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차원우
우도 일정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목적지를 바꾸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찾아본 덕분에 첫 번째와 두 번째 관광지는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층층이 쌓인 모래가 만들어 낸 넓은 바위를 끼고 해안가를 산책하고, 절벽을 앞에 둔 높은 지대에 올라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 풍경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어지간하면 적당히 보다 들어가자고 할 것 같았던 은율이가 먼저 길을 따라 걷자고 하고 언덕까지 올라가자고 했던 걸 보면 까다로운 취향도 만족시킨 모양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것도 덮고 있어.”
“괜찮다니까. 너나 입어.”
“참도 괜찮겠다. 입술은 시퍼래가지고. 말 좀 들어라, 어?”
“…….”
“우산이 아니라 우비를 챙겼어야 되는데, 어휴.”
경치는 좋았는데, 그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차로 돌아온 나와 은율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비를 맞은 게 아니라 물벼락을 맞은 것 같다. 그것도 강풍기 앞에서. 이미 언덕에 오를 때부터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우산을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히터를 켰다. 뒷자리에 잔뜩 웅크리고 앉은 은율이가 내가 건넨 옷을 덮더니 말없이 따뜻한 음료 캔 두 개로 연신 팔을 문지른다. 강풍을 동반한 폭우라기에 나름대로 걸칠 것을 준비하기는 했어도 그래 봤자 가벼운 바람막이였다. 감기약을 사려고 가장 가까운 약국을 찾아봤지만 차로 한참이나 가야 나올 것 같았다. 차라리 어디서 아무 옷이나 사서 입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예 이불로 싸매고 있는 게 낫겠다.
“그냥 호텔로 간다.”
“왜, 원래 가기로 한 데로 그냥 가. 녹차 사러 가기로 했잖아.”
“그러다 감기 들어. 마지막 날 공항 올라가는 길에 들러도 되니까 오늘은 가서 쉬자.”
“일정 다 짜서 온 거잖아. 마지막 날 시간 못 뺄 수도 있으니까 그냥 지금 가. 어머니 녹차 좋아하셔서 사다 드리고 싶어.”
“너희 어머니 녹차 좋아하셨어? 커피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누가 우리 엄마 사다 준대?”
“…우리 엄마가 녹차를 좋아한다고?”
삼십 년 넘게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뒤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해 하자 은율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덮고 있던 바람막이 소매로 내 얼굴을 툭 친다.
“아들이 기본이 안 됐네. 넌 너희 어머니 뭐 좋아하시는지도 모르냐?”
“넌 너희 어머니 소고기보다 돼지고기 좋아하시는 건 알아?”
“…안 가고 뭐하냐. 출발해.”
“몰랐지?”
“히터 좀 올려 봐. 추워.”
괜히 할 말이 없으니까 말을 돌린다. 그럼 가서 녹차만 사서 다시 호텔로 가, 괜히 바람 쌩쌩 부는데 구경할 생각하지 말고, 감기 걸려서 나머지 일정 내내 호텔 방에 처박혀 있고 싶은 거 아니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출발하다가 뒤늦게 뭔가 신기한 점을 깨닫고 헛웃음이 터졌다. 조금 들뜬 목소리로 은율이에게 물었다.
“노은율, 엄마한테 우리 제주도 간다고 얘기했어?”
“그냥, 면세점에서 뭐 살 거 있으신지 여쭤보려고….”
“네가 전화했어? 직접?”
“…어.”
“어쭈?”
“뭘 어쭈야, 그냥 전화 한 번 드린 건데.”
“너 원래 우리 집에 전화 못 하잖아.”
“…….”
“은율아.”
“아, 왜, 뭐.”
“이제 안 무서워?”
백미러로 뒤의 은율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옷을 코까지 올려 덮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괜히 젖은 머리를 툭툭 털고, 젖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대답한다.
“…안 무서워.”
