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내가 말할 때는 개지랄, 소정이가 말할 때는 진상 오브 진상, 민기 말로는 병신 짓, 원우네 아버지 말씀으로는 부모도 못 알아보는 성질 더러운 놈의 소행,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를 전해들은 은지의 소감으로는 터프하고 남자답고 와일드하고 짱 멋진 원우 오빠의… 아니, 이건 됐다. 어쨌거나 이십대 초반의 차원우를 봐온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차원우의 난동은 꽤 오랜만이었다. 처음 같이 살기 시작하고,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에는 그 짓거리가 정말로 적응이 안 됐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리고 지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화를 버럭버럭 냈었기 때문이다. 과제 때문에 자취방에 친구 한 번 불렀다가 키보드가 박살나고, 과에서 엠티 조를 짠다길래 선발대로 신청했다가 과방까지 쳐들어온 차원우를 끌고 나오느라 개고생을 했었다. 그렇게 실컷 화를 내놓고 내가 신경을 하도 많이 써서 먹은 걸 다 토하거나 아니면 아예 굶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안 보기 시작하면 옆에서 똥 마려운 개새끼처럼 끙끙거리면서 안절부절못하고,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좀 풀려서 말 몇 마디를 시키면 그러게 왜 다른 놈들한테 자꾸 추파를 던지냐고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해대서 또 싸웠었다. 최 실장 이야기를 원우에게 쉽게 하지 못한 건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여지없이 잘라내고 눈길 한 번 안 준다고 해도 차원우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니까. 물론 이런 식으로 개지랄을 또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이번에도 좀 의외였다. 원우가 그 ‘말을 해도 들어먹지를 않는 멍청한 놈’의 버릇을 고친 지는 이미 꽤 되었기 때문이다.
소정이가 예전 이야기를 하면서 놀리기 바쁜 예전 나와 원우의 생활, 지금은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서 소멸할 지경인 우리의 ‘신혼 생활’은 꽤 오래 갔었는데, 집안에 이야기를 하고 군대를 같이 갔다 오고 나서 나와 원우의 성격이 바뀐 다음부터는 그 영원할 줄 알았던 신혼 생활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었다. 지가 지 성질대로 부모님한테 지랄을 했다가 이마가 찢어져서 기절한 나를 업고 뛰어나와야 했던 기억 때문인지 그 이후로 한동안 원우는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목소리 한 번 높인 적이 없고, 내가 아무리 쥐어 패고 걷어차더라도 나를 제압하려고 팔이나 다리를 붙드는 일은 있었어도 뭐 하나 집어던진 적이 없었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뭘 부쉈으면 부쉈지, 내 앞에서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다. 반대로 나는 조금이라도 성에 안 차는 게 생기면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거울이며 그릇 몇 개 깨먹는 건 우스웠고 심하게는 TV까지 부숴먹은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원우는 그걸 가지고 나에게 뭐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이야 원우도 화가 날 땐 그냥 참기보다는 적당히 말을 하고 넘어가는 정도로 답답하지 않게 해 주고 있고 나도 내 성질 죽이려고 많이 노력을 하지만, 처음 서로의 바뀐 성격에 적응하는 기간 동안 우리는 꽤 많이 싸웠고 심하게는 헤어질 생각까지 했었다. 심지어 서로를 시험하기도 했다. 내가 대놓고 고등학교 동창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모텔에서 자고 간다고 했을 때도 있었고, 한참 입사 시험 준비를 하던 원우가 스트레스 풀러 간다고 여자 둘 사이에 끼어서 클럽을 갔을 때도 있었다. 물론 우리 둘 다 그 일에 대해서 화는커녕 일언반구 말도 없었다.
여태까지 차원우와 같이 사는 동안 유일하게 그때 딱 한 번 그런 고민을 했었다. 내가 누굴 만나고 다니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간에 원우가 신경을 쓰지 않고 나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걸 보면 우리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게 아닐까. 처음에야 좋아 죽을 것 같고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서 집에 이야기까지 다 해뒀지만 보통 사람들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데 우리가 과연 그 힘든 일을 겪으면서 집에 말을 하고 사귈 정도로 오래 갈 사이일까.
참 우스운 일이지만 아마도 나는 그렇게 변한 원우에게 은근히 서운해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이 정말 적응의 동물이긴 한가보다. 처음에는 그런 행동을 하는 원우 때문에 화가 나는 건 둘째 치고 무서워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숙이고 들어갔었는데 나중에는 반대로 도대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저 새끼는 화를 안 내나 싶었다. 성격이 좋아진 차원우와는 다르게, 성격이라고 해 줄 것도 없고 그냥 성질머리가 된 나는 일부러 원우를 몇 번이나 건드리고 쑤셔보았다. 그저 허허 웃는 걸로 때우는 차미륵 차보살 차느님이 내 성질 다 받아주는 게 편하긴 해도 마음속으로는 이제 그 정도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닌가, 하는 유치한 생각을 했었다.
