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옥탑방
上
아직 수다를 떨기에는 이른 아침인데 누구와 그렇게 통화를 하는 건지 원우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출근 준비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핸드폰만 붙들고 있다. 시간을 보아하니 저러다가 지각할 것 같아서 눈앞에 손을 휘휘 젓고 시계를 가리키자 알았다고 눈짓을 한다. 저 정도면 뭔가 굉장히 중요한 통화인 것 같은데, 이직을 할 것도 아니고, 나 말고 딴 놈이랑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회사에 급한 일도 별로 없는 차원우에게 중요한 통화라면 아무래도 출처가 한 곳 뿐이다.
“집?”
최대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린다.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인 것 같다. 이러다 나까지 늦겠어서 일단은 출근 준비를 했다. 현관에서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이다. 뭔가 답답한 게 있는지 그게 아니라며 반박을 하다 말고 시계를 보더니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는다.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하길래 원우를 그냥 두고 집을 나서다 현관문을 닫기 직전에 단어 하나를 주워들었다. 옥탑방이 어쩌고저쩌고 한 것 같은데.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가는 동안 다세대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동네를 지나다 보니 아까 언뜻 들은 옥탑방 생각이 났다. 다른 기억들은 죄다 추억보정이 되었는지 하다못해 원우네 아버지가 화분을 던지셨던 것도 지금은 웃으며 넘어가겠는데 유난히 옥탑방에서 살던 때의 이야기만큼은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절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모든 것을 정리한 다음 나와 원우의 부모님에게 우리 사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도망치듯이 동반입대를 하고, 제대를 했을 때 나와 원우는 빈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군대 가기 전에 조금 모아두었던 돈이 있었지만 원래 살던 수준의 자취방을 다시 얻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했고, 집에서 내다 버리듯이 부쳐준 옷가지는 짐이나 다름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증금을 조금이라도 더 모을 때까지만 고시원에서 따로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가 원우가 대출을 하네 마네 하도 난리를 쳐서 결국 방을 보러 다녔었다. 입대 전에 내가 맡겼던 낡은 노트북을 자기가 사겠다면서 소정이가 강제로 도움을 준 덕분에 둘이 나란히 누울 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첫날 이불도 없이 점퍼만 껴입은 채로 다른 옷을 덮고 맨바닥에서 잤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만족했었다. 반지하보다는 햇빛 보면서 사는 게 나으니까, 옥상이라 나름대로 분위기도 좋고, 옆에 붙은 다른 빌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라 가끔은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문 앞에서 키스를 해도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었고… 와 같은 장점들은 한 달 안에 단점들에 묻혀 전부 사라졌다. 일기예보에서 올해 들어 최고 기온이라거나 올해 들어 제일 추운 날이라는 소리만 나오면 공포에 사로잡혀야 했다. 옵션으로 출몰하던 날개 달린 것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생활비 예산을 짤 때 원우와 제일 먼저 합의한 사항이 냉난방비는 절대 아끼지 말 것과 매달 결제하는 해충 처리 서비스의 비용은 절대 밀리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만으로 옥탑방 시절을 기억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턱을 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버스 하차 벨을 눌렀다.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굉장히 불쾌해져서 오만상을 찌푸린 채 사무실로 올라가다가 원우의 전화를 받았다.
- 출근 잘 했어? 버스 안 밀렸냐?
“어, 바로 왔다. 지금 도착했어.”
- 너 오랜만에 정시출근한대서 태워다주려고 했는데 일이 꼬였네.
“뭘 태워다 주냐. 오는 대로 오면 되는 거지. 근데 집에 왜, 무슨 일 있으시대? 아침에 전화하실 정도로 급한 일이야?”
- 아니. 별거 아냐.
“뭔데.”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켜면서도 신경은 온통 전화 내용에 쏠려 있었다.
- 설명하면 좀 길어서.
“요약.”
- 현우 서울 올라올 때 됐잖아. 그거 때문에.
“아 맞다… 조금 있으면 개강이구나.”
컴퓨터 옆의 달력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일이 바빠서 마감 날을 제외하고는 날짜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갑작스럽게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 집 구하느라 정신없나 보더라고.
“어…. 그렇겠네.”
- 쫄지 마라, 노은율. 왜 쫄아?
“쫄긴 무슨.”
- 목소리가 쫄았는데?
놀리듯이 묻는 말에 뭐라고 반박을 하려고 했는데 근처에 누가 왔는지 원우가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얼른 끊어.”
- 일찍 퇴근할 거 같으면 문자해. 데리러 갈게.
“봐서.”
- 봐서는 무슨, 튕기지 마시고요. 밖에서 밥 먹고 들어가자.
“알았으니까 끊어. 그쪽에서 누가 자꾸 너 부르잖아.”
아까부터 작은 소리로 원우를 부르는 게 들리고 있었다. 바쁜데 괜히 없는 시간 쪼개서 통화를 하는 것 같아 핀잔을 주자마자 전화가 뚝 끊어졌다. 왠지 멍했다. 어디서부터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것 같다. 넋을 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 원우에게 문자가 왔다.
[차현우 생각하고 있지 말고 내 생각이나 해]
[솔까 내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냐 얼굴부터 내가 낫잖아]
지 동생이랑 똑같이 생긴 주제에 얼굴 따지고 있다. 꽉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흘렀다. 내 표정 변화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문자가 연달아 더 도착했다.
[게다가 난 기술도 있잖아 짬도 있고]
[파워도]
[확인 콜?]
간략하게 답장을 보냈다.
[지랄마세요]
곧 빨개진 얼굴을 가리면서 부끄러워하는 듯한 이모티콘과 함께 답이 돌아왔다.
[넌 욕할 때랑 존댓말 할 때가 제일 섹시해]
“놀고 있네….”
“아 지금 일하려고 했거든요! 그거 잠깐 봤다고 너무 하시네 진짜.”
