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반차를 낼 거면 전날 미리 이야기를 하지 왜 당일에 이야기를 하냐고 차장님에게 깨지기야 하겠지만 깨질 때 깨지더라도 기분 좋게 깨질 수 있을 것 같은 아침이었다. 주차장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모닝 섹스가 이렇게 좋구나, 앞으로는 자주 꼬셔봐야겠다, 평일은 안 되더라도 주말은 괜찮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보다 훨씬 즐거운 출근길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실수에요. 죄송합니다.”
애초에 죄송할 짓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걸 어디서 미리 배워 오면 참 좋았을 뻔했다. 울기 직전의 얼굴로 연신 허리를 굽혀 사과를 하는 김재민 인턴님의 옆에서 나는 먹통이 된 컴퓨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개인적으로 저장할 건 USB나 메일함을 쓰고 있었지만 업무용 자료들이 몽땅 날아간 게 문제였다. 몇 년 간 회사에서 일하면서 모아둔 자료들이 전부 다. 모조리 다. 내일 당장 제출해야 했던 서류까지 모두 남김없이 아주 깨끗하게.
“…근태야, 이거 복구 안 된대?”
“전산팀에서 왔다 갔는데 안 된대. 그냥 새로 하나 신청하는 게 빠르다더라.”
“…….”
“미안하다. 그냥 업무 프로그램 가르쳐준다고 켰던 건데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뭘 잘못 만졌는지….”
그러면서 근태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인턴을 노려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인턴이 찔끔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반차 쓸 거면 일찍 쓰라고 잔소리를 해야 할 차장님까지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사무실 분위기를 나 때문에 망치기도 좀 그래서 일단 근태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죄송합니다, 주임님.”
인턴은 진지하게 사과를 하고 있는데 나는 정말 생뚱맞은 타이밍에 웃음이 터졌다. 지난번에 주인님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일을 하는 척하면서 조용히 나를 주시하고 있던 동기들이 내가 웃는 걸 보고 나서야 몇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누가 뭘 잘못했고 어쩌고 난리가 났다.
“어쩔 수 없죠.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미리 배워서 일하시는 거 덜어드리고 싶어서 제가 가르쳐달라고 그랬는데….”
“아냐, 근태가 먼저 가르쳐준다고 깝쳤어.”
무조건적인 인턴 편애의 현정이가 얼른 끼어든다. 근태가 반박 없이 급하게 일하는 척을 하는 걸 보면 맞는 말이긴 한가 보다.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는 거면 그냥 빨리 일이나 하는 게 낫겠다. 새 컴퓨터가 오기 전에 전산팀에 가서 남는 컴퓨터라도 가지고 오려고 나오는데 김재민 씨가 뒤를 졸졸 쫓아온다.
“그냥 사무실에 있어도 돼요.”
“아… 뭐 시키실 거 없나 해서요.”
“딱히 없는데.”
“네….”
머뭇거리는 걸 보니까 물어뜯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하이에나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기가 싫은 눈치였다. 하긴 현정이 하나 가지고는 실드가 안 되겠지. 나는 인턴에게 손짓을 했다.
“컴퓨터 가지고 올 거니까 같이 갑시다, 그럼.”
“네.”
“근태가 그렇게 무서워요?”
“네? 아뇨, 무서운 게 아니고, 그냥 제가 잘못해서, 죄송해서….”
대학교 시절부터 찍어온 삼사 년 치의 사진이 들어있던 하드를 통째로 날려먹고도 살다 보면 하드가 날아갈 수도 있지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도리어 화를 냈던 노은율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다. 사진은 간신히 복구했지만 돈이 무지하게 깨진데다가 우리의 시작을 함께 해 준 각종 동영상 연구 자료가 담겨있던 논병아리와 개개비 동고비 부엉이 폴더들은 결국 망가진 하드와 함께 고물상으로 사라져야 했다. 덕분에 잃어버린 영상 복습하자고 꼬셔서 몇 날 며칠 참 잘 놀았었지,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근데 몸은 괜찮으세요?”
“몸이 왜요?”
“아, 반차 내셨다고 하셔서 혹시 아프신 건가 해서….”
