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 그래서 기껏 세 번이나 전화했더니 받아서 한다는 소리가 응 소정아, 고마워, 그러더라.
“…그래. 알았다.”
- 왜 그런 거 시켰는지 알 것 같기는 한데… 어쨌거나 부탁한 대로 해 줬으니까 노은율한테 닭강정 꼭 잊지 말고 보내라고 해.
“알았어.”
- 원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티가 났나, 나는 헛기침을 했다.
- 일단 무슨 일 있으면 알려주기로 했으니까 전화는 했는데, 너….
“별일 아냐.”
- …알았어. 나중에 얘기하자.
“그래. 전화할게.”
- 응, 그리고 혹시, 원우야.
“예전처럼 안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그게 아니라 혹시 은율이가 까먹을지도 모르니까 알려주려고. 닭강정 세 박스야.
참 나, 하고 웃었더니 전화 너머에서 소정이가 같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안으로 주문을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임산부와 통화했다가 기껏 하고 있는 태교를 시원하게 말아먹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열이 받아 있었는데 그 마지막 닭강정 세 박스 때문에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뜨끈했던 머리가 좀 식는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소정이는 나와 은율이를 다루는 데 탁월하다.
전화를 하느라 잠깐 나왔던 응급실 복도에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의사에게 손을 맡기고 불안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은율이와 눈이 마주쳤다. 입모양으로 왜 안 들어와, 하고 묻는다. 나는 그냥 벽 뒤로 몸을 감췄다. 머리가 식는 것 같았던 건 착각이었나 보다. 그 피가 거꾸로 솟는 꼴을 보고도 손이 걱정돼서 화를 제대로 못 냈다. 그랬더니 속이 더 끓고 있었다.
예전에는 은율이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나 누군가에게 웃어주는 모습만 봐도 눈이 뒤집히고 쌍욕이 혓바닥에서 춤을 추는 사태가 벌어져서 난리를 쳤다고 하지만 하루 이틀 같이 산 것도 아니고 이제 고작 손 좀 내줬다는 걸로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 아니,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일단 오늘은 그 이유만으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계속 그렇게 묶어 두고 싶어서 안달을 할 거였으면 은율이를 그 회사에 보내지도 않았을 거다. 야근과 철야를 수시로 시키는 것도 빡치는 판에 거래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거절하지 못할 술자리가 생겨 매번 참석해야 하고, 주말에 집에 널브러져 있다가도 일정이 당겨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회사로 뛰어가야 하는 것 등등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마음에 드는 걸 굳이 찾자면 은율이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이라는 것이었고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나는 은율이가 그 회사에 다니는 걸 이해해 주었다. 진상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뺑이를 돌아도, 집에 들어오지도 못해서 옷을 갖다 줘야 되는 일이 생겨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가 심하게는 근처 병원에서 링거까지 맞고 오더라도 노은율 입에서 이 일 너무 싫다거나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거나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이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에 단련이 되어 있다 보니 최 실장 같은 새끼가 자기를 고생시킨 게 은율이 입장에서는 그다지 큰일도 아닐 것이다. 다만 앞서 거쳐 간 수많은 씨발놈들과 최 실장이 다른 게 있다면 최 실장이 은율이한테 고백을 했다는 것이고 그 한 가지가 나한테는 너무 크다. 그것 때문에 거슬리지 않아도 될 일이 죄다 거슬리는 거였다.
