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우리의 연애
현우가 나에게 전화를 한 건 두 번째였다. 지난번에 유니폼을 선물하고 나서 부대로 핸드크림과 선크림을 보냈더니 잘 받았다는 전화를 해서 엄청 당황했었다.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하라고 명함을 주기는 했는데 진짜로 전화를 할 줄은 몰랐었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인터넷에서 할인을 하길래 핫팩을 백 개 정도 사서 보내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강원도 지역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았으면 이 귀한 전화를 받지도 못하고 그냥 넘어갈 뻔했다. 아직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고 대화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짤막하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게 기특했다.
“혹시 뭐 또 필요한 건 없고?”
- 네.
“그래, 형한테 부탁하기 좀 그런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도 되니까 편할 때 전화해.”
- …네.
“추우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감기 조심해. 요즘 감기 독하더라.”
- …….
“그럼….”
- 근데 형.
아, 역시 연애는 오래 하고 볼 일이다. 차현우 입에서 형 소리가 나오다니. 녹음을 해둘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전화가 끊길까봐 얼른 대답했다.
“응.”
- …뭐 좋아해요?
“어?”
- 도, 동생 뭐 좋아하는지….
전화를 한 본 목적이 이거였나 보다. 그 와중에도 나 뭐 좋아하냐고 물어보는 줄 알고 잠깐 설레었다. 겹사돈이 코앞이다. 부모님께 진지하게 상의를 해야 하나. 현우 정도면 뭐 비주얼은 나쁘지 않고 성격이야 나이 좀 더 먹으면 변하겠지만 그건 내 취향이고 노은지 입장에서는… 열심히 깎은 사과를 미친 듯이 먹이던 걸 보면 아주 별로는 아니었나 보다. 사과에 아픈 추억이 있는 놈이 그걸 또 받아먹은 걸 보면 현우야 이미 뭐 말 다했고.
“은지한테 선물하려고?”
- 그냥, 다음에 휴가 나갈 때, 뭐라도 같이 먹고… 아 어쨌든….
“음, 난 잘 모르겠고, 우리 집에 갈 때마다 원우가 은지 데리고 나갔었는데 한 번 물어봐줄까?”
- 아… 네.
“그래, 그럼….”
- 제, 제가 내일 다시 전화할게요.
“어, 그럴래?”
- 형한테는….
“그냥 내가 물어보는 걸로 할게.”
- …네.
“그래, 내일 아무 때나 전화해.”
- 네.
십 년이 걸려서야 싹싹해진 현우와 통화를 끝내고 나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 불타오를 때다, 이 파릇파릇한 것들. 원우에게 이야기를 듣자 하니 현우를 터미널에 데려다 줄 때 은지가 먼저 선수를 친 모양인데 쪼그만 게 겁도 없이 연애질 하겠다고 먼저 적극적으로 나간 게 대단하긴 대단했다.
하긴, 나도 내가 먼저 고백했었지. 낌새는 보여도 먼저 이런 말은 죽어도 못하는 스무 살의 차원우를 붙잡고 꽤 덤덤한 척하면서 말했었다. 어차피 타지 생활하는 거 힘들고 외롭고, 이왕 몇 년 같이 살아야 되는데 그냥 한 번 사귀어 볼래? 그러다 진짜 애인 생기면 관두고.
차원우가 뭐라고 했더라. 뭔가 되게 닭살 돋는 말을 해서 좀 오그라들 뻔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은율아 나 보일러 깜빡했다]
[가스비 많이 나올라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아 젠장 나올 때 확인한다는 걸 까먹었어]
분위기 잡을 틈을 안 준다. 점심시간에 뛰어가서 당장 끄라고 답장을 보내고 머리를 헝클었다. 진짜 생각이 안 나네, 원우가 뭐라고 했더라.
결국 예전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채로 일을 하다가 그 생각을 하고 있던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야근을 안 하려고 온갖 수를 다 쓰다 보니까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짬이 없었다. 간신히 퇴근 시간에 맞춰 일을 끝내고 피곤에 쩔어서 회사 앞으로 내려왔는데 원우가 와 있었다. 연락도 안 하고 웬일로 데리러 왔지, 느긋하게 걸어가다가 조수석을 열고 다급하게 손짓을 하는 걸 보고 어리둥절해 하며 뛰었다.
“왜?”
“가자, 빨리.”
“어딜?”
