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노은율
원래는 원우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서 먼저 준비하고 원우를 깨워 주면서 슬쩍 화해 시도를 하려고 했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이마를 쓸어 주고 귓가를 따라 움직인 손가락이 목덜미를 살살 매만지는 느낌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가 뒤늦게 냉전 상태인 것을 깨닫고 얼른 눈을 떴다. 내가 눈을 뜨기가 무섭게 손을 치운 원우가 테라스와 방 안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세수만 하고 나와. 조식 시간 얼마 안 남았어.”
“몇 시야…?”
“아홉 시. 공항 가기 전에 뭐 하나라도 보고 가려면 얼른 나가야지.”
“공항?”
“서울 가야 된다며. 얼른 세수하고 와.”
멍했던 머리에 누가 찬물을 들이부은 것 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아니라, 하면서 가까이 온 원우의 팔을 잡으려는데 원우가 홱 돌아서더니 여행 가방에 옷을 툭툭 던져 넣고 가방을 닫는다. 진짜 화났나 보다. 할 말이 없었다. 나였으면 더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신혼여행 간다고 그렇게 설레어 했는데 제대로 여행하는 첫날부터 비바람이 몰아치고, 그 비바람을 뚫고 겨우 구경을 하고 내일을 기약하려는데 일 때문에 서울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기나 하고…. 애꿎은 침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밥 먹으면서 차근차근 설명을 할 생각이었다. 얼른 얼굴만 닦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고 원우를 불렀다.
“가자.”
“가서 먹고 와.”
“어?”
“너 안 일어나길래 아까 먼저 먹고 왔어. 짐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먹고 와.”
“차원우.”
“왜.”
“…화 많이 난 거 알겠는데, 내 얘기도 좀 듣고 화내면 안 돼?”
“얘기해.”
나도 모르게 자꾸만 몸이 움츠러든다. 평소의 원우는 허허실실 물렁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보이는데,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꾸할 때면 말을 붙이기도 쉽지가 않다. 원우가 한참 날뛰는 망아지처럼 굴 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의 원우는 날뛰는 망아지 시절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침대 옆의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잠자코 뚫어져라 쳐다보길래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서울 안 가도 돼. 그냥 원래 일정대로 움직이고 내일 올라가자.”
“프로젝트 들어왔다며.”
“그것 때문에 어제 통화한 건데 일단 정아한테 맡겼어. 내준 휴가를 회수할 수도 없는 건데 뭐 어때, 그냥 놀다 갈래.”
“괜히 무리하지 말고 가야 되면 차라리 빨리 말해. 이따가 돌아다니다 갑자기 올라가야 된다고 하면 다시 호텔 들렀다가 공항 가야 돼서 복잡해지니까.”
“안 가도 돼.”
“…….”
“진짜야.”
그 전에도 회사에서 휴가를 주면 보통 집에서 모자란 잠을 자거나 원우랑 놀아 주며 쉬는 정도였기 때문에 팀장님은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인 줄 알았던 모양인데 그게 더 짜증이 났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것 같이 보였다. 팀장님에게 나는 지금 제주도에 내려와 있고 심지어 비바람까지 몰아쳐서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더니 못내 아쉬운 듯 몇 번이나 더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겨우 전화를 끊었다. 거기서 열이 받아서 괜히 원우에게 화풀이를 할까 봐 방에서 나갔던 거였다. 밖에서 정아와 통화를 했고, 대충 상황을 알려 준 정아가 일단 자기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해 놓을 테니까 이왕이면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메일이나 몇 번 확인해 달라고 했다. 여전히 찜찜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원우에게 한 십 년은 족히 미안할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안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안 간다고 말을 해도 원우는 대답은 안 하고 계속 나를 보고 있기만 해서 나도 어정쩡하게 굳은 채로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일어난다. 이때다 싶어 나는 얼른 원우의 옆으로 갔다.
“나 그냥 조식 안 먹을래. 혼자 밥 먹기 싫어.”
내 나름대로 화해를 하자고 꺼낸 말이었는데 원우의 눈썹이 쓱 올라가는 걸 보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이놈의 싫다는 말은 왜 입에 붙어서…. 오늘은 벌금으로 퉁 칠 분위기가 아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가 입을 여는데 원우가 먼저 말했다.
“내기 안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어?”
“해서 뭐하냐, 괜히 서로 눈치나 보고 신경이나 쓰고. 그만하자.”
“…….”
“조식 먹으러 갈 거 아니면 준비하고 나와. 나 주차장 내려가서 차 정리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원우야.”
“어.”