그래, 여태 같이 살면서 지은 죄가 있으니 백 번 양보해서 화 안 내고 다 넘어가줄 수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정신이 없어서 누가 내 손을 붙들고 있든 발을 붙들고 있든 모를 때도 있고, 특히나 그렇게 다친 직후라면 더더욱 다친 데만 신경이 쏠려서 미처 그 상황을 인식을 못할 수도 있다. 임자 있는 사람한테 좋다고 고백까지 하고 좋아하는 거 안 받아줬다고 온갖 초딩식 진상은 다 피운 새끼가 손을 붙들고 있어도 그런 새끼가 손을 붙들고 있다는 것보다 아프다는 게 먼저라서 밀어낼 생각을 좀 늦게 할 수도 있다.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건 똑같은 일이 있어도 노은율은 화를 안 낼 것 같은데 나만 이렇게 빡돌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서였다. 혹시 알게 되면 마음 상해 할까봐 만취해서 안기는 사람 하나를 택시에 짐짝처럼 실어 보내놓고 식은땀을 줄줄 흘려가며 집에 오는 내내 고민을 했었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오해하지 않고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 그래서 기껏 마련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니 지 말만 하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아직 그 정도로 취한 거 아니라고 뻗대길래 어렵게 말을 했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딴 새끼한테 추파도 받고 오다니 기특하다, 잘 키워 놨다, 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진짜. 마음에 없는 소리라도 누가 내 애인한테 집적거려 이거 안 되겠네 우리 애인이 너무 잘나서 별 날파리 같은 게 다 꼬이는구나 긴장 좀 타야겠다 이런 말 한 마디 해 주면 어디 덧나나. 그래놓고 자기한테 추파 던지는 날파리 하나가 옆에 달라붙어서 뭔 짓을 하고 있어도 이건 뭐 위험하다는 생각도 없고 경각심도 없는 것처럼 군다. 막말로 최 실장이라는 새끼가 회식 빙자해서 술이 떡이 되도록 먹여놓고 어딜 끌고 가더라도 노은율이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걸 내가 잘 알다 못해 아주 머릿속이 번쩍거릴 정도로 깨닫게 되었는데 왜 본인은….
“원우야, 나 이거 좀 해 줘.”
왜 본인은 저렇게 귀엽냐는 거다… 가 아니라, 아니 이게 아니라, 아니 귀엽긴 귀엽다. 근데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화는 내야겠는데, 화를 내자니 진짜 오랜만에 너무 애처럼 구니까 또… 도대체 내 인격은 몇 개인가. 지킬과 하이드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았다. 이런 모습의 노은율을 보면 헤벌쭉 좋아서 침을 질질 흘리는 병신 차원우 새끼가 슬슬 속에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코트 팔 한 쪽만 대충 끼우고 응급실 밖으로 나와서 나에게 다른 팔을 내미는 은율이를 세워놓고 소아과 앞 엄마들이 된 기분으로 옷을 제대로 입혀주고 꼼꼼하게 잠가주었다. 분명히 일부러 저러는 거 알겠는데 알면서도 좋아서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내가 멍청이 바보 등신이다.
“그냥 근육이 좀 놀라서 그런 거지 뼈에 이상 있는 건 아니래. 뜨거운 걸로 찜질해서 뭉친 거 좀 풀어주고, 내일 다시 와서 제대로 진찰 받아보라고 했어.”
“…….”
“그래도 돈 생각보다 많이 안 나왔다. 우리 뭐 맛있는 거 먹고 갈까?”
“…내가 밥이 넘어가겠냐, 지금?”
귀여운 노은율한테 홀려서 좋다고 처웃고 있는 내면의 병신 차원우를 꾹꾹 밟아 밀어 넣고 나는 얼굴을 굳혔다. 쭈뼛거리던 은율이가 말없이 내 뒤를 쫓아왔다. 주차장으로 가면서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지금 바로 말을 꺼내면 대화를 하는 내내 소리 안 지르고 화 안 내려고 버티다가 내가 뒷목을 잡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심한 말을 해서 또 뱉어 놓고 후회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 사람들이 있어서 함부로 행동을 못하는 밖에서 뭐라도 먹으면서 일단 진정을 하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다시 말을 해야겠다. 그렇게 고민을 한 것 자체가 나에게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안전벨트를 못 당겨서 끙끙대고 있는 은율이 몸을 뒤로 젖히게 하고 대신 벨트를 매주었다. 차를 빼고 출발할 때까지도 내 눈치를 살살 보고 있던 은율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가 왜 화가 난지는 알겠는데….”