“콩이 보러 와도 된대.”
“콩이? 벌써 나왔어?”
“어제.”
“와 강민기 존나 치사하네, 그걸 왜 오늘 알려줘?”
“민기도 정신 없었나봐. 예정일보다 빨리 나와서.”
“알았어, 일단 가자. 가서 패든가 해야지.”
애는 벌써 나왔다는데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늦으면 못 볼 것 같아서 골목길 사이사이로 질주하며 선물을 살 겨를도 없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나마 자연분만을 해서 아이를 낳은 산모를 이렇게 금방 만나도 되는 게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엄청 초조할 뻔했다. 허둥지둥 병실로 올라가서 숨을 몰아쉬며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민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을 열었는데 침대에 앉아 있던 소정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울어?”
“은율아아, 흐어엉.”
엄청나게 서럽게 우는 걸 보니까 내 코끝이 다 찡해졌다. 애 낳는 게 힘들었나, 아무래도 초산이니까 힘들만도 하겠지, 기분도 이상할 것 같다. 열 달을 품고 있던 내 새끼를 낳아 놓고 나면 뿌듯하기도 엄청 뿌듯할 거고. 역시 엄마라는 존재는 위대하구나. 나는 좀 감동했다. 그 와중에도 손 씻고 오라고 잔소리를 하는 민기 때문에 병실 안 화장실로 떠밀려 들어가서 손을 벅벅 씻고 나와서 소정이의 손을 잡았다. 지난번에 애를 낳으면 잘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걱정을 했다던 소정이의 말이 떠올라서 울컥하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만 울어, 몸도 안 좋은데. 응? 애 잘 낳아 놓고 왜 울어.”
“흑, 흐엉, 은율아.”
“어, 왜.”
소정이가 끅끅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나, 커피가, 흑, 커피가 너무, 먹고 싶은데, 못 먹게 해, 으어엉.”
“…그래서 우냐?”
“열 받잖아, 먹고 싶은데, 흐윽, 못 먹게 하니까.”
그래, 아메리카노를 하루에 머그컵으로 네 잔씩 달고 살던 사람이 열 달을 못 먹었으니 먹고 싶을 만도 하다는 건 알겠는데, 잔잔히 밀려오던 감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산모에 대한 상식이 없는지 커피를 사오겠다는 차원우의 등짝을 후려쳐서 앉혀 놓고 한탄을 하는 소정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래도 콩이가 효자는 효자인지 초산인데도 엄청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고 다른 산모에 비해 금방 나왔다고 했다. 신생아실에서 빨갛고 쭈글쭈글한 콩이를 보고, 애를 낳느라 부어 있는 것 말고는 여전히 밥도 잘 먹고 수다도 잘 떨고 심지어 아직도 닭강정 타령을 하는 소정이와 두어 시간을 같이 있다가 가족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일어났다. 선물을 못 사와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됐다고 손사래를 치던 매너남 강민기는 요즘엔 인터넷으로 못 사는 게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서 나와 원우를 흠칫하게 했다.
“이제 애 키우려면 고생 좀 하겠다.”
“그래, 신혼 다 갔어. 그동안은 연애하는 기분이었는데 이제 좀 유부남 된 것 같다.”
“뭘 아직도 신혼이야, 니들도 연애 오래 했잖아.”
“왜 이래, 아침에 얼굴 볼 때마다 처음 만난 것처럼 설레는 마음이었거든.”
“네 네, 공처가 강민기 나셨네요.”
“그러니까 니들은 감사하라고. 사시사철 신혼처럼 살아도 애가 마음에 걸리기를 하냐 생계가 걱정되기를 하냐.”
아이가 생긴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데 육아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심란해진다면서 민기가 한숨을 쉬었다. 하긴 본격적으로 애가 크기 시작하면 한 재산 들어갈 거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라고 위로 같지도 않을 위로를 해 주었다.
“퇴원은 언제 해?”
“아직 모르겠어, 몸 상태 좋아지는 거 봐서.”
“주말에 병실 지킬 사람 있어? 너 주말에 바쁘잖아. 아무도 없으면 나라도 오고.”
“아냐, 안 와도 돼.”
“아, 부모님 계시지? 근데 뭐 먹을 거라도 사다 나르려면 부모님만 계신 것 보다는 누구 하나 심부름할 사람은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심부름꾼이라면 있어.”
