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찔레꽃 (中)
해가 지고 어둑한 밤이 되었는데도 은재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퇴청하고 돌아온 후였기에 바깥을 지키는 홍 씨의 마음은 불안하고 조급하기만 했다. 그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인영이 홍 씨의 눈에 잡혔다.
그중 한 사람이 은재라는 것을 알아챈 홍 씨가 부산스러운 걸음으로 은재에게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 마주하니, 나갈 때와는 달리 은재의 얼굴이 핼쑥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홍 씨는 서둘러 은재의 안색을 살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생겼을까 싶어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는데, 결국 뭔 사달이 일어났구나 싶었다.
눈치를 보는 꺽새에게 향했던 매서운 눈길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를 향해 움직였다. 홍 씨는 팔짝 놀라 뛰었다.
홍 씨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나리…?”
강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뒤를 향해 곁눈질하는 은재의 눈치를 보랴, 멀찍이 서서 저희를 지켜보는 강을 보랴 홍 씨의 눈알만 바쁘게 움직였다.
그 침묵의 순간이 멋쩍었던 것인지, 은재가 헛기침을 해 댔다.
“아범, 많이 늦었네.”
“어찌… 나리께서 함께 오신 것입니까요?”
은재는 슬쩍 강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가 강에게로 몸을 틀었다. 미운 마음은 미운 마음이고, 차려야 하는 예의는 갖춰야 하는 게 마땅했다.
강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닥한 은재의 걸음이 거침없이 대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늘 뒤에 달고 다니던 꺽새도 필요치 않다는 듯 은재는 매몰차게 대문 안으로 쏙 모습을 감췄고, 꺽새는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은재가 사라진 대문을 바라보던 홍 씨는 정신을 차리고 강에게로 발길을 옮기려고 했다.
“아이고!”
강이 어느새 코앞에 와 있자, 화들짝 놀란 홍 씨가 비명을 내질렀다.
“오늘 도령이 마음고생을 좀 했네. 자네가 잘 돌봐 주게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쓰린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니, 도령에게 구태여 묻지 말고.”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강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홍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에게 등을 돌린 강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은재를 붙잡고 사정을 물을 수 없었으니, 홍 씨의 마음은 당연히 꺽새에게로 쏠렸다. 홍 씨는 서둘러 꺽새를 붙잡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헐레벌떡 대문간을 넘어선 홍 씨는 행랑채 마당에 펼쳐진 장면 탓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퇴청한 주인은 사랑방에 저녁상이 들어갔다 나오면 방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주인이 작은도령을 붙잡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사달이 날 것이라고 직감한 홍 씨는 꺽새처럼 머리를 납작 조아렸다.
“무얼 하다 이제야 돌아온 것인지 물었다.”
주인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일말의 애정이나 관심이 담기지 않은 무심함 그 자체였다. 홀로 주인의 멸시를 받는 작은도령이 안쓰러웠던 홍 씨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주인의 눈치를 보았다. 불똥이 저에게 튈까, 달달 떨어 대는 꺽새와 달리 진심으로 은재가 걱정스러웠다.
“죄송합니다….”
“행실을 똑바로 하라던 말을 잊었더냐?”
조용히 나갔다가 조용히 돌아올 생각이었던 은재는 마음처럼 운이 따르지 않는 오늘 하루를 곱씹었다. 그러곤 단 하루도 편하지 않았던 천양살이를 되짚었다.
“잊지 않았습니다.”
꺼내 놓을 변명이 없었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이는 그마저도 듣고 싶지 않아 했다. 이 불편한 순간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승낙이 떨어지지 않는 한 은재는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잊지 않았다면서 그리 경거망동하다니.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아둔한 행실로 조부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은 내 알 바가 아니나, 지금 네가 있는 곳은 현천이 아니다.”
단조롭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늘 꾸지람을 받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적적한 목소리는 형식일 뿐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은재의 마음이 더 아렸는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신중히 행동하겠습니다.”
어김없이 은재의 바람은 빗나갔다. 아주 작은 관심이라도 보여 주길 바랐던 저의 바람이 미련했다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은재는 허망하다는 눈길로 애꿎은 땅바닥을 노려보았다.
“너의 경솔함을 눈감아 줄 성싶었냐? 한심한 놈.”
전후 사정을 묻지 않는 아비를 원망할 법도 했지만, 은재는 속으로 제 잘못이라며 저를 탓했다.
“앞으로는 대문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거라.”
별안간 떨어진 명령에 은재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고개를 드는 건 무서워 푹 숙인 채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되묻기라도 하면 나을까 싶었지만, 결국에는 마음에도 없는 답을 억지로 입 밖으로 밀어 내야 했다.
“…예.”
은재는 머릿속에 아른거리던 하얀 꽃밭을 아쉬워할 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운이 좋지 않았던 오늘 하루를 기억 속에서 몽땅 지워 내고 싶었다.
가슴속에서 슬그머니 피어오른 원망이 누군가에게 향하기도 전에 은재는 어미의 말을 떠올렸다.
‘그 누구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너 자신조차도 원망하지 말렴.’
어미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설사 그 대상이 아비라도, 저일지라도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도 말라고 했었다.
고숙이라고 불러야 하는 아비의 눈에 비친 속마음을 보았기에 은재는 애먼 땅바닥을 응시했다.
오직 저의 행복만을 바라던 어미의 마음을 은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계속해서 보다간 아비처럼 저도 원망을 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보지 않기를 택했다.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는 미련한 것을 두고 내가 뭐라 하겠느냐. 썩 방으로 물러가거라.”
은재는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손을 양옆으로 옮긴 뒤 허리를 굽혀 예를 차렸다. 그러고는 또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어 급하게 별채 쪽으로 걸음을 틀었고, 꺽새는 늘 그랬듯 은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범.”
김윤덕의 눈길이 대문간 근처에 있는 홍 씨에게로 향했다. 그가 저를 부른 이유를 눈치챘다는 듯 홍 씨는 김윤덕 앞으로 달려갔다.
“남강의 일은 어찌 되었는가.”
“객주가 직접 주국으로 갈 처지가 아니라서 시간을 달라 하였습니다. 이르면 여름이고 늦어도 가을이라 했지만, 그마저도 객주의 짐작인 것 같았습니다.”
“혼담이 오간다는 소문이 도성 안팎에서 돈다지?”
소문에 예민한 편이 아니었지만, 김윤덕은 천양에 은재의 소문이 나돌게 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여겼다. 꽤 번거롭다는 듯 김윤덕의 미간이 좁아졌다.
입을 통해 떠도는 말을 단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문의 근원지를 알았지만, 그 역시도 김윤덕의 손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
“더 많은 말이 돌기 전에 그 아이를 주국으로 보내야겠네.”
홍 씨는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적어도 저의 손으로 은재의 혼례상을 차리길 바랐다. 그게 제가 어렸을 적부터 모셨던 안방마님과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라 여겼다.
아쉬운 마음에 젖어 든 홍 씨는 고개를 숙였다.
“장인께서 자네를 천양에 두고 간 까닭을 아는가?”
“예…. 알고 있습죠.”
금지옥엽 딸의 혼례를 올린 뒤 현천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던 옛 주인이 저를 불러 놓고 말했었다. 사위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달라고. 진심을 담아 부탁하는 옛 주인의 뜻을 받들어 홍 씨는 그날 이후 김윤덕을 제 주인으로 모셨다.
홍 씨는 풋풋하고 혈기 넘치던 젊은 시절의 주인을 기억했다. 그러나 물 한 잔을 달라는 말에도 수줍은 티를 내던 젊은이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탐욕을 품고 있었을까.
숱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홍 씨는 김윤덕의 속내를 들춰 보려고 했지만, 주인은 허술한 자가 아니었다. 홍 씨 또한 김윤덕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섣부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현천의 연을 정리하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음인 아기씨가 태어나던 날, 저와 안방 주인의 계책이 없었다면 천하는 주인의 뜻대로 움직였을 것이었다. 주인의 발목을 잡는 음인 아기씨가 존재하는 이상, 홍 씨는 완전히 김윤덕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아범을 믿겠네.”
그 한마디 말에 충성심을 새길 홍 씨가 아니었지만, 그는 공포를 알고 있었다. 멀쩡한 허우대 속에 감춰진 욕망과 본질을 보았기에, 수긍이 아닌 복종을 그에게 내보여야 했다.
“예, 영감마님.”
홍 씨가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김윤덕의 걸음이 큰 사랑채로 향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납작 엎드려 있었다.
도련님의 운명이 제 손에 달려 있었다. 홍 씨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은재의 목숨을 연명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제가 허튼 짓을 한다면 안쓰럽기 그지없는 목숨은 제대로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끊어질 것이었다.
삽시간에 솟아난 소름에 홍 씨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아직은 밤이 되면 추운 기운이 내려앉는 봄이었다.
* * *
안수동으로 돌아온 강은 후원의 정자에서 부경을 마주했다.
이른 아침 현천으로 떠났던 부경이 물고 온 소식은 진부할 정도로 제 예상과 맞아떨어졌다.
“어미를 죽이는 팔자라…. 그 대단한 형판이 불교를 배척한다는 범랑의 숭고함을 잊고 중의 말을 순순히 믿었다…?”
강이 내뱉은 조소에서 부경은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제 생각이 중요한 것입니까?”
강의 관심이 저에게 돌아오자, 부경은 바른 자세인데도 바짝 긴장했다.
“참고할 정도의 수준은 되겠지.”
흥미를 느끼지 않는 듯 무심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강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부경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저는 함구하겠습니다.”
강은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현천에서는 그 도령이 정부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고 네가 말했다. 천양에서는 어떠하냐? 정부인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부경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강이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무엇이 터진 사람의 입을 막았을까?”
강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부경은 끝까지 답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강이 흥미를 느끼는 것에 뛰어들게 할 생각도, 가담할 생각도 없었다.
“권세다. 김윤덕은 경파의 실세이고, 경파는 손에 권력을 쥐고 있지. 그게 천양 사람들의 입을 막은 것이다.”
장난기가 담긴 것 같으면서도 눈 속에는 증오와 경멸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기에 부경은 끝내 한숨을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위험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줄 알고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더냐?”
“어르신뿐만 아니라, 안기창 대감 또한 위험해지는 일입니다.”
부경의 경고에 강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늙으신네들이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퇴물 취급하면 쓰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면?”
되물음에 부경은 또다시 한숨을 지었다. 강은 잔잔하게 퍼지는 한숨 소리에 실실 웃으며 술잔에 술을 채웠다.
“경파의 권력은 강합니다.”
“연파는 목숨 줄이 간당간당하지.”
“예, 그렇습니다. 견줄 수 없을 상대입니다.”
강은 작게 키득거렸다.
“현천이 알고 있는 사실은 국구와 안기창의 권세가 시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해볼 만한 싸움이다.”
강은 개다리소반 위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내가 공진포(公賑包)와 현천을 등에 업고 있다 해도 나는 흩어진 연파를 모을 생각이 없다. 또한 간신히 목숨 줄을 잡고 사는 이들을 부추기지도 않을 것이다.”
부경이 서둘러 술을 마시려는 강을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깟 술에 취할 위인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형판에게는 나만 갈 것이다.”
“대감!”
“내가 꾀하는 것은 무력으로 치르는 싸움이 아니다. 무력 따위는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담화에서 시작된 치열한 기 싸움 정도?”
“하지 마십시오!”
부경이 저를 다그치는 게 아니꼬웠는지, 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입술에 닿았던 술잔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은 소반 위로 술잔을 내리꽂았다.
“형판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다. 목숨을 걸고 치르는 전쟁도 아닌데, 뭘 그리 유난이야.”
“대감, 형판을 건드는 건 위험합니다.”
“형판이 당장 내 목을 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냐?”
강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술을 따랐다. 지금 당장 강의 외조부가 있는 공진포로 연통을 보내야 하나 고민할 만큼 부경은 마음이 갑갑했다.
“조정에서 경파가 득세하고 있다. 형판은 주상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고, 모두가 형판을 겁내고 있다. 형판에게 목을 감춘 이들의 목숨을 내가 보전해 주랴? 내 의무가 아니다.”
술잔을 입에 대는 모습마저도 여유로웠다.
“이 빌미로 형판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나도 안다.”
강이 말린다고 제 말을 들을 위인이던가. 부경은 모색을 찾으려고 했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강의 허락 없이는 공진포와 현천에 말을 전하지 못할 터였다.
강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조정은 머지않아 형판이 원하는 판국에 들어설 것이다. 해서 지금이 아니면 내 뜻을 이룰 수 없다.”
쪼르륵, 어느새 비워진 잔으로 술이 채워졌다. 술잔에서 풍기는 솔잎 향이 잠잠히 앉아 있는 부경의 코를 찔러 댔다. 그 향이 지독해 부경은 눈썹을 찌푸렸다.
“부경아.”
슬쩍 고개를 틀었던 부경은 강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술을 채운 잔을 부경에게 내밀고 있었다.
“하지 않겠습니다.”
꽤 단호한 말투에 강은 못내 섭섭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술 한 잔 나눌 수도 있지. 어찌 그리 깐깐하게 구느냐.”
“무익합니다.”
강은 짧게 혀를 차고는 내밀었던 술잔을 거뒀다. 단숨에 술을 넘긴 그는 그게 마지막이라는 듯 술잔을 소반에 내려놓았다.
“지강문 밖으로 나가면 말이다.”
부경은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강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 강이 피식 웃음을 꺼냈다.
“하얀 찔레꽃이 피는 꽃밭이 있다더구나.”
그 순간, 부경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눈을 번쩍 떴다. 필시 허투루 입을 열지 않았을 터.
“혹 찔레꽃이 어디서 피는지 아느냐?”
단번에 내뱉지 않고 툭툭 끊어 꺼내 놓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부경은 머릿속으로 섣불리 짐작했다. 그러곤 당치도 않다는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찌 한숨을 내쉬어.”
“결론만 말씀하십시오.”
강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 꽃밭을 찾아 다오. 한 이틀이면 되려나…?”
“대감!”
부경이 기겁하자 강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오동산의 산세를 모르십니까?”
기울인 술병 주둥이에서 술 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깨끗하게 비워진 술병이 아쉬워 섭섭한 얼굴로 부경을 보았으나, 그 눈초리가 매서워 강은 술병으로 눈길을 옮겼다.
“알고 있다. 가파르지 않고 험하지도 않은 산세가 무에 걱정일까. 내 몸으로는 가당치 않으니 네게 시키지.”
“저는 잔심부름을 하려고 대감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시도 알고 있다. 하나 나이가 든 말복 아범을 보내랴, 어린 말복이를 보내랴. 이 일에는 네가 적합하다.”
부경은 끈질긴 시선으로 강을 쫓았다. 쫓기는 신세에도 강은 태연하고 당당했다. 말린다고 들어 먹을 사람도 아니었다. 또다시 체념을 되새김질한 부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꽃밭은 어인 일로 찾으십니까.”
이유라도 알고 싶어 물었지만, 그저 미소만 지을 뿐 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의 시선이 멈춘 곳을 따라 움직인 눈길에 술병이 잡혔다. 벌써 두 병째였다.
부경은 제 고집대로 술병을 들고 부엌간으로 가지 않고 그곳에서 농성했다. 이내 더 마시기를 포기한 듯 강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김윤덕에게 꽂힌 원망이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제 주변을 떠돌고 있는 잔향은 착각이었으나, 강은 자연스럽게 수치심에 물든 은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순간순간 살갗으로 느꼈던 것들이 머릿속에 퍼져 나갔고 가슴 속에서는 아릿함이 물들기 시작했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를 바라보며 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무에 닿아 있던 시선이 부경에게로 향했다.
“이틀 내로 찾아오거라. 이왕이면 꽃이 많이 피어 있는 곳이 좋겠다.”
강에게 끝내 답을 듣지 못한 부경이 질색했다.
“너무 짧습니다.”
“도성 밖에 사는 오동산 심마니를 찾아가거라. 그가 너를 도와 꽃밭을 찾을 것이다.”
수치심에 물들었던 얼굴의 잔상과 함께 제 장난으로 붉어진 수줍은 뺨이 떠올랐다.
강은 제 짓궂은 장난을 후회했다. 꽃밭을 찾아 주겠다는 약조도, 적일지도 모르는 이에게 품은 희미한 마음까지도 모두 후회가 되어 강의 가슴을 찔러 댔다.
정자에 강의 한숨 소리가 흩어졌다. 비워진 술병을 아쉬워하는 듯하여 부경은 살짝 마음이 약해졌다. 부엌간으로 가 술병을 채워다 바치는 것쯤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후원에 자리한 나무에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고, 정자 진척에 심어진 홍매화 꽃잎이 떨어질 때도 지저분하다며 난리를 쳤던 강이었다. 부경은 강의 눈길이 막 만개하기 시작한 홍매화에 닿은 걸 희한하게 여겼다.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도성으로 오면 밥 먹듯이 하는 말이라 부경은 크게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 * *
별안간 목덜미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을 번쩍 떴을 때, 은재는 제가 서 있는 곳이 숲 한복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숲 한가운데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인가. 분명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가.