양손으로 핸들을 꽉 쥐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릴렉스, 차원우 릴렉스. 움츠러든 은율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억지로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일단 집에 가서 얘기해.”
“그럼 하나만 대답해 주고 가. 최 실장한테 화가 났는데 최 실장이 가버려서 나한테 화를 푸는 거야, 아니면 내가 그러고 있던 거 본 것 때문에 화가 난 거야?”
“너한테 화풀이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그러고 있던 거 본 걸로 화난 것도 아니니까 조용히 하고 집에 가자.”
“…아니야?”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은율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최 실장 새끼 때문에 화가 났지만 그 새끼가 가버렸다고 은율이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로 내가 씨발놈인 것도 아니고, 그 자리를 은율이가 바로 피하지 않아서 화가 났던 건 처음에 애 같은 고집 부리면서 성질이 났을 때나 그런 거지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헛다리를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은율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챙길 건 다 챙겼다. 안전벨트 대신 풀어주고, 가방 들어주고, 집에 들어와서 옷 갈아입는 거 도와주고, 떨어뜨려서 더러워졌다고 빨래 통에 대충 넣으려는 목도리 가져다가 세면대에서 손빨래까지 해서 널어주었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확실히 차분해졌다. 물론 아무리 차분해져봤자 벌써 화가 풀렸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은율이가 뭐라고 말을 해도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지랄발광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데 성공한 정도다.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조용히 식탁 앞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던 은율이가 밥상이 다 차려지고 내가 맞은편에 앉고 나서야 있잖아, 하고 운을 뗐다.
“나 이틀 쉬고 다시 출근해.”
“사표 낸다며.”
“그냥 안 내기로 했어. 팀장님이 보너스랑 특근수당도 따로 챙겨주겠다고 그래서.”
“그래서 아까 그 새끼가 그런 거냐? 다음 주에 보자고.”
물을 마시던 은율이가 콜록, 하고 기침을 했다. 전투적으로 밥을 퍼먹을 기세로 숟가락을 꽉 움켜쥐고 눈만 들어서 빤히 쳐다보았다.
“어… 근데 따로 보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회의 때문에….”
“그 회의 끝나면 또 너 뺑이 돌리고?”
“이제 안 그런대. 아까 그거 사과하러 온 거였어. 애인 있는 사람한테 들이댈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고, 더 귀찮게 안 한다고 그랬어.”
“그래서, 이제 내가 뭐라고 해 주면 되는데?”
“…어?”
“그래도 사과를 할 줄은 아는 놈인 걸 보면 그 새끼가 아주 병신은 아닌데, 그런 놈이 너 좋다고 쫓아다닌 거 보면 내 새끼가 잘나기는 잘났나보다, 기특하다, 밖에 나가서 추파도 받고 오고 장하다, 그래야 되냐?”
은율이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나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고 은율이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안한 기색이 역력하고 눈치를 보느라 어색하게 웃고 있던 은율이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하냐.”
“그따위라니, 네가 한 말 그대로 한 건데.”
“장난하냐?”
“장난처럼 보이냐?”
“야, 차원우.”
“뭐.”
말이 끊긴 식탁 위는 고요한 전운이 감돌았다. 이런 분위기가 조성이 되면 보통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편이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 잘못이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화를 내는 게 전혀 해서는 안 될 짓인 것도 아니니까.
“…최 실장이 내 손 만지던 거 때문에 너 빡친 거 나도 이해는 하거든.”
“그래서 빡친 거 아니라고 말했다, 아까.”
“그럼 아예 아까 최 실장 그냥 보내지 말고…!”
“그 새끼한테 한 마디도 못하고 그냥 보낸 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니라고도 아까 말했고.”
“아 그럼 뭔데 진짜, 차라리 그냥 성질을 내든가!”
“씨발 존나 성질내고 싶은데 쪽팔려서 못 내겠다, 됐냐?”
