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weet Home (43/43)

Sweet Home 上

애인사이인 사람 둘이 붙어살다 보면 좋아서 죽고 못 사는 때가 분명히 있다. 지난 달에는 그랬다. 운이 좋게도 쉬는 주말이 많아서 눈만 맞으면 배도 맞춰댔고, 틈만 나면 데이트도 하러 다니고,심지어 평일에도 꼬박꼬박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얼마 전에 결혼한 철호형 말로는 아내에게 어떤 선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과 용돈 스케일이 달라진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실감하면서 한 달을 보냈다. 최근까지 원우는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새로 걸어둔 액자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시선으로 한참을 감상하곤 했다. 소정이의 이름을 도용해서 사진과의 졸업작품인 척 뻥을 쳐가며 주문을 했는데 먹혔을지 안 먹혔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싼 돈 주고 만든 보람이 있었다.

그것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지만. 약발이 떨어져 가는지 원우도 나도 슬슬 평소로 되돌아가고 있다. 일단 오늘 아침부터가 시작이다. 아까 원우가 보내온 문자를 무시하고 일을 하다가 겨우 깜이 났을 때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켜보았다. 

-저기요 노은율씨 니가 청소 담당 아니라고 이러면 돼 안돼?

그리고 아침에 주방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다가 급하게 출근하느라 대충 오므려 놓기만 하고 나온 쓰레기봉투가 옆으로 쓰러져 있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누가 쓰러질 줄 알고 그렇게 해놨겠냐고 변명을 하려는데 정아가 맞은 편에서 내 모니터를 툭툭 건드렸다.

“지금 드린 거 확인 언제 되냐니까요?”

“아,지금 해줄게. 잠깐만.”

한 시간 뒤에 회의가 잡혀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문자를 보고도 답을  화를 해 같아서 얼른 문자부터 보냈다.

-ㅈㅅ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이 오는데 맞장구를 쳐주고 있을 시간이 정아가 시시각각 보내오는 자료를 제크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을 수정하라고만 해도 한 시간이 모자란데 문자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두어 번 더 진동이 오더니 조용해진 핸드폰이 뭔가 심상치 않았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갔다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회의가 끝나고 완전하 녹초가 되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잔터라 오늘은 점심 대신 잠을 선택했다 휴게실 소파에 엎드러져서 꿀 같은 잠을 자고 있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깼다. 뒤에 사람을 우르르 달고 들어오던 철호형이 눈을 동그랗게 떤다  

“너 밥 안 먹었냐?”

“어어,졸려서…. 좀만 더 자고….”

“자긴 뭘 자,오 분 있으면 점심시간 끝나는데.”

그럴 리가,한 십 분 잔 것 같았는데….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을 했 다. 정말로 점심시간이 고작 오 분 남아 있었다. 이대로라면 일 층에 가서 커피 한 잔 사올 시간도 안 된다. 결국 좋아하지도 않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앉아서 멍한 눈으로 홀짝홀짝 커피를 마셨다. 사무실로 들어갈 때 뒤늦게 원우 문자가 생각났다.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 화면을 켜놓고 줄줄이 들어와 있는 문자를 확인하면서 스트레칭을 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계란껍질 일반쓰레기봉투에 버릴 거면 물이나 좀 빼고 버리라고 

-그리고 반찬가게 스티로폼 버릴 때는 한 번만 제발 행궈주면 안 되냐 

-양념이 다른데 죄다 묻잖아 

-답 없는 거 보니까 바쁜가본데 

-쨌든 사랑하고

_양파즙 먹었으면 봉지는 한곳에 모아놔라 분리수거해서 버리게

-보고 싶다 이따 봐

묘하게 일관성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일관성이 없는 문자들아다. 그래서 주제가 뭐야? 사랑한다는 건가?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라는 건가? 사랑하지만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라는 건가? 쓰레기를 제대로 못 버리지만 그래도 사랑한다는건가? 하여간 누가 보면 혼자 살림 다 하는 줄 알겠다.

보고 싶다고 기특한 소리를 하길래 회사에서 몸올 불사를 각오로 일 해서 오랜만에 금요일에 일찍 퇴근을 했는데 집에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광경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분명하 혼자 밥 먹을 때도 이왕이면 식탁을 쓰고 TV를 보면서 바닥에서 먹을 거면 쟁반에 받치기라도 하라고 백 번은 말한 것 같은데 무슨 개도 아니고 방바닥에 밥그릇과 반찬그릇을 늘어놓고 밥을 먹고 있다. 그러다 내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황급히 쟁반을 찾으러 일어난다. 이미 늦었다. 싱크대 옆에 세워놓은 쟁반을 치켜들자 원우가 반사적으로 가드를 올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진짜 다 갖다 놓고 쟁반에 받치고 먹으려고 했는데….”

“방바닥에서 저러고 먹으면 바닥에 뭐 튀었을 때 닦기 안 힘드냐? 얼룩 생기면 그거 어쩔래?”

“어차피 내가 닦잖아. 얼룩 생기기 전에 얼른 닦을게.”

“왜, 어차피 니가 닦을 건데 아예 바닥에 뿌려놓고 먹지.”

“아 거 참 알았다고,쟁반 내놔.”

툴툴거리면서 쟁반을 들고 가더니 반찬과 밥을 대충 올려놓고 TV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뭘 끄렇게 열심히 보나 했더니 젓가락을 꼭 쥐고 입까지 벌린 채로 아이돌이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남자 아이돌이 나올 때는 별로 관심도 없이 밥을 퍼먹다가 다리를 온통 내놓고 가슴을 강조한 야시시한 무대의상을 입은 여자애 하나가 나오니까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저번에도 퍼피걸즈안지 멍멍소녀인지 보느라 정신 못 차리다가 혼나더니 그새 다른 아이돌로 갈아탔나 보다. 노래도 더럽게 못하면서 혼자 나와 자신감 넘치게 엉덩이를 실룩거리고 있는 여자애를 보느라 침이라도 홀릴 기세다.

“언제는 개소녀 좋아하더니 그새 바뀌었냐?”

“재가 퍼피걸즈 멤버야. 아오 해피 솔로 쩔어주네. 아 진짜 예쁘다.”

“예쁘긴 뭐가 예쁘…“

“재 약간 약간 은지 닮지 않았냐?”

“누구? 노은지?”

“응,난 재 은지 닮아서 좋아하는데.”

입을 쩍 벌렸다.잠시 머릿속에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리고 다시 TV화면을 쳐다봤다.갑자기 해피인지 뭔지하는 애가 엄청 이뻐 보인다.

“갖다댈걸 갖다대라“

“하긴 은지가 좀 더 예쁘긴 해.”

“...넌 진짜 이상한데서 팔불출이 되고 그런다.누은지 말고 박은지나 김은지 말하는거냐?뭐 다른 은지가 있어?“

“김은지 박은지 누군지는 모르는데 무슨소리야.우리 은지 말하는거지“

“..........“

“그러고 보니까 너랑도 닮은 것 같고”

이게 또 슬슬 헛소리에 발동을 걸고 있다 슬금슬금 옆으로 붙어 앉더니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쥐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이러다가 또 키스나 하고 덮치려고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음흉하게 웃으면서 입술을 들이댄다. 고개를 돌려서 피하 려고 해도 붙들려 있어서 피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빨리면서 뒤로 눕히려는 원우와 힘싸움을 했다. 눕히려는 게 내 쪽이면 체중을 실어서라도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원우가 눕히려고 작정을 하면 당해낼 수가 없다. 버텨보려고 바닥을 짚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결국 머리를 찧으면서 광 하고 넘어졌다.

모서리에 찍히는 느낌과 함께 김치국물 냄새가 확 올라왔다. 눕힐 때 눕히더라도 뒤를 좀 보고 눕혀야지 막무가내로 밀어 눕히는 바람에 김치가 담겨 있던 그릇에 그대로 뒷머리를 담갔다. 그릇이 엎어지는 소리에 놀란 원우가 나를 얼른 일으켰지만 이미 뒷머리에서 김칫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안해,못 봤어.”

“내가 이래서 식탁에서 밥 먹으라고 말했지,어? 쟁반에 잘 좀 담아서 한쪽에 치워놓든가,아 존나 아파,어후.”

“잠깐만,수건 가지고 올게.”

엎어진 그릇에서 쏟아진 김칫국물이 바닥에 스며들 것 같아서 얼른 휴지부터 뽑아닦았다.김칫국물이 셔츠 옷깃을 적시고 김칫국물을 뒤집어쓴 김에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원우가 방바닥을 밀고 벌떡 일어났다. 바닥에 나를 앉혀놓고 소파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해집어가며 열심히 내 뒤통수를 살핀다.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한참을 내쉬고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려고 팔을 뻗어왔다. 뿌리치다가 튀 통수로 아예 얼굴을 들이받아 버렸다. 얼결에 코를 얻어맞아 밀려나면서 혹시 못 본 곳아 있는자 계속 내 머리카락을 뒤적거린다.

“이 잡냐,그만 봐.”

“멍들었을까봐. 혹 생기면 어떡하지,아 진짜 식겁했네.”

“그러니까 그놈의 밥 좀,차라리 후딱 먹고 TV를 보라고.”

“싫어하는 거 알겠는데 조금만 참아줘라. 저녁 혼자 먹는 거 생각보다 되게 심심해. 좀 쓸쓸하고. 넌 거의 늦게 오고 난 거의 일찍 오니까,매번 근태나 현정이 불러서 밥 먹을 수도 없잖아.”

시무룩한 목소리 때문에 뭐라고 화도 못 내겠다. 보통 한 달 근무일수 중에 절반이 넘게 늦은 퇴근을 하니까 원우 말이 틀린 말도 아니고,그렇다고 일찍 오겠다고 할 수도 없고,노력해보겠다고 해봤자 내 노력과 회사의 일정은 전혀 다른 것이가 때문에 장담도 못한다. 괜히 방바닥 휘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원우와 다리를, 슬쩍 붙잡았다.

“알았으니까 쟁반은 꼭 써. 장판 사이에 김칫국물 들어가면 청소하기 존나 힘들어“

“알았어,잘못했어.”

“오냐.”

“머리 진짜 괜찮야?"

“괜찮아.”

“다시 안 봐도 돼?”

“어.”

“울리거나 그러지 않고?”

“안 울린다고. 멀쩡하다니까.”

 “그럼 됐네.”

바로 전까지 수심과 걱정아 가득한 목소리 톤이 슬짝 올라간다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가 코앞까지 와 있는 원우 얼굴 때문에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밀쳐내지 못하도록 양팔올 꽉 붙들고는 몸으로 눌러서 순식간에 뒤로 눕혀버린다. 그 와중에도 잊지도 않고 잽싸게 내 뒷머리를 손으로 받치기까게 했다. 마치 내가 괜찮다고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둣이 너무 자연스러운 연결동작이라 황당해서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그냥 납작하게 깔려버렸다.

“기껏 너 일찍 퇴근한 날인데 하루 그냥 날리는 줄 알았어.”  

“이러려고 일찍 온 거 아니라고.”

“나 보려고 일찍 온 거잖아.”

맞는 말이지만 왠지 분했다. 하도 쫄아있길래 생각도 못했는데 이런데서 낚일줄 몰랐다. 조금 더 연습시켜서 배우 데뷔를 시켜도 될 판이다. 아니,배우를 하기에는 얼굴에서 탈락인가 그때 원우가 웃으면서 이마를 맞대고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뭐 이 정도면 그래도 봐줄만하자 않나? 콩깍지를 열 겹 쯤 씌운 듯한 생각을 하면서 괜히 닿은 이마에 힘을 주어 꾹꾹 눌렀다.

“너무 그러지 마. 자주 일찍 오지도 못하면서,어차피 일찍 온 거면 나랑 놀아줘도 되잖아.”

“너랑 놀다가 병나겠어서 그러지.”

“병 안 나게 할게.”

“........“

“응?“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면서.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눈빛을 보니까 하지 말라고 했다가는 울게 생겼다. 말로 대답하는 대신 목을 끌어안았다. 몸이 힘들어져서 귀찮을 뿐이지 나라고 뭐 하기 싫은 것도 아니었고 다만 이건 하기 싫다. 욕조 가득 물을 받으면서 한숨올 푹푹 쉬었다.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욕실 바닥에 대충 던져 놓은 시트와 수건 뭉치들을 보니 빨래를 할 일이 까마득했다. 다른 건 몰라도 특히나 시트는 꼭 직접 빨아야 했다. 내가 아무리 뻔뻔해도 정액이 묻은 시트를 세탁소에 들고 가서 동호수를 불러주고 세탁을 맡길 배짱은 없었다.

원우와 처음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집안일을 어떻게 나누어서 할 것인지에 대해 세세하게 규칙을 정했었다. 그때는 오래 같이 살 거라는 생각으로 그랬다 기보다는,방값을 아끼려고 같이 자취를 하게 되었다가 그런 문제로 인해 사이가 안 좋아져서 찢어지면 손해가 막심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였다. 같이 군대에 갔다 와서도 똑같은 규칙으로 살다 보니까 이제는 그 규칙이 몸에 배어버렸다.

말이 규칙이지 사실 별 것 없었다. 다림질이나 설거지처럼 바로바로 하지 않으면 굉장히 귀찮아지고 상대에게 시찼을 때 안면강타를 당할 수 있는 일은 각자 하고 있다. 빨래와 주방은 내 몫이다. 기본적인 일부터 시작해서 마트에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워 넣고 쌀이 떨어지지 않았나 체크하는 것까지가 내가 할일이다. 원우는 기본적으로는 집 전체의 청소와 각종 시설 점검 담당인데 차를 산 이후로는 차까지 알아서 챙기고 있었다. 생활비는 내가,공과금은 원우가 체크하는 것도 같이 살기 시작한 초반부터 계속 해온 일이다. 언뜻 보면 엄마와 아빠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역할분담을 해놓은 것 같지만 살다 보니까 처음에 이런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한 것이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기억이 안 나도 정말 신의 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원우에게 한 달간 생활비 통장을 맡겼다가 일주일이 지난 다음부터 밥과 김치만 먹으면서 나머지 한 달을 살았던 적도 있였고,지난번에 원우가 괜히 빨래를 도와주겠답시고 내 니트를 빨았다가 처참하게 망가뜨린 적도 있었고,차량점검 받으러 가야 된다는 걸 내가 해주겠다고 끌고 나갔다가 이상한 튜닝에 홀려서 덤터기를 쓰고 돌아왔던 적도 있었다. 피차 서로의 역할에 참견을 하지 않고 알아서 자기 할 일이나 잘하고 살자는 주의였다.

그러나 오늘은 좀 심각하다. 일단 김칫국물 범벅이 된 수건부터 초벌빨래를 한 다음 세탁기에 넣어 돌려놓고 욕조에 담근 시트를 빨기 시작했는데 헉헉거리면서 시트를 빨고 있으려니까 현자타임이 저절로 찾아왔다. 물론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하니까 자기가 싼 정액을 자기가 치우는 거라고 생각하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빨래가 내 담당이라고 해도 그렇지,신난 다고 섹스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욱신거리는 허리를 붙들고 이 짓을 하고 있으 려니까 이게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은 거다. 원우에게 해달라고 하려니 내 일을 떠넘기는 것 같아서 그건 좀 아닌 것 같고,그렇다고 그냥 계속 이렇게 역할 분 담을 하자니 오늘은 그나마 전날 원우가 매너플레이를 해줘서 빨래를 할 수나 있지만 좀 굶다가 하기라도 하면 그 다음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은데 아 짓을 해야 한다. 욕조 안에서 열심히 시트를 발로 밟아가며 고민을 하다가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머리를 헝클고 있었다

“안 힘들어?”

“다해가.”

타이밍도 참 잘 맞춘다. 욕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원우가 말로는 다 해 간다고 하면서 죽울 거 같으니까 당장 들어오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는 나를 보고 팔을 걷으며 들어온다.욕조 한쪽에 걸터서 빨래하는 원우를 구경하다가 말을 꺼냈다.