왠지 가슴이 막 뛴다. 목에 뭔가 꽉 들어차서 막힌 것 같기도 하고. 민망했는지 은율이는 바람막이를 아예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반쯤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동그랗게 움츠러든 어깨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뒤로 가서 키스라도 하고 싶지만 키스로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일단은 참고 밤을 기다리기로 했다.
새해 첫 날 집에 내려갔다 오는 것을 제외하면 부모님을 직접 뵈러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별다른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버이날이나 부모님 생신 때 전화로 안부를 전하고, 가끔 은율이나 내 생일에는 영상 통화로 얼굴을 보여드리는 정도였다. 그리고 아직도 은율이는 통화를 하는 그 잠깐 사이에도 바짝 긴장을 하고 겁을 먹곤 했다. 십 년이 우스울 정도로 그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살았는데 우리 부모님이 지금도 그렇게 무서운가 싶다가도, 처음 부모님 뵙는 자리에서 머리에 화분부터 맞았으니 할 말이 없기도 했다. 하긴, 은율이도 은율이지만 아버지도 그때 일 때문에 은율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시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웬일로 먼저 전화를 해서 제주도에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꺼낼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우리 부모님에게. 나는 반차 내고 연차 쓰기 바빠서 은율이 부모님을 챙기지도 못했는데. 뭘 사가야 은율이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을지 이따가 은지나 소정이에게 문자로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그전에 할 말은 해야겠지.
“전화하니까 어땠어? 막상 하니까 별거 아니었지? 엄마랑 무슨 얘기했어? 그냥 제주도 갔다 온다고 그랬어?”
“…….”
“알았어, 안 물어볼게. 나도 너희 어머니한테 이따가 전화드려야겠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시면 바로 택배로 보내 버리든가 해야겠어. 들고 가는 것보다 그게 낫겠지?”
“…….”
“…미안해. 그리고 고맙다, 많이.”
“…….”
“내가 더 신경 썼어야 되는데 정신이 없었어. 엄마한테 전화 걸 때 너 엄청 덜덜 떨었을 거 아냐. 혼자 전화하게 하지 말고 옆에 있어 줬어야 했는데 내가 거기까지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왠지 쑥스러워서 귀까지 새빨갛게 붉힌 채로 눈 둘 곳이 없어 두리번거리고 있을 것 같다. 괜히 짠하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잠시 빨간불에 걸렸을 때, 은율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계속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면서 미소를 띠고 뒤를 흘낏 보았다가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자냐?”
“…….”
“노은율, 자냐고.”
“…….”
“야, 넌 뭐 그렇게 빨리 잠이 들고 그러냐? 어? 내가 지금 오랜만에 분위기 딱 잡고…!”
울컥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분위기 같은 게 언제는 있었나. 오랜만에 감동의 물결이 몰아치게 입 좀 털었다 싶었더니…. 불편하게 웅크린 채로 팔에 얼굴을 파묻고 쿨쿨 자고 있는 애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나는 기운 없이 다시 출발했다.
내 바람막이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노은율은 목적지에 내리자마자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추워서 떨었던 게 좀 나아졌다면서 뽈뽈거리고 잘도 돌아다니고 있지만 나는 내 몸을 점령하기 일보 직전인 감기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지근해진 음료 캔은 아무 짝에 쓸모가 없어져서 안에 있는 카페에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사서 마실까 했는데 성수기도 아닌 날에 몇 십 명이 줄을 서 있는 걸 보고 기겁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홀짝거리고 있는 동안 매장 안을 휘젓고 다니며 두 손 가득 선물을 쓸어 담아 온 은율이가 피곤한 듯 얼굴을 문지른다.
“뭘 그렇게 많이 샀어?”
“어머니 드릴 거, 우리 회사에 돌릴 거, 이런 건 까먹고 안 챙길 차원우네 회사에 돌릴 거.”
“안 까먹었거든. 난 그냥 공항에서 초콜릿 사 가려고 했어.”
