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다른 말은 없던데, 그냥 그러고 나서는 연락 없었어.
“…그래.”
- 왜? 무슨 일 있는 것 같아?
“아니… 그냥 분위기가.”
걱정스러운 소정이의 목소리에 괜한 전화를 했나 싶었지만 물어볼 사람이 소정이 말고는 없었다. 자고 있던 사람을 전화로 깨워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별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감이 좀 안 좋다는 것뿐이라는 게 미안했지만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할 말이 없었다.
“어쨌거나 너한테 별 말 없었으면 됐어. 미안.”
- 미안하긴, 만약에 뭐 일 있어서 연락 오면 바로 얘기해 줄게.
그나마 믿을만한 정보통이 있어서 다행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멍하니 업무 프로그램을 켜고 앉아 있다가 과장님이 오셔서 어깨를 툭툭 치셔서 정신을 차렸다. 알림사항이 있으니까 잠깐 소회의실로 오라고 하셔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소정이와 약속이 있다고 했다가 취소한 그날부터 은율이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를 설명하려면 딱히 할 수가 없고 그냥 내 직감 같은 것이었다. 평상시에 하는 행동과 비슷해 보여도 분명히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짜증을 낼 때도 성질을 부릴 때도 기운이 빠진 것 같았다. 철야에 야근을 연달아 하고 들어올 때 이러다 죽겠다고 툴툴거리는 것과 요즘 집에 들어와서 보이는 행동들에도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지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별일 없다고만 하니까 진짜로 별일이 없는 건지 아니면 대답을 하기가 싫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후자의 경우라서 그러는 거라면 나도 좀 화가 날 것 같아서 일단은 참고 있다. 도대체 노은율이 나한테까지 숨길 일이 뭐가 있을까 싶어서 서운한 것도 있었다.
혹시나 나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나한테는 이야기를 못하는 건가 해서 어제 밤에 은율이가 일찍 잠들고 난 다음 집에 전화까지 해 봤다. 엄마나 아버지도 별 말씀이 없으셨고, 은율이 어머니 대신 통화를 한 은지도 아무 일이 없다고 하니까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집안일이 아니고 소정이도 모르는 일이라면 분명 회사 일일 것 같은데 그건 은율이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내가 알 방법이 없으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다릴 생각을 하니 초조해져서 일이 손에 잘 안 잡혔다.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소회의실은 어느새 사람들이 꽤 차 있었다. 부장님과 그 뒤를 따라 우르르 들어오는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짝 긴장들을 하고 서 있는 걸 보니 인턴 아니면 신입인가 싶었는데 역시나 이제 막 교육을 끝내고 온 인턴들이라면서 부서별로 배정을 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입사 동기가 많은 우리 팀은 친하다 못해 막말이 오가는 사이여서 그런지 이미 대놓고 첨예한 대립 구도였다. 여자 인턴이었으면 좋겠다고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남자 동기들과 영계로 배정해 줬으면 좋겠다고 투덜대는 여자 동기 한 명 사이에 한 치의 양보도 없어 보여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행정지원팀은 김재민 씨….”
“아 또 남자, 아 진짜.”
이름이 불리기가 무섭게 옆에 앉아 있던 동기인 근태가 대놓고 투덜거렸다. 딱 한 명 있는 여자 동기 현정이는 이미 다른 팀 동기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난리가 났다. 핸드폰을 흘낏 보자 간간히 미묘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 직장 내 성희롱 하지 말라고 농담을 던졌다가 얻어맞을 뻔했다. 그저 성별이 남자라는 것 이외에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 인턴이 안 좋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주눅이 든 채로 우리 팀 쪽으로 왔다. 물론 현정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환영을 하고 있었지만.