조수석 문을 닫아주고 창틀에 몸을 기댄 민기가 빙긋 웃는다.
“형이 하루 있어주기로 했거든.”
아, 나는 입을 벌리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조심해서 가라고 인사를 하고 주차장 밖으로 뛰어가는 민기를 보던 원우가 씩 웃었다. 이제 괜찮아졌나 보다. 형 이야기를 하는 민기의 표정이 밝았다. 콩이에게 우리보다 더 좋은 큰아버지가 생긴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집에 오는 내내 운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침까지 흘려가며 자다가 도착을 하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 업고 갈 생각이었는지 조수석 문을 열고 있던 원우는 슬라임처럼 흐물흐물 기어 나오는 나를 보고 혀를 찼다. 피곤해서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건드리지 마, 나 들어가자마자 잘 거야,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노은율.”
“아 오늘은 안 한다고….”
“그게 아니라.”
졸린 눈으로 멀뚱히 쳐다보았더니 원우가 내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아 나 진짜 CCTV 있는데 이 망할 놈이, 근데 자다 깨서 발차기가 조준이 안 된다. 헛발질을 하고 휘청거렸다. 픽 웃으면서 넘어질 뻔한 나를 붙들고 원우가 말했다.
“데이트하자.”
“뭐?”
“내일 퇴근하고 데이트하자고. 신혼 같은 데이트. 민기가 사시사철 신혼처럼 사는 걸 감사하라잖냐.”
“…무슨 데이트야.”
“하자니까, 데이트. 진지하게.”
낮에 생각하던 게 문득 떠올랐다. 내가 고백했을 때 원우가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신혼 같은 진지한 데이트를 하자는 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
차원우는 내 생각보다 더 진지했다. 점심시간 때쯤이 되자 문자까지 보내왔다. 예약까지 다 했으니까 야근 절대 하지 말라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답장을 보냈다. 트렁크 열었는데 풍선 튀어나온다거나 거대 곰 인형을 안고 회사 앞에 서있다거나 사무실로 꽃 배달 서비스 따위를 시키면 널 모르는 척 할 거고 일주일간 자체 철야를 하겠다고 했다. 한참 답이 없더니 그럼 거대 곰 인형은 은지에게 보내겠다고 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큰일 날 뻔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이상한 불안감과 묘한 두근거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차원우는 한 번 면상에 철판을 깔기 시작하면 길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장미 백 송이를 주면서 청혼도 할 놈이라서 불안했고, 그러면서도 진지한 차원우가 어떤 데이트를 하자고 할지 은근히 기대가 되어 두근거렸다. 중요한 일에는 결국 손도 못 대고 급한 것만 대강 마무리하고 나머지 일을 정아에게 맡겼다. 졸지에 야근을 하게 된 정아가 하도 징징거리길래 보는 앞에서 인터넷으로 피자를 주문해서 확인까지 시켜주고 퇴근을 했다. 트렁크에서 풍선 튀어나오는 거 하지 말랬다고 차에 풍선을 달고 오는 건 아니겠지, 긴장을 하면서 밖으로 나왔는데 의외인지 다행인지 차는 멀쩡했다. 차원우가 완벽한 정장 차림인 게 거슬릴 뿐이다. 내가 다 민망해지는 것 같아서 선보러 가냐고 툴툴거리며 차에 탔다.
“두 가지만 약속하고 가자.”
“뭐.”
“오늘 내가 어디를 데려가서 뭘 하더라도 이거 돈 아깝다, 이 값이면 고기를 두 끼는 더 먹겠다, 돈이 썩어 나냐, 돈지랄 하지 마라, 이런 말 안 하는 거다.”
“…일단 그렇다 치고.”
“그리고 이거 오그라든다, 하지 말자, 닭살 돋는다, 민망하다, 쪽팔린다, 토 나온다, 오징어 될 것 같다, 이런 것도 안 되고.”
“오그라드니까 오그라든다고 하지.”
“남들 다 하는 데이트 할 거니까 오그라들 거 하나도 없어.”
이쯤 되면 불안하거나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무서워지고 있었다. 길바닥에서 꽃다발을 바치는 차원우의 모습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안 돼, 하지 마, 도망갈 거야, 대로변에서 게이 인증 하고 싶지 않아, 설마 그래도 지 새끼도 사회적 지위라는 게 있는데 그런 짓은 안 하겠지. 미심쩍기는 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 원우가 시동을 켜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아무 생각 없이 주소를 보다가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미쳤냐? 돈이…!”