“우리 귀찮아도 콘돔은 좀 꼬박꼬박 쓰든가, 아니면 뭔 좀 깔고 하자.예전에 매트리스 쓸때처럼. 시트 치워버리든가 하게“

“세탁기로 돌릴 수 있으면 좋은데 세탁기를 한 번 알아볼까…”

“배보다 배꼽 키울 일 있냐. 그냥 최대한 시트 빨래를 줄여야지 ”

“이불 까는 건 니가 싫다 그랬잖아. 무릎 쓸란다고.”

“...아,그랬지.”

“극세사 이런 걸로 깔면 좀 낫나?근데 그건 비오거나 이러면 진짜 안 마를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다.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원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시트는 내가 빨 테니까 담가놓기만 해. 안 그래도 계속 마음에 걸렸어. 아침에 꼭 니가 빨래하는데 안 그래도 몸 힘든데 고생시키는 거 같아서.” 

“내가 할 일인데 뭐가 고생이야.”

“일이야 니가 할 일일지 몰라도 몸이 따라줘야지“

고맙기는 한데 이런 거에 바로 알았다고 하고 넘어가기에는 원우를 너무 알아서 탈이다. 팔짱을 끼고 미간을 좁힌 채로 올려다보았더니 원우가 왜 그러냐는 둣이 멀뚱멀뚱 쳐다본다.

“나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뭐가?”

“어차피 내가 빨래할 거니까,이러면서 막 안에다 싸고.” 

“허허,넌 날 뭘로 보고 그러냐.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너무하네.”

“어차피 자기가 닦을 거라고 쟁반도 안 쓰고 방바닥에서 밥 먹던 사람이 여기 있지 않았냐?”

원우가 입을 다물었다. 피식 웃고 있다가 세탁기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굳이 시트 빨래가 아니어도 할 일이 천지에 널려 있다. 결국 김칫국물이 덜 빠져 얼룩덜룩해진 수건들을 건조대에 널고 있을 때 원우가 시트를 들고 나왔다. 시트까지 널고 나니까 겨우 빨래 하나 한 것뿐인데도 둘 다 녹초가 돼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뒹굴뒹굴 굴러가서 원우의 배를 베고 누워 있다가 혼잣말을 했다.

“바꿔서 해도 해볼만할 것 같은데….”

“뭘,집안일을? 너 밥이랑 김치만 놓고 살던 거 까먹었냐?” 

“그건 집안알 때문이 아니라 니가 경제관념이 좆도 없었으니까 그렇지“

“지금도 뭐 딱히 나아진 게 없을 텐데.”

“왜,사회생활 짬이 있는데. 니가 청소하고,니가 빨래하고 주방 보호,장 보려면 식비는 필요하니까 그것까지만 니가 하고. 괜찮지 않냐?“

적금이나 보험,공과금 같은 것들은 나와 원우 둘 중에 담당하는 사람 명의로 나뉘어 있어서 그걸 이제 와서 다시 바꾸기엔 어지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기도 했다. 다른 것만 바꿔서 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원우도 비슷하게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른 덧붙인다.

“일주일만 해보고 안 되겠으면 바로 바꾸자?

괜히 서도했다가 집안 살림이 파탄나기 전에 알아서 주의하자본 말이었다. 그러자고 해놓고 다시 멍하나 누워 있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원우에게 물었다 

“근데 너 세탁기 돌릴 줄은 아냐?”

“너 나 되게 무시한다. 나도 자취 경력 십년 넘는 셈인데.”

“섬유유연제 언제 넣어야 되?”

“…뭐 꼭 그걸 넣지 않아도 섬유는 존나 유연하지 않을까. 섬유잖아“ 

진지하게 대답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나 여태 빨래를 대신 해줬을 때 섬유유연 제 따위는 써본 적도 없는 모양새다. 괜한 제안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율이가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많이 바뀐 내 성격과 은율아 성격이 더 바뀌고 있었다. 나는 좋은 쪽으로,은율이본 나쁜 쪽으로 이긴 한데 어차피 내가 데리고 살 거니까 크게 상관은 없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눈을 부릅뜨고 시비를 걸면서 화를 내는 게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는데 당황스러울뿐이지 똑같이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어지간한 건 그냥 넘길 수 있게 되었고,가끔은 성질을 내는 은율이를 적당히 달탤 수도 있게 되었다.

일종의 요령이 생긴 셈이다. 내가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은율이의 화가 더 금방 식는 다는 것을 몇 번 체험하고 나니까 차라리 그게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똑같이 맞받아쳤다가 기분이 상하고 데면데면해지는 것보다는 내가 한 번참아 넘기고 은율이가 적당한 타이밍에 사과를 해오면서 전쟁경보가 해제되는 편이 서로에게 좋았다.

성격만 변한 게 아니라 묘하게 체질도 변하는 것 같았다. 원래 나는 잠자리에 예민하게 구는 편이 아니다. 군대에서는 밖에서도 잘 잤고, 제대하고 처음 살던 옥탑방에서도 덥건 춥건 잘만 잤다. 환경이 조금 나아진 이곳에서는 당연히 더 잘 잤다.

그러나 요즘은 이게 잘 자는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 자기는 자는데 일어나면 몸이 이상하게 찌뿌듯하고 무거웠다. 민기는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하는데,그렇다고 내가 한 번 잠들었을 때 풍차돌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몸으로 움직이거나 수시로 깨는 것도 아니었다,도대체 왜 그럴까. 늙어서 그런 건가. 이 나이가 늙은 나이는 아닌데.라고 고민을 하다가 그나마 제일 원인에 근접한 것을 찾았다.

“안 자냐.”

“어,아직. 먼저 자.”

집에 수험생이 있어서였다. 새벽 한 시가 넘어가는데도 모니터 화면 가득 영어 지문을 띄워놓고 공부 삼매경에 빠진 수험생 노은율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수능 때도 저렇게는 안 했을 거다. 그러니까 나랑 같은 대학을 다녔겠지. 대학 다닐 때도 저 정도는 안 했던 것 같다. 은율이의 공부 스타일 자체가 시험 기간에 몸이 버거울 정도로 혹사를 시켜가며 하는 타입이긴 하지만 지금은 좀 심하다. 앉아 있는 은율이를 뒤에서 스캔했다. 못해도 몸무게가 오 키로는 넘게빠졌을거다.

“뭐 만들어줄까?”

“아니.”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줘? 밥 안 먹었잖아.”

“됐어,

“커피?”

“차원우.”

짜증을 내면서 은율이가 의자를 핵 돌렸을 때 나는 재빨리 현관에 있는 슬리퍼부터 신었다. 긴급 탈출이다.

“알았어,나 담배.”

화를 내기 전에 얼른 나왔다. 이럴 때 부딪히면 혼자 토하고 잠도 못자고 온갖 난리를 치는 예민한 분이시니 내가 맞춰드려야지.

그러나 맞춰주는 건 맞춰주는 거고 내 잠이 문제긴 하다. 따로 분리되매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원룸이라 방 한 칸에서 형광둥을 켜면 꼼짝없이 밝은 데서 자야 했다. 모자가 달린 티셔츠를 입고 모자를 눈까지 내린 다음 자보기도 하고,안대를 써보기도 하고,아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자보기도 했지만 자다 보면 안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소용이 없었다. 몇 번의 실험으로 확실히 알았다. 은율이가 피곤하다고 조금 일찍 자는 날이면 나 역시 팔다리가 획획 돌아갈 정 도로 개운한 꿀잠을 잤다. 

심지어 불을 꺼둔 상태로 은율이가 잠깐만 기다리라 면서 콘돔을 손에 쥐어주고 사워를 하는 사이에 내가 잠들어서 아무 일도 없이 다음날이 된 적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피로가 엄청나게 누적된 것 같았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어렵게 은율이에게 말을 꺼냈다. 한두 달 같이 살고 말 것도 아니고,어쨌거나 은율이가 원하는 영어 점수를 받을 때까지는 계속 그렇 게 살아야 한다는 소리인데 몸이 무거우니까 일을 하기도 힘들어서 대책이 필요 했다. 가뜩이나 공부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럼 어쩌라는 거냐고 화를 내 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어렵게 말을 했는데 오히 려 은율이는 정말로 당황한 것 같았다.

“난 몰랐어. 계속 잠 설쳤냐? 여태? 나 공부하는 날마다”

“어? 아나 나도 몰랐는데…, 원인이 그거 밖에 없긴 해.”

“난 우리 처음 자취할 때 니가 불 켜도 잘 잔다고 그래서 당연히 잘 자는 줄 알았어. 공부하다가 보면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잘 자길래.”

“나도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체질이 바뀌었나 봐.”

“어휴…,신경 좀 쓸 걸.”

은율이가 저자세로 나오니까 왠지 내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 애가 공부를 한다는데 그깟 불빛이 대수냐, 하는 학부모의 심정아 되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그냥 공부하라고,알아서 자겠다고 손을 내젓자 고민을 하던 은율이자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미안,영어 시험 끝날 때까지만 참아“

“..어, 그,래야지.”

뭔가 대책이 나을 줄 알았는데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결말이었다 그 뒤로도 계속 불이 켜진 밤이었다. 만성 피로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낮에 다른 직원들이 모두 점심을 먹을 시간에 나는 휴게실 구석에 처박혀서 잠을 왔다. 당연히 거기도 불이 켜져 있으니 제대로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야간 근무조로 일을 하던 날은 기어이 코피를 쏟았다.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깔깔깔 웃으면서 허우대 멀쩡한 청년이 왜 코피를 쏟냐고 요즘 여자친구랑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그런 종류의 무리를 나도 좀 해보고 싶었다. 서로 피곤하니까 밤에 짬이 나더라도 간단하게 키스만 하거나 기껏해야 페팅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딱히 끝까지 하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다. 이러다 고자가 되는게 아닐까….

그러나 내가 고자가 되져 .전에 은율이한테 무슨 일 생길까봐 걱정이었다. 어깨도 결리고 허리도 아프다고 해사 비싼 마사지 끊어줄 돈은 없으니까 신사 아저씨에게 마사지 부탁을 하러 같이 목욕탕에 갔던 날이었다. 어깨 너머로 슬쩍 은율이의 몸무게를 보고 나는 경악했다. 여태까지 노은율 몸무게 중 최저치였다. 자기도 놀랐는자 몇 번이나 체중계를 확인한다. 뒤에서 딱 봐도 목덜미부터 허찍 아래까지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너 이러다 영양실조 오는 거 아냐? 제발 밥 좀 제대로 먹어라. 차려 먹기 귀찮아서 그래? 아예 다 차려놓고 갈까?“ 

“못 차려서 안 먹는 거 아니니까 그럴 필요 없어“

“그럼 좀 챙겨서 먹어. 뼈밖에 안 남았잖아.” 

“안 먹히는데 어떡해. 누군 먹기 싫어서 안 먹냐?“

솔직히 먹기 싫어서 안 먹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대학 때는 시험 공부 할때 시간이 없기도 하고 입에 뭐 넣고 씹기도 싫다고 해사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는데,자금은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까 밥을 먹어도 몸에 잘 안받는 모양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추어탕을 두 그릇 샀다. 은율이가 공부할 준비를 하는 동안 치즈계란말이까지 해서 그럴싸한 상을 차렸다. 밥에 많다고 반을 덜어놓고 나머지 반도 한참을 깨직꺼린다. 정 안 되겠으면 국물이라도 마셔보라고 그릇을 밀어주었다. 몇 번 떠먹더니 금방 수저를 내려놓는다-

“못 먹겠어?

“속 안 좋아.”

“…입덧이냐고 하면 때릴 거냐?”

물어볼 필요도 없이 맞았다. 표정 하도 심각해 보여서 잠깐이라도 웃겨주고 싶었는데 분위가 파악을 잘못했다.

그러니까 내차 피곤한 것도,은율이가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것도 모두 저놈의 영어 시험 때문이었다. 하도 긴장 하고 있길래 나는 은율이가 보는 영어 시험은 일 년에 한 번 보는 줄 알았다.그런데 그것로 아니었다. 그냥 남들은 매달 보기도 하고 할 때마다 보기도 하는 영어 시험 종류일 뿐이다. 기운이 없다고 일찍 누운 은율이 어깨를 다독이면서 나름대로 설득을 했다.

“마음 불편하면 공부고 뭐고 말짱 꽝이야. 너 그러다 시험날 가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지금?”

“예를들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긴장 좀 풀어. 못 보면 다음 거 또 보면 되잖아.”

“안 돼. 한 번에 점수 받아야 돼“

“아니,대체 왜,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는데. 나가 그런 생각을 하니까 자꾸 몸이,축나는 거 아냐. 좀 여유를 가지고 하라고.”

“내 몸 축나는 건 잠깐이야 내가 제대로 시험 못 봐서 취직 빨리 못하면 니 몸 축나는 게 한참이고”

말문이 막혔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이불올 올려 덮은 은율이가 꾸벅꾸벅 졸면 영어 점수 나와서,취직만 해봐, 넌 집에 오는 택배 박스도 못 놈의 박스들을 씨발 내가 진짜 다 뽀개버리든가 해야지.... 과격하지만 왜 그렇게 긴장을 한 채로 공부를 하는지 확실히 알았다.물류센터에서 일할때 내가 팔을 다쳤던 게 은율이한테 충격이긴 했나 보다.홀쭉하게 들어간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불 켜진 상태로 자는것에 대해 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는 주제에 생활비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자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공과금 납부부터 월세에 식비까지 지출해야 되는 모든 돈을 은율이가 관리하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서 마구 머리를 헝클며 짜증을 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공부히는 줄 알았다가 자세히 보면 가계부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차마 그것까지는 내가 하겠다고 할 수 없었던 게 나는 J마트에서 단지 개당 단가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두부 열 모를 한꺼번 사온다 나 마트 닫는 시간에 막판 세일을 한다고 해서 저렴하다는 이유로 토마토를 한 박스씩 들고 오는 멍청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반도 못 먹고 상해서 버렸다. 그 후로 은율이는 나에게 돈을 맡기지 않았다. 공부를 하는 것만도 바쁜데  오늘 식비가 얼마가 나갔고 어디서 어떻게 돈을 빼야 다른 돈을 메울지도 里만 하려면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게 뻔해서 생각 없이 몸만 움직여도 되는 단순한 집안일만이라도 내가 다 해주고 싶었다.

그나마 은율이가 제일 너그러워지는 시간은 모든 일과를 마치고 자려고 누울때였다. 하루 종일 말도 제대로 안 할 정도로 온 신경을.곤두세우고 있더라도 자기 전에는 경계령을 해제하고 이것저것 대답도 잘하고 가끔은 웃가도 한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수시로 뒤척거려서 어느 날부터인가 팔베개를 해주고 안아서 재우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는 꽤 잘 자는 편이어서 오늘도 누울 것 같은 타이밍을 보다가 잽싸게 먼저 이불 속으로 들어가 팔을 뻗어주었다. 원래 은율이의 성격이라면 닭살 돋는 짓 좀 하지 말라고 툴툴거린다거나 누굴 애 취급하냐고 짜증을 낼만도 한데 지금은 몸이건 머리견 완전히 지쳐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옆으로 들어와서 누운 은율이가 아예 내 가슴팍에 코를 박고 얼굴을 게 버린다. 이렇게 재울 때의 장점이 잠이 든,은율이 얼굴을 실것 볼 수 있다논 거였는데 이러면 장점 하나가 날아가는 셈이다. 대신 다른 장점이 생긴다 몸을 바짝 붙인 채로꼼지락거리더니 내 허리로 올라온손이 잠옷자락을꼭 잡고 어리광을 핀다.애취급을 안 할 수가 없다. 여태 살면서 은율이가 이런 식으로 어리광을 취했을 때를 빼면 거의 없다고 봐야 되는데 요즘 들어 부쩍 늘었다.

“오늘 지원서 넣었어.”

그냥 잘 줄 알고 등을 다독이고 있었는데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오늘도 자기 전에 말을 다 한다. 몸을 살짝 뒤로 물리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두워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핼쑥해 보였다.

“근데 좀 그래.”