각 팀별로 업무를 배정해 주고 교육 담당을 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바로 정할 줄 알았더니 점심 먹을 때 의논하자면서 부장님이 자리로 가 버리셨다. 오전 업무를 적당히 땡땡이 칠 생각이었던 동기들을 비롯해 차장님과 과장님까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갈 곳을 잃은 인턴은 자리로 돌아간 사람들 틈에 멀뚱히 서서 눈치를 보고 있다. 저렇게 계속 세워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업무도 안 정해 주고선 뭘 하라고 시킬 수도 없어서 일단 손짓을 해서 불렀다. 기합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들어간 게 꼭 내 신입 때를 보는 것 같았다. 출근 일주일 하고 긴장 풀려서 집에 와서 앓아누웠었지 아마.
“인사부터 하세요. 저쪽 끝자리 부장님부터 차례대로.”
“아, 네, 네.”
“긴장 풀고요. 무서운 사람 없으니까.”
“아… 감사합니다.”
로봇도 아니고 직각으로 걸어가서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는 인턴을 지켜보고 있는 주변 책상의 동기들 표정이 심상치 않다. 분명 뭔가 골탕을 먹일 것 같은데 재미는 있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놈을 놀리는 걸 그냥 보고 있는 게 양심에 찔려서 적당히 자리를 피할 구실을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들고 일어났다. 잠깐 다들 정신없는 타이밍에 은율이에게 전화를 해 볼 참이었다.
비상구 계단으로 나와서 두어 번 전화를 하고 문자를 했는데도 연락이 없다. 평소라면 일이 바쁜가보다 하고 말겠지만 이상하게 더 신경이 쓰였다. 세 번째로 전화를 걸자 한참 신호가 가다가 아 왜 자꾸, 하고 짜증 충전 완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하는 중이었어?”
- 그럼 출근했으니까 일하지 노냐?
“알았다.”
- 왜 자꾸 전화하는데.
그러게, 왜 자꾸 전화했을까, 나도 모르겠다.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 아 진짜 난 또 회의 중에 계속 전화 와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
“미안.”
- 가뜩이나 빡치는데 진짜….
“왜 빡쳐?”
- 몰라, 끊어봐.
“…무슨 일 있냐?”
전화 너머가 잠깐 조용하더니 곧 폭발했는지 목소리가 확 터져 나왔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귀에서 살짝 뗐다.
- 없다고 씨발! 없어! 아무 일도 없다고! 없다는데 왜 자꾸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냐고! 와 진짜 돌아버리겠네, 무슨 일이 있어야 돼? 무슨 일이 있어야 되냐고! 없다고 개새끼야!
확실해졌다. 이건 십 년을 노은율을 끼고 살아온 내 인생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은율이는 진짜로 내가 잘못한 일이 생겨서 나에게 화를 내더라도 저런 식으로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가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각종 개드립과 비꼬는 말을 퍼부어서 말발에서 쭉쭉 밀리게 하다가 기어이 나도 문과를 나왔는데 왜 이렇게 말대꾸를 못하는지에 대해 깊이 좌절하게 만들면 모를까. 그걸 감지하자마자 나는 입을 닫고 가만히 있다가 ‘무슨 일이 있어야 되냐’는 말만 수도 없이 반복하던 은율이가 조용해지고 씩씩거리는 소리만 들릴 때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일찍 들어와라. 나랑 얘기 좀 해.”
- 회식 있다고 씨발, 끊어!
전화가 뚝 끊겼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비상 연락처 용도로 저장은 해놨지만 한 번도 쓸 일이 없었고 쓸 생각도 없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네, 기획팀 김정아입니다.
“안녕하세요, 은율이 같이 사는 친구입니다.”
- 아, 안녕하세요. 선임님 지금 회의 들어가셨는데 급한 일이시면 불러 드릴까요?
“그건 아니고요, 일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오늘 은율이 회식 있나 해서요.”