문자를 보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였는데 옆에 있던 정아가 황급히 인터넷 창을 끄면서 구시렁거렸다. 그리고는 내 앞의 모니터 화면을 흘낏 보더니 대뜸 신경질을 낸다.
“뭐에요, 나만 노는 것도 아닌데 나만 뭐라 그러고 진짜. 그거 왜요? 안마의자 사시려고요?”
“어? 아니?”
“근데 왜 그거 보고 계세요?”
쨍쨍한 정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모니터를 보니 진짜로 안마의자 가격비교 창이 떠 있었다. 내가 안마의자를 검색하고 있었나 보다. 차원우네 집, 차원우 동생 차현우, 그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본능적으로 원우네 집에 뭐라도 보내야 되나 싶어서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정인지 합의인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부모님이 우리 사이를 봐주신 것도 한참이 지났고, 원우도 자기 부모님이 수시로 내 안부를 묻고 반찬까지 해서 보내는 거 보면 이제 괜찮으니까 제발 쫄지 말라고 하긴 하는데, 지금 이러는 건 내 간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콩알만 하거나 아니면 원우네 집 이야기만 나오면 쭈글쭈글해지는 게 습관이 된 것 같다.
얼마 후의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어서 요즘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폭풍이 시작되면 개처럼 구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제 시간에 퇴근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데려다주지 못한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백 번 말해도 신경을 쓸 차원우는 결국 회사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내 얼굴을 붙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살이 빠진 것 같으니까 고기를 먹자고 한다. 그냥 지가 먹고 싶다고 해도 먹을 텐데 별 핑계를 다 댄다. 물론 나 역시 군소리 없이 따라가기는 했지만 그건 딱히 고기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원우의 동생 때문에 조금 심란해져서다. 절대로 고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현우 집 못 구했대?”
“일단은.”
“그럼….”
“아 거 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맙시다, 노은율 씨.”
“내가 뭐 말이나 했냐? 딱 두 글자 말했는데.”
“네가 꼭 말을 다 해야 내가 알 것 같냐?”
틀린 말이 아니니 반박할 수가 없다. 집 구하는 동안이라도 우리 집에 있으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원우는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챘다. 시무룩해진 척하면서 힘없이 고기를 뒤적거렸지만 연기하고 있을 시간에 먹기나 하라고 쌈을 싸서 입 앞으로 들이미는 바람에 그것도 망했다. 친형이 저러고 있는데 생뚱맞게 내가 오라고 할 수도 없는 거니까 일단은 한 발 빼기로 했다. 제대하고 나서 방 구하는 게 원래 힘들긴 하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원우가 픽 웃었다.
“원래 서울 생활은 셀프로 하는 거다. 힘들어야 정상이지.”
“현우는 아직 어리잖아.”
“어리긴 뭐가 어려? 그게 어리면 우린 뭐, 제대를 서른에 했냐?”
“…그래서 옥탑방에 살아보라고 했어?”
아까 옥탑방이라는 말이 나온 게 그래서 나왔나 싶어서 물어본 거였다. 심각해진 내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원우가 조용히 대답했다.
“다른 데는 다 고려해 보더라도 옥탑방은 빼라고 했지.”
“…….”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묘한 일이다. 분명 옥탑방에서 지냈던 때를 생각하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원우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묻고 싶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싫었는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그렇게 그때가 힘들었는지. 어떤 대답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도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초조했다. 그때 우리 옥탑방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내 말을 자르며 원우가 빙긋 웃었다.
“밥이나 먹자.”
“…….”
“근데 여기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된장찌개 진짜 별로지 않냐? 솔직히 내가 끓여도 이거보단 잘 끓인다.”
지난주에 네가 끓인 된장찌개에서 출처 모를 단맛이 나던 걸 잘 생각해 보라고 핀잔을 주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생각하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다는데 그런 기억을 원우에게서 굳이 억지로 들춰내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와서 원우가 씻는 동안 내일 회사에서 해야 할 업무 처리를 검토하고, 대강 정리를 해두고 나서야 겨우 씻고 방에 들어왔을 때 원우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등을 돌린 채로 쿨쿨 자고 있는 원우를 내려다보다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옆에 가서 누웠다. 천장을 보고 있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널찍한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옥탑방에 있을 때도 이렇게 잠들던 날들이 있었다. 웅크리고 잠든 원우의 등에 손 한 번 못 올리고 가만히 보기만 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던 날들이 기억났다. 손을 대기만 해도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뭔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때는 그랬었다.
***
“우리 되게 웃기지 않냐?”
테이블 위의 종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율이가 뜬금없이 말했다. 제일 위에 있는 종이로 비행기를 접으면서 되물었다.
“뭐가?”
“그냥, 선택권도 없는데 고르고 있잖아.”
맞는 말이다. 나는 픽 웃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내야지.”
“무슨 분위기, 떠돌이 분위기?”
“신혼 분위기.”
“신혼은 무슨….”
“이러고 앉아서 집 보는 게 신혼 분위기지 뭐.”
능청스러운 내 대답에 귀 끝이 빨개진 은율이가 괜히 창문 밖으로 눈을 돌린다. 볼 것도 없는데 괜히 구경하는 척 하기는. 다 접은 비행기를 은율이 쪽을 향해 살짝 날렸다. 손등에 비행기가 툭 떨어진 걸 보더니 자기도 좋긴 했는지 웃어버린다. 저럴 거면서 괜히 내숭이다.
나름대로 추리고 추린 자료들을 앞에 늘어놓기는 했지만 어차피 고를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밑바닥에 깔려 있던 종이 두 장을 꺼내 제일 위에 올려놓았다. 일주일 가까이 집을 보러 다니고 부동산에서 입씨름을 벌여 얻어낸 결과가 겨우 이거였다. 군대에 있는 내내 제대한 다음이 걱정이 안 된 건 아니지만 너무 막연하다 보니까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고 있었다. 마치 집에 우리 일을 알리기 직전처럼.