차원우가 아무리 열이 받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 정말로 화가 나도 티를 내지 않는다. 그랬던 차원우가 또 예전처럼 뭘 갖다 던지고 깨부수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 분노 폭발의 한복판에 서있던 내가 묘한 향수와 더불어 이상하게 뿌듯한 기분에 원우의 그 개지랄을 조금 이용했다는 걸 아마 바보 멍청이 차원우는 꿈에도 생각 못할 거다. 예전에 했던 대로 겁을 잔뜩 먹은 것처럼 말도 안 하고, 적당히 떠는 게 보일 정도로 몸에 힘을 주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더니 원우는 금방 내 꼴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아무 것도 못하고 동상처럼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원우의 다친 팔에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속으로만 말했다. 차원우, 너 아직 나 되게 좋아하는구나, 이 기특한 새끼. 물론 토한 건 원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망할 놈의 최 실장 때문에 요즘 하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먹은 것도 자꾸 얹혀서 그런 거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차원우를 보고 있으려니까 그 스트레스도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병신 같기는 한데 원우의 그 행동이 묘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내가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서 원우가 화를 낸 건 단순히 자기한테 비밀을 만들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아마 예전 일이 겹쳐져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이를 숨겼다가 아슬아슬했던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원우뿐만 아니라 나도 뭔가 감추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래서 더 화가 났을 건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지랄을 한 건 심하다고 생각하겠지. 원우는 지가 한두 번 했던 짓이 아니라서 나에게 더 미안해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한두 번 봤던 짓이 아니라서 사실 별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만큼 했으면 아마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까. 그게 변한 차원우의 성격이기도 하다. 지금은 늦을 때마다 거의 일 분 간격으로 꼬박꼬박 연락을 하고, 미안할 일이 있으면 무조건 대놓고 말로 사과를 하고, 지 옷은 대충 빨아도 내 니트는 항상 손빨래를 한다. 변한 차원우는 실수를 한 번은 해도 두 번은 절대 안 한다.
매번 옆으로 누워서 웅크리고 자던 원우는 오늘은 지 딴에도 어지간히 미안하고 불안했는지 애처럼 내 허리를 안고 바짝 붙은 채로 목덜미에 고개를 기대고 참 잘도 잔다. 애처럼 자니까 나도 애처럼 대해 줘야지. 고롱고롱 내뱉는 숨소리를 들으며 등을 토닥이다가 엉성하게 감긴 붕대가 눈에 들어오자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음 참느라고 약도 대충 바르고 붕대도 대충 감았는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병원부터 가라고 해야겠다. 내 허리와 팔 사이에 끼워놓아서 저릴 것 같은 원우의 팔을 빼놓고 고개를 뒤로 젖혀 원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화를 낼 때 예전 모습이 문득 보여서 사실 나는 좀 설레었다. 원우와 똑같이 생긴 현우가 아무리 나를 무시하고 나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지껄여도 내가 절대 화를 내지 않는 진짜 이유를 아마 바보 차원우는 모를 거다. 그냥 지 동생이니까 밉보이기 싫어서 잘해 주려고 그러나보다, 하겠지.
멍청하게 그런 걸로 좋아 죽냐고 소정이나 민기한테 핀잔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멍청이 데리고 사는데 내가 좀 멍청이면 어때, 멍청이끼리 잘 살면 되지. 침을 흘릴 것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자는 원우의 바보 같은 얼굴을 한참 감상하다가 입술에 입을 맞춰주고 더 꽉 껴안았다. 주눅이 들어 있는 건 보기 싫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좀 써먹어야겠다. 뒤척거리면서 파고드는 원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나도 때늦은 잠을 청했다.
***
그렇게 며칠, 나는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잘 지내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살짝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은율아,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나 피곤한데, 출근하기 싫다, 뻔한 레퍼토리로 웅얼거리는 말에 일일이 대꾸를 해 주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이마와 얼굴을 마사지해 주는 손길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서 좀 웃겼다. 애초에 출근 시간 자체가 나보다 늦기 때문에 보통은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차원우가 최근 사나흘을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해 주니까 편하기는 확실히 편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원우의 다리를 붙들고 비비적거리는 안 하던 짓을 해도 군말 없이 별것도 아닌 애교를 받아주면서 등을 토닥인다. 아직도 쫄아 있는 걸 보면 차원우도 어지간히 소심하다.
“나 햄 구운 거 먹고 싶은데….”