“별로 하고 싶은 일도 아닌데 괜히 마음 급해서 지원서 넣은 거면 그러지마“

그러더니 한잠을 머뭇거린다. 영어 성적이 안 나올까봐 걱정이 돼서 그러나?그렇다고 지금 영어 성적 이야기를 했다가는 오랜만에 찾아온 좋은 분위기 망치는 짓일 것 같아서 말도 못 꺼내고 가만히 있었다.

“회사가…,좀 작거든.“

“응“

“구인광고만 본 거니까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업무 스타일이나 사람 구하는 조건 보면 잘 맞을 것 같아서 넣기는 했어,근데....시작한 지 얼마 안된 회사라 좀 힘들 수도 있대.“

“월급 떼먹겠대?”

“떼먹고 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적을 거라고 하더라“

은율의 입에서 농담이 나오는 것도 정말 오랜망이었다.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너 하고 싶은대로 해“

“...아직 확정된거 아니야,영어 시험 보고 점수 나와야 갈수 있는거라서“

“점수 당연히 나오겠지, 니가 공부하는 양을 봐라, 저 양이면 대학도 갈아탔다.내가 너랑 한두해 산 것도 아닌데 지금도 너 공부하는거 보면 왠지 물리는기분이야“

“떨어지기 싫으니까 그러지 ”

“떨어질 수도 있는 거지.“

“내 응시료 한번 내려면 너 진짜 오래 서 있어야해“

“그 응시료 아니어도 어차피 서있어야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잠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 은율이가 아까처럼 다시 바짝 붙어 안겨왔다.이번엔 진짜 자려는 것 같아서 토닥여주려고 등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내가 진짜 잘할께“

안 하던 말을 하면 귀엽든가 기특하든가 해야 되는데 이건 뭐 안 쓰러운게 먼저였다. 날개뼈가 튀어나와 있는 마른 등을 몇 번 쓸어주면서 대답했다.

“나중에 취직했다고 나 버리지나 마.“

“버리긴 누가 버려.”

“왜, 막 남자가 성공하고 나면 뒷바라지하던 여자랑 헤어지고 잘난 새 여자 만나고 그러잖아. 나쁜 새끼들.”

“....아침드라마 좀 그만 봐라. 아줌마가 다 됐네.”

“살림하는 사람은 원래 다 그런 거야.”

내려다보이뺨이 슬쩍 올라가있는 걸 보면 웃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는지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은율이를 웃게 만든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처럼 행복해지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하다.

은율이가 영어 시험을 보는 날 나는 일부러 오전 근무를 신정했다. 저녁 전에 드어가서 할 수 있는 요리를 최대한 해볼 참이었다. 회사 지원서 넣었다는 건 당장 서류 결과가 나오지 않는 거니까 아직 여유가 있었고,시험을 봐서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린 오늘이 뭐라도 먹일 찬스였다.일이 끝나자 마자 잔뜩 장을봐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안에 발을 디디자마자 마트에서 들고온 짐을 놓쳤다.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광경이 펼져져 있었다.

“일찍 왔네.”

“…어어.”

“왜 서 있어?”

“어? 어,아니….”

고 있던 은율이가 뒤늦게 내가 들고 온 마트 봉지를 보고 슬그머니 피자를 내러 놓는다 그 와중에도 치킨다리는 꼭 붙들고 있는 걸 보면 정말 먹고 싶어서 먹는 거긴 한가 보다

“장 봐왔어?”

“어,근데 뭐…, 안 봐와도 됐겠다.”

“왜,이따가 야식 해먹으면 되지.”

“…너 속 괜찮냐?”

“어.”

안 괜찮을 것 같은데. 마트 봉지에 있는 식재료들을 정리하면서 홀껏홀껏 은율이를 쳐다보았다. TV를 틀어놓고 음식에 둘러싸인 채로 정말 꾸역꾸역 잘도 먹는다. 여태 노은울이라는 인간과 살면서 저렇게 많은 양의 음식을 저렇게 입에 구겨 넣어가며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래카메라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온 것들이야 냉장고에 쟁여놓고 나중에 먹어도 되는 건데 과연 저 수많은 배달 음식들을 은율이가 다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다 먹는다 치더라도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던 몸이 그걸 버텨낼지 걱정이었다. 모양만 봐서는 무인도에서 살다 나온 사람이 생존을 위해 허겁지겁 먹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은 집에 소화제가 있었는지부터 체크를 했지만,최근에 뭘 먹은 사람이 있 어야 소화제를 사다 놓든가 할 텐데 나도 집에서 먹어봤자 한두 끼였고 은율이 는 그마저도 안 먹는 경우가 많아서 소화제가 있을 리가 없었다. 문 닫기 전에 약국부터 빨리 다녀와야겠다.

“담배?”

“어? 어.”

“가는 김에 이거 그릇 좀 내놓고 갔다 와.”

싹싹 비운 자장면과 짬뽕 그릇을 내미는 걸 받아들고 나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그릇을 내려놓고 다급하게 도로변에 붙어있는 약국으로 뛰어갔다.

원룸으로 뛰어와서 헉헉거리다가 숨을 가다듬을 겸 증거도 만들 겸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집 안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결국 다 먹지도 못하고 반 정도만 비운 음식들을 한쪽에 밀어놓고 은율이자 매트리스 위에 옹크리고 누워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서당개가 삼년 서당을 다니면 풍월올 옮는데 삼 년도 넘게 노은율이라는 까다로운 인간과 동거한 차원우가 풍월 정도로 그칠리가 없지. 얼굴올 온통 찌푸리고 있던 은율이가 겨우 눈을 떠서 내가 온 걸 보더니 끙끙거린다.

“배아파.”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어제까지 물도 제대로 만 마시려고 했으면서 긴장 풀렸다고 이렇게 먹으면 돼,안 돼?”

“앉아봐. 손 따줄게.”

시험 기간 때마다 꼭 한 번은 멀쩡하게 밥 먹고 나서 곧바로 앓아눕는 예민쟁이 덕분에 이제 손 따는 데는 이골이 났다.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은율이를 일으켜 앉히고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왔다. 라이터 불에 바늘을 달구면서 나도 모 트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가 걷어차일 뻔했다. 은율이가 지금 힘이 없어서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내가 내 손을 찌를 뻔했다.

“노래가 나오냐,나쁜 놈아.”

“끝나긴 끝났구나. 역시 노은율의 시험기간은 손 따는 걸로 끝을 봐야지“ 

“아픈 사람 두고 할 소리냐고, 아 진짜 아파! 살살 좀 해봐.”

“그러니까 왜 그렇게 미련하게 먹냐. 소화도 못할 거면서.” 

시커멓게 죽은 피가 풍풍 솟아오른다. 팔을 주무르고 손을 꽉꽉 눌러서.피를 짜낼 때마다 아프기는 진짜 아팠는지 몸부림을 치더니 그것도 잠깐이고 곧 기운을 잃고 팔을 내준 채로 가만히 누워 있다. 약국에서 사온 곰돌이 그림이 그려진 밴드를 붙여주었다. 뜨악한 표정으로 다른 밴드를 찾길래 토끼 그림이 그려진 걸 흔들었더니 손을 이불 속으로 얼른 집어넣는다. 땀이 맺혀 있는데도 서늘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숙숙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하나만 해라,하나만. 시험공부를 할 때 하더라도 밥을 제대로 먹든가,아니면 시험 끝났다고 이렇게 배달로 뷔페 차리지 말고 죽이나 밥부터 먹든가.” 

“...진짜로 배고파서 시킨 거였어.”

“그럼 하나만 시켰어야지.”

“다 먹고 싶어서…,”

“여태 그렇게 굶고 살았으니까 이해는 하는데 위장은 무슨 죄야,어?”

“....알았다고. 이제 안 그럴게.”

“당연히 안 그래야지. 평소에 음식 좀 넣어달라고 할 때는 대답도 안 하더니 갑자가 이러면 위장 개들도 어느 장단에 맞춰 연동운동을 해야 될지 모를 거 아냐. 그러다 진짜 속 버린다,알았어?”

그동안 예민한 인간 수발 들어주느라 참고 살았던 잔소리를 쏟아냈다. 사실 할 말은 더 많았다. 시험이 끝나서 스트레스를 받은 걸 풀고 싶으면 차라리 잠을 좀 푹 자든가,그것도 아니면 사우나 가서 뜨뜻하게 몸이나 풀고 오든가,이상한 방식으로숑트레스를 푸느라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걸 알기는 하냐고 혼을 내려고 했다. 아니,혼을 내고 있기는 했다.

“몸이 못 버틴다고. 영어성적 받고 나서 입사 준비하고 뭐 면접 준비하고 할 때마다 이러면?”

할 말을 매듭짓기도 전에 가만히 있던 은율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키스할래?”

“…어.”

이쯤 했으면 됐겠지 뭐. 잘못했다고 굳이 말을 해줘야 아나,애도 아니고 안 그러겠다고 하니까 안 그러겠지. 설마 또 그러면 그건 그때 가서 혼내기로 하자. 설마 또 그러진 않겠지. 설마….

자기 전에 뽀뽀는 많이 했어도 키스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혀가 얽히고 문질러주는 느낌이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참 입을 맞추면서 본능적으로 은율이 티셔츠 속에 손을 넣었다가 아차 싶어서 꺼냈다. 방금 전에 아프다고 손까지 따주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는데.

“그냥 해도 되는데.”

거기가 아니라는 둣이 은율이가 내 손을 바져 안으로 집어넣는다. 나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아 존재해서 일단 손을 한 번 뺐다.

“까불지 말고 그냥 자,인마. 몸도 안 좋으면서.”

“차원우 여유 있나 보네,막 튕기고.”

“까불지 말고 그냥 해, 인마.”

내 목소리를 따라하면서 은율이가 코 끝을 깨물었다 못이기는 척 티셔츠를 벗겨냈다가 살이 아니라 살가죽만 붙어 있는 것 같은 몸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마트에서 장을 봐올 게 아니라 어디 소문난 곳에 가서 보양식이라도 사왔어야 되나보다.

영어 점수는 역시나 은율이가 원하는 대로 나왔다. 그렇게 공부를 했으니 당연히 한 번에 통과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건 별로 걱정하지도 않았다. 이제 좀 안심을 했을 테니까 회사 면접 보기 전까지 뭐라도 잔뜩 먹여서 살부터 찌울 생각이었다. 매일같이 마트에서 음식을 사다 날랐다. 밥을 먹고 나서는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다.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하더니 슬슬 오버한다고 생각했는지 드디어 못 참고 은율이가 화를 냈다. 내가 무슨 임산부냐며 임신한 사람한테도 너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하진 않을 거라고 성질을 내길래 니가 임신했으면 이거보다 더했을 거라고 대꾸했다가 헛소리를 했다고 딱밤을 맞았다.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는지 얼굴에 조금씩 살이 붙는 게 보였다. 매일 아침마다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어서 확인을 했는데 슬슬 그립감이 돌아오고 있었다.어차피 공채 시즌 돌아오고 면접 보러 다니면 또 긴장해서 먹지도 못하노라 다 빠질 살이다. 차라리 많이 찌워놓기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퇴근하는 길에 집 앞의 노점상에서 전기구이.통닭을 네마리쯤 사들고 들어 갈 생각이었다. 한적한 버스안에서 이어폰을 꽂고 다리를 까딱거리며 음악을 듣고 있는데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음악이 뚝 끊겼다. 누군가 했더니 웬일로 은율이었다. 요즘은 계속 집에 있어서 따로 전화할 일도 없을 텐데,순간적으로 무 슨 일이 있나 싶어 황급히 전화를 받으려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어폰을 내던지듯이 빼고 부리나케 전화를 받았다. 어 왜,하고 다급하게 물었는데 전화 너머가 나보다 더 다급했다.

_너 어디야? 지하철역 지났냐?

“어? 아,아니,왜,무슨….”

-거기 지하철역 앞에 왜 그,정장 파는 데 있지, 그 뭐더라 이름? 아 씨 모르 겠다. 생각 안 나. 어쨌든 거기 열었나 좀 봐봐. 전화해봤는데 안 받더라고

“지금 막 지나고 있…,는데 열었어. 왜 안 열었어? 너 거기 내려서 잠깐만 기다려. 나 거기로 나갈게.“

“왜,무슨 일…“

이냐고 묻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급하게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들 은 거라고는 정장을 파는 옷가게가 문을 열었냐는 것과 기다리라는 것뿐이였다.정장이 필요한 일이 생겼나,하고 생각하다가 입을 털 하고 막았다. 설마 집에 초상이라도 났나,아니면 무슨 일이,혹시 어머니가 갑자기 올라오신다거나….

초조하게 보도블록을 툭툭 차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 개를 들었다. 횡단보도 신호의 파란 불이 십 초쯤 남았는데 길 건너에서 은율이 가 부리나케 뛰어오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내 앞에 도착한 다음에는 말도 못 하고 숨을 몰아쉬느라 헉헉거리기만 했다-

“무슨 일 있어?”

“잠깐만,어후 힘들어,아 오랜만에,뛰니까,진짜 죽겠다.” 

안색이 안 좋거나 표정이 굳어진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별 일이 아니구나 하기에는 반응이 너무 별 일인 것 같았다. 콜록거리면서 기침까지 해가며! 겨우 숨 쉬는 걸 보니까 왠지 나까지 다급해졌다.

“뭔데,무슨 일 있어?”

“저번에 원서 넣었다는,그 회사에서,전화가 왔는데.”

“어?”

“내일 아침에, 면접 보러 오래.”

“내일? 부슨 회사가 면접 일정을 그렇게 잡아? 거기 다단계 아냐?”

“내가 지원서에 핸드폰번호 한 자리를 잘못 써서,계속, 후우, 계속 다른 사람 한테 전화했었나봐 통화가 안 되니까 비상 연락망으로 전화를 했는데,내가 거기다가 엄마 번호를 써놔서,엄마가 이제 연락을 해줬는데….” 

은율이가 쓰는 입사지원서의 비상연락망에 이왕이면 내 번호를 쓰지 말라고 하긴 했었다. 보통 그런 곳에서 연락이 오는 세간에 나는 마트에 서서 객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전화를 받을 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머니 번호를 적어 놓았을 줄은 몰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멍청하게 서있는 동안 겨우 호흡을 고른 은율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닫겠다,빨리.”

“정장 사둔 거 있었잖아.”

“그거 소정이가 디자인이 너무 가벼워서 면접용으로는 안 된댔어.”

디자인이 가볍다는 건 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이 가게가 문닫기 전에 빨리 면접에 입고 갈만한 정장 한 벌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가 보다. 안으로 들어간 은율이가 전투적으로 정장을 고르기 시작했다,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삽분만에 산 정장올 돌고 집에 오자마자 은율이는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셔츠를 꺼냈다. 깨끗한 셔츠를 잘 다려서 걸어 놓고 인터넷으로 면접용 헤어스타일올 찾더니 욕실에서 열과 성을 다해 헤어스타일을 따라해 보고 있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딱하 도와줄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은율이가 맞춰 놓은 알람 때문에 같이 잠에서 깼다. 정작 은율이는 제대로 눈도 못 뜨고 있었다. 간단한 거라도 해서 먹여야 될 것 같아 토스트를 굽고 있을 때 두 번째 알람이 울렸다. 은율이가 뒤척아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는다. 잘 구워진 토스트를 반대로 뒤집어놓고 은율이에게 가까이 가서 귓속말을 했다. 일어나,너 면접 봐야 된다며.

그 말 한 마디에 은율아가 몸을 튕기듯이류벌떡 일어났다. 눈은 반밖에 못 뜬 채로 사워를 하고 머리를 만지느라 난리를 친다. 어제 연습했던 대로는 잘 되지가 않는지 마구 헝클어대면서 한숨을 쉬길래 가스불을 꺼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제 보니 손까지 덜덜 떨고 있다: 은율이는 보지 못할 뒤쪽 저리에 왁스를 살짝 묻혀 대충 매만지면서 물었다.

“뭘 그렇게 떨어,그냥 편하게 보고 와.”

“그 회사 놓치기 아까워서 그래?”