그리고 막상 제대를 하고 나니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았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도 부대 근처에 은율이랑 둘이 있다가 다시 들어간 적이 많아서 경제관념이 덜 잡힌 상태였다. 부모님이 등을 돌렸을 때 선택 폭이 이렇게까지 좁아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남은 건 결국 이 두 곳 뿐이다. 반지하와 옥탑방 사진 하나씩을 두고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햇빛 보고 사는 게 낫지 않나? 장마철 생각해도 그렇고.”
“소정이 말로는 옥탑이 여름엔 열탕이고 겨울엔 하얼빈이래.”
“흙탕물로 수영장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리고 반지하보다는 옥탑방이 덜 위험할 것 같아.”
“위험? 뭐가? 아, 도둑?”
“아니. 남이 보니까.”
비행기 끝으로 은율이의 손등을 쿡쿡 찌르면서 씩 웃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게 눈을 맞춰 오던 은율이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손등을 두드리던 내 비행기를 잡아서 우그러뜨려버렸다.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차원우.”
“안 할 것도 아니면서.”
“이게 공공장소에서 진짜…!”
은율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러다 한 대 맞겠다. 잽싸게 종이를 대강 정리해서 들고 일어났다.
“그럼 옥탑으로 하는 거지?”
“빠져나가는 스킬만 늘어가지고.”
그쯤에서 안 빠졌으면 더 민망해할 것 같아서 빠져준 건데 그것도 불만인가 보다. 종이를 휙 낚아채서 먼저 카페를 나서는 은율이의 뒤를 졸졸 쫓아가면서 괜히 어깨와 머리카락을 살살 건드리다가 매서운 훅이 날아오는 걸 간신히 피하고 나서야 나는 은율이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당일 입주도 된다고 해서 계약을 마치자마자 모텔에서 바로 짐을 빼서 올라왔다. 집주인은 조금 까다로워 보이는 아주머니였지만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분을 모시고 살고 있는데 그 정도 까탈을 못 견딜까 싶었다. 조금 작기는 해도 입대하기 전에 은율이와 같이 살던 자취방 크기와 비슷해서 둘이 살기에 공간이 아주 모자라진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이 정도 보증금에 이 정도 방이면 만족할 수 있다. 가구가 하나도 없이 먼지만 쌓인 방을 한참동안 쓸고 닦고 나서야 짐을 들여놓고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있었다. 저녁은 자장면으로 때우고 바로 써야 되는 짐만 대충 풀어놓은 다음 골목 입구에 있는 마트에서 산 얇은 담요를 바닥에 깔았다. 은율이와 나란히 누워서 겨울용 파카를 덮고 나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천장만 있지 이거 완전 노숙이잖아,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니까 참을 새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나오냐?”
나오지, 그럼. 옆으로 비스듬히 돌아누워 팔을 뻗었다. 좁아 죽겠는데 귀찮게 하지 마라, 좁아 죽겠으니까 이러는 거지, 어차피 결론이 정해져 있는 실랑이를 벌이다가 못이기는 척 은율이가 팔을 베고 품 안으로 들어온다. 어깨와 허리를 꽉 껴안고 귓가에 입술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나 미쳤나봐.”
“어, 너 계속 웃는 거 보니까 좀 그런 거 같기는 해.”
“왜 이렇게 좋지?”
“…….”
“이불도 없어서 옷 덮고 자는데도 좋아서 미치겠네.”
상황이 정 안되면 은율이를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결국에는 같이 있게 되었다.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정말 고마웠다. 좁아터진 옥탑방에 이불도 없이 누워서 불평을 하면서도, 아니, 그보다도 전에, 집을 보러 다니는 내내 남아있는 통장 잔고 계산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어 가면서도, 그 전에, 집 구하는 동안 잠깐 있으려고 학교 근처의 모텔에 짐을 풀었다가 문득 그 모텔이 예전에 자기 어머니가 주무시고 가셨던 곳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은율이는 한 번도 안 되겠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마에 길게 남은 흉터 위에 입을 맞췄다. 은율이가 속삭였다.
“차원우.”
“…어.”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차라리 귀신을 속여야지. 대답 대신 뺨을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키스했다. 은율이가 두 팔로 내 목을 안았다. 욕실에 뜨거운 물이 잘 나왔었나? 뭐, 안 나오면 물을 끓여서라도 닦아주면 되겠지. 슬금슬금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가슴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밤공기에 서늘해진 피부 위로 뜨거운 내 손가락이 닿으니까 더 자극이 되었는지 은율이가 한숨 같은 신음을 뱉었다. 손끝에 걸린 유두를 살살 매만지고 문지르다가 아예 은율이를 제대로 눕히고 위에 올라탔다. 키스가 깊어지면서 젖은 입술이 맞물렸다 떨어질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티셔츠를 벗기고 본격적으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춥다.”
“추워? 많이?”
“아니 그냥… 읏, 조금.”
“금방 땀 날 걸.”
“너 하는 걸로 봐서는 동 터야 땀 날 거 같은데.”
언제는 긴장해서 세우지도 못하더니. 들으라고 한 내 혼잣말은 들은 척도 안 하면서 은율이가 내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린다. 뭐 적극적인 게 나쁘지는 않다. 초반에 분위기만 잡아도 벌벌 떨던 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볼록하게 솟아 오른 유두 위에 입술을 대고 혀로 문지르면서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뭘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반은 서 있다. 손으로 감싸고 훑어주는 것처럼 문지르자 바로 반응을 보인다. 고개를 젖힌 은율이가 마른 침을 삼키는지 목울대가 움찔거리는 게 묘하게 섹시했다. 아래를 계속 자극하면서 입을 맞추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직격타를 맞았다.
“아으… 빨리 좀….”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은율이가 살짝 젖은 눈으로 애타게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뱃속에 불이 확 붙는 것 같았다. 감싸 쥔 성기를 조금 거칠게 주무를 때마다 도리질을 치고 허리를 들썩이던 은율이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내 손을 간신히 잡았다.