“저녁에 사올게. 아침은 그냥 먹자.”
“햄….”
“점심에 먹으러 갈래? 근처에 그런 거 파는 데 있나.”
“일 바빠….”
“그럼 도시락 싸서 갖다 줄게. 햄하고 소시지하고.”
원우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거실로 나왔다. 지나가는 말로 춥다고 하자 얼른 담요를 가지고 와서 덮어주고, 식탁에 앉아서도 두리번거렸더니 재빨리 차가운 물을 한 컵 떠다 준다. 결국 나는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앞치마를 두르고 뒤집개를 든 채로 왜, 하고 물어보면서도 눈을 못 마주친다. 아오 저놈의 새끼, 저 귀여운 놈의 새끼.
“야, 너 내 눈치 언제까지 볼 건데?”
“…들켰냐? 눈치 보는 거?”
“더 떠보려고 했는데 못하겠어. 하던 대로 해.”
“난 원래 너한테 이렇게 하잖아. 네가 안 하지.”
“내가 그러면 너 또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냐고 뭐 또 집어던지고….”
“아 안 그런다니까 이제, 진짜!”
“어쭈, 큰 소리 낸다, 어? 이러다 또 막 소리 지를 거지? 기다려, 나 미리 귀마개 좀 준비해야 돼.”
실실 웃으면서 대꾸하자 또 금방 시선을 피하면서 주방으로 가 버린다. 아 웃겨, 너무 웃겨,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면서 웃다가 얼른 주방으로 가서 투덜거리며 계란 프라이를 뒤집고 있는 원우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오그라들어서 못하겠다더니 왜 이러냐고 는 하는데 볼이 씰룩거리는 걸 보면 분명 웃고 있다. 목덜미를 이를 세워서 몇 번 깨물기가 무섭게 가스불을 끄고 돌아서서 허리를 안는 원우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좋은 생각이 있는데.”
“뭔데?”
그 머리에서 나오는 좋은 생각이라면 당연히 뻔한 거겠지만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지금부터 빨리 한 번만 하고, 내가 널 회사까지 태워다 주는 거지. 냉동실에 식빵 남은 거 얼려놨는데 그거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가는 길에 아침 먹고. 어때?”
“내가 오늘 회의만 네 시간 연속으로 잡혀 있고 야근하는 날만 아니었어도 좀 혹했을 텐데 안 되겠다.”
“오늘 야근 하냐?”
“정아한테 전화해서 확인시켜줘?”
“이제 진짜 안 그런다니까.”
“알았으니까 키스로 때워.”
이런 말은 참 잘도 듣는 차원우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맞춰온다. 싱크대에 기댄 채로 키스를 받으면서 티셔츠 속으로 들어오는 손을 모른 척 했더니 꽤 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슴과 배를 오르내리던 손이 기어이 바지 안으로 옮겨갔다. 아침인데다가 타액으로 입가가 축축해질 정도로 진하게 입을 맞추는 동안 일어서 있던 내 것을 원우가 잡고 몇 번 주물렀다. 하악, 숨을 토해 내면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젖혔다. 원우가 목덜미를 진득하게 핥으면서 말했다.
“식빵은 됐고 아침 건너뛰어도 시간이 안 되겠는데.”
“안 돼, 나 진짜 오늘 바쁘… 아…!”
“양심적으로 벌써 이렇게 줄줄 흘리면서 안 된다고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거기는 양심으로는 해결이, 읏, 안 되는 데라고.”
“그러니까 비양심적으로 지각 한 번만 하자.”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입 속으로 들어온 손가락 때문에 타이밍을 놓쳤다. 에라 모르겠다. 혀로 감아서 쭉쭉 빨아주면서 축축하게 적시자 곧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바짝 말라 있는 입구에 닿았다. 목을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원우는 자기가 오랜만에 개새끼 모드가 돼서 난리를 친 것이 어지간히 미안했는지 내가 회식을 한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갔지만, 나는 아직도 그게 찜찜했다. 말을 할 때는 홧김에 꼴도 보기 싫어서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긴 해도 원우한테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차원우가 계속 저자세로 나오니까 대뜸 미안하다고 하기가 애매했다. 정작 본인이 그걸 잊어버린 것 같기도 했고.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할 수가 없다.
“으, 좀 제대로 풀고….”
“식빵 먹을 시간도 없는데 젤 가지러 갈 시간이 어디 있냐.”
벌써부터 손가락을 넣고 쑤시기 시작하는 바람에 아래가 화끈거렸다. 이러다 피라도 보면 오늘 해야 할 업무는 말짱 꽝이다. 싱크대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잡히는 걸 아무거나 내밀었더니 원우가 픽 웃었다.
“맛있게 먹어달라고 식용유 주냐?”
