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찔레꽃 (上)
천양(天陽)의 소식을 들고 온 이는 현천(蜆川)의 터줏대감인 안기창의 충복이었다.
그는 주인에게 소식을 전하고 밀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동이 트기 시작하자 주인의 손자와 함께 천양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굽이진 산을 건널 때, 그는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흐느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막 열아홉 살이 된 도령은 스스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는 도령의 울음에서 관심을 거두었다.
도성에 도착할 즘, 도령은 언제 울었냐는 듯 조용했다. 제 소임을 끝마치기 위해 충복은 번잡스러운 길을 피해 목적지로 향했다.
으스대기 좋아하는 천양의 사대부가 사는 동네에 도착하고 웅장한 기와집의 대문 앞에서 말이 멈췄다. 말 울음소리를 들은 종복들이 대문을 열고 마중을 나왔다.
도령은 현천에서 본 적이 있는 홍 씨를 보고 반색했다.
“도련님,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홍 씨는 말을 꺼내 놓고도 멋쩍어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도령이 반가운 게 사실이었으나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도령의 얼굴에도 슬픔이 잔뜩 깔려 있었다.
홍 씨의 시선이 말의 고삐를 쥔 이에게 닿았다.
“고생 많았네.”
충복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별말씀을요.”
사내종의 부축을 받으며 노둣돌을 밟고 무사히 말에서 내린 도령이 저를 이곳으로 데려다준 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천한 신분에 어림도 없는 일이라 충복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도령에게 허리를 접으며 예를 차렸다.
“도련님, 어서 가시지요.”
행랑아범 홍 씨의 말에 도령이 걸음을 뗐다. 도령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꽤 그럴싸한 얼굴로 솟을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웅장한 솟을대문을 바라보았다.
남부럽지 않은 대궐 같은 아흔아홉 칸 집은 안기창의 딸과 사위인 김윤덕이 사는 곳이었다. 안기창이 천양에서 이름을 날릴 적에 지냈던 곳이기도 했다.
안기창의 충복은 멀어지는 도령을 지켜보다 발길을 틀었다. 현천으로 곧바로 돌아가야 했지만 말이 휴식을 취할 짧은 시간 동안 주인의 심부름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이곳은 영감마님이 지내시는 큰 사랑채입니다. 저쪽 작은 사랑채는 세준 도련님께서 지내시는 곳이지요.”
떨어졌던 발이 바닥에 닿자 도령은 사랑채의 정원을 훑어보았다. 다시 발을 떼고 걷던 그는 무늬가 박힌 담벼락을 눈에 담았다.
두 개의 중문을 지나 안채에 들어선 도령은 잘 꾸며 놓은 안채 마당의 정원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현천의 정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어미의 그리움을 엿본 것 같아 도령의 마음이 저릿했다.
“도련님, 마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홍 씨가 정원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도령을 불렀다. 도령은 마지못해 그를 쫓아갔다.
홍 씨의 수발을 받으며 안방 대청마루에 선 도령은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름의 상쾌하고 맑은 날씨와 다르게 안채 주변은 스산하고 어두웠다.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기운에 도령은 괜스레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죽음.
태어나자마자 현천으로 가야 했던 저를 나이 든 외조모가 거두어 주었다고 들었다. 어미와 같았던 조모의 죽음을 떠올리자, 그때 느꼈던 슬픔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그때의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듯 오금이 달달 떨리는 것 같았다.
그 슬픔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감을 계속 부정했지만, 삼키지도 못하고 뱉어 내지도 못하는 불안감이 목을 옥죄었지만, 그게 무서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마님, 현천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작은도련님이라는 호칭보다는 현천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것에 익숙한 은재는 활짝 열린 방문 너머를 응시했다.
사치를 부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외조부의 성정을 닮아 친어미도 검소했다. 보란 듯이 꾸며 놓은 장식품 하나 없는 방으로 들어가자 왠지 모르게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방을 지키던 여종이 주인에게 고했다.
“마님, 현천 조카님께서 오셨어요.”
안으로 든 은재는 누워 있는 어미를 바라보았다.
“…은재야.”
안 씨는 갈라진 목소리를 인지하지 못한 듯 애타게 은재를 불렀다.
은재는 제 두 귀로 들은 목소리를 의심했다. 항상 노래를 부르는 듯한 고운 목소리로 저의 이름을 불러 주었던 어미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 고운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기에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은재는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연실아, 잠깐 나와 보거라.”
대청마루에 서서 문을 지키고 있던 홍 씨가 여종을 부르자, 여종이 은재에게 예를 차려 보이고는 바깥으로 향했다.
은재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난 뒤에야 안 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니….”
“천양으로 오는 길이 힘들었지.”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은재는 안 씨의 손을 붙잡았다. 제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던 손길을 기대했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어미의 손은 송장처럼 차갑기만 했다.
“네게… 이런 모습을 보여 미안하다.”
장성한 아들을 바라보는 안 씨의 눈길에는 형언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가슴속에 묻어 놓고 살았던 아픈 손가락이 바로 은재였다. 보고만 있어도 기특했고, 만지면 살을 아리게 하는 아이였다.
추운 겨울날 태어난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아이는 태어난 날 아비에게 버림을 받았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땅에 파묻어도 좋고 절에 가져다 버려도 좋다.’
그리 무서운 말을 했던 이가 바로 지아비였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불길한 예상이 딱 맞아떨어졌음에도 안 씨는 침묵했다. 지아비에게 죽여도 좋다는 명을 받고 아이를 데려간 수복이 현천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소첩이 음인인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첩은 상공에게서 그 아이를 지켜야 했지요.’
해가 지천을 밝히는 아침이 되어서야 안 씨는 입을 뗐다. 지아비의 반응 역시 안 씨의 예상대로였다.
‘가문을 위한 일이오! 내 욕심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준이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함이오!’
‘아니요. 세준이를 위한다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름조차 지어 주지 못하고 소첩의 곁을 떠난 아이 또한 상공의 자식입니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에 안 씨는 몸이 달달 떨렸다. 순식간에 변절한 마음이, 영원할 줄 알았던 지고지순했던 연정이 싸늘하게 식어 안 씨의 마음을 차게 만들었다.
‘나는 절대로 그 아이를 내 자식이라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예, 인정하지 마십시오.’
그날, 안 씨는 그 순간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냉정하고 무책임한 모습으로 아이를 부정하던 아비의 모습을 똑똑히 머릿속에 새겼다.
‘아이는 제 가슴에 묻겠습니다. 아이는 안씨 가문의 명예를 품은 채 잘 자랄 것입니다. 또한 소첩은 세준이가 현천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알게 할 것입니다.’
안 씨는 지아비의 절실함을 알았다.
그는 출세 가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고, 진정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현천의 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랬기에 안 씨는 지아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생각이었다.
‘아이를 건들지 마십시오. 그리해 주신다면 소첩은 상공이 원하는 바를 이루시도록 끝까지 돕겠습니다.’
상실감과 함께 절망이 찾아왔다.
차곡차곡 쌓았던 담이 일순간 무너지는 것은 모두 초석이 자리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느지막하게 알아차렸지만, 이미 물릴 수 없도록 서로의 몸에는 합환 증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니, 상공께서는 소첩의 마음을 잃으셨다는 것만 기억하십시오.’
지우려면 쉽게 지울 수 있는 증표는 백년가약을 약속한 부부에게는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제 몸에 새겨진 증표를 선택한 대가로 가슴에 멍울이 맺혔다.
지금 안 씨는 자신의 끝을 목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아이가 어미가 있는 천양으로 오길 바랐다.
“어머니, 제가 왔으니 어서 쾌차하셔야 합니다.”
아이를 보면 좋을 줄만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현천과 달라 보는 눈이 많고, 듣는 귀가 많다. 이를 꼭 명심해야 한다.”
“그런 것이라면 염려 마십시오.”
안 씨는 손을 들어 차가운 손끝으로 파릇파릇한 생기가 도는 은재의 뺨을 쓰다듬었다.
죽음으로 생을 끝낸다 해도 아이에게 품은 죄책감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흉터처럼 자리 잡은 죄스러움이 안 씨의 온몸을 저리게 했다.
“혹여 어미가 떠나게 되거든,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말거라.”
“…어머니.”
아이는 어미도 아비도 없이 조부모의 밑에서 자랐으면서도 그늘이 없이 참 밝았다. 심성 또한 어찌나 고운지 어려운 사람을 보고 지나치는 법이 없다고 들었다.
동네에 떠도는 개가 있다면 개장수에게 붙잡혀 갈 걸 걱정하며 기어코 집 안으로 들였고, 동네 거지 아이들에게 제가 먹을 주전부리도 서슴없이 내어 줬다고 했다.
이렇게 잘 자란 아이를 보면 부군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를 불러들였던 안 씨는 넘쳐흐를 듯한 눈물을 억지로 삼켜 냈다.
미련한 줄 모르고 착각을 했구나.
막상 현천에서 아이를 마주하자 불안감이 치솟았다. 제 죽음 뒤에 찾아올 아이의 고난이 걱정됐다.
“그 누구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너 자신조차도 원망하지 말렴.”
괜한 트집을 잡아 아이를 내치면 어쩌나. 현천의 부친을 견제하기 위해 아이를 볼모로 삼으면 어쩌나.
안 씨는 은재를 현천으로 불러들인 것을 후회했다.
음인이라는 이유로 아비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이는 소리 없이 저 자신을 죽일 것이었다. 어른들이 핑곗거리로 감춰 둔 진실을 영원히 모르길 바랐다.
안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달달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미는 여한이 없다.”
“어머니….”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어여쁜 아이. 아이는 활짝 웃을 때마다 푸른 옥돌처럼 반짝거렸다. 비록 순탄치 않은 삶을 살더라도 어디서든 사랑받을 터. 안 씨는 애써 아이의 화창한 미래를 꿈꿨다.
“이 어미는 네가 행복한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단다.”
아이의 행복과 안녕을 빌어 주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안 씨는 뺨을 쓰다듬었던 손으로 은재의 손을 맞잡았다.
“꼭 행복해야 한다.”
“예, 어머니. 그러겠습니다.”
은재는 지긋이 안 씨의 곁을 지켰다. 얼마 뒤 밖으로 나갔던 여종이 탕약이 놓인 소반을 들고 돌아왔다.
“도련님, 마님께서 약을 드실 시간이십니다.”
방을 나가고 싶지 않아 은재는 안 씨를 바라보았다. 나가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어미의 모습에 은재는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재가 방문을 넘어서기 무섭게 대청마루 아래에 있던 홍 씨가 말했다.
“도련님, 영감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대청마루에 선 은재의 얼굴에 어렴풋이 난색이 떠올랐다.
현천에 자주 찾아왔던 형제와 어미와는 달리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비였다. 순간 긴장감이 돌면서 진땀이 나는 것 같았다.
“도련님.”
홍 씨의 재촉에 은재는 숨을 작게 내쉬었다.
“처음 뵙는 것이라… 긴장이 되어 그러네.”
홍 씨는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처음 본 아비라.
갓 태어났을 적, 도령의 아비는 꼬물거리는 도령을 기특하다는 눈으로 보았었다. 하나 허벅지 안쪽 여린 살에 물든 푸른색 반점이 화근이었다. 홍 씨 또한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늦지 않게 큰 사랑채로 가야 화근을 면할 것이었다. 트집 잡힐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홍 씨는 주저하는 은재에게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환복을 하시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이 도리에 맞습니다.”
그 말에 은재는 어색함이 가득한 웃음을 내보였다. 친부모가 살고 있으니 제집이나 다름없는데도 손님으로 와야 하는 제 처지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어른들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까닭에 은재는 자신의 상황에 순응했다. 착한 심성도 한몫했을 터였다.
“…그래, 아범의 말이 맞네.”
은재가 발을 뻗자, 홍 씨는 서둘러 비단으로 겉을 덧댄 신발을 집어 들었다.
* * *
덕망 높은 선비임을 뽐내듯 김윤덕은 점잖은 차림으로 보료 위에 앉아 있었다. 장죽을 물고 연초를 태우자 담배 연기가 방 안을 떠돌다 활짝 열린 측면 창으로 빠져나갔다.
현천에서 지내던 원흉이 천양으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김윤덕은 못마땅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도성 사대부 양반가에서 음인 자손이 태어나는 것은 남우세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광풍 김씨의 가문이라면 말이 달랐다.
김윤덕은 뼛속까지 가문을 위해 사는 사내였다.
허공으로 은은하게 퍼지는 담배 연기 사이를 파고든 서슬 퍼런 목소리가 김윤덕의 귓가에 아른거렸다.
‘네 아비는 이제 광풍 김씨와는 상관없는 인물이다!’
김윤덕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집 안에 은폐되어 있던 아비가 쫓겨났다.
김윤덕의 아비는 음인이었다. 조부는 당신이 처음 품은 자식이 음인이라는 걸 극도로 경멸했고, 조부의 경멸을 보고 자란 김윤덕 역시 아비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아비가 쫓겨난 뒤 어린 나이였던 김윤덕은 조부의 뜻에 따라 숙부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때는 모두가 가문의 유일한 양인인 김윤덕을 영광으로 떠받들었다. 김윤덕은 그게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했었다.
하나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었다. 김윤덕이 음인 아비에게서 태어난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양부모는 건강한 양인 사내아이를 낳았다. 어렸으나 위대했던 김윤덕의 위상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김윤덕은 열두 살이라는 나이에 사람들의 위선을 깨달았다. 그들이 저의 가슴에 꽂았던 비수를 똑똑히 기억했다. 사소한 감정 하나까지도 살에 새기고, 뼈에 새겼다.
‘그들의 가문이 아닌, 나의 가문을 위하여.’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신념이 필요했다.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철칙도 세웠다. 신념이라는 것은 집착할수록 단단해졌다. 틀에 박힌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운 좋게 안기창의 눈에 띄었고, 성공의 길로 접어들었다. 단번에 오르지 않고 천천히 올라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기 위해 김윤덕은 침묵했다. 그리고 임금의 눈에 드는 순간, 김윤덕은 저의 뜻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의 가문을 위하여. 오롯이 나로 인하여 시작된 나의 가문을 꿈꾸며.’
제가 신념에 잡아먹힌 걸 알면서도 버리지 않았다. 버릴 수 없었다. 완벽한 복수를 꿈꿨다.
선례를 보았기에 어렵지 않았다. 저를 낳은 아비가, 늘 어두운 방에 갇혀 있던 아비가 늦은 밤 사내종들의 손에 끌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조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가문을 위해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나로 인하여 시작된 나의 가문, 그 뒤를 이을 내 아들의 장성(長成)을 위해.’
김윤덕은 운명이 저를 궁지로 몰기 위해 보낸 필연적인 아이를 부정해야 했다.
“영감마님, 현천 도련님께서 드셨습니다.”
김윤덕은 입에 물었던 장죽을 뱉었다. 그러곤 장죽을 엎어 요강을 때렸다. 타다 만 담뱃재가 요강으로 후드득 떨어지고 길게 피어오르던 연기는 곧 사그라졌다.
“들라 하게.”
곧바로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젊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와 방 한가운데 서서 쭈뼛거렸다. 김윤덕은 그이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제 왼편에 나 있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절 받으십시오.”
김윤덕의 고개가 은재가 서 있는 곳으로 휙, 돌아갔다. 그는 일말의 정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시선으로 흉물을 보았다.
“말조심하지 못하겠느냐!”
은재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벼락같은 노성이 떨어졌다.
저에게 달려든 매서운 눈빛에 은재는 턱하고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그 눈빛과 노성에 놀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무서운 짐승을 피하려는 듯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어설픈 몸짓에 휘청거린 은재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차마 고개를 들어 노여움이 가득 깃든 눈을 바라볼 수 없어 은재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분위가 저를 압박하자, 아비를 향한 기대는 창밖으로 빨려 나가는 담배 연기처럼 사라졌다.
“내게는 안씨 성을 가진 자식이 없다.”
처음으로 아비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상상으로만 떠올려야 했던 아비와 처음으로 눈을 맞춘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했던 만남은 제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상상과는 달랐다.
세상에 태어나던 날, 시주를 받으러 왔던 중이 괴상망측한 예언을 남기고 돌아갔다고 했다. 저를 낳은 어미가 난산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어미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팔자를 반길 곳은 없었다.
‘할머님, 저 때문에 어머니께서 아프신 건가요?’
‘은재야, 우리 어여쁜 손자야. 네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단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보고 싶지 않으신가 봅니다.’
‘아가, 그렇지 않단다. 네 아비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그런 말을 하는구나.’
은재는 어쩔 수 없었던 사정으로 어린 자식을 보내야 했던 아비의 마음을 연민했었다.
