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찔레꽃 (下)
이 년 후.
종기로 시작된 세자의 병환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세자의 등창은 괜찮아질 만하면 재발해서 약방 의관의 애를 태우곤 했는데, 생기는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았다.
또다시 자리에 누운 세자는 신열에 괴로워하며 계속해서 앓았다. 최고급 약재로 열을 다스리고 짓무른 상처에 고약을 덧발랐음에도 나아지지 않자, 궁궐 사람들은 동궁에 올리는 물 하나도 정성을 담아 올리고는 했다.
세자는 임금의 자랑이었다. 더 나아가 범랑의 미래였다. 세자는 유약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만큼 굳건하고 강한 자였다. 그런 세자의 병환은 절망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궁궐에 몸담았던 이들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들은 세자가 누워 있는 그 자리에서 생을 잃었던 또 다른 세자를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했다.
낮의 볕은 따뜻했지만, 밤이 되면 목덜미가 시릴 정도로 추운 봄이었다. 그러나 궁궐에서는 바람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추위를 몰고 왔다. 그럴 땐 뜨거운 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도 목덜미가 오싹했다.
또다시 궁궐에 바람이 불 것인가.
주상이 그토록 올려놓고 싶어 안달 냈던 그 자리를 세자는 끝까지 지켜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로 인하여 술렁이는 것은 비단 연파만의 일이 아니었다. 경파 사람들도 세자가 일으킨 여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하나로 단결되어 있던 마음이 흔들리다 보면 끝에는 쪼개져 나눠질 것이었다.
“세자의 병이 어찌 가볍다 할 수 있을까.”
“저하께옵서는 곧 강녕해지실 것이옵니다.”
숱한 역경을 함께해 온 동지를 바라보는 눈빛은 선하기만 했다. 속에서 울렁거리는 슬픔을 애써 감춘 임금은 제게 위로를 전하는 김윤덕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판의 말이 옳다. 세자가 그리 약한 아이가 아니지.”
“하오나.”
줄곧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시립해 있던 김윤덕이 반박을 꺼내 들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고개가, 김윤덕의 시선이 탁상 앞에 앉아 있는 이호에게 똑바로 꽂혔다.
“세자 저하의 환후를 장담할 수는 없사옵니다.”
내의원의 어의가 전한 말보다도 충격이었는지 임금의 얼굴에 급속도로 근심이 깔렸다.
김윤덕의 간언은 늘 직설적이고 꾸밈이 없었다. 조정에 선 대신 모두가 세자의 차후를 기대하고 있는 지금, 김윤덕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간언했다.
그 올찬 모습에 용안에서는 곧 그늘이 사라졌다.
“경의 뜻이 무엇인가.”
임금의 시선은 오로지 김윤덕에게 향해 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영의정 역시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으나, 그는 소심한 성격 탓에 감히 간언 따위는 넘보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임금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이가 든 영의정은 두려움에 떨었다.
경파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수뇌부인 김윤덕을 걱정했고, 제가 하지 못할 말을 과감하게 꺼내 든 김윤덕에게 감격하기도 했다. 김윤덕에게 기회를 넘겼지만, 임금의 눈에 들 기회를 놓친 것이니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대응책을 세우셔야 하옵니다. 그것이 훗날의 어지러움을 막을 방도입니다.”
“훗날의 어지러움이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느라 정신 빠진 듯한 눈동자와 다르게 똑바로 저를 보는 이를 이호는 기꺼이 눈에 담았다.
세월이 흘러 관록이 생긴 눈은 여전히 처음 보았을 적, 그때의 총명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세자는 일어날 것이다.”
“확신할 수 없사옵니다. 대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퍼진 지독한 파동이 편전을 에워쌌다.
“성심이 흔들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김윤덕의 강수였다. 조정에서 임금에게 강수를 둘 자는 오롯이 김윤덕뿐이었다.
임금의 곁을 지키는 상선이나, 김윤덕의 맞은편에 서서 조바심을 내는 영의정이나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앓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헛숨만 들이마시고 눈동자를 조용히 굴려 댔다.
“성심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호가 부산스러운 웃음을 꺼내 놓았다. 그 웃음소리에 긴장감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첫 세자이자 이호의 이복형제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계절과 날씨를 가리지 않고 사냥터에 나가 활 솜씨를 뽐내길 좋아하던 이는 소낙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는 날에도 궁궐 사냥터로 사냥을 나갔었다. 잠시 비를 피하려 몸을 맡긴 곳이 사냥터의 미루나무 아래였다는 것 말고는 문제가 없었다.
그 나무로 번개가 떨어질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한 세자의 말로는 살이 타면서 풍기는 누린내를 퍼트리며 끝이 났다.
세자를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 선왕은 조정 대신들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세자를 앉혀야 했다. 선왕은 세자 책봉을 총애로 저울질했고, 당권을 배척한 가문일지라도 약하고 한미한 가문을 가진 둘째 차흥군 이호보다 세력이 있는 셋째가 더 유망하다 여겼다.
그때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세자의 자리를 아우에게 빼앗긴 이호는 제 목을 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게 마땅한 일이었다.
이호에게는 무력이 없었다. 무력이 없는 자가 내뱉는 말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고 임금의 발치에도 닿지 못한 채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정치였다.
“선왕의 치세 때 세자였던 형님께서 돌아가시고, 십 년이 지난 후 형님의 자리를 이어받은 아우가 죽었다.”
정치는 순결하고 온화하지 않았다.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이 그렇다 해도 속내는 더럽고 난폭한 것을 품고 감추는 게 정치였다.