나한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내 입으로 나만 질투하는 것 같아서 존나 배알이 뒤틀리고 있다고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밥을 먹을 기분도 안 나서 그릇을 죄다 싱크대에 쓸어 넣고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 끝에 앉아서 욕을 속으로 삼키느라 헛숨을 들이쉬다가 문득 거울을 봤다. 꼴 참 볼만 하다. 혼자 열 올라서 얼굴까지 시뻘게져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뜨끈한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최대한 생각을 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 새끼가 아까처럼 수작 걸 때 경계를 좀 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만 좋아 죽는 것 같은 기분이라 좀 창피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런 일에 굉장히 화를 잘 내고 질투 폭발을 하는 쪼잔한 놈이니까 너도 하다못해 예의상으로라도 나한테 질투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이 정도 선에서 말을 하면 되나. 근데 도저히 두 번째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안 하면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지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지킬과 하이드가 또 등장했다. 서운하게 씨발 살다 살다 질투도 구걸하고 앉아있냐는 다혈질의 차원우, 쪽팔려도 할 말은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이성적인 차원우, 차원우 두 명이 차원우 속에서 정면대결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너 아까 씨부린 그거 뭐냐?”
“뭐.”
“밖에 나가서 추파 받고 왔다고 장하다고 존나 비꼰 거 그거 뭐냐고 새끼야. 진심으로 한 말이냐? 그게 그렇게 기특해?”
“네가 한 말 그대로 했다고 말한 거 못 들었냐, 아까?”
“내가 뭘 어쨌다고!”
“기억 안 나냐?”
“그러니까 뭘!”
은율이는 거의 울 기세였다.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으면서 눈빛은 마구 일렁이는 걸 보고 있으려니까 뒤죽박죽 뒤섞였던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내가 하하, 하고 웃자 은율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허무하다. 나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노은율은 그냥 기억을 못하는 거였다. 사람이 존나 진지하게 앞으로 너 걱정 안 하도록 처신 잘하겠다고 열심히 설명을 한 걸 죄다 술기운에 날려먹고 까먹은 거였다. 전투력이 바닥을 치면서 웃음만 계속 나왔다. 지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는 놈을 붙들고 화를 내고 있으니까 답이 안 나오지.
인정한다.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세포 남자다. 은율이가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가 무섭게 화는 잠시 밀어두고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쪽팔린 건 일단 둘째 치기로 했다. 침대 옆에 던져놨던 가방에서 얇은 파일 하나를 꺼냈다.
“앉아봐.”
“미안하다고 아까부터 설설 기어 줬잖아. 뭘 더 어떻게 해 줘, 무릎 꿇고 빌어줘? 딴 새끼한테 손 붙들린 거 정신없어서 그냥 둬서 존나 죄송하다고 싹싹 빌어주면 되냐?”
“술 취해서 지가 한 말도 기억 못하고, 아까부터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니라고 말을 해도 기억 못하고, 너 생각보다 기억력이 좀 안 좋다.”
“말장난할 기분 아니거든?”
“난 화낼 기분 아니야. 그러니까 앉아 보라고.”
팔을 붙들어서 침대 옆에 앉히고 눈앞에서 파일을 휙휙 흔들었다. 짜증스럽게 파일을 낚아채간 은율이가 파일은 볼 생각도 안 하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노은율.”
“왜.”
“아 이 얘기 다시 하기 존나 쪽팔리는데… 그래, 내가 참는다.”
“뭘 참아.”
“그거 먼저 봐.”
미심쩍은 표정으로 은율이가 파일을 휘리릭 넘겼다. 업무 시간에 짬내서 사람들 모르게 만드느라 개고생을 한 내 보고서를 대충 읽던 은율이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래, 뭔지 모르겠지. 알 턱이 있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누가 네 회사 생활 보고하래? 아니면 이제 나도 이렇게 써 오라고 견본 만들었냐? 회사에 전화질 하더니 이젠 아예 서류로 받으시겠다?”
