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추억 여행
분주하게 움직이며 준비한 아침 식사 코스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콩나물국을 지켜보다 씩 웃었다. 언제 나왔는지 내 등에 툭, 하고 고개를 기댄 은율이가 업히듯 몸을 붙여 온다. 찔리는 게 있는 나는 최대한 상냥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자도 되는데, 배고파서 깼어?”
그러자 잔뜩 갈라지고 거칠어진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개새끼야.”
이래야 노은율이지. 콩나물국을 마무리하고 얼른 뒤로 돌았다.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내 가슴에 아무렇게나 벅벅 문지르다 말고 은율이가 시퍼런 도끼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럼, 그럼. 화낼 수 있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웬일로 노은율이 하루 쉰다는 희소식을 듣자마자 어제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새벽까지 괴롭혔으니 화가 날 수도 있다. 난 좋아 죽겠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내민 채로 칭얼칭얼 짜증을 내는 것도 귀엽긴 한데 그렇다고 계속 짜증만 내고 있게 할 순 없으니까 나도 나름대로 뇌물을 준비했다. 힘도 제대로 안 들어가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밀어내는 은율이를 품 안 가득 껴안고 머리카락 위로 뺨을 비볐다.
“네가 좋아하는 콩나물국 끓였어.”
“그런다고 봐줄 줄 알아…?”
“어묵볶음도 방금 전에 해서 되게 맛있을걸. 간장양념으로 볶았어.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눈치는 빨라 가지고….”
“근데 그거 알아? 은율아.”
은율이의 이마에 입술을 한 번 눌렀다 떼고 속삭였다. 방금 한 계란찜도 있어. 완전 따뜻한 거. 툴툴거리던 소리를 멈추고 얌전히 내 말을 들어준 은율이가 주먹으로 내 배를 툭 치고 어슬렁어슬렁 식탁으로 간다. 엄살을 떨며 아픈 척을 하다가 얼른 수저부터 꺼냈다.
은율이가 출근 준비를 하고 내가 쉬는 날은 있어도, 내가 출근 준비를 하고 은율이가 쉬는 날은 정말 흔치 않다.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이런 날에 나도 연차를 내고 같이 쉬면 참 좋았겠지만 오늘은 외부 출장 일정이 있어서 불가능했다. 그래도 퇴근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밥을 먹자마자 말릴 새도 없이 소파에 엎드린 채로 손만 겨우 들어 인사하는 은율이를 보니 내가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알 것 같아서 일단 정수기 옆에 소화제부터 꺼내서 올려놓았다. 가까이 가서 몸을 굽혀 앉자마자 건드리기만 해 보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래서 건드려 봤다.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있으려니까 마치 원래 그러려던 참인데 우연히 타이밍이 겹친 것처럼 슬그머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준다. 보들보들한 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오늘 아무리 늦어도 네 시면 퇴근할 것 같은데, 오랜만에 밖에서 데이트할까?”
“…뭐 하려고?”
“너 저번에 서초동에서 하는 무슨 사진 전시회 보고 싶다며. 내가 그쪽으로 퇴근할 테니까 시간 맞춰서 와.”
“그럼 차 두고 가라. 거기 버스 타고 가기 힘들어.”
“당연하지, 여보야. 입장권은 내가 사 놓을게.”
평소였으면 여보의 여만 나와도 주먹이든 발이든 뭐라도 날아와야 정상인데, 가고 싶어 했던 전시회를 기억하고 콕 집어 얘기한 게 은근히 기분이 좋았는지 은율이는 피식 웃으면서 늦기 전에 얼른 가라고 내 어깨를 떠민다. 목덜미와 볼 위에 연신 입을 맞추자 못 이기는 척 입술 뽀뽀도 한 번 해 준다. 이 정도 해 뒀으면 이따가 만날 때는 화가 완전히 풀려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나온 해피의 신곡을 흥얼거리며 즐겁게 집을 나섰다.
일상이 늘 비슷하다 보니까 평소와 조금이라도 다른 일정이 생기면 하루가 특별한 날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퇴근하고 회사 근처에서 은율이를 만나서 술 한잔하는 게 특별할 때도 있고, 주말의 막히는 도로 위에 시간을 버릴 각오를 하고 유명하다는 맛집을 찾아가서 밥 한 끼 먹고 오는 게 특별할 때도 있는데, 출근을 안 하는 노은율과 해 떠 있을 때 데이트라면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셈이다.
그래서 좀 특별하게 코스를 짜고 싶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뭐가 안 나온다. 전시회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한잔하고 그 다음은…. 전시회를 보고 밥을 먹고 가볍게 쇼핑이라도 하고 그 다음은…. 전시회를 보고 밥을 먹고 영화라도 한 편 땡기고 그 다음은…. ‘그 다음’만 가면 헛웃음이 나온다. 왜 머릿속에 있는 모든 데이트 코스가 자꾸 기승전떡으로 끝나는 걸까. 어제 새벽에 맥없이 늘어지는 은율이를 말끔하게 씻겨 놓고 다시 달라붙었을 때, 발정난 개새끼도 너만큼은 안 할 거라고 엄청 욕을 해 대서 조금 억울했는데 억울해하면 안 되겠다.
“근태야. 넌 데이트할 때 주로 뭐하냐?”
출근해서 일을 하다 점심을 먹고 출장을 가기 위해 나올 때까지 고민해 봐도 내 머리로는 나오는 게 없으니 남의 머리를 써먹어 볼 생각이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오늘 외부 출장의 운전기사를 맡게 된 근태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그러자 왠지 기분이 더러워지는 표정으로 바뀐 근태가 은근한 말투로 되묻는다.
“갑자기 웬 데이트 얘기? 왜, 여보야가 참신한 데이트 코스 좀 짜 오래?”
며칠 전 회사 화장실에서 은율이와 통화하다가 여보자기 하던 걸 우연히 근태에게 들켜 버렸다. 처음에는 어차피 내가 통화하던 상대가 은율이인 걸 모르니까 들키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입사 동기들까지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에서 자꾸만 입을 털려고 해서 안 그래도 짜증이 있는 대로 나 있었다. 그런 곳에 소문이 나면 결혼 얘기부터 나와서 피곤해질 게 뻔한데 새끼가 자꾸 사람 성질을 건드린다. 근태의 입을 찰지게 몇 대 때려 주고 그걸로는 분이 안 풀려서 간식으로 들고 온 빵을 아무렇게나 욱여넣어 입을 막아 버렸다. 한숨을 쉬며 다시 이것저것 검색을 하는 동안 빵을 한참 우물거리고 나서야 겨우 입이 트인 근태가 툴툴대며 말했다.
“데이트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술 한잔하고.”
“뭐 특이한 거 없냐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네가 좀 찾아봐. 지금 가는 데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검색 한 번 싹 돌려 보든지.”
“지금 가는 데랑 데이트랑 무슨 상관이야. 데이트는 서초… 아니, 근데 오늘 어디 가는데?”
“넌 출장지도 모르고 출장 나오냐?”