“그냥 냈어요.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원래 이렇게 반차 쓰면 안 되는 건데 오늘 재민 씨가 일을 만들어준 덕분에 내 농땡이가 묻혀서 다행이네요.”
“아, 어, 아… 죄송합니다.”
하루에 죄송하다는 말을 한 백 번 쯤은 할 것 같은데 처음에는 나도 몸 둘 바를 몰라서 좀 머쓱했지만 이제는 슬슬 적응이 되고 있다. 전산실 안쪽으로 들어가 그나마 제일 깨끗해 보이는 본체를 골라보려고 두리번거리는데 뭐가 쑥 앞으로 들어왔다.
“아프셔서 늦게 오시는 줄 알고 아까 사왔는데… 그냥 예방 차원에서 드셔도….”
아직 뜨끈뜨끈한 쌍화탕 한 병을 내밀면서 눈도 못 마주치고 서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고마워요, 하고 받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 나이 또래 애들이 이렇게 얌전하고 싹싹한가? 요즘 애들은 인스턴트를 많이 처먹고 자라서인지 참을성도 없는데다가 싸가지가 바가지라고 은율이가 새 매니저나 직원이 들어올 때마다 하소연을 했었는데 이 인턴은 달랐다. 어차피 두어 달 일을 하고 끝날 인턴 기간인데 굳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 보일 이유가 없을 텐데. 하다못해 내가 나중에 면접실에 들어가는 사람이라 미리 눈도장을 찍어두려는 것도 아니고.
“재민 씨는 원래 그래요?”
“네?”
말이 좀 이상하게 나갔다.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게 무슨 초식동물 같다. 토끼쯤 되려나.
“원래 이런 거 세심하게 챙기고 그러나 해서요.”
“하,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보통 남자들은 이런 거 잘 신경 안 쓰지 않나 해서.”
“아… 제가 위로 누나만 여섯이 있어서요.”
“그렇구… 여섯이요?”
요즘 애들인데도 욕설 한 마디 듣는 걸로도 벌벌 떠는 도련님 스타일의 가정교육을 시키는 집이 대체 어딘가 했더니 딸부자집의 막내아들이어서 그랬나 보다. 이제 좀 이해가 된다.
“누나들 사이에서 고생 많이 했겠네요.”
“근데 꼭 누나들 때문에 그런 거는 아니고, 그냥 제가 성격이 그래서… 누나들도 저보고 답답하다고 많이 그래요. 말도 잘 못하고….”
“말 잘하는데.”
“아… 감사합니다.”
고작 말 잘한다는 게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까지 하는 걸 받을 정도로 감사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감사하다니까 감사를 받아줘야지. 잘 마셨다고 어깨를 툭툭 치고 빈 쌍화탕 병을 건네주었다. 그나마 외관상으로는 상태가 제일 좋아 보이는 본체를 들고 전산실을 나가려다가 문을 열 수가 없어서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빈 병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좀 이상했다. 쟤 왜 저러고 있지? 내가 뭐 잘못 말했나.
“문 좀 열어줄래요?”
“네? 네.”
후다닥 달려와서 문을 열어주는 김재민 씨의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귀가 좀 빨개진 것 같은데, 착각인가.
급한 업무는 김재민 씨 책상에 뒀던 컴퓨터의 업무 프로그램으로 처리를 한다고 해도 내가 하루 종일 그 컴퓨터를 붙들고 있을 수도 없다. 업무 배워 오라고 보내놓은 인턴 컴퓨터를 대신 쓰면서 하루 종일 내 컴퓨터로 지뢰찾기나 하라고 시킬 수는 없으니까. 전산실에서 새 컴퓨터가 오기 전까지 최소한 문제없이 사용할 만한 컴퓨터를 만들려면 이것저것 손봐야 할 게 많았다. 점심 비번을 신청해서 식사까지 뒤로 미뤄놓고 고이 품고 있던 바이러스 이백 개를 토해 내는 컴퓨터를 보면서 하품을 쩍쩍 하다가 차 주임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김재민 씨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판기 커피를 수줍게 내민다. 수줍다는 말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 표정이다. 그냥 애가 하도 소심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나까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라 어색해지기 전에 얼른 말을 꺼냈다.
“점심은 뭐 먹을래요?”
“네? 아, 전 그냥 아무 거나 괜찮아요.”