“…진짜 서울 안 가도 돼.”
“알았어.”
“중간에 가자고 하지도 않을게.”
“알았다니까.”
“그럼 왜 화났어?”
“화난 게 아니라 서운한 거고, 말해 봤자 뭘 그런 걸로 서운하냐고 할 게 뻔해서 말 안 할래.”
뭔지는 모르지만 그간 내가 해온 전적이 있으니 왜 말도 안 하면서 그렇게 짐작하냐고 따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하루 종일 이런 분위기로 지낼 수는 없다. 차 키를 들고 나가려는 원우를 뒤에서 황급히 붙들었다.
“뭘 그런 걸로 서운하냐는 소리 안 할 테니까 말해 봐.”
“…….”
“내가 뭐 잘못했어?”
머뭇거리고 있는 걸 보니 말을 하기는 할 것 같다. 좀 달래 주면 풀어질까 싶어서 손을 잡고 깍지를 끼려는데 뒤로 물러서면서 팔을 확 빼낸 원우가 한숨을 쉬더니 나름대로 매섭게 눈을 치켜뜬다.
“이런 것 좀 하지 마.”
“뭘?”
“솔직히 너 이럴 때마다 기분 좋아져서 헤벌레 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닌데, 내 눈치 봐야 될 때만 이렇게… 하여튼 이런 거 하지 말라고.”
“내가 뭘 어쨌는데.”
“지금도 나한테 뭐 잘못한 것 같으니까 손부터 잡는 거잖아.”
“야, 그건….”
“저번에도 얘기했지. 넌 너 아쉬울 때만 나한테 살갑게 굴어.”
“너 말 이상하게 한다. 내가…!”
내가 언제 나 아쉬울 때만 너한테 그랬냐, 평상시에도 충분히 살갑게 했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살갑게 해야 되는 거냐, 내가 무슨 나한테 필요할 때만 너한테 들러붙는 줄 아냐, 그렇게 항변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데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평소에 내가 원우보다 더 표현에 인색한 것도, 다정한 말보다는 툴툴거리는 볼멘소리가 먼저인 것도, 원우가 먼저 다가오지 않으면 먼저 스킨십을 하는 일이 적은 것도 다 인정한다. 그런데 아쉬울 때 살갑게 구는 식으로 요령을 피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억울해서 뭔가 말을 하려다가도 결국 내 무덤만 파는 것 같아 인상만 잔뜩 찡그리고 있다가 이를 득득 갈았더니 원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됐다. 네가 그럴 때마다 넋 놓고 풀어지는 내가 잘못이지.”
“…….”
“나와. 차 정리하고 있을….”
“차원우.”
“왜.”
“…내가 평소에 살갑게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고.”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거면 그게 더 놀라운데.”
“…….”
“됐어, 그냥 흘려들어. 이제 와서 이런 일로 태클 걸고 싶지도 않고 태클 건다고 바뀌는 거 없는 것도 아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해. 어제 갑자기 서울 가자고 해서 나 혼자 꽁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말 나온 김에 까놓고 말해 봐? 내가 뭐 미안한 일 있어서 네 눈치 보면서 샐샐대면 네가 금방 웃고 기분 푸니까 더 그랬던 건 있어. 너랑 싸우기 싫고 너 서운해 하는 거 보기 싫으니까. 근데 너도 평소에 내가 살갑게 하면 식겁해서 무서워하잖아.”
“뭘 식겁하고 무서워해? 내가 언제?”
“너 내가 문자로 워누워누야, 자기야, 여보야, 이러면 너 나한테 무섭다고 하잖아. 무슨 일이냐고 그러고.”
원우가 입을 딱 다물어 버린다. 예전에 집안일 한 번 시켜보려고 문자로 애교를 부렸더니 진짜 잘못했다면서 대체 왜 그러냐는 소리를 했던 적도 있고, 얼마 전에는 야근을 마치고 너무 힘들어서 데리러 와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우리 여보가 보고 싶다는 소리를 한 번 했다가 심리 테스트하는 거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평소에 이유 없이 살갑게 굴면 지가 지레 놀라면서 나한테만 책임을 떠넘기는 게 조금 억울했다. 할 말이 없었는지 차 키만 휙휙 돌리고 있길래 조금 앞으로 다가가 섰다. 나만큼이나 뭔가 억울한지 할 말이 엄청 많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원우의 두 볼을 잡아 쭉쭉 늘리면서 말했다.
“어쨌든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까 미안해. 근데 정말 나 아쉬울 때만 너 가지고 놀려고 그러는 거 아냐.”