어차피 대학교에 정책 소개를 빙자한 취업 상담을 하러 가는 거라 딱히 궁금하지도 않아서 목적지를 안 봤었는데, 근태의 핸드폰 내비게이션에 찍힌 주소를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면서 여태까지 굳어 있던 머리가 쌩쌩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잽싸게 은율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전시회 이번 주말에 보고 오늘은 다른 거 하자」
「내가 끝내주는 데이트 코스 준비했어」
그리고 내비게이션에 입력할 주소에서 일부러 건물명을 빼고 도로명주소만 보냈다. 오면서 놀랄 은율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히죽거리며 답장을 기다리다 핸드폰이 짧게 진동하는 것을 느끼자마자 부리나케 화면 잠금을 풀었다가 멈칫했다.
「ㅇㅇ ㅇㅋ」
「뭔진 몰라도 별거 아니면 니가 끝남」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싫다고 하진 않겠지. 에이 설마…. 머뭇거리며 전시회 티켓을 다시 알아보려다 그만두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
갑작스럽게 하루 휴일을 받았을 때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 일단은 옷장 정리가 급했다. 날이 쌀쌀해진 지 꽤 됐는데도 일이 바쁘다 보니까 급하게 입을 것들만 꺼내다 보니까 여름옷과 가을옷, 거기에 외투까지 죄다 뒤섞여 있었다. 주방 정리도 해야 했다. 요리를 하려고만 하면 뭔가 하나씩 떨어지는 게 생겨서 한 번 싹 정리하고 살 건 사고 버릴 건 버리려던 참이었다. 커튼도 바꿔 달아야 했고, 욕실 청소도 한 번 하고 싶었고, 지난달부터 버리자고 마음먹은 데스크톱에 들어 있는 자료도 옮겨 놔야 하고….
이렇게 지나치게 알찬 계획을 세워 놓을 때면 꼭 계획을 망칠 만한 고비가 생긴다. 첫 번째 고비는 어제 침대 위에서 새벽까지 치대고 들러붙으며 작정하고 괴롭히던 원우새끼. 두 번째 고비는 아침을 먹고 잠깐 졸다가 일어나서 겨우 샤워만 하고 나왔을 때 혼자 쉬니까 좋냐면서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괘씸한 정아. 그리고 마지막은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옷장의 옷들을 꺼내놓자마자 번갈아 가며 계속 전화를 해 대는 소정이와 은지였다. 이 전화를 받으면 왠지 오늘 내 계획은 이대로 끝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과, 이 전화를 안 받으면 소정이가 내 명줄을 끝낼 것 같다는 불길하고도 무서운 예감에 한참 망설이다가 메시지도 씹는지 한 번 보자는 선전포고를 보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랬더니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난 또 전화를 하도 안 받길래 오늘 일이 엄청 바쁜가 보다 그랬는데 그냥 씹은 거였나 보네?”
차라리 소정이가 왔으면 징징거리기라도 할 텐데. 나는 들고 온 짐을 식탁 위에 줄줄이 올려놓는 은지를 흘낏 보고 다시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별 반응이 없자 한 건 잡았다 싶었는지 노은지가 계속 조잘거린다.
“쉬는 날이면 쉬는 날이라고 말을 하든가. 그냥 처음부터 전화 받았으면 좀 좋아? 그래도 소정 언니는 오빠 챙긴다고 계속 전화한 건데 너무하네. 소정 언니한테 다 일러야지. 오빠가 일부러 전화 안 받은 거 알면 소정 언니가….”
“배달 다 했으면 그냥 좀 가면 안 되냐?”
“기다려 봐, 이거 소분해서 얼려야 돼. 그래야 나중에 먹기 편할 거 아냐.”
“뭐 언제부터 그렇게 신경 써 줬다고.”
“누가 오빠 신경 쓴대? 원우 오빠가 번거로울까 봐 그런다. 어차피 원우 오빠가 다 챙길 거 아냐.”
그럼 그렇지. 하품을 하며 돌아누웠다. 은지가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여동생이 생기는 게 꿈이었다던 소정이가 은지를 불러 반찬도 나눠 주고 가끔 고기도 사 먹이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 집까지 챙겨서 뭘 들려 보낼 줄은 몰랐다. 오늘 소정이와 점심을 먹은 곳에서 사 왔다면서 잔뜩 포장해 온 불고기를 나름대로 깔끔하게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 놓고, 들고 온 통은 깨끗하게 씻어 재활용품 바구니에 갈무리해 넣은 은지가 나를 보고 혀를 쯧쯧 찬다.
“쉬는 날이라고 거지꼴을 하고 있네. 구멍 난 티셔츠는 너무 심하지 않아? 좀 버려.”
“이거 원우 건데.”
“…뭐 다시 보니까 나름 느낌 있네.”
“느낌 같은 소리 한다. 다 했으면 가.”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나도 바쁘거든. 약속 있어서 빨리 가야 돼.”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욱신거리는 허리 통증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잠깐, 노은지. 서 봐.”
“왜?”
현관을 막 나서려던 은지를 불러 세우기는 했는데 이걸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러지 말라고 하기도 뭐하고, 되게 애매하다. 불러 놓고 운을 못 떼고 있었더니 은지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를 놀리듯이 말했다.
“안 알려 줄 거니까 가서 잠이나 자.”
“뭘 안 알려 줄 건데?”
“누구랑 약속 있냐고 물어보려던 거 아니야?”
“…누구랑 약속 있는데?”
“안 알려 준다니까?”
“야, 너 진짜, 혹시…!”
“아휴, 신경 꺼. 뭐 언제부터 그렇게 신경 써 줬다고.”
내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되자 안 그래도 막혔던 말문이 더 막힌다. 버벅거리는 나를 보고 신나게 웃어젖힌 은지가 다음에는 원우가 있을 때 놀러 오겠다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나가 버렸다. 터덜터덜 거실로 돌아왔다가 혹시 몰라서 메시지 창을 켰다. 아래로 쭉 밀려 내려가 있는 현우와의 대화창을 열고 조금 더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다.
「현우야」
「내가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통화 가능해?」
다른 걸 하고 있는지 꽤 오래 확인을 안 하길래 일단 옷장 정리부터 하기로 했다. 물론 하기로만 하고 온 신경이 핸드폰에 쏠려 있어서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다 화면이 켜지는 순간 부리나케 잠금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현우가 보낸 답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형 죄송해요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현우는 굉장히 정중하게 돌려 말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관심 끄고 있어야지, 뭐. 애들도 아니고. 맥없이 옷장에 옷들을 대충 걸면서 혼자 구시렁거렸다. 차원우가 맨날 우리 은지가 제일 예쁘니 어쩌니 우쭈쭈 둥기둥기 해 주니까 기가 살아 가지고, 객관적으로 보면 답이 딱 나오는데…. 그러다 핸드폰에 다시 메시지가 온 걸 보고 혹시나 해서 얼른 잠금을 풀었다. 양반은 못 되는 차원우였다.
