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차원우
나 왔어, 하고 인사를 하면서도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다. 감사가 뜨거나 지사에서 급한 업무가 넘어오는 아주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늘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나와는 다르게 은율이는 야근하는 날이 제 시간에 퇴근하는 날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그래서 일찍 퇴근할 수 있는 날이면 보통 먼저 연락을 해 주는 편이었고, 연락이 없었던 오늘은 당연히 늦게 올 줄 알았다. 불이 꺼진 거실로 들어서면서 저녁 메뉴를 고심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나는 괴성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갈아입은 옷을 들고 나오던 은율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보고 혀를 찼다.
“뭐하냐?”
“와 씨, 우와, 나 진짜, 어휴, 아오….”
“뭐 못 볼 거 봤냐? 왜 그렇게 놀라?”
“아니 집에 왔으면 거실 불이나 좀 켜놓지, 불은 왜 다 꺼놓고 방에서 나와? 그리고 일찍 오면 온다고 말을 하지. 오는 길에 태워 오면 되잖아.”
“통화하면서 가방부터 놓느라 방 먼저 들어갔고, 너 출발했을 시간 지나서 그냥 왔어. 그게 그렇게 식겁할 일이야?”
“도둑인 줄 알았잖아….”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소파에 엎드린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났다. 제일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근데 너 왜 이 시간에 퇴근했냐?”
“빨리도 물어본다. 일찍 퇴근하래서 일찍 왔어.”
“잘렸어?”
은율이가 들고 있던 옷소매로 내 얼굴을 후려쳤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헛소리라 맞을만했다.
“프로젝트 받아놓은 게 갑자기 무기한 연기돼서 한가해졌어. 다음 주에 어떻게 할지 결정할 거니까 이번 주는 그냥 며칠 쉬래.”
“잘됐네, 그럼 내일은 끝나고 전화해. 같이 오자.”
“왜 전화해?”
“며칠 쉬라고 그랬다며. 일찍 올 거 아냐.”
“쉰다니까. 출근 안 해.”
“…아예 쉰다고? 회사 안 가고?”
“응.”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 준비를 시작하는 은율이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된장찌개랑 김치찌개 중 뭘 먹을 건지 물어보는 은율이에게 다가가서 볼을 슬쩍 꼬집었다. 뭐하는 거냐면서 국자를 휘둘러서 얼른 손을 떼어 냈다.
“너 노은율 맞아?”
“술 먹었냐?”
“회사를 아예 안 가고 쉰다고?”
“몇 번 말해, 안 간다니까.”
“며칠?”
“이번 주는 내내 안 가.”
“오늘이 수요일인데…?”
“그러니까, 목요일 금요일 휴가고 토요일 일요일은 출근 안 한다고! 새끼가 좀 한 번에 알아들으면 안 되냐? 오늘 차원우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지?”
“…3박 4일이나 쉬는 걸 지금 말하는 거야?”
“그럼 언제 말해? 지금 퇴근했는데.”
“회사에서는 미리 말해 줬을 거 아냐.”
“아 그래서 지금 말해 줬으면 됐잖아!”
아무래도 은율이는 내가 지금 왜 이렇게 계속 묻는 건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나 보다. 속 터지는 소리만 자꾸 한다면서 짜증을 내는 은율이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없이 식탁에 수저를 놓고 밑반찬을 꺼냈다. 방으로 들어와서 아침에 나간 모양 그대로 뭉쳐 있는 이불을 정돈하고, 다시 나가서 세탁기를 돌리고, 다림질할 것들을 모아서 소파 옆에 올려 두는 동안 계속 입을 닫고 있었더니 찌개를 끓이고 저녁을 준비하던 은율이가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거실로 왔다.
“차원우.”
“어.”
“삐졌냐?”
“아니.”
“그럼 뭔데. 왜 입 나왔어?”
“서운해서.”
“서운? 설마 넌 출근하는데 내가 출근 안 한다고 서운해? 그게 서운할 일이야?”
“안 서운하겠냐? 조금만 일찍 말해 줬으면 나도 목요일 금요일 연차 쓰고 퇴근했을 거 아냐.”
“뭘 연차까지…!”
“내가 연차 쓰는 게 힘든 일도 아닌데 너 때문에 연차 쓰면 안 될 게 뭐가 있어? 바빠서 휴가 한 번 제대로 간 적이 없는데, 3박 4일이나 쉴 거면 이참에 같이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좀 좋냐고. 미리 말해 줬으면 내일부터 나도 같이 쉬었을 거 아냐.”