“…내가 언제 나 가지고 놀았다고 그랬냐. 그렇게 심하게 말한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평소에도 막 이렇게 해 달라는 거지?”
손을 잡고 깍지를 꼈더니 원우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좋은데 좋은 티 안 내려고 참 힘들게도 참고 있다. 피식 웃으면서 조금 더 가까이 가서 가슴에 콩, 하고 이마를 기댔다.
“막 이런 것도 하고?”
“…아 됐어.”
“아니야?”
“…….”
“차원우, 아니냐니까.”
“너 지금도 나 삐진 것 같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아닌데? 나 원래 이런 거 잘하는데?”
못 하는 거 억지로 하지 말라며 몸을 홱 돌리면서도 손은 안 놓는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구경할 곳으로 가는 동안 차에서 아침을 대충 때우기로 했다. 어제 사온 점퍼 두 개를 집어 들고 원우가 방 밖으로 나선다.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씩 웃었다. 어디 오늘 한 번 죽어 봐라.
***
오늘은 비바람이 어제처럼 심하지 않아서 원래 계획했던 일정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보고 싶었던 폭포도 구경하고, 숲과 바위가 장관인 계곡에서 사진도 실컷 찍고, 때 맞춰 점심도 먹었다. 다음 스케줄은 원우와 내가 제일 기대하고 있던 아쿠아리움이었다. 뻥 뚫린 도로를 달리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원우는 지친 것 같았다. 지칠 만도 하지.
“노은율.”
“응.”
“너 언제까지 그럴 거냐?”
“내가 뭘?”
“너 아침부터… 아니다, 됐다.”
“왜, 우리 워누 또 삐졌어? 내가 뭐 또 잘못했어?”
원우가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창문 밖으로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린다. 나는 대놓고 낄낄대며 웃었다. 아침에 호텔에서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런 식이었다. 오그라드는 거 그렇게 좋아하면 어디 오그라들다 못해 손발이 없어져 보라는 심산으로 호칭도 우리 워누 아니면 자기로 통일하고 일부러 목소리 톤도 높였다. 처음에는 은근히 좋았는지 자꾸 씰룩거리는 입술을 감추려고 애를 쓰던 원우는 이제 슬슬 그만했으면 좋겠는 눈치인데 그만하라고 그만할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다.
“자기야.”
“…내가 잘못했다. 여기까지만 하자.”
“싫어.”
“…….”
“어? 나 싫다고 했는데 왜 가만히 있어? 진짜 내기 안 해?”
“안 한다니까.”
“난 하고 싶은데.”
한적한 도로 옆에 차를 세웠다. 원우가 공포에 질린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돌아앉았더니 흡, 하고 숨을 급하게 들이쉰다. 두 손으로 원우의 볼을 잡고 빙긋 웃었다.
“사랑해.”
“…….”
“왜, 넌 안 사랑해?”
“…사랑하지.”
눌린 입술 위에 몇 번이나 쪽쪽 소리를 내면서 뽀뽀하고 실실 웃었다. 원우는 감은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입술이 닿을 거리에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야, 노은율, 내가 잘못했다니까!”
“사랑해 다섯 번 하면 되나?”
아예 더 가까이 가서 원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랑한다는 소리를 딱 다섯 번 반복하고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었더니 온몸을 뒤틀면서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손으로 나를 밀어내던 원우가 크게 한숨을 한 번 쉰다. 원우가 내 팔을 붙들고 나를 껴안기 직전에 얼른 뒤로 몸을 빼고 손가락으로 원우의 이마를 쓱 밀었다.
“너 지금 뭐하려는 건지 눈치챘으니까 하지 마.”
반박도 못하고 뒤로 물러난 원우가 다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만 봐도 웃겨서 신나게 웃었더니 뭔가 단단히 각오라도 한 듯 똑바로 앉아서 기어 위에 올려 둔 내 손을 쓱 잡는다.
“왜 갑자기 손을 잡고 그래, 자기야.”
“잡고 싶으니까 잡지, 여보야.”
“…….”
“어디 언제까지 하나 한 번 해 보자.”
“워누워누야.”
“우리 자기가 웬일로 날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그러더니 느끼한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나는 대답 대신 급출발을 했다. 우리 은율이가 운전할 땐 화끈하다면서 살살 손등을 쓰다듬는 손가락을 본능적으로 밀쳐 낼 뻔했다가 꾹 참았다.
