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반짝이는 내일 (33/43)

04. 반짝이는 내일

“선임님, 야근이 두 번이면 뭔지 아세요?”

“몰라.”

“두근이래요, 두근.”

“…….”

“그럼 야근 네 번이면 뭔지 아세요?”

“야 그만해라.”

“두근두근! 와하하!”

정아가 저렇게 미친 소리를 하는데 사무실에 있는 사람 그 누구도 대꾸를 안 할 정도로 모두 진이 빠져 있었다. 이 주를 꼬박 철야 같은 야근을 하고 주말 출근까지 하니까 나도 화딱지가 나서 심장이 두근두근 벌렁벌렁하긴 하다.

“그런데요.”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정아가 파티션 너머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오늘만 꼬박 다섯 잔을 채우는 커피를 후룩후룩 마시면서 마주보았다. 정아가 생긋 웃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일까요?”

“누구긴 누구야, 거래처 담당자 때문이지.”

“과연 그럴까요? 혹시요 선임님, 담당자한테 일처리 좀 빠릿빠릿하게 해달라고 채찍질한 사람 때문은 아닐까요?”

“…너 아주 오늘 날 대차게 까는구나.”

나름대로 무섭게 노려보았는데 꼼짝도 안 한다. 정아가 저렇게 간을 배 밖에 내놓고 덤비는 것도 이해는 한다. 내 탓이 아닌 것도 아니니까. 아니, 진짜로 내 탓인가….

이 뺑뺑이 야근의 발단은 이 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꽤 크게 열리는 새 전시회와 박람회 행사 홍보를 회사에서 맡게 되면서 우리와 기획 회의를 하게 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다. 담당자인 이 팀장은 같이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특히나 우리같이 타이밍과 분위기 보며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딱 질색인 타입이었다. 지가 무슨 노자도 아니고 존나 자연의 흐름과 순리에 몸을 맡기고 있다고 철호 형이 투덜거리는 소리 그대로였다. 무엇 하나 급할 것도 없이 천천히, 느긋하게, 여유가 넘치게 행동하는 동안 우리는 복장이 터지고 뒷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남이 뭐라고 하건 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제일 최악이었다.

그래서 결국 질렀다. 못 참는 사람이 지는 거지만 질 때 지더라도 할 말은 하고 지고 싶었다.

이 주 전 회의를 마무리할 때였다. 기획안이 결정되면 만드는 시간이 있고 만드는 시간이 걸리면 나가는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보면 광고 때려야 되는 타이밍 다 놓치고 망하게 생겼다고 짜증 섞인 훈수를 두었다. 회의실에 올곧은 자세로 앉아 기획안을 넘기고 있던 이 팀장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박물관 초청 전시회와 소설가 초청 강연회의 홍보 기획이 담긴 파일을 탁 접고 이 팀장이 나에게 되물었다.

- 방금 한 얘기 다시 해 주시겠습니까?

못할 것도 없었다.

- 일처리가 너무 늦어진다고요. 이래서는 효율도 적고 의미도 없습니다. 빨리빨리 스타일이 잘 안 맞으시더라도 업무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은 감안을 해 주셔야죠. 이렇게 지지부진 길어지다 보면 저희도 이 팀장님 쪽도 다 손해입니다. 일정 당겨서 진행했으면 좋겠는데요.

이 팀장은 내 말을 주의 깊게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 번 시원하게 잘했다면서 정아가 테이블 아래에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뿌듯해서 광대가 슬슬 승천하고 있었다.

- 당기죠, 뭐. 다음 주에 최종 프레젠테이션 하고요.

- 예?

이렇게까지 당겨달라는 건 아니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남기고 이 팀장이 회의실을 나간 그 이후로 나도, 우리 팀도 내내 이 꼴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면서 팀장님한테도 한 시간을 꼬박 잔소리를 듣고, 그 이후로는 욕을 먹고 잔소리를 들을 시간도 없는 폭풍 근무의 연속이었다.