“그런 거면 어쩔 수? 없기는 한데,차라리 마음 비우고 면접실 들어가는 게 낫지. 그렇게 긴장해서 들어갔다가는 될 일도 안 되겠다.”

“나 토할 것 같아.”

옆에서 누가 시우팅을 해도 지금 상태로는 못 들을 것 같다. 포기하고 머리를 마무리한 다음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충분히 준비할 시간도 안 주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불러다 쓰나,회사를 원망해야 할지 연락을 늦게 해준 은율이 어머니를 원망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류합격 발표만 알고 있는 채로 면접날을 기다리며 살이 쭉쭉 빠지는 것보다는 살아 빠질 여유도 없이 바로 서류 합격 사실을 알게 되고 면접을 보러 가는 외려 나을지 모르겠다. 나야 말할 것도 없고 면접관들도 피골이 상접한 은율이보다는 그래도 볼살이 붙은 은율이를 더 좋아하겠지.

“잘하고 와“

넥타이 위치를 다시 잘 맞춰주고 어깨의 먼지를 털어주었다. 은율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을 나선다. 처음 은율이가 그 회사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을 때는 그냥 막연하게 일이 하고 싶어서 그러나 했었는데, 지금 하는 행동들을 보니 그 회사에 굉장히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은율이는 뭘 해도 잘할 거라 별로 걱정하지도 않았다. 구워놓은 토스트를 입에 물고 밀린 집안일부터 정리를 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오늘은 야간 근무를 하는 날이라 늦게 출근을 해 야 해서 이불을 펴고 아침에 못 잔 잠을 마저 자고 있었다. 한참 깊게 잠 든 때여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듣기는 했는데 몸은 못 일어나고 있었다. 인기척이 가까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똑바로 누워 있던 내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잠결에 잘 갔다 왔냐,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말! 하거나 말거나 움직이는 입술에도 계속 자기 입술을 누르고 있던 은율이가 천천 히 내 어깨를 안았다. 그제야 잠이 제대로 깨기 시작했다. 몇 번 심호흡을 한 은율이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떨어져서 이러나. 차라리 계속 자는 척이나 했으면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생각이나 했을 텐데….

“…원우야.”

“마트 아르바이트 오늘 가서 그만두고 와.”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덩달아 내 몸도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어서 눈을 뜨고 은율이를 돌아보았다

“이제 너한테 내 뒷바라지 안 시킬 거니까.”

베개 옆의 내 손을 잡아 팔을 뻗게 한 은율이가 상처가 났던 내 팔의 흉터를 아래부터 위까지 손가락으로 덧그린다. 웃고 있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마음에 두지 말라고 했는데도 정말 끝까지 사람 민망하게 만든다 누워있는 내 위로 엎드려 나를 안는 은율이의 등을 다독였다. 고생했다,내 새끼. 들썩이는 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지만,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차마 내 앞에 꺼내 보이지도 못하고 마음속만 가득 채우고 있던 미안함이 이제야 홀러나오는 중 일테니까.

첫 출근날도 술,두 번째 출근날도 술,그제도 술,어제도 술…. 벌써 일주일 내내 술이었다. 오늘이 토요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꿈까지 꿨다. 그러나 꿈에서는 토요일인데도 내가 출근을 하고 있었다. 아직 규모가 작은 회사라서 서로 도와주고 챙겨줘야 한다며 온갖 곳에 다 인사를 시키는 바람에 회식이 끊이질 않았다. 출근 닷새째인데 연차를 쓰고 싶어졌다. 아,아직 우리 회사 연차는 유나콘이라고 그랬었지…,상상속에나 존재하는 연차라니….

“아,해.”

일어나서 앉게는 앉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고 있다가 원우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눈을 떴다. 뭔자도 모르고 겨키는 대로 입을 벌렸는데 뭔가 뜨뜻한 게 흘러 들어온다. 몇 모금을 받아 마시니까 속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입 안에 들어온 건더기를 우물우물 씹고 나서야 알았다. 

“콩나물국…?”

“오늘 국 내가 끓이는 날인데….”

“내일 니가 끓이면 되잖아.“

그 말로 퉁치고 넘어간 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닷새째다. 그 말은 곧 첫 출근을 한 이후로 내가 집안일에 손을 하나도 못 댔다는 소리다. 패기 넘지게 이제 너한테 내 뒷바라지 안 시킨다고 해놓고 원우에게 또 뒷바라지를 받고 있 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들고 일어나서 두리번거리자 원우가 박수를 한 번 짝 소리 나게 쳤다. 놀라서 원우를 봤더니 차례대로 설명을 한다.

“아침밥 차려놨으니까 다른 건 안 먹더라도 콩나물국은 꼭 다 먹고 가라. 옷 장 앞에 셔츠 다려서 걸어놨으니까 그거 입고. 아,넥타이 맡긴 거 세탁소 아저 씨가 아직 안 됐대서 일단 내 거 꺼내놨어. 매듭 만들어 놨으니까 그냥 목에 걸 고 나가.”

“너….”

“나 오늘 스터디랑 학원.”

“밥…,

“저녁 스터디라 밖에서 먹고 들어올 거야. 넌 일찍 올 수 있겠냐? 오늘 금요 일이라 또 회식하는 거 아냐?”

왠지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아 어허허, 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웃었다. 커다 란 가방을 메면서 내 머리를 쓱쪽 쓰다듬은 원우가 현관으로 나간다. 갔다 올게,하고 말하는 소리에 대답도 못하고 있다가 얼른 쫓아 나갔지만 문이 닫혔다. 울리는 머리를 붙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 와중에 청소까지 싹 하고 갔는지 집이 말끔하다. 아침을 차려 놓은 쟁반과 셔츠가 걸려 있는 옷장을 한번씩 번갈아 보다가 어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공부를 하고 원우가 일을 할 때 원우가 그랬었다. 그래도 공부하는 사람보다는 일하는 사람이 마음이 덜 불편하니까 집안일은 자기한테 맡기고 넌 공부나 하라고. 그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길래 할만한 일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차원우의 몸과 마음이 강철로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물류센터 대타까지 될 때는 도대체 그 일을 하면서 어떻게 집안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회사에서 회식을 한다고는 해도 자정이 넘어서까지 이차 삼차 연차로 달리는 분위기도 아니고,그렇다고 내가 술에 약한 것도 아닌데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그대로 뻗어서 잠이 들었다. 결국 남은 집안일은 전부 원우의 몫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도 원우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내 몸 하나 씻고 준비하고 나가기도 바빠서 설거지만 간신히 해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가는 내내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그마저도 한숨에서 술냄새가 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더니 답답하기만 했다. 추말에는 조금이라도 집에 손을 대야 원우 보기에 안 창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자가 왔다 출금 예정 교통카드 금액,맞다,교통비,아침일찍 시작하는 수업이라 분명 지금도 수업을 듣고 있을 텐데 아침 일찍 원우에게 전화부터 했다. 한심한 인간이다.

회사에 와서 공과금 납부 항목을 제대로 살펴보고 나서는 빠짐없이 이체가 끝나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없어서 원우가 대신 납부를 해준 것 같았다. 이것도 사실 내가 해야 하는건데 나는 무능력의 표본이 따로 없었다 스스로에게 일이 바빠서 정신이 계를 대보지만,나보다도 먼저 나가서 하루 종일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스터디하느라 보통 자정 넘어서야 잠드는 원우를 보면 그 말도 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내가 어떻게든 영어 시험을 두 번 안 보고 점수를 얻으려고 기를 썼던 것처럼 원우는 재수를 안 하려고 기를 쓰고 있다. 이제 와서 대학을 다시 갈 건 아 니고,며칠간 소정이와 통화를 하고 민기에게 뭔가를 물어보더니 공기업 입사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원우가 그 말을 할 때 나는 전날 회식의 여파로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 상 앞에 앉아 졸고 있었다. 이제 보니 나 완전 인간쓰레기구나. 취직했다고 자기를 버리지 말라던 원우의 말이 이런 식으로 현실화 될 줄 몰랐다. 본의 아니게 버려두고 있는 셈이었다. 아니, 버려두었다기보다는 완전하게 달려 있다. 원우가 없었으면 출근할 때 입고 나갈 옷도 없었을 거다.

여태까지 원우랑 같이 살면서 이렇게 원우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해본 적 없었다. 한참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설칠 때에도 원우가 강제로:내 집안일을 떠맡기 전인 초반까지는 내 몫의 집안일을 칼같이 해놓고 공부를 했었다^돈 계산에 약한 원우 대신 생활비 통장과 납부 통장을 책임지면서도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 백 번 양보해서 공부보다 회사 일이 더 바쁘고 신경을 쓸 거괴가 많다고는 해도 자기가 입을 셔츠 하나 다려 입자 못한다는 건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 기필코 이번 주말에는 원우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해야겠다. 오늘 회식을 하고 집에 실려 가는 한이 있더라도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원우 담당인 청소부터 미리 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계획으로 끝났다. 한 주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금요일 마지막 회식이 끝나고 나서 택시에 실려 집에 왔다.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도 못 일어나다가 겨우 원우에게 전화를 했다.자다가 일어난 원우가 뛰어내려와 나를 업고 올라온 게 기억이 나니까 미칠지경 이었다. 그리고 실컷 늦잠 자고 일어난 지금,집은 또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머리맡에 원우가 써놓고 간 메모가 있었다

-스터디가 있어서 저녁 먹고 들어올게 어제 술 많이 먹어서 속 안 좋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밥 꼭 먹어라 일어나면 세탁기에 이불 빨래 탈수해서 널기만 해 다른건 다 해놨으니까

메모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다가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하여간 제대로 하는게 하나도 없다. 일단 밥부터 먹고 원우의 퀘스트부터 해결을 해야겠다. 밥 차리고 수저를 들고 막 앉았을 때 전화가 왔다. 회사를 소개해주고 입사를 하는 동안 이것저것 도움을 준 학교 선배 누나였다. 받을 때까지만 해도 안부를 묻고 회사 이야기를 하다가 금방 끊게 될 전화인 줄 알았다

一그래서 지금 어딘데?

“예? 저 집이요.

-너 집 어디더라?

“학교 근처요.”

-진짜? 잘됐네,나 오늘 교수님 뵈러 잠깐 학교 왔거든. 점심 안 먹었으면 점심 먹자.

“어…,네 뭐,안 먹기는 했는데….”

한 숟가락도 뜨지 못한 밥을 내려다보면서 우물쭈물했다.

-뭐야,안 나오는 거야? 나 한 턱 얻어먹어야 되는데 노은율 엄청 비싸네?

“그건 아니고요. 당연히 사드려야죠. 누나 어디세요?” 

-정문 앞에 카페에 있는데 이쪽으로 올래?

“네. 저 지금 일어나서요. 얼른 씻고 갈게요.”

-대충 세수만 하고 나와도 돼. 얼른 와.

사방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혼자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 내가 다니고 싶어했던 회사를 소개해준 건 고마운 일이니까 당연히 밥 사려고 했지만….

뚜껑이 열린 채로 멈춰 있는 세탁기와 맛도 보지 못한 아침 밥상을  고민하다가 결국 일어났다. 가서 장단 맞춰 주다가 적당한 타이밍에서 원우보다 먼저 집에 올 생각이었다. 스터디를 하고 저녁까지 먹고 온다고 했으니까 자리에서 잘 빠지기만 하면 될것 같았다.

그리고 이놈의 계획은 아여간에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나를 두고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선배들은 몇 시간을 카페에서 떠들다가!여섯시가 넘어서야 겨우 밥을 먹으러 가자는 말을 꺼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생활비 통장을 탈탈 털어 밥을 사주고 나서 집에 오려고 했는데 몇 명이 더 합류했다. 먼저 취직을 한 선배 형이 맥주라도 한 잔 하고 가자며 사람들을 붙들었다. 엉겁결에 끌려가서 맥주에 소주까지 몇 잔 마시고 원룸에 올라갈 때는 이미 저녁은 한참 전에 지났고 늦은 밤이 다 되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계단을 오르다가 원룸 베란다에 널려 있는 이불을 보자마자 헉헉거리던 숨이 딱 멈추는 것 같았다.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tv를 틀어놓고 빨래를 개고 있던 원우가 나를 홀껏 보더니 왔냐,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TV로 눈을 돌린다. 미안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빨래 개는 거라도 도와주려고 옆에 앉으려는데 원우가 팔을 뻗어 막았다.

“씻고 와라,술 냄새 난다.”

“어? 어….”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많이 시킨 것도 아니고 고작 이불 한 장 탈수해서 널어달라고 한 건데 그걸 못하고 밖에서 술이나 처먹다가 들어왔으디 내가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이미 더 갤 빨래도 없었다. 다림질을 하려는자 다리미판을 펴고 있길래 얼른 가서 붙들었다 

“내가 할게.”

“음주 다림질 하다가 손 다쳐. 가서 자.”

“괜찮아. 그냥 내가 할 테니까 줘.”

대답도 안 하고 셔츠를 펼쳐 놓는다. 진짜 화가 난 것 같다. 화가 날 만도 하지. 어정쩡하게 옆에 앉아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문득 다리미판 옆에 원우의 커다란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일은 학원을 안 가는 날이니까 문제집이나 노트를 꺼내놓았을 만도 한데 지퍼도 열리지 않은 체 그대로 있는 걸 보면 오자마자 짐도 못 풀고 집안일부터 한 모양이다.. 아까는 벽에 머리를 박았고 이번엔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내 꼴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둣이 원우가 물었다

“뭐야?”

“미안합니다.”

“뭐가?”

“죄송합니다,제 잘못입니다….”

“왜, 너 나한테 뭐 죄 지었냐?”

“네….”

“어떤 새끼야?”

“어?”

“어찐지 아까부터 내 눈치를 슬슬 보는 게 이상했어. 어떤 새끼냐고.”

“…어?”

“누가 너한테 꼬리쳤어?”

“아니 그게 아니라,그냥 학교 선배가 불러서 나간 건데,나 회사 소개… “

진짜로 당황해서 팔까지 휘적거리며 설명을 하려는데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원우가 크혹혹,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허리도 못 펴고 몸을 떨고 있는 걸 보니까 저건 백 퍼센트 웃는 거다. 뒤늦게 원우가 날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는 데도 왜 사람 가지고 장난을 치냐고 화를 내기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와 난 너 그렇게 소심해질 때 정말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

잉여인간 얹고 사는데도 좋다고 저러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내 팔자가 이렇게 상팔자인줄 몰랐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원우는 다림질을 하면서 내내 싱글벙글 웃고 있다.

“이걸 확 씹어 먹어 버리든가 해야지.”

“나 맛없는데.”

“안 먹어본 것도 아닌데 어디서 챙을 쳐,이게. 귀여운 소리 한다,응?”

“아오 진짜….”

“진짜 뭐,너 귀여운 거 안다고?”

“.....그만해라.”

“어유 우리 귀요미 삐지겠네.”

“아 차원우,좀!”

성질을 버럭 내놓고 일 초 만에 후회했는데 원우는 또 배를 잡고 웃고 있다 뒤늦게 깨달았다. 저거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구나.

“어쨌든 미안하다고요….”

“너 그거 알지 모르겠는데, 니가 가끔 나한테 뭐 미안하다 눈치 보면서 존댓말 할 때마다 나 존나 꼴려.”

얼굴이 확 붉어졌다. 미안한 건 미안한 게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이게 죽을라고.”

“와,집안일 덤터기 씌워서 일주일을 부려먹더니 꼴린다고 한 마디 했다고 사람 죽이려 드네.”

“그건 미안한데….”

“요, 도 해야지.”

“…잘못했어요.”

장단 한 번 맞춰줬는데 눈빛이 확 변하는 게 보였다. 이번엔 진짜로 실수한 것 같다. 갑자기 원우가 빛의 속도로 다림질을 시작했다. 다리미로 옷을 펴는 건지 힘으로 옷을 펴는 건자 모르겠다.

“너 딱 기다려라. 이거만 다려 놓고 씹어 먹어 버리게.”

“언제는 몸으로 로비하지 말라더니“

“오늘은 좀 해봐.”