아쿠아리움을 구경하는 내내 내 어깨에 올라와 있는 원우의 손은 내려갈 기미가 안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신경이 쓰였지만, 예전에 원우가 했던 말대로 이 정도의 스킨십은 그냥 친한 친구 사이에도 많이 하는 거고 나만 어색해하지 않으면 아무도 신경을 안 쓸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아쿠아리움에서 나온 다음에는 남들은 다 일출 보러 가는 곳에 일몰을 보러 갔다. 적당한 곳에 앉아 노을이 지는 바닷가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사진을 찍자고 해서 살짝 옆으로 붙었는데, 팔을 쭉 뻗고 핸드폰을 들어 올려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한 원우가 사진을 찍으면서 동시에 내 볼에 뽀뽀를 했다. 사람도 많은 관광지에서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싶어 화를 버럭 내려고 일어났는데 따라 일어난 원우가 씩 웃었다.
“이제 그만할 거지?”
당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안 그만할 건데. 빨리 호텔 가자고 하려고 했지. 우리 자기랑 놀고 싶어서.”
그러자 원우가 아까보다 더 해맑게 웃는다.
“진작 말하지. 빨리 가자. 나도 오늘 아침부터 계속 그 생각 했거든.”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미 늦은 것 같다. 내 손목을 콱 붙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원우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울상을 지었다.
호텔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원우는 차에서 한 마디도 안 했다. 날 어떻게 싹싹 발라 먹을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말을 못했다. 무서워서. 그리고 역시나 호텔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문을 닫고 확실하게 잠근 것을 확인한 원우가 대뜸 팔을 뻗고 목을 움직여 스트레칭을 한다. 핸드폰과 점퍼를 슬쩍 내려놓다가 원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잽싸게 뒤로 물러서면서 빠르게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이제 평소에 잘할게.”
“너 원래 평소에도 잘하잖아.”
“아냐, 네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정말 나 아쉬울 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어, 내가 오해했어. 아닌 거 이제 알았어. 노은율이 오그라드는 짓 절대 못 하겠어서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거였어. 맞지?”
“아니야, 못 해. 못 한다니까?”
“뭐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하겠냐.”
원우가 닫아둔 여행 가방을 다시 열고 허리를 굽힌 채로 뭔가를 찾는다. 그 틈을 타서 도망치려다가 이럴 때만 눈치가 심하게 빨라지는 원우에게 붙들렸다. 나를 옆에 끼고 가방을 뒤적거리다 어제 산 콘돔을 전부 침대 위에 툭 던져 놓은 원우가 기어이 젤까지 찾아 들고 일어나면서 씩 웃는다.
“내가 이런 말 했던 적 있지 않냐? 좀 옛날 얘기인 것 같기는 한데, 너 나한테 불 지르지 말라고 그랬었지.”
“불 꺼, 끄면 되잖아.”
“네가 잘못 불 질렀다가 내가 정신줄 놔 버리면 너 진짜 큰일난다는 소리도 했었던 것 같은데.”
“놓지 마. 정신줄 꽉 잡아. 알았어? 만지지 말고, 악, 차원우!”
“이미 놨어. 아까 네가 ‘자기’랑 ‘놀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묘하게 강조되는 단어를 듣고 몸을 움츠렸다. 지금 보니까 벌써 눈에 불이 붙었다. 능숙한 손길로 내 옷을 훌러덩 잘도 벗겨 놓은 원우가 나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간다. 여기 소리 울리니까 다른 객실에 안 들리게 조심해, 자상하면서도 무서운 경고를 하는 원우의 팔을 붙들고 욕실 벽에 붙은 채로 마지막 애원을 해 봤다.
“우리 내일 그 차 거꾸로 올라간다는 그 도로도 가야되고, 해변에 멋있는 카페 가서 커피 마시….”
“그 도로는 차에 앉아서 구경하면 되고, 카페에서 커피는 앉아서 마시면 되고. 이제 괜찮지?”
“뭐가 괜찮아 이 새끼야, 안 괜찮아! 안 해, 싫어, 안 해!”
“이제 좀 노은율 같네.”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속옷까지 벗겨졌다. 욕조 안에 나를 밀어 넣고 두 팔을 들어올려 티셔츠를 벗은 원우가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눌러 앉히면서 빙긋 웃는다.
“너 아까 내기하고 싶다고 했지? 하자, 내기.”
“싫…!”
“싫다는 소리 할 때마다 한 번 추가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원래 그거 아니잖아! 야, 안 놔? 놔, 이거 놔!”
“당연히 내 기준 한 번이고.”
몇 번 더 탈출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다. 커다란 수건으로 내 팔을 칭칭 감아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어 놓고 원우가 남은 옷을 벗더니 욕조에 물을 채운다. 욕조가 생각보다 좁았는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씩 웃는다.