은재는 빙그르르 돌며 숲을 넓게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느꼈던 숨결은 무엇일까. 누가 이런 못된 짓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또다시 살갗을 간질이는 바람이 느껴졌다. 미세한 잔털이 바짝 곤두서며 전신으로 소름이 흩어졌다. 오돌토돌 돋아난 팔뚝의 닭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은재는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무도 없었던 곳에 등장한 그이의 모습에 은재는 경악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이는 얄궂기 짝이 없었으며 그 능청스러움은 감당하기 버거운 기세로 다가왔다.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신 은재는 찌푸렸던 눈살을 풀고 눈을 접어 웃었다. 이상했다. 미소를 짓는 제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정신을 따르지 않는 몸뚱이라니.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은재는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안 된다고 소리치는 자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제가 그를 향해 손을 뻗자 은재는 속으로 경악했다.
정녕 도리를 저버리겠다는 것인가! 정녕 경망스러운 짓을 하겠다는 것인가!
은재는 거리낌 없이 그의 손을 붙잡아 허리로 이끌었다. 그의 손이 제 허리에 닿기 무섭게 짜르르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졌다. 발끝에서 파지직 터지는 감각에 은재는 신발에 갇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가깝게 달라붙은 몸은 어찌할 것이며, 수줍음에 발그레해지는 뺨은 어찌하란 말인가.
귓가로 가까이 다가온 이가 무어라 속삭였다. 은재는 그 목소리가 다리에 힘이 풀릴 듯 달코롬했다는 것만 알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랐다. 그저 그의 품에 안겨 귓가에서 멀어진 그와 눈을 맞췄다.
옆구리에 닿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몸이 발작하듯 튀어 오르며 은재는 그에게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곧 제 몸뚱이를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가며 그가 저를 꽉 끌어안았다.
비로소 은재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쩌면 그가 저를 이리 안아 주길 바랐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이 행복감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겁이 났다. 잠이 깨면 사라질 행복감이 두려웠다.
은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을 온전하게 느끼고 싶었다.
잃고 싶지 않아 눈물이 핑 돌았다. 주르륵 제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의 감촉을 느끼며 다시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을 보며 은재는 울먹거렸다. 망측스러운 꿈일지라도 그처럼 행복했을 때가 있을까. 저를 어여삐 여기는 시선이 사라져 버린 순간이 아쉬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더욱더 마음이 애달팠다.
바깥출입을 금지당한 지 이틀이 지났다. 눈에 아른거리는 꽃밭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건 그렇다 쳐도 지난밤 꿈자리가 여간 심상치 않았다.
새벽녘의 아쉬움과 애달픔은 잊고 오롯이 그의 품에 안겼던 것만을 기억했다.
대청마루에 앉아 저절로 배배 꼬아지는 몸을 어쩌지 못하던 은재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며 밖으로 내온 서안을 저에게 가까이 끌어당겼다.
활짝 펼친 책을 한 장 넘겼다.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검은 글자 사이로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이 비치는 것 같았다. 곧 제 눈앞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 망측한 환영에 화들짝 놀란 은재가 서책을 내던지고 뒤로 물러났다.
기억하면 안 된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제 몸에 퍼졌던 흥분감이 떠올랐다. 은재는 꿀꺽하고 침을 넘겼다. 정신을 차리라는 듯 두 손으로 제 뺨을 찰싹 때리자 손바닥이 닿은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절대로 지난 밤 꿈으로 얼굴을 붉힌 게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제 아둔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은재는 혀를 차며 내던졌던 서책의 책등을 집었다.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진 서찰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방금 전까지 난리쳤던 일은 새까맣게 잊고 관심이 서찰에 닿았다.
이미 입구가 뜯긴 봉투 속에서 서찰을 꺼낸 은재는 보고 싶은 마음을 부풀리며 글자를 응시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아버님 말씀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향 상단의 자제와 혼담이 오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돌아가기 전에 혼례를 치르겠구나. 혼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못난 형제지만, 누구보다도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원망을 마음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가슴에 가득 찬 그리움을 서찰에 담을 수 없다는 게 원통했다.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저의 괴로움에 비하면 형제는 더한 고난 속에 있었다.
은재는 겸허한 마음으로 서찰을 접어 다시 봉투 속에 넣었다. 계속 눈에 띄면 닳도록 볼 것 같았다.
형제가 돌아올 때까지 제가 품은 그리움처럼 서찰 역시도 이리 묻어 놓는 게 마땅하다 생각했다.
한 번 더 서찰을 꺼내 볼까 고민하던 은재는 서둘러 얇은 종이 사이에 봉투를 꽂은 뒤 겉장을 덮었다. 고개를 들어 처마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눈에 담으려고 했다.
툭.
하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은재는 현천을 떠올렸다.
특이하게도 현천의 사랑채 마당에는 큰 개암나무가 심겨 있었다. 가을이 되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개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다는 걸 기억해 내자 마음이 요동쳤다.
툭.
복잡해진 마음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는데 이목을 끌려는 노력이 참 바지런했다.
기어코 은재의 시선이 마당으로 향했다. 은재는 천양의 집 마당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던 돌멩이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담벼락 너머에 있는 강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에 은재의 입술이 떡 벌어졌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놀란 마음에 주변의 눈치부터 살폈다. 모두 지난밤에 꿨던 꿈 때문이었다.
은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디딤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신을 신고 귀신에게 홀린 듯 곧장 강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어찌 오셨습니까?”
은재는 적당한 경계심을 세우며 일절 관심이 없다는 양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높은 담벼락을 가운데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게 여간 어색해야지. 게다가 꿈에서 진득하게 맞췄던 눈이지 않던가.
은재는 강과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쌀쌀맞게 굴었다.
“기뻐할 만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한데 어찌 그리 퉁명스럽습니까?”
능청이 섞인 목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에게 닿지 않은 눈길이 야속해도 강은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튼튼하게 잘 지어 놓은 담벼락에 기대어 그리 저를 반기지 않는 이를 응시했다.
“…제가 기뻐할지 안 할지는 어찌 아시고요.”
저를 파고들었던 감정 따위에 시름 앓았던 게 바로 이틀 전이었다. 담 너머에 있는 이는 다시 만나도 반갑지 않을 사람이었음에도 몸에 이상증이 생긴 듯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댔다.
갑작스레 벅찬 숨이 몸뚱이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렸다. 은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필시 기뻐할 소식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식을 들고 온 이를 봐서 기뻐하는 척이라도 해 주겠지요.”
강의 능청스러운 얼굴이 자연스럽게 은재의 머릿속에 퍼지기 시작했다. 실재와 환상이 같을까. 궁금증에 져 버린 은재는 숙였던 고개를 슬며시 꼿꼿이 세웠다.
그는 담장 위 기와에 양팔을 기댄 채 순수한 아이처럼 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은재는 두 눈을 깜박이며 강을 보았다.
눈 맞춤의 시간은 길었다. 가슴속에 슬그머니 무엇인가가 부유하기 시작하자 심장이 서서히 멈추는 것 같았다.
은재는 담벼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강은 갑자기 틀어진 발길이 당황스러워 잠시 그곳에 홀로 남아 저에게 멀어지는 은재를 보았다. 멋쩍은 웃음을 툭 내뱉은 강의 발도 땅바닥에서 떨어졌다.
“무슨 소식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은재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붉어진 귀를 두 손으로 감쌀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껏 달아오른 귀를 감추겠다고 얼굴을 맞대는 건 더 거북했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바깥세상에 있는 이가 금세 저를 따라잡았다.
따를 것을 알면서도 도망쳤다. 막상 그와 함께 담벼락을 가운데 두고 걸으니 마음이 이상야릇했다.
“꽃밭을 찾았습니다.”
성의 없게 툭 내던진 말에 은재의 걸음이 멈췄다. 강에게로 틀어진 얼굴에는 갖가지 감정이 물들어 있었다.
강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하여 지금 나가도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꽃밭을 찾았다는 말에 감탄스럽고 설렜다. 그의 말마따나 기쁘기 그지없었다.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꽃밭의 모습에 은재의 마음이 삽시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일 뿐, 은재는 얼굴에 떠올렸던 흥분을 가라앉혔다. 제 주제를 잘 알기 때문에 제 마음을 감춰야 했다.
그러나 결심을 비웃는 듯 담벼락을 넘어온 손에 건이 들려 있었다. 받아 든 은재는 저의 품에 넣지 못하고 건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대답하기 퍽 난감한 질문을 피해 도망가듯 은재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어찌 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추궁하듯 물어 오는 말에 뭐라 답을 할 수 있을까. 사실을 말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제 몸종이 지금 곁에 없습니다.”
답을 비웃는 웃음소리가 정확하게 귀에 꽂혔다. 얄밉게 여기는 마음에 그를 쏘아보고 싶었지만, 은재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몸종이 없다 한들 무엇이 문제입니까? 도성 안팎에 몸종 없이도 돌아다니는 음인이 여럿입니다.”
“그 산에 음인을 노리는 왈패가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강은 제가 내질렀던 거짓말에 당황했다. 은재가 그걸 이렇게 써먹을 줄 알았겠는가. 강의 입술에서 허탈감에 싸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게다가 미혼인 양인과 음인은 부동석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아니…. 그것 또한….”
보기보다 견고한 방어에 강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마음이 어찌 이틀 사이에 변한 것일까? 강은 은재의 속내를 들여다보겠다는 집요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대에게는 내가 파렴치한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슬쩍 흘려 놓은 말에 단번에 은재의 발이 멈췄다. 강은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그리고 찌푸린 은재의 짙은 눈썹을 보았다.
“함부로 남을 깎아내리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닙니다. 저는 공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이라 부르지 말라 했거늘….”
굴곡이 졌던 눈썹이 평평해지고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얄궂다는 듯 다시 찡그려진 눈살에 강의 입에서 진심으로 기뻐 웃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가 진짜 재미있어 웃는 것인지도 모르고 강은 키득거렸다.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면 안심하고 나오십시오. 나 역시도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의심 섞인 눈초리에도 강의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언제 박장대소했냐는 듯 강이 정색하다 능수능란하게 굳어진 얼굴을 감췄다.
은재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퍼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가 느끼는 감정을 함부로 내보여도 되나, 강은 그게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나오지 않겠다는 이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강은 은재를 보며 생각했다. 불만이 꽤 많아 보이는 얼굴이 다른 쪽을 보고 있었지만, 그리 끈질기게 보며 제 마음을 알아내려고 했다.
강의 눈길이 은재의 손에 들려 있는 건으로 향했다.
‘찔레꽃입니다. 제게 소중한 분이 만들어 주셨지요. 이 길목 어딘가에서 찔레꽃밭을 보았다 하셨고, 저는 그 꽃밭을 찾고 싶습니다.’
감청색 건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낯빛에 퉁명스럽고 새초롬한 무심함을 떠올린 저이가 과연 기뻐하는 얼굴을 지을 것인지가 궁금했다.
“갇혀 있는 게 아니라면 제 성의를 봐서라도 나오셔야 합니다.”
게다가 저는 궁금한 것이라면 어떻게든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내이지 않던가.
“…하려고 마음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마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궁핍한 변명거리를 늘어놓은 은재도, 그걸 훤히 꿰뚫어 보는 강도 말을 잇지 않고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은재는 그가 저의 거짓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견디기 힘든 눈초리와 침묵에 은재의 입에서 작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늘어놓을 구실이 더 있습니까?”
능글거리는 웃음에 정곡이 팍 찔려 은재는 고개를 숙였다.
“먹히지도 않는 핑곗거리는 넣어 두십시오. 해가 질 것 같으니, 어서 나오십시오.”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강을 못 이기겠다는 듯 은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고숙님과 약조를 했습니다.”
“약조?”
“예,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바깥출입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에 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혼례를… 올린다고 했습니까?”
은재는 강의 눈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선명한 당황과 불만스러운 눈초리가 제 살갗을 쿡쿡 찔러 댔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은재는 지레 겁을 먹고 또다시 강에게서 눈길을 떼었다.
“때가 되었으니, 할 것은 해야지요.”
“하나… 그대는….”
강의 걱정을 알아챈 은재는 괜히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것 역시 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강은 헛웃음을 꺼냈다.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강의 눈에는 김윤덕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눈엣가시를 제 앞에서 치워 버리겠다는 저급한 계략이 이렇게도 잘 먹힌다니….
지금 제 앞에서 멋쩍어하는 순진한 이를 보며 강은 김윤덕의 비열함에 혀를 찼다.
“혹 만백성의 모범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까?”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은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답지 않다는 듯 흘겨보는 눈으로 그리 강을 쏘아보자, 강은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도리와 규범에 무지하고, 알고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것은 지키라고 만든 겁니다.”
“나이 든 늙은이도 아니고. 요새 젊은이 중에 그대처럼 자신에게 각박하게 구는 이가 있을까 싶습니다.”
“각박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응당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와 다르게 인품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지요.”
은재의 뻗댐에 강은 기가 차 웃었다.
“그대와 나는 학문을 논하는 선비가 아니잖습니까?”
끝까지 져 주는 법이 없는 이를 보는 눈길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실랑이를 벌이는 이 시간이 아깝지 않은 건 그 전까지 너무나 적적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이야기를 주고받다가는 좋았고 고마웠던 것마저도 산산이 조각날 듯하여 은재는 서둘러 물러나기를 택했다.
“내 오늘이 아니면 그대를 그곳에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끈질기게 저를 재촉하는 강을 보며 은재는 이를 악물었다. 나갈 수 없는 제 처지에 화가 났고, 속사정도 모르면서 저를 가만두지 않는 강이 얄미웠다.
“그대가 정녕 무엇을 원하는지만 생각하십시오.”
그 말은 마치 도화선과 같았다.
이 집 안에서 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이가 있었던가. 은재는 줄을 타고 저에게로 다가오는 불꽃을 두려운 눈길로 보았다. 금방이라도 불꽃에 의해 터져 버릴 것 같은 제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닿은 시선이 달달 떨렸다.
“이리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혼례를 올린다면 정녕 행복해지는 것입니까?”
악물었던 턱에서 저절로 힘이 빠지더니 달달 떨리던 눈이 강에게 꽂혔다. 지금까지 벅차올라 힘겨웠던 숨이 턱 막히면서 은재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잇새로 앓는 것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어미는 네가 행복한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단다.’
은재는 어미의 바람을 떠올렸다. 어떤 다사다난한 일이 있다 해도 행복하게 지내라고 했다.
원망하지 말라는 말은 지켰으면서 어찌 제 행복은 등한시했을까. 그동안의 제가 우스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제가 이곳에서 나가면 행복해지는 것입니까?”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강 또한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퉁명하고 새초롬했던 모습은 간곳없이 꽤 진지한 얼굴을 보며 강은 입꼬리를 가로로 늘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그 후에 인품이니, 효도니 사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을 하나씩 어겨 봅시다.”
강의 웃음을 보며 은재는 심장이 마구잡이로 요동치는 걸 느꼈다.
“적어도 재미는 있을 것입니다.”
숨이 턱턱 막히다 못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진정해 보려고 가까스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면서 결심도 함께 내렸다.
“대문으로 나서면 식솔들이 막아설 터인데, 어찌 나가면 좋겠습니까?”
강은 피식거리며 비웃었다.
자의로 구류를 택한 줄 알았건만 흥분으로 일렁거리는 표정과 말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너머에 있는 이가 제가 툭 던져 놓은 비웃음을 업신여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쏘아보는 눈길에 강은 뻔뻔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에게서 떨어져 나간 시선에 살짝 아쉬움을 느꼈지만, 구태여 표현하지는 않았다.
“담을 넘으십시오.”
“담을요?”
“예. 못 할 것도 없잖습니까.”
은재는 유난히 높은 담벼락과 땅의 높이를 견주어 보았다. 그러나 오 척 가까이 되는 담을 도움도 없이 넘어갈 만큼 몸이 날쌔지 않았다.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얼굴로 강을 보자 강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또 저의 자존심을 톡톡 건드렸지만, 제 몸이 둔한 게 사실이었으니 뭐라 맞받아칠 수도 없었다.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갈까요?”
“예?”
믿지 못하겠다는 눈초리에 강이 혀를 찼다. 그러곤 얄궂다는 듯 은재를 탓하는 눈빛을 꾸며 내며 말했다.
“사람을 뭐로 보고…. 이깟 담 정도는 거뜬히 넘을 수 있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강이 담을 오르려고 시늉하자, 은재가 서둘러 강을 말렸다.
“할 수 있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담벼락 위에 올라설 수만 있다면 내려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자신감이 들기 무섭게 은재는 부엌간의 장독대를 떠올렸다.
“우선 부엌간으로 가야 합니다.”
“부엌간요?”
“예, 그곳에 장독대가 있으니 그것을 밟고 올라가면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신에 찬 은재는 강의 답을 듣기도 전에 중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과연 혼자서 내려올 수는 있으려나 하는 의구심이 들던 차에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진 것처럼 혼자 남아 있던 강은 어딘지 모르는 부엌간을 찾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으악!”
중문을 나서던 찰나, 은재는 바로 코앞에서 꺽새와 마주쳤다. 꺽새에게 붙잡힐까 봐 겁이 나서 있는 힘을 짜내 꺽새의 어깨를 두 팔로 밀어 버렸다.
은재에게 떠밀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꺽새는 바닥에 주저앉아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은재를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도련님?!”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당이 있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홍 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꺽새를 째려보았다.
“또 무슨 일이냐?”
“아재! 도련님께서!”
“뭐야? 이놈아! 어딜 가는 게냐!”