또한 정치에서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았다. 정치는 그저 결과만 뚜렷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 과인이 형제를 직접 죽였다는 소문이 궁궐 안팎에 돌았지. 그 소문의 진위가 무엇이든, 과인을 책망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겠는가? 선왕께서 순리에 따르셨다면 과연 그런 소문이 돌았겠는가?”
이호는 거칠고 세찬 바람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생존하기 위해 손에 무엇을 묻혔는지 살피는 것은 필요치 않았다.
끝내 몸에 걸치고야 만 사조룡보가 달린 세자의 상복이 그의 위대함을 증명할 것이었다.
다섯 개 용의 발톱이 생긴 임금의 보를 가슴에 품었을 적, 이호는 환희했다. 제가 진정한 승리자였다.
“과인은 선왕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영의정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임금을 보았다.
임금은 이미 흘러간 기억보다 앞으로 다가올 도약을 더 중요시했다. 그랬던 그가 옛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수면 위로 떠올린 게 자신의 결점이 담긴 기억이었다.
그 소문은 사실이기도 했고, 거짓이기도 했다.
첫 세자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두 번째 세자의 죽음은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금상의 아우는 별 볼 일 없는 병환을 앓다 죽었다.
먼 길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병을 앓는 세자에게 바치기 위해 약재를 구해 온 이가 누구였던가. 세자에게만은 상극인 독인 줄 알고도 탕약으로 달여 바쳤던 이가 누구였던가.
거짓이면서도 사실인 소문을 품고 용상에 올랐던 임금은 어쩌면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과인은 선왕과 다르다. 과인은 선왕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었다. 그때 영의정 눈에는 보였다.
아비가 순리를 지키지 않아 결국에는 내가 이 자리에 올랐다. 내가 내 것을 찾았다. 똑똑히 보아라. 너희들이 섬겨야 할 임금이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지.
즉위식 날, 임금은 보이지 않는 입으로 그리 말했다.
임금은 순리에 순응하는 사람인 척하며 스스럼없이 저울질했던 선왕을 조롱했다. 그 조롱은 경멸에 가까웠다.
좋은 군주가 되기 위해 조정에서 선왕의 미흡함을 꺼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성군으로 인정받지 못한 선왕을 동정했다.
그 말대로 임금은 선왕과 달랐다. 선왕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른 행보를 걸었다.
민심을 알아주고, 베풀었다.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공부했고, 실행했다. 읽고 듣는 것으로는 부족해 직접 나가 살폈다. 하여 부족한 게 있으면 더해 주고, 과한 게 있으면 덜어 주었다.
“나의 세자는, 나의 소명은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대응책? 필요치 않다.”
임금은 확실히 선왕과 달랐다. 하나 세자 책봉에서만큼은 선왕과 같았다.
사저에서 군 대감이라 불리던 시절, 그곳에서 낳은 첫아들이 임금에게는 으뜸이었다. 궁궐로 들어와 원자가 된 소정 대군은 임금을 빼닮아 모든 방면으로 출중했다. 인품도 좋았고, 용모도 단정했다.
그러나 으뜸 중에서도 으뜸이었던 원자의 결격은 타고난 성질이었다.
그간 용상에 올랐던 선대 임금 중 양인이 아니었던 자가 있던가. 풍파가 시들지 않는 궁궐에서 범랑 전역으로 퍼져 나간 바람은 임금의 신의를 잃고, 사람을 잃게 했다.
모두 차자인 효원 대군, 이강 때문이었다.
처음 바람이 불었을 때는 이강이 중전의 복중에 있을 적이었다. 임금에게 반기를 든 자들은 평인인 원자를 내치고 복중 왕손을 원자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신념에는 확신이 없었다. 붉은 옥을 주웠다는 중전의 태몽으로 일어서기에는 신중함이 없었다.
그때 임금은 그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목을 쳤으면서도 그들의 기세를 깡그리 짓밟았어야 했다며 후회했었다.
그러나 만회할 기회가 왔다는 듯 또 다른 바람이 궁궐을 휘감았다. 임금은 깨달았던 것을 행했다. 그것을 김윤덕이 도왔다. 그 시절, 병조에 몸담고 있었던 영의정 역시도 임금을 도왔었다.
그렇게 하나씩 이강을 죽였다. 첫 사변 때 이강은 태어나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이강을 짓밟았을 적에는 그의 나이는 고작 세 살이었다.
세자의 병환은 뜻을 하나로 뭉친 이들의 계획이 아니었다. 이미 짓밟아 놓은 이강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도 시기가 늦어 버린 후였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영의정은 임금의 심기를 살폈다.
선왕과 다르려면 순리를 따라야 했다. 임금은 제 손으로 올려놓은 소명 세자를 거두고 제 손으로 영혼을 쳐 낸 강을 책봉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대비하셔야 하옵니다.”
소명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쌓은 김윤덕이 임금에게 강을 종용했다. 임금이 반길 리가 없었다.
영의정은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제가 나서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입 안에서 단내가 진동했다.
“과인의 손으로 그 허물을 들라는 것인가.”
명치를 꽉 조이는 듯한 신경전은 조용하게 일어났다.
영의정의 두 눈에는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생길 리가 없는 간극의 선명함을 보았다.
그 간극이 어떤 바람을 불러일으킬지 몰라 영의정은 불안을 끌어안았다. 누굴 도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불안이 깃든 얼굴로 임금과 김윤덕을 번갈아 보았다.
“효원은, 이강은 범랑의 극흉이다. 이강이 몰고 왔던 피비린내가 아직도 고스란히 궐내에 남아 있다. 한데, 그 허물을 내 손에 쥐라…?”
마침내 제 것을 손에 넣을 때, 이호는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용상에 올라 환희가 가득 찬 눈으로 먼 곳에 있는 김윤덕을 바라보았다. 금관 제복을 갖춘 채 당하관 무리에 섞여 있던 김윤덕 또한 감복한 눈으로 이호를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후였다.