“왜, 말 못할 은밀한 회사 생활이라 보고하기가 좀 그래?”
“야!”
“너 어제 나랑 술 먹다가 한 얘기 하나도 기억 안 나지? 존나 중요한 얘기였는데.”
따발총처럼 쏘아 붙이려던 은율이가 입을 다물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기억 못해도 두 번은 안 말해.”
“뭔데.”
“회사 인턴이 나한테 들이댄다고.”
“…근데.”
“한 달은 걔 얼굴 계속 보면서 일해야 되고. 나도 찜찜하기 싫고 너 찜찜하게 만들기도 싫어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일일이 보고해 줄 테니까 괜히 혼자 꽁해 있지 말라고 했다. 기억 안 나?”
“…….”
“그랬더니 네가 존나 기특하다며. 어린놈한테도 먹히냐고, 밖에 나가서 추파 받고 온다고 내 새끼 잘났다며. 이제 기억 나냐?”
은율이는 한참 말이 없었다. 딴에는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데 술 먹고 끊긴 필름을 찾아올 재주가 있었으면 진작 찾아왔을 것이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었다.
“기억 안 나지? 악!”
말을 덧붙이려다가 배를 맞았다. 와 진짜 억울하다. 쪽팔림을 감수하고 애인 속 안 썩이겠다고 열심히 했던 말을 기억 못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걸 두 번 말하게 해놓고 때리기까지 하다니 억울함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배를 감싸고 눈을 확 치켜떴다가 이번엔 머리를 한 대. 결국 억울함이 폭발했다.
“아 아파, 좀!”
“뻥카 치지 마 새끼야, 내가 언제!”
“뻥카 아니라고 씨발!”
“네 입에서 어린놈이 들이댄다는 소리가 나왔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기특하다고 했다고? 사람 술 좀 취했다고 이딴 식으로 구라까기 있냐?”
“와 노은율 적반하장도 수준급이다, 나 진짜 서운했거든?”
“개새끼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미쳤냐? 내가 미쳤다고 그걸 기특하다고 지랄을 해? 어떤 새끼가 집적대, 어떤 씨발놈이 내 거한테 수작질이야! 너 회사 그만둬, 씨발 보고서 백 장 써와도 내 눈으로 못 보는데 내가 뭘 믿고 널 출근을 시켜, 내가 병신이냐? 병신이야?”
아니 넌 병신 아니지, 병신은 나다. 가드도 제대로 못 올리고 여기 저기 정신없이 처맞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작정하고 침대에 올라앉아서 나를 후드려 패고 있는 은율이의 어깨를 잡아서 뒤로 넘어뜨렸더니 이번에는 발이 날아온다. 아예 다리 사이에 허리를 꽉 끼고 몸으로 눌렀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큭큭거리며 웃었더니 한참 씩씩대며 씨발 개발 욕을 날리던 은율이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새끼가 진작 좀 이럴 것이지 사람 속상하게.
“…그렇게 서운했냐?”
낌새가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은율이를 쳐다보았다. 아차 싶었다. 씩 웃고 있던 은율이가 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당했다.
“이제 됐지?”
“야 너, 아 씨발, 사람 이렇게 병신 만들래?”
“우쭈쭈, 우리 질투쟁이 우쭈쭈.”
“엿도 존나 창의적으로 먹인다, 어?”
“나 요즘 창의력 딸려서 너무 힘든데 내 엿이 그렇게 창의적이었어? 고맙네.”
“…너 알고 그랬지.”
“미안한데 진짜 기억 안 났고 감으로 때려 맞췄다. 제대로 맞았지?”