문득 생각을 하다 보니 원우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들은 게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고 있는 놈 괜히 깨울까봐 소파에서 쪽잠 자고, 그러다가 원우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서 헐레벌떡 씻고 나오고, 그 짓을 한 주 내내 했더니 피곤한데다가 뭔가 쫓기는 기분까지 들어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럴 때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 모드의 차원우한테 좀 징징대고 해야….

[오늘도 야근?]

딱 지 생각하고 있을 때 도착한 문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앞에서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정아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괜히 메모장을 켜고 일을 하는 척 타자를 대충 치면서 한 손으로 문자를 썼다.

[ㅇㅇ자갸]

답장은 금방 왔다.

[울애기 맘마는 머거쪄?]

하하 거 참, 녀석, 아무리 내가 자기라고 했기로서니 이게 무슨 짓이지….

[거기까지만]

정도를 아는 차원우는 내 한마디에 바로 장난을 접었다.

[ㅇㅋ밥은?]

[아직]

[갈까?]

[ㄴㄴ]

[정아씨?]

[ㅇㅇ]

분명 애인하고 문자를 하는데 다섯 글자도 안 되는 단어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로 의사소통이 다 되다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딱 거기까지 답장을 보냈을 때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얼른 핸드폰 화면을 끄고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앞에서 정아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식사….”

“대충 컵라면으로 때우고 일해, 밤샘할 거 아니면.”

그리고는 째지는 팀장님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다시 앉는다. 한숨을 푹 쉬고 다시 원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에 가긴 감]

[정리하면서 문자해 태우러 갈게]

[됐어 택시]

[아냐 어차피 할일도 없어 문자해]

좋은데 화가 나는 묘한 기분이다.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모니터 쪽으로 돌아앉았다.

열 시를 막 넘기고 나서야 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자를 보내놓고 회사 옆 카페에서 숙면에 좋다는 허브차를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원우가 도착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꼴이 영 부스스하다.

“자다 왔어?”

“잠깐 졸았어.”

“그러게 택시 타고 간다니까 왜 오냐, 귀찮게.”

“우리 자기 얼굴 일 분이라도 더 보려고 왔지.”

카톡으로는 얼굴 보고 하는 소리 아니니까 자기야 여보야 잘도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면 선뜻 말이 안 나오는데 차원우는 그런 쑥스러움도 없다. 괜히 못 들은 척 창문 너머를 보고 있다가 손등 위로 따뜻한 기운이 덮여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어차피 집에 가면 씻고 바로 잘 거잖아. 아침 되면 밥도 안 먹고 바로 나갈 거고. 가는 길에라도 손잡고 가자.”

“운전에나 집중하세요, 차원우 씨.”

물론 그건 말뿐이었다. 나는 신경 안 쓰는 척 슬그머니 깍지를 껴서 기어를 사이에 두고 원우의 손을 잡았다. 그걸 또 원우는 모르는 척해 준다. 이럴 때는 짠 것처럼 쿵짝이 잘 맞는다.

“최 실장인지 뭔지 하는 그 개놈 가고 나서 좀 한가한 거 같더니, 이상한 놈이 또 걸렸어?”

“최 실장보다 더해. 아 몰라, 피곤하다. 나중에 얘기해.”

“피곤한 건 알겠는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내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되는데.”

“왜? 뭔데?”

설마 집에서 무슨 일이… 순간적으로 오싹해져서 몸을 움츠리자 원우가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살살 쓸었다.

“왜 겁을 먹어? 아, 집안일 아니야.”

“아, 어….”

“나 다음 달 승진 시험 명단에 올라갔어.”

벌써 연차가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다. 근데 그게 이렇게 진지하게 할 이야기인가? 표정까지 굳히고 핸들을 톡톡 두드리던 원우가 말했다.

“아마 이번에 승진을 하기는 하게 될 것 같은데, 면접이야 그냥 형식이고, 동기들이랑 연차는 똑같은데 내가 근무평가 점수가 제일 좋거든.”

“…근데?”

