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벚꽃
上
바로 어제까지 나는 여태 세운 연속 야근 일수 기록을 새롭게 갱신 중이었다. 지난주부터는 야근도 모자라서 새벽 네 시에 퇴근하는 철야를 하고 있었고, 어제는… 아니, 오늘이구나. 새벽 여섯 시가 되어서야 회사에서 나와서 택시에 실려 집에 왔다. 그러니까 몇 주 전부터 지옥 같은 일정을 소화한 내가 겨우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고 마음 편하게 잠든 게 세 시간도 채 안 되었다는 소리고….
“미안, 깼어?”
같이 사는 놈이 그걸 뻔히 알면서 굳이 이렇게 내 잠을 깨울 필요는 없지 않냐는 거다. 욕할 힘도 없어서 두어 시간을 헤드뱅잉이라도 한 것처럼 핑핑 도는 머리를 붙들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머리가 하도 아프니까 눈알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겨우 떼었다.
“…죽을래?”
머쓱하게 웃은 원우가 거실 한복판에 엉망으로 쏟아진 CD들을 대충 발로 밀어 치우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으려고 하길래 짜증을 내면서 손을 쳐냈다. 쿵, 좌르륵, 덜그럭, 우당탕, 도대체 뭘 저질렀길래 저런 각양각색의 소리가 나오나 했더니 컴퓨터 옆에 놓여 있던 CD장을 옮기고 있었나 보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미안해.”
“너는 진짜 씨발… 됐다, 아오….”
예전에는 그냥 엎어져서 자고 누워서 자고 소음에 깼다가도 불만 꺼져 있으면 다시 금방 잠들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잘 안 된다. 아마 내 성격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이후부터 잠자리까지 까다로워진 것 같다. 이렇게 갑자기 깨면 다시 잠들 때까지 한참이 걸린다. 그리고 다시 잠들기 위해 뒤척이는 내내 나는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이 가득해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이 된다. 타이머 멈춰서 터지기 전에 차라리 가서 눕는 게 낫다. 방문을 꽉 닫고 커튼을 꼼꼼하게 친 다음 침대 위로 뭉그적거리며 올라갔다. 이불을 덮어 쓰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어떻게든 다시 잠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예민하게 곤두서있던 감각이 슬슬 느슨해지면서 겨우 잠이 들려던 찰나에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저절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번엔 방 밖이 아니라 위였다. 또 한 번 쾅, 연타로 한 번 더.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형광등이 부르르 떨렸다. 한 번만 더 소리가 나면 진짜로 위층으로 쫓아 올라갈 생각이었다. 또 한 번 쾅, 하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가 와서 말려도 안 먹힐 기세로 방문을 발로 차서 열고 나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원우가 일어나더니 겁도 없이 내 팔을 붙들었다.
“올라가지 마.”
“놔라, 하루 이틀이어야지 씨발, 내가 저것들을 그냥 확…!”
“올라가지 말라니까. 이리 와”
“어쭈, 놔라. 죽을래? 안 놔?”
내가 성질을 부리거나 말거나 꿋꿋하게 나를 잡고 방으로 다시 들어간 원우가 침대에 나를 눕히더니 그 위로 이불을 덮어씌우고 꽉 껴안는다. 안 그래도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은데 더 답답하게 만드니까 있는 대로 화가 나서 발길질을 해댔지만 죄다 이불에 막혔다. 안 막힌 게 입뿐이라서 욕이라도 거나하게 하려던 찰나에 원우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위에 올라가서 싸우다가 괜히 같이 털린다. 열 내지 말고 그냥 자. 이제 안 시끄러울 거니까.”
“뭘 이제 안 시끄러워, 네가 무슨 경비실이냐? 또 저 지랄하면…!”
“그럼 또 경찰 부르지 뭐.”
또, 라니? 그럼 지금? 나는 순간 말을 잃고 원우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원우는 태연한 얼굴로 나를 안은 채로 아이를 재우는 것처럼 내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나와 원우가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도 자잘하게 쿵쿵거리던 소리가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들리지 않았다.
“거봐, 안 시끄럽지?”
“진짜 경찰 불렀어?”
“어. 경비 아저씨도 부르고.”
“윗집이랑 싸우기 싫다더니.”
“네가 못 자잖아.”
말문이 막혀서 입만 벌리고 있다가 허허, 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참 이상한 데서 이상한 방법으로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든다. 이상하게 두근거리네.
인정하기 싫지만 원우에게 이불 말이를 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잠이 들었다. 꽤 오래 잤다고 생각하고 개운하게 일어났을 때는 집이 텅 비어 있었다. 방문 앞에 붙어 있던 마트에 다녀오겠다고 써둔 메모지를 떼서 쥐고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오랜만에 맞는 주말 휴일이라 이 시간에 TV에서 뭘 하는지 생각도 안 날 지경이다. 원우가 오기 전까지 채널이나 돌려볼 생각으로 TV 옆에 있는 리모컨을 가지러 일어났다가 멈칫했다.
버리려고 따로 빼둔 건지 TV 옆에 CD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노래가 좋아서 샀다가 요즘에는 주로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니까 쓸모가 없어져서 처박아둔 오래된 음악 CD, 유행이 지났고 이미 보스까지 백 번은 깨서 더는 손을 대지 않는 게임 CD 같은 것들이었다. 이번 주 초쯤에 원우가 계절 바뀌면서 옷장 정리하는 김에 대청소를 한 번 해야겠다고 말을 했던 게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래서 CD장을 꺼내고 CD를 쏟고 내 잠을 깨워가며 그 난리를 쳤구나. 깨우기는 지가 깨워놓고 위층이 시끄럽게 했다고 경비실도 모자라서 경찰까지 부른 대단하신 차원우님을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CD를 뒤적이다 뭔가를 발견했다. 눈에 익은 글씨체에 눈에 익은 로고. 졸업앨범에 딸려온 CD였다.
“…어휴 이 등신, 이걸 여태 가지고 있었네.”
두 동강 내서 버렸던 내 졸업앨범 CD를 생각하니 입 안이 썼다. CD를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일어났다. 컴퓨터를 켜고 CD를 넣은 다음 재생을 하기 직전까지 꼭 보면 안 되는 걸 몰래 훔쳐보는 사람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는데, 막상 화면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그냥 허탈해졌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도 졸업앨범을 넣어 집에 보냈던 박스가 집에 고스란히 도착했던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 택배를 뜯었을 때 원우 표정을 생각하면 더더욱. 모르는 얼굴이 가득한 화면을 휙휙 넘기면서 원우의 졸업사진을 찾았다. 확실히 졸업앨범 사진이 인생사진이긴 하다. 뭐 딱히 나랑 살아서 그런 게 아니라 이렇게 보면 꽤 잘생겼단 말이지. 흐뭇하게 턱을 괴고 졸업사진을 감상하고 있을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어?”
그리고 이상한 소리도 같이 들린다. 뒤를 돌아보았더니 입에 커다란 핫도그를 물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들어온 원우가 끙끙거리면서 장을 봐온 것들을 내려놓는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 바지, 소매 끝의 실밥이 너풀거리는 낡은 티셔츠, 부스스한 머리에 입가에 묻은 케첩… 이게 차원우지, 그래, 이게 차원우였다. 방금 전까지 스물스물 피어 올라오던 핑크빛 설렘이 급격하게 사라졌다.
“그거 빼고 말해.”
“다 잤냐고. 저녁까지 잘 줄 알았는데.”
“잘 만큼 잤어. 그건 뭐냐, 애도 아니고 무슨 핫도그야?”
“윗집에서 주던데? 미안하다고.”
“그래서 그걸 덥석 물고 왔어?”
“주는데 어떡해, 받아야지.”
몇 시간 전에 경찰에 신고 전화 넣은 새끼가 배알도 좋다. 핫도그로 그간의 층간소음을 퉁치려는 윗집과 신난다고 거기에 케첩까지 발라서 물고 온 차원우 중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패스하기로 했다.
간식거리가 있나 봉지를 뒤적거려봤지만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죄다 풀 천지에 계란, 두부 같은 것들 밖에 없다. 배가 나오는 것 같다면서 원우가 동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 달 안에 회원비 날리고 그 돈으로 고기나 사먹을 걸 그랬다고 후회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재미가 붙었는지 열심히 다니더니 요즘은 등이나 팔 같은 곳에 자잘하게 근육이 꽤 붙었다. 벗을 때 보면 확실히 티가 나서 쏠쏠하게 눈요기를 하는 건 좋지만, 안 그래도 체격 차이 때문에 힘에서 밀리는 걸 각종 기술로 극복해 오다가 요즘엔 그것도 잘 안 먹혀서 몸이 힘들 때가 많다. 여덟 개나 들어 있는 닭가슴살 팩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바닥에 깔려 있는 것들을 마저 꺼냈다. 좀처럼 집에 둘 일이 없는 것들이 나온다. 햄, 맛살, 우엉, 단무지…?