“뭐, 풀어질 때까지만 하고 나머진 나가서 하면 되니까. 콘돔도 아낄 겸.”
차라리 서울 갈 걸….
“그냥 오늘 서울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해 줄게.”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더는 도망갈 틈도 안 준다. 허리를 한 팔로 안아 들어 올리더니 입술부터 마주 대는 원우의 어깨를 퍽퍽 소리가 나게 내리치다가 포기하고 팔을 붙들었다.
예전에는 한 번 할 때마다 엄청 공을 들여서 안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한참 걸리곤 했었다. 어느 정도 몸이 익숙해지고 나서는 마치 정해진 코스를 밟는 것처럼 습관적인 페팅을 했다. 그리고 나와 원우 사이에 나름대로의 권태기가 있었을 땐 그냥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만 했었고. 그러다가 다시 애틋해지고 난 이후에는 그 세 가지가 섞였다. 그 말은 곧, 정해진 코스를 밟는 습관적인 페팅이 최소한의 것이 되었는데 그것만 해도 내 안이 완전히 풀려 버린다는 뜻이다. 지금처럼.
“눈 떠.”
욕실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원우의 손에 두 번째로 사정하고 나니까 아래가 알아서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민망해 죽을 것 같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싶어도 그럴 때마다 손끝부터 팔 안쪽의 여린 살까지 혀로 진득하게 핥는 바람에 결국 차라리 내가 안 보고 만다는 심정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랬더니 이제는 눈도 못 감게 한다. 계속 감고 있으면 눈을 뜰 때까지 속눈썹을 핥을 거라는 소리를 듣고 식겁해서 눈을 떴더니 원우가 피식 웃었다.
“왜, 구멍이 막 알아서 오물거리니까 눈 뜨고 못 보겠어?”
“이 새끼가 또 이상한 소리, 아!”
“이상한 소리는 무슨. 난 사실만 말했는데.”
“만, 만지지 마, 아흐윽.”
“안 만지면 어떻게 넣어?”
물에 잠겨 있는 아래로 손을 넣어 말랑하게 풀린 입구를 덧그리면서 목덜미에 소리 나게 계속 입을 맞춘다. 손을 떼어 내려고 허우적거렸더니 아, 하고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인 원우가 자세를 바꾼다. 힘이 빠진 허리를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네가 넣어 봐, 그럼.”
“이거 안 할래.”
“왜?”
“…안 할래, 차라리 나가서 해.”
“이 자세로 하면 너무 느껴서?”
“안 해, 아, 안, 하으으….”
바짝 솟아 있는 유두가 꼬집히자마자 뒷목을 타고 찌릿거리는 감각이 등줄기를 훑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내민 채로 원우의 어깨를 붙들고 보채듯이 몸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갈라진 틈 사이로 딱딱할 정도로 일어선 원우의 것이 스치는 바람에 놀라서 반쯤 일어섰다. 옳지, 하고 칭찬이라도 하듯 내 등을 다독인 원우가 내 허리를 잡고 아래를 움직여 끝을 맞추더니 그대로 나를 내려 앉혔다. 이미 아까부터 손가락이 수도 없이 들락거렸던 내벽을 단숨에 가르면서 뜨거운 성기가 그대로 끝까지 틀어박혔다. 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고개를 젖히면서 허리를 튕겼다. 방금 사정했던 내 것은 다시 반응을 보이기도 전이었는데, 머릿속에서는 꼭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번쩍거렸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내 등을 받치고 있는 원우에게 몸을 맡기는 것뿐이었다. 하필이면 원우의 것이 제일 느끼는 곳을 누르고 있어서 끝나지도 않는 절정에 완전히 잠겨 버리는 기분이었다.
은율아, 은율아, 하고 몇 번이나 부르는 목소리를 뒤늦게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앞에 흐릿하게 원우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부터 자극이 너무 강했다. 안을 메우고 있던 성기가 움직이려고 할 때 반사적으로 싫어, 하고 흐느꼈다가 원우의 손에 입이 틀어 막혔다.
“싫다고 하면 안 될 텐데.”
지금은 그런 약속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나중에 후회하면 모를까. 소리 지르지 않게 조심하라며 참 고맙게도 충고를 해 주더니 원우가 그대로 아래를 쳐올린다. 시야가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끝까지 도달해서 나는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이를 악물고 원우의 등을 할퀴었다. 고작 몇 번 박아 넣는 것으로 내가 몸도 못 가누게 만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원우가 자기 것을 빼냈다. 겨우 숨을 몰아쉬다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엄청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양심도, 흣, 없는 새끼….”