여태까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로 터지기 일보 직전의 흉흉한 기세를 마구 내뿜고 있던 은율이의 분위기가 단번에 누그러졌다. 아, 하고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나를 마주 보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들고 있던 국자를 만지작거린다. 한숨을 쉬면서 은율이에게 국자를 받아 들고 주방으로 왔다. 끓고 있는 찌개를 뒤적거리며 간을 보는 동안 슬금슬금 다가온 은율이가 내 눈치를 보며 묻는다.
“…찌개 간 맞아?”
“어.”
괜히 다른 말은 못 걸고 머뭇거리고 있길래 못 본 척하고 다 끓은 찌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아서 수저를 들고 밥알을 셀 것처럼 깨작거리던 은율이가 멸치를 조금 집어서 내 숟가락 위에 올려놓는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소정이가 보낸 거라면서 맛있다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더니 이번에는 장조림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 주기까지 한다. 대답 대신 밥만 푹푹 떠서 퍼먹는 동안 안절부절 못하던 은율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일 다 취소될까 봐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겨우 무기한 연기로 붙들어서 미뤄 둔 거라… 정신이 없어서 너한테 전화할 생각을 못 했어.”
“…….”
“아까도 집에 와서 일 때문에 통화하느라, 진짜 너한테 성질부리려고 그랬던 거 아닌데 일 때문에 머리 복잡해서… 성질 안 내려고 했는데….”
열심히 꿍얼꿍얼 변명을 한다. 안 그래도 아까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은율이가 뭔가 짜증이 나 있는 것 같았는데 회사 일 때문에 그랬나 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뭐 엄청 화를 낸 것도 아니고, 똑같은 거 여러 번 물어보면서 내가 귀찮게 한 것도 맞으니까 나한테 성질을 부린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다. 다른 게 문제지. 그리고 은율이도 다른 게 문제라는 걸 모를 리가 없고.
“차원우.”
“왜.”
“…밥 먹고 같이 씻을까?”
“넌 꼭 이럴 때만 나 듣기 좋은 소리 하더라.”
정곡을 찔렸는지 은율이가 딴청을 피우더니 반찬을 깨작거리면서 싫음 말고, 하고 웅얼거린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부분에서는 아무리 지가 잘못한 상황이어도 일단 튕기면 내가 굽혀 주는 걸 아니까 저런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이 없다. 대답을 안 했더니 힐끗 나를 쳐다본 은율이가 갑자기 핸드폰으로 뭘 검색한다. 제주도 비행기 표 있겠지, 제주도 가는 비행기가 우리 집 앞에서 강남 나가는 버스보다 더 자주 있다던데, 아니면 부산 갈까, 난 강원도도 좋은데, 열심히 혼자 떠드는 동안 나는 조용히 밥만 먹었다. 은율이가 그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야깃거리가 떨어지고 밥까지 다 먹어서 더 피할 방법이 없게 되자 그제야 수저를 내려놓고 은율이가 머리를 몇 번 헝클더니 조용히, 그리고 착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원우야.”
살짝 내려가 있는 눈썹과 반들반들한 눈동자를 보니까 슬슬 나도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뭐,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려는데 자꾸 웃음이 날 것 같아서 괜히 남은 밥을 퍽퍽 퍼서 입에 욱여넣었다. 물론 은율이가 그런 내 분위기 변화를 모를 리가 없다.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면서 생글생글 웃는다.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꼭 미리 얘기할 테니까 그만 화내면 안 돼?”
“…….”
“워누야아아.”
“…….”
“미안해, 응?”
“알았으니까 얼른 먹어, 같이 씻자며.”
“나쁜 새끼.”
진작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걸 참 멀리도 돌아온다. 내가 씩 웃자 콧소리까지 내며 나를 달랜 게 굴욕적이었는지 숟가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은율이가 머리를 싸매 쥐더니 으으,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후딱 비운 밥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넣고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찔러보았다.
“그냥 씻으면 아까운데 한 판 뜨고 씻으면 안 되냐? 내일 출근도 안 한다며.”
“뜨긴 뭘 떠 새끼야! 내가 회야? 뜨게?”
“그럼 한 판 하고?”
“닥쳐!”
“한 판 치고?”
“꺼져!”
입으로는 닥치고 꺼지라며 짜증을 내고 있으면서, 정작 손으로는 밑반찬 통 뚜껑을 하나씩 닫고 식탁을 정리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굽혀 주는 건 내가 아니라 은율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목욕물을 받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서의 ‘한 판’에 이어 따뜻한 물에 목욕까지 마치고 노곤해진 채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가 옆에 엎드려 있는 은율이의 허리를 안았다.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하면서도 쳐 내지는 않는다.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은율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같이 살펴보았다. 부산 3박 4일 여행, 제주도 3박 4일 여행, 강원도 3박 4일 여행, 줄줄이 나오는 여행 일정을 보다가 뭔가 좀 아쉬워서 내 핸드폰으로 다른 것을 검색해 보았다. 해외에 나가기에는 시간이 모자라려나? 내일 출근하자마자 반차 내고 낮에 바로 공항으로 달리면 이동 시간과 숙소 들어가는 시간을 버리더라도 2박 3일은 꼬박 놀 수 있을 것 같은데. 후쿠오카, 오사카, 이런저런 도시 이름들을 쭉 훑어보는데 은율이가 자기 핸드폰을 내 앞으로 쓱 들이밀었다.