“근데 승진해서 본사로 빠지게 되면 이사 가야 될지도 몰라.”

“이사? 어디로?”

“원주.”

“…허?”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원래는 집에 오자마자 뻗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이 다 달아났다. 집에 오는 내내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원우를 붙들어 소파에 앉혀놓고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다. 다음 달 승진 시험 명단에서 승진을 할 유력 후보인데 지금 승진을 하게 되면 본사로 옮기게 될 가능성이 크고, 그럼 내년에 원주로 본사를 옮길 때 당연히 따라가야 된다고 했다. 승진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나 원우나 둘 다 주말부부… 부부라고 하니까 엄청 오그라들지만 어쨌든 그걸 할 생각도 없고, 그러니 누구 하나가 원주로, 혹은 원주에서 출퇴근을 하거나 아니면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고…. 가뜩이나 내 일 때문에 심란한데 원우 일까지 겹쳐져서 정수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올 것 같았다.

“당장 승진하는 건 아니니까, 떨어질 수도 있어.”

“하게 될 것 같기는 하다며.”

“뭐, 다른 녀석들 점수랑 차이가 좀 나서… 내가 우리 지사 일 등이라.”

“아니 그러니까 일을 좀 설렁설렁하지 뭐 얼마나 호사를 누리겠다고 그렇게 빡세게 일을 해서 점수를 받냐?”

“내 여보 먹여 살리려고 쌔빠지게 일한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냐.”

“너 아니어도 실컷 먹고 살아.”

“그럼 내가 일 그만두고 원주 가지 말까?”

“…….”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차라리 돈만 걸린 문제면 깔끔하게 그러라고나 하겠는데, 일을 안 하고 집에서 노는 입장이 되면 무기력해지고 기운 빠지는데다가 괜히 자격지심까지 생겨서 사소한 걸로도 시도 때도 없이 부딪히게 된다. 졸업하고 같이 취업준비를 할 때, 내가 먼저 취직을 했던 터라 원우가 입사 준비를 하던 서너 달 정도를 내 월급으로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그때 만약 원우가 취업 준비를 더 했으면 우리는 백 퍼센트 찢어졌을 거다. 끔찍해서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든 되겠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고민을 하고 있는 내 뒷덜미를 원우가 쓰다듬었다. 한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나 일 그만둘 생각 없어.”

“알아. 내가 알아서 할게.”

“너도 그만둘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난 따로 살기 싫어.”

무슨 다섯 살짜리 애가 투정부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와서 움찔했다. 이 타이밍이면 보통 그랬쪄요 우쭈쭈 하면서 놀려야 정상인데 원우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난 나만 싫은 줄 알았네. 우리 거의 보름 내내 거의 따로 산 거 아니었냐?”

“야, 그거랑 그게 같냐? 내가 바쁘니까….”

“아무리 바빠도 전화 한 통을 못 해 주냐? 그리고 멀쩡한 침대 두고 잠은 대체 왜 소파에서 자?”

“타이밍이 애매했다고. 전화할 짬나서 시간 보면 그냥 통화할 시간에 일 더 해서 빨리 집에 가야겠다 싶고, 집에 오면 너 자고 있으니까 깨우기 싫어서 그냥 소파에서 자고.”

“노은율, 나 너한테 아들 아니고 애인이다. 까먹은 거 아니지?”

이런 거 저런 거 배려한답시고 헛짓거리 할 시간에 전화해서 목소리나 들려주고 옆에 기어 들어와서 자라는 소리다. 진지하게 받아쳤다가는 우울해지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서 나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원우의 볼을 한 번 꽉 꼬집었다.

“애인이었냐? 난 여보인 줄 알았지.”

볼이 붙들린 채로 씩 웃은 원우가 잽싸게 몸을 날려 나를 덮쳐누른다. 거의 일주일 만에 하는 키스였다.