「우리 전시회 이번 주말에 보고 오늘은 다른 거 하자」
「내가 끝내주는 데이트 코스 준비했어」
넌 속 편해서 참 좋겠다, 새끼야. 툴툴거리며 답장을 보내 놓고 남은 옷을 대충 쓸어다 옷장에 우르르 걸었다. 허리도 아프고 몸도 뻐근한데 그냥 쉬다 나가야겠다.
불편한 자세로 잠깐 잠이 들었다가 별로 달갑지 않은 꿈을 꿨다. 요즘 들어 잘 안 꾸던 꿈인데, 꿈속의 나는 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원우에게 손을 내 주고 있었다. 십 년은 된 일이 웬일로 꿈에 또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은지와 현우 때문에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것 같다. 그새 땀이 나서 달라붙어 있는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엄마가 심란해할 텐데, 내쫓을 정도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니 뭐 그냥 만나기만 하는 것 정도는 그럭저럭…. 그런 생각들을 하며 샤워를 하다 실없이 웃어 버렸다. 은지가 누굴 데려오더라도 내가 원우를 데리고 간 것보다는 부모님이 덜 놀라겠지. 그렇게 매듭을 짓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나와 원우는 좀 지나치게 겁이 없었다.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킬 결정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황당할 정도로 단순했다. 떨어져 있기 싫으니까. 계속 같이 살고 싶으니까.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부모님한테 말하고 계속 같이 살자. 이건 뭐…. 대책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런데도 정말로 부모님한테 말했고 정말로 계속 같이 살고 있다. 새삼스럽게 신기해진다. 그냥 월세 좀 아껴 보려고 같이 살게 된 친구였을 뿐인데, 과가 같은 것도 아니고 고향이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신입생 모임에서 술 한잔했을 뿐인데,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매달리는 놈이 불쌍해서 여관방에서 같이 하루 자 줬다가 여태까지 같은 방에서 자게 될 줄은, 그땐 당연히 몰랐다.
꿈 때문인지, 은지 때문인지, 아무 생각 없이 원우가 보내 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목적지로 향하면서 계속 예전 일을 돌이켜보게 된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그냥 배 째라는 심정이었을까.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결정을 또 한 번 내릴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지금 가고 있는 목적지까지 오 분 남았다는 내비게이션 음성을 듣고 멈칫했다. 낯선 주소만 적혀 있어서 잘 몰랐는데, 지도를 보니 이제 알겠다. 원우가 나를 어디로 불렀는지.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결정을 또 한 번 내릴 수 있을지, 그 의문에도 금방 답이 나왔다. 흐릿하게 보이던 실루엣이 점점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면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커다란 쇼핑백을 두 개나 들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원우를 보니까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거다. 어쩔 수 없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차 안 막혔어? 일단 주차….”
“차원우, 너 그거 알아?”
“어?”
“내가 너 엄청 좋아하는 거.”
좋으니까. 좋아하니까.
혼자 했던 생각 때문에, 원우가 정한 데이트 장소 때문에, 노을이 흐드러지기 시작하는 시간 때문에, 들썩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나는 오랜만에 진지하게 고백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던 원우가 말없이 뒷좌석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 탄 다음 나보다도 훨씬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묻는다.
“너 오다가 사고 냈냐?”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인사 사고야? 아니면 뭐, 외제차라도 긁었어?”
어디까지 하나 보자. 대답 없이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멀뚱멀뚱 내 대답을 기다리던 원우가 갑자기 대뜸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온다.
“그런 거 아니면….”
“…….”
“나 좋아해 줘서 고마워. 사랑해, 은율아.”
이건 좀 의외다. 귀와 목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길지 않은 대답 안에 들어 있는 원우의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바로 어제 사귀기로 한 것처럼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면서 설레고 있었다. 일은 내가 벌여 놓고 괜히 민망해져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말을 못하고 있는데 원우가 사근사근하게 다시 말을 걸어온다.
“근데 은율아.”
“…응.”
“수리비 얼마 나왔어?”
“…….”
“외제차는 아니야?”
자기도 어색하긴 한가 보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웃음이 터져서 결국 나름대로 묵직했던 분위기는 다 없어졌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뭐 언제부터 그렇게 진지했다고. 이미 알 만큼 다 아는 사이인데 서로한테 제일 편한 분위기로 맞춰 주면 그만이다.
여기로 오라고 해서 놀라지 않았냐며 딱 봐도 기대를 엄청 한 듯한 원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도착하기 오 분 전에야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깜짝 놀랐다고 대답했다. 그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진짜 오 분 전에 알아채긴 했다. 놀라기도 했다. 데이트를 하자면서 졸업한 지 한참 된 대학교로 부르는데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어쨌거나 원우가 뿌듯해하니까 됐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슬그머니 내 어깨에 팔을 얹고는 조금씩 안아 당기는 것도 모른 척하기로 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원우에게 물었다.
“근데 갑자기 웬 학교?”
“오늘 여기로 출장 왔거든. 뭐 설명회 같은 거 하느라고 강의실 안까지 들어가서 돌아다니다 왔는데, 들어올 땐 하도 뭐가 많이 생겨서 되게 낯설었는데 안에는 그대로라 옛날 생각나더라.”
“옛날 생각? 뭐, 차원우 술 처먹고 잔디밭에 누워 있다는 전화 받고 내가 욕하면서 뛰어 나갔던 그런 일? 아니면 나 엠티 가는 날 자판기 뒤에 숨어서 버스 훔쳐보다가 들켜서 소정이한테 욕먹은 그런 일?”
웃으면서 쓱 올려다보자 원우가 불순한 의도를 가득 담은 눈빛을 쏘아 보내며 은근한 미소를 짓는다.
“아니, 노은율 토끼 옷 입고 노래자랑 나갔다가 꽐라 돼서 나한테 어부바 해 달라고 찡찡거렸던 일이나….”
“야, 그 얘기 하지 마라.”
“키스하고 싶어서 집에 가자는데 그것도 못 알아듣고 학생회관 참치비빔 먹고 싶다고 했던 일, 뭐 그런 거.”
“…그건 내가 눈치가 좀 없긴 없었어.”
“인정하지?”
마침 걷고 있던 곳이 딱 그곳이었다. 봄이 되면 벚꽃이 가득 피는데 항상 시험 기간이라 꽃놀이 한 번 하기 힘들었던 곳. 시험 끝나면 벚나무 아래에 자리 펴고 앉아서 소주부터 빨자고 그렇게 소정이랑 얘기를 했는데 결국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못했다. 시험만 끝나면 비가 와서 벚꽃이 다 떨어졌으니까. 그나마 꽃놀이 같지도 않은 꽃놀이를 한 번 하긴 했다. 사귀기 전이었다. 혹시 원우가 날 좋아하나, 라는 생각을 처음 했던 날이다. 대뜸 산책을 하자고 불러서 벚꽃길을 한 바퀴 돌더니, 내 입술을 닦아 주는 척하면서 손가락으로 꾹 눌러 쓸어 보고 먼저 가던 원우의 뒷모습을 봤던 날.
