느껴지는 강렬한 향에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나리….”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홀린 듯 문지방을 넘자, 방 안에 가득 찬 외격소가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강을 덮쳤다.

강은 신비로운 것을 보듯 이불에 누워 있는 은재를 바라보았다.

붉게 상기된 보드라운 뺨.

짙은 숨을 내뱉는 도톰한 입술.

눈가에 맺힌 눈물과 땀이 번진 볼록한 이마.

시선을 고정한 채 은재에게로 다가갔다. 무엇 때문인지 은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고리의 고름이 풀어 헤쳐져 살갗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었다.

강은 잔뜩 경직된 은재를 바라보며 곁으로 가서 낮게 앉았다. 그리고 은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제 허벅지에 내려놓았다.

“나리….”

말끝에서 흑, 하고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은재를 보며 강은 손바닥으로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몸이… 이상합니다….”

대문 앞에 닿기 무섭게 정신을 잃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더운 열기에 눈을 뜬 곳이 강의 방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은재는 처음 겪어 보는 지금이 두려웠다. 뜨거운 화마가 몸을 덮친 듯 전신으로 퍼진 열기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강이 오기 무섭게 은재는 목구멍에 걸쳐 있던 설움이 툭, 하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괜찮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뜨거운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은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은 제 손으로 은재의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눈물이 묻은 손가락을 제 입에 가져다 댔다. 혀를 살짝 내밀어 눈물의 맛을 보자 풍기는 달콤한 향내와 어울리지 않는 짭짤함이 입 속으로 퍼졌다.

“나리….”

은재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강은 그런 은재를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강의 손은 계속해서 홍조가 깃든 뺨을 쓰다듬었다.

“성주기가 시작된 것이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질끈 눈을 감고 있던 은재가 살며시 눈을 떴다.

저 혼자 이곳에 머무는 동안 곳곳에 희미하게 배어 있는 강의 외격소를 느꼈었다. 열기도 열기지만, 강의 자취가 은재를 더더욱 괴롭혔었다. 지금은 강이 곁에 있었기에, 그가 뿜어내는 짙은 향 때문에 괴로웠다.

은재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뗐다.

“성… 주기….”

성주기라는 것이 제게 찾아왔다니, 은재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리 찾아오지 않아 애를 태웠던 것이지 않았던가. 기뻐할 일인데도 은재는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여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글로 배웠던 성주기라는 것이 이렇게나 독한 것이구나.

은재는 제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저고리 등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 와중에도 저에게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날까 봐 걱정하며 슬쩍 강의 허벅지를 밀어 냈다.

“네, 성주기. 별거 아닙니다. 비록 처음이라 생소하겠지만, 이 또한 곧 지나갈 것입니다.”

강은 그 미약한 손짓에 피식거렸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골똘히 보았다.

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눈동자에 다시 웃음을 내보였다. 안심시킬 생각이었지만, 불안한 마음을 쉽게 놓지 못하는 은재가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물론 익숙하지 않을 것이었다. 저 역시도 첫 상사기가 찾아왔던 순간은 혼란으로 다가왔었다. 제가 겪었던 그 격동의 시간이 은재에게도 찾아왔다 하니, 강은 진심으로 은재가 안쓰러웠다.

“나리…. 이제 어떻게 하죠….”

성주기라는 것은 미묘한 것이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고,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었다.

발가락 끝과 손가락 끝은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으로 저릿했고, 증표가 새겨진 안쪽 허벅지는 뜨거운 인두로 지진 것처럼 뜨거웠다.

배 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 불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축축해진 밑. 은재는 모든 게 거북하기만 했다.

“나리….”

강을 재촉하듯 아무 말이 없는 강을 불렀다. 강은 입을 꾹 다물고 은재를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재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저 애가 단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은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익숙해져야 합니다.”

잔잔한 목소리가 은재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은재는 구멍에서 질질 흘러나오기 시작한 진액의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부끄러워 티를 내지 못했지만,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몸으로 뒤처리를 어찌하면 좋을까, 싶었다.