자식을 멀리 보내야 했던 아비의 마음이 더 처절할 것이라고 여긴 탓에 서운해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아비가 어미와 같은 줄 알았었다.
그러나 아비는 달랐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도, 내뱉는 말투도. 심지어 얼굴에 담긴 감정까지도 어미와는 같지 않았다.
“이곳에 손님으로 왔음을 잊지 말고 처신을 똑바로 해라.”
서운한 마음을 티 낼 수 있었지만, 은재는 제 감정을 감췄다. 기대와는 다른 아비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한 저 자신을 질책했다.
“그만 나가거라.”
겁에 질려 허둥지둥하는 몸짓으로 예를 갖췄지만, 아비의 눈길은 이미 저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 더는 머물 수 없었던 은재는 조심스럽게 발을 뒤로 물렸다.
바깥으로 나가 문을 닫자 방 안의 눈치를 보던 홍 씨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인사는 잘 올리셨습니까?”
은재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들이마신 홍 씨는 맨발로 대청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디딤돌에 놓인 신발을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영감마님! 영감마님!”
안채로 이어지는 중문 너머에서 젊은 여종이 소리를 꽥꽥 질러 댔다. 곳곳에 모여 있던 종복들이 그 외침을 듣고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삐쭉 내밀 정도였다.
“안방마님께서! 영감마님!”
여종의 달음박질이 사랑채 앞뜰에서 가까스로 멈췄다. 이곳으로 오다가 넘어진 듯 여종의 치맛자락은 흙투성이였다.
눈물범벅인 여종의 얼굴에 홍 씨는 다시 대청마루 위로 올랐다.
“영감마님! 어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유일한 이방인이었던 은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종을 바라보았다. 곧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은재의 고숙이 말했다.
“무슨 일이냐.”
벅찬 숨을 몰아쉬며 끅끅거리던 여종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안방마님께서… 안방마님께서….”
사랑채 마당에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에 은재는 제가 맨발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양반으로서 지켜야 하는 체통이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다급한 걸음으로 안채로 이어지는 중문을 향해 뛰었다.
* * *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안기창의 충복은 안수동으로 향했다.
주인의 옛집은 궁궐의 서쪽인 회은동에 자리했고, 안수동은 궁궐의 동쪽에 있었다.
안수동은 주로 왕족이 거주하는 동네였고, 궁궐에서는 왕족들의 사치를 견제했기에 안수동에는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집이 많았다.
그의 걸음이 어느 집 대문 앞에서 멈췄다.
“계십니까?”
그는 대문 앞에 서서 그 집 대문을 평가했다. 높은 솟을대문을 보고 온 탓인지, 그 집의 대문은 소박하다기보다는 형편없어 보였다.
대문 옆에 붙어 있는 행랑방도 두어 칸은 되려나. 왕족이 산다고 하여 대궐 같은 집을 생각했건만, 예상보다는 많이 간소한 집이었다.
부름을 들은 듯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경첩이 끼익, 하고 요란을 떨며 문 한 짝이 열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청지기로 보이는 듯한 이의 모습이 보였다. 곧 청지기가 경계하며 물었다.
“뉘십니까?”
그는 청지기가 내보이는 경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현천의 안기창 대감마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 댁 주인께 직접 서찰을 전해 드리라는 명을 받고 왔는데, 혹 뵐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청지기는 난색을 보였다.
“지금 주인 나리께서는 계시지 않으십니다.”
서찰을 적어 내려가던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고민이 많아 보였다. 함부로 볼 수 없도록 봉한 서찰을 내밀며 주인은 수신인이 한곳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는 방랑자라며 걱정했었다.
충복은 제 주인의 걱정을 마주하며 작게 탄식했다.
“하면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청지기가 난색하며 답했다.
“지금 나리께서는 도성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난처함을 한숨으로 내뱉었다.
“참말입니까?”
“예, 참말이지요. 엊그제 길을 떠나셨습니다.”
서찰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다고 해도 탈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찝찝했다.
“나리께서는 출타하시면 언제 돌아오시는지 기별을 주지 않으십니다. 적어도 서너 달은 나가 계시는 분이라…. 다시 찾아오셔도 뵙기 힘들 것입니다. 하니 제게 서찰을 주고 가시면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충복의 팔이 아주 잠깐 움찔거렸다.
‘전하지 못했다면 필시 서찰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서찰을 꺼내려다 멈춘 그는 뒤로 한발 물러났다.
“아닙니다. 다음에 때를 잘 맞춰 오겠습니다.”
청지기는 의심이 깃든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예, 그러십시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그는 청지기의 배웅을 받으며 그곳에서 멀어졌다.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에 연이어 한숨을 내뱉은 충복은 조금이라도 빨리 현천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회은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렀다. 가는 길이 바빠 자신의 뒤를 밟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그들이 지닌 살기 또한 눈치챌 수 없었다.
회은동에 맡겨 두었던 말을 가지고 도성을 빠져나간 충복은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현천을 향해 내달렸지만, 끝끝내 충복의 품에 있던 서찰은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모두 천양을 안일하게 생각한 탓이었다. 무지와 방만 탓에 안기창은 결국 수풀이 우거진 으슥한 곳에서 충복을 잃어야 했다.
* * *
기묘년(己卯年) 유월 스무여드레, 깊은 영면에 든 안 씨는 친정이 아닌 광풍 김씨의 선산에 묻혔다. 장자인 세준이 그 곁을 지켰다. 사실상 아들임에도 그곳에 남아 있을 명분이 없었던 은재는 광풍을 떠나 천양으로 돌아와야 했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팔월 초, 천양에 있을 이유가 사라진 은재는 현천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현천으로 돌아오라는 소식도, 그만 천양에서 떠나라는 말도 없었다.
“도련님.”
하릴없이 별채를 거닐고 있는 은재의 곁으로 홍 씨가 다가왔다. 기다렸던 소식이 홍 씨의 손에 들려 있기라도 한 듯 은재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영감마님께서 모셔 오시라 하셨습니다.”
은재는 잠시 머뭇거리다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시각, 김윤덕의 사랑방에는 손님이 들어 있었다. 꽤 진지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갔다.
김윤덕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의 옷차림새는 저잣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양민의 모습이었으나, 그가 품은 기세는 마치 세도가의 양반같이 당당했다.
“천양에서 안기창 대감마님의 명성을 모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영감마님의 명성을 더한다면 도성이 들썩거릴 것입니다.”
쇠뿔로 만든 물부리를 물고 있던 김윤덕이 과히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치를 보던 이가 신이 나 헤벌쭉 웃었다.
김윤덕을 찾아온 이는 도성에서 이름난 중매쟁이 곽병주였다. 곽병주는 본디 운종가에서 청포전을 크게 운영하던 상인이었는데, 말재간이 좋아 우연히 인연을 맺어 준 뒤로 중매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원하시는 가문이 있으신지요?”
삼복더위의 끄트머리를 달리고 있었다. 곽병주는 익숙해지지 않는 더위에 이마를 따라 흐르는 땀을 옷소매로 훔쳤다. 실실거리며 김윤덕의 답을 기다렸지만, 고심하는 듯 집주인은 말이 없었다.
곽병주는 김윤덕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김윤덕은 정삼품 병조참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인물치고는 앉아 있는 벼슬이 하찮았다.
과연 저에게 혼인 의사를 비친 다른 가문들 중에서 김윤덕의 아들이 아닌 ‘김윤덕의 처조카’를 반겨 줄지가 의문이었다.
“얼마 전 개포(槪浦) 관찰사로 임명되신 조덕령 영감마님을 아십니까? 얼마 전 그 댁 안방마님께서 제게 다녀가셨습죠. 그 댁 장녀가 혼기가 찼는데, 양인이라고 합니다.”
나름대로 격이 맞는 집안을 떠올리다 생각난 것이 조덕령이었다. 제가 꺼낸 혼처가 김윤덕의 입맛에 맞을지 궁금해 곽병주는 또다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틀린 답이었는지 김윤덕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슬슬 곽병주의 애가 타기 시작했다.
“하면 승문원 참교의 자식은 어떠십니까?”
곽병주는 또 다른 답을 꺼내놓았다. 사방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더위가 곽병주를 휘감았다.
“남강(南江)의 유향 상단을 아는가?”
남강의 유향 상단이라면 주(朱)국과 교류를 하는 상단이었다. 그 상단의 객주 역시 도성에서 꽤 유명한 사람에 속했고 곽병주와도 밀접한 자였다.
“예, 알고 있습죠. 쇤네가 그곳의 객주와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 객주에게 양인 아들이 하나 있다지?”
곽병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시탐탐 양반가와 연을 맺길 바라는 오 객주의 바람을 아는 듯 김윤덕이 그자를 입에 올렸다.
오 객주가 상술이 좋아 돈이 많기는 하지만, 양반가와 인연을 맺을 만한 자는 아니었다. 중매를 하면서 이리 격이 안 맞는 경우는 처음이라 곽병주는 당황스러웠다.
“오 객주의 아들은 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일 혼례를 올리면 도련님께서도 주국으로 가셔야 할 텐데….”
“내 행랑아범을 보낼 테니, 객주와 자리를 만들어 주게.”
이 소식을 오 객주가 듣는다면 좋다며 방방 뛰어 댈 테지만, 곽병주에게는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 격이 맞는 집안끼리 인연을 맺어 줘야 저에게도 일감이 들어오지 않겠는가.
“저… 영감마님. 상단보다 더 나은 가문이 많습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조금 더 고민을 해 보시는 게 어떨지요.”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김윤덕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더는 반문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곽병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영감마님, 도련님께서 드셨습니다.”
바깥에서 홍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윤덕은 들여보내라고 짧게 말한 뒤 장죽의 물부리를 물었다.
이어 문이 열리고 은재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랑방에 먼저 와 있는 손님을 본 은재는 살짝 당황 어린 눈으로 김윤덕을 보다 예를 갖춘 뒤 손님의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곽병주의 시선이 자연스레 은재에게로 쏠렸다. 나름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생각했던지라 곽병주는 무례임에도 불구하고 매파의 눈길로 은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관례는 언제 치렀느냐.”
김윤덕의 말에 은재는 눈을 깜박거렸다.
은재의 눈길이 곧 곽병주에게 닿았다.
저를 보며 웃는 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내보인 무례에 은재의 눈빛이 시무룩해졌다.
“어찌 답이 없는 것이냐.”
꾸지람에 은재는 서둘러 입을 뗐다.
“열여섯에 치렀습니다.”
김윤덕의 눈길이 곽병주에게 향했다. 혼인에 문젯거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도 뜻을 알아차린 곽병주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이른 시일 내로 자리를 마련해 주시게나.”
제게 향한 말에 곽병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 연통을 드리지요.”
길지 않았던 대화가 끝났음을 느낀 곽병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김윤덕에게 예를 차린 뒤 은재에게도 허리를 굽혔다. 곧 허리를 꼿꼿하게 편 곽병주는 장지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섰다.
김윤덕과 단둘이 방에 남은 은재는 방 안의 침묵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희뿌연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퍼지는 걸 바라볼 뿐이었다.
“현천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 아니, 이제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게지.”
돌아가라는 말을 기대했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기대했던 대로 운명이 흐르지 않았다. 애정이라고는 하나 담기지 않은 쌀쌀맞은 말투에 은재는 답을 꺼내지 못하고 애먼 바닥을 쏘아보았다.
김윤덕은 애초에 은재의 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곳에 남아 혼례를 올려라.”
사실상 안 씨의 아들이었으니, 상중에 혼례를 올리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궁중에서는 이따금 상중에도 혼례를 올린다고 하지만 궁궐 밖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은재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뜻이 담긴 말이었다. 은재는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김윤덕을 바라보았다. 형제가 묘소에 남아 여묘살이를 하는 와중에 어찌 혼례를 치를 수 있겠냐고 따질 수도 없어 은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비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을 몰랐다. 아비가 원하는 대로 한다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은재는 저에게 닥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집안에 누가 될 행동을 하지 말거라.”
“예.”
아비의 눈빛은 여느 때와 같이 날카로웠지만, 다른 때와 달리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다. 아주 작은 위안을 받은 은재는 저에게 닿지 않는 아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것으로 족하다. 어차피 치러야 하는 혼례이지 않은가. 혼례를 치르고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며 그간 몰랐던 아비의 마음을 깨닫고자 마음먹었다.
김윤덕은 서안에 놓인 서찰을 바라보았다. 안기창이 보낸 것이었다. 현천의 장인은 몸이 좋지 않아 딸의 장례를 볼 수 없었다. 외손자의 안부를 묻는 서찰에 김윤덕은 감흥이 없었다.
현천을 떼어 내기 위한 것일까. 매정한 손길로 낚아챈 서찰이 화로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죽을 날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네가 아직도 기세가 등등하구나.
“그만 나가거라.”
불씨가 피어오르는 화로에 닿아 있던 시선을 김윤덕에게로 옮긴 은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비를 향해 읍했다.
문간을 넘어 바깥으로 나오며 그는 어미가 마지막으로 저에게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그 누구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너 자신조차도 원망하지 말렴.’
언제쯤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 둔 앙금이 원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게 될까.
은재는 단 한 번도 원망을 품어 본 적 없다는 듯 저를 기다리는 홍 씨를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 * *
한 달째 소식이 없었던 충복이 사체로 발견되었다.
더운 여름의 열기에 녹아내린 살점을 멍석으로 가렸다. 살 썩은 내가 마당에 진동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안기창은 허탈감에 휩싸인 채 멍석을 응시했다.
충복의 죽음은 안기창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이 끔찍한 짓을 벌인 이가 누구인가. 안기창은 자신을 겨냥한 협박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장례를 치러 주게나.”
깊은 생각에 빠진 안기창은 사랑방으로 걸음을 되돌렸다. 그의 뒤를 안기창의 문하 몇이 따랐다.
“어르신….”
안기창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안에 놓인 서책을 보았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그의 고개는 꿈쩍하지 않았다.
근심하던 문하들이 그의 앞에 쪼르르 무릎을 꿇고 앉았다.
“회은동에서는 기별이 없었느냐.”
“예. 답신이 오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도련님을 보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충복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온 문하가 입을 열었다. 시체를 찾아오기 전, 천양의 집에 들러 안기창이 내어 준 서찰을 전하고 온 문하였다.
저희를 주시하는 자들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하나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안기창은 충복을 주검으로 만든 이가 누구일지 생각했다.
충복에게 들려 보냈던 서찰의 부재를 떠올린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사위를 용의 선상에서 배제할 수 없었다. 그보다도 더 높은 존재가 저를 경계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천양을 살펴야겠다.”
안기창의 명령에 또 다른 문하가 나서서 답했다.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적은 명분을 만들어 들쑤시기를 좋아했다. 서찰의 내용은 별거 아니었지만, 적의 손에 들어갔다면 크건 작건 풍파가 일어날 것이었다.
안기창은 백 리 남짓 떨어진 천양을 경계했다. 관직에서 내려와 여생을 그들을 배척하기 위해 몰두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양의 모두가 저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내고 있었다. 늙은이는 살기 위해 그리고 살리기 위해 칼을 잡아야 했다.
“은재의 안위도 살피라고 전해라.”
무엇보다도 안기창에게는 서찰에 적힌 이들의 안위가 중요했다.
방 안에 앉아 있던 문하들이 쪼르르 바깥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안기창은 서안에 올려놓았던 서책들을 치우고 종이를 펼쳤고, 어린 문하가 곁에 앉아 먹을 갈았다.
붓을 든 안기창은 임금의 장인이자 자신의 벗에게 보낼 서찰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현천에서 온 연통을 받아 든 국구, 윤호석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벗은 자식을 잃었음에도 강건했다. 손자가 볼모가 되었음에도 강직했다.
혼자 속으로 애를 태우고 있을 벗을 생각하자 걱정이 단단했던 마음을 흔들었다.
“천양에 가야겠구나.”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국구와 어르신이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벗끼리 서찰을 주고받는 것을 어찌 내통한다고 여기겠느냐.”
“무엇인들 곱게 볼 이들입니까.”
윤호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주상께 갈 것이다. 주상께서는 편협하지 않으시니 내 뜻을 헤아려 주시겠지.”
“전하의 곁을 지키는 자들은 편협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미 간언을 올렸을 것입니다.”
“그저 혼기가 찬 대군에게 혼인을 제안하는 서찰이지 않았느냐.”
윤호석은 제 앞에 있는 이의 걱정을 보며 웃었다. 하나 걱정하는 이는 웃음 속에 섞인 근심을 확실하게 눈치챘다.
“문제될 것은 없다.”