젊음은 잃었지만, 지루함을 알고 평온을 알았다. 동지애는 여전했고, 신의와 충심도 그때와 같았다. 단지 서 있는 자리가 가까워진 만큼, 발끝이 정해진 선을 넘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곳에 멈춰 있었다.
“소신에게 생각이 있사옵니다.”
이호는 그때의 김윤덕을 잊지 않았다. 김윤덕 역시 그때의 이호를 잊지 않았다. 이호는 자신의 권력을 믿었고, 김윤덕은 자신의 지략을 믿었다.
비슷한 두 사람은 그렇게 상부상조했다.
편전에서 알현을 마치고 나온 영의정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다 안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하며 진저리를 쳤다. 영의정은 제 뒤를 따라 나오던 김윤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시게!”
“현실을 바로 본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옵서 노하셨다면 자네의 목숨은 저 안에서 끝났어.”
영의정의 핀잔에 김윤덕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김윤덕의 모습에 영의정은 학을 떼며 혀를 차고는 가자미눈으로 김윤덕을 쏘아보다 걸음을 떼었다. 김윤덕은 당연하다는 듯 영의정의 곁을 따랐다.
“영상.”
영의정은 곁눈질로 김윤덕을 바라보았다.
“대군을 찾아야겠습니다.”
이강은 갑자기 나타나 갑자기 사라졌다. 늘 그랬다. 천양에 왔다는 이야기가 돌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강을 번개라 불렀다.
전국을 뒤져 어디에 꽂혀 있는지 모르는 번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갓난아기가 뜀박질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팔도를 뒤져 강을 찾는 것도 문제였지만, 김윤덕이 강을 찾아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으니 더욱더 불안스러웠다. 같은 경파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뺄 수 있을 땐 빼고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알아서 하시게.”
그 말을 끝으로 시선을 정면으로 옮긴 영의정은 바쁜 일이 있다는 듯 서둘러 편전 뜨락을 빠져나갔다.
* * *
시끌벅적하고 부산스러운 장거리는 인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몰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도성의 육의전과 저잣거리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시전이었지만, 그곳에는 특별한 게 있었다.
순찰을 도는 나졸들이 놀이 삼아 벌이는 투전판을 모른 척 눈감아 주는 일이 빈번해 그곳의 장거리는 투전판으로도 꽤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셈에 약한 이들을 등쳐 먹으려는 사기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나라에서 금지한 투전은 여전히 밝은 대낮 길 한복판에서 성황리에 이뤄졌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거리끼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투전판이 열린 주막은 구경꾼으로 인산인해였다.
“이런, 육시럴!”
판이 끝났는지 눈 밑이 시커먼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을 가다 멈춘 행인들은 그 빈자리에 누가 앉을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물주가 자신 있으면 앉아 보라는 듯 그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빈자리가 남았으니 어서 앉으시오. 누가 돈을 걸어 보겠소? 엽전 한 푼만 걸어도 곱으로 받아 갈 수 있으니 여기에 앉아 보시오.”
그곳에 모인 이들은 각자 할 일이 있어 장거리에 나온 이들이었다.
목이 좋은 자리를 구하지 못해 장거리를 빙빙 돌고 있는 장사치가 있나 하면 물건을 사기 위해 나온 이도 있고, 그냥 할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도 있었다.
모두가 그 빈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지 눈치만 보고 있는 와중에 초라한 무명옷 차림새를 한 사내가 덥석 그 자리에 앉았다.
패가 담긴 나무통을 들고 흔들어 대던 물주가 의심이 깃든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행색은 구경하는 다른 이들과 같다 쳐도 허리춤에 매달려 모습을 드러낸 장검은 예사 것이 아니라는 듯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돈은 있수?”
물주의 말에 사내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는 소매에 넣어 둔 주머니를 꺼내 엽전 다섯 닢을 끄집어내더니 물주가 깔아 놓은 상판 위에 올려 두었다. 사내가 선택한 것은 점이 네 개 찍혀 있는 패였다.
이미 자리를 깔고 있던 이들도 돈을 내걸었기에, 물주는 경계하는 눈으로 사내를 보며 나무통을 흔들었다.
관아의 아전도 저리 귀한 검을 들고 다닌 적이 없었다.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관리도 단출한 장검을 지니고 다녔다.
손잡이의 반짝이는 금속은 금이거나 못해도 도금을 한 것일 터였다. 칼자루 끝에 붉은 술과 함께 매달린 장식품은 은은한 빛깔을 지닌 옥으로 만든 게 분명했다.
당연하다는 듯 물주의 욕심이 사내가 지니고 있는 장검으로 향했다.
“자, 자, 이번 판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물주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무통을 흔들었다.
중얼중얼 뭐라고 떠드는 목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이게 했다. 주절주절 떠드는 탓에 있던 정신도 홀랑 빠지는 듯했다.
물주가 속임수로 돈을 갈취하지 않으려나, 구경꾼들은 하나같이 매의 눈으로 물주의 손을 지켜보았다. 각 패에 돈을 건 노름꾼들도 물주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침내 중얼중얼 떠들며 나무통을 흔들어 대던 물주가 입을 꾹 다물고 나무통에서 패 하나를 꺼내 뒤집어 놓았다.
일순간, 구경꾼이며 노름꾼이며 모든 눈길이 뽑은 패를 가린 물주의 손으로 향했다.
“패를 맞추면 곱절로 돈을 내어 드리리다.”
“닥치고 빨리 까기나 하쇼!”
긴장감을 부추기려는 물주의 행동에 성미가 급한 노름꾼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알겠소! 이리 성질이 급해서야.”