“이거 왜?”
“김밥 싸려고.”
“갑자기 웬 김밥?”
“꽃구경 하러 가자. 내일 비 온다니까 떨어지기 전에 봐줘야지.”
“출퇴근 할 때마다 맨날 보는 게 벚꽃인데 무슨 꽃구경이야.”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 소파에 드러누웠다. 남은 핫도그를 마저 해치운 원우가 소파 옆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아 왜.”
“진짜 안 가?”
“안 가. 세 시도 넘었는데 그냥 좀 쉬다가 저녁이나 먹자.”
“진짜로?”
“나 귀찮아. 진짜 피곤하다고. 베란다에서 꽃구경 하고 집에서 놀자, 어?”
“여태 잤잖아.”
“더 잘래. 아 씨, 간지러워, 하지 마. 야, 케첩 맛 난다고, 좀!”
내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입술 위에 쪼는 것처럼 잔뜩 키스를 한 원우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티셔츠 속에 손을 넣는다. 간질이는 건지 문지르는 건지 모르겠다. 손가락이 허리를 스칠 때마다 흠칫거리다가 안 되겠어서 얼굴을 꾹꾹 눌러 밀어냈다. 얼굴이 온통 찌그러져서 밀려나던 원우의 손이 바지에 닿았다.
“손 안 떼?”
“집에서 놀자며.”
그리고 단번에 바지를 내리려고 하는 걸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붙들었다.
“잠깐만, 알았어, 꽃구경 가자.”
“됐어, 너 피곤하다며. 집에서 놀자.”
“빨리 가서 김밥 싸. 이러다 해 진다. 어? 빨리.”
실실 웃으며 일어나더니 룰루랄라 주방으로 가는 원우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차라리 밖에 나갔다 오는 게 낫지, 내일이 일요일이라 내가 쉰다는 걸 알고 있는 차원우를 집에서 데리고 논다는 건 꽃구경을 열 번 하는 것보다 힘들 것 같았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대충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원우를 따라나섰다. 내가 툴툴거릴 때마다 그렇게 싫으면 그냥 집에 가서 놀아도 된다고 해서 고개를 저었다. 동네 산책로나 돌아다닐 줄 알았는데 원우는 차까지 끌고 나섰다. 반쯤 포기한 상태로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켰다. 뿅뿅거리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블록을 부수고 있는데 옆에서 원우가 잔뜩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데이트하네. 저번에 심야영화 보고 온 게 마지막이었나? 그게 한 달도 더 된 거 같은데.”
“…요즘 바빴으니까.”
슬그머니 게임을 끄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억지로 끌려 나오기는 했지만 이미 나온 이상 분위기를 잘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날에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서운하게 하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오래 가니까 조심해야 했다.
바깥바람을 쐬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계속 이어지던 야근과 철야에 지친 머리가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시 외곽으로 나와서 강둑을 따라 널찍한 공원까지 달렸다. 도착해서 내리자마자 바람이 불면서 벚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렸다. 입을 벌리고 구경하는 동안 원우는 뒷자리에서 돗자리를 꺼내왔다. 우리처럼 준비한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꽃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딱 두 종류였다. 가족이거나, 커플이거나.
“뭐해?”
“어? 아, 아니.”
“여기쯤 앉으면 되겠다.”
김밥이 든 찬합과 돗자리를 들고 커다란 나무 밑으로 간 원우가 주위를 대충 정리하고 돗자리를 펼쳤다. 그리고는 망설이지도 않고 돗자리 위에 앉아서 손짓을 한다. 이걸 앉아야 돼 말아야 돼, 나랑 원우도 커플은 커플이고 뭐 이쯤 살았으면 가족이기도 한데, 그런데 이게 모양새가 좀….
결국 앉았다. 앉긴 앉았는데 남이 보면 되게 웃길 것 같았다. 삼십대 남자 둘이 후줄근한 차림으로 벚나무 밑에 앉아서 김밥 찬합까지 꺼내놓고 꽃구경 피크닉이라니, 이러다 진귀한 광경이라고 사진이라도 찍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괜히 귀가 빨개지는 것 같았다. 찬합을 열고 김밥을 먹기 시작한 뒤로는 더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낯이 간지럽기도 하고, 괜히 미어캣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주위를 살피기도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도 닦는 사람처럼 멀찌감치 흐르는 강물을 감상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래도 꽃이 예쁘다거나 날씨가 좋다거나 김밥이 맛있다거나 같은 잡담이라도 하면서 앉아있었는데 뻔뻔하던 원우도 슬슬 말이 없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남이 어떻게 볼 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쑥스러워서 못 앉아 있겠다. 그리고 원우도 똑같은 기분이었는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어, 소정아 난데. 민기 집에 있어? 좀 나와라. 여기 너희 집이랑 별로 안 멀어. 삼십 분 정도 걸릴 건데, 어….”
탁월한 선택이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괜히 무릎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끊는 원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원우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변명을 했다.
“야 이거 생각보다 되게 민망하다.”
왜 민망한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엄청 민망했다. 로맨틱한 꽃구경 소풍 같은 것을 기대하고 나왔겠지만 나와서 꽃에 대해 나눈 이야기라고는 꽃이 예쁘다 역시 비주얼은 벚꽃이 최고다 뿐이었다. 공들여 싼 보람도 없이 김밥이 한가득 남은 찬합을 착착 정리하고는 물만 계속 들이키던 원우가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더니 뭔가를 띄워 나를 보여 준다.
“이거 게임 해 봤냐?”
“아니. 뭔데, 그냥 뛰는 거야?”
“장애물 피하는 건데, 여기 이렇게….”
아무래도 정석 데이트 코스는 나에게도 원우에게도 안 어울리는 것 같다.
게임 삼매경에 빠져서 열심히 토론을 하며 스테이지를 깨고 있었다. 앞에 그림자가 생겨서 고개를 들자 허리에 손을 얹은 소정이가 혀를 찼다.
“너희들은 벚꽃나무 밑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도시락까지 까먹어가며 고작 하는 게 그거야?”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괜히 성질이다. 뭐라고 항변을 하려는데 원우가 벌떡 일어났다. 저쪽에서 민기가 안고 오는 콩이를 봤는지 눈이 이미 하트로 변해 있었다. 돗자리에 털썩 앉은 소정이가 잽싸게 신발을 신고 달려 나가는 원우의 뒷모습과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왜?”
“차원우 아이디어인 건 알겠는데 넌 웬일로 장단 맞춰주고 있어?”
“왜, 나도 이런 거 좋아해.”
“허이고, 네가 참도.”
“가끔 바람도 쐬고 그러는 거지, 무슨 장단까지.”
꽃구경을 나오지 않았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민기 주위를 빙빙 돌며 안겨 있는 콩이와 장난을 치는 원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했지만 표정만큼은 로또 일등 당첨된 얼굴이다. 이럴 거면 꽃구경이고 나발이고 그냥 소정이네 식구 불러다 집에서 밥이나 먹을 걸 그랬다.
“나야 좋지만. 이렇게 자리 잡고 꽃구경 하는 거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왜, 콩이 때문에?”
“애 키우면서는 생각도 안 해 봤고,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바로 입사시험 준비하고, 취업하고 나서는 좀 한가해져서 벚꽃축제라도 갈까 싶으면 이상하게 비가 오더라고. 그래도 학교에서는 벚꽃 꽤 봤나?”
“그럭저럭 있었지. 도서관 뒤랑, 법대 근처랑. 미대 건물 뒤에도 있었던 거 같은데.”
“아, 맞다, 너희 미대 건물 뒤에서 사진 찍었지?”
“…그 사진 말도 하지 마.”
“너희 집 거실에 걸려 있는 그거.”
“내가 그거 떼겠다고 온갖 잔소리를 다 해도 차원우가…!”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민망해져서 괜히 파르륵 성질을 내려다가 조그마한 형체가 돗자리 위로 올라와서 소정이에게 덥석 안기는 바람에 입을 딱 다물었다. 아무리 민망해도 애 앞에서 욕은 못하겠다.
“주아야, 원우삼촌한테 가봐. 우와, 삼촌이 너 비행기 태워준대. 진짜 재미있겠다, 그치?”
오랜만의 휴식을 놓치기 싫었는지 소정이는 재빨리 원우에게 아이를 떠맡기고는 찬합을 열어 남은 김밥을 주섬주섬 입에 넣는다. 평소에는 애 보느라 밥도 편하게 못 먹었을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는데 기어이 태연한 얼굴로 내 낯짝에 불을 지른다.
“근데 왜 거실 사진 왜 그걸로 걸었어? 뽀뽀하는 거 걸지. 그게 베스트 컷인데. 태어나서 내가 찍어본 사진 중에 그걸 제일 잘 찍었거든.”
“죽는다 진짜.”
…어려서 그랬다, 어려서. 지금은 시켜도 못할 짓이다.