애초에 노은율이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때 저 새끼가 술을 열심히 처먹더니 혹시, 하고 의심을 해 봤어야 했다. 그 최가의 개놈 때문에 화가 나 있을 때라 여유가 없어서 그 절호의 기회를 날려먹었다. 하다못해 은율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땍땍거릴 때라도 알아챘어야 하는데 그것도 나 창피할 일 만들기가 싫어서 짱구 굴리다가 날려먹었고. 기회만 제대로 포착했으면 떡밥 몇 개 던져 주고 알아서 눈치 까기를 기다렸다가 미안해하면서 달래준다고 살살거리는 걸 받아주기만 하면 됐을 텐데 내 입으로 줄줄이 토해놔서 다 망했다. 눈치 한 번 더럽게 빠른 노은율이 머리를 팽팽 굴리며 사건 정황을 파악하고 날 가지고 놀 때까지 나는 질투 안 해 줘서 서운했다고 대놓고 징징대고, 질투해 주는 낌새가 보이자 의기양양해하며 실실댔다. 이 정도로 멍청이인줄은 몰랐는데 차원우라는 새끼는 내 생각보다도 더 심각한 멍청이였다.
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민망함에 침대 시트에 머리를 처박고 몸부림을 쳤다. 머리카락을 다 뽑을 기세로 쥐어뜯으면서 아오 씨발, 아오 씨발만 연신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내 등을 토닥이던 은율이 쪽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굴을 번쩍 들었다. 보고서 파일을 막 집어든 은율이에게 얼른 손을 내밀었다. 은율이가 옆으로 몸을 틀어 피하면서 빙긋 웃었다.
“왜?”
“내놔.”
“나 보라고 써온 거잖아.”
“아 쪽팔린다고, 내놔!”
“차원우, 목소리가 크다? 밥도 안 먹었는데 힘이 막 펄펄 나나봐?”
“…줘.”
당연히 줄 리가 없다. 크지도 않은 침대 위에서 열심히 도망을 다니면서 보고서를 들춰 보려는 은율이를 몸을 날려 콱 찍어 누르자마자 밑에서 으악, 하는 비명이 터졌다. 은율이가 웅크린 채로 다친 손을 붙들고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고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배가 걷어차여서 나는 침대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쾅 박고 나서야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멍청한 게 아니라 은율이가 똑똑한 거라고 스스로를 열심히 위로하고 있었는데 두 번을 연달아 당하니까 그냥 빼도 박도 못하는 멍청이가 된 것 같아서 나는 기운 없이 침대 모서리에 고개를 기댔다.
“아홉 시 오 분, 인턴 부장님 심부름, 아홉 시 삼십오 분, 인턴 업무 프로그램 교육 현정이한테 맡김, 열 시 십 분….”
“읽지 마라 좀….”
“역시 회사 생활 허투루 한 게 아니구나. 보고서가 착실하네.”
얼굴이 뜨겁다 못해 목과 귀까지 다 뜨거워지고 있었다. 쓸 때는 이 정도면 은율이도 괜찮다고 하겠지, 하고 뿌듯하게 쓴 건데 막상 은율이가 저걸 소리 내서 읽고 있는 걸 보니까 맨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민망했다. 그래, 맨정신으로는 안 되겠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신줄을 놔야겠다. 내가 아무리 멍청해도 이 방면에서는 노은율보다 똑똑할 거다. 너덜너덜해진 자존심 회복을 위해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갔다. 은율이 손에서 보고서를 휙 빼내 던져버리고 입을 맞췄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은율이는 고개를 꺾으며 내 등을 껴안았다.
“이 보고서 마음에 안 들어. 하루 종일 인턴 뒤꽁무니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잖아.”
“안 쓴다, 이제.”
“왜 안 써, 다른 내용으로 써와. 하루에 내 생각 언제 어디서 몇 번 했나 그런 거.”
“…너 노은율 맞냐?”
“아닌 것 같으면 한 번 확인해 봐. 노은율 맞나.”
눈웃음을 샐샐 치면서 티셔츠를 제 손으로 벗는 은율이를 내려다보다가 허허, 웃었다. 목에 매달린 채로 내 셔츠 단추를 풀고 목덜미를 혀로 핥으면서 은율이가 말했다.