윤호석과 안기창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분란을 일으킨 적이 없었음에도 그들을 주시하는 자들이 많았다. 천양에 있는 궁궐 역시 두 사람에게 잠재적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놓고 살피고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이 지키고 있는 대군 때문이었다.
범랑에는 언제든 피바람이 불 듯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두 사람을 따르는 문하들은 현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윤(自輪)의 손자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자윤은 안기창의 호였다. 이미 안기창의 근심을 보고 온 문하는 작게 탄식했다.
“김윤덕은… 얍삽하나 제 잇속이 걸린 일에는 신중하지. 장인의 명성을 얻어 그 자리에 올라갔으니 자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호석은 안기창에게서 온 서찰의 귀퉁이를 호롱불에 가져다 댔다. 증좌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종이의 귀퉁이를 따라 번진 불길이 화로 안에서 활활 타오르다 삽시간에 사그라졌지만, 입으로는 괜찮다면서도 마음속에서 일렁거리는 윤호석의 근심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국구가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윤호석은 임금을 바라보았다. 임금 역시 윤호석을 응시했다.
“전하께 의논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사옵니다.”
“대군의 일이겠지요.”
“예, 전하.”
임금은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두루마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근처에 있던 내관에게 내밀자, 내관이 상소를 받아 들고는 허리를 굽힌 채 뒤로 물러났다.
내관은 윤호석에게 다가가 상소를 전했다.
“읽어 보십시오. 대군이 부린 행패에 관한 상소입니다.”
두루마리를 펼친 윤호석은 종이에 빼곡하게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곧 참담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상소에 적힌 대군의 비행은 모두 거짓이었다. 임금은, 대군의 아비는 그 적나라한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군은 왕실의 흠입니다. 대군이 사람이 되기 전까지 혼례를 입에 담지 마십시오.”
“하오나 대군께서는….”
용기를 낸 윤호석의 입이 떨어졌다. 그러나 임금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자, 윤호석은 결국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국구는 이미 안기창 대감과 대군의 혼례를 의논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국구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왕실의 법도를 경시하는 것입니까.”
“…전하.”
윤호석은 임금을 휘감고 있는 분노를 보았다. 그 분노가 필시 자신만을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대군을 향한 임금의 분노를 보았기에, 윤호석은 숨을 죽였다.
“안기창 대감의 손자에 관해서도 들었습니다. 병조참의가 혼처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임금은 자신의 장인이 꾀한 혼사를 입도 벙끗하지 못하게 막았다. 윤호석과 안기창이 무엇을 몰고 궁궐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어 우려했기 때문이다. 우려가 불신을 불러왔으나, 임금은 중전을 위해서라도 윤호석을 잃을 수 없었다.
“국구는 안기창 대감과 거리를 두십시오.”
좌절을 느낀 윤호석의 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국구와 안기창 대감은 이미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목을 물고 찢어발길 빌미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임금의 음성이, 잔잔한 음색이지만 분노를 담고 있는 목소리가 조용히 내전에 울렸다. 홀로 앉아 그의 경고를 들은 윤호석은 이마를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렸다.
“주상 전하…. 황송하옵나이다.”
임금이 지금 당장 제 목을 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그의 입에서 연신 황송하다는 말이 나왔다.
책상에 앉아 있던 임금이 일어나 윤호석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조아렸던 어깨를 손수 들게 했다.
“잘 새겨들으십시오.”
윤호석은 통탄에 빠진 얼굴로 임금과 눈을 맞췄다.
“내 마지막으로 국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나지막하게 내뱉는 말이 윤호석의 어깨를 달달 떨리게 했다.
“더는 천양 일에 나서지 마십시오.”
* * *
늦은 봄, 온기를 품은 남풍이 길을 걷는 이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낡아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삿갓을 쓴 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그만 그것을 벗으시지요.”
삿갓을 쓴 이의 뒤에서 핀잔이 들려왔다. 그는 피식 웃고는 걷던 길을 계속 걸었다. 뒤를 따르던 사내가 눈썹을 우그리며 외쳤다.
“대감!”
발을 내디뎠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사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햇볕을 가리기에 딱 좋은데 어찌 버리라는 것이냐?”
한 줄기 바람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먼지투성이인 그의 도포 자락에 묻어 있던 마른 잡초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자 사내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제 곧 도성에 당도할 것입니다.”
“알고 있다.”
“환복을 하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내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르신께서 당부하셨습니다. 근처 주막에 들러 환복하고 가시지요. 그 삿갓도 버리셔야 합니다.”
사내의 말에 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핀잔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내가 이 꼴로 도성에 간다고 한들 도성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가기 위해 틀었던 몸을 돌렸으나 어느새 사내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환복하고 가십시오.”
꽤 귀찮다는 듯 그의 얼굴에 짜증이 깃들었다. 사내는 그런 표정에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함을 내비쳤다.
길 한복판에서 벌어진 때아닌 기 싸움에 지나가던 행인들의 눈길이 두 사람에게 잠시 머물다 떨어졌다.
“내 참으로 이 삿갓이 마음에 들어 그런다.”
“참으로 마음에 드신다는 삿갓이 대감의 체면을 깎아 먹을 것입니다.”
한 마디 져 주는 법 없이 말 뒤에 말이 따라붙자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하던 남자의 입에서 곧 포기와도 같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제 앞을 가로막은 사내의 팔뚝을 밀어 길을 텄다.
뾰로통한 그의 표정을 보았음에도 사내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도성으로 들어가는 대문과 가까워질수록 거리에 있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그만큼이나 지나치는 이들이 해진 도포를 입고 구멍 난 삿갓을 쓴 그를 바라보는 일도 잦아졌다.
줄곧 그의 뒤를 따라가던 사내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 주변을 살폈다. 골목길 어디선가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돌멩이를 던지며 거지라고 놀려 대기에 딱 좋은 모습이었다.
사내는 주변을 경계했다. 사내가 모시는 이는 그런 수모와 멸시를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사내가 모시는 이의 이름은 이강이었고, 그는 범랑의 왕자, 효원(曉原) 대군이었다.
“어느 주막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을까? 집을 코앞에 두고도 굳이 주막에 들러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사내는 앞선 이가 빈정거리는 말을 잠잠히 들었다. 사내의 눈이 잠시 들렀다 갈 만한 주막이 없는지 찾으려 분주하게 움직였다.
“부경아.”
강이 걸음을 멈추고 부경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강과 마주한 부경은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눈살부터 찌푸렸다.
“대충 갈아입고 가면 될 것 같으니 이곳에서 환복할까?”
“안 됩니다. 깨끗한 주막을 찾아보겠습니다.”
“도포만 갈아입고 갈 것인데 뭣 하러!”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부경은 말끔해 보이는 주막에 들어서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듯 강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버림받은 듯 길 한복판에 홀로 남은 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막 마당에 들어선 부경을 지켜보았다.
부경이 돌아오면 어떤 심통을 부려 볼까, 고심하던 찰나였다. 지금까지 길을 걸으며 몸으로 느꼈던 봄바람이 강을 지나쳐 갔다.
도성 근처에서 부는 바람이 그간 느꼈던 바람과는 다르다는 듯 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바람 속에 섞여 있던 향을 똑똑히 맡았다. 만개한 꽃에서 퍼지는 향인 것 같으면서도, 과즙을 잔뜩 품은 과일의 달콤한 냄새 같기도 했다.
그 오묘한 냄새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알아내고 싶은 욕망이 강의 가슴속에서 날뛰었다.
강은 제 곁을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성으로 들어가는 이들과 도성에서 나오는 이들로 뒤섞인 인파 속에서 특정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초립을 쓴 사내인가. 아니면 장옷을 입은 아낙? 그것도 아니라면 누구인가.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계속해서 두리번거렸지만,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지 못했고 누구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주모와 이야기를 나누던 부경이 어느새 강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주막에서 잠시 방을 내어 주기로 했습니다. 가시지요.”
인파 속으로 휩쓸려 간 바람을 찾아보려던 강은 진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향을 놓치고 말았다. 강의 발이 힘없이 뒤쪽으로 향했다.
“어찌….”
강은 허탈감이 가득한 얼굴로 부경을 보았다.
부경은 이해할 수 없는 강의 실망감에 그저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강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는 주막 쪽으로 무심하게 손짓했다.
“어찌 그러십니까?”
강의 발이 떨어지지 않자 부경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놓쳤는지 아느냐?”
짜증이 깃든 말투에 부경은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모릅니다.”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내 그것을 놓쳤으니, 이제 어떻게 하냔 말이다.”
이렇게 난리를 치는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부경은 도성을 앞두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물어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대체 무엇을 놓치셨다는 것입니까?”
강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늘어놓았다. 한숨의 의미를 알기에 부경은 눈썹을 씰룩거리며 강을 지켜보았다. 또 무슨 억지를 부리시려고.
얼마 가지 않아 강의 입술이 떨어졌다.
“내 지금 그것을 모르겠으니, 이리 화를 내는 것 아니냐.”
“예?”
부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한쪽 입꼬리를 들썩거렸다.
부경에게서 시선을 뗀 강은 저에게서 멀어져 간 인파를 바라보았다. 도성으로 나가는 이들과 도성 안으로 향하는 이들을 번갈아 보던 그는 체념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생전 맡아 본 적 없는 향이건만 잔잔한 호수 같았던 마음을 어찌나 뒤집고 간 것인가.
그저 막연하게 찾아온 궁금증이었다. 강은 그저 그 생경한 향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이토록 별거 아닌 것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강은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겨서라도 미련을 버려야 했다.
꽤 그럴싸한 차림새를 한 강이 봉놋방의 장지문을 열었다. 강이 쪽마루에 서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부경이 벌떡 일어났다.
“부경이 네 원대로 옷을 갖춰 입었으니,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겠다.”
부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부경이 인내하는 방법이었다.
“우선 네 호패를 내게 다오.”
“예?”
부경이 눈을 번쩍 떴다. 강이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낸 채 활짝 웃고 있었다.
“너와 내 호패를 바꾸자.”
떨떠름한 부경의 반응에도 강은 제 소매 속에 넣어 둔 옥으로 만든 호패를 꺼내 들었다. 부경의 얼굴에 점점 어둠이 깔렸다.
옥패는 오직 범랑국의 왕족만 들고 다닐 수 있었다. 강의 옥패에는 기린이 새겨져 있었는데, 기린은 임금의 차자인 대군을 뜻하는 것이었다.
왕족이 아닌 이가 옥패를 소지할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우니 부경에게는 말이 되지 않는 억지였다. 기어코 제 목숨 줄로 장난을 치겠다는 것인가?
“자, 너의 호패를 내게 다오.”
“안 됩니다.”
“어서.”
“그럴 수 없습니다.”
부경이 단호하게 말했어도 강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기어코 부경의 호패를 받아야겠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부경은 질색하며 강에게서 떨어졌다.
“이것을 들고 가면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는지 몰라서 내빼는 것이냐?”
“그 대우는 제가 받을 게 아닙니다.”
“내가 너에게 나눠 주고 싶은 것이다.”
“받고 싶지 않습니다.”
심술이 난 듯 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부경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내놓아라.”
“안 됩니다.”
한사코 부경의 입에서 거절이 나왔다. 강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바꾸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하찮은 대우를 받은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좋은 대접을 받게 해 주려고 했건만.”
강이 부경을 보며 혀를 찼다. 곧이어 강의 걸음이 떨어졌다. 부경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쫓았다. 강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주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근래 쭈글탱이만 보다 눈 호강을 했다며 요란을 떠는 주모를 지나치며 부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분이 뉘신 줄 알고 감히.
주막을 나서 길가에 접어든 강이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도성으로 들어가면 나는 성현관(聖賢官)으로 갈 것이다.”
부경은 길거리에서 난리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며 속으로 탄식했다. 옥패를 들고 억지를 부리던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 현란한 수작질에 매번 당했던 부경은 가늘게 뜬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성현관은 유생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꼭 유생만 들어가라는 법이 있나.”
“예,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버드나무 골로 불러내면 되지.”
버드나무 골은 성현관에서 사역하는 일꾼들이 사는 동네였고, 강은 며칠 전부터 그곳에서 파는 수육이 먹고 싶다며 성화를 부렸었다.
부경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에 안색이 좋지 않았다.
“도성으로 오신 이유를 잊으셨습니까?”
부경이 나긋한 목소리로 강을 타일렀다.
“알다마다. 붙잡히지 않았다면 안 와도 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지.”
“바로 입궐하셔야 합니다.”
“지금 막 도착했다. 여독을 풀 겸 벗을 만나러 갈 것이다.”
결국 강을 포기한 부경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제가 모셨던 왕세자보다도 고집이 셌으니, 강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싶었다.
도성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속에 파묻힌 강을 지키기 위해 부경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 * *
“뭐!”
강은 버드나무 골에서 가장 유명한 주막으로 사촌 동생인 윤권호를 불렀고, 막 술상이 나온 참이었다.
다른 벗의 부재의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택원 사형이 여묘살이에 든 지도 곧 일 년이 됩니다. 대군 대감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도성 밖에 나가 계셨는지 아시겠지요?”
권호의 눈초리에 강은 억울함을 호소하다 들고 있던 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정말 내가 서너 달 전에 왔다 간 줄 알았네!”
“예, 그러시겠지요. 한데 아십니까? 대군 대감께서는 세자 저하의 덫에 빠지지 않으시면 도성에 오지 않으실 분이십니다.”
“어허!”
강이 권호에게 호통쳤다. 권호는 듣는 둥 마는 둥 한 얼굴로 성현관에서는 접하기 힘든 수육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참 무심하지. 택원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어찌 내게 연통 하나를 보내지 않았어….”
그 말에 곁을 지키던 부경이 헛숨을 내쉬었고, 우물우물 수육을 씹던 권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뺨을 콕콕 찔러 대자 강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권호의 탓을 하기에는 찔리는 게 많았다.
“내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이라도 가 봐야겠네.”
“제 얘길 또 흘려들으신 것이지요? 택원 사형은 지금 광풍에 계십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강이 허탈하다는 듯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경은 억지 티가 물씬 풍기는 모습으로 강의 곁에 서서 걱정하는 시늉을 했다.
“벗이라 주야장천 떠들어 대면 무엇 하나. 그리 힘들 적에 위로하나 해 주지 못하였는데….”
젓가락으로 수육을 한 점 더 집어 든 권호가 눈을 깜박이며 강을 보다 수육을 내려놓았다.
꺼칠꺼칠한 멍석 위에서 잠이 들 택원을 떠올리니 씹어 삼킨 고기가 다시 덩이지는 것 같았다.
“사형께서는 온종일 움막에 처박혀 설움에 북받친 곡을 하고 계시겠지요. 택원 사형을 생각하면 제 마음도 아립니다.”
“나 역시도 마음이 좋지 않구나.”
강은 미처 들이켜지 못한 곡주를 넘기기 위해 술잔을 들었다. 부경은 그런 강을 멀뚱히 바라볼 뿐 말리지 않았다.
“그래도 사형은 걱정이 없으실 것입니다. 사형은 이제 전시만 보면 되시는데, 저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귤이 진상되는 겨울이 되면 성현관에서는 황감제라는 시험을 치르는데, 황감제에서 수석으로 합격하면 과거의 전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도록 직부전시의 권한을 주었다. 강은 그것을 이룬 자신의 벗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안쓰러웠다.
술병을 집어 든 강은 좋지 않은 낯빛으로 권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큰일입니다. 큰일이지요. 저는 운이 좋아 성현관에 들어갔지마는 여태 윤씨 가문에 먹칠만 해 대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저만 보시면 한숨부터 지으십니다. 대군 대감, 제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권호가 시무룩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술을 들이켜는 권호를 보던 강은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꾹 머금었다.
“중전마마께서 이번 별시에서 좋은 성적을 내라 하시며 약과를 하사하시었습니다. 약과가 참 맛있기는 했지요. 하나 더는 중전마마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막내아들을 걱정하는 외숙을 보았으니, 강은 권호의 근심을 이해했다. 그러나 제 입에 풀칠하는 것도 버거운데 누가 누구를 보살피겠는가. 손위랍시고 권호를 구박하는 것도, 위로해 주는 것도 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강은 속상해하는 권호를 보다 부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좀 해 보라는 강의 뜻을 알았지만 부경은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한 발자국 멀어진 부경에게 송곳 같은 눈빛이 꽂혔다.
이윽고 갑자기 들려온 울음소리에 강과 부경의 눈이 커졌다.
“지금 우는 건가?”
“저는 정말 집안의 수치입니다. 저 같은 머저리는 성현관에서 내어 주는 밥도 먹으면 안 됩니다!”