***
과에 사진을 같이 찍을 정도로 친한 사람도 별로 없고, 쓸 일도 없는 비싼 앨범을 굳이 돈 들여가며 사고 싶지 않아서 졸업앨범 사진은 당연히 찍지 않을 생각이었다. 은율이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과별로 찍는 졸업앨범 촬영 날이 같은 날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소정이는 나와 은율이를 노렸다. 단순한 강민기는 이미 넘어간 지 오래였으니 남은 건 우리 둘이었다. 은율이는 둘째 치고 나는 같은 과도 아닌데 도대체 왜 자꾸 찍으라고 그러는 거냐고 항의를 했더니 자기 딴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며 설명을 한다.
“이 사진 가지고 입사원서 쓸 때 증명사진으로 써도 되잖아. 나중에 어차피 찍을 거면 그냥 이번에 전문가한테 맡겨서 찍으면 되는 거고, 안 그래?”
“그러니까 나중에 증명사진 찍을 때 찍더라도 앨범은 안 찍고 싶다고. 하루 종일 여기저기 끌려 다녀야 되는데 귀찮고….”
“나중에 찍을 땐 안 귀찮을 것 같고?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요즘은 남자들도 입사원서 사진 찍을 때 다 메이크업하고 머리 따로 하고 찍는다니까. 그리고 따로 찍으면 사진 이렇게 많이 뽑아주지도 않아. 두고두고 쓴다고 생각하면 이게 훨씬 이득이야.”
그런가…? 하도 말을 잘하니까 슬슬 설득당할 것 같았다. 차라리 나 말고 은율이한테 거절을 하게 시키고, 은율이가 안 찍으니까 나도 안 찍는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자기 일 아니라고 카페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커피를 마시고 있던 은율이 앞에 소정이가 은율이 몫의 신청서를 쓱 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은율이가 말했다.
“난 안 찍어.”
“진짜 안 찍어?”
“어.”
“진짜 너무하네.”
“뭐가 너무해, 괜히 돈 들이고 짐만 되는 앨범 사지도 않을 거고 학사모는 졸업식에서 쓰면….”
“난 그래도… 너랑 진짜 같이 찍고 싶어서 얘기하는 건데….”
소정이가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나는 움찔했다. 일부러 약한 척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은율이는 낚이지 않았다.
“한소정, 연기하지 말고 포기해라. 난 안 찍는다니까.”
“난 고등학교 자퇴해서 졸업 사진도 못 찍어서, 이거라도 친구들이랑 같이 찍고 집에 자랑하고 싶었는데….”
목소리 끝이 떨린다. 뭐야, 진짜인가? 아닌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살펴봤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 은율이가 초조하게 빨대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네가 정 그렇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찍지 말아야지. 그렇게 나랑 찍는 게 싫다는데…. 하긴 나 같아도 이렇게 귀찮게 하면 찍고 싶다가도 찍기 싫어질 것 같은데….”
“…….”
“그럼 나 수업 있어서 갈게…. 나중에 보자.”
소정이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은율이와 소정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씹던 빨대를 뱉어내고 은율이가 소정이 쪽으로 손을 뻗는다.
“주고 가.”
“뭘?”
“신청서.”
낚이지 않기는 개뿔이.
“그럼 원우 너도 찍는 거지?”
눈빛으로 항의를 했지만 먹히지 않는다. 나한테까지 신청서를 떠넘긴 소정이가 언제 울먹였냐는 듯이 원피스를 신나게 나풀거리며 카페를 나간다. 원망의 대상을 은율이로 바꿨다.
“나까지 끌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냐?”
“내가 끌고 들어갔냐, 네가 끌려 들어간 거지.”
“네가 먼저 들어갔으니까 내가 끌려 들어간 거 아냐.”
“아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볼펜 좀 빌려달라고.”
이름과 연락처를 쓰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교재비 메우느라 생활비도 허리띠 잔뜩 졸라매고 아껴 쓰고 있었는데 목돈 나가게 생겼다. 앨범은 사지 말고 증명사진만 뽑을까…. 가격을 보면서 진지한 고민을 하다가 은율이의 신청서를 언뜻 봤는데 앨범부터 액자까지 전부 체크가 되어 있었다.
“다 사려고? 짐만 된다더니.”
“…집에 보내려고.”
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다. 증명사진 외에 항목들이 텅 비어 있는 내 신청서를 내려다보다가 하나씩 체크를 했다.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에는 포기가 되지 않는다. 전화와 문자는 오래 전부터 무시당하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지난달 집에 보낸 편지는 일부러 등기로 보내서 집에 도착한 것까지 확인했지만 이번에도 회신을 받지 못했다. 신청서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은율이가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나 슬슬 학교 들어가야겠다.”
“뭐 안 먹고 가도 돼?”
“수업 끝나고 대충 사먹지 뭐.”
“나 알바 끝날 때 나올래? 밤에 포장마차 가서 뭐 좀 먹을까?”
“긴축재정 해야지, 인마.”
포장마차에서 야식 먹는 게 돈이 많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돈 생각해가며 거절할 일은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그러는 것 같다. 눈치껏 맞춰주기로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은율이 짐을 나눠 들고 카페를 나섰다. 날씨는 또 기가 막히게 좋다. 그래봤자 좋은 날씨 즐길 시간도 없지만.
“너 일 끝나기 전에 장 좀 봐올 수 있어? 집에 먹을 거 하나도 없던데.”
“이모들 정산시간 전에 잠깐 돌면 돼.”
“알았어. 간다, 이따 밤에 봐.”
손을 휘휘 흔들고 걸어가는 은율이의 뒤에서 물끄러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덤덤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어깨가 축 쳐져 있다. 핸드폰 화면을 켜고 문자를 보냈다.
[기운 좀 내라 어깨 좀 펴고]
걸어가던 은율이가 멈칫하더니 핸드폰을 꺼내는 게 보였다. 뭔가 쓰고 있는지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걸어간다. 내 핸드폰에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
[ㅇㅇ]
평소였다면 난 기운 넘치니까 네 걱정이나 하라고 한 소리를 했을 법도 한데 오늘은 얌전하다. 저 정도면 온종일 입에 아무 것도 안 댈 것 같은 분위기다. 소정이에게 수업 끝나고 편의점 샌드위치라도 사서 은율이한테 물려주라고 문자로 부탁해놓고 돌아섰다. 내가 챙겼으면 좋겠지만 여기서 더 꾸물거리다가는 근무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한참 은율이와 서로 간 보던 때는 시험기간이라 바쁠 때에도 꼬박꼬박 학교에서 꽃구경을 핑계로 산책이라도 했는데 이제 그럴 시간도 없었다. 오늘은 그나마 은율이의 공강 시간에 내 수업 하나가 휴강이 된 덕분에 커피라도 마셨지만, 평상시에는 아침에 같이 학교에 갈 때가 아니면 얼굴도 못 보는 날이 많다. 죽어라고 벌어서 지옥 같은 옥탑방을 탈출하고, 발품을 팔아가며 학교 근처의 싼 원룸을 찾아 집을 옮기고 나니까 다시 모든 게 원점이다. 아니, 대출받은 등록금 빚을 떠안고 있으니까 마이너스인 건가. 버스 창문에 기대어 멍하니 밖을 보다가 어제 밤에 은율이가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에 들어갔는데 은율이는 잠도 안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보고 자려고 기다렸냐고 좋아했는데 심각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한참 뜸을 들여서 정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
- 영어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이야기한 게 너무 별 게 아니어서 약간 당황했었다. 나더러 영어 공부를 하라는 건가? 내가 영어를 못해서? 하기는 할 건데, 아니면 어디서 영어 못한다고 구박을 받았나…. 의미 파악이 안 되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더니 은율이는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 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 신청하고 싶었는데 너무 늦게 봐서 못했어. 그게 확실히 싸긴 한데…. 어쨌든 졸업하고 바로 취업 준비 하려면 영어 성적은 꼭 있어야 되는데 나도 영어 성적 없고 너도 없잖아.
- 응.
- 내 말은, 그거 준비하려면 돈 많이 든다고. 학원 안 다니고 혼자 공부하더라도 교재도 사야 되고 시험 신청비도 만만치 않으니까.
그제야 은율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어어,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당장 생활비를 벌고 월세를 내기 바빠서 졸업한 다음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 네가 먼저 할래?
- 어?
- 둘이 같이는 못해.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하면 도서관 왔다 갔다 하느라 아르바이트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누구 하나 빨리 취업을 해야 그래도 좀 여유가 생길 거 아냐. 나보다는 그래도 네가 취업하기는 더 낫지 않냐? 과가 일단 먹어주니까.
- 그것도 옛날 말이지. 요즘은 다 똑같아.
- 어느 쪽으로 준비할 건지는 생각했어?
- 글쎄… 너는?
- 난 일단 광고 쪽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도 요즘 어려워서.
