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흩날리는 1
목차
서장
1장. 찔레꽃 (上)
1장. 찔레꽃 (中)
1장. 찔레꽃 (下)
서장.
수수한 차림새를 한 사내가 얼마 되지 않는 이들을 이끌고 방지(方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봉우리에서 떨어져 나간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연못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정자의 기단에 걸터앉았다.
“아직은 날이 찹니다.”
“괜찮다. 조금만 머물다 돌아갈 것이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나선 이를 물리는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놓은 연못에 닿아 있었다. 그곳을 유유히 헤엄치는 원앙을 보는가 싶었지만, 그는 방지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았다.
활짝 피어난 꽃잎도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그런 계절이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부터 열기가 가시는 가을까지 그곳에 피어날 꽃은 수없이 많았기에, 생이 끝난 꽃잎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아쉬움이 깃들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에게 바람이 불어왔다. 부산스럽게 그에게로 뛰어들었던 바람은 주름진 옷자락 위에 하얀 꽃잎 몇 장을 남겨 두고 다시 먼 곳으로 달아났다.
꽃잎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애석함이 떠올랐다. 귀한 비단도 아니고, 비싼 염료로 물들인 옷감도 아니었건만 옷자락에 떨어진 꽃잎이 참 애달팠다.
손을 든 그는 이유 없이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하얀 꽃잎을 톡, 하고 건드렸다. 그러고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봄이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봄바람이 사정없이 불던 그런 계절이었다.
그때 번쩍 눈을 뜬 그는 기꺼이 제 연심을 내어 준 이의 얼굴을 맞닥뜨렸다. 그는 콩닥콩닥 뛰는 박동에도 굴하지 않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금 무엇을 베고 누워 있는지 눈치챘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일어나지 않았다.
‘술 한 잔에 쓰러질 것이었으면서.’
‘두 잔이나 마셨습니다.’
‘그대가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다 하여 잔을 반만 채웠습니다. 그러니 한 잔이 맞지요.’
은재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좋았다. 그래서 저도 그를 따라 웃음을 지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저는 그저 이곳에 나리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먼저 시작한 것은 그대입니다. 나는 셈에 그리 야박하지 않아요.’
‘대신 다른 것에는 야박하십니다.’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삐죽 내민 입술과 퉁명스러운 말투가 이상스러웠는지, 그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내 그대에게 무엇을 야박하게 굴었단 말입니까?’
정말 제 마음을 모르는 것일까? 눈빛으로 알아보라는 듯 은재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말로 해야 아시는 것입니까…?’
속에서 울렁거리는 것을 그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참으로 태연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은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마주 보았다.
가라앉았던 술기운이 다시금 팔딱거리며 몸뚱이를 뛰어다니는 것일까? 얼굴에 퍼진 짙은 열기가 너무 뜨거웠지만, 은재는 애써 아래로 떨어지려는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맞췄다.
그 어떤 징조도 없었다. 은재는 저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이의 옷깃으로 다짜고짜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 힘을 가득 주고 그를 저에게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을 듯 닿지 않는, 그러나 온기가 어린 살김이 통할 거리에서 그가 힘을 주고 버텼다.
‘정녕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려는 것입니까?’
은재는 질 생각이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나리께서 함께 가 주신다면 괜찮습니다.’
지금 그가 내보이는 당황과 난감함은 꾸며 낸 게 분명했다.
‘허어, 사통일지라도 상관없습니까?’
애가 타는 마음이 어찌 저와 같지 않다 할 수 있을까. 그도 저와 같았다.
은재는 저의 확신을 믿었다.
‘예, 괜찮습니다.’
작게 속삭이는 말에 그는 웃음을 흘렸다.
‘마음을 품었고, 확인했습니다. 나누어 가진 증표가 있는데 어찌 이것을 사통이라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여린 살갗이 맞닿으며 짙은 숨소리가 정자 안에 퍼졌다.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숨결이 그곳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뿐일까. 비단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부지런히도 울렸다.
입에 대 본 적 없는 술 탓이라고, 오기로 들이켰던 술이 결국 사달을 냈다고 핑계를 대려 했건만 그럴 수 없었다.
은재는 서로의 몸에 새겨진 증표가 증명하는 연정은 허무하다는 듯 그를 갈망했다.
살갗을 맞대고 단단한 살결을 느끼고 싶었다. 저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담긴 애정을 느끼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연정을 손가락 끝으로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혼인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합환이 불경스러운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은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싶었다.
“흠, 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에 은재는 회상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다.
멍하게 한곳을 응시하던 눈길이 움직이자, 다섯 보 정도 떨어져 있던 궁인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조금 전 떠올렸던 회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은재는 눈을 깜박거렸다.
전신으로 퍼졌던 간질거리는 느낌, 서로 나눠 가졌던 숨결, 설렘에 젖어 두근거리던 심장.
모든 게 지금 방금 느꼈던 감각인 듯 선명했다. 위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에 은재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잊고 싶은 일을 기억할 때마다 온몸에 고통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옛 기억을 떠올리지 말라고 몸이 경고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숨이 차올랐지만 은재는 달뜬 숨을 참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이 가득한 눈길이 저를 졸졸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은재는 방지 앞으로 다가갔다.
연못을 둥둥 떠다니는 꽃잎을 바라보던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방지 건너편에 서 있는 이에게 눈길을 멈췄다.
은재는 목울대를 울렁거렸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곳에 있는 그를 보며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의 초라함에 헛숨을 들이마셨다.
연정을 속삭이던 그때, 저를 끌어안았던 그의 마음은 저와 같았을까?
혼자서는 풀지 못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또 다른 의심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은재를 휘감았다.
정녕 저를 사랑하기는 했던 것일까.
언제나 기억으로만 재회할 듯했던 그가 방지 건너편에 있었다. 다가가 손을 뻗으면 따듯한 온기가 깃든 손을 내밀 것처럼 보였으나 은재는 제 눈으로 보는 것을 믿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전과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음이 미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얼굴만 같을 뿐, 그이는 제가 알던 이가 아니었다.
은재는 뒤늦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그리고 먼저 발길을 틀어 방지 일대에서 빠져나갔다. 내딛는 걸음에 담긴 무심함을 알아채라는 듯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걸음걸이가 참으로 매정했다.
은재를 배종하던 궁인들은 혹시나 넘어져 다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서둘러 그 걸음을 뒤따랐다. 비틀거리는 몸짓에 궁인 하나가 나섰다.
“조심히….”
“괜찮다…. 괜찮아….”
방지에서 멀어지기 무섭게 은재는 걸음을 멈췄다. 얼마 걷지도 않았건만 숨이 어찌나 벅찬지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불현듯 치고 올라오는 기억이 문제였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은재는 자신의 결심이 뜻하지 않게 무너질 걸 잘 알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 여린 살 위에 새겨진 합환 증표가 마음을 나눠 가졌다는 증좌였다. 그마저도 사라져 버린다면 모든 게 허무로 돌아갈 터.
끊어져야 하는 인연을 옭아매고 있는 합환 증표가 사라진다면, 그땐 오롯이 강을 향한 증오만이 존재할 것이었다.
은재는 그때가 오지 않길 바랐다. 지푸라기를 잡듯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저의 희망을 앗아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