“며칠 동안 부장님이 인턴들 줄줄이 끼고 식사하러 가시던데 뭐 맛있는 거 좀 얻어먹고 왔어요?”
“그냥 순두부찌개랑….”
“회사 건너에 그 순두부찌개? 거기 진짜 맛없는데. 부장님만 좋아하지 않아요?”
“아… 그냥 조금….”
“우리랑 밥 먹으러 갈 때마다 맨날 거기 가자고 하셔서 우리가 부장님이랑 같이 밥 안 먹거든요.”
원래 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닌데 우물쭈물하는 놈을 앞에 두고 있으려니까 아무 말이나 안 하면 너무 싸해질 것 같아서 별 소리가 다 나왔다. 웃으라고 한 말인데 제대로 웃지도 않고 여전히 수줍수줍 모드여서 내 손발이 다 사라질 것 같았다. 내가 진지하게 굴 때마다 은율이가 면박을 주면서 말하던, 인간이 구운 오징어가 되는 기분이 이런 건가 보다. 아무나 제발 좀 빨리 와서 살려주세요, 아니면 일을 존나 많이 줘서 말할 시간도 없게 만들어주세요. 누구한테 하는지도 모를 기도를 마음속으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역시나 내 곤경을 해결해 주는 건 내 애인밖에 없다. 도대체 몇 개를 보낸 건지 연달아서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일어났다.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바로 안 받을 줄 알고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전화를 걸었는데 핸드폰을 들고 있었는지 곧바로 받는다. 점심 왜 안 먹었냐, 아침도 안 먹었잖아, 야근은 몇 시까지 하는데, 이따가 데리러 갈까, 주절주절 통화를 하면서 사무실을 나가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김재민 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얼른 고개를 돌린다. 사무실 두 번 나갔다가는 울면서 쫓아오겠다.
***
한 번 일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먹고 자는 기본적인 생활도 포기해야 하는 은율이와 다르게 나는 아무리 바빠도 야근을 할 일도 별로 없고 철야는 더더욱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흘째 야근을 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적응이 안 되어서 몸이 엄청나게 피곤했다. 그나마 집에서 은율이랑 같이 노닥거리기도 하고 부장님 뒷담화라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면 낫겠는데 회사에 강제로 처박힌 은율이는 사흘째 집 현관문 구경도 못하고 있다. 근처 찜질방에서 씻고 속옷은 사다 입으면서 버티는 것 같더니 오늘 기어이 옷 좀 갖다 달라고 전화가 왔다. 옷 핑계로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기필코 야근을 해서는 안 되는 날이다. 밀렸던 업무를 처리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점심도 못 먹고 인턴이고 나발이고 신경도 못 쓰고 분노의 타자질을 하다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자는 근태의 말에 겨우 엉덩이를 떼었다. 출근을 하고 나서 꼬박 여섯 시간 만이었다. 남자의 생명이자 내 자존심인 허리가 뻐근하다 못해 뼈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 병아리는 담배는 안 피우나 보네?”
“병아리?”
“너 졸졸 쫓아다니는 병아리.”
“아, 김재민 씨.”
“걔 너 쫓아다니는 거 보면 진짜 웃긴다니까. 너 일하면서 뒤 돌아보지 마라. 현정이가 너 엄청 주시하고 있거든. 인턴이 자기를 저렇게 쫓아다녔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점심 먹는 내내 징징대더라.”
“그럼 그냥 사수 바꿔달라고 그럴까, 나 컴퓨터 나가고 나서 일 너무 바빠서 인턴 교육 하나도 못 시키겠는데.”
“되면 현정이야 춤을 추겠지. 이따 차장님한테 한 번 여쭤봐.”
기껏 일 배우겠다고 어렵게 인턴 합격까지 해서 들어온 사람을 아무 것도 못 가르쳐 주고 있는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이왕 배울 거면 열의가 넘치다 못해 타오르고 있는 사람한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퇴근 전에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차장님 주최 회식이래.”
“바로는 못 가, 나 은율이 옷 갖다 주러 갔다 와야 돼.”
“그러고 보니까 요즘 은율 씨가 안 보이네, 네가 술을 안 처먹어서 그런가?”