대화를 하고는 있는데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은율이는 이런 것까지 계획을 하고 있었구나. 물론 은율이가 원래도 꼼꼼한 성격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새삼 놀라고 있었다. 막연히 졸업반이니까 빨리 직장을 잡고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와는 확실히 달랐다. 뭔가 한참 설명을 하다가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았는지 은율이가 손가락을 딱 하고 부딪혀 소리를 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다시 쳐다봤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 중요한 얘기하고 있는데 뭐냐 지금? 졸아?
-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사실 딱히 생각한 게 없어서….
- 그럼 나부터 해?
- 난 상관없으니까 너 편한 대로 해.
-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보다는 네가 계획이 더 확실하니까 그렇지. 아르바이트는 내가 더 늘려서 해도 되니까 그럼 과외 그만두고 공부부터 해. 학원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그래도 처음 시작할 땐 누가 알려주는 게 좋잖아.
- …….
- 왜?
갑자기 말을 안 하고 가만히 보기만 해서 내가 뭔가 잘못 말한 줄 알고 쫄았다. 한참 나를 보고 있던 은율이가 고개를 숙인다. 왜 저러지? 슬금슬금 가드를 올릴 준비를 했다. 입술까지 깨무는 걸 보면 화가 났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표정을 살피려는데 갑자기 얼굴을 확 드는 바람에 움찔했다.
- 알았어.
- …내가 뭐 잘못했냐?
- 아니.
- 화난 거 아니지…?
- 아니야.
- 어어.
- 잠이나 자자. 피곤하다.
- 어? 어.
그러고선 부리나케 불을 끄고 누워버려서 분위기 파악을 미처 하지도 못했다. 오늘 아침이 평소와 같았던 걸 보면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제의 상태와 아까 기운 없어 보였던 걸 생각하면 뭔가 이상하기는 하다. 그리고 그걸 알아챌 수 있으면 차원우가 아니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말을 해 주겠거니 하고 일단은 밀어두었다. 당장은 일을 해야 하니까.
학교 근처 원룸으로 집을 옮기면서 버스로 삼십 분 거리의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종점과 가까워서 막차가 늦게까지 다니는 곳이라 야간 근무를 해도 택시가 필요 없는 곳이었고 일하는 시간에 비하면 그럭저럭 월급도 괜찮았다. 정장에 구두까지 갖추고 몇 시간을 서 있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오래 서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으니까 할만 했다. 다만 폐점하고 나서 물건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는 게 힘들었다. 서 있을 때는 몰랐던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오고 팔과 허리에 묵직한 추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몸이 늘어졌다. 그래도 정리를 도와주면 야간수당이 따로 나오니까 빠질 수는 없었다.
환불을 하겠다는 손님을 데스크로 안내해 주고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가 전화를 받았다. 내일 내야 하는 과제에 대해 물어보는 민기의 전화였다. 일하는 중이라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 끊으려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너도 영어점수 해놨냐?”
- 어, 올 초에. 졸업 전에 원서는 넣어봐야 하니까 스피킹이랑 묶어서 대충.
“그거 학원으로 가는 게 그래도 점수가 빨리 나오나?”
-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보통 그렇지 않나? 난 혼자 독학 삼 개월 하다가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서 학원으로 가긴 했어. 이게 실력이 아니라 기술이라, 학원에서 알려주는 모범답안만 달달 외웠는데도 엔간히 나오더라고.
“아… 알았어.”
- 왜, 너 영어 준비하게? 시간 되겠어?
“시간이 문제가 아니지.”
공부는 어떻게든 짬을 내서 하면 되지만 돈은 짬을 낼 수가 없다. 잠깐 조용하던 민기가 말했다.
- 요즘엔 인강으로도 많이 하더라. 시간만 제대로 투자할 수 있으면 인강도 괜찮다던데. 난 안 해 봤지만.
“어, 고맙다.”
- 나 보카 교재 사두고 안 쓰는 거 하나 있는데 내일 줄까?
“괜찮아. 내가 할 거 아니라서.”
- 은율이? 그럼 은율이한테 갖다 줘.
“됐어, 그냥 사서 하면 돼.”
- 이거 새 거야, 짜샤. 내가 이런 말하기 좀 쪽팔리지만 펼치지도 않은 건데.
“은율이 성격 알잖냐. 봐서 지 공부 스타일이랑 안 맞겠다 싶으면 그냥 갖다 버리라고 그럴걸.”
- 하긴 그 새끼 까탈 받아주려면 차라리 그냥 사는 게 낫긴 해.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괜한 자존심이고 객기였다. 민기에게 교재를 받고 그 돈이라도 아껴서 하다못해 고기 한 점 더 사먹는 게 낫긴 하지만, 친구가 사놓고 쓰지도 않은 교재를 얻어다가 공부하라고 은율이에게 건네주는 건 하기가 싫었다. 영어공부 해야 될 것 같다는 말도 그렇게 어렵게 꺼낸 녀석에게 그런 식으로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퍼뜩 깨달았다. 어젯밤 은율이의 그 표정은 그래서였나 보다.
눈치 없는 내가 모르는 어떤 것 때문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화가 나긴 난 건지도 모른다. 남들 다 하는 영어공부 한다는데 생활비에 밥값 걱정해가며 나와 상의를 해야 하는 것 자체가 속이 상하는 일이었을 거다. 터덜터덜 밖으로 나오다가 안내를 부탁하는 손님에게 웃어 보이면서도 마음이 답답해서 자꾸만 얼굴이 굳어졌다. 안정되고 넉넉한 생활, 좋은 직장, 여유 있는 경제 사정 같은 건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한 가지였다. 은율이가 나와 있는 시간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겨우 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휴게실에 들어왔을 때였다. 옆에서 물류 담당 직원 형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언뜻 듣고 다가갔다. 일당 세다 그래서 신청했는데 좆된 것 같다, 일당으로 당일 계산해 준다길래 내키면 바로 그만둘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계약기간 못 채우면 야간수당도 안 준다는데 짜증난다, 돈 안 줘도 되니까 딱 일주일만 쉬었으면 좋겠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였다.
“형 그거 물류센터죠.”
“어? 어.”
“그거 일당 얼마 줘요?”
“야간인데 칠만 원.”
“제가 하면 안 돼요?”
“네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직원 형의 눈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너 학교 다니지 않냐? 이거 새벽 여섯 시에 끝나는 건데.”
“잠깐 자고 가면 돼요.”
“여기 근무도 해야 되잖아.”
그걸 미처 생각을 못했다. 왠지 잘될 것 같아서 들떠 있었는데 일 초 만에 우울해졌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직원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럼 원우 쉬는 날만 원우가 대신 하면 되겠네. 네가 그날 쉬면 되잖아.”
“야, 나도 사람인데 양심이 있지, 애 쉬는 날 그걸 어떻게 시키냐?”
범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양심 같은 건 필요 없다.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래도 되면 제가 할게요.”
“좀 생각해 보고 얘기해, 이거 진짜 지옥이라니까.”
“택배 상하차도 잠깐 했었어요. 괜찮습니다.”
“이거 참,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한데….”
나는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찬 밥 더운 밥 가리는 건 밥이 있을 때나 하는 일이다.
은율이가 싫어할 거라는 건 당연히 예상했다. 상황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니, 벌써 하기로 했고 그쪽 담당자한테 연락도 해놓았다고 하니까 지옥의 문지기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물류센터 일이 지옥이라는데 미리 예방주사 맞은 셈 치고 등짝 한 대로 협상을 끝냈다. 강의가 끝나고 과제를 붙들고 씨름을 하다가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집에서 출발했다. 도착하고 나니까 왜 지옥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택배 일을 안 해 봤으면 조용히 뒤로 돌아서 나간 다음 직원 형에게 정말 미안한데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둘러댔을 거다.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물건의 대다수가 엄청나게 부피가 큰 상자들이었다. 레일을 타고 들어가는 상자의 껍데기만 봐도 저절로 이를 악물게 되었다.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한 달에 여덟 번이면 오십육만 원이다. 직원 형한테 고맙다고 밥 한 번 거하게 사더라도 오십 만원이 넘는다. 딱 여덟 번만 죽었다 생각하고 일하면 학원비 가지고 은율이가 자존심 상해 하는 거 안 봐도 된다. 난 이제부터 물건 나르는 기계다.
당연히 그깟 마인드 컨트롤로 극복이 되는 업무 강도가 아니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벌써 어디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온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뻐근한 팔을 몇 번 돌리면서 묵묵히 상자를 옮겼다. 상자 위에 엎어져서 레일에 실려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냥 드러눕고 싶었다가 돈을 받고 나니까 그래도 집에 갈 힘은 생겼다.
첫 차를 타고 집에 오는 동안 지하철에서 몸도 못 가누고 잠을 잤다. 원룸으로 겨우 기어 들어와서 씻지도 못하고 매트리스 위에 엎어졌다.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깼는지 뒤척이고 있던 은율이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눕고는 길게 한숨을 쉰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웃지 마, 새끼야….”
“왜, 너 보니까 살 것 같아서 웃는 건데.”
