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13/43)

07

나는 한적한 버스 안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음악을 흥얼거렸다. 출근시간에 미어터지던 버스를 타다가 여유 있는 버스를 타니 이렇게 좋구나. 역시 일을 안 하면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몸은 참 편하다.

새벽부터 미친 듯이 울려대던 전화를 전부 씹고 느긋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어제 내가 그냥 잠들어서 아침에 말도 안 걸 정도로 노발대발 삐져버린 차원우를 살살 구슬리고 엉덩이 팡팡 두들겨서 회사에 보내놓고 집 청소까지 싹 하고 나오니까 한결 개운했다. 몇 년을 일한 회사고 나한테는 참 잘 맞는 직장이었는데 최 실장 같은 새끼 때문에 그만두게 되는 게 화는 났지만 중요한 클라이언트인 것도 맞고 쌍욕만 안 했다 뿐이지 책임 못 질 말을 하고 오기도 했으니까 그냥 정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아직도 팀장님이 설마 날 자르기야 하겠냐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회사로 가는 내내 의외로 나는 초연했다. 이미 보낸 문자를 회수할 수도 없으니까 될 대로 되라, 그런 기분이었다.

어제 내가 최 실장을 무시하고 그냥 간 덕분에 기획안 전면 수정과 철야라는 쌍욕 세트를 받아들고 초상집이 되어 있을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 일은 안 하고 뭘 하고 있는 건지… 가 아니라 어차피 그만둘 회사니까 신경 안 써도 되나, 테이블 위에 온통 피자에 치킨을 차려놓고 우걱우걱 먹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제일 끝에 앉아 있던 팀장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이고 우리 은율 씨, 하면서 두다다 뛰어오셔서 나는 잽싸게 뒷걸음질을 쳤다.

“은율 씨 쪼오오금 늦었네? 어제 최 팀장 만났다며?”

“아, 네, 어쨌거나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선임님, 역시 선임님이 최고에요. 선임님 얼굴밖에 볼 거 없다는 거 취소할게요. 일도 참 잘하신다니까. 하나 추가해 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칭찬인지 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팔을 붙들고 흔드는 팀장님의 뒤로 쪼르르 쫓아온 정아가 감동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나에게 팍팍 쏘아 보냈다. 얼떨떨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한테 욕을 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갔다.

“아침에 최 실장 왔다 갔는데 아주 은율 씨 칭찬에 입이 마르더라. 어제 쉬는 날인데도 박람회장까지 가서 광고 시안 점검하고 컨펌 받고 집에 갔다며. 고맙다고 이거 다 최 실장이 시켜주고 갔어. 아마 이번 달에 특근수당이랑 보너스도 나올 거야. 내가 은율 씨 덕분에 일할 맛이 난다니까.”

“최 실장이 뭘 어쨌다고요?”

“우리 일차 시안 넘겼던 거 너무 좋다고 그쪽에서 이사님한테 직접 얘기하러 찾아왔다니까요. 추가로 해야 될 것도 그냥 이 정도 선이면 될 것 같다고 알아서 넘기라고 했어요. 선임님 덕분에 이제 최 개새… 아니, 최 실장님이 우리 좀 봐주려나 봐요.”

양쪽에서 열심히 떠들어대는 팀장님과 정아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피자와 치킨은 전부 최 실장 작품이고, 최 실장이 이사님한테 가서 우리가 일을 잘했다고 칭찬을 했고, 앞으로 넘겨야 할 일들은 죄다 알아서 하라고 했고, 심지어 내가 휴일에 박람회장까지 가서 컨펌 받은 게 고맙다고 했다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그 새끼 안 되겠다. 이런 식으로 어제 일을 없던 일로 할 셈인가 본데 내가 한 번은 당해도 두 번은 안 당한다. 전화를 해서 한바탕 욕이나 해 줄 생각으로 사무실을 나가려다가 정아의 말에 움찔하고 멈춰 섰다.