“그것도 사. 현우 군것질거리 좋아하던데 현우 거 빠트리지 말고.”
“…이거 기분 되게 이상하네.”
“뭐가?”
“네가 자꾸 우리 집 식구들 챙기는 거.”
“나보단 네가 더 많이 챙겼었잖아.”
그러다 감기 든다고 아무리 말려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기어이 사온 녹차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면서 은율이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턱을 괸 채로 내리깔린 은율이의 속눈썹과 두 눈을 물끄러미 보다가 실없이 웃었다. 왜 웃냐는 듯 빤히 쳐다본다.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신혼여행 온 것 같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밖에서 하면 주위 사람이 들으니 조용히 하라는 핀잔이 곧바로 날아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의외로 은율이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휘휘 젓더니 은율이가 대답했다.
“네가 우리 이제 이렇게 해도 된다며.”
“…….”
“그래서 어머니께 전화드릴 때도 안 떨었어. 이런 일로 전화드려도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런 걸로 미안해하지 마.”
우와,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대답도 없이 눈을 감은 채로 숨만 색색 내쉬고 있길래 정말 자는 줄 알았는데 아까 차 안에서 내가 했던 말을 다 듣고 있었나 보다. 아니 진짜 이런 밀당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레지? 올라간 광대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아니, 광대만 올라간 게 아니라 얼굴이 아예 허물어질 것처럼 웃고 있는 게 내 스스로 느껴져서 감당이 안 될 지경이다. 두 뺨을 손으로 문지르다가 못 참고 씩 웃었더니 얼빠진 표정이라면서 은율이가 피식 웃는다. 슬금슬금 손을 뻗어 은율이의 손등을 살살 문지르고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못 본 척하는 은율이에게 잔뜩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은율아, 우리 그냥 호텔로 바로 갈까?”
“아니.”
“아 왜?”
“점심 먹을 시간 지났어. 갈치조림 먹기로 했잖아.”
“호텔 근처에도 갈치조림 하는 식당 있을걸.”
“찾아 둔 데 있어서 거기 가서 먹을 건데.”
“난 배 안 고픈데, 점심 그냥 거르고 이따 저녁 좀 일찍 먹는 건 어때? 응?”
“싫어.”
손을 휙 빼내면서 냉랭하게 대꾸했던 은율이가 아, 하고 입을 틀어막는다. 나는 소리 없이 환호하며 벌떡 일어났다. 늘어놓은 쇼핑백들을 줄줄이 팔에 꿰고 가자, 하고 손을 내밀었더니 머리를 마구 헝클며 일어난 은율이가 갑자기 생긋 웃는다.
“원우야.”
“안 돼.”
“말도 안 꺼냈어, 새끼야.”
“알았어, 말 꺼내 봐.”
“갈치조림 그냥 호텔 근처에서 먹고, 지금 호텔로 바로 가는 대신에 이거 내기 안 하면 안 돼?”
“응, 안 돼.”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오는 동안 뒤에서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계속 꿍얼거리며 쫓아오다가 내가 트렁크에 선물을 싣는 것을 지켜보더니 대뜸 엉덩이를 걷어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실실 웃었다. 그래, 엉덩이는 네가 쓰지 내가 쓰냐.