물주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찍 침을 내뱉고는 패를 가렸던 손을 치웠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무패를 뒤집어 깠다.
물주의 눈길은 새로 자리에 앉은 이에게로 향했다. 제가 택한 패와 같은 개수의 점을 확인한 사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기뻐하고 있었다.
“아, 이것 참.”
“에이, 씨팔!”
보기에도 많은 돈을 건 노름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한 푼으로 시작해 엽전 더미를 점 다섯 개가 찍힌 패에 걸었던 이였다. 자신이 졌다는 사실에 광분한 이가 판을 엎을 듯 물주를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자, 계산은 똑바로 해야 하니 일단 받으시오.”
천천히 광분을 모으고 있는 이와 다르게 물주는 태연한 얼굴로 패자에게 딴 엽전을 거둬들였다. 그 돈에서 동전 열 닢을 승자에게 건네자, 승자의 얼굴에 웃음이 더 진해졌다.
그때 빼앗긴 돈에 이성을 잃은 듯 돈을 잃은 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 씨벌 놈이! 너 지금 패 가지고 장난질 노는 거 아니냐?!”
물주는 씩씩거리는 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까딱거렸다.
물주의 뒤를 지키고 있던 장정 둘이 눈이 뒤집힌 사내에게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덩치가 덩치인지라, 금방이라도 판을 엎을 듯 씩씩하던 이의 숨소리가 순식간에 작아졌다.
“애초에 장난질할 노름이 아니오. 운에 돈을 걸어 놓고서는 뭐가 그리 말이 많소? 돈을 잃어 탓을 하고 싶거든 형씨의 운발에 대고 탓하시오. 왜 애먼 사람한테 지랄인지…. 쯧.”
장정들은 극성스럽거나 과격하게 굴지 않았다. 장정들이 걸음을 내디디면 덩치에 겁을 먹은 이는 뒷걸음질을 쳤다. 계속 그렇게 걸었고, 노름꾼은 점점 투전판에서 멀어져 갔다.
소란을 피우던 이가 떠나간 자리에 또 다른 이가 냉큼 앉았다. 그이는 점 두 개가 찍힌 패에 엽전 스무 닢을 내걸었다. 그 돈이면 꽤 괜찮은 면포를 살 수 있었다.
“그만할 거요?”
물주의 시선이 방금 끝난 판의 승자에게 닿았다. 사내는 물주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 걸었던 패에 다시 본전과 딴 돈을 내걸었다.
“같은 패에 거시겠다?”
“문제 있소?”
의미심장한 물주의 말에 사내가 생글거리며 반문했다. 물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요란스럽게 나무통을 흔들어 댔다.
해가 어물어물 져 갈 즘 묘목이었던 사내는 노목이 되어 투전판의 망부석이 되어 있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망부석은 가진 돈을 탈탈 털린 채 허망하고 애처로운 눈길로 돈을 챙기는 물주를 바라보았다.
“이건… 말이 안 돼….”
“말이 안 되기는. 형씨의 운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오.”
“필시 장난질을 쳤겠지….”
“장난질이라니?”
물주가 맞받아치기 무섭게 물주를 지키던 두 장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주는 넋이 반쯤 나간 듯한 이를 보며 혀를 쯧쯧거렸다.
한두 번 보는 광경도 아니었다. 패자들의 넋두리는 늘 진부하기만 했다.
“자, 여기 이걸로 가서 국밥이나 한 그릇 말아 드시오.”
사내가 지닌 장검은 끝까지 노름판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 진귀한 장검을 갖겠다고 판을 이어 가던 물주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물주는 그에게 엽전 두 닢을 던져 주며 판을 완전히 파하려고 했다.
“안 돼…. 이대로 가서는 안 되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오시오. 두둑이 챙겨 온다면 내 또 껴 드리리라.”
“아니…. 절대로 끝내서는 안 된다!”
반쯤 미친 사람처럼 광기를 부리는 이를 두 장정이 막아섰다. 그들의 보호를 받아 뒤로 물러난 물주는 그이를 보며 다시 혀를 쯧쯧 찼다.
“어서… 어서 판을 다시 벌이시오! 내 다른 사람들을 더 불러오겠소!”
“이 사람이 증말 미쳤나? 날을 좀 보시오! 해가 저물어 가는데 깜깜한 곳에서 뭘 하겠다고 이 소란이오? 가서 국밥이나 자시고 주무시오!”
바닥에 툭 떨어진 엽전을 바라보던 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주를 바라보았다.
“내 전 재산을 걸었소! 그 돈으로 먹고살아야 하는데 나는 어찌하란 말이오!”
“누가 먹고살 돈으로 노름에 뛰어들라 했소? 부추긴 사람 있냔 말이오! 제가 좋다고 앉아 놓고 인제 와서 돈 내놓으라는 심보가 당최 뭔지 모르겠네? 당장 썩 꺼지시오!”
울먹거리던 이가 앙다문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다시 판을 벌이지 않으면 네놈의 목을 칠 것이다.”
사내의 손이 장검의 칼자루에 닿아 있었다. 검을 탐내던 물주와 그를 지키던 장정들의 얼굴도 점차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이, 이보시오….”
“어서 패를 깔아라.”
“날이, 느, 늦었다 하지 않았소…. 내, 내일도 이곳으로 올 것이니… 그때….”
“당장 깔아라.”
금속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서슬이 퍼런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입장이 뒤바뀐 이들은 언제 제 목이 떨어질지 몰라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희귀한 칼을 지니고 다니는 만큼 칼자루를 쥔 자의 자태도 예사롭지 않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두 장정이 꽁지가 빠지라 달아나자, 물주는 뒷걸음을 치다 벌러덩 자빠졌다. 점점 저에게로 다가오는 이를 보던 물주의 몸뚱이가 두려움에 달달 떨렸다.