“…미련한 새끼는 약도 없어.”
“약이 왜 없냐, 여기 있지.”
후들거리는 팔을 겨우 들어서 은율이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평소엔 먹히지도 않을 수작이지만 이럴 때는 안 먹힌 적이 없다. 역시 은율이는 거절하지 않고 꿈틀꿈틀 움직여서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 위에 도장이라도 찍는 것처럼 자기 입술을 꾹 누르더니 그대로 중얼거린다.
“짜….”
웃으면서 몇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대답했다.
“미안, 내가 간고등어 취향이라.”
“…잠이나 자.”
말 안 해도 자려고 했다. 기절하는 것처럼 잠들면서 생각했다. 섹스 할 때 개고생을 시키고 막판에 기절하기 직전에 잠들면 은율이가 이런 기분으로 자겠구나. 정말 딱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손에 쥐는 게 있으니까 뿌듯하긴 했다. 첫날 받아온 돈으로 영어 교재를 사다 주었다. 두 번째로 일을 하러 가서 받아온 돈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소고기를 사 먹었다. 그리고 내 월급날에 맞춰 은율이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오래 걸리는 아르바이트도 아니고 그냥 해도 된다고 우겨서 잠깐 입씨름을 하기는 했지만 차라리 그 시간에 인터넷 강의라도 하나 더 들어서 빨리 점수를 올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내 말에 은율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졸업앨범을 찍는 날 바로 직전까지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고, 집에 와서 깊이 자다가 하마터면 시간에 못 맞출 뻔했다. 아침 일찍 나간 은율이가 전화를 스무 통도 넘게 한 것을 뒤늦게 보고 벌떡 일어나자마자 끄억, 하고 이상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어제 사과 상자를 옮기다가 찍힌 무릎에 거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어차피 무릎 보이고 찍을 것도 아니니까 괜찮겠지. 대충 준비를 하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과별로 모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 웬일로 다른 과인 소정이가 와 있었다. 민기를 앉혀 놓고 머리를 살펴가며 스타일링을 하고 있길래 예쁜 사랑 하시라고 휘파람을 불면서 박수를 치다가 화장품 케이스에 이마가 찍힐 뻔했다. 정돈이 끝난 민기를 치워 놓고 소정이가 나를 끌어다가 벤치에 앉혔다.
“내가 너 이 꼴로 나올 줄 알았다. 이리 와.”
“그렇게 못 봐줄 정도는 아니잖아.”
“등빨이랑 키가 있으니까 봐주고 있는 거지 그거 아니었으면 내다 버렸어.”
그 부분은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얌전히 얼굴을 내맡긴 채로 잠깐 가만히 있는데도 잠이 쏟아진다. 꾸벅꾸벅 졸다가 다 됐다는 말을 듣고 눈을 떴다. 언제 왔는지 은율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 와중에 잠을 자? 노숙하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목소리와 표정은 걱정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헤벌쭉 웃었다.
“뭐 좋다고 웃어?”
“네가 예뻐서.”
옷이 날개인 건지 원래 예쁜 건지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딱 떨어지는 깔끔한 정장에 머리까지 손을 본 은율이는 진짜로 엄청 예뻤다. 엊그제 정장을 사러 갔을 때 적당히 하나만 골라서 사이즈만 맞춰 입어보고 끝내자던 은율이를 설득한 보람이 있다.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게 시켜놓고 웨딩드레스를 하나씩 입고 나오는 신부를 보는 기분으로 할인매장에서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가 여덟 번째 정장으로 갈아입은 은율이의 니킥에 맞았다. 뭘 입고 나와도 다 예쁜데 어떻게 고르라는 거냐고 항변을 했다가 정강이를 까였고. 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비주얼이 폭발하는 걸 보니까 니킥도 정강이킥도 다 참을 수 있었다.
“밖에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 말도 더럽게 안 듣는다, 진짜.”
“아으악!”
보는 눈이 많으니 때리지는 못하고 앉아 있는 내 무릎을 은율이가 자기 무릎으로 꽉 눌렀다. 그런 말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가벼운 농담 치고는 대가가 너무 혹독했다. 이건 못 참겠다. 저절로 비명이 터졌다. 눈물까지 찔끔 날 것 같았다. 무릎을 붙들고 주저앉아서 몸부림을 치는 나를 보고 나머지 세 사람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소정이와 민기가 중얼거렸다.
“기어이 애를 골로 보내는구나.”
“이거 뭐 필살기냐? 차원우 왜 저래?”
“그, 그렇게 아프게 안 했는데….”
그 중에 제일 당황한 건 은율이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고개도 못 드는 내 앞에 앉은 은율이가 무릎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린다. 아직도 엄청나게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은율이가 그러고 있으니까 괜히 더 울컥했다. 손을 밀어내고 무릎을 마구 문질렀다. 은율이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내 팔을 붙들어서 나를 일으켰다.
도서관 화장실로 나를 끌고 온 은율이가 다짜고짜 화장실 칸 안에 나를 밀어 넣고 바지를 내리려고 해서 식겁하면서 허리춤을 붙들었다. 분위기 파악을 조금만 덜 했어도 공공장소 플레이는 취향이 아니라고 농담을 했겠지만 하도 심각해서 이제는 오히려 내가 쫄고 있었다. 몇 마디만 건네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은율이가 고갯짓을 했다.
“벗어봐. 무릎 좀 보게.”
“괜, 괜찮은데.”
“빨리. 시간 없어.”
엉거주춤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다. 아침에 발견했을 때보다도 더 시퍼렇고 큰 멍이 올라와 있다. 내가 봐도 흉할 정도였다. 무릎을 한참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설명을 하라는 듯이 빤히 눈을 맞추길래 주절주절 변명을 했다.
“어제 뭐 옮기다가 찍혔나봐. 별로 안 아파. 멍만 큰 거니까….”
“별로 안 아픈 새끼가 아까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렸냐?”
“그땐 아팠으니까 그렇지.”
지가 찍어놓고 적반하장이다. 울컥해서 투덜거렸다가 곧 후회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 초만 더 이러고 있어도 진짜로 울 것 같다. 얼른 바지부터 올려 입었다.
“애들 기다린다. 나가자.”
“…….”
“진짜 괜찮아. 농담 아니라 진짜로.”
“…오늘 알바 하러 가?”
“가야지.”
“…알았어.”
그리고는 먼저 휙 나가 버린다. 허겁지겁 셔츠와 바지를 정돈하고 바쁘게 쫓아가봤지만 이미 소정이와 저만치 가고 있다. 그냥 좀 참을 걸 그랬나. 어지간해서는 참겠는데 도저히 못 참겠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
“쟤 울었냐?”
덩달아 눈치를 보고 있던 민기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울… 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표정 안 좋았지?”
“무서울 정도던데.”
역시 혀라도 깨물어서 참았어야 했나 보다.
졸업앨범을 찍는 내내 은율이 표정이 생각나서 영 찜찜했다. 스튜디오 촬영을 할 때는 사진사 아저씨가 집안에 우환 있는 사람도 아니고 표정 좀 풀어보라고 훈수를 둘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우환이 있기는 있는 거라 좀처럼 웃는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마트 아르바이트 할 때처럼 고객님 상대한다고 생각하고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으로 겨우 촬영을 마치고 나왔다. 먼저 끝내고 기다리고 있던 민기가 저만치서 손짓을 했다. 졸업앨범 촬영을 하는 걸 뻔히 알 테니까 오후 수업은 자체 휴강하기로 했다. 미대 건물 근처에서 신방과 졸업앨범 막바지 촬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소에는 올 일도 없는 곳이고 미대생들도 잘 안 다니는 인적이 드문 뒤쪽 길은 온통 푸른색 나무 그늘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앞쪽에 볕이 잘 드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곧 단체 사진을 찍는지 줄을 맞춰 선다.
죄다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데도 눈에는 은율이만 보였다. 하얗고 말끔한 얼굴이 어두운 색 정장 때문에 더 돋보였다. 소정이가 공을 들였는지 예쁘게 모양이 잡힌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질 때마다 점점 내 입이 벌어지는 게 나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옆에서 찰칵 소리가 나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핸드폰으로 열심히 소정이를 찍고 있던 민기가 머쓱했는지 내 옆구리를 툭 친다.
“넌 안 찍냐?”
“어? 어어. 찍어야지.”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멀리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한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방과를 갈 걸 그랬다.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전공 선택을 후회하며 허접한 사진이라도 열심히 남기고 있을 때 사람들이 잠깐 모였다가 곧 흩어지기 시작했다. 촬영이 끝난 것 같았다. 잘 입지 않는 정장이 불편했는지 목을 쭉 뻗고 넥타이를 푸는 은율이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곧게 드러난 목선이 엄청나게 섹시해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셔츠 제일 위의 단추까지 풀어버린 은율이가 나와 민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내 손에 야광봉 좀 쥐어줬으면 좋겠다. 만 번쯤 흔들 수 있을 것 같다.