은율이가 찾아 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마지막 일정으로 골라둔 해변에 가기 전에 번화가에 먼저 들렀다. 적당히 걸칠 만한 옷을 골라서 은율이와 하나씩 나누어 입고,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서 미리 먹고 나니까 살 것 같기는 했는데 자꾸 잠이 왔다. 자긴 괜찮다면서 약을 먹지 않은 은율이에게 운전대를 맡겨 놓고 조수석에서 잠깐 졸았다. 아니, 잠깐인 줄 알았다. 뭔가 좀 답답하다 싶어 뒤척이면서 눈을 떴다가 깜짝 놀랐다. 밖은 이미 밤이었다. 바다 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주차해 둔 차 안에 은율이는 없었고, 차 밖의 돌담에 앉아 있는 눈에 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졸음이 가득했던 눈을 비비고 제대로 앉아 은율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는 잦아들었지만 바람은 여전했다. 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쓴 채로 바다를 보고 있다가 가끔은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한다. 마른 목과 동그랗게 떨어지는 어깨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은율이 학원비를 대겠다고 한참 마트 물류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자면서 몸이 아파 끙끙거리다가 깼을 때, 내 옆에 누워 있어야 하는 은율이가 책상에 엎드려 있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게 일이 힘들어서 잠결에 앓는 내 옆에서 편히 누워 자는 것조차 미안했기 때문이라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다. 미리 알았으면 그런 걸로 미안해 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옆에 와서 자라고 했을 거다. 네가 옆에 없으면 그게 더 불안하다고 괜한 투정도 부리면서. 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아서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해 볼 참이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차에서 나와서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은율이의 뒤로 다가갔다. 돌담 뒤에서 몸을 굽혀 어깨를 살짝 감싸 쥐었다가 두 팔로 껴안았더니 흠칫 놀랐다가 익숙하게 몸을 기대 온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괜한 말을 하는 은율이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보면 좀 어때, 알 사람 다 아는 사이인데.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보드라운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다가 다정하게 물었다. 이리저리 몸을 틀어 자세를 다시 잡은 은율이가 말했다.
“정아가 일 제대로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
“…그래, 내 생각하고 있었다는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어.”
“네 생각도 했어.”
“웬일로, 무슨 생각?”
“어떻게 하면 차원우 주머니에서 십만 원 빼서 아까 십만 원 채울까.”
민망해서 둘러대는 게 아니라 진심이 느껴진다. 괜히 심통이 나서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가 머리를 쥐어뜯길 뻔했다. 얌전히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 은율이와 나란히 앉아 있다가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넌 사랑한다는 말하는 게 그렇게 싫어?”
“너 지금 나한테 싫으냐고 물어봤다, 아까 거 한 번 까 줘.”
그 와중에도 챙길 건 확실히 챙긴다. 알았으니까 대답해 보라고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은율이는 나를 보는 대신 새카맣게 밀려드는 파도만 가만히 보고 있다가 불쑥 이야기를 꺼낸다.
“말해야 아는 거 아니잖아.”
“야, 노은율, 언제는 일일이 말로 해야 안다며. 네가 한 말 아니었냐?”
“…그래서 네가 말 잘 하잖아. 그럼 됐지 왜 나한테까지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말로 안 해도 알긴 알겠는데 몰라서 말해 달라는 거 아니거든?”
“그럼 왜 해 달라고 그러는데?”
막상 질문을 받으니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이제 와서 은율이가 날 안 좋아할까 봐 불안할 일도 없고, 몰라서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다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먼저 물어봤으니까 네가 먼저 대답해야지.”
“진짜 유치하다.”
“나 원래 유치하잖아.”
“…….”
“쑥스러워서그래?”
“…그런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대답했잖아. 넌 왜 해 달라고 그러는데?”
“난 내일 대답할게.”
“와, 이거 봐라, 어디서 밑장을 빼?”
“이거? 야, 애인한테 이거라니 너무하지 않냐?”
내가 입고 있던 점퍼의 모자를 푹 눌러 씌우면서 아예 목까지 숙이게 하더니 은율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밤이라 바다 가까이까지 가기는 좀 그렇고, 근처 도로를 따라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싶었는데 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차로 돌아와서 호텔로 출발해야 했다.