“급하게 예약하는 거 감안하고, 월요일 출근할 거 고려하고 다녀오기에는 그냥 제주도가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좀 봐.”
“난 아무데나 상관없어. 너 가고 싶은 데로 가.”
“나도 안 가 봐서 잘 몰라.”
“소정이한테 물어볼까? 걔는 여기저기 많이 다녔었잖아.”
“신혼여행 가는 거냐고 놀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신혼, 좋지. 좋은 단어야. 노은율이 드디어 나랑 결혼한 걸 인정하는구나.”
“말을 말자.”
“그러고 보니까 우리 여행 처음 가네?”
말을 해 놓고 내가 놀랐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명절에 집에 내려갔다 온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작정하고 여행을 간 적이… 정말 한 번도 없구나. 놀랍기도 하고 기가 막혀서 멍청한 얼굴로 은율이를 바라보자 은율이도 뒤늦게 깨달았는지 그러네, 하고 머리를 긁적인다. 어떻게 십 년을 넘게 살면서 여행 한 번을 안 갔을까. 대학교 때는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어 놓느라 바빴고, 구직할 때는 돈이 없었고, 각자 회사에 자리를 잡고 나서는 은율이 일이 많이 바빠서 같이 어딜 갈 짬을 못 냈고…. 과거부터 차근차근 돌이켜보니 참 정신없이 살았다 싶었다. 저번에 일을 그만두네 어쩌네 난리를 쳤을 때라도 한 번 다녀왔어야 하는데.
“바빠서 그렇지 뭐. 사는 게 바빠서.”
은율이도 예전 일부터 필름 한 번 쫙 돌렸나 보다. 남들도 다 비슷할 거라면서 다른 사람들이 올려놓은 여행 사진들을 휙휙 훑어보며 나름대로 덤덤하게 대답은 하는데 눈빛이 꽤 씁쓸해 보였다. 허리에 둘러놓았던 팔에 힘을 주어 은율이를 당겨 안았더니 싫지는 않았는지 몸을 기대 온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나지막이 속삭였다. 평소에는 이마에 잘만 뽀뽀했으면서 오늘은 왠지 이마까지는 갈 자신이 없다. 흉터가 마음에 걸려서. 대신 관자놀이에 입술을 꾹 눌렀다 떼고 머리를 비비는데 대뜸 은율이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내 입술에 자기 이마를 갖다 댄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가 눈이 마주치고 웃음이 터졌다. 하여튼 뭘 숨기질 못하겠다. 보송보송하고 따뜻한 몸을 가득 안고 키스했다.
***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괜히 욕심만 나서 결국 제주도로 합의를 봤다. 놀릴 걸 뻔히 알면서도 여행 가방을 빌리기도 해야 해서 소정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미루고 미루던 신혼여행을 가는 거냐면서 온갖 호들갑을 다 떨더니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냥 놀리는 건 줄 알았는데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우리 엄마도 안 할 법한 말을 해서 나도 그렇고 은율이도 당황해서 달래느라 쩔쩔맸다. 결국 제주도에서 각종 먹을거리들을 사다 주기로 하고 괜찮은 관광지 정보를 얻어 내고 나니까 뭔가 낚인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금요일 연차를 내고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회사 밖으로 나왔다. 차를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은율이가 클랙슨을 짧게 울렸다. 뒷좌석에 커다란 여행 가방이 두 개나 있다. 누가 보면 제주도에 이사 가는 줄 알겠다. 처음 가는 여행이니까 구두쇠 노은율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숙소를 좋은 호텔로 잡아서 짐을 이렇게까지 다 싸서 가지 않아도 되는데 참 많이도 챙겼다. 하긴, 나도 그렇고 은율이도 그렇고 여행 가방을 싸 본 적이 있어야 뭘 빼든지 말든지 하지.