“내가 뭘.”
“이 정도 했으면, 하아, 한 번은 좀….”
“나가서 할게. 뭐가 그렇게 급해, 늦게 쌀 수도 있지.”
급하긴 누가 급하냐고 화를 내려다가 원우가 나를 안아 드는 바람에 목을 안고 매달렸다. 욕조 밖에 발을 내딛자마자 그대로 힘이 풀려 고꾸라질 뻔했다.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힘 빠지면 어떻게 하냐면서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 주는 괘씸한 차원우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서 있을 힘도 없는데 발길질을 할 힘은 당연히 없었다.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리면서 원우에게 매달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눕고 나니까 그대로 눈 감고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물론 원우가 그걸 봐줄 리 없다. 곧바로 다리를 벌리게 하더니 아래로 내려간다. 황급히 머리카락부터 움켜쥐고 싫어, 하고 울먹이자 고개를 들고 씩 웃는다.
“싫다고 하면 안 된다니까? 한 번 추가라고.”
“그거 내기 안, 한다고, 했, 흐윽.”
“그럼 사랑한다고 해 봐. 한 번 까 줄게.”
잡아당기는 대로 딸려 올라오더니 능글능글 웃으면서 나를 내려다본다. 마지막 힘을 모아서 다리를 들어 걷어차려다 그것마저 막히고 나서는 완전히 늘어져 버렸다.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다. 가슴부터 배를 타고 내려와 내 것을 자연스럽게 감싸 쥔 원우가 예민해진 성기의 끝을 둥글게 문지르며 대답을 재촉한다. 저절로 들려 올라가는 허리를 비틀다가 가쁜 숨을 토해 내면서 짜증을 냈다.
“사, 아읏, 사랑해, 나쁜 새끼야, 아윽!”
“나도.”
“천천, 히, 으, 흣, 처, 천천히…!”
“진짜 천천히 해 봐?”
빳빳해지기 시작한 성기를 문지르던 손이 점점 느려진다. 애가 타서 입술이 마르고 저절로 허리가 딸려간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곧바로 쏟아 낼 것처럼 완전히 일어선 내 것을 쓰다듬다가 원우가 입구를 틀어막더니 엄지로 끝을 꾹꾹 누른다. 싫어, 하지 마, 그거,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손을 멈추고 원우가 씩 웃는 바람에 또 뒤늦게 싫다고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안 해, 안 할 거, 아, 흐으윽!”
아까처럼 열기를 가득 품은 원우의 것이 내 안에 빈틈없이 들어찼다. 내 다리를 들어 허리에 감게 하고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겹쳐 온 원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뭘 안 할 건데, 응?”
“하아, 아, 앗! 아읏!”
“이거, 하지 마?”
정점을 마구 문지르다가 슬쩍 뒤로 빠져나간다. 황급히 다리로 원우의 허리를 감아 당기자 원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보다는 훨씬 천천히 내벽을 문지르면서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아까 찔러댔던 끝보다 조금 얕게 머문다. 이성이 슬슬 날아가기 시작한다. 겨우 숨을 뱉어 내면서 어깨를 붙들어 안고 투정을 부리듯 웅얼거렸다. 내기 안 해, 안 할래, 내기 안 할래….
“너 내기 안 하면, 나한테 사랑한다고 안 하잖아.”
“할 거야, 흑, 할 테니까, 안 할래….”
“할 테니까 안 한다니, 무슨 말이야, 도대체.”
“차원우, 흐, 으응, 원우야….”
애가 타서 이마를 비비며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온다.
“그럼 내기는 하지 말고, 이건 그냥 하고?”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자꾸 다른 곳만 쑤셔 대는 바람에 모든 감각이 전부 깊은 곳에 숨겨진 극점으로 쏠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것도 아니니까, 나도 이제 모르겠다. 얼굴을 떼어 내게 하더니 뜨거운 입술이 귓가를 지나 뺨을 타고 내 입술에 닿는다. 거칠게 입 안을 헤집는 혀에 내 혀를 마주 문지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남은 걱정은 한 가지였다. 밤이 너무 길었다.
***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분명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지쳐 나가떨어진 채로 겨우 잠들었을 때는 호텔 방 침대 위였는데 눈을 떠 보니 나는 조수석에 누워 있었다. 술을 엄청나게 마셨을 때도 집에 돌아오는 길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도대체 지금 차에 어떻게 누워 있는 건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술보다 차원우의 집착과 집념이 더 무섭다.