허겁지겁 둔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꺽새는 소리를 내지르고는 은재가 달려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예삿일이 아님을 짐작한 홍 씨는 서둘러 정원에 모여 있던 사내종들을 불러 모아 대문간으로 가게 했다. 걱정에 휩싸인 홍 씨도 곧 꺽새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무사히 부엌간으로 도착한 은재는 망설임 없이 장독으로 기어 올라갔다. 처음에는 디딜 만한 작은 장독, 다음에는 저의 허리춤에 오는 장독을 밟았다.
“으앗!”
꺽새를 가둘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장독에 올라선 은재가 중심을 잃었는지 휘청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가까스로 그곳에 도착한 강이 은재를 붙잡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풀썩 그 자리에 앉아 버린 은재는 겁에 질려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찌 그리 무모합니까?”
성내는 말투에 은재는 슬그머니 강을 바라보았다. 몸이 앞선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은재는 풀이 죽었다.
“도련님!”
몸짓이 둔한 아이답지 않게 부엌간에 빨리 도착한 꺽새를 보며 은재가 질색했다.
“제 몸종이 옵니다.”
은재는 저에게 뻗친 강의 손을 붙잡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담 위에 있는 기와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은재에게는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독에 올라섰을 때와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맨땅을 보니 또다시 겁이 났다. 은재는 제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강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강은 하얗게 질린 은재에게 걱정 말라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등을 내어 드리오리까?”
감히 어느 누가 왕족의 등을 짓밟을 수 있겠는가. 인간 말종도 왕족의 등을 밟는 건 못 하겠다며 혀를 내두를 것이었다.
은재는 입술에 힘을 가득 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다면 내가 받아 줄 테니 뛰어내리십시오.”
그 말에 은재는 답을 하지 않았다. 저를 따라 장독 위로 기어 올라온 꺽새의 부산스러움을 느꼈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제 몸뚱이의 고통을 짐작했지만, 상대는 저 하나쯤은 거뜬하게 받아 낼 수 있는 자였다. 그렇다고 믿어야 했다.
“또 나리십니까?!”
때마침 도착한 홍 씨가 담벼락에 달라붙어 외쳤다. 강은 그런 홍 씨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또 나일세.”
“도련님! 그곳에 가만히 계십시오!”
홍 씨가 윽박을 지르듯 소리쳤지만, 은재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은재는 눈을 질끈 감고 다짜고짜 강을 향해 뛰어들었다.
몸뚱이를 받아 낸 팔이 허리를 감쌌다. 맞닿은 가슴과 가슴을 느끼며 은재는 저도 모르게 강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저의 외격소가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재는 강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지겹도록 차분해지지 않는 벅찬 숨을 고르는 건 이미 포기한 후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 안일한 생각을 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곧 경직되어 있던 입술에서 힘이 빠지더니 그 누구도 볼 수 없도록 감춰진 입꼬리가 은밀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저 몰랐던 것을 알게 되어 기뻤을 뿐이었다. 콧속으로 들어온 향에 사로잡힌 은재는 서서히 제 몸에 퍼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좋다며 그 향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형언할 수 없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다는 듯 은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
목덜미를 조여 오는 힘에 강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더욱더 밀착된 몸을 느끼며 강은 슬그머니 헛웃음을 내뱉었지만, 저의 품에 안겨 있는 이는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강 또한 품이 넓은 옷에 가려진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은재의 등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내 품이 넓어 안기기 퍽 좋지만, 이만 내려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지금 무얼 하던 중인지, 누구의 품에 안겨 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 은재가 황홀함에 젖어 있을 즘이었다.
산통을 깨겠다는 듯 속삭이는 소리에 은재는 정신을 번쩍 차렸고, 제 등을 쓸어 올리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소름을 느꼈다.
제 두 발이 무사히 땅에 닿아 있는 것을 확인한 은재는 극심한 후회에 휩싸였다. 귀는 물론이고 몸 전체가 부끄러움에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애먼 땅을 쏘아보고 있는 은재에게 강이 말했다.
“몸종들에게 붙잡히기 싫으면 어서 뛰십시오.”
강은 준비도 하지 않은 은재의 손목을 잡고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산길은 대체로 가파르지 않았다. 깊은 숲속까지 퍼진 나무를 양옆에 두고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앞에 늘어서 있던 나무가 사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을 거닐었다.
앞선 이는 돌길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흔들림 없이 걷는 반면, 뒤에 선 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슬아슬했다. 제 주먹만 한 자갈돌을 밟고 휘청이질 않나, 이끼가 낀 바위를 밟고 미끄러지지 않나.
“으….”
벌써 몇 번씩이나 넘어질 뻔한 은재는 강의 시선이 저에게 닿을 때마다 그 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 발그레해지는 두 뺨을 감추느라 은재의 고개가 자갈밭으로 향했다.
“길이 좋지 않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예.”
저와 다르게 궂은 길을 여유롭게 걷는 강을 보니 은재는 속이 상했다. 무예에 소질이 없어도 진작에 다리 힘을 길러 둘 것을. 뒤늦은 후회를 떠올렸지만 제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니 그나마 속이 시원했다.
은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보는 강에게 갈 길을 가자는 듯 눈짓을 하고는 걸음을 떼었다. 강은 뒤뚱뒤뚱 자갈밭을 걸어오는 은재를 보며 피식거렸다.
떨어진 거리가 점차 좁혀지고 있음에도 강은 그곳에 서서 은재가 오길 기다렸다. 마침내 은재가 강의 앞에 섰다.
“지세가 더 험난해질 것입니다. 제 곁에 딱 붙어서 따라오십시오.”
“예.”
배려마저도 못마땅했는지 은재는 볼멘소리로 답했다.
두 발이면 거뜬히 넘을 수 있는 바위 앞에서 강이 은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로 앞에 있는 매끈한 바위를 오르지 못할 것 같아 손을 내밀었건만, 은재는 두 뺨만 살그머니 붉히고는 강을 지나쳤다.
머지않아 두 사람 앞에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은재는 이번에도 자신 있다는 듯 앞장섰다. 비단신을 신은 발로는 어림도 없을 터인데. 강은 살짝 불안했다.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땅이었고, 길이었다. 비록 경사가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바위는 은재의 키보다도 높았다. 게다가 바위에 들러붙은 물이끼 때문에 더욱더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강은 성큼성큼 걸어가 매끄러운 바위를 손으로 짚고 한쪽 발을 디딘 은재를 보았다. 어디서 불어난 자신감일까 싶어 서둘러 은재의 뒤를 따른 강은 그를 받아 낼 기회를 엿보았다.
“어어!”
아니나 다를까. 바위에 두 발이 닿기 무섭게 미끄러지며 은재가 우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적절한 시기에 은재를 받아 낸 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은재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은재의 두 뺨 위로 새빨간 홍조가 피어났다.
부끄러워하는 것에는 꽤 솔직한 편이었다.
“거참, 위험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놔주십시오. 혼자 올라갈 수 있습니다.”
“허튼소리. 내가 먼저 올라갈 테니 기다리십시오.”
강의 품에서 떨어진 은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은재의 불만을 본 강이 타이르듯 말했다.
“오기로 나섰다간 찔레꽃을 찾기도 전에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다칠 것입니다. 정녕 그러길 바랍니까?”
꽃밭의 위치를 아는 건 강이었고, 이 험난한 지세를 뚫고 가는 것도 저보다는 강이 더 우세했다. 어수룩한 모습만 보이는 게 낯 뜨거워서 나섰지만, 소득도 없고 낯만 더 붉히게 되었으니 은재는 여기서 얌전히 물러나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다.
덧댄 비단색이나 수놓은 무늬가 어제 신었던 신발과는 달랐다. 꽤 불편해 보이는 신발이었는데도 강은 날렵한 몸짓으로 바위 위에 올라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은재는 그저 경이롭다는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저에게 내민 손이 의아해 은재가 눈을 깜박거렸다.
“하찮아 보이는 바위에 오를지라도 무공이 필요한 법이지요.”
능청스럽게 웃은 강이 조금은 얄미웠다. 은재는 뾰로통한 얼굴로 강의 손을 맞잡았다. 저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은재는 살짝 식겁했다.
그러나 강은 은재를 놓치지 않았고, 질질 끌려가다시피 바위에 올라선 은재는 훅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되었던 마음을 비우고 천연덕스럽게 강을 보자 생글거리는 그가 앞쪽으로 손짓했다. 그 손길에 따라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은재는 제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이가 이 높은 바위만 넘으면 찔레꽃밭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던가.
눈앞에 드러난 암지는 지금껏 걸었던 길과는 달리 평탄했다. 상쾌한 소리를 내며 물줄기가 떨어지는 낮은 폭포 옆에는 절벽과 나무가 얼키설키 엉켜 있었고, 근처에는 입구가 좁은 동굴도 자리하고 있었다.
단단한 바위를 뚫고 어찌 자랐을까. 숲과 계곡의 경계에 잔뜩 피어 있는 찔레꽃을 보며 은재는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꽃에 정신을 홀린 듯 서슴없이 걸음을 떼었다.
“조심하십시오.”
찔레꽃은 숲에서는 흔하디흔한 꽃이었다. 찾고자 했던 꽃밭이 이곳인지 불확실해 자신이 없었으나, 강은 넋을 놓고 걸어가는 이의 얼굴을 보고는 침묵했다.
앞선 이가 찾길 바랐던 것은 필시 찔레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강은 저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은재를 응시했다. 찔레꽃에 얽힌 사연이 궁금하기는 하나 구태여 묻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글썽인 눈물을 보았으니, 그 사연이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닐 터라 짐작했다.
찔레꽃 덤불 앞에 선 은재는 어미를 향한 그리움이 담긴 건을 꺼내 들었다. 건의 끝과 끝에 새겨진 꽃을 보고, 줄기에 매달린 꽃을 보았다. 파릇파릇한 잎과 어울려 있는 꽃을 보며 은재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엄지로 건에 수놓인 찔레꽃을 쓰다듬었다. 촘촘히 박혀 있는 실을 느끼며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줄기에 매달린 꽃잎을 매만졌다.
“그래도 행복하라 하셔서…. 쉽지는 않지만 그러려고 합니다.”
마치 어미의 신위 앞에 서 있듯 은재는 꽃을 눈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은재는 입술을 앙다물고 슬픔을 삼키려고 했다. 울컥하고 치솟는 설움을 미소로 바꿔 보았지만, 이미 자리 잡은 슬픔을 깨끗하게 비워 낼 수는 없었다.
제 손에 들린 건이 저를 더욱더 슬프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은재는 다시 소매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껏 더운 몸을 식혀 주어 고마웠던 바람이라는 것이 야속하게도 그의 손에 걸려 있던 건을 앗아 갔다.
물가 쪽으로 날아가면 고마웠겠으나, 은재의 속을 모르는 바람은 건을 나무가 즐비한 곳으로 몰고 갔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도록 섬뜩하게 얽혀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건을 보며 은재는 아, 하고 탄식했다. 건을 잃을 수 없었던 은재는 기어코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줄곧 은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강이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새 은재의 뒤편으로 다가온 강이 길게 팔을 뻗은 은재를 말렸다.
“내가 하겠습니다.”
저를 밀어 내는 손길에 이끌려 뒷걸음질 친 은재는 불안한 얼굴로 강을 보았다. 그러곤 결에 따라 부러져 뾰족해진 나뭇가지 끝으로 눈길을 옮겼다.
태풍에 부러진 듯 나무에 아슬아슬하게 얽매여 있는 나뭇가지는 제 장딴지와 견줄 만큼 굵고 위험해 보였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강은 은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나뭇가지에 걸린 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강의 손에 건이 잡히는 동시에 우지끈 소리가 나며 위태롭게 나무에 걸려 있던 썩은 나뭇가지가 강을 향해 돌진했다. 저의 안위보다 뒤에 서 있는 이가 다칠까 싶었던 강은 재빨리 몸을 돌려 은재를 감싸 안았다.
“윽…!”
옅은 신음을 내뱉는 동시에 나뭇가지에 떠밀려 쓰러졌지만, 강은 별게 아니라는 듯 저를 덮친 나뭇가지를 치워 냈다. 함께 암지로 고꾸라진 은재의 얼굴이 파리해진 것을 보고 더욱더 태연하게 굴었다.
사색이 된 은재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강은 벌떡 일어나 옆으로 밀어 낸 나뭇가지를 발로 툭툭 밀었다.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말했건만, 은재의 얼굴은 도무지 제빛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치, 치료를 해야 합니다!”
은재가 쏜살같이 일어나 강의 어깨를 살폈다. 옷이 찢기고 작지 않은 상처가 나 있었다.
통증의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겨보고는 은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거 아닙니다.”
나뭇가지에 긁혀 살갗이 벗겨진 상처에 피가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주르륵 흘러내리자, 은재의 얼굴이 더욱더 파랗게 질려 갔다.
“동굴…. 동굴로 가야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은재를 보며 강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까짓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동굴에는 굳이 뭣 하러 들어가냐는 말도 핀잔이 될 것 같아 강은 조용히 은재의 손길에 이끌려 동굴 쪽으로 향했다.
어쩌다가 그곳에 생긴 것인지는 모르는 동굴 안은 습하면서도 시원했다. 동굴 천장에 맺힌 물이 웅덩이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울려 퍼졌다.
강은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다친 저를 위하는 은재가 그저 기특해 올곧이 바라보았다.
“잠시만 계십시오.”
강을 그 안에 두고 홀로 바깥으로 나온 은재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향했다.
물이끼에 미끄러져 낭패를 보지 않겠다며 조심스럽게 물가로 가 소매에서 명주 손수건을 꺼냈다. 물에 적신 뒤 비비고 다시 물에 헹구는 부지런을 떨다 끝에는 두 손으로 손수건을 비틀어 짰다.
여전히 울 것 같은 마음에 이를 악물고 강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떼었다.
은재가 다시 동굴로 돌아왔을 때 강은 갓을 벗어 두고 상의도 다 벗은 채 맨몸으로 제 상처를 확인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에 은재는 제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옷으로 가려진 태를 얼핏 보아 예상은 했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본 장면은 강렬했다. 길게 뻗은 팔을 따라 내려가던 시선이 단단할 것 같은 근육을 적나라하게 매만졌다. 제 눈길이 무엇을 좇고 있는지 모르고 은재는 그리 한참을 그곳에 서서 강을 훔쳐보았다.
은재의 눈길을 지켜보던 강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도 상처가 깊지는 않습니다.”
안심하라는 듯 능청스러운 투로 말했지만, 저를 훔쳐보다 정신을 차린 이는 금세 표정이 심각해졌다. 피가 계속 흐르는 상처로 눈길을 돌린 강은 피를 닦기 위해 찢어진 도포를 집어 들었다.
“제가…. 제가 봐 드리겠습니다.”
때를 놓칠까, 맨몸에 경직되어 있던 은재는 손에 든 손수건을 꽉 쥐었다. 잠시 얼빠졌던 저 자신을 질책하고는 서둘러 강의 곁으로 향했다.
은재에게는 팔뚝을 따라 흐르는 피가 낯설었다. 기껏 넘어져도 살짝 비치고 말았던 피가 솟아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은재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상처를 조심스레 눌렀다.
“으윽….”
강의 잇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에 은재가 화들짝 놀라 뛰었다.
“떼지 마십시오.”
강은 상처에서 멀어진 은재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려 다시 상처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살포시 은재의 손등을 눌렀다.
“깊은 상처가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그렇지만….”
태연한 강의 모습에도 은재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심하라던 강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였다. 저의 안일한 잘못으로 다쳤다는 것에 충분히 죄책감을 느낄 만했다.
게다가 상대는 왕족이었다.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은재는 속으로 저를 탓했다.
이 미련퉁이야….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결국 속으로 삭이려고 했던 울음이 강의 어깨에 난 상처에서 솟아나는 피처럼 펑펑 쏟아져 나왔다. 은재는 눈물을 들키는 게 싫어 고개를 푹 숙였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말라 있던 바닥에 떨어진 물 자국에 강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짐짓 놀란 얼굴로 저에게 정수리를 들이밀고 있는 은재를 보았다.
“어찌 웁니까?”
앙다문 입술 사이로 설움이 새어 나올 것 같아 힘을 줬다. 은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느슨하게 풀려 있던 갓이 벗겨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저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막상 은재가 우는 것을 보자 강은 마음이 저릿했다.
“저 때문에… 이리 되시어…. 속상합니다.”
우는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이가 어찌나 안쓰러운지 강은 저도 모르게 은재의 턱 끝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제 손끝으로 들린 고개를 보며 헛숨을 내뱉었다.
토끼처럼 벌게진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강은 탄식을 내뱉었다.
“울지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조심하라 그리 말씀하셨는데…. 제가 미련해서….”
흑흑거리며 우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자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완전히 마음이 편안해지려면 눈에 보이는 눈물이 없어져야 했다.
강은 다친 어깨의 팔을 들어 은재의 눈물을 훔쳤다. 그간 퉁명스럽고 새초롬한 모습만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니 그게 또 마음에 와닿았다.
훔쳐도 멈추지 않는 눈물을 어찌할까.
이 안쓰럽기 짝이 없는 이를 어쩌면 좋을까.
왜 자꾸만 저의 마음을 건네게 하는 것일까.