“이상합니다…. 제 몸이 아닌 것 같아요….”

은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입 밖으로 삐져나오는 숨조차도 뜨거워 입 안이 화끈거렸다. 저에게 닥친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이 잔인한 성주기라는 것이 무탈하게 스쳐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있는 그대로 느껴 보세요.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강의 시선이 머리로 시작해 발끝으로 내려갔다. 시선이 다시 올라오는 길에 불룩 튀어나온 고간 부근에서 멈췄다. 그 눈길을 의식한 듯 은재의 손이 슬쩍 올라와 고간을 덮었다.

한껏 달아오른 몸뚱이는 뜨겁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음란한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밑구멍이 제멋대로 움찔거렸고, 성기는 별 자극 없이도 몸집을 키웠다. 이런 음란한 모습을 강에게 들키게 되면 어쩌나 싶어 은재는 마음을 졸였다.

볼을 쓰다듬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살갗을 훑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손길에 은재는 더운 숨을 내쉬었다. 옷에 가려진 살갗이 그 손길을 원한다는 듯 움찔거리며 단단하게 굳어졌다.

애간장을 녹이려는 듯 강은 은재의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으읏….”

부드러운 손길에 툭 튀어나오는 음란한 소리가 부끄러웠는지 은재가 강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제 살갗에 퍼지는 더운 숨결에 강이 흐릿한 웃음을 흘렸다.

“얼굴을 보여 주세요. 나는 그대의 붉은 얼굴이 좋습니다.”

은재는 그 말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강을 끌어안고 신음했으면서 이건 이거대로 부끄럽다며 계속 얼굴을 감췄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은재는 충실하게 반응했다. 강은 아랫배를 쓰다듬던 손길을 옮겼다. 저 혼자 풀린 허리끈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느슨해진 바지 틈을 손으로 파고들며 부드러운 살갗을 매만졌다.

“흐읍!”

은재는 무릎을 세웠지만 발끝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강은 비비 꼬는 다리를 보며 손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은재의 몸이 뒤틀렸다.

“으읏!”

선액으로 범벅이 된 성기를 매만지는 순간, 은재가 신음을 터뜨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줏대 없이 흔들리던 다리가 무너지더니 모로 누워 엉덩이를 뒤로 빼려고 했다.

강은 은재가 물러나는 만큼 다가갔다.

“아…. 아읏….”

둥글고 매끄러운 선단을 손바닥이 감싸자 은재의 얼굴이 더욱더 강의 허벅지에 밀착되었다. 얇지 않은 비단으로 뜨거운 숨결이 스며들었다.

“이리 하면 한결 나아질 것입니다.”

굵고 단단한 손가락 마디가 성기의 얇은 살가죽을 문질렀다. 드문드문 간질이듯 선단을 문대는 손길에 은재는 모두숨을 내쉬었다. 목을 긁고 나가는 신음이 부끄러워 그렇지 않아도 달뜬 뺨이 더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머릿속도 몸뚱이도 본능만 좇고 있었다.

더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은재는 근처에 진하게 깔려 있는 강의 외격소에 집중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은재의 숨결이 닿은 곳이 화끈거렸다. 수치심에 허벅지를 파고들 것이라 생각했던 은재의 얼굴이 일순간 틀어지더니 점점 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강은 은재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좋은 향이 납니다….”

뼛속까지 박혀 있는 줄 알았던 샌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듯 은재는 음란한 얼굴로 강을 올려다보았다. 강은 저를 보는 눈빛에 헛숨을 들이마셨다.

먹음직스러운 입술에 당장이라도 제 입술을 가져다 붙이고 싶었지만 은재가 불쑥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고간이 있는 곳에 가져다 대고 비비적거리는 모습에 강은 또 한 번 헛숨을 들이마셨다.

“원합니까?”