- 음… 오늘은 없을 것 같은데요. 내일부터 사흘은 꼬박 철야해야 돼서 다들 일찍 들어갈 거예요. 메모라도 남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는 빠져도 되는 회식인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한 거였는데 사실을 듣고 나니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원우 앞에서 지금 노은율이 구라를 깠다 이건가,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헛웃음이 나와서 픽픽 웃다가 나중에는 웃음이고 뭐고 화가 치밀어서 표정이 생길 틈도 없이 얼굴이 굳는 게 느껴졌다.
[회식 없는 거 확인했다]
[여섯 시 이십 분까지 회사 앞]
[안 내려오면 올라간다]
문자 세 개를 연달아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인턴을 놀리는 게 꽤 재미있었는지 낄낄거리고 있던 동기들이 내가 들어가자마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근태를 쳐다보았다.
“차원우, 축하한다. 인턴 교육 담당, 지원비도 나온다는데 잘해 봐라.”
“…누가 정했냐?”
“민주 사회에서 강제로 정했겠냐? 만장일치 거수투표로 정했지.”
그제야 내 책상 옆자리를 열심히 정리하면서 내 눈치를 보고 있던 인턴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하루 아주 좆같은 날이 될 것 같다.
애초에 인턴에게 중요한 일을 시킬 수가 없으니까 인턴 교육 담당이 돼도 중요한 일을 가르칠 수가 없다. 간단한 업무 프로그램 사용 방법과 전화 돌리는 방법, 인턴 기간 동안의 회사 스케줄 정도를 알려주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졌다. 이럴 때는 적당히 인터넷 뉴스나 검색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요령도 없는지 멀뚱히 앉아서 내가 하는 업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인턴의 시선 때문에 가뜩이나 날카로워진 신경줄이 끊어지기 직전에 부장님이 나와 인턴을 호출했다. 회사에서 제일 쓸모없는 업무라고 정평이 나서 공익 애들이 와도 잘 안 시키는 서류책자 만드는 일을 받아들고 사람이 없는 소회의실로 갔다. 그놈의 공기업이 뭔지 회사가 망할 때까지 펼쳐보지도 않을 보관용 기록서류들을 적당히 묶어 표지를 붙이는 잡일 중의 잡일을 하게 된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지금 성질대로라면 전화를 받든 업무를 하든 쌍욕부터 나갈 것 같아서 차라리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 올라와서 종이들과 씨름이나 하는 이게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저… 어느 정도로 나누면 될까요?”
“적당히요.”
“아… 네.”
시큰둥하게 대꾸했더니 몇 장인지 일일이 셀 기세다. 한숨을 쉬면서 대충 한 뭉텅이를 집어주었다.
“이 정도에 맞춰요. 날짜별로 분류만 하면 됩니다.”
“네.”
“별로 중요한 일 아니니까 대충 해요.”
“그래도 처음 하는 일인데 대충 할 수 있나요, 열심히 할게요.”
그 와중에 저 인턴은 또 왜 저렇게 해맑아서 나한테 죄책감을 마구 생성시키는지 모르겠다. 툭툭 튀어 나가는 싸가지 없는 말투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 건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팔까지 걷어붙이고 박스에서 종이들을 꺼내고 있다. 보통 저렇게 처음부터 의욕이 넘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라고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꺼번에 많이 꺼내려고 했는지 거의 한 박스 분량의 A4용지가 어지럽게 바닥에 뿌려졌다.
“죄송합니다, 아, 어떡하지, 진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긴장해서 그렇겠지, 또 한 번 한숨을 쉬려다가 주눅이 들어 있는 걸 보니까 그마저도 못하겠다. 날짜 분류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기야 하겠지만 별일이 아니라서 화를 낼 것도 없다. 참자, 아무 것도 모르는 애한테 불똥 튀게 하지 말자, 나는 노은율이 아니다, 마인드컨트롤을 하면서 당장 발밑에 떨어진 종이부터 주워 올리려고 손을 뻗었다가 손을 베여서 악 씨발, 하고 나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방금 전까지 하던 마인드컨트롤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욕이 나오기가 무섭게 앞에 있던 인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도대체 어느 집 도련님이어서 씨발 소리 한 마디에 저렇게 굳는지 참 대단도 하다.