강은 천천히 은재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화들짝 놀라 우는 것을 잊어버린 은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맺혀 있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상처를 덮고 있던 손수건이 이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보드라운 살갗에 닿은 엄지손가락이 눈물에 적셔 들었다. 그저 저로 인하여 우는 이가 안타깝고 사랑스러워 보였을 뿐이었다. 혹은 좁은 동굴을 가득 채운 향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억누르기에만 급급했던 욕구가 봇물처럼 터져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저를 밀쳐 내지 않는 손길이, 가까워진 숨결에 응하는 그이가 야속할 뿐이었다. 강은 다른 때와 달리 얼굴을 붉히며 저를 비난하지 않는 입술이 저를 꾀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더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강은 악착같이 잡고 있던 이성을 천천히 비우기 시작했다.
경직된 이의 입술을 탐하면서 강은 저 혼자만의 황홀함일지라도 은재가 저처럼 이 황홀함에 물들길 바랐다. 입맞춤을 멈추고 고개를 슬쩍 뒤로 물리니 촉촉하게 젖어 있는 은재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강의 눈동자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수줍음으로 물든 두 뺨과 어쩔 줄 몰라 우물거리는 입술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적의 자식이라고 덮어놓고 있느라 그이의 매력을 알아보지도 못했던 것일까. 새초롬하기만 했던 이를 보며 다른 마음을 품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터져 버린 봇물에 허우적거리는 건 오롯이 저의 몫인가 보구나, 싶었다. 저의 강함은 영원할 것이라는 다짐과 다르게 은재의 얼굴에 매료된 건 강이었다.
그러나 그이도 저와 같았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시선과 다르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동요하고 있었다. 당연히 시골 샌님보다 더 고루한 이가 지금 이 상황을 가뿐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동한 게 분명했다. 저와 입술을 맞추고 숨결을 나누었으니 그 단단했던 마음이, 고루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마음이 산산이 조각이 났을 터였다. 강은 그런 은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저를 막지 않은 것은, 앞으로 뛰쳐나가길 바라는 저를 붙잡지 않은 것은 모두 제가 눈을 맞추고 있는 이의 잘못이었다. 모두 황홀감에 젖어 들어 저를 원하고 있는 이의 눈빛 탓이었다.
“그만할까요?”
강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굳이 물었다. 허락을 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다고 은재가 타락으로 빠져들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애가 타다 못해 바짝바짝 말라 가는 저의 마음을 한번 느껴 보라는 못된 심보였다.
타인과 처음 입술을 맞춰 보는 은재는 갑작스럽게 저에게 쏟아진 상황에 홀딱 빠져들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벌렸던 입술은 무엇으로도 해명할 수 없었다. 입술에 감돌고 있는 그 촉감에 애가 탔다.
마주친 눈을 휘감고 있는 강렬한 무엇인가를 보며 은재는 그것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세차게 타오르던 눈길이 처음 느껴 보는 욕정에 사로잡힌 어리숙한 눈을 집어삼켰다.
“으음….”
다시 입술이 맞닿았을 때, 강의 움직임이 조금 전보다 더욱더 격렬해졌다. 강은 은재가 저에게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턱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살짝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속으로 물컹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안으로 밀려 들어온 살덩이가 생경했는지 안을 지키고 있던 혀가 단단하게 굳어 쪽을 쓰지 못했다. 경직된 그것을 살덩이로 툭 하고 살짝 건들자, 아니나 다를까 그것의 주인이 화들짝 놀라 저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어림도 없었다. 입 안을 휘젓고 있는 살덩이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먹어 치우겠다는 듯 광포를 떨어 댔다. 여린 살점을 희롱하는 것으로는 부족했고, 부드러운 점막을 훑는 것으로도 감질이 났다.
얼떨결에 난폭한 살덩이에 휘말려 버린 그것이 맥을 추지 못하고 피해 다녔지만, 그 움직임 역시 환희를 부추겼다.
그 이상은 안 될 것 같았다. 함께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가는 세상의 끝에 닿을 것이었다.
은재는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손을 들어 강의 두 팔을 잡았다. 직접 만져 보는 것은 처음이라, 그 단단한 살갗을 제가 잡아 놓고 파르르 떨어 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은재는 강의 팔뚝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저 저에게 없는 그 튼실한 근육이 부러워 자꾸만 탐이 났다. 슬쩍 주물러 보기도 하고, 훑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제 얼굴을 덮고 있는 큼지막한 손을 의식했다.
질퍽한 살덩어리가 교미를 하는 뱀처럼 얽혔고, 뜨거운 숨결이 뒤섞였다.
“…흐음.”
입을 맞추며 숨을 내쉬는 방법조차 모르는 미련퉁이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숨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숨이 턱 하고 막힐 것 같은 위기감에 눈을 번쩍 뜬 은재가 강의 손목을 억세게 붙잡았다.
강의 입술이 떨어졌다. 과감하게 맞잡은 두 손을 뿌리치지 못한 은재는 달뜬 숨을 내뱉었다.
살짝 숙여진 이마에 열기가 가득한 입술이 닿았다. 흠칫 놀라며 몸통을 바르르 떨었다.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그 촉감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발끝으로 퍼져 나갔다.
잠깐 떨어진 눈길이 아쉬워 은재는 고개를 들었다. 그윽한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이를 보았다. 그의 눈을 보고, 턱 위에 자리한 번들거리는 입술을 보았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다는 듯 입술이 자꾸만 꼼지락거렸다.
강은 그런 은재를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은재를 끌어안았다. 그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박고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체향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들이마셨다.
심보가 못됐기에, 원하는 것을 바로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윽….”
목덜미에 닿은 숨결마저도 뜨거웠다. 어찌 이렇게 열이 많은 것일까. 은재는 덩달아 뜨거워진 제 몸뚱이를 생각하지 않고 목을 움츠렸다. 점점 더 제게 파고드는 이를 느끼며 은재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뒤로 젖혀졌다.
등을 쓰다듬다 앞으로 넘어온 손길이 맨 위에 걸친 도포 자락을 쓸고 위로 올라갔다. 도포의 고름이 풀렸다. 그 속을 탐하고 싶었던 강은 도포에 가려졌던 저고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가슴에서 옆구리로 넘어간 손은 부드러운 비단을 느끼며 감춰진 살갗을 상상했다. 가슴팍으로 돌아온 손이 또다시 과감하게 잘 묶여 있는 고름을 잡아당겼다.
한번 흐트러지기 시작한 옷매무새는 적의 침공을 당한 요새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강은 마침내 옷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맨살을 큼지막하고 뜨거운 손으로 매만졌다. 부드러운 살갗이 느껴지는가 싶으면 끝에 단단한 뼈가 채였다.
슬슬 애가 타기 시작한 쪽은 은재였다. 제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이 벗겨지는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순진했으면서도 은재는 저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기에, 그저 좋았다.
그가 저를 더 어루만져 주길 바랐다. 마치 귀한 것을 쓰다듬듯 저를 그리 느끼길 바랐다. 마치 그 손길에 그 누구에도 받지 못할 애정이 담긴 듯해 가슴이 뭉클하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으읏….”
그러나 은재는 강의 손길이 등에 닿으면 몸을 앞으로 쭉 내밀었고, 가슴에 닿으면 뒤로 쭉 뺐다. 간질거리는 그 느낌에 마른 살집이 달달 떨렸다. 멋대로 입 밖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야살스러운 소리가 동굴에 광광 울리면 수치심에 귀가 불에 타는 것 같았다.
거침없는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헤치고 들어간 손은 능수능란하게 허리를 조여 맨 띠를 끌렀다.
은재가 입은 바지를 내리기 위해 강이 은재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들어 올렸다. 느슨해진 바지가 단숨에 허벅지를 훑고 종아리를 지나 발목을 거친 후 강의 손길에 의해 단단한 암지로 나가떨어졌다.
강은 눈높이가 같아진 은재와 눈을 맞췄다. 눈을 점찍어 놓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눈길에 밑이 트인 개당고 바지가 들어왔다.
아무리 노려보아도 그 틈 속에 감춰진 것이 별안간 모습을 내보일 리가 없어 강은 은재를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틈새가 약간만 벌어질 뿐, 바지 틈에 숨은 것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았다.
쪽 하고 다시 한번 입술과 입술을 맞췄다. 붉어지는 게 습관인 볼을 쪽쪽거렸다가 턱을 따라 목덜미로 향했다.
강은 흐르다 못해 넘치는 향을 느끼며 혀를 꺼내 할짝거렸다. 그게 생소했는지 흰 살갗이 파르르 진동했다. 그곳에 입을 맞추고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갔다.
다시 은재와 눈을 맞췄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하다 입술로 돌아간 입술이 그제야 은재가 원하던 것을 내어 주었다.
강은 입술을 맞추면서도 손을 놀렸다. 한 손으로는 허벅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은재를 받쳤고, 다른 손으로는 활짝 트인 바지의 틈을 파고들었다.
토실토실한 볼기를 감싸 쥐고 어루만지던 손이 말캉말캉한 살을 쓰다듬으며 점점 더 은밀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강은 좁은 비문에서 새어 나오는 액체로 축축해진 회음을 매만졌다.
“아, 앗!”
저 혼자 움찔거리며 묽은 액을 뿜고 있는 주름을 검지로 문지르자 안겨 있던 이가 벌떡 튀어 올랐다. 그 손놀림이 뭐라고. 강은 좁은 틈으로 검지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우흣!”
재차 발작하듯 튀어 오른 은재는 바닥에 무릎을 딛고 강의 머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천천히 제 몸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았고, 무엇을 위해 제 은밀한 곳을 파고든 것인지도 알았다.
쏜살같이 피어오른 공포와 두려움으로 허벅지를 달달 떨며 그 손길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툭 건드렸다.
“아, 으읏!”
힘을 주었던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며 은재가 풀썩 주저앉았다.
진액 범벅이었던 구멍은 오랫동안 그곳을 함락시킬 존재를 기다렸다는 듯 강의 손가락을 먹어 치웠다. 뜨겁고 보들보들하며 축축한 내벽이 손가락을 조이기도 했다.
비문이 천천히 물러나는 손가락을 뱉어 내자 투명한 액이 함께 딸려 나왔다. 주름에 액을 바르듯 살갗을 비벼 대던 강은 두 개의 손가락으로 다시 비문을 파고들었다.
“으윽….”
끙끙 앓는 것 같은 신음이 제 귓가에 퍼졌다. 손을 타지 않은 것치고는 몸의 반응이 확실했다. 구멍을 늘리기 위한 행동으로도 어찌 이리 흡족한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
강은 은재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 위로 입을 맞췄다. 신중을 기해야 했다. 저에게 처음으로 몸을 연 이를 위한 배려였다.
“힘을 빼십시오.”
두 개의 손가락을 먹어 치운 비문은 조바심으로 안달을 내고 있었다. 귓가에 속삭인 말로 잔뜩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힘으로 비문이 늘어났다. 진액이 주르륵 회음을 타고 암지로 툭툭 떨어졌다.
신음을 내뱉는 걸 수치로 여긴 듯 제 어깨에 다문 입술에서 앓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강은 그것을 귀담아들으며 손가락 세 개를 밀어 넣었다.
“으… 악!”
비문은 얌전히 세 개의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좁고 습한 통로를 가득 메우자 여린 살에서 바르르 떨리는 듯한 경련이 느껴졌다. 넣고 빼기를 반복하다 손가락을 벌려 구멍을 늘려 본 강은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진액으로 범벅이 된 손을 옮겨 제 허리를 풀고 그 속에 억눌려 있던 성기를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미 잔뜩 곧추선 성기를 매만지며 투명한 액을 발랐다.
“…하.”
깊은 숨을 몰아쉰 뒤 벌떡 선 성기를 놓은 강은 은재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강의 행동은 신중한 것 같으면서 경솔했고, 진중한 듯싶으면서도 경박스러웠다. 제 성기의 굵기는 생각하지 않고 구멍을 늘리다 말았으니 경솔한 것이었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문을 연 이보다도 더 컸으니 경박스러운 것이 맞았다.
발딱 선 채로 선액을 흘리던 성기의 말단이 축축한 비문에 닿았다. 강에게 매달려 어깨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은재는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한 끝을 느끼며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몸을 달달 떨어 댔다.
“으읏, 흣, 아! 아윽!”
말랑말랑해진 틈을 단번에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덜 늘어난 비문은 몸집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성기를 천천히 머금기 시작했다.
“후….”
야금야금 성기를 먹어 치우던 구멍은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듯 기둥을 꽉 조였다. 그 느낌에 강의 잇새에서 벅찬 숨이 터져 나왔다.
“저기…. 아픕니다….”
겁이 나, 혹은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던 은재가 속삭였다.
“쉬…. 괜찮습니다.”
저를 다독거리는 목소리에 풀릴 마음이 아니었다. 엉덩이 사이에 자리한 미골을 쓰다듬는 손길에 은재는 숨을 죽였다.
“이곳의 힘을 빼십시오.”
은재는 이마로 그의 어깨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강이 뿜어내는 체향이 콧속으로 밀려 들어오자 은재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에 홀리고 말았다.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듯 통각에 젖어 들었던 몸에서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아, 으흣!”
그러자 쑥 밀려 들어온 성기가 은재가 알지 못하는 지점을 쿡 찔러 댔다. 갑자기 묵직해진 아랫배의 감각도 감각이지만, 성기의 끝이 그곳을 푹 찔렀을 때 순식간에 퍼져 버린 전율에 은재의 숨이 한껏 들뜨기 시작했다.
강이 받쳐 든 엉덩이를 더 높게 들었다 내렸다. 다시 또 그 행위를 반복하자 은재의 앓는 소리가 조금씩 커졌고, 강이 내뱉은 숨도 짙어졌다.
“읏! 으흣!”
여린 살을 파고들어 훑고 짓누르며 감각을 느끼던 성기는 그 안에서 점점 더 몸집을 부풀렸다. 추삽질이 계속될수록 고조되는 흥분감이 그나마 남아 있던 강의 이성을 날아가게 했고, 지금보다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했다.
“아, 읏, 이, 이상합니다….”
소변을 볼 것 같은 욕구 탓에 은재는 아랫배를 꾹꾹 찔러 대는 그 행위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부드러웠던 움직임이 점차 격렬해지자 더는 요의를 참기 어려운 은재가 강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흐읏, 흣, 아흐윽, 제, 제발….”
목덜미에 둘렀던 팔을 풀고 저를 꽉 끌어안은 강의 가슴팍을 밀어 냈지만, 악착같은 이는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 움직임에 개당고에 가려져 있던 은재의 성기가 옷 사이로 존재를 드러냈다.
양인 여성과 몸을 섞지 않으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성기도 꼴에 생식기라고 발갛게 달아올라 끝에 투명한 선액을 머금고 있었다. 그것이 기둥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리기 무섭게 아주 세밀한 틈에서 희뿌연 정액이, 쓸모없는 씨물이 울컥울컥 뿜어져 나와 강의 맨살을 적셨다.
“아읏! 아, 아으읏!”
파정과 동시에 몸에서 힘이 쭉 빠진 은재는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후희를 느낄 새도 없이 제 뒤를 공략하는 몸짓에 신음했다. 다시 강을 향해 손을 뻗은 은재는 목덜미를 꽉 끌어안고는 저에게 물밀듯이 쏟아지는 쾌감을 느꼈다.
그 몸짓으로는 영 부족했는지 강이 바닥에 흩어진 도포 자락 위로 은재를 눕혔다. 그리고 제 목을 놓아주지 않는 은재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싼 뒤 마구잡이로 추삽질을 이어 갔다.
고간과 회음이 맞닿을 때마다 살갗이 쩍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음란한 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나, 나리, 으핫, 하으읏!”
연신 은재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에 강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성기가 안으로 쳐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강의 단단한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제 목덜미를 끌어당기는 힘에도 굴하지 않고 강은 참았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움직였다.
“읏….”
강의 입에서 거친 숨이 튀어나오는 동시에 성기의 선단에서 진짜배기 씨물이 터져 내벽을 적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던 강은 제 목덜미를 조이고 있던 팔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걸 느끼며 윗몸을 일으켰다.
“…이보십시오.”
강은 혼절한 은재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거칠었던 숨은 온데간데없고 새근새근 잘게 내쉬는 숨결에 그는 그만 픽 웃었다.
* * *
강이 없는 동안 부경은 자유로웠다.
강의 억지와 강압, 투정에서 벗어나 온전히 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경은 그저 기꺼웠다. 집에 틀어박혀 무술을 단련하는 걸 더 좋아하는 그는 나가기를 택하지 않고 제가 지내는 작은 사랑채 뜨락에서 장검을 들고 한창 수련을 하던 중이었다.
“호위 나으리.”
저를 부르는 말복 아범의 목소리에 허공에 검을 휘두르던 부경이 멈췄다. 소매로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 내고 걸음을 돌렸을 때, 부경의 입에서 헛숨이 튀어나왔다.
“어르신….”
부경은 대문간에서 외채인 사랑채로 들어오는 중문에 서 있는 윤호석을 보고는 검을 검집에 넣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맨바닥에 절을 할 듯이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자, 윤호석이 당치도 않다는 듯 부경을 말렸다.
“너는 어찌 예를 갖추지 못해 안달하느냐.”
윤호석의 말에 부경은 멋쩍어 고개를 숙였다.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부경을 보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윤호석은 허허, 하며 웃었다.
“역시나 네 입으로 아비라는 말을 듣는 것은 힘들겠구나.”