오뚝한 코가 성기의 선단을 짓눌렀다. 숨을 들이마시며 강은 은재의 뺨을 제 손으로 덮었다. 대답 없이 고간을 파고드는 은재를 보며 강은 제가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 던졌다. 저고리도, 바지의 허리끈도 풀어 헤쳤다.

강이 허리끈을 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은재가 바지 속에 가려져 있던 강의 것을 꺼내 반쯤 발기한 성기를 끈덕지게 바라보았다. 제 밑구멍을 들락날락했던 그것을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 배를 바닥에 깔고 엎드려 두 손으로 강의 성기를 쥐었다.

아마도 강이 뿜어내는 외격소 탓에 완전히 이성을 상실했을 터였다. 은재는 별로 크지도 않은 입술을 벌렸다. 한입에 다 넣기에는 부담스러운 성기를, 아직 제대로 몸집을 키우지 않은 강의 것을 입에 담았다.

해 본 적이 없는지 은재는 서툴렀다. 그것 또한 흡족한 강은 저의 것을 입에 문 은재를 만족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으음….”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받아 본 기억은 있어 은재는 느꼈던 대로 행했다. 수컷 특유의 냄새보다는 청량한 솔잎 향이 감도는 선단을 혀로 핥았다. 입 안 가득 넣어도 뿌리까지 모두 삼킬 수 없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성기로 입 안이 가득 차자, 은재는 숨을 몰아쉬며 성기를 뱉었다. 기둥을 따라 내려가며 입술로 쪽쪽 입맞춤을 했다. 정액으로 가득 찬 음낭을 입에 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강은 짙은 숨을 내뱉었다. 단단하게 조여 맨 상투 끈을 풀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억압에서 풀려나 아래로 흩어졌다. 강은 은재의 머리카락을 한 줌 쥐고 제 코가 있는 곳으로 들어 올렸다.

전신에서 솟구치는 외격소와 머리카락에 배어 있는 외격소를 들이마시며 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은재의 등줄기를 어루만졌다.

축축해진 엉덩이 골을 스치고 회음을 타고 더 아래로 내려간 손가락은 진액으로 퉁퉁 불은 은문에서 멈췄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문지르자 물기 어린 소리가 약하게 울렸다.

“우읍…!”

성기의 선단을 입에 물고 빨아들이는 것에 정신을 빼앗긴 줄 알았건만 은재가 신음했다. 강은 계속해서 검지로 은문을 둥글게 문질렀다.

강 또한 점점 달아오르는 저의 몸뚱이를 느꼈다. 그 이상 신호는 상사기를 알리는 것이었다.

음인이 곁에 없어도 상사기는 매달 찾아오는 것이었지만, 본디 성주기를 겪는 음인 곁에 머물면 양인에게도 상사기가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기운의 작용이 그랬다. 음기가 짙으면 그만큼 양기도 짙어지고, 양기가 짙으면 음기도 그만큼 짙어졌다. 성주기와 상사기는 어느 음양인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뽀얀 얼굴에 선명하게 퍼진 홍조가 마음에 들었는지 강의 입꼬리가 더 위로 추켜 올라갔다. 강은 주름진 곳을 문지르던 손가락 끝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으읏….”

순간, 제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손가락에 은재가 몸을 잔뜩 움츠리며 아래로 무너졌다.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목에서도 힘이 빠졌는지, 우뚝 솟아난 선단 위에 은재의 뺨이 닿았다. 선단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강의 것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힘을 빼십시오.”

파고든 손가락의 마디를 잘라 낼 듯 구멍에 힘이 들어간 걸 몸소 느끼던 강이 나긋한 목소리로 은재를 얼렀다.

강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처박고 달뜬 숨을 내뱉던 은재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강을 보더니 움츠러든 몸에서 애써 힘을 뺐다. 안으로 침범한 손가락이 내벽을 훑으며 뒤로 물러나자 은재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신음했다.