주말도 없이 출근을 하다 보니 날짜 관념이 사라졌다. 프레젠테이션 일정에 간신히 맞춰 기획안을 끝내니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원우는 끝나면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전화하고 차 기다리는 시간에 차라리 집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택시를 탔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일주일 내내 근무를 하는 내가 불쌍하긴 했는지 팀장님이 하루 쉬고 토요일에 나오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아이고 하루 휴가에 이어지는 주말 출근이라니 거 참 감사해서 욕이 나올 지경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잤는데 일어나보니 옷은 또 다 갈아입혀져 있었다. 안 깨우려고 조심해가면서 옷을 갈아입혔을 원우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품을 쩍쩍 하면서 거실로 나왔다. 식탁에 밥상이 깔끔하게 차려져 있다. 메시지도 있었다.

[푹 쉬다가 저녁에 나와라 고기 먹으러 가자]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식탁에 앉아 밥숟가락을 들었다. 식탁 옆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고지서들과 마트 할인 행사 전단지를 들춰보면서 아침을 먹었다. 볼 것이 없어서 핸드폰을 켜고 인터넷 기사를 휙휙 넘기다가 멈칫했다. 공공기관의 이전이 어쩌고 하는데 원주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 최고의 고민이다. 답이 있는 것까지는 안 바라지만 선택지라도 몇 개 있었으면 좋겠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골치가 아팠다. 누구한테 물어보기라도 하고 싶은데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은 소정이 아니면 민기 둘 중 하나였고, 그 두 사람한테는 굳이 상담 신청을 하지 않아도 대답이 뻔했다. 누구 하나가 그만두고 같이 살든가 그냥 따로 살든가. 그것도 아니면 출퇴근… 원주까지 출퇴근이라니.

서울 원주 출퇴근, 서울 원주 버스, 서울 원주 교통. 이것저것 검색을 해 보다가 지쳐서 게임도 몇 판 하고 TV를 보면서 뒹굴거리다 보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집 앞으로 갈 줄 알고 씻지도 않고 있었는데 원우에게 문자가 왔다. 회사 근처의 한우 맛집과 집 앞의 삼겹살집 중 하나를 고르라길래 당연히 한우를 골랐다. 버스를 타면 전화하겠다고 답장을 보내고 얼른 머리부터 감았다.

이 시간에 시내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자체가 정말 오랜만이라 엄청 어색했다. 깡촌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다가 심지어 길까지 헤맸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을 때 원우는 이미 와서 자리를 잡고 불판에 고기까지 올려두고 있었다. 간만에 위에 기름칠하는 김에 술도 한 잔 하고 싶어져서 소주 한 병과 사이다 한 병을 시켜놓고 주거니 받거니 먹다가 승진 이야기가 나왔다.

“다시 물어봤는데 원주로 가는 거 확정은 아니라더라. 지사에서 계속 근무할 수도 있다던데.”

“그래도 원주로 갈 수도 있는 거잖아.”

“가면 그냥 출퇴근하지 뭐. 어차피 차 내가 끌고 다니는 거.”

“원주까지 출퇴근을 하겠다고?”

“어.”

너무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니까 말문이 턱턱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한 시간 반은 걸리겠던데.”

“서울 안에서 지하철 타도 한 시간 반씩 걸리는 거리 수두룩하잖아.”

“그래도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왕복으로 세 시간씩 운전해서 다니면 버겁지.”

“따로 살기 싫다며, 일도 안 그만둘 거고. 나도 너랑 따로 살기 싫어. 그나마 나는 정시 퇴근이나 하지 너는 그것도 아니고. 그럼 내가 그냥 출퇴근하는 게 낫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런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잘 구워진 꽃등심을 먹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불판의 고기를 뒤집고 능숙하게 자르면서 원우가 말했다.

“일 그만두는 거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내가 일 그만두면 좀 무책임하고 대책 없어 보이지 않겠냐, 너희 부모님한테.”

“…….”

“그리고 만약에 네가 그만두면… 우리 부모님이 그런 생각 안 하실 분들이라고는 차마 말을 못하겠다.”

“너 오늘 되게 현실적이어서 무섭다.”