오랜 유랑의 여독을 풀겠다고 버드나무 골로 온 것인데 졸지에 권호에게 시달리게 생기자 강은 난색을 떠올렸다. 이러려고 온 길이 아닌데….
멀찍이 떨어져 있던 부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강이 부경을 재촉했다. 부경은 모르는 체하며 강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부경아, 네가 이곳에 남아 권호를 상대해 주어라.”
“예?”
제가 흘린 코웃음을 벌하겠다는 심보였다. 부경은 당치도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경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듯 강은 바닥에 벗어 둔 신발을 신었다.
“아무래도 나는 회은동으로 가 봐야겠다.”
회은동이라면 택원의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부경은 강이 그곳에 혼자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렸을 적부터 부경은 질질 짜길 좋아하던 권호라면 질색부터 했기에 버드나무 골에 남고 싶지 않았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부경은 정색하며 강에게로 다가갔다.
“그럼 권호는 어찌하고? 잘 먹던 수육도 먹지 못하고 저러고 있지 않느냐. 저 아이를 그냥 두고 가라고?”
“저는 대군 대감의 호위입니다.”
강의 눈길이 권호에게로 향했다. 아우는 저를 두고 가지 말라는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자네도 함께 갈 텐가?”
“저요? 싫습니다. 가끔 사형의 부친을 마주치는데, 그분의 싸늘한 눈빛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그 댁을 찾아가자고요?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권호가 고개를 저어 대자 부경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럼 대군 대감께서는 이곳에 계십시오. 회은동에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강에게 권호는 친아우와 같았지만, 여기서 술이 더 들어간다면 관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저와 함께 세상을 떠돌아다니겠다며 설레발을 칠 것이었다.
권호를 다독여 줄 택원이 없으니 강은 술에 취한 그를 혼자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가려거든 내가 가야지!”
강과 부경은 서로 이곳에 남으라며 눈빛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의 침묵에 눈치를 챈 권호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홀로 이곳에 남아 술잔을 기울이다가 들어가면 됩니다. 가시려거든 고이 가시옵소서.”
애먼 불똥이 부경에게로 쏟아졌지만 부경은 강의 비난 어린 시선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가셔도 됩니다. 참말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가십시오.”
손이 맥없이 흔들거렸다. 갈 테면 가 보라는 손짓에 강은 마음이 걸려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지만, 부경이 먼저 주막을 나서려는 낌새를 보였다. 강은 질 수 없다는 듯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그리고 떠나시려거든 제게 연통을 남겨 주시는 걸 잊지 마시고요. 그러다 마음이 내키시거든 저를 데리고 가 주셔도 됩니다.”
벌써 취한 것인가? 권호의 하소연에 멈춰 선 강이 홀로 남은 아우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공부하는 머리가 없어서 그렇지, 성품은 훌륭한 아이인데…. 참으로 안쓰럽군.”
“그리 안쓰러우시면 남으셔서 위로를 해 주시지요.”
“저 녀석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꼴을 또 보라고? 어림도 없다.”
강이 질색하며 머리를 저어 댔다. 그러곤 더는 권호에게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는 듯 버드나무 골에서 빠져나갔다.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사람이 그 집의 솟을대문을 본다면 그곳을 궁궐이라고 착각할 것이었다. 강은 집주인의 높지 않은 품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대문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강이 고갯짓을 하자 부경이 나서서 대문을 두들겼다. 대문 안에서 복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빗장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으로 익숙한 이의 모습이 보였다.
“나리!”
집을 찾아온 손님이 강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린 홍 씨가 외쳤다. 강은 그의 외침에 입꼬리를 늘려 웃음을 지었다.
“잘 지냈는가?”
“예, 예…. 쇤네는 무탈하였지요. 한데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혹 세준 도련님의 소식을 듣지 못하신 것입니까?”
얼떨떨해하는 홍 씨의 얼굴을 보며 강은 고개를 저었다.
“내 택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막 들었지 뭔가. 늦은 건 아닌 듯하여 이리 한달음에 달려왔네.”
“아이고…. 그러셨습니까?”
이쯤 되면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문을 막아선 홍 씨가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강은 꼼짝하지 않고 문을 지키는 홍 씨를 의아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고….”
강은 홍 씨의 난색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혹시나 했건만 역시나였군.
집에 붙어 있기를 좋아하는 세준에게 택원(宅院)이라는 별호를 붙여 준 게 강이었다. 김세준은 강의 숙적인 김윤덕의 독자였다.
강은 권호가 말했던 김윤덕의 멸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저에게 내비치는 멸시를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제 아들이 잘못된 길로 가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김윤덕은 조정의 파벌인 경파(硬派)에서도 유별난 인물이었다. 말단직에서 시작해 당상관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가 무엇을 했던가.
무고한 사람을 짓밟고 권력에 올라선 자가 김윤덕이었다. 경파가 독차지하고 있는 권세를 김윤덕이 쥐여 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윤덕을 강을 혐오하고 멸시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벌레보다 못한 천것으로 보았다. 그뿐인가. 경파 전체가 강의 존재를 티끌로 여기며 눈엣가시로 콕 찍어 지목했다.
앞길에 방해되는 돌, 그보다도 더 하찮은 존재가 바로 이강이었다.
강 역시도 김윤덕을 그리 보았다. 경파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위선자들을 그리 여겼다.
“내가 오거든 집 안에 들이지 말라는 밀명이라도 떨어진 것인가.”
홍 씨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강을 보았다. 제 주인이 그의 출입을 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왕족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놀랄 만도 했다.
놀라기만 했나, 당장에라도 의금부 나장이 달려와 제 몸뚱이에 오라를 지우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강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하면 어찌 내게 이리 야박하게 구는 것인지.”
“아이고, 나리!”
홍 씨가 뒤로 붙잡고 있던 문짝을 내던지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요. 그리 말씀을 하시면 쇤네의 모가지가 날아갈 것입니다요! 나리, 부디 쇤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강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옆으로 비켜나 있던 부경이 나서서 홍 씨를 부축했다.
“농담 한 마디를 하지 못하게 하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마땅하겠지?”
기로에 선 홍 씨는 곡소리를 멈추고 강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길을 터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이제 형판의 자리에 올랐다 들었네. 그렇다면 숙인(淑人)은 정부인(貞夫人)에 봉작되었겠군.”
처세에 어찌나 능한지 강은 애처로운 눈빛을 꾸며 냈다. 그것을 보는 부경은 기가 찼지만, 안주인을 들먹거리는 통에 홍 씨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갔다.
“정부인이 내게 그냥 벗의 어머니이기만 한가. 중전마마의 어릴 적 친우셨네. 중전마마의 애틋함이 어찌 나와 다르다 할까. 나 역시도 생전 정부인이 애틋했네.”
강의 한탄을 목도한 홍 씨는 아예 고개를 숙여 눈길을 피했다. 부경은 가식적인 강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겉으로 표하지는 않았다. 홍 씨가 제 발로 서자 부경은 그에게서 떨어졌다.
“정녕 안 된다는 것인가?”
홍 씨는 번갯불처럼 떨어졌던 주인의 명령을 떠올렸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집 안에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 명령이 떨어진 이유도 물론 알고 있었다.
홍 씨는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렸다. 주인의 명을 어길 수도, 기껏 집으로 찾아온 왕족을 문전 박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은재의 부재가 떠올랐다. 지금이 적기였다.
“사당에 아직 위패를 올리지 않았으나 신위가 있습니다. 어서 그곳으로 가시지요.”
돌연 안으로 들어오라는 홍 씨를 보며 강과 부경은 눈을 깜박거렸다. 홍 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그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어리둥절해했다.
강이 피식거리며 문간을 넘었다. 그리고 앞서가는 홍 씨를 응시하며 부경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 반응을 어찌 생각해야 하는 것이냐.”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은 감도 있었기에 부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렁이의 속은 까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법이지.”
강 역시도 속을 까 보지 않는 한 알기 힘든 사람에 속했다. 부경은 오묘한 눈길로 강을 보다 아주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협문을 넘어 사당 뜨락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집 안에서 들려오는 복작거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에 서서 강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담벼락 너머에 자리한 소나무 군락을 보며 그는 옛 집주인의 안목에 감탄했다.
“집안 식구도 아닌 내가 억지를 부린 게 아닌가 싶네.”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왕족이지 않던가? 홍 씨는 왕족을 기만한 죄로 옥사에 갇히고 주인의 명성에 먹칠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유난히도 재촉이 심해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강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신위 앞에서 예를 갖춘 강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바람이 협문 주변에 심어진 소나무를 건드렸다. 솔 향을 머금은 바람이 곧장 강을 향해 날아왔다.
강은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마음을 뒤흔들고 사라졌던 그 향이었다. 그러니 우연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쥘 운명이었다.
강은 향에 취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떼었다. 그저 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게 옳다는 듯 강의 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나, 나리!”
홍 씨는 갑작스러운 강의 모습에 놀라 외쳤고, 제 할 일에 충실한 부경은 보폭을 줄인 채 강의 뒤를 따랐다.
걸음은 협문에 닿기 전에 멈췄다. 이제 막 협문 앞에 발을 디딘 사내와 눈을 맞추자,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또다시 강을 에워쌌다.
바람에 섞인 향이, 강과 시선을 맞춘 이가 뿜어내는 향이 강을 휘감았다.
강을 따라 멈춘 부경 또한 놀란 눈치였다. 강과 부경은 말없이 시선을 맞췄다. 동시에 두 사람의 눈길이 협문 앞에 선 이에게 닿았다.
“아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홍 씨가 강에게로 뛰어갔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왜 하필 이곳에서 마주친 것일까!
홍 씨는 감춰야 하는 진실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게 무서웠다. 남의 집에서 빌어먹는 삶에 무슨 미련이 있을까. 그저 제 눈에 보이는 은재가 걱정되어 강의 곁으로 내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은재가 홍 씨에게 물었다.
“아범, 이분은 누구시기에 어찌 이곳에 계신 것인가.”
낯선 이들이야 누군지 알아보면 되는 일인데, 저를 보는 그들의 눈초리와 사색이 된 홍 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련님….”
홍 씨는 안절부절못하며 강과 은재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은재를 바라보며 서둘러 이곳에서 떠나라는 듯 눈짓을 했지만, 못 알아들었는지 은재가 협문을 넘었다.
“돌아가신 마님의 조문을 오신 손님이십니다….”
계획을 바꾼 홍 씨의 표적은 강이었다. 누구든 하나라도 당장 이곳에서 떠나야 했으니, 아무래도 손님이 나가는 게 옳다고 여겼다.
강의 헛기침에도 홍 씨는 슬그머니 은재를 협문 쪽으로 몰았다. 그러나 홍 씨에게 떠밀려 뒷걸음치던 은재가 옆으로 쏙 빠져 버리자, 홍 씨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애석하게도 강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내 이름은 이강입니다.”
통성명을 하자는 듯 냅다 이름을 내지르는 탓에 홍 씨의 얼굴이 다시 새파랗게 질렸다.
“도련님, 이분은….”
서둘러 나선 게 무색하도록 강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손을 올렸다. 홍 씨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제 식구를 마음대로 부리는 이가 좋게 보일 리가 있나. 은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주인 없는 집에 손님을 들인 것으로도 부족해 사당으로 오다니. 당장 대문으로 모시게.”
입하를 지난 지 오래였고, 소만을 앞두고 있었다. 어중간한 어느 계절이었건만 서릿발 섞인 듯한 싸늘함이 난데없이 사당 뜨락에 몰아친 것 같았다. 강은 그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입니까?”
오묘한 향의 실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찾지 못했던 것을 찾아냈기에 궁금증은 풀렸다만, 개운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궁금증이 강의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리….”
위기를 모면하지 못한 홍 씨는 손을 달달 떨어 대며 금방이라도 은재에게 뛰어들 것같이 으르렁거리는 강을 말렸다. 두 사람의 등살을 이길 수 없어 그 자리에서 자진하라고 하면 응당 그럴 수 있을 만큼 곤욕스러웠다.
“누구기에 주인 없는 집에서 그쪽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까?”
“이곳은 사당입니다. 가족 외에는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에 드셨으니, 공께서는 무례를 범하신 것입니다. 남의 식솔에게 그리 함부로 대하시는 것 역시 무례입니다.”
강은 제 앞에 서서 또박또박 대답하는 사내를 골똘히 응시했다.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얼추 비슷하구나.
제 앞에 있는 이를 보며 그는 세준을 떠올렸다. 생김새도 성정도 비슷하고 품행 또한 닮았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은 그의 얼굴에 있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고 했다. 그래야 제가 원하는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추측만 몸집을 키우고 있을 뿐이었다.
“무례였다면 용서하십시오. 하나 모든 일에는 사정이 있는 법입니다. 그대는 어찌 내 사정을 모르면서 내게 모욕을 주는 것입니까?”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마주한 강은 입꼬리 한쪽을 씩, 올리며 더욱더 노골적인 미소를 지었다.
마주한 눈은 마치 어디서 이런 종자가 튀어나온 것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게 또 재미나 강이 키득거렸다.
“제가 무례를 범한 이의 사정까지 알아야 합니까?”
별안간 벌어진 팽팽한 기 싸움에서 두 사람은 누구도 먼저 물러나지 않았다.
이곳이 저의 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은재는 낯선 이에게 눌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목에 힘을 빳빳이 주며 낯선 이를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무례를 범하게 된 속사정을 헤아려 보자는 것이지요.”
제가 만들어 놓은 경계를 허물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짓는 사내를 보며 은재는 질색했다.
“택원에게 아우가 있다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지만, 그대가 주인 행세를 하는 것에도 다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신경을 가라앉히려는 듯 적당히 능글거리며 웃는 그 때문에 은재는 이를 악물었던 턱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눈을 매섭게 뜨고 상대를 노려보아도 저는 범인 척하는 괭이에 불과했다.
웃음이라는 게 그랬다. 방심하는 사이 틈을 노리고 스며 들어와 마음을 열게 했다.
부족한 것 없이 잘 자랐으면서도 항상 정이 필요했기에, 은재는 당장 눈앞에 있는 사내가 아닐지라도 저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들에게 마음이 약했다. 저에게 친절한 것들만 보면 마음을 주지 못해 안달 냈다.
모두가 그런 저를 걱정하는 것도 알았다. 그랬기에 은재는 지금 눈앞에서 저를 조롱하는 이에게만큼은 마음을 열지도, 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곳의 주인과 어떤 사이입니까?”
마주 보던 사내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졌다. 은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싸한 기분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표정을 잘 꾸며 내는 사람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그가 계속해서 저를 파고들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아범, 어서 모시고 나가시게.”
솟아난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은재는 발을 틀었다.
그때였다.
“윽!”
툭 튀어나온 단발의 신음과 함께 꼿꼿이 서 있던 강이 뒷걸음을 쳤다. 강의 신음에 협문으로 다가가던 은재가 걸음을 멈췄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홍 씨가 유난을 떨었다.
은재가 다시 강에게로 발길을 돌렸을 때, 강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보았다는 듯한 눈으로 은재를 노려보았다.
마치 고약한 악취가 난다는 듯 노골적인 비난이 섞인 시선에 은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포 소맷자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이를 보며 은재는 눈살을 찌푸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 짧았던 찰나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으레 불어오던 늦은 봄바람이 저를 스쳐 지나간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부경은 손을 내밀어 강을 부축했다. 천하의 강이 바람 하나로 휘청거렸다. 이런 일도 있구나.
협문을 넘었던 은재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저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듯한 태도를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불청객을 내쫓아야겠다던 다짐과 달리 은재는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도망치듯 모습을 감췄다.
“저자는 누구인가.”
협문에서 사라진 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 강은 그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다리에 힘을 주고 제대로 섰다.
홍 씨는 강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번갯불처럼 버럭 내지른 호통에 홍 씨는 울상을 지었다.
“저… 저분은 안방마님의 친조카십니다….”
“정부인의 조카라고?”
“예. 안방마님께서 별세하시기 전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오셨지요….”
부경은 이번에도 나서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홍 씨의 모습이 수상쩍어 부경의 눈길은 줄곧 그에게 닿아 있었다.
“정녕 정부인의 조카가 맞느냐.”
처음 강이 큰도령과 함께 이곳에 왔을 적, 그가 왕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서글서글한 모습에 매료되었던 홍 씨였다. 그러나 강상의 법도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걸 증명하듯 버럭 내치는 호통에 홍 씨는 오금이 달달 떨리는 공포를 느꼈다.
“예, 확실하지요….”
강은 무방비한 저를 급습했던 향을 떠올렸다.