능숙한 솜씨로 순식간에 셔츠 한 장을 말끔하게 다려놓고 앞을 정리한 원우가 내 팔을 붙들고 일어났다. 매트리스에 누워서 원우가 내 옷을 벗기는 걸 도와주면서도 기분이 참 애매모호했다. 이걸 지금 그냥 받아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불 한번 잘못 질렀다가 반쯤 죽여 놓을 때는 언제고 지금은 또 좋다고 덤비는 건지,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노은율.”

“어?”

“네,해야지.”

“미쳤냐?”

“얼른 ”

“안 해.”

“와, 치사하네. 기껏 일주일 내내 옷 다려 입히고 아침 차려 먹이고 청소 다 해놓고 속옷까지 싹 개서 서랍장에 넣어주고 술 취한 놈 업고 올라왔더니.”

“아 씨발….”

평소처럼 넘어가기에는 이번주의 나에게 약점이 너무 많다. 민망해서 새빨개진 얼굴을 팔至 가리고 있다가 겨우 한 마디 했다.

“...진짜 못하겠는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되냐,요.”

말도 안 화는 소리를 듣고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웃던 원우가 내 팔을 떼어내 고 얼굴을 두 손으로 단단히 고정시키더니 씩 웃는다.

“한 마디만 해봐,그럼.”

“뭐, 뭐라고….”

“이 중에 하나만 골라. 박아주세요,먹어주세요,죽여주세요.”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얼굴을 붙들고 있어서 피하지도 못하겠다. 이제는 얼굴이 아니라 몸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입술만 달싹이면서 말올 못하고 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하드부터 털어봐야겠다. 지난번 욕실에서 할 때부터 느낀 건데 어디서 미상한 영상을 잔뜩 수집해서 나 몰래 공부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필코 찾아내서 지워버려야지.

“…빨리 해주세요.”

일단 벌써 잔뜩 단단해져 있는 이 흉기부터 치우고 나서.

그리고 다음날도 내내 집안일은 원우 차지였다. 나는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으니까.

원우는 딱 일 년만 공기업 취직 준비를 해보겠다고 했다. 붙어서 끝을 내든 떨어져서 끝을 내든 해결을 보겠다며 나에게 일 년만 버티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큰 결심을 하고 진지하게 말할 정도의 일인가 싶었다. 예전에 내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처럼 학원비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집이 옥탑방이라서 살기에 불편한 것도 아니고,원우가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해야 할 정도로 사는 게 빠듯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공부가 모자란 것 같아서 이년 삼년이 될 것 같다고 해도 나는 그러라고 했을 것이다. 다만 원우가 너무 심각하게 말하길래 알았다고 대답을 하기는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왜 원우가 그렇게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시간과의 싸음이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생활은 오히려 편해졌다. 회사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말은 집안일도 원우에게 떠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온종일 공부를 하고 들어 와서 안하던 공부를 하려니까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다며 지쳐서 바로 잠드는 원우를 지켜보는 일도 익숙해졌다.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생활비 통장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내년이면 계약이 끝나는 집을 새로운 곳으로 옮기기 위해 적금을 부을 정도의 여유도 생겼다 원우의 부모님이 원우에게 조금씩이나마 학원비와 생활비를 보태주시는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괜히 잘 흘러가고 있는 판을 엎는 게 아닐까 싶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우리 끼리 어떻게든 해결이 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고 원우가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 대신 한약이 도착했다. 한약이 담긴 묵직한 상자에는 내 이름이 붙은 양파즙도 같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원우의 집에 대한 걱정을 접었다. 큰 산을 하나 넘었다고 생각하니까 나머지 큰 산이 앞에 있어도 마음이 놓였다 이 정도면 여태까지 원우랑 같이 살기 시작하고 나서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것이었다. 겉으로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나도 원우도 분명히 뭔가가 어긋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원우는 뭘 꼽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뀐 원우와 성격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할 말이 있으면 거괴낌 없이 지르는 게 원우의 스타일이었다. 이제 더분 소리를 지르거나 뭔가를 부수격 않더라도 기분이 마뜩찮을 때는 얼굴에서부터 티가 풀풀 나니까 오히려 파악하기가 쉬웠다. 심각한 것 같으면 같이 심각하게 분위기를 맞춰주고,그냥 조금 삐진것 같을 때는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쳐서 풀어주면 되는 거였다. 가끔 진지 하게 뭔가 이야가를 하려 할 때는 나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오래 같이 살았 으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 원우를 보면 그동안 내가 차원우와 살아온 것이 다 헛짓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이쯤 되면 몇 십 년 같아 산 부부처럼 잘 안다고 생각해놓고,내가 생각하는 것에 자꾸 어긋나는 일들이 생기니까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어제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마른 빨래를 개지 못하고 그냥 잠이 들었었다. 당장 입어야 하는 걸 널어놓은 게 아니니까 오늘 퇴근하고 나서 정리롤 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끄래서 아침에 원우가 수건을 찾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건조대에 걸려 있는 수건을 툭 던져주었다. 하필이면 수건이 원우가 뻗은 손이 아니라 바닥에 떨어졌다. 고작 그런 사소한 계기로 싸웠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지가 않는데 어쨌든 그게 시작인 것 같다.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서 가만히 보고 있던 원우가 새 수건을 달라고 했다. 출근 준비를 하던 중이어서 아무 수건이나 던져주고 말았다.

-그러게 미리 수건 개서 찬장에 올려놨으면 달라고 안 했을 거 아냐.

-그건 그런데.

-바쁜 건 알겠는데 챙겨야 될 건 챙기자.

정말 길 가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사과를 못할 것은 없었다.

농담도 농담 나름이다. 듣는 사람이 즐거워야 농담이지 내가 신난다고 농담 아니니까 원우가 기분이 나빴다면 내가 잘못한 거였다. 그래서 그냥 물어본 거 였다.

-화내는 거야?

-피곤하나까 나중에 얘기해. 너로 출근해야지.

나름대로 누그러뜨린 말투였다고 생각했는데 원우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당황해서 버벅거라는 사이에 획 나가버려서 더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출근하는 동안 버스에서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공부하느라 힘든 거 안다,미안하다,그냥 장난쳐려고 한 말이었다,오늘 저녁에 일찍 들어갈 테니까 같이 밥 먹자,원래 나였으면 가당치도 않았을 길고 긴 사과의 문자에 답장은 사진 파일 한 장이었다. 학원 시간표를 캡처해서 보낸 메시자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버스에서 욕을 할 뻔했다. 공부하는 시간이니까 문자하지 말고 닥치고 있으라는 건 예상치 못했던 원우의 반응에 잠깐 욱했던 마음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스물스물 기어 울라왔다.

그리고 나와 원우의 최대 위기였던 공포의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포문은 원우가 열었다 내무반의 다림질 요정이자 각 잡기의 신이었던 원우가 실수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구멍이 난 셔츠를 오 분이 넘게 들여다보았다.

“이거뭐나?”

옷을 입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원우가 옷장 문에 걸어둔 후 아무 생각 없이 입다가 뭔가 시커먼 게 보여서 처음엔 벌레안 줄 알고 했다. 그런데 차라리 벌레인 게 나을 뻔했다. 두 번째 단추 옆에 까맣탄 자국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심지어 구멍까지 뚫려 있다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설거지를 하는 원우에게 셔츠를 휘휘 흔들어보였다. 심드렁하게 뭔데,하고 고개를 돌린다.

“이거 뭐냐고.”

“그거 태운 거니까 다른 거 입어.”

“다리미 진작 샀어야 되는데.”

솔직히 호들갑을 떨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저런식으로 무덤덤하게 말할 거라고는 더더욱 예상을 못했다. 오죽하면 이게 내 셔츠가 아니라 원우 셔츠인지를 다시 보았을 정도였다. 내 눈이 이상한가 싶어서 눈까지 비볐다.

“다리미 왜, 뭐 이상해?”

일단 울컥하는 걸 한 번 참고 물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제대로 얼굴을 보고 뭐라고 해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원우는 바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바지 같은 건 괜찮은데 셔츠 다릴 땐 정상 아나야. 가뜩이나 얇은 옷인데 온도까지 지 멋대로 왔다 갔다 해서 딴에는 맞춘다고 용쓴 건데,결국 탔네.”

“결국 탔네,라고?”

지난번 수건 사건 때부터 원우와 묘하게 말이 안 통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제대로 대화를 하고 있기는 한데 샛길로 빠져서 대화를 하는 기분이랄까. 그 위화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한 번 더 참았다. 원인도 모르는 미묘한 신경전으로 아침부터 원우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일단 다리미부터 사자. 스터디 가기 전에 시간 되면 아무거나 하나 사.“

예상하지 못했던 지출이긴 해도 필요한 건 바로바로 사다 놔야 불편할 일이 없어진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현관 앞에 놓고 신발을 신고 있었다,나갈 준비를 하던 원우가 말했다. 가지고 가라 거지도 아니고,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반가워서가 아니라, 꼭 한 대 후려 맞을것 같아서

“뭐라고 했냐?”

“거지 아니니까 가지고 가라고?“

“야,차원우.”

“왜?”

“내가 지금….”

너한테 적선하려고 이 돈 추는 게 아니지 않냐 말을 하려다가 그냥 삼켰다. 단어 선택 한 번 잘못했다가 뭘로 싸움이 날지 가늠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내가 고개를 휘휘 저어 괜한 생각을 떨쳐내는 것올 보고 원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냥 나가자,일단 자리를 피하자,그렇게 생각하면서 현관문 손잡이 를 잡았다.

“돈은 사람 손에 줘. 이런 식으로 받으면 기분 별로니까.”

“야 아 새끼야,내가 지금 너 거지 취급 했다는 거냐? 어?”

결국 뒤에서 들린 말에 터져버렸다. 셔츠에 구멍이 난 걸 가지고도 아무 말도 안 했고,사과 한 마디 안 하고 심드렁하게 구는 걸 가지고도 화를 내지 않았 데 저렇게 같잖은 걸로 시비를 거니까 더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공부하느라 지 쳐서 괜히 툴툴거리는 거라고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는데 그게 입까지 내려오지 를 않는다. 씩씩거리면서 숨을 몰아쉬다가 돈을 주워들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자 서 원우의 가슴팍을 밀치듯이 돈을 떠넘겼다.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선 원우가 한 숨을 쉬더니 욕실로 들어가 버린다.

거기에 악재가 하나 더 겹쳤다. 오는 동안에는 화를 식히느라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있어서 몰랐고,회사에 도착하고 나서는 내 앞으로 떨어진 업무부터 처리 하느라 확인을 할 새가 없어서 몰랐다. 한참이나 회의실에서 전화로 나를 찾던 팀장님이 기어이'사무실까지 와서 노발대발 화를 냈다. 처음에 혼이 날 때는 영문도 모르고 죄송하다고 굽실거리다가 팀장님이 가고 나서 내 사수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설명을 해줄 때 뒤늦게 내가 핸드폰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알았 다. 개인 전화로 전화를 안 받으면 회사 전화로 전화를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내 물음에 사수는 머쪽하게 웃고 자리를 피했다.

일이 늦게 끝나거나 회식이라도 하면 집에 늦게 들어갈 수가 있어서 차라리 낫겠는데 오늘따라 팀장님이 칼퇴근을 해버려서 다 같이 일찍 퇴근을 하게 되었다. 원룸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서 마음에 뭉쳐 있던 울화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기분 나쁘게 하려고 일부러 바닥에 돈을 던져 놓은 건 아니치만 보기에 별로 안 좋았울 테니까 미안하다, 대신 너도 내 셔츠에 구명 낸 것에 대해서 나한테 사과를 해라,내가 양보할 수 있는 타협점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았었다는 둣이 원우가 현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오늘 많이 바빴냐? 연락 안 되턴데.”

“핸드폰 두고 갔어.”

“…혹시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내 까만 셔츠 빨았어?” 

“예약 걸어놓고나갔어.지금 돌고 있을건데.왜?”

묻는 말에는 대답올 안 하고 바로 세탁기를 확인하러 가 버린다. 얼른 뒤를 쫒아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돌아가고 있던 세탁기 뚜껑을 열자마자 짠 것처럼 둘이 동시에 아 씨발,하고 욕을 했다. 온 빨래에 흰색 종이가 물에 풀린 채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원우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거 아직 빨래 내놓은 거 아니었는데.”

빨래 바구니에 넣어 놓은 빨래에서 저런 현상이 발생했으면 내가 화를 내야 맞는 거였다. 빨래를 내놓기 전에 주머니를 비우고 내놓는 건 상식 아니냐고 성질을 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원우가 책상에 따로 올려둔 옷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침에 세탁기에 빨래 넣다가 뭔가 시커먼 게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넣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든 종이 조각이라도 건져보려고 원우가 빨래를 뒤적였지만 이미 한 번 탈수가 된 빨래에서 멀쩡한 종이 조각이 나올 수가 없었다. 한숨 쉬는 소리가 한 번 들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뭐 중요한 거 있었어?”

“됐어. 어쩔 수 없지.”

그러더니 획 몸을 돌린다. 정말 중요한 게 아니라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중요 한 건데 화를 참고 있는 건지 이변에로 표정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뒤를 쫓아 나갔다. 아무 말도 없아 책상 위를 정리하고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내고 있다. 분위기 파악이 되지 않으니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말아 막 쏟아지려는 걸 참는 데만도 힘이 들었다. 최대한 단어를 거르고 걸러서 입을 열었다.

“빨래 내놓은 건줄 알았어. 그냥 책상 위에 있길래.”

“..........“

“중요한 거 들어 있었면 거 아냐?”

“버린 건데 뭐. 어쩔 수 없으니까 신경 꺼.”

이마에 힘줄이 솟는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더 참았다. 

“진짜 괜찮은 거야? 중요한 거면….”

“어쩔 수 없다니까.”

“말 좀 끊지 마,씨발놈아. 아 나 진짜 돌겠네.”

그리고 애초에 인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내가 참는 건 거기까지였다.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서 입을 벌리면 중기라도 솟을 것 같았다. 가방의 문제집을 다 꺼내 쌓아둔 원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원우가 돌아보기 전까지 화를 내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리고 원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려던 말이 죄다 얼어붙은 것 처럼 막혀 버렸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다못해 짜증이 나 있기라도 해야 되 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이어서 손끝까지 차차 워지는 것 같았다.

“노은율“

“어쩔 수 없다고 이미 저렇게 됐잖아. 니가 미안하다고 해봤자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내가 화내봤자 멀쩡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됐다고 한 건 데, 넌 왜 화가 난 거야?”

“일하고 오느라 피곤했을 거 아냐. 씻고 쉬어. 내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차분한 목소리가 명치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요 며칠간 느꼈던 그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마음을 졸엿던 이유가 있었다. 원우는 지금 남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일이라니,갑자기 거리감이 확 생겼다. 당연히 원우의 일이 내 일이었다. 내 일이 원우의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운하다고 말하기에는 그 말을 했다가 원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어서 무서웠다. 도대체 그게 왜 서운한 일이냐고 한다거나, 내 일이라서 내일이라고 한건데 니가 왜 서운하냐고 한다면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질 것 같았다. 조용히 씻고 나와서 잘준비를 하는 동안 원우는 스탠드를 켜놓고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아래로 내리깔린 눈과 펜을 들고있는 손에는 흔들림조차 없었다.

다음날 나는 새벽 일찍 집에서 나와 버렸다. 원우와 같이 나갈 준비를 하고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자였다. 이러면 더 상황이 악화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뭔가를 시도할 수조차 없었다. 회사에서도 내내 멍하니 있다가 몇 번이나 팀장님 앞으로 불려갔다 첫단추부터 잘못 끼워졌으니 그 다음 단추들이 제대로 끼워질 리가 없었다 손을대는 것마다 실수를 하고 실수를 하는 것마다 혼이 나다 보니까 회사에서 탈출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회사에서 탈출하면 집에 가야 하는데 집도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밖에서 저녁 시간을 때워줄 만한 친구도 없었다. 민기는 취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락도 잘 되지 않고 있었고 소정아는 원우처럼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서 불러낼 수가 없었다.