“그러게, 근데 그렇게 되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그리고는 농담이었다며 픽 웃는다. 원우가 그럴수록 나는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꾹 눌리는 것 같았다. 기분 진짜 이상하다. 감동 같은 것도 아니고, 서운한 것도 아니고, 이건… 미안한 건가 보다.

“원우야.”

“다 아니까 말 안 해도 된다.”

내가 민망해할 걸 알고 지가 먼저 저래버리니까 더 미안해졌다. 좋아하는 걸 실컷 먹이기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불판을 갈고 새 고기를 얹었다.

“너 다 먹어.”

“다른 것도 먹으면 안 돼?”

“뭐, 꽃등심? 꽃등심… 은 일 인분만. 이번 달 식비….”

“그거 말고.”

“그럼 뭐.”

“에잉.”

에잉 같은 소리 한다. 테이블 아래에서 내 발을 툭툭 건드리는 원우의 발을 꽉 밟았다. 그런 말은 집에 둘만 있을 때 조용히 했으면 참 좋겠는데 하여간 눈치가 없다.

***

승진 대상자가 나오는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은율이나 나나 초조해졌지만 꼭 짠 것처럼 둘 다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하다못해 뉴스에 강원도 날씨만 나와도 움찔움찔할 정도였다. 승진을 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월급 올라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거 더 벌어서 어디다 쓸까 싶고, 그렇다고 승진 대상자에서 빼달라고 한다고 그게 빠지는 것도 아니고. 더불어 꼭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차장님과 부장님까지 나에게 자리를 슬슬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줘서 마음도 싱숭생숭했다. 갑갑한 심경을 근태에게 토로하면서 애인이 서울에 있는데 내가 원주로 가면, 까지 말을 꺼냈다가 애인 없는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냐고 구박만 받았다.

일요일 아침부터 은율이는 집에서도 일을 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TV를 보고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려니 서러워졌다. 내일이 승진 발표가 나오는 날이었다. 물론 지금도 주말 말고는 오붓하게 둘이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원주로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 주말에는 피곤이 쌓여 기절해서 잠이나 잘 텐데 그 전에라도 같이 놀아주면 참 좋겠다… 고 생각만 하고 결국 말은 못했다. 소파에 누워서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고 그러다 해가 진 걸 보고 뭐라도 해먹을까 싶어서 일어났는데 그제야 은율이가 방에서 나왔다. 좀 쉬러 나오는 줄 알았더니 외출을 할 건지 코트까지 입고 있었다.

“어디 가게?”

“어. 너도 옷 입어.”

“나? 왜?”

“고기 먹으러 가게.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웬 고기?”

라고 말하면서 나는 얼른 벌떡 일어나서 옷을 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소고기를 먹어서 당분간은 구경도 못할 줄 알았는데 호강하게 생겼다.

집 앞에 자주 오는 고깃집에 앉아서 지글지글 익는 삼겹살을 보고 있으려니 또 우울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원주로 다니기 시작하면 주말에 시간 내서 외식하러 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기를 뒤집는 나를 빤히 보고 있던 은율이가 픽 웃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 고기 먹기 싫어?”

“아니.”

“뭐, 원주 가는 거 때문에?”

내내 이야기 안 하고 넘어가더니 직구로 던지니까 넘길 방법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심각해하지 마. 가면 가는 거지.”

“…알아.”

“서울 밖에서 사는 거 불편할 수는 있는데, 뭐 평생 서울에서만 산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주말 말고는 이렇게 나와서 고기 구워먹고 할 시간도 없잖아.”

“왜 없어? 내가 원주로 갈 건데.”

나는 들고 있던 집게를 떨어뜨렸다.

“네가 왜?”

“회사 그만둘 거니까.”

이번엔 입을 쩍 벌렸다. 은율이는 내가 떨어뜨린 집게를 들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구우면서 말했다.

“정리하느라 오늘까지 바빴어. 이제 좀 한가할 거야.”

“사표 냈어?”

“아직. 그만두기 전에 사람 구해야 되니까. 원주 가기 전까지는 그래도 시간 되겠지?”