“은율이 요즘 장난 아니다. 사흘째 집에도 못 왔어.”
“그럼 옷 갖다 주고 다시 오면 되겠네.”
“그러지 뭐.”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근태나 다른 회사 사람들과 은율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때마다 기분이 참 묘했다. 부장님이 대수롭지 않게 사모님 이야기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 할아버지가 돼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회사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말할 일은 없겠지만 이 정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뿌듯했다. 이게 다 노은율이 술에 떡이 된 나를 들춰 메고 가면서도 짜증 한 번 안 내고 동기들과 상사들에게 싹싹하다 못해 굽실거린 덕분이다. 오늘 고기라도 사먹여야겠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급한 일부터 처리를 해놓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밖에 부장님 심부름을 갔다가 코가 빨개진 채로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던 김재민 씨가 퇴근하시냐면서 또 꾸벅 인사를 해 왔다. 현정이에게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차장님께는 회식 자리에서 적당히 비위 맞춰가며 이야기하면 될 것 같고, 그 전에 본인에게 미리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재민 씨, 하고 부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으로 얼른 다가온다. 아무리 봐도 병아리보다는 토끼과다.
“재민 씨 교육 담당을 바꿔야 될 것 같은데.”
“…네?”
“내 업무가 밀려있는 상황인데 재민 씨 업무 알려주는 것까지 하려면 내가 너무 건성으로 하게 될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나보다는 현정 씨가 기본 업무는 더 많이 보고 있어서 재민 씨가 일 배우기는 쉬울 것 같거든요. 차장님한테는 내가 이야기할게요.”
“…….”
“현정이 나보다 훨씬 꼼꼼하고 착해요. 회식 가서 얘기 몇 마디 해 봐요.”
꼼꼼하고 착하지만 영계 헌터라는 건 차마 말하지 못했다. 가방을 챙기고 책상 밑에 넣어 뒀던 은율이 옷을 꺼내드는데 아직도 김재민 씨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우물쭈물 입만 달싹거리고 있길래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재민 씨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웬일로 눈을 다 맞추는지 모르겠다.
“차 주인님, 아니, 차 주임님, 저….”
어떡하지, 말하는 사람은 진지한데 나는 너무 웃겼다. 차 주인님, 뱃속부터 밀려올라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아예 입을 다물고 숨을 참았다. 방금 전까지는 잘만 쳐다보더니 내 표정을 보고 또 울상을 한다. 화난 것처럼 보였나, 얼른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는데 김재민 씨가 한숨을 쉬어서 말문이 막혔다. 한숨을 쉴 줄은 아는구나.
“…알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아, 오늘 회식 저도 갈 겁니다. 조금 늦게 가긴 할 건데, 이따 마저 얘기합시다, 그럼.”
오늘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턴 기간 내내 그렇게 인사를 할 거냐고 놀려도 꼬박꼬박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더니 오늘은 별 말이 없어서 나는 당황했다. 갈 길이 바빠서 일단 나오기는 했지만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동안에도 계속 찜찜했다. 말을 잘못했나, 그렇게 거슬리게 말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차를 빼는 내내 고민을 하다가 오고 있냐는 은율이의 문자를 받고 얼른 출발했다.
사흘 만에 본 애인 얼굴은 수척을 넘어서서 좀비의 형상이 되어 있었다. 내 눈에 쓰인 콩깍지가 십 년 째 벗겨질 생각을 안 하고 있어서 그마저도 예뻐 보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고기를 사주겠다고 했더니 그거 구워 먹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짜증을 내서 고깃국물이라도 먹이려고 회사 근처의 곰탕집으로 데리고 갔다. 신경질적으로 밥을 퍽퍽 말아서 후룩후룩 떠먹는 내내 구시렁거리는 말은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최 실장이라는 놈이 개새끼에 씨발놈이라는 걸 주입식 교육을 받는 것처럼 한 스무 번은 연거푸 들은 것 같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어라. 라면 같은 걸로 때우지 말고 뭐 시켜서라도 먹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 그 개놈의 새끼가 씨발….”
“알았으니까 그거 국물 다 먹어. 천천히, 체하겠다.”