“그, 만해. 잠깐만… 쌀 거 같으니까….”
“그냥 해도 돼.”
“싫어. 같이….”
뱃속에 붙었던 불이 머리로 올라왔나 보다. 일 분만 더 있어도 눈에 뵈는 게 없어질 것 같았다.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고 은율이를 안아다가 위에 앉혔다. 빠듯하게 일어선 성기끼리 살짝 닿기가 무섭게 아찔한 비음이 들린다. 알았어, 같이 해, 흥분 때문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슬슬 자세를 맞추고 있을 때였다.
“악 씨발!”
몽롱한 얼굴을 하고 내가 잡아끄는 대로 자리를 잡던 은율이가 갑자기 내 어깨를 확 떠밀었다. 미처 몸을 가눌 새도 없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가 바로 옆에 희끄무레한 불빛을 받아 보이는 시커먼 것을 보자마자 나도 용수철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으악! 와 씨발 저거 뭐야! 어후, 와 진짜, 아 씨발 진짜!”
“저, 저거 좀, 좀 치워 봐, 아 움직여 씨발 아 미친….”
은율이와 내가 뱉어내는 말의 절반이 씨발이었는데 정말 욕 밖에 안 나오는 크기였다. 어른 손바닥만 한 거미가 내가 방금 뒤로 넘어졌던 곳의 바로 옆에서 유유히 기어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던 쾌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쾌감은커녕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건 그냥 거미가 아니다. 저 거미라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도심 한복판에 왜 저런 거미가 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 이해고 나발이고 일단은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다. 은율이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버럭 화를 낸다.
“야, 네가 치워라, 어? 난 군대에서 팅커벨 보자마자 총기 들고 탈영할 뻔한 인간인데 아 씨발 진짜 좀!”
“누군 저런 거 좋아하는 줄 아냐? 와 나 진짜, 어휴, 와 미쳤나 진짜 무슨 거미가 저따위로 커? 여기가 무슨 열대우림이냐, 어후, 심장 아파, 아오 진짜….”
“엄살떨지 마 새끼야, 빨리 안 치워?”
“답답하면 네가 치우든가 왜 나한테 치우라 마라야, 아오 씨, 어후.”
은율이와 몸싸움을 하면서 서로 거미를 치우라고 밀치다가 방바닥의 담요가 휙 밀려갔다. 그리고 시야에서 거미가 사라졌다. 나와 은율이는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싸우던 것을 멈추고 담요를 가만히 주시했다. 담요 근방 삼십 센티미터 어디에도 거미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저 담요 버리자.”
“야 오늘 산 건데….”
“그럼 네가 가서 거미 잡고 담요 가지고 오든가.”
은율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후다닥 뛰어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담요 안에서 거미가 뛰어나올까봐 조심조심 담요 끝을 잡아 질질 끌고 나온 다음 바깥에 담요가 다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와 문을 잠갔다. 이미 사방의 창문이란 창문은 다 잠그고 방 한복판에 서서 온갖 곳을 살피며 거미 레이더를 돌리고 있던 은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풀리면서 긴 한숨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순간적으로 땀이 확 올라왔던 몸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담요를 덮… 을 수가 없구나.
“…잠이나 자자.”
어느새 트레이닝복에 커다란 겨울 점퍼를 입고 온 은율이가 옷 몇 개를 둘둘 말아 베개로 만들어 베고 눕는다. 의도적으로 아까 거미가 발견된 곳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눕는 것을 보고 나도 다시 옷을 추스르고 그 옆에 가서 누웠다. 아까는 바닥에 깔 거나 있었지 지금은 맨바닥에 누워있으려니까 진짜로 노숙을 하는 기분이었다. 연거푸 한숨을 쉬다가 은율이가 내 쪽으로 돌아눕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나 좀 추워.”
아까부터 춥다고 하더니 왠지 내일이면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할 모양새다. 얇은 봄옷부터 겨울옷까지 죄다 구겨지거나 말거나 은율이 위로 잔뜩 덮어주었다. 옷더미 아래로 꼬물꼬물 나온 손이 내 손을 잡는다.
“원우야.”
“…어.”
“나 솔직히 진짜로, 여태 이런 생각 한 번도 안 했거든. 진짜로.”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똑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집에 고작 거미 하나 나왔다고 왜 이렇게 서럽냐.”
위에 얹어둔 옷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잡고 있던 은율이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 위에 입술을 한 번 꾹 눌렀다. 그리고 까슬까슬한 손등에 짧은 키스를 하면서 말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돌침대 사줄게.”
“…….”
“다 벗고 자도 땀날 만큼 난방 잘 되는 걸로.”
“돌침대 말고 푹신한 걸로 사서 전기장판 깔아줘. 돌침대에서 하다가 등에 피멍 들겠다.”
반박할 수가 없는 맞는 말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누워 있는 상황이 웃겨서인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허탈해서인지 은율이가 몸을 들썩거리면서 웃는다. 웃음 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긴 하다. 첫날밤 한 번 기가 막히게 요란뻑적지근하게 치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부터 생활비와의 전쟁이었다. 바로 복학하는 것은 포기했다. 학자금대출로 등록금만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 나머지는 벌어서 채울 생각이었다. 은율이는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고 전화를 하느라 바빠 보이더니 용케도 과외 아르바이트를 잡아서 면접을 봐야한다고 일찌감치 나갔다. 그리고 경력도 없고 아는 선배도 별로 없는 나는 집 근처의 PC방에 앉아서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하루 종일 헤매다가 겨우 일자리를 구했다. 아니, 구했다기보다는 얻어 걸렸다. 해가 질 때까지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순회하다가 소정이의 전화를 받고 얼떨결에 덥석 물게 된 일자리였다.