양아들을 바라보는 윤호석의 시선은 따스했다. 저의 막내아들이 된 부경에게 느끼는 부정(父情)이 참으로 남달랐지만, 부경은 살가운 핀잔에도 딱딱하게 구는 데 도가 터 멋쩍어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런 부경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윤호석은 더 말하지 않고 부경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으로 서운한 제 마음을 대신했다.
두 사람은 강이 술을 즐길 때나 이용하던 정자에 자리했다. 말복 아범이 다과상을 내오자, 때가 되었다는 듯 부경이 말문을 열었다.
“어찌 이 먼 곳까지 걸음을 하셨습니까.”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신 윤호석은 꽤 좋은 차 맛에 홀홀거리며 웃었다.
“내일이 중전마마의 탄일이지 않으냐. 탄신연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왔단다.”
큰아들의 집은 궁궐의 남쪽인 호정동이었다. 호정동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까닭은 오랜만에 천양으로 돌아온 강을 만나기 위함일 것이었다.
자리를 지키지 않은 강 대신 윤호석을 대면하는 게 마뜩잖지는 않았지만, 이유가 있는 방문에 부경이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잎 차를 즐기던 윤호석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종일관 눈알을 굴리며 상황 파악을 하려는 부경을 보며 그가 또다시 홀홀거리며 웃었다.
“일전에 현천에 다녀왔느냐.”
부경의 눈이 흔들렸다.
“연유가 무엇이었더냐. 대군의 명이었느냐?”
부경은 제가 아는 사실을 윤호석에게 이실직고해야 했지만,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가 현천에 다녀온 것을 안다면 양부도 어느 정도 강의 계략을 눈치챘을 터였다. 머리와 수염이 희었대도 그는 범랑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러나 사실을 고한다면 강에게 족히 십 년은 시달릴 것이었다.
“네 입으로 말할 수 없나 보구나.”
부경의 난처함을 엿본 윤호석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홀짝이던 그는 더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천양에서 온 소식을 부경을 통해 확인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윤호석은 쉽게 실망하지 않았다.
“대군께서는 어딜 가신 게냐.”
일을 보고 오겠다며 능청스럽게 나간 이가 심마니와 찾아낸 꽃밭들 중 어느 곳으로 갔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침묵이 답이라는 듯 부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경아.”
올곧은 부경의 태도에 윤호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 대군께서 은재를 만나셨느냐?”
부경은 놀란 눈으로 윤호석을 응시했다. 현천에서 공진포로 날아간 말이 강의 계획까지 눈치챘던 것은 아니었는지, 윤호석의 얼굴에 떠오른 근심은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우리의 꾀가 결국 이 사달을 만들어 낸 것인가….”
혼잣말을 하는 듯 중얼거리던 윤호석의 말에 부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강이 어떤 이유로 꽃밭을 찾았을까. 현천에 다녀왔던 날, 그날 강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강의 곁에 꽃 향이 떠다녔던 것인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된 부경은 숲으로 떠난 강을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지금 대군을 찾아보겠습니다.”
윤호석은 그런 부경을 올려다보다 곧바로 시선을 떨궜다.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대군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자꾸나.”
부경의 얼굴에 떠오른 걱정과는 달리 윤호석은 담담했다. 부경은 제 양부의 속을 알지 못하겠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 * *
두 눈을 번쩍 뜬 은재는 육지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펄떡 뛰어 일어나 앉았다. 톡톡,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 자리한 곳에 거칠어진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의 부재에 은재는 울컥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희뿌연 빛으로 가득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허무했다. 버림받은 것인가.
세상천지에 그런 무뢰한이 있다는 이야기를 꺽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간 보았던 이의 행실을 생각하니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아니면 꿈인가? 또다시 요망한 꿈을 꾼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풀어헤쳐진 저고리 앞섶과 축축한 개당고바지만 달랑 걸치고 있는 몸뚱이를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은재는 고개를 푹 숙이고 힘 빠진 손으로 흐트러진 앞섶을 여몄다.
제 처지가 한탄스러워 끝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훌쩍거리며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저고리 고름을 묶으려던 찰나였다. 돌바닥을 딛는 발걸음 소리에 은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밝은 곳에 서 있는 이와 눈이 마주치자, 참으려고 했던 눈물이 솟구쳤다.
“…어찌 그럽니까?”
바닥으로 떨어졌던 손수건을 깨끗하게 빨아 오기 위해 계곡에 다녀왔던 강은 어둡지 않은 곳에 앉아 눈시울을 붉힌 은재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우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저릿했다. 서둘러 은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은재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강은 손을 뻗어 은재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붉은 눈망울을 따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꽤 당혹스러웠다.
“저만 두고 가신 줄… 알았습니다….”
설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동굴에 은은하게 퍼졌다.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된 강의 입에서 헛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역시나 그대는 나를 파렴치한으로 여겼군요.”
우스갯소리라고 뱉었지만 은재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강은 은재의 턱 끝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손수건을 눈앞에서 흔들자, 멀쩡했던 뺨에 붉은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퉁명스럽게 대꾸한 강은 일어나 은재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얇은 도포 자락 하나 깔아 놓고 그 짓을 해 댔으니 여리고 흰 살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몸을 가리고 있는 옷을 들춰내자 군데군데 붉은 기가 도사리고 있는 가냘픈 등이 드러났다.
강은 후회 어린 헛숨을 내쉬었다.
“아프지 않습니까?”
두꺼운 손가락이 살갗에 맞닿자 다른 의미로 은재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그 손길에 의해 흐릿하게 몸속을 떠돌던 느낌이 다시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물기 어린 손수건이 맨살에 닿기 무섭게 쓰린 감각이 피어올랐다. 은재는 아프다기보다는 놀란 마음에 몸을 앞으로 빼고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괜찮기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벌게진 등을 식히던 강은 다시 자리를 바꿔 은재의 옆에 앉았다.
“다시 누워 보십시오.”
그가 목덜미에 손을 대고 천천히 은재를 바닥에 눕혔다. 강이 갑자기 다리 한쪽을 번쩍 들어 올리자, 은재가 또다시 펄쩍 뛰어 올랐다.
“뭐, 뭐 하시는 것입니까!”
“윽!”
은재는 제가 다친 강의 어깨를 밀쳤다는 것을 깨닫고 안절부절못하며 그에게 달라붙어 다친 상처를 확인했다. 맺혔던 피가 굳어 검붉은 딱지가 내려앉은 상처에 제가 더 아프다는 듯 은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의 화근이었던 건을 찾아 헤매느라 은재의 고개가 분주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건을 찾아낸 은재는 강의 뒤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팔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괜찮습니다. 그대의….”
“어서 드십시오.”
주도권을 빼앗긴 강은 입을 꾹 다물고 팔을 들었다. 상처는 아프지 않았다. 그 하찮은 상처를 치료하겠다며 소중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것을 제 팔에 두르고 있으니, 그게 퍽 감동스러웠다.
“상처에 물이 닿으면 안 됩니다. 돌아가는 즉시 의원에게 상처를 보이십시오.”
“그대는 괜찮습니까?”
등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강의 상처에 비하면 별게 아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등 말고요.”
등 말고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순간 뜻을 알아챈 은재는 제빛으로 돌아온 뺨을 또다시 붉혔다.
“괘, 괜찮습니다.”
“좀 봅시다.”
저에게 몸을 들린 강이 아슬아슬하게 속살을 감추고 있는 개당고 바지로 손을 뻗었다. 그 손짓에 은재는 두 손으로 바지의 트인 부분을 움켜잡았다.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에도 손수건을 든 강의 손이 은재에게로 향했다. 강은 아연실색한 은재의 얼굴을 보며 피식거리다 은재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미 다른 곳은 다 닦았으니, 얼굴을 닦으십시오.”
강의 얄궂은 장난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은재가 강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낚아채듯 받아 갔다. 그러고는 할 말이 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연신 손수건을 조몰락거렸다.
수상한 낌새에 은재를 응시하던 강은 픽 하고 웃고는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책임지라면 책임질 것이고, 묻겠다 하면 묻겠습니다.”
관계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제가 아직 마음을 확실하게 정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은재는 그 말이 서운했다. 양인과 음인이 동석을 하면 안 된다는 규범을 제 몸으로 직접 부딪쳐 깨달았으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찌할까요.”
은재는 그저 말없이 손에 들린 젖은 손수건만 바라보았다.
“그거 압니까? 세상에는 정혼자를 두고도 사통을 즐기는 이들이 있답니다.”
강의 말에 은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경악을 가득 담은 시선을 강에게 보내자, 그저 우습다는 듯 강이 피식거렸다.
“그런 경망스러운 이들과 저를 덧대지 마십시오!”
“경망스럽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이미 선을 넘었습니다.”
“그것은!”
서로 마음이 동해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지금 와서 발뺌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얼굴을 모르는 정혼자에게 느끼는 죄책감만 더해질 뿐이었다.
고심에 빠진 은재를 보며 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옷을 갖춰 입고 나오십시오.”
그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를 주워 든 후 곧장 바깥으로 향했다.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강을 보고 있던 은재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젖은 손수건을 뺨에 가져다 댔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냔 말인가.
은재는 한 손으로는 개당고 바지의 트임을 여민 채 어귀에 떨어져 있는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옷이….”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바깥으로 나간 은재는 찢어진 저고리와 도포를 입고 있는 강을 보며 작게 탄식했다.
차마 말을 다 할 수 없어 난처한 얼굴로 강을 보았지만, 강은 그런 것에는 하나도 연연하지 않는 듯 태연했다.
“괜찮습니다. 이리 가도 좋고, 뭣하면 지강문으로 가 옷을 사지요.”
지강문 근방에는 백성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다. 대개 양민들이 사는 동네라 좋은 옷을 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강은 이 꼴로 돌아가 부경에게 타박을 받는 것보다 양민들이나 입는 옷을 입는 게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찢어지고 군데군데 얼룩진 옷을 보며 은재가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붉혀 대는 탓에 강의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달뜬 볼을 보니 홍시가 생각납니다.”
홍시? 갑자기 나온 홍시에 은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컹물컹한 것이 맛이 좋지 않습니까? 달큼하기도 하고요. 홍시를 먹을 때면 손이 더러워지지만요. 저는 세상에서 붉은 홍시가 제일 맛있습니다.”
은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강이 지은 표정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능청스러움에 무엇인가가 더해진 듯했는데, 은재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는 은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참으로 순박한 이다.
“곧 해가 질 것입니다. 어서 돌아가지요.”
말뜻을 알아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고군분투하던 은재는 강의 걸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뒤를 쫓았다.
* * *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도성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회은동으로 향했다.
옷을 파는 가게를 찾지 못해 여염집 빨랫줄에 걸린 낡은 옷과 더럽지만 고치면 쓸모 있는 비단옷을 맞바꾼 강은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민무늬 무명옷에 양반이나 걸칠 수 있는 갓과 비단신을 더한 조합이 지나쳐 가던 이들을 다시 뒤돌아보게 했다.
은재는 강의 차림새가 낯부끄러운 게 아니라 제 탓으로 그가 손가락질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거기에다 회은동에 들어서 웅장한 대문을 양옆에 나란히 두고 있으니 슬그머니 불안감이 떠올랐다. 뒷일을 감당할 때가 오자 저 혼자 지레 겁을 먹은 것이었다.
“이제부터 혼자 가겠습니다.”
강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은재를 보았다.
“거, 거의 다 왔으니… 혼자 가도 괜찮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약조한 사람을 부추긴 것은 저였기에 강은 은재가 혼자 뒤집어쓸 게 뻔한 상황에서 마음 편하게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같이 가겠습니다.”
은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손으로 내디딘 걸음까지 막아 세웠다.
“아닙니다.”
황급히 저를 막아서는 은재를 보며 강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지 어찌 압니까?”
“예?”
“그대의 고숙이 짐을 싸 놓고 기다리고 있다면 내가 그 짐을 풀고, 매를 들겠다 하면 내가 그 매를 대신 맞겠습니다.”
허세로 범벅이 된 말이었음에도 꽤 감명적이었다.
은재는 강과 시선을 맞추며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미소를 짓고는 그리해 보라는 듯 강의 앞길을 터 주었다. 강이 은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경박한 것은 내가 하겠습니다. 그대는 고아한 것을 하십시오.”
“예?”
“그대가 책임을 물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 내 탓이라 하십시오.”
퍽 감동적이었지만, 은재는 강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할 생각이 없었다.
“제 잘못은 제가 책임질 것입니다. 하니 저까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강은 먼저 걸음을 뗀 은재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당차 보이던지, 처음 웃는 것을 보는 듯한 그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은재의 뒤를 유유히 쫓았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씩씩한 걸음을 내딛던 은재는 아직은 저 멀리에 있는 웅장한 솟을대문이 눈에 들어오자 슬금슬금 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바깥으로 나왔으니 현천으로 도망갈까 싶다가도 제 뒤를 따르는 이의 존재에 은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고! 도련님!”
강과 거리를 두고 걷는 은재를 발견한 홍 씨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은재도 은재지만, 뒤에 서 있는 강의 해괴한 차림새에 홍 씨가 아연실색했다. 분명 해가 떴을 땐 멀쩡한 옷차림새였는데,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것인가!
“도련님!”
홍 씨의 뒤를 따르던 용천댁은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씩씩거리며 은재에게 다가갔다. 평소에도 억척같은 말씨로 저를 혼내던 이가 두 팔을 걷고 다가오자, 은재는 저를 지켜 주겠다던 존재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쇤네의 애간장을 얼마나 졸이시려고 이러세요!”
“미, 미안하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셨을까 싶어서 단 한시도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어요!”
“내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걱정시켜 참말로 미안하네.”
강은 그저 그 상황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용천댁의 날카로운 눈길이 강에게 닿았다. 은재를 품에 끌어안은 이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뼈를 발라 곰탕을 끓이겠다는 표독스러운 눈빛에 천하의 강이 흠칫거렸다.
“잠깐 볼 일이 있어 나갔다 온 것을…. 과하네.”
그 말에도 용천댁의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홍 씨가 중재하겠다는 듯 강과 용천댁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영감마님께서 뵙길 바라십니다.”
홍 씨의 말에 강은 생글거렸다.
과정은 원하지 않은 길로 흘러갔지만, 결과는 제가 마음먹은 대로였다.
“그래, 형판이 날 뵙자고 하니 응당 낯을 들이밀어야지.”
용천댁의 품에 안겨 있던 은재는 식겁한 얼굴로 강을 보았다. 저에게 닿은 눈길에는 그 어떠한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태연스러운 그의 얼굴에 은재는 옅게 탄식을 내뱉었다. 저의 몫은 고아한 게 아니라 불길로 뛰어드는 이를 걱정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쇤네를 따라오시지요.”
은재와 눈을 맞춘 강은 저를 걱정하는 눈길에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이 정해진 일이라는 것을 미리 언질이라도 해야 했나.
“도련님, 어서 안으로 드셔요.”
용천댁은 멀쩡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은재를 굳이 부축하며 대문 쪽으로 이끌었다. 홍 씨와 나선 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은재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떼었다.
큰 사랑채 마당에 도착한 강은 그곳이 처음이라는 듯 두리번거리며 집을 구경했다. 방 주인에게 손님이 왔음을 고한 홍 씨가 강의 시중을 들기 위해 돌계단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곧 강은 돌계단을 오르고 디딤돌에 섰다. 누군가가 시중을 드는 게 낯설지 않았던 터라, 신발을 벗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강보다 늦게 마루에 오른 홍 씨는 잰걸음으로 사랑방 안으로 드는 장지문 앞에 섰다.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강을 보았지만, 장지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이는 한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홍 씨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장지문을 열었다.
강은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듯 도성에서 가장 넘기 힘들다는 김윤덕의 문지방을 넘었다.
“나를 뵙자고 하셨습니까?”
방 주인은 집 안으로 들어온 임금의 아들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소불위, 무엇이든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것은 권력의 핵심이었고, 그것을 쥐기 위해 인간은 항상 투쟁을 벌여야 했다.
김윤덕은 무소불위의 권력보다도 더 큰 것을 쥔 자였다. 불충과 불경의 차이점을 잘 알기도 했다.
불충은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오, 불경은 국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김윤덕의 충심은 숭고한 국법을 이길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강은 자신의 앞에 있는 진정한 권력자를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행색이 어찌 그러십니까.”
“내 행색을 따지고 싶어 날 보자 청한 것이 아닐 텐데요.”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뜻에 김윤덕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첫 시작부터 강의 선방이었다. 강은 김윤덕의 입에서 앉으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방바닥에 깔린 방석 위에 앉아 그를 대면했다.
“하실 말이 있으면 빨리하십시오.”
보면 안 될 것을 보았다는 듯 강에게 닿아 있던 시선이 떨어졌다. 얼굴에는 언짢음이 가득했다.
“어찌 그 아이를 꾀어내신 것입니까.”
“내 목적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약점, 그리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형판이 그 도령을 약점이라 여기면 약점이 되는 것이고, 눈엣가시라 여기면 눈엣가시가 되니 다 사람 마음먹기 나름이지요.”
김윤덕의 입에서 비아냥거리는 듯한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강 역시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경계하고 배척하면서도 태연한 척하며 서로의 간격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태풍을 무시했다.
“이제 어찌하실 것입니까.”
“조정 대신들보다 약해빠진 내가 뭘 어찌하겠습니까?”
“어찌 보면 큰 패인데, 그냥 버리시렵니까?”