“…그때 차원우 좀 멋있었는데.”
“지금은 아니고?”
“나이를 생각해라. 솔직히 그때랑 비교가 되냐?”
“반박을 못 하게 만드네.”
그러면서도 싫진 않았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내 어깨를 조금 더 바짝 당겨 안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그냥 예전에 걸었던 그 길을 같이 걷기만 하고 있는데 왠지 기분이 남달랐다. 조금 들뜨는 것 같기도 했다. 건물 뒤쪽에 사람이 없는 산책로를 걸을 때는 슬쩍 손도 한 번 잡았다 놓고, 허리도 한 번 안아보면서 장난을 치다가 미대 건물 뒤쪽까지 오게 되었다. 나도 원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서로 눈을 쳐다봤다가 웃어 버렸다. 더 볼 것도 없는데 괜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원우가 투덜거렸다.
“이제 여기서 키스 못하겠다.”
원래는 차가 못 들어오는 곳이라 담벼락과 화단과 벚나무만 있었는데, 지금은 그 벚나무 근처에 차가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입술을 비비고 있다가는 어느 차가 됐든 블랙박스에 찍히기 딱 좋은 각도였다. 픽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우리만 무서워서 못하는 거지. 요즘 애들은 키스 정도는 그냥 할… 수도 있지 않나?”
별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는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원우의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저절로 말끝을 흐리게 됐다. 이제 이런 걸로 서운해하거나 심란해할 짬이 아닌데 원우는 왜 갑자기 굳었을까. 뭔가 기분 나쁜 말이었나? 아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조금 긴장한 것 같이 보였다. 왜 긴장하지? 이유를 모르겠다. 애써 덤덤하게 왜, 하고 대답해 놓고 정작 눈은 못 보겠어서 시선을 피하자 원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도 할 수 있는 데로 한 번 가 볼래?”
여기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뭘 벌써부터 하려고 하냐, 밥이라도 먹고 하면 안 되냐, 해도 안 졌는데 그 생각부터 하냐, 그러면서 웃고 넘길 건지. 아니면 내 말 때문에 신경 쓰는 거냐고,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거냐고 물어볼 건지. 방금 전까지 분위기는 웃고 넘길 만한 거였는데, 지금 원우의 분위기는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어디 가려고?”
그러자 원우가 다시 아까처럼 내 어깨를 감쌌다. 천천히 미대 건물을 돌아 나왔다. 나지막한 원우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울렸다.
“같이 가 보고 싶은 데가 많았는데 없어진 데도 많더라고. 학생회관 식당도 없어지고, 우리 산책할 때 매번 커피 사 마셨던 법대 옆 카페도 없어지고… 아, 맞다. 우리 처음 같이 살았던 자취방도 없어졌더라.”
“거기도 없어졌어?”
“어. 그 자리에 엄청 큰 원룸 건물 생겼던데. 앞에 도로도 넓히고.”
“그럼 그 포장마차도 없어졌겠네.”
“포장마차? 아, 거기.”
우리 처음 키스했던 곳, 뺨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워서 귀를 마구 문질렀다.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원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거기도 없어졌지. 그쪽 거의 다 갈아엎다시피 한 것 같아. 근데 아직 안 없어진 곳이 있더라고.”
어딘지 알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딘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얘기를 피하는 원우를 보면서 뭐가 그렇게 싫었는지,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묻고 싶다가도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처럼 초조했었다. 지금도 그런 기분이었다.
학교 후문 밖으로 나와서 골목 몇 개를 돌았을 때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내 걸음이 느려진 것을 알아챈 원우가 보폭을 맞춰 온다. 재촉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고 돌아가지도 않을 것 같다. 걸으면 걸을수록 걸음이 무거워진다. 그렇게 오르막길 앞까지 왔다. 계단을 앞에 두고 잠시 멈춰 섰던 원우가 먼저 몇 계단을 오르더니 나에게 손을 내민다. 망설이고 있다가 결국 그 손을 잡고 천천히 올라섰다. 익숙한 길이기도 했고, 내려가면서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길이기도 했다. 옥탑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둘 다 심각한 얼굴로 처음에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점점 서로 숨이 거칠어지는 걸 눈치채고 웃기 시작했다. 원우는 예전엔 이렇게까지는 안 힘들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고 투덜댔다. 원우보다 운동량이 적은 난 그 정도의 긴 문장도 못 만들 정도로 엄청 헉헉대고 있었다. 바뀌지도 않은 초록색 대문이 보이자 처음 망설였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다 왔다는 생각에 반갑기까지 했다.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데 대뜸 원우가 벨을 눌렀다. 기겁해서 원우의 손을 붙들었다.
“뭐야, 그냥 이 앞에 와 보자는 거 아니었어? 벨은 왜 눌러?”
“내가 다 준비해 놨지.”
“뭘 준비… 헐.”
초록색 대문이 벌컥 열리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와 함께 맞닥뜨린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엄청 민망해졌다. 누군지는 알겠다. 주인집 아들이었다. 근데 이름도 생각이 안 나고, 몇 살이었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 생각나는 게 딱 하나밖에 없었다. 원우와 한참 뜨거운 밤을 불사르고 있는데 갑자기 옥상으로 올라와서 지 애인과 전화통화를 하던 저 새끼 때문에 그날 소리를 참고 이불을 쥐어뜯느라 죽는 줄 알았었다.
하필 생각이 나도 그런 게 생각날 건 또 뭐야. 어색하게 웃으며 겨우 인사를 나눴다. 솔직히 아주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엄청 까칠해서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눈치를 봐야 했고, 수리를 해야 할 때마다 바로 해 주지 않아서 원우나 내 지갑이 털리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월세를 늦게 드린 적이 없는데도 월세를 빨리 안 준다는 소리를 매달 들어야 했다. 학교 근처의 원룸으로 이사하던 날, 돈이 쪼들리더라도 차라리 고시원을 가면 갔지 여긴 다시 오지 말자고 원우랑 약속까지 했었다.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원우는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들러서 주인집 아들을 구워삶아놨나 보다. 요즘은 창고로 쓰고 있다고, 예전에 형들이 쓰던 것 중에 안 버린 것도 있을 거라고, 엄마도 곧 온다고 하니까 꼭 얼굴 보고 가라고, 옥상으로 이어지는 철문을 열어 주며 주인집 아들이 쉴 새 없이 조잘거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장님 대하듯이 상냥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꼬박꼬박 대답을 하던 원우는 그럼 이따가 어머니 오시면 알려 달라면서 주인집 아들의 코앞에서 철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옥상 문을 열고 나오기가 무섭게 내 손을 깍지까지 껴서 꽉 잡는다. 만약 원우가 먼저 손을 잡지 않았으면 내가 잡았을 거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현기증이 났다.
“…저걸 안 버리고 아직도 뒀네.”
“그러게.”