그래도 자리를 구해놓고 나니까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은율이가 오기 전까지 청소를 해두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방을 온통 쓸고 닦고,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로 들어 있던 옷들을 잘 펴서 행거에 걸어두고, 한 번씩 빨아서 입어야 할 것 같은 옷들만 골라 세탁기에 돌려놓고, 단출하지만 그래도 한 끼는 먹을 만한 저녁식사 준비를 끝냈다. 주부가 따로 없다. 마무리를 하기 위해 옥탑방 앞 빨랫줄에 하나씩 널고 있을 때 은율이가 터덜터덜 올라왔다.
“예전에 살던 데보다 여기가 더 높나? 어휴, 힘들어 죽겠네.”
“별 차이 없을 걸. 과외는 잘 됐어?”
“그냥저냥. 가격 후려치려고 하길래 그거 때문에 싸우느라 정신없었어. 왠지 느낌이 별로긴 한데.”
“그럼 다른 자리 구해 봐.”
“다른 자리 구할 시간 없어. 이것도 선배가 자기한테 온 거 빼준 거라고.”
“과외 말고 다른 거는….”
“다른 건 선불로 안 주잖아. 방법 없어, 그냥 무조건 이거 해야 돼.”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은율이가 쪼그리고 앉길래 잽싸게 젖은 옷 중에 만만한 것 하나를 던져 주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버리려면 스티커에 돈 내야 할 것 같아서 옥상에 가져다놓은 것 같은 커다란 상을 그 옷으로 대충 닦고는 은율이가 평상에 눕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 위에 드러누웠다. 앓는 소리부터 나오는 걸 보면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빨래를 다 널고 나서 팔을 붙잡아 일으키자 끙끙거리며 겨우 몸을 가누더니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다.
“넌 뭐 어떻게 됐냐?”
“자리 구했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해.”
“뭐하는 건데?”
“은행 청경이라던데? 청원경찰은 뭐 유단자만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더라. 소정이가 소개해 줬어.”
“괜찮네. 그거 자리 잘 안 날 건데, 한소정 능력 좋네. 차원우를 갖다 꽂고.”
“근데 정장 사야 된다고 그러던데….”
“나 내일 과외비 선불 받으니까 그걸로 사줄게.”
“어… 미안.”
“미안은 무슨. 월급 타면 갚아, 인마.”
주먹으로 배를 쿡 찌르더니 그래도 잘했다고 엉덩이를 툭툭 두드린다. 별것도 아닌 손길에 기분이 금방 좋아져서 실실 웃으면서 따라 들어왔는데 뭔가 더 해볼 새도 없이 은율이는 옷만 겨우 갈아입고 바로 이불 더미로 다이빙을 했다. 기껏 차린 밥상이 아까워서 밥이라도 먹고 자라고 흔들었지만 그냥 너나 먹으라며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피곤해? 그냥 상담만 하고 온 거 아냐?”
“여덟 군데 돌아다녔어. 버스 안에서만 세 시간 넘게 있었나봐. 남자 선생 안 쓴다 그러고, 제대한 지 얼마 안 됐으면 잘 모를 거 아니냐고 빠꾸 놓고… 몰라, 일단 좀 자고….”
과외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 등급의 최상위 계층이라 그래도 좀 수월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세상에서 돈 버는 일 치고 쉬운 일이 없다. 방금 전까지 옹알이를 하더니 잠깐 이야기가 끊긴 사이에 잠이 들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린다. 이불더미에 꾹 눌려 있는 뺨을 쓰다듬다가 슬쩍 입술을 가져다 댔다. 파리라도 쫓는 것처럼 손을 휘적거린다. 더 귀찮게 했다가는 잠을 깨웠다면서 화를 낼 것 같아 그냥 이불을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 은율이가 닦은 상 위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달무리만 흐릿하게 보이는 어두운 밤이다.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하루 종일 서있는 일이라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가서 그런지 오히려 서있는 건 견딜만했다. 생각도 못한 곳에서 밀려오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어서 문제다.
“다 됐어?”
팔짱을 끼고 옆에 서 있던 아저씨가 턱을 치켜든 채로 반말로 묻는다.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나는 억지로 미소를 띠며 통장을 건네주고 대답했다.
“네, 고객님이 말씀하신 부분 처리 다 되었고요, 이쪽으로 오시면….”
“아니, 내가 여기서 다 처리를 해달라고 했잖아. 기다리기 싫어서 부탁한 건데 그것도 못해? 젊은 양반이?”
“일단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만큼은 다 해드렸고요. 나머지는 본인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라 창구에서….”
“그러니까 내가 나 맞다고 했잖아. 사람을 꼭 이렇게 귀찮게 해야 돼?”
“고객님 그러니까 이 부분은….”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때 좀 알아들어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참고 있을 때 창구 쪽에서 직원이 나와서 아저씨를 데리고 들어갔다. 짜증이 확 올라와서 이를 악물고 참고 있을 때 뒤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ATM기계가 이상한 것 같다고 해서 확인을 해 보니 단순히 버튼을 잘못 누른 것이었다. 기계적인 미소를 띠고 처리가 되었다고 하자 고맙다고 웃더니 대뜸 내 엉덩이를 두드렸다. 식겁을 해서 쳐다보자 높은 톤으로 깔깔 웃으며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구, 놀랐어? 미안, 우리 아들 같아서.”