그깟 향이 어떻게 흥미를 툭 하고 건드렸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참으로 재미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잔향이 머무는 듯한 협문을 바라보며 강은 입꼬리를 잔뜩 추켜올렸다.
사저가 있는 안수동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느릿했다. 여유롭게 길을 걷던 강이 뒤따르던 부경에게로 돌연 몸을 틀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부경은 갑작스럽게 날아든 물음에 답을 꺼내지 않고 고심하기를 택했지만, 강이 원하는 답은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강의 생각이 제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부경은 제발 강의 흥미가 거기서 그치길 바랐다.
“그 도령은 김윤덕의 아들이 분명할 터.”
제 예상에 딱 맞아 떨어지는 답에 부경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단호한 눈으로 강을 보았다.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깊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강은 질색하는 부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그 댁 행랑아범이 정부인의 친조카라 했습니다.”
“뭔들 꾸며 내지 못하겠느냐.”
강이 관심을 갖는 건 그 도령이 아니라 김윤덕이었다. 부경은 강이 김윤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았기에, 지금이라도 그가 변덕을 부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으면 했다.
그러나 강은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화마에 뛰어들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강을 집어삼키고 몸집을 키운 불길은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이들까지 먹어 치우려고 할 것이었다.
“무익합니다.”
“무익하다…?”
부경은 피식거리는 강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내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광풍 김씨 집안은 음인 자손이 귀하다는 소문이었던가? 그 소문을 접했을 때 나는 그리 생각했다.”
강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을 보자 부경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적나라하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부경은 강의 목숨 줄이 끊기지 않게 보호하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강이 내리는 모든 결정을 지켜보기만 하는 방관자였다.
“감추거나, 버렸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죽였거나.”
부경의 눈길이 강에게서 떨어졌다.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싸한 추측에 관심을 가질 만도 했지만, 부경은 끝까지 회피할 셈이었다.
“그 도령을 보니 죽였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져. 버리고 죽이지 않았으니 김윤덕을 닮은 얼굴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겠지.”
“대감.”
“정부인 안 씨의 고향이 현천이다.”
마지못해 다시 강과 시선을 맞춘 부경은 그만하라는 듯한 눈으로 강을 보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동요할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는 김윤덕이었다. 조정의 당파 중 급물살을 타고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경파의 추종자였다. 범랑에는 김윤덕과 연결된 이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질서가 존재했으나 강은 김윤덕의 심기를 끊임없이 건들려고 했다.
치기 어린 도발.
“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치 고민도 없이 대꾸하는 부경의 모습에 강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그러나 강은 거기서 물러나지 않고 능글맞게 눈웃음을 치며 부경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현천에 떠다니는 소문 몇 개만 건져 오거라.”
강은 변덕 심한 장마철 계곡처럼 요동쳤다. 과연 급물살을 탄 게 경파만의 일일까? 강의 웃음을 보며 부경은 속으로 질색했다.
“네가 그리해 준다면 또 아느냐? 내가 널 세자익위사로 돌려보낼 것을 고려할지도.”
부경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고 강은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연신 싱글벙글했다. 결국에는 부경이 제 뜻에 따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 웃음이 안 나올 리가 없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출발하거라.”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도 강에게는 명을 받들겠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러셨습니까?”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도 지쳐 버린 듯 부경의 말투에 힘이 없었다.
강은 그저 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이강이 불어오는 바람에 주책없이 다리가 풀렸으니, 그 꼴을 본 부경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느끼지 못한 것이더냐?”
“느꼈습니다. 하나 미약했습니다.”
강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네게는 미약했던 것이 나에게는 그렇지 않더구나.”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부경은 강이 보였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 고약하고 능글맞은 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내가 그자의 외격소(外激素)를 어찌 느꼈는지가 아니다.”
강은 싱긋 웃어 보일 뿐 별 다른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부경은 그의 속을 까 보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좇았다. 심오한 부경의 얼굴을 보면서도, 저의 속을 파헤치려는 확실한 심보를 보면서도 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은 유난히도 짙었던 그 외격소를 떠올렸다.
외격소는 양인과 음인에게서만 나타나는 향이었다. 그것은 서로의 성질을 구별 짓는 데 용이하기도 했다.
외격소로 짝을 찾는 사람들도 있으나 강의 생각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그자가 나의 적이 될지, 아닐지가 중요하지.”
강이 몸을 휙 돌렸다. 가죽신의 바닥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원을 그리듯 넓게 퍼진 도포 자락이 부드럽게 휘날리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부경은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강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도련님.”
귀한 손님을 배웅한 홍 씨의 발길이 별채에 닿았다.
꼭 닫힌 문을 보며 연신 그 안에 있는 주인을 불러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들리지 않았다.
디딤돌 위에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니, 방의 주인은 필시 안에 있을 것이었다. 허락도 없이 안으로 쳐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라 홍 씨는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러 댔다.
“도련님, 좀 나와 보셔요.”
홍 씨의 아내인 용천댁도 기단 아래에 서서 은재를 불러 댔다. 그 소리가 얇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가지 못한 듯 안에서는 작은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맞췄다. 결심을 내린 듯 용천댁이 고개를 끄덕이자 홍 씨는 동그란 주물 손잡이를 잡았다.
“도련님, 쇤네 들어가겠습니다. 아무 말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노여워 마십시오.”
홍 씨가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별채의 방은 좁은 행랑방과 엇비슷하고 사람 사는 것 같지 않게 황량했다. 무엇보다 그곳에 있어야 하는 도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홍 씨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허망한 눈길로 용천댁을 바라보았다. 용천댁은 대청마루에 무릎을 딛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고, 곧 있으면 대감마님께서 돌아오실 텐데…. 어찌해요….”
홍 씨는 근심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주인에게 밉보인 도령은 관청으로 출근한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눈치를 보지 않고 대문을 넘나들 수 있었지만, 주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불호령만 떨어지면 다행이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기분 탓일까. 홍 씨와 용천댁은 퍼렇게 질린 얼굴을 마주한 뒤 지금의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고민했다.
곳곳에 퍼져 집안일을 하는 종복들을 불러다 은재를 찾아 나서면 될 일이었지만, 은재가 넓은 집 안에서 머물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종복들이 바깥으로 나가 도령을 찾아 헤매다 보면 그 사실이 주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없었으니, 홍 씨와 용천댁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체념한 홍 씨가 마루에 걸터앉아 제 짚신을 주워 신을 때였다.
“도련님!”
중문을 통해 별채 마당으로 들어선 은재를 보며 용천댁이 외쳤다. 고개를 번쩍 든 홍 씨는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못하고 은재에게로 뛰어갔다.
“도련님,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천양으로 왔을 때부터 도령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떠나지 않았다. 어두운 안색에 홍 씨는 저릿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작게 앓았다.
“어찌 그리 무례한 자를 함부로 집에 들인 것인가….”
나지막한 목소리에 깃든 설움까지 알아챈 홍 씨는 울상을 지었다. 홍 씨에게 대충 사연을 전해 들은 용천댁마저도 은재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분은 세준 도련님의 친우이십니다. 그리고….”
집안일을 하는 겸인들에게 시무룩해진 모습을 보이면서 체면을 깎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은재는 고개를 들어 홍 씨를 봐야 했다.
“그분은… 임금님의 차자이신 효원 대군이시지요….”
은재와 눈을 맞춘 홍 씨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끔찍한 일을 상상하며 울먹였다.
“지금 뭐라 했는가…?”
은재는 두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대군…?”
숨을 꼴깍 삼켜 봐도 숨통이 꽉 막혔는지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은재는 제가 사당에서 무얼 했는지 되짚어 보았다. 저를 비난하는 눈빛만 기억날 뿐, 제가 부린 패악은 떠오르지 않았다.
홍 씨와 용천댁은 천천히 질려 가는 은재의 낯빛을 바라보다 땅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앞으로 벌어질 수난을 예고하는 듯 무거운 침묵만이 별채 주변을 배회했다.
* * *
부엌간에 자리한 이들 대부분이 삯을 받으며 일하고 솟을대문 옆 작은 문을 통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꾼이었다.
유일하게 이 집에 머무는 용천댁은 문간 앞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참말로 우리 대감마님 같으신 분이 어디에 계시겠어요?”
들기름에 호박전을 부치던 여종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상단의 자제와 혼담이 오간다던데, 용천댁은 뭐 들은 거 없소?”
이곳의 속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이 용천댁밖에 없어 그에게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이 다시 용천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기씨는요?!’
‘아기씨는… 돌아가셨네….’
‘아니… 조금 전만 해도 우렁차게 우시던 분이 어째서요….’
‘이녁, 목숨 보전하고 싶걸랑 아기씨는 입에 올리지 말게!’
저도 한때는 새로운 주인의 성품을 따를 자가 없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갓난아기를, 그것도 서릿발 내리는 한겨울에 내다 버리듯 내치는 이의 성품이 어찌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용천댁은 주인을 더는 믿지 않았다. 부군인 홍 씨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다물고 있던 용천댁이 이상했는지 조잘조잘 떠들어 대던 아낙들의 눈길이 용천댁에게 꽂혔다.
“아줌마?”
저를 부르는 여종의 목소리에 용천댁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찬이나 잘 만들게!”
소문은 발 없이도 산과 들을 넘나들었다. 그렇게 퍼지는 말속에는 저와 제 부군의 목숨 줄도 섞여 있었기에 용천댁은 버럭 화를 냈다. 용천댁의 서슬 푸른 말씨에 그곳에 있던 아낙들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한 아낙이 물에 불린 고사리 뭉치를 팔팔 끓는 들기름 속으로 내던졌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부엌간에 가득 차자 모두 입을 다물고 침만 꿀떡꿀떡 삼켰다.
부엌간 귀퉁이로 자리를 옮긴 용천댁은 근심이 가득 깃든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지켜보았다.
부디 오늘 사당에서 일어났던 일이 주인의 귀에 들어가질 않기를, 불쌍한 도련님이 이곳을 무탈하게 떠날 수 있기를 용천댁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저녁상이 나간 사랑방에 자리한 홍 씨는 기름종이가 깔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불안한 마음으로 주인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주인은 희뿌연 연기만 내뱉고 있었다.
“낮에 대군이 왔다 갔다지.”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던가. 홍 씨는 슬며시 바닥에 닿아 있던 눈길을 들어 주인의 눈치를 보았다.
“대군이 무엇을 보았는가.”
잔뜩 한이 서린 겨울 추위가 덮친 듯 홍 씨는 오한이 든 사람처럼 바르르 떨었다.
“현천 도련님을 뵈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쇤네의 잘못입니다…. 도련님께서는 잘못이 없으십니다.”
김윤덕은 홍 씨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부리를 문 입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묵직한 연기가 목구멍으로 들어왔다 내뱉어지며 허공에서 흩어졌다.
“염려치 말게.”
홍 씨는 짐짓 놀란 눈으로 김윤덕을 보았다. 먹잇감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사나운 짐승 같은 눈빛에 홍 씨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문제가 되지 않을 걸세.”
이십 년이 훌쩍 지나는 동안 주인으로 섬겼으니 홍 씨는 주인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문제가 될 만한 여지를 없애 버린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어찌 주인의 생각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홍 씨는 진땀이 솟아나기 시작한 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일 남강으로 가 소식을 묻고 오게.”
지난겨울, 남강의 상단과 적극적으로 혼담이 오갔다.
객주의 아들은 여름이 되기 전 주국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기로 했으며, 은재는 올가을 혹은 겨울에 혼례를 치를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일이 진행되어야 하네. 알아들었는가?”
오랜 시간 동안 김윤덕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이와 소리 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미천한 신분으로 주인이 건 사활을 알 리 없었던 홍 씨는 고향을 떠나 내쫓기듯 주국으로 가야 할 은재의 처지가 안쓰러울 뿐이었다.
“예, 영감마님.”
그러나 어찌 나설 수 있을까.
홍 씨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김윤덕을 향해 절을 했다.
아주 잠깐 저의 참담한 마음을 현천에 알려야 할지 고민했지만, 은재가 이곳에 볼모로 잡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미련퉁이가 아니었다.
그래, 차라리 멀리 떠나시는 게 도련님께는 더 나은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 * *
꿈을 꿨다.
저를 쫓아오는 지독한 추격자들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험준한 산을 뛰고 또 뛰는 꿈이었다.
숨이 턱 끝에 맺히고 허파가 쪼그라들어 펴지지 않을 즘, 강 앞에 절벽이 나타났다.
그 절벽은 추격자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와 같았으나, 강에게는 희망이기보단 절망에 가까웠다.
죽어야 끝날 수 있는 것인가.
강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곧 있으면 제 앞에 멈춰 설 추격자들을 기다렸다.
머지않아 숨결이 차분해진 강의 앞에 적이 나타났다. 살기를 지닌 칼끝이 강에게 겨눠졌다.
강은 눈을 지그시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죽음은 쉽게 닿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이들이 강을 에워쌌고 적의 칼은 강을 지키던 이들을 겨누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몸에서 떨어져 나간 목이 붉은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군의 신음과 함께 사위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잔혹한 순간에도 강은 그들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강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서 저를 지키려고 해도 그들의 끝은 죽음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강을 지키려고 했던 이마저도 죽음을 맞게 될 것이었다.
적들은 순식간에 하나 남은 아군의 사지를 밧줄로 동여맸고, 사방으로 퍼진 이들은 신호에 맞춰 밧줄을 잡아당겼다. 뼈가 비틀어지고 힘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그러나 앳된 얼굴로 강을 바라보던 이는 평온한 모습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모든 게 끝났다. 아니, 곧 끝날 것이었다.
강은 기쁘지 않았으면서도 적들에게 습관처럼 떠오르는 미소를 내보였다. 그들에게 제 삶을 거둘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꿈을 끝낼 수 있는지 알고 있던 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깊은 강물에 빠져 질식해 죽기만을, 한시라도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릴 즘, 누군가가 제 앞에 나타났다.
강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이를 눈에 담기 무섭게 아래로 잡아당기던 물살이 사라지고 막혔던 숨이 트였다. 긴장감이 뒤죽박죽 뒤섞여 음습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
강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늘 같은 곳, 달라지지 않는 적,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공존하던 세상에 새롭게 물든 건 빛이었다.
화창하고 푸른 숲 한가운데에 선 강은 눈앞의 이와 눈을 맞추었다. 몸을 감싸고 있던 나쁜 기운이 모두 사라진 듯 한없이 가볍고 상쾌했다.
기분이 좋아진 강은 저도 모르게 진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에게로 뻗친 그이의 손을 향해 제 손을 내미는 순간, 눈앞에 나타났던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강은 눈을 깜박이며 사라진 이를 찾았다. 그리고 곧 현실을 깨달았다.
꿈은 항상 반복되었기에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강은 크게 겁내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른 때와는 달리 꿈에 새롭게 나타난 존재로 인하여 강은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느꼈다.
그래서 이상했다. 실로 놀랍기도 했다.
“미쳤구나.”
강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꿈 하나로 혼란에 빠졌다.
머지않아 좋지 않은 꿈이고 불길한 징조라며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늘 같은 악몽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살그머니 강의 가슴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안수동 사저의 겸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의장에 넣어 둔 흑단령과 서대를 꺼내고 관모를 챙겼다. 흑단령은 한 치 구김도 있어선 안 됐고 서대는 틀어지지 않아야 했으며 관모에 쌓인 먼지는 한 톨도 용납하지 않았기에, 의대를 만지는 손길은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정성이 깃든 손길에 마침내 구석에 처박혀 있던 강의 관복이 제빛을 발휘했다.
그러나 의대를 갖춰 입고 대문간에 선 강의 표정은 떨떠름 그 자체였다. 부경은 무심한 얼굴로 강의 뒤를 바짝 쫓았다. 모두 강이 다른 길로 새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잊지 말고 현천에 다녀오거라.”
“잊지 않았습니다.”
시종일관 불만이 가득했던 강은 찌푸린 눈으로 부경을 노려보았다. 부경은 시치미를 떼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끝마다 따라붙는 말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한다.”
“예.”
강이 대문간을 넘자 부경은 당연하다는 듯 뒤를 따랐다. 돌연 걸음을 멈춘 강이 부경을 막아 세웠다.
“한눈팔지 않고 곧장 궐로 갈 것이니 따르지 않아도 된다.”
강은 부경이 궁궐에 드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 마치 제 것을 빼앗길까 봐 탐탁지 않아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근방까지 모시겠습니다.”
“되었대도.”
확실한 거절에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던 부경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대문을 넘지 않고 문간에 선 채 저에게서 멀어지는 강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곧 시야에서 강이 사라지자, 부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마구간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집스러운 걸음은 동궁전을 향해 옮겨졌다.