눈앞에 펼쳐진 옥상과 옥탑방 풍경은 그대로였다. 평상도, 파라솔도, 심지어 깨진 화분과 찢어진 돗자리와 뚜껑이 맞지 않는 항아리와 휘어진 빨래걸이까지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평상은 요즘도 쓰고 있는지 먼지가 없이 그럭저럭 깨끗했다.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서 두리번거리는데 옆으로 온 원우가 대뜸 평상 위에 누워 버린다. 파라솔로 적당히 그늘을 만들고는 손짓을 하길래 나는 주위를 살피다 그냥 원우 옆에 누워 버렸다.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다가 원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람이 꽤 차다면서 들고 있던 재킷을 내 어깨 위로 덮어 주고는 원우가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린다.
“드라마 보면 그런 거 있잖아. 이렇게 눈 감고 있다가 떴는데 갑자기 아침인 거야. 그리고 우리 옥탑방에서 살 때로 돌아간 거지. 그러면….”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여기 처음 들어오던 날 봤던 거미 기억 안 나냐?”
“와 씨, 그건 진짜 무섭다.”
“여태까지 살면서 그거보다 큰 거미를 본 적이 없어.”
지금 생각해도 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 때문에 다시 생각났다며 툴툴거리면서도, 내가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자세를 잡아 주는 원우의 팔을 베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팔은 나에게 내 주고, 한 팔로 내 허리를 안고 있더니 조금씩 손이 올라와서 내 볼을 쓰다듬는다. 천천히 뜨인 원우의 두 눈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금 더, 그리고 그것도 아쉬워서 조금 더 가까이 갔다. 원우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눈 떴는데 옥탑방에서 살 때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건데?”
“집에 가서 엄마한테 빌어야지.”
“나 차원우랑 헤어졌어요, 그러니까 거미 없는 집 좀 구해 주세요, 이렇게?”
“아니. 차원우 진짜 괜찮은 놈이니까 딱 한 번만 만나보라고, 그래도 부모인데 자식한테 한 번 져 주면 안 되냐고.”
잘생긴 애인의 얼굴 가득 걸린 미소를 가까이서 보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다. 원우를 따라 웃고 있다가 마른 입술 위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떼고 말했다.
“…만나기 싫으면 천만 원만 무이자로 꿔 달라고 빌어 보려고.”
“천만 원이면 꿔 주고 싶어도 못 주시겠는데.”
“그때 난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 엄마 비상금 꽤 되더라. 꿔 줄 수 있을 걸?”
“그래? 이따 전화 한 번 드려야겠네. 요즘 내가 좀 뜸했지. 어머니 사랑한다고 노래라도 한 곡 해야겠다.”
“차라리 나랑 못 살겠다고, 짐 다 싸서 집으로 보내겠다고 해. 그럼 우리 엄마 무서워서 너한테 돈 보낼 거야.”
“그걸 믿으시겠냐. 내가 우리 자기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 어머니도 다 아시잖아.”
“…어휴, 닭살, 어휴.”
“뭘 새삼스럽게.”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따뜻한 숨결이 입술을 간질였다.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던 원우의 손가락이 옆으로 옮겨 가서 귓가를 어루만진다. 길쭉한 손가락이 내 머리를 감쌌다.
“여기 오면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되게 많았는데, 이러고 있으니까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좋아서 그래.”
“그런가 봐.”
“…….”
“아직도 노은율이 너무 좋은데, 큰일이네.”
원우의 손을 잡아 내리고 그 손바닥에 입술을 한참 눌렀다가 뗐다.
“뭐가 큰일이야. 그냥 계속 좋아하면 되잖아.”
“…….”
“나도 그럴 건데.”
아주 가까이에서, 서로의 마음까지 전부 들여다볼 수 있을 거리에서 눈을 마주했다. 맞닿은 가슴 너머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뒤섞였다. 팔을 뻗어 원우의 목을 안고 내가 먼저 입을 맞췄다.
원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 옥탑방에서 살 때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나는 그게 예전의 나인지, 아니면 지금의 내가 돌아간 과거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 같다. 눈치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여기서 보냈던 수많은 날들 중 이런 날도 분명 있었을 거다. 힘들고 지치긴 했어도, 사는 게 괴롭고 버겁긴 했어도, 그냥 둘이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옥상의 평상에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보고 있다가 입술을 맞대고 웃는 시간이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날이 없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에게 내어주는 마음의 크기까지 똑같은데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다.
원우와 함께 보내는 날들이 지나가면 갈수록 몇 분 전의 시간이, 몇 시간 전의 아침이, 하루 전의 어제가, 몇 달 전의 계절이, 몇 년 전의 일들이 소중해진다. 그러니 여기에서 보냈던 날들도 이제는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데이트 코스가 마음에 들었냐는 원우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나는 다시 한번 진하게 키스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아쉬운 게 없진 않지만 그래도 출장 온 김에 급하게 준비한 것 치고는 나름대로 괜찮은 데이트였던 것 같다. 별거 아니었으면 은율이가 데이트도 끝내고 나도 끝내 버렸겠지만, 데이트도 계속되고 있고 나도 살아 있는 걸 보면 은율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나 보다. 옥탑방에서 내려오면서 은율이가 피곤해 하면 바로 학교에 가서 차를 빼 오려고 했는데 학교 근처를 구경하자고 해서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카페 자리에 새로 들어온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은율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술집 자리에 생긴 디저트 가게에서 케이크와 마카롱도 샀다. 수도 없이 지나다녔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사소한 걸로 싸우고 또 얼마나 사소한 걸로 감동했었는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갔다.
그래도 다 없어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큰길 쪽에 있던 삼겹살집과 만두집도 그대로였고, 예전에 밥 차리고 치우기 귀찮으면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끌고 나와서 한 끼 식사를 때웠던 백반집도 아직 있었다.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어서 오늘도 예전처럼 여기서 한 끼를 해결하고 가기로 했다. 밑반찬을 앞에 두고 은율이 앞에 수저를 놓아 주다 보니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너 여기서 나한테 프러포즈 했던 거 기억 안 나냐?”
우리가 앉은 테이블이 제일 구석에 있기도 하고, 저녁 시간이라 꽉 들어찬 손님들 때문에 주위가 시끌시끌해서 적당히 소리가 묻혔는데도 은율이가 도끼눈을 뜨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진짠데, 하고 웅얼거리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나 그런 적 없는데.”
“잘 생각해 봐.”
“…내가 그랬다고?”
“어.”
“언제? 군대 갔다 와서?”
“아니, 그전에.”
“그전에?”
“진짜 기억 안 나? 네가 나한테 먼저 같이 살자고 했던 거.”
“…아 뭐야, 그 얘기야?”