웃음도 안 나온다. 아주머니는 저희 엄마 같지 않은데 왜 그러시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뭉쳐서 내려갔다. 명치가 꽉꽉 막힌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조금 한산해졌을 때 안에 불려가서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다. 고객이 뭐라고 하건 간에 죄송하다고 먼저 사과를 하라는데 내가 뭘 죄송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다고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식사를 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창구에 다시 자리를 잡는 걸 보고 나서 점심을 먹으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도저히 뭐가 입에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담배 한 대라도 피우고 나면 뭉친 속이 좀 내려갈 것 같았는데 일대일로 사람 상대하는 일이라 그마저도 할 수가 없으니 머리까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뒷정리를 하는 것까지 돕고 나서 겨우 탈출했다. 뒤쪽 문으로 나오자마자 근처에 있는 재떨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부터 물었다. 안 아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무릎과 종아리도 엄청나게 쑤시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속은 쓰리고 머리는 아까부터 터질 것 같고, 집이라도 가까우면 좋겠는데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은 족히 가야 한다는 게 벌써부터 막막했다. 온종일 한 번도 울리지 않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은율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것도 씹혔다. 오늘따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뭐하냐? 안 바쁘면 커피라도 마실래?]
징징거리며 비빌 언덕이 마땅치 않아서 소정이에게 문자를 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슬슬 일어나려고 할 때 답장이 왔다.
[나 알바 가야돼 쏘리]
[일 힘들지? 밖에서 시간 때우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
그냥 걱정해서 하는 흔한 말인데 이상하게 울컥울컥 뭐가 올라온다. 우는 표정으로 답장을 했는데 바쁜지 읽지도 않는다. 오늘 진짜 날이 아닌가 보다.
집에 오니까 또 집안일이 산더미다. 입대하기 전에도 다 하던 것들인데 밖에서 내내 일을 하고 와서 그런지 유독 많아 보였다. 다림질을 해야 할 셔츠, 개수대에 담긴 그릇, 시간에 맞춰 예약을 해둔 세탁기까지. 눈 딱 감고 그냥 눕고 싶었지만 지금 안 한다고 없어질 일도 아니고 더 하기 싫어질 게 뻔해서 재킷만 벗어두고 팔을 걷었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성질 내봤자 내 손해다. 빨래부터 널고 설거지를 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들어오는 은율이의 눈가에 피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왜 그렇게 힘이 없냐. 차 밀렸어?”
“금방 왔어. 큰 길 앞에 있는 술집 면접 보고 오느라.”
“술집? 아르바이트 하나 더 하려고?”
“복학하면 많이도 못할 텐데, 돈 모자라기 전에 쉴 때 미리 벌어놔야지.”
맞는 말이긴 한데 기운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까 마음이 안 좋았다.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고 은율이가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 앞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나올 때에 맞춰 숨을 죽이고 있다가 문을 막 열었을 때 쓱 다가갔더니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입술 위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올렸는데 은율이가 내 손을 매섭게 쳐냈다.
“아 뭐하는 거야.”
“힘 좀 내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다른 쓸데없는 짓도 해 봐?”
이미 분위기 파악은 했다. 지금 굉장히 짜증이 난 상태니까 이런 식으로 엉겨 붙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괜히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서 얼굴을 감싸 쥐고 키스를 하려고 덤벼드는 건 오기가 생겨서 그러는 거다. 처음부터 진득하게 달라붙은 것도 아니고, 고작 뽀뽀 한 번 했다고 예민하게 반응한 것 때문에 무안하기도 했고 슬슬 묵혀둔 짜증도 올라오고 있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떠밀고 손을 떼어내려다가 안 되겠는지 다리를 올리려는 게 보여서 아예 벽에 확 밀쳤다. 부딪힌 등이 아팠는지 순간적으로 입술이 벌어졌을 때 혀를 밀어 넣었다가 소리도 못 지르고 뒤로 물러섰다. 깨물린 입술에서 피 맛이 나서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눈앞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허.”
“개새끼야, 하기 싫다고, 씨발!”
“쳤냐, 지금?”
꽉 쥐고 있는 주먹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손바닥이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목까지 새빨개진 채로 씩씩거리는 은율이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은율이와 같이 집에 내려갔던 날 이후로, 있는 대로 부수면서 성질부리는 건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앞에 뵈는 게 없어질 것 같았다.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로 한참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는 내가 아니면 만들지 않았어도 될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은율이는 본인이 선택한 일이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수십 수백 번을 말했지만 절대로 잊어버리고 살 수 없는 흉터였다. 열기를 뱉어내는 것처럼 속에서부터 깊은 숨을 겨우 내쉬고 나서 재킷을 집어 들었다. 문이 부서져라 닫고 나오자마자 발에 걸리는 것부터 걷어찼다. 하필이면 자리가 없어서 버리려고 내놓은 행거 봉이 걸렸는지 듣기 싫은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아마 내일이면 주인집에서 도대체 뭘 하길래 오밤중에 소란을 벌이냐고 화를 내겠지만 차라리 내일 주인집의 잔소리를 듣는 게 낫다. 지금 이 화를 못 풀면 그 다음 일은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발에 걸리는 것마다 있는 대로 걷어차다가 현관문 옆의 시멘트벽에 주먹을 내리쳤다. 찌르르한 아픔이 전해지고 나니까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 일이 아니었다. 분명 은율이가 집에 막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었으니까. 깐깐한 학부모에게 걸려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모자라 새로 할 아르바이트 면접까지 보고 왔으니 피곤이 두 배였을 거다. 가만히 있었으면 알아서 집안일을 같이 했을 거고 그냥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잤으면 끝날 일이었다. 처음 건드린 건 나였고 나중에 시비를 건 것도 나다. 내가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화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고작 그거 가지고 그렇게 신경질을 낼 일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였다. 돈 많이 벌자고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방값이 모자라서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정말 좋아해서 같이 사는 거라 거기에 딸려 오는 다른 힘든 점들을 참고 있는 건데 제일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그 전제부터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게 깨지는 순간 이 생활을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벽에 기대어 한참 숨을 몰아쉬고 있다가 이제는 완전히 평상처럼 쓰는 커다란 상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하늘이 새까맣다. 달빛도 먹어버릴 것처럼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눈을 감으나 뜨나 그게 그거일 것 같았다. 뻣뻣해진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었다. 갈 길이 구만 리인데 벌써 지치기 시작한다.