공항에 와서도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시간에 맞춰 비행기에 탔다. 제주도로 향하는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은율이는 무려 공공장소인데도 내 손을 붙들고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여태까지 노은율을 만난 이래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깍지까지 끼고 손을 잡아 본 적이 없어서 이걸 설레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걱정을 해야 할지 감을 못 잡다가 비행기가 제주도에 도착하고 나서 은율이의 표정을 보니까 확실히 입장을 정할 수 있었다. 캐리어를 찾으러 가는 동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한숨을 푹푹 쉬던 은율이가 우뚝 멈춰 서더니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서울 갈 때 어떻게 하지?”
“그렇게 무서웠어?”
“비행기가 도대체 하늘에 어떻게 떠 있는 건지 도저히 납득이 안 가잖아. 아니 이게, 진짜 황당하지 않냐? 그 무거운 게….”
“그게 납득이 안 가면 비행기를 어떻게 만들었겠냐, 어? 그냥 뜨는 거지, 인마.”
“하여튼 문과 새끼는 도움이 안 돼.”
“너도 문과잖아.”
“이과가 아니니까 몰라서 이러지.”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이리 와.”
은근히 손을 다시 한 번 잡아 볼 생각으로 내 손을 뻗었는데 이제는 평소의 노은율로 돌아왔나 보다. 나를 휙 스쳐 지나가더니 가방이 줄줄이 나오는 레일 앞에 서서 손가락 하나 못 잡게 팔짱을 껴 버린다. 손을 잡는 대신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 주었다. 3박 4일만 잘 참고 기다리면 서울 갈 때 또 비행기 안에서 손을 잡을 수 있으니까 괜히 욕심내다가 기회를 날리진 않을 거다.
제주에 도착하는 시간이 밤이라 첫날 일정은 아예 안 잡았는데 그러기를 잘한 것 같다. 비행기 때문에 힘을 다 뺀 은율이는 숙소로 가는 동안 차에서 내내 자더니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침대에 뻗어 버렸다. 심지어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멀미까지 했다면서 발코니 밖으로 보이는 호텔 정원 풍경을 감상할 힘도 없는지 이불을 턱까지 올려 덮고 눈을 감는다. 삼십 분만 누워 있을게, 하고 웅얼거리더니 곧 다시 잠이 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분명 일어나자마자 툴툴거릴 게 뻔해서 숙소 근처에 미리 봐두었던 횟집에 가서 회를 떠 왔다. 원래는 늦은 저녁을 먹으러 오려고 했던 곳인데 은율이는 도저히 저녁을 먹기 위해 방에서 나올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행 일정에 횟집만 네 번을 넣어 놓은 녀석이 회를 못 먹고 한 끼를 그냥 넘기면 되게 서운해 할 것 같으니까 내가 신경 좀 써야지.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와 맥주, 못 보던 막걸리까지 사서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 침대에 누워 있던 은율이는 괜찮아졌는지 발코니에 놓인 의자에 기대어 앉아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욕조에 걸려 있던 목욕 가운을 들고 나가서 은율이의 위에 덮어 주고 뒤에서 의자 팔걸이를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여행 좀 왔다고 닭살 돋는 짓 엄청 많이 한다, 차원우.”
고개를 뒤로 젖혀 나를 올려다본 은율이가 피식 웃으면서 내 턱을 쓱 밀어낸다.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손짓이어서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아슬아슬하게 코 끝에 입술을 대고 있다가 팔걸이를 짚고 있던 손등을 따뜻하게 덮는 체온에 미소를 지었다. 시선이 계속 마주치는 것이 민망했는지 은율이가 눈을 감고 종알거린다.
“뭐, 왜, 뭐.”
“뭐가.”
“왜 계속 그러고 있어, 목 아프게.”
“그럼 뭐했으면 좋겠는데?”
“또 수작질 하네.”
“수작질이라니, 애교지, 애교.”
“덩치도 커다란 게 애교는 무슨.”
“덩치가 크면 애교 떨면 안 되냐?”
“…그래서 애교 언제까지 할 건데?”
“네가 받아 줄 때까지.”
손등의 체온이 뒷머리로 옮겨 간다. 내 머리를 감싸서 당긴 은율이가 먼저 입술을 마주 댄다. 불편한 자세로 키스를 하는 게 힘들었는지 은율이가 일어나더니 내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다. 침대 위에 올려 둔 봉지들을 펼쳐 보더니 자기도 침대 위로 올라가서는 나에게 손짓한다. 처음엔 손을 저었다.
“테이블에서 먹자. 거기 흘리면 골치 아파.”
“뭘 먹을 건데?”
“…어?”
“뭘 흘리면 골치 아픈데?”
그러더니 샐쭉 웃는다.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지는 나는 얌전히 회와 술이 담긴 봉지들을 침대 아래에 내려놓고 은율이의 옆으로 펄쩍 뛰어 올라갔다. 귓불과 목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혀로 핥자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따뜻한 온기가 뒤섞이는 건 금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