“왜, 되게 의미 있는 얘긴데. 먼저 프러포즈한 사람이 너라는 거잖아.”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은율이가 손가락을 까딱인다. 가까이 가려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공공장소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숟가락을 휙 치켜들었던 은율이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생각났다. 지금이야 방향과 힘이 조절이 되지만, 그때는 방향도 힘도 조절이 안 되던 은율이가 휘두른 숟가락에 처음 맞았었다. 물론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이 정도 피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의기양양해하다가 발을 밟히고 정신을 차렸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어제 그렇게 끈질기게 괴롭혀 놓고 오늘 몇 시간 동안 밖으로 불러내 돌아다닌 게 미안해서 얼른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운전석 쪽으로 가는 내 어깨를 붙든 은율이가 몸을 돌리게 하더니 조수석 쪽으로 등을 떠민다.
“왜?”
“내가 운전하려고.”
“내가 할게. 넌 가면서 좀 자.”
“괜찮아. 내가 운전할 테니까 넌 소정이한테 잘 받았다고 전화나 해.”
“소정이? 뭘 받아?”
“아까 불고기 엄청 많이 보냈더라.”
“아 그런 거 자꾸 보내지 말라니까. 들고 오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은지가 들고 왔어.”
“은지가? 집에 왔다 갔다고? 그거 들고?”
“어.”
“헐.”
“금방 갔어. 약속 있다고. 누구랑 약속 있는지 끝까지 말 안 하더라.”
밖에서 차 문을 열고, 각자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주차장 요금을 정산하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대화가 거기서 끊겼다. 은율이의 눈치를 살피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나도 반대하는 입장인데 내가 왜 은율이 눈치를 봐야 하지. 고개를 꼿꼿하게 든 채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말하기 싫었을 수도 있지.”
그러자 은율이가 나를 노려본다.
“너 때문인 줄이나 알아.”
“내가 뭘.”
“노은지가 무슨 소릴 해도 네가 다 받아 주니까 걔가 오빠한테 신경 끄고 가서 잠이나 자라고 막말하잖아.”
“그게 뭐가 막말이냐? 욕도 아닌데. 너 피곤해 보여서 그랬겠지.”
“이 와중에 또 노은지 편부터 들어?”
“야, 편드는 게 아니라….”
변명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눈빛만 봐도 알겠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하게 화가 난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은지 일 때문에 짜증이 나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풀어 줄까. 일단 한 번 찔러 보기로 했다.
“은율아.”
“…뭐.”
“자기야.”
왜,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호칭을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는 걸 보면 아예 듣기 싫은 건 아닌가 보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은율이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씩 웃었다.
“이제 은지 편 안 들게.”
“편드는 거 아니라며.”
“우리 자기가 편들었다고 하면 편든 거지 뭐. 내가 잘못했어. 안 그럴게.”
“말은 잘한다, 어휴.”
“나 말 잘했쪄?”
“혓바닥 반토막 났냐?”
“볼래? 반토막 났는지? 내가 확인시켜 줄게.”
은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쭉 내밀고 가까이 갔더니 결국 은율이가 어이없어 하면서도 웃어버린다. 운전 중이니까 똑바로 앉으라고 내 이마를 떠밀어 놓고, 잠깐 신호에 걸린 사이에 기어를 잡고 있던 손을 잡아서 일부러 쪽쪽거리며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등에 뽀뽀했더니 그건 또 안 빼고 그냥 둔다. 은율이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고 있다. 겨우 찾은 평화가 또 깨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그 평화를 깼던 게 우리라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는 것도 다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이번엔 자신이 있었다. 이제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은율이를 감싼 채로 서 있을 수 있다. 이런 것도 요령이 생겼나 보다. 뻗쳐 있는 머리카락을 잘 정돈해 주면서 은율이의 표정을 살폈다. 흔들리던 눈빛이 곧 안정을 찾는다. 빙긋 웃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근데 여보야, 여기서 직진해야 되는데?”
“직진 안 해도 돼.”
“아니, 여기서 좌회전하면 안….”
“좌회전해도 된다고.”
“그럼 한참 돌아갈 텐데.”
“집에 안 가면 되잖아.”
“집에… 어?”
“왜, 집에 꼭 가야겠어?”
“…아니.”
척하면 척이다. 재빨리 분위기 파악을 한 나는 급하게 핸드폰에 띄운 지도를 끄고 얌전히 앉았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자꾸 헤실헤실 웃음이 나와서 못 참겠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고 은율이를 흘낏 쳐다보았다. 운전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은율이도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 데이트 코스 잘 짰다고 상 주는 거지?”
“그런 거 같아?”
“아니야?”
“그냥 내가 집에 갈 때까지 못 참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건데.”
“헐.”
“왜?”
“어? 아니야.”
그게 상이지 뭐. 노은율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게 얼마 만인가 싶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밤하늘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내일 연차 쓰라고 하면 화내려나? 뭐, 자기도 생각이 다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내가 할 필요 없는 걱정은 안 하기로 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체크인하고 방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오늘 못한 키스부터 할 거라고 백 번도 더 생각하면서 머릿속으로 이 상상 저 상상 마구잡이로 해 댔는데 막상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는 동안 나는 살짝 쫄았다. 오늘 같은 분위기면 모텔은 아닐 거고 근처에 있는 적당한 가격의 비즈니스호텔 정도로 방을 잡았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은율이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지난번 내가 큰맘 먹고 저녁 식사를 예약했다가 은율이가 못 먹는 망고 케이크가 잘못 나오는 바람에 마무리를 망쳤던 그 호텔이었다. 내가 여기서 저녁 먹자고 할 때는 머릿속으로 계산기 두드리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안 좋은 표정이었는데 지금 은율이는 언뜻 봐도 엄청 신이 나 있다. 이런 곳에서 하루 자는 게 그렇게까지 큰 부담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내가 아닌 은율이가 결정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이런 곳에 오면 주위 시선이 신경 쓰여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들면서 오늘은 웬일로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손부터 잡는 것도 신기하고, 또… 방에 들어오자마자 키스하는 걸 그냥 받아 주는 것도 신기하고.
“왜 웃어?”
느슨해진 내 넥타이를 빼서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두 손으로 셔츠 단추를 꼼꼼히 풀고 있는 은율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비비다가 물었다. 시키는 대로 재킷에서 팔을 빼자 잘했다는 듯이 내 머리를 부스스 흩트려 놓은 은율이가 대답했다.
“그냥, 너 이렇게 문 앞에서부터 달려드는 거 오랜만이라서 웃겨.”
그랬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집에서 할 때는 일단 이런 분위기가 안 나온다. 퇴근하고 와서 밥 먹고, 샤워하고, TV도 좀 보고, 그러다 마치 정해진 일과를 처리하는 것처럼 오늘 할 거냐고 물어보고, 하자고 하면 들어가서 각자 알아서 옷 벗고, 그 뒤로는 익숙하게 이어지는 절차를 밟기 마련이었다. 업무도 아닌데 참 성실하게 하나하나 결재 받긴 했다.
“안 웃기게 막 짐승처럼 덤벼 볼까?”
“안 덤벼도 넌 짐승이야. 어제 했던 거 까먹었냐? 잠깐만, 잡아당기지 마. 내가 벗을게.”
“예전엔 그랬잖아. 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막 한 번만 더 하면 안 되냐고 졸라서 또 하고.”