“그런 말 안 한다며. 일 분은 버텨봐라 좀, 십 초도 안 됐거든?”
생전 가본 적도 없고 가볼 생각도 없던 특급 호텔 주소에 나는 잠시 넋이 나갔다. 돈 아깝다, 돈이 썩어 나냐, 돈지랄, 기타 등등 원우가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입 안을 뚫고 나올 것처럼 맴돌았다. 첫 번째가 호텔이면 두 번째는 대체 어디일지 감도 안 온다.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는 환대를 받으면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잡아놓고 저렇게 당당하게 들어가나 싶어서 진지하게 여장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목적지는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죄다 남녀 커플들과 가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을 지나서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돈이, 소중한 월급이, 이 값이면 고기가, 카드로 했을 텐데 다음 달 고지서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착잡해져서 유리창 너머의 야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원우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마음 편하게 좀 놀자, 오늘만, 어?”
“…편해. 존나 편해.”
“너 머릿속에 지금 계산기 막 돌아가는 거 보인다.”
“야,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이런 데 너무…!”
비싼 거 아니냐고 딱 한 번만 말을 하려다가 직원이 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곧 줄줄이 나오는 코스 요리를 하나씩 먹으며 나는 넋이 나갔다. 쥐똥만큼 주면서 종류가 많기도 하다. 그래도 원우가 메뉴를 신경 써서 고른 건 알겠다. 거의 대부분이 내가 좋아하는 재료가 들어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나온, 이름이 엄청나게 길어서 기억도 안 나지만 대충 바닐라와 호두가 들어갔다고 하는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퍽퍽 퍼먹고 있는데 뚜껑이 덮인 커다란 쟁반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코스가 끝난 줄 알았는데 메뉴가 또 남았나 보다. 의기양양해 하면서 원우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동시에 뭐야,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야 나 망고 알레르기….”
“딸기로 주문했는데 왜 망고야, 아 진짜.”
인심도 좋게 한두 개도 아닌 수북한 망고가 올라간 케이크를 어쩌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더니 원우가 종업원을 불렀다. 딸기로 해달라고 했는데 왜 망고가 왔냐, 분명히 생크림 케이크 위에 딸기로 하트 그려서 해달라고 했는데, 주문 확인해 봐라, 분명 딸기였다, 딸기 하트였다, 원우가 지배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남자만 둘이 있는 테이블에 놓일 딸기 하트 생크림 케이크를 생각하니까 막막해져서 나는 얼른 원우를 말렸다. 망고만 걷어내고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변명을 하면서 케이크를 잘랐는데 안이 노랗다. 이 망고 새끼는 왜 여기까지 처박혀 있고 지랄이야. 결국 먹는 건 포기했다. 데이트를 하다 말고 목 안이 부풀어서 응급실에 실려 가고 싶지는 않았다.
계획했던 게 틀어져서인지 원우는 시무룩해하는 것 같더니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곧 활기를 되찾았다. 불길한 예감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오늘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영화관을 간대서 설마 커플석을 예매했냐고 하니까 괜히 신호가 왜 이렇게 안 바뀌냐면서 딴청을 부린다. 나는 반쯤 포기했다. 어디 한 번 해 봐라, 어디까지 하나 보자, 그런 기분이었다. 팝콘과 콜라까지 사들고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원우의 뒤를 쫓아가다가 나는 입구에서 멈칫했다. 이건 또 뭐야.
“왜 안 오냐.”
“야, 이… 아니, 잠깐만, 이런….”
대체 영화관에 왜 좌석이 서른 개밖에 안 되는 걸까. 영화관이야말로 돈이 썩어나나. 서른 개 가지고도 장사를 하냐. 심지어 죄다 커플석처럼 되어 있다. 황망한 정신을 수습할 새도 없이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영화 시간에 거의 맞춰 오기도 했고 평일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얼마 없어서 다행이었다. 미어캣이 된 것처럼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는 내 팔을 잡아당기면서 원우가 웃었다.
“촌티 내지 마라, 좀.”
“촌티가 아니라…!”
“여기 칸막이 있어서 옆자리 잘 안 보이니까 그냥 앉아. 네가 그렇게 서 있으면 더 쳐다본다.”