“어, 어떡해요, 피, 피 나시는데….”
“됐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해서,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요.”
“저 밴드 있을 거예요, 잠시만요, 얼른 갔다 올게요. 죄송합니다.”
“괜찮…!”
괜찮다고 이 새끼야, 사내새끼가 이런 걸로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말라고, 피가 철철 나는 것도 아니고 종이에 베어서 그냥 살짝 손끝에 맺힌 것뿐인데 아주 난리가 났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반차 낼까, 그래, 반차를 쓰자. 반차를 써야겠다. 써야만 한다. 이 정신으로 일했다가는 오늘 회사에서 그간 몇 년을 억눌러온 내 성질머리를 본격 봉인 해제시킬 것만 같다.
“뭐야, 많이 다쳤어?”
“아니.”
대단하신 인턴이 기어이 근태까지 끌고 왔다. 허겁지겁 곰돌이 푸가 그려진 밴드를 꺼내서 건네주는 걸 붙이는 나를 보면서 근태가 픽픽 웃었다.
“난 또 우리 인턴님이 얼굴이 새하얘져서 뛰어오셨길래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안 났으니까 가라.”
“오냐. 피 너무 많이 나서 현기증 나면 반차라도 써라, 응?”
아 씨발 반차 쓰려고 했는데 저 새끼가 저래버리면 반차도 못 쓰고….
“죄송합니다, 그냥 조용히 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됐어요. 신경 쓰지 마요.”
“나머지 제가 할게요, 좀 쉬시….”
“이봐요, 인턴… 이 아니라….”
분명 아까 아침에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뇌가 익을 정도로 열이 받아서 기억이 초기화가 된 건지 생각이 안 났다. 내가 머뭇거리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인턴이 재빨리 얼굴을 들고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김재민이요.”
알았다, 재민아, 그러니까 그만 좀 샐샐거려라, 아주 그냥 천하의 몹쓸 놈이 된 기분이다. 이렇게 순진무구한 인턴을 괴롭히다니 차원우 너 완전 개새끼구나 라고 구박을 할 현정이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결국 화를 내려던 걸 꾹 참고 어지럽게 섞인 종이들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짜증내지 말자. 짜증내서 뭐하냐. 나는 노은율이 아니니까 짜증내지 말자.
점심을 먹은 후에도 계속된 단순 노동 업무는 여섯 시 직전이 되어서야 간신히 끝났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 뒤늦게 핸드폰을 켜 보았지만 연락은 하나도 없었다. 문자를 확인했으면 씨발개발 소리가 하나쯤은 왔을 법도 한데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분명히 뭔가 있다. 원래 하던 업무는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일단 퇴근부터 해야겠어서 여섯 시가 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길 강남대로가 난폭운전을 하고 싶어도 못할 지경으로 막히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심신 안정을 위해 휴게실 냉장고에서 달달한 오렌지주스 하나를 꺼내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돌아보았다. 뛰어왔는지 헥헥거리면서도 부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던 인턴, 아니, 김재민 씨가 꾸벅 인사를 한다.
“저기,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매번 그렇게 인사할 거 아니죠?”
“네?”
“한 달은 더 우리 팀에 있어야 할 건데 한 달 내내 그렇게 나한테 인사할 겁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기가 아니고 차 주임입니다. 그냥 주임님이라고 부르면 되고요.”
“네?”
“주임이요.”
“아, 네. 주인님이라고 하시는 줄 알았어요.”
크헙, 삼킬 새도 없이 오렌지주스를 그대로 앞으로 뿜었다. 방금 엄청나게 무서운 단어가….
“괜찮으세요? 저, 저 손수건 있는데.”