두어 시간을 누워 있었다. 몸에 찬 기운이 돌아서 도저히 못 버틸 것 같다 싶었을 때 방으로 들어갔다. 같이 살 때 제일 안 좋은 점 중에 하나가 당장 내일 안 볼 것처럼 대판 싸우고도 또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두컴컴한 방의 구석에 둥그렇게 올라온 이불이 보였다. 개수대에는 깨끗하게 닦은 그릇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행거에는 잘 다려진 셔츠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안으로 들어가서 자고 있는 은율이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불빛도 잘 안 들어오는 방인데도 어렴풋이 보이는 뺨이 창백해 보여서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하나씩 넘기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매만졌다. 은율이 말대로 쓸데없는 오기 때문에 괜한 짓을 했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매번 조심을 하면서도 꼭 이런 상황은 나 때문에 시작된다.
선잠을 자다가 몸 위에 무게감이 느껴져서 어렴풋이 깨어났다. 부스럭거리면서 내 위에 이불을 덮어놓은 은율이가 내 눈가를 매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미동도 없이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조심스러운 손길은 살짝 부은 뺨을 어루만지고 이불 밖으로 삐죽이 나온 내 손을 꺼내 손등을 덮는다. 긁혀서 피딱지가 앉은 손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고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꼼꼼하게 확인을 하고는 손등 위에 약을 바른다. 크게 난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은율이의 손을 잡았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가만히 손을 내준 채로 한참을 멈춰 있더니 겨우 내 손을 마주 잡아온다.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는 사과의 말은 따로 하지 않았다. 나처럼 은율이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제일 힘들 거다. 또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나름대로의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했다. 어색한 걸 풀고 싶어도 좀처럼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할 틈이 생기지 않았다. 새벽까지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들어오는 은율이는 내가 출근할 때는 자고 있었고, 퇴근을 하고 오면 은율이는 과외 수업을 하러 가 있는 시간이라 집이 항상 비어 있었다. 공부를 좀 하다가 다음날 출근을 하기 위해 일찍 자고, 일어나보면 또 전날과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주말에 나는 은행으로 출근을 하지 않는 대신 당일에 일당을 주는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생활비를 보태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나갔다가 오면 결국 일주일 내내 멀쩡한 정신으로 보기가 힘들었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서로 피하는 것처럼 자꾸 엇갈렸다. 같이 살고 있는데도 따로 사는 것 같았다. 스킨십은 고사하고 눈을 마주한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하다. 아침에 나가기 전에 잠든 은율이를 잠깐 들여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에서 깰까봐 선뜻 쓰다듬지도 못했다. 밖에 있으면 서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방해가 되는 전화를 하기 보다는 문자를 간간히 주고받았고, 그래서 목소리를 언제 들었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
서로의 집에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을 한 순간부터 각오를 했던 생활이었다. 그러나 각오를 했던 건 이런 부분이 아니었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부터 집에서 생활비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편하게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걸 우리 힘으로 메우는 게 힘들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감정적인 부분에서 너덜너덜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절대로 후회하지 말자고 해놓고도 지쳐서 잠든 은율이를 보면 순간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괴로웠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이 생활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적응이 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만 붙잡고 사는 것 같았다.
며칠 째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번 달 들어 최저 기온이라더니 오늘은 백 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꽃샘추위라며 난리가 났다. 아침에 씻기 전에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슬리퍼를 신은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말이 꽃샘추위지 이건 그냥 한겨울이다. 추위를 엄청나게 타는 은율이는 며칠 째 감기약을 먹고 있는지 방 한 쪽에 놓아둔 먹다 남은 감기약의 수가 점점 줄고 있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옷을 죄다 껴입었는데도 방 밖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얼굴부터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다시 들어가서 겨울 코트를 꺼내 입고 나가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짧게 메모를 해서 냉장고 앞에 붙여두었다. 추위를 많이 타니까 평소대로 입고 나갔다가는 큰일 난다고, 따뜻하게 입으라고 써두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혼자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핸드폰으로 보내는 문자 말고 손 편지라도 써서 줄 걸 그랬다. 그게 훨씬 모양도 살고, 뭔가 좀 애틋한 기분도 날 텐데 미처 생각을 못했다. 오는 길에 편지지를 사와야겠다.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같이 살았고 군대도 동반입대를 해서 한 번도 연애편지 같은 건 써본 적이 없었는데 막상 쓰려고 생각을 하니까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뜨끈해지는 것 같아 혼자 실실 웃었다.
하루 종일 편지에 뭘 쓸까 고민을 하면서 퇴근 시간이 되면 칼 같이 나가려고 했는데 일이 자꾸 늦어졌다. 평소에는 좀처럼 연장근무를 안 시키는데도 오늘은 유난히 바쁜지 나를 붙들고 조금만 늦게 가라고 하는 걸 보면 급하긴 한 것 같아서 거절도 못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하나씩 파기하면서 시계를 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로 은율이 이름이 찍혀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당황했다. 지금 한참 과외 수업을 하고 있을 시간일 텐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안 오냐?
“어? 어, 아직. 좀 늦게 끝날 거 같아서.”
- 알았어.
새삼스럽게 전화까지 해서 퇴근을 안 하는지 묻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무슨 일 있어?”
- 아니… 일단 알았어.
“왜, 뭔데. 목소리 왜 그래?”
- …….
“많이 아파? 감기 때문에 그래?”
“원우 씨, 그거 다 되면 계장님 쪽에 좀 가볼래? 그쪽에도 뭐 있는 것 같더라고. 미안해, 오늘만 좀 부탁해. 연장수당 내가 따로 청구해 줄게.”
“예? 아, 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하려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왼손의 핸드폰과 오른손의 서류더미를 번갈아 보다가 파쇄기에 서류를 집어넣으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섯 번까지 걸어보고 안 받으면 진짜로 택시라도 잡아타고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전화 너머에서 왜, 하고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은율아.”