안 그래도 앞쪽에 있던 사람 두어 명이 뒤를 돌아보는 것 같아서 나는 잽싸게 자리에 앉아 아예 반쯤 누워버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영화만 보고 빨리 집에 가자고 해야겠다. 집에 가서 족발집 앞치마라도 입어줄 테니까 얼른 가자고 해야겠다.
영화까지 로맨스 영화면 고개를 못 들 뻔 했는데 다행히도 요즘 한참 인기를 끄는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여서 마음을 놓고 봤다. 건물이 뻥뻥 터져 나가고 차가 휙휙 뒤집히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지구 종말 급 상황이 펼쳐진 혼돈의 도시를 남의 일처럼 구경하다 보니까 잠이 솔솔 밀려왔다. 의자도 편하고, 따뜻하고, 배까지 부르니까 잠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대놓고 의자를 젖히고 제대로 자기 시작했다. 얼마쯤 잤을까,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아서 부스스 눈을 떴다. 원우의 코트가 코끝까지 덮여 있었다. 허둥지둥 코트를 걷어내면서 일어나다가 원우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드냐, 노은율.”
“…….”
“어떻게 옆에 애인 두고 데이트 하다가 잠을 자냐고.”
“피, 피곤하니까 그러지, 여기 의자가 너무 편하니까… 그러니까 그냥 일반 상영관으로 예매하면 됐잖아.”
“그래, 좋은 데서 편하게 영화 보자고 이런 데 예약한 내 잘못이다.”
삐졌나 보다. 사실 나 같아도 삐질 것 같다. 그냥 미안하다고 할 걸 그랬다. 집의 지읒자도 못 꺼내고 사람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나는 원우의 뒤를 쫓아갔다. 이제 어디 가는 거냐고, 오늘 준비 왜 이렇게 많이 했냐고 비위를 맞춰가며 살살 달래자 단순한 차원우는 그거에 또 금방 넘어왔다. 혹시 피곤하면 그냥 집으로 가도 된다고 슬쩍 말을 꺼냈다가 단박에 커트당한 다음부터 나는 아예 해탈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데이트는 데이트로구나.
다음 코스는 남산타워였다. 요즘 착해진 차원우가 TV에 나왔던 것처럼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자물쇠를 걸자고 고집을 피우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웠다. 온통 커플로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남자 둘이 멀뚱멀뚱 야경을 보다가 내려왔다. 한강 드라이브, 둔치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키스를 하다가 진도를 빼려고 해서 아무리 해탈을 했어도 여기서는 못하겠다고 발버둥을 쳐서 밀어내다가 원우 얼굴에 훅을 날리는 바람에 달래주느라 또 한참 걸렸다. 마지막엔 와인바, 도대체 어느 나라 언어인지도 모를 말로 쓰인 와인을 벌컥벌컥 원샷을 해도 성에 차지 않아서 몇 잔을 연거푸 먹다 보니까 뜨악할 만한 계산서가 나왔다. 정석적으로 준비한 코스를 차근차근 밟고 나서 집에 올 때가 되니 정말 엄청나게 피곤했다. 그래도 미안하긴 했다. 처음에는 민망했고 중간에는 피곤했고 나중에는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해 보겠나 싶어서 나도 조금 즐기긴 했는데 데이트 하는 내내 원우한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서였다.
아무리 남들 다 하는 데이트여도 오그라드는 건 오그라드는 거고 안 맞는 건 안 맞는 거다. 우리한테는 이런 데이트가 최고다. 집 앞 마트에서 소주 두 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서 들어왔다.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놈이니까 안주는 내가 준비하기로 했다. 예전의 나처럼 영락없는 애들 입맛이 된 차원우가 좋아하는 소시지 야채볶음과 콘버터를 만드는 동안 원우는 이런 날까지 집안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소파에 앉아 요리를 하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앉아 있다. 하루 정도는 봐줘도 괜찮겠지. 매일 농땡이 피우는 것도 아니고. 관대한 마음으로 요리를 하다가 뒤로 딱 돌았는데 뭔가가 반짝거렸다. 식탁에 턱을 괴고 있던 원우가 최면을 거는 것처럼 목걸이를 손끝에 걸고 흔들었다.
“…뭐야, 그건?”
“목걸이 몰라? 목걸이. 목에 거는 거.”
“야 내가 멍청이냐… 가 아니라, 그거 샀…?”
“샀지 그럼 주워왔겠냐.”