아까는 곰돌이 푸 밴드를 꺼내더니 이번에는 웬 귀여운 개 캐릭터가 그려진 손수건이 나온다. 도대체 저런 캐릭터가 그려진 손수건은 어디 가서 구해 온 건지 모르겠다.
“오늘 저 때문에 화 많이 나신 것 같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부터는 더 잘할게요.”
“김재민 씨 때문에 화난 거 아니니까 안 죄송해도 됩니다.”
“아… 죄송하….”
“안 죄송해도 된다니까요.”
“네, 입버릇이라….”
“내일 봐요, 그럼. 손수건은 내일 줄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연거푸 인사를 하는 사람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대충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아까 들은 말실수가 자꾸 생각났다. 주임님이 어떻게 주인님이 되냐, 주임님, 주인님, 주임, 주인… 아 진짜 골 때리는 놈이다. 결국 엘리베이터 안에서 빵 터져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웃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끼어들기에 심지어 신호위반까지 해가면서 퇴근 시간이면 이삼십 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십 분 만에 주파했다. 정차를 했다가는 딱지를 뗄 것 같아서 은율이네 회사 건물을 한 바퀴 돌기로 하고 내려오라는 문자를 먼저 보냈더니 한참 지나서 답이 왔다. 평상시에 쓰는 문자 어플도 아니고 요즘엔 카드사나 포인트 확인 문자가 아니면 쓸 일도 없는 기본 문자 창에 집, 딱 한 글자가 적혀 있는 걸 보고 나는 핸들을 마구 내리쳤다. 핸드폰을 잘 쓸 줄 모르는 나 대신 스팸 문자 때문에 핸드폰이 자주 울리지 않도록 아예 내 핸드폰 기본 문자창의 알림 기능을 다 꺼놓은 사람이 노은율이다. 그걸 알면서도 확인 못할지도 모르는 문자로 답장을 보낸 것도 빡치고, 지금 벌써 집에 가 있다는 건 분명히 여섯 시가 아니라 더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다는 소리인데 내가 회사 앞에서 뺑뺑이를 돌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언반구 없었다는 것도 빡쳤다. 나더러 엿 먹으라는 것 같은데 당연히 고분고분 엿을 처먹어줄 생각 따위는 꿈에도 없었다. 그나마 바로 얼굴을 본 게 아니어서 육두문자 대신 이성적으로 말싸움을 준비할 시간이 생겼다.
엉망으로 주차를 해놓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속에서 끓고 있는 열을 조금이라도 식히기 위해 후우,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 머릿속은 지금 두 명의 차원우가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아무리 열이 받았어도 상대가 노은율인 이상 미친개처럼 날뛰지 말고 일단 참아야 된다면서 나 스스로를 말리고 있는 착한 차원우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은율이 생전 처음으로 나한테 구라를 쳤는데 병신도 아니고 그걸 그냥 참고 넘겼다가 또 다른 거짓말을 줄줄이 하게 되면 그땐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지고 있는 나쁜 차원우. 현관문 앞에 설 때까지도 어느 쪽으로 할지 결정을 못하다가 결국 그냥 들어갔다.
“정아한테 전화는 왜 했냐?”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꼭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은율이와 마주쳤다. 삐딱하게 서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는 게 딱 기분이 더럽다는 걸 티를 내는 모양새라 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기분이 더러워야 될 사람이 누구인데 이렇게 대놓고 시위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차원우, 너 지금 나 감시하냐? 아니면 뭐 엄마 노릇이라도 해 보려고? 출퇴근 시간 관리하게? 그거 가지고 되겠냐? 회사에다가 카메라라도 달아 놓지?”
“그래, 중간에 어디로 샐까봐 미리 선수 쳐놓으려고 전화했다.”
“대단하네, 다음에는 아예 정아한테 다 까발려라, 그렇게 감시할 거면 친구 나부랭이로 설명이 되겠냐? 씨발 정아가 대뜸 같이 사는 친구 분이 집안일도 챙겨 주냐고 해서 내가 얼마나 식겁을 했…!”