궁궐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하는 윗전이 많았으나, 강은 여느 때처럼 입궐한 목적만 해결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동궁전 뜨락에 나태하게 시립해 있던 궁인들이 강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불호령은커녕 관심도 없다는 듯 강은 동궁의 내전인 사녕전(瀉寧殿) 돌계단에 올랐다.
사녕전 복도를 지나는 동안 강은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곳을 걷는 기분에 숨이 턱하고 막혀 오는 것 같았다. 곧 강의 앞에 내관이 나타났다.
“세자 저하께옵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가워하는 내관과는 달리 강은 별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세자의 침전 앞에 내관과 강의 발이 멈췄다. 내관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예를 갖추는 것에 도가 튼 듯 허리를 접은 채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 효원 대군이 뵙길 청하옵니다.”
강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닫힌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문이 열리자 무표정으로 일관되어 있던 얼굴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드십시오.”
내관의 안내에 따라 강은 문지방을 넘었다. 안으로 들기 무섭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렸다.
강은 평복 차림을 한 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세자 저하, 불충한 효원이 들었사옵니다.”
강이 예를 차리기도 전에 보료에 앉아 있던 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바로 범랑의 왕세자이자, 강의 동복형제인 소명(嘯䳟)이었다.
“세자 저하….”
강은 저의 곁으로 다가오는 세자를 보고 있을 수 없어 머리를 더 낮게 숙였다.
“매정하다 탓을 했어도 아우가 반가운 것은 사실이다.”
제 앞에 당도한 세자가 저를 와락 끌어안자 강이 작게 탄식했다.
“나 또한 모질게 굴면 분이 풀리겠지만, 어찌 먼 길을 달려온 아우를 내칠 수 있겠느냐.”
“하오나….”
제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강은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모질게 구셨습니다.”
세자가 황급히 강의 등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그러곤 당황스럽다는 눈빛으로 강을 보았다. 아우는 눈으로 울분을 토해 냈다.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았기에, 세자의 눈이 반으로 접혔다.
“어찌 죄 없는 아우를 죄인으로 만드셨습니까?”
장난기가 그득한 우는 소리에 세자는 체동을 뒤로한 채 목청을 트고 웃음을 꺼냈다.
“그로 인하여 소신이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아십니까?”
입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리던 강의 입꼬리도 언제 서러웠냐는 듯 위로 쭉 올라갔다.
“하여간 네 능글맞음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농익는 것 같구나.”
“꺼리시어 말씀을 돌리시는 것입니까?”
세자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강을 흘겨보았다.
“그럼 어찌하느냐? 보내오는 연통은 하나 없고, 심지어 거쳐 간 곳도 알지 못했다. 너에게 보내려던 서찰이 내 서안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너를 찾아오라고 군졸을 보내는 게 마땅했을까?”
진심 어린 농담에 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말이 길어져 봤자 제 잘못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어서 따르거라. 이리 서서 할 이야기가 아니지 않더냐.”
두 사람의 담화는 다과상이 들어올 때를 빼곤 끊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강은 오랫동안 저를 기다린 형제의 모습이 안타까웠고, 소명은 전보다 더 여윈 듯한 강을 안쓰럽게 여겼다. 우애가 남달리 좋은 형제였다.
두 형제의 애틋함을 지켜보던 내관은 조용히 웃으며 찻잔에 김이 풀풀 올라오는 뜨거운 물을 따랐다.
찻잔에 담겨 있던 마른 국화꽃에 뜨거운 물이 닿자 가을이 온 듯 오므려져 있던 꽃잎이 활짝 벌어졌다.
잠시 침묵이 오가던 중, 소명이 서안 위로 서찰 하나를 올려놓았다.
“풍홍군에게 서찰이 왔다. 어린 나이라 그런지 신문물에 사로잡힌 듯하더구나.”
강은 피식, 웃었다.
“풍홍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지요.”
“주국의 악기에 심취했다고 한다. 맛난 것을 먹었다는 자랑만으로 장이 넘어가니, 그 아이의 잘난 체를 나만 볼 수 있어야지.”
내관이 전한 서찰을 받아 든 강은 거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고약한 아이입니다. 세자 저하께 떼를 쓸 적부터 소신은 풍홍군의 성정을 알아보았습니다.”
“어찌 풍홍군의 성정을 탓할 수 있을까. 일찍이 어미를 여읜 가여운 아이다.”
“그 아이의 성정이 그리된 연유에는 세자 저하께서 계십니다.”
소명은 당치도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소명의 구김살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자 저하의 바지를 붙잡고 떼를 쓴 왕자군은 풍홍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
잠잠히 강의 이야기를 듣던 소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풍홍군을 시기하는구나?”
강이 과장되게 눈을 깜박이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소신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소신을 풍홍군과 같은 철부지로 치부하지 마시옵소서.”
“그래, 알겠다. 우리 강이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지. 형제의 품에서 날아갈 때가 지난 지 오래다. 한데 어찌하겠느냐? 이 형제의 눈에는 아직 우리 강이가 어리게만 보이는구나.”
“저하!”
질색하는 모습에 소명이 재미난다는 듯 웃었다. 심통이 난 듯 강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강아.”
다정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강은 소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존귀한 몸인 탓에 마주 보지 못해 비스듬히 앉아 있었지만, 마주한 시선은 존귀를 따지지 않았다.
“네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어찌나 넋을 빼앗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저하….”
“내 곁에 남아 나를 도와다오. 나는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너와 함께 꿈꾸고 싶다.”
순간 강이 세자를 향해 몸을 튼 뒤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강의 갑작스러운 모습에 소명은 당황했으나, 가까이 다가가 아우를 말릴 수 없었다.
“소신의 그릇에는 본디 담을 수 없는 것이 정해져 있사옵니다.”
“나와 함께한다면 그 그릇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소신은… 그럴 만한 재목이 아니옵니다.”
“하면 계속 떠돌아다닐 셈이더냐. 나와 함께 꿈을 그리지 않겠다면 이곳에 남아 가정을 꾸리는 것은 어떠냐?”
천양에 들어서는 순간, 강은 아무것도 못 하는 나무 인형이 되어야 했다.
벗을 만나도 말이 돌고, 술 한 잔을 기울여도 말이 돌았다. 돌기만 할 줄 알았으나 와전은 물론이거니와 항상 곡해가 뒤따랐다.
강에게 천양은 즉 감옥이었다. 그 감옥 속에, 그 불안한 인생길에 약점으로 잡힐 인연까지 더하라니 언감생심이었다.
“일어나거라. 네가 그러고 있으니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구나.”
소명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보나 마나였다. 무엇이든 강에게는 뜻이 없었다. 소명 역시 알고 있었다. 지금이 강에게는 가장 좋은 날들이라는 것을.
강은 광활한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새였다. 자신이 천양에 묶어 두려고 한다면 강은 속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제 날개를 망가뜨릴 아이였다.
“그만두어라.”
부복했던 강이 천천히 일어났다.
저에게서 떨어진 시선에 송구함을 느꼈다. 차마 고개를 들고 있을 면목이 없어 강은 눈길을 바닥에 고정했다.
“나은 줄 알았던 등창이 날 또 괴롭히고 있단다. 등창에 좋다는 것은 모두 다 써 보았지.”
화들짝 놀라 들린 얼굴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지만, 소명은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살을 뚫고 올라오는 종기가 참으로 얄밉기는 하나 걱정치 말거라. 나는 이 역시도 이겨 낼 것이다.”
임금을 아비로 두었기에, 형제에게는 해내야 하는 몫이 있었다. 소명에게는 자리를 지키는 것, 강에게는 자리를 넘보지 않는 것이 각자 맡은 소임이었다.
소명에게 있어 강은 눈만 마주쳐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가여운 아우였다. 그래서 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가 살기 위해 강을 버릴 수 없었다.
시련과 풍파를 홀로 감당했던 아우가 강이었고, 강이 받는 멸시를 두 눈으로 보았기에 소명은 그를 아프게 여겼다.
강이 언제든 억압에서 도망치도록 그에게 날아드는 갈고리를 막아주는 것. 강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이미 강에게서 눈길을 뗐지만, 웃음 속에 감춰 둔 쓸쓸함이 소명의 얼굴에 잔뜩 배어 나왔다.
줄곧 침묵하던 강이 입을 뗐다.
“…저하.”
그는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을 터뜨릴 듯 붉어진 눈시울을 소명에게 내보였다. 떨어졌던 입이 딱 달라붙더니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강은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그리 이를 꽉 깨물었다.
“염려 마라. 나는 그리 초라하고 엉성하지 않다.”
강 역시도 소명의 뜻을 알았다. 제 아우가 먼 곳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소명은 홀로 벼랑 위에 서서 강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나는 범랑의 동쪽이다.”
곧 강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지만, 그는 속에서 일렁거리는 슬픔을 꺼낼 수 없었다. 소명처럼 강 또한 강해져야 했다.
* * *
“도련님,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려고 하십니까….”
출타를 위해 대문간 앞에 선 은재를 홍 씨가 막아섰다.
본디 그는 겁이 많은 자였다. 진땀 나는 어제를 잊지 않은 홍 씨는 외출에 나서려는 은재를 보자 살짝 겁이 났다.
“잠시 볼일이 있어 그러네.”
홍 씨의 눈길이 현천에서 은재의 시중을 들었던 꺽새에게 닿았다.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탓에 벗이자 형제같이 은재의 곁을 지키는 꺽새가 기특하기는 했지만, 칠칠치 못한 성질머리가 홍 씨는 못마땅했다.
살을 찌르는 듯한 눈빛에 꺽새는 주눅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홍 씨의 눈빛을 본 은재가 저보다 덩치가 더 큰 꺽새를 제 뒤로 숨기며 기꺼이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아범은 어찌 꺽새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가.”
홍 씨가 당황이 섞인 소리를 내며 작게 앓았다.
“도련님께 짐이 될까 그러는 것이지요.”
“이 집에 꺽새만큼 내 마음을 잘 아는 이가 있을까 싶네.”
은재의 두둔으로 기가 산 꺽새가 장난스럽게 우그린 얼굴을 홍 씨에게 내보였다.
“잘 다녀올 테니 걱정 말게.”
“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홍 씨는 꺽새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은재가 기어코 문간을 넘기 위해 발을 내딛자 더는 막을 수 없었던 홍 씨는 뒤를 따르려던 꺽새의 목덜미를 덥석 낚아챘다.
“행여나 귀한 도련님 몸에 작은 생채기라도 생긴다면 네놈의 궁둥이가 지져질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아이구, 아재는 어째 그리 무서운 말을 함부로 하시오? 내 잘 알아들었으니, 명심 또 명심하겠소.”
꺽새의 장담에도 홍 씨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은재에게로 후다닥 달려가는 꺽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덩치만 크지 뛰는 폼은 어설펐다. 홍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눈치를 보던 꺽새는 홍 씨가 보이지 않자 신이 나 펄쩍 뛰었다.
“도련님! 오늘도 도성 밖으로 나가실 거예요?”
“그래, 지강문(地江門)으로 갈 것이다.”
지강문은 은재가 요 며칠 동안 계속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볼 거 없는 숲길을 어찌나 헤매고 다녔던가.
다리가 저리도록 걸어 다녔던 나날이 떠오르자 꺽새는 대문간에 섰을 때부터 품었던 흥미가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도련님도 참…. 그깟 꽃이 무에 중요하다고…. 저희 둘이서는 절대로 못 찾는다니까요?”
부정 섞인 말이 심기를 건드렸는지 은재가 곱지 않은 눈으로 곁눈질을 했다.
“그깟 꽃이라니, 내게는 그깟 꽃이 아니다.”
꺽새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꽃이 꽃이지, 뭐 특별나다고 이러시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는 그만 돌아가거라.”
“아이구! 신소리 마셔요. 도련님 혼자 보냈다가 생채기라도 나는 날엔 제 목숨 줄이 끊어집니다요.”
“하면 입을 다물고 조용히 따라오거라.”
“예, 예. 그럽지요.”
그러나 지강문 근처에 도착했을 즘, 장거리를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린 꺽새의 투덜거림이 도로 잦아졌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여유로웠으나 은재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도 찾지 못하고 돌아가면 어쩌나. 꽃이 지기 전에 찾아야 할 터인데.
“꺽새야, 어서 가자.”
“도련님, 우리 고생 말고 장 구경이나 하면 안 될까요?”
“그럼 너는 이곳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련?”
꺽새가 어림도 없다는 듯 은재의 곁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어제도, 그제도 못 찾은 꽃을 오늘이라고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아냐. 내가 오늘은 운이 좋을지도 모르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어서 따라오거라.”
꺽새는 불분명한 것에 희망을 품고 발을 뻗는 은재를 바라보았다. 긍정적이구나 하면 긍정적이고, 무모하다면 무모한 것이었다. 꺽새는 은재를 보며 후자를 생각했다.
두 사람이 지강문이 도착했을 즘, 문 앞은 여느 때와 같이 나가려는 사람들과 들어오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은재는 나가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도성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 문과 저와의 거리를 짐작하던 눈길은 자연스럽게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지게에 나무를 가득 실은 나무꾼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 뒤를 소달구지를 모는 이가 따랐다. 봇짐을 멘 아낙이 있는가 하면, 가벼운 행장을 지닌 선비가 환희에 찬 얼굴로 도성 안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리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니, 도성이 괜히 도성이 아니구나.
그리 생각하며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
“어딜 가려는 것입니까?”
누군가가 목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은재가 사시나무 떨 듯 몸서리를 치며 소리쳤다.
“으악!”
난데없이 귓가에 들이닥친 목소리에 소름이 돋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도 저에게 그랬던 적이 없어 그 가까움이 생경했다.
은재는 닭살이 돋은 목덜미를 제 손바닥으로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마구잡이로 요동치는 심장은 진정시킬 방법을 몰라 그냥 두고, 저를 이렇게 만든 이를 쏘아보았다.
짓궂은 장난만으로도 야속한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은재는 입술을 떼어 말을 내뱉다 그마저도 괜한 일이라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지강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여전히 목덜미에 남아 있는 숨결이 그리 독한 것인 줄 몰랐다. 제가 무엇을 느꼈는지, 그로 인하여 무엇을 생각하는지조차 모를 만큼 머릿속이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전신에 퍼진 소름으로 살갗이 달달 떨렸다.
그 전율이 어디 좋았을까. 은재는 처음 겪어 보는 지금이 그저 수치스러워 화가 났다.
“한낱 장난에 얼굴을 붉히다니요. 내가 무안하지 않겠습니까?”
뒤에서 신발 바닥에 흙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수룩한 것인지, 순수한 것인지….”
그가 내뱉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마음의 손으로 귀를 막아 봤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토씨도 틀리지 않게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제길.
욕이라고는 할 줄 몰라 은재에게는 그 욕이 제일 심한 축에 끼었다. 속으로 그 말만 연이어 되뇌고 있을 때 목덜미를 겨냥한 바람결이 또다시 느껴졌다.
“읏!”
은재는 경악하며 강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마치 무뢰배를 보는 듯 경멸을 담아 강을 보았다.
“뭐 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공께서는 무례를 저지르신 것입니다! 어찌 이리 행동거지가 불경스러우십니까?”
강이 헛숨을 과장하며 내뱉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 역시도 지나치게 과했다. 은재가 펄쩍 뛰면 뛸수록 그는 능청스럽게 굴었다.
“무례라 했습니까? 불경스럽다니요? 내가 그대를 희롱하기라도 했다는 것입니까?”
뻔뻔하고 당당한 그 모습에 은재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나는 그저 우연한 이 만남이 반가워 그런 것입니다. 어찌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만듭니까?”
“대체 어느 누가 그리 반가움을 표한단 말입니까? 공께서는 제게 실례를 범하신 것입니다.”
되받아치는 까칠한 말씨와는 다르게 뺨에 스며든 홍조를 본 강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저 길거리에 은은하게 퍼진 향을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눈에 채인 은재를 보고는 어제 회은동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어제가 괘씸해서 그런 것도, 우연한 만남에 친근감을 느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김윤덕이 꽁꽁 감춰 둔 진실의 실마리를 보았기에 강은 은재에게 접근할 이유가 생겼다. 게다가 성내는 모습을 보니 놀리고 싶은 악독한 마음이 불어난 것을 어쩌겠는가. 저도 어쩔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성이 풀렸으니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리합니다.”
맞은편에 있는 이의 낯빛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안부를 나눌 사이가 아닌 듯하니 그만 가던 길을 가십시오.”
“어찌 우리가 안부를 나눌 사이가 아니란 말입니까?”
“예, 아닙니다.”