그러더니 티셔츠를 살짝 내려 목을 쓱 보여 준다. 무한대 기호 모양의 펜던트가 원우의 목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이 빠졌다.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도 커플링 같은 건 챙기기도 귀찮고, 하고 다니기도 부담스럽고, 잃어버리면 피차 기분 상하니까 맞추지 말자고 해놓고 이제 와서 웬 커플 목걸이….
“내가 이걸 사면서 느낀 건데 우리 좀 천생연분인 것 같다.”
오그라든다거나 닭살 돋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나는 그냥 아예 말을 안 했다.
“이니셜 목걸이 따로 맞출 필요도 없더라. 둘 다 이름에 이응만 두 개씩 들어가잖아. 그래서 이걸로 샀지. 이응 두 개 붙인 거 같잖아. 멋있지 않냐? 나 똑똑하지?”
“…….”
“이리 와 봐.”
원우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얼른 식탁을 잡고 버텼다.
“왜?”
“진짜 고마운데, 그거 안 하면 안 되냐?”
“그러니까 왜.”
나는 다급하게 변명하듯이 말했다. 회사 사람들도 갑자기 없던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어디서 났냐 누가 사 줬냐 애인 생겼냐 궁금해 할 거고, 혹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차원우는 길길이 날뛰는 망아지가 될 거고, 혹시 어디 같이 가야 되는 자리에서 누가 보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심장이 내려앉았다. 매번 별 생각 없이 그냥 습관이 되어 했던 말인데 지금은 정말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식탁을 꽉 붙들고 있는 내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가서 손등 위로 힘줄이 튀어나와 있을 정도였다.
그때 원우가 일어났다. 경직된 내 어깨를 둥글게 두어 번 쓰다듬던 원우가 말했다.
“애인이 사줬냐고 궁금해 하면 그냥 그렇다고 해. 애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네가 하던 대로 하고. 알아서 뭐할 거냐고, 내 애인 보여 주기 싫다고, 그렇게. 너희 회사 사람들 그런 거 일일이 캐묻는 사람들 아니잖아. 그리고 잃어버려도 화 안 내. 그냥 다시 사주면 되지. 맞춘 거 아니라니까, 있는 거 산 거야.”
“…….”
“또… 너랑 나랑 같이 가야 되는 자리 끽해야 민기네 만나는 거 아니면 집에 가는 건데, 이제 누가 봐도 문제 생길 일 없어.”
나를 끌어당긴 채로 원우가 목걸이를 채우고 내 목덜미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은율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등을 쓸어주는 손길도 다정하고 따뜻했다.
“이제 괜찮아. 노은율, 이제 우리 이렇게 해도 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속에서 자꾸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숨을 참았다. 숨을 참고 있으니까 몸에 힘이 안 빠져서 계속 부들부들 떨렸다. 머리가 텅텅 빈 것 같다. 원우가 계속 내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었다. 떨림이 잦아드는 것 같다가도 다시 바짝 긴장을 하면 괜찮다고 속삭이며 나를 가득 안고 목덜미와 귓가에 입술을 비빈다. 감은 눈앞으로 예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남겨두고 살기에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까마득한 구석으로 밀어 넣었던 것들이었다.
“다들 괜찮아졌어. 민기도, 소정이도, 동생들도, 부모님도, 그리고… 나도.”
“…….”
“너만 남았어.”
“…….”
“겁 안 내도 돼. 무서울 일도 없어. 이제 우리한테 아무도 뭐라고 안 그래. 남들처럼 연애하고 좋아하면서 살아도… 이제 괜찮아.”
눈가가 축축해지는 것 같아서 당황하고 있다가 원우가 몸을 떼어내는 바람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목에 매달려 있는 목걸이 펜던트가 보였다. 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헤집어진 기억 틈으로 이제야 떠올랐다. 지난번에 기억해 내지 못했던, 내가 처음 고백했을 때 원우가 대답으로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다른 사람 생기면 관두자고, 그냥 서로 외로우니까 가볍게 즐긴다고 생각하고 해 보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날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었다. 혹시나 해서 건드린 차원우의 감정을 내가 헛짚은 거라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불안했었다. 그때 차원우가 이 말을 했었다.
“…연애하는 거 못 관두겠으면, 그땐 어떡할래, 네가 나 평생 끼고 살 거야?”
원우는 기억할까.