“일 그만둘 생각 없다며.”

“그래도 일보단 네가 먼저니까.”

와, 내가 원주로 출퇴근하겠다고 했을 때 은율이가 이런 기분이었나 싶다. 감동의 물결이 아주 밀려오다 못해 넘치게 생겼다. 어디서 저런 멘트를 배워 와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생각 충분히 하고 결정한 거니까 말려도 소용없어.”

“…….”

“정년보장 확실한 네가 그만두는 것보다는 내가 그만두는 게 훨씬 낫지 않겠냐? 우리 부모님이야 내가 알아서 할 거고 너희 부모님은… 이번 설 때 내려가면 내가 잘 말씀드려볼게. 그래도 너 챙긴다고 같이 간다고 하는 건데 거기 가서도 일 찾아보겠다고 하면 막 엄청 마음 상해하고 그러시진 않을 것 같아.”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뜩이나 부모님을 만날 때마다 긴장해서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은율이를 또 구석에 몰아넣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은율이가 하는 말이 맞는 말 같아서 더더욱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안 따라가면 너 술 처먹고 꽐라 됐을 때 누가 너 데리러 가냐? 멀어서 원주까지는 못 가. 그러니까 그냥 같이 가야지. 떼놓고 살면 불안해서 어디 살겠냐.”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내가 원주로 출퇴근 하면 노은율 야근할 때 옷 챙겨다 줄 수도 없고 밥 먹이러 데리고 나올 수도 없고, 퇴근할 때 데리러 가기도 힘들 것 같고, 가끔 같이 출근할 때 편하게 데려다 줄 수도 없을 텐데…. 근데 비슷한 생각을 은율이도 하고 있었나 보다.

“괜히 출퇴근하는 데 기름 값 더 쓰지 말자. 돈은 돈대로 쓰고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그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일 그만둬도 팀장님한테 부탁해서 거기서 받아다 할 수 있는 일 있으면 할 거야. 서울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

“감동받은 거 알겠으니까 가위 들고 그렇게 울먹울먹하지 마라, 되게 웃겨.”

나도 내 꼴이 웃긴 건 알겠는데 컨트롤이 잘 안 됐다.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아까 시켜놓고 한 모금도 안 먹고 있던 소주를 원샷했다. 속이 확 뜨거워지면서 간신히 막혔던 목이 풀렸다.

“노은율.”

“어.”

“내가 너 진짜 사랑해.”

은율이가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한참을 웃더니 말했다.

“원주 두 번 갔다가는 아주 업고 다니겠다.”

“어, 가서 업고 다닐게.”

“그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건 글러먹었으니까 발에 모래 한 알 묻히지 말고 잘 업고 다녀.”

고개를 열심히 끄덕끄덕했다. 집에 내려가면 은율이 겁먹지 않게 내가 말도 잘 해 보고, 가서도 정말 내내 업고 다녀야겠다.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을지 아니까.

감동과 울컥함으로 범벅이 된 삼겹살을 대충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다가 슬금슬금 껴안고 키스를 했다. 보통 일요일에 분위기를 잡기 시작하면 다음날 출근해야 되니까 들러붙지 말라고 걷어차기가 일쑤였는데 오늘은 잘 받아준다.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따뜻한 배와 가슴을 문지르다가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그 상태로 한참을 멈춰 있었다.

“왜?”

“고마워서.”

“고마워하지 마라, 너 또 개고생 시킨다는 소리니까. 거기 가면 너 혼자 돈 다 벌어야 돼. 월급 한 푼도 빼지 말고 그대로 갖고 와. 어디 삥땅치지 말고.”

“네.”

“어이구 대답도 잘하네, 착하다.”

턱 아래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면서 머리 위에 입을 맞추던 은율이가 나를 끌어올려 목을 안는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비비다가 파고들었다.