집 앞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시켜 놓고 한 잔씩 들이켜면서 시간을 때웠다. 문득 원우가 학원에서 올 시간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연락을 해볼까 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지만 문자 하나도 선뜻 보낼 수가 없었다. 원우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도 포장마차에서 뭔가를 먹는 것을 좋아했다. 술도 못 먹는 놈이 왜 그렇게 아저씨처럼 포장마차를 좋아하냐고 놀릴 때마다 분위기를 먹으러 가는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웃곤 했었다. 생각해보면 첫키스도 포장마차 에서 한 셈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원우가 갑자기 키스를 해서 소주를 쏟고 테이블에 손등을 찧고,처음이 아니라고 벅벅 우기다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쫓겨나 그리고 골목길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또 한 번. 키스를 했었다.

예전 생각을 하니까 심하게 우울해졌다. 고작 소주 한 병에 취한 것도 아닌데  괜히 눈앞이 흔들거렸다.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 원룸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골목 길 계단 옆에 원우 전용 재떨이를 놔뒀었다. 가끔 학교에서 늦게 끝나거나 약속 이 있어 밖에 있다가 집에 올 때면 원우는 꼭 계단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 었다. 방금 나왔다고 뻥을 치지만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가 한두 개가 아닌 것 을 매번 들켜서,방금 나온 거라고 거짓말을 해도 눈감아주겠다는 의미로 놓아 둔 것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속아주면서도 연애를 잘만 했었는데, 지금은미,그 냥 가족 같은 건가, 혹은 그냥 친구라거나.

원룸 건물로 들어가는 골목 옆 계단에 조그리고 앉았다. 예전에 살던 자취방처럼 아래가 전부 내려다보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볼만한 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원름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한번도 밖을 제대로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옥탑방올 탈출하면서는 돈이 모자라서' 아르바이트 하는 데 바빴으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취직을 하고 나서는 일이 많아서 생각을 못했다. 오히려 간신히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고 오는 원우가 나보다는 이 야경을 더 많이 봤을거다. 예전에는 어지간한 건 전부 같이 했었는데 어느때부터인가 뭔가를 각자 하는 것에 바빠졌다. 그게 서로를 위한 거라고 말은 하지만 예전과 비교해 보면 당연히 더 허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앉아 있는 동안 원우가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한참 앉아 있다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원우는 언제 들어왔는지 벌써 자고있었다. 환경은 훨씬 나아졌는데 오늘 기분은 옥탑방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벌써부터 지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지친다는 감정이 무서웠다. 왜 버티라고 했는지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차곽리 모른 것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러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가라앉기 시작한 기분은 수습이 안 될 장도로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회사 사람들이 집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올 정도였으니까 이 정도면 숨겨두는 것도 불가능했다. 적당히 둘러대고 일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으니까 잔업이 계속 늘었다. 야근을 하는 날아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원우의 얼굴을 보기 더 힘들어졌다. 원우는 아예 새벽에 독서실에 가서 하고 바로 학원에 수업을 들으러 갔다. 학원과 스터디가 끝나면 또 바로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일주일을 통째로 말 한 마디 못하고 보내게 되었다. 가끔 얼굴을 볼 때면 정해진 것처럼 똑같은 말만 하게 되었다. 왔냐, 밥 먹었냐,나 먼저 잔다,그런 게 전부였다. 뭔가 더. 말을 할까 싶다가도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워서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니,그것보다는 내가 하는 말에 원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더 무서웠다. 이 상황에서 일이 틀어치면 정말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을 하니까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렇게 세 달 아 지났다. 세 달 중에 한 달은 꼬박 냉전 상태였다. 원우가 말한 기간에서 고작 사분의 일이 지났을 뿐인데 체감으로는 일 년은 더 지난 것 같았다, 수시로 채용 일정을 확인하고 합격자 발표날을 기다렸다가 원우의 눈치를 보는 것이 일이 계속 되었다. 제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그 생각뿐이었다. 만약 내가 취직할 때까지 원우가 기다려준 것이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져도 몇 번올 무너졌을거다.

평소처럼 야근을 하게 된 날이었다.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먹으러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한 달 전의 날짜에 맞춰있는 원우의 문자 창에 새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눈이 저절로 커졌다 메시지를 확인했다. 길지도 않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회사 앞인데 바쁜게 아니면 잠깐만 나오라는 메시지였다. 황급히 옷을 들고 아래로 뛰어 내려 가다가 멈칫했다. 회사까지 찾아온 걸 보면 급하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일지 모르겠다. 계단에서 몇 번을 내려갔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걸음을 떼었다.

회사 건물 옆의 좁은 골목에서 담배 연기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가 꼭 천리길 같았다.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원우가 전화를 끊고 담배를 대충 비벼 끄더니 손짓을 한다. 그리고 골목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원우가 내 팔을 당겼다. 가슴이 맞닿기가 무섭게 딸꾹질이 나왔다. 내 머리 위에 얼굴을 마구 비벼대더니 원우가 중얼거렸다.

“이제 좀 살겠네.”

“..........“

“필기 합격이래. 이렇게 금방 붙을 줄 몰랐는데 긴장한 보람이 있어. 인성검사랑 면접 남았긴 한데 그건 그럭저럭…,어?”

놀란 원우가 얼른 몸을 떼어내고 내 얼굴을 살피더니 허허,하고 헛웃음을 흘린다. 딸꾹질이 안 멈춰서 입을 틀어막았다.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눈물이 줄줄 나왔다.

“아직 최종 합격도 아닌데 왜 벌써 울고 그러냐. 민망하게.”

“그거 때문에 우는 거 아니야”

“은율아.”

나도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당황스러운데 원우는 오죽할까 싶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소매 끝으로 내 얼굴을 문질러 닦던 원우가 물었다.

“놀라서 그래?“

고개를 저었다.

“서운해서?”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힘들었어?”

또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원우가 어리둥절해 하는 게 보였다. 겨우 손을 떼어내고 한 마디를 뱉어냈다.

“그거,옥, 그거 전부 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새끼가 그동안 나 가지고 장난을 쳤나 하는 생각,필기라도 붙었다니 다행이라는 안도감,한 달 넘 게 말도 제대로 안 하더니 아무 알도 없었다는 것처럼 뻔뻔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원망,그것 말고도 한 스무 가지는 더 있었는데 나머지를 전부 덮 어버리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집에,흐,옥,집에 갈래“

발도 들이기 싫었던 지난 한 달 간의 집이 아니라,차원우와 같이 들어가는 ‘우리 집’에 가고 싶었다. 엉뚱한 소리에 웃음을 터뜨린 원우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알았다면서 내 등을 토닥였다. 무슨 애도 아니고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나 싶어서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을 게 무섭기는 했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꼴을 하고 회사에 올라갔으니 난리가 날 만던 했다. 팀장님은 우리 집에 초상이라도 난 줄 알고 얼른 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눈물 콧물 범벅을 한 얼굴을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내려왔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원우가 가까이 와서 내 어깨를 안았다. 밖에서 붙어 다닐 때 혼히 하는 행동인데도 오늘 따라 유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원우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너 쪽팔려서 그러지.”

“..........“

“와,살다 살다 노은율이 맨정신에 그렇게 우는 걸 다 보네.”

나도 신기할 지경이다. 그리고 신기한 것과 별개로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민망해서 미칠 것 같았다. 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원우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찌르다가 혼자 또 울컥했다. 이런 장난 치는 것도 한 달 만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옷만 갈아입고 포장마차로 향했다. 좋은 날이니까 외식을 하자 며서 원우가 메뉴를 시키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또 괜히 눈이 축축해지것 같았다. 얼마 전에 혼자 와서 술을 마셨던 게 생각나서였다. 살짝만 건드려 또 흑역사가 줄줄이 소시지처럼 엮여 나오게 생겼다. 마음을 가다듬고 소주를 연거푸 마셨다. 도대체 지난 한 달을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원우는 나를 앞에 두고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오랜만에 공부를 하 려니까 머리가 굳어서 혼났다,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두 가지가 한꺼번에 안 되니까 공부에 집중을 하면 옆에 누가 있어도 말 한마디 하는 게 힘들었다,집 앞 독서실 진짜 구리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꼭 붙어라,최종 면접까지.”

“붙으면 좋지.”

“붙으면 좋은 게 아니라 무조건 붙어.”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닥치고 붙어. 버티는 거 못해먹겠으니까.”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원우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을 마주하자마자 또 목이 꽉 막혔다. 이제 눈만 봐도 알겠다. 지금은 당황해서 저러는 거였다. 그걸 다시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미안해.”

“집안일 좀 밀리기는 했는데,일하면서 하느라 힘들었지?”

“이 둔한 새끼야.”

“이거냐?”

“아니라고 씨발.”

“…그럼 뭔데?”

“니가 나한테….”

남남처럼 굴지 않았냐고 말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입 밖으로 말이 안 자기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딱 잘라버리고,표정도 없이 화도 안 내와 그런것들을 막상 말로 하려니까 별 것도 아닌 걸로 꽁해 있었던 것 같아서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때는 나름대로 진지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무슨 실연당한 여주인공이 따로 없는 헛짓거리였다. 머리를 마구 헝클다가 소주 반 병올 단숨에 마셨다. 원우가 황급히 내 손목올 붙잡았다.

“천천히 마셔,뭐하냐 지금.”

“먹고 죽자, 좀“

“아니 대체 왜 그러는데?”

“됐으니까 그냥 놔둬.”

“와 나 오늘 노은율 진짜 모르겠네. 아깐 울더니 지금은 왜 이래? 이중인격이야? 말을 좀 해봐.”

“너나 말을 하지 그랬냐고 씨발,너나! 어? 너나 좀!”

불시에 속마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저만치에 앉아 있던 주인아저씨가 싸우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한숨을 쉬면서 얼굴을 마구 쓸었다.

“욕하니까 노은율 같기는 한데,근데 나 진짜 뭔지 잘 모르겠어.”

“…꼭 말로 다 해야 알아 쏟냐.”

“나 눈치 없는 거 하루 이틀아냐. 되게 새삼스럽네.”

“그러니까, 너 눈치 없는 거 하루 이틀 아닌데 난 아니었다고. 원래는 말로 안해도 알아들었었는데 못 알아들었다고.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봐도 모르겠어서,한달동안….”

“어,뭔지 알았어.”

결국 설명을 하게 만드는 차원우도 징하고 그걸 또 설명하고 앉아있는 나도 징하다. 반쯤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은 원우가 갑자기 음식이 남은 접시들을 들고 일어났다. 주인아저씨한테 포장을 부탁해놓고 나에게 고갯짓을 한다.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오르는 동안 원우는 말이 없었다. 나도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집으로 들어와서 싸온 음식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원우가 팔을 뻗는다.

“이리 와,너 좀 안아줘야겠다.”

“..........“

“안 놀릴 테니까 빨리.”

평상시에도 이렇게 눈치껏 행동하면 좋을 텐데 꼭 지가 멋있어 보일 것 같을 때만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는다. 원우의 허리를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한번 세게 꽉 껴안고는 원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 눈치 더럽게 없긴 하다.”

“알면 됐어?

“니가 그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건데.”

“서류 몇 개 떨어지고 나니까 진짜 붙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다른 거 볼 여유가 없었어. 나 사실 세 달 동안 뭐하고 살았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 독서실,학원,스터디,이거 말고 나머지는 그냥 나중에 붙고 나서 생각해야겠다 고 죄다 밀어놨는데,내가 잘못한 거 맞아.”

“너까지 밀어놓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멍청해서 또 후회할 일 만들었네. 이제 후회할 일 안 만들려고 했는데.”

원우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나 때문에 니가 신경 쓰는 게 싫어서 그랬던 거였어. 회사 다니기도 힘들 텐데 내일 때문에….”

“내꺼 니꺼 나누지 마.”

“원래 안 그랬잖아? 그리고 내가 신경 쓰면 좀 어때서. 내가….”

숨을 한 번 삼켰다. 놀리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내가…,내꺼한테 신경 쓰는데, 그게 왜.”

귀가 붉어지려는자 귀끝이 간질거렸다. 이 정도 오그라드는 말이면 사실 놀려도 할 말이 없었다. 원우가 이런 말을 했으면 나는 못해도 몇 달은 꾸준히 놀렸을 거다. 그러나 원우는 장난을 치는 대산 말없이 나를 더 꽉 껴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안 그럴게.”

“............“

“큰일 났네. 너 우는 거 보겠다고 입 털다가 감동 받아서 내가 울게 생겼어.” 

“털다가 뭐냐. 분위기 좀 깨자 마.”

“그럼 주둥이 놀리다가…?”

“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결국 실없이 웃어버렸다. 같이 웃으면서도 원우는 한참을 더 내 둥을 다독이고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안고 있는 팔을 풀지 않았다 정말로 미안한 마음에 그러는 거라는 걸 내가 온전히 느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것 같았다. 켜켜이 쌓였던 불안함과 두려움이 눈녹듯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준 덕분에,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키스할 때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집안일에 본격적으로 취미를 붙인 건 은율이가 취업 준비를 할 때였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귀찮기만 했고 깔끔한 은율이 성격에 맞춰서 매일 청소를 하는 게 고역이었는데 어느 순간 청소를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적응을 한 건지 길들여진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청소 하나만큼은 은율이가 흠잡을 구석이 없도록 완벽하게 한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은율이가 해놓은 청소가 마음에 안 들었다. 미처 닦이지 않은 TV 위의 먼지를 손으로 쪽 쓸고 은율이를 한번 쳐다보았다. 걸레질을 하고 있던 은율이가 시선을 피한다.

“저기 청소담당님. 여기 안 닦였는데.”

“…그거 좀 안 닦는다고 죽진 않잖아.”

“이거 안 닦는다고 죽일 것처럼 화내던 사람 어디 갔냐?”

“어디 갔나 보지. 난 몰라.”

그걸로 끝이면 말도 안 꺼냈을 거다.

“그렇게 걸레 우그러뜨려서 닦으면 나중에 계속 새로 빨아서 닦아야 되잖아“

“반씩 접으라고. 그 다음에 반대쪽으로 닦고,그 다음에….” 

“아 이렇게 닦아도 안 죽는다니까.”

“청소기 하기 전에 먼지 털었냐?”

“…알아서 내려오겠지. 먼지 가볍잖아.”

“문은 다 열어놨으면서 모기장은 왜 안 열어?”

“벌레 들어오잖아.”

“먼지 안 나간다고?“

“알았다고,아오 존나 차원우 까탈 개까탈.”

말로 밀리니까 험한 소리를 하고 있다. 다년간의 가사일로 단련된 팔똑 맛을 보라면서 헤드락을 걸다가 물기가 있는 바닥에 미끄러져서 뒤로 넘어졌다. 대놓고 삿대질을 하면서 비웃는 은율이를 붙들고 걸레부터 확인했다.

“제대로 짜서 닦으라니까. 이거 봐,바닥에 막 미끄러지잖아.”

“하체가 제대로 지탱을 못해서 미끄러졌겠지.”

“내 하체에 대해서 아주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실까. 한 번 보여드려야 되나? 이미 충분히 본 거 아니었어?”

“아 알았으니까 거실에서 바지 벗지 마 제발!”

벗겠다는 나와 막으려는 은율이의 실랑이는 중국집 배달원이 오고 나서야 끝났다. 이사를 한 것도 아닌데 청소를 말끔하게 했으니 자장면을 먹어야 한다고 하도 우겨서 시키기는 시켰다.

“내가 장담하는데 딱 삼 년 전에 니가 이 꼴 봤으면 날 쥐 잡듯이 잡았을 거 ?짜다. 청소 더럽게 못한다고“

“사람이 살다 보면 좀 바뀌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

자기가 그렇게 말해놓고 민망했는지 괜히 탕수육을 소스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댄다. 예전에 청소 검사를 하던 노은율은 거의 기숙사 사감 수준이었다. 아니,사감을 넘어서서 군대 당직사관도 그렇게는 안 했을 거다. 싱크대에 튀어 있는 물방울 하나도 용납을 못하던 인간이 이 정도면 좀이 아니라 엄청나게 바뀐 거다.