“침 흐르겠다, 새끼야.”
“야 진짜 인간적으로 존나 예쁘지 않냐? 와 씨 죽겠네 진짜.”
“취향이니 존중은 해 주겠다만 은율이한테 무릎 필살기 또 당하기 전에 조용히 하는 게 좋을 텐데.”
민기의 충고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곧 은율이 뒤쪽에서 소정이가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들고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나한테 말은 그렇게 해도 민기 역시 소정이를 보면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마음껏 헤실거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저기 건물 뒤 그늘에 벚꽃 아직 덜 진 데 있더라. 가서 사진 찍자.”
“무슨 사진을 또 찍어, 여태 찍었는데.”
언행불일치를 몸소 보여 주려는지 민기는 말만 그렇게 하고 소정이의 카메라 가방을 받아들고 뒤를 따라간다.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서더니 기어이 소정이의 손을 잡고 신난다고 날아가듯 걷는 민기를 보면서 낄낄 웃고 있을 때 은율이가 옆으로 가까이 왔다. 손을 내밀었더니 못 본 척 한다. 당연히 안 잡을 거다. 밖에서 이렇게 들이대는 것을 싫어하는 걸 뻔히 아니까 별로 서운하진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날씨 진짜 좋다, 하고 혼잣말을 하는데 갑자기 허리에 팔이 감겼다. 언제 뒤로 갔는지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뒤에서 온 힘을 다해 한 번 세게 껴안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옆으로 온다. 멍청하게 서 있다가 웃음이 터졌다. 아까부터 쿵쾅거리던 심장이 더 가쁘게 뛰었다.
담벼락 위에 카메라를 받쳐 놓고 타이머를 맞춰서 넷이 같이 사진도 찍고, 때 빼고 광 낸 모습을 꼭 남겨둬야 한다는 소정이의 말에 어색하지만 독사진도 찍었다. 소정이와 민기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말도 안 되는 포즈를 취해가며 코믹 사진을 잔뜩 찍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색을 하고는 웨딩촬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벚나무 아래에서 온갖 오그라드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참 쿵짝이 잘 맞는 커플이다. 아침에 내 무릎 때문에 심란해 보였던 은율이도 두 사람한테는 당해 낼 재간이 없는지 아까부터 내내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찍사 노릇도 지쳤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 좀 하고 가자고 열 번쯤 말하고 나서야 두 사람이 만족한 듯 내 쪽으로 왔다. 카메라를 받아든 소정이가 내 등을 떠밀었다.
“너희도 빨리 가서 앉아봐. 찍어줄게.”
“우린 됐어.”
“빨리. 강의 끝나면 담배 피우는 사람들 이쪽으로 내려온다고.”
“됐다니까.”
“거 참 밀어줄 때 못이기는 척도 좀 하고 그래라.”
이번에는 민기가 내 엉덩이를 걷어찰 기세로 덤벼들었다. 피한다고 앞으로 갔다가 졸지에 벚나무 아래에 서게 되었다. 눈치를 보고 있는 은율이 뒤에서 소정이가 등을 확 떠밀었다. 엉겁결에 앞으로 몇 발자국을 나온 은율이가 어색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 걸어온다. 괜히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거기 화단에 앉아봐.”
“대충 찍어. 뭘 앉아, 앉기는.”
“아 진짜,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게 더 빨리 끝나지 않겠냐고, 어? 말 좀 들어라 제발.”
그리고 소정이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화단은 창문에서 내려다봐도 안 보인단 말야.
평소에는 낯 뜨거운 소리도 잘만 하는데 이런 분위기는 이상하게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내킬 때면 나까지 부끄러워지는 소리도 하는 은율이도 지금은 내 눈도 못 쳐다보고 있었다. 화단에 나란히 앉아서 멀뚱멀뚱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었더니 소정이가 허리에 손을 짚은 채로 한숨을 쉰다. 천년만년 그러고 있어보라면서 짜증을 내길래 그냥 적당히 찍고 가자고 하려는데 손등 위에 따뜻한 체온이 덮였다. 고개를 푹 숙인 은율이가 내 손을 슬쩍 잡고 있었다. 분위기만 보면 전문 포토그래퍼가 따로 없는 소정이가 차마 소리를 지르면 누가 내려다볼까봐 말도 못하고 바디 랭귀지로 열심히 의사전달을 한다. 바짝 붙어 앉지 않으면 몸을 반으로 쪼개버리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은율이가 손을 잡아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가까이 갔다. 깍지를 껴서 손을 꽉 잡자 은율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셔터 누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거 왜 이렇게 민망하냐.”
“몰라.”
“너 지금 얼굴 터질 것 같은데.”
“넌 인간 토마토 됐어.”
똑같이 빨개진 얼굴을 하고 마주보고 있다가 웃어버렸다. 신이 나서 사진을 찍던 소정이가 여태 찍은 사진을 확인하더니 딱 한 장만 더 찍겠다면서 제대로 좀 해 보라고 손짓발짓을 한다. 뭘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거지, 감이 안 잡혀서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원우야.”
“어?”
고개를 돌렸을 때 은율이의 얼굴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살짝 젖은 소리가 나면서 입술이 부딪혔다가 금방 떨어졌다. 일, 이, 삼, 딱 삼 초가 지나고 나니 얼굴이 아니라 몸이 통째로 터질 것 같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지경이다. 벌떡 일어난 은율이가 머리를 마구 헝클면서 잰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진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화단에 앉아 허허 웃었다.
마트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소정이의 문자를 받았다. 메일로 사진을 보냈으니까 귀찮더라도 꼭 오늘 확인하라는 명령 같은 문자였다. 귀찮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오늘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불이 꺼진 방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스피커 전원까지 확실히 내린 다음 컴퓨터를 켰다. 부팅이 되는 동안 뒤를 돌아보았다. 하루 종일 사진 촬영을 한 게 피곤했는지 은율이는 뒤척일 만도 한데 미동도 없다. 오늘따라 별것도 아닌 것에 가슴이 너무 뛴다. 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살짝 비춰 보이는 속눈썹과 입술을 홀린 것처럼 보고 있다가 화면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고 겨우 시선을 돌렸다.
메일의 용량이 꽤 큰 걸 보면 원본 사진을 보낸 것 같았다. 사진 파일부터 바로 열어보려다가 메일에 뭔가가 가득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원래는 크게 인화를 해서 주고 싶었지만 여러모로 위험하니까 그냥 파일만 보낸다면서, 부끄럽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기 때문에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어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가끔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발랄하고 명랑해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지만 사실 소정이의 본모습은 이런 거였다. 처음 은율이에게 자기 상처를 털어놓았을 때도 소정이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집에 사진 보내드려. 너희 정말 예쁘게 잘 나왔어.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야.]
이러려고 그렇게 졸업앨범을 찍자고 난리를 친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한소정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깊이가 이렇게나 깊기 때문에 웃음 뒤에 감추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나도 은율이도 묻지 않았다. 그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사진 파일을 열었다. 카메라 가방이 유독 크더라니 진짜 좋은 카메라이긴 한가 보다. 흐드러진 벚꽃을 배경으로 은율이와 내가 앉아 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가 은율이가 먼저 내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가 앉고, 입을 맞추는 것까지 몇 번을 반복해서 감상했다. 마주보고 웃고 있는 사진을 핸드폰에 옮겨두고 컴퓨터를 껐다. 비어 있는 매트리스 한 쪽을 차지하고 누울 때까지 옆으로 누워 있던 은율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서 내가 허리를 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을 때 낮에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내 손등을 덮고 손을 잡는다. 자는 것으로 착각한 건 처음 잠깐 뿐이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올 때마다 은율이는 아주 잠깐이라도 눈을 떠서 꼭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잠들었다. 한 번도 빠짐없이.
“아… 어떡하지.”
귓가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입을 맞추며 한숨처럼 내뱉은 말에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은율이가 되묻는다.
“…뭐가.”
자극이 되지 않도록 귓불을 살짝 입술로 문지르면서 속삭였다.
“매일 설레니까 감당이 안 되네.”
손등을 덮고 있던 은율이의 손이 내 손가락을 하나씩 찾아 쥐고는 곧 단단히 깍지를 껴서 잡는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한껏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충족감이 가득 차올랐다.
은율이의 영어학원비를 내고 나니까 생활비 통장이 텅텅 비었다. 그래도 학원비를 내기까지 정말 힘겨운 싸움을 벌여서인지 오히려 비어 있는 통장을 보니 좀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든 독학으로 해 보겠다고 하도 우겨서 화를 낼 뻔했다. 다른 부가적인 문제들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공부만 했으면 좋겠어서 일을 늘려 하고 있는 건데, 내가 뭐라고 설득을 해도 학원 안 가고 독학으로 해도 되니까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말만 해서 답답했다. 이런 걸로 부딪히면 돈 문제가 걸리고 미안한 마음이 겹쳐져서 일이 커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작 답답하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하고 있는 거니까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야 되지 않겠냐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까봐 담배를 피우겠다는 핑계로 도망쳤다. 다시 들어갔을 때 은율이는 성질을 내는 대신 뭔가 고민하는 것 같았고, 다음날 마트에서 일을 하던 중에 학원 수강료 결제 문자를 받았다. 딱 한 달만 다닐 거라는 문자가 뒤이어 도착해서 알았다고 대답을 하며 나도 한 발 물러섰다.