명절 때 늘 그랬던 것처럼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운전을 하는 원우의 옆모습을 흘낏 봤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목 말라, 겨우 말했지만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못 들은 모양이다. 어제 결국 못 견디고 실컷 소리를 질러 댔더니 배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크게 말할 기운은 없고 그냥 잠이나 더 자야겠다.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밀려오는 잠기운에 빠져들 듯 말 듯하고 있는데 이마 위에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이 흉터 좀 지우고 싶은데 병원 가 보자고 말만 꺼내도 싫다고 질색을 하니까, 어휴…. 아니다, 그냥 두자. 그냥 둬야 내가 볼 때마다 정신 차리지.”
앞머리를 걷어 내고 숨어 있던 흉터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원우가 혼잣말을 한다. 어제는 그렇게 전부 씹어 먹어 버릴 것처럼 덤벼서 기어이 엉엉 울게 만들더니, 다행히 날이 밝으니까 원래의 차원우로 돌아온 것 같다.
상냥한 손길에 점점 더 잠이 쏟아졌지만 왠지 원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져서 애써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사흘 내내 비 오네. 제주도 날씨는 사흘에 한 번씩 바뀐다더니 결국 가는 날까지. 하긴 뭐, 비오는 풍경도 나름 괜찮았어. 호텔도 좋았고, 먹었던 것도 다 맛있었고. 혼자 이 소리 저 소리 잘도 한다 싶어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 원우가 내가 덮고 있던 옷이 흘러내려가지 않도록 잘 올려 주면서 말했다.
“뭔가 되게 벅차네. 예전에 어렸을 때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집에 에어컨도 놓고 좋은 침대도 사자고 그랬었는데 이렇게 좋은 데로 여행도 오고…. 우리 같이 지낸 지 되게 오래 된 것 같아. 새삼스럽게.”
아마 깨어 있었으면 무슨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소리를 하냐고 농담을 하며 말을 돌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원우가 잠시 조용해졌다. 신호에 걸렸는지 차가 잠시 멈춰 섰을 때 다시 원우의 손이 내 뺨과 눈가를 쓰다듬는다.
“근데 참… 이만큼 오래 됐으면 좀 지겨워질 때도 됐는데 난 아직도 좋아 죽겠어. 신기하지?”
손가락이 입술 위로 내려와서 한 번 꾹 누른다. 그리고 원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 매일 봐도 좋아서 큰일이다, 노은율이 아무리 나를 구박해도 그냥 이러고 사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밖에 안 드니까 그것도 큰일이고. 내가 눈을 뜨고 있으면 절대 못 할 말을 중얼거리던 원우가 또 조용해진다. 왠지 손가락 끝이 간질거리고 코끝이 매워져서 인상을 찡그리려는데 지금까지 말했던 것보다 더 진중하고 나지막하고, 무엇보다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행 또 가자, 너 시간 날 때마다, 지금보다 외식도 더 자주 하고. 늘어진 내 손을 한 번 꼭 잡았다 놓고 원우가 고백하듯 말했다.
“사랑해.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더 오래 오래 같이 있자.”
그냥 자주 듣던 말인데, 이런 말을 자주 하지 못하는 나에 비하면 원우는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곤 했는데, 그래서 익숙했는데, 왠지 모르게 오늘은 감고 있던 눈 안에 물기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한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그럼 깨어 있는 걸 눈치챌 것 같아서 숨을 참았다. 그러다 결국 딸꾹질 같은 목 막힌 소리를 냈다. 눈을 번쩍 뜨는 바람에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원우가 깜짝 놀라거나 아니면 작정하고 놀릴 것 같아 순간 멈칫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분명 나를 봤으면서 원우는 말없이 운전만 한다. 울컥 밀려오는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덮고 있던 얇은 바람막이를 끌어올려 얼굴을 전부 가린 다음 조용히 말했다.
“…나도 사랑해.”
부드럽게 달리던 차가 멈춰 선다. 그리고 곧 바람막이를 사이에 두고 내 입술 위로 뜨거운 입술이 내리덮인다. 입술만 부딪히는 키스를 하다가 흘러내린 옷 때문에 결국 눈이 마주쳤다. 축축해진 눈가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 준 원우가 빙긋 웃는다. 밖은 비구름이 흩어지고 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 좋은 날에 또 지금처럼 같이 있기로 약속하고 이번에는 가리는 것 없이 입술을 마주했다.