“올리브유야, 식용유 아니고. 변태놈아.”
“그게 중요하냐, 진짜 변태같이 한 번 해 봐?”
다른 의미로 이성을 잃은 차원우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이미 몸소 경험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 기름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흠뻑 젖어서 미끈거리는 손으로 원우가 회음부를 문질렀다. 이상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주방에서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오랜만이라 그런가, 하긴 며칠 전에 대판 싸우고 난 다음에는 키스도 제대로 안 했고, 그 전에는 바빠서 못 했으니까 나도 꽤 쌓여 있었나 보다.
“흐으윽….”
“너무 조여, 힘 좀 빼.”
“서서, 하는데 힘을, 윽, 어떻게 빼, 나쁜 새끼야.”
다리 한 쪽을 들어서 허리에 걸쳐놓고 원우가 몇 번을 넣었다 빼면서 끝까지 들어왔다. 미끄러워서 그런지 몇 번 비틀어 찌르는 것만으로도 안에서 대충 자리를 잡는다. 정점에 끝을 두고 한 번 밀어붙일 때마다 허리가 저절로 들썩거렸다. 후우, 귓가에 뜨거운 숨이 흩어질 때마다 몸이 달았다. 제대로 움직이려는 듯 엉덩이를 꽉 움켜쥐어서 부르르 떨고 있는데 갑자기 간신히 바닥을 디디면서 체중을 전부 지탱하고 있는 다리 한 쪽을 마저 원우가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더 깊은 곳까지 빈틈없이 채워졌다. 나는 허겁지겁 원우의 목을 껴안았다.
“안, 안 돼, 아, 으응, 흑.”
“자세 잡았어, 말 시키지 마.”
“잠깐, 원우야, 하악, 아, 아!”
이 무식하게 힘 센 놈, 그 와중에 기술까지 챙기는 놈, 짜증을 낼 새도 없이 나는 싱크대 모서리에 등이 눌려서 몇 번이나 부딪히는 것도 모른 채로 정신을 놓고 흔들렸다. 그새 땀이 배어난 손이 자꾸 미끄러져서 손톱을 세워 어깨를 긁으며 붙들 때마다 원우가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콘돔도 안 썼는데, 안에다가, 하면, 아 모르겠다 씨발 너무 좋아….
“아, 앗, 그, 그만, 나, 아윽!”
눈앞이 핑 돌았다 싶더니 금방 시야에 들어오는 배경이 바뀌었다. 아까부터 계속 싱크대에 부딪히던 등이 편해진 건 좋은데 대신 가슴과 배에 닿은 식탁 유리가 너무 차가워서 나는 몸을 움츠렸다. 차리다 만 식탁 위의 그릇들을 대충 팔로 밀어서 한 쪽으로 치워놓고 나를 엎드리게 한 원우가 엉덩이를 잡아 벌린다. 괜히 건드렸다. 저 새끼가 식탁에서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차원, 우, 흐으, 좀… 아, 거기, 아!”
“뭐, 말을 해.”
뭐긴 뭐야, 거기 좋으니까 좀 더 넣어달라는 거지. 그리고 척하면 척,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눈치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채는 노은율 전문가 차원우는 말을 하라고 해놓고 내가 말을 안 했는데도 금방 내가 원하는 대로 퍽퍽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선임님!”
“…어, 어?”
“진짜 몸살 나셨어요? 늦게 일어나셔서 꾀병 부리시는 줄 알았는데.”
“야, 되게 서운하다, 진짜 아프다고 몇 번을 말하냐.”
“목이 좀 쉬신 것 같긴 하네요. 진짜 몸살이신가 보네.”
물론 목이 쉰 건 다른 이유고, 몸살은 아니고 다른 데가 아프지만 어쨌든 아프긴 아프다. 넋을 빼고 앉아 있다가 정아한테 또 핀잔을 들었다. 앉아 있는 자세를 조금만 바꿔도 쿡쿡 쑤시는 엉덩이 안쪽의 그곳과 뻐근한 허리, 근육이 제대로 뭉친 다리와 기어이 싱크대 모서리 모양으로 멍이 든 등까지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한 번만 하고 식빵이 어쩌니 하던 차원우는 결국 두 번을 쉬지도 않고 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지 회사랑 내 회사에 차례대로 전화를 했다. 우리 팀장님이 원우 허벅지가 튼실하다고 좋아해 줘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누구 마음대로 오전 업무를 까고 있냐면서 몸살로 죽어도 회사에서 죽으라고 가차 없이 기획안으로 두드려 맞을 뻔했다.