“뭔 일이여?”
그때였다.
사내의 뒤로 군복을 입은 나졸 둘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사내가 부린 난리를 듣고 이곳으로 온 듯했다.
본래대로라면 노름판을 주도했던 물주에게도 반갑지 않아야 할 이들이었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었음에도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는 물주에게는 그들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살았구나. 그동안 공갈로 사람들 돈을 뜯어 벌을 받는구나 싶었는데, 살았구나.
“뭐여? 지금 이게 뭔 일이여?”
게으르게 생긴 두 나졸은 각자 손에 육모방망이를 들고 장사가 끝난 주막을 빙 둘러보았다. 여러 개 놓인 나무 의자와 넓은 상판이 올라간 탁자를 보며 상황을 짐작하던 나졸의 시선이 물주와 그와 대치 중인 이에게 꽂혔다.
“불법으로 투전판을 벌인 전문 노름꾼이오. 사람들의 눈을 속여 돈을 갈취하는 파렴치한이지.”
말을 꺼낸 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칼자루를 쥐고 물주를 죽이려 들었던 이였다.
칼자루에 닿았던 손은 진작에 떨어졌고, 나졸에게 향한 눈은 살기가 사라진 채 말똥말똥하게 반짝거렸다. 잽싸게 얼굴을 뒤바꾼 이를 보며 물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노름? 아니,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노름판을 벌였대. 나라님께서 노름하지 말라는 말 못 들은겨? 어이, 뒤져 봐.”
줄곧 말을 하던 나졸이 제 졸도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나으리, 그것이 아니라! 노름이라니요! 잠깐 놀이를 한 것입니다요!”
졸도는 물주에게로 향했다. 물주의 행장을 뒤지자 노름에 쓰였던 나무통과 나무패들이 나왔다.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빼앗은 돈으로 두둑해진 주머니를 발견한 나졸이 제 상관에게 주머니를 내보였다.
“노름이 놀이고, 놀이가 노름이지.”
“저, 저자도 노름을 했습니다!”
물주에게만 닿아 있을 줄 알았던 나졸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저를 보는 눈길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 얼굴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
“내 일부러 물주에게 돈을 뜯겨 가며 붙잡아 둔 것이니 어서 데리고 가시오.”
“일부러 돈을 뜯기는 천치가 어딨대유?”
사내는 의심이 깃든 눈초리가 저에게 닿는 게 껄끄러웠다.
“어쨌든 노름했지유?”
“저자를 잡아 두려면 어쩔 수 없었소. 관아에 변고한 지가 언제인데, 뒤늦게 나타나 놓고 노름을 했다 나를 탓하는 것이오?”
그는 계속해서 저를 쳐다보려는 나졸의 눈길을 피해 얼굴을 숨겼다. 수상함을 눈치챈 나졸은 그의 얼굴을 보겠다며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상황이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졸의 관심이 물주에게서 그에게로 옮겨졌다. 틈을 탄 물주가 슬그머니 도망가려 발을 뒤로 물렸으나, 그 뒤를 함께 온 나졸이 막아섰다. 영락없이 붙잡히게 생긴 물주는 원망이 깃든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여기서 뭐 혀.”
그곳으로 다른 나졸이 도착하자, 나졸을 피하던 사내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물주는 저를 겁박하던 이가 역시나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어찌 나졸을 무서워한단 말인가?
“내 할 일을 끝냈으니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아녀유, 계속 있어 봐유. 동식이, 이리 와 보시게.”
“왜 그러는겨?”
“그 천양에서 내려온 용모파기화 가지고 있는가?”
용모파기화라는 말에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게다가 누가 신호라도 보냈는지 점점 더 많은 인원이 주막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내는 좁은 주막에 몰려 있는 나졸들을 바라보았다. 장정이 일곱으로 늘어나 있었다.
일곱 명, 도와주는 이가 있다면 몰라도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아니, 도와주던 이가 있었어도 그이는 방관하길 좋아하던 이였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이가 그리웠다.
“용모파기화? 있지.”
“꺼내 보시게.”
동료에게 용모파기화를 받은 나졸이 종이를 펼치더니 횃불을 든 다른 나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그리고 횃불로 밝아진 곳에서 종이에 그려진 얼굴과 제 눈앞에 있는 이의 얼굴을 비교했다.
“어이쿠.”
나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동료들을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내, 내 말을 좀 들어 보아라!”
사내가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그냥 얌전히 관아로 가셔유.”
“그 용모파기화에는 죄명이 적혀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란 말이다!”
“어디서 반말이여? 그리구 죄인이 아닌데, 우째 용모파기화가 내려왔겄어. 순순히 가십시다?”
궁지에 몰린 사내는 저를 포박하기 위해 다가오는 이들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이리 붙잡혀 갈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 목청에 걸음을 내딛던 나졸들이 움찔하며 멈췄다.
“내가 누군지 안다면 너희는 내 앞에서 고개를 함부로 들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분한 마음을 담아 강은 그들을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지만, 그들의 멈춤은 잠시뿐이었다.
* * *
“송구합니다. 제 부하들이 귀한 분이신 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강이 붙잡혀 온 관아의 수령은 점잖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강과도 일면식이 있던 자였다. 강과 인연이 있는 사람치고 시골구석으로 내쫓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울 만도 했으나, 강의 얼굴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저게 어째 왕족이래유.”
“그러게 말이여. 왕족인데도 저리 거지꼴을 하고 댕긴다믄 나는 안 할려.”
“어허! 조용히 하지 못하느냐!”