“선임님 진짜 감사해요, 덕분에 저 진짜 너무 갖고 싶었던 백 드디어 살 수 있어요. 맨날 백화점 가서 눈으로만 핥고 와서 매장 언니들 눈치 보였는데 당당하게 만 원짜리 돈뭉치로 뽑아가서 살 거예요. 아, 제가 가방 사고 돈 남으면 밥 한 번 쏠게요.”

“어, 아니 잠깐만… 근데 팀장님 어제 제 문자 못 보셨어요?”

“문자? 아, 나 어제 핸드폰 먹통 돼서 집에서 혼자 고쳐보려다가 그냥 초기화 시켰거든. 어플 싹 다시 까느라고 못 봤지.”

“그럼 새벽에 전화는….”

“이사님이 특별히 전화하셨길래 은율 씨한테 먼저 알려주려고 했는데 안 받더라. 근데 문자 왜, 뭐 급한 일이었어?”

아, 나는 멍청하게 서서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안부 문자요. 근데 보너스 얼마 나온대요?”

미안하다 원우야, 최 실장 이 개새끼를 냅다 치워버리고 그냥 당분간은 집안일이나 하면서 너랑 꽁냥꽁냥 놀아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보너스에 특근수당까지 준다잖아, 대신 이번 주 안에 좋은 콘돔 사줄게, 네가 사고 싶다던 딸기 향 나는 비싼 젤도 사줄게…. 월급에 매인 하찮은 직장인인 나는 좀 슬퍼졌다.

최 실장이 진상을 안 부리기 시작하니까 일은 일사천리였다. 지각을 넘어서서 제멋대로 오후 출근을 한 것에 대해 혼내지도 않은 팀장님은 내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하품을 하면서 인터넷 기사나 읽고 지뢰찾기나 하면서 노닥거리는 걸 뻔히 보고도 별 말을 안 했다.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희귀한 날, 혁혁한 전공을 세운 직원에게만 특별히 제공하는 팀장님의 무한 실드 데이가 바로 오늘인가 보다. 그리고 그 수혜자인 나는 펑펑 놀고만 있자니 양심에 찔려서 결국 정아한테 맡겨 놓은 자잘한 일을 끌고 와서 끄적거렸다. 어차피 오늘 지나면 없어질 실드니까 오늘만 즐겨야지. 그렇게 팀장님에게 보냈던 사직 문자와 내 가방에 고이 잠자고 있는 사직서는 흐지부지 넘어가고, 내일 해야 할 일에 대해 회의까지 끝냈는데도 시간이 남아서 정말 오랜만에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팀장님의 무한 실드를 이용해서 그동안 있는지도 까먹고 살았던 연차도 이틀이나 연달아 쓸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 원우가 이를 벅벅 갈면서 벼르고 나가던데 오늘은 미리 가서 밥도 해놓고 구석구석 싹싹 씻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다. 팔 센티미터나 되는 힐을 신고도 탭댄스를 추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을 하는 정아를 먼저 보내놓고 나도 퇴근을 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무심코 받으려다가 혹시나 해서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

“네.”

- 최훈입니다.

“말씀하시죠.”

- 어제 일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싶어서요.

“아, 그러세요.”

어디 얼마나 대단한 사과를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인사를 하면서 나가는 팀원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면서 사무실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무슨 개소리를 해도 되는 상황이다. 나는 삐딱하게 서서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 미안합니다. 어제는 솔직히 내 잘못이 맞습니다. 은율 씨가 그냥 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고요.

“안 솔직해도 최 실장님 잘못이 맞는데요.”

- 압니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전화했습니다. 지금 퇴근하는 거면 잠깐 볼 수 있습니까? 이렇게 전화로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진 않은데.

“최 실장님이 어디로 불러낼지 제가 어떻게 알고 나갑니까. 어제처럼 또 한 시간 거리로….”

- 은율 씨 회사 앞입니다. 회사 사람들 보기 불편하면 자리 옮겨도 되고요.