날씨 때문에 일정이 망가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였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은율이와 이야기도 많이 했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기도 했으니까. 감기약을 일찍 먹은 덕분에 호텔에 들어왔을 때는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슬슬 분위기를 좀 잡아 볼까. 어제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리하게 하지도 않았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은율이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거고…. 뜨거운 물로 몸을 데우고 욕실 밖으로 나오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다가 나는 욕실 앞에 멈춰 섰다. 테라스 쪽을 서성이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은율이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까 온몸으로 맞닥뜨렸던 비바람처럼 불길한 예감이 몰아친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가방에 넣어 둔 젤을 꺼내려다 짜증을 내는 소리에 멈칫했다. 그러니까 팀장님, 하고 손까지 휘적거리며 설명을 하는 걸 보니 영락없이 회사 전화다. 이럴 때는 괜히 말을 걸었다가 불똥이 튈 수 있다. 핸드폰을 들고 조용히 욕실로 다시 들어왔다. 은율이 부모님께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소정이에게 물어봤더니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 주다가 대뜸 묻는다.
- 설마 벌써 싸우고 올라오는 길이라 선물 사려고 물어보는 거 아니지?
참 별걱정을 다 한다. 아니라고 답을 보내다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서 밖으로 나갔다. 은율이가 없었다. 빡치는 기분을 다스리지 못할 것 같아 자리를 피했나 보다 싶어 한숨을 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 밤은 물 건너 간 모양이다.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침대에 파묻혀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은율이가 돌아왔다. 나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욕실로 들어가더니 곧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옆에 누울 수 있게 이불과 베개를 정리해 놓고 얌전히 기다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은율이가 속옷 위에 목욕 가운만 대충 걸치고 침대로 들어오더니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손으로 슬쩍 걷어 내면서 눈치를 살피는데 웬일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내 손에 볼을 대고 눈을 감는다. 샤워하면서 화가 좀 식었나? 볼을 쓰다듬고 눈가를 매만져 주었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은율이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린다.
“…우리 내일 서울 가자고 하면 너 화낼 거지?”
“뭐?”
“…….”
“…내일 서울 가자고?”
“연기됐던 프로젝트 갑자기 들어왔다고, 급하게 일 시작해야 될 것 같다고 팀장님이 그러시는데….”
그럼 그렇지, 노은율이 살갑게 구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단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연기됐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시작된 게 은율이 잘못도 아니고, 내일 서울에 가야할지 은율이가 고민하게 만든 건 회사 탓이고, 그러니까 지금 은율이가 서울에 올라가자고 한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서로 기분만 상할 뿐이다. 다만 지금 좀 꽁해지는 건 서울에 가자고 해서가 아니라 나한테 미안할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먼저 다가오고 달라붙는 게 눈에 보여서다. 손을 떼어 내고 말없이 이불을 올려 덮은 뒤 눈을 감아 버렸다.
“화낼 거 알면서 왜 그런 얘기를 해?”
“…원우야.”
“지금 싸우기 싫으니까 못 들은 걸로 한다. 내일 다시 얘기해.”
“…….”
“일찍 자자. 오늘 낮에 내내 비바람 맞았잖아.”
은율이가 부스럭거리더니 바짝 다가와 붙는 것이 느껴졌다. 팔베개라도 해 달라고 하려는지 슬금슬금 내 팔을 잡아당기길래 아예 팔을 치우고 돌아누워 버렸다. 눈치를 보고 있을 게 느껴져서 괜히 가슴이 찌릿거리기는 했지만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민망해서, 쑥스러워서, 오그라드는 거 싫어해서, 누가 볼까 봐, 그런 이유로 평소에는 쳐 내기만 하다가 꼭 이럴 때만…. 하긴, 그런 은율이한테 매번 넘어가 놓고 이제 와서 서운해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이래저래 마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잠시 조용한 채로 미동도 없던 옆에서 또 한 번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곧 목 뒤에 뭔가 닿는다. 은율이가 고개를 기대고 있는 것 같다. 꼼지락거리던 손이 내 허리로 올라와서 차마 붙들지는 못하고 티셔츠 끝만 당겨 잡는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가 여기서 넘어가면 오늘처럼 또 이럴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