강단 있게 맞받아치는 말에 강은 허탈한 척을 하며 사뭇 진지한 투로 말했다.
“그거 압니까? 그대도 지금 내게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을?”
순간 은재는 찌푸렸던 눈매를 풀었다.
‘그분은… 임금님의 차자이신 효원(曉原) 대군이시지요….’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지만 홍 씨에게 들었던 정체를 떠올리며 은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범랑에는 신분이 존재했다. 하늘 가까운 곳에 닿은 자가 있는 반면 땅에 달라붙은 자들도 있었다. 제가 중간 어디쯤에 있다면 그는 제가 고개를 추켜올려도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자였다.
그의 눈에 서려 있는 존귀를 보았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 중 감히 왕족에게 맞설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그리했다간 불경죄로 붙잡혀 갈 사람이 백이면 백, 만이면 만이었다.
강자가 존귀를 거들먹거리면 약자가 되어야 하는 게 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순진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은재에게는 약자한테는 유약하고 강자에게는 맞서는 강단이 있었다.
은재는 고개를 빳빳하게 추켜세운 채 강을 똑바로 보았다. 겁이 살짝 나기는 했지만, 할 말은 해야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아예 확실히 선을 그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강상의 법도를 어겼으니 석고대죄라도 하오리까? 제가 그리한다면 공께서는 어찌하실 것입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강의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이 나라의 왕자라고 하면 모두가 꼬랑지부터 내리는데 어찌 이리 당돌할까?
강은 신기한 것을 찾았다는 듯한 눈으로 은재를 응시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는 신이 나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럼 그대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 나도 그대와 같이 석고대죄를 하면 마음이 풀리겠습니까?”
웃는 얼굴과 달리 강의 대꾸에는 기쁨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강은 제 앞에 있는 자의 혐오를 보았기에 비소했다.
제 앞에 있는 이는 김윤덕을 닮은 얼굴로 김윤덕이 내비치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윤덕이 저에게 보였던 멸시를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는 강은 제 속에 자리 잡은 의심이 더욱더 깊어지는 걸 느꼈다.
급기야 타당하지 않았던 가설이 확신으로 바뀌는 지경에 이르자, 강은 자신의 승리를 예감했다.
그러니 지금 강이 내보인 비소는 김윤덕을 향한 것이었다. 강은 김윤덕의 실수를 마주하며 그의 시커먼 속내를 헐뜯었다. 그러곤 이 패를 어찌 쓸지 생각했다.
과연 김윤덕이 이 패로 어떤 굴욕을 느낄까. 강은 제 앞에 있는 이를 보며 김윤덕을 향해 품었던 앙심을 크게 부풀렸다.
“어찌하다 왕가에서 태어났을 뿐, 나는 내 신분을 내세워 거들먹거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금부에서도 그리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그대가 의금부로 압송된다면 선처를 소청하지요.”
왕족을 기만하는 죄는 의금부에서 관할했고, 강이 입에 올린 의금부는 왕명으로 움직였다. 이로 인하여 가문에도 해가 미칠 것이라고 짐작한 은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분노로 물들어 있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눈동자를 한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굴려 댔다.
얼굴을 들어 강을 보니 그는 웃고 있었다. 은재는 입술에 힘을 가득 주고 적개심을 내비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대가 의금부에 잡혀가는 일이 없도록 할 테니 그만 화를 푸십시오.”
제아무리 왕족이라고 해도 강은 진중하지 못한 성정이었다. 은재는 그가 지어 보인 웃음 속에 음흉한 게 섞여 있을 것이라 불신했다. 그리고 불신은 늘 그렇듯 은재의 경계를 곧추세웠다.
“그대에게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낯을 익힌 자를 우연히 만나 기쁜 마음에 그리했다고 여기십시오.”
“예.”
더는 말을 잇고 싶지 않았던 은재는 딱딱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지강문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면서도 제 뒤에 선 이가 다시 의금부를 운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은재는 불안감이 가득한 눈으로 앞에 선 이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에서 벗어날까 싶다가도 문 앞에 가까워져 있었기에 회은동으로 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도성 밖에 볼일이 있는 것이라면 나와 함께 갑시다.”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 있는 이가 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은재는 바짝 긴장했다. 그가 있는 곳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멋대로 머리가 움직이려고 했다. 은재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내게 더 빨리 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흙을 짓이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가라앉은 줄 알았던 숨결의 느낌이 선명해졌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면서 또다시 전신으로 소름이 퍼졌다.
은재는 어깨를 달싹이며 황급히 발길을 돌렸고, 그를 피해 뒷걸음을 쳤다. 꾹 다물고 있으리라 다짐했던 입술이 저절로 떨어졌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곳에서 시간을 다 보낼 생각입니까?”
저를 지긋이 보고 있는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뜨거워지는 뺨을 들킬까, 은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예, 그럴 것입니다.”
제 뜻에 따라 주지 않는 은재가 참으로 매정하다는 듯 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한숨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얼굴에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그대의 운이 좋길 바랍니다.”
말도 안 되게 능청스럽게 굴던 이는 그 말을 남기고 수문군 병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에게 일절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은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강을 따라 움직였다.
지금껏 강에게 밀려나 있던 꺽새가 나서서 물었다.
“도련님, 저분은 뉘십니까요?”
“저런 무례한 자를 내가 어찌 알겠느냐. 모르는 자다.”
은재는 얄궂은 이의 뒷모습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러곤 단칼에 강에게서 눈길을 떼었다.
“오늘 그대의 운이 참으로 좋은 듯합니다.”
마침내 도성 밖으로 나오게 된 은재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사람은 바로 강이었다.
“내 지금까지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렸습니다. 어찌나 시간이 안 가던지….”
은재는 강을 무시하고 다짜고짜 걸음을 떼었다. 못 본 척하고 지나쳐 가려고 했지만, 은재를 고이 보낼 강이 아니었다.
“어딜 가려는 것입니까?”
답을 하지 않는 모습에 강은 그제야 제 장난이 도가 지나쳤구나, 했다. 그러나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은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참을성을 톡톡 건드려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은재의 걸음이 현천으로 가는 길목으로 향하자 뒤를 따르던 강이 멈칫했다.
“지금 산을 오르려는 것입니까?”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지한 말투였다. 게다가 따라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은재는 걸음을 멈추고 강에게로 몸을 돌렸다.
“할 일이 있습니다. 공께서는 갈 길을 가시지요.”
“이것 참….”
난감함이 가득 깃든 얼굴이 분위기를 순식간에 이상하게 만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과 함께 주변에 냉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은재는 수상한 느낌에 슬쩍 강의 눈치를 보았다.
“도성 밖의 치안은 좋지 않습니다. 음인을 상대로 부도덕한 짓을 일삼는 왈패가 출몰한다고 하던데, 혹 소문을 듣지 못한 것입니까?”
도성 안의 소문은 부엌간에 자주 드나드는 꺽새가 훤히 꿰고 있었으나 꺽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은재는 제 곁을 지키는 꺽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새파랗게 질려 있는 얼굴을 보자 은재는 대강 이해를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당혹시키는 이의 말을 어찌 믿겠는가? 오히려 은재는 강을 수상하다는 눈길로 쏘아보았다.
“산길을 오르는 이가 한둘이겠습니까? 게다가 몸종과 함께 가는 길이니, 걱정치 마십시오.”
“역시 그대는 순진합니다. 칼을 차고 활을 든 이들에게 맞설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도망가지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그리고 참나….”
강의 눈길이 꺽새에게 닿았다. 큰 덩치로 달달 떠는 모습을 보니 애잔하기 짝이 없어 그는 혀를 차며 노골적으로 꺽새를 비아냥거렸다.
“그대의 몸종은 거기서 몇 보만 더 움직이면 소피를 지릴 것 같습니다. 정녕 저놈에게 그대의 안위를 맡길 것입니까?”
을러대는 말에 무심하고 퉁명스러웠던 은재의 낯에도 얼핏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은재는 제 곁을 지키는 꺽새를 힐끔거렸다.
곧 은재의 머릿속에 왈패에게 붙잡혀 살려 달라 애걸복걸하는 꺽새의 모습이 그려졌다. 환상이었지만 등골이 오싹했다. 음인을 상대로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다고 하지 않는가. 평인인 꺽새가 아니라 제가 왈패의 표적이 될 것이었다.
파르르 떨리던 눈동자가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강은 막판 승부를 보겠다는 듯 강수를 던졌다.
“남녀를 따지지 않고 음인만 봤다 하면 몹쓸 짓을 한답니다. 내가 그대를 이곳에 두고 가는 게 옳은 일입니까?”
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은재를 보았다. 점점 파리해지는 얼굴을 보며 속으로 은재의 순진함을 조소한 강은 지체하지 않고 지강문으로 가는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원치 않는다면 돌아가겠습니다.”
순간 판단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은재는 저도 모르게 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잠시만….”
그러나 은재의 손은 강의 옷자락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 붕 뜬 채 멈췄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하더니, 왜 붙잡습니까?”
강의 걸음은 다시 은재에게 향했다. 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겁에 질린 은재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떨어질까 말까 하던 입술이 기어코 떨어지는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찾는 것이 있습니다. 지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지요. 하여… 그곳을 찾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겠다고 하면 은재는 어미가 현천으로 올 적에 보았다던 들꽃밭을 찾을 것이었다.
제 청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제 발로 그 꽃밭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질 나쁜 불량배가 출몰한다는 소문을 듣고도 찾고 싶을 만큼 간절했다.
저에게 따다 주고 싶었다던 그 하얀 꽃을, 따다 주지 못해 비단에 새겨 준 어미의 마음을 천양을 떠나기 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루는 눈 깜빡할 새 지나갔고, 꽃은 한 몽우리도 찾지 못했다. 언제 올릴지 모르는 혼례가 조바심을 부추겼고, 점점 더워지는 날씨가 안달을 내게 했다.
“무엇을 찾는 것입니까?”
조금 전까지 경멸하고 혐오했던 자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거짓이라는 증좌만 있다면 쌀쌀맞게 돌아서 갈 길을 갔을 것이었다.
그의 겁박에 순순히 넘어간 저 자신을 바보스럽다 여기면서도 강의 말을 믿어야 했다.
은재는 떨떠름한 마음을 떠안은 채 도포 소맷자락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손에 쥔 비단 띠를 강에게 건넸다.
은재의 손에 들린 것은 머리에 두르는 건(巾)이었다. 음인 사내가 양인 사내와 혼인을 올리면 음인 사내는 망건을 풀어야 했다. 간혹 예를 차려야 할 때는 망건 대신 건이라고 불리는 머리띠를 이마에 둘렀다.
어미가 저를 위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여 만들어 준 건은 귀한 보물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은재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으로 강을 보았다.
“찔레꽃입니다. 제게 소중한 분이 만들어 주셨지요. 이 길목 어딘가에서 찔레꽃밭을 보았다 하셨고, 저는 그 꽃밭을 찾고 싶습니다.”
건을 살피던 강은 끝과 끝에 수놓아진 하얀 꽃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건을 들어 은재의 얼굴과 견주었다.
체념에 힘을 잃은 동그란 눈에서 오뚝한 콧날을 따라 뺨으로 눈길이 움직였다.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하얀 뺨을 지나 빨갛고 도톰한 입술에서 시선이 멈췄다. 감청색으로 색을 입힌 비단과 하얀 얼굴이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강은 은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건을 손에 꼭 쥐었다.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동요하지 않았다는 듯 얼굴을 능청스럽게 꾸민 뒤 다시 눈길을 은재에게로 옮겼지만 머릿속에선 제가 눈으로 새긴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강에게는 은재가 김윤덕의 아들로 인이 박혀 있었기에,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저 자연스럽게 김윤덕을 향한 원망만 부풀었다. 강은 그마저도 제 앞에 서 있는 이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넓은 숲에서 그 찔레꽃을 어찌 찾는답니까? 사방팔방 널린 게 찔레꽃이지요. 도성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게 더 쉽겠습니다.”
기대에 찼던 은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하나 못 찾을 것도 없지요.”
시무룩했던 얼굴에 희망이라는 것이 퍼지기 시작하자 강은 미소를 지었다. 은재를 놀려 먹는 데 재미가 붙어 버린 것 같았다.
은재는 제 눈이 반짝인다는 것을 모르고 해맑게 물었다.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할까요? 저는 숲을 돌아다니는 것에 자신이 있습니다.”
강이 시원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은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고 약조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꺽새가 말했었다.
믿음이 없었기에 은재는 그가 지어 보인 웃음이 거북했다. 심성 역시 의심스러워 좋은 사람이라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디서 이런 은인이 나타났을까, 하는 감탄과 함께 기대감을 살포시 품었다.
“이런 일에 제격인 자가 있습니다. 내 그자에게 부탁하도록 하지요.”
강은 은재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세세하게 뜯어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감정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저를 의심하는 이를 비웃는 것일 수도 있고, 어수룩한 그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강은 웃음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웃음은 오직 저를 감추기 위한 수단이며 저의 속내를 보이지 않기 위한 허구였다.
“참말입니까?”
“그럼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웃는 것이 어색한 듯 은재의 입꼬리가 달싹거리다 내려갔다.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은재는 제 표정을 완전히 감추고는 건을 돌려받기 위해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은 돌려줄 심산이 아니라는 듯 제 손을 뒤로 물렸다.
“이 꽃을 찾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부탁할 이에게 보여 줘야 하니, 이것은 제가 잠시 보관하겠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은재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그의 손에 들린 건을 주시했다. 지금이라도 돌려줬으면 했지만, 쥐고 있는 이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잃어버리지 않을 터이니 염려 마십시오.”
그가 건을 둘둘 말아 제 소맷자락에 넣었다. 은재는 그이의 소맷자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내 포기한 듯 은재는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강은 코웃음을 치고는 저에게서 떨어진 시선을 돌려놓으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 꽂혔던 눈길이 위로 치솟았다.
“어찌할 것입니까?”
강의 의도대로 은재는 시무룩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눈을 맞춘 게 뭐라고 강은 다시 입꼬리를 늘려 웃음을 머금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대로 돌아가길 바라면 지강문으로 갈 것이고, 산을 둘러보길 원한다면 내 그대의 호위를 해 드리지요.”
은재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강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덩치가 있는 꺽새에 비하면 그는 꽤 날렵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태와 꺽새의 살집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훤칠한 다리와 쭉쭉 뻗은 팔, 떡 벌어진 어깨까지. 몸이 도포에 가려져 있는 탓에 보이지 않을 뿐, 그는 저처럼 얄팍하지 않았다. 저고리 속에 감춰진 몸을 감히 상상할 수 없어 은재는 노골적인 저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찌할까요?”
은재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늘로 높게 솟아 있는 나무에 낀 이끼를 보며 그가 입을 뗐다.
“조금만… 둘러보고 갔으면 합니다.”
은재는 은근슬쩍 강에게 눈길을 주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답이었는지 강이 빙글댔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은재는 아주 작게 탄식했다. 그가 지어 보인 웃음이 심기를 툭, 하고 건들지 않았던 건 처음이지 않았나 싶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역시나! 세상에 이유 없는 선행은 없다고 꺽새가 말했었다. 조건이 대체 무엇일까.
은재는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가 지은 미소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심성은 여전히 못 미더웠기에 은재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당황한 은재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대는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공평하지 않습니다.”
은재는 선행의 대가가 저의 이름만으로 끝날 것인지를 의심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더니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점차 희미해졌다.
강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은재의 입술이 떨어졌다.
“…안은재입니다.”
그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이 환하게 들어찼다. 은재는 강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마치 허상에 홀린 듯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리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또한 날 공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공(空)은 허무하고, 공(攻)은 과격합니다. 나는 허무하지도 과격하지도 않으니, 굳이 존대하겠거든 나리라 부릅시오.”
그의 말투는 선을 긋는 것 같았지만, 말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허물없는 사이가 되자는 듯한 인상을 받은 은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이 되지 않았다. 대체 어느 누가 일국의 왕자에게 나리라 부를 수 있겠는가.
위아래를 구분 짓지 않는 강이 불쾌한 건 아니었지만, 은재는 그가 내보이는 관용이 못마땅했다. 그리 친밀한 사이로 발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저에게 은인이 될지도 모르는 이였으니, 은재는 함부로 경망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작정이 아니라면 어서 따르십시오.”
미련이 없다는 듯 강이 숲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은재는 혹시라도 놓칠까 싶어 후다닥 강의 뒤를 쫓았다.
한 시진 정도 숲길을 따라 걸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은재는 오늘도 헛수고로 끝났다는 생각에 속상했지만, 겉으로 꺼내 보일 수 없어 침묵했다.