담당을 바꾸고 나서 사흘 정도가 지났다. 집안 꼴은 정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정리정돈을 제 때 안 해서 분명 집에 있었던 물건들이 어디 블랙홀에라도 빨려 들어간 것처럼 사라졌다. tv 먼지는 참 꿋꿋하게 안 닦고 있었다. 바닥을 밟고 다니는 게 아니더라도 차 바닥의 깔개는 매일 털어줘야 먼지가 안 일 어나는데 사흘 사이에 차 바닥에 황사 바람이라도 왔다 간 것 같았다. 결국 못 참고 은율이가 야근을 하는 날 집 청소를 시작했다.

가정 블랙홀에 숨겨져 있던 물건들을 죄다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고 먼지도 말끔하게 닦아냈다. 집안이 번쩍번쩍하도록 쓸고 닦고 난리를 치면서 몇 시간을 꼬박 청소를 하다 겨우 허리를 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깔끔함이다. 저번 명절에 집에 내려가서 하루 잘 때,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이불의 먼지를 털고 시트와 베개를 정돈한 후 바닥에 걸레질을 하는 나를 보고 엄마가 경악해서 이게 무슨 일이냐며 은율이를 붙들고 물어봤던 게 생각났다. 서울로 돌아 오는 길에 참 많이 맞았었지. 누가 보면 시집살이중인줄 알겠다면서.

“뭐 냐?”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에 잠겨 먼지닦이용 마른 수건을 들고 소파에 앉아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 은율이가 들어왔다. 피곤한 듯한 미간을 문지르다가 집을 둘러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첫는다.

“우리 담당 다시 바꾸자.”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

안 그래도 나도 은율이가 청소하는게 답답해서 속이 터질 참아었다. 원만한 합의 끝에 우리의 생활은 평소대로 돌아왔다.

진작 되돌렸어야 했다. 다른 것보다도 주방을 내가 담당하면 이런 게 안 돼서 문제다. 셔츠를 다려놓을동안 소시지 볶음과 콘버터를 순식간에 만들어온 은율이가 좁다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이 사다 놓은 소파 앞 테이블에 술상을 차렸다. 며칠간 담당을 바꿔 집안일을 하면서 내가 차렸던 각종 음식들을 생각 하다가 제대로 된 상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릴 치경이다 시원한 맥주에 소시지를 집어먹고 있으려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맛있다고 엉덩이를 툭툭 투드려줬더니 은율이가 덤덤하게 말했다.

“많이 먹어라. 이게 끝이다“ 

“또 사오면 되지.”

“식비 채우려고 적금 깰 일 있어? 당분간 톤정치야.”

“왜?”

“왜인지 몰라서 물어? 와 너 진짜 식비 엄청나게 썼던데. 내가 마트 영수증 보고 뒷목을 잡았다. 누가 보면 우리 집이 토끼 농장인줄 알겠던데.”

“야채는 계속 먹으니까….”

“그러니까, 계속 먹는 건데 도대체 왜 그렇게 쟁여놓냐고 새로 사다 먹는 게 더 신선할 거 아냐 니가 사다 놓은 야채 상하지만 않으면 세 달은 먹겠어.” 

그렇게 많이 샀었나,무게가 별로 없어서 장을 많이 봤다는 감이 안 왔었는데. 믿을 수 없어서 의심에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은율이가 지갑을 꺼냈다.나오는 영수중마다 길이가 장난이 아니다. 반 정도 금액 체크를 하고 손을들었다.

“잘못했습나다,

예전에 담당 바꿨을 때 한 달 치 식비를 일주일 만에 쓴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결국 똑같은 결과였다. 사회생활 짬 좀 쌓였다고'뿌듯해했는데 경제관념에는 깜이 쌓이려면 백만 년은 걸릴 것 같다. 앞으로 한 십 년쯤 더 살면 그때는 차산관리가 되지 않을까. 그때도 은율이가 생활비부터 노후대비까지 죄다 할것 같기른 하지만…. 경제관념 투철한 애인에게 의지하는 미래 계획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산처럼 쌓인 영수중올 대충 밀어놓고 은율이가 콘버터를 후물거리면서 말했다.

“넌 진짜 어디 가서 총무 회계 이딴 거 하지 마라. 공금 날리기 딱 좋아.”

“난 어디 가서 너 없으면 계산기도 안 켜는 사람이야.”

“그게 자랑이냐?”

“내가 자랑할 게 아니라 니가 자랑해야지. 딴 주머니 찰 줄도 몰라서 너한테 용돈만 받다쓰는데 이런 착실한 배우자가 어디 있다고“

그건 좀 마음에 들었는획 은율이가 흐뭇하게 웃는다. 분위기가 괜찮은 것 같아서 한 마디를 더 보됐다.

“그런 의미에서 오만 원만 올려주면 안 되냐,담뱃값이 올라서….”

“끊어“

“열심히 끊어볼 테니까 다음 달만이라도….”

“다음 달은 오만 원 빼고 줄게“ 

“아 왜!”

“끊는다며. 돈 덜 들 거 아냐.”

돈 계산하는 걸로는 함부로 낚시질 하려고 들면 안 되는데 또 당했다. 다음 달에 나올 퍼피걸즈 새 앨범은 당분간 장바구니에만 담아둬야겠다.

“선임님, 근이 두 번이면 뭔지 아세요?” 

“몰라.”

“두근이래요,두근.”

“...........“

“그럼 야근 네 번이면 뭔지 아세요?”

“야 그만해라.”

“두근두근! 하하!”

정아가 저렇게 미친 소리를 하는데 사무실에 있는 사람 그 누구도 대꾸를 할 정도로 모두 진이 빠져 있었다. 이 주를 꼬박 철야 같은 야근을 하고 주말 출근까지 하니까 나도 화딱지가 나서 심장이 존나 두근두근 벌렁벌렁하긴 하다. 

“그런데요.”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정아가 파티션 너머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오늘만 꼬박 다섯 잔을 채우는 커피를 후룩후룩 마시면서 마주보았다. 정아가 생긋 웃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일까요?”

“누구긴 누구야, 이 팀장 때문이지.”

“과연 그럴까요? 혹시요 선임님,담당자한테 일처리 좀 빠릿빠릿하게 해달라고 채찍질한 사람 때문은 아닐까요?”

“…너 아주 오늘 날 대차게 까는구나.”

무섭게 노려보았는데 꼼짝도 안 한다. 정아가 저렇게 간을 배 밖에 내놓고 비꼬는 것도 이해는 한다 내 탓이 아닌 것도 아니니까 아니, 진짜로 내탓인가….

이 뺑뺑이 야근의 발단은 이 주전으로 올라간다.꽤 크게 열리는 새 전시회와 박람회 행사를 회사에서 맡게 되면서 우리와 기획을 같이하게된 지 일주일 되었을 때였다.담당자인 이 팀장은 같이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특히나 우리같이 타이밍과 분위기 보며 바쁘게 움직여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딱 질색인 타입이었다. 

지가 무슨 노자도 아니고 존나 자연의 흐름과 순리에 몸 을 맡기고 있다고 철호형이 투덜거리는 소리 그대로였다. 무엇 하나 급할 것도 없이 천천히 느긋하게 하게, 여유가 넘치게 행동하는 동안 우리는 복장이 터지고 뒷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다른 것보다도 남이 뭐라고 하건 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제일 최악이었다.그래서 결국 질렀다. 못 참는 사람이 지는 거지만 질 때 지더라도 할 말은 하고 지고 싶었다.

이 주 전 회의를 마무리할 때였다. 기획안이 결정되면 만드는 시간이 있고 만 CU 시간이 걸리면 나가는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보면 광고 때려야 되는 타이밍 다 놓치고 망하게 생겼다고 짜증 섞인 훈수를 두었다. 회의실에 올곧은 자세로 앉아 기획안을 넘기고 있던 이 팀장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박물관 초청 전시회와 소설가 초청 강연회의 홍보 기획이 담긴 파일을 탁 접고 이 팀장이 나에게되물었다.

_방금 한 얘기 다시 해주시겠습니까?

못할 것도 없었다.처리가 너무 늦어진다고요. 이래서는 효율도 적고 의미도 없습니다. 빨리 빨리 스타일이 잘 안 맞으시더라도 업무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은 감안을 해서해야죠. 이렇게 지지부진 길어지다 보면 저희도 이 팀장님 쪽도 다 손해입니다.일정 당겨서 진행했으면 좋겠는데요.

이팀장이 내 말을 주의 깊게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 번 시원하게 잘 했다며 정아가 테이블 아래에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뿌듯해서 광대가 승천,하고 있었다.

-당기죠 뭐 다음 주에 최종 프레젠테이션 하고요.

-예?

이렇게까자 당겨달라는 건 아니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남기고 이 팀장이 회의실율 나간 그 이후로 나도,우리 팀도 내내 이 꼴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면서 팀장님한테도 한 시간을 꼬박 잔소리를 듣는 그 이후로는 욕을 먹고 잔소리를 들을 사간도 없는 폭풍 근무의 연속이었다.

문득 생각을 하다 보니 원우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들은 게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고 있는 놈 괜히 깨울까봐 소파에서 쪽잠 자고,그러다가 원우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서 헐레벌떡 씻고 나오고,그짓을 한 주 내내 했더니 피곤한데다가 뭔가 쫓기는 기분까지 들어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 이었다. 이럴 때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 모드의 차원우한테 좀 징징대고 해야…. 

-오늘도 야근?

딱 지 생각하고 있을 때 도착한 문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앞에서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투드리고 있는 정아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괜히 메모장을 켜고 일을 하는 척 타자를 대충 치면서 한 손으로 문자를 썼다.

-자갸 

답장은 금방 왔다.

-울애기 맘마는 머거쪄?

하하 거 참,녀석, 아무리 내가 자기라고 했기로서니 이게 무존 짓이지.

-거기까지만

정도를 아는 차원우는 내 한마디에 바로 장난을 접었다.

-ㅇㅋ밥은?

-아직 

-갈까?

-ㄴㄴ

-정아씨?

一 0 0

분명 애인하고 문자를 하는데 다섯 글자도 안 되는 단어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로 의사소통이 다 되다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딱 거기까지 답장을 보냈을 때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얼른 핸드폰 화면을 끄고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앞에서 정아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식사.....“

“대충 컵라면으로 때우고 일해,밤샘할 거 아니면.”

그리고는 째지는 팀장님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다시 앉는다. 힌숨을 폭쉬고 다시 원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 가긴 감0 0

-정리하면서 문자해 태우러 갈게

-LL 택시

-아냐 어차피 할일도 없어 문자해

좋은데 화가 나는 묘한 기분이다.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모니터 쪽으로 돌아앉았다-열 시를 막 넘기고 나서야 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자를 보내놓고 회사 옆 카페에서 숙면에 좋다는 허브차를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원우가 도착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꼴이 영 부스스하다.

“자다 왔어?”

“잠깐 졸았어.”

“그러게 택시 타고 간다니까 왜 오냐,귀찮게.”

“우리 자기 얼굴 일 분이라도 더 보려고 왔지.”

카톡으로는 얼굴 보고 하는 소리 아니니까 자기야 여보야 잘도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면 선뜻 말이 안 나오는데 차원우는 그런 쑥스러움도 없다. 괜히 못 들은 척 창문 너머를 보고 있다가 손등 위로 따뜻한 기운이 덮여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어차피 집에 가면 씻고 바로 잘 거잖아. 아침 되면 밥도 안 먹고 바로 나갈 거고. 가는 길에라도 손잡고 가자.”

“운전에나 집중하세요,차원우 씨.”

물론 그건 말뿐이었다. 아닌 척 슬그머니 깍지를 껴서 기어를 사이에 두고 손을 잡았다. 그걸 또 원우는 모르는 척해준다. 이럴 때는 짠 것처럼 쿵짝이 잘 맞는다.

“최실장인지 뭔지 하는 그 개놈 가고 나서 좀 한가한 거 같더니, 이상한 놈 걸렸어?“

“최 실장보다 더해. 아 몰라, 피곤하다. 나중에 얘기해.”

“피곤한 건 알겠는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내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되는데.”

“왜? 뭔데?”

설마 집에서 무슨 일이…,순간적으로 오싹해져서 몸을 옴츠리자 원우가 깍지를 낀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살살 쓸었다.

“왜 겁을 먹어? 아,집안일 아니야.”

“아,어…”

“나 다음 달 승진 시험 명단에 올라갔어.”

벌써 연차가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다. 근데 그게 이렇게 진지하게 할 이야기인가? 표정까지 굳히고 핸들을 톡톡 두드리던 원우가 말했다.

“아마 이번에 승진을 하기는 하게 될 것 같은데,면접이야 그냥 형식이고,동기들이랑 연차는 똑같은데 내가 근무평가 점수가 제일 좋거든.”

“…근데?”

“근데 승진해서 본사로 빠지게 되면 이사 가야 될지도 몰라.”

“이사? 어디로?”

“원주.”

“…허?”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머리가 깨칠 것처럼 욱신거렸다.

원래는 집에 오자마자 뻗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이 다 달아났다. 집에 오는 내내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원우를 붙들어 소파에 앉혀놓고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다. 다음 달 승진 시험 명단에서 승진을 할 유력 후보인데 지금 승진 하게 되면 본사로 옮기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 내년에 원주로 본사가 옮길때 당연히 따라가야 된다고 했다. 승진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나 원우나 둘다 주말부부…,부부라고 하니까 엄청 오그라들지만 어쨌든 그걸 할 생각도 없고, 그러니 누구 하나가 출퇴근을 하거나 아니면 일을 그만둬야 한다 는 말인데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고…. 가뜩이나 내 일 때문에 심란한데 원 우 일까지 겹쳐져서 정수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올 것 같았다.

“당장 승진하는 건 아니니까, 떨어질 수도 있어.”

“하게 될 것 같기는 하다며.”

“뭐,다른 녀석들 점수랑 차이가 좀 나서…, 내가 우리 지사 일등이라.”

“아니 그러니까 일을 좀 설렁설렁하지 뭐 얼마나 호사를 누리겠다고 그렇게 쎄빠세게 일을 해서 점수를 받냐?”

“내 여보 먹여 살리려고 쎄빠지게 일한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냐.”

“너 아니어도 실컷 먹고 살아.”

“그럼 내가 일 그만두고 원주 가지 말까?”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차라리 돈만 걸린 문제면 깔끔하게 그러라고나 하겠는데,일을 안 하고 집에서 노는 입장이 되면 무기력해지고 기운 빠지는데다가 괜히 자격지심까지 생겨서 사소한 걸로도 시도 때도 없이 부딪히게 된다. 졸업하고 같이 취업준비를 할 때,내가 먼저 취직을 했던 터라 원우가 입사 준비를 하던 서너 달 정도를 내 월급으로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그때 만약 원우가 취업 준비를 더 했으면 우리는 백 퍼센트 찢어졌을 거다. 끔찍해서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든 되겠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고민을 하고 있는 내 뒷덜미를 원우가 쓰다듬었다. 한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나 일 그만둘 생각없어.” 

“알아. 내가 알아서 할게.”

“너도 그만둘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난 따로 살기 싫어.”

무슨 다섯 살짜리 애가 투정부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와서 움찔했다. 이 타이밍이면 보통 그랬쪄요 우쭈쭈 하면서 놀려야 정상인데 원우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만 싫은 줄 알았네. 우리 거의 보름 내내 거의 따로 산 거 아니었냐?”

“야, 그거랑 그게 같나? 내가 바쁘니까….”

“아무리 바빠도 전화 한 통을 못 해주냐? 그리고 멀쩡한 침대 두고 잠은 대체 왜 소파에서 자?”

“타이밍이 애매했다고. 전화할 짬나서 시간 보면 그냥 통화할 시간에 일 더해서 빨리 집에 가야겠다 싶고,집에 오면 너 자고 있으니까 깨우기 싫어서 그냥 소파에서 자고.”