“존나 천천히 먹고 싶어서 미칠 지경인데 천천히 먹고 들어가면 정아가 계급장 떼고 나 죽일 거야. 너랑 저녁 먹는다고 나오겠다고 했더니 정아가 일곱 시 넘으면 일 초에 한 대라더라.”
오늘 저녁 식사자리 대화의 요약은 최 실장이 개새끼라는 것과 정아 씨는 생각보다 무서운 여자라는 것과 노은율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런 거지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최 실장이라는 놈 같은데 길에서 마주치면 남의 애인 고생시킨 죄로 카운터펀치라도 한 방 날려줘야겠다.
허겁지겁 밥을 먹은 은율이가 차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근처 약국에서 소화제를 사가지고 왔다. 아무래도 밥 먹고 나오는 길에 배를 문지르는 게 꼭 탈이 날 것 같아 보였다. 팔 한 쪽을 못 찾아서 헤매고 있길래 뒷좌석으로 들어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며칠 사이에 더 마른 것 같은 목덜미가 안쓰러워서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줬더니 은율이가 대뜸 내 목을 껴안으면서 입술을 가져다 댄다. 무슨 놈의 회사가 애인이랑 키스할 시간도 안 줘, 키스를 하는 와중에도 투덜거린다.
“짜증나, 너한테 할 말도 있는데.”
“화분 플라스틱으로 사다 놨다. 존나 튼튼한 걸로.”
“그거 말고 새끼야, 진짜로 할 말 있다고. 지난번에 생각하고 있다고 했던 거.”
“아… 지금 해 그럼.”
“안 돼, 시간 여유 있을 때 해야 돼.”
“…뭐 심각한 얘기야?”
“그건 아닌데 그냥 여기서 하긴 좀 그래. 일단 주말에는 어떻게든 들어가 볼 테니까 그때 얘기하든가 해야겠다.”
주말에 말할 거면, 아니, 주말에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면 그냥 말을 꺼내지를 말지 사람 궁금하게… 라고 불평을 했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나는 얌전히 젖은 입술을 닦아주고 운전석으로 건너왔다.
들어가서 소화제 꼭 먹고, 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하고, 끼니 거르지 말고, 회사 앞까지 가면서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는 내내 건성으로 듣는 것 같던 은율이가 들어가기 전에 문득 뒤로 돌더니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그래, 마음껏 봐라, 닳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에 갖다 대고 씩 웃었다. 토하는 시늉을 하거나 차분히 가운데 손가락을 날릴 줄 알았는데 은율이는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뭐가?”
“차원우만한 놈이 없지.”
“…응?”
“나 간다. 운전 조심하고. 오늘 회식 있다며, 술 많이 처마셔도 못 데리러 가니까 적당히 먹고 들어가라.”
아니 그러니까 당장 뭐 해 줄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왜 해서 동하게 하냐고, 새삼 또 반하게. 망부석이 된 것처럼 굳어서 홀연히 사라진 애인의 빈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뒤늦게 온 회식 자리는 이미 서로가 서로를 꽐라로 만들기 위한 대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돌아오는 술잔에 대충 입만 댔다가 내려놓고 분위기를 살폈다. 이미 넥타이를 셔츠 주머니에 쑤셔 넣은 걸 보면 근태는 어지간히 마신 모양이고, 빈 소주잔 수집을 하고 있는 창진이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딱 한 시간 늦게 온 건데 도대체 그 사이에 뭘 얼마나 부어라 마셔라 했으면 다들 이 지경이 됐을까. 은율이가 데리러 오지도 못하는데 이런 분위기에 잘못 휩쓸렸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다. 눈치껏 술을 버릴 물잔을 내려놓다가 터질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소주잔을 꼭 쥐고 있는 김재민 씨와 눈이 마주쳤다. 간단하게 눈인사를 했더니 내 쪽으로 오려고 했는지 일어나려다가 현정이한테 붙들려서 또 술을 받는다. 오늘 아주 술에 절여서 보내려나 보다.