“쓰고 말고는 지금 결정할 일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김윤덕은 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어리석은 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훗날, 이 패가 쓰일 만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마 패를 쓰지 못하실 것입니다.”
강은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쓸 수 있고 말고는 형판이 결정할 게 아니지요.”
“그 패는 곧 범랑을 떠날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눈엣가시를 치우려는 그 속셈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번에는 김윤덕이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의 혼례는 주상 전하의 명이셨습니다.”
궁궐에 있을 지존이 궁궐 밖 대감집에서 거론되었다.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여염집에서도 화두에 오르는 것이 나라의 임금이었다. 하나 강은 지금 이 자리에 올라온 임금이 그저 생소할 뿐이었다.
“도령의 혼례가 주상 전하의 뜻이라….”
“예. 저는 어명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강은 의문이었다. 궁 밖으로 내몬 자식에게는 관심 하나 없던 아비였다. 김윤덕을 총애하는 성심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충신의 숨겨진 자식에게 뻗친 이유가 궁금했다.
“어째서요?”
“대군, 주상 전하께오서는 여전히 공진포와 현천을 우려하고 계십니다.”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라고 그들을 궐에서 내친 분이 주상 전하십니다.”
“그런다 한들 호랑이는 호랑입니다.”
강의 입에서 까칠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설마요. 전하께서는 호랑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형판, 진정한 무소불위가 누구의 것입니까.”
김윤덕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강을 직시했다. 그 비열하고 저급한 웃음에도 김윤덕은 끄떡없었다.
“바로 전하의 것입니다. 형판은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무소불위를 흔들려고 했던 자들이 주상 전하가 아닌 공진포와 현천을 섬깁니다.”
“이미 싹을 다 자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형판이 직접, 그 두 손으로 말입니다.”
저의 인자함을 뽐내겠다는 듯 김윤덕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젖은 땅에는 무엇이든 싹이 움트기 마련이지요.”
그 촌철 같은 말이 날아오는 순간, 강은 꿈에서 저를 맹렬하게 쫓았던 적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은 가장 선명하게 보였던 이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가식으로 꽁꽁 덮인 웃음 뒤에 끝이 첨예한 칼날이 제 목에 닿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강은 무명으로 만든 저고리 속에서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대군,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 굳이 누군가를 탓하고 싶으시다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국구와 제 장인을 원망하십시오.”
줄곧 김윤덕을 응시하던 눈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은 아무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어두컴컴하고 습한 그 지옥 같은 나날이 다시 반복되는 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 지옥에서 단 한순간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저를 되짚었다.
공진포와 현천은 강의 목숨을 연명할 수 있도록 도운 은인이었다. 그들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저 모르게 꾀한 공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니 더더욱 그랬다.
모든 게 김윤덕의 음모라고, 그리 생각하고 싶었다.
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윤덕을 바라보았다.
“주상 전하께서 어찌 그런 어명을 내리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언젠간 그 패를 쓸 것입니다.”
강은 상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혐오와 경멸을 똑바로 직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발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제 뜻을 김윤덕에게 내비쳤다.
“그러니 너무 자신만만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동쪽에 있습니다.”
강은 서쪽에 앉아 있는 김윤덕을 응시했다.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에 섞여 들어 있던 혐오와 경멸이 더욱더 짙어질 뿐이었다.
“저와 같은 뜻을 품으신 분도 동쪽에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김윤덕은 끝까지 동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셔도 대군께서는 전하의 그늘에 계십니다.”
현재의 태양은 임금이었다. 그 태양이 지는 날에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를 것이었다. 강은 그때를 기다리는 이였고, 김윤덕은 그때가 더디게 오길 바라는 이였다.
팽팽한 신경전에 두 입이 다물어지자, 방 안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가 깨지 않으면 그곳은 그대로 적막에 빠져 버릴 것이었다.
“그 아이는 안 됩니다. 예정된 대로 혼례를 치르고 주국으로 떠날 것이니, 그 패는 버리십시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건 김윤덕이었다.
“하면 내 형판에게 부탁을 하나 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꿈을 품지 않게 하십시오.”
김윤덕은 가늘게 뜬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내가 욕심을 내지 않게 날 끝까지 짓누르라는 말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마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김윤덕은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꾸몄다. 그러나 강은 제가 품은 분노를 웃음으로 꾸며 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김윤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꿈을 꾸고, 욕심을 내는 날이 오면 형판은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잃을 것입니다.”
김윤덕은 강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강은 그저 철없고 어린 풋내기였다. 게다가 김윤덕은 강이 이 범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소불위를 가진 자가 강이었지만, 강의 무소불위는 한없이 나약하기만 했다.
분노를 지워 낸 강의 얼굴에는 오롯이 미소만 존재했다. 그것을 보던 김윤덕 또한 이내 미소를 지어 화답했다.
“부디 그날이 오지 않길 바라야겠군요.”
강이 돌아가고 김윤덕에게 불려 온 은재는 불안함이 가득 깃든 얼굴로 그의 앞에 앉았다.
메케한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방은 은재에게 괴롭기만 했다. 눈을 찌르는 연기 탓에 설움이 밀려오기도 전에 눈물이 잔뜩 고일 것 같았다.
“대군이 어떤 자인지 아느냐.”
담배 연기보다도 더욱더 극심하게 은재를 괴롭히는 것은 김윤덕이었다. 싸늘한 말투가 방 안에 울리자 은재는 겁을 먹은 아이처럼 어깨를 달달 떨어 댔다.
“…죄송합니다.”
“그자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서 어린애처럼 졸래졸래 따라간 것이더냐? 네가 우매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토록 우매할 줄은 몰랐구나.”
“죄송합니다….”
설움이 치고 올라와 목소리에 섞여 들었다. 그 목소리에도 아비란 작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김윤덕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존재하는 부정(父情)은 은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김윤덕은 독기가 가득 찬 눈으로 은재를 바라보았다. 비루한 것.
“네게서 죄송하다는 말 따위를 듣고자 부른 게 아니다.”
윽박을 예상하고 왔던 은재였지만, 그의 불호령은 여느 때와 같이 잔잔했다. 돌멩이를 던진 호수처럼 아주 잘게 파동을 일으킬 뿐이었다.
“너와 함께 있던 이는 불구대천의 원수고, 그자가 노리고 있는 게 바로 네 앞에 있는 나다. 그런 자가 너에게 선의를 가지고 접근한 듯싶었느냐?”
외마디 말보다는 그의 눈빛과 그의 마음에서 보았던 게 더 신빙성이 있었다. 지금 바깥세상으로 향한 제 마음이 그에게 닿을 것이라고는 호언장담할 수 없었으나, 이미 은재는 서서히 강을 깨닫고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그와 살을 섞은 와중에도 은재는 완전히 강에게로 향할 수 없었다.
“그… 그분께서는 잘못이 없으십니다. 제가… 나가고 싶어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자는 사리가 밝지 않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 나는 네 주제를 파악하라고 하였다. 그러지 않았으니 그자의 잘못이 아닌 너의 잘못이 맞다.”
내뱉는 말은 차분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악이 서려 있었다. 귓구멍을 쿡쿡 찌르는 것이 마치 칼과 같았다.
그러나 은재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아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씹어 먹힌다고 해도 그를 위해서 제 아비를 넘어서야 했다.
“오해십니다.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강을 대변하고자 하는 마음에 김윤덕은 차가운 비수 같은 웃음을 끼얹었다. 멸시가 가득한 눈길에 결국 주눅이 든 은재는 고개를 숙여 김윤덕의 눈길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천양에 오거든 대군을 만나라. 그 마음을 얻어 분에 넘치는 부귀와 권력을 쥐라. 네 조부가 네게 그리 일렀느냐?”
저를 멸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악의가 조부에게 뻗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할아버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찌 발악하든 혼사는 깨지지 않는다.”
“저는…. 저는 단지….”
“이 가문의 존망이 너에게 달렸다.”
가문의 존망,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은재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놈의 손으로 내 아들 세준이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이래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느냐?”
“저… 저는….”
“네 혼사는 가문을 위한 일이다. 네가 주국으로 떠나야 세준이가 평탄하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사지가 뒤틀리는 것 같은 공포가 덮쳐 왔다. 떨어져 자랐지만 은재는 저를 참으로 위해 주던 형제를 좋아했다. 그런 형제의 앞길을 제가 망쳤다는 말을 듣는 건 고역이었다.
충격으로 얼룩진 은재는 우는 것 또한 할 수 없었다. 제가 당하는 수모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후라 오로지 세준의 안위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은재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빌 것 없다. 혼례를 치르기 전까지 죽었다 생각하고 그리 살아라. 이것이 내 마지막 자비다.”
경멸이 담긴 눈빛을 거둬 낸 김윤덕은 장죽의 물부리를 물었다. 지독한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은 그의 눈길은 장지문으로 향했다.
“아범.”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홍 씨가 문을 열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은재를 보는 순간, 애잔한 마음에 홍 씨의 눈썹 끝이 아래로 향했다.
“이 아이가 별채로 돌아가면 별채를 잇는 중문을 모두 잠그게.”
홍 씨는 명을 받들겠다는 말과 함께 허리를 반으로 접어 예의를 차렸다.
“데리고 물러가시게나.”
밖에 서서 황망히 은재를 바라보던 홍 씨는 허겁지겁 방 안으로 향했다.
* * *
강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김윤덕의 집에서 나왔다. 담을 따라 걷는 도중 강은 무엇인가에 붙잡힌 듯 걸음을 멈췄다.
연정이라는 것을 품었던가. 그리움이라는 게 있었던가.
제가 낮에 서 있던 담벼락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즘이었다. 밝았던 거리에 깔린 어둠 덕분에 가까운 곳만 겨우 내다볼 수 있었다. 걸음을 내딛지 못한 강은 그곳에 서서 생각했다.
앞을 메워 버린 어둠 속에서도 그이의 얼굴을 기억했다. 환한 빛과 함께 치고 올라온 그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머릿속으로 갖가지 표정을 떠올리는 게 연정이었고,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해 느끼는 아쉬움이 그리움이었다. 그러니 저는 그이에게 무언가를 내어 주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애정을 갈구하는 그 눈을 보았을 때, 저는 연민을 느꼈다. 연민이 맞았다. 하나 남모르는 사이 섞여 들어간 것 때문에 제가 품은 연민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 변질한 연민으로 그이의 손목을 붙잡고 거리를 뛰었었다. 욕망에 취해서 살갗을 맞대었을 땐 무엇을 나눴던가. 서로의 품에 어찌 연심을 새겨 놓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떠밀 듯 그이에게 내어 준 것은 그이가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때 저도, 그이도 서로에게 연심을 내밀었다. 어찌 그 확실한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완전히 깨달은 것은 때가 이미 지나 버린 후였다.
강은 다시 김윤덕에게 되돌아가 부탁이라고 했던 겁박을 거두고 그이를 내어 놓으라 할까, 싶었다. 그러나 그이와 저의 목숨을 가지고 농간을 치는 이들을 제가 이길 수 있을까. 제 목숨을 건다고 그이를 살릴 수 있을까.
저는 무력했다. 저는 나약하고 겁이 많았다. 항상 쫓겨야 했고, 도망쳐야 했다. 죽음이 두려웠고, 사는 것 역시 무서웠다. 그런 저에게 연심이 가당키나 할까.
강의 잇새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강은 그곳에 서서 계속해서 억지웃음을 끄집어 내놓았다.
그 웃음이 담벼락을 넘어 김윤덕에게 향하도록, 그것에 섞여 있는 비난과 분노가 김윤덕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도록 그리 한참을 서서 웃음을 내뱉었다.
마음이 복잡스러웠다. 그 복잡스러운 마음속에 또다시 은재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설움이 밀려왔다. 은재의 얼굴을 생각하는 동시에 살고 싶은 마음이, 품길 바랐던 꿈이 움트기 시작했다.
어느새 강의 꿈은 연심이 되어 버렸다.
강은 이를 악물었다. 설움을 죽이고 꿈을 죽이려고 억세게, 강하게 이를 맞물었다. 조금만 뒤로 걸음을 물리면 볼 수 있는 얼굴임에도 그곳에서 한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더욱이 그 꿈은 이뤄질 수 없는 허상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현실을 살아야 하는 죄인인 강은 허상을 좇을 수 없었다.
단념이 쉬운 일이라는 듯 곧 땅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강의 발이 떨어졌다.
강은 낮에 제가 서 있던 담벼락 앞에 섰다. 가뿐한 몸짓으로 담벼락 기와에 오른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발길을 돌리며 제 팔에 감겨 있던 건을 풀고는 그것을 손에 쥐고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아야 했다. 은재가 그리 소중하게 여겼던 건을 가지고 간다면, 은재의 마음을 가지고 간다면 강은 결국 김윤덕에게 지는 것이었다.
강은 손이 닿을 만한 높이의 나뭇가지에 감청색 건과 함께 제 마음을 그곳에 묶어 놓았다.
안수동 사가에 도착한 강은 말복 아범의 마중을 받았다. 외조부인 윤호석이 들었다는 말에 강의 걸음은 곧장 그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곁을 지키고 있는 이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만큼 강의 얼굴은 한없이 밝았다.
손님이 들었을 때 기거하는 작은 사랑이었다. 그곳의 누마루에 앉아 있던 부경은 중문으로 들어서는 강을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안에 들어 부친의 말벗이라도 해 드려야지 어찌 나와 있어.”
족보를 두고 따지면 부경은 강의 외삼촌이었지만, 강은 부경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는 세자익위사가 된 부경을 보았을 적, 함께 외조부 집에서 지냈던 나날을 생각하며 어린 강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강은 그날 이후로 부경을 외삼촌으로도, 벗으로도 여기지 않았다.
“먼 길을 오신 터라 휴식을 취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드렸습니다.”
“그러게. 먼 길을 오셨는데 어찌 아들 집이 아니라 손자의 집으로 오셨을까.”
강은 부경을 보며 생글거렸다.
“오셨으면 안으로 드시지요.”
방 안에서 윤호석의 목소리가 울렸다. 강은 피식 웃으며 돌계단에 올랐다.
강이 안으로 들자 윤호석은 상석에서 물러났다.
조부를 두고 상석에 앉기보다는 마주 보는 게 낫다고 여긴 강은 윤호석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부경은 어중간한 자리가 어색했는지 장지문 근처에 우두커니 자리를 잡았다.
“어찌 바로 호정동으로 가지 않으시고요.”
능청스럽게 말하는 강을 보며 윤호석이 홀홀거리며 웃었다.
“대군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저는 조부님께서 자리를 깔면 무섭습니다.”
강의 능청에 익숙했던지라 윤호석은 그러려니 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 시기를 잡느라 애를 먹어야 했지만, 끝까지 윤호석은 다정함을 잃지 않았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어서 하십시오. 이러다 밤을 지새우겠습니다.”
부경은 살짝 두려움이 섞인 눈길로 강을 보았다. 강이 유난히 능청스러울 때면 항상 뭔가가 뒤따를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께름칙했다. 지금도 과하게 능청스러웠다.
“대군. 혹 은재, 그 아이를 만나고 오시는 것입니까.”
생글거리던 얼굴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어졌고, 그것을 본 윤호석은 옅게 탄식을 내뱉었다. 강은 쏜살같이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조부의 앞에서는 돌탑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웃음이었다.
강이 부경이 서 있는 장지문으로 고개를 틀고 말했다.
“말복 아범, 담소가 길어질 듯하니 술상을 내오게.”
“대군, 술을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윤호석의 제지에 강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꾸며 냈다.
“이 조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새로이 시작된 조부의 자책에 강은 작게 탄식했다. 내막을 알지 못했다면 그저 어리둥절했을 테지만, 정황을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조부가 저를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천의 안 정승과 혼사를 논하셨다지요.”
천양에도, 공진포에도 머물지 않았기에 강이 그 소식을 들었을 리가 없었다. 어쩌다 강이 알게 되었을까. 윤호석은 놀랐지만 그 마음을 감추고 말했다.
“대군의 버팀이었던 제가 늙어 죽으면 대군의 곁을 지켜 줄 이가 필요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내 조부께 혼사를 걱정치 말라 했습니다.”
“대군….”
윤호석에게 닿아 있던 강의 눈길이 잠시 바닥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이 씁쓸한 순간을 달래 줄 술이 없다는 걸 아쉬워하는 듯 자꾸만 말복 아범이 서 있을 장지문을 향해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강직한 모습으로 그곳을 지키는 부경을 보며 강은 또다시 탄식하고는 윤호석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소식이 없던 거로 보아하니,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은 모양입니다.”
윤호석은 침묵했다. ‘그이가 바로 대군의 아비입니다.’라는 말은 이간질이 될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부자의 관계를 악화시킬 생각이 없었으니 말을 아낄 때였다.
“주상 전하입니까?”
어렸을 적부터 눈치가 약삭빠르기로 자자했던 강이었다. 능글맞게 웃는 강의 모습에 윤호석은 마음이 저릿했다.
“전하께서는 마음이 올곧으십니다.”
“맞습니다.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시지요.”
“여전히 그러십니다.”
눈물 콧물을 뺄 만큼 웃기고 재미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강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하고 웃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렸지만, 그 누구도 함께 웃어 주는 이가 없었다.
강의 웃음은 분노로 점철된 원망이었다. 하여 부경도, 윤호석도 감히 흉내 내지 못했다.