승진 결과가 나왔다는 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침까지 은율이와 그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다. 집은 언제쯤 알아볼 거고 회사 일은 언제 정리를 할 거고, 은율이는 별다른 동요도 없이 태연하게 말을 하는데 괜히 내가 좌불안석이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목이 타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부장님이 손짓을 하는 걸 보고 그대로 뿜을 뻔했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부장님 자리까지 갔다. 언뜻 봐도 부장님의 표정은 그냥 평범하게 나를 축하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긴장돼서 목이 졸리는 것 같은데 더 긴장이 됐다.

“차 주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 일단 승진 축하하고.”

“예? 아, 예, 감사합니다….”

역시 그렇구나. 나는 얼떨떨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거 좀 애매하네.”

“예?”

“원래는 이번에 승진하면 본사로 바로 가는 거였는데 다른 지사에 지원자가 있어서.”

“에?”

예도 아니고 네도 아닌 어정쩡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본사에서는 두 명 정도로 생각한다고 했었는데 한 명은 확정이었고, 다른 한 자리가 차 주임 자리였거든. 그런데 다른 지사에서 지원자가 있다고 해서 그 친구가 올라가게 됐어.”

“어, 네, 그….”

“승진은 승진인데 본사로만 안 가는 거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말고.”

“아뇨 서운한 건 아닌데….”

“다시 본사로 갈 시기가 올 거니까 그때는 내가 책임지고 올려 보내줄….”

“아니 안 그러셔도 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 오늘 다들 회식이나 하지. 대리 턱이 어디 턱이냐 싶지만 그래도 명함 새로 파는데 술 한 잔씩은 돌려야지.”

영혼 없는 리액션으로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왔다. 옆에서 근태와 현정이가 차 대리님 축하한다느니 대리님 하찮은 주임들 좀 잘 봐달라느니 어쩌니 말이 많은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멍 때리고 있다가 얼른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은율이에게 전화부터 했다. 이거 뭔가 익숙한 상황인 것 같은데….

“은율아.”

- 너 마침 전화 잘했다. 나 사람 새로 구하는 거 얼마 안 걸릴 것 같아. 아, 그리고 집은 우리 회사에 그쪽에 부모님 계신 사람이 있어서 일단 한 번 괜찮은 데로 추려 달라고 했어.

“어 그래 고마운데….”

- 이따가 점심 먹으면서 팀장님하고 얘기해 보고 다시 전화할게.

“그러지 말고, 얘기 안 해도 돼.”

- 어?

“나 본사 안 갈 것 같아.”

- …어?

얼굴을 안 보고 있어도 전화 너머에서 은율이가 벙찐 게 느껴졌다.

- 승진 안 됐어?

“아니 승진은 했는데 원주는 안 가도 된대.”

- …….

“다행이지, 근데….”

- 다행?

“어어.”

- 야, 씨, 나 그만둔다고 사방팔방에 다 떠들어놨는데 다행?

“그, 그러게 내가 안 갈 수도 있다고 했었잖아.”

- 야 차원우.

삼 초 전의 타이밍이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얼굴에서 떼어냈다. 한 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나더니 바로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 회사 그만두면 누구 낯짝 보고 일하냐고 정아가 울고불고 하는 거 기껏 달래놨더니 다행, 다행 같은 소리하네, 일 정리하느라 오늘 오전 내내 쑤시는 엉덩이 한 번 못 떼고 일했는데 다행, 다행은 개뿔이 다행, 쪽팔려서 씨발 이걸 뭐라고….

까지 듣고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자를 찍었다. 이 말까지 전화로 하면 분에 못 이긴 은율이가 핸드폰을 들고 욕을 하면서 날뛰다가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급 커밍아웃을 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서였다.

[근데 나 오늘 회식해 진짜 미안해]

[그리고 원주 안 가도 나 진짜 너 사랑해]

[사랑한다니까]

[진짜로]

[은율아 사랑한다]

연달아 보낸 문자를 읽은 건 보이는데 답장이 안 온다. 나는 머리를 싸매 쥐고 주저앉아서 끙끙거렸다. 집에 들어가기 이렇게 무서운 적이 또 있었나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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