그대로 바깥으로 나갈 줄 알았는데, 손가락은 뿌리까지 안으로 밀어 넣을 기세로 다시 내벽을 문지르며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불쑥 들어온 그것이 민감한 부분을 쿡 하고 찔렀다.

“아읏!”

축 처져 있던 은재의 고개가 위로 젖혀졌다. 은재는 그 감각이 쌓이고 쌓이다가 무엇을 가져올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면서도 이전과는 느껴지는 강도가 달라 무서웠다. 지금 제 몸에 퍼진 모든 느낌이 좋으면서도 더 강력한 것을 원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니,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했다.

“아, 흐읏….”

그렇지 않아도 달아오른 몸뚱이가 감질 나는 행위 때문에 더 뜨거워지고 더 간지러워졌다. 온몸에 수만 마리의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고, 발가락이며 손가락에 퍼진 저릿함이 몸뚱이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은재가 원하는 건 단순했다. 파지직,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황홀했던 쾌락.

은재는 기세가 이전과 다른 강의 성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투명한 선액이 몽글몽글 맺혀 있는 선단을 입에 물고 쭉 빨아들였다. 위에서 들려오는 짙은 숨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은재는 서투르게 혀를 움직였다.

첫 합환을 했을 때처럼 강은 은재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진액이 줄줄 새어 나오는 구멍에 단 한 번도 파정하지 못한 제 것의 선단을 가져다 대고 문질러 댔다.

은재는 강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 풀린 눈으로 강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성기가 축축하게 젖은 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후읏!”

복부에서 느껴지는 꽉 찬 느낌에 은재는 신음을 토했다. 그러곤 이를 꽉 깨물었다.

내벽에 성기가 가득 차자 온몸에 퍼진 열기처럼 희열이 전신으로 빠르게 치솟아 올랐다. 민감한 부분을 짓누르다 뒤로 물러나는 그 느낌이 좋아 은재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흐읏….”

눈을 질끈 감고 강의 어깨에 뺨을 댔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을 느끼며 강은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은재의 몸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 아흣!”

행위는 가볍고 느릿했다. 성기가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쳐들어가자, 어깨에 닿아 있던 고개가 떨어져 위로 젖혀졌다. 강은 은재의 얼굴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더운 숨을 내뱉는 입술이 탐스러웠고, 깊은 속에서 목구멍을 긁고 나오는 신음이 그저 좋았다.

“하아….”

뜨겁고 부드러우며 축축한 내벽은 더할 나위 없었고, 제 것이 깊은 곳을 쿡 찌를 때마다 반응하는 모습에 흥분감이 고조되었다.

강은 은재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대의 품…. 좋습니다….”

달싹거리는 입술이 가만히 있는 입술을 간지럽혔다. 은재는 강의 입술과 저의 입술을 맞붙이기 위해 강에게로 다가갔다. 감당할 수 없는 강의 성기를 입에 머금어서 입술이 퉁퉁 부르텄는데도 강은 그 입술이 맛있다는 듯 쪽쪽, 빨아 댔다.

여유롭게 천천히 이어 가던 추삽질이 조금씩 빨라졌다.

“나리…. 하, 하읏!”

강에게 매달린 채 몸을 들썩거리던 은재가 부르짖었다. 강 역시도 지금까지 고수하던 점잖음을 내던지고 은재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아흣! 아, 아, 아읏!”

은재의 등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강은 상체를 약간 세우고는 은문 속에 제 성기를 거칠게 처박았다.

진액으로 흥건한 살갗에 메마른 살갗이 닿았다. 쩍쩍거리며 요란한 소리가 신음과 함께 울려 퍼졌다.

“아읏! 아, 앗! 나리…. 흐읏!”

강하게 안쪽으로 쳐들어오는 성기가 깊은 곳을 쿡쿡, 찌르고 도망갔다.

거친 몸짓의 파동으로 곧추선 은재의 성기가 파닥거릴 지경이었다.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아랫배를 내리치던 성기의 끝에서 투명한 선액과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정액이 섞여 나왔다. 질척해진 아랫배에 선단이 닿으면 은재는 크게 신음을 내뱉었다.