“애초에 네가 구라 까지만 않았어도 내가 전화할 일이 있었겠냐?”
“네가 구라를 까게 만들었잖아 이 개새끼야!”
속이 끓다 못해 온몸으로 김이 팍팍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바람 빠지는 것마냥 헛웃음이 자꾸 나오나. 들고 있던 가방을 현관에 집어던지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더니 노은율은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처럼.
“…지금 네가 거짓말한 게 내 책임이라고?”
“네가 언제 나 회식 있다고 했을 때 확인전화 한 적 있었냐? 있으면 있나보다 그러고 말았지, 이딴 식으로 기분 좆같게 사람 의심한 적 있었냐고!”
“노은율. 너 지금 뭐가 먼저인지 전혀 감이 안 오나 본데, 애초에 네가 아무 일도 없다고 바락바락 악 써가면서 우겨대지만 않았어도 내가 의심할 일이 있었을 것 같아? 안 하던 짓 하는 걸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든 새끼가 누군데 지금 적반하장으로 지랄을 해대냐? 어?”
“그러니까 내가 아무 일도 없다고 백 번 말해도 네가 안 믿는데 내가….”
“무슨 일 있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씨발, 왜 자꾸 나한테 뭘 숨겨, 왜!”
최대한 화를 안 내려고 했다. 소리도 안 지르려고 했다. 근데 안 되겠다. 도저히 못 참겠다. 꼭 술을 많이 마셔서 필름이 끊길 때처럼 눈앞이 핑핑 돌았다. 잡히는 것마다 벽으로, 바닥으로 내던졌다. 중간에 드문드문 소리도 지른 것 같은데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가는지 나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거실에 있는 물건을 죄다 깨부술 기세로 날뛰다가 어딘가에 베이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화분이 깨져서 온통 흙 천지가 된 거실 바닥에 떨어져서 내용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깨진 스킨병과 박살이 난 거울,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찢겨진 책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붙들고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체온이 몇 도는 내려가는 것 같았다. 뻣뻣하게 굳어 서서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입술을 깨물고 있던 은율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한두 번 본 표정, 한두 번 본 눈빛이 아니었다. 몇 년 전에는 수도 없이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겁을 잔뜩 먹은 얼굴을 보니까 화를 냈던 게 생각도 안 날 정도로 미안해졌다. 차라리 기껏 달래고 가르쳐서 사람 만들어 놨더니 제 성질 못 버리고 또 개지랄 떤다고 한 마디 했으면 좋겠다. 선뜻 말을 붙이지도 못하고 서 있자 눈을 감고 한숨을 깊게 내쉰 은율이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몇 대 맞아야 될 것 같다, 고 생각했는데 잘못 짚었다. 은율이는 말없이 내 옆의 서랍장에서 약상자를 꺼내 내 상처를 소독하고, 어느 정도로 베였는지를 살피고, 지혈제와 약을 차례로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잠깐 스치는 손이 꽁꽁 얼어 있는 것처럼 차가웠다.
큼지막한 유리와 거울 파편들을 박스에 주워 담고, 청소기를 꺼내서 흙과 작은 유리 조각들이 널려진 거실을 청소하고, 이제는 쓸 수가 없게 된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은율이 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손에는 엉성하게 붕대를 감고 셔츠 자락은 빠져나와서 흐트러진 멍청한 몰골로 굳어 있었다. 그러다가 정리를 대충 마친 은율이가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뒤따라갔는데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혔다.
“…은율아.”