오전에 네 시간 분량으로 잡혀 있던 회의는 오후로 미뤄졌다. 최 실장 담당 매니저 철호 형은 내가 점심시간 직전에 출근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자리로 찾아와서 오만 짜증을 다 냈다. 지금도 자꾸 멍 때리게 되지만 열을 다 식힐 새도 없이 출근을 해서 더 멍했던 아까는 철호 형이 뭐라고 화를 내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내가 뭐라고 변명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고. 그냥 내일 점심 살 테니까 한 번만 봐달라고 웅얼거렸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철야하는 직원들을 위해 참 친절하기 짝이 없는 회사에서 갖다놓은 소파에 누워 점심도 거르고 한 시간을 꼬박 자고 일어났더니 그나마 몸이 힘든 게 조금 가셨다. 아직도 일을 하다가 잠깐씩 혼이 나갔다 들어오기는 하지만.
아침에 회사에 왔다가 헛걸음을 했다던 최 실장은 단박에 전화를 해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연락이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 상태로 최 실장하고 통화를 했다가는 최 실장이 내 허점을 수도 없이 잡아서 그걸 또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았다. 오후 회의 시간에 다시 온다고 했다니까 최소한 최 실장이 올 때까지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최 실장이 온다고 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 때쯤, 업무 때문에 잠깐 팀장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살금살금 휴게실로 와서 원우에게 문자를 했다.
[개새끼야 너 때문에 점심도 못 먹었잖아]
[햄 먹고 싶은데]
[야 차원우]
[너만 배채우고 출근하니까 일이 존나 잘되냐]
도시락을 싸다 주니 마니 하더니 도시락은 개뿔 전화 한 통 없는 게 은근 서운했다. 아침나절부터 올리브유까지 싹싹 발라서 그만큼 먹어놨으면 미안해하는 티라도 내야지 이렇게 입 싹 씻어도 되나, 양심이 어쩌고 하던 새끼가 말이야. ‘ㅗ’를 한 이십 개 정도 찍어서 문자를 보내고 차가운 냉커피를 빈속에 쭉쭉 들이키다가 전화를 받았다.
“뭐, 왜, 뭐.”
- 점심 왜 안 먹었냐, 아침도 안 먹었잖아.
“피곤해서 그냥 잤어.”
- 야근은 몇 시까지 하는데? 이따가 데리러 갈까?
“집에 들어가면 나오기 귀찮을 텐데 그냥 알아서 갈게.”
- 나도 오늘 야근할 것 같아서 시간 맞으면 같이 갈까 했지.
“네가? 왜?”
차원우가 야근이라니, 오늘 하루 반차를 쓴 게 그렇게 큰 타격인가 싶어서 놀라서 되물었다. 본부장이 바뀌어도, 사장이 바뀌어도, 하다못해 대통령이 바뀌어도 아홉 시 출근에 여섯 시 퇴근을 어기는 적이 없는 회사에서 원우가 야근을 하는 일은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인데.
- 회사에 인턴 새로 들어왔는데 내가 인턴 담당하게 돼서 일이 좀 생겼어.
“그 회사는 왜 너한테 인턴을 맡기고 그래?”
- 왜, 내가 인턴한테만 신경쓸까봐 좀 찜찜하고 그러냐?
“아니, 인턴이 뭐 못하고 그러면 네가 또 뭐 던지고….”
- 아 노은율 진짜… 내가 또 그러면 진짜 사람 새끼가 아니라 개새끼, 아니, 개만도 못한 새끼다. 한 번 더 그런 일 있으면 아예 내 손모가지를 분질러 버려.
으하하, 웃음이 저절로 나와서 아픈 와중에도 벽을 붙들고 한참을 웃었다. 더 놀리면 진짜로 화낼 것 같으니까 그만해야겠다.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하긴 했다.
- 어쨌거나 오늘 늦게 출근한 사이에 얘가 일을 뭘 잘못해놔서, 그거 수습하다 보면 몇 시에 끝날지 잘 모르겠어.
“그럼 먼저 끝나는 사람이 전화하는 걸로 해.”
- 알았어. 혹시 네가 먼저 끝나면 또 밖에서 기다리지 말고 꼭 어디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라, 몸도 안 좋은데.
“응. 근데 나 할 말 생각났는데 말해도 돼?”
언제는 숨기지 말라면서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막상 말을 한다고 하니까 원우는 한참 우물쭈물하다 뭔데, 하고 간신히 대답한다. 나는 심각한 척 말했다.
“네가 부순 화분.”
- …어.
“사올 때 플라스틱 화분으로 사와.”
- 아, 어. 알았….
“도자기나 유리는 안 돼. 혹시 또 부술 일이 생기면 그때는….”
- 야!