은재는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저 혼자 꺼덕거리는 성기를 손에 쥐고 생산성 없는 행위를 강행했다. 수음이라는 것을 해 본 적 없었기에, 그 행위는 실로 자극적이면서도 강렬했다.

“흣! 나리! 아, 으읏!”

강의 격렬한 움직임처럼 은재의 손도 바쁘게 움직였다. 이윽고 선단에서 정액이 터져 나와 아랫배에 쏟아지자 은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액을 사출하며 몸에 힘을 가득 주자 당연히 성기가 드나들던 은문에도 힘이 들어갔다.

“하아….”

강은 저의 것을 옭아매는 부드러운 내벽을 느끼며 숨을 터뜨렸다. 그리고 앙상한 가슴뼈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로 숨을 가쁘게 쉬는 은재를 바라보았다.

“나리….”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촉촉한 눈을 가진 은재가 강을 불렀다. 온몸에 만족감이 감돌기도 잠시, 강은 작게 탄식했다.

“안 됩니다. 정신 차리세요.”

천천히 감기는 눈을 보며 강은 두 손으로 은재의 뺨을 부여잡았다.

“자꾸만… 눈이 감깁니다….”

지난 시간 동안 파정과 동시에 잠에 들었던 은재를 기억했다. 이번만큼은 은재가 잠드는 걸 볼 수 없었던 강은 어떻게든 은재를 깨울 생각이었다.

“일어나세요. 눈 감으면 안 됩니다.”

“나리….”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에 강은 허리를 뒤로 뺐다. 그리고 한달음에 안으로 쑥 밀어 넣고 깊은 곳을 쿡, 찔렀다.

“으읏!”

벼락을 맞은 듯 은재가 펄쩍 뛰어올랐다. 당황이 어린 눈으로 강을 바라보자 강은 입꼬리를 추켜올려 은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몇 번이나 파정한 강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은재의 속을 파고들었지만, 은재는 달랐다.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졌다는 듯 축 늘어진 몸으로 강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치렀던 합환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저에게 쏟아진 쾌락도 감당할 수 없었지만, 지치지 않는 강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하읏, 나리…. 아흣!”

혼탁하고 어지러운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잠들지 못하도록 강이 짓씹은 어깨가 화끈거렸다. 손가락을 깨무는 것도 서슴지 않던 강은 얼굴을 낮춰 은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붉게 부르튼 것은 비단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구멍의 얇은 살가죽 또한 붉었다. 성기가 안으로 들어가면 부은 살가죽도 함께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강의 허리 짓에 굵고 긴 성기가 뒤로 물러나면 강이 안에 뿌려놓은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희고 뿌연 정액은 엉덩이 골을 따라 흐르다 뚝뚝 떨어지며 이불을 적셨다.

강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은재를 바라보았다. 힘들어하는 은재를 안쓰러워하면서도 강은 격렬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깊은 곳, 더 깊은 곳으로 저의 성기를 밀어 넣던 순간이었다. 무엇인가에 성기가 턱, 하고 걸렸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던 강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빠르게 허리를 뒤로 뺐다.

“아읏! 아, 아앗!”

강의 몸짓에 장기가 딸려 나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덜컥 겁이 난 은재가 비명을 내지르자, 강이 움직임을 멈췄다.

“나, 나리! 아, 아읏!”

몸 안에서 점점 몸집을 부풀리는 성기를 느끼며 은재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놀란 티를 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것은 만고(滿臌)였다. 만고는 성주기와 상사기를 겪는 음양인이라면 응당 겪는 것이었다. 성기의 선단이 아기집에 걸리고, 사정을 위해 성기가 부풀어 올라 내벽을 빠듯하게 메웠다. 그 순간 음양인이 느끼는 쾌락은 보통 때의 합환과는 달랐다.

“하아….”