“불편할 게 뭐 있습니까, 클라이언트님이신데. 시간 많이는 못 드립니다. 애인이랑 약속이 있어서요. 일 층 카페에서 기다리세요.”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소정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왕 정리할 거 깔끔하게 끝을 내려면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했다. 지난번 닭강정 조공이 파토난 이후로 소정이는 아직도 삐져 있었는지 인사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아이구 바쁘신 은율님이 어쩌다 저한테까지 전화를 다, 하고 비꼬기 시작했다.

“야 너 임산부가 그렇게 막 빈정거려도 되냐, 태교에 안 좋다니까. 어쨌거나 나 뭐 부탁 좀 하자.”

- 부탁이라니, 저 같은 하찮은 사람에게 은율님이 부탁을 하신다니, 제일 친한 친구의 소중한 아가를 위해 닭강정 사 올 시간도 없는 바쁜 은율님께서….

“바쁘긴 진짜 바빴어. 대신 네가 맛있다고 했던 그 닭강정 그거 택배 주문해 줄게. 너 먹고 민기 먹고 애기 먹게 세 박스. 콜?”

-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십 분 있다가 나한테 전화 좀 걸어줘. 한두 번은 안 받을 거니까 받을 때까지만 걸어주고, 내가 전화 받고 나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듣기만 하면 돼.

- 콜.

분명 애가 태어나면 엄청난 닭덕후가 될 거다. 핸드폰의 주소록 이름까지 바꿔 놓는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내려가려다가 나는 잠깐 내 상태를 살폈다. 분명 어제 원우랑 마지막에 했던 이야기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술을 퍼마셨는데 잠 조금 더 잤다고 상태가 이렇게 멀쩡하다니 내가 아직 창창하긴 한가보다. 얼른 머리를 조금이라도 헝클고 피곤하게 보이려고 눈을 열심히 비벼서 빨갛게 만들었다. 이제 됐겠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카페의 가장 끝 테이블에 앉아서 고개를 빼고 문 쪽을 열심히 기웃거리던 최 실장이 내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건성으로 고개를 기울여 까딱 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꼈다. 뭐라도 좀 마시겠냐면서 지갑을 들고 일어나길래 손을 저었다.

“차 마실 시간은 안 돼요.”

“용건만 간단히 하고 가라는 거네요.”

“네.”

일부러 하품을 하면서 눈을 깜빡였더니 최 실장이 픽 웃었다.

“피곤합니까?”

“네. 어제 애인이랑 놀다 보니까 좀.”

“…그런 식으로 일부러 티내려고 안 해도 잘 알아듣고 있습니다. 은율 씨가 나랑 연애할 마음 없다는 거.”

내가 베테랑 연기자도 아니고 애초에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당황하는 기색 없이 어디 더 해 보라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얕은 한숨을 쉰 최 실장이 커피 몇 모금을 마시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봐도 내가 좀 미친 것 같기는 합니다. 여태까지 일하면서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으니까요.”

“의외네요.”

“의외라고 생각하겠죠. 공사 구분도 못하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은율 씨한테 매달린 것도 있어요. 인터넷 소설을 보면 이런 게 많이 나온다면서요. 날 이렇게 만든 건 네가 처음이야, 하는 거.”

“인터넷 소설 아시는 것도 의외네요. 영자 신문이나 보실 줄 알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그냥…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차인 거, 내가 왜 은율 씨를 좋아하게 됐는지는 꼭 알려주고 싶었어요.”

원래는 무슨 말을 하든 사과하러 온 거 아니냐고 딱 잘라내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내 생각보다 최 실장이 진지하다 못해 저러다 울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각해서 차마 말을 끊지를 못했다. 이 카페가 회사 사람들만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곳이어서 다행이었다. 지금쯤 다들 퇴근을 했거나 아니면 이제 막 야근 업무를 시작했을 시간이라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강제 커밍아웃을 당할 걱정은 없었다. 손님이 조금만 적다 싶으면 자리를 비우는 주인아저씨는 오늘도 역시나 농땡이중이다. 나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해 봤자 결과가 달라지지도 않을 테니까, 어차피 당분간 계속 일 때문에 연락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 양해는 해 줘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알지 모르겠지만 난 외국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와서는 한참 적응을 못했죠. 외국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은 있어도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내가 맡은 일을 내 선에서 처리하면 충분했고, 다른 사람 일까지 도맡아 해야 할 일은 없었죠. 눈치 안 보고 일을 하다가 몇 번이나 큰 트러블이 생기고 나서야 지금 이 성격이 된 겁니다. 은율 씨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처럼, 허허실실 웃으면서 넘어가는 것 같은… 호구라고 했었죠?”