어이쿠, 우렁찬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나올 것 같다. 신나게 낄낄대면서 전화를 끊다가 휴게실 유리문 너머에서 나를 보고 있던 최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좆됐다, 하필 이 때 오냐. 얼굴 표정을 싹 바꾸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나갔더니 또 그 느물느물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넨다.
“은율 씨 뭐 좋은 일 있나 봐요?”
“네.”
“나도 좀 같이 알면 안 되나?”
“네. 안 돼요.”
“아, 오늘도 찬바람 쌩쌩 부네. 방금 전까지는 안 그러더니. 누구랑 통화한 거예요?”
“사적인 통화까지 다 말씀드려야 됩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은율 씨하고 사적인 관계가 되고 싶다 보니까 궁금해져서요.”
어련하시려고, 방금 전까지 원우와 통화한 걸로 기분이 꽤 좋아졌기 때문에 나는 평소처럼 가시가 잔뜩 박힌 말로 쏘아붙이는 대신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재빨리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간 최 실장을 상대하면서 익힌 요령이 몇 가지가 있다. 최 실장은 회사 사람들과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농담 정도는 해도 대놓고 수작을 걸듯이 말하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불안한 건 있었지만 그래도 편하긴 편했다. 업무 때문에 회의에 들어가면 회의 시간에는 딱 일 이야기만 했다. 회의 중간에 잠깐씩 쉬거나 일 문제로 통화를 할 때 둘이 있게 되면 어김없이 작업의 시작이었지만 그 자리만 피하면 된다는 걸 알고 나서는 나도 항상 철호 형이나 정아를 끼고 다녔다.
최 실장이 나한테 집적거리는 건지 아니면 내가 하도 차원우의 우쭈쭈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도끼병이 생겨서 착각을 하는 건지 아직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가 도끼병이라고 한다면 나는 반박할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무려 클라이언트님이신데 내가 대놓고 틱틱거리면서 싸가지 없이 대하고 말을 막하고 행동을 함부로 해도 최 실장은 나에게 한 마디도 싫은 소리를 안 하고 업무로 괴롭히지도 않는다. 다만 재수 없게 허허실실 호구처럼 웃으면서 은율 씨는 그럴 때가 더 매력적이라느니 오늘도 까칠해서 귀엽다느니 개소리를 해댈 뿐이지. 다른 사람들 중에 최 실장에게 나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없어서 비교의 대상이 없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중한 고객님을 호구처럼 대해도 별 탈이 없다는 건 그 고객이 진짜로 호구거나 아니면 호구 취급을 당하는 걸 참아줄만한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최 실장은 두 번째 경우일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을 할 때 최 실장은 꼼꼼하다 못해 깐깐해서 사람을 빡치게 하는 일은 있어도 호구처럼 굴지는 않으니까.
오늘 회의도 마찬가지다. 철호 형 말마따나 뭐 그렇게 씨발 걸리적거리는 게 많은지 이거저거 죄다 태클을 걸어서 결국 절반은 다시 하게 만들어놓은 최 실장이 오늘 회의는 이만큼 할까요, 라고 말을 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야근은 확정이고 철야라도 면해 볼 생각으로 기획안을 뒤적거리다가 저만치에서 최 실장이 일어나는 걸 언뜻 보고 재빨리 정아에게 말을 걸었다. 야근 전에 뭐 간단히 먹을까, 선임님 점심도 안 드셨는데 식사 제대로 하셔야죠, 괜찮아 그냥 컵라면으로 때우든가 하고….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식사라도 하러 가실까요?”
“야근이라 대충 때우고 업무 봐야 해서요.”
“최 실장님, 우리 선임님 너무 일 많이 주지 마세요.”
“하하, 미안합니다. 내가 잘 몰라서 이거 저거 시키는 게 좀 많죠?”
“많아도 너무 많아요, 우리 선임님 몸살 나서 아프신데 그래도 일하시겠다고 간신히 오후에 출근하셔서 점심도 못 드시고 내내 누워 계시다가 겨우 회의 들어오셨단 말이에요.”
이상하다, 오후에 출근해서 이제 회의에 들어온 정아의 선임은 나밖에 없는데 도대체 간신히 출근해서 내내 누워있던 선임은 누구지, 시키지도 않은 걸 열심히 나불대고 있는 정아에게 그만하라고 옆구리를 푹푹 찔러도 끄떡도 않는다. 일을 많이 주지 말라는 소리가 정아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내가 출근을 한 이후로 일도 제대로 안 하고 헤롱거리고 있었던 걸 뻔히 알고 있던 팀장님과 철호 형까지 다들 입을 닫고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다. 무서운 직장인들 같으니.
“많이 아팠습니까?”
“그게….”
“얼마나 아팠으면 선임님이 직접 전화도 못 하셔서 같이 사시는 친구 분이… 악! 선임님 왜요!”