강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몸집을 키우는 성기를 느꼈다. 그리고 저의 것을 조이는 내벽을 느꼈다.

“나리… 흐읏! 무, 무섭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은재는 제 안에서 점점 커지는 강의 것이 배를 뚫고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웠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제 아랫배를 문지르자 볼록한 것이 느껴졌다.

“쉿…. 괜찮습니다.”

저도 처음 겪어 보는 만고가 생소하면서도 강은 겁에 질린 은재를 달래듯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하, 하지만…. 흐윽….”

“금방… 끝날 것, 입니다….”

강에게도 견디기 힘든 쾌락이 쏟아졌다. 성기를 옭아맨 내벽의 느낌에 황홀함을 느끼며 강은 은재를 부둥켜안았다.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은재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아읏! 아, 아앗!”

발작하듯 은재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강은 더더욱 은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흣….”

만고는 그리 길지 않았다. 아기집에 걸려 부풀었던 성기가 사정을 하는 동시에 크기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강은 짙은 숨을 내뱉으며 제가 끌어안고 있던 은재를 확인했다. 이미 정신을 놓은 듯 은재의 몸뚱이가 축 늘어져 있었다. 강은 그런 은재를 보며 피식거렸다. 그리고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는 은재의 이마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입을 맞췄다.

강에게는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떠나야 할 명분이 생길 것이었다. 강은 그 명분을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인연을 짐 덩어리로 여겼던 나날과는 달랐다. 지금의 강은 저와 은재 그리고 식구가 될 명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 * *

곧 인정이 될 늦은 시간이었다. 바깥을 서성이는 인기척에 잠에서 깬 강은 품에 안겨 있는 은재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져 얼굴에 달라붙은 은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는 뺨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체를 가리기 위해 옷걸이에 걸려 있던 도포를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장지문을 열기 전 장식대에 걸려 있던 장검으로 손을 뻗었다.

강은 동요하지 않았다. 문을 열 때도, 문지방을 넘어 대청마루에 두 발이 닿았을 때도 무심한 얼굴이었다.

기단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는 부경을 보았을 때, 강은 헛숨을 터뜨렸다. 제 목숨을 노리는 자객일 것이라는 생각이 틀렸기에 한순간 안도했지만, 마음을 아예 놓을 수는 없었다. 부경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강은 올 것이 왔음을 짐작했다.

“돌아가셨느냐.”

“위독하십니다. 이 밤을 넘기지 못하실 듯합니다.”

강은 침묵했다. 부경은 침묵하는 강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입궐하시지요.”

그 짧은 찰나, 모든 결정을 내린 듯 강은 부경의 눈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나는 갈 수 없다.”

“…대군.”

“떠날 것이다.”

곧 있으면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의 소리가 도성을 휘감을 것이었다. 단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강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세자 저하께옵서 위독하십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나는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

강은 부경을 그곳에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곤히 잠든 은재의 곁으로 다가가 구김 하나 없는 속옷을 입고 잠이 든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십시오.”

조급한 마음과 달리 강은 차분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은재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어서 일어나세요.”

“…예?”

잠이 덜 깬 은재는 멍한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저를 보며 짓는 웃음에 은재도 따라 웃었다.

“지금 떠나야 합니다.”

그 말에 은재의 눈이 번뜩거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강을 마주했다. 어둠 속에서 훤히 보이는 강의 표정을 읽었다. 어디든 따라가겠노라, 제 입으로 내뱉었던 말을 은재는 기억하고 있었다.

은재는 미동조차 없었다. 강은 그런 은재를 보며 불안했다. 떼어 내지 못한 미련이 있는 것일까. 은재가 뭐라 답할지 몰라 물을 수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은재는 어미가 제게 준 건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미의 유일한 유품이었다. 그것을 놓고 떠나는 걸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라앉힐 수 없는 미련이 성을 냈다.

침묵은 얼마 가지 않았다.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고 은재가 말했다.