“그건 좀 잊어버리세요, 아 진짜 그게 언제 적 얘긴데.”

“내가 은율 씨한테 반한 게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꼭 나를 보는 것 같았어요. 예전의 최훈을요. 당당하고 거침없고, 숨기는 것 없고, 자기 주관 확실하고, 맡은 일을 허술하게 하는 법도 없고, 어떻게 보면 자기 일밖에 모르는 것 같아도 자잘하게 남에게 배려하는 것까지도.”

“칭찬이에요, 자랑이에요?”

“둘 다입니다.”

어이가 없어서 멀뚱히 쳐다보다가 때맞춰 울리는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최 실장이 잠시 말을 멈췄다. 액정에 커다랗게 떠 있는 ‘울쟈긔’를 보니까 내가 한 짓인데도 웃음이 나왔다. 착실하게 임무 수행을 하고 있는 소정이의 전화를 끊고 마저 이야기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욕심을 냈던 겁니다. 갖고 싶었으니까. 자유분방해 보이고 어디 매여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게 부러웠고요.”

“그렇게 보입니까?”

두 번째 전화가 울리는 것도 마저 끊었다. 그제야 화면의 이름을 확인했는지 최 실장이 피식 웃었다.

“애인이 부럽네요. 은율 씨한테 전화도 막 하고.”

“최훈 씨.”

미소를 띠고 있던 최 실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아들었는지 입술을 꾹 다물고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최 실장을 보면서 입을 떼려던 찰나 세 번째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았다.

“응 소정아, 고마워.”

- 어? 뭐야, 이러라고 전화하라는 거였어? 아, 말하지 말랬지, 미안.

“아냐. 나중에 설명할게. 일단 끊자.”

만약 말귀를 못 알아듣고 끝까지 지랄을 하면 소정이 전화를 적당히 이용해서 떼어낼 생각이었는데 굳이 쇼를 해가면서 면박을 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바깥으로 목소리가 들렸었는지 최 실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애인이 여자였습니까?”

“아뇨, 이건 최 실장님이 내 말을 못 알아듣고 진상을 피울 때를 대비한 거였고요.”

“참 철두철미한 것까지 내 스타일이네요.”

“어련하시려고요. 어쨌든 최 실장님. 내 애인이라는 사람 그렇게 부러워할 게 못 돼요.”

“…….”

“내 애인이라는 사람은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발 동동 구르고 속 끓이고 살아요. 사람들 많이 만나는 일이고, 애인보다 정아나 팀장님 얼굴 보는 시간이 더 많은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서운하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면 그렇게 하라고 했던 놈이에요. 야근에 철야를 밥 먹듯이 해도 데이트할 시간이 없다고 징징대는 게 아니라 내가 끼니 거를까봐 회사까지 와서 나 밥 먹는 거 보고 옷 챙겨다 주고 집에 가는 놈이고요. 보통 그렇게 몇 년을 살면 속병이 나든가 아니면 못 견디겠다는 티라도 내야 되는 게 정상인데 내 애인은 그러지도 않아요. 걔는 우리가 어디 가서 각자 애인 있다는 말도 쉽게 못하고, 집에 한 번 내려갈 때마다 죄인처럼 가는 것까지 다 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살거든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화 한 번 제대로 못 내고, 정말로 열 받아서 화를 내더라도 금방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내 눈치 보고 살아요.”

“…….”

“그렇게 꼬박 십 년을 연애하고 있는데, 내가 그런 애인을 두고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그러니까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고 이 새끼야, 라는 진심이 함축된 말을 하자 최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이나 된 애인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이제 알았으면 진상 짓은 적당히 하세요.”