그리고 생뚱맞게 튀어나온 내 말에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게 한 원우가 대답했다.
“진득하게 십 년 붙어서 살아도 안 질렸는데, 평생을 못 끼고 살겠냐.”
- 혹시 아냐, 진득하게 한 십 년 사는데도 안 질리면 그땐 평생 끼고 살든가 해야지.
나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내가 했던 대답보다 더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다른 말을 더 보태지 않아도, 내 마음이 어떤지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봐달라고 내비치지 않아도, 차원우는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젖은 내 눈 끝을 손가락으로 눌러 닦는 원우의 볼을 가볍게 감싸 쥐고 키스했다.
키스를 하느라 바짝 타버린 소시지 야채 볶음과 콘버터는 죄다 버리고 집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고 찌개를 데워서 술을 먹었다. 내가 소주 두 병 반, 원우가 반 병, 주량까지는 좀 남았지만 이상하게 평소보다 기분이 좋았다. 묵직하게 추처럼 달려 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되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원우를 쫓아 나와서 그네를 타며 기다리다가 원우가 가자고 손짓을 했을 때 나는 손을 잡고 원우의 옆에 나란히 섰다. 집에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아파트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가 꽤 차가워서 내가 몸을 움츠릴 때마다 따뜻하게 해 주겠다면서 키스를 하는 원우를 못이기는 척 받아주고, 원우가 뒤에서 점퍼로 나를 싸매서 안아주기도 하고, 인기척이 느껴지면 허둥지둥 밀어내기도 하고, 그렇게 연애 초기에도 잘 안 하던 닭털이 풀풀 날리는 산책을 하고 있었다. 원우가 나를 쿡쿡 찌르더니 하늘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가로등 불빛 틈새로 눈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젠장, 내일 차 존나 막히겠네. 출근 망했다.”
“하여간에 하룻밤을 못 넘기냐, 노은율. 분위기 좀 잡자, 어?”
“…많이 오면 버스 밀리니까 그러지.”
“예이,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십 년 동안 이러고 살았는데 지금 와서 또 바꾸라고 하면 될 리가 있나.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원우가 눈 맞고 있지 말고 들어가자고 나를 잡아끌었다. 손을 잡고 집 쪽으로 걷다가 괜찮은 생각이 나서 멈춰 섰다. 앞서 가던 원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차원우.”
“어.”
“태워다줘서 사랑해.”
“그렇게 버스 타고 다니기가 싫었냐? 차 끌고 다닐래?”
“잘 들어봐. 태워다줘서 사랑한다고.”
나를 빤히 보던 원우가 푸하, 하고 웃기 시작했다. 괜히 목이 근질근질한 것 같아서 벅벅 긁었다. 밤이라 다행이다. 얼굴 빨개진 거 잘 안 보이겠지.
“또 없냐?”
“음… 목걸이 줘서 사랑해.”
“또.”
“오늘 돈 많이 써줘서 사랑하고.”
“더 해 봐.”
“못 먹긴 했지만 망고 케이크 주문해 줘서 사랑하고.”
“또.”
기어이 앞에 붙은 건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모양이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곰곰이 생각을 하면서 코를 훌쩍거리자 원우가 소매 끝으로 내 코끝을 쓱 문질렀다.
“콧물 닦아줘서….”
“야 그건 사랑하지 마, 이 코찔찔이야.”
“추운데 어떡해.”
“그러니까 빨리 한 마디만 하고 들어가자고. 길게 말할 거 있냐.”
“…돌아봐.”
얼굴 보고는 못하겠다. 원우는 순순히 뒤로 돌아섰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널찍한 등을 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뒤에서 허리를 확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중얼거렸다. 네가 차원우라서 사랑해.
오늘이 지나면 이 말보다 다른 말을 더 많이 하게 될 거다. 늘 그랬으니까. 셔츠 제대로 뒤집어서 벗어놔, 보일러 끈 거 확인해, 카드 값 빠질 때 됐어, 나 오늘 야근해, 그런 말들. 그래도 하나 달라지는 게 있다면, 어쩌면 가끔은 이렇게 능청스럽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치킨 시켜줘서 사랑해, 다리미질 대신 해 줘서 사랑해,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럼 차원우는 또 오늘처럼 가만히 기다려줄 거다. 내가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그게 우리가 해 왔던, 그리고 앞으로 하게 될 연애의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