“안 까먹었지? 다리 풀려서 기어 나가지 말라고 했던 거.”
까먹을 리가 있나. 하체를 바짝 붙이고 귓불을 잘근거리면서 대답했다.
“너나 까먹지 마라. 다 벗고 앞치마, 욕조도 있었지 아마.”
바지를 벗기던 손이 멈칫한다. 그래 어디 한 번 죽어봐라 오늘.
크건 작건 나와 은율이가 다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소정이가 천 번 쯤 했던 말이 있다. 제발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자존심 세운답시고 뻗대다가 일 키우지 마, 적당히 굽혀줄 줄도 알아야지. 물론 소정이가 그 이야기를 천 번이 아니라 만 번을 해도 우리는 만 번을 흘려들을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정 굽혀주고 싶으면 허리나 굽혀주면 되지.
첫 번째를 꼭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몰아치듯 할 때도 차원우 이거밖에 안 되냐고 허세를 부리던 노은율은 고작 두 번째 사정을 끝냈을 뿐인데 벌써 흐물흐물 늘어진 채로 가쁜 숨만 색색 내쉬고 있다. 아직 빼지 않은 내 것을 한 번 더 깊이 밀어 넣으면서 입맛을 다시자 은율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지 이를 악물면서 허리를 뒤틀었다. 들썩거리는 가슴 위로 몸을 겹쳐서 누르면서 귓가를 축축하게 핥을 때마다 진저리치며 떠는 몸이 느껴졌다. 절정이 채 가시지 않아 엄청나게 민감한 상태라는 뜻이다. 이럴 때 장난을 치면 꽤 좋은 반응이 나온다. 닿은 가슴 사이로 손을 넣어 유두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면서 일부러 바람을 잔뜩 넣어 낮게 속삭였다.
“그만할까…?”
“아, 흐으윽….”
“은율아. 그만해?”
꼭 대답을 하는 것처럼 꽉 조여드는 입구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고개를 저어가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던 은율이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말을 할 기운이 돌아왔는지 헐떡이며 말했다.
“누가, 그만하래.”
“그냥 물어봤어. 너 너무 힘들어보여서.”
“안 힘들, 잠, 깐…!”
“잠깐 뭐, 잠깐 쉬어?”
“안 쉬어, 아으으, 개새끼야. 아, 아아!”
빠지기 직전까지 성기를 빼냈다가 내벽을 온통 긁어가며 단번에 밀어 넣었다. 눈은 반쯤 풀려서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몸서리를 치면서도 끝까지 안 지려고 아등바등하는 게 귀엽긴 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겨주고 깊이 들어간 내 것을 안에서 잘게 흔들었다. 역시 섹스는 강약약이 최고지. 한 번 정점을 콱 찍어 눌렀다가 주변을 문지르며 애를 태울 때마다 은율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흐느꼈다.
그렇게 한 번 더 휘몰아치는 절정이 지나고 나서, 뒤쪽의 감각과 맞닿은 배 사이에서 연신 쓸리는 느낌을 이기지 못해 쏟아 내고 나서도 금방 단단하게 발기한 은율이 것의 입구를 틀어막고 몸을 뒤집었다. 콘돔을 쓰지 않아서 질척해진 안을 긁어낼 새도 없이 뒤에서 박아 넣었다. 간신히 팔에 힘을 주어 버티고 있던 몸이 허물어지려고 할 때 허리를 붙들어서 엉덩이만 치켜 올리게 했더니 싫다고 욕을 하면서도 허리를 흔든다. 팔 한 쪽을 뒤로 붙들어 당기면서 내장까지 다 뚫고 올라갈 것처럼 깊게 치고 들어갔다. 소리도 못 내고 들썩이던 은율이가 막고 있던 손을 떼어 주기가 무섭게 그대로 시트 위에 사정했다. 순식간에 확 좁혀지는 안의 움직임을 참으려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앞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코끝을 타고 떨어지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침대에 대충 비벼서 닦아낸 은율이가 입술을 달싹거린다.