대답을 할 리가 없다. 멍청한 새끼, 병신 같은 새끼, 학습 능력이 제로라서 백 번을 말해도 못 알아 처먹고 기어이 제 성질 못 이겨서 지랄은 지랄대로 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골 빈 새끼, 나는 방문 앞에서 내 머리를 몇 번이나 내리치다가 그마저도 손이 아파서 제대로 못하고 소파로 와서 털썩 앉았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이런 일이 일주일에 두 번은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은율이는 처음에는 너 때문에 집안 물건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농담처럼 핀잔을 주는 걸로 끝냈었지만 그게 무섭고 겁먹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꺼낸 말이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별 같잖은 것들 때문에 수시로 화를 냈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다. 노은율이 내 거니까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고 나 말고는 아무도 노은율에게 관심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할 거고 어렸을 때 말고는 할 수도 없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노은율의 어깨에 손을 얹고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만 봐도,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은율이가 다른 사람들과 웃으면서 어울리고 있는 것만 봐도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이 흐르고 나서 아마 시험이 막 끝난 주말이었을 것이다. TV를 보고 있는 은율이 뒤에서 넌 오늘 약속 같은 거 없냐, 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가 냉랭해진 목소리를 듣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약속 잡으면 이번엔 어디까지 쫓아오게? 와서 또 무슨 지랄을 하려고? 나 주말에 약속 안 잡은 지 오래 됐어. 이제 더 부서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 다음엔 네가 뭘 어떻게 할지 감이 안 오거든.
물론 그 말을 들었을 때만 정신이 들었을 뿐이지 바로 반성하게 된 건 아니었다. 제대로 습관을 고친 건 은율이와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니까 그로부터도 한참이 걸렸었다. 은율이와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하던 엄마가 그나마 지금 음식까지 해서 보내주는 정성을 보이는 건 은율이가 나를 철들게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고 또 마음고생을 했을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몇 번이나 하려다 결국엔 포기한 일이니까.
그렇게 어렵게 성질을 죽여 놓고 또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방문을 열 용기는 당연히 없었고, 소파에 누워서 한숨을 푹푹 쉬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이불도 없이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부스스 일어났다. 언제 나와서 덮어준 건지 툭 떨어지는 담요를 소파 위에 올려두고 방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방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비어 있었다. 불이 켜진 건 화장실 쪽이었다.
살금살금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발소리를 죽여 화장실 쪽으로 갔다. 그리고 곧 그 소리의 정체가 뭐였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변기를 붙들고 속을 게워내고 있던 은율이가 빨개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얇은 티셔츠 하나에 트레이닝복 바지만 입고 덜덜 떨고 있는 게 안쓰러워서 아직 갈아입지도 못하고 있던 수트 재킷을 벗어 덮어주려고 했더니 손을 탁 쳐내다가 또 속이 울렁거렸는지 윽, 하고 고개를 돌린다. 나는 익숙한 자세로 뒷목을 지압하면서 등을 두드려주었다.
“먹은 것도 없으면서 뭘 이렇게 토하냐.”
학교 다닐 때부터 이미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다. 은율이가 과도하게 신경을 쓸 때 보이는 행동 중 하나고, 그 행동의 원인은 보통 나다. 나오는 것도 없고 올라오는 위액만 몇 번을 내뱉다가 하아, 하고 숨을 내쉬는 은율이에게 미지근한 물을 가득 담은 컵을 건넸다. 입을 몇 번 헹구고 세수를 하고 나서 물도 안 닦고 그냥 나가려고 하길래 붙들어서 젖은 얼굴을 마른 수건으로 천천히 닦아주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
“그러니까 말 좀 해. 내가 잘못했어. 차라리 날 때리든가 해. 대신 나한테 뭐 숨기지는 마. 하루 이틀 같이 산 거 아니잖아. 얼굴 안 보고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기분인지 알겠는데, 네가 자꾸 아무 일도 없다고 하니까 내가 너무… 불안해서, 자꾸 불안해져서 그랬어.”
“…….”
“화내서 미안해. 의심해서 미안하고. 내가 또 이러면 그때는 그냥 나 내쫓아라. 말을 해도 들어먹지를 않는 멍청한 놈이라 어지간해서는 정신 못 차리니까.”