“클라이언트한테 진상 짓이라니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왜요, 호구 소리 듣고 나한테 반했다면서요.”

“정말 못 이기겠네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은율 씨 애인이 궁금하네요. 도대체 어떤 사람일지.”

“내 애인도 최 실장님 궁금해 하더라고요. 길에서 만나면 큰일 날 걸요.”

물론 오랜만에 이성을 잃고 날뛰는 뿔난 망아지 차원우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고작 최 실장 따위의 인간 때문에 내 새끼가 경찰서 들락거리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 일은 없어야한다. 어깨를 들썩거려가며 웃던 최 실장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뭡니까?”

“나도 더 이상 귀찮게는 안 하겠습니다. 십 년을 사귄 애인 있는 사람한테 막무가내로 들이댈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이 손은 뭔데요?”

“클라이언트인데 악수 한 번 못 청합니까?”

그놈의 클라이언트 소리 참 주구장창 한다. 나는 악수 대신 펼치고 있는 최 실장의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게 내리치고 일어났다. 그동안의 병신 짓 때문에 뺨 한 대 쳐주려던 건 이걸로 참아주기로 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신나게 웃던 최 실장이 따라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 주에 이차 기획안 회의 때 보죠.”

“아니 기획안 회의 이제 안 한다면서요, 그냥 넘기라면서요.”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그냥 넘깁니까, 내가 호구도 아니고.”

“아 진짜 그놈의 호구 소리, 호구 호구 하는 게 그렇게 좋아요?”

“애칭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예 기획안 상단에 담당자 최 호구로 올려서 개쪽을 줘야 정신을 차리려나 보다. 호구가 돼도 좋다고 실실 웃으면서 카페 문을 열고 먼저 나가는 최 실장의 뒤를 따라 나가다가 엉성하게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떨어뜨렸다. 에이 씨 요즘 눈 와서 바닥도 더러운데, 손빨래해야 되는 건데, 허리를 굽혀 얼른 목도리를 주우려고 손을 뻗는 동안 뒤에서 닫히고 있던 문을 미처 못 봤다. 뺄 새도 없이 손이 그대로 문틈에 끼어서 나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주저앉았다. 이미 나가 있던 최 실장이 놀라서 다시 뛰어 들어왔다.

“괜찮아요?”

“아 씨발, 목도리는 왜 떨어져서 씨발!”

“은율 씨는 욕도 참 찰지게 잘하네요.”

“잡지 마요 좀!”

“많이 아픕니까? 부을 것 같은데.”

그 잠깐 사이에 시뻘개져서 욱신거리는 손을 붙들고 끙끙대는 내 앞에 앉아서 최 실장이 내 손을 붙들고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얼얼한데 의사도 아닌 새끼가 뭘 그렇게 살피겠다고 자꾸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시키는 게 짜증나서 손을 쳐내려다가 갑자기 몸이 위로 휙 딸려 올라갔다. 딱 삼 초 걸렸다. 내 손목을 억세게 붙들고 있는 손을 확인하는 데 일 초, 손목을 붙들고 있는 원우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 이 초, 레이저빔이 나올 것 같은 원우의 눈을 보자마자 분위기를 감지하고 몸을 움츠리는 데 삼 초.

“…뭐하냐, 여기서?”

“어, 언제 왔어?”

“문자는 답도 없고, 사무실로 전화했더니 아무도 안 받길래 퇴근한 것 같아서.”

분명 차분한 목소리로 나랑 말을 하고 있는데 시선은 내내 최 실장을 주시하고 있다. 더 있다가는 사단이 날 것 같아서 일부러 손을 쥐고 앓는 소리를 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내가 원우네 회사 동기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원우도 우리 팀 사람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얼굴이 아니라는 정도였으면 그냥 모르는 회사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내가 손을 내주고 내 손을 주물거리던 사람이어서인지 원우는 더 경계를 하고 있었다. 손목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서 이제는 문에 낀 손가락보다 손목이 더 아팠다.

“야, 힘 좀 풀어봐….”

“…누구?”

“우리 거래처 클라….”

“아, 최훈입니다.”