“어머님의 유품이… 가지고 오지 못한 게 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바로 나와야 합니다. 어서 옷을 입으세요.”

강은 잘 정리해 놓은 은재의 옷을 건네주었다. 분주함 속에서도 얼떨떨하기만 했던 은재는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강이 말했던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때가 올 줄은 몰랐었다. 그러나 굳게 결심했던 대로 은재는 강을 믿고 움직였다.

“아주 먼 곳으로 갈 것입니다.”

강은 흩어져 있던 은재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쥐고 능숙한 솜씨로 상투를 틀었다.

“얼마나 먼 곳으로 갈 것입니까?”

“천 리는 훨씬 넘겠지요.”

상투 끈으로 뭉친 머리를 묶은 뒤 이마에 망건을 두르고 뒤통수에서 끈을 조여 매듭을 묶었다.

“그리 오래 걸어 본 적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대가 지쳐 보이면 내가 업으면 됩니다.”

은재가 피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강은 훤히 드러난 은재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댔다. 그리고 은재의 체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고맙습니다.”

나긋한 목소리에 은재는 입꼬리를 올렸다.

“오히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어째서요.”

“아주 먼 곳까지 함께 가자는 약조를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제게 자유를 주기도 하셨고요.”

은재가 몸을 돌려 강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제가 먼저 나서 강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곧 다시 뵙지요.”

강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자, 익숙하지만 낯선 이가 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강은 디딤돌 앞에 앉은 은재의 발에 손수 신을 신겨 주었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됩니다. 저이가 함께 갈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나오면 곧장 지강문으로 오십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어서 가세요.”

기단 위에 발이 닿은 은재는 대청마루에 선 강을 바라보았다. 강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은재는 마음속에 떠오른 불안을 게우려고 애썼다.

“부탁하네.”

강과 함께 궁궐로 가려고 했던 부경은 마지못해 강의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누구보다도 강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의 선택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제가 그동안 품었던 원망이 지난 이 년 동안 삭아 없어졌으니, 부경은 이제 강이 행복해지길 바랐다.

“알겠습니다.”

부경의 걸음이 떨어지자 은재는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그곳에 남아 은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은 곧 제가 할 일을 기억해 낸 사람처럼 다시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떠날 때를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그는 이 층으로 된 옷장에서 짐 보따리를 꺼냈다. 옷을 갖춰 입고 소명이 저에게 준 장검을 챙겼다. 돈으로 맞바꿀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챙겼다. 때의 시급함을 알았기에, 움직임에는 쉴 틈이 없었다.

“나리!”

바깥에서 말복 아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은 봇짐을 챙겨 들고 바깥으로 향했다. 말복 아범은 난처한 모습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발 빠른 말이 벌써 도성 전역으로 퍼진 듯 마당에는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있었다. 주둥이에서는 하나같이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금방 세자가 훙서했다는 듯 설움이 가득한 울음이었다.

“대군, 어서 입궐하셔야 합니다.”

“세자 저하께옵서 위독하시옵니다.”

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흐느끼는 울음소리에서 느껴지는 이기심에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찌 이 늦은 시간에 이곳까지 걸음 하셨는가?”

제일 먼저 나서 사람을 모은 듯한 이가 말했다.

“세자 저하께옵서 훙서하신다면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존하실 분은 바로 대군 대감이십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입궐하셔야 합니다.”

그는 연파의 일원이었다. 조정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을 만큼 가문이 뒷받침하는 권력자였다. 그는 경파와 연파의 위협적인 줄다리기에서 자신의 고집을 강력하게 내세울 만큼 강했다.

그러나 그는 너그러운 자였다. 원망을 알지 못했고, 분노를 내보이지 않았다. 적인 경파와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거래에 능했다.

형장에서 피를 토해 내며 죽음을 맞이했던 이들에게는 배신자였다. 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 아군을 버린 변절자였다.

그는 연파의 수장이었고, 연파의 적폐였다.

“내가 뭘 해야 한다고?”