“대군, 전하의 믿음은 경(硬)입니다. 못난 늙은이들이 헛된 희망을 품었던 게지요.”
“언제는 연(軟)이셨습니까? 단 한 번도 연했던 전하를 뵌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분위기가 요상하게 싸늘해지고 있었다. 방 어귀에 서서 상황을 관망하던 부경은 윤호석과 강 사이에 깔리는 냉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강의 원망은 비단 궁궐로만 향하는 게 아니었다.
“또 누군가가 죽어야 끝나는 것입니까?”
쐐기를 박듯 강의 말투는 매정했다. 그런 변화를 느낀 윤호석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나서도 지금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었다.
부경은 그저 제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강의 분노가 날뛰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만 할 수 있었다.
“전하께옵서는 대군과 은재의 결합으로 연파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 여기십니다. 만일 그 아이와 만났다는 것을 전하께옵서 아신다면 대군께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 이번에는 저를 죽이시겠답니까?”
영원히 용맹할 줄 알았던 조부의 기세는 쇠약해지고 있었다. 아니, 벌써 사그라졌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안쓰러운 손자를 앞에 두고 있었기에 그 기세를 감추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의 기세에 희망을 걸었던 강은 여전히 기대했다. 그들이 이대로 죽지 않기를. 그러나 강의 희망은 언제나 간절했어도 이뤄지지 않았다.
“사셔야 합니다. 대군을 사지로 몰았던 경파를 물리치기 위해선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강이 품었던 희망은 조부가 놓지 못하는 미련을 마주하는 순간 재빠르게 식어 버렸다. 잠잠했던 나날을 즐기고 있던 저를 사지로 내몬 이는 바로 눈앞에 있는 조부였다. 기세는 멀쩡해도 총명했다던 머리는 흐려진 모양이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세력을 모아 궁궐로 쳐들어갈까요?”
늘 그렇듯 강은 우스갯소리를 꺼내 놓았다. 윤호석이나, 부경이나 그 말에 섞인 진심을 못 볼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피하십시오.”
“내가 사실을 알고 그이를 만난 것도 아닌데, 피하라고요?”
“훗날을 기약하십시오. 지금은 움츠릴 때입니다.”
강은 허탈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책임은 모두 내게 전가되는군요.”
윤호석에 닿은 눈길은 조금 전처럼 따스하지 않았다.
“조부, 그거 아십니까? 지금까지 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있거든 이 나라에서, 그것도 임금의 아들로 태어난 게 내 죄입니다.”
강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 속에 담긴 원한을, 지금까지 쌓아 놓기만 했던 원망을 직시하는 윤호석은 끝내 한숨을 터뜨렸다.
“이 이상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은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호정동으로 향하는 윤호석을 부경이 따랐다.
“부경이 네가 대군을 잘 모셔야 한다.”
줄곧 묵묵히 윤호석의 뒤를 쫓던 부경은 때가 왔음을 직시하고는 말했다.
“세자익위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막힘없이 걷던 윤호석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부경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짐짓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어르신께서 제게 세자 저하를 보필하라 하셨습니다.”
부경은 어렸을 적에 사변으로 아비를 잃었고, 몸이 약하던 어미는 충격으로 곧장 아비의 뒤를 따랐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가 안쓰러워 제가 나서 품었지만, 아이는 가슴에 원망을 품고 있었다.
저의 부모를 그리 만든 이를 미워할 수 있으랴. 저를 놓고 떠난 부모를 원망할 수 있으랴. 원망은 탓하기 쉬운 이를 겨누고 있었다.
“저하와 이미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다.”
“제 뜻과는 상관없이 무작정 강요하신 것입니다.”
함께 그리 세상을 떠돌다 보면 어렸을 적처럼 정을 붙이고 우애를 다질 것이라던 생각이 착각인 모양이었다.
세자의 바람을 알았고, 본인도 어쩌면 부경이 강의 곁을 지켜 주길 바랐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 부경은 묵살당하고 있었다.
윤호석은 그런 부경이 안쓰럽다는 듯 보았다.
“네가 대군을 언제 처음 뵈었는지 기억하느냐.”
그 질문에 부경은 살짝 눈썹을 움찔거렸다. 지금 와서 철없던 어린 시절을 끄집어내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때 세 살이셨던 대군께서 친형제처럼 널 따르셨지. 지금도 널 그리 여기실 것이다.”
친형제는커녕 저를 부려 먹으려고만 하는 강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희미해진 옛 기억을 들춰 가며 강의 곁을 지키길 바라는 마음 또한 부경은 알고 있었다.
하나 부경은 이미 오래전 뜻을 정해 놓았고, 그 뜻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저는 무모한 것이 싫습니다.”
“대군께서 무모하시더냐?”
“예, 무모하고 불확실하십니다. 안위도 그렇고, 마음도 그러십니다.”
“하면 세자 저하께서는.”
“저하께서는 위치도, 권력도 확실하십니다.”
다부진 부경의 답에 윤호석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확실한 것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다. 언제 부서질지 몰라 두려움을 품고 지켜보는 것에는 많은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윤호석은 세자에게 희망을 건 경파의 믿음처럼 확실하고 명확한 세자를 선택한 부경의 올곧은 충심을 다그칠 수 없었다.
“저하의 근심은 항상 대군이시다. 네가 조금만 더 그 곁을 지켜 드릴 수는 없겠느냐.”
그 물음에 부경의 시선이 흐트러졌다. 일순간 아래로 떨어진 눈길을 보며 윤호석은 작게 탄식했다.
“너의 뜻이 그렇다면 내일 궁궐에 들어 저하를 찾아뵙겠다.”
윤호석은 일절 원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인 듯 부경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가려던 길을 향해 몸을 틀었다.
부경 또한 묵묵한 모습으로 윤호석의 뒤를 따랐다.
호정동을 다녀온 부경은 말복 아범의 언질에 따라 강이 있을 정자로 향했다. 조부의 잔소리를 잊은 듯 강은 어김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심스러웠으나, 일말의 동정심이 부경의 가슴에서 일렁거렸다.
“잘 모셔다드리고 왔지?”
“예.”
유난히 강의 웃음이 어두웠다. 확실한 세자의 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정자에 홀로 앉아 있는 강이 외로워 보였다.
부경은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강에게 닿아 있는 눈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막 비워 낸 술잔에 술을 따르던 강은 정자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부경을 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제가 마시려고 했던 술잔을 부경에게로 내밀었다.
“한잔하겠느냐?”
내민 술잔을 바라보는 눈길은 늘 그렇듯 무심하고 무정했다. 마뜩잖았던 강의 팔이 안쪽으로 굽어지려던 찰나였다.
“주십시오.”
신을 벗고 정자 위로 올라온 부경은 기꺼이 대작하겠다는 듯 술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 손에서 벗어난 술잔을 보는 강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어인 일로 무익하다는 것을 입에 담아?”
“무익한 것을 즐기시는 대군을 이해해 보려는 것입니다.”
부경은 제 손에 들린 술잔을 보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소나무의 송홧가루를 넣어 빚은 술에서 솔 향이 진동했다. 눈을 질끈 감고 한입에 털어 넣으면 그만이겠지, 싶은 생각에 부경은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예상했던 대로 무익한 맛이었다.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은 강이 두서없이 말했다.
“보나 마나 조부께 궁궐로 돌아가게 해 달라 청했겠지?”
“예.”
미련 없이 깨끗하게 비운 잔을 강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강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세자 저하가 그리 좋으냐?”
강의 투기는 익숙했다. 좋아 어쩌지 못하는 형제를 제게 빼앗길까,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좋아 어쩌지 못하는 형제에게 유일한 제 편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든 부경은 강의 편이 될 수 없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처음으로 제가 충성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던 분이십니다.”
“세자익위사에 들어가서야 뵐 수 있었던 저하다. 그때 저하를 처음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예, 그랬습니다.”
“어찌?”
조금 전보다 강의 눈빛이 얼어 있었다. 저에게 꽂힌 싸늘한 시선에도 부경은 꿈쩍하지 않고 맞보았다.
“어찌 그리 생각했는지 물었다.”
부경은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이 없다는 듯 맞닿았던 눈길을 아래로 떨궜다.
아비의 죽음은 강에게서 시작되었다.
평인인 세자와 달리 양인이었던 강을 추종하던 아비의 죽음은 일찍이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진포에서 강과 함께 자라던 그때의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두 차례의 사변으로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이 또다시 몸부림을 치려고 했다.
강의 세자 옹립을 찬성하는 문하들과 반대하는 문하들의 충돌이 있었을 적, 또 다른 사변이 일어날까 우려하는 이들의 움직임으로 부경은 아비의 죽음을 처음 접했었다.
그때 나이 열다섯, 강은 고작 열한 살이었다.
그날 이후 부경은 강을 원망하기로 했다. 가장 정확한 것은 강뿐이었다. 강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비도, 어미도 잃지 않았을 것이었다.
부경이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은 강뿐이었다. 강이 제일 만만했고 쉬웠다. 늘 곁에 있었기에, 가까이 지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원망이 강에게로 향했을 때, 부경은 눈시울을 붉히고 입꼬리를 달싹거렸었다. 터뜨리지 않고 가슴에 묻어 놓는 게 원망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확실한 세자를 택했다. 강의 유일한 편인 세자가 왕이 되도록 그 곁을 지키는 게 강에게 할 수 있는 복수라 생각했다.
“내 탓이다.”
그사이 술잔을 비워 낸 강이 작게 읊조렸다. 아래로 향해 있던 시선이 강에게로 되돌아갔다. 강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져 있었다.
“네가 세자 저하를 택했던 이유가 나 때문이다. 그렇지 않느냐?”
강은 눈치가 빨랐다. 얍삽하고 영악했다. 강에 비하면 부경은 묵묵했다.
강의 눈길이 부경의 시선에 닿기 전 부경은 그 눈길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네 아비가 죽던 그날, 나 역시도 그 자리에서 네 아비의 죽음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나는 내 눈앞에서 죽은 사람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 아느냐?”
부경은 보고 싶지 않았다. 강의 얼굴이 어떨지 알고 있어 볼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을 본다면 제가 묻어 놓았던 원망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보지 않는 게 나았다.
“고작 세 살이었다. 형틀에 묶인 채 다리가 뒤틀리고 피와 신음을 토하는 그들을 보기에 퍽 좋은 나이였지.”
목소리에 섞여 든 울분은 잔뜩 억압되어 있었다. 꾹꾹 담아 놓은 것들을 한 번에 터뜨릴 기회를 보고 있다는 듯 강은 인내하는 중이었다. 강의 울분과 분노 또한 늘 그늘 밑에 가려져 있었다.
부경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감히 동궁과 용상을 탐냈다. 그러니 내 잘못이다. 내가 치러야 하는 죄고, 내가 갚아야 하는 빚이다.”
한숨 소리와 함께 술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가 정자에 울렸다. 곧 강의 입술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경아, 한데 나는 원하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고. 그때 나는 고작 세 살이었다.”
부경은 시선을 들었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눈에 담아야 했다. 끝내 강을 보길 택해 놓고 부경은 후회했다. 붉어진 눈시울에 부경의 잇새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술 그만 드십시오.”
“이까짓 술에 내가 취하는 것을 보았느냐?”
강은 보란 듯이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술병을 집어 들어 술을 채웠다.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내가 건강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느냐?”
짙은 한숨을 토해 내는 부경을 보며 강은 픽 웃었다.
“생각을 고쳐먹어 보려고 했다. 네가 그리 원했듯 천양에 정을 붙이고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하나 나는 이곳과는 영 맞지 않는 듯하다.”
“예상했습니다.”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고 해도 부경은 제가 품은 뜻을 바꾸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기필코 세자의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모든 게 다 무의미하다.”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부경 또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나으리, 기침하셨습니까?”
바깥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부경은 사위를 확인했다. 동틀 무렵인 듯 밖과 안이 어슴푸레했다.
대충 겉옷을 껴입은 부경은 장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웬일인지 낯이 좋지 않은 말복 아범이 기단 아래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짧은 사이 말복 아범의 난처함을 엿본 부경은 곧장 누마루로 발을 뻗었다. 그리고 강이 기거하는 큰 사랑채로 향했다.
처음에는 걷던 걸음이 조급해지면서 부경은 때아닌 달음박질을 했다.
기침 여부조차 묻지 않고, 방의 주인도 허락도 받지 않고 부경은 방문을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쏟아질 잔소리와 투정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이 틀기 전에 깨우라 하셨습니다. 밖에서 나리를 불러 봤지만 답이 없으셨지요. 쇤네가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처음부터 계시지 않았던 것처럼 방이 깨끗했습니다.”
부경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혹, 혼자 길을 나서신 것일까요….”
부경은 강이 길을 떠날 때마다 들고 다니는 행장을 찾기 위해 의장으로 향했다.
이 층으로 된 의장의 문을 열고 안을 뒤적였지만 행장을 찾을 수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부경의 발길이 장검이 진열된 곳으로 움직였다.
처음 세자가 강에게 하사했던 장검이 없었다. 늘 제가 있기에 검은 필요 없다 말하던 이가 강이었다. 그리 소중하게 여기던 장검을 들고 제 몸을 지키겠다는 수작이 아니라고 어찌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시겠지요? 잠시 볼일이 있으셔서 출타하신 것이겠지요?”
오늘 궁궐에서는 중전의 탄신연이 행해질 것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하라 강을 천양으로 불러들인 세자의 뜻을 모를 이들이 아니었다. 부경은 부경대로 고민에 빠졌고, 말복 아범은 말복 아범대로 고민에 빠졌다.
“대군께서 홀로 떠나신 듯하네.”
부경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거기에 말복 아범의 탄식마저 젖어 들자, 방 안엔 무거운 공기만 자리했다.
“뒤를 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성을 빠져나가는 문은 큰 문과 작은 문을 합하면 총 열 개였다.
그중에서 어떤 문으로 나갔는지 알 수 없거니와, 안다고 해도 문 밖으로 나가면 수백 갈래로 길이 나뉘었다. 다음 목적지에 관한 관심이 어디로 향했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 이곳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강은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곧 부경은 허탈감에 빠져 헛웃음을 내뱉었다.
궁궐로 찾아가 사실을 고한다고 해도 세자 말고는 나설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허탈했다. 그토록 의지할 곳이 없었던 이가 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느지막이 깨달아 허탈할 뿐이었다.
어젯밤 그 모습에 아주 잠깐만 그의 곁을 지키려고 마음먹었던 부경이었다. 한데 언질도 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저를 두고 홀로 떠난 이를 두고 부경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 * *
꺽새가 은재와 함께 별채에 갇힌 지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어떤 여파가 은재를 괴롭게 하는 것인지 사달이 일어난 저녁, 급속도로 치고 올라온 열이 은재를 괴롭히고 있었다. 해가 뜨면 조금 나아지나 싶다가도 세상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다시 열이 오르고 경기를 하듯 몸을 달달 떨어 댔다.
꺽새는 단 한시도 은재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벌써 이틀 밤이나 뜬눈으로 밤을 새웠으니, 꺽새의 얼굴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방으로 들어온 홍 씨는 꺼멓게 들뜬 꺽새의 눈 밑을 보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은재에게 눈길을 옮겼다. 홍 씨의 입에서 한숨이 푹 나왔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홍 씨의 안내에 따라 중년 사내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호천이라 불리는 개울가 건넛마을에 살고, 민보청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의원이었다.
은재가 겪는 증세가 심상치 않았다. 민보청으로 가지 못하는 음양인을 사사로이 진료해 준다고 암암리에 소문으로 돌고 있는 그를 데려온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은 의원은 심오한 표정으로 환자의 손목을 집어 들었다. 고심에 고심을 더하는 듯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 꺽새와 홍 씨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지켜보았다.
“음인이라 하셨나?”
“예, 예.”
“성주기는 시작하셨고?”
“그것은 아직….”
답을 들은 의원은 흠, 하는 소리를 낸 뒤에 다시 진맥에 집중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환자는 성주기를 시작하지 않은 음인이었다. 먹은 나이에 비해 늦어진 성주기는 신체의 기운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었다.
실로 환자의 맥이 그랬다. 그러나 불안정한 맥박 속에 섞여 있는 요동을 느낀 의원은 이상하기만 했다.
“어찌 양의 기운이 있는 것일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의원에 말에 홍 씨와 꺽새의 두 눈이 달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야, 양의 기운이라니요.”
“음인의 맥박은 잔잔하고 부드럽네. 성주기가 찾아오지 않은 몸이라 불안정할 수 있다지만, 맥이 어찌 이리도 파닥파닥 뛰고 요동치는 것인지…. 이것은 분명 양의 기운일세.”
홍 씨는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은재를 보았다. 음인이 아니라 양인이라는 것인가? 뭔가 아는 게 있을까 싶어 꺽새에게로 눈길을 돌렸지만, 꺽새는 전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맥박으로는 증상을 알아내기 어렵겠다고 생각한 의원이 물었다.
“혹시 도련님께서 태어나셨을 적, 반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가?”
홍 씨는 머릿속으로 오랜 기억을 되짚었다. 산모의 진맥만 보고 양인이라고 확신했던 의원의 말과 다르게 세상에 태어난 아기씨의 허벅지 안쪽에는 양인의 붉은 반점 대신 푸른 반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 있으셨습니다.”
“내보이게.”