어제 원우가 한 말대로 결국 신기한 도로도, 멋있게 생긴 바위도 다 차 안에 앉아서 구경해야 했다. 허리가 욱신거리고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땅에 발을 내딛기만 하면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원우를 수족처럼 부리는 것으로 분을 풀며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카페에 도착했다. 업어 주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원우의 등을 한 대 내리쳐 주고, 비가 그친 김에 카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간단한 메뉴들을 늘어놓고 점심을 먹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굉장히 아쉬워졌다. 왜 하필 제주도 들어오자마자 비가 와서, 왜 하필 내기를 해서, 왜 하필 어제 객기를 부려서…. 포크에 파스타 면을 돌돌 말다 말고 한숨을 푹푹 쉬자 내가 하는 생각을 눈치챘는지 원우가 웃으면서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그렇게 죽을상 하지 마라, 응? 그래도 갑자기 온 거 치고는 꽤 잘 구경하고 다녔잖아.”
“됐고 다음에 오면 각방 써.”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또.”
“그럼 서울 가서 각방 써.”
“에이, 나 거실 소파에서 자면 신경 쓰여서 제대로 못 잘 거면서. 아니야?”
대답 대신 앞에 놓인 바게트 빵을 원우의 입에 쑤셔 넣었다. 하여간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이 집은 빵이 제일 맛있다면서 입 안 가득 들어온 빵을 우걱우걱 삼킨 속없는 차원우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앞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고 테이블에 기대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노은율.”
“왜.”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쑥스러운 거 말고 다른 게 대체 뭐야?”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사랑한다는 말을 왜 그렇게 안 해 주냐고. 쑥스러워서 그런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며.”
“…….”
“그리고 내 눈치 봐야 될 때만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라며, 그럼 평소엔 왜 안 해?”
괜히 볼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몇 시냐, 슬슬 공항 가야 되는 거 아니냐, 렌터카 가져다줄 시간 되지 않았냐, 말을 돌리려고 해도 대꾸도 안 하고 쳐다보는 거 보면 기필코 대답을 들을 생각인가 보다. 결국 포크를 놓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저히 눈을 쳐다보고 말하지는 못하겠어서 사람도 없는 바다를 보며 웅얼거렸다.
“…귀여워서.”
“뭐?”
“귀엽다고.”
생각도 못 했던 대답일 거다. 원우가 말문이 막힌 채로 멀뚱멀뚱 나를 본다. 이번에는 바다가 아니라 파스타 접시만 내려다보면서 빠르게 말했다.
“가끔 한 번씩 해 주면 차원우가 멍청하게 웃으면서 한 번 더 안 해 주나 안달복달하는 게 귀여워. 그래서 자주 해 주기 싫어. 자주 해 주면 안 그럴 거 아냐. 됐냐?”
“안 됐어.”
“뭐?”
“너 지금 싫다고 했다. 우리 아직 제주도인데, 내기 안 끝났잖아.”
아직도 그놈의 내기 타령이다. 닥치라고 포크를 휘둘렀더니 실실 웃으면서 내 손목을 붙들고 쓱 앞으로 온다. 숨을 들이쉬며 얼른 뒤로 물러나려는데 손목 대신 내 두 볼을 손으로 감싸 쥐고 조물거리면서 원우가 어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예 반쯤 일어나서 발까지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넌 진짜 뭐 먹고 이렇게 귀엽냐? 야, 노은율, 너 뭐 믿고 이렇게 귀여워? 이 나이에 이렇게 귀여워도 돼? 미치겠네. 어? 누구 애인이어서 이렇게 귀여워? 말 좀 해 봐.”
“죽을래?”
“죽겠다 진짜. 좋아 죽겠어. 여기서 키스를 할 수도 없고, 어휴, 너무 귀여워서 겁난다.”
“누가 본다, 이거 안 놔?”
“나 멍청하게 웃으면서 안달복달할 준비 다 했으니까 한 마디만 해 줘. 그럼 놔줄게.”
“하긴 뭘 해!”
“그럼 하지 말고 십만 원 주든지.”
거짓말. 멍청하게 웃으면서 안달복달할 준비를 다 한 게 아니라 이미 그러고 있다. 테이블 아래에서 나한테 발까지 밟혔는데도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하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원우의 손을 잡아 떼어 내면서 말했다.
“사랑한다고, 바보 차원우.”
기다렸다는 듯 원우는 벌떡 일어나서 테이블을 붙든 채로 안달복달하며 정신없이 움직인다. 내 머리 위에 이마를 콩 찧으면서 나도, 하고 작게 속삭이는 것까지 정말 차원우다워서 나는 실없이 웃어 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