나는 스스로 죽을 길을 자초하며 자기소개를 하는 최 실장에게 마구 눈치를 줬지만 최 실장은 못 본 것 같았다. 바짝 붙어 있던 탓에 나는 원우가 뿌드득 이를 가는 걸 고스란히 들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뿔난 망아지 구경을 하고 싶었던 건 취소해야겠다. 얼른 원우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나 여기 문에….”

“…네가 말했던 그 최 실장?”

“어? 아니, 그게….”

“은율 씨가 제 이야기 하셨나 보네요. 아, 그럼 이쪽이 은율 씨….”

“야 차원우, 나 손 찧었다고!”

최 실장의 입에서 ‘은율 씨’라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점점 더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원우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그제야 원우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퉁퉁 부은 손가락을 원우가 살피는 동안 얼른 최 실장을 소리 없이 윽박질렀다. 제발 좀 꺼지라는 나의 간절한 고요 속의 외침이 이번에는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 최 실장이 빙긋 웃었다.

“전 그럼 가보겠습니다. 병원 꼭 가 봐요. 다음 주 기획 회의 자료는….”

“알아서 보낼 테니까 가세요.”

“네, 그럼 다음 주에 봐요. 친구 분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은율 씨도요.”

저 씨발놈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하다. 한 번 개새끼는 영원한 개새끼인데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분명 애인인 걸 한참 전에 눈치챘으면서도 친구 분이 어쩌니 지랄을 하고 일부러 다음 주에 보자고 말을 하고 기어이 마지막에는 내 이름을 한 번 더 강조해서 부르기까지, 다방면으로 원우를 잔뜩 건드린 최 실장이 정중하다 못해 약이 오를 정도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최 실장이 가는 걸 조용히 쳐다보고 있던 원우의 시선을 돌리려고 눈앞에 손을 휘휘 흔들었다. 지금 차원우는 꼭 맹수 같았다. 사냥감을 덮치기 직전에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는 맹수. 그리고 사냥에 실패하고 사냥감이 도망가고 나면 화풀이 대상은….

“…타라.”

안 그래도 목소리가 낮은 놈이 쫙 깔고 말을 하니까 더 무서웠다. 내가 조수석에 타는 동안 밖에서 잠시 씩씩거리던 원우는 무표정하게 운전석에 타자마자 급출발을 했다. 쏠리는 몸을 지탱하려고 창문에 손을 짚었다가 으악, 하고 다시 손을 붙들었다. 원우가 앞쪽의 적당한 곳에 다시 차를 세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집에 가도 모자랄 판에 왜 이 손가락 새끼는 아프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안전벨트를 매려고 뒤로 손을 뻗었다가 또 아픈 손가락을 눌려서 나는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을 뒤틀었다.

“손 좀 봐.”

“괜찮아, 그냥 집에….”

“손 좀 보자고.”

그럼요, 드리겠습니다. 나는 얼른 손을 펴서 내밀었다. 차원우는 지금 눈빛으로 손 레이저 치료라도 할 태세였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게 뻔한 데도 내 손을 한참 들여다보던 원우가 한숨을 쉬며 내비게이션에 근처 병원 주소를 찍었다.

“야, 지금 응급실밖에 안 열었을 텐데….”

“알아.”

“아니, 응급실이….”

“노은율.”

“네.”

“그냥 가만히 있어라.”

“네.”

내비게이션을 끄려던 손을 내려놓고 얌전히 앉았다. 원우는 꽉 막힌 도로를 노려보며 분노의 레이스를 시작했다. 차선을 하도 바꿔서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기어이 다른 차선의 빈틈을 억지로 파고들다가 급정거를 하자 뒤에 있던 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죄송하니까 제발 우리 원우 건드리지 마세요….

“야, 운전 똑바로 못….”

“뭐 이 개새끼야!”

개새끼는 시작일 뿐이었다. 옆으로 치고 들어와서 욕을 하려던 아저씨가 간만에 입이 트여 현란하게 쌍욕을 난사하는 원우를 보며 입을 벌린 채로 대꾸도 못 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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