“그만 좀 해라, 누가 보면 중환자인줄 알겠다.”
기어이 원우 이야기까지 나와서 이번에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팔을 철썩 내리쳤다. 잠깐 최 실장의 표정이 굳는 것 같더니 곧 사람들 앞에서 늘 유지하는 웃는 얼굴로 돌아온다. 그 짧은 순간의 표정 변화를 놓치면 내가 노은율이 아니라 차원우다. 분명히 나중에 같이 사는 친구가 누구냐고 물어볼 것만 같은 예감이 팍팍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럼 오늘 제가 저녁이라도 사야겠네요. 일 많이 시켜서 소중한 인재가 몸살이 나도록 부려먹었으니까 사죄하는 의미로 소고기라도….”
“아니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물론 안 그러셔도 되지만 실장님이 정 사시겠다면야 저희가 잘 아는 한우집이 있는데….”
맞은편에서 철호 형이 핸드폰을 꼭 쥐고 일어난다. 지금 당장 자리를 알아볼 기세다. 그냥 무서운 직장인들이 아니었다. 이 소고기에 미친 무서운 직장인들.
결국 나는 안 가겠다고 몇 번을 우기다가 정아에게 질질 끌려서 회식도 식사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 왔다. 고기를 앞에 두고 이렇게 식욕이 떨어지기는 또 처음이다. 최 실장하고 얼굴을 마주 하고 앉아서 그런가. 이렇게 고기를 처먹고 있을 시간에 사무실에 앉아 있었으면 일을 해도 반은 더 했겠다. 야근으로 끝날 일을 기어이 철야까지 끌고 가는 회사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지만 다들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정말 해맑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대역죄인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나 아무래도 철야할 듯 그냥 먼저 들어가라]
적당히 바디 투 바디로 화해도 한 김에 원우랑 같이 들어가고 싶었는데 다 글러먹었다. 이왕 글러먹은 거 고기라도 먹고 가야겠다. 정아가 내 앞에 몇 점 집어다 놓은 소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도착한 답장을 확인했다.
[적당히 하고 잠은 집에 와서 자]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망할 지금 밥 처먹겠다고 다들 고기 먹으러 왔어]
[고기? 회식하냐?]
[회식은 아니고 우리 이번 거래처 사람이 산다고 해서]
[알았어]
핸드폰을 집어넣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집에 가도 할 일이 태산인데 집안일은 또 언제 하지… 아, 이럴 때 차원우를 부려먹어야지. 나는 얼른 문자 몇 개를 덧붙였다.
[원우원우야]
[나 빨래 돌리기 시러시러]
[다림질도 해야 되는데 귀차나 시러시러]
[음식물쓰레기도 못 버리고 왔는데 원우원우야]
[워누워누야]
[워누자기야]
분명 읽고는 있는데 답이 안 온다. 이게 웬 황당한 문자 폭탄인가 하겠지. 핸드폰을 보면서 좋다고 멍청하게 실실 웃고 있을 얼굴을 생각하니까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오….
[야 내가 진짜 잘못했다 너 왜 그러는데]
나오려다가 말았다. 아니 이 새끼는 기껏 애교를 가져다 바쳐도 못 받아 처먹네.
[왜 그러긴 우리 워누워누가 보고 싶어서 그러지]
[나 좀 무섭다 알았어 집안일 해놓으면 되잖아 그러지마]
[뭘 무서워 병신아 닭살을 떨어줘도 지랄]
[너무 좋아서 무서워]
그러더니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캐릭터 이모티콘이 같이 도착했다. 빵 터져서 얼굴을 가리고 큭큭대고 웃다가 정아가 툭툭 치길래 고개를 들었다. 최 실장이 넋을 빼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은율 씨 아까부터 되게 좋은 일 있나 본데 사람 자꾸 궁금하게 만들 거예요?”
“사적인 일인데 왜 자꾸 궁금해 하시냐니까요.”
“그럼 궁금해 하지 않게 애인이랑 문자 그만 해요.”
“선임님 애인 있어요?”
대답을 안 하면 애인이 있는 줄 알고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말을 안 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정아가 대뜸 물었다. 오늘 정아 덕분에 엿을 여러 번 처먹고 있다.
“…아니.”
“에이 뭐야, 깜짝 놀랐네.”
“왜요, 정아씨가 은율 씨 좋아해요?”
“제가요? 설마요. 우리 선임님은 얼굴 빼고는 볼 게 없어요.”
그렇구나. 그동안 우리 정아가 나한테 쌓인 게 많았구나. 하하하. 하지만 착한 선임이 되려면 원수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다. 이럴 때는 차원우랑 살면서 수많은 말싸움으로 임기응변을 길러놓은 게 참 많이 도움이 된다.