“노은율,나 니 아들 아니고 애인이다. 까먹은 거 아니지? 이런 거 저런 거 배려한답시고 헛짓거리 할 시간에 전화해서 목소리나 들려 주고 옆에 기어 들어와서 자라는 소리다.“ 

진지하게 받아쳤다가는 우울해지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서 나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원우의 볼을 한 번 꽉 꼬집었다.

“애인이었냐? 난 여보인 줄 알았지.”

볼이 붙들린 채로 씩 웃은 원우가 잽싸게 몸을 날려 나를 덮쳐누른다. 거의 일주일 만에 하는 키스였다.

주말도 없이 출근을 하다 보니 날짜 관념이 사라졌다. 프레젠테이션 일정에 간신히 맞춰 기획안을 끝내니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원우는 끝나면 전 화를 하라고 했지만 전화하고 차 기다리는 시간에 차라리 집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택시를 탔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일주일 내내 근무를 하는 내가 불쌍하 긴 했는지 팀장님이 하루 쉬고 토요일에 나오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아이고 하루 휴가에 이어지는 주말 출근이라니 거 참 감사해서 욕이 나올 지경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잤는데 일어나보니 옷은 또 다 갈아입혀져 있었다. 안 깨우려고 조심해가면서 옷을 갈아입혔을 원우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품을 쩍쩍 하면서 거실로 나왔다. 식탁에 밥상이 깔끔하게 차려져 있다. 메시지도 있었다.

-푹 쉬다가 저녁에 나와라 고기 먹으러 가자

끄응,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식탁에 앉아 밥숟가락을 들었다. 식탁 옆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고지서들과 마트 할인 행사 전단지를 들춰보면서 아침을 먹 었다. 볼 것이 없어서 핸드폰을 켜고 인터넷 기사를 획휙 넘기다가 멈칫했다. 공공기관의 이전이 어쩌고 하는데 원주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 최고의 고민이다. 답이 있는 것까지는 안 바라지만 선택지라도 몇 개 있었으면 좋겠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골치가 아팠다 누구한테 물어보기라도 하고 싶은데 상담중 하나였고,그 두 사람한테는 굳이 대답이 뻔했다. 누구 하나가 그만두고 같이 살든가 그 출퇴근…,원주까지 출퇴근이라니.

서울 도주 출퇴근,서울 원주 버스,서울 원주 교통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다 가 지쳐서 게임도 몇 판 하고 tv를 보면서 뒹굴거리다 보니 해가 지기 시작했 다. 당연히 집 앞으로 갈 줄 알고 씻지도 않고 있었는데 원우에게 문자가 왔다 회사 근처의 한우 맛집과 집 앞의 삼겹살집 중 하나를 고르라길래 당연히 한우를 골랐다. 버스를 타면 전화하겠다고 답장을 보내고 얼른 머리부터 감았다.이 시간에 시내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자체가 정말 오랜만이라 엄청 어색했다. 깡촌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다가 심지어 길까지 헤떴다. 약속한 시간 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을 때 원우는 이미 와서 자리를 잡고 불판에 고기까지 올 려두고 있었다. 간만에 위에 기름칠하는 김에 술도 한 잔 하고 싶어져서 소주 한 병과 사이다 한 병을 시켜놓고 주거니 받거니 먹다가 승진 이야기가 나왔다.

“다시 물어봤는데 원주로 가는 거 확정은 아니라더라. 지사에서 계속 근무할 수도 있다던데.”

“그래도 원주로 갈 수도 있는 거잖아.”

“가면 그냥 출퇴근하지 뭐. 어차피 차 내가 끌고 다니는 거.”

“원주까지 출퇴근을 하겠다고?”

“어.”

너무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니까 말문이 턱턱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한 시간 반은 걸리겠던데.”

“서울 안에서 지하철 타도 한 시간 반씩 걸리는 거리 수두룩하잖아.”

“그래도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왕복으로 세 시간씩 운전해서 다니면 버겁지.” 

“따로 살기 싫다며,일도 안 그만둘 거고. 나도 따로 살기 싫어. 그나마 나는 정시 퇴근하지 너는 그것도 아니고. 그럼 내가 그냥 출퇴근하는 게 낫지.”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런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잘 구워진 꽃등심을 먹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불판의 고기를 뒤집고 능숙하게 자르면서 원우가 말했다.

“일 그만두는거 생각 안해본건 아닌데,내가 일 그만두면 좀 무책임하고 대책 없어보이지 않겠냐,너희 부모님한테“

“.........“

“그리고 만약에 니가 그만두면…,우리 부모님이 그런 생각 안 하실 분들이라고는 차마 말을 못하겠다.”

“너 오늘 되게 현실적이어서 무섭다.”

“그러게,근데 그렇게 되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

그리고 농담이었다며 픽 솟는다. 원우가 그럴수록 나는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꾹 눌리는 것 같았다. 기분 진짜 이상하다. 감동 같은 것도 아니고?서운한 건 아니고,이건…, 미안한 건가 보다.

“원우야.”

“오냐,다 아니까 말 안 해도 된다.”

내가 민망해할 걸 알고 지가 먼저 저래버리니까 더 미안해졌다. 좋아하는 걸 실컷 먹이기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불판을 갈고 새 고기를 얹었다.

“너 다 먹어.”

“다른 것도 먹으면 안 돼?"

“뭐,꽃등심? 꽃등심…,은 일 인분만. 이번 달 식비….”

“그거 말고.”

“그럼 뭐.”

“에잉

에잉 같은 소리 한다. 테이블 래에서 내 발을 툭툭 건드리는 원우의 발을 꽉 밟았다. 그런 말은 집에 둘만 있을 때 조용히 했으면 참 좋겠는데 하여간 눈치가 없다.

승진 대상자가 나오는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은율이나 나나 초조해졌지만 꼭 짠 것처럼 둘 다 그 아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하다못해 뉴스에 강원도 날 씨만 나와도 움찔움찔할 정도였다. 승진을 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월급 올라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거 더 벌어서 어디다 쓸까 싶고,그렇다고 승진 대상자에 된다고 그게 빠지는 것도 아니고. 더불어 꼭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차장님과 부장님까지 나에게 자리를 슬슬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줘서 마음도 싱숭생숭했다. 갑갑한 심경을 근태에게 토로하면서 애인이 서울에 있는데 내가 원주로 가면,까지 말을 꺼냈다가 애인 없는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냐고 구박만받았다.

일요일 아침부터 은율이는 집에서도 일을 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혼자 라면 끓여 먹고 TV를 보고 빈둥빈둥 시간올 보내려나 서러워졌다. 내일이 승진발표가 나오는 날이었다. 물론 지금도 주말 말고는 오붓하게 둘이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지만,그래도 원주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 주말에는 피곤이 쌓여 기절해서 잠이나 잘 텐데 그 전에라도 같이 놀아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만 하고 결국 말은 못했다. 소파에 누워서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고 그러다 해가 진 걸 보고 뭐라도 해먹을까 싶어서 일어났는데 그제야 은율이가 방에서 나왔다. 좀 쉬러 나오는 줄 알았더니 외출을 할 건지 코트까지 입고 있었다.

“어디 가게?”

“어. 너도 옷 입어.”

“나? 왜?”

“고기 먹으러 가게.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웬 고기?”

라고 말하면서 나는 얼른 벌떡 일어나서 옷을 입으려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소고기를 먹어서 당분간은 구경도 못할 줄 알았늘데 호강하게 생겼다.집 앞에 자주 오는 고기집에 앉아서 지글지글 익는 삼겹살을 보고 있으려니 또 우울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원주로 다니기 시작하면 주말에 시간 내서 외식하러 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기를 뒤집고 나를 빤히 보고 있던 은율이가 픽 웃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 고기 먹기 싫어??

“아니.”

“뭐,원주 가는 거 때문에?“

내내 이야기 안 하고 넘어가더니 바로 전날 직구로 던지니까 넘길 방법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심각해 하지 마. 가면 가는거지 뭐“

“…알아.”

“서울 밖에서 사는 거 불편할 수는 있는데,뭐 평생 서울에서만 산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주말 말고는 이렇게 나와서 고기 구워먹고 할 시간도 없잖아.”

“왜 없어? 내가 원주로 갈 건데.”

나는 들고 있던 집게를 떨어뜨렸다.

“니가 왜?”

“회사 그만둘 거니까.”

이번엔 입을 쩍 벌렸다. 은율이는 내가 떨어뜨린 집게를 들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구우면서 말했다.

“정리하느라 오늘까지 바빴어. 이제 좀 한가할 거야.” 

“사표 냈어?”

“아직. 그만두기 전에 사람 구해야 되니까. 원주,가기전까지는 그래도 시간 되겠지?”

“일 그만둘 생각 없다며.”

“그래도 일보단 니가 먼저니까.”

와, 내가 원주로 출퇴근하겠다고 했을 때 은율이가 이런 기분이었나 싶다. 감동의 물결이 아주 밀려오다 못해 넘치게 생겼다. 어디서 저런 멘트를 배워 와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생각 충분히 하고 결정한 거니까 말려도 소용없어.”

“정년보장 확실한 니가 그만두는 것보다는 내가 그만두는 게 훨씬 낫지 않겠냐? 우리 부모님이야 내가 알아서 할 거고 너희 부모님은…,이번 설 때 내려가 면 내가 잘 말씀드려볼게. 그래도 너 챙긴다고 같이 간다고 하는 건데 거기 가서도 일 찾아보겠다고 하면 막 엄청 마음 상해 하시진 않을 것 같아.”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뜩이나 부모님을 만날 때마다 긴장해서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은율이를 또 구석에 몰아넣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은율이가 하는 말이 맞는 말 같아서 더더욱 얼굴 들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안 따라가면 너 술 처먹고 꽐라됐을 때 누가 너 데리러 가냐? 멀어서 원주까지는 못 가. 그러니까 그냥 같이 가야지. 떼놓고 살면 불안해서 어디살겠냐“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내가 원주로 출퇴근 하면 노은율 야근할때 밥 먹이러 데리고 나올 수도 없고. 퇴근할때 데리러 가기도 힘들거 같고,가끔 같이 출근할때 편하게 데려다 줄수도 없을텐데....근데 비슷한 생각을 은율이도 하고 있었나 보다.

“괜히 출퇴근하는 데 기름값 더 쓰지 말자. 돈은 돈대로 쓰고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그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일 그만둬도 팀장님한테 부탁해서 거기서 받아 할 수 있는 일 있으면 할 거야. 서울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

“감동받은 거 알겠으니까 가위 들고 그렇게 울먹울먹하지 마라,되게 웃겨.“ 

나도 내 꼴이 웃긴 건 알겠는데 컨트롤이 잘 안 됐다.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아까 시켜놓고 한 모금도 안 먹고 있던 소주를 원샷했다. 속이 확 뜨거워지면서 간신히 막혔던 목이 풀렸다.

“야 노은율.”

“어.“

“내가 너 진짜 사랑해.”

은율이가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한참을 웃더니 말했다

“원주 두 번 갔다가는 아주 업고 다니겠다. 어,가서 업고 다닐게.

“어,가서 업고 다닐래“

“그래,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건 글러먹었으니까 발에 모래 한알 안묻게 잘 업고 다녀.”

고개를 열심히 끄덕끄덕 했다.집에 은율이 겁먹지 않게 내가 말도 잘해보고.가서도 정말 내내 업고 다녀야겠다-감동과 울컥함으로 범벅이 된 삼겹살을 대충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씻고 나란히 누워 있다가 슬금슬금 껴안고 키스를 했다.보통 일요일에 분위기를 잡기 시작하면 다음날 출근해야 하니까 들러붙지 말라고 걷어차기가 일쑤였는데 오늘은 잘 받아준다.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따뜻한 배와 가슴을 문지르다가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그상태로 한참을 멈춰서 있었다.

“왜?“

“고마워서.”

“고마워하지 마라,너 또 개고생 시킨다는 소리니까. 거가 가면 너 혼자 돈 다 벌어야 돼. 월급 한 푼도 빼지 말고 그대로 갖고 와. 어디 뻥땅치지 말고.”

“네.”

“어어구 대답도 잘하네, 착하다.”

턱 아래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면서 머리 위에 입을 맞추던 은율이가 나를 끌어올려 목을 안는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비비다가 파고들었다. 

승진 결과가 나왔다는 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침까지 은율이 와 그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다. 집은 언제쯤 알아볼 거 회사 일은 언제 정리 를 할 거고,은율이는 별다른 동요도 없이 태연하게 말을 하는데 괜히 내가 좌 불안석이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목이 타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저만 치에서 부장님이 손짓을 하는 걸 보고 그대로 뿜을 뻔했다. 떳떳하게 굳은 채로 부장님 자리까지 갔더니 부장님이 꼭 이인하를 만났을 때의 나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언뜻 봐도 그냥 축하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긴장돼서 목이 졸리는 것 같은데 더 긴장이 됐다.

“차 주임,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 일단 승진 축하하고.”

“예? 아,예,감사합니다….”

역시 그렇구나. 나는 얼떨떨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거 좀 애매하네.” '

“예?”

“원래는 이번에 승진하면 본사로 바로 가는 거였는데 다른 지사에 지원자가 있어서.”

“예에?”

예도 아니고 네도 아닌 어정쩡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본사에서는 두 명 정도로 생각한다고 했었는데 한 명은 확정이었고 다른 한친구가 올라가게 됐어.”

“어, 네, 그 … ”

“승진은 승진인데 본사로만 안가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말고.”

“아뇨 서운한 건 아닌데... ” 

“다시 본사로 갈 시기가 올 거니까 그때는 내가 책임지고 올려 보내줄…-”

“아 안 그러셔도 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일단 오늘 다들 회식이나 하지.대리 턱이 어디 턱이냐만은 그래도 명함 새로 파는데 술 한잔씩은 돌려야지“

영혼없는 리액션으로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왔다. 근태와 현정이가 대리님 축하한다느나 대리님 하찮은 주임들 좀 잘 봐달라느니 어쩌니 말이 많은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멍 때리고 있다가 얼른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은율이에게 전화부터 했다. 이거 뭔가 익숙한 상황인 것 같은데….

“은율아.“

-너 마침 전화 잘했다. 나 사람 새로 구하는 거 얼마 안 걸릴 것 같아. 아,그리고 집은 우리 회사에 그쪽에 부모님 계신 사람이 있어서 일단 한 번 괜찮은데로 추려 달라고 했어.?

“어 그래 고마운데….”

一이따가 점심 먹으면서 팀장님하고 애기해보고 다시 전화할게.

“그러지 말고,얘기 안 해도 돼.”

-어?

“나 본사 안 갈 것 같아.”

-.........어?

얼굴을 안 보고 있어도 전화 너머에서 은율이가 벙찐게 느껴졌다

-승진 안 됐어?

“아니 승진은 했는데 원주는 안 가도 된대.”

-..........

“다행이지,근데….”

-다행?

“어어.”

-야 씨,나 그만둔다고 사방팔방에 다 떠들어놨는데 다행?

“그,그러게 내가 안 갈 수도 있다고 했었잖아.“

一야 차원우.

삼 초 전의 타이밍이다. 나는 얼른 핸폰을 얼굴에서 떼어냈다. 한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나더니 바로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 회사 그만두면 누구 낮짝 보고 일하냐고 정아가 울고 불고 하는 거 기껏 달래놨더니 다행,다행은 같은 소리하네, 일 정리하느라 오늘 오전 내내 쑤시는 엉덩이 한번 못뗴고 일했는데 다행, 다행은 개뿔이 다행, 쪽 팔려서 씨발 이걸 뭐라고.....

까지 듣고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자를 찍었다.이말까지 전화로 하면 분에 못 이긴 은율이가 핸드폰을 들고 욕을 하다가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급 커밍아웃을 하는 사태가 벌어질것 같아서였다.

-근데 나 오늘 회식해 진짜 미안해

-그리고 원주 안 가도 나 진짜 너 사랑해 사랑한다니까

-사랑한다니까

-진짜로

-은율아 사랑한다 

연달아 보낸 문자를 읽은건 보이는데 답장이 안온다.나는 머리를 싸매 쥐고 주저앉아서 끙끙거렸다. 집에 들어가기 이렇게 무서운 적이 또 있었나 싶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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