“범랑의 세자는 주상의 적장자인 대군께서 이어받으시는 게 온당합니다. 부디 입궐하시어야 합니다.”

강은 웃음을 내뱉었다. 툭툭, 거칠게 내뱉었다.

까칠하고 날카로운 웃음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이들에게 쏟아졌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조아린 머리를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리하자고 작당을 하고 왔을 터였다.

“세자 저하의 곁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주상 전하의 명을 받으시옵소서.”

지금까지 목을 감추고 숨소리를 낮췄던 이들치고는 하나같이 내지르는 목소리가 컸다. 과감하게 내보인 목이 어느 순간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는데 그들의 기세는 단호했다.

강이 스스로 가지 않겠다면 끌고서라도 궐로 가겠다는 강단을 내보였지만 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혹 충격이 심해 정신이 나간 것인가?”

그 말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몇몇 대신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환멸을 바라보며 강은 짓궂게 그들을 비웃음으로 깎아내렸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당장 이곳에서 나가시게.”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이라고 여긴 듯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우두머리 자격으로 온 자는 물러서지 않을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읍소했다.

“곧 교서가 내려올 것입니다. 주상 전하께옵서 대군을 세자의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강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게 확실해지는 순간, 강은 그들의 비열함에 혀를 찼다.

“지금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던 이유가 지금을 위해서였다니…. 아니, 경들은 단 한 번도 숨을 죽이지 않았다. 그저 자기 목숨이 아까워 나서지 않았어. 그대들의 동지가 죽어 나갈 때 그대들은 침묵했지.”

“대군! 우리의 뜻을 폄훼하지 마십시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 와서 이리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믿는 구석이기는 했나 보군. 하나 그대들은 비열한 기회주의자일 뿐, 충성심이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나를 등에 업고 경파를 짓누를 상상에 들떠 달려온 듯싶지만, 나는 경들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것이네.”

강의 비난에 참을 수 없었던 그가 소리쳤다. 언성이 높아짐에 따라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언짢음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군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군께서 어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냔 말입니까!”

“나는 그대들의 무엇이 되길 자처한 적이 없었다. 나를 지키려고 했다? 진정 나를 지키려고 했던 이들은 하나 보이지 않는데? 나는 그대들의 꼭두각시놀음에 놀아날 생각이 없으니, 마음을 접고 돌아가시게.”

“대군께서 없으면 이 나라의 종묘사직은 누가 보존한단 말입니까! 대군, 제발 진정하십시오. 지금은 함께 마음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는 듯 강의 얼굴이 구겨졌다. 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다시 방으로 향했다. 강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그곳에 무릎을 꿇은 이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한목소리로 외쳤다.

“부디 범랑의 종묘사직을 보존하십시오!”

다시 강이 대청마루에 모습을 드러냈다. 둥글고 환한 보름달에 반짝이는 금속의 빛깔이 마당에서 소리치는 이들을 겨누고 있었다. 하나둘, 그 반짝임을 본 이들의 눈이 달만큼 커졌다.

“내 칼을 들었다. 어디 한번 계속 지껄여 보거라.”

“대, 대군….”

“이번에 그대들이 목숨을 내놓고 읍소한다면 그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내가 내 발로 궐에 들어갈지도 모르지.”

강의 횡포를 예상하지 못한 듯 가장 선두에 서서 목청을 높였던 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계속해 보라니까?”

강은 날이 서늘한 칼을 들고 맨발로 돌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떼었던 발이 기단 위에서 멈추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았던 이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그대들의 목이 바닥에 나뒹굴 것이네.”

강의 걸음이 떨어졌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를 향해 내딛는 걸음이 무서웠는지, 한껏 겁을 집어먹은 이들은 양반이 지녀야 하는 품위를 잊은 듯 꽁지가 빠지도록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

“아둔한 것들.”

강의 입에서 시린 말이 흘러나왔다. 비단 연파를 향한 원망만 공중으로 흩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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