“나, 흐으, 나 그만….”
“뭐?”
“내가 졌, 아, 내가 졌다고, 그만, 앗!”
“하아… 다리 풀려서 기어 나가지 말라며, 나 다리 풀리려면 멀었다.”
엎드리고 있던 은율이를 일으켜 앉혔다. 뒤에서 껴안고 딱딱해진 유두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목덜미를 깨물었다. 하악, 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무기력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쳐올릴 때마다 안을 채우고 있던 정액이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질척거리는 마찰음이 생겼다. 일부러 더 들으라는 것처럼 방향을 맞춰 세게 쳐올렸다. 뜨거워진 몸이 허물어지면서 뒤로 체중을 실어온다.
“그만, 아, 원우야, 그, 만…!”
“낙장불입 몰라?”
“제발, 아, 너무, 너무 안, 흐윽.”
“너무 안이라 좋아?”
제대로 된 단어보다 신음과 흐느낌이 더 많이 섞인 목소리였던 데다가 나도 눈가가 뜨거워질 정도로 열이 오르고 있어서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는데 굳이 주의 깊게 듣지 않아도 내용은 뻔할 뻔자다. 개새끼야 그만하라니까 내가 졌다 그 말 취소라고 나쁜 놈아, 뭐 그런 거였겠지. 당연히 나는 들은 척도 안했다.
아침 일곱 시. 허벅지와 허리가 뻐근했다. 나는 침대 옆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했다. 꼭 조깅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앞으로는 저녁 운동 말고 좀 일찍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해 볼까. 아직 캄캄한 밖을 내다보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붕대가 감긴 손가락이 이불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다. 옆으로 들어가서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안고 토닥이자 은율이가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칭얼거렸다. 나도 나지만 노은율도 보통이 아니긴 하다. 감도가 안 좋아져서 한 번 빼내고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던 이후로는 아예 세는 걸 포기했는데 그렇게 잡아먹히고도 내가 좀 껴안았다고 잠이 깨서 말할 정신이 있다니. 하마터면 내가 질 뻔했다.
“개새끼….”
물론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안 자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하루의 시작을 은율이의 귀여운 욕으로 하니까 기분이 참 상쾌하다. 오늘은 욕을 들어줄 마음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나는 대꾸를 하지 않고 은율이를 가득 끌어안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자 오만상을 찌푸리고 벗어나려고는 하는데 힘이 없어서 몸을 빼내지도 못하고 꼬물거린다. 슬쩍 혀를 밀어 넣었다가 씹힐 뻔 하고 나서 나는 혀 대신 다른 걸 이용하기로 했다. 등 뒤로 두르고 있던 팔을 슬슬 내려서 엉덩이 쪽으로 옮겼다.
“하지 마아, 좀….”
“피 안 났나 검사 좀 하자.”
“검사는 무슨, 변태 새끼가, 아… 나 진짜 기운 없다고….”
“언제는 네가 기운이 펄펄 넘칠 때만 했냐. 기운이 없어도 다 내가 알아서 해 줬잖아.”
“진짜 아파, 읏, 손가락 빼, 흑.”
우는 척하면서 키스 재도전은 참 잘도 받아준다. 은율이는 아기새처럼 입을 벌린 채로 내 혀가 움직이는 대로 쫓아오느라 정신이 없더니 간신히 손을 올려 내 등을 움켜쥐었다. 이미 몇 번을 긁어 놔서 엄청 따가웠지만 그것도 참을만했다.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들어갈 공간을 만들고 내 것을 사이에 넣은 채로 슬슬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구로 바로 찔러 들어갈 것처럼 쳐올리다가도 근처만 맴돌면서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비빌 때마다 바짝 긴장했다가 몇 번을 부르르 떨던 은율이가 예쁘게 울먹이면서 그냥 갖다 박으라고 쌍욕을 했다. 그리고 평생 노은율을 이길 생각이 없는 나는 착실하게 명령대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