사실 한 달 다니고 나서 더 다니겠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진지하게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아보거나 아니면 차라리 졸업식 끝나고 다니는 게 어떠냐고 물어봐야 할 참이었다. 마트 직원 형은 내가 대타를 뛰어주는 게 쏠쏠했는지 몇 번 시켜본 이후로는 내가 쉬는 날을 본인이 체크하고 일을 하러 가줄 수 있냐고 물어보곤 했다. 시작할 때는 힘든 걸 따질 여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당연히 알았다고 했지만,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고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는 몸이 휴식을 필요로 하는 걸 너무 간과한 것 같았다. 물류센터 대타를 뛰기 전까지는 마트 일을 쉬는 날에 밀린 잠을 몰아서 자거나 리포트를 쓰고 졸업논문을 들여다보았었다. 그 황금 같은 휴일이 없이 일을 하면서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로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졸업논문을 쓰고 막바지 성적까지 챙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주 잠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일만 생겨도 졸았고 밥을 먹을 시간도 아까워서 빵 쪼가리 같은 것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부터 잤다. 시험 때문에 바빠서 일주일 정도를 못 보다가 학교 식당 앞에서 만난 소정이가 기겁을 해서 나를 살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꼴이 어떤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나한테 말해 봤자 안 들을 걸 알았는지 은율이를 붙들고 제발 쟤 고기라도 먹이라고 저러다 무슨 일 나겠다고 닦달을 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라 미처 생각을 못했는지 은율이도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마트 입구에 서서 들어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은율이에게서 온 문자였다. 일이 끝나고 학교 앞의 이십사 시간 영업을 하는 삼겹살집으로 오라면서, 돈 아깝다고 다른 거 먹자고 하면 굶겨버리는 수가 있다고 협박을 한다. 나도 나지만 은율이 입에 고기가 안 들어간 지도 오래 돼서 안 그래도 조만간 한 번 먹일 참이었다. 끝나고 바로 가겠다고 답장을 했다.
먹는 데서 돈을 아끼다가 병이 나면 더한 걸로 쓸 수도 있다. 옥탑방에 있을 때 최대한으로 돈을 아끼다가 둘이 같이 병이 나서 드러누운 적이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식비는 줄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소고기도 아니고 고작 삼겹살 먹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가 앉기가 무섭게 삼 인분을 먼저 시키더니 그 이후로 점점 추가되는 고기가 늘어갈수록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돈이 무서운 게 아니라 은율이의 기세가 무서웠다. 사육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또 다 해치우고 있다는 거였다. 그동안 위에 기름칠을 못했던 몸이 삼겹살을 내 살이었던 것처럼 흡수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은율이가 손을 댄 건 자기 앞에 있는 샐러드가 전부였다. 혼자 먹은 고기가 오 인분을 넘어가고 나서야 이성을 찾고 벨을 누르려는 은율이의 손을 막았다.
“잠깐만, 나….”
“더 먹을 수 있는 거 아니까 그만 먹겠다는 말만 해 봐, 어떻게 되는지.”
“…나 밥을 먹을까 하는데.”
너무 잘 아는 게 이럴 때 문제다. 결국 공기밥까지 시켰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불판의 남은 고기를 주워 먹고 나니까 위가 꽉 차서 버거울 정도였다. 또 벨을 누르려는 걸 막고 진짜로 못 먹겠다고 애원을 했다.
“여태 너 고기 구워줬으니까 이제 나 좀 먹으려고.”
그리고 당연히 그건 페이크였다. 새로 불판에 올린 삼겹살이 익기가 무섭게 쌈을 싸서 은율이가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내일 물류센터에 일하러 가는 날인데 이렇게 삼겹살을 처먹다가는 땀에서 돼지고기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하도 비장하게 쌈을 들이밀어서 결국 그것도 다 받아먹었다. 기어이 둘이서 술도 안 먹고 고기만 팔 인분을 채웠다. 불판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야 뒤늦게 잔고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일 일당 받은 걸로 메우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하고, 혼자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은율이가 말했다.
“물류센터 일 정말 그만뒀으면 좋겠어.”
기름이 잔뜩 묻은 입을 닦고 있다가 멈칫했다.
“차라리 내가 과외를 다시 하면 되니까.”
“너 공부하라고 그러는….”
“아는데, 네가 거기 갔다 올 때마다 내가 마음 불편해서 한 시간에 문제집 한 장을 못 넘기고 있는 것보다는 과외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아.”
“…….”
“잘 생각해 봐. 나 지금 존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니까.”
먼저 일어난 은율이가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곧 체크카드 결제 문자가 도착했다. 결제 금액을 물끄러미 보다가 먼저 나간 은율이의 뒤를 쫓아갔다. 늦은 새벽이라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원룸으로 가는 골목길 초입에서 손을 잡았다.
“내일까지만 하고 그만할게.”
“…….”
“직원 형한테 미리 하겠다고 말해둔 거라서 내일은 꼭 가야 되니까, 정말 내일까지만 할게. 진짜야.”
“…….”
“걱정 많이 했어?”
어두컴컴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걸음이 천천히 느려진다. 후우, 탄식 같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멈춰 선 채로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다.
“울어?”
“울긴 뭘 울어, 멍청아.”
아니구나. 단번에 돌아온 대답에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은율이가 다시 한숨을 쉬고 말했다.
“화가 나서 그래.”
“미안해. 진짜로 내일만 하고 그만할게.”
“너한테 화난 거 아니니까 쭈글거리지 마라.”
쭈글까지야, 그냥 잠깐 쫄았던 것뿐인데.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진짜 쭈그러드는 것 같아서 어깨를 펴고 똑바로 몸을 세웠다.
온몸에 밴 고기냄새를 씻어내고 누웠다. 오랜만에 기름이 들어간 배에서 올라오는 포만감과 샤워를 마친 개운한 몸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깊은 잠을 자다가 문득 옆이 허전하다는 생각에 잠깐 깼었다. 은율이가 옆에 없었다. 잠기운 때문에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컴퓨터 앞에 은율이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부를 하고 있나 싶었는데 모니터가 안 켜진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졸리니까 내일 물어보기로 하고 잠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연락도 안 하는 부모님이지만 핑계를 댈 때는 유용했다. 물류센터로 가면서 직원 형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 엄마가 험한 일 한다고 싫어해서 더는 못할 것 같다고 하자 형은 엄청 아쉬워했다. 이왕이면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내가 수시로 대타를 뛰어줬으면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용돈 모자라면 얘기하겠다고 했더니 제발 그래달라면서 한숨을 푹푹 쉰다. 하긴, 양심도 여유 있을 때나 찾는 거지. 미안해서 어떻게 시키냐면서 머뭇거리던 건 잊었나 보다.
차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해가 뜨는 것을 구경했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일출이다. 진짜 열심히 하긴 했다. 덕분에 은율이 학원도 보내고. 이쯤 되면 거의 가장 아닌가? 그럼 은율이가 내 마누라 하고…. 당사자가 알았으면 낯 뜨거운 소리 하지 말라며 단번에 뒤통수부터 후려칠만한 생각을 하면서 실실댔다. 그 차에 있는 물량 다 빼면 일당 받아가라는 작업반장님의 말을 듣고 어깨를 휘휘 돌리면서 짐을 옮길 준비를 했다. 추억을 남겨주려는지 하필이면 마지막 차에서 과일 박스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일을 할 때마다 이 시간이 되면 팔과 허리가 닳는 것처럼 아파서 좀처럼 힘을 쓸 수가 없었는데 위험하다 싶었다. 물량이 거의 다 빠지고 슬슬 안쪽의 벽이 보이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사과박스를 받아드는데 순간적으로 팔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면서도 박스를 놓치면 안 되니까 힘도 안 들어가는 손으로 추스르다가 박스 아래로 손가락이 잘못 끼어 들어갔다. 무게를 못 견딘 검지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박스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악을 쓰느라 이를 꽉 물고 있어서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는데 그 바람에 이가 부서졌는지 입 안에서 뭐가 씹히는 것 같았다. 그대로 손을 붙잡고 주저앉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팔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감이 가까운 시간이라 작업반장은 이미 퇴근을 했고 다른 사람들도 마무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누군가가 택시를 불러주어서 택시를 타고 병원까지 갈 수는 있었다. 팔을 싸매고 있는 재킷에 피가 잔뜩 묻은 것을 본 간호사가 접수부터 하라고 옆에서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는데도 얼이 빠져서 바로 대답을 못했다. 접수를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접수비를 체크카드로 긁다가 아차 싶었다. 오늘 일당을 못 받고 급하게 병원으로 와 버려서 접수는 했어도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을 생각하면 치료비는 못 낼 것 같다. 그리고 우습게도 돈 생각을 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기번호를 받고 기다리면서 은율이에게 전화를 했다.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라 바로 받지 못할 줄 알았는데 신호가 얼마 가지도 않았을 때 여보세요, 하고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울컥하는 걸 꾹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은율이가 엄청 놀랄 거다. 최대한 목을 가다듬고 별일 아닌 것처럼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 난데.”