저희 딴에는 속삭인다고 여긴 듯 시끄럽게 떠들던 나졸 둘이 수령의 외침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날카로운 눈길이 저희에게 꽂혀 있는 것을 보면서도 움찔하지도 않고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 강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어디서 건너오셨습니까?”
“옥양에서 왔소.”
수령은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듯 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찌 투전을 하셨습니까. 국법으로 금지된 것을 잊으셨습니까?”
“품위를 지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강은 이곳으로 오기 전 옥양에서 만났던 행인을 떠올렸다.
그때 강은 재미로 했던 투전에 정신이 팔려 농작물을 가져다 판 돈을 다 잃었다던 농부의 얘기를 듣고 불의를 참지 못했다.
제가 나서지 않아도 됐지만, 관아에 변고를 했을 때 심드렁해하던 나졸들을 보았기에 직접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강의 속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 수령이 말했다.
“얼마 전 옥양에서 인삼을 사사로이 거래하는 상단이 붙잡혔다 들었습니다.”
“그렇소?”
“의인이 되길 바라셨습니까?”
강은 그저 피식 웃었다.
“구실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망나니가 무슨 수로 의인이 되길 자처하겠소? 나는 그저 노름이나 하고 다니는 한량이오.”
“옥양에 닿으시기 전, 죽천골에 가셨다지요.”
죽천골은 산림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산림들은 학식이며 무예며 무엇 하나 손색없는 자들이었으니, 강이 그곳에 간 것은 괜한 일이 아닐 터였다.
죽천골과 연이 깊은 수령은 그들이 그곳에 모여 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연파의 일원이었던 산림들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산으로 모인 까닭은 강이었다.
“발 없는 말이 참 빠르오. 죽천골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더라?”
“발이 없기에 빠른 것입니다. 발이 있다면 더디게 도착했겠지요.”
강의 반응은 무심했다. 귀찮고 번거롭다는 듯한 태도에도 수령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죽천골에 간 것은 우연이었소.”
“대군.”
“별 뜻 없이 닿는 대로 가다 보니 그곳에서도 내 발이 멈추더이다.”
수령은 강을 응시했다. 저에게서 떨어진 이후 돌아오지 않는 시선을 보고 있자니 잊었던 꿈이 수령의 마음속에서 부풀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고 바로 길을 나섰으니, 오해하지 마시오.”
“그곳에서 일 년을 보내셨다 들었습니다.”
모든 사실을 들킨 강은 수령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이곳에서 의인 노릇을 하실 때가 아니십니다.”
강은 그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죽천골에서도 그랬다. 어쩌다 한번 우연히 마주치는 패자들을 보아도 똑바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게 죄책감이었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강은 지금까지 그들의 앞에서 똑바로 낯을 들지 않았고, 그들도 저처럼 죄책감을 품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대군, 세자 저하께옵서 위독하십니다.”
흔들림 없을 듯했던 눈길이 수령에게 꽂히는 순간은 찰나였다. 똑바로 마주하고 있으나 잔 떨림이 확연한 눈동자를 보며 수령은 말문을 뗐다.
“도성에서는 쉬쉬하고 있으나,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날아다닙니다.”
수령의 눈길이 탁자에 올려놓은 강의 손으로 내려갔다. 바들바들 떠는 손을 보고 있자니 곧장 자리에서 뛰쳐나갈 듯싶었다.
“말 한 필 내어 주시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셔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소.”
“전하께옵서는 선왕과 다르시옵니다.”
강의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강은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속내 역시 잘 알았다. 강에게는 훤히 보였다. 그들이 차후에 무엇을 꾀할 것인지도.
그들은 죽음이 무서워 목을 움츠리고 숲속으로, 시골로 내쫓기듯 향한 게 아니었다.
“나 역시도 다르오. 그러니 같은 뜻을 품을 것이라 기대하지 마시오.”
대화는 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끝이 났다. 수령은 손짓으로 대기 중이던 나졸을 불렀다.
“가서 말 한 필을 내어 오거라.”
“예.”
“부디 무탈하게 조심히 가십시오.”
기분이 나쁘다는 듯 강의 눈살이 움찔거렸다.
수령과 작별을 나눈 강은 동헌을 나서 관아의 내삼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에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 깃들어 있었다.
* * *
희뿌연 안개가 가득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아늑한 곳. 눈에 보이는 게 실제가 아닌 환상이라는 것을 은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꿈이었다. 한참을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꿈을 꾸었다.
주변에는 푸른 소나무가 자리했고, 근처에 계곡이 있는지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언제쯤 모습을 보일까. 보이지도 않는 앞을 내다보며 그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다렸다.
그곳으로 와야 하는 이는 희뿌연 안개에 발이 묶인 것인지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재는 한참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은재야.”
정신이 들려는 찰나가 아쉬워 은재는 꿈 앞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바라보면 조금이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에 가득 차 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은재야.”
환상이 확실하다는 듯 꿈이, 안개로 가득 찬 그곳이 곧 암흑으로 뒤바뀌었다.
눈이 저절로 번쩍 뜨였다. 그제야 정신이 든 은재는 엎드려 있던 서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저릿한 손을 느끼며 제 앞에 앉아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형님?”
그마저도 꿈인가 싶어 손으로 눈을 비벼 댔지만, 조금 전 사라진 환상과는 다르게 그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낮잠을 자려거든 편히 자야지.”
은재는 그저 눈을 깜박거렸다. 세준이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멀끔히 바라만 보았다.
머릿속을 배회하던 몽롱함이 완전히 사라지자, 은재는 저절로 현실을 깨달았다. 제가 두 눈으로 마주하고 있는 형제는 실제였다.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책벌레가 책을 보다 깜박 잠이 들기도 하는구나.”