“저보다는 최 실장님이 정아랑 더 잘 어울리는데요.”
“어우, 선임님 왜 그래요.”
“왜, 최 실장님이랑 너랑 사귀면 되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지 마요, 최 실장님 싫어하시겠다.”
지는 좋아 죽겠으면서 괜히 최 실장 핑계다. 우리 정아 괜찮은데, 빙긋 웃으면서 최 실장을 바라보았더니 웃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오묘한 얼굴로 고기를 구우면서 딴에는 예의를 차려가며 대꾸한다.
“저 같은 사람이면 정아 씨가 너무 손해 보는 장사인데요.”
“하긴 우리 정아가 엄청 괜찮기는 하죠.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어른스럽고, 근데 또 보면 어린 티가 확확 나요. 정아가 또 얼굴은 엄청 동안이니까.”
웃고 있는 사람은 세 사람인데 진짜로 좋아서 웃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 불편한 테이블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어딜 감히 내 앞에서 수작질을 하려고, 나는 나를 사육할 기세로 열심히 잘 구워진 소고기를 집어다 주면서 선임님 많이 드시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싹싹하게 구는 정아를 보며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이만큼 해 줬으니까 잘 해 봐. 물론 최 실장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한 저녁식사가 끝나니 다들 일을 하러 가기가 귀찮았는지 한참을 뭉그적거리다가 식당에서 나왔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어정쩡하게 식당 밖에서 서성대고 있는데 최 실장이 슬쩍 다가온다. 정아를 부르려고 해도 저만치에서 여직원들끼리 뭔가 하하호호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고 철호 형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틈에 있어서 부를 수가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후려쳐야지. 나는 태연하게 저녁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최 실장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걸 보면 돌직구가 날아올 태세다.
“은율 씨 나한테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역시. 예상 못했던 것도 아니라서 나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제가 뭘요?”
“내가 은율 씨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러네.”
최 실장도 작정을 한 모양이다. 늘 그랬던 대로 능글능글 웃고 있지도 않고, 장난스러운 말투도 아니다. 그럼 나도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다. 팔짱을 끼고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최훈 실장님.”
“네.”
“최 실장님이 절 좋아하는 게 어떤 의미로 좋아하는 건데요?”
“그걸 말로 해야 알아요?”
“네.”
한숨을 쉬면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하길래 저는 담배 안 피웁니다, 하고 태클을 걸었다. 그랬더니 또 얌전하게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노은율 씨.”
“네.”
“노은율 씨랑 연애하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이제 말끔해졌다. 더는 소정이한테 조공 바쳐가며 상담하려고 굽실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나왔으면 간단했을 걸 무슨 애 꼬시는 것도 아니고 살살 구슬리려고 들어서 사람을 빡치게 하냐.
“최 실장님 그런 취향이셨습니까?”
“은율 씨는 그런 취향에 편견 있었어요?”
“편견은 없는데 좀 의외여서요.”
“그냥 의외여서 놀라서 그러는 거면….”
“아뇨, 의외인 건 다른 문제고, 저는 최 실장님하고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애인 없다면서요.”
꼭 사탕 뺏긴 애처럼 억울한 얼굴로 말한다. 나는 픽 웃었다.
“제가 애인 없는 거랑 최 실장님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냥 제가 최 실장님이랑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요. 앞으로도 없을 거고.”
“…….”
“그러니까 업무 이외에 다른 걸로 귀찮게 하지 마셨으면 하는데요.”
“…그렇게 귀찮았습니까?”
“네.”
이런 데서 빙빙 돌려가며 최 실장님은 참 좋은 사람이지만 저랑은 안 맞는 것 같고 최 실장님은 사람은 괜찮은데 제 타입은 아니고 등등 지껄여봤자 도움 될 게 하나도 없다. 특히나 이 이야기를 원우에게 해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 잘라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대답을 하고 사람들 쪽으로 가려고 했을 때 뒤에서 최 실장이 조용히 말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
“사람들한테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들어갔다고 전해 주세요.”
“네.”
“수정된 기획안은 내일 아침까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뭐 이 새끼야? 지금이 아홉 신데? 휙 돌아서서 가버리는 최 실장의 뒤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입모양으로만 거침없이 쌍욕을 쏟아 부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희희낙락하며 걸어오고 있는 회사 사람들을 보니까 갑자기 없던 죄책감이 막 생기려고 했다. 나 때문에 그냥 철야를 하는 것도 모자라서 개처럼 일하게 되었다는 걸 알면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날 죽이려고 할 거다. 최 실장 저 새끼 때문에 성질이 열 배는 더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