- 그냥 올 때 약 좀 사오라고. 약 떨어져서 전화했어.
“감기약? 차라리 병원을 가자. 어디야, 집이야?”
- 호들갑 떨지 말고 그냥 종합감기약 하나만 사와.
“노은율. 병원 가자니까.”
- 괜찮아. 일단 끊어.
마음이 급해졌다. 서류를 아무렇게나 넣다가 걸려서 한참 씨름을 하고 겨우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저만치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신 미안하다면서 하나만 도와주고 가라고 애걸복걸하는데 그냥 갈 수도 없어서 차라리 빨리 끝내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서류를 받아들었다. 섞인 파일들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초조해서 좀처럼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부탁받은 일을 마치고 도망치듯이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은율이가 예전에 살던 곳보다 옥탑방이 더 높으냐고 했을 때는 별 차이 없을 거라고 대답했는데 막상 내가 급하게 올라가려니 죽을 노릇이었다. 숨이 차다 못해 넘어갈 것 같아서 컥컥거려가며 겨우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문을 벌컥 열자마자 덥고 답답한 기운이 확 쏟아졌다. 이불을 있는 대로 꺼내 덮은 은율이가 얼굴만 겨우 내밀어 나를 보고는 다시 눈을 스르륵 감는다. 허둥지둥 뛰어 들어가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가 식겁하고 이불을 걷어냈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은율이가 이불을 잡아끌었다.
“추워….”
“병원 가자니까, 열 너무 높잖아!”
“네 손이 차가운 거니까…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아파.”
“병원, 늦었나, 응급실, 응급실 가야겠다. 일어나 봐.”
등을 받쳐 일으켜 앉히는데도 고개가 힘없이 흔들린다. 이마만큼이나 뜨거운 손이 내 팔을 붙들었다. 앉혀 놓고 보니까 입고 있는 옷도 땀으로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말할 기운도 없는지 입술만 달싹이다가 한숨 섞인 목소리를 겨우 뱉어낸다.
“그냥 좀 쉬자….”
“알았으니까 가서 링거 하나만 맞고 오자. 너 땀도 너무 많이 흘렸고 열도 너무 심해. 응급실 가서….”
“돈 아깝다니까….”
“…….”
“…약은 사왔어?”
할 말이 없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잡아주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은율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은율이를 앉혀 놓고 물을 떠 왔다. 사온 약을 꺼내주자 힘겹게 물을 넘기고는 은율이가 픽 웃었다.
“일주일 만에 처음 얼굴 보고 얘기하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는 대신 물컵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불 안으로 들어가서 팔을 벌렸다. 당장은 바깥에서 묻어온 한기 때문에 춥겠지만 조금 있으면 이불만 덮고 있는 것보다는 따뜻해질 것이다. 감기 옮는다고 손을 내젓길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열이 온몸에 느껴졌다. 머리카락 위로 얼굴을 파묻고 긴 숨을 토해 냈다. 꼼지락거리며 올라온 손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아픈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놀라서 호들갑이야.”
은율이는 갈라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데 나는 꼭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답 대신 조금 더 등을 당겨 안았다.
“차원우 직장인 다 됐다.”
“…….”
“내가 아프다고 전화까지 해서 알려줬는데 일하느라 바로 오지도 않고. 예전에는… 대전까지 내려가다 말고 다시 올라와서 약 사들고 뛰어오더니.”
땀으로 젖은 목덜미를 가만히 쓸어내리다가 웃음을 흘렸다. 그런 적이 있었지. 그때는 미친 사람처럼 뛰어서 자취방으로 올라가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는데 옥탑방이 높은 건지 나이를 먹은 건지 아까는 딱 죽을 것 같았다.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목 위부터 어깨까지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예전에는 그랬지.”
“…….”
“…너 꼬시려고.”
목덜미에 닿아 있던 입술 사이로 옅은 숨이 새어 나온다. 웃고 있는지 어깨가 살짝 떨린다.
“지금은 잡은 고기라 안 꼬셔도 되고?”
“내가 잡은 고기 아니야.”
“…….”
“나한테 잡혀준 고기.”
허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뜨거운 숨이 흩어진다.
“잡아먹히러 들어간 고기겠지.”
은율이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 눈을 맞추고는 씩 웃는다. 열이 올라서 온통 빨개진 얼굴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눈가와 뺨, 콧등을 지나 입술까지 내려오는 동안 열이 달라붙은 것처럼 내 입술도 잔뜩 뜨거워졌다. 키스를 하려고 하자 손을 들어 막는다.
“감기 옮아.”
“괜찮아.”
“이번 감기 독하대.”
“괜찮아.”
“…….”
“잡아먹히러 들어온 고기 잡아먹어야 되니까 키스 좀 하자.”
열기로 말라서 하얗게 일어난 입술이 예쁘게 휘어진다. 입술 위를 몇 번이나 핥아가며 적시고 나서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굳어있던 혀가 감길 때마다 입 안이 데일 것 같았다. 숨이 가빠지지 않도록 천천히 입술을 머금고 입천장을 간질였다. 등에 두르고 있던 손이 올라와 어깨를 꽉 붙잡는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응급실 팍팍 데려가 줄게.”
“아프지 말라고 해야지, 인마.”
“…아, 맞다.”
“너 돈 진짜 많이 벌어야겠다. 돌침대도 사야 되고, 나 응급실도 데려가려면.”
다른 것도 해 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지금은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생각이라도 많이 해두었다가 하나씩 하나씩 숙제하듯 지워나가야겠다. 달아오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은율이가 중얼거렸다.
“키스 얼마 만에 하는 건지 생각도 안 나.”
“그러니까 다른 건 얼마나 오래 됐겠냐.”
“어쭈.”
“빨리 나아라.”
“무서워서 낫겠냐.”
“잡아먹히러 왔으면서 내숭은.”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마주보면서 실없이 웃었다. 묵직하게 얹혀 있던 뭔가가 사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