자상하고 다정한 말투에 은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준은 과거 시험인 전시에 합격한 뒤로 집에 머물고 있었다. 앞으로도 쭉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던 세준의 말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제가 한심스러웠다.
“제 방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부르시지요.”
작은 사랑채에서 기거하던 세준은 은재를 각별하게 생각해 종종 은재가 머무는 별채로 찾아왔다. 은재 역시 그 방문이 싫지만은 않았다.
“부르기는, 필요한 사람이 찾아와야지. 네게 부탁할 일이 있다.”
“부탁할 일요?”
“면주전으로 가서 내가 부탁한 것을 찾아다 주겠니?”
면주전이라면 육의전 중 하나로 옷감을 파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갈 수 있는 구실이었지만 은재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잠시 생각하다 못 할 것도, 안 될 것도 없어 서둘러 대답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하면 채비를 하고 나오거라.”
말을 마친 세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방문을 넘자 대청마루를 기웃거리는 꺽새와 눈이 마주쳤다. 꺽새는 뭐가 좋은지 세준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리하면 되는 것이지?”
“예, 잘하셨습니다.”
“외출이라도 하고 오면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
“당연하지요. 현천에 있을 적에도 이리저리 잘 돌아다니지 않으셨습니까.”
근심 어린 눈으로 닫힌 장지문을 바라보던 세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꺽새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조심히 다녀와야 한다.”
“걱정일랑 하지 마십시오! 쇤네가 성심성의껏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래, 네 덕분에 내가 근심을 덜 수 있겠구나.”
세준은 꺽새의 어깨를 두들기며 기운을 북돋아 줬다. 그리고 제 소매에서 엽전이 든 꾸러미를 꺼내 건넸다.
그사이 바깥에 나갈 채비를 한 은재가 장지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왔다.
은은한 옥빛 도포를 입고 갓을 갖춰 쓴 은재를 보며 꺽새가 환하게 웃더니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기단 위에서 방방 뛰며 달리는 시늉을 해 댔다.
그 모습에 은재가 피식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우와! 역시 우리 도련님 옷 태 하나는 잘 받으십니다요!”
눈살을 찌푸린 은재가 꺽새를 흘겨보며 말했다.
“허튼소리 말아라. 어찌 그리 경거망동해.”
“허튼소리라니요. 참말입니다.”
“꺽새의 말이 옳다. 잘 어울리는구나.”
세준마저 꺽새와 장단을 맞추자 은재의 얼굴이 붉어졌다.
“형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꺽새와 세준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도련님! 어서 가셔요!”
“아직 신도 신지 않았다.”
세준이 꺽새에게 말하자, 놀란 꺽새가 황급히 디딤돌 옆으로 향했다.
“은재야, 잘 다녀오거라.”
신을 신고 돌계단을 내려온 은재가 기단 아래에 섰다. 그 뒤를 세준이 졸졸 따라갔다.
“제가 다섯 살 난 어린아이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찌하냐. 내 눈에는 아직도 조막만 한 것을.”
농담인 줄 알면서도 은재는 얄궂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형님, 저도 이제 다 컸습니다.”
“그래, 알겠다. 어린애 취급하지 않을 터이니 어서 다녀오거라.”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세준은 꺽새와 함께 중문으로 향하는 은재를 지켜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세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재작년 늦가을, 세준은 어명을 받고 천양으로 돌아왔다. 올해 열리는 과거에 응시하라는 임금의 명령이었다.
아비 역시 가문의 명예를 위해 돌아오라고 했었다. 응당 따라야 하는 처지였던 세준은 불효인 줄 알면서도 여묘를 포기하고 천양으로 발길을 옮겼었다. 임금과 아비의 명보다도 은재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보낸 연통을 끝으로 아우는 소식이 없었다. 게다가 항간에서 떠드는 소문이 세준에게까지 들려오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할 아우에게 들이닥친 악재가 웬 말인가 싶었다.
천양으로 돌아온 세준이 본 것은 암담한 현실이었다.
어미와 아비의 잘난 모습을 빼닮아 웃어도 예쁘고, 심통을 내도 예쁘던 아우였다. 그런 아우가 지어 보인 웃음에 담긴 슬픔을 못난 제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허한 웃음과 생기를 잃어버린 아우가 그저 아플 뿐이었다.
‘네 어미의 배에서 나온 너의 아우다. 네가 지켜야 하고, 네가 보살펴야 한다. 그리해 준다면 어미는 널 기특하게 여길 것이다.’
어렸을 적, 현천에 사는 은재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종종 이야기를 들어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밤톨만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저의 품에 안기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제가 그간 얼마나 많은 것을 혼자서 독식했는지 알았다. 어린 나이에 깨달아 버린 빚이었다. 그리고 이젠 제가 은재에게 빚을 갚을 차례였다.
“도련님, 오랜만에 나오시니까 좋으시죠?”
은재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꺽새가 흥을 돋워 보겠다는 듯 물었다. 저보다 앞섰기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집 안에 있을 적보다는 은재의 기분이 한결 편해 보였다.
“좋으시죠?”
재차 묻자 앞서가던 은재가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마저도 감격스러워 꺽새의 얼굴에도 연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저 도련님이지?”
오가는 사람이 많은 시전은 늘 그렇듯 말이 많았다. 주인과 가격을 흥정하는 이의 목청과 길거리를 지나는 인파의 시선을 잡기 위해 소리치는 상인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그 와중에 들리지 않아도 되는 말이 꺽새의 귀에 콕, 하고 박혔다.
“맞네, 맞어! 정혼자가 그리됐으니, 혼처를 구하기는 물 건너갔지.”
“아무래도 재수 없다고 다들 꺼리지 않겠어?”
소리를 따라 움직이던 꺽새의 눈길이 멈춘 곳은 담배를 파는 연초전이였다.