조용한 은재가 걱정되는 것인지 뒤를 따르던 꺽새가 은재의 눈치를 보았다. 슬그머니 다가가 말을 붙일 수도 없게 양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꺽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맨 앞에 서 있는 선비와 눈이 마주쳤다. 선비는 앞만 보고 가다가도 간혹 제 주인의 눈치를 살피려는 듯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벌써 손으로 꼽을 만큼 그와 눈을 맞췄으니, 꺽새는 응당 지금을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저 나리가…?
선비는 꺽새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음흉한 속내를 들여다보았다는 듯 꺽새는 은재의 뒤에 서서 그를 경계했다. 어지간히도 수상하단 말이야.
“도련님….”
꺽새가 힘없이 걷는 은재의 팔뚝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지친 걸음에 꺽새가 달라붙자, 은재의 걸음이 더뎌지다가 끝내 제자리에 멈췄다.
“그래, 꺽새야.”
꺽새는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걱정했다. 어슴푸레한 숲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겨울과 달라 해가 늦게 지는 편이지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해는 게 눈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이 길이 맞는 것이겠지요?”
은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를 양옆에 두고 줄곧 걸었으니, 둘러보아도 그곳이 어디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가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니 맞고 틀리고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왔던 길을 따라가는 것인데 어찌 그러느냐?”
꺽새의 눈길이 앞에 서 있는 강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강의 뒷모습을 본 은재는 그저 괜찮다 웃어 보였다.
꺽새와 은재를 두고 혼자 갈 것처럼 계속 걷던 강이 들리지 않는 인기척과 아주 잘 들리는 속삭이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은재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몸종을 보며 하찮다는 듯 코웃음을 친 강이 말했다.
“우리가 언제 다른 길로 들어선 적이 있더냐? 더 지체하다간 그땐 앞이 보이지 않아 정말 길을 잃을 것이다.”
그의 으름장에 은재와 꺽새의 걸음이 떨어졌지만, 불신을 품은 걸음의 보폭은 한없이 좁아졌다.
“나를 의심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네놈의 목숨은 네놈이 알아서 잘 지키거라.”
강이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그대로 가던 길을 향해 몸을 틀려던 찰나였다.
바람에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가 숲길을 따라 강에게로 들이닥쳤다. 저보다 몇 보 뒤에 있던 이를 스치고 온 바람에 강은 또다시 경악했다.
강은 저에게 달려온 체향의 근원지를 노려보았다. 희한한 것을 보았다는 듯한 눈빛은 전혀 살갑지 않았고, 적나라한 불쾌함과 선명한 부정을 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은재의 어떤 상처를 찔러 대는지는 몰랐으니 강은 꾹 다문 입으로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기 어린 눈빛을 한 몸에 받아야 했던 은재는 그 순간이 당혹스러웠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은재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려고 했건만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리 사나운 눈으로 저를 헐뜯는 것인가.
저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인가. 저는… 그리도 쓸모없는 폐물이었던가.
은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강은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우그러진 얼굴도 보았다. 금이 가기 시작한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려는 듯 강에게로 또다시 바람이 날아들었다.
“윽!”
마치 공격을 받은 것처럼 강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서둘러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으나, 제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향의 파급력은 소맷자락으로 막아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지가 떨리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대로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다행이었지. 잔잔했던 숨결이 거칠어지며 숨이 벅차올랐다. 멀쩡하던 목이 갑자기 쩍쩍 갈라지며 갈증이 느껴졌다.
강은 은재를 응시하던 눈으로, 불에 타오르는 것 같은 뜨거운 눈으로 땅을 노려보았다.
강은 제가 이러는 이유를 알았다. 이까짓 향에 무력해지는 것은 제가 양인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저에게로 들이닥친 음인의 향 때문이었다.
외격소는 양인과 음인으로 성질이 나뉜 사람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은은한 음인의 향기를 맡아 본 바가 있지만, 은재의 향은 이상했다. 간헐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강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 같은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 귓속으로 쳐들어온 그 고운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을 끝낼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가지고 태어난 부모와 신분이 저를 뒷받침하고 있었으니, 역모나 사고, 흉계에 얽히지 않는 이상 딱히 죽을 일이 없었다.
그 대단한 뒷배를 떠안고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욕정에 눈이 먼 짐승이 되어 지금의 욕구를 해결하는 것 따위로는 아무런 벌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
향을 뿜어 대는 음인의 곁에 달라붙어 있는 하찮은 몸종 따위를 죽여 없앤 뒤 음인을 낚아채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이 모욕적인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몸뚱이를 갈취하고 옷가지를 찢어 버린 뒤 경망스러운 줄도 모르고 향을 흘려 대는 음인을 취하고 싶었다. 울며불며 사정하고 매달려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 겁탈한 뒤 모르쇠로 저 음인을 숲속에 버리고 사라진다면 보잘것없는 소문으로 떠돌다가 끝날 것이었다.
하나 강은 짐승이 아닌 사람이길 바랐다. 이까짓 성질 따위에 지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은재는 멀지 않은 곳에서 홀로 분투하는 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물어보고 싶었으나 물을 수 없었다. 같잖지도 않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두려웠다.
곧이어 강의 고개가 들렸다.
한낮의 온기를 품고 있던 숲속에 어느덧 스산한 공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강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에게 꽂혀 있는 그의 두 눈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은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뗐다.
“그곳에 계십시오.”
순간, 은재는 전신이 얼음처럼 굳어지는 걸 느꼈다.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몸을 휘감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안위를 살피고 싶어도 덜컥 겁이 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나지막하게 울린 목소리는 마치 비수를 내던진 것처럼 가슴을 따갑게 했다. 은재의 마음에 울분이 떠올랐다.
그를 걱정하려던 찰나였다.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제가 아니라 그였다. 걱정으로 물들어 있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찌 그러십니까?”
강은 제 성질이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경멸의 눈으로 저를 보는 이는 제 노력을 모르는 듯했다. 은재를 바라보던 강의 눈길에 짙은 설움이 담기는 순간 허망함을 이기지 못한 시선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제가 악취라도 풍기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억울하다 못해 속이 상하고, 상하다 못해 가슴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가 저를 멸시했기에 은재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실로… 그런 것입니까…?”
끝까지 속사포처럼 따져 댈 것 같았지만 은재의 말끝은 점점 흐려졌다.
“그런 게 아닙니다.”
강 또한 변명을 꺼냈지만, 은재의 눈에는 그마저도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은재는 원망하고 증오하는 눈으로 강을 보았다. 사람을 기만하는 것에 능하다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그를 믿었던 저를 짓씹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해 은재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참으로 무례하십니다. 일전의 일은 실수라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내지 않겠다는 듯 은재는 속에서 치밀어 오른 감정을 마구잡이로 꺼냈다.
다른 이었다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테지만 섭섭했고 실망스러웠다. 다른 누구에게도 이처럼 하지 않았을 것이었으면서 은재는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을 충실하게 강에게 내보였다.
“어찌 또 제게 이런 수치를 안기시는 것입니까? 어찌… 짐승만도 못한 취급으로 저를 능멸하시는 것입니까….”
은연중 저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이에게 무엇인가를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깨달을 생각이 없어 무심하게 보았고, 퉁명스럽게 대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은 살가운 이에게나 하는 짓이었다. 지금 속을 들끓게 하는 섭섭함과 실망감을 강에게 냅다 집어 던지는 것은 그 짧은 순간, 그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느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은재 역시도 강과 같았다. 겉으로 내보이는 감정에 거짓을 더해 저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다. 낯선 이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 저를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우리가 안부를 나눌 사이가 아니란 말입니까?’
도성 밖으로 나오는 지강문에서 강을 마주쳤을 때.
‘무례였다면 용서하십시오. 하나 모든 일에는 사정이 있는 법입니다. 그대는 어찌 내 사정을 모르면서 내게 모욕을 주는 것입니까?’
혹은 사당으로 들어서는 협문 앞에서 강을 보았을 때이던가.
언제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마음을 건넨 찰나는 은재가 강을 처음 눈에 담았던 순간이었을 것이었다.
웃음이라는 게 그랬다. 방심하는 사이 틈을 노리고 스며 들어와 마음을 열게 했다.
그때 제가 먼저 강에게 조그마한 마음을 건넸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제가 어디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또한 알지 못해 은재는 먼저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가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그렇게 제가 불쾌하시다면… 먼저 가십시오.”
아래로 향해 있던 강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강은 그저 이 상황이 억울하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은재의 얼굴에 떠오른 수치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를 콕콕 찔러 대는 비난을 감당하는 게 마땅하다 여겼으나, 곧 분노가 치밀었다.
제 속사정은 알지 못하면서 저를 곡해하고 핍박하는 걸 누가 참을 수 있겠는가.
“나라고 무례를 저지르고 싶어 이러겠습니까?”
땅을 짚었던 손을 그러쥐었다. 손가락에 딸려 온 낙엽 찌꺼기와 흙이 손바닥을 더럽혔지만 강은 일절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양인인 것을 어찌합니까? 그대가 어쩔 수 없이 음인으로 태어난 것처럼 나 역시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은재는 슬며시 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울분을 보며 헛숨을 들이마셨다.
어렸을 적부터 배웠던 음양의 성질을 기억했다. 평범한 평인들 사이에서 유독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성질을, 제가 갖고 태어난 그 기질을 떠올렸다.
음양의 조화는 우주의 진리였다. 밤이 있으면 낮이 있듯, 음인에게는 양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의학에서도 음인과 양인의 조합이 금슬지락을 이루는 최상의 조화라 이르기에, 혼례를 치르는 것도 성질에 따르도록 법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은재는 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알고 있으나, 저는 알지 못했다. 지금껏 강과 함께 있을 때 그의 외격소를 맡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것도 몰랐다. 제가 미흡한 탓일까. 은재는 삽시간에 걱정과 불안에 휩싸였다.
“내 탓을 하려거든 하십시오. 하나 내가 그대를 탓하는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대의 향… 지독합니다.”
상처를 겨냥한 듯한 말이 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은재의 가슴에 꽂혔다.
은재는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걸 느꼈다. 수치심으로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단번에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제게 모욕을 안겨 준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술은 우물쭈물할 뿐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도대체 어찌하면 그리할 수 있는 것입니까?”
강은 저에게 유리해진 분위기를 타고 톡, 쏘아붙였다.
여전히 제 상식으로는 폭발하듯 쏟아지는 외격소는 생경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기필코 그 향의 정체를 밝혀내겠다는 듯 은재를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어찌 그리 줏대 없이 내보내는 것입니까? 그게 가능키나 한 일입니까?”
뜨거워진 낯을 보일 수 없었던 은재는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성질을 논하는 것은 남우세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마치 강이 제 흠집을 들춰내려고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저 지금을 벗어나고 싶었다. 부족한 저 자신이 세상에 밝혀지면 더한 굴욕감이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그의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될 것 같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란 말입니다.”
마치 시무룩한 주인의 기분을 따르는 듯 주변을 배회하던 향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외격소는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덕분에 강은 끝내 저를 괴롭히던 향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자 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도포 자락에 묻은 부스러기는 신경 쓰지 않고 단번에 은재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은재에게로 돌진하는 강을 보며 꺽새가 허겁지겁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아직 성주기가 오지 않으셨습니다요!”
언제 주인의 뒤에 숨어 있었냐는 듯 내지르는 목청의 크기가 꽤 요란했다. 강은 꺽새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마는…. 도련님이 이상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요….”
꺽새는 평인이라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음양인을 관리하는 민보청에서 한 달에 한 번 진찰을 나왔을 때 은재의 곁을 지키며 의원의 말을 엿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훔쳐 들었던 제 주인의 결점을 이렇게 꺼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은재가 이 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민보청 의원이… 도련님의 외격소가 그…. 온전치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꺽새는 몇 보 떼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 이를 힐끔거렸다.
여전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은재의 뒤에 숨어 있었지만, 그 순간 제가 나서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곧 저에게 쏟아진 은재의 원망에 꺽새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성주기가 오지 않았는데, 어찌….”
당황에 빠진 강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때가 되면 음인은 성주기(性週期), 양인은 상사기(相思期)를 시작했다.
음양인의 기운은 성주기와 상사기가 되면 최고조에 달했다. 선인들은 성주기와 상사기가 발현되었을 때 성교를, 즉 합환을 이룬다면 조화가 이뤄지며 그 조화가 만물의 영생을 돕는다고 여겼다.
성주기와 상사기의 첫 시작은 성년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혼례를 올려도 좋다는 뜻이었고, 첫 성주기와 상사기를 치르지 않고서는 관례를 올릴 수 없었다. 그것이 누구도 경시할 수 없는 범랑의 법도였다.
병약한 아이에게 오래 살라는 의미로 일찍이 관례를 치러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은 민가에서나 행할 뿐 양반이 지켜야 하는 도리와 이치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강의 시선이 제가 쓴 갓에 닿아 있는 걸 눈치챈 은재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이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꺽새로 인하여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제 흠집에 은재는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강건해져야 했다.
은재는 수치심에 젖어 들었던 제 속을 깨끗하게 게워 내고 모욕감을 느꼈던 일도 모두 지워 냈다.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하나 조부께서 일찍이 관례를 올려 주셨습니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이 공허했지만, 은재는 개의치 않았다.
“제가 무탈하길 바라는 조부께 어찌 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문제 삼으시겠다면 기꺼이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속 깊은 곳에 생긴 상처가 너무나도 따가웠다. 눈물이 솟구치려는 걸 억지로 막아 내는 일이 어간 힘든 게 아니었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에 힘을 가득 준 채 은재는 바르게 서서 강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제 허물에서 비롯된 일이기에, 용서를 구하는 게 마땅하다 생각했다.
“성주기가 오지 않은 몸이고, 제 외격소라 저는 몰랐습니다. 제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굴었으니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디 부덕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치욕스러우면서도 속상했다. 하나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은재는 의연했다.
“하….”
모든 것을 깨달은 강이 탄식했다.
폭발하지 않고 흘러넘치는 기운을 증명하는 게 성주기였다니. 제 눈앞에 있는 이는 첫 성주기가 찾아오고도 남았을 나이였지만, 간혹 늦게 기운이 터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강은 열다섯 살, 첫 상사기를 겪었던 저를 떠올렸다.
그것은 몸이 타들어 가고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으로 찾아왔다.
그것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음양인은 첫 성주기와 상사기를 겪으면 바로 혼례를 치르기도 했지만, 강은 달랐다. 혼례로 도피할 생각이 없었다.
변함없는 신조인 인내를 택한 지금도 때가 되면 고통은 잊지 않고 강을 찾아왔다. 질긴 인내로 억압된 기운이 사방으로 튀고 난리를 쳐도 강은 그것에게 질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나 이를 악물고 참아 왔는데 일순간 저를 무력화시킨 은재가 원망스러운 건 당연했다. 그러나 분노로 일렁거리던 눈빛은 이내 사그라지고 강의 눈 속에는 동정만이 자리했다.
강은 진심으로 은재가 안쓰러웠다. 제 잘못도 아닌데 저를 낮추는 은재가 어지간히도 짠했던 것이었다.
“어찌 그대의 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속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내 잘못이지요. 사과는 거두십시오.”
은재는 짐짓 놀란 눈치로 강을 보았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에게 못된 말을 하며 저를 탓했던 이가 지금은 세상이 끝났다는 듯 풀이 죽은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분노로 일그러졌던 것과는 다른 얼굴이 또 은재의 마음을 툭 하고 건드리자, 목구멍 너머로 삼키려고 했던 설움이 끝내는 치고 올라왔다.
“저야말로… 경솔했습니다….”
강은 촉촉한 은재의 눈을 보며 또다시 탄식했다. 저희를 휩쓸고 지나간 바람이 문제였다. 바람을 향한 원망이 치솟았다. 강은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은재를 바라보기만 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인도, 양인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리 서로 어우러져 살아갔다. 그러나 성질은 강과 은재에게 유난히도 척박하게 굴었다. 서로의 속내를 알지도 못하면서 두 사람은 그리 생각했다.
나와 같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씁쓸해졌다.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계기였다.
“저… 도련님….”
무거운 침묵이 오가던 중, 꺽새가 슬그머니 은재에게 달라붙었다. 음산한 주위를 둘러보는 꺽새는 공포에 물든 얼굴로 은재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강을 보았다.
“나으리, 해가 지고 있습니다요….”
강이 제일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
꺽새를 향한 원망이 남아 있던 은재는 꺽새를 슬쩍 노려보았지만, 이내 찌푸렸던 눈살이 풀어졌다. 꺽새는 눈치를 보면서도 은재의 허리춤을 놓지 않았다.
곧 강의 걸음이 떨어졌다. 은재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