직장 생활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회식 자리에서 술 피하는 건 이미 요령이 생겼다. 동기들끼리만 모이는 술자리나 과장님 주최의 몇 명 안 모이는 회식자리에서는 다들 그 요령을 빠삭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못 써먹어서 은율이에게 업혀 들어가지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는 피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기어이 부장님 지갑에서 나온 개인 카드로 만든 이차 자리에서 취한 사람들을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열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대리운전비가 택시비보다 비쌀 것 같아서 회사 주차장에 주차해둔 차를 빼오는 대신 술집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자 입구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김재민 씨를 부축하면서 나오던 근태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인턴 교육 담당이니 귀가 교육까지 시키라면서 김재민 씨를 나에게 떠넘기고 들어가는 근태를 부르다가 어정쩡하게 붙들고 있던 김재민 씨가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바람에 얼른 몸을 받아 안았다.
“김재민 씨, 괜찮아요?”
“어… 네… 차 주인, 아니, 차 주임님….”
그래요 내가 내 차 주인이긴 하지. 피식피식 웃으면서 도로가로 김재민 씨를 데리고 나왔다.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대충 걸치고 있는 코트 앞을 잠가주고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주저앉아 있던 김재민 씨가 내 옷자락을 당겼다.
“차 주임님….”
“네, 잠깐만 있어 봐요. 택시 좀 잡고.”
“주임님, 그거 안 하시면 안 돼요…?”
“택시 잡아야 집에 가죠.”
“아아니, 그거 말고요, 주임님….”
아예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릴 기세여서 적당히 몸을 굽혀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얘 술 취하니까 꽤 대범해지는구나. 늘어진 내 코트자락을 꼭 쥐고 멀뚱멀뚱 올려다보더니 뜬금없이 헤벌쭉 웃는다.
“저는… 저는 차 주임님이요….”
“네.”
“그냥 차 주임님이, 어… 저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네?”
“그거, 바꾸시는 거 그거, 안 하시면 안 돼요…?”
그게 이렇게 애절하게 할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누가 보면 한 십 년을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가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일단 옷 좀 놓고, 택시 잡고,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출근하면 마저 이야기하자고 차근차근 설명을 하자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뜸 딴소리를 한다.
“차 주임님 멋있어요….”
어유 그래 고맙다 나도 알아 인마. 내 애인도 나만한 놈 없다고 했거든. 내일 지가 한 말이 생각나면 아마 얼굴도 못 들고 도망 다닐 것 같다. 그리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일단은 집에 좀 가고 싶었다. 다시는 꽐라 돼서 은율이한테 데리고 오라고 하지 말아야지. 평소에도 내 체격을 감당 못하는데 술까지 취한 나를 이 모양으로 집에 데리고 갔을 은율이 생각을 하니까 되게 미안해졌다. 신호가 바뀌었는지 저만치에서 차들이 출발하는걸 보고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는 김재민 씨를 일으켜 세웠는데 이번에는 앞으로 몸이 확 쏠린다. 내 어깨에 고개를 박고 있던 김재민 씨가 갑자기 뭉그적거리며 파고들더니 허리를 안는다. 잠깐,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차 주임님… 진짜 멋있어요.”
“…알았다니까요.”
“차원우 주임님….”
“네, 알았으니까 팔 좀 풀어 봐요.”
“진짜요… 제가 진짜 차 주임님을….”
들어서는 안 될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얼른 몸을 떼어내고 김재민 씨의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택시를 잡았다. 뭐라고 더 주절거리고 있는 김재민 씨를 뒷좌석에 태우고 문을 닫으려다가 집을 모른다는 게 떠올랐다. 아 뭐 이런 좆같은 상황이…. 근태나 창진이었으면 그냥 집에 데려가서 하루 재울 텐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짜증을 내는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몇 번이나 사과를 하면서 김재민 씨의 핸드폰을 꺼내고, 집으로 저장되어 있는 번호에 전화를 하고, 아마도 여섯 명의 누나 중 한 명인 듯한 여자와 통화를 해서 기사 아저씨에게 집 주소를 불러주고, 지갑에서 대충 돈을 꺼내 드리고 문을 닫으려는데 팔이 붙들렸다. 꼭 어디선가 노은율이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긴장감에 냅다 손을 뿌리치고 김재민 씨를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떠나는 택시를 쳐다보고 있다가 땀까지 나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가 진짜 차 주임님이 뭐가 어떻다고? 아 어쩐지 귀 빨개질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아무래도 내일 도망 다니는 사람은 김재민 씨가 아니라 나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