가게 주인이 담배를 피우러 온 객을 위해 내놓은 나무 의자에서 사내 둘이 장죽을 물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꺽새의 눈빛이 급속도로 날카로워졌다.
이전의 꺽새였다면 겁이 나 모르쇠로 넘겼을 테지만, 어디서 호기가 불어난 것인지 꺽새는 씩씩거리며 연초전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적잖이 당황한 듯한 이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희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뭐라고 하긴.”
“방금 한 말 다 들었소!”
“우리가 뭐, 틀린 말 했나?”
길 한복판에 두고 온 은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꺽새가 더욱더 크게 분개했다.
“뭐요?!”
예상치 못한 순간이 들이닥치자 은재는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저와 꺽새에게 시선이 꽂힐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갔음에도 둥둥 떠다니는 소문을 어찌 몰랐을까. 은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애먼 땅바닥을 노려보았다.
“얼굴 한 번 못 본 정혼자인데, 우리 도련님이랑 무슨 상관이오!”
꺽새가 내지른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제 분을 참지 못한 꺽새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우리 도련님이 그 정혼자랑 살 맞대고 살기나 했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둥아리를 나불거리는 게요!”
“뭐? 주둥아리?! 이 어린놈이 버릇없이 어디서 터진 입이라고 주절주절해!”
“터진 입으로 먼저 주절거린 건 댁들이오! 우리 도련님이 뉘신지 알고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오? 내 당장 의금부로 가 이 사실을 고하면 댁들 궁둥짝이 멀쩡할 듯싶냔 말이오!”
“에이, 웬 미친놈이야. 그만 가세.”
장죽을 든 이가 요강에 침을 찍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함께 있던 자 또한 일어나자 꺽새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디 가시오! 당장 내 관아로 가야겠으니 이리 오시오!”
붙잡힌 이가 손을 뿌리치자 꺽새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꺽새야!”
놀란 은재가 황급히 꺽새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 저놈들을 그냥!”
그들이 떠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는지 꺽새가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은재에게 붙잡힌 꺽새는 더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보다 고개를 들어 은재의 낯을 살폈다.
“도련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은재를 보는 순간, 꺽새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전 상인이며 길손이며 가리지 않고 모두가 저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군거림은 덤이었다. 적나라한 시선은 투과되지 않고 오롯이 은재에게 꽂혀 있었다.
그 시선이 꽤 아팠을 것이라 생각하자 울분이 차올랐다. 저에게는 그저 딱하기만 제 주인을 보는 시선에 담긴 조롱이 꺽새는 서글펐다.
꺽새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은재의 손목을 붙잡았다.
“도련님, 어서 가요.”
꺽새는 감히 상전의 손목을 붙잡고 서둘러 거리를 빠져나갔다. 씩씩거리며 앞길을 막고 있는 이들을 쏘아보자 좁은 길 위의 인파가 좌우로 물러났다.
“저런 썩은 종자랑은 상종하는 게 아니었는데, 참말로 죄송해요….”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곳에 닿아서야 꺽새는 슬며시 은재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고, 은재가 여전히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빛으로 돌아오지 않은 얼굴을 보며 꺽새는 탄식했다. 곧 제가 더 서럽다는 듯 꺽새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큰도련님 심부름은… 제가 나중에 다녀올게요….”
은재가 소나무숲에서 나온 것은 여름이 끝날 무렵 도성에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였다.
‘주국으로 갔던 유향 상단 소객주가 글쎄 목만 돌아왔다네?’
‘목만?’
‘몸통은 찾지도 못하고 소금에 절인 목만 왔대.’
하루아침에 정혼자를 잃어버린 은재는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그들에게 동정을 받았다. 그러나 소나무숲에서 나오게 된 이유가 소문 때문이라는 건 확실하지 않았다.
꺽새는 아는 게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몰랐다.
그저 저의 어미가 말했었다. 알아도 모른 척을 하라고.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인생이라고.
꺽새는 살기 위해 그 말만 되새겼을 뿐이었다.
별채로 되돌아왔을 적에는 은재의 낯빛이 지금처럼 나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은재는 어느 기점부터 천천히 말라 갔다.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시든 꽃과 같았다.
그나마 세준이 천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은재는 숨을 트고 살 수 있었다. 그동안 은재를 괴롭혔던 이가 어느 순간 달라진 것이다. 부자 셋이서 차를 마시기도 했고,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꺽새는 얼떨떨했지만, 달라진 주인의 태도가 한양으로 돌아온 큰도련님 때문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꺽새야.”
찔끔, 눈물을 흘리던 꺽새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꽤 그럴싸한 얼굴로 은재를 보았다.
“네가 다른 이에게 모진 소리도 할 줄 아는구나.”
은재는 웃고 있었다. 시퍼렇게 질렸던 얼굴도 제빛으로 돌아온 후였다. 태연한 척하는 게 분명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은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꺽새는 마음이 아팠다.
“우리 꺽새, 참 장하다. 내 속이 다 시원하더구나.”
“도련님….”
꺽새는 그제야 입술을 우그러뜨린 채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주인도 저처럼 울고 싶을 게 뻔한데, 양반 체면이 있으니 이렇게 울지는 못할 것이었다.
주인 대신 제가 우는 게 낫겠다 싶어 울음을 끄집어 놓았다.
“괜한 것에 마음 쓰지 말아라. 곧 지나갈 일이다.”
제 너저분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안쓰러워 꺽새는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저 꺽새는 그 나리가 미웠다. 매일 밤, 잠든 은재가 눈물을 흘리면서 찾는 그 나리가 싫었다. 그가 왕족이라는 것마저도 원망스러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남몰래 찾아가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