붉어진 눈가를 꾹꾹 손가락으로 눌러줄 때까지 가만히 있던 은율이가 수건을 탁 낚아채서 빨래 통에 던져 넣고 나갔다. 뒤를 졸졸 쫓아가면서 분위기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소파에 앉아서 담요를 덮으려고 했더니 방 문고리를 잡고 있던 은율이가 뒤도 안 돌아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하냐, 안 들어오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 출근을 하려면 얼른 재워야 될 것 같아서 불도 켜지 않고 바지만 대충 갈아입고 옆에 조심조심 누웠다. 벽을 보고 있는 은율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차마 손도 못 뻗고 차렷 자세로 눈을 끔뻑거리며 누워있는데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고장 나서 안 켜져. 그래서 집에 일찍 온다고 문자 바로 못했어. 컴퓨터로 문자 보낸다고 한참 찾다가 늦게 보냈고. 다른 사람 핸드폰 빌리면 괜히 번호 남을까봐.”
어쩐지 쓰지도 않는 기본 문자로 왜 문자가 왔나 했더니, 우물쭈물하다가 어어, 하고 바보처럼 대답하자 갑자기 은율이가 몸을 확 돌렸다. 놀라서 딸꾹질이 나왔지만 꾹 숨을 참았다.
“차원우. 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내가 너한테 뭘 숨길 게 있을 것 같아? 내가 무슨 일이 있는데도 말을 안 하는 게 너한테 뭘 숨기려고 그러는 것 같아 보여? 어떻게 말할지 생각을 좀 하느라, 어떻게 말해야 제대로 설명이 되는 건지 고민하느라 그런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그걸 그렇게 취조하는 것처럼 캐물어야 속이 시원해?”
“…그럼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 주면 안 되냐.”
“하루 이틀 같이 산 거 아니라며.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기분인지 안다는 놈은 그럼 차원우 아니고 딴 놈이냐?”
그러는 너도 다 말로 해야 안다고 하지 않았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내 입으로 한 말이기도 하니까 변명을 더 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진짜로 뭘 숨기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말할 방법을 생각하느라고 그랬다고 하니까 바로 안심이 됐다. 고개를 숙이면서 미안, 하고 중얼거렸다가 딱 소리가 나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다. 맞아도 싸니까 그것도 괜찮았다.
“다 부수고 나니까 속이 좀 풀리냐?”
“아니.”
“또 그럴 거야?”
“아니.”
“또 그랬다가 내쫓기면 네 책임이야, 알겠어?”
“어.”
“어는 무슨 어야 병신아, 너 내쫓으면 노은지가 노발대발해서 서울까지 쫓아 올라올 텐데.”
“어… 그럼 내가 잘 말할게.”
“뭘 말해, 잘 말하라고 한 번 내쫓아줘?”
“아니.”
내가 생각해도 무슨 잘못한 유치원생 가르치는 엄마와 벌서는 애새끼의 대화 같았지만 이럴 때는 그냥 단순하게 묻고 대답하는 게 최고다. 눈치를 봐 가며 이불 속에서 팔을 뻗어서 허리를 잡았는데도 화도 안 내고 손도 안 쳐내길래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가까이 가자마자 은율이가 내 머리를 확 껴안았다. 이제 좀 풀렸나보다, 하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정수리를 턱으로 꾹꾹 찍어 눌러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혼내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머리가 다 얼얼했다.
“네가 부순 건 네가 사다 놔.”
“알았어.”
“그리고 나도 미안하니까.”
“…다음엔 그냥 지금 당장은 말하기 싫다고 얘기를 해. 말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집안 물건 안 부수고 기다릴 거면 그렇게 말할게.”
“아 이제 안 부순다고.”
툴툴거리자 얼굴을 박고 있는 가슴이 들썩거렸다. 웃는 것 같아서 슬쩍 입술을 비볐다가 나는 기어이 한 대 더 맞았다. 가뜩이나 바보 멍청인데 이러다가 머리가 더 나빠질 것 같다.