“요즘은 안 그런 것처럼 얘기하네. 양심 어디 갔어?”
“나 원래 양심 없어. 핸드폰 꺼내 놔? 내 재킷에 넣어 둘까?”
“응. 근데 너 안 급한가 보다, 차원우.”
“뭐가?”
“내가 셔츠 단추 하나씩 일일이 풀고 있는데도 그냥 두고, 내 옷 내가 벗겠다고 막는데도 그러라고 하고, 내 핸드폰 신경 쓸 여유도 있고.”
그러고 보니 지금 들어오자마자 키스만 바로 했을 뿐 셔츠 하나 벗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게다가 옷을 벗는 와중에도 잡아당기지 말라길래 그냥 놔주고, 은율이의 핸드폰도 내 재킷 안에 잘 넣어 두고 있었다. 하도 익숙해지다 보니까 이제 별 걸 다 신경 쓰게 된다. 웃고 있는 은율이를 빤히 보다 셔츠를 벗어 아래에 대충 던져 놓고 허리를 확 당겨 안았다. 이러면 놀라는 기색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은율이 역시 놀라기는커녕 늘 있던 일이라는 것처럼 심드렁하게 내 바지 버클을 풀고 있다. 문 앞에서부터 달려드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오랜만이라서 웃긴 거라면 어쨌든 싫은 건 아니란 소리다. 그럼 더 웃게 해 줘야지. 허벅지를 꽉 쥐자마자 그제야 은율이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그대로 은율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아 뭐야, 왜!”
“내가 그동안 너무 느긋하긴 했지.”
“안 내려놔?”
“근데 예전처럼 못해서 안 하는 건 아니고, 너 힘들까 봐 그랬지.”
“으악!”
침대 위에 은율이를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바로 올라탔다. 일주일 밤샘하다가 연차 받아서 집에 온 은율이를 맞닥뜨렸을 때처럼 말할 틈을 주는 대신 곧바로 입술부터 마주 댔다. 닿은 입술 사이로 금세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혀를 감아 당기다가 놓아주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때마다 허리와 어깨가 움찔거린다. 빨갛게 물이 오른 입술을 혀끝으로 살살 쓸면서 속삭였다.
“네가 하나 간과한 게 있는데.”
“뭐, 뭐가?”
“예전에 눈에 뵈는 게 없을 땐 물고 빨기 바빠서 내가 헛방을 많이 쳤잖아. 근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거든.”
“…야, 잠깐만.”
“말했잖아.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니까.”
티셔츠 말고는 벗은 것도 없던 은율이가 알몸이 될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로 제일 약한 부분에 손을 뻗자마자 기겁하면서 내 손을 붙든다. 은율이의 손을 떼어 내서 깍지를 끼고 다른 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진득하게 훑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기회를 줄게.”
“알았어. 예전처럼 하지 말고 요즘처럼, 읏, 요즘처럼 해.”
“그거 아닌데. 골라 봐. 내일 반차 쓰고 늦게 출근할래? 아니면 내일 연차 쓰고 쉴래? 반차 쓴다고 하면 두 시까지만 하고, 연차 쓴다고 하면 장담 못해. 아, 전화는 내가 해 줄게.”
“정시 출근은 왜, 아, 윽, 왜 없어?”
“있겠냐? 못 참을 것 같다는 소리 하고 호텔에 데리고 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쩔래?”
여린 살결을 쓰다듬던 손을 움직여 이미 반쯤 일어선 은율이의 것을 살짝 잡고 느릿느릿 매만졌다. 부르르 떨면서 이불을 꽉 붙든 은율이가 나를 노려본다. 대답은 뻔했다. 내가 연차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줄 아냐, 반차도 힘들다, 아까는 그냥 농담한 거였다, 내일 조식은 먹어야 되는 거 아니냐, 뭐 그런 보기들 중 하나가 정답일 거다. 노은율 머릿속에 든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알았으니까 해.”
“알긴 뭘 알아. 선택하라니까.”
“…벌써 연차 썼으니까 빨리 하라고.”
거기서 거기가 아니었다. 예상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귀와 목까지 빨갛게 물들인 은율이가 팔을 들어 눈을 가린다. 멍하니 보고 있다가 나는 씩 웃었다. 여태까지 키스하고 만지고 쓰다듬을 때까지만 해도 조금 흥분되는 정도였는데, 고작 얼굴 빨개진 노은율이 쑥스러워하는 걸 보자마자 저절로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예전처럼 앞뒤 안 재고 거칠게 안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은율이의 몸에 부담이 많이 간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뭘 좀 급하게 하려다가도 저절로 브레이크가 걸린다. 급한 척하며 적당히 사정을 봐 주면서 한 번 하고 나서 숨을 고르고 뜨거워진 머리를 가라앉히고 있는데 은율이가 안아 달라는 듯이 팔을 뻗는다. 몸을 겹치고 허리 아래로 손을 넣어 꽉 껴안았다. 그러자 아직 내 것을 품고 있던 안이 요동치면서 빨아 댄다. 거기서 살짝 이성이 날아갈 뻔했지만 겨우 붙들었다. 차에 있는 콘돔을 갖고 올라오긴 했지만 두 개밖에 없었고, 벌써 하나를 썼으니까, 욕실에서 하더라도 일단 지금은 좀 참고… 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짜증 나.”
“응?”
“으, 아읏… 짜증 난다고.”
“뭐가.”
진짜로 짜증 낼 때 짓는 표정이 아니라 꼭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은율이가 이런 식으로 투정을 부리는 건 진짜 보기 힘든 희귀한 광경이다. 우리 여보가 왜 짜증 났을까,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달래며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내 손에 이마를 기댄 채로 숨을 몰아쉬던 은율이가 툴툴거렸다.
“좋아서, 짜증나.”
“어?”
“너 지금… 딱 기분 좋을 때까지만, 하잖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나 모르겠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버거워하거나 눈물까지 보여 가며 견디기 힘들어 하는 꼴을 봤다가는 후폭풍이 너무 세서 적당히 하려던 건데 거기서 불이 확 붙었다. 브레이크가 있으면 뭐하나 싶다. 당사자가 브레이크 밟지 말라는데 그럼 엑셀 밟아야지.
“미안, 여보가 그런 취향인 줄도 모르고 몸 사렸네.”
“취향인 게 아니라, 아, 으응…!”
“그럼 오늘은 말 안 들어도 되지?”
“그 말이 아니, 아, 잠깐, 아! 거기 너무…!”
“깊어서 싫다, 그러려고?”
“아윽!”