- 왜 안 오고 전화해…?
“나 지금 응급실에서 순서 기다리는 중이거든.”
- …어디라고?
“응급실. 아무래도 치료비 모자랄 것 같은데 네가 좀 와야 될 것 같아.”
- …….
“듣고 있어?”
- 거기 어디야?
전화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낮게 잠겨 있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병원 이름과 위치를 대충 설명해 주고 전화를 끊었다. 요즘 들어 계속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 보였는데 내가 쐐기를 박는구나. 오자마자 분명 화를 낼 테니까 변명을 미리 생각해놓고 있었다. 이제 절대로 물건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안 하겠다고 하면 화를 안 내려나, 아예 마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고 할까, 근데 그거 그만두면 당장 생활비가 없을 텐데, 아니면 그냥 미안하다고 싹싹 빌어야 하나….
“일단 골절인 것 같기는 한데, 엑스레이 찍어봐야겠는데요.”
은율이가 오기 전에 내 순서가 먼저 왔다. 의사가 아직도 피가 나는 찢어진 팔과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는 손가락을 쓱쓱 만지면서 살피더니 대뜸 무서운 소리를 한다. 골절이라니,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차렸다.
“근데 엑스레이 가격이….”
“학생이에요?”
“네.”
“일단 보호자한테 전화해요.”
“부모님이 지방에 계셔서… 친구가 오고 있기는 한데요.”
“지금 바로 못 내는 상황이면 나라에서 도와주는 것도 있으니까 일단 치료부터 해요. 여긴 꿰매야 할 것 같고요.”
“아, 네, 으억!”
아직도 피가 나는 내 팔에 의사가 태연하게 소독약을 들이붓고 뭔가 처치를 하고는 꿰맬 준비를 한다. 손가락이 아픈 게 아니었으면 정말 체면이고 뭐고 아파서 엉엉 울 뻔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팔이 찢어진 걸로는 눈물도 안 나왔다. 바늘이 살을 뚫고 들락거리는 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아파서 감각이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대기석에 앉아서 엑스레이 촬영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입구 쪽에서 숨을 몰아쉬면서 뛰어 들어오는 은율이가 보였다. 손을 흔들려고 다친 손을 들다가 윽, 하고 팔을 감쌌다. 나를 발견하고 잠깐 멈춰 서 있던 은율이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나는 생각했던 수많은 변명은 꺼내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은율이의 시선이 간이 깁스를 한 내 손가락과 붕대가 감긴 팔, 그리고 피가 잔뜩 묻은 재킷으로 차례로 옮겨간다. 괜찮다는 말이라도 해 보려고 겨우 입을 여는데 의사가 나를 불렀다. 차라리 버렸으면 버렸지 은율이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을 해서 결국 피가 잔뜩 묻은 내 재킷을 은율이에게 주고 엑스레이를 찍으러 들어갔다.
다행히 수술을 안 해도 되는 골절이어서 뼈를 맞추고 깁스만 하기로 했다. 자리가 없어서 응급실 밖의 복도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은율이는 내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의사들과 고성을 지르고 실랑이를 벌이는 환자들 사이에서도 은율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재킷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다. 힘이 바짝 들어간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게 보인다.
주의사항을 잔뜩 듣고 나서 치료비 결제를 하려고 했는데 은율이가 나를 잡아끌었다. 결제 문자가 따로 온 것도 아닌데, 그냥 가면 이건 범죄 아닌가, 은율이가 응급실에 온 이후로 여태 입도 못 떼고 있다가 결국 내가 처음 한 말은 ‘돈 안 냈는데’가 되었다. 은율이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돈이 나서 결제를 했는지는 나중에 묻기로 했다.
병원 밖으로 나와서 찬 공기를 마시고 나니까 좀 살 것 같았다. 담배 한 대만 피웠으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나머지 팔을 분질러버릴 것 같아서 조용히 은율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버스도 있는 동네인데 택시를 잡는다. 버스를 타도 된다고 했다가는 방금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서 응급실에 환자로 누워있게 될지도 모른다. 얌전히 택시에 타고 눈치를 살폈다.
“…놀랐지, 미안해.”
“…….”
“막판에 과일이 떼거지로 들어와서, 이게 마지막에 물건 빼다 보면 순간적으로 힘 풀릴 때가 있거든. 평소에는 안 그랬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입 다물어.”
군말 없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길게 숨을 내쉬면서 은율이가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제야 발견했다.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다. 마른침을 삼켰다. 차라리 울 거면 울고 화를 낼 거면 화를 내고 때릴 거면 때렸으면 좋겠는데 말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까 어느 방향으로 들어올지 감이 안 잡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은율이가 내 티셔츠를 벗겼다. 지금 발견했는데 재킷으로 팔을 싸매고 있는 동안 티셔츠 앞까지 피가 잔뜩 배었는지 회색 티셔츠 앞판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은율이는 내 재킷과 티셔츠를 욕실 세면대에 던져놓고 내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고는 바로 욕실로 들어가 버린다. 물소리가 들렸다. 욕실로 가까이 가서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정말 물소리만 들린다. 안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물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를 더 붙이려다가 문이 벌컥 열려서 넘어질 뻔했다. 세면대에 담긴 내 옷에서 핏물이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연 은율이가 내 멱살을 잡았다. 화를 내려고 그러나.
“…내가, 그 일 하는 거 싫다고 했지, 이 새끼야.”
그러더니 대뜸 정강이를 걷어찬다.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굽히다가 은율이가 쥐고 있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발견했다. 더 때리려고 그러나. 팔이 하나밖에 없어서 가드도 제대로 못 올리니까 때리면 그냥 맞는 수밖에 없었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일어났다가 얼이 빠졌다.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채로 은율이가 몸을 기울여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남은 팔로 안아주려고 했다가 호되게 얻어맞았다. 몸이 들썩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갈아입은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는다. 화내고 때리더니 막판엔 결국 우는구나. 달래줘야 될 타이밍인 것 같아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배에 주먹이 들어오는 바람에 기겁하면서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섰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벅벅 닦은 은율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 죽었다 복창해라 개새끼야.”
“뭐, 뭐가, 왜.”
“넌 이제 내 말 안 듣고 무슨 일만 해 봐, 존나 죽는 수가 있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해, 제발! 으악!”
“진정하게 생겼냐? 진정하게 생겼어? 내가 씨발, 너 때문에, 아오 진짜 차원우 이 씨발놈아!”
알아들었다. 알아들었으니까 제발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눈에 그렁그렁 담겨 있던 눈물을 기어이 뚝뚝 떨어뜨리면서 입으로는 욕을 내뱉고 돌격하는 것처럼 덤벼들면서 훅을 날리는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좁아터진 방에서 도망을 다녀봤자 갈 곳이 없다. 구석으로 몰려서 눈치를 살폈다. 은율이가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더니 손가락을 휘휘 돌린다. 돌았냐는 건가?
“돌아서라고.”
진짜 죽이진 않겠지 설마…. 반신반의하면서 돌아섰다. 뒤가 하도 조용해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긴장하고 있었는데 등에 따뜻한 숨이 닿는다. 허리를 꽉 껴안고 내 등에 얼굴을 묻은 은율이가 몇 번 숨을 고른다. 응급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처럼 허리를 안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내 팔을 쓰다듬는다. 조금만 힘을 줘도 내가 아플 것 같았는지 붕대 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다가 깁스를 하고 있는 손가락을 살짝 잡아보기도 하고 손으로 감싸보기도 한다. 마주보고 있는 게 아니라서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큰일 난 줄 알았어.”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면 듣지 못했을 작은 목소리가 등을 타고 가슴까지 울린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움직이며 내가 다친 곳을 연신 쓰다듬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은율이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일부러 안 아픈 척하면서 전화한 거였는데. 너 놀라지 말라고.”
“진짜, 큰일 난 줄 알았어….”
“…미안해.”
“…….”
“잘못했어.”
화도 났을 거고, 한 대 패주고 싶기도 했을 거고, 울고 싶기도 했겠지만, 다른 것보다도 엄청 놀랐을 거다.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손끝에 계속 입을 맞췄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마주볼 수 있게 해 준다. 안아주려고 불편한 팔을 움직이느라 낑낑대는 걸 봤는지 슬쩍 몸을 틀어 안겨 온다. 땀이 배어 있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