홍 씨가 꺽새에게 고갯짓을 했다. 은재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 꺽새는 발끝까지 덮어 놓았던 이불을 걷고 오른쪽 바짓단을 돌돌 말아 올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살짝 은재의 넓적다리를 들어 의원에게 그 여린 살갗을 내보였다.
“아니….”
짧은 탄식처럼 의원에 입에서 튀어나온 말로 인하여 모두가 긴장한 채 숨을 머금었다. 유심히 은재의 허벅지를 살펴보던 의원이 곧 쯧쯧, 하며 혀를 찼다.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을 터인데 합환 증표라니….”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표식 보시게. 이것이 합환 증표라네.”
홍 씨는 의원이 가리킨 반점을 보았다. 음양인이 성교를 하게 되면 흔적이 남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태어났을 적 푸른 반점이 있던 곳에 새롭게 피어난 그것은 마치 퍼렇게 멍이 든 것 같으면서도 꽃봉오리에서 떨어지는 꽃잎과 같았다.
“성주기가 시작되지 않은 몸에 양인의 기운이 들어갔으니, 도련님께서 이리 신열을 앓으시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거의 확신한 듯한 의원의 모습에 홍 씨가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의원은 당치도 않다는 듯 홍 씨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니. 확실하네. 도령께는 필시 합환 증표를 나눈 상대가 있을 걸세. 상대방에게도 똑같은 증표가 남으니, 찾기는 쉬울 터.”
이틀 전, 은재와 함께 돌아온 강의 모습이 홍 씨의 머릿속에 번뜩거렸다. 머리를 세게 맞은 듯 잔뜩 일그러진 홍 씨의 얼굴을 살피던 꺽새는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자리에 주저앉았던 강을 떠올렸다.
눈길을 맞댄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시퍼렇게 질려 갔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의원은 사색이 된 두 사람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혼례를 올린다고 도성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더니만, 정혼자가 아닌 이와 사통을 한 게로구나.
“이런, 쯧쯧.”
그가 그간 민보청에서 보았던 음양인의 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그만큼 민보청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같은 성질인 양인과 양인이 맞붙어 도망가는 일이 있는가 하면, 민보청에서 발행하는 혼인 승낙서 없이 혼례를 치렀던 음양인도 있었다.
성주기와 상사기를 시작하지 않은 음양인이 합환하는 것 역시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저희 도련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옆에 꼭 붙이고 다니지 않았으면 모를 일 아닌가.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곧바로 민보청에 고해야 할 걸세.”
홍 씨는 김윤덕의 밑에서 일했기에 국법에 꽤 밝은 편이었다. 제가 그저 안쓰러워 어쩌지 못하던 도련님의 행로는 아슬아슬한 길로 향하고 있었다. 어찌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의원님, 제 입으로는 고할 수 없으니 의원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홍 씨가 의원 앞에 납작 엎드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봤지만, 의원은 그런 홍 씨를 보며 꿍꿍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일찍이 민보청에서 쫓겨나듯 나오게 된 연유가 바로 그가 품은 시커먼 속내 때문이었다.
“어디 계신가.”
“사랑채에 계십니다.”
“그럼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김윤덕의 방으로 들어간 의원은 그를 마주 보았다. 양반네를 처음 본 게 아니었지만, 그간 보았던 양반과는 풍기는 기개 자체가 달랐다. 의원은 제가 들고 있는 양반네의 약점이 꽤 쓸 만하다 여겼기에 기개 따위에 압도되지 않았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 쉽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지만, 조카님께서 합환을 하셨습니다.”
보료 위에 앉아 있던 김윤덕은 넘기던 서책의 낱장을 놓쳤다. 그는 허공에 붕 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시선을 의원에게로 옮겼다.
“자자한 소문을 들은바, 도련님의 정혼자는 현재 주국에 계시지 않으십니까? 흔히 이런 것을 사통이라 하던데….”
김윤덕은 일관적이었다. 흐트러짐 없이 무심한 눈길로 의원을 지긋이 응시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이상 저는 민보청에 고해야 합니다. 어찌할까요?”
의원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윤덕의 얼굴에도 마지못해 미소가 떠올랐다.
“이왕 왔으니 마저 치료를 해 주시게. 아이의 상태가 좋아지거든 그때 내 후하게 사례하지.”
그 인자한 웃음을 눈치채야 했지만 후한 사례에 욕심이 불처럼 솟구친 의원은 시커먼 속내를 볼 수 없었고, 생각 또한 깊게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천양을 넘어 전국에 김윤덕의 명성이 높았으니, 의원의 눈을 가리는 데 한몫했을 것이었다.
그는 제 요구가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여지자 그저 좋아 헤벌쭉 웃었다. 그리고 곧 김윤덕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대감. 여부가 있겠습니까.”
김윤덕은 다시 고개를 든 의원의 웃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도련님의 증상은 지켜보면 사라지는 것이니, 심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면 쇤네는 물러가서 도련님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하겠네.”
의원은 설렘을 가득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챙기겠다는 욕심은 차후에 그것을 또 어떻게 써먹을지 생각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것 또한 그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홍 씨는 장지문을 열고 나온 의원을 보았다.
“문제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게. 그럼 나는 도련님을 돌보러 가 보겠네.”
방실방실 웃고 있는 모습이 의심스러워 홍 씨는 별채로 향하는 이의 모습을 보고도 따라나설 수 없었다.
“아범.”
안에서 부르는 소리에 홍 씨의 걸음이 방으로 향했다.
“지금 바로 울개를 데리고 오시게나.”
“예…?”
울개라는 말에 홍 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울개는 항상 피비린내를 몰고 다니는 사내였다.
도성 밖에서 짐승을 죽여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 파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백정이었다. 그는 풍신과 어울리게 우락부락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살고자 발악하는 짐승의 뒷발에 차여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한 발을 절지만, 몸놀림이 빠른 이였다.
“어서.”
천한 일을 하는 백정이라 늘 손가락질을 받아도 울개 앞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그러나 김윤덕이라면 말이 달랐다. 또한 김윤덕이 울개를 데려오라고 명하는 것은 그가 꼭 필요로 할 때뿐이었다.
“…네.”
짐승의 목을 가르고 피를 뺀 뒤 뼈를 동강 내는 일을 하는 천한 백정은 마냥 짐승만 잡는 건 아니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는 몇 없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식솔들 그리고 김윤덕.
홍 씨는 그저 김윤덕의 심부름을 할 뿐, 울개가 주인에게 어떤 명을 받는지는 알지 못했다.
차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마당 안으로 울개가 들어섰다. 감히 방으로 발을 들일 수 없는 처지라 마당에 선 울개는 창 너머로 모습을 내민 김윤덕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진 비단 주머니를 보며 울개는 스스럼없이 손을 뻗었다.
“별채에 있는 자다.”
“예.”
“주국에 가 본 적이 있느냐.”
김윤덕의 물음에 주머니 속을 들여다보던 울개가 고개를 들었다.
“없습니다.”
“식솔을 거느려 주국에 다녀오거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땅바닥으로 주머니 하나가 더 떨어졌다. 울개는 이번에도 주머니를 집어 그 안을 열어 보았다.
“뱃삯으로 쓰면 남지 않습니다.”
“내가 언제 섭섭하게 굴었던 적이 있더냐.”
두 개의 주머니를 한 손에 쥔 울개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 가면 됩니까.”
“유향 상단 객주의 아들인 소객주다. 이름이… 오한영이라 했지.”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는 김윤덕의 창문이 닫히며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울개는 제 바지춤에 엽전이 두둑하게 든 주머니를 매달았다. 그러고는 줄곧 손에서 놓지 않던 도축용 칼을 들고 별채가 있는 곳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의원님, 좀 나와 보시오.”
바깥에서 저를 찾는 소리에 벽에 기대어 깜박 졸고 있던 의원이 눈을 번쩍 떴다. 어디로 간 것인지 저와 함께 방을 지키던 몸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의원님.”
밖에서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는 이 집에 들어와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원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일어나 장지문으로 걸어갔다.
대청마루에 서서 마당을 보자 그곳에는 목소리만큼이나 몸체가 큰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왠지 모르는 스산한 분위기에 의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를 데리러 왔던 행랑아범 또한 어디로 간 것인지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의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이를 보았다. 절뚝절뚝하는 걸음으로 저에게 다가오는 이가 풍기는 위세에 주눅이 들어 그의 눈이 바들바들 떨렸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의원의 얼굴이 잔뜩 구겼다.
“내 냄새가 좋지 않소?”
“그, 그것이 아니라…. 용건이….”
천천히 의원에게로 다가가던 이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의원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 절뚝거리는 발짓으로 제법 날쌔게 움직였다.
“윽!”
날이 바짝 선 칼에 의원의 입에서 두꺼운 단음이 울렸다. 울개가 할 일은 너무나도 쉽게 끝이 났다.
홍 씨는 울개가 별채로 간 뒤에도 김윤덕의 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방 안에 자욱하게 낀 담배 연기는 주인의 근심일까, 환희일까. 시종일관 담배 연기에 섞여 든 침묵에 홍 씨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주인의 뜻을 목도한 홍 씨는 두려움에 달달 떨었다.
“그 아이의 거처를 옮겨야 하네.”
“…예?”
일순간 깨져 버린 침묵에 홍 씨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당 뒤 소나무 숲에 장인이 만든 별당이 있지. 그곳으로 데려가시게.”
“하, 하지만 그곳은 쓰지 않았던 곳이라 보수를….”
분노에 일그러진 김윤덕이 홍 씨의 눈에 들어왔다. 홍 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눈길을 떨궜다.
“아범, 내 뜻을 곡해 말게나. 나는 그 아이를 살리고자 숨기는 것이네.”
김윤덕은 차분했지만, 목소리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눈빛, 표정,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진노가 얽혀 있었다.
홍 씨가 주인의 분노를 본 것은 두 번째였다. 주인의 분노는 항상 은재로 인하여 일렁거렸다.
바닥에 나뒹굴던 홍 씨의 시선이 다시 김윤덕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는 타지에서 돌아올 정혼자를 잃어야 하네. 그것이 우리 가문을 살릴 수 있는 명분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홍 씨는 헷갈렸다. 은재의 오점을 묵인하고 집 안 깊숙한 곳으로 숨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객주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은재가 살 수 있는 것일까.
홍 씨에게 주인의 속내는 의문투성이였다. 알아내려고 파고들어도 끝에서는 단단한 것에 부딪혀 길이 막혔다. 손에 쥔 것은 고작 나무로 만든 호미였다. 더 나아갈 수 없기에 홍 씨는 주인의 뜻을 강제로 이해해야 했다.
“대군의 방해가 있어서는 안 되네.”
김윤덕을 향해 예를 차린 홍 씨는 종종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홍 씨가 나가고 빈방에 남은 김윤덕은 장죽의 물부리를 입에 물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김윤덕의 눈에는 어느새 분노가 아닌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결국 패는 내 손에 들린 것인가.”
김윤덕은 빈 요강에 장죽을 털며 입꼬리 한쪽을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 * *
덩치가 큰 꺽새가 은재를 엎고 사당 협문을 넘어섰다. 그 뒤를 용천댁이 따랐다. 늦은 밤이었고 보는 눈이 없는 집 안이었지만, 그들의 걸음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먼저 사당을 지난 홍 씨는 작은 쪽문 앞에 섰다. 동그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자 이미 낡을 대로 낡은 경첩에서 끼익, 하고 소리가 났다.
“조심히 넘어라.”
홍 씨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쪽문을 넘어서는 꺽새의 발 아래로 등불을 비췄다. 순간에도 말대꾸를 하던 꺽새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걸음을 내디뎠다.
폭이 좁은 길을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낡은 초가집을 보며 동시에 헛숨을 터트렸다.
“말이 안 돼요….”
설움에 휩싸인 꺽새는 등에 업힌 은재가 내뱉는 숨소리를 들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입 다물래도.”
“아무리 그래도 이런 법이 어딨어요…. 이럴 거면 차라리 현천으로 보내 주시지.”
“어허! 이놈이 글쎄!”
홍 씨의 핀잔에 꺽새가 훌쩍거렸다. 자꾸만 찔끔찔끔 쏟아지는 눈물 탓이었다. 그저 불쌍하기만 한 도련님을 어쩌면 좋을까.
현천에 살 적에는 제멋대로 살던 도령이 이 콧대 높은 천양에 와서 운신하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을 보았던 꺽새는 억울하기만 했다. 감금으로도 부족해 은폐까지 당하는 은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을까.
은재가 쓸 이불을 챙겨 온 용천댁이 안으로 들어섰다. 은재를 데리고 오기 전 청소를 했다지만 바닥에 깔린 기름종이며, 벽에 붙여 놓은 한지며 세월이 지난 만큼 낡아 버린 흔적을 모두 다 감출 수는 없었다.
용천댁은 덤덤한 표정으로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조심, 조심.”
은재를 자리에 눕힌 꺽새는 조금 벅찬 숨을 내쉬며 은재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까지 오게 된 이유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원망할 이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행여나 허튼 생각일랑 하지 말고 이곳에서 도련님을 잘 뫼셔라.”
“아무리 개잡놈이라고 해도 제 핏줄을 이런 집에 처박아 두지는 않아요.”
“이놈이!”
“우리 도련님이 무엇을 그리 잘못하셨어요!”
끝끝내 울분을 참지 못한 꺽새가 제 속에 담긴 것을 싸그리 토해 냈다.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홍 씨가 나섰다.
“입 다물지 못해!”
“누가 듣는다고요!”
“네놈의 주둥아리 때문에 더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
마구잡이로 뇌까리던 꺽새가 그 말에 입을 다물고 씩씩거렸다. 홍 씨를 쏘아보던 눈에 결국에는 체념이 깃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은재를 보자 눈물이 터질 것 같아 꺽새는 아예 은재에게서 고개를 틀었다.
“꺽새야, 명심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도련님께서는 이곳에서 나오시면 안 되신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만이다…. 적어도… 큰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나아질 게다.”
홍 씨의 말에도 꺽새는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홍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은재의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용천댁을 보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바깥으로 향했다.
“제때 밥상 들일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말해. 알겠니?”
“네, 그만 가 보셔요.”
용천댁마저 일어나 나가자 고즈넉한 방이 더 스산해지는 듯했다. 그제야 은재에게로 눈길을 옮긴 꺽새는 설움에 북받친 입술에 힘을 가득 주었다.
* * *
바람에 나뭇가지가 나부끼는 소리에 서서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슬며시 눈을 떴을 때 느껴지는 낯섦에 그대로 누워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은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머무는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발치에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자는 꺽새를 보고는 안심했다.
은재는 제 이불을 집어 들어 꺽새에게 덮어 주고는 장지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는 맑았다. 게다가 사방을 에워싼 소나무 향이 가득한 곳이라 콧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상쾌하기만 했다.
그러나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뭇가지에서 생명을 다한 채 바닥으로 떨어진 솔잎을 짓밟으며 은재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 부재의 시간 동안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민하는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또한 알 필요가 없었다.
은재는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스스로 납득했다.
안팎에서 진동하는 솔 향은 마음 어귀를 쿡쿡 찌르며 공격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지워 내지 못할 정도로 인상이 강렬했던 이의 모습을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그게 마음이 저려 은재는 이를 꽉 깨물고 설움을 참았다.
설움은 참는 건 쉬운 일에 속했다.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쩌면 쉬울 것이었다.
속에 켜켜이 쌓아 두고 삭이면 바닥에 떨어져 썩어 가는 솔잎처럼 언젠간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사방을 에워싼 소나무 숲 한 가운데 낡은 집에서는 과히 어려울지도 몰랐다.
“어디 계십니까….”
첫 질문은 강에게로 향했다.
“저는 이곳이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중얼거리는 듯한 그 말을 들어 주는 이가 없었음에도 은재는 기어코 말을 꺼내 놓았다.
“현천으로 가고 싶은데….”
마치 허공에 상대가 있다는 듯 그곳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혼례도… 올리기 싫은데….”
향을 품고 그에게로 날아갔던 바람처럼 제가 지금 하는 말 역시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 주길, 그래서 그가 이곳에 있는 저를 찾아 주길 바랐다.
“전… 이제 어떻게 합니까…?”
두 번째 질문 또한 강에게로 향했다.
미처 가지 못한다 해도 얼굴을 맞보고 하지 못한 말을, 너무나도 뒤늦게 깨달아 버린 제 진심을 누군가가 들어 줄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울창한 소나무 숲, 은재는 그곳에 서서 나뭇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두둑, 무언가가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솔잎을 요란스럽게 적시는 빗소리였다.
솔잎이 머금지 못한 빗방울이 툭, 하고 은재의 뺨에 떨어졌다. 동시에 은재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보고 싶습니다….”
서서히 푸른 솔잎과 나뭇가지를 적시던 빗줄기가 은재의 어깨에 떨어지고, 이마에 떨어졌다. 바닥에서 썩어 가는 솔잎을 적시고 머지않아 쌓인 솔잎에 감춰진 땅을 적실 것이었다.
전하지 못한 애석한 마음만큼은 빗물 대신 눈물에 젖어 들었다.
“어디서든 살아만 계십시오. 저도 살아 보겠습니다.”
비가 내리자 바람이 멎었다. 끝내 제 마음이 그에게 닿지 못할 것이라고 인정한 은재는 체념을 되새겼다.
그리고 슬픔은 머지않아 초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