두 손으로 허리를 받쳐 들어 올리고 평소에는 잘 닿지 않던 깊은 곳까지 내 것을 쑤셔 넣었다. 풀려 있던 안이 바짝 경직되었다가 가득 들어찬 내 것을 씹는 것처럼 오물거리며 끌어당긴다. 깊숙한 곳에 끝을 두고 슬슬 쳐올릴 것처럼 가볍게 움직이자마자 은율이가 고개를 휙 젖혔다. 아주 약간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정신줄 놓기 딱 좋다. 더 들어갈 것처럼 헤집다가 뒤로 살짝 빼고, 다시 안쪽까지 비집고 들어갔다가 닿은 곳을 뭉근하게 짓누르자 약한 절정이 왔는지 시트를 움켜 쥔 채로 은율이가 덜덜 떨었다. 원우야, 벌어진 입술로 겨우 내뱉은 내 이름에 열이 확 올랐다.
“흐, 아, 너무 안까지, 아윽, 하지 마, 앗!”
“안 들려.”
“야, 차원우, 아윽!”
“안 들린다고.”
“아, 아! 흐앗, 앗, 그만, 아! 천천히…!”
“읏, 안 들린다니까.”
“아, 으응, 응…!”
일부러 내벽을 잔뜩 긁으며 파고들어 느끼는 곳을 꽉 누르고 세게 비볐다. 안에서 느껴지는 쾌감만으로 끝까지 도달한 은율이가 이를 악물고 도리질 치며 몸을 비틀었다. 배 위로 쏟아 낸 절정의 흔적을 손으로 대충 닦아 내고 다시 몸을 겹쳤다. 안쪽에 깊이 파묻혀 있는 귀두 끝을 슬슬 움직여 방향을 바꿀 때마다 시트를 쥐어뜯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내 허리를 누르며 안달을 한다. 일부러 다른 곳만 쿡쿡 찔러 대다 땀이 잔뜩 밴 은율이의 몸을 힘껏 껴안은 채로 세게 한 번 박아 넣었다.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내 어깨를 움켜쥔 채로 은율이가 헉, 하고 숨을 멈춘다. 순식간에 조여드는 바람에 나까지 그대로 쌀 뻔했다. 입술을 빨고 유두를 지분거리면서 계속 허리를 쳐올렸다. 빠져나갔다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극점에 닿은 채로 계속 밀고 들어갈 것처럼 움직이는 게 견디기 힘들었는지 기어이 은율이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거기서 한 번 멈칫했다. 잠깐 쉴까 고민하고 있을 때 벌어진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던 입술이 달싹이면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으, 흑, 원우야….”
“…응, 왜?”
“아, 앗, 이상해, 나, 아, 흑.”
“뭐가, 하아, 뭐가 이상한데?”
고작 가슴을 한 번 쓸었을 뿐인데 은율이가 또 한 번 눈을 질끈 감고 부르르 떨었다. 손을 뻗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되는지 겨우 고개를 돌려 피한다. 빨갛게 달아올라 가쁜 숨을 내쉬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 흘러내리는 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야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좀 쉬었다가 해야 되나. 평소보다 빨리 우는 것 같은데. 아직도 깊이 파고들어 있는 내 것을 슬슬 빼 보려는데 부어오른 입술이 달싹였다.
“자꾸, 흐, 아으, 싸지도 않았, 는데, 앗, 으응, 흣….”
“…어?”
“움직이지, 마, 읏! 안, 안 돼, 아, 앗! 또, 흐으윽…!”
껴안고 있을 때부터 아래에 계속 비벼져서 아까부터 빳빳하게 일어서 있는 은율이의 것을 살피려고 몸을 살짝 들었다가 멈칫했다. 잘라먹기라도 할 것처럼 안을 잔뜩 조이는 은율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 허리가 잔뜩 들려 올라왔다. 한 차례 짧게 경련한 몸에서 힘이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무릎까지 후들거리면서 다리를 좁히는 걸 보면 제대로 간 것 같긴 한데 말갛게 끝을 적신 채로 흔들리는 성기 끝에서는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처음 보는 모습인데다 흐느끼며 계속 보채는 은율이 때문에 순간 당황해서 머리가 멈췄다. 안 그래도 나도 버티기 힘들어지고 있는데 은율이까지 이러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빼야 되나, 차라리 넣는 게 낫나, 아니면….
“흐으, 좋아, 앗, 아, 아아!”
“좋아…?”
“아, 아! 거기, 흐, 아흑, 아!”
“여기?”
“원, 우야, 흐윽, 빨리, 나, 으응, 흑….”
잘게 흔들 때마다 깊은 안쪽부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은율이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은율이가 다급하게 내 팔을 붙들어 당긴다. 더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좋다는데 뭐, 그거면 됐지.
예전처럼 한다고는 했어도 확실히 예전과 똑같이 할 수는 없다. 체력부터 예전과는 다르니까. 뭐 얼마나 했다고 벌써 허리가 다 뻐근해진다.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전 같지 않은 건 은율이도 마찬가진가 보다. 아직 두 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기절할 거면 기분 좋을 때까지만 한다고 짜증은 왜 냈나 싶다.
침대 아래로 내려왔더니 온몸이 쑤셨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예전처럼 하면 안 되는 일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움직여 정리를 모두 끝내고, 욕조 가득 받아둔 뜨거운 물이 식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늘어져 있는 은율이를 안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들어가며 자세를 고쳐 잡는 동안에도 정신을 못 차리더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등에 물을 살살 끼얹어 주자 그제야 움찔움찔 하면서 귀여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소리를 낸다. 근육이 뭉치지 않도록 목 뒤와 어깨를 꾹꾹 눌러 마사지해 주는 것도 이제 손에 익은 일이 되었다. 겨우 눈을 뜨고 물부터 찾길래 아까 미리 준비해 둔 생수를 컵에 따라 주었다. 목을 축이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투덜거리다 내 어깨를 물어 버린다. 피식 웃으면서 맥없이 풀린 허리를 받쳐 주었다.
“두 번 짜증 냈다가는 죽겠다 싶지?”
“…닥쳐.”
“연차까지 먼저 쓰고 예전처럼 하라더니 어때, 마음에 들었어?”
말로 하는 대답보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긴 한숨이 먼저 나온다. 웃음이 터져서 몸을 들썩이다가 은율이가 미끄러질 뻔하고 나서는 아예 내 허리에 팔을 두르게 하고 바짝 당겨 안았다. 성질은 나는데 지가 먼저 하라고 해서 누굴 탓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몸이 이 지경이 된 게 억울했는지 정도를 모른다고 투덜대길래 미안하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귓가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은율아, 나 운동할까 봐. 트레이너 붙여서.”
“…뭐?”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많이 못 하겠더라. 너도 같이 운동하자. 예전처럼 밤 한 번 새 봐야 될 거 아냐.”
이번에는 대답 대신 주먹질이 먼저 나온다. 물속에서 내 배에 어퍼컷을 꽂아 넣은 은율이가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대 와서 나는 실실 웃으며 팔을 주물러 주었다. 싫다는 소리를 안 하는 걸 보면 자기도 밤샘을 해 볼 생각이 있긴 있나 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겁이 없는 것도 똑같고 자기가 겁이 없다는 걸 항상 한 발 늦게 깨닫는 것도 똑같은, 사랑스러운 내 애인의 등을 느긋하게 쓰